'이재훈_관련자료'에 해당되는 글 97건

  1. 2007.09.05 시적 회상의 두 유형_ 김옥성
  2. 2007.08.23 [명왕성되다] 단평_ 이윤정
  3. 2007.08.18 송기한_ 우주를 건너는 힘으로서의 서정 정신
  4. 2007.08.14 시의 위반_ 진순애
  5. 2007.08.10 리듬의 변주를 듣다_ 김진희
  6. 2007.07.13 죽음과 시의 변주들_ 이성혁
  7. 2007.07.05 [빗소리] 평 / 조해옥
  8. 2007.07.05 서정성의 경계와 세 가지 시향 / 전동진
  9. 2007.07.05 예술에 나타난 악마성 / 강경희
  10. 2007.07.05 시나고그 광장에는 홀로 부는 바람들뿐인가 / 고현정
  11. 2007.07.05 산문과 정신 / 변의수
  12. 2007.07.05 몰록의 아이들 / 허혜정
  13. 2007.07.05 본다는 것, 혹은 시를 쓴다는 것 / 전병준
  14. 2007.07.05 내국망명자와 생활세계적 가능성의 지형 / 홍용희
  15. 2007.07.05 무모한, 희망의 원리 / 이경수
  16. 2007.07.05 내면적 낭만의 순간 / 박수연
  17. 2007.07.05 바빌론의 후예 / 김태형
  18. 2007.07.05 육체의 호흡과 비전 / 손진은
  19. 2007.07.05 빌딩숲으로 망명한 서정시 / 임준서
  20. 2007.07.05 <다른> 미래에 관한 몽상 / 이경수
  21. 2007.07.05 젊음을 구원하기 위한 풍장 / 이성혁
  22. 2007.07.05 먼 이방의 전설을 말하는 내 입술 / 송승환
  23. 2007.07.05 좌절된 구원과 작은 희망 / 송기한
  24. 2007.07.05 파열된 연대의 시적 기록 / 정과리
  25. 2007.07.05 뿔 달린 존재들의 고통 / 문혜원
  26. 2007.07.05 이재훈의 시 「산책」을 읽고 / 배한봉
  27. 2007.07.05 결별의 노래에 대하여 / 이승하
  28. 2007.07.05 시인, 영혼의 순례자 / 김유중
  29. 2007.07.05 도시의 물관(管)을 읽고 / 배한봉
  30. 2007.07.05 생명과 성(聖) / 김종태

김옥성


서정시에서 회상(Erinnerung)은 일상적인 기억과는 다르다. 그것은 경험이나 대상, 사건의 재현이 아니라 경험으로 구축된 기억을 시적 상상력과 결합하여 재구성하는 시적 사유와 상상의 방식이다. 시적 회상은 현재의 것, 과거의 것, 심지어 미래의 것도 서정시의 어떠한 상태성 속에 펼쳐 보일 수 있다. 그러한 시적 회상의 영역에는 현생뿐만 아니라 전생과 내생까지 포함된다.

시적 회상의 가장 전통적인 방식은 근원에 대한 사유와 상상이다. 여기에서 근원은 존재방식에 있어서 근원적인 영역이지, 과거나 현재, 미래로 구획될 수 있는 시간적으로 제약된 특수한 영역은 아니다. 하지만 흔히 근원은 과거의 형상으로 회상된다. 오랜 세월 동안 시인들은 결여된 지금-여기의 현실의 배후에 근원적인 영역을 설정하고, 그것을 회상해 들임으로써 결여를 충당하여 왔다. 그러한 근원적인 것에 대한 회상은 결여된 현실에서 부유하는 자아의 정체성 설정과 관련된다.

권혁웅의 『마징가 계보학』과 이재훈의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는 그러한 근원적인 것에 대한 시적 회상의 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양자는 근원적인 것의 회상을 통해 자아의 시적인 정체성을 설정하는 방식에서는 유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매우 상반된 지향성을 드러낸다. 가령, 권혁웅 시의 시적 주체는 자신의 근원을 ‘서울시 성북구 삼선동’이라는 달동네로 내세우고 있는 반면, 이재훈 시의 시적 주체는 ‘이방의 신화’로 설정하고 있다.

…(중략)…

이재훈의 시적 회상은 이 셋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특징을 지닌다. 이재훈 시의 시적 주체는 근원적인 것을 경험적 과거가 아니라 선험적인 과거로서 신화적인 영역에 상정한다. 그는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의 맨 앞에 수록한 「사수자리」라는 시에서 자신의 고향이 저 밤하늘의 사수자리임을 고백한다. 시적 자아에게 별자리의 신화에서 떨어져 나온 지상에서의 삶은 이방인의 생(生)이다. 그리하여 그는 「빌딩나무 숲」에서 자기 사신을 빌딩 숲에 갇힌 이교도라고 말한다. 「수선화」에 구체적으로 드러나듯이 그러한 시적 회상은 “나르키소스”적인 것이다. 권혁웅이 경험적 과거를 동화적인 것, 만화적인 것, 영화적인 것과 뒤섞어서 세속적인 축제의 분위기를 마련하여 지금-여기의 시적 주체의 공허한 내면을 충만하게 채우는 것과 달리, 이재훈 시의 시적 주체는 자신의 고향을 신화의 영역에 설정하여 자아를 신비화하면서 지금-여기의 공허함을 신비롭고 성스러운 분위기로 충만하게 한다.

이재훈 시의 이러한 나르키소스적인 자아의 신비화는 자칫 과대망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시적 주체는 시집 곳곳에 그러한 함정에 빠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 두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지금-여기의 자아의 상황이다. 황사가 불어오는 거리의 풍경(「공중정원」), 아침도 거른 채 빌딩으로 출근하는 세일즈맨(「세일즈맨의 오후」), 시청 앞에서 시위하는 사람들, 신촌 네거리에서 찬송으로 전도하는 신도(「당신은 가짜다」) 등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경험적 현실의 이미지이다. 시적 자아는 그러한 이미지로부터 신화를 상기한다. 시적 자아에게 신화의 환기는 곧 파편화된 선험적 기억의 복원이다. 「시인 세헤라자데」에서 시적 자아는 “빼앗긴 내 기억들을 처음부터 다시 조립하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다. 시적 자아는 구체적인 현실을 배회하면서, 비루한 거리의 이미지들로부터 신성한 과거의 기억을 호출해내는 것이다.

그러한 시적 회상의 방식은 비록 신화적인 영역을 근원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지상으로부터 초월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시적 주체는 세속 도시의 이미지들로부터 신성한 기억을 환기하고 그것을 통해 세속 도시를 성화한다. 그리하여 자아를 에워싼 세속 도시 자체가 성화된다. 그와 함께 세속 도시에서의 삶 또한 “순례”라는 신성한 여행으로 인식된다. “순례”는 물론 일상에서 벗어나 근원적인 혹은 성스러운 곳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경험의 구조적인 측면을 주목할 경우 “순례”는 세속과 신성의 중간지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재훈의 시에서는 그러하지 않다. 이재훈의 시에서 근원적인 곳은 머나먼 어딘가라기 보다는 세속 도시의 구석구석에 내재되어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시적 자아는 세속 도시의 세속적인 이미지 속에서 성스러움을 체험한다. 그러므로 이재훈 시에서 “순례”는 신비화된 혹은 성화된 세속적 삶 자체라고 이해할 수 있다.

_ [시인시각], 2006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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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힌다. 눈을 감아라, 소리만 남은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에서 갈 곳을 모르는 시적 자아는 과거의 시간을 되짚어 보지만 그 시간조차 자신을 증명해내지 못한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이 과거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다시 열리는 문 앞에 설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삶이 첩자의 삶이었는지, 먼지의 삶이었는지를 확인하여 스스로를 부스러기로 만들 “거대한 허무”로 침잠하지 않기 위해서다.

다시 삶.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렸다”.

명왕성처럼, 분명히 존재하는 별이었는데 돌연 지위를 박탈당하고 태양계 행성으로부터 소외된 명왕성처럼 우리의 존재는 잠시 명멸한다. 무엇으로 스스로를 증명할 것인가?

_ [시와세계], 2007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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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를 비집고 나오는 힘의 실체 
 

깨진 기왓장을 주워 주머니에 넣으면, 그 속에서 비닐에 덮여 자고 있는 여인을 볼 수 있다. 콧대와 턱이 뿌연 비닐과 뒤엉켜, 툭 건드리면 바삭 부서질 것 같다. 팔딱팔딱, 손가락 사이로 심장 소리가 뛰어 올랐다. 모든 소리들이 긴 줄에 매달려 그네를 탔다. 녹색의 밤. 신발을 잃어버리고 울었던 밤. 나는 단지, 일생을 꿈꾸었을 뿐인데. 챙, 소리에 놀라 보니 사방에 깨진 파편들이 반짝였다. 깜박깜박, 수많은 눈동자가 길을 물었다. 그네는 삐걱거리며 보랏빛 옷만 남겼다. 깊은 숲길에 안개가 뿌옇고, 여인은 안개를 덮었다.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면 천년을 건너온 어떤 눈동자에 손을 베인다. 스윽.
- 이재훈,  [동경(銅鏡)], 문학사상 2007년 7월호

위의 시는 무의식과 의식이 뒤엉켜 강한 에너지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단일한 의식의 서정적 언표로 이루어지는 대신 충동적 상상력이 돌발적 이미지들의 연쇄를 일으키는 이 작품은 일견 초현실주의적이고 해체적인 시적 의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시에서 의미의 일관성을 읽어 내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유형의 시에서 우리는 대개 시적 의미와 형태의 파괴를 이루어 낸 의도와 동력에 관심의 초점을 두기 마련이다. 초현실주의와 해체시가 무의식적 충동에 근거를 두고 일상적 규범과 질서의 파괴 및 일탈을 겨냥한다는 해석은 이러한 관점에서 설명된다. 위의 시 역시 이러한 해석의 자장 안에 충분히 놓일 수 있다. 그리고 만일 그러하다면 위의 시는 특정 시기에 우리가 무수히 보아 왔던 모던적인 혹은 포스트 모던적 실험시의 범위 안에 고스란히 포섭될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간취되는 상상력의 방향은 단지 파괴와 해체에 그 지향성을 두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깨진 기왓장’, 즉 ‘동경’에서 연상된 ‘여인’에 대한 상상, ‘여인’의 ‘팔딱팔딱 뛰어 오르는’ ‘심장 소리’에의 귀 기울임과 “나는 단지, 일생을 꿈꾸었을 뿐”이라는 고백, 그리고 시적 화자를 에워싸는 미세하고 두터운 분위기에 대한 묘사는 시인의 상상력에 일정한 공간성과 방향성이 있음을 감지케 하는 것이다. ‘꿈’과 ‘심장’, ‘울음’, ‘눈동자’ 등은 모두 생명력에 대한 상징물들로서 ‘여인을 덮고 있는 비닐’, ‘안개’와 같은 주변을 내리덮고 있는 암울한 공간적 실체들과 서로 대립을 이루고 있거니와 전자는 후자의 억압적 환경에 저항하여 자아의 생명에의 의지를 보존케 하는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 생명체로 하여금 숨조차 쉴 수 없게 하는 주변의 어둡고 무거운 공기는 ‘심장의 팔딱’거림, ‘꿈’꾸는 행위, ‘수많은 논동자’의 헤매임, 상실로 인한 ‘울음’ 등의 생동적이고 역동적인 움직임들에 의해 찢기고 소멸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와 같은 상상의 스토리는 이 시의 충동적 에네르기가 파괴와 해체를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과 생명에로 정향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곧 시인은 초현실주의적이고 해체적인 기교시를 쓰고자 한 것이 아니라 숨 막히는 환경에 대한 공포와 그것으로부터의 초극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숨도 못 쉴 만큼 생명체를 덮어 누르는 그 공포스런 환경이란 ‘동경’에서 발견된 시간대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의 긴 시간성와 ‘깨진 파편들이 던져져 반짝’거리는 ‘사방’, ‘깜박깜박 수많은 눈동자’가 형상화하는 공간성으로 확정된다. 그 환경은 수천 년과 천지 사방에 걸치는 시공간인 바, 그것에서 우리는 인간을 짓누르는 우주적 너비의 무게를 짐작하게 된다. 인간의 억압과 숨 막힘, 그것은 단지 하나의 물질이나 선명한 실체가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전우주적인 규모로 미지의 존재들이 형성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우주적 규모와 무게의 억압을 시인은 민감하게 포착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이기기 위한 힘을 강하게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그 힘은 ‘심장’과 ‘꿈’ 등으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이들은 생명성을 지키기 위한 인간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총체적 의지와 노력을 의미한다.

이로써 우리는 시인이 위치해 있는 지점을 이해하게 된다. 시인은 비단 기교적이고 사조적 측면에서 시를 쓰고 있지 않다. 그는 의식이 스스로 구획하는 한정된 세계에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구획된 경계가 없는 지대, 무한한 지대, 곧 우주적 지대에서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곳에 위치해 있다. 그곳에서 우주를 느끼며 우주에 대해 말하고 우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드라마를 그리고 있다. 그때 그 우주란 결코 순결함과 온화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천 년간 묵은 무거움과 억압을 포함하고 있다.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생명성의 존재물들은 다시 말하면 우주의 이와 같은 난해한 환경을 이기기 위한 힘에 해당한다. 우주적 지대에 던져진 자아가 그 안의 무수한 짓누름의 존재들과 겨루고자 하는 것, 그리고 겨룰 수 있는 힘을 지니는 것, 나는 이러한 의지가 다름 아닌 ‘정신’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시이느이 시 곳곳에서, 그 틈과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어 감춰지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그러한 ‘정신’에 다름 아닌 것이다.


- 송기한, [우주를 건너는 힘으로서의 서정 정신], 문학사상 2007년 8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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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위반한다. 무엇에 대하여, 무엇을 위해, 그리고 무엇으로 위반하는가? 자유에 이르는 시의 노정을 위해 무차별적인 장치로써 제도를 위반하고 질서를 위반하며 시간을 위반한다. 그리고 경직된 세상의 벽을 허물고 닫힌 마음의 문을 연다. 그러므로 시의 위반은 인간의 위반과 달리 한량없다. 한량없는 위반이 자유를 불러오는 시의 힘이기 때문에 그러하며, 이와 같은 위반의 자유 속에서 시는 위반의 지평을 확장한다. 시의 위반이 이룩한 열린 문으로 온전한 영혼이 은밀히 내방하고, 상투적 삶이 알몸의 생이 되어 새로워진다.

오르한 파묵이 <내 이름은 빨강>에서 그림을 이성의 침묵이며 응시의 음악이라고 한 대목이 있다. 이때 이성의 침묵이란 이성의 칼 혹은 언어의 칼을 휘두르는 시언어의 칼을 감춘 시에 대한 은유로도 들린다. 언어의 칼을 휘두르는 시언어의 칼을 감춘 시, 그리고 언어를 왜곡시킨 시언어조차 침묵하게 한 시와의 사이에는 있음(존재)없음(부재) 사이만큼의 사이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성의 침묵인 그림이 아니라 시의 세계에서 침묵은 부재로써 존재하므로, 결국 존재와 부재 사이에는 사이가 없는 셈이다. 이성의 언어 혹은 왜곡된 언어가 이끄는 위반의 장치는 부재하는 것의 존재성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역설로 존재하고, 그 뒤에서 시는 은밀히 침묵의 권리를 완성한다. 시의 위반은 완성을 향한 시의 권리이며 주로 왜곡된 언어의 전략적 작용이 낳는 역설적 힘이다.

(중략)

깨진 기왓장을 주워 주머니에 넣으면, 그 속에서 비닐에 덮여 자고 있는 여인을 볼 수 있다. 콧대와 턱이 뿌연 비닐과 뒤엉켜, 툭 건드리면 바삭 부서질 것 같다. 팔딱팔딱, 손가락 사이로 심장 소리가 뛰어 올랐다. 모든 소리들이 긴 줄에 매달려 그네를 탔다. 녹색의 밤. 신발을 잃어버리고 울었던 밤. 나는 단지, 일생을 꿈꾸었을 뿐인데. 챙, 소리에 놀라 보니 사방에 깨진 파편들이 반짝였다. 깜박깜박, 수많은 눈동자가 길을 물었다. 그네는 삐걱거리며 보랏빛 옷만 남겼다. 깊은 숲길에 안개가 뿌옇고, 여인은 안개를 덮었다.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면 천년을 건너온 어떤 눈동자에 손을 베인다. 스윽.

― 이재훈, <동경銅鏡>(<문학사상>, 7월호) 전문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면 천년을 건너온 어떤 눈동자에 손을 베인다는 일탈된 시선이 무질서한 위반을 생산한다. 신발을 잃어버리고 울었던 밤. 단지 일생을 꿈꾸었을 뿐인데. 챙, 소리에 놀라 보니 사방에 깨진 파편들은 깨져버린 일생의 꿈이고, 잃어버린 신발의 영상이다. 잃어버린 신발은 잃어버린 일생의 꿈을 은유하고, 그것은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영혼의 결정체이며 시의 위반을 이끄는 기억의 언어이다. 무의식은 깊은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침묵의 샘이며, 침묵의 샘에서 길어 올려진 기억이 이재훈의 거울로 작용하고, 상투적인 일상을 알몸의 생으로 견인한다. 이재훈의 기억은 파편의 위반으로 돌아와 온전한 영혼의 거울을 환기시키고 있다.

- <현대시>, 2007년 8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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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다시 뜨고, 봄이 새롭게 오고, 생명이 나고 죽는 것. 이런 끝없는 반복의 과정에서 리듬을 발견한다. 리듬Rhythm은 바로 인간과 자연, 우주가 존재하는 기본 원리이자 그들의 존재를 가시화시키는 현상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들이 갖는 리듬의 양상은 동일하지 않다. 우주에서 미물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각기 다른 리듬을 타면서 살아간다. 따라서 리듬이란 모든 존재가 가진 본질적인 것이면서도 한편으론 각기 다른 규칙을 가진 개별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정형시로부터의 해방이 시인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리듬의 발견과 자유로운 시화詩化를 의미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의 리듬, 좁게 말하면 운율이라는 것은, 각 시인들의 호흡과 기질, 그리고 언어 습관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인들의 개성과 미의식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원리이다. 따라서 시어 자체의 물리적 존재성과 리듬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개개의 시어들이 그저 의미로만 환원되기 때문에 시인들의 독창성을 찾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최근 시단에서는 운율과 관련하여 산문화의 경향이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산문시에도 엄연히 시적 운율과 함축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이런 고민은 일반 자유시 형과 다른 운율을 가진 산문시의 리듬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으로 읽힌다. 이런 의미에서 현 시단은, 시인들의 감수성과 상상력, 미의식의 변화와 함께 리듬 역시 전통적인 운율 체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드러날 것이라는,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 지점에 와 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이 글에서는 최근에 읽은 시집들을 중심으로 2000년대 시인들이 구사하는 리듬의 양상과 그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중략)...

이런 의미에서 의도적으로 마침표를 사용하고 있는 시인의 의식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버지가 기타를 연주하십니다. 나는 아버지의 다리 밑에 누워 있습니다. 기타에서 떨어지는 마른 고독이 목젖을 열게 합니다. 노래를 부릅니다. 말들이 우르르 목덜미로 떨어집니다. 말들이 저 밖으로 퍼지지 못하고 등 뒤로 차오릅니다. 나는 말 위에 떠 있고, 아버지는 저 말 속에 계십니다. 내가 뱉어 놓은 검은 말속에서 기타를 연주하십니다. 말이 진화하면 물이 된다지요. 고도로 단련된 연금술인 셈입니다. 허공에 산화되어 사라지는 말을 만들어냅니다. 그때 비로소 저는 말을 배웠습니다. 내 말은 이미 물이 되었습니다. 물속에서 기타소리가 들려옵니다.

― 이재훈, 「기타가 있는 궁전」 부분

이재훈 시인은 산문시의 경우 대부분 마침표를 사용한다. 마침표가 시인의 호흡과 생각에 일종의 마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리듬의식을 자연스럽게 생산한다. 이때 한 문장의 종결을 표시하는 마침표는 산문시를 행 단위로 읽게 함으로써 길고 짧은 행의 구분에서 느껴지는 반복적 리듬의 변화를 보여준다. 한편 시인은 산문시에서 각 시행들의 의미가 응집되고 절제되도록, 한 행 안에 의미와 이미지를 응축시키고 있다. 의미상으로도 기타를 연주하는 아버지와 노래를 부르는 나의 대비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시인이 갇힌 검은 말, 아직 흘러가거나 산화되지 않는 갇힌 말 속에서 들리는 기타소리가 마침표 안에서 울린다. 말에 갇힌 자의 고독과 슬픔이 여운을 남기지 않는, 짧은 문장의 반복과 마침표 안에 응집되어 있다.

...(중략)...

가면놀이

고양이가 탁자를 긁으며 옹알거린다 고양이의 목을 쓰다듬고 싶다 말랑말랑한 등뼈를 만지고 싶다 암소가 탁자에 걸터앉아 느릿하게 몸을 꼰다 로큰롤이 연발로 발사된다 모두 몸을 흔들며 잘도 피한다 낙서가 가득한 벽에 총탄 자국이 어지럽다 서로에게 총을 겨눈다 서로를 향해 난사한다 춤을 춘다 춤을 추며 총을 쏜다 고양이의 입술에 쥐꼬리가 걸려 있다 암소의 배가 불룩하다 배에다 연발총을 쏜다 가죽소리만 창창 난다 고양이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고양이가 암소 뱃속에 있다

― 이재훈, 「신촌, 우드스탁, 가면놀이」 부분

위의 시에서도 역시 몸으로부터의 리듬,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리듬을 느낄 수 있다. 세 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는 위의 시는 한 장이 한 연으로 된 산문시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마침표가 찍히지 않았는데, 이는 현재 상황의 혼종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가면과 가면 밑의 실제 얼굴들, 고양이와 암소, 로큰롤 음악과 총탄의 발사, 고양이를 밴 암소 등 이질적인 것들이 열기와 에너지 속에 혼재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는 리듬의 특성은 우선 후반부로 갈수록 급박한 리듬감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앞부분에서 옹알거린다, 쓰다듬고 싶다, 만지고 싶다는 느긋한 속도감을 주었던 서술어들이 후반부로 가면서 발사된다, 피한다, 어지럽다, 난사한다, 춤을 춘다, 총을 쏜다를 거쳐 고양이가 암소 뱃속에 있다는 그로테스크한 상황에까지 급박하게 진행된다. 이런 속도감은 로큰롤의 빠르고 강한 에너지를 실감하게 만든다. 둘째로는 리듬이 몸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느릿하다, 몸을 꼬다, 흔들며 피하다, 춤을 춘다, 가죽소리만 창창 난다 등은 모두 몸의 감각을 일깨우고 몸의 움직임을 통해 시적 공간이 술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재훈 시인 역시 에코가 메아리치는 몸을 상상한다. 아름다운 내 몸, 거울에 비추어, 아아아 에코가 흐느끼네(「수선화」) 라는 시인의 고백은 시각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노래 그 자체의 몸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 시인들의 리듬은 그들의 몸에서 나오는 율동과 호흡, 숨결과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시의 리듬으로부터 멀어진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리듬을 살고, 리듬을 창조한다. 반복과 속도를 조절하면서 몸의 리듬을 고르는 그들은, 보는 시가 아니라 듣는 시를 씀으로써 시의 원형原型인 노래에 가까이 간다. 그러하므로 이제 독자들은 시를 읽고 보면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을 넘어 시인의 몸이 연주하는 리듬의 변주에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

_ 현대시, 2007년 7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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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혁

아래의 시 역시 축축하게 젖으며 출구를 찾는 현대인의 영혼을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윤의섭의 방식과는 달리 서정적으로, 리얼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음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 [명왕성 되다(plutoed)] 전문

현대인의 삶, 즉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을, 끝없이 밀려드는 새로움의 파도에 휩쓸리며 밤낮 없이 지하철을 갈아 타며 출퇴근하는 저 시인의 모습이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하철 안은 평범한 현대인이 거주하다시피 하는, 그래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 공간이다. 문은 새롭게 계속 열리고 있지만, 우리가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할 출구는 지하철엔 없다. 지하철에서의 삶은 ‘터널’ 속의 삶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공간 안에서 어떤 출구를 찾는 주관적인 방법을 터득한 것 같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갈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그가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 길은 눈을 감자 “어둠이 긴 불빝을 뱉어” 내면서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질 때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때의 시간은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다. 아마도 이 시공간은 시인의 무의식적 내면에 마련되어 있는 것이리라. 그것은 어둠이 불빛을 뱉어내는 공간이면서 기계적 시간과는 무관한 어떤 소리만이 융합되면서 생성되는 시간이기에 그렇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지각을 거둔다는 것이다. 감각은 대상으로부터 철회되어 지각되지 않았던 내면의 움직임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어둠이 뱉은 빛, 시간의 회오리 속에서 섞여드는 소리들의 움직임. 그 움직임들이 무의식적으로 시인을 인도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때 시인은 자신이 현대 바깥의 어느 곳에서 온 ‘첩자’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시인은 곧 그 생각을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라며 수정한다. “그리운 얼굴”과 “기계음 소리”, 즉 지하철 바퀴가 내는 소리 때문이다. 시인은 무의식적 공가넹 올라타고 있다. 하지만 드러나는 것은 “서서히 물드는” 풍경, 그립지만 “잊혀진 얼굴들”이다. 그 얼굴들은 시인에게 아픔을 느끼게 한다. 아마 시인은 그들과 헤어져야만 했을 것이리라. 터널 속, 지하철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삶은 이들과 시인을 갈라 놓았으리라. 현대가 낳은 이 이별의 폭력성은 풍경―얼굴들을 멍의 푸른색으로 물들인다. 멍이 주는 통증 때문일까? 어둠이 낳았던 불꽃이 사그라지면서 그리운 얼굴은 “노란 불꽅으로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때, 시인 외부의 사물들이 시인의 감각을 다시 자극하기 시작한다. 바퀴가 내는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기계음이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졌던, 시인이 체험했을 사랑의 파괴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무의식적 내면 공간의 이미지들과 공격적으로 내면에 침투해 들어오는 외부 대상의 감각들이 서로 교차해 얽혀 들어간다. 즉 “내 사랑”은 “저 바퀴”로 여겨진다. 사랑은 바퀴처럼 “사각거리”다가 꼭 바퀴에 깔려 으깨어지듯이 망가져버렸다. 시인이 자신을 “그냥 먼지였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렇게 진행된 상념 때문이리라. 으깨어진 사랑은 자신마저도 으깨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일상 공간에서 탈출하여 ‘첩자’가 되고자 한 시인은 결국 자신이 “칵탈당하고 소외되”어 상처받은 ‘먼지’와 같은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탈출의 시도는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한 느낌만을 줄 뿐이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함 모험이었다는” 소문은 “거짓된” 것이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눈을 감았을 때 잠깐 열린 출구는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시인은 그 길에로 “들어갈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 이때 또 다른 새로운 문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시인은 이 문으로 나가 또다시 출구 없는 터널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다른 세계를 꿈꾸는 이 낭만주의자는, 너무나 상처 입고 있어 이 세계를 결국 탈출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시는 리얼하다. 사실, 우리는 다른 삶을 꿈꾸어보며 산다. 하지만 그 꿈은 곧 현실에 부딪쳐 부서지지 않았던가? 그래서 꿈꾸기는 우리를 더욱 아프게 한다. 그것이 이 터널 속에서의 현실이다. 현재로서는, 사실 무의식적 상상의 세계가 터널의 현실을 이겨낼 수 없다.

