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왕성 되다'에 해당되는 글 22건

  1. 2014.03.21 대도시와 정신적 삶, 그리고 서정시_ 조강석
  2. 2013.12.02 <명왕성 되다>, <재킷을 입은 시인> 영상 2
  3. 2013.12.02 [행사] 젊음, 시로 폭발하다
  4. 2013.11.15 황하의 순례자 (이재훈론)_ 김혜영
  5. 2013.02.04 신생의 사건으로서의 시_ 정과리
  6. 2012.10.18 육성(肉聲)을 얻기 위한 영혼의 드라마_ 이성혁
  7. 2012.09.05 행복한 문학편지_ 나 명왕성 되었어(이 땅의 소외된 이들에게)
  8. 2012.04.04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자 발표(현대시학, 2012년 3월호) 2
  9. 2012.03.30 [제6회 수북수북 라디오] <명왕성 되다> 이재훈 편
  10. 2012.03.30 <명왕성 되다>의 시인 이재훈 - 제7회 수요북콘 후기 2(최종)
  11. 2012.03.30 <명왕성 되다>의 시인 이재훈 - 제7회 수요북콘 후기 2
  12. 2012.03.30 <명왕성 되다>의 시인 이재훈 - 제7회 수요북콘 후기 1 1
  13. 2012.03.29 수요북콘_ 이재훈 북콘서트
  14. 2012.03.09 유한성의 파토스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_ 박대현
  15. 2012.03.09 유한성과 동일성 너머의 무한_박대현
  16. 2011.12.25 이재훈 시집 <명왕성 되다> 광고
  17. 2011.12.09 <명왕성 되다> 문화예술위 우수문예도서, <나는 시인이다> 문화관광부 올해의 교양도서로 선정!! 3
  18. 2011.10.04 [주간 동아 / 시인 오은의 vitamin 詩] 카프카 독서실
  19. 2011.10.04 [한국일보] 진은영의 시로 여는 아침_ 명왕성 되다
  20. 2011.10.04 [매일경제] 이재훈 두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 출간
  21. 2011.10.04 [연합뉴스] 도시의 생태와 내면의 쓸쓸한 풍경
  22. 2011.10.04 이재훈 시집_ 명왕성 되다(민음사, 2011)

대도시와 정신적 삶, 그리고 서정시

 

 

-조강석

 

 

 

 

 

 

1.

 

대도시의 성립은 단지 물적 기반의 확립과 경제 시스템의 정착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앙리 르페브르가 강조했듯이 공간은 정신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사회적인 것, 역사적인 것 등을 연결하고 발견, 생산, 창조의 과정을 재구성함으로써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공간은 “할당된 장소와 위치 안에서 무수히 많은 교차를 내포”하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간의 문제는 물적 토대, 지식과 담론의 생산, 그리고 공간의 재현 양태 모두와 결부된다. 대도시의 성립이 예술에 있어 새로운 의미지평을 획득하게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대도시의 대두와 성립은 단지 물리적 차원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공간을 표상하고 재현하는 구성원들의 의식 차원의 문제와도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대도시는 물리적으로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구획하고 정초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 삶의 영역에서도 새로운 방식의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아마도 이와 관련하여 게오르그 짐멜의 논의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막스 베버, 에밀 뒤르켐 등이 근대 세계에서 대도시의 성립과 관련된 역사적 계기와 도시의 발달 조건 등에 대해 논했지만 대도시의 발달이 인간의 내면적-정신적 삶과 일상적 상호작용에 대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짐멜의 글 「대도시와 정신적 삶」이 우선적으로 주목에 값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대목을 눈여겨보자.

 

한편으로는 관심을 끄는 자극들이 도처에서 밀려오고 시간과 의식의 충전을 통해 거의 움직이지 않아도 마치 강물에 휩쓸려가듯이 저절로 떠밀려가는 삶을 살게 되면서 개인의 삶은 엄청나게 편리해졌다. 다른 한편으로 삶은 점점 더 개인적 색채나 비교불가능한 특성을 몰아내는 비인격적 내용과 제공물로 채워진다. 그 결과 누군가를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 혹은 자신만을 위한 경우라도 개인적인 것을 과장할 필요성이 생긴다.

 

인용된 게오르그 짐멜의 언급에서 흥미로운 것은 대도시가 개인의 의식의 영역에서 “도처에서 밀려오”는 자극들을 끊임없이 생산한다는 대목이다. 생활의 영역에서 개인의 삶은 더욱 편리해졌지만 한편으로 정신적 삶의 영역은 “비인격적 내용과 제공물”들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이 짐멜의 설명이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급속도로 이미지들이 교체되면서 밀려오거나,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포착되는 내용의 변화가 급격하거나 밀려드는 인상이 전혀 예기치 못한 경우에 더 큰 부담을 갖는다. 이러한 심리적 조건은 대도시의 거리를 걸을 때나 빠르고 다양한 경제적-직업적 및 사회적 삶을 경험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정신적 삶의 감각적 기반, 다시 말해 차이에 입각한 우리 존재의 속성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의식의 총량을 비교해보면, 대도시는 소도시나 시골의 삶과 커다란 차이를 보여준다. 후자에서는 감각적-정신적 생활의 리듬이 더 느리면서 더 익숙하고 더 평탄하게 흘러간다.

 

그러니까, “비인격적 내용과 제공물”로 가득찬 자극들이 “정신적 삶의 감각적 기반”을 형성하는 감각자료들이 됨에 따라 주체는 한편으로는 신경과민에, 또 한편으로는 둔감함에 내몰리게 된다는 것이다. 짐멜 전문가 김덕영은 이에 대해 이 둔감함이, 지젝의 규정에 따르면 “사물의 차이에 대한 마비증세”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둔감함은 쉴 새 없이 주어지는 자극들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주체의 내면에 사물의 차이에 대한 마비증세가 나타난 결과라는 것이다. 모든 개별 가치들을 교환가치로 환원시키는 화폐의 유통이 사물들 고유의 가치에 대한 계량보다 우선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런 양상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신경과민과 둔감함이라는 양가적 심리를 동시에 지닌 주체들은 무수한 자극과 만남들에 대해 매번 전면적인 내면적 반응을 보이는 것을 피하고 자신의 속내를 감춤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한다는 것이 짐멜의 후속 설명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짐멜은 대도시에서의 정신적 삶과 관련하여 양적 개인주의와 질적 개인주의를 구분하여 설명한다. 짐멜에 의하면 양적 개인주의란 18세기에 발생한 것으로 “자연이 불어넣었지만 사회나 역사에 의해 훼손될 수 있는 인류의 고상한 본질”을 회복하려는 개인주의 즉, 종교적 억압과 같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구속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려는 개인주의를 의미한다. 반면, 질적 개인주의란 “역사적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개인들이 각기 남과 구분되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이상”으로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질적 유일성과 대체 불가능성이라는 개인적 가치를 유지하려는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짐멜은 대도시에서 개인의 정신적 삶이 결국 이 두 개의 개인주의의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혹은 “투쟁과 분규”를 통해 형성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2.

 

게오르그 짐멜의 설명은 대도시에서 서정시의 역할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대도시가 감각적 자극의 끊임없는 흐름을 낳고 그에 따라 정신적 삶의 영역에서 개개인은 둔감함과 신경과민에 내몰리면서도 고유성을 유지하는 질적 개인으로 남고자 하는 열망을 품게 된다면, 그것은 대도시와 정신적 삶의 영역에서 서정시가 할 일이 적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서정시란 사물들을 익명의 교환가치에 의해 환원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사물 각각의 고유성에 대한 구체적 관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서정시에 대한 오래된 규정 중 하나가 ‘서정시는 사물의 꿈이다’라는 것을 상기해 보라. 또한, 감각적 자극들에 매몰되거나 이에 휩쓸려 신경과민과 둔감함에 치우지는 대신 넘치는 자극들을 수용하여 고유한 내적 반응을 생성시키고 이를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주체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것이 서정시이기 때문이다. 둔감함대신 일사일언(一事一言)을, 교환과 환원대신, 질적 고유성을 택하는 것이 대도시의 자극에 의해 계발되면서도 동시에 정신적 삶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질적 개인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시적 주체의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의 대도시 형성 경험에 나타난 문학적 표상과 재현의 예를 직접 드는 것이 긴 설명을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조선에 근대적 도시가 본격적으로 성립되던 1930년대의 한 정신 풍경의 지형도를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서 단적으로 일람할 수 있을 것이다.

 

 

(1)

가로수(街路樹) 이팔마다 발발(潑潑)하기 물고기 같고 유월(六月)초승 하늘아래 밋밋한 고층건축(高層建築)들은 삼(杉)나무 냄새를 풍긴다 ( …중략)

풀포기가 없어도 종달새가 나려오지 않어도 좋은, 푹신하고 판판하고 만만한 나의 유목장(遊牧場) 아스팔트!

 -정지용, 「아스팔트」 중에서

 

 

(2)

그러나―왜 나는 미끈하게 솟아 있는 近代建築의 위용을 보면서 먼저 鐵筋鐵骨, 시멘트와 細砂, 이것부터 선뜩하니 감응하느냐는 말이다

 

(… …중략)

 

나는 오늘 大悟한 바 있어 美文을 避하고 絶勝의 風光을 隔하여 蕭條하게 往生하는 것이며 宿命의 슬픈 透視癖은 깨끗이 벗어 놓고 溫雅慫慂, 외로우나마 따뜻한 그늘 안에서 失命하는 것이다.

                    

- 이상, 「종생기」 중에서

 

 

(3)

서울의 이곳저곳에 뛰어난 근대적 <데파트멘트>의 출현은 1931년도의 大京城의 주름잡힌 얼굴 위에 假裝하고 나타난 <近代>의 <메이크업>이 아니고 무엇일까(… … 중략) 이 <메이크업>한 <메피스트>의 늙은이가 온갖 근대적 시설과 機構感覺으로써 <젊음>을 꾸미고 황폐한 이 도시의 거리에 다리를 버리고 저물어가는 황혼의 하늘에 노을을 등지고 급격한 각도의 직선을 도시의 상공에 뚜렷하게 浮彫하고 있다.

밤 하늘을 채색하는 찬란한 <일류미네이션>의 人目을 현혹케 하는 변화―수백의 눈을 거리로 향하여 버리고 있는 들창―.

-김기림, 「都市風景 1․2」 중에서

 

 

1930년대에 이르러 경성은 완연하게 근대적 도시의 면모를 지니게 된다. 통계에 따르면, 1928년 현재 경성의 인구는 약 31만 5천이었으나 1934년에는 38만 2천 명에 이르며 1941년에는 무려 97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완연한 성장이 아닐 수 없다. 근대적 도시가 형성됨에 따라 지식인들의 도시 문물 체험은 일상적이면서 동시에 문제적인 것이 된다. 많은 작가들이 소위 ‘산책자’로서 도시의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새로운 문물에서 ‘신기성’을 발견하고 동시에 새롭게 도입된 근대 문물이 자극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따라 부유하는 군중의 모습을 발견했고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관견기로만 간주될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대도시의 넘쳐나는 감각적 자극들의 홍수 속에서 사태를 고유한 방식으로 파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당대의 대표적 모더니스트로 꼽히는 정지용, 김기림, 이상 등은 근대 도시 문물의 상징인 고층 건물에 대한 각기 다른 인상을 기록한 글들을 남기고 있는데 이 글들은 이들이 속도감 있게 육박해오는 근대와 근대적 도시에 대해 보여준 인식의 차이와 그에 따른 미학적 태도의 차이를, 그리고 그 결과 각자의 고유성이 발원하는 지점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정지용은 근대 문물의 상징인 낯선 고층건물에서 ‘杉(삼)나무 냄새’를 느끼고 아스팔트에서 유목장을 상기한다. 이는 낯설고 새로운 것을 친숙한 감각을 통해 전유하는 정지용 특유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근대 도시의 넘쳐나는 자극들을 감성적으로 전유하여 새로운 이미지로 벼리는 것이 정지용의 방식이다. 반면 이상은 낯선 자극을 감성적으로 전유하여 친숙한 이미지들의 결합체로 변환시키는 대신 정공법을 택한다. 그는 근대건축의 위용을 보면서 무엇보다 먼저 철근철골, 시멘트와 세사 등을 “선뜩하니 감응”한다고 말하며 이를 스스로 ‘슬픈 투시벽’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근대와 근대 도시에서의 삶을 해부학적 시선으로 투시하는 것이 이상의 방식이다. 김기림의 태도는 또 다르다. 각기 근대와 근대 도시의 감각적 전유와 수학적 환원으로 환언될 수 있는 정지용과 이상의 태도와 달리 그는 고층 건물의 외관에서 ‘메이크업한 표정’을 읽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근대 도시의 물리적 알리바이로부터 매혹과 불안이라는 양가적 정서를 느낀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일종의 신경증이라고 표현될 만한 성질의 것이다. 근대 도시의 산물을 익숙한 감각에 의해 치환하고 전유하거나 대도시라는 괴물을 수학적 알고리즘으로 해부하고 포획하는 태도와 달리 김기림은 근대 도시가 지시하는 숨은 기표를 더듬으며 때론 그것을 매혹으로 때론 그것을 불안으로 풀어내고 있다. 김기림의 작품에 나타나는 근대도시에 대한 양가적 태도가 이런 신경증적 태도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1930년대에 대도시가 본격적으로 성립됨에 따라 작가들은 그것이 주는 새로운 감각적 자극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이에 대해 고유한 대응을 해나갈 것인가를 각자의 방식으로 모색했으며 그 귀결이 그들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3.

그렇다면 최근의 사정은 어떠한가를 간략히 살펴보기 위해 최근의 시 두 편을 더 읽어 보자.

 

(1)

도시는 수많은 유리알을 낳는다

 

도시의 유리체를 통과한 것들은

유리체 통과의 꿈을 꾸지 않는 것들과 함께 있지만

유리체를 통과하지 않은 것들과 같지 않다

아직도 뒹굴며 꿈꿀 뿐이다.

 

돌아온 것들은 죽고 완성된 것은 훼손된다

꿈을 통과하지 않은 것들만 밖에서 천예(天倪)의 숨을

쉰다. 유리체는 녹화되지 않고 영원히 비어 있다

구름을 향해 그들은 불구의 몸으로

가지를 뻗는다

 

이미 사라진 것의 남은 존재들은

지나간 거리에 긴 그림자를 끌기 시작한다

오늘도 혼돈은 눈을 감고, 길을 차단하고 돌아와

깨어나지 않는 유리알 속으로 사라진다

-고형렬, 「유리알 도시의 빌딩 속에서 - 고귀한 삶을 빙자한 숲의 은유」 전문

 

 

(2)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 낸다. 눈빛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빛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소리. 단추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 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 이재훈, 「명왕성 되다」 전문

 

 

(1)이 이미 경험의 본원적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로 자리 잡은 도시를 단적으로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라면 (2)는 도시에서 질적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겪어내는 정신의 운동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우선 인용(1)을 보자.

유리는 바깥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다른 세계를 환기시키는 동시에 스스로 차단막으로 기능한다. 이 이미지는 도시의 심리적 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는 얼핏 보아 유리와 숲의 대립 구조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도시 자체가 이미 매혹과 환멸, 방랑과 귀환, 순수와 퇴화의 심리 구조로 축조된 것임을 적실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도시는 매혹으로도 환멸로도 펼쳐질 수 있는 감각적 자료들을 끊임없이 생산하여 주체의 감성에 기입한다. 넘치는 자극들로 인해 익명성과 은닉의 편안함 속으로 퇴거하는 것도, 넘치는 자극들을 수용하여 질적 개인으로 재탄생 하는 것도 모두 가능하다. 이처럼 서정시가 자극의 감성적 전유과 감각적 표현을 통해 도시인의 정신적 삶을 개변시킬 수 있는 격려가 될 수 있는 여지는 항상 도시가 낳은 피로감을 토로하는 것을 반복할 위험과 동시에 존재한다. 인용(2)를 보라.

