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학> 201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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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고통을 대하는 자세…이재훈 시집 `벌레 신화` 출간

  • 김유태 기자
  • 입력 : 2016.08.19 15:43:30   수정 : 2016.08.19 17: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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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도 못 사는 인간으로만 살다 가는 인간이 있고 억겁의 시간에 자기를 올려두고 삶을 구경하다 가는 인간이 있다. 혹자는 후자를 시인이라 부른다.

이재훈(44)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벌레 신화`(민음사)가 출간됐다. 시인은 이번에도 어떤 분리주의적 시각을 유지한다.
몸에서 영혼을 떼어내 나를 구경하는 `자기 분리`랄까. 떨어져서 보니 꽃 속에 갇힌 벌레 한 마리가 보인다. `꽃 속에 산다./웅덩이에 잠겨/달콤함에 취해/먹고 싸며 늙는다.`(`벌레` 부분)

벌레로의 변신은 자기비하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삶이 닮았기에 등가를 이룬다. 더 주목할 건 내부 풍경이다. 벌레는 `기근보다 더한 맨살의 고통`(`뿔` 부분)을 겪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육체`(`벌레 신화` 부분)가 되길 희망한다.

원시를 현시하는 환시로 쓰인 작품들이 눈에 띈다. 아주 먼 과거에서 왔다는 신화적 상상력이 독특하다.

`우리는 어디에서 짐승처럼 왔을까.(중략)기억이란 늘 중심이 다를 텐데.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검은 밤의 시간을 가로질러 왔지.`(`짐승의 피` 부분)

`광석을 모르는 고대인들은 운석을 주웠다지. 별의 살 껍질을 주워 칼을 만들고.`(`녹색섬광` 부분)

현재에서 과거를 보는 시인의 발상이 시집 한 권에 가득하다.

장은수 문학평론가는 시집 해설에서 시인에게 "세계의 쏟아지는 폭력을 웅크리고 엎드린 채 등으로 견디면서 자신의 소리를 듣는 식물적 능동"이라는 평을 헌사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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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스스로의 온기’로 고통을 견디는 시인

<68> 이재훈 시인 ‘벌레 신화’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입력 : 2016.10.01 03:08|조회 : 5261

  

     


꽃 속에 산다. 
웅덩이에 잠겨 
달콤함에 취해 
먹고 싸며 늙는다. 

그곳이 지옥인 줄 알고 
기어 나올 때 

지옥을 보려고 온 사람들 
예쁘다고 기념할 때 

벌레들끼리 서로 눈 마주쳐 
징그러워 깜짝 놀랄 때 

마지막 계절은 
툭 떨어진다. 
- '벌레' 전문
 

오래 전,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다.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났더니 흉측한 벌레로 변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 그가 벌레로 변한 이후, 가족과 직장 등 지금까지의 일상적인 관계가 완전히 변한다는, 사람에서 비천한 벌레로 변하자 기존의 관계조차 비천해졌다는 그런 슬픈 이야기. 1998년 ‘현대시’로 등단한 이재훈 시인(1972년~ )의 세 번째 시집 ‘벌레 신화’에 수록된 여러 시편들은 카프카의 ‘변신’을 연상시킨다. 

스스로, 혹은 타의에 의해 벌레가 된 시인이 “바닥 여기저기 팔랑거리는”(‘벌레 신화’) 처지에 놓인 것은 도시의 삶과 무관치 않다. “아무도 도시에서 살라 이르지 않았”(‘향연饗宴’)지만 시인은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도시에서 살고 있다. 정글 같은 대도시에서 먹고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차도 없고 집도 없고 양복도 구두도 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도시는 저 멀리 있”(‘미적인 궁핍’)지만 시인은 도시를 떠나지 못한다. 차, 집, 양복 그리고 구두가 없다는 것은 실직했음을 뜻한다. 도시에서 월급생활자는 실직하는 순간 벌레와 같은 존재로 전락해 고통스럽게 환멸을 견뎌야 한다. 벗어나려 날개를 파닥거릴수록 삶은 점점 더 구차해진다.