시인은 그 비극적인 과정을 일상 속에서 포착하여 솔직한 태도로 드러낸다. 시인은 무의식적 세계로 초월하지 않는다. 꿈이 패배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드러낸다. 그렇다고 시인이 이 ‘터널’의 현실을 수락했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는 그 비극적인 패배의 진실을 기록하도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그 터널의 세계와의 또다른 싸움을 모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 [애지], 2007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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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



메마른 땅에 아카시아 꽃잎 떨어져요. 질긴 가지 끝에서 제 몸을 뜯어내는 소리, 천둥치는 밤. 당신은 그 아픔을 숨기고 투명한 몸으로, 꽃잎처럼 경쾌하게 내려요. 낡은 군화를 신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앙상한 가지를 꺾어 가며 걸었어요. 흙발로 저벅저벅 아스팔트 위를 걷다가 문득, 당신을 봅니다. 사납고 포악한 걸음걸이 사이로 보이는 당신의 알몸. 밤이 되어도, 이별이 지나도, 당신의 몸이 온 사방에 닿는 소리 들려요. 당신이 울고 있다 생각했지만, 실상 당신은 아무 말 없어요. 아무 몸짓도 없어요. 잠시 침묵.

몸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요.
서러운 아픔도 참, 아름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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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에서 한 시간을 걷더라도 흙을 밟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도시의 도로는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꽃비가 내리는 요즘만큼은 우리가 사는 이곳이 ‘메마른 땅’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어서 위안을 받는다. 도시가 자연과 자연스러운 것들을 쫓아내고 시멘트로 장악해 버렸다 할지라도 봄바람과 비를 따라 내리는 꽃비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 마음의 삭막함을 안아서 달래준다. 이재훈 시인의 「빗소리」는 마치 시멘트 포도에 내리는 꽃비처럼 여겨진다. 이재훈 시인의 「빗소리」를 읽으니, 시를 해석하는 일을 하거나 딱딱한 인식의 시를 쓰는 필자로서는 잠시 부끄러워진다. 시인의 작품이 내게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감성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거나 현상을 바라보는 데 서툴다. 내게도 ‘빗소리’를 ‘서러운 아픔’으로 감각하던 때가 있었던가? 이재훈 시인은 「빗소리」에서 의미상의 대구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화자는 자신과 ‘당신’을 대조시켜서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대상인지를 드러낸다. 화자는 낡은 군화를 신었으며, 앙상한 가지를 꺾어들었고, 흙발이고 포악한 걸음걸이를 가진 사람이다. 반면에 ‘당신’은 투명한 몸과 꽃잎의 경쾌함을 지니고 있다. ‘당신’은 연약하고 부드러운 알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아스팔트 위에 내리는 빗방울 같은 이다. 화자가 ‘당신’을 아름답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자신의 몸으로 감당하기 힘든 아픔을 겪으면서도 “아무 말 없”이, “아무 몸짓도 없”이 메마르고 딱딱한 아스팔트를 적시고 안아주기 때문이다. 빗소리는 아스팔트 같은 화자의 가슴과 「빗소리」를 읽는 이의 마음자리에 “서러운 아픔”으로 내려와서 따스하게 안아준다. ‘당신’의 “서러운 아픔”을 아는 자 역시 ‘당신’만큼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겠다.
(조해옥)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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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성의 경계와 세 가지 시향
- 윤임수․이재훈․장석원의 시


1.
‘서정시란 무엇인가’, 이것은 시의 본질에 관한 물음이다. ‘서정시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할 때의 ‘서정시’는 무수한 시편들, 즉 현상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서정시는 어떻게 서정시인가’라는 물음이 가능하다면, 본질로서의 서정시(전자)가 현상으로서의 서정시(후자)로 떠오르는 과정을 ‘서정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정성은 서정시의 의미가 형성되는 과정이자 장(場)이다. 주체, 대상, 의식의 상호 주관성을 통해 서정성은 그 지평을 펼친다. 이 지평 안에서 새롭게 형성된 시적 주체가 주체를 지향할 때 서정성의 원리로서 주관성이 우세하게 작동한다. 같은 방식으로 대상을 지향할 때는 동일성이, 의식을 지향할 때는 본원 회귀라는 서정성의 원리가 지배적으로 작동한다. 이와 같은 연유로 서정성의 원리를 주관성, 동일성, 본원 회귀로 규정하는데 이것은 필자만의 논의는 아니다. 오랫동안 여러 논자들이 두루 논의한 바 있다.
서정성의 원리는 시간성을 통해서 구현된다. 서정시와 서정성이 다른 것처럼 시간과 시간성은 구별되어야함은 물론이다. 시간(본질로서의 시간)과 시간(기계-시간)을 이어주는 의식의 작용을 시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간성이 의식을 지향할 때, 본질적인 시간에 다가설 수 있다. 이 본질적인 시간은 ‘시원’이며 ‘본원’이 숨 쉬는 의식류이다. 시간성이 대상 쪽으로 작용할 때 현실에 가까운 사실적인 시간이 반영된다. 그리고 주체와 맞닿을 때 무시간성의 시간성과 조우할 수 있다. 이들 세 가지의 시향(時向)이 얽히며 교직하며 펼쳐지는 장이 다름 아닌 시적 현재이다.
이 글에서 다룰 세 권의 시집, 윤임수의 이 글에서 다룰 세 권의 시집, 윤임수의 <상처의 집>(실천문학사, 2005년 9월), 이재훈의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2005년 9월), 장석원의 <아나키스트>(문학과지성사, 2005년 11월)는 각각 다른 서정성의 원리가 특별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시편들을 담고 있다. 이와 함께 각기 다른 시향(時向)을 만나는 것은 이들 시편들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중략)...

3.
이재훈의 이재훈의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2005년 9월)는 본원, 혹은 시원 회귀라는 서정성의 원리에 관한 ‘보고서’라고 할만 하다. 이 보고서가 작성된 곳은 빌딩 숲이 아니라 ‘공중정원’이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정원은 떠 있는 정원이 아니라 의식의 흐름, 그 출렁이는 공중에 가라앉아 있는 정원일 가능성이 높다.

배꼽으로 차가운 톱날이 들어온다 슬금슬금 배를 가르고, 시커먼 내 장들을 걷어올린다 텅 빈 뱃속에 햇살이 들어와 가만히 눕는다 나는 환한 몸으로 세상 이곳저곳을 누빈다 오 따사로운 마음들 어느새 햇살이 누운 자리 꽃망울이 올라와 있다! 꽃은 피어나 온몸에 홀씨를 퍼뜨린다 즐겁게, 내 몸 구석 구석이 피어오른다 사람들이 하나 둘 내게 찾아와 꽃 한 송이씩 꺾어간다 계절이 바뀌고, 꽃들이 떨어진다 떨어진 꽃마저 누군가 주워간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내게 남은 꽃다지 공중으로 날아간다 나는 까맣게 타들어간다 잿빛 몸들이 부르는 거리의 합창 나는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한다
- 「공중 정원」 전문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라는 시에서도 노래하고 있듯이,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으로 걸어’가기 위해서는 ‘내 목을 자르’는 행위가 선행 되어야 한다. 현실은 ‘목줄’을 쥐고 있다. 현실과의 과감한 단절을 결행할 때, 비로소 우리는 시원으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곧 ‘“눈앞의 이것이 나인가” 되뇌이’는, 지금 여기의 나를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어머니라는 시원과 연결된 통로가 끊기고 세상에 던져진 흔적이 다름 아닌 배꼽이다. 그러므로 배꼽은 원죄의 증좌이자 잃어버린 낙원으로 통하는 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차가운 톱날’을 들이대는 것은 ‘내 목을 자르’는 일이며, 곧 시원으로 향하는 문을 여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렇게 열리는 시원의 세계인 ‘공중정원’은 현실의 세계, 현실의 시간과 무관하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굳이 현실의 시간을 끌어와서 하나의 씨가 꽃이 되고 그 꽃이 시들어 다시 홀씨가 되는 두 계절여의 시간을 상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시는 다만 하나의 자연 현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글에 불과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사태들은 시작에서 또 다른 시작에 걸쳐 있는 서사적인 흐름 위에서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배꼽으로 차가운 톱날이 들어오’는 순간으로 수렴될 때, 그 시적 현재의 지평은 ‘한생’으로까지 넓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시인은 ‘광화문 네거리. 한복판에 우뚝 선 이순신 장군 동상이 흠칫 움직인다. 칼자루를 놓고 싶다 후손들아!’(「햇살의 집」)라고 이순신 장군의 말을 전하고 있다. 언어들은 여전히 감옥이다. 다만 의미를 잡아들여 빗장을 거는 감옥이 아니라 인간들 스스로가 갇히는 감옥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의미의 칼을 쓰고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 칼을 벗고 감옥을 벗어나 이재훈 시인의 시편들을 따라 ‘최초의 말’들 사이를 가르며 ‘말’ 달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세상의 시간으로는 아주 ‘잠시’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잠시가 펼쳐지는 ‘시적 현재’는 만유가 일자로 드는 문인 영혼, 일자가 만유로 펼쳐가는 마음의 거처이기도 하다. 이 시적 현재에서 우리의 최초의 ‘고해성사’를 받아줄 ‘말의 사제(司祭)’로서 이재훈 시인의 활약을 기대한다.

_ 시와정신, 2006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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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잊어버릴까 그림을 그렸는데 입지
그는 꽃잎 같은 얼굴을 하고 몸은 짐승의 털이었습지
그 얼굴에서 진득한 침이 흐르기 시작했습지
은촛대 위에 까만 표지의 성경이 펼쳐져 있고
고개를 꺾은 그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습지
옆구리에는 창이 꽂혀 있었는데
- 이재훈, <참 이상한 꿈이 있었단 말입지> 부분

그로테스크하고 기이한 현상은 이재훈의 시에서도 또한 마찬가지로 제시된다. 화자가 그리고 있는 꿈의 세계는 온통 암울하고 참담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짐승의 털', '침', '고개를 꺾은 십지가', '돼지의 꼬부라진 성기' 등과 같은 모습은 모두 혐오감을 자아내게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시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너무도 낯익은 얼굴'이라 표현함으로써 이 충격적인 낯선 세계가 실상은 가장 친숙한 낯익은 세계, 즉 현실 세계라는 의도를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러한 환상시의 저변에는 현실에 대한 직접화법이 아닌 시인이 만들어낸 환상의 영역을 통해 모순된 현실과 절망적 현실을 보다 과장되고 자극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 <리토피아>, 2007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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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엔 활이 들려져 있었고
다리가 말의 몸에 심겨졌지
말과 나는 한 몸이 되었지
그제야 예언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
어둠 속엔 많은 별이 있었지
십자가 없는 어둠,
그 불안한 시간 속에서
별을 보며 내 형상을 기억했지
가끔씩 구름에 가려 별이 안보이면
활을 쏘았지 허공 속에서 비명이 들려왔지
꺼지지 않는 촛불의 위태로움을
말 위에서 견디는 삶
그곳엔 조용한 잠도 없었지
열두 밤이 지나자 황도십이궁의 한 모퉁이에
나는 떨어졌지

새벽녘 어머니가 내 머리칼을 만지고 있었지
나는 쭈글해진 어머니 배에 귀를 갖다 댔지
말발굽 소리와 활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지
그 큰 어둠을 품고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가셨지
나는 어머니가 믿는 神의 안부가 궁금해졌지
- 이재훈, <사수자리> 부분

포스트모던 시대에 시인들은 오히려 종교적 구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다. 가상과 환타지가 난무하는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진부하다고 느끼는 걸까? 아니면 인간의 연약함을 감추는 또다른 몸짓일까? 시인마다 작품 속에서 복잡한 복선을 깔아두는 것은 분명하다. 십자가 없는 어둠, 그 불안한 시간 속에서 그는 자신이 만든 가짜 세상 속에 안주하며 혼자인 그는 한 가지 방법을 찾아낸다. 어머니에 기대는 것이다. 어머니는 인간에게 더없이 확실한 실체인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믿는 신의 안부가 궁금해졌지"라고 내뱉는 행태는 또한 종교에 소극적인 그들의 단면이기도 하다. 신앙은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 고통스런 현실에 스스로 변화되기를 강요당하며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존재들에게는 말이다.
코미디언 제리 루이스는 1960년대 "내게 사실로 존재하는 것은 세 가지다. 바로 하나님, 인간의 어리석음, 그리고 웃음이다. 앞의 두 가지는 우리의 이해 밖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 번째 것과 관련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가짜 세상은 기만이다. 하지만 편안하다. 스스로 자신에 맞춰 재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가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시시때때로 우리는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 도피할 수 있는 현실은 현실이 아니다. 어머니가 새벽기도를 가시며 풀고 간 어둠을 시인은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이순간 그는 스스로의 불안에 대해 진실할 수 있는 것이다.

- <유심>, 2007년 봄호 중에서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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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과학이 태어나는 대지이다.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점을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초기의 사상가들로 하여금 철학적으로 사유하도록 강요한 것은 경이로움이었다…신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철학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신화라는 것이 경이로움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형이상학』, A2, 982b). 논리의 분절적 시냅스가 이루어지는 순간 신화는 과학이 된다. 신화는, 눈뜨기 이전의 과학을 품고 있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를 낸 바 있는 이재훈 시인은 서울이라는 공화국의 시민이면서도 사실은 그는 ‘자신의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의 한 주민으로서 살고 있다. 언제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안경 속의 눈빛과 온화한 무표정의 얼굴은 세계적 거대 도시 서울의 권위 있는 시 전문 월간지의 걸음 빠른 편집장이 아니라 아직은 자연과 정신이 분화되기 이전의 신화적 시대에 살고 있는 원시 부족의 자연인이다. 자동차와 전철이 무질서하게 뒤엉켜 운행하는 복잡한 서울의 중심에서 그가 거닐고 있는 곳은 황도십이궁의 한 모퉁이의「사수자리」이거나 혹은 ‘태양을 갉아 먹는 뱀’의 숲 같은 곳이다. 그는 문명의 진화를 건너뛰어 들어온 샤먼의 후예로서 신화적 위상 공간에서 거주하는 서울공화국의 진정한 무정부주의자이다.

언제부턴가 새는 날지 않았다. 나스카 평원을 유유히 날아 광대한 상상의 틀까지도 슬쩍슬쩍 엿보던 새가, 날지 않게 되었다. 사연은 있었다. 가벼운 날갯짓, 그림자 아래에서 즐기는 종종걸음의 시간이 지나자, 설움이 찾아 왔다. 새의 부리와 발톱이 꺾이고, 허기가 지면 온 몸이 숯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새는, 투명한 옷을 입고 전생의 시간 앞을 오갔다. 수면을 뛰어오르는 물고기나 굴을 빠져나온 뱀을 낚아챌 때마다 한 생이 투명하게 빛 바래는 순간을 보았다. 새는, 눈이 멀었고 노래를 배웠다.

내 스무 살은 노래였다. 거리에서 배운 노래가 목청으로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그것을 먼 이방의 방언이라 여겼다……새의 등에 올라타고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으며 나스카 평원에 새겨넣은 神의 형상을 한눈으로 보고 싶었다. 나는, 어떤 법을 배웠던가. 노래하는 법 말고는 배운 것이 없다. 눈 먼 한 마리의 새가 내 머리칼 속에서 둥지를 틀고 있었다. 새의 전생은 자유였다고 평원을 돌보던 파수꾼이었다고……

                                        -「나스카 평원을 떠난 새에 관한 이야기」부분

  융은 의식과 무의식의 해리를 현대의 심각한 정신적 문제로 지적하였지만, 보다 근본적이고 내재적인 문제점은 정신과 육체의 격리적 사고이다. 정신과 육체는 분리되어 있지 않은 하나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정신과 육체의 유리적 상황을 경험한다. 신체에 대한 정신의 격리는 곧 신체기관의 전경화로서 인격의 부재화를 의미하며 인간이 하나의 도구이자 수단으로 전락함을 의미한다.
  한조 시대에 정위라는, 백황기술자는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소량의 물질을 반응용기에 넣어 은으로 변하게 하자 그 비밀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댄다. 하지만 아내가 그것은 운명적으로만 전수될 뿐이라고 하자 정위는 그녀를 위협하여 결국엔 미쳐서 죽게 하고 말았다. 연금술은 영적 본질을 물질계에 구현해 보임으로써 영성을 깨닫게 한다. 그녀가 죽으면서까지 그 기술을 알려줄 수 없었던 건 어떤 영적 가치의 문제와 결합되어 있는 때문이다.
  자신의 영혼에 가하는 모욕만으로도 우리는 신체기관의 주체자로서 정신과 신체의 해리적 공황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체에 대한 체벌이나 가학 행위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신체기관의 전경화에 따른 영성 부재 의식은 인간을 인격체가 아닌 하나의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케 한다.
  정신분석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분리한다. 융이 환자를 전인적 인격체로서의 자기 완성을 염두에 두었던 것과는 달리 프로이트는 환자를 리비도적 신체기관으로 환원한다. 그것은 어떤 경우 견딜 수 없는 치욕이자 고문일 수 있다. 치료를 거부하고 미치광이로 살아가게 한 도라 양의 경우는 초기의 프로이트가 전이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실수였다고 하나, 문제는 보다 근원적인 곳에 있다.
  타인 즉, 영성 부재의 신체기관은 권력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권력이 기록되는 양피지 혹은 신전을 건축하는 한 장의 벽돌 같은 것으로 상징화 된다. 도구화된 인간의 신체기관은 자신의 기호체계 또는 하나의 기표로 인식될 뿐이다. 푸코는 일찌기 ‘몸은 권력을 각인시키는 장소이자 권력의 문화를 새겨 넣는 매체’로 인식하였다.
  사회의 검은 무의식의 휘장 속에 감추어진 신체기관의 전경화 또는 영성 부재 의식은 오늘날 심판, 성전, 민주화 또는 정의, 평등, 규범이라는 이름 등으로 개인과 사회, 국가 간 서슴없이 자행되어지고 있으며 또한 ‘문명의 충돌’ 같은 표제 하에 인류학적 서고의 깊숙이 은폐되어진다.  

- <문학마당>, 2007년 봄호 중에서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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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몰록의 기계들

  과열된 기계는 멈추지 못한다. 불타는 제물처럼 우리를 고갈시키고 쓰러뜨리는 기계는 악마적으로 가동된다. 일상의 회전벨트에 실려가며 비명을 지르는 커다란 입은 이 세계의 균열이다. 마치 황량한 패잔병들이 널부러진 전쟁터처럼 지친 술꾼들이 창백하게 널려있는 황량한 대도시를 상상해보라. 버겁게 가동되는 세계를 견뎌내기 위해 우리는 서로에게 치명적인 이방인이 되어가며, 서로를 배신한다. 몰록신은 불가능한 업무를 강요하는 보스의 모습 혹은 의사당과 스타디움 어디든 모습을 감추고 있다. 우리는 이 세계가 주입한 성공의 신화를 위해 상관의 호의를 부적처럼 훔치고, 파멸이 예정되어 있는 사랑의 장소를 받아들인다. 경쟁에 지친 아이들은 유서를 쓰고, 밤마다 기어드는 스크린은 흡혈귀의 칼날을 쏟아낸다. 공포가 오락이 되고, 사랑은 기계인형을 껴안고, 법은 상습적인 부패로 물들어있다. 몰록신은 철저히 시스템 속으로 스며들어 보이지 않는다. 몰록신의 음성은 시끄러운 메탈음 속으로 스며들고, 악마의 눈은 시뻘건 네온빛으로 번득인다. 심야에 달라붙은 게임모니터들, 아직도 더 받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오만한 계산대들, 진실이 결핍된, 그저 모든 것을 잊고 참아내야 하는 세계에 몰록신은 서 있다.
  이렇게 알 수 없는 악의 기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실한 언어를 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세계는 늘 투명한 ‘유리’처럼 신념과 확신을 흩뿌리지만, 그것은 결코 온전한 진실은 아니다. 이재훈의 시는 이 무서운 세계의 화려함과 그 이면의 어두움을 마주 대하며 자주 어떤 ‘진실’에 대한 갈망을 노래하고 있다. 시 속의 화자는 마치 수난을 앞둔 메시아처럼 혹은 긴즈버그의 <울부짖음>처럼 “북한산 밑에서 밤새도록 통곡의 기도를 하지. 항문에서 시커멓게 멍울진 피가 흘러내리지. 나무를 움켜잡고 소리를 지르지”(이재훈 <순례2>)만 “악령의 창”같이 존재를 찔러대는 통증은 멎지 않는다. 시인에 의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대환란’의 날이다. “수만의 별을 넘어”가도 안전한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악의 암운에 뒤덮힌 말세처럼 시 속의 화자는 “나는 눈물도 흘리지 않고 사람을 죽였”(이재훈 <공중정원3>)다는 범죄의 자기증언을 토해놓고 있다. 모호한 악의 기류에 오염되어가는 세계의 초현실적인 위험을 그는 감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 편의 시를 읽어보기로 하자.  

  맨발로 유리밟는 소리를 듣는다. 유리의 머리가 내 발바닥을 찢는 수런거림을 듣는다. 수행자처럼 온 땅을 모두 밟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땅은 너무 넓어. 내 온기가 기댈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 그 사이의 위태로운 희망, 그리고 낯선 꿈들뿐.