이 시의 배경이 되는 것은 출퇴근길의 2호선 지하철이다. 이 시의 주체는 지금 익명과 소외, 그리고 기계적 규칙성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다. 이것이야말로 도시 생활자의 정신적 삶에 대한 노골적 은유가 아닐 수 없다.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생(生)”, 모든 대면 접촉이 시간을 두고 익명성의 궁륭이 되는 부박한 삶의 한 가운데에서, 게오르그 짐멜식으로 표현하자면 연속적인 익명적 자극이 끊임없이 주어지는 도시적 삶의 한 가운데에서 이 시의 주체는 질적 개인으로의 탄생을 꿈꾼다.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하고 묻는 것은 삶의 고유성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열망의 불씨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심회는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는 말을 통해 역설적으로 다시 한 번 표현된다. 폭풍이란 바로 기계적 삶의 리듬을 뒤흔들 파국이 아니겠는가? 일상에 한 번 생긴 파국은 언제나 치명적이다. 그것은 항상 이미 생긴 파국이기 때문이다.

시인 김수영은 “도시의 피로”를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새로운 삶의 씨를 틔우는 텃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아니, 그 가능성을 믿으며 도시의 피로, 바로 거기로부터 삶의 새로운 지평이 발원하기를 열망했다. 신경과민과 둔감함, 그리고 환원의 피로가 도시의 것이라면 새로운 감각이 탄생하고 피로로부터 신세계로의 발원을 가능하게 하는 씨앗을 품고 있는 것도 도시이다. 서정시는 토로하고 전유하고 창조하고 싹 틔운다. 갑을 시대에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 다시 한 번 필요한 까닭은 우리가 누구도 양적 보편성으로 환원되는 개성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둔감에 매몰되는 재난에 대해 시만한 방재시스템이 따로 없다. 

 

_ 출처 : <시인수첩>, 2014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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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왕성 되다>. 영상 : 윤형철 감독. 영상 출처 : 유튜브 

 

 

<재킷을 입은 시인>. 영상 : 윤형철 감독. 일러스트 : 우소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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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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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1일 서울과기대에서 <젊음, 시로 폭발하다> 행사가 있었다.

최치언 형의 연출과 극단 <두목>이 함께 했다.

이병률, 강정, 김경주, 오은, 조인호, 장수진 시인과 함께 출연했다.

이날 박성훈 배우가 <명왕성 되다>를 낭송했다. 고맙다! 성훈아.

나는 <재킷을 입은 시인>을 낭송했다.

수업을 더 늦출 수 없어 2부를 보지 못해 아쉬웠다.

뒤늦게 뒷풀이 자리에 합류했다.

다시 만난 2인조 밴드 <투명>과 영상작업을 한 윤형철 감독과의 만남은 오래 남을 것이다.

 

 

<명왕성 되다>. 낭송 : 박성훈 배우. 영상 : 윤형철 감독.

 

 

<투명>의 민경준, 정현서 씨와. 정현서 씨와는 동갑내기여서 친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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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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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의 순례자

- 이재훈론

 

 

김혜영

 

 

 

1. 기원을 향한 아득한 향수

 

원시 부족사회는 그 집단을 다스리는 위대한 아버지가 있었고,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법과 심판을 수용해야 하는 윤리적 구속과 그 속박을 끊고 감히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고픈 욕망도 함께 가졌을 것이다. 아버지의 법을 지키는 것과 아버지의 법을 위반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는 종교든 세속의 정치권력이든지 언제나 의식의 틈새를 비집고 출현하는 사건이다. 가장 작은 집단인 가족 안에서 아버지가 차지했던 권력은 어린 아들에게 전지전능한 아버지의 환상을 품게 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뿐만 아니라 원시 사회의 추장이나 고대 국가의 왕이 소유한 절대 권력이 갖는 아우라가 어쩌면 자연스럽게 전지전능한 그 어떤 절대적 존재에 대한 종교적 사유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고대국가의 왕이 소유한 신성함은 종교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왕의 집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금기와 터부 역시 내포하고 있다. 그 절대적인 아버지가 현대에서는 여러 번 살해되었고 끊임없이 전복되고 있다. 기원으로서의 아버지를 해체한 현대 문명 속에서 고독한 개인들은 현상의 물질적 가치 혹은 생존을 위한 가혹한 경쟁체제에 매몰되어 황하에 익사될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이재훈의 시 세계는 기독교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하여, 존재의 기원에 대한 상상과 별을 노래하는 시인의 깊고 푸른 여정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적 공간은 광활하고 존재의 깊은 심연에 대한 탐색을 추구한다. 첫 시집인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는 “말”이라는 상징적 동물과 언어라는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시적 화자는 상상 속의 말을 타고 아득한 존재의 기원을 찾아 중세의 기사처럼 순례를 떠난다.

 

   1

 

   그곳을 찾았을 때

   모든 시간은 무너지고

   가없는 기억의 언덕도 무너지고

   또닥또닥,

   희미한 발굽 소리만 들렸는데

 

   2

 

   잠든 말, 묵상도 없는 말들이 벽에 붙어 있다 너의 소리를 들으려고 널 만진다 그제야 너는 벽화가 된다 널 만지면 황소가 되었다가 사슴이 되었다가 초원을 가로지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타 노래를 부르는 추장이 된다

 

   ―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부분[각주:1]

 

세계의 근원을 기독교에서 로고스 즉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거룩한 신의 말씀으로 창조된 우주와 인간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 시인은 맹목적으로 신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기원에 대한 역사를 쓸 야심을 갖는다. 이 세상에서 아무도 가지 않는 나만의 시원, 나만의 언어 찾기에 골몰하는 것이다. 그가 타고 가는 말은 고대 토템에서 부족들이 숭상했던 여러 동물들 즉 황소, 사슴, 말, 돼지, 매, 뱀 가운데 하나이다. 시인이 말을 선택한 것은 말을 타고 하늘을 날고픈 비상의 의지와 함께 언어의 연금술사를 꿈꾸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사명은 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언어에 자신만의 새로운 언어의 집을 건설해, 커다란 변화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을 지향하는 시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그의 첫 시집이다.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내 목을 자르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라고 절연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재훈의 시적 여정에서 이토록 담대한 선언이 또 있겠는가. 자신의 목을 스스로 자른다는 것은 자살의 의미보다는 성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부분이다. 예수의 비범한 능력으로는 죽음의 잔을 피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 선포한 진리를 위해 죽음의 길을 스스로 걸어간 예수와의 동일시가 비쳐진다. 예수가 유대교의 모세 신앙을 중심으로 한 유일신 개념과 선택받은 민족에 대한 우월의식을 타파하고 보다 넓은 보편성의 종교로 방향을 전환한 것처럼 이재훈이 시인으로서 지향하는 것은 새로운 자신만의 기원 찾기인 것이다.

인간 존재의 본질과 아득한 시원에 대한 탐색을 지향함에 있어서 아버지를 위반하는 아들의 출현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이다. 중세나 16,17세기의 종교시에는 전능한 하느님에 대한 찬미와 신성한 섭리에 부합되는 삶을 살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20세기 이후의 종교시는 신에 대한 헌신이나 찬미 보다는 신으로부터 이탈한 현대인의 초상이나 신을 전복하려는 시도를 한다. 남성적인 아버지 신에 대한 반기로써 여성시인들은 가부장제의 모태로서의 아버지 신을 거부하고 살해하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한다. 이재훈의 시 곳곳에 스며있는 종교적 상징과 이미지는 아버지 신을 살해하고 아들로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보다는 그 어떤 근원에 이르기까지의 혼란스러운 순례의 기록으로 읽혀진다. 첫 시집에서는 낭만주의적 사유의 흔적을 보이면서 아득히 먼 고대의 시공간을 배회하는 영혼의 몸짓을 묘사하고, 둘째 시집인 <명왕성 되다>에서는 자본주의라는 물신 사회의 왜곡된 이미지를 황하의 다양한 풍경 속에 풀어놓는다. 욕망과 자본이라는 이교도의 신을 위해 예수라는 인격신을 살해한 현대 문명의 기괴한 얼룩을 스케치한다. 대도시의 풍경과 중국을 관통해서 흐르는 황하 이미지를 중첩적으로 겹쳐 놓음으로써 고대 문명과 현대 문명의 이질성과 여전히 삶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을 펼쳐 보인다.

모세는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선언함으로써, 절대적 진리가 감각적 대상이 아닌 정신적인 것임을 그의 백성들에게 각성시킨다. 고대 문화에서는 이집트 신화처럼 여러 다양한 동물 신의 형상과 태양신 ‘라’ 의 상징이 지배적이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영원히 존재하고, 무한히 자비와 축복을 베푸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이라는 유일신의 개념은 이전의 다신교의 전통을 억압해 버린다. 예수가 죽은 이후에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한 유대인 바울 역시 육체 보다는 정신적 사랑의 우위를 설파한다. 그러나 이재훈은 그러한 가치에 함몰되지 않고 감각의 순수성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그의 시「수선화」에서는 한밤중의 몽정인지 자위인지 알 수 없지만 사춘기 소년의 육체에서 꽃피는 생명의 노래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한밤중에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을 잘 무렵이면, 내 몸에 꽃씨 앉는 소리가 들린다. 간지러워, 암술과 수술이 살 부비는 소리가 사물거리며 온몸에 둥지를 틀고, 어머 꽃피네, 마른버짐처럼, 간지러운 꽃이 속옷새로 피어나네, 내 몸에 피는 꽃, 어머 내 몸에 핀 꽃, 나르키소스의 영혼이 노랗게 물든, 수선화가 핀다, 아름다운 내 몸, 노랑 꽃파랑이 쓰다듬으며 어깨에서 가슴을 지나 배꼽으로 핀 꽃과 입맞추고, 시커면 거웃 사이에도 옹골지게 핀 꽃대 잡는다, 아아, 아 에코가 메아리치네, 아름다운 내 몸, 거울에 비추어, 아아아 에코가 흐느끼네, 내 몸이 하분하분 물기에 젖네, 꽃들이 더펄거리며 시들어가네, 나르키소스여 내 몸에 오지 마소서 五慾에 물든 몸 꽃피게 마소서

   한밤중이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들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나

 

   ― 「수선화」 전문[각주:2]

 

사춘기 소년이 겪는 성적 욕망의 발산을 수선화의 이미지를 통해 묘사하면서, 금욕을 미화시키는 종교 사이에서 갈등하는 소년의 내면을 보여준다.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가 자기애에 빠진 모습도 동시에 연상시킨다. 나르키소스가 연못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연못에 빠져드는 모순을 두려워하는 시적화자의 심적 갈등이 구체화되어 있다. 자기애를 지향하는 이드의 폭력적인 충동과 타자에의 사랑을 강조하는 초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심리적 에너지가 예술로 승화된 시이다. 생명으로 충만한 육체의 순수한 욕망과 그것을 억압하려는 윤리 사이에서 고민하는 소년의 긴장과 두려움이 노란 수선화처럼 어둔 밤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시이다.

 

2. 명왕성처럼 퇴출당한 신의 아들들

 

프로이트는 <종교의 기원>에서 종교와 신경증과의 상관성을 흥미롭게 진행하면서 정신적 외상에 대해 설명한다.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라는 논문에서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탈출시키고 새로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려한 모세를 살해한 기억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세가 가르쳐준 유일신의 교리가 그들을 너무 억압했기에 모세를 살해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를 죽인 죄의식과 함께 모세의 신앙으로의 회귀를 전승을 통해서 이루어왔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를 죽인 후, 죽은 예수에 대한 사랑을 재확인하고 예수의 성찬식을 되풀이하는 종교적 의식과 유사하다. 이 같은 증상이나 사고의 패턴이 신경증 환자에게도 나타난다고 그는 주장한다. 강박증을 가진 환자들이 무엇인가를 금기시하거나, 강박적으로 특정 행위를 반복하는 것 역시 속죄 혹은 자기 방어의 충동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의 토템 신앙에서 부족의 상징으로 신성시하는 동물을 잡아 서로 나누어 먹는 전통이 기독교에서 예수의 몸과 피를 나누어 먹는 의식으로 계승되었다고 보고 있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는 현대 종교도 고대 원시 사회의 토템 신앙과 다신교의 여러 이미지들을 계승하고 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로버트슨 스미슨의 토템 이론을 바탕으로,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던 무리는 토템을 받드는 형제를 중심으로 하는 무리로 자리바꿈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아버지로부터 승리를 쟁취한 형제들은 아버지를 죽인 뒤부터 아버지의 소유였던 여자들을 포기하고는 족외혼속을 좇게 되었다. 이로써 아버지의 권능은 붕괴되고 가족은 모권 중심으로 재편성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들의 양가적인 감정 태도는 그 이후의 전 발전 단계에 걸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형제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특수한 동물을 토템으로 세웠다. 이 토템 동물은 형제들의 조상이자 수호령신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다치게 하거나 죽여서는 안되었다. 모듬살이의 남성들은 일년에 한 번씩 한자리에 모여 의례적인 향연을 벌였는데, 그들은 바로 이 자리에서 토템 동물(평소에는 숭배의 대상이던)을 죽이고는 모두 그 고기를 찢어 나누어 먹었다. 모듬살이의 남성이면 어느 누구도 빠질 수 없는 향연은 아버지 살해의 의례적인 반복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사회적인 질서, 윤리적인 규범, 그리고 종교가 시작되었다. 로버트슨 스미스의 토템 향연과 기독교의 최후의 만찬 사이의 유사성은 무수한 내 선배 학자들의 주목을 환기시켰다.[각주:3]

 

기독교의 만찬의식을 고대의 토템 동물을 제사지내고 서로 나누어 먹는 전통과 연관시키는 것은 흥미롭다.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절대적인 아버지의 잔영과 그 아버지를 살해하는 아들들의 이미지는 인간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증상임을 설명하고 있다. 개인의 측면에서는 유아기 때 겪은 외상 같은 것들이 잠복되어 있다가 사춘기나 성인기에 반복되어 출현하는 신경증의 형태로 나타난다. 종교에서도 부친살해와 그에 대한 죄의식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이성의 억압을 피해 은폐되었다가 전승이라는 구술의 방식 혹은 문학이나 예술의 형태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재훈의 시 「할례의 연대기」에서는 어릴 적 경험한 폭력이 어른이 된 이후에도 수족관의 물고기를 보면 반복해서 떠오르는 양상을 볼 수 있다. 동네 형들의 짓궂은 장난에 저항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가 내면에 증오심을 차곡차곡 쌓지만 한편으로는 그 감정을 억압해버린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였던 수족관의 물고기를 풀어주는 행위로 전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동네 형들이 내게 침을 뱉던 날,

하얗다며 얼굴에 진흙을 바르던 날,

공중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오줌을 내갈겼다.

붉은 얼굴로 욕하는 연습을 했다.

다행히 집엔 물고기가 있었다.

수족관 유리에 입술을 대고 혀를 내밀었다.

차갑고 막막하여 아름다운 감촉.

침묵을 알아버린 호흡.

나는 방 안에 박혀 물고기와 놀았다.

온 몸이 달아올라 수족관에 다리를 비볐다.

물고기 때문이었다.

악한 아이를 죽이지 못하고

풀밭 위에 누워 한없이 울게 된 것은.

나는 시퍼런 칼을 든 모험의 소년이고 싶었다.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방법쯤은 알고 있었다.

침착하고 고요하게 모두 죽이고 나면,

평정이 온다는 것을.

그것이 운명일지라도.

물고기를 호수에 풀어 주었다.

물에 놓자마자 내 발등을 핥고

허벅지를 핥고 사타구니를 깨물고는

서서히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슬쩍, 물 위에 비치는 내 몸.

온 몸에 비린내가 났다.

가랑이에서 썩은 내가 났다.

난삽한 사랑이 시작되었다.