도시를 떠나 자연 속에 산다고 하여 행복한 것도 아니다. 표제시 ‘벌레’에서 보듯, 꽃 속 “웅덩이에 잠겨/ 달콤함에 취해/ 먹고 싸며 늙”어가지만 거기가 천국은 아니다. 장소에 상관없이 벌레의 삶은 벌레의 삶일 뿐이다. ‘세이렌의 노래’와 같은 꽃의 아름다움에 나를 망각하고 있다가 “그곳이 지옥인 줄 알고/ 기어 나”오지만 “마지막 계절은/ 툭 떨어”지고 만다. “벌레들끼리 서로 눈 마주쳐/ 징그러워 깜짝 놀라”는 장면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언제나 고개만 숙였습니다. 변명은 늘 부끄러우니까요. 아프면 그냥 아파야 합니다. 견딜 수 없어도 견뎌야 한다죠. 게으름을 좋아하는 저는, 참는 것이 제일 쉬운 저는, 겨우겨우 살아갑니다. 다만 구걸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꽃이라는 말, 약속이라는 말을 참 좋아했던 때가 떠오릅니다. - ‘악행극’ 부분

“채찍이 내 피부에 감겨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가시가 박혀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갈라”(‘벌레 신화’)질 만큼 고통스러워도 시인은 도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참고 견딘다. 변명도 하지 않는다. “아프면 그냥 아파”하며 견딘다. “참는 것이 제일” 쉽다는, “다만 구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구절에서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려는 시인의 섬약한 마음이 느껴져 시위가 붉어진다. 시인은 꽃과 “약속이라는 말을 참 좋아했던 때”, 즉 도시의 삶 이전이나 궁핍하지 않았던 시절이 그립다.

어른은 큰소리 내지 않는단다. 
마음에 상채기를 남기고 비겁한 자가 되겠지. 
담배 연기만 뿜어 대며, 다 안다는 듯 
끄덕끄덕 대기만 하겠지. 
날 어른이라 부르는 손가락들. 
그 모든 비겁도 눈 감고 
어떠한 격정에도 미혹되지 않는 
어른들의 세계. 
이미 네 앞의 시간들은 결정된 것. 
가르치려 드는 꼰대들에게 
다리를 까딱거리고 딴지를 걸고 싶더라도 
어른이란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제 소년을 간신히 넘었을 뿐인데. 
눈물을 참아야 하고 그리움도 참아야 하고 
홀로 식당 문을 들어서는 서글픔도 
지루한 술자리도 참아야 한다. 
아직도 쓸쓸함을 사랑할 수 없나. 
차가운 거리를 헤매다 방안에 들어와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할 때. 
내 몸에 남아 있는 허약한 온기. 
엎드려 시를 쓰는 사람. 
엎드려 생각하는 사람. 
엎드리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라지만 
엎드리는 일은 자신을 잊는 일. 
엎드려 이제 
스스로의 온기로 인해 나는 살겠다. 
- ‘불혹’ 전문
 

시인은 “이제 소년을 간신히 넘”(이하 ‘불혹’)었을 뿐인데, “눈물을 참아야 하고 그리움도 참아야 하고/ 홀로 식당 문을 들어서는 서글픔도/ 지루한 술자리도 참아야” 하는 “어른들의 세계”에 발을 들려놓았다. 아직 어른이 될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지만 “가르치려 드는 꼰대들”은 “마음에 상채기를 남기고 비겁한 자가 되”라고 훈수를 둔다.  