  내가 밟는 유리의 온기를 기억하고 싶었다. 그 뜨거운 감촉. 두꺼운 군살을 비집고 환한 몸으로 날 찾아오는 신비. 유리를 밟으며 축제를 연다. 붉은 포도주가 흐르는 식탁. 얼굴에 분칠을 하고, 혀에 피어싱을 하고, 히피처럼 연기를 피워올린다. 치렁치렁한 푸른 옷을 입고, 방안을 빙빙 돈다. 사각사각 유리가 몸 안에서 춤을 춘다. 두려움은 없다. 정작 두려움은 예언자의 눈, 인디언의 귀, 언고기를 사각거리는 알라스카의 몽골리안을 그리워하는 것. 生의 분노도 잊은 채, 태평하게 먼 이방의 전설을 말하는 내 입술.
(이재훈 <순례> 부분)

  시 속의 순례자는 “온기가 기댈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 그 사이의 위태로운 희망, 그리고 낯선 꿈들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붉은 포도주가 흐르는 식탁. 얼굴에 분칠을 하고, 혀에 피어싱을 하고, 히피처럼 연기를 피워올”리는 광폭한 유희 속에서도 그는 ‘그리움’을 버리지 못한다. 세속도시에 파묻혀 환락과 탕진으로 고갈되어가는 존재에게 “예언자의 눈, 인디언의 귀”같은 것은 너무나 갈망이 지독해서 도리어 두려워지는 꿈이다. 결국 “生의 분노도 잊은 채, 태평하게 먼 이방의 전설을 말하는 내 입술”은 진실의 땅을 어듬어 찾는 ‘순례’를 꿈꾸지만 궁극적으로 ‘관’같은 일상의 공간으로 다시 기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일상이라는 지능적인 시나리오에 빼앗긴 네 몸을, 경멸한다”(이재훈 <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한 얼굴의 죽음에 관하여>) 결국 이 세계가 부여한 장소에서 지능적인 시나리오에 따라 꼭두각시 배역을 고수해야만 하는 일상의 작동자는, 몰록신의 기계요 사이보그(cyborg)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존재의 행동, 사유 모든 것을 세계의 가동모드로 전환시키는 잔혹한 힘의 지배 속에, 존재가 상실한 것은 무엇이고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번뇌로운 질문이 끌려나오는 것이다.

- 현대시, 2007년 3월호 부분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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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옛말은 본다는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 가를 웅변한다. 이 말이 어떤 상황에서 비롯하였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크게 상관하지 않지만 그 뜻하는 바는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보기 전에는 들은 내용을 믿을 수 없다거나 듣는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말의 내용이 충분히 시각적 이미지로 변형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시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말이 단지 신뢰와 설득에 관련되어 실제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시각 능력은 이미 있었던 것을 재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보지 못한 것, 혹은 지금 없는 것을 상상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부재라는 견디기 힘든 상황을 ‘포르트(fort)-다(da)’라는 언어 놀이로 견딜 수 있었던 자신의 손자의 일화를 통해 프로이트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언어를 통해 대상을 통제하고자 하는 의식의 성장과정일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가지고 노는, 실을 매단 실패는 언어 경험과 시각 경험의 밀접한 관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실패를 던져서 눈 앞에서 사라지면 어머니가 가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실을 잡아당겨 실패가 나타나면 어머니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긴 이 아이의 예에서 우리는 시각적 인상이 언어의 성숙 혹은 의식의 성숙과 얼마나 크게 관계 맺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사실 언어는 시각에 많은 부분 빚지고 있다. 이것은 증명을 필요로 하는 명제가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거나 말하고 행동할 때를 가만히 떠올려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인체가 수용할 수 있는 감각의 70퍼센트 정도가 눈에 모여 있다는 사실은 시각의 중요성을 과학적으로 추인하는 수치(數値)일 뿐이다. 모든 언어와 논리를 그림으로 단순화하여 나타낼 수 있다고 믿었던 어떤 철학자의 생각 또한 시각이 우리의 언어와 사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진단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시는 시각, 혹은 본다는 행위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을까. 어떻게 보면 시란 본다는 행위와 떨어질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일상적인 시선으로는 좀처럼 간파할 수 없는 사물의 비밀스러운 유사성을 발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함을 은유와 상징이라는 수사학으로 표현하는 시에 바라봄의 행위가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각 활동이 시작되는 눈은 우리 신체의 일부분일 뿐이지만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고 어딘가로 향한다. 그러나 시각의 활동이 가시적 대상에만 묶여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시각은 때로 가시적 대상 너머로, 가시성 자체가 소멸되는 곳까지 나아간다. 그 방향은 때로 의식의 바깥이 될 수도 있고, 때로 의식의 내면일 수도 있다. 나의 의식과 세계가 만나는 지점, 바로 거기서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나고, 그 어름에서 또한 시가 탄생할 것이다.


(...)

생명이 절정에 다다를 때가 있으면 또한 몰락에 이르게 될 때가 있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어떤 초인간도 영원한 생명을 지닌 채 살지 못하였다. 산 자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서 자라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삶에서 잠시 피었다가 시드는 국화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시인은 시드는 꽃에서 어둠과 상처를 발견한다. 꽃이 시드는 것처럼 자신도 나이들고 있다는 데 대한 애처로움의 고백일까, 아니면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옛사랑에 대한 서글픈 감정의 표현일까. 그러나 시인은 이 쓸쓸한 낙화에 대해,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반복하는 존재론적 순환에 대해 “눈에 밟히지 마라/끝없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있음과 동시에 생성과 소멸로 이어지는 존재의 무한한 반복에 대한 단호한 긍정이 있다.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두려움과 존재론적 숙명을 받아들이는 담담함 사이에서 시인은 진동하고 있는지 모른다.

일부러 가부좌를 틀 필요는 없다 당신은 감각의 수행자, 당신의 세상은 불구의 시간이 시작되는 때, 눈을 감아도 또렷이 기억나는게 있다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반했던 제비꽃 향기처럼 당신, 들릴 듯 말 듯한 냄새 당신의 냄새를 들었다 노란색 코트가 아니라 감미로운 목소리가 아니라 당신의 발자국처럼 저 멀리서부터 두근거리는 냄새 눈을 감아도 또렷이 기억나는 게 있다 그러나 당신의 향기는 잠시 머물렀다 사라졌다 부재(不在)는 그리움의 양식 바이올렛 향기로 내 몸이 건반처럼 울렸지 잠시 뿐이었지만, 덤불 속에서 상채기를 핥다가 취한 당신의 냄새 적어도 당신의 몸에서 육식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다른 꽃으로 환생한다해도 이미 알았던 것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음을*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다 :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이리언(Alien)>
― 이재훈, 「앉은뱅이꽃」(서정시학, 봄호) 전문

봄이면 산과 들에 자줏빛 꽃을 피우는 키작은 꽃을 부르는 이름이 있다. 앉은뱅이꽃. 어딘가 앙증맞으면서도 안쓰러운 감정을 자극하는 별명을 지닌 이 꽃은 달리 제비꽃으로도, 혹은 오랑캐꽃으로도 불린다. 줄기가 없어 높이 자라지 못하는 탓에 붙여졌을 별명뿐 아니라 원래 이름에서도 이 조그마한 꽃의 비극적인 운명을 눈치챌 수 있다. “당신의 세상은 불구의 시간이 시작되는 때”라고 시인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꽃의 겉모습뿐 아니라 겉모습을 따라 사람들이 불렀을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기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앉은뱅이 꽃에서 “가부좌를 튼” 듯한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고,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반했던 제비꽃 향기”를 기억해낼 수도 하지만 시인은 “눈을 감아도 또렷이 기억나는” 냄새에 이끌린다. 그것은 그저 지나치는 발걸음을 지닌 자에게는 감지될 수 없는 것이다. 땅에 붙박혀 있는 꽃에 눈길을 보낼 수 있는 이에게만 꽃은 향기를 허락하는 것인지 모른다. 가만히 꽃을 들여다보는 시인에게 꽃의 향기가 “멀리서부터 두근거리는” 듯 다가오는 소리로 느껴진다. 고요히 꽃을 바라보며 꽃의 향기를 맡는 시인에게 꽃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 것이다. 다만 꽃을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향기를 맡고 꽃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만큼 시인이 꽃에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꽃의 향기는 이내 사라지고 만다. 그것은 쉽게 자극에 익숙해지는 후각의 특성 때문일 수도 있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의 운명 때문일 수도 있다. 향기는 사라졌지만 시인은 부재(不在)에 대해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지는 않는다. 또한 부재를 현존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다만 사라진 것을 사라진 대로 내버려둘 뿐이다. 존재의 부재가 곧 존재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한다고 시인은 믿지 않기에 꽃의 변화를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그 누구도 소리를 들어주지 않은 꽃의 소리를 들으면서.

_ <현대시>, 2006년 5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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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국망명자와 생활세계적 가능성의 지형

홍용희
                                       
                
    1. ‘새로움’과 ‘오래된 새로움’

신진 시인들의 첫 시집들이 비 온 뒤의 대나무 순처럼 일군의 무성한 숲을 일구고 있다. 시단의 중심부에 새로운 세대 군이 성큼 진입해 들어온 것이다. 2005년을 분기점으로 신진시인들의 등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직접적인 배경은 <천년의시작>, <렌덤하우스중앙> 등의 출판사들이 기성 시인들의 명망에 의존하는 관행보다, 새로운 세대의 목소리를 제도권으로 수용하기 위한 출판 기획을, 과감하게 추진한 데에서 찾아진다. 그러나 이보다 더 원천적인 배경은 이천년 대에 진입한 지 5년여가 지났으나, 1990년대 시단과 변별되는 뚜렷한 새로운 변모의 단층을 보여주지 못하던 상황에서, 내부에 적재되어 있었던 이천 년대의 새얼굴의 시인과 시적 감각이 표층을 뚫고 돌연히 출현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보면, 그동안 우리 시사가 비교적 10년 단위로 뚜렷한 전환의 마디절을 보여주었던 것에 비춰볼 때, 2005년에 이르러서야 신진 세대의 새로운 목소리가 전면에 표출된 것은 시차적으로 지체된 감이 없지 않다. 이것은 1990년대와 2000년대 간에 사회역사적인 층위에서의 변화의 단층이 뚜렷하지 않다는 점과 깊이 연관된다. 이를테면, 1980년대 말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의 와해로 상징되는 탈냉전 시대의 개막과 전 지구적 시장화라는 지각변동이 일어나면서, 시사에 있어서도 리얼리즘의 현격한 퇴조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 및 생태주의 시편이 주류로 나타나는 변화가 있었지만, 1990년대와 2000년대는 이에 상응하는 시대사적 전환의 단층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 시단의 이른바 기득권층이 과거 어느 때보다 두텁고 견고해서 신진들의 출현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환경이라는 점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안팎의 여건 속에서 다소 지체된 감은 있으나 근자에 들어 그 어느 때보다 첫 시집의 발간과 더불어 제각기 개성적인 목소리로 출사표를 던지고 있는 시인들이 활발하게 대두되고 있다.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이민하, 『환상수족』, 이승원, 『어둠과 설탕』, 김이듬, 『별 모양의 얼룩』, 김언, 『거인』, 신해욱, 『간결한 배치』, 고영,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박진성, 『목숨』, 이세기, 『먹염바다』, 박후기, 『나는 종이의 유전자를 알고 있다』, 이재훈,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윤성학, 『당랑권 전성시대』, 김근, 『뱀소년의 외출』, 조동범, 『심야 베스킨라빈스 살인사건』, 박판식, 『밤의 피치카토』, 진수미, 『달의 코르크 마개가 열릴 때까지』, 안현미, 『곰곰』, 이영주, 『108번째 사내』 등 신진 시인들의 첫 시집만도 실로 많이 간행되었다.
이들 시집들을 편의상 유형화하면, ‘새로움’과 낯익은 ‘오래된 새로움’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유형화는 우리 시단에 제 3 인류형의 탄생으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낯선 문법과 감각의 ‘새로움’이 등장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시적 전통의 계승에 해당하는 ‘오래된 새로움’의 지칭은 ‘새로움’에 대한 대타적 관계 속에서 성립된다.  
  어느 시대에나 그래왔듯이 새롭게 등장한 세대는 기왕의 시단에 우려와 호기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며 순식간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근자에도 역시 새롭게 등장한 젊은 세대군에 대한 평자들의 논의가 활발하게 개진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논점은 주로 신진들 중에서도 불연속적이고 이색적인 ‘새로움’의 진영에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불연속적인 ‘새로움’과 더불어 ‘오래된 새로움’ 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신진 시인들 전반의 이해를 위한 균형감각의 필요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새로움’이 더욱 시대사적 진정성과 미래적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인식에 바탕 한다.
  특히, 1990년대 이래 지속된 가치의 다원화와 해체적 상상력이 한편으로, 지나치게 개별적 단절과 파편화를 가속화시킴으로써, 고립, 소외, 혼돈, 불안을 야기시켰음을 주목할 때, 이천 년대의 시대정신은 이를 초극할 수 있는 창조적 보편을 요구한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찾아내고 의미화 하는 작업이 이천 년대 시 창작이 견지해야 할 과제라고 할 것이다. 오늘날 발표되는 신진 시인들의 창작활동은 이러한 시대사적 소명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  
  그러나 ‘새로움’의 시편은 숨은 차원의 새로운 질서가 전면에 표출되고 있음을 선언적으로 충격하고 있으나, 이를 구체적으로 의미화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문화주의적으로 추상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 시편의 시인들은 스스로 소통불능의 자기 방어적 성채 속에 들어가서, 자폐적인 언술을 일방적으로 전개하는 일종의 내국망명자의 길을 가고 있다. 이것은 현실세계에 대한  반영일수는 있으나 대안일수는 없다. 오히려 시대적 전환의 전복과 변혁의 에너지를 생산적으로 규명하기 보다는 일과성으로 소모시키기 쉽기 때문이다.  
한편, ‘오래된 새로움’은 구체적인 생활세계에서의 실천적 삶을 통해 이에 적응하고 부정하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체험적 삶에서 터득되는 생활 세계적 이성(하버마스)은 현실에 대한 ‘부정성의 계기’가 되는 미래지향적 예지로 작용한다. 생활세계속의 실천적 삶은 현실상황에 규정받으면서 동시에 이를 주체적으로 구조화하는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오래된 새로움’이 구체적인 시대정신의 발견과 미래적 가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감당하기에 용이하다고 파악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점을 염두해 두고 ‘새로움’의 시편에 대한 성찰적 개관과 함께 ‘오래된 새로움’의 시편의 성격, 의미, 미래적 가능성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새로움’ 혹은 내국망명자들

2000년대 중반이 기존의 질서와 새로운 질서의 ‘두 날’이 팽팽한 긴장관계를 이룬 민감한 임계상태라는 점을 집약적으로 선명하게 표출시킨 시편들은 단절적인 ‘새로움’의 진영이다. 이들의 시편들은 제3 인류형이라고 지칭할 수밖에 없는 소통 불능의 화법과 분방한 상상력으로 넘쳐흐른다. 낮선 문법을 통해 환상, 엽기, 섹스 등의 상상력을 가학적으로 탐닉하는 이들 시편은 현실 사회가 극심한 소외와 사물화에 시달리고 있음을 절규처럼 드러내 주고 있다. 마치 혼돈스런 현대사회에 대응하는 시적 화법으로는 비선형적인 혼돈 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들 시인들의 시편에 대해 시집 전반을 헤짚으면서 상징과 이미지의 기호론적 분석을 시도한다면 나름대로의 의미체계를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은 중요하지 않다. 이들 시편들은 상징적인 메시지의 전달 보다 시적 형식론 그 자체의 강렬한 자기 투척을 통해 불협화음의 실재를 환기시키고자하는 전략이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다음의 시편을 읽어보기로 하자.

  지하에 계신 淫父와 淫母 가 침봉으로 내 얼굴에 난 털
을 벗긴다 나는야 털북숭이 라푼젤, 짜다 푼 목도리의 털
실같이 꼬불꼬불한 털을 발끝까지 내려뜨린 채 울고 있다
울음을 짜보지만 눈물은 흐르자마자 냄새나게 덩어리지는
冷 일 뿐, 에이 더러운 년 킁킁거리며 내 얼굴을 냄새 맡던
淫父가 빨간 포대기처럼 늘어진 혀로 내 털 한 가닥 한 가닥
을 싸매 핦는다 조스바를 빨던 입처럼 淫父의 혀끝에서
검은 색소가 뚝뚝 떨어진다. 이제부터 이게 네 머리칼
이야. 알았어? 淫母가 스트레이트용 파마약을 이제부터 내 머리칼인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부분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광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모두 서른두 개
나는 나의 아름다운 두 귀를 어디에 두었나
유리병 속에 갇힌 말벌의 리듬으로 입맞추던 시간들을.
오른손이 왼쪽 겨드랑이를 긁는다 애정도 없이
계단 속에 갇힌 시체는 모두 서른두 구
나는 나의 뾰족한 두 눈을 어디에 두었나
호수를 들어올리던 뿔의 날들이여.
새엄마가 죽어서 오늘은 모두 슬프다
밤의 늙은 여왕은 부드러움을 잃고
호위하던 별들의 목이 떨어진다
                                                 -황병승, 「검은바지의 밤」 부분

  시적 상상력이 매우 생경하고 도발적이다. 행과 연 구분의 절도와 간격은 물론이거니와 의미의 일관성과 상관성이 무화되고 있다. 첫 행에서부터 시제와 인과적 관계가 무화된 비문임은 물론이고, 엽기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들이 서로 뒤엉킨 채 자기 재생산을 지속하고 있다. 시의 길이는 여기에서 그칠 수도 있지만 무한대로 늘여도 무방하다. 어차피 청자를 배려하지 않은 자폐적 발화인 탓에 시상의 형식과 전개 역시 화자의 자의적인 의지에 따라 결정하면 그만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시편들이 무의미한 잡답이나 잡음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시상의 기반을 이루는 엽기와 환상성은 그 자체로 우리 시의 새로운 범주를 개척하고 돌파하는 충동적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위의 인용시의 시인 이외에도 이민하, 이승원, 진수미, 신해욱, 이영주 등의 시 세계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유사한 경향을 읽을 수 있다.  
  엽기란 기본적으로 공포스럽지만 매혹적이라는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잔혹성이 쾌감을 부채질하고 쾌감은 다시 잔혹성의 공포를 상기시킨다. 공포스러움은 불온하고 발칙하고 어처구니없는 도발과 전복에서 비롯된다. 한편, 매혹적인 쾌감은 공적인 장소에서는 결코 발설되거나 공개될 수 없었던 지점들이 공개될 때, 지배질서의 남용과정의 전모가 누설되고 전복되는 데에서 생성한다.
엽기의 유행과 관련하여 우리시대 자체가 엽기적이기 때문이라는 식의 반영론적 지적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충실한 것도 아니다. 이런 식의 반영론은 문제를 드러내기 보다는 오히려 덮어버린다. 엽기적 상상력에 대해 우리가 고민하고 찾아야 할 핵심 문제는 현대사회에 대한 도저한 성찰, 전복의 에너지를 감지하고 이를 생산적으로 의미화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자에 발표되는 신진 시인들의 시편에 창궐하고 있는 엽기는 세계와의 불협화음 자체에 그치는, 현실 반영론의 차원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은 엽기가 유행하는 불온한 사회에 내장된 발칙한 공격과 저항의 에너지를 봉인하거나 일회적으로 소모시켜 버리기 쉽다.
한편, 환상은 현실과 완전히 차원이 다른 시공간을 향한다. 환상은 일상의 시공간을 혁명적 파괴력을 통해 모험의 시공간으로 대체시키고 있는 것이다. 환상의 가장 표준적인 해석은 배제당하거나 소실된 것들을 호출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식이다. 캐서린 흄이 “나는 환상을 사실적이고 정상적인 것들이 갖는 제약에 대한 의도적인 일탈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할 때, 환상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체계에 의해 억압된 신화적이고 자연적인 세계를 가리킨다. 보이는 세계의 재현으로서의 미메시스와 그러한 “사실적이고 정상적인”세계가 포괄할 수 없는 빈자리, 즉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심연이 환상 속에서 재생될 수 있다. 따라서 환상성은 현대 세계의 일상성에 대한 위반과 전복을 통해 미분성의 몽환적이고 신화적인 상상력의 영토를 개척하고 수용할 때 그 본래의 소임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시편에서 환상성은 권태로운 일상에 대한 조소와 일탈의 차원에 머무는 경향을 보인다. 치명적인 비약의 상상이 엽기적 상상력의 보조적 수단으로만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엽기와 환상성이 시적 대화의 상상력을 돌파해내지 못하고 오히려 비유와 상징의 빽빽한 그물망으로 구성된 성채를 높이 쌓는 결과를 낳고 있다. 그리고 그 닫힌 성채 안에서 시인들은 스스로 불안한 매혹의 내국망명자로서의 삶을 구가하고 있는 형국이다. 망명자의 속출은 사회 현실의 불온성을 극명하게 선언하는 충격을 던져줄 수는 있지만, 그러나 혁신과 변화의 출구를 직접 마련하는 데에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내국망명정부의 성채를 허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먼저, 앞에서 제기한 엽기와 환상성이 지닌 부정과 혁신의 창조성을 생산적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환상성은 ‘치명적 비약’의 상상을 통해 일상 속에서 우리 자신의 기원의 시간과 소통함으로써 우리들 스스로도 망각하고 있었던 우리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는 동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엽기 역시 이점은 마찬가지이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추사 김정희가 자신의 문체를 향한 괴기성(怪奇性)이라는 비난 앞에서 ‘괴(怪)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 숭고하고 심오한 지혜의 세계, 지극한 예술의 땅을 밟을 것인가’라고 응답했던 것처럼, 숭고를 향한 추의 미학의 심연으로 매진해나가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시적 형식 미학에서 시적 언술과 이미지의 과잉에 대한 성찰을 통해 절제와 생략의 여백을 추구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 본 바대로, 이들 시편에는 대체로 온통 환유, 제유, 상징 등의 이미지가  범벅을 이루고 있다.  시적 양식이 전통적으로 견지하는 압축과 생략의 미의식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시적 장르의 ‘말하지 않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명제는 여기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말의 절제와 비움이 아니라 말들의 성찬을  즐기고 있다. 시적 화자의 언술만이 시상의 비선형적인 혼돈의 흐름을 타고 일방적으로 발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의 창조적 상상력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차라리 그 비어 있음을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하다.’(多言數窮 不如守中)는 고전(노자 『도덕경』)의 가르침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여기에서 비어 있음을 가리키는 중(中)은 도(道)에 다름 아니다. 말의 풍요는 오히려 그 풍요로움으로 인해 길(道)을 잃게 되고 도(道)의 소통을 막게 된다.)
  실제로 시적 양식은 나르시즘의 성채가 아니라 이타적으로 열린 창조적 대화의 장이다. 주지하듯, 옥타비오 파스는 시 창작에서 ‘타자의 의지의 침투’를 강조한다. 시를 쓰는 행위는 상반되는 힘들의 얽힘, 즉 나의 목소리와 타자의 목소리가 합쳐져 하나가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도 이러한 점을 읽을 수 있다. 그가 시적 창조를 자연의 모방이라고 할 때, 자연은 혼으로 가득한 것, 살아있는 유기체에 해당하는 물활론적 대상이다. 따라서 그의 논지에서 시는 ‘시 자체가 자신의 주인이며 혼이 깃 들인 자연과 시인의 영혼이 만나서 얻어지는 열매이다.’
  이렇게 보면, 시에서 비움과 절제의 여백은 초월적인 ‘타자의 의지가 습합’되는 소통의 공간이다. 시의 형식미학에서 말의 ‘자발적 가난’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발적 가난’의 시적 형식은 타자의 목소리의 동참과 소통을 향한, 시의 우주적 형식화로 정리된다. 여기에 이르면, 시 창작의 주체란 나르시즘적 자아가 아니라 공동체적 자아라고 말해 볼 수 있다. 한편의 시가 집단적, 민족적 차원의 예언적 지성으로 떠오르기도 하는 것은 이러한 문면에서 이해된다. 이렇게 보면, 내국망명자들의 본국 환수의 전략은 형식미학의 자기 갱신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것이다.    