과분하게 영원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

 

― 「할례의 연대기」 부분[각주:4]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신성한 행위이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하는 거세의 의미를 내포한다. 신성한 행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기가 선행한다. 즉 인류사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근친상간에의 금지일 것이다. 어머니와 자매들에 대한 욕망을 절단하는 의미로서의 거세가 기본적인 의식의 구조로 잠입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갖는 선민의식도 거세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거세의 상징인 할례를 받아들임으로써 거룩한 신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이재훈은 소년의 거세 공포와 함께 거세를 감행하는 절대적인 아버지가 되고픈 욕망을 동시에 표출하고 있다. 그렇지만 감히 폭력을 행사하지 못한 채 풀밭에서 우는 소년은 “나는 시퍼런 칼을 든 모험의 소년이고 싶었다.”라고 독백하면서, 사악한 형들에게 폭력적으로 진압하려는 의지를 강화시킨다. 하지만 이 욕망은 초자아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수면 아래 잠기고 이드의 욕망으로 억압될 뿐이다. 그렇지만 이 억압된 충동이 갑자기 수족관의 물고기를 호숫가에 풀어줘 버린다. 의식의 틈새를 뚫고 나오는 이 무의식적 행동은 욕망의 자유로운 분출과 맞닿아 있다. 지나치게 윤리를 강조하는 삶의 굴레를 벗어나고픈 다양한 충동들, 성적 충동이나 폭력에의 욕구 등을 분출하는 방식에서 오히려 신의 윤리를 전복하고픈 욕망이 불현듯 출현한다. 그리고 그는 과감히 “과분하게 영원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라고 선언한다.

고대의 전지전능한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들이 얻은 자유는 새로운 사회의 틀을 짜면서 공존의 삶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현대의 양상은 아버지의 절대적 자리에 자본이라는 물신이 차지한 듯하다. 형이상학적 사유보다는 감각적 실존에 더 함몰되고, 정신보다는 육체의 가치에 더 매몰되는 듯하다. 그의 시 「만신전(萬神殿)」에서는 구원 같은 개념보다는 대도시에서 출현하는 유령과도 같은 욕망의 흔적이 그려져 있다.

 

저는 오래전 아버지를 죽이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뒤로 수많은 신들이 제 속에 들어와 소리를 지릅니다. 홀짝 홀짝 살들을 빨아 먹습니다. 가슴이 휑뎅그렁해져서 사다리를 타고 허공 위에 올라갔습니다. 십자가가 네온을 켜고 붕붕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오리온을 찾으려고 별자리를 하나씩 짚어 보았습니다. 거인의 눈과 코와 활 오늬의 도톰한 입에 손가락이 빨려 들어갔습니다.

 

― 「만신전(萬神殿)」 부분[각주:5]

 

위의 시에서 도시를 배회하는 유령 같은 도시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쓴 연작시인「대황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황하는 고대 중국 문명의 젖줄기로서 생명의 물이었지만 이재훈의 시에 등장하는 황하는 불모의 이미지이다. 마치 엘리엇의 「황무지」처럼 풍요의 물이 아니라 메마른 사막과 같은 느낌이 강하다. 유순하면서도 장대하게 흐르는 물줄기는 동양철학에서는 도의 이미지로서 절대적인 진리의 현현처럼 간주되지만, 그의 시에서는 낙원을 상실한 채 끝없이 질주하는 문명의 속도에 지친 낙오자들이 드나드는 길목처럼 느껴진다. 첫 시집에서 원시 시대의 신성하고 거룩한 별을 동경하던 시적 자아가 척박한 도시 문명의 길바닥을 맨몸으로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왜소화된다. 그래서 결국은 대다수의 시민들은 태양계에서 어느 날 문득 퇴출당한 명왕성처럼 신의 아들의 지위를 상실한 채 서서히 잊혀져가는 익명의 존재들이 되어간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 「명왕성 되다(plutoed)」 전문[각주:6]

 

이재훈의 「명왕성 되다(plutoed)」시편은 최초의 아름다운 말의 부족을 찾아 떠난 시적자아가 팍팍한 도시에서 발견하는 자화상의 한 단면이다. 아름답고 성스러운 별의 영혼임을 인식하는 연금술사가 문득 발견한 것은 초라한 소시민의 일그러진 얼굴이다. 늦은 밤 지하철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익숙한 얼굴들의 피로감이 현대 도시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더 이상 전지전능한 신의 자랑스러운 아들도 아니고 욕망의 극한까지 질주하는 악동도 아니다. 일상의 사소한 의무감에 묶여 묵묵히 달팽이처럼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시인이 발견하는 이 작고 왜소한 자화상이 갖는 위력은 이런 데 있다. 찬란하고 거룩하게 빛나는 별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처럼 사라지는 ‘소멸’을 꿰뚫는 시선이 예언자의 눈빛이다. 종교의 환상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허무를 처절할 정도로 직면하는 용기가 빛난다. 유대인처럼 선택받았다는 과잉된 자기 확신도 거부하고, 아버지의 억압적인 거세를 조롱하고 비웃을 수 있는 시인의 말은 하늘을 날아가는 적토마처럼 독자의 인식에 빗금을 지른다. 지나치게 엄격한 윤리 역시 억압이 되어 그 욕망을 대리적으로 분출하게 마련이고, 자유를 탐닉하는 자아 역시 먼지처럼 세상에서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불멸을 꿈꾸는 연금술사의 끈질긴 욕망은 새로운 사건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제물로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 그 비밀의 성소(聖所)가 내 집이었다./ 소멸이/ 내 먹는 밥이었다.”(「연금술사의 꿈」)에서처럼 소멸을 지향하는 찬란한 꿈이 빚어내는 새로운 세계가 궁금해진다. 자신의 몸을 죽여 제물이 된 고대의 토템 동물처럼, 혹은 살해된 모세처럼,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처럼 시인은 자신의 말이 아득한 먼지처럼 사라질지라도 누군가의 밥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기억의 흔적처럼 전승을 통해 출현하는 종교적인 사건처럼, 혹은 신경증 환자의 외상처럼 상처로 얼룩진 욕망들이 그의 시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아주 작은 먼지일지라도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별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그의 통찰력이 환한 빛을 비춘다. 연금술사는 자신의 몸을 내어주듯 자신의 내밀한 언어를 내밀어 허무한 생을 건너는 불사조의 깃털이 된다.

 

 


출전 : <시와사상>, 2012년 가을호.

 

 

  1. 이재훈,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문학동네, 2005. p. 19-21. [본문으로]
  2. 이재훈,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문학동네, 2005. p. 18. [본문으로]
  3. 지그문트 프로이트, <종교의 기원>,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7. p. 420-1. [본문으로]
  4. 이재훈, <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p. 2-73. [본문으로]
  5. 이재훈, <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p. 36-7. [본문으로]
  6. 이재훈, <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p. 25. [본문으로]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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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종합한다면 시가 다른 예술 장르와 구별해본다고 할 때, 시는 무엇보다도 예술적 충동의 맨 앞자리에 놓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적 충동의 맨 앞자리에 놓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다시 한다면, 앞자리에 놓인다는 것을 다른 말로 치환해보건대 시는 시원始原의 자리에 있으려고 한다, 탄생의 자리에 있고자 한다, 라는 것입니다. 이는 프랑스 철학자인 장 뤽 낭시Jean-Luc Nancy의 말을 인용해보면 더 확고해집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을 통해 의미의 시원에 도달한다면, 그 방식은 ‘시적으로!’라는 방식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시가 그런 도달의 수단 혹은 중개를 이룬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의 뜻인데, 즉 오직 그런 도달만이 시를 구성한다는 것, 그리고 시는 그런 도달이 일어날 때에만 생겨난다는 뜻이다.

 

이 말대로, 우리가 시를 쓴다는 것은 시를 쓰는 행위 자체가 의미의 시원에 다다르는 행위라는 겁니다. 의미의 시원에 다다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의미의 시원 그 자체입니다. 좀 더 말을 바꿔보자면, 시를 쓴다는 것은 언제나 ‘신생의 사건’이 되려고 하는 충동과 관련된다고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항상 ‘신생의 사건’을 스스로 겪거나 체험하거나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

 

어쨌거나 프로이트가 생각할 때, 아이가 반복적으로 팽이를 던지는 행위는 쾌락원칙 너머에 있다고 봅니다. 쾌락원칙에 충실히 따르면 몇 번 하고 스스로 만족해야 되는데, 만족하지 못한다는 얘기죠.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가 있다, 이게 반복강박이죠. 쾌락원칙 너머의 이 반복강박은 ‘생의 충동’이 아니라 ‘죽음의 충동’과 관계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 ‘죽음의 충동’의 현장이 바로 앞서 읽었던 보들레르의 「여행」이라는 시입니다. “죽음이여,…(중략)… 닻을 올리자!”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죠?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우리는 죽어야 다시 살아납니다. 죽지 않으면, 언제나 낡은 생의 찌꺼기가 남아 있습니다. 낡은 생의 찌꺼기를 완전히 버려야지만 우리는 다시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진짜로 죽으면 다시 살지 못하잖아요.(웃음) 그러니까 죽되 죽지 않아야 합니다. 죽되 죽지 않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게 바로 시 쓰기라는 얘기입니다. 시를 쓰는 것, 그게 언제나 ‘신생의 사건’이 되는 거라면, ‘신생의 사건’은 결국 무엇인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완전히 새로 사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꼭 시에만 있는 것만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시에 유별나게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왜 유별나게 많은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시는 언제나 예술적 충동의 맨 앞자리에 놓이기 때문이죠.

이 신생의 분출은 창조하는 자로서, 창조하는 행위로서, 창조하는 내용으로서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하려는 욕망에 밀착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사람은 새로워질 때에야 항상 나다워진다고 느낍니다. 신생은 나의 회복인 것입니다. 즉, 신생에 대한 충동은 자신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욕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일성으로의 회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진짜 모습(true identity)의 세움이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시를 씀으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진면목―진정한 자기 모습으로 도달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여느 시인들보다도 더 시적인 소설을 썼던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는 가장 환상적인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언제나 ‘인공적인 것’에 대한 저항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다.” 현실에 대한 저항이 뭡니까?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거죠. 즉, 이 말은 시가 ‘자연스러움’(‘당연함’)의 회복임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괴테도 이미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순수한 본질 안에서 고려된 시는 말(parole)도 예술―기술(art)도 아니다. 말이 아닌 것은, 시는 완성을 위해서 리듬과 노래와 육체의 운동과 시늉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이 아닌 것은, 모든 것이 ‘자연스러움(le naturel)’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움은 규칙들을 존중해야 하지만, 장인적 훈련의 억압적인 강제를 따라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언제나 영감이 피어오르는 고양된 정신이 특별한 목표나 계획도 없이 토로하는 진솔한 표현으로 존재한다.” 그렇습니다, 시는 말로 썼지만 우리는 그것을 쓰는 순간 이미 춤추고 노래하고 몸짓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까 이성복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말씀드렸잖아요. ‘앵도를 먹고 무서운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어’의 뜻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앵도를 먹고 무서운 아이를 낳’으세요. 이것이 시입니다. 순수한 본질 안에서 시는 말이 아니니까요. 이미 몸짓이고 운동이고 무용이에요. 더불어 시가 예술이 아닌 까닭은 모든 것이 자연스러움에 근거하기 때문이라고 괴테는 말했습니다. 자연스러운 규칙들, 규칙들이되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있는 이야기는 서로 모순될 수는 있겠으나 크게 두 가지예요. 어쨌든 시는 우선적으로 자기표현의 발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기 표현은 단순히 있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순수하게 토로된 세계의 창조이자 의미의 시원 혹은 신생의 사건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결국 시 쓰기로서의 자기표현은 자기로부터 세계가 되는 일입니다. 이것을 다른 것이 되는 것, 이화異化, 독일어로 ‘Entfremdung’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ntfremdung’을 자주 쓰이는 의미대로 잘못 이해하면 ‘소외’가 됩니다만, 소외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고 버려지는 것이거든요. 헤겔에 따르면 ‘Entfremdung’은 자기로부터 이화될 때 비로소 자기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는 논지에서 쓰인 용어입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정리하자면, 시의 표현은 곧 이화이고, 이화는 곧 창조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는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행위입니다. 이 때문에 시는 언제나 생성의 첫 순간에 늘 있는 것입니다.

왜 시가 ‘쓰는 것’만으로 충족되는 것인지, 그 이유는 이재훈 시인의 시를 통해서 확인해봅시다.

 

산책길엔 언덕이 있다.

그날은 이상했다.

오르고 올라도 닿지 않는 거리를 헤맸다.

혼을 빼앗긴 것처럼.

늪에 빠진 것처럼.

뒷덜미를 놓아주지 않는 불빛이 있었다.

사위가 어둠에 둘러싸이면서

상점엔 불이 하나씩 켜졌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어둠이 안겨주는 거대한 정적을,

위대한 침묵을

나는 알지 못했다.

상처받은 한 친구를 생각했고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생각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바쁜 거리의 일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산책길엔 언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길목과 길목이 혀를 내밀어

내 몸을 떠받치고 있을 뿐.

타인의 인격을 규정하지 않기로 했다.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다.

장 그르니에가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빛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다.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은,

그 짧은 시간만큼은 황홀하겠지.

언덕이 있는 곳은 월곡月谷,

달빛이 있는 골짜기다.

언덕을 오르고

또 한 언덕을 오르면

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그 햇살의 순간처럼.

― 이재훈,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전문

 

이재훈 시인은 여기서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라는 말로 시가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그 이유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자인데 절대로 기적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시를 쓰되 온전히 다 이해되고 전부 해석되기를 희망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시원의 순간에 있으려고 하는 시적 충동은 시의 존재론적 양태들 중 하나로 들어갑니다. ‘묘사’는 이미 있는 것을 그리는 거잖아요. ‘묘사가 아닌 표현’이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복수성이 아닌 단수성, 시는 언제나 단수성을 지향합니다. 이것을 황동규 시인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옆놈 모습 닮으려 애쓰지 않는다”(「제비꽃」)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시는 공간적으로는 전개되는 게 아니라 언제나 압축됩니다. 왜냐하면 고밀도로 압축될 때에만 빅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압축되지 않는 것들은 폭발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터져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시는 시간적으로는 흐름이 아닌 순간입니다. 이재훈 시인의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에서 계속 ‘순간’이 지시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시는 순간에 대해서만 다루고 순간에 의해서만 다루어질 뿐, 흐름으로 의식화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시는 드러냄이 아닌 암시입니다. 왜냐하면 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창조는, 우리가 눈을 뜨는 시간에 금방 사라져버려요. 어느 한 순간에 창조되어버렸는데, 눈을 뜨는 그 시간에 이미 사라져버려요. 그러므로 우리는 시의 진지한 창조를 언제나 암시로써만 들여다볼 수 있는 거죠.

 

_ <현대시>, 2013년 2월호 중에서

 

 

Posted by 이재훈이
,

 

최근 출간된 이재훈의 시집 <명왕성 되다>에는 육성(肉聲)이 담겨 있다. 많은 젊은 시인들의 시가 현란하긴 하지만 그들의 시에서 삶의 무게가 직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재훈의 시집에는 2000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환멸과 고뇌가 격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재훈의 시는 ‘나’로부터 벗어나지 않지만 그 ‘나’는 사회로부터 오는 자극에 대해 격렬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그만큼 시대의 인장이 찍혀 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더욱 지독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전형적인 영혼을 살펴볼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 영혼은 시대에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만 반응하지 않는다. 세계로부터 고통 받는 그 감수성 짙은 영혼은 어떤 도주로를 뚫고자 한다. 그래서 영혼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시집을 여는 시인 「비비디 바비디 부」는 시인이 처한 현재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 눈은 카메라를 닮았다.

노출을 열고

몇 시간 동안 창밖을 보면

불빛만 남은 세계.

칼 맞고 피 흘리는 거룩한 세계.

지친 육체는 허공이 가져 가고

영혼만 달랑달랑 소란하다.