세상의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된 마음 약한 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벌레처럼 바닥에 “엎드려 시를 쓰는” 일이다. “자신을 잊”고 “스스로의 온기로” 고통을 견디는 일이다. 그 고통이 생생히 느껴져 더 고통스럽긴 하지만 시인은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 벌레 신화=이재훈 지음 민음사 펴냄. 116쪽/ 9000원

※ 이 기사는 빠르고 깊이있는 분석정보를 전하는 VIP 머니투데이(vip.mt.co.kr)에 2016년 9월 30일 (15:08)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출처 : http://news.mt.co.kr/mtview.php?no=2016092811524779885&outlink=1&ref=http%3A%2F%2Fsear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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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한국서정시문학상 특집 | 평론

 

고통의 수신기

 

남승원

 

 

 

미국을 대표하는 프리마돈나 르네 플레밍이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모든 예술은 결국 문학적으로 전달된다.”는 말을 듣고 깊은 공감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스스로를 풀 리릭 소프라노full lyric soprano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화려한 콜로라투라가 넘쳐나는 오페라의 세계에서 개성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풍부한 감수성과 남달리 깊이 있는 호소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다른 오페라 가수와 달리 TV쇼 출연 같은 대중적 활동도 마다하지 않는 것 역시 어쩌면 같은 차원에서 이해해볼 수 있겠다.

이재훈 시인의 <벌레 신화>를 앞두고 단번에 르네 플레밍이 떠올랐던 이유는, 그의 시작품들이 의미관계에서 자유로워진 기표들의 발산에서 빚어지는 다채로운 기교들을 앞세운 최근의 우리 시문학에서 보기 드물게 선명한 주체의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기교와 함께 독자들에게 스며들 수 있는 길을 찾기보다, 시를 읽는 독자들 내면에 잠재된 고유의 목소리와 어떤 방식으로든 충돌의 길을 걷게 된다. , 이재훈 시세계의 의미들은 독자들의 내면과 부딪히고 얽히는 움직임의 장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움직임을 일관되게 만드는 운동성이 <벌레 신화>를 관통하고 있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르네 플레밍의 말을 떠올려보면서, “모든 시문학은 결국 서정적으로 전달된다.”고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재훈의 시작품들은 대상을 표현하는 방식이나 주제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가장 적극적인 차원에서 독자와의 반응을 기대하면서 서정적으로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서정의 본질이나 시와의 관계, 또는 그 관계의 범주와 의미에 대한 논의는 곧 우리 현대시 백여 년의 역사와 흐름을 같이 한다. 그만큼 서정의 문제는 시문학 내부에서 명확히 한정되어 있는 어떤 특성이라기보다, 장르의 전반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본질적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서정의 기존 인식에 균열을 일으키려는 의미 있는 시도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정=서정시라는 인식이 여전히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면, 그만큼 서정과 시문학이 그 특질에 있어서 최대치를 공유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 서정이 시에 의미를 부여하는 핵심이라는 절대적 관점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서정과의 길항을 통해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새로운 시적 현실, 즉 시와 시가 아닌 것(非詩)들 간의 경계 확장이 요구되는 현실에서 다시 한 번 시의 영역을 도약시킬 수 있을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재훈의 <벌레 신화>에 특징적으로 감지되는 시적 운동성을 우리 시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역시, 그의 시세계가 특정 가치를 재현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다양한 대상들과 일으키는 반응 때문이며, 나아가 시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에까지 확대 적용되는 이 반응이야말로 그 자체로 서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서정의 가장 중요한 특질은 시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이 반응하는 접점에 의미를 결절시키는 데에서가 아니라, 의미를 생성시키는 힘에 대한 모든 의심이 끊임없이 발현되도록 만드는 데에서 나온다.