3. ‘오래된 새로움’ 혹은 생활세계적 가능성

  물론, 오늘날 신진시인들로부터 내국망명자들의 이방인적인 발성만이 들리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도 이색적인 탓에 도드라지게 느껴질 따름이다. 사실은 생활세계에서의 고생살이에 시달리면서 이로부터 살림살이의 방향을 찾아서 가로질러 나가는 ‘오래된 새로움’의 시 편이 더욱 활발하게 발표되고 있다.  ‘오래된 새로움’의 시편은 이를테면, 메를리-퐁티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의식과 신체가 하나로 통일된 ‘살아있는 신체’로서의 인간 실존을, 시적 주체로 설정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살아있는 신체’는  세계 속에 결박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세계를 재구성해 낸다. 다시 말해, 인간 존재는 자신의 상황에 규정 받으면서 동시에 스스로 자신의 상황을 구조화해 나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체험적 삶을 통해 절망과 상처의 길을 걸으면서, 동시에 스스로 이를 초극하고자 하는 ‘오래된 새로움’의 시편에서,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을 감지하는 것이 더욱 용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래된 새로움’의 시편에서 우리는 절망과 상처의 생활세계에 직접 부대끼면서 그 신생의 출구를 향한 탄력적인 움직임을 읽어내는 것이 요구된다.
여기에서는 우선 윤성학, 박후기, 박진성, 이세기의 시 세계를 중심으로 생활 세계적 가능성에 대한 체험적 현장의 언어를 만나 보기로 하자. 이들의 시적 출발은 생의 허기와 결핍이다. 그 주된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물적 풍요와 문명의 이기를 자랑하는 오늘날에도 치명적인 결핍, 가난, 소외, 질병의 그림자가 우리 주변을 침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여기에서 더 나아가 지배 권력의 자동 조절 메카니즘이 고도로 발전한 오늘날에는 적당한 결핍과 고통의 강요가 조장되고 관리되기도 한다.  적당한 “허기”의 강요가 현대사회의 지배질서에 충실한 구성원을 생성해내는 효율적인 지배전략이기 때문이다. 윤성학의 시집 『당랑권 전성시대』의 첫 번째에 수록된 다음 시편은 이러한 점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매받이는 사냥을 나가기 한 달 전부터
가죽 장갑을 낀 손에 나를 앉히고
낯을 익혔다
조금씩 먹이를 줄였고
사냥의 전야
나는 주려, 눈이 사납다
그는 안다
적당히 배가 고파야 꿩을 잡는다
배가 부르면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꿩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날아 도망갈 수 없을 만큼의 힘
매받이는 안다
결국 돌아와야 하는 나의 운명과
돌아서지 못하게 하는 야성이 만나는
바로 그곳에서
꿩이 튀어 오른다
                                                             -윤성학, 「매」 전문

적당한 “허기”는 문명과 야성의 가파른 긴장관계를 지탱시키는 지점이다. 이때, 사냥꾼의 기질이 가장 민감하게 발휘된다. “꿩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그러나 절대 “날아 도망갈 수 없을 만큼의 힘” 만이 주어지는 지점이다. 그래서 “매받이”는 나에게 “적당히 배가 고”픈 허기를 지속적으로 강요하고 관리한다. 이러한 상황을 다른 시각에서 정리하면, 나는 강요되고 관리되는 문명과 야성, 안주와 고통의 접점을 이탈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는 “꿩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먹이”마저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적당한 “허기”마저도 고마운 은총이다. 이 허구적 은총의 수혜를 계속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윤성학은 “당랑권”의 권법을 내보인다. “이곳에는 사람 수만큼의 권법이 있”지만,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고/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당랑권이다”(「당랑권 전성시대」) 이와 같이, 당랑권의 처세술을 익혀야 낙오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바로 현대사회가 획일화와 자기 정체성의 상실을 강요하는 사회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래서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것보다/누군가 내가 나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더 참에 가까운 명제였다니/그러므로 나는 말하지 못한다/이 구두의 주름이 왜 나인지/말하지 못한다”(「구두를 위한 삼단논법」)는 상황은 예고된 것이다. 이처럼, 심각한 자기 정체성의 상실은 자연스럽게 자기 정체성 회복을 위한 갈망을 증폭시킨다. 마치 몸에서 수분이 빠져나가면 물을 찾게 되는 몸의 반응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윤성학이 “다산이 나고 죽은 여유당 햇빛 속에서/하루를 보내며/촘촘한 그 이의 정신을 읽고 오는 길”에 “철길을 바라보며 그때 알았습니다/물이 그러하듯 쇠가 또 그러하듯/어딘가를 향하는 동안에만/강물이고 철길인 것이었습니다” 라는 전언 역시 자연스럽게 들린다. 윤성학은 첫 시집에서 생활세계의 실천적 삶을 통해 “당랑권 전성시대” 로부터 “다산이 나고 죽은 여유당”을 찾아 “그때 알았습니다”라고 탄성하는 넓은 음역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한편, 박후기의 시집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역시 기본적으로 “생의 허기”에서 출발하고 생성되는 특성을 보인다. 다음 시편은 허기진 사람들의 허름한 모습에 대한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묘파이다.
 
  장대비 맞고 차양이 내려앚은 국밥집
  바지춤을 추켜올리듯 바람은
  흘러내린 천막의 갈피를 움켜지었다, 놓아버린다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도
바지를 흘러내리게 하는 생의 허기
고개 숙인 채 밥집의 허름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배고픈 사람의 뒷모습이 식은 국밥의 기름기처럼
흐린 내 시선에 엉겨붙는다
   (중 략)
사슴 박제처럼
벽에 목만 내걸린 선풍기가
두 평 남짓한 밥집에 철철 바람을 쏟아붓는다
바람은 라디오 속에도 들어 있어
무뚝뚝한 얼굴에 나뭇잎처럼 달라붙은
인부들의 귀를 간질인다

광야는 넓어요 하늘은 또 푸르러요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행복의 나라로」 부분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도/바지를 흘러내리게 하는 생의 허기”를 달래며 “허름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배고픈 사람의 뒷모습이” 넓고 푸른 “행복의 나라”로 가는 정서적 틈새를 마련하고 있다. “두 평 남짓한 밥집”에 내걸린 선풍기의 바람이 라디오의 “행복의 나라”라는 노래를 전파시키는 촉매로 작용하고 있다. 이처럼, 가난과 절망 속에서 풍요와 희망을 향한 추구는 너무도 식상한 계몽적 서사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또한 지속적인 생활세계의 실상이다. 비록 낮고 느리고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생활세계 속에서 스스로 부대끼는 삶이 자신을 초극의 길로 인도하는 방법론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뱃속에”서부터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열 개/발가락이 열 개 그리고/바위의 안부를 묻는 빗방울처럼/쉬지 않고 내세를 두드리는/희망이라는 유전자”(「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밥집의 허름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일상은 스스로를 “희망”으로 구원하는 과정과 연관된다.  
   박후기의 시 세계가 대부분 “산란(産卵)의 공장지대”처럼 결핍과 고통의 풍경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그러나 차갑거나 건조하지 않고 그 내부에서부터 자루 속의 감자들이 싹을 틔우듯(“울타리 아래 버려진 자루 속에서/썩은 감자들은 싹을 틔웠고”(「뒤란의 봄」), 따뜻한 희망의 정조가 번져 나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편, 박진성의 시 세계는 질병의 구심력과 원심력의 상상력을 절박한 체험적 언어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질병의 구심력적 상상력이란 공황발작, 불안, 자살충동, 상습불면 등을 앓는 자신의 증세에 대한 핍진한 묘사이고, 원심력적 상상력이란 타인의 아픔과 “애옥한 삶”(「슬픈 바코드」)에 대한 연민의 정감을 가리킨다. 몸속에 침투한 질병은 역설적으로 온몸의 신경 조직과 감각기관을 날카롭게 깨운다. 그래서 질병을 앓을 때, 날씨와 기온의 변화, 바람소리, 지각의 움직임 등을 섬세하게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박진성의 시 세계가 누구보다  절박하면서도 예민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질병의 신경 조직이 시의 촉수를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병동 복도를 걷는다 밤이면 적나라해지는 고통들……
형광불빛 쏟아지면 신경은 휘어진 척추처럼 길에 달라 붙
는다(오늘 검사에서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창문 열면
후려치는 바람, 바람이 부는 것이다 십일 층에서부터 내가
밟고 내려온 건 울분이 아니다 긴 낭하에서 술렁이는 고요의
낱알들은 중력으로 비틀거린다 고요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현기증
어지러운 공기를 가득채운 내 몸은 몇 개 불빛을 집어 삼킬
것이다(내려가고 싶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새벽이면 철제문이
열리겠지 어두운 낭하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불빛, 출구가 없는데
바람아, 물체의 몸에서 튕겨나온 빛의 알갱이들아, 아프러 오는가
                                                                    -「봄밤」 부분

“적나라해지는 고통”에 시달리는 시적 주체의 정서와 몸의 감각이 그려지고 있다. 바람이 “후려치”는 각도는 물론이고, 고요와 빛들이 각각 “낱알”과 “알갱이”의 형상으로까지 보이고 느껴진다. 질병의 깊은 고통이 온몸의 감각을 푸른 칼날처럼 날카롭게 살려 놓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질병은 또한 “살고 싶은” 생의 의지에 “목숨을 걸(「목숨을 걸다」)게 한다. 목숨과 건강의 소중함 역시 질병의 상상력이 더욱 깊이 환기시킨다. 몸을 훼손하는 질병이 역설적으로 몸의 가능성을 깨우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박진성의 몸의 고통은 스스로를 외부세계를 향해 원심력적으로 열어 놓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가 “낮은 카바이드 불빛 아래 쭈그려 앉은 여자, 느린 자전거 한 대만 쓰러져도 모두가 다칠 것 같은 밤의 시장길 모퉁이에 이마 주름살 따라 흔들리고 있는 여자”(「슬픈 바코드」) 의 슬픔을 내밀하게 감지하고 느끼는 것은 질병으로 인해 가장 민감해진 몸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는 시집 『목숨』에서 “목숨”을 거는 질병과의 처연한 싸움을 통해, 한편으로, “산다는 일이 숨결 곳곳에 구멍을 내어 설움도 가난도/비루함도 숨쉬게 해줘야 하는”(「목숨-금강에서」)것이라는 “목숨”의 이치를 성찰적으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세기는 우리 시사에서는 매우 낯설게 바다의 교향시가 아니라 ‘바다의 산문’을 읽어주고 있다(최원식). 바닷가의 질척한 삶의 내력과 흔적이 평명한 언어를 통해 기록되고 있다.
 
   늘그막 함석집에 누군가 걸어온다
   
   막배도 끊기어 올 이도 없는데
   저녁밥상이 차려지고
   흰쌀밥에

  컴컴한 밤이 내어온다

  오리와 고양이와 흰둥이 강아지가 있는 빈 마당이
  쓸쓸하니 텅 비어

  이런 날이면 지리산 갈가그메 게발 물어 던진디끼
나 혼자 떨어졌다며 울었다는 할아배와
   이작도 굴업도 섬그늘을 떠돌다
   불귀의 몸이 되었다는 대고모와 뺑덕어멈을 닮았다
는 할머니가 절로 생각나는

   환한 저녁이 온다
                                                              -「애저녁」 전문
                            
어촌의 “늘그막 함석집”이 맞이하는 저녁 풍경이 종요롭게 그려지고 있다. “올 이도 없”고, “쓸쓸하니 텅 비어”있는 “빈 마당” 이 있을 뿐이지만, 시적 화자에게 그곳은 이미 이승을 떠난 “할아베”, “할머니”, “대고모”의 삶의 내력들로 홍성스럽다.  “늘그막 함석집”은 어느새 이들의 삶의 설화로 술렁인다. 어촌마을의 저녁은 이와 같이 죽어 사라졌어도 잊혀지지 않는 삶의 곡절과 사연들로 언제나 수런거린다. 굳이 “조깃배를 타던 쌍둥이 아들이/월경을 하였다는/소문”(「당너머집」)과 같은 어둠의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섬마을은 제각기의 삶의 곡절들이 도처에 소금처럼 서려있다. 이를테면, “바다의 잔주름”을 닮은 “옷장수 이수본 씨”(「이수본 씨」), “내 애비의 이 가는 소리와 코곪과 술주정을/보고 돌아왔던 바다”(「백령도에서」), “여인숙 할아배가/화투장을 두드”리는 “옹진여인숙”(「옹진여인숙」) 등이 섬마을의 풍속의 역사를 증거한다. “여기까지 온 길이 생간처럼 뜨"(「먹염바다」)거웠음을 생생한 표정으로 보여주는 섬마을은 또한 그 속에서 “상수리 숲 위 만월”(「애비」)을 퍼올리기도 한다. 어두운 한과 그늘이 “환한 저녁”의 빛을 반사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의 “밤바다”가 “슬프”면서도 “아름다운”(「밤물 때」)까닭이 여기에 있다. 어둠 속에서 어둠이 정화되어 약하고 미미하지만 밝은 기운으로 퍼지고 있는 현상이다.  
물론,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생의 그늘이란 위에서 든, 윤성학, 박후기, 박진성, 이세기의 경우처럼 허기, 질병, 고난 등의 항목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보다 거대 인공도시 속에서의 막막한 단절과 소외의식이 더욱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그 숲엔 풍경이 없다
나무와 새 온갖 풀벌레가 가득하지만
그들은 소리내지 않는다
사방을 둘러봐도 제자리만 지키고 선
가장 그럴듯한 포즈의 마네킹들
그곳엔 소리가 없다
                                                  -이재훈,「빌딩 나무 숲」 부분

이와 같이 몰인격화, 익명화된 도회지적 삶의 일상에 대한 회의는 조동범, 고영, 박판식, 안현미 등의 시편에서도 빈번하게 변주되어 반사된다. 그러나 이들 시편 역시 앞에서 살펴 본 이른바, ‘내국망명자들’의 경우와 달리, 소통 가능한 전통적인 시적 문법을 통해 대화적 상상력의 장을 열어놓는다. 외부 세계와의 불협화음에 대해 자폐적 공간으로의 퇴행이 아니라 외부 세계에 대한 열린 교감의 장을 견지한다. 또한, 이와 동시에 현실 초극의 자기고투의 과정을 지속적으로 추구한다. 이를테면, 실어증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해, “벙어리의 옹아리”(이재훈, 「마리의 오아시스」)나마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메를리-퐁티가  지적했듯이  인간 실존은 현실 세계에 대해 부정성의 계기(완전한 자유에의 계기)만을 갖는 것도 현실을 완전히 수긍하는 계기(결정론적인 계기)만을 갖는 것도 아니다.  구체적인 인간 존재는 외부 상황과 상호 교환적인 작용을 하는 가운데 상황에 의존해 있으면서 항상 미래로 열려있는 성향을 지닌다.  아직 높은 성과를 이루어내지는 못했지만 ‘오래된 새로움’의 시편의 미래적 가능성을 특히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4. 맺음말 : 창조적 보편의 질서를 위한 단상

이천 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신진 시인들의 목소리가 비약적으로 쏟아져 나왔다는 것은 우리사회에 적재된 숨은 차원의 새로운 질서가 표출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징후이다. 따라서  어느 시 편이 이러한 징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게 대두된다. 신진 시인들의 시집을 살펴보면, 크게 ‘새로움’과 ‘오래된 새로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의 기준은 물론 매우 이색적인 ‘새로움’의 시편이 출몰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엽기와 환상, 비유와 상징의 이미지가 뒤얽힌 ‘새로움’의 시적 유형은 사회적 질서가 전환의 극점에 도달했음을 충격적으로 선언하고 있으나, 그러한 사실을 추상적으로 일반화시키는 데 그치고 있다. 시인들 스스로 소통불능의 자폐적 성채로 들어가는, 일종의 내국망명자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현실세계에 대한 반영의 한 형식일 수는 있으나 대안일 수는 없다. 오히려 사회 현실의 전복과 변혁의 생산적 에너지를 덮어버리거나 일과적으로 소모시켜버릴 가능성이 있다.
한편, ‘오래된 새로움’의 시편들은 구체적인 생활세계로부터의 체험적 삶을 통해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스스로 존재의 결정과 선택을 열어나가는 가능성을 지닌다. 그래서 ‘오래된 새로움’이 아직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미래적 가능성을 감당할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하기에 용이하다. 특히, 좀더 자각적인 형식미학에 대한 인식이 요구되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형식미의 계승은 ‘타자의 목소리’와 교감하고 공명할 수 있는 열린 소통의 형식과 가깝다는 측면에서 더욱 고무적이다. 물론, 21세기의 미래지향적인 시대정신의 감지가 신진시인들의 몫만은 아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시인군에 한정해서 논의를 전개시키고 있을 따름이며, 그것이 또한 다가오는 새로운 질서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기대도 한 몫을 했다.
  분명, 1990년대 이래 우리 사회는 가치의 다원성과 해체를 해방과 가치의 민주주의라는 미덕으로 추구해왔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과 외부세계의 연속성을 와해하고 단절시켜 개별적 파편화와 소외감의 심화를 몰고 온 것도 사실이다. 이제는 다채로움의 무질서로부터의 질서, 즉 창조적 보편의 양식이 요구된다고 파악된다. 물론, 이때의 창조적 보편은 무질서의 엔트로피를 스스로 수용하면서 나오는 질서일 것이다. 열역학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프리고진은 물질과 에너지의 출입이 가능한 열린계가 평형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미시적 요동의 결과로 무질서하게 흐트러져 있는 주위에서 에너지를 흡수하여 엔트로피를 오히려 감소(무산,霧散)시키면서, 거시적으로 안정한 새로운 구조가 출현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무산 구조 혹은 자생적 조직화로서의,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를 오늘날의 우리 시단에서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창조적 보편의 실체에 대한 논의는 오늘날의 사회, 정치,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와 함께 진척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생활세계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오래된 새로움’의 시편이 내국망명자의 속성을 지닌 ‘새로움’의 시편보다 창조적 보편의 질서를 담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크다는 점에 대해 거듭 강조하고자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국망명주의에 상응하는 ‘새로움’의 시편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평형으로 나아가기 위한 비평형 현상은 그 자체로 과도기적인 동역학으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시작, 06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
무모한, 희망의 원리

이경수



1. 폐허를 걷는 법

최근 논의되고 있는 ‘미래파’에 관한 논의를 바탕으로 현대시의 문제와 방향에 대해 논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 솔직히 좀 난감했다. 우리 시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건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찬사든 비판이든 논의의 초점이 한쪽에 집중된다는 건 논의의 대상이 된 당사자들에게나 논의로부터 소외된 시인들에게나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 대부분이 이제 막 첫 시집을 낸 시인들이었으니 말이다. 여름호 계간지들의 상당수가 ‘미래파’로 지칭되었던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에 대한 비판적 논의에 할애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나로선 어떻게 하면 우리 시의 미래에 대한 좀더 생산적인 논의를 끌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됐든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에 대한 비판적 담론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의 하나로서 언제까지고 동어반복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섣불리 다른 지도를 그려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일전에 발표한 「‘다른’ 미래에 관한 몽상」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에 대해 나 역시 얼마간 매혹을 느끼고 있고, 어찌 됐든 이들과 함께 우리 시의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편 가르기 식으로 이들의 시를 매도하거나 또 다른 이분법의 함정에 빠져 ‘전부 아니면 전무’,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식으로 논의를 이끌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다른’ 미래에 관한 몽상」에서 제기한 의문과 비판에 대해서는 지금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다만, 비판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 글에서는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방향에서 논의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마침 서정성의 계보를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보이는 개성 있는 시집들이 최근 몇 달 사이에 출간되어, 아직은 막연한 내 생각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최근 우리 시단의 논의를 지켜보면서 ‘다른’ 미래를 열어갈 새로운 담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면서도, 작품이 받쳐주지 않는 담론이란 공허한 것임을 다시 한번 절감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록 소설을 중심으로 한 담론이기는 하지만, 가라따니 고진은 ꡔ근대문학의 종언ꡕ에서 사회 비판적 기능을 잃어버리고 사소해진 근대문학에 대해 죽음을 선언했다. 일본의 근대문학은 1980년대에 이미 종언을 고했다고 단호하게 선언하면서도,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한국문학에 대해서는 희망이 있다고 말했던 그가 이제 한국문학도 미래가 없기는 마찬가지라고 태도를 정정한 것이 내게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나 역시 우리 문학이 일본문학이 걸어간 것과 비슷한 행보를 걷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발언을 우리의 사정을 잘 모르는 이웃나라 비평가의 발언으로 가볍게 넘겨 버릴 수 없었다.
90년대 들어 80년대 문학의 공과에 대해 평가하면서 공보다는 과에 주목하여 근대적 이분법의 한계에 사로잡힌 파시즘의 문학으로 80년대 문학을 평가하는 시선이 널리 퍼졌던 것이 사실이다. 느린 행보이긴 했지만 여전히 사람살이에 대한 관심을 철회하지 않으면서 80년대 문학의 과오에 대해 자기반성하는 시들도 씌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는 세상을 온몸으로 느끼며 우리의 문학은 사회와 역사와 윤리라는 무거운 짐을 이제 문학으로부터 덜어주고 싶어했고,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문학은 그동안 억눌러온 욕망을 발산하고자 했다. ‘문학의 위기와 죽음’에 관한 담론이 널리 퍼지며 ‘디지털 문학’과 ‘대중문화’에 대한 담론이 이전의 문학의 자리를 대신했고, 사회․역사적 상상력이나 리얼리즘, 문학의 윤리에 관한 논의는 낡은 것으로 사회적 살해를 당해 버린다. 그 와중에 신자유주의의 옷을 입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전 지구적으로 세를 확장해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졌지만, 개인의 욕망에 관한 수많은 담론들은 ‘지금, 여기’가 마치 굉장히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인양 또 다른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문학 역시 최근 담론의 추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녕 이제 문학에서 시대를 앞서나가는 새로운 전위의 역할은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인가? ‘지금, 여기’가 자유롭고 민주적이라는 환상이야말로 신자유주의가 퍼뜨린 환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학 역시 그에 대한 비판적 담론을 이끌어내기는커녕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추종하거나 그것을 조장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문제는 과거와는 달리, 이제 문학조차 그런 환상이 거짓이며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문학은 사회․역사적 상상력을 철회하면서 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마저 놓아 버린다. 이미 문화의 전위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문학에 대해 누구도 그런 역할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도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기능을 문학에 기대하던 독자들이 오늘의 문학에 실망하고 하나둘씩 문학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었다. 문학의 위기를 과장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최근에 제기되는 위기 담론은 문학이 언제 위기 아닌 적이 있었냐는 식으로 낙관적이면서도 다소 무심하게 받아치기에는 좀더 근원적으로 보이며, 문학의 위상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학이 여전히 사람살이에 대해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고, 사람과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으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에게, ‘지금, 여기’의 문학이 위기로 다가오고 더 나아가 폐허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문학이 다른 대중문화와 차별 없이 재미와 새로움을 추구하는 스타일의 경쟁을 펼치게 된다면 솔직히 문학의 미래가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문학보다 훨씬 재미있고 새로운 스타일을 수용하기에 더 유리한 대중문화가 널려 있다.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시 중에는 스타일의 새로움으로 시라는 장르가 가진 한계를 극복해 보려는 시도가 보이기도 하지만, 그 새로움이라는 것도 장르의 한계를 넘어서면 그리 새로워 보이지 않는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유행하는 탈근대적 담론이 더 이상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이제 고민이 필요한 시점에 도달한 듯하다. 이 새로움이 담론을 추종하는 것은 아닌지, 새로움의 포즈만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좀더 냉정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많은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지금, 여기’는 사막이거나 폐허로 등장한다. 그들이 그리는 미래나 환상은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어찌 됐든 이 폐허를 견뎌야 할 때 폐허를 걷는 법은 각자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절망을 과장하며 냉소와 환멸의 시선으로 폐허를 걷는 자도 있을 것이며, 희망을 강요하며 또 다른 환상을 심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폐허를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묵묵히 폐허를 걸어 나가는 것일 게다. 미리 절망하여 걷기를 포기해 버리거나 오아시스라는 또 다른 환상에 사로잡혀서는 결코 폐허를 벗어날 수 없다. 이 글에서는 유행을 추종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세계를 담담히 개척해 가고 있는 몇몇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다른’ 미래를 구성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디디려 한다.