 

이재훈 시인의 눈에 비치는 세계는 어떠한 곳인가? 세계엔 불빛만 남아 있다. 그 불빛은 현란한 도시의 야경을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시인의 눈에는 폭력으로 인한 희생의 피가 묻어 있는 핏빛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폭력적인 세계는 희생자로 가득 찬 ‘거룩한 세계’다. 핏빛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시인의 육체는 지칠 대로 지치고 영혼은 “달랑달랑 소란”해질 정도로 빈곤해진다. 파괴된 영혼이 일으키는 소란은 도시의 소란과 관련된다. 이재훈 시인에게 서울이란 도시는 “나의 메디나,/ 시인들의 공화국”(위의 시)이다. 하지만 시인은 「만신전(萬神殿)」에서 “도시는 너무 시끄럽습니다. 가슴속에서 귀신들이 포식하고 구역질하는 소리 들립니다”고 하여 도시에 대한 구토감을 드러낸다. 시인에게 서울은 시인들의 공화국이자 귀신들이 시끄럽게 토하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도시에 대한 이러한 양가적인 태도는 보들레르 이후 현대 시인의 전형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재훈 시인은 그러한 태도를 직접적으로 격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포식하고 토하는 귀신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시인은 언제나 비상을 꿈꾸는 존재이다. 하지만 도시에서 사는 시인은 “마음껏 날고 싶었지만,/ 이곳에 살기 위해선 참아야 했”(「안드로메다 바이러스」)다고 한다. 이재훈 시인은 그러한 시인에 대해 ‘외계인’이라고 명명한다. 그 외계인―시인은 지구에 유폐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탈출을 꿈꾼다. 즉, “서로의 키를 재고 우쭐거리”는 수학의 미학이 지배하는 지구에서 다시 날고 싶어 하는 이 외계인은 “살아 나갈 도주로를 찾”(같은 시)는다. 그 도주로란 “아름다운 북극의 얼음 위에서/ 지혜의 말들을”(같은 시) 얻는 데로 나아가는 길이다. 하지만 그를 묶어 놓은 이 세계의 밧줄은 쉽게 풀리지 않을 테다.

이 세계에서 사는 삶이란 “육십억 분의 일일 뿐”으로 사는 것이며 “페트병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맥주 캔. 먹다 남긴 컵라면.”(「매일 출근하는 폐인」)과 같은 폐품으로 버려진 채 사는 것이다. 시인은 “하루하루를 버티다” “외치고 울부짖”(같은 시)을 수 있을 뿐이다. 지구에 유폐된 외계인의 삶은 이렇듯 쓰레기가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환멸과 구토 속에서 외치고 울부짖는 그는 언제나 ‘거대한 허무’에 맞닥뜨린다. 시인은 대부분의 도시인들이 그렇듯이 하루하루 버티는 삶을 살아나간다. 그는 시끄러운 도시 생활 속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여유도 가지지 못하고 갖가지 노동에 파묻혀 살아가야 한다. 「명왕성 되다」를 보면, 시인은 몽상에 잠기고 영혼을 비상시키기 위한 시간을 출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겨우 얻는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 시인만이 아는 내밀한 기억들로 가기 위해서 시인은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는다. 눈을 감은 시인은 자유로운 연상에 들어서고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면서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몽상은 지하철의 기계소리에 방해받고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런 리듬”은 시인의 몽상에 지속적으로 개입해서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한 현실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리듬은 시인을 옥죄는 오랏줄이다. 도시의 일상에 묶인 시인으로서는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들어갈 자신이 없”으며 “신성한 모험”도 의심스럽기만 하다.

「다정한 재봉사의 재판」을 보면, 이 세상은 “유리로 만든 방”이며 몽상하는 시인을 죄인 취급하기도 한다. 이 세계는 재봉사로 비유된 시인을 ‘유리방’에 가두고는 유리를 통해 보이는 세상을 보고 “그대로 옷감을 짜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몽상하는 시인으로서는 그러한 명령을 따라야 하는 일이 고통이다. 그는 “하늘을 날고 있는 제 모습을 짜고 싶었”으며 “저 먼 세계를 비상하는 영혼의 고난함을 짜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만한 이미지”만을 보여주는 세계―“문명의 숲”―는 시인이 “매일매일 똑같은 무늬를” 짜도록 강요할 뿐이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시인은 탈출을 더욱 더 열망하게 될 터,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다./ 열대를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킬리만자로」)라는 담담한 진술은 이러한 열망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고 하겠다. 시인이 원하는 것은 문명의 숲으로부터 벗어나 “위대한 숲의 시를 쓰”(같은 시)는 것이다. 그 숲은 열대와는 멀리 떨어진 겨울 숲이다. 겨울 숲은 “목숨까지 다 토한”(「겨울 숲」) 어떤 兄이 먼저 떠나간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문명의 숲’에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시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도시 생활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상황과 도주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시인의 말이 빚어진다. 하지만 ‘형’처럼 겨울 숲으로 떠나지 못하고 있던 자책감이 어떤 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내 입술은 봉인되지 못하고/ 부끄러운 고백들을 나불댔네”(「진흙의 봉인」)라고 말하기도 한다. 시인의 시는 “결국 슬픔이 되고 공허가 될 말들”이였으며 “징그러운 말들의 시체”(같은 시)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시인은 이 말들이 “반성의 포즈로 모두를 속일 수 있었”(「침묵의 세계」)다고도 말한다. 이러한 자기 부정은 또 하나의 반성으로도 볼 수 있겠으나 한편으로 어떠한 도주로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모색으로서도 읽을 수 있다. 위대한 숲의 시를 쓰고 싶었다는 고백만으로는 이 문명의 숲에서 겨울 숲으로 통하는 도주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는 우선 “혀를 깨무는 연습”(같은 시)부터 하여 ‘침묵의 시민’이 되는 데서부터 다시 출발하고자 한다. 왜 혀를 깨물고 침묵하고자 하는가? 침묵 속에서 소멸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소멸은 또 다른 생성으로의 길을 열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촛불도 아니고 감나무도 아니다.

미끈한 자동차도 아니고

달콤한 솜사탕도 아니다.

차갑고 텅 빈 사물에

쇳물을 들이붓고 싶다.

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이었다.

꿈을 꾸면

붉은 별 하나가 내게 떨어지는 사건이었다.

손이 델까 만지지도 못한 별이

마당에 내려와 날 또렷이 노려보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엎드려 울지 않겠다.

슬픔을 우스운 몸짓으로 과장하기 않겠다.

해거름에 사양(斜陽)을 보며 사흘을 울겠다.

그러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

그 비밀의 성소(聖所)가 내 집이었다.

소멸이

내 먹는 밥이었다.

― 「연금술사의 꿈」 전문

 

이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이 시는 앞으로의 시작(詩作)에 대한 시인의 각오를 보여준다. 슬픔을 과장하지 않겠다는 각오는 앞에서 언급한 “혀를 깨무는 연습”과 통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그 침묵의 연습은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시를 통해 드러난다. 그 침묵은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는 작업이다. 그 작업을 통해, 시는 에밀레종처럼 몸을 녹여 소멸시키고는 “에밀레 에밀레”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은 무엇이 될 수 있을 터이다. 그리하여 시의 목소리에는 몸이 녹아 들어가 있게 된다. 시는 육성(肉聲)을 내게 되는 것이다. 소멸을 통과하여 육성을 드러내는 시. 말의 연금술사가 되고자 하는 시인은 이 경지에 다다르고자 꿈꾼다. 이때 “차갑고 텅 빈 사물”은 시의 내밀한 세계―쇳물이 출렁대는 비밀의 성소―속으로 용해되고는 새로이 탄생할 것이다. 세계와의 지독한 불화와 이에 따른 자기비판은 이렇게 단단한 영혼의 다짐으로 나아간다. 이 시집의 첫 번째 시는 철저히 공허하기만 한 세계 속에서 “달랑달랑 소란”하기만 한 영혼을 보여주었다면, 이 시집의 마지막 시에서는 “빛나는/ 뜨거운 강철”의 영혼이 등장한다. 이렇듯 이 시집은 공허에서 단단함으로 나아가는 영혼의 드라마를 엮어내고 있다.

그런데 위의 시의 자기 다짐이 손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시집의 중추를 이루는 2부는 「대황하」 연작이 실려 있는데, 이 연작시는 불모의 세계 속에서 시인이 겪어야 하는 환멸과 고통을 뜨겁게 그려내고 있는 역작이다. 강렬한 이미지의 연쇄로 전개되는 이 연작시는 시인과 환멸스러운 세계와 뒤섞임을 환몽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세계는 모래의 강과 같은 황하로 비유된다. 「대황하 1」을 보면 “작열하는 사막에서 기다리고 기다”리고 있는 시인은 누런 모래의 세계 속에 빠지고 있다. 그런데 그 모래는 흡혈귀와 같이 시인의 피를 빨아먹는다. 시인은 “서서히 내 몸이 모래에 잠기지. 모래가 살갗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지. 물과 피가 다 빨려 가죽만 남았지. 모래가 사각사각 살가죽까지 갉아먹”는다고 진술한다. 시인의 기다림은 아마도 하늘로의 비상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이 사막은 그에게 비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막의 모래는 그의 몸에 달라붙어 그의 피를 빨아먹고는 결국 가죽만 남은 시인을 쓰레기처럼 폐기해버릴 것이다. 이 사막에서 비정한 현 한국 사회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시인이 현 한국 사회가 가하는 압력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한편, 시인은 더 나아가 “끝없이 깊은 모래 밑으로 물소리가” 들린다고 말한다. 사막은 역설적으로 강이었다는 것이다.

 

손가락 하나가 툭 꺽였다. 만져 보니 문드러져 툭 떨어져 나간다. 배를 만지니 손가락이 푹 들어가 내장이 만져졌다. 누웠다.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생은 연습이 없다. 단 한 번이면 족하다. 누웠다. 온몸에서 진물이 흘렀다. 누런 물이 땅으로 스민다. 누웠다. 스민다. 쏟아지는 모든 것들이 스민다.

― 「대황하 2」 부분

 

피를 빨아먹는 사막은 육체를 부패시키는 누런 황하임이 드러난다. 시체들이 누워 있는 이 세계에서 시적 화자의 육체 역시 부패하면서 누런 물을 흘린다. 즉 황하는 시체들의 진물로 이루어진 강이다. 「대황하 3」의 “누런 황토물이 거리에 솟구친다.”라는 구절을 보면 황하란 바로 도시의 거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시는 부패해가는 시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얼굴을 가린 채 눈빛만 쏘아 대는 사람들”(「대황하 3」)이다. 자신의 마음을 가리고 상대방에게 가하는 공격적인 눈빛은 삶의 부패를 드러낸다. 그 눈빛이 바로 ‘진물’일 것이며 ‘황토물’일 터, 「대황하 7」에서는 그 시체와 같은 얼굴 가린 사람들이 제법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다음은 이 시의 후반부다.

 

뜨거운 김을 쐬고 퇴근 무렵 자동차에 몸을 싣는다. 내 얼굴에 붉은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사람들은 이미 죽음 직전의 표정을 연습하고 있다. 나는 두통을 이기기 위해 투구를 쓴다. 도도한 웃음을 연습한다. 열기를 보았다. 빛이 열기 속에서 반짝반짝 드러났다. 시장(市場)이다. 죽음의 얼굴을 파는 시장이다. 뜨거운 빛 속이다.

 

도시의 거리인 황하는 또한 시장이기도 하다. 그들은 얼굴을 가리고 “죽음 직전의 표정을 연습”한다. 시인 역시 투구를 쓰고 얼굴을 가린 채 “도도한 웃음을 연습”하고 있다. 그 웃음이란 아마도 시장에 팔리기 위한 웃음일 것이며 결국 진실한 삶을 죽이는 웃음일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 직전의 표정 짓기를 연습하면서 살아나가야 한다. 팔리기 위해 사는 이들은 경쟁자인 상대방을 공격적인 눈빛으로 바라본다. 이 “뜨거운 빛”이 사막―황하의 열기를 만들어낸다. 시인은 이들 삶 속의 죽음을 ‘붉은 물줄기’로 상징화한다. 죽음의 표정을 짓는 이들의 얼굴엔 죽음을 가리키는 붉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그리하여 이 죽어가는 삶에는 언제나 시체 냄새가 날 것이다. 시인은 “몸 가죽을 슬쩍 잡아 찢는다. 온몸에 누런 물 내음이 가득 퍼진다”(「대황하 8」)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누런 물이란 물론 부패해가는 육체가 흘리는 진물이다. 그러므로 마실 수 없는 물이다. 죽음의 삶, 거짓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황하에서는 “실체는 없고, 허상만 가득”해서 “바닥이 보이지 않”(「대황하 9」)는다. 그곳에서는 “강물에서 물을 먹지 못”하며 “재갈을 물린 입으로 소리를 질러”야 하고, 그래서 “갑판에 비명이 가득”한 공간에서 사람들은 “생수 위에서 목말라 죽어”(같은 시)가야 한다.

「황하」 연작은 이 세계에 대한 시인의 지독한 환멸을 보여준다. 그 세계는 구체적으로 서울을 가리킨다. 서울은 “한여름에도 눈이 내리고/ 한겨울에도 태풍이 오는 곳”으로서 “일찍 배운 증오로/ 뼈와 살을 태우는 곳”(「비상」)이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 나타나곤 하는 이상 기온 현상이 수시로 닥치는 도시, 증오 속에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도시가 서울이다. “죽는 법을 배우지 못”하여 죽지 못한 시인은 이 속에서 “새들의 노래를” 부르는 자다. 그러나 어떻게 이 시체들로 가득 차 있는 공간에서 비상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대황하」 연작을 마무리하는 시인 「대황하 11」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쓴다. 다음은 이 시의 마지막 연이다.

 

붉은 눈물,

가만히 들어와 출렁인다.

거리를 걷고 있으면

온몸이 하늘로 붕 뜬다.

병든 몸 위에 새들이 날고 있다.

 

죽은 삶을 상징하는 ‘붉은 물줄기’가 이 시에서는 ‘붉은 눈물’로 변환되어 나타난다. 죽어가는 삶에서 비롯되는 슬픔, 그 슬픔이 ‘붉은 눈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시인은 이 슬픔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비상의 힘을 마련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죽음 속에서 슬픔으로 마음이 출렁이게 될 때, “온몸이 하늘로 붕” 뜨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병든 몸 위에 새들이 날고 있”음을 발견한다. 더 나아가 시인은 날아가고 있는 저 새들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 역시 발견한다. 「건기(乾期)의 새」에 따르면, 새들은 “하늘 귀퉁이 구름을” 밀고 있다. 그런데 그 행위는 “어떤 운명을 잠시” 미는 것이라고 한다. 왜 그럴까? 구름을 미는 행위는 “물 쪽으로 향한 구름에 몸을 던”지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물이란 황하에서와 같은 누런 물이 아니라 “이슬의 영롱함과 풀잎의 생명”과 같은 맑은 물일 터이다. 이 맑은 물을 함유하고 있을 구름 쪽으로 몸을 미는 행위는 황하 같은 세상에서 삶의 운명을 바꾸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꿈꾸는 비상이란 맑은 삶에의 의지를 의미한다.

시인이 북극을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최초의 물”이 결빙되어 이루어진 북극의 얼음이야말로 ‘맑음’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그 맑음은 인간의 세계를 넘어선 어떤 세계다. “언젠가 인간의 시간은 멈추겠지만/ 얼음의 시간은 멈추지 않겠지.”(「북극의 진화」)라고 시인이 말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얼음의 시간대에서 인간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시인은 좀 더 광활한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시인의 인식에 따르면, 대자연의 순수성이라고 할 북극의 얼음은 인간 세계 밑바탕에서 세계를 세우고 허문다. 「북극의 진화」는 인간 세계 바깥의 시야에서 “인간의 소리”를 인식하고 있는 대작이다. 이 시의 후반부를 다시 읽으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최초의 물은 멈추지 않고 질퍽대면서

어느새 허벅지까지 올라온다.

솔직히 나는 진화했다.

물이건, 얼음이건 간에

먹고 버리고 회피하면서 몸뚱이를 지켜왔다.