을 보면 이것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해볼 수 있다. 진화의 흔적을 보여주는 인간의 신체 기관에 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시집의 첫 부분에 배치됨으로써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충돌의 움직임을 이끄는 역할도 하고 있다. 특히, 두 개의 연으로 나누어진 구성은 이 상상력을 둘러싸고 있는 대립적 요소들, 기원과 현재또는 희망과 고통’, ‘이상과 현실등의 충돌을 보다 적극적으로 일으킨다. 이를 통해 우리가 그토록 애써가면서 유지하고자 했던 평범한 일상이 사실은 현실과의 타협을 강요하면서 고유한 가치들을 기꺼이 스스로 퇴화시키게 만드는 폭력성을 감추고 있었다는 진실이 어렵지 않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어 끝까지 퇴화를 거부함으로써 현실의 고통 위로 두드러지고 있는 을 시적 상상력의 범주에 포함시켜 작품을 통해 드러난 폭력적인 일상 속에서도 어느 정도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데로 나아간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재훈의 작품이 시문학을 둘러싼 요소들의 충돌이라는 일관된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충돌이 빚어내는 어떤 결과물이어서는 안된다. 결과물에 주목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은 그것을 만들어내던 힘이 소멸되는 순간과 정확히 겹쳐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서 우리는 이 힘의 중심이자 충돌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고, 그곳에서 결국 수난이 없는 몸은 역사가 없다는 시인의 인식과 만난다. 이를 통해 수난이 언제나 하나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것을 피할 수도 없고, 또 그렇기에 우리의 일상이 곧 고통그 자체인 현실이 밝혀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같은 사실이 그대로 압축된 대상으로서 이 내세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화 속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우리에게도 은 일상을 지속시키는 힘인 동시에 우리에게 가해지는 일상적 고통을 수신하는 안테나의 기능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표제작을 비롯하여, 시집의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벌레에서 시인이 지옥과도 같은 일상을 흘리며 기어가는 삶을 보여줄 때에도 의 상징과 겹쳐지면서 보다 명백하게 전달된다.

을 통해 드러난, 고통으로 직조된 우리의 일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하이델베르크에서 시인은 성 밑의 마을로 표현된 일상의 모습을 특히 오래된 성과 대비시켜 잘 보여주고 있다. “희롱과 진노의 말들만 더펄거리는 곳으로 압축된 일상의 공간은 책망이 없화답이 존재하는 곳과의 위상학적 배치, 오래된 성을 찾아 떠나는 시적 주인공의 행위와 더불어 우리에게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이처럼 시인이 만들어 둔 우리 일상의 모습은 우리를 문득 K, 카프카의 바로 그 K가 마주했던 상황과 고스란히 겹쳐진다.(시인은, 다소 익살스럽게, 그곳을 가보지 않은 어느 누구라도 지명을 듣는 순간 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독일의 소도시를 제목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시에 드러나 있는 것처럼, ‘마을을 벗어나 에 오르는 일은 결국 저 마을의 시간과 분리되지 않고 반복될 수밖에 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카프카를 경험해본 사람들이라면 중차대한 법적 소송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그 이유조차 전혀 알 수 없다거나, 또는 오랫동안 기대해왔던 목표 바로 앞에서 달성이 무기한 지연되는 상황을 맞닥뜨린 적이 있을 것이다. 카프카는 이처럼 일상이 갑작스럽게 무너지는 데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그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상황을 피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 오히려 그 상황을 지속시키는 유일한 원인이 되는 이해 불가능한 상황에 우리를 몰아넣는다. 카프카가 꼼꼼히 만들어둔 일종의 미로와도 같은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처럼, 이재훈의 시세계를 관통하고 난 우리 역시 평안했던 일상 전체를 의심하고 스스로에게 끝없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처럼 시 안에서 던져진 질문과 그것을 읽는 독자 내부의 질문이 충돌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시가 가진 힘이 발산되고 있다.