2. 리얼리즘과 서정성의 행복한 결합 가능성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새로움에 대한 추구가 확연히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가운데 리얼리즘과 서정성의 행복한 결합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전망하게 하는 시집들이 최근에 출간되어 주목을 요한다. 김진완의 ꡔ기찬 딸ꡕ, 이승희의 ꡔ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ꡕ, 고영민의 ꡔ악어ꡕ는 각기 다른 개성을 빛내며 리얼리즘이 아직 낡아빠진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첫 시집이다. 물론 이들의 경우 공교롭게도 1960년대 후반 출생으로 비록 끄트머리나마 386세대에 속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점을 눈여겨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세대 구분이 큰 의미를 가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386세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미 오래 전에 서정의 한 축을 단단히 구축하고 있는 문태준 시인도 있고, 역시 세대적인 구분에서는 벗어나지만 서정의 계보에 세울 수 있는 손택수, 신용목, 박성우 시인도 있다. 반면 김록, 장석원 등 세대적 구분과는 무관하게 오히려 새로운 시의 첨단을 달리는 시인들도 있으니 말이다.
리얼리즘과 서정성의 결합 가능성은 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90년대 시의 특성을 ‘신서정’에서 찾는 논의들은 80년대를 풍미한 리얼리즘 시가 90년대 들어 몸 바꾸기를 시도하던 중 서정성과 결합하면서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랑말랑한 서정으로 인해 상업주의와 결탁했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90년대에 유행한 생태주의 시 역시 윤리적 정당성이 문학적 성취를 앞서면서 자연에 대한 체험이 적은 젊은 세대에게 반감을 가져오기도 했다. 유형진의 「모니터킨트」나 「피터래빗 저격사건」 연작시는 디지털 세대로서의 세대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자연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보여준다. 자연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자연이 없었다고 이들이 인식하고 있다거나 기억을 사서 유년의 고향에 대한 기억을 갖게 된 이후로 오히려 혼란스러워지고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고백이 바로 그것이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이들 세대 나름의 정직한 고백이자 자연과 서정을 특권화해 온 기존의 시에 대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생태주의 시들이 그 담론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한계 안에 시를 가두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맥락이 이러한 자기 고백의 배후에 작동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리얼리즘과 서정성의 결합이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해서 모두가 판을 걷어치우듯 생활현실의 문제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작품은 대개 유행과 무관한 곳에서 나오는 법이니 말이다.
최근에 나온 김진완의 첫 시집 ꡔ기찬 딸ꡕ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동시대 시인들의 요란한 유행과는 무관하게 이 시집이 전통 서정의 미학을 계승하면서도 거기에 삶의 체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바탕이 된 사람살이에 대한 신뢰가 접목된 형식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등단 후 13년 만에 나온 첫 시집다운 내공을 보여주고 있는 시집인 셈이다.
김진완의 시는 「기찬 딸」, 「그 어느 잠결에」, 「굳은 살」, 「아픈 딸」 등에서 살아있는 인물 형상을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는데, 그것은 에밀 슈타이거가 말한 회감의 원리에 충실하면서도 사람살이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화자의 따뜻하고도 유머 어린 시선으로 각 인물에 세월의 깊이를 불어넣는 힘에서 오는 것이다. 기차 안에서 여러 사람의 은혜를 입어 태어났다고 해서 “多惠子”라는 이름을 얻게 된 화자의 어머니는 여러 사람의 성원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잘 살아보려 했지만, 그런 “마음은 맘에만 가득할 뿐” “빌린 돈 이자에 치여 / 만성두통에 시달”리는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화자의 어머니 다혜자씨는 “칙칙폭폭 칙칙폭폭 끓어오르는 부아를 소주 한잔으로 다스릴 줄도 알아/ “암만 그렇다캐도 문디, 베라묵을 것 몸만 건강하모 희망은 있다!””라는 말을 화자에게, 또 자신에게 건넬 줄 아는 “여장부”이다. 그의 표현대로 정말이지 “기찬, / 기-차-안 딸”(「기찬 딸」)인 것이다. 화자의 어머니 다혜자 씨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떤 어려움도 꿋꿋하게 이겨내는 생활력 강한 어머니의 모습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형상화해낸다. 외할아버지를 통해 전해 들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어머니가 태어나던 순간의 기억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구어체를 활용함으로써 형성되는 리듬감과 의성어․의태어의 사용, 적절한 대화의 삽입 등을 통해 생생하게 장면화된다. 이러한 형식적 특성은 백석 시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걸쭉한 경남 진주 사투리가 더해져 백석 시와는 또 다른 좀더 해학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우리말이 가지고 있는 반복의 미학을 잘 살리고 있는 점도 김진완 시의 장점이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시에서 잊혀져 가던 전통적인 해학의 정서를 계승해 인물과 장면에 끈끈한 화해의 힘을 불어넣는 것은 김진완 시가 가진 특별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의 시의 매력이 여기서 멈추었다면 유행을 추종하지 않는 뚝심은 있지만 새로울 건 없다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과 삶에 대한 따뜻한 애착을 보여주고 있는 그의 시는 실은 세상에 대한 아주 특별하고 날카로운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동생의 손에 백인 굳은살을 보며 남의 살이 아파서 울먹이던 시절의 자신을 기억해내는 「굳은 살」에서는 “삼팔육이고 사팔육이고 있는 것들이 더 지독해”라는 동생의 말을 빌려, 이제는 남의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는 노회한 사람들이 되어버린 “삼팔육 꼬라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거기서 “그저 거품뿐이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달라진 세상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인연설화 혹은,」에 오면 그 변화의 근원을 추적하는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주기도 한다. 100년 전 화자의 아내와 피붙이들과 전답을 강제로 빼앗고 화자를 죽이기까지 했던 악랄한 도적은 다름 아닌 ‘자본’이었음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밝혀진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다고 말해야 할” 자본은 시인의 표현대로 악연을 이어나가는 “독한 놈”인 것이다.
각기 살아 있는 개성을 지닌 사람에 대한 시인의 애정은 시집에 따뜻한 해학의 정서를 불어넣는다. 그러나 그것은 무차별적 화해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오히려 끊임없이 몸을 바꾸며 생명력을 이어가는 자본에 의해 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시인이 품게 되는 세상에 대한 근원적인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시는 리얼리즘이 폐기처분되어야 할 가치가 아니라 시인들의 각성에 의해 새롭게 실험되고 구축될 수 있는 가치임을 하나의 예로서 실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리얼리즘은 아직도 힘이 세다. 다만, 그것을 시와 접목시키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을 뿐이다.
올 1월에 출간된 이승희의 첫 시집 ꡔ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ꡕ는 386세대가 시로 쓰는 일종의 후일담이라고 할 수 있는 시집이다. 그 후일담은 벽제라는 공간을 빌려 전해진다. 벽제는 가난하던 시절 시인이 살던 곳으로 아직도 그의 누님이 혼자 노동하며 외롭게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벽제 가는 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여러 편의 시에서 이승희는 가방공장에서 일하는 누님이 살고 있는 벽제라는 장소에 대해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것은 어려서 자신을 희생하며 시인을 “업고 키웠다는 누님”(「벽제 가는 길」)에 대한 부채의식이기도 한데, 시를 읽어갈수록 그것이 전부는 아님을 짐작하게 된다. 벽제는 시인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 누님이 지금도 힘겹게 노동하며 살아가고 있는 곳이자, 민주화투쟁에 몸 바친 투사들의 화장터가 가까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벽제에 간다는 것은 좀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젊음을 바쳤던 지난 80년대의 기억을 떠올리는 행위를 동반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80년대적인 삶의 방식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진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시인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벽제 가는 길은 단지 벽제를 향해 다가가는 물리적인 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잊혀진 과거를 망각의 늪에서 끌어올리는 행위를 의미하게 된다.
가난하고 팍팍했던 그 시절을 시인은 잊고 싶을 만큼 끔찍해 하지만, 누님을 모른 척할 수 없는 것처럼 지난 시절을 잊고 살 수는 없음을 깨닫는다. 공장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소풍가자고 누님을 조르면서도 그가 누님이 사는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승희의 시에서 ‘누님’은 벽제라는 장소에 현재 살고 있는 실존하는 누님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상징적인 존재로 겹쳐 읽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누님은 이승희 시인의 누님이자 그 시절을 어렵게 살아 온 우리네 누님들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누님을 향한 시인의 발언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시인의 넋두리이자 독백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기는데, 그 때문에 누님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 벽제 화장터에 묻혀 있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들게 한다.
그것은 누님을 만나러 벽제 가는 길이 바로 시인에게 386 세대로서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지난 시간을 기억함으로써 찾는 행위와 겹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승희 시인의 자기 고백적 시 쓰기가 의미하는 바이다. 「벽제 가는 길」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일은 가난하다는 것인가.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그 순간 돌이 될 것이다.”와 같이 설의적 의문형과 명령형 어미가 쓰여 청자를 상정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화자의 독백으로 들린다.
이승희의 첫 시집에는 청승맞은 가락과 어조가 눈에 띈다. 그의 이런 어조 상의 특징을 가리켜 너무 감상적인 것이 아니냐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자기 고백적 행위이기 때문에 청승맞아 보이는 어조를 동반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어머니 같은 누님 앞에 앉아-혹은 누님의 무덤 앞에 앉아- 혼자 넋두리하듯이, 이승희 시의 화자는 가난하고 고생스럽던 지난 시절이 지나가버린 과거의 시간으로 잊혀지지 않고 현재에도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누님이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그것이 아닐까 싶다.
둥근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 그의 시에서 둥긂은 날카로움과 단단함을 품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오랜 세월 삭혀 온 날카로운 분노의 칼을 품고 있는 단단한 둥긂. 그의 시가 너그러워 보여도 슬픔을 유발하고 청승맞은 듯싶다가도 너그러운 연민의 웃음을 짓는 것은, 바로 이 단단한 둥긂, “각진 세월이 파랗게 날 세우고 있”(「돌멩이를 쥐고」)는 둥긂 때문이다. 이승희의 시는 가난했지만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이 살아 있던 지난 시대에 대한 후일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난 시절에 대한 감상적인 향수에 젖어 그 시절을 무조건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섣불리 부정하거나 모멸하지도 않는다. 이승희의 시에서 부정을 긍정으로 전환하는 힘은 가난의 체험으로부터 온다. 그의 시에서 가난은 징글징글한 과거의 기억에 머물지 않고 시인의 현재를 끊임없이 간섭해 오는 윤리적 척도가 된다. 그의 시가 타인에 대한 유대와 연민의 시선을 획득하는 것도 바로 이 가난의 체험으로부터이다. 이승희의 시에서 그것은 도덕적 한계에 갇히지 않는데, 그의 시에서 가난이 핍진한 서사를 동반하기보다는 1인칭 화자의 고백적 어조에 기대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체험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서정적 색채를 통해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밖에도 농경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해학의 정서를 계승하고 있는 고영민의 ꡔ악어ꡕ를 주목할 만하다. 고영민 시인의 세상에 대한 태도는 시집의 맨 앞에 수록되어 있는 「즐거운 소음」이라는 시에서 잘 드러난다. 한밤중에 시인은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지 / 건물 전체가 울”리는 소음을 듣는다. 매우 짜증나는 상황일 텐데, 그로부터 시인은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 / 만들기 위해 / 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주는 삶의 방식을 발견한다. 나 아닌 타인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조금씩 자기의 욕심을 줄이고 자신의 자리를 내주는 태도가 필요한 법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덜 가진 사람에게 좀더 나눠 줄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이 자발적으로 가능하기만 하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만, 대개는 힘을 동원해 빼앗고 힘이 없어 뺏길 뿐, 모두가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내주어 다른 존재가 들어설 틈을 마련해주는 일이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영민이 제시하고 희구하는 삶의 태도는 너무 이상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이런 생각이 가능한 것은 그의 현실 인식이 부족하거나 낭만적이어서라기보다는 농경문화에 익숙한 그의 천성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조화롭게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꿈꾸는 시인은 모두가 자신의 자리를 “아주 조금씩만 양보하면” 타인을 받아들여 더불어 살아가는 일이 가능함을 이 시를 통해 말하고자 한다. “저 한밤중의 소음을” “웃으면서 참는” 것이야말로 시인이 제시하는,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태도이다.
고영민의 시에는 평생을 살면서 큰소리 한번 심각하게 내지 않은 부모가 주름진 얼굴로 따뜻한 웃음을 짓고 있다. 오래 세파를 겪어 오면서 고난조차 웃음으로 넘길 줄 아는 여유를 획득하게 된 노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미소가 그의 시에는 퍼져 있다. 그는 “마르고 닳도록 외치다 / 인이 박여 생긴 생계의 운율 / 계란 한 판의 리듬”(「계란 한 판」) 같은 시를 쓰고 싶어한다. 날마다 동네에 울려 퍼지는 “계란 사세요” 소리에는 생계의 운율이 깃들어 있게 마련이다. 고영민은 자신의 시가 책상 앞에서 씌어지는 시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땀방울과 헐떡이는 목소리를 담아 씌어지는 시이기를 바란다.
그의 시는 넉넉한 웃음을 품을 줄 안다. 아마도 그것은 농경문화적 정서에 익숙한 시인에게서 체화되어 나오는 것일 게다. 세상을 따뜻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가 늘 공감을 자아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도시에서의 단절된 삶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그의 시는 자칫 안일하게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선악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재단하려 드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시는 긍정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담담히 그려 보여줌으로써 온기를 서서히 전염시키는 방법을 따를 줄 안다. 새로운 서정이라고 부르기에 고영민의 시는 아직 미흡하지만, 그럼에도 신뢰가 가는 까닭은 그가 가진 느긋함 뒤에는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섬세하게 읽어내고 요란한 포즈 없이 위로할 줄 아는 예민함과 따뜻함이 동시에 숨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밖에도 이미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중견 시인이지만, 김신용 시인이 「도장골 시편」 연작시를 통해 최근에 보여주고 있는 행보는 새로운 서정을 개척해나간다는 맥락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의 시는 도장골이라는 인적이 드문 마을의 풍경, 자연현상,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느리게 관찰함으로써 그로부터 깊이 있는 인식과 사유에 도달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들은 감성적 차원의 주관화에 그칠 위험을 안고 있는 서정성에 사색의 깊이를 부여함으로써 서정성을 확장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빠른 속도의 시대에 홀로 느리고 깊게 사유하며 생의 의미를 통찰하고자 하는 김신용 시인의 시작(詩作)은, 새로움은 발 빠른 행보만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예로서도 기억할 만한 것이다.


3. 시인의 몽상과 구원으로서의 영성(靈性)

앞서 살펴본 시인들이 리얼리즘과 서정성의 결합을 시도함으로써 새로운 서정을 개척해 나간 시인들이라면, 이 장에서 살펴볼 시인들은 자유로운 몽상을 펼쳐 보이면서도 그것이 환상을 통해 ‘지금, 여기’에 대한 환멸로 흐르지 않고 구원으로서의 영성에 이를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인들이다. 이들의 시는 ‘미래파’, 또는 ‘미래형 시’라는 범주에 포함되어 논의되기도 했지만, 특권화된 서정으로부터의 일탈을 시도하는 듯 보이면서도 궁극적으로 영성을 예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환멸을 유발하는 시들과는 다른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관점이다. 다시 말해 탈주체적이라거나 탈근대적이라는 수식어가 이들의 시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서정을 확장했다거나 ‘다른’ 서정의 길을 개척해 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좀더 사실에 근접한 판단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함께 논해 볼 만한 시인으로는 이재훈, 박판식, 김병호 등이 있다.
이재훈의 첫 시집 ꡔ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ꡕ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몽상을 통해 그가 펼쳐 보이는 공간은 말을 타고 달리는 드넓은 평야, 즉 태초의 공간으로서의 대지라고 할 수 있다. ‘말(馬)/말(言)’의 이중성을 통해 이재훈의 시는 태초의 공간을 거침없이 달리는 활달한 상상력의 현신(現身)으로서의 말(馬)과 태초의 언어로서의 말(言)을 겹쳐 놓는다. 말의 현신을 통해 태초의 언어에 다가가고자 하는 그의 시는 자기애로부터 출발하고 있지만, 근원에 다가서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낸다. 그것은 이재훈의 시에서 종교적인 연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종교시로 귀착하지 않으면서 시원에 대한 상상력을 펼쳐 보인다. 이것은 우리 시에서는 낯선 풍경으로, 이재훈 시인의 시가 기대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몽상을 통해 활력 있는 새로운 공간의 창출에 성공하고 있는 이 시인의 시도 자기 상처를 들여다보고 아파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한밤중이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나르키소스여 내 몸에 오지 마소서”(「수선화」)라는 고백을 통해 시를 쓰는 행위가 시인에게 자신의 상처와 대면하는 시간임을 짐작하게 하지만, 태초의 공간과 언어에 다가서려 하는 시원에 대한 갈망이 그의 시가 나르시시즘에 발목을 잡히지 않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적 상상력을 활용하면서도 종교시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그의 시에서 종종 순례자의 태도가 연상되는 것은 아마도 그런 까닭에서일 것이다.
박판식의 첫 시집 ꡔ밤의 피치카토ꡕ는 한 시인을 지나간 유년의 상처와 어둠과 불치와 피로의 병력으로 빼곡한 몽상의 기록이다. 그곳에는 한밤중에 흐느끼는 어머니가 근원적 상처로 새겨져 있다. 세상으로 가는 고행의 길을 “온몸으로 채찍 받으며” “타박타박”(「화남풍경」) 걸어가고 있는 어머니의 아픔과 슬픔은 시인에게로 고스란히 유전된다. 그는 슬픔과 우울과 고뇌가 자신의 천성임을 예감한다. 그것은 마치 몸의 일부가 붙어서 어쩔 수 없이 한 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샴쌍둥이의 운명을 닮았다. 지독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써봤겠지만, 결국 시인은 공존의 방법을 터득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운명애야말로 박판식 시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박판식 시인이 선택한 길이다. 이제 결과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 바로 그 과정이 시가 된다.
그는 엄살을 부리지 않고 자신에게 드리워진 운명의 어두운 그림자를 담담히 감당하면서도 만만치 않은 안간힘으로 거기에 맞선다. 그것은 박판식의 시에서 “구름의 부력”(「샴쌍둥이」), 혹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손에서 튀어 오른 “새의 반발력”(「인생의 전진」)으로 표현된다. 이 세계가, 또는 우리의 삶이 “더러운 샘”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서 “지진 같은 굉음의 푸른 줄기 하나”(「밤의 피치카토」)를 보고자 하는 의지가 그의 시에 구원의 가능성을 마련한다.
김병호는 최근에 출간된 첫 시집 ꡔ달 안을 걷다ꡕ에서 어둡고 음울한 몽상의 날개를 펼쳐 보인다. 시인의 몽상을 촉발하는 것은 어둔 밤에 떠오르는 시간이다. 검은 싹이 돋고 검은 꽃이 피는 숲에서 검고 우울한 시인의 몽상은 시작된다. “불탄 묵시록 같은 검은 숲”에는 청맹과니 마술사인 아버지와 아버지의 마지막 주문을 외워 기괴한 짐승들―“얼룩 코끼리와 혹 뗀 낙타 / 털 빠진 늙은 거위와 죽지 부러진 타조떼”―을 불러 모으는 누이, 누이를 범한 눈먼 짐승들이 살고 있고, 불탄 나무와 검은 싹과 “불길한 예언” 같은 “검은 꽃”이 피어나고, “죽은 짐승들의 피가 흐르고”(「아버지의 화원」) 있다.
생명력이 넘치는 짙은 초록의 숲이 아니라, 봄을 기억하지 못하는 숯이 된 뿌리들로 가득한, 불탄 묵시록 같은 검은 숲을 그가 몽상의 공간으로 선택한 이유는 ‘지금, 여기’에서는 더 이상 평화로운 마음의 안식처로서의 고향이나 숲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은 여전히, 임신한 아내와 잎 푸른 감나무가 교감하고, 아이의 생명의 기운이 가족과 친지들에게 태몽으로 미리 전해지는(「환한 길 하나」), 생명세계의 신비로움에 설렐 줄 아는 가슴을 가졌지만, ‘지금, 여기’는 봄에 관한 기억을 잃어버린 죽은 생명들로 가득하다. 그가 믿어왔고 또한 여전히 갈망하는 세계와 ‘지금, 여기’ 사이의 깊은 불화가 김병호의 시에 어둠과 밝음이 공존하게 한다. 그는 아이의 태동에서 “겨울 언 강 밑을 가지런히 헤엄치는 피라미의 꼬리지느러미 같은” 생명의 기미를 느끼고, 그 “기미가 이 별을 움직인다”(「幾微」)는 깨달음에 이를 줄 아는 시인이다. 그러나 이 어둡고 암울한 세계가 시인의 감수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검은 숲이라는 몽상의 공간은 그 불화의 틈새에서 발견된 것이다.
묵시록적 전망과 생명과 일상에 대한 따뜻한 감성이 충돌하는 김병호의 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멸과 냉소에 빠져들지 않는다. “오래 전에 지운 아버지의 얼굴이 / 내 아이의 얼굴에 돋는”(「강가의 墓石」) 것을 보며, 시인은 그 시간의 유장한 흐름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어두운 검은 숲의 세계가 점점 침몰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겨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김병호 시인은 “아름다운 순장의 형식으로”(「雪害林, 그 아름다운 순장의 형식으로」) 몰락의 시간을 함께 하고자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이재훈, 박판식, 김병호 등의 시는 어둡고 우울하고 검은 몽상의 시간을 펼쳐 보이지만, 최근에 유행하는 탈근대나 탈주체적 지향의 시들과는 다른 흐름을 형성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90년대적 ‘신서정’이나 최근의 ‘환상’과도 다르고 앞장에서 살펴본 리얼리즘과 서정성이 결합한 시들과도 다른 이 시인들의 행보가 주목되는 까닭은, 자기 상처를 들여다보는 데서 출발해 어두운 운명에 절망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환멸에 발목을 잡히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며 살아가는 힘을 이 시인들이 발견할 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겨우 첫 시집을 낸 시인들이지만, 유행에 쉽게 흔들리지 않으며 개성적인 시세계를 열어가 주기를 기대해 본다.


4. 오래된 미래

이 글에서 논한 내 생각은 시대착오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시대추수적인 시보다는 차라리 시대의 변화에 발 빠르게 따라가는 것을 거부하는 느린 시로부터 ‘다른’ 미래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근대라는 시기가 열릴 때 노래하는 시, 읊는 시로부터 읽는 시로의 커다란 변화가 있었듯이, 다시 한번 문학에 커다란 변화의 시기가 왔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시든 소설이든 문학의 위상 자체에도 변화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더 이상 시인이나 소설가는 지식인이자 철학자로서의 면모를 지니지 않게 되었으며 비평가라고 해서 그리 다르지도 않다. 사회에서도 더 이상 그들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여전히 신문의 칼럼이나 문화 잡지의 칼럼 한 자리를 시인이나 소설가가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관례에 의한 것일 뿐 그만큼의 사회적 존경의 표현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졌다. 그러나 문학이 새로움과 재미, 언어적 마력만으로 승부를 건다고 했을 때, 그것은 궁극적으로 만화나 영화, TV 드라마, 게임 시나리오 등과 다를 바가 없어질 것이다. 문학의 특권은 놓으려 하지 않으면서 대중문화의 상상력을 추종하거나 기존의 담론을 추종하는 것은 이미 대중문화의 상상력과 담론의 우위를 시인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이대로라면 머잖아 우리 문학은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대중문화와 서로 재미와 새로움을 견준다면, 상대적으로 시는 훨씬 불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생활인의 현실은 그렇게 많이 변한 것은 아니다.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세상을 숨 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피가 돌고 웃고 울고 분노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세상의 속도에 발맞춰 가야겠지만, 그런 세상에서 느끼는 상실감과 소외감은 당연히 더 클 수밖에 없다. 기계의 부품처럼 단자화 되어 가는 세상을 살아가며 상대적으로 느리고 공들여 읽어야 하는 문학을 선택해 읽는 사람들이 문학에 기대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에 대해서도 이제 좀더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니, 그렇게 거창할 필요까지도 없을 것이다. 시인 개개인이 느꼈을 상처가 좀더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학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과도한 짐을 질 필요도 없겠지만, 너무 개인적이고 사소한 상처에만 집착하는 것도 바람직한 미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문학의 상품화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이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문학이 열어가는 미래는 최소한의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기능을 지켜내는 데 위치해야 하는 건 아닐까? 물론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은 다양하게 나타나야 할 것이다. 개개의 시인이 지닌 개성적인 목소리들이 더 자기 색깔로 빛날 때 우리 시는 죽음이라는 눈앞의 현실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ꡔ근대문학의 종언ꡕ에서 가라따니 고진이 한 말은 우리 문학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게 한다. 그의 발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절망을 과장해서도 안 될 것이고, 그렇다고 우리의 사정을 모르는 남의 나라 비평가의 발언이라고 무시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근대 문학의 종언에 관한 그의 발언은 많은 부분 진실을 담고 있다. 다만, 그를 따라 문학의 장을 떠나 실천의 장으로 나아갈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죽음’의 현실을 인정하고 끌어안은 상태에서 우리의 고민은 다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 우리 시에 나타난 실험 과잉으로 보이기도 하는 징후를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찬양할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첫 시집으로 새로운 목소리를 얻고자 고민하고 있는 그들의 시를 죽음의 징후로 과잉 해석하고 싶지도 않다. 우리 시의 ‘르네상스’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는 판단이 세대론을 등에 업은 다소 과장된 욕망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분명히 다른 차이를 보이고 있는 이들의 시를 섬세하게 읽는 것을 거부하고 싸잡아서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 역시 또 다른 욕망을 숨기고 있기 쉬울 것이다. 우리 시가 오래 지속되어 온 낡은 이분법의 투쟁 속에 다시 휘말리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서로를 할퀴고 상처 내는 방식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으로 빛을 발하며, 신자유주의라는 또 다른 제국주의 논리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사회에서 숨죽인 개인이 되어가는 우리의 삶에, 그리고 예전의 위상과 빛을 잃은 채 좁은 영역에 갇혀 가는 우리 문학에 예측 불가의 이질적인 흐름을 만들어가길 바랄 뿐이다.
문학이 예전의 위상을 잃어가고 있는 지금, 그런 흐름이 떠나버린 독자들을 되돌리고 경직된 우리 삶에 균열을 내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까지는 솔직히 이 글에서 논하기 어렵다. 다만, 근대소설이 사회와 관계 맺는 방식과 시가 관계 맺는 방식이 다르고, 애초에 소설에 비해 장르의 성격 자체가 좀더 주관적이고 사적인 장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면에서 근대적인 장르의 바깥, 혹은 적어도 경계에 놓여 있는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던 점이 어쩌면 시의 미래를 다르게 열어갈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중에 한 길은 느리고 오래된 천착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발견하는 길로 열릴 것이다. 문학의 경우, 낡음과 새로움은 결코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가장 새로워 보이는 것이 오히려 낡은 것일 수 있고, 낡아 보이는 것이 새로운 것일 수 있는 아이러니가 가능해지는 일이 묘하게도 문학의 장에서는 가능하다. 우리 문학이 다른 미래를 열어갈 가능성 중 하나는 분명 오래된 미래를 개척하는 방향에서 열릴 것이다. 다만, 그것이 적당한 서정과 적당한 온기와 적당한 화해의 포즈에 안주하는 방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어쩌면 서정성을 포기하지 않는 길을 선택한 시인들에게는 더 치열한 싸움이 필요해 보인다. 세상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유지한다는 것이 그들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분명 치열한 싸움이기도 하다. 어느 하나가 자기를 완전히 죽이고 다른 하나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바람직한 의미의 사랑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이질적인 개성이 치열하게 부딪히며 공존하는 법을 터득해 가는 것이야말로 생명을 지닌 것이 다른 생명을 지닌 것을 일방적으로 해하지 않는 방식의 사랑이 아닐까. 이제 우리 시도 이러한 사랑법을 터득해 가야 할지 모른다. 아마도 그럴 수 있을 때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희망의 원리를 논한다는 것은 다소 무모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모한 희망이라도 품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으로 이 시대를 견뎌나갈 수 있을 것인가? 환멸에 중독된 우리를 구원해 줄 가능성은 무모해 보이는 희망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우리는 이미 여러 번 보아오지 않았던가? 무모해 보이는 길을 고집스럽게 가는 사람이 마침내 열어가는 길 아닌 길을 말이다.