상점에 들어오면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푸르스름한 기억을 소환해

이 도시를 담금질한다.

한 달 새 교차로엔 거대한 빌딩이 들어섰다.

대형 마트와 옷가게가 들어서고 그 위에 사람들이 산다.

지도는 또 바뀔 것이다.

대륙의 한 점이, 또 한 점이 되고,

다시 한 점이 덧입혀져 거대한 점이 될 때까지.

저 멀리 철새는 날아오르고

꽃잎은 몽우리를 틔울 것이다.

내 숨은 어느 산맥을 따라 이동할까.

밤이 되면 지도의 소리는 막힌다.

거칠게 울고 우는 소리만 가득하다.

인간의 소리만 가득하다.

모든 것이 까마득하다.

 

 

_ <현대시>, 2011년 9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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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for-munhak.or.kr/idx.html?Qy=letter&nid=484&page=1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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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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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들이 오갔을까요? 3월 28일

<명왕성 되다>의 저자 이재훈 편을

오디오로 중계합니다.

 

수요북콘 7회 제1편(00:00:00~00:13:27)

 

수요북콘 7회 제2편(00:13:27~00:28:18)

 

수요북콘 7회 제3편(00:28:18~00:42:02)

 

수요북콘 7회 제4편(00:42:02~00:56:02)

 

수요북콘 7회 제5편(00:56:02~01:07:35)

 

수요북콘 7회 제6편(01:07:35~01:18:34)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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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의 질문을 받은 후 이어진 낭독의 시간입니다.

 

 

초대 손님들이 올라오시기 전 이재훈 시인과 진행자 신혜정 시인의 낭독이 있었기에,

허연, 김태형, 오은 시인 순서로 낭독이 이어졌습니다.

좋더군요! 와우.

 










그렇게 객석에도 시의 기운이 감전되고...



행사 후 이어진 사인회 겸 포토타임~

수요북콘의 트레이드 마크 빨간 장미를 한 송이씩 선물하고~!





그리고 여기저기 있는 시인들에게 사인 받으랴 사진찍으랴 바쁩니다.


 

 

 

 

정말 한 자리에 모이기 힘든 시인들이 이렇게 대거 모이다니요~!

놀랍습니다. 그리고 오신 분들도 놀랍고 고맙습니다.

시인에 대한, 시에 대한 사랑이 아직까지 이렇게 뜨겁다는 것에 감동한 밤입니다.

 


진행자와 초대손님의 기념촬영 촬콱~!




민음사 장은수 편집대표님과 허양희 시인과도 한 컷~

 


 

무슨 이미지 사진 같군요. 사진 같군요. 흐흣.

 

마무리 촬.칵.

 

이렇게 제7회 수요북콘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오신 분들께 감사, 모여주신 시인들께 감사, 객석에서 함께해주신 이영주, 김종훈, 강정, 허양희, 신동옥... (아 이름을 제가 놓쳤다면 용서해주세요.~) 시인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저희 수요북콘은 앞으로도 책과 저자의 향기가 향긋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계속해서 관심 갖고 지켜봐주세요.

수요북콘의 행진은 다음주에도 계속됩니다.!

 

 

끝-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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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수요북콘은 '나는 시인이다' 편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재훈 시인과 가깝게 지내는 시인 세 분을 모셨지요.

 

우측부터

신혜정, 이재훈, 허연, 김태형, 오은 시인입니다.

 

 


 

이런 자리에 관객으로도, 게스트로도, 주인공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처음 나와봤다는 허연 시인.

이재훈 시인의 전화 한 통에 바로 수락하셨다고 합니다. 와웃!


 


날카로움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모두 갖추신 분 같았어요!

 

허연 시인은...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추계예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게이오대학교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현재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로 재직하고 있으며, 중앙대학교와 한국사이버대학교에서 미디어 문장론과 시 창작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불온한 검은 피》, 산문집 《고전 탐닉》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 등이 있다.

 

 

 

말씀을 어찌나 차분하고, 진지하게 하시는지 오신 분들이 김태형 시인의 말에 고개를 계속 끄덕이셨어요.!

 

김태형 시인은...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2년 『현대시세계』에 시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로큰롤 헤븐>,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코끼리 주파수>가 있다.

 

 

 



언어유희가 가득한 시집으로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해주신 오은 시인...

오, 시와 시인이 닮았냐는 물음에 재치 센스 만점 입담으로 관객들께 웃음을 선사했지요~

 

오은 시인은...

2002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다. 2012년 현재 작란作亂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2012년, 미술 산문집 <너랑 나랑 노랑>을 출간하였다.

 

참, 이제 막 출간된 따끈한 미술 산문집 <너랑 나랑 노랑>에도 관심 가져주세요. ><





시에 대한 진지한 질문들이 이어집니다.

 

이재훈 시인에게 누구와 가장 친하냐고 물었더니 모두 자기라고 답하시네요. :-)



그리고 시에대한 진지한 물음들이 오갔어요.

 

시가 처음 찾아왔던 그 때의 느낌 말예요.

 

이재훈 : 정말 모든 게 다 시였고, 지나가면 시가 나왔어요.

허연 : 좋은 시 한 편을 써 놓으면 하루종일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안고팠지요...

김태형 : 생각하는 시간이 중요해요. 시를 쓰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문자메시지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줄여보세요~

오은 : 형이 제가 끄적인 걸 문예지들에 응모했는데, 어느날 전화가 왔어요. '등단하셨습니다...' 등단이 뭐죠? 제가 그 때 술이 안 깼거든요. (흣. 이런 귀엽고, 천재 같은 일화가!)




그렇게 '나는 시인이다'의 대화가 이어지고,

 

객석에는 여기저기 숨어 있는(?) 시인들과,

이화여대 이화문학회, 반도문학회 학생들이 화기애애 함께 웃고 박수쳐주셨지요.

 

그리고 곽객들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시적인 것부터 사적인 것까지...^^ 






 

 

열심히 답해주시는 시인들.






- 다음편에 계속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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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5일에 시작한 수요북콘이 어느덧 7회 행사를 치렀습니다.

제7회 수요일의 정기 북콘서트 '수요북콘'의 주인공은 2012 시인협회 주관 시인상에서 젊은시인상을 수상한 이재훈 시인입니다.  

3월 24일 막 시상식을 마치고 온 시인과,

그의 친구들(?)

'나는 시인이다' 편을 열 준비가 한창입니다.

 

북스리브로 홍대점에 이렇게 매대를 준비해 놓고,,,

시집 단독으로 책을 진열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는데, 매우 새로운 느낌이 드네요. ^^

 


 

아아, 마이크 테스트... 오늘의 행사 전반 음향과 무대 조명을 점검중입니다.



 

카메라는 잘 돌아가고 있나요? (그렇다고 합니다.^^ )

 

관객들이 막 들어오고 있네요.

 

이제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손님들을 맞고 오프닝 낭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화여대에서 온 반도문학회 학생들.. 파릇파릇 생기가 돕니다.

시를 쓰는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눈망울을 반짝반짝..




오늘의 주인공 이재훈 시인을 무대로 모셨습니다.

 

 

 

진지하게 관객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명왕성 되다... 무슨 뜻인가요?

지구의 수금지화목토천해명... 의 아홉번째 행성인 명왕성이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소행성 134340으로 다시 명명되었죠..

명황성 pluto를 이용해 미국에서는 be plutoed... 라는 수동태로 부르면서,

명왕성 되다.. (나 완전히 x됐어.. 같은?^^) 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2006년 미국 방언협회에서 선정한 그 해의 방언에 be plutoed가 선정되었죠.

명왕성 되다.

아, 소외된 현대인의 고독이 느껴지지 않나요?

시인은 이 말을 캐치해서 끊임없이 도는 서울 순환선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철컥철컥 계기판 없이 흐르는 그 시간을 시로 형상화 했죠.

 

그게 바로 이 시집의 표제작 <명왕성 되다>입니다.

 

 


열심히 설명하는 이재훈 시인.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 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 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 명왕성 되다 전문 


 

계속 시와 시 쓰기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오늘의 깜짝 무대는 진행을 맡은 신혜정 시인이 준비해주셨습니다.

 

이재훈 시인과 오래전부터 절친! 사이라고 하네요.




무대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김건모의 <서울의 달>을 열창해 주셨습니다.

 

후후, 노래 끝나고 무척 쑥스러워 하셨습니다. ^^

 

 

- 2편에서 계속 -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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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1일 일곱 번째 주인공은

2012년 시집 <명왕성 되다>(민음사)로 시인협회에서 수여하는 젊은시인상을 수상한 이재훈 시인입니다.

3월의 마지막 주간은 주인공으로 오시는 이재훈 시인을 비롯해, 시인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초대손님

<나쁜 소년이 서 있다>의 시인 허연,

<코끼리 주파수>의 시인 김태형

<호텔 타셀의 돼지들>의 시인 오은

 

모두 '나는 시인이다'로군요.!^^

 

자, 젊은시인상 수상작가 이재훈 시인과

젊은 시인들의 토크토크 톡톡!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어서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이재훈 시인은...

1972년 강원 영월에서 태어났다. 1998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가 있다. 이밖에도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를 비롯, <딜레마의 시학>, <현대시와 허무의식> 등의 책을 썼다. 2012년 한국시인협회에서 수여하는 '젊은시인상'을 수상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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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성의 파토스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

 

 


1.

언젠가부터 한국시에서 죽음에 대한 사유는 주체의 문제로 전이되어왔다. 탈주체 이론 이후 주체의 자리가 ‘빈공간’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면, 이론적으로 주체는 살거나 죽는 주체가 아니라 살거나 죽는다고 오인하는 주체와 다르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 때문에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의식을 포함한) 의식 그 자체를 유발하는 주체의 기원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시적 사유의 중대한 변곡점이라 할 수 있는데, 주체의 기원에 대한 시적 사유 속에서 죽음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파토스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시들이 죽음에서 비롯된 과도한 허무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탈주체의 주체는, 테리 이글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리 자체를 즉흥적으로 다루는 것이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방식”임을 깨달아 “우리 자신의 현존에 근거가 없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죽음과 가깝게 살아”갈 수 있는 주체이다. 하여 탈주체의 주체는 “죽음을 소름끼치게 상상하는” 저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소멸 혹은 죽음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오인’에 의한 주체의 구조를 의식하는 주체라 할지라도 그것은 강력한 현실작용 위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는 원래부터 ‘빈 공간’임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육체에 기반하고 있는 주체로서는 죽음에서 비롯되는 ‘소름’에서 해방되기란 힘든 일이다. 주체의 기원을 사유하고 해체하는 주체는 ‘자아’로서의 강력한 통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탈주체의 주체 역시 원래부터 죽음과 무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죽음’의 유령으로부터 끊임없이 소환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장욱이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상징계를 균열시키는 동시에 주체마저도 하나가 아닌 둘로 균열시키는 나가는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면, 이재훈은 주체의 소멸에서 비롯된 파토스적 세계를 응시한다. 이장욱의 시가 주체와 상징계의 균열을 매우 “드라이한 저음”(함돈균)으로 드러내고 있다면, 이재훈의 시는 균열된 주체 틈새로 새어나오는 습한 신음에 젖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주체의 균열과 죽음에 대한 시적 사유의 시차(視差)를 드러내는데, 이는 최근 시들의 흐름을 바라보는 시각에 선명한 입체성을 제공하기도 한다.

...(중략)...

3.

이재훈의 시집 <명왕성 되다>는 소멸의 감각으로 점철되어 있다. ‘소멸’이라는 저주의 늪에 걸려든 시적 주체는, 그러나 서서히 가라앉는 소멸의 늪에서 이 세계를 응시하는 뜨거운 눈을 가지고 있다. “내 눈은 카메라를 닮았다. 노출을 열고/ 몇 시간 동안 창밖을 보면/ 불빛만 남은 세계./ 칼 맞고 피 흘리는 거룩한 세계.”(「비비디 바비디 부」)라고 했듯이, 그의 시는 소멸의 망막에 비친 세계에 대한 기록이다. 소멸에 대한 예민한 감각으로 말미암아 그의 시에 비친 세계상은 냉철하게 묘사되기보다는 그의 내면의식에 되비친 이미지로 점철된다. “내 눈은 카메라를 닮았다”고 선언했을 때, 그 눈은 ‘카메라 아이’(camera-eye)와 같은 냉철한 기계적 속성이 아니라, “붉은 눈물,/ 가만히 들어와 출렁이”(「대황하11」)는 눈이다.
하여 그의 눈은 이미 소멸과 허무에 익숙한 눈이기도 하다. “소멸을 향해 스스로 전진하는 몸짓.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풍경”(「대황하1」)과 같은 구절이 말해주듯이 그의 시선은 허무와 소멸이라는 감관(感官)을 관통한다. 혹은 “누웠다. 땅이 따뜻했다. 내 등은 늘 따뜻한 곳만을 찾는다. 누웠다. 썩는 냄새가 났다. 옆을 보니 시체가 누워 있다. 시체의 살이 썩고 있다.”(「대황하2」)에서 확인되듯이, ‘대황하’의 물결을 시즙(屍汁)으로 치환시킴으로써 소멸할 수밖에 없는 육체의 치욕과 굴욕을 드러낸다. 그래서 “아무것도 거둘 수 없는 몸./ 냄새나는 몸./ 위로할 것 없는 몸.”(「흠향(歆饗)」)이라거나 “타닥타닥, 누군가 내 몸을 읽는 소리”(「세이렌의 도서관」)와 같은 소멸과 허무 의식은 이재훈의 시를 지배하는 의미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재훈의 시적 사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소멸과 허무를 감각하되 그것에 대적하여 싸우는 치열한 의식의 장(場)으로 나아간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촛불도 아니고 감나무도 아니다.
미끈한 자동차도 아니고
달콤한 솜사탕도 아니다.
차갑고 텅 빈 사물에
쇳물을 들이붓고 싶다.
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이었다.
꿈을 꾸면
붉은 별 하나가 내게 떨어지는 사건이었다.
손이 델까 만지지도 못한 별이
마당에 내려와 날 또렷이 노려보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엎드려 울지 않겠다.
슬픔을 우스운 몸짓으로 과장하지 않겠다.
해거름에 사양(斜陽)을 보며 사흘을 울겠다.
그러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
그 비밀의 성소(聖所)가 내 집이었다.
소멸이
내 먹는 밥이었다.
-「연금술사의 꿈」 전문

