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의 후예
― 이재훈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김태형
(시인)



천일 동안의 무수한 밤이 이어지고 또 하루의 새로운 시작이 거듭되는 곳에서 “잃어버린 기억”(「시인 세헤라자데」)을 하나하나 더듬어나가는 이가 있다. 물의 기억 속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펄떡펄떡” 고통스러운 몸을 꿈틀거리는 자의 밤은 격렬하다. 하루하루 또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새겨야 할 새로운 기억들이 끝없이 반복되거나 변주되고 아득한 후렴구를 거느리면서 숨결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노래가 비롯된다. 섣불리 노래가 끝나서는 안 된다. “완벽한 미완성”이 되어야 한다. 아직 날이 밝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의해 사로잡힌 자, 그래서 “불 켜진 창”(「까마귀 속에 나의 시간이 있다」)에 갇혀 있는 자의 노래는 밤의 언어로 가득하다. 날이 밝으면 밤하늘 너머 시간의 허방을 날아오르던 새의 죽음을 다시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 좌절의 연대기가 첫 장을 열기도 전에 “모든 시간은 무너지고”(「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밤이 되어서야 먼 기억의 세계로 떠나는 초시간성의 상상 세계가 시인의 목숨을 담보로 펼쳐진다. 그 환한 밤의 시작을 알리듯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방안을 들여다본다. 까마귀는 어둠 속에서 태어난 태양의 새다. 어둠의 휘장을 펄럭이며 낮의 일광 속을 날아다녀야 하지만, 이 태양의 새는 정작 밝은 빛 속에 깃을 치지 못하고 밤의 창가에 내려앉는 추방된 자의 비애를 삼킨다. 이 까마귀와 마주하는 시인은 어딘가 까마귀가 날아왔을 또 다른 세계를 들여다본다.

그곳에는 황소가 억센 뿔을 세우고 있으며 긴 허리를 둥글게 구부려 가볍게 숲속을 뛰어다니는 사슴의 무리로 가득하다. 밤의 동굴 속에는 오래 된 벽화에서 이제 막 빠져나온 원시의 시간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어둠의 자궁이 활짝 벌어진 동굴의 깊은 곳으로부터 대초원이 시작되고 야생의 거친 말 위에 올라탄 추장의 노래 소리가 북소리처럼 웅장하게 울려 퍼진다. 급기야 이 말은 도시의 음습한 거리까지 뛰쳐나와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한다.

동굴은 “불 켜진 창”을 가진 유폐된 자의 거처이며, 동시에 “말과 나는 한몸”(「사수자리」)이라고 인식하는 황홀한 꿈의 자리이다. “쭈글쭈글해진 어머니 배”로 불려지는, 바로 시인이 태어난 성소이다. 시인은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지상에 유폐되기 이전의 “그 불안한 시간”을 다시 살아보고자 한다. 별빛을 통해 나를 인식할 수 있었던 곳,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허공을 양해 활을 쏘아 올리던 그곳으로 시인은 귀를 바짝 갖다 댄다.

그래서 시집 곳곳에는 종교적 인유(引喩)나 자기동일성의 신화적 재현, 탈역사적인 신비로운 상상으로 가득하다. 혼돈(Babel)의 탯줄을 끊고 첫 울음 울던 태초의 풍경은 도시의 빌딩 속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곳엔 소리가 없다”(「빌딩나무 숲」). “어머니, 하고 부르면 침묵만 되돌아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목소리만 공허하게 울리는 도시의 중심에는 콘크리트 빌딩나무가 자라고 있을 뿐이다. 울림도 없이 되돌아오고야 마는 자기중심적인 세계야말로 바로 ‘폐허’를 재생산하는 곳임에 틀림없다. 그에게 남은 믿음은 ‘현대’라는 맹목적인 종교를 거부하는 이교도의 삶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현대’를 무작정 이탈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를 찾아가는 일은 자기 목소리에 매달리는 일이 아니라는 도시거주자의 꽤나 의미심한 전언을 시인은 남겨놓는다.

나르키소스처럼 폐허가 된 죽음의 자리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다. 자기의 목소리만 자기 안에 울려 퍼지는 빌딩나무의 완강한 숲을 지나 급기야 자기 몸에 수선화의 꽃씨가 내려앉는 밤의 긴 침묵을 마주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 도시를 한순간 부정해버릴 방법이 없다.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그가 찾아가야 할 성소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거침없이 내달릴 초원도, 언덕을 하나 넘으면 펼쳐질 시원도 그에게는 멀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그의 순례는 제프리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처럼 위트와 해학, 무용담으로 넘쳐나는 이야기 사슬을 엮어나가지 않는다. “건물과 건물 사이, 그 사이의 위태로운 희망, 그리고 낯선 꿈”(「순례」)을 찾아가는 순례의 여정은 도둑이 들끓고, 마차 바퀴가 빠지는 진흙탕의 먼 길이 아니라 “방 안을 빙빙” 도는 제의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질베르 뒤랑의 말을 풀어내면, 제의는 부재(不在)를 재현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상징 자체를 새로운 구체적인 의미로 생성하는 독자성을 가진다. “맨발로 유리 밟는 소리”를 들으며 그 유리조각이 살을 찢고 흘러내리는 피로써 거행되는 밤의 제의는 “불 켜진 창”에 유폐된 자의 유일한 몸짓이다. 역설적이게도 자기가 발 딛고 있는 도시 문명의 현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일탈의 꿈을 이루려는 행위이다.

섣불리 자연에 귀의하지 않고, 작위적인 환몽 속에서 현실을 되레 왜곡하는 거짓된 부정의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대상을 왜곡하면서까지 이루어지는 부정의 방식은 또 다른 부정을 부를 뿐이다. 진정한 부정의 발화는 자기 목소리만을 듣는 닫힌 귀를 갖고 있지 않다. 새로운 말은 그것을 다시 부정하는 순간 태어난다.

생명의 샘(「마라의 오아시스」), 마른 목을 축여줄 정원의 샘(「공중정원2」)을 찾아가기 위해서 불을 타고 오르거나 허공에 발을 내미는(「공중정원3」) 이 영원한 꿈의 시민(市民)은 먼 길을 걸어가는 그 어떤 순례자의 고단한 하루보다 긴, ‘무너진 시간’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 새로운 공중의 시민은 금빛 새가 날아오르는(「결별의 노래」) 곳으로 우리를 이끌며 잃어버린 노래를 다시 기억해내어 들려줄 것이다. 그가 열어 보여주는 최초의 말들을 여전히 나는 어둔 귀로 더듬더듬 따라가게 될 것이다. 신성한 별들이 떨어지는 쭈글쭈글한 동굴 속의 어둠을 향해 누군가 또 바짝 귀를 대어볼 것이다.

(『시평』, 2006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