이경수
199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반년간 ≪작가와비평≫ 편집동인.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저서 ꡔ불온한 상상의 축제ꡕ ꡔ한국 현대시와 반복의 미학ꡕ 등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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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적 낭만의 순간


  박수연



  시집은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로 마무리된다. 이 말은 서정시의 보편적인 발화방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재훈의 시집은 그의 실제 삶과 분리된 또다른 삶을 “나”의 정처로 삼은 말들의 저수지이다. “나”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그의 시가 고정성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시에 대한 옳은 이해가 아니다.
  말은 본디 뛰노는 것이다. 말(馬)도 그렇고 말(言語)도 그렇다. 전자의 말은 이미 만들어진 길을 가로질러 넘어다니는 실제적 생명체이며 후자의 말은 지금까지 소비된 적이 없었던 의미를 끄집어내어 세계의 비약을 이루어내는 기호이다. 이것들은 그러므로 논리화되거나 체계화되기 이전의 어떤 마음들에 대해 최초로 활성적 힘을 부여하는 존재들이라고 해야 한다. 이것이 지속적으로 움직이며 탄생하는 존재들의 최초의 이유이다. 그리고, 시의 존재 이유가 그럴 것이다. 잘 만들어진(혹은 솟아나온) 시는 세계와 최초로 만나는 존재들의 육성이다. 이렇다는 점에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는 시적 계기에 대한 보고서이다. 이 점을 알아보기 위해 몇 개의 계단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재훈은 시적 정황들에 대한 낭만적 구성의 재능을 이 시집 하나로 일약 보여준다. 이는 특히 시의 언어들을 수려하게 배열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최근의 젊은 시인들이 시행과 시행 사이의 간격을 넓게 벌려 놓고 일반적인 언어 논리로 규정되지 않는 의미들을 다차원적으로 부려놓는다는 사실에 대해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낯선 언어들 때문에 일견 난해해보이기도 하는 이런 경향들에 대해서는 되도록이면 상식적인 선에서 그 작업의 의미를 파악해보는 일이 필요하다. 일반론의 차원에서 접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작업의 특이성 또한 소통되기 힘든 개체성으로만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별체들의 특이성이란 일반성의 차원 위에서만 작동하는 힘의 운동으로 구성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젊은 시인들의 독특한 언어사용 방식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혹은 성공한 것이든 실패한 것이든, 기존의 언어 체계를 교란시킴으로써 새 세계의 환기에 도달하려는 의도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시의 무게 있는 경향은, 90년대 이후 인문사회학계의 언어학적 문제설정과 강하게 연동되면서 시적 언어의 의미와 존재방식에 대해 발본적으로 질문하도록 하는 효과를 갖는다. 이것을 의사소통의 난항이라는 이유를 들어 평가절하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닐 것이다. 모든 언어 사용 방식에는 각각 제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 새로운 언어 사용이 얼마나 애초의 의도를 실현하고 있는가 하는 점임에 틀림없다. 이재훈의 시는 그런데 그 새로운 시의 경향에서 일정하게 비켜 서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 모습이 낭만적이라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시의 주제면에서 도드라진다.

  맨발로 유리 밟는 소리를 듣는다. 유리의 머리가 내 발바닥을 찢는 수런거림을 듣는다. 수행자처럼 온 땅을 모두 밟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땅은 너무 넓어. 내 온기가 기댈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 그 사이의 위태로운 희망, 그리고 낯선 꿈들뿐.

  내가 밟는 유리의 온기를 기억하고 싶었다. 그 뜨거운 감촉. 두꺼운 군살을 비집고 환한 몸으로 날 찾아오는 신비. 유리를 밟으며 축제를 연다. 붉은 포도주가 흐르는 식탁. 얼굴을 분칠을 하고, 혀에 피어싱을 하고, 히피처럼 연기를 피워 올린다. 치렁치렁한 푸른 옷을 입고, 방 안을 빙빙 돈다. 사각사각 유리가 몸 안에서 춤을 춘다. 두려움은 없다. 정작 두려움은 예언자의 눈, 인디언의 귀, 언 고기를 사각거리는 알래스카의 몽골리안을 그리워하는 것. 生의 분노도 잊은 채, 태평하게 먼 이방의 전설을 말하는 내 입술.

  맨발로 유리 밟는 소리를 듣는다. 유리가 내 몸을 돌고 돌아 검붉은 내장을 모두 만난다면, 늦은 밤 가냘프게 흔들리는 마음까지 싹둑 잘라버린다면, 나는 백치가 되리. 내 몸이 된 유리. 너의 촉감밖에, 소리밖에 모르므로 나는 불구다. 저기 저쪽, 나처럼 맨발로 유리 밟으러 가는 젊음들. 땡볕 아래 꽃들이 붉은 햇살을 게워내고 있다. 절정이다.
                                     ―「순례」 전문

  삶이 고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만 그 고행을 실체로 감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령, 유리를 밟는 소리는 그것의 감각만으로도 소름끼치는 반응을 이끌어내게 되는 것이다. 이 감각은 그러나 대상에 직핍해 들어가도록 하는 매개물이기도 한데, 이재훈에게는 그것이 “희망” “전설” “절정”의 맥락 아래 배열된다. 이를테면, 끔찍한 기억의 감각은 절정에 도달하는 교두보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감각의 기억으로부터 시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도록 하자. 모든 시에 대한 것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어떤 시는 애초에 세계의 부재와 결여에 대한 기록으로 출발한다. 언어가 세계의 압도적인 숭고함에 대면하는 인간의 보잘것없는 행위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또한 인간은 그 언어에 주술성을 부여함으로써 삶의 초라함을 벗어나려 한 존재였다. 이 벗어남의 행위가 은유를 구성할 때 표현될 수 없는 세계가 언어에 포함될 수 있다고 믿은 것도 언어를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요컨대 감각은 여전히 세계의 두려움에 기인하는 고통이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의미가 은유적 확장에 의해 언어에 도입된다. 세상은 여전히 압도적인데도 그 세상을 표현하려 하는 언어가 위로의 힘을 부릴 줄 아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의 은유는 무엇보다도 대상의 감각에 대한 언어적 표현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시는 생각하기 이전에 듣고 보는 행위이며 감각하고 지각하는 행위이다. 인식은 그 이후의 문제이다.
  「순례」는 “유리 밟는 소리”의 끔찍한 감각에서 출발하여 “절정이다”라는 간명한 진술로 끝난다. 시는 이를테면 감각으로 시작되고 인식으로 마무리된다. 이렇다는 의미에서 이 시는 시적 탄생의 보편적 경로를 개별적 시의 계기와 겹쳐 놓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감각에서 인식으로 나아가는 통로의 기본적인 동력은 “위태로운 희망” “낯선 꿈” “이방의 전설”을 거쳐 “저기 저쪽, 나처럼 맨발로 유리 밟으러 가는 젊음들”로 표상되는, 현실 저편에 대한 간절한 희구이다. 희구 이전에는 생의 고통을 시적 탐구의 미려한 정황으로 환원한다는 사실도 지적해두기로 하자. 언어도 그럴뿐더러 정황도 마찬가지인 이 미려함이야말로 이재훈의 시집 전체에 펼쳐져서 그의 시적 기율을 알게 해주는 요인인데, 「순례」는 그것을 “땡볕아래 꽃들이 붉은 햇살을 게워내고 있다”는 진술로 압축한다. 고통의 미적 전환이라고 할 만한 움직임이 여기에는 있다.
  이 전환이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를 낭만적 유미주의의 육성으로 읽도록 한다. 시편들의 대부분은 현실 저편에 대한 지향을 보여주며 그 틈틈이 낭만적 지향을 촉발시키는 비정한 현실이 배경처럼 깔린다. 「빌딩나무 숲」이나 「마라의 오아시스」 「거리를 훔치다」에서 표현되는 삶은 도시의 거리에서 상처받은 채 숨가빠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존재의 비망록이다. 이것이 배경이기 때문에 현실 저편은 열렬히 탐구되거나 지향되어야 하는 세계가 될 것이다. 그 세계의 온전성이 이재훈 시의 형식적 정결성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러므로 감각적 고통을 가져다주는 현실을 낭만적 극복의 미적 정결성으로 바꾸어 놓는 전형적인 예라 할 만하다.
  현실의 결여를 넘어서도록 하는 언어적 탐구가 아름다움의 정결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현실의 고통을 시로 보상받으려 한다는 사실을 뜻할 것이다. 이것은 따라서 현재적 고통의 대가를 미래적 보상으로 유예시킨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래로 유예된 보상이란 그러나 시의 내부 혹은 시인의 내면에서만 근거가 확보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시인의 외부에 있는 바로 그 결여된 현실이란 실제로는 어떤 것도 보증해 줄 수 없는 부정성의 세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시인이 택할 수 있는 것이 내면으로의 침잠이며 내면의 광휘에 녹아드는 일이다. 이재훈의 시가 현실 너머의 저편을 지향하되 그 지향운동의 장소를 나르시스적 탐구로 채워넣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수선화」는 지금 이 순간의 결여와 부재를 “한밤중”이라는 충만한 시간의 생성으로 전환시키고 보상받는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아아, 아 에코가 메아리치네, 아름다운 내 몸, 거울에 비추어, 아아아 에코가 흐느끼네, 내 몸이 하분하분 물기에 젖네”(「수선화」)라는 말로 부각시키는 자기애는 결국 자신의 내부로 침잠하는 사건의 구체화에 답한다.
  시인에게 내부로 침잠하는 사건이란 동시에 시 내부로의 집중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재훈 시의 미려함은 여기에서 또하나의 계기를 부여받는다. 이 계기는 언어에 대한 집중이기도 할 터인데, 그것이 그의 시 속에서 고통과 함께 하여 지속적 생성의 국면에 대응하는 “말”의 이중 의미이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는, 어찌되었든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시인의 삶에 대한 보고서이다. “말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뱃속에서 말의 새끼들이 뛰어나온다”는 진술이 말(馬)의 생태를 지시한다면 “밤이되면 나는 시를 쓴다/거리의 곤고함에 대해/꽃이 침묵하며 피는 이유에 대해/아는 척 쓰다가 말다가 결국/”말은 태양을 잉태했다“고 쓰다가”는 또다른 말(言語)의 생태를 알려준다. 이 두 가지 말의 생태가 모두 “뱃속”과 “잉태”라는 언어를 이용해 그 생태의 정황적 요인을 환기한다는 점과 관련시켜 보면, 이재훈에게 시란 내부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에 대한 언어적 집중이라고 할 만하다. 이를테면, 시인은 내부에 집중하면서 사건을 펼치는 언어의 주인이다. 이것을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비난할 근거는 없다. 오히려 이재훈의 시에서는,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시와 비교해본다면, 언어적 낙관주의라고 할 만한 것이 눈에 띄는데 이는 그의 시가 그의 상상세계에 대한 분명한 은유적 효과를 거느리고 있다는 점에서 도드라진다. 이 은유적 기율이야말로 그의 시에 낭만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의 시는 세계에 대해 어떤 순간의 압축적 동일시를 표현하는, 최근의 시단에서는 흔치 않은, 영역을 건설하였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도 그렇다.  
 
  흰 눈을 만나기 위해
  폭염을 견디었는지 모른다
  먼 기억으로 터져나오는 울음소리,
  도시의 거리와 거리, 사람과 사람이
  서로 엉켜 태연히 입 맞추는 소리,
  이 땅은 풀벌레 소리도 서러움이다
  마음이 없는 몸을 질질 끌고
  미술관으로 가서 꽃 가득한 정물화를 본다
  지지 않는 꽃, 수없이 그리워하고 약속했던 꽃
  나는 그림 속의 화려한 상징에만 골몰했다
  마음이 없는 몸을 질질 끌고
  시위대를 지나고 학교를 지나고
  걸음을 멈추게 했던 대현 전광판을 지난다
  역사도 없고 분노도 없는 권태로운 시간을
  홑날로 벼리는 젊은 어깨의 그림자
  그림자들이 서로 만나 어둠을 만들고
  어둠을 지키기 위해 네온사인이 하나 둘 켜진다
  어제의 일이 까마득하다
  하룻밤 새
  이마 위에 주름이 깊어 눈이 감기고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차가운 결정(結晶),
  그 위에 금빛 새가 발자국을 찍고
  푸드득 날아오른다
         ―「결별의 노래-성배(聖杯)를 찾아서」 전문

  “울음소리”가 있고 “서러움”이 있는 반면에 “마음이 없는 몸”이 있고 “권태로운 시간”이 있다. 그러니까, 심한 정서적 굴곡이 한꺼번에 배열되어 있는 세계가 눈앞에 있다면, 이것은 시인의 내부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의 파노라마에 다름아닐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 역설적으로,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솟아오른다. 그것은 시의 마지막 네 행에서 표현되는 것과 같은 신생의 사건이다. 이것이 결정적인 것은 비정한 세계의 결정(結晶)인 눈보라가 금빛 새의 비상으로 전환되는 일이 갑자기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재훈의 시적 은유는 이런 방식으로 세계의 파노라마 속에 배열된 대상들을 한순간 압축하는 동일시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는 이렇게 삶의 비루함 이면을 순간의 황홀함으로 역전시키는 내면의 보고서를 만들어낸다. 이 보고서는 근래에 보기 힘든 낭만적 정신의 고투라고 할 만하다.

- 현대시, 2005년 1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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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후예
― 이재훈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김태형
(시인)



천일 동안의 무수한 밤이 이어지고 또 하루의 새로운 시작이 거듭되는 곳에서 “잃어버린 기억”(「시인 세헤라자데」)을 하나하나 더듬어나가는 이가 있다. 물의 기억 속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펄떡펄떡” 고통스러운 몸을 꿈틀거리는 자의 밤은 격렬하다. 하루하루 또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새겨야 할 새로운 기억들이 끝없이 반복되거나 변주되고 아득한 후렴구를 거느리면서 숨결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노래가 비롯된다. 섣불리 노래가 끝나서는 안 된다. “완벽한 미완성”이 되어야 한다. 아직 날이 밝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의해 사로잡힌 자, 그래서 “불 켜진 창”(「까마귀 속에 나의 시간이 있다」)에 갇혀 있는 자의 노래는 밤의 언어로 가득하다. 날이 밝으면 밤하늘 너머 시간의 허방을 날아오르던 새의 죽음을 다시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 좌절의 연대기가 첫 장을 열기도 전에 “모든 시간은 무너지고”(「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밤이 되어서야 먼 기억의 세계로 떠나는 초시간성의 상상 세계가 시인의 목숨을 담보로 펼쳐진다. 그 환한 밤의 시작을 알리듯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방안을 들여다본다. 까마귀는 어둠 속에서 태어난 태양의 새다. 어둠의 휘장을 펄럭이며 낮의 일광 속을 날아다녀야 하지만, 이 태양의 새는 정작 밝은 빛 속에 깃을 치지 못하고 밤의 창가에 내려앉는 추방된 자의 비애를 삼킨다. 이 까마귀와 마주하는 시인은 어딘가 까마귀가 날아왔을 또 다른 세계를 들여다본다.

그곳에는 황소가 억센 뿔을 세우고 있으며 긴 허리를 둥글게 구부려 가볍게 숲속을 뛰어다니는 사슴의 무리로 가득하다. 밤의 동굴 속에는 오래 된 벽화에서 이제 막 빠져나온 원시의 시간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어둠의 자궁이 활짝 벌어진 동굴의 깊은 곳으로부터 대초원이 시작되고 야생의 거친 말 위에 올라탄 추장의 노래 소리가 북소리처럼 웅장하게 울려 퍼진다. 급기야 이 말은 도시의 음습한 거리까지 뛰쳐나와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한다.

동굴은 “불 켜진 창”을 가진 유폐된 자의 거처이며, 동시에 “말과 나는 한몸”(「사수자리」)이라고 인식하는 황홀한 꿈의 자리이다. “쭈글쭈글해진 어머니 배”로 불려지는, 바로 시인이 태어난 성소이다. 시인은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지상에 유폐되기 이전의 “그 불안한 시간”을 다시 살아보고자 한다. 별빛을 통해 나를 인식할 수 있었던 곳,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허공을 양해 활을 쏘아 올리던 그곳으로 시인은 귀를 바짝 갖다 댄다.

그래서 시집 곳곳에는 종교적 인유(引喩)나 자기동일성의 신화적 재현, 탈역사적인 신비로운 상상으로 가득하다. 혼돈(Babel)의 탯줄을 끊고 첫 울음 울던 태초의 풍경은 도시의 빌딩 속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곳엔 소리가 없다”(「빌딩나무 숲」). “어머니, 하고 부르면 침묵만 되돌아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목소리만 공허하게 울리는 도시의 중심에는 콘크리트 빌딩나무가 자라고 있을 뿐이다. 울림도 없이 되돌아오고야 마는 자기중심적인 세계야말로 바로 ‘폐허’를 재생산하는 곳임에 틀림없다. 그에게 남은 믿음은 ‘현대’라는 맹목적인 종교를 거부하는 이교도의 삶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현대’를 무작정 이탈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를 찾아가는 일은 자기 목소리에 매달리는 일이 아니라는 도시거주자의 꽤나 의미심한 전언을 시인은 남겨놓는다.

나르키소스처럼 폐허가 된 죽음의 자리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다. 자기의 목소리만 자기 안에 울려 퍼지는 빌딩나무의 완강한 숲을 지나 급기야 자기 몸에 수선화의 꽃씨가 내려앉는 밤의 긴 침묵을 마주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 도시를 한순간 부정해버릴 방법이 없다.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그가 찾아가야 할 성소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거침없이 내달릴 초원도, 언덕을 하나 넘으면 펼쳐질 시원도 그에게는 멀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그의 순례는 제프리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처럼 위트와 해학, 무용담으로 넘쳐나는 이야기 사슬을 엮어나가지 않는다. “건물과 건물 사이, 그 사이의 위태로운 희망, 그리고 낯선 꿈”(「순례」)을 찾아가는 순례의 여정은 도둑이 들끓고, 마차 바퀴가 빠지는 진흙탕의 먼 길이 아니라 “방 안을 빙빙” 도는 제의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질베르 뒤랑의 말을 풀어내면, 제의는 부재(不在)를 재현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상징 자체를 새로운 구체적인 의미로 생성하는 독자성을 가진다. “맨발로 유리 밟는 소리”를 들으며 그 유리조각이 살을 찢고 흘러내리는 피로써 거행되는 밤의 제의는 “불 켜진 창”에 유폐된 자의 유일한 몸짓이다. 역설적이게도 자기가 발 딛고 있는 도시 문명의 현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일탈의 꿈을 이루려는 행위이다.

섣불리 자연에 귀의하지 않고, 작위적인 환몽 속에서 현실을 되레 왜곡하는 거짓된 부정의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대상을 왜곡하면서까지 이루어지는 부정의 방식은 또 다른 부정을 부를 뿐이다. 진정한 부정의 발화는 자기 목소리만을 듣는 닫힌 귀를 갖고 있지 않다. 새로운 말은 그것을 다시 부정하는 순간 태어난다.

생명의 샘(「마라의 오아시스」), 마른 목을 축여줄 정원의 샘(「공중정원2」)을 찾아가기 위해서 불을 타고 오르거나 허공에 발을 내미는(「공중정원3」) 이 영원한 꿈의 시민(市民)은 먼 길을 걸어가는 그 어떤 순례자의 고단한 하루보다 긴, ‘무너진 시간’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 새로운 공중의 시민은 금빛 새가 날아오르는(「결별의 노래」) 곳으로 우리를 이끌며 잃어버린 노래를 다시 기억해내어 들려줄 것이다. 그가 열어 보여주는 최초의 말들을 여전히 나는 어둔 귀로 더듬더듬 따라가게 될 것이다. 신성한 별들이 떨어지는 쭈글쭈글한 동굴 속의 어둠을 향해 누군가 또 바짝 귀를 대어볼 것이다.

(『시평』, 2006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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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호흡과 비전
-이재훈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손진은(시인, 경주대 교수)



  1.

  최근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출현으로 한국 시의 지형도가 재편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젊은 시인이자 평론가인 권혁웅이 ‘미래파’라고 명명한 이 경향은 한국시의 물줄기에 새로움으로 수혈될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 문학판의 변화로까지 어어질 수 있는 문화적 감성에서 배태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다만 이들의 움직임이 60년대의 김수영, 80년대의 이성복, 황지우가 감당했던 에너지로까지 승화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고서 말이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문단은 그 주류적 흐름으로 ‘생태시’를 꼽는 데 주저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생태시의 부상에는 인간우위적 가치관의 붕괴와 대안을 마련하려는 입지점이 놓여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생태시, 에코페미니즘적 경향은 이제는 별다른 문제의식도 없이 삶의 체험이나 철학도 없이 누구나가 시도하고 있는 시적 관행으로 굳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90년대부터 큰 흐름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여 이제 완연히 자리를 잡은 서정시 본연의 위력과 광휘를 보여주는, ‘부드러운 서정’이리고 일컬을 수 있는 시적 맥락이 있다. 그런 시인들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야 없겠지만, 여기에 포괄될 수 있는 시인들은 대체로 나희덕, 장석남, 이정록, 박형준, 문태준, 이윤학 등이고, 이전 세대들인 천양희, 이시영 등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겠다. 이들 세계와는 변별되는 지점에서 존재의 깊이와 서정을 보여주는 시인들이 있다. 김명인, 이성복, 오규원, 최하림, 김사인, 고재종, 조용미, 김기택, 송찬호, 최정례 등의 시인들이다. 이들은 많은 시인들이 생태시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그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내면 성찰이라 존재의 깊이 쪽으로 물꼬를 틀어 한국시가 철학과 사상을 내면에 거느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흔해빠진 비유를 통해 흔해빠진 우리들 삶의 모습, 그 허망과 음험함을 비극적 정서로 탁월하게 드러낸 이성복의 『아, 입이 없는 것들』 같은 시는 한국시가 이를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지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과거 민중문학이 가지고 있는 현실성은 담지하되 부족한 부분이었던 깊이를 확보하는 시적인 경향으로 김신용, 이기인 등의 현장을 다룬 시들을 꼽고 있는 평자들도 있다.    
  그러나 ‘미래파’들은 이런 문화적 지형도를 바꾸려하고 있다. 그들은 세계와 자아의 행복한 일치를 기조로 하는 서정시 본연의 문법이 못마땅한 것이다. 이성과 관념 이전의 원초적인 시어로, 이 세대의 문화감각으로, 이미지의 분열적 분방함과 해체적 언술로 시단의 앙팡테리블로 불려지길 희망하고 있다.


  2.
 
  이재훈도 그런 일군의 무리들에 해당하는 시인이다. 그 역시 무의식과 환상과 분열적 내면의 풍경을 다루는 사유의 혼종성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이들 시인들과의 변별점은 이재훈이 시원의 언어를 향한 순례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그는 기원에 대한 탐구로 시작의 실마리를 연다. 이 글은 우리 시단의 새 목소리라고 명명되는 이재훈의 시가 어떤 지점을 거느리며 자신의 세계관을 열어가고 있는가를 고찰한 기록이다.