이 ‘연금술사의 꿈’은 유한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주체의 열망과 맞닿는다. 인간의 유한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치열한 고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재훈의 시가 ‘유한성의 파토스’로 가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주체의 ‘결여’에 대한 자각 속에서 소멸과 허무 의식은 들끓는다. 그러나 “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 혹은 “소멸이/ 내 먹는 밥”이라는 고백 속에서 허무의 세계를 대적하고자 하는 주체의 결연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나’라는 주체의 허무와 소멸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만들어내는 “신명”이기를 간절히 기구(祈求)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신명 속에서 만들어지는 “뜨거운 강철”은 꿈속에서 “내게 떨어지는” “붉은 별”이자 “사건”으로서 재주체화의 과정에 있는 시인이 지향하는 ‘연금술’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주체의 ‘진화’로도 진술된다. “나는 자꾸 진화한다./ 詩人이었다가 일용근로자였다가 백수건달이었다가 독학자가 된다./ 어떤 모습에도 아파하지 않는 내성(耐性)의 몸”은 “누구의 소유도 아닌” “연혁이 없는” “몸”이다. (「비상」) 누구의 소유도 아닌 몸은 자신의 연혁을 지움으로써 탈주체화를 도모한다. 주체의 ‘결여’화를 도모하고 ‘결여’에 직면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주체 이론이 다다른 윤리학의 정점이다.
그러나 지상의 ‘소멸’과 천상의 ‘붉은 별’이 지니고 있는 간극은 너무 크다. 시인이 마주하고 있는 지상은 “페트병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맥주 캔. 먹다 남긴 컵라면. 참기 힘든 소음. 역겨운 화장 냄새와 비둘기 똥 냄새”(「매일 출근하는 폐인」) 따위로 가득한 현실이다. 급기야 시인은 “육십억 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 왜소한 존재로서의 절망감을 드러낸다. “벌거벗은 육체 사이에서 신음”하거나 “저녁마다 매연을 맡으며 구역질을 하”면서 “허무의 군락 사이를 헤매”(「킬리만자로」)야 하는 현실은 처음부터 혁명 혹은 개조가 불가능한 대상인 것이다. 하여 그의 시는 결국 어떤 ‘근원’의 세계에 의탁하기도 한다. “돌의 근원”.(「돌」) 구체적인 물상(物像)으로 펼쳐진 광활한 세계를 폐기함으로써 드러내는 “짐승도 없고 새도 없고 울음도 없”고 “깊은 밤 달빛”이 “제 몸인 양” “푹 잠”긴 “돌의 근원”을 향한 회귀욕망. 말할 것도 없이 ‘돌’은 추상화된 세계로서의 사물이다. “차갑고 텅 빈 사물에/ 쇳물을 들이부”(「연금술사의 꿈」)음으로써 이 세계를 연금술적으로 해득하고자 했던 시인의 욕망은 잠재성의 차원에서 꿈틀거릴 뿐이다.
문제는 소멸과 허무 의식이다. 인간이 지닌 소멸과 허무의식이야말로 ‘탈주체’가 맞닿은 가장 큰 장벽이기 때문이다. 소멸과 허무 의식은 유한성의 세계관 속에서 강화된다. 일자(一者)로 수렴된 무한은 일종의 ‘유일신’으로서 유한한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대척점에 서게 된다.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연금술사의 꿈」)에 대한 열망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의 형벌”을 견뎌야 하는 “육십억 분의 일”(「매일 출근하는 폐인」)이라는 주체 속에서 들끓는다. 이 양자(兩者)의 간극을 견디면서 “천사와 함께 비탄의 노래를 부르”고 “처형의 시간”((「연옥의 산」)을 기다리는 존재가 바로 이재훈의 시적 주체이며, 이 시적 주체의 발화가 그의 시세계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 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명왕성 되다(plutoed)」 전문

지하철의 시간은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이다. “기계소리”만이 들리는 지하철 속에서 시인은 정주할 힘을 전혀 갖지 못한다. “도시의 生”을 향한 “새로운 문이 자꾸 열리”지만, 도시의 기계적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은 그는 섣불리 지하철의 리듬에 몸을 맡기지 못한다. “男子가 바닥에 구토를 하”거나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지하철에서 “심장은 슬픔을 견디기 위해 존재”(「귀신과 도둑」)할 뿐이다. 도시적 삶의 조건을 수락할 수 없으면서도 도시 ‘내부’에 존재하는 시적 주체는 도시 ‘내부’의 ‘바깥’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 ‘내부’에 거주하고 있으면서도 도시적 삶에 탑승하지 못하는 주체는 그야말로 태양계에서 버림받은 ‘명왕성’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계의 행성과 유사한 궤적을 돌고 있는 명왕성처럼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는 시적 주체는 도시 ‘내부’의 ‘바깥’에서 “푸른 멍자국”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속의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는 고백. 이 ‘허무’는 “도시의 生”을 겨냥한 것이다. “도시의 生”은 바로 허무다. 이재훈은 이 사실을 명확히 직관한다. “도시의 속도에 적응된 발로 허공을 구른다”(「언덕의 아들」)고 했듯이, 도시의 삶은 “허공으로, 바람 속으로 달리”는 것에 불과한 것. 시인의 내면에 들어앉은 소멸과 허무의식은 도시의 삶 전체로 확장되고 있다.
그렇다면 “아무도 모르는 그곳”은 주체의 허무를 관통한 이후의 그 어떤 세계가 아닌가. 그곳은 내 안의 “허무”를 관통하여 ‘결여’의 자리에 정주할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시인은 고백한다. “내 안의 허무로 들어갈 자신이 없다.” 쉽게 뛰어들지 못하는 ‘도시의 생’과 ‘허무’의 사이에서 시인은 배회한다. 그 배회의 실상은 어떠한가? 시인은 내면의 허무로써 “모든 것이 까마득”한 이 세계를 “얼음의 시간”(「북극의 진화」) 속에 감금하는 적멸(寂滅)의 사유로 나아가려함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은유에 머물렀다가/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며 와르르” “무너지”는 “형체 없는 얼굴”(「거울 속의 얼굴」)로 귀착되고 만다. 이처럼 이재훈은 소멸과 허무를 도시의 폐부까지 불어넣는 동시에 멸각할 수밖에 없는 인간 주체의 고통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이러한 고통은 일찍이 진이정이 보여주었던 “나라는 물건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각성이/둔한 내 뒷골을 쑤셔야만 하리라 하하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니,/그럼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단 말인가!”(「아트만의 나날들」)와 같은 고통의 공동체를 이룬다.

4.

주체의 기원 형성을 ‘오인’으로 파악하고 주체의 자리를 ‘빈공간’으로 파악하는 사유의 방식은 궁극적으로 아파니시스(aphanisis), 즉 주체의 소멸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방식은 주체를 지속적으로 재정립하는 윤리의 역능을 발휘한다. 주체의 소멸이 주체의 허무와 죽음으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경유한 새로운 주체로 재탄생하는 과정 자체가 윤리성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 이론과 무관하게 주체의 실상은 매우 복잡다기한 고통으로 가득하다. 그 고통에서 자유롭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주체의 분열과 고통을 마주하는 시인의 태도는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이장욱과 이재훈은 주체와 세계 속에 내재한 균열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방식에 있어서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장욱이 시의 주체를 선험적으로 파기함으로써 소멸과 죽음에서 발생하는 파토스로부터 자유롭다면 이재훈의 시적 주체는 파기되는 ‘과정’ 내에 존재함으로써 유한성의 파토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때문에 이장욱의 시적 상상력은 매우 자유롭다. 어느 한 시점에 매이지 않고 세계의 구획을 마음대로 넘나들며 주체의 자장과 진폭을 마음껏 넓히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생년월일’을 파괴함으로써 획득하는 새로운 주체의 ‘생년월일’의 복수성(複數性)을 무한하게 추구하고 있다. 이는 주체 기원의 복수화(複數化)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주체의 관성(慣性)을 깨고 있다는 점에서 파토스적 주체마저도 사라질 수밖에 없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에 이재훈은 유한성의 파토스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있다. 이재훈의 시적 주체는 자기 소멸의 사태에 예민하게 감응함으로써 시적 파토스를 더욱 강화한다. 이러한 파토스는 분열의 주체가 아니라 실존적 주체와 강력하게 결합한다는 점에서 매우 현실적이다. 주체의 결여에 선험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결여’를 향해 나아가는 고통의 결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그러나 이장욱과 이재훈에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여전히 주체의 기원과 소멸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장욱이 주체와 세계의 ‘생년월일’을 탐색하고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세기”(「생년월일」)로 나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면, 이재훈 역시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연금술사의 꿈」)에 대한 열망을 응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열망은 라캉주의 좌파의 관점에서 보자면 윤리의 원질(原質)에 해당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실재를 경유한 윤리적 주체는 뚜렷한 정치적 주체로서 성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최근의 시적 주체들이 대개 실재를 경유하는 데만 골몰할 뿐, 뚜렷한 정치적 윤리를 탐색하는 데 있어서 다소 소극적인 것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주체의 윤리를 정치적 윤리로 확장해나가는 작업이 이루어질 때, 이들의 시가 보다 큰 진폭과 파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_ <시인수첩>, 2011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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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한의 감성과 주체의 공백화

 

 

바디우는 낭만주의적 전통이 오늘날까지 남긴 유일한 정신적 자산이 있다면 유한성에 대한 예민한 자각이라고 정리한 바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유한성에 처해 있다는 자각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죽음에 귀착되게 하는 문제를 발생시켜왔다는 것이다. 열망과 좌절의 간극 속에서 발생하는 유한성의 페이소스는 낭만주의 전통 이후 동일성의 시학이 지니고 있는 감성적 자질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시인은 본질적으로 죽음과 파국이라는 유한성의 예감에 치를 떠는 존재다. 낭만주의적 영원과 신성, 혹은 무한자를 향한 열망은 인간이 자각하는 유한성의 강도를 더해왔던 것이다.
유한의 감성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바디우는 독특하게도 동일성의 대상인 무한을 일자(一者)가 아닌 다자(多者)로 해체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한다. 이른바 무한의 탈신성화. “무한을 아우라 없는 다수성들의 유형학 속에 산포시키기 위해 일자의 지배에서 끄집어내”는 것이다. 주체마저도 일자(一者)가 아닌 이자(二者), 혹은 다자(多者)로 해체되고 빈 공간이 됨으로써, 무한과 주체는 일자가 아닌 오직 “무한한 다수들”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무한한 다수들”은 일자(일자)의 세계가 아니라 ‘빈 공간’ 혹은 공백의 세계이다. 따라서 무한과 주체가 ‘공백’으로 환원되고 그 자체가 “무한의 다수들”이 됨에 따라 주체의 유한성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동일성의 시학(김준오)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시사하는데, 인간 주체(유한)의 공백과 절대자(무한)의 공백이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유한/무한의 대립관계가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디우가 지향하는 주체는 ‘공백’을 감싸는 둘레가 없는 일자(一者)를 폐기한 ‘비-전체’로서의 주체이다. 둘레를 제거한 인간 주체가 발산하는 무한의 공백은 무한자의 공백과 자연스럽게 겹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과 소멸, 즉 유한을 극복하고자 하는 현대시의 한 방향은 주체의 공백을 둘러싼 테두리를 제거함으로써 주체의 자리를 무화(공백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동일성의 시학은 무화되고 만다. 동일성의 시학이 절대․영원과의 분리의식을 해소하고자 유한자의 무한자에 대한 열망에 근거한 것이라면, 바디우의 주체 관점에서 동일성의 욕망은 폐기되어야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성의 시학(김준오)에서 시적 주체는 보다 큰 일자(一者)로 귀속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다. 대립과 적대 관계 속에서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향한 열망을 품게 되는 동일성의 욕망은 서정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을 내포한다. 에밀 슈타이거가 지적했듯이 서정적인 것은 세계와의 조화로운 상태 그 자체라면, 지금 여기의 세계를 부정하고 다른 세계를 열망하는 동일성은 페이소스를 필연적으로 동반하기 때문이다. 왜소한 존재로서의 주체는 이 세계의 결핍과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영원과 무한의 세계를 동일성의 대상으로 삼는다. 세계의 유한성을 향한 대립과 갈등 속에서 배태된 적대적 감정이 바로 페이소스이며, 영원한 무한자를 향한 동일성의 욕망을 충동하는 배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디우의 철학적 관점에서 동일성의 시학은 극복대상이 되고 만다. 바디우에게 동일성의 시학은 낭만주의적 전통의 유한성의 파토스를 이어받은 일자(一者) 중심의 세계관적 산물이다. 바디우는 유한과 무한의 대립이라는 낭만주의적 유산을 극복하고 주체의 공백 속에 내재한 무한의 공백을 읽어냄으로써 모든 것이 죽음(유한)에 귀착되고 마는 오늘날의 정신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자로서의 주체와 무한에 감금되지 않고 주체와 무한의 감싼 테두리를 제거함으로써 ‘공백’이라는 ‘비-전체’를 발견하는 것. 이로써 유한자로서의 동일성 욕망이 응축하고 있는 유한성의 페이소스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허무주의적 탈주체 이론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주체의 윤리를 가장 극단적으로 정립해 나가고자 하는 정치적 주체이론의 근간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의 시를 읽는 일은 의미 있을 것이다. 90년대 이후 한 흐름을 형성해왔던 주체의 균열과 유한의 감수성은 여전히 한국시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상자된 이재훈과 김영미의 시집 역시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2. 신성(神聖)의 파국과 균열의 기록

이재훈의 시는 신성(神聖)을 욕망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시원(始原)에 대한 원대한 물음”이 있으며, “문학하는 이유가 자기 구원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흠의 고백」)는 제1시집(<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2005)의 고백을 환기한다면, 그의 시적 지향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인간 개체와 시원을 연결 짓는 원대한 꿈은 시의 유년을 지배했던 열망이 아닐 수 없다. 시가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 발원되고 사회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존재와 우주, 그리고 근원과 시원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했던 물음이기 때문이다. 이재훈의 제1시집은 바로 그런 물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예컨대 “새의 등을 올라타고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으며 나스카 평원에 새겨넣은 神의 형상을 한눈으로 보고 싶었다”(「나스카 평원을 떠난 새에 관한 이야기」), 혹은 “나는 어머니가 믿는 神의 안부가 궁금해졌지”(「사수자리」)라는 부분만을 보더라도 그의 시에 내재된 신성에의 욕망이 확인된다.
‘신성’은 자기구원의 언덕이다. 그러니까 이재훈의 시는 자기구원을 위한 ‘신성’에의 탐구에서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이재훈의 첫 시집은 ‘신성’에의 탐색으로 가득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성에의 탐색과 거기서 비롯된 균열의식으로 가득하다. “천 년 동안 날아가고 천 년의 천 년을 날아가지. 아무리 날아도 어딘가로 닿지 않지. 시간을 견디지 못해 몸은 찢어졌지”(「순례2」)처럼 신성은 시인의 접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신성’의 분리는 인간의 전락(顚落)과도 무관하지 않으므로 시인의 시선은 인간의 깊은 무의식(“잠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깊은 동굴이었지”(「사수자리」)과 드넓은 천공(天空)을 향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서 발원되었던 것이 시인의 ‘말’, 곧 시(詩)이다. 이재훈의 시적 주체는 신성에 가닿은 시원의 언어를 찾아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가” “노래 부르는” 시의 “추장”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내 목을 자르고”서라도 말이다.(「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6년만의 시집 <명왕성 되다>(2011)는 신성에의 동일성 욕망이 결국 파국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제1시집에서도 그 균열과 파국의 징후가 보이긴 했지만, 제2시집만큼 적나라하지는 않았다. 자기구원의 문학적 가능성이 제2시집에서는 여지없이 파국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 구체적 징후는 우선 ‘소멸’에 대한 압도적 감성에서 드러나는데, 「대황하」 연작시편은 인간을 지배하는 소멸의 역사를 형상화한다. 시인은 신성이 떠나간 이 세계를 “소멸을 향해 스스로 전진하는 몸짓.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풍경”(「대황하1」)으로 진술한다. 이 소멸의 세계에는 이제 더 이상의 구원은 없다. 이재훈은 말한다. “당신의 세상은 불구의 시간이 시작되는 때”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으므로 “일부러 가부좌를 틀 필요는 없다.”(「앉은뱅이꽃」) 그렇다면 그토록 갈구했던 신성(神聖)은 어디로 갔는가? 이재훈의 시에서 신성은 이 세계와 회복할 수 없는 간극을 지닌 것으로 그려진다.