잠든 말, 묵상도 없는 말들이 벽에 붙어 있다 너의 소리를 들으려고 널 만진다
(……)
말은 내게 뱃속을 열어 보여준다
건강한 줄기를 먹고 자란 말
(……)
아프다, 말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뱃속에서 말의 새끼들이 뛰어나온다
(……)
내 목을 자르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부분

  이성적인 사유체계로 길든 독법으로는 쉽사리 읽을 수 없는 시이다. 어떤 점에서 이 시는 결여와 부재의 언어 사이에서 최초로 태어나는 말에 대한 이재훈의 사유를 보여준다. 보이는 질서와 체계는 이미 없다. “모든 시간은 무너지고” 주체가 기댈 “기억의 언덕도 무너지고” 없다. 이재훈은 기원이 사라진 시대에서 말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 지난한 작업을 자신의 시 창작의 첫 번째 질료로 삼고 있다. 여기서 말은 말(馬)이면서 말(言)이고, 또한 그 가치의 신념체계를 넘어선다. 그러기에 발굽 소리가 들리고 벽에 붙어 있기도 하며, 그것으로 한정되지는 않는다. 만지면 황소가 되고, 사슴이 되고, 초월을 가로지르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탄 추장이 된다. 마침내 그 뱃속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말하자면 이재훈에게 ‘말’은 말이라는 시니피앙에 대한 수많은 인접혼란을 겪어 새로이 태어나는 어떤 힘이요, 빛이나 공기 입자의 산란처럼 의미의 비좁은 틈을 뚫고, 그 사유의 혼종성 속에 태어나는 생명이다. 이는 소통을 위주로 하는 언어 체계에 대한 신선한 위반이요, 경계 넓히기이다. 그러나 이재훈은 의미 없는 교란에 머물지는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환기의 표지로 언어를 이끌어간다. 마침내 자신의 목마저 자르고 자신의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의 추장이 된다. 이는 이재훈의 시가 이성보다는 감각과 정서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재훈의 이런 시적 경험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그가 “거리의 곤고함”으로 표상되는 이 시대의 삶과 문화를 외면하지 않고 있다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거리의 곤고함이 그를 이러한 세계로 이끈 내적 동인이 되는 것이다. 시집의 첫 작품이 「사수자리」라는 사실은 이런 그의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거니와 ‘평원을 떠난 새’, ‘기적’, ‘공중정원’, ‘도시의 물관’, ‘마라의 오아시스’ 등 그의 시 제목이 환기하는 정서는 환멸이라는 이름으로 명명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정치문화적 함의를 짐작하게 하는 다양한 기호들로 가득차 있다. 말하자면 ‘사수자리’, ‘마라’와 같은 천문학적인, 성서적인 공간의 인유는 그가 이 시대를 바라보는 표지가 환멸이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한다. “아무도 면회 오지 않는 숲에서/나는 이교도가 되었다”(「빌딩나무 숲」)가 시인은 말한다.

밤이 되면 말을 타러 갔었지
잠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깊은 동굴이었지
(……)
나는 편자를 갈고 있었지
등불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같았지
빛이 어둠을 갉아먹기 시작할 때
하늘에서 별이 하나씩 떨어졌지
말이 내 앞에 와서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지
(……)
열두 밤이 지나자 황도십이궁의 한 모퉁이에
나는 떨어졌지

새벽녘 어머니가 내 머리칼을 만지고 있었지
나는 쭈글해진 어머니의 배에 귀를 갖다댔지
말발굽 소리와 활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지
그 큰 어둠을 품고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가셨지
나는 어머니가 믿는 神의 안부가 궁금해졌지
-「사수자리」부분

  화자인 나는 사수로 설정되어 있다. 이 사수는 떨어지는 별에 맞을까 두려워 말을 타고 등불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심정으로 가고 있다. 이는 꺼지지 않는 촛불의 위태로움을 말 위에서 견디는 삶이다. 말하자면 묵시론적인 비전과 상황으로 환치되어 있다.   아울러 이 모든 상황이 밤과 잠이라는 설정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잠이라는 게 무엇인가. 현실에서 비전을 가질 수 없을 때 육체의 호흡에 기대는 형식이 아닌가. 현실에 억압과 환멸이 밤과 잠을 부르게 했지만, 이 밤과 잠의 세계는 육체가 가동하는 통로가 된다. 열두 밤이 지나자 황도십이궁에 떨어진 ‘나’가 쭈글해진 어머니의 배에서 말발굽 소리와 활이 날아가는 소리를 듣는 것은 이 같은 맥락이다. 말하자면 이재훈의 시에서 육체는 모든 비전을 함의하는 영혼의 형식이면서 우주의 무한한 팽창과 맞먹는 힘을 가진 것이다. 황도십이궁에서 화살을 쏘던 시적 자아의 잠과 꿈의 무한배경은 기실 어머니의 쭈글해진 배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재훈의 시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무한팽창과 축소를 거듭하는 시적 연동방식이며 육체 속에 담겼다가 새로운 길을 찾아나가는 시적 행로이다. 우주의 무한팽창과 축소를 육체의 호흡의 수준으로 규정하는 시인의 개성은 예술지상주의적 인식에 가깝다. 또 위의 시에서 보았듯이 나의 육체만이 그 통로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육체의 기반은 넓기까지 하다. 물론 위의 시에서의 육체는 생명의 통로가 되었던 모체이므로 그 모성성, 여성성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이재훈의 시는 페미니즘의 좁은 영역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이재훈에게 육체는 자신을 분할하여 세계로 진입하는 통로(“내 목을 자리고/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이면서도 끊임없이 소생하는 질료이다. 이는 맥베스의 “눈앞의 이것이 나인가”라는 화두에서처럼 규정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기호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사도 바울의 말처럼 끊임없는 갱신을 향한 고투의 흔적으로도 독법이 가능하게 한다. 이재훈에게 예술은 정신의 표현이자 육체의 조화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이재훈에게 육체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넘어서고, 교란하며 갱신하는 에너지가 된다. 이는 ‘나’를 포괄하는 ‘개인으로 세계를 끌어안으려 하는 기획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일식」은 이재훈의 ’최초의 말‘이 가지는 위력과 육체의 호흡을 보여주는 시편이다.

태양이여,
나는 이 큰 우주를 목놓아 불러본 적 없다
용기도 없이 컴컴한 방에 앉아
창틀에 놓인 꽃병들만 바라봤다
어느 날 나는
태양이여, 불러보고 싶었다
늘 곁불만 쬐며 속으로 옹알거리기만 하며
이 엄살의 통각(痛覺)을 갖게 되었다
태양이여, 부른 순간
내 항문으로 뱀이 숯진 머리를 들이밀고 왔다
온몸이 뜨거워져서 태양에게 다가가도
뜨겁지 않았다
불타지 않았다

뱀이 태양을 갉아먹을 때,
하나의 꿈틀거리는 숨이 우주를 갉아먹을 때,
네 소멸이 위대한 미학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어느새 뱀의 뱃속에 태양이 들어가 있다
고요 가운데 입을 열고 들어가
한 몸이 된
뜨거운 잉태

나는 큰 소리로 태양이여, 불렀다
뱃속에서 울리는 뜨거운 공명

모든 사위는 어둠이 되었다
-「일식」 전문

  “엄살의 통각”만이라고 말하는 시적 화자의 수줍음을 보아라. 그러면서도 이 호명에 육체와 세계가 합치는 순간의 뜨거운 감각적 파동과 전일적 세계의 움직임을 보라. “컴컴한 방에 앉아” 있을 때의 자아와 호명하는 순간의 자아는 차이가 크다. 부르는 순간 세계는 내게로 온다. 이 변화와 실감 속에 언어의 사제로서의 시인이 가지는 주술성이 놓인다. 이재훈에게 언어는 기존의 가치체계를 허물어버리는 도구이면서 육체와 세계를 하나로 이어주는 통로가 된다. “태양이여, 부르는 순간/내 항문으로 뱀이 숯진 머리를 들이밀고 왔다”고 하지 않는가. 서정주의 「화사」에서 “스며라 배암” 할 때 우리는 순네와의 성행위를 떠올릴 수밖에 없듯 이재훈의 시에서 우리는 세계가 내 육체에게로 와서 스며든다는 실감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서정주의 그 행위는 육체적 충동에 무게 중심이 놓여 있는 심리적 수준이라 할 수 있지만, 이재훈에게 세계에 대한 발화는 실상 통각의 실감으로 육체에 그려지는 것이라서 호명의 순간에 나의 육체는 완벽한 우주의 통로가 되고 우주 그 자체가 되어 달라붙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전일적 감각의 합치를 시인은 “뜨겁지 않았다”, “불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거니와,  이 합치를 말하는 데 뱀만한 상징이 또 어디 있겠는가. 세계를 호명하고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이 합치의 순간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2연에서 육체의 호흡의 위력을 보여준다. “꿈틀거리는 숨이 우주를 갉아먹”어, 우주를 소멸시켜버리고, 내 기운(뱀) 속에 태양이 들어앉아 버리는, 달리 말하면 우주를 내 육체 속에 가두어버리는 주술을 행하게 된다. 혈액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들숨과 날숨을 거듭하는 육체의 호흡과 고동은 우주를 육체의 힘의 조화로까지 만들어버린다. 더욱 언어의 주술과 육체의 호흡을 통해 육체는 우주를 새롭게 잉태할 수 있게 되고 사위는 어둠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언어의 탄생과 육체의 호흡의 비전을 획득한 이재훈 시의 특장을 살필 수 있었거니와, 여전히 눈여겨 볼 것은 “뱃속에서 울리는 뜨거운 공명”이라는 시인의 발화이다. 기존의 시인들이 태양을 신화적 비유로 끌어다 쓰거나 관찰자적 입장을 견지하는 데 반하여, 이재훈의 육체는 세계를 끌어안아 버리는 통로가 된다. 말하자면 일식이라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가 동원되는 수사의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3.

   이재훈에게 육체는 “(그 속에) 한밤중이 되면 수선화가” 피고 (「수선화」)  하분하분 물기에 젖다가, “잘 익은 돌을 낳”고(「예쁜 똥」), 수레바퀴가 지나가는 통로가 되며(「수레바퀴 지나간 길」), 마침내 그 숨으로 우주를 삼키기까지 하는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재훈은 이성과 관념 이전의 원초적인 ‘말’들의 회복으로 개성의 터전을 마련하고, 이를 육체의 호흡이라는 비전을 통해 결정시킨 우리 시단의 새 목소리다. 문학적 감성의 변화를 보여주면서도 분열적 내면의 풍경 속으로만 탐닉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슐라르와 신화적 상상력을 자신의 몸으로 체화해내면서 자신의 어법으로 완성해가고 있다. 무엇보다 그의 육체의 호흡의 낭만성이 도시의 우수에서 발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성의 거점을 마련하고 있고, 우리 시단의 형이상학적 밀도와 부피를 수혈해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재훈을 비롯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문화적, 문학적 감성이 깊이를 더해 우리 시사의 새로운 광맥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 [시와세계], 2005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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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숲으로 망명한 서정시


임준서
(문학평론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고들 한다. 확실히 지금은 산문의 시대이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삶의 터전이 속속들이 도시화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삶은 콘크리트에 점령당한 지 이미 오래다. 도시는 우리가 나고 자라 묻히는 거대한 요람이자 무덤이며, 우리의 정신을 딱딱하게 양생하는 공장이다. 곧게 뻗은 마천루와 아스팔트가 말해주듯 도시는 직선적 사고를 강요한다. 도시는 과학의 힘으로 자연을 극복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수학적인 산문언어가 발달하고 감각적인 운문언어는 퇴화하기 마련이다. 자연을 영적교감의 대상으로 삼는 운문의 곡선적 사고는 힘을 잃는다.
산문의 독주는도시의 난개발과도 같이 위험하다. 난개발이 녹지의 소멸을 불러 생태계를 파괴하듯 산문의 범람은 정신의 녹지를 빼앗아 우리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서정시는 우리가 보존해야 할 정신의 그린벨트와 같다. 그렇다고 산문화된 현실, 도시화된 현실을 삶의식에 민첩하게 반응하는 새로운 서정이 필요하다.

(중략)

이재훈의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는 말울음 소리가 진동한다. 이재훈 시의 고향은 초원이다. 그는 말을 타고 광활한 초원을 달리는 유목민의 후예를 꿈꾼다. 시인을 사로잡는 것은 “말이 끄는 수레 소리”와 “대장간에서 들려오는 풀무질 소리” “뻣뻣해진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말발굽 소리”(수레바퀴 지나간 길])이다. 그에게 시쓰기는 곧 야생을 향한 질주이며, 원시적인 힘을 되찾는 주술이다. 그런 맥락에서 시인은 특별히 ‘말’의 이미지를 애호한다. 그 이유는, 말이 야생의 삶과 원시적인 힘을 환기시키는 가장 역동적인 이미지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시인은 왜 그토록 야생의 삶과 원시적인 생명력에 집착하는가. 그것은, 도시의 일상이 시인을 무기력하고 무감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도시의 삶이 시인의 감각을 마비시키면 시킬수록 그는 더욱더 초원을 꿈꾼다. 그런 점에서 이재훈 시가 보여주는 초원의 상상력은 근본적으로 도시의 무기력한 일상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의 시는 이러한 정황을 잘 보여준다.

그 숲엔 풍경이 없다
나무와 새 온갖 풀벌레가 가득하지만
그들은 소리내지 않는다
사방을 둘러봐도 제자리만 지키고 선
가장 그럴듯한 포즈의 마네킹들
그곳엔 소리가 없다
어머니, 하고 부르면 침묵만 되돌아와
귓가엔 내 목소리만 자욱이 앉아 있다
숲속에서 숨이 막혀 한참을 내달았다
소리를 지르고 실컷 울고는,
그루터기에 앉아 부풀어 오르는 힘줄들을 만졌다
나는 나를 만지고 한없이 그리워져
나무에게로 간다
새에게 말을 건다
자애는 폐허, 라고 되뇌이는 시간들
내 힘줄을 내가 끊어도 고통스럽지 않은 곳,
그곳엔 아무도 없다
있다면, 침묵이 있다
아무도 면회오지 않는 숲에서
나는 이교도가 되었다
― [빌딩나무 숲] 전문

풍경도,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빌딩숲은 생명을 잃은 공간이다. 그 속에서는 인간 역시 “마네킹”처럼 정물이 되어 아무도 서로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다. 서로 소통하지 못하기에 “그곳엔 아무도 없다.” 화자는 그 삭막함이 두려워 숲을 내달리고 소리를 지르고 울어도 보지만 숲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빌딩숲이 야기하는 소외의 감정은 급기야 “나는 나를 만지고 한없이 그리워”하는 도착된 자애를 낳지만, 그조차도 “내 힘줄을 내가 끊어도 고통스럽지 않”을 정도로 화자를 무감각하게 만들 뿐이다. 고립된 자애의 숲에서 끝없는 자기 소외를 거듭하는 이교도의 모습은 곧 빌딩숲에 갇힌 시인의 자화상에 다름아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단절감만 심화시키는 이러한 도시의 일상은 이재훈의 시에서 “인격을 빼놓고 전송”하게 하는 인터넷의 “바다”([바다])로 묘사되거나, “너무도 목이 말라/매일 종이를 씹어먹고/부라운관에서 춤추는 댄서의 옷을 잘라먹”게 하는 “사막”([마라의 오아시스])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급기야 시인으로 하여금 “시대가 없는 거리의 시” “나르시시즘의 시”([거리를 훔치다])를 쓰게 하고, “서럽고 아름다운 자연을 이미 다 해먹고/남은 상상으로 목울대를 울리는” “실패한 서정시인”([쓸쓸한 날의 기록])으로 자조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시인은 “상스런 욕설만 남은 거리”를 내려다보며 “불타는 빌딩 속을 걷다가/얼음의 기억을 불 가운데 던지리라”([세일즈맨의 오후])고 저주를 퍼붓기에 이른다.
이재훈의 말은, 도시의 일상에 대한 이 뿌리 깊은 환멸 속에서 태어난다. 다음의 시는 시인의 말이 상상 속에서 탄생하는 과정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잠든 말, 묵상도 없는 말들이 벽에 붙어 있다 너의 소리를 들으려고 널 만진다 그제야 너는 벽화가 된다 널 만지면 황소가 되었다가 사슴이 되었다가 초원을 가로지르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 타 노래를 부르는 추장이 된다

말이 쏟아져 내린다 초원에 내려 거칠게 달려나간다 내가 지겹게 머무는 도시의 거리까지 와서 내 머릿속을 후드득후드득 내달린다


시에서 화자는 알타미라와 같은 선사시대의 동굴 벽화 앞에 서 있다. 벽화를 만지는 순간, 화자는 그림 속의 말이 깨어나 갈기를 휘날리며 야생의 초원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상상하고, 야생마의 잔등에 올라탄 자신의 모습을 그려본다. 화자의 상상은 도시의 거리로까지 이어지고, 말들은 시인의 머릿속에서 뛰쳐나와 거리를 질주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말에 관한 시인의 상상이 초원에서 거리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의 생동적인 이미지를 동원해 시인은 도시의 거리를 야생의 초원으로 변화시키고, 생명 잃은 도시에 생명의 활력을 쏟아놓는다.
그런 점에서 말은 곧 시를 가리키는 비유요, 말 위에 올라탄 추장은 시인 자신을 가리키는 비유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은 원시적은 충동으로 가득 찬 시쓰기를 통해 신화를 잃은 불임의 도시에 태초의 신화를 회임케 하려는 것이다. 어머니의 배에게 “말발굽 소리와 활이 날아가는 소리”([사수자리])를 듣는 시인의 모습은 이러한 의지를 웅변해준다. 이렇듯 이재훈 시가 빚어내는 초원의 상상력은 종국에는 신화적인 차원으로 나아간다. 아스팔트 위에서 원시의 신화를 찾는 도시 유목민의 순례. 그것이 곧 이재훈식 시쓰기의 정체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시인이 아직 나르시스의 연못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재훈의 시가 감상적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 좀 더 절제되고 원숙한 미의식에 이른다면 그의 말울음 소리는 한층 우렁차게 메아리칠 것이다.

- [문학동네], 2005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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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미래에 관한 몽상


이경수
(문학평론가)



광활한 시공을 끌어들임으로써 시원에 대한 신비한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는 이재훈의 경우는 쉽사리 포섭되지 않는 시적 개성으로 인해 최근의 시에 관한 논의에서 배재되었지만, 오히려 개성적으로 우리 시의 또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2005)는 치밀하게 짜여진 전략에 의해 구성된 시집은 아니지만, 들쑥날쑥하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표제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가 보여주는 세계는 우리 시의 형이상학의 한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긍정적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 현대시학, 2006년 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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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을 구원하기 위한 풍장


이성혁
(문학평론가)



   이재훈의 「겨울 숲」은 30대 시인 특유의 감성을 발현하면서 젊음을 보내버린 겨울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할 윤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 특유의 감성이란, 지나가버리고 있는 청춘을 민감하게 의식하는 자가 느끼는 쓸쓸함을 말한다. 30대엔 다른 삶을 향해 나가게 된 지인들과 이별해야 하는 일들을 자주 겪게 된다. 이별은 과거와의 결별을 어쩔 수 없이 이끌어온다. 벅찼던 삶들은 기억으로만 외롭게 현재의 한구석에 버려지기 시작한다. 쓸쓸함의 감성은 겨울에 특히 어울린다. 조숙한 젊은 시인들이 눈의 이미지에 그토록 경도되는 이유는 그것이 이별의 정조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녹고 있는 눈의 이미지와 사라지고 있는 젊은 날들이 교차되면서 섞이기 쉽다. 그래서인지 청장년 시인들은 겨울이라는 상황을 자주 선택하여 젊은 날이 소멸되고 있는 현재에 대해 유장함의 어조로 슬퍼하곤 한다.
   「겨울 숲」에서 시적 화자는 지금 세상에 등을 돌리고 겨울 숲으로 떠난 형인 ‘그’를 생각한다. 해어진 그 형에 대한 기억은 이젠 과거가 되어 버린 방황들을 아프게 떠올리게 할 것이다. 시적 화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그 급격한 낙차를 느끼며 가슴을 쓸어내릴 것이다. 그리하여 과거를 현재의 흐름에 급격하게 끌어당겨올 때 일어나는 유장함이 시를 적신다. 「겨울 숲」 역시 청장년 특유의 어조와 감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칫 감상으로 빠질 수 있는 이 감성의 흐름을 시인은 ‘그’의 삶이 보여주는 윤리의 문제로 끌어올림으로써 적절하게 통제한다. “이제야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며 시인은 시를 시작한다. 시의 물꼬를 미리 이렇게 터놓음으로써 시인은 청장년 시인에게 전형적인 쓸쓸함과 유장함의 어조를 유지하면서도 감정을 발산하는 식으로 나아가지 않고,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시는 ‘그’의 삶의 방식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시적 화자의 세계관적 변동을 토로한다. 겨울 숲으로 떠난 그를 지금은 이해하게 되었으므로 “그를/찾으러 겨울 숲에 간다”고 시의 후미 부분에서 시적 화자는 말한다. 아마 예전엔 투사(鬪士)이자 수사(修士)였을 그, 하지만 그는 “아마 목숨까지 다 토”해버리며 과거를 등지고 겨울 숲으로 떠난 자이다. 그렇게 다 토해버린다는 것, 그리고 은둔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시적 화자는 예전엔 몰랐다고 진술한다. “언젠가 술 취한 내 등을 두드리며/다 토해라, 있는 것 다 토해라고/그가 말할 때 나는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겨울 숲으로 떠나기 직전인 그가 “버스터미널에 우두커니 서 있을 때”, 그의 떠남의 의미를 몰라 “오래도록 그의 등 뒤를 서성거렸”으리라. 하지만 ‘그’와 같이 과거의 ‘풍성한 사연들’이 다 마를 때까지 모두 토해낼 수 있을 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시적 화자는 지금 깨닫고 있다. 이 깨달음이 청장년층이 겪는 쓸쓸함을 넘어 새로운 삶에 대한 성찰로 나아가게 한다. 그것은 “앙상한 뼈들만 모여 서 있는” 겨울 숲이 “더 뜨겁다”는 그의 진술을 이해하게 되는 세계관적 변동이다.
   아직 “겨울 숲이 오히려 더 따듯하다”는 그의 진술을 시적 화자가 진실로써 받아들이는 단계는 아니다. 시적 화자는 그 진술을 받아들이면서 진실인가 확인하고자 그를 찾으러 겨울 숲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그의 말을 전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겨울 숲은 모든 것을 다 토하고 과거와 결별한 자의 내면을 상징할 것이다. 그 숲에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헐벗은 나무들이 겨울바람에 맞서 서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뼈만 남은 헐벗은 나무가 그냥 서 있기만 하는 것만은 아니다. “뼈를 태우”고 있다. 아마 삶과 죽음의 경계선상에서 온 힘을 다해 삶을 지탱하고 있는 중이다. 모든 것을 다 토해 “이미 거죽만 남은 몸”인 ‘그’ 역시 저 겨울 숲의 나무들처럼 존재하고자 한다. 뼈가 탈 것이니 삶을 지탱하는 마지막 지지대 역시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뼈까지도 아깝지 않다”면서 “묘비도 없이 바람에 존재를 실어버리는 게/가장 행복한 결말이라고,/정말 시적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자신을 풍장하여 “신문에도 남지 않”도록 소멸하는 삶이 겨울 숲에서의 삶이며 그의 삶의 결말이라는 말이다.
   청춘의 끝에서 청춘을 불살라버리는 가장 극한적이고 청춘에 걸 맞는 결말을 ‘그’는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그는 과거와 극한 결별을 시도하면서도 과거를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남들과 같이 과거의 분실을 애도하면서 청춘을 끝내려 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 젊은 시절과 이별할 수밖에 없다면, 그는 모든 과거와 결별하면서 청춘의 극단적 에너지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그 방도는 거죽만 남은 채로 삶의 공허와 대결하는 것이다. 이 삶의 방식을 선택한 ‘그’를 통해, 시인은 젊은 시절이 점차 과거로 밀려나가고 있는 현재에 맞서 젊은 시절 이후의 삶이 여전히 젊을 수 있는 역설적인 방도와 윤리를 보여주려 한다. 헛된 희망이라는 거짓을 지지대 삼아 살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삶의 상황이 겨울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겨울을 철저히 받아들이고 맞서 살아 나가야지만 봄의 시절도 구원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철저히 절망한 사람만이 희망을 보여줄 수 있다는, 카프카를 읽으며 발터 벤야민이 한 말처럼.

_ <현대시>, 2006년 1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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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이방의 전설을 말하는 내 입술

송 승 환

이재훈의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2005)는 잃어버린 始原의 언어를 회복하고 다시 시원으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하는 시인의 내적 고백이다. 그 중에서도 「순례」는 시집의 주제를 관통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시원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시인이 적는 도시에서의 巡禮記이다.

고대의 순례가 낙타를 타고 모래 바람 휘날리는 사막을 가로질러 聖地를 향하던 것이었다면 현대의 순례는 바닥과 벽과 지붕을 온통 유리로 덮은 백화점 아케이드 거리와 쇼윈도우의 유리 사이를 거니는 것이다. 맑고 깨끗한 흰모래가 태양의 불을 만나 유리가 된 것처럼 순례의 연금술도 이뤄진 것이다. 맨발로 유리를 밟는 행위는 현대 도시에서의 순례이자 시원의 성지로 향하는 순례인 것이다. 「순례」는 유리의 투명한 흰빛과 핏빛 붉음의 시각적 이미지가 유리를 밟을 때마다 소리나는 청각적 이미지와 발끝에 닿는 촉각적 이미지로 전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시각적 이미지의 청각과 촉각 이미지로의 전이 과정은 시원의 매개체인 유리를 내면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발을 찢고 들어와 몸 속을 헤집고 모든 내장과 마음을 찢어놓는 유리를 통해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이 세계 너머의 시원을 엿보는 것이다. 동시에 유리는 컨텍스트로서의 지명(地名)도 함축하고 있다.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로나, 미친 년 오줌 누듯 여덟 달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 없는데다,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羑里)로도 모인다.

유리에서는 그러나, 가슴에 불을 지피고는, 누구라도 사십 일을 살기가 용이치는 않다. 사십 일을 살기 위해서는 아무튼 누구라도, 가슴의 불을 끄고, 헤매려는 미친 혼을 바랑 속에 처넣어, 일단은 노랗게 곰을 띄워내든가, 아니면 일단은 장례를 치러놓고 홀아비로 지나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또 아니면, 사막을 사는 약대나, 바다밑을 천년 한하고 사는 거북이나처럼, 업(業) 속에 유리를 사는 힘과 인내로써, 운산이나 눈뫼나 비골을 또한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인데, 이리의 무리는 눈벌판에서 짖으며 사는 것이고, 지렁이는 흙밑 습습한 곳에서라야 세상은 안온하다고 하는 것이고, 신들은 그렇지, 그들은 어째도 구름 한자락 휘감아 덮지 않으면 잠을 설피는 것이다. ―처음에는, 자기에게 마땅스런 장소를 물색하겠다고 여기저기로 싸돌아 다니다가, 찾기는커녕 마음에 진공만 키워 버린 뒤, 타성에 의해서 그 진공 속을 몸 가지고 밖으로 한없이 구르고 있는 듯이 보이는, 아흔 살은 되었음직한 그 중의 얘기대로 하자면, 그러하다, 즉슨, 모든 고장들이 다 그곳대로의 아름다움과 그곳대로의 고통을 지니고 있었다.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의 제1장 제1일 첫 부분에서 밝히고 있는 유리(羑里)에 대한 묘사이다. 유리는 마른 늪에서 물고기를 낚아야 하는 운명에 놓인 육조 혜능이 찾아가는 곳이다. 유리는 수행(修行)을 통해 구원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장소이자 일종의 성소(聖所)이다. 이재훈의 「순례」는 현대 도시의 주요한 질료인 유리와 함께 박상륭 소설의 羑里를 겹쳐놓음으로써 삶의 비의(秘意)와 신화가 사라진 ‘마른 늪과 같은 도시-유리’에서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삶의 의미를 되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삶은 매일같이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 마른 늪과 같은 도시-유리를 밟으며 살아야 하는 삶이다. 도시-유리 너머로의 출구는 쉽게 보이지 않으며 도시-유리 안에서 떠돌며 유폐된 삶을 살다가 生을 마쳐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이재훈은 도시-유리에서의 삶을 도피하듯 초월함으로써 <저기 저쪽>에 닿으려는 것이 아니라 유리를 밟으며 <두꺼운 군살을 비집고 환한 몸으로 찾아오는 신비>를 느끼려 하는 수행자의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시대의 삶을 외면하지 않고 마른 늪에서 물고기를 낚으려는 삶의 자세를 견지한다. 유리를 밟는 수행자는 <유리의 머리가 내 발바닥을 찢는 수런거림>을 듣고 <유리가 내 몸을 돌고 돌아 검붉은 내장을 모두 만>나 유리 자체가 내 몸 전체가 되도록 유리를 밟으면서도 고행을 멈추지 않는다. 순례를 통해 죽음을 맞으면서 나는,

그 뜨거운 감촉. 두꺼운 군살을 비집고 환한 몸으로 날 찾아오는 신비. 유리를 밟으며 축제를 연다. 붉은 포도주가 흐르는 식탁. 얼굴에 분칠을 하고, 혀에 피어싱을 하고, 히피처럼 연기를 피워올린다. 치렁치렁한 푸른 옷을 입고, 방 안을 빙빙 돈다. 사각사각 유리가 몸 안에서 춤을 춘다. 두려움은 없다. 정작 두려움은 예언자의 눈, 인디언의 귀, 언 고기를 사각거리는 알래스카의 몽골리안을 그리워하는

生의 원시성(原始性)과 시원과의 조우를 희구하며 <生의 분노도 잊은 채, 태평하게 먼 이방의 전설을 말>한다. 도시-유리-羑里의 순례를 통해 나의 온몸과 마음이 갈가리 찢기고 유리가 내 몸 전체가 되고 내가 백치가 되어도 <유리―너의 촉감>과 <유리―너의 소리>와 먼 이방의 전설을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죽어가면서도 <나처럼 맨발로 유리 밟으러 가는 젊음들>과 함께 유리에서의 순례는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땡볕 아래 고행하는 꽃들이 핏빛 붉은 햇살을 게워내듯 우리들의 지상에서의 삶은, 이재훈의 <순례>처럼 고통스럽게 아름다운 <절정>인 것이다. 사각사각.

_ <현대시학>, 2005년 1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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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된 구원과 작은 희망


송기한
(문학평론가, 대전대 교수)



이재훈의 [빌딩나무 숲] 또한 생명과 그 근원이 소멸하여 모든 존재가 사물이 되고 죽음에 의해 점령당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 숲엔 풍경이 없다
나무와 새 온갖 풀벌레가 가득하지만
그들은 소리내지 않는다
사방을 둘러봐도 제자리만 지키고 선
가장 그럴듯한 포즈의 마네킹들
그곳엔 소리가 없다
어머니, 하고 부르면 침묵만 되돌아와
귓가엔 내 목소리만 자욱히 앉아 있다
숲속에서 숨이 막혀 한참을 내달았다
소리를 지르고 실컷 울고는,
그루터기에 앉아 부풀어 오르는 힘줄들을 만졌다
나는 나를 만지고 한없이 그리워져
나무에게로 간다
새에게 말을 건다
자애는 폐허, 라고 되뇌이는 시간들
내 힘줄을 내가 끊어도 고통스럽지 않은 곳,
그곳엔 아무도 없다
있다면, 침묵이 있다
아무도 면회오지 않는 숲에서
나는 이교도가 되었다
― 이재훈, [빌딩나무 숲](현대시, 1월호)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물화(物化)를 통해 인간이 고독과 소외의 상황으로 내몰리는 양상을 그리고 있다.
“나무와 새 온갖 풀벌레가 가득하지만 소리내지 않는 풍경”이라든가 그것이 “그럴듯한 포즈의 마네킹”과 겹치는 상황, 혹은 ‘어머니’하는 외침이 “침묵으로 돌아오”거나 “자애가 곧 폐허”가 되는 상황들은 환경의 물화와 인간의 소외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생명을 잃고 사물이 되어 버린 ‘나무’나 ‘새’, “아무도 면회오지 않는 숲”에서는 죽음이 예사롭지 않게 찾아든다. “내 힘줄을 내가 끊어도 고통스럽지 않다”는 진술에서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이 같은 상황을 ‘빌딩나무 숲’이라 명명함으로써 환경의 사물화에 대한 근거로 근대라는 패러다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이처럼 생명이 상실되고 죽음이 만연한 곳에서는 어떠한 구원도 손쉽게 찾아들 수 없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어머니’라는 근원적인 힘이나 ‘자애’와 같은 미덕들은 결코 응답받지 못하게 되는 바, 시인이 “나는 이교도가 되었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곧 인간을 구원하고 세상에 빛과 희망을 주어야 할 종교조차 이런 소외된 상황에서는 그 구실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 송기한, [좌절된 구원과 작은 희망]중에서, 현대시 200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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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열된 연대의 시적 기록


정과리
(문학평론가, 연세대 교수)



앞에서 이재훈의 짧은 시구를 인용하면서 “과거에 미련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단순히, 예전의 시들이 기원의 신화 속에서 태어났음을 가리킨 것일 뿐이다. 그러나 발설된 말은 발설자를 떠나 혼자 놀기 시작한다. 저 과거는 어떤 과거인가? 시를 태어나게 한 현실을 가리키는 것인가(왜냐하면, 지금의 논리 속에서 시는 현실 다음에 오니까)? 아니면, 시라는 것의 별도의 맥락(‘한국현대시사’ 같은 표현이 지시하는 것처럼)을 환기하는 것인가? 이재훈의 시는 소박하나마 하나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곳에 살기 위하여”가 아니라 “이교도”로 살기 위하여. 실상 시는 “나는 이교도가 되었다”고 했지 “이교도로 살기 위하여”라고 적지 않았다. 그런데 시를 읽어 보면, 시의 화자는 이교도가 되지 않았다. 그는 빌딩 속에서 살면서 자연을 그리워한다. 빌딩에는 가짜 자연들만이 있다. 빌딩과 자연의 대위법은, 그러나, 빌딩을 붕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빌딩을 재생산한다.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야만 빌딩은 거듭 솟아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빌딩의 종교이다. 화자의 종교도 같은 종교다. 이교도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나를 만지고 한없이 그리워져
나무에게로 간다
― 이재훈, [빌딩나무 숲] 부분

이 시구의 앞 행에 드리워진 성적 암시를 제거하고 읽으면 이교도로 사는 방식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빌딩의 종교 의식은 대상의 성물화를 통해서 나타난다. 그런데 화자의 그리움은 자위를 통해 솟구친다. 자위의 끝에서 그는 몰아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죽음의 예행연습), 오히려 대상에 대한 그리움으로 타오른다. 그래서 저 가짜 나무, 가짜 새에게로 가 “말을 건다.” 가짜가 진짜를 온전히 대행하는 순간이다. 그러니까 이 시구가 암시하는 것은 화자가 빌딩의 종교이기도 한 자신의 종교를 절대자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자기의 이름으로 행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이단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단이라고 말하기가 화자는 께름칙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류를 가리키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그 꺼림한 감정이 ‘이단’ 대신 ‘이교도’를 선택하게 한다. 그는 이교도인 체 함으로써 이단을 사는 것이다. 그러한 방식의 최종적인 명제가 ‘이교도로 살기 위하여’이다.
엘뤼아르의 시이기도 하고 김지하의 시 제목이기도 한 “이곳에 살기 위하여”에서 ‘이곳에’는 의미론적으로는 무의미한 췌사이다. 사는 것은 언제나 여기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다른 곳에서 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당연히 ‘저곳에 살기 위하여’라고 써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살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이곳에’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단지 리듬의 조화를 위해서만 기능한다. 따라서 의미론적으로는 ‘살기 위하여’만이 작동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그것은 무언가 부족하다. 문자 그대로의 그것은 모든 존재들의 한결같은 소망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부족한가? 바로 그 소망의 방식이 부족한 것이다. 가령, 용감히 살기 위하여, 떳떳이 살기 위하여, 멋지게 살기 위하여, 반항아로 살기 위하여, 음메 기죽어로 살기 위하여, 죽어서 살기 위하여, 이교도로 살기 위하여, 기타 등등.

- 정과리, [파열된 연대의 시적 기록]중에서, 현대시 200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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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 달린 존재들의 고통


문혜원
(문학평론가)



1. 혼란과 응시, 단절등단작에서 섬세한 감각과 다듬어진 어휘를 보여주었던 이재훈의 신작시는 평면적인 진술에 가까운 형태로 바뀌어 있다. [수선화], [Big Bang]에서 감지되던 개인의 신화적인 공간은 사라지고, 일상 속의 현실적 자아가 직접 얼굴을 내민다. [빌딩나무 숲], [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공복의 새벽에 관하여]에는 문명의 숲에서 살아가는 시인의 피곤과 상실감이 짙게 배어 있다. 관계는 단절되었거나 애초에 맺어져 있지 않다. 그는 잠시 낯선 것들과 함께 하는 관계 속에 놓여보지만(“어둠 속에선 낯선 냄새와/낯선 속삭임이 더 경이로워/아, 백치 곰보라도 함께 노래하는 밤”;[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공복의 새벽에 관하여]), 밤이 지난 후 더욱 허무해진 ‘공복의 새벽’으로 되돌려진다. 그리고 다시 무관계성 속에 홀로 남겨진다. 그것이 나르시소스적인 색깔을 띠고 있는 것은 [수선화]나 마찬가지이지만, 그의 최근의 시는 좀더 건조하고 허무한 세상으로 밀려나온 듯하다.

- 문혜원, <뿔 달린 존재들의 고통>중에서, 현대시 200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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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의 시 「산책」을 읽고

현대인들의 비극은 고향 상실에 있다. 찌그러지고 가난한 현실적인 고향이 아니라 마음이 돌아가 편히 쉴 고향 말이다. 그러니 외로울 수밖에 없다. 외로운 자는 그림자를 벗삼아 낯선 거리를 걷는다. 레미콘 트럭의 바퀴에 치어 압사하는 햇살. 어부가 되고 싶다는 중얼거림을 졸졸 따라오던 그림자도 압살된다. 그러나 실체가 아닌 것은 생노병사가 없다. 어둠이 오고, 시인의 고독이 마침내 당도하는 닫힌 방문. 자취방 문을 열면 거기 이불이라도 따뜻하게 깔려 있을 것인가.

(배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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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별의 노래에 대하여


이승하
(시인, 중앙대 교수)



우리는 모두 사회적 동물이다. 60억이 넘는 동물들이 아옹다옹 지지고 볶으며 사는 세상에 던져진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다. 우리는 중동지방의 연이어지는 테러에 불안해하고 미국의 산불에 상심하지만 내 가족의 안위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아니, 나 자신의 일상적 삶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문학이 ‘일상’의 차원만 다룬다면 가볍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는 풍선 같아지리라.
시 <결별의 노래>에서 말하는 결별이란 이 시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역사적 자아와의 결별을 뜻한다. 그래서 마음이 없는 몸을 질질 끌고 시위대를 지나고 학교를 지나고 걸음을 멈추게 했던 대형전광판을 지나는 것이다. 거대담론들이 죄 무너진 이 시대에 역사적 자아로서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시인은 지금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시인은 역설적인 의미에서 아주 행복하였다. 공격의 대상, 야유의 대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대사회적인 발언을 해본들 그것은 별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역사적 자아로서의 역할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런 때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림 속의 화려한 상징’으로 자꾸만 빠지려 하는 시적 자아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다. 오히려 중세시대의 기사들이 행복했던 것이리라. 성배를 찾아 목숨을 건 모험을 하면 되었으니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시적 자아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현상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시인은 해보았던 것이리라. 이 시에서 성배란 절대적인 것, 근원적인 것이다. 그래서 <결별의 노래>는 요즘 시단에서는 아주 드물게 볼 수밖에 없는 형이상학적인 시이다. 근원적인 것을 찾아 나선 시인의 행로가 역정의 길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리려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시안>, 2003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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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영혼의 순례자



김유중
(문학평론가, 항공대 교수)



5. 젊은 날의 아픈 기억, 쉽게 지워질 수 없는

상실의 감정은 우리를 아프게 만든다. 특히 모든 것을 바쳐 몰두했던 무언가를 잃었을 때의 그 아픔이란 직접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이겨낸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이성적으로야 몇 번이고 털고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일 뿐, 현실에 있어서 그것이 실제 그대로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의 어려움을 시적으로 성공적으로 표현한 두 편의 시를 여기서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이재훈의 「때 이른 유적」(시로 여는 세상, 2002. 가을호)은 그러한 상황을 운명론적인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다.

너를 보다 보니
너는 안보이고 내 경험이 보인다
나는 너를 때 이른 경험으로 만지작거리다가
급기야 너를 훼손하고 만다

…(중략)…

저기 담벼락에 꽃 한 송이가 안간힘으로 피어 있다
꽃이 떨어지면 그 꽃을 지켜보던 풀잎 하나는
평생 간직할 유적 하나를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
나는 작고 예쁜 그 꽃이 언젠가는 떨어질 것을 알고 있다
누구나 아는 이 사실을 알기까지
나는 내 젊음을 모두 소진했다

마음은 가장 무거운 유적이다

이 텍스트에서 상실에의 두려움은 처음 탄생과 만남의 순간부터 어차피 예비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우리는 그러한 두려움을 원천적으로 떠안은 채 살아간다. 우리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러한 원천적인 상실에의 두려움을 시인은 ‘때 이른 유적’이라 칭한다. ‘너’를 보면서도, 정작 ‘나’는 ‘너’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나’의 내부에 가로놓인 ‘너’에 대한 상실에의 두려움만을 응시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두려움은 대개 ‘내’ 삶에 파고든 실체로서의 ‘너’의 의미를 왜곡하고 훼손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의 지난 경험이 그에게 끊임없이 그러한 위험성에 대해 귓속말로 귀띔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알고 있다. “꽃이 떨어지면 그 꽃을 지켜보던 잡초 하나는/평생 간직할 유적 하나를/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시인의 영혼은 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을 앞에 두고 여전히 엉거주춤 망설이고 있을 뿐이다. 그의 표현대로 “마음은 가장 무거운 유적”이기에.

- <시와정신> 200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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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물관(管)


물이 흐른다
어제까지도 길이었던 곳에
도둑처럼 물이 넘어 든다

사람들은 물길을 튼다
배설과 오물의 길
그 위에 서성이는 사람들
트르륵트르륵 한 세기 동안
콘크리트 덮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발길을 멈춘다
가고 싶지 않은 길
집과 집 사이엔 수평선처럼
악수할 수 없는 긴 부정법이 놓여 있다
어제를 부인하고
어제의 그 집을 부인하고
어제의 그 집까지 향해 있던 길을 부인한다
발밑의 물소리는 늘 고요하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말을 뱉고 침을 뱉고
그 말과 침이 화간(和姦)하여
발밑으로 스며들었다
물을 기억하게 될 때
사방은 모두 가라앉는다
누란(樓蘭)은 물 속의 집
오래된 말들의 집
누란은 오아시스다
말들이 목마름으로 남아 있는 곳

물이 흐른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네가 버린 물과 네가 뱉은 말이
파이프를 타고 수화기를 타고
물결치며 이집 저집을 들락거린다
이 무시무시한 동력(動力)

나는 썩은 물로 컸다
발밑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내 속에서만 고여 있는 말로 컸다

- <서정시학>, 2003년 여름호

이 시를 읽고 나니 ‘조울’, ‘비애’와 같은 단어들이 나를 찾아온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내부에 곧 터질 듯한 위태로운 물관 하나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이다. 시인은 길을 걷다 물관(管)이 터진 현장을 만난다. 쏟아진 물과 오물이 뒤범벅 된, 별로 유쾌하지 못한 현장이다. “한 세기 동안/콘크리트 덮는 소리를 듣다가/문득 발길을 멈춘” 것은 이재훈이기도 하고 물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나’인 이재훈은 곧 현대 문명인의 모습이고, ‘물’은 그들의 내면이다. 온통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육체)에서 물관이 터진 그 길(운명)은 어떤 불행을 예고하는 징조 같다. 거기다 온갖 오물까지 합세했으니 길을 걷던 이재훈이나 콘크리트 아래 물관을 타고 흐르던 물이나 그 길은 그다지 “가고 싶지 않은 길”인 것이고, 그러나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다. 그러므로 “긴 부정법이 놓여”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처럼 “어제를 부인하고/어제의 그 집을 부인하고/어제의 그 집까지 향해 있던 길을 부인”하게 된다. 이재훈에게는 도시 문명이 만든 사막 같은 길(운명)이 슬프고, 물은 땅속 지류를 버리고 인위적으로 만든 물관을 따라 흘러야하는 운명이 슬프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뱉은 “말과 침이 화간하여/발 밑으로 스며”든 ‘물 속의 집, 누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비밀처럼 땅 속에 숨겨진 ‘파이프’같은 “무시무시한 동력”이 있을 뿐이다. 콘크리트 길 위로 흘러 넘친 물은 땅 속으로 스며들지도 못하고 증발한다. 현대인들, 즉 이 시 속의 ‘나’는 “도시의 물관”과 자기를 동일화시킨다. 물관 속에 고인 물처럼 “내 속에서만 고여 있는 말”로 세상을 읽으며 살아왔다는 자기 한탄이 너무 우울하고 고통스럽다.
아, 꿀물 흐르는 샘 하나, 어디 없을까?

- <시선>, 200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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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성(聖)



김종태
(시인, 문학평론가)



우리가 현재 목도하는 세상은 생명과 성으로 가득 차 있는 싱싱한 공간이 되지 못하고 있다. 위에서 중견 시인 두 사람은 삶에 가담하고 삶을 관조하는 넉넉한 시선으로 세상을 포용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젊은 시인들은 생명과 성이 사라진 어두운 세상에서 절망의 노래만을 부르고 있다. 그러나 생명과 성에 대한 화해의 양식이나 이들에 대한 절망의 양식이나 모두 다 마찬가지로 생명과 성이 이 세상에 아름답게 현현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다음에 인용될 이재훈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배꼽으로 차가운 톱날이 들어온다. 슬금슬금 배를 가르고, 시커먼 내장들을 걷어올린다. 텅 빈 뱃속에 햇살이 들어와 가만히 눕는다. 나는 환한 몸으로 세상 이곳 저곳을 누빈다. 오 따사로운 마음들. 어느새 햇살이 누운 자리. 꽃망울이 올라와 있다! 꽃은 피어나 온몸에 홀씨를 퍼뜨린다. 즐겁게, 내 몸 구석구석이 피어오른다. 사람들이 하나 둘 내게 찾아와 꽃 한 송이씩 꺾어 간다. 계절이 바뀌고, 꽃들이 떨어진다. 떨어진 꽃마저 누군가 주워간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내게 남은 꽃다지. 공중으로 날아간다. 나는 까맣게 타 들어간다. 잿빛 몸들이 부르는 거리의 합창. 나는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한다.

이재훈 「공중정원」 전문([시와생명] 2002년 봄호)

이재훈이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은 몽환적 구조를 근간으로 삼는다. 이 시에 나오는 체험은 현실이 아니라 꿈의 세계 즉 악몽의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서사 형식을 지닌다. 시인은 이 섬뜩한 경험의 상상을 통하여 생명의 의미에 대하여 진지한 물음을 던져 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시는 “배꼽”과 “꽃망울”이 주는 상징을 통하여 동물적 이미지와 식물적 이미지의 교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이색적이다.
시인은 꿈속에서 배꼽으로 칼날이 들어오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 배꼽은 생명 탄생을 가능하게 한 목숨의 뿌리이며 포유류 동물이 가진 몸의 중심이다. 그러나 이 배꼽은 육체적 기관으로서는 뚜렷하게 돌출되어 있지 않은 채 탄생의 흔적만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시인이 이러한 배꼽의 상징성을 문제삼은 것은 생명의 근원적인 의미를 반추해 보면서 이것에 힘입어 반생명적인 외압을 의식적으로 견디어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이 곳으로 들어오는 칼날은 인간 생명의 원형적 가치를 송두리째 파괴하려는 음모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시인이 칼날의 형상에 역설의 일격을 가하면서 이 시의 서사는 반전된다. 그는 오히려 이 칼이 자신의 내부에 있는 오염된 내장을 말끔히 씻어내 준다고 말한다. 내장이 잘려지는 고통이 오히려 신비로운 생명의 확산을 가능하게 한 것일까. 내장이 걷어진 복부는 햇살들로 인하여 환해지고 그 곳에는 꽃망울이 오르고 꽃이 피고 홀씨가 생겨나면서 동물적 이미지와 식물적 이미지의 아름다운 교합의 공간으로 변용된다. 내부를 잃어버린 불구의 몸이 역설적이게도 그 상실로 인하여 오히려 ‘제의적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이한 생명의 향연 역시 오래 가지 못한다. 사람들이 내 몸의 꽃을 꺾어 갔으며 계절이 변화하면서 꽃들이 지고 그 떨어진 꽃마저 행인들이 주어가면서 그 몸에 피어난 생명의 꿈은 다시금 좌절의 길을 향할 수밖에 없게 된다. 생명의 축제를 유지하기란 이처럼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시인은 마지막 남은 “꽃다지”를 보며 다시금 타들어 가는 몸의 고통을 느낀다. 검게 탄 잿빛 몸이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시의 말미는 매우 음울한 상징을 낳는다. 이를 ‘비극적인 아이러니’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아름다운 생명과 초월적 세계에 대한 관심은 문학의 오랜 주제가 되었다. 시인들은 때로는 그 화해로운 세계의 도래를 갈등 없는 언어로 형상화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그 곳에 대한 끊임없는 노스텔지어를 간절한 기다림의 언어로 표현하기도 하였으며 한편 이와는 달리 반생명적인 악의 세계를 그로테스크한 언어의 비수로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그러한 생명과 성의 세계가 우리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공히 인정할 터이다. 근대의 물질 문명은 이들 성스러운 가치를 자본과 물건의 위세에 종속시키려 하고 있다. 물질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오늘날의 삶 속에서도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더욱 반생명적이고 세속적인 경험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세계에 대한 갈망의 끈을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된다. 첨단 기술 문명의 시대에도 생명과 초월을 꿈꾸는 언어의 주술사가 필요한 이유가 참으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 [문학의 미로], 하늘연못, 2003.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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