밀었다. 저 새. 군무의 몸짓이 궁중을 긋고 지나갈 때. 하늘 귀퉁이 구름을 밀었다. 타인의 몸 몇 개를 밀었다. 늙은 햇살이 들판을 토닥토닥거릴 때. 밀었다. 어둠 속으로 햇살을 밀었다. 이 세계엔 바람이 없다. 밀고 밀린 생들이 서로 겹쳐 희붐히 향기만 가득할 뿐. 잊혀진 고향 땅만 언뜻언뜻 보일 뿐. 지겹다. 밀고 밀었다. 눈을 감았다. 도도록한 마음 가운데 한 머리가 덜컹 떨어졌다. 팔짱만 낀 몸이 잠시 움찔했다. 파릇파릇 새로운 몸이 피어났다. 당신의 형상은 몰라요. 부서진 뼈의 향기는 달콤했다. 어떤 운명을 잠시 밀었다. 물 쪽으로 향한 구름에 몸을 던진다. 저 새.
- 「건기(乾期)의 새」 전문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위 시에서 시인은 회복할 수 없는 신성을 노래한다. 이 세계엔 우주의 저 끝에 있을 신성(神聖)으로 밀어줄 바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밀고 밀린 생들이 서로 겹쳐 희붐히 향기만 가득하”고 “잊혀진 고향 땅만 언뜻언뜻 보일 뿐”이다. “밀고 밀린 생들”이라 했지만, 사실 이들은 모두 ‘밀리고 밀린’ “생들”이다. 신성의 세계는 이제 인간계와 분리되었으며, 그 간극을 극복하기에 너무 메말랐다. ‘건기(乾期)의 새’란 신성을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세계에 처한 인간의 비극을 아련하게 드러낸다. 신성(神聖)이란 이제 이렇게 진술된다. “당신의 형상은 몰라요. 부서진 뼈의 향기는 달콤했다.” 그럼에도 구름에 몸을 던지는 새야말로 인간의 운명을 의미하지 않는가, 라고 말하기에는 신성과 인간의 간극에서 비롯되는 피로도가 역치에 달했다.
그나마 아름답게 형상된 이 비극의 세계는 「만신전(萬神殿)」에 이르러 그 끔찍함이 폭로되고 만다. “저는 오래전 아버지를 죽이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뒤로 수많은 신들이 제 속에 들어와 소리를 지릅니다. 홀짝홀짝 살들을 빨아 먹습니다.”“허공의 사다리엔 긴 목을 가진 시체들이 걸려 있습니다.”(「만신전(萬神殿)」) 신성을 향한 인간의 열망은 숭고함을 잃었다. 이재훈은 숭고함을 상실한 이 결핍의 자리를, 신성이 인간의 살들을 ‘홀짝홀짝’ 빨아먹는 이미지로써 끔찍하게 드러낸다. 신성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힘겹게 건너가는 “허공의 사다리”에는 “긴 목을 가진 시체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성의 세계는 해체되고 만다. “처형의 시간” 이후 도달한 “연옥의 산”에서조차 “그 어떤 존재도 이름이 없다”(「연옥의 산」)는 사실은 ‘신성’을 향한 낭만적 환상이 여지없이 파국을 맞이했음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신성한 사랑에 대해 논”하는 일이란, “구름”과 같은 헛된 것을 먹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구역질이 나서/ 나무의 텅 빈 몸에 구름을 토하”(「카프카 독서실」)는 비루함에 맞먹는다. 그런데, “텅 빈 몸”이라니. 시인은 비로소 주체의 자리를 ‘빈 공간’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신성과 개체의 영성적 동일성을 추구했던 시인의 세계관은 주체의 ‘결여’ 쪽으로 기우는 것이다.

그동안 숨어 있던 마음의 보풀이
비늘처럼 떨어집니다.
입김을 불면 그대로 내 살들이
냄새를 풍기며 날아갑니다.
비린내가 가득합니다.
-「물에 대한 사소한 변론」 부분

고가도로 아래로 바람이 분다.
땅속으로 분다.
이 세계의 배꼽 속으로 분다.
모든 허공으로 분다.
모든 공허 속에 인다.
-「미궁의 열두 번째 통로」 부분

신성(神聖)을 향한 욕망이 “마음의 보풀이/ 비늘처럼 떨어지듯” 허물어진다. “입김을 불면” 그대로 “냄새를 풍기며 날아가”는 “살들”의 “비린내”. 신성의 확신으로 가득 차 있던 주체는 비로소 악취를 풍기는 것이다. 강한 것은 비리다. 암석처럼 단단한 주체는 허물어질 때 비로소 독한 비린내를 풍긴다. 비린내는 주체의 강도에 비례하리라. 주체가 ‘빈 공간’이라는 자기 파국의 비수는 마침내 신성(神聖)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간다. “고가도로 아래” 부는 세속의 “바람”이 “땅속으로”, “이 세계의 배꼽 속으로” 불듯이 말이다. 그런데 “땅속”, “이 세계의 배꼽”, “모든 허공”, “모든 공허”의 병치는 결국 하나의 의미망으로 귀결되지 않는가. 이 병치는 ‘신성’을 담지하고 있을 “세계의 배꼽”이 “허공”이자 “공허”임을 웅변한다. 그렇다면, 신성에 닿고자 했던 주체는 ‘빈 공간’으로서 ‘신성’과 합일을 이룬다. 그러나 이 합일은 절대적 무한으로서의 ‘신성’을 부정하고 주체의 확실성을 부정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합일이다. 이와 같은 주체와 신성(神聖)의 파국 속에서 이재훈의 시적 세계관은 극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제2시집의 제목이 <명왕성 되다>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태양계의 궤도로부터 이탈된 명왕성은 주체와 신성(神聖)의 궤도를 이탈한 존재의 비유에 다름 아닌 것이다.

거울엔 과녁이 없다.
내가 거울에 입을 맞추면
오히려 그는 없고 내 얼굴만
환하다.
어디를 찔러도 되돌아오는 아픔.
거울은 고요다.
어떤 사연도 담지 않고
내가 볼 때마다 붉게 충혈된
눈만 되돌려 주며
침묵하는 사태.
나는 도시의 은유에 머물렀다가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며 와르르
내 얼굴이 무너짐을 본다.
형체 없는 얼굴,
소실점으로 모이지 못하는 얼굴,
-「거울 속의 얼굴」 부분

겨냥할 과녁이 없는 세계, 욕망의 대상이 사라지고 말아 내 존재만이 홀로 남아 있는 세계 속에서 주체는 결국 ‘나’라는 존재의 “소실점”을 상실하고 만다. 이 “소실점”은 주체의 ‘누빔점’이 아닌가. ‘누빔점’을 상실한 주체의 파국이야말로 이재훈의 시가 새롭게 진입한 세계의 진경(眞境)이다. 하여, 시인에게 ‘시’(詩)란 시원(始原)의 신성(神聖)을 향해 날아가는 ‘자기구원’의 언어가 아니라 “어머니가 없는 공허한 시”에 지나지 않으며, 시인조차도 “재킷을 입고 시를 쓰”(「재킷을 입은 시인」)는 세속화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토록 극적인 세계관의 변화 속에서 상처는 피할 수 없다. 시인은 단지 ‘자기구원’의 “일생을 꿈꾸었을 뿐인데”, “챙, 소리에 놀라 보니 사방에 깨진 파편들이 빤짝”이는 것이다. “깨진 기왓장”의 “천년을 건너온 어떤 눈동자”에 시인은 “스윽” “손을 베이”고 만다.(「동경(銅鏡)」 파국의 과정에서 시인은 깊은 상처를 입는다. 이 상처의 깊이는 ‘신성’(神聖)을 열망했던 시인이 경험한 자기 파국의 강도를 알려준다. 따라서 이재훈의 제2시집은 신성(神聖)을 희구했던 주체가 비로소 맞이한 파국의 세계와 그 안에 새겨진 고통과 균열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_ <시와사상>, 2011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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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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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출간한 두 권의 책, 좋은 소식이 있었습니다.
<나는 시인이다>(팬덤북스)가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올해의 교양도서로 선정되었습니다.

http://www.mcst.go.kr/web/notifyCourt/notice/mctNoticeView.jsp?pCurrentPage=1&pSeq=6788

<명왕성 되다>(민음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2011년 우수문학 도서보급사업에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었습니다. 아래는 선정평입니다.~^^

http://www.for-munhak.or.kr/idx.html?Qy=book3&fld=cGFydF9ib29rc195ZXNfYWE=&words=2011-4&nid=9158&page=1



"별자리의 혼처럼 볼 수 없는, 시의 검은 여백에서는 시인의 젖은 눈빛과 호흡이 심장처럼 뛰고 있을 것이다. 시집 『명왕성 되다』의 표정은 생각보다 멀리 뛰는 말이었고, 그 뜨거운 빛을 방울처럼 울려댔다. 일용근로자의 피로와 백수건달의 자책과 독학자의 자부심과 시인의 기상이 한 별자리로 앉아있다 ‘동시에’ 일어나는 바람에 독자는 화들짝 놀란 유성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아쉬움을 햇빛처럼 눈이 부시게 보다 잃었을 때, 시인은 소멸의 그림자를 자신의 무릎에 가벼이 올려놓는다. 슬픔을 소진한 시인이 새로 얻은 별자리의 흔적을 감추고 있는 시집이다."


선정위원 /  이기인 안상학 강형철 유안진


'민음의 시' 175권. "이재훈 시의 시공은 광대하다. '빌딩나무 숲'인 이곳에 사막과 우주와 원시의 시공을 겹친다."(김혜순 시인), "그의 시는 오늘의 시에 대한 새로운 보고서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조정권 시인)라는 평을 받은 이재훈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

도시의 생태와 자신의 내면을 결합하며 한 시대의 쓸쓸한 풍경을 기록한 첫 번째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로 큰 주목을 받았던 그는, 이번 시집에서 소재와 착상의 범위가 더욱 넓고 풍요로워졌으며, 다양한 시편들을 통해 호흡과 리듬도 점점 확장되고 있다.

이재훈 시인에게 도시는 늘 새로운 탐구의 대상이다. 욕망으로 가득한 도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도시를 성찰한다. 시집 곳곳에서 지하철, 버스, 독서실, 저녁의 거리, 도서관, 골목 등 시인의 일상 공간들이 직접 드러나는데, 존재의 시원(始原)에 가닿고자 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도시 속에서 환상적이고도 동화적인 색채의 공간을 펼쳐 놓는다.

그 도시 속에서 '육십억 분의 일일 뿐'인, 그저 '먼지'처럼 '아무것도 아닌' '매일 출근하는 폐인'들의 고단한 삶이 펼쳐지며, 시인은 그 속에서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을 진하게 그려 낸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명왕성 되다(plutoed)'라는 말은, 명왕성이 태양계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한 사건에 빗댄 신조어다. 익명과 소외, 그리고 기계적 규칙성이라는 도시 생활자의 삶에서 그는 '명왕성'이 됨으로써 스스로 궤도를 벗어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끊임없이 구원을 꿈꾸고 있는데, 그에게 '구원'은 곧 '근원'이다. 이재훈의 시에서 근원적인 곳은 머나먼 어딘가가 아닌, 세속 도시의 구석구석에 내재되어 있다. 이 도시 안에서 시인은 세속적인 이미지 속에서 성스러움을 체험한다.


이재훈

1972년 강원 영월에서 태어났다. 1998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명왕성 되다』가 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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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8.16 800호(p72~73)

[시인 오은의 vitamin 詩] 


카프카 독서실



카프카 독서실


벽이다.

엎드려 잘 때마다 이곳은

바닥이 아니라 무른 껍질이라 생각했다.

배에 힘을 주면 지그시 열릴 것 같은

그 껍질을 깨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몸을 마음껏

비벼 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주장해야 했다.

쿵, 말문이 열리면 긴 오솔길이 펼쳐지곤 했다.

한참을 걸었을 때 울창한 숲이 보였다.

나는 구름을 먹고,

신성한 사랑에 대해 논했다.

풀숲에는 소리가 고여 있었다.

풀을 헤치니 소리가 서로 밥을 먹고 있다.

갑자기 구역질이 나서

나무의 텅 빈 몸에 구름을 토했다.

검은 말들이 꿈틀댔다.

가련한 밤,

문신을 새기는 꿈을 꾸었다.

팔뚝 위에 피리를 새겨 넣자

내 몸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창밖엔 십자가가 흐른다.

가로등이 떠다닌다.

감정 없이 장단만 있는 노래.

이 방은 어둠이 몸 푸는 자리,

얼굴도 없고 가슴도 없다.

빗방울도 없이

빗소리가 내리는 방.

엎드려 자고 있으면

살포시 몸에 감기는

빈 말들의 뼈.

― 이재훈 ‘명왕성 되다’(민음사, 2011)에서


빈말을 채워야 할 시간이 닥쳤다

재수 시절, 나는 학원 대신 독서실에 다녔다. 유독 아침잠이 많았던 나는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11시에 퇴근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독서실도 일부러 집에서 좀 먼 데로 잡았다. 그래야 마음이 덜 흔들릴 것 같아서였다. 컴퓨터, TV, 그리고 침대와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했다. 독서실은 밤낮으로 어둡고 습했다. 스탠드를 켜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에어컨에선 물이 뚝뚝 떨어졌다. 눅눅해진 책장을 넘기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퍽 서글퍼졌다. 시간 가는 줄도 알고, 시간이 잘 안 가는 줄도 알던 시기였다.

혼자서 저녁 먹고 들어와 식곤증에 고개를 끄덕거리다 보면 “창밖엔 십자가가 흐”르는 게 예삿일이었다. 어떤 종교도 나를 붙잡아주지 못할 것 같았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으면 눈앞에 둥둥 “가로등이 떠다”녔다. 가로등은 점멸등처럼 자꾸 깜박거렸다. 그만큼 나는 불안했다. 기약 없는 일을 남들보다 일 년 더 해야 한다는 사실은 나를 움츠러들게 만들기 충분했다. 자책하는 날이 늘어났다. 나는 왜 이토록 유약한가. 나는 왜 사소한 것에 쉬 휘둘리는가. 카프카가 아니어서 나는 감히 ‘성’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사방에 덫이 깔린 것 같았다.

어느 날이었다. 저녁 먹고 들어왔더니 어김없이 졸음이 쏟아졌다. 정신이 좀 들까 해서 독서실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후 8시, 여느 때처럼 가로등이 켜지던 순간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뜬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머릿속에 빛줄기가 흡사 빗줄기처럼 내리쳤다. 그날이었다. 내가 독서실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나는 줄기차게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면서도 그게 시라고는, 시가 될 수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았다. “오솔길”과 “울창한 숲”을 요리조리 헤치고 나가는 게 그저 즐거웠을 뿐이다. 계절이 바뀌고 히터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자극했지만, 이미 나는 마음속으로 시원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할 말은 아직도 “풀숲”처럼 곱슬곱슬 우거져 있었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독서실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됐다. 하루가 점점 짧게 느껴졌다. 인수분해를 하고 판구조론에 대해 공부해야 할 시간에 나는 말을 처음 배우는 심정으로 단어들을 장난감 블록처럼 가지고 놀았다. “팔뚝 위에 피리를 새겨 넣”으면 “내 몸에서 노래가 흘러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독서실은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 됐다. 어쩌면 나는 그곳에서 내 운명을 발견한 셈이다. 그래서 오늘도 “완성되지 않은 몸”들은 기꺼이 독서실에 간다. 시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만의 방’을 찾아든다. 지금도 분명 “빈 말”들이 “뼈”가 돼 누군가의 “몸”에 “감기”고 있을 것이다. 빈말을 채워야 할 시간이 또다시 닥친 것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종이를 꺼내야겠다. 더는 창백할 수 없는, 더없이 새하얀 것으로. 그리고 나는, 곧, 너를 채울 것이다.

 

오은 |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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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명왕성 되다(plutoed)

이재훈

입력시간 : 2011.08.21 20:39:35  수정시간 : 2011.08.21 21:36:42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 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아름다운 시 한 구절을 외우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미국 방언협회는 'plutoed(명왕성 되다)'를 2006년의 새 단어로 선정했대요. '태양계로부터 소외당했다'는 뜻입니다. 그 해 명왕성은 태양계의 행성 지위에서 퇴출당했거든요. 명왕성이 태양 궤도를 돌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강제로 잊혀진 별이 되었을 뿐. 깊은 피로감에 휩싸여 우리는 이탈한 적도 없으나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하는 얼굴들을 떠올립니다.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고 싶던 별같이 환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어요. 아직도 몸을 뚫지 못한 폭풍 같은 열망이 살갗에 멍을 남깁니다. 그 멍 때문에 지하철에서 내려 일상의 궤도를 향해 뛰어가지 못해요. 그냥 문이 닫혀주길 기다립니다. 오늘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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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두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 출간
도시순례자의 눈으로 본 세상
명왕성 되다 / 이재훈 지음 / 민음사 펴냄
기사입력 2011.08.12 17:02:48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블로그 스크랩
참 애처롭고 쓸쓸하다. 도시 남자의 일생이 애벌레처럼 느껴지다니. 이재훈 시인은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아등바등하며 살아가는 수컷의 고충을 시 `남자의 일생`으로 토로한다.

`풀잎에 매달려 있다가/툭,/떨어진 애벌레.//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 데/온 생을 바쳤다.//늦은 오후./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그림자 잦아들고/온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나비 한 마리./공중으로 날아간다.//풀잎이 몸을 연다.`

살벌한 세상과 사투를 벌이듯 살다 초라하게 생을 마감해야 하는 남자의 숙명을 애벌레에 비유했다. 숨 막힐 정도로 끊임없이 옥죄는 사회에서 버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할 수밖에 없는 수컷의 피로감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민음사 펴냄) 속에는 도시 노동자의 핍진한 삶과 성찰이 담겨 있다. 거대한 기계의 부품처럼 존재감 없이 그저 살아내는 데 급급한 일상이 황량하게 펼쳐진다. 지하철과 버스, 독서실, 골목 등 시인의 일상 공간 속에서 느낀 소외감과 외로움이 진하게 배어 있다.

시인은 각박한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상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한 남자를 명왕성에 빗댔다. 궤도가 불안정하고 크기가 작다는 이유로 태양계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퇴출된 명왕성 사건을 떠올린 것이다. 도시에서 버려지지 않기 위해, 구원받기 위해 넥타이를 매고 만원 지하철에 오르는 남자의 하루가 시 `매일 출근하는 폐인`을 통해 애잔하게 다가온다.

`의욕적으로 넥타이를 매고 미소를 연습한다. 수많은 거울 앞의 표정들. 낯선 얼굴, 낯선 침묵.//다른 말은 없다./너를 자위케 하던 기호들. 새, 별, 그리고 꽃과 나무. 아무 생각 없이 잠들 수 있었던 그대, 라는 말을 향해.(중략) 나는 육십억 분의 일일 뿐. 페트병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맥주 캔. 먹다 남긴 컵라면. 참기 힘든 소음. 역겨운 화장 냄새와 비둘기 똥 냄새로부터.//계곡의 하얀 물보라를 헤치고, 난파된 얼음 위에 올라서 저물어 가는 사람들의 삶을 감상하고 싶다. 그러면 아주 쓸쓸하겠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아무도 없이 고독하겠다.(중략)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의 형벌이었다.`

현실은 비루하지만 시인은 비관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정확하게 인지한다. 도피하려 하지도 않는다. 시 `명왕성 되다`를 통해 오히려 현실을 초월적 공간으로 바꿔 놓는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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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생태와 내면의 쓸쓸한 풍경


이재훈 시집 '명왕성 되다' 발간

(서울=연합뉴스) 김영현 기자 = 'Plutoed(명왕성 되다)'는 미국 방언협회에 의해 '2006년의 단어'로 선정된 신조어다. 국제천문연맹(IAU)이 명왕성의 태양계 행성 지위를 박탈한 뒤 'Pluto(명왕성)'라는 단어에 '가치를 떨어뜨리다, 소외되다'는 의미가 추가됐다.

시인 이재훈(39)은 도시 속 익명과 소외를 드러내는데 이 단어를 적절하게 활용했다. 2005년 이후 6년 만에 낸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민음사 펴냄)에서다.

시인은 이 시에서 출퇴근길 지하철 2호선을 탄 도시 생활인의 팍팍한 정신세계를 전했다. 이 '도시인'은 주변 제약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쉽게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눈만 감고 만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중략)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명왕성 되다(Plutoed)' 중)

시인은 이처럼 시집에서 도시를 탐구 대상으로 삼았다. 도시의 생태와 자신의 내면을 결합해 쓸쓸한 풍경을 그렸다.

"의욕적으로 넥타이를 매고 미소를 연습한다. 수많은 거울 앞의 표정들. 낯선 얼굴, 낯선 침묵. (중략) 나는 육십억 분의 일일 뿐. 페트병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맥주 캔. 먹다 남긴 컵라면. 참기 힘든 소음. 역겨운 화장 냄새와 비둘기 똥 냄새로부터.('매일 출근하는 폐인' 중)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고 노래한 '남자의 일생'은 이 시대에 남자로 살아가는 고충을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과정으로 씁쓸하게 비유했다.

제약과 구속에 시달린 시인은 마침내 초월을 꿈꾼다. 하지만 그 시도는 현실을 탈출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초월적 공간을 꿈꾼다. '근원'을 찾는 것이다.

"나는 근원을 바랐다./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중략) 언덕이 있는 곳은 월곡(月谷),/달빛이 있는 골짜기다./언덕을 오르고/또 한 언덕을 오르면/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중)

문학평론가 조강석은 "이 시집의 기저를 맴도는 덩어리진 목소리는 일용근로자의 피로와 백수건달의 자책과 독학자의 자부심과 시인의 기상이 한데 배어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148쪽. 8천원.

coo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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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시원(始原)을 응시하며 세속 도시를 순례하는 시인 이재훈

슬픔의 소진마저 지난 후에야 비로소 얻는 소멸의 미학



“이재훈 시의 시공은 광대하다. ‘빌딩나무 숲’인 이곳에 사막과 우주와 원시의 시공을 겹친다.”(김혜순 시인), “그의 시는 오늘의 시에 대한 새로운 보고서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조정권 시인)라는 평을 받은 이재훈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가 출간되었다. 도시의 생태와 자신의 내면을 결합하며 한 시대의 쓸쓸한 풍경을 기록한 첫 번째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로 큰 주목을 받았던 그는, 이번 시집에서 소재와 착상의 범위가 더욱 넓고 풍요로워졌으며, 다양한 시편들을 통해 호흡과 리듬도 점점 확장되고 있다.

이재훈 시인에게 도시는 늘 새로운 탐구의 대상이다. 욕망으로 가득한 도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도시를 성찰한다. 시집 곳곳에서 지하철, 버스, 독서실, 저녁의 거리, 도서관, 골목 등 시인의 일상 공간들이 직접 드러나는데, 존재의 시원(始原)에 가닿고자 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도시 속에서 환상적이고도 동화적인 색채의 공간을 펼쳐 놓는다. 그 도시 속에서 “육십억 분의 일일 뿐”인, 그저 “먼지”처럼 “아무것도 아닌” “매일 출근하는 폐인”들의 고단한 삶이 펼쳐지며, 시인은 그 속에서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을 진하게 그려 낸다. 시집 안에서는 끊임없이 “일용근로자의 피로와 백수건달의 자책과 독학자의 자부심과 시인의 기상”이 한데 배어나고 있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명왕성 되다(plutoed)’라는 말은, 명왕성이 태양계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한 사건에 빗댄 신조어다. 익명과 소외, 그리고 기계적 규칙성이라는 도시 생활자의 삶에서 그는 ‘명왕성’이 됨으로써 스스로 궤도를 벗어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끊임없이 구원을 꿈꾸고 있는데, 그에게 ‘구원’은 곧 ‘근원’이다. 이재훈의 시에서 근원적인 곳은 머나먼 어딘가가 아닌, 세속 도시의 구석구석에 내재되어 있다. 이 도시 안에서 시인은 세속적인 이미지 속에서 성스러움을 체험한다.


이재훈

1972년 강원 영월에서 태어났다. 1998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가 있다.


■ 편집자 리뷰

침묵과 고요의 깊고 너른 ‘울음’을 통한 거대한 ‘울림’


첫 번째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가 하늘 위에서 부르는 노래, 특히 ‘영가(靈歌)’의 세계였다면,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는 하늘과 땅의 중간쯤에서 부르는 ‘침묵’과 ‘고요’의 깊고 너른 ‘울음’을 통한 거대한 ‘울림’이다. 이재훈 시인에게 도시는 늘 새로운 탐구의 대상이다. 숨이 막히고, 끊임없이 옥죄는 공간이지만, 어쨌든 발 디디고 살아가야 할 공간인 욕망의 도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도시를 성찰한다. 「新林洞」, 「매일 출근하는 폐인」, 「비비디 바비디 부」,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등의 시에서 시인의 일상 공간들이 직접 드러나는데, 존재의 시원(始原)에 가닿고자 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도시 속에서 환상적이고도 동화적인 색채의 공간을 펼쳐 놓는다.


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 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잦아들고

온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나비 한 마리.

공중으로 날아간다.


풀잎이 몸을 연다.

―「남자의 일생」


이 시는 애벌레가 나비로 변화하는 과정의 알레고리 속에 처절한 생존 게임과도 같은 인생의 과정 전체를 담아내며, 이 시대에 남자로 살아가는 것의 고충을 우회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의욕적으로 넥타이를 매고 미소를 연습한다. 수많은 거울 앞의 표정들. 낯선 얼굴, 낯선 침묵.


다른 말은 없다. 너를 자위케 하던 기호들. 새, 별, 그리고 꽃과 나무. 아무 생각 없이 잠들 수 있었던 그대, 라는 말을 향해.


(중략)


나는 육십억 분의 일일 뿐. 페트병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맥주 캔. 먹다 남긴 컵라면. 참기 힘든 소음. 역겨운 화장 냄새와 비둘기 똥 냄새로부터.


계곡의 하얀 물보라를 헤치고, 난파된 얼음 위에 올라서 저물어 가는 사람들의 삶을 감상하고 싶다. 그러면 아주 쓸쓸하겠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아무도 없이 고독하겠다.


(중략)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의 형벌이었다.

―「매일 출근하는 폐인」


이 시를 통해 우리는 견고한 생활의 필연적 조건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비관’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스스로 정확히 ‘인지’한다. 이 인지의 결과는 바로 다음과 같은 시에 나타난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 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 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명왕성 되다(plutoed)」


이 시의 제목이자,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명왕성 되다(plutoed)’라는 말은, 명왕성이 태양계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한 사건에 빗댄 표현인데, 사물이나 사람이 갑자기 평가절하 되거나 혹은 소외되는 것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이 시의 배경은 규칙적인 리듬의 기계 소리만 들리는 2호선 지하철 안으로, 화자는 익명과 소외, 그리고 기계적 규칙성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이것이야말로 도시 생활자의 정신적 삶을 규정하는 필연적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이 시의 화자는 바로 그런 제약들로부터 비켜서고자 눈을 감는다. 그는 ‘첩자’나 ‘폭풍’과 같은, 기계적 삶의 리듬을 뒤흔들 파국을 스스로 필요로 하고 있다. ‘명왕성 되다’는 말은 즉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궤도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재훈의 시에서 근원적인 곳은 머나먼 어딘가가 아닌, 세속 도시의 구석구석에 내재되어 있다. 시적 자아는 세속 도시의 세속적인 이미지 속에서 성스러움을 체험한다. 지하철의 문은 계속해서 열리지만, 우리를 진정한 삶으로 인도할 출구는 없다. 하지만 시인은 그 공간 안에서 출구를 찾는 방법을 터득했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소멸의 순간을 꿈꾸다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중략)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다.

장 그르니에가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빛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다.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은,

그 짧은 시간만큼은 황홀하겠지.

언덕이 있는 곳은 월곡(月谷),

달빛이 있는 골짜기다.

언덕을 오르고

또 한 언덕을 오르면

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그 햇살의 순간처럼.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키르케고르가 유한과 무한, 필연성과 가능성의 문제를 종교로 풀어냈다면, 그는 이 문제를 종교가 아닌 시로 풀어내고 있다. 그는 유한이 무한의 반대가 아니라, 무한의 일부임을 깨닫고, 시적 상상력을 통해 유한한 시간을 펴서 무한한 시간에 잇대어 유한성과 필연성을 뛰어넘는다. 그의 초월은 현실을 탈출하고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초월적 공간으로 바꿔 놓는다. 또한 그는 끊임없이 구원을 꿈꾸고 있는데, 그에게 ‘구원’은 곧 ‘근원’이다. 이 시집은 바로 그 ‘근원’, 즉 존재의 시원에 대한 물음과 상상력을 통해 유한과 무한, 필연성과 가능성의 문제를 풀어내고자 하는 시적 고민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시에서는 기계적인 ‘심장’과 존재의 비밀을 깨칠 ‘순간’의 대립이 선명하게 이미지화 된다. 그리고 다시 그것은 퇴근길의 행선지인 월곡과 장 그르니에의 미적 처소인 산타크루즈의 이미지로 보다 또렷하게 구상화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제 월곡과 산타크루즈의 대립이 아니라 월곡을 산타크루즈로 ‘발견’할 수 있느냐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촛불도 아니고 감나무도 아니다.

(중략)

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이었다.

(중략)

그러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

그 비밀의 성소(聖所)가 내 집이었다.

소멸이

내 먹는 밥이었다.

―「연금술사의 꿈」


그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이 소멸의 순간임을 믿는다. 그러므로 그는 끊임없이 소멸을 꿈꾼다. 우주 속으로, 거대한 대황하 속으로, 허공 속으로,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침묵 속으로, 빛 속으로, 영원 속으로 흔적조차 없는 완전한 소멸을 꿈꾼다. “바람은 불어야 제 몸을 갖”고, “눈물은 흘려야 제 몸을 갖”(「비비디 바비디 부」)듯이 그는 소멸함으로써 비로소 제 몸을 갖는다. 그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처럼,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는 시인이다.


■ 작품 해설에서

 

이 시집의 기저를 맴도는 덩어리진 목소리는 일용근로자의 피로와 백수건달의 자책과 독학자의 자부심과 시인의 기상이 한데 배어나는 것이다. 시인의 소멸에 대한 열망은 슬픔의 내력을 시간의 이력으로 전화시키려는, 다시금 유한한 것들을 무한에 대고자 하는 상상적 결단에 의한 것이다. 소멸이 슬픔의 발견, 슬픔의 과장, 슬픔의 소진마저 지난 후에야 얻는 신명의 성소(聖所)라는 것, 그러니 근대인 키르케고르가 비약의 귀재라면 이재훈은 소멸의 총아다. — 조강석(문학평론가)

 

■ 추천의 말


이재훈은 중무장한 중세의 기사와 같다. 그는 영주에게 충성하지 않고 연인에게 헌신한다. 그러나 그 연인은 비밀의 화원에 은신해 있지 않고 시인의 갑주 속에 내장되어 있다. 시인은 연인을 위한 투쟁에서 연인을 훼손시키고야 마는 운명에 처한다. 그것이 이재훈이 파악한 현대 시인의 궁지이다. 자신이 보존할 가치를 기치로 내세울 때마다 그것은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와도 같이 부스러지고 문드러진다. 그러나 그 덕분에 우리는 진실 앞에 놓인 현실의 아득한 해자를 본다. 진정한 세계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말에 채찍을 가해야 한다. 언어의 기교는 현실을 일격에 무너뜨리기 위한 필사의 계책이다. — 정과리(문학평론가, 연세대 국문과 교수)


모든 사라져 가는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애련에 젖게 한다. 시인 이재훈에게 그 정조는 무척 각별하다. 지금은 사라진 고대 문명이나 사라져 가는 시원적 자연에 감응하는 그의 상상의 촉수는 매우 예민하다. 문명의 늪을 거슬러 태초의 궁륭으로 다가서는 소리의 환(幻)이 웅숭깊다. 때로는 혼돈으로 들끓고, 때로는 명상으로 침묵하는 그 소리의 환은 격렬한 듯 단정하고, 단정한 듯 격렬하다. 그 소리의 환의 스펙트럼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에 거역하거나 크게 순응하는 연금술사의 꿈의 폭과 깊이를 가늠케 한다. 사라져 감 혹은 부재라는 그리움의 양식을 통해 이재훈은 존재의 시원적 리듬을 새삼 환기한다. 그리고 헝클어진 동시대의 존재의 리듬에 반성적 감촉을 제안한다. 큰 슬픔이라는 통과제의를 거친 우리네 존재의 신명은 아득한 듯 가깝고, 오래인 듯 여기이고, 사라져 가는 듯 되돌아온다. — 우찬제(문학평론가, 서강대 국문과 교수)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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