<벌레 신화> 전반에 걸쳐 있는 동굴이미지 역시 이와 관련되어 있다. 햇칼, 빙하의 고고학, 구렁등에서 직접적인 소재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작품들에서 구멍-(어두운)숲속-(어둠에 잠긴)-(깊은)등의 이미저리들로 확산되면서 동굴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어둠과 밝음, 안과 밖등을 구분 짓는 경계인 동시에 그 둘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 충돌을 일으키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햇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동굴은 바깥의 햇살이 가득한 공간과 쉽게 대조를 이루고, 또 그 때문에 황홀하게만 보이는 바깥의 세계를 꿈꾸게 만든다. 하지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바깥의 세계는 동굴 속 에게 그대로 로 작용하면서 고통과 희생을 통하지 않고서는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만든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끝이 보이지 않는 텅 빈 계곡을 날고 싶다.”는 바람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물론이지만, 이재훈의 시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언제나 이면에서 그것을 발생시키는 고통스러운 순간과의 충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속적으로 충돌을 발생시키는 이재훈의 시는 독자들을 수동적인 상태에 머무르지 않게 만들고 필연적으로 적극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이를 위해 그는 우리의 일상 속으로 고통을 끌어들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할 것은 그가 고통에 직접적인 관심을 두고 있다는 오해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개인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물질적 환경과 지적·감정적 반응을 하며 이것이 결국 시를 만들어내고, 이렇게 만들어진 시작품이 다시 독자와의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시의 올바른 방향이라고 했던 오든(W.H. Auden)의 말대로, 이재훈에게 고통은 독자들에게 능동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일종의 장치인 셈이다.

나쁜 병에서 그가 고통은 존재와 다른 물질이라고 말할 때 이는 보다 분명해진다. ‘고통을 끌어들인 이유가 평범한 일상 뒤에 가려진 폭력적이고도 비인간적인 얼굴을 폭로하기 위함이라면,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맞아들인 고통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과 반응하는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고통의 전제가 우리의 존재와 동등한 독립적 차원이라는 사실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만이 어느 한 쪽의 일방적 영향력이나, 또는 그 둘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일종의 결과물에 관심을 두기보다, ‘일상고통이 동등한 차원에서 만나 벌어지는 반응들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양하게 벌어지는 이 반응들에 참여하게 되면서 때로 자신의 삶과 고통을 견주어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시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고민해보는 일도 가능해진다.

이재훈 시인이 만들어둔 길을 따라가는 일은 목적과 무관한, 반응 그 자체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반응이 결과로 이어지는 보편적 상식의 세계에서라면 이는 어쩌면 막연한 두려움을 동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말 그대로 반응안에는 최대한의 고통이라는 범주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은 살이 찌는데, 풀잎은 쪼그라들기만 하는, 그래서 소망(벌레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면 어느 한쪽을 반드시 포기해야만 하는 제로-섬 사회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언제나 고통을 남의 몫으로 미루어왔다. 결국, <벌레 신화>를 통해 고통마저 적극적으로 포함할 수밖에 없는 반응을 경험하게 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장면을 만나게 된다.

 

비밀을 말하지 않아도 맛보면 다 아는 것이지. 꿈을 맛보고, 슬픔을 맛보고, 춥고 서글픈 때를 맛보는 사람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약속을 맛본다네. 그 어떤 약속도 폐기할 수 없다고 쓴다네. 어느새 입 안이 까끌하고 씁쓸한 봄이 성큼 와 있다네.

― 「맛보는 공동체부분

 

맛을 본다는 것은 그 어떤 이해의 방식과도 전혀 다르다. 같이 눈물을 흘리거나, 혹은 안아 주거나 손을 잡아 줄 때조차, 냉정하게 말해서 타인의 고통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맛을 본다는 것은 우선 나의 감각을 직접 참여시키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또한 맛보는 행위에는 자신이 싫어하는 특정 맛이 그 대상에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단 맛을 보게 된다면, 자신의 의도가 전혀 없었던 순간에조차 맛보는 사람들과 동일한 공동체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꿈을 맛보는 것과 같은 순간이거나 춥고 서글픈 때처럼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달콤한 희망보다 입 안이 까끌하고 씁쓸한 봄을 노래하는 이재훈의 시세계가 더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전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사사>, 2017년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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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승원 | 문학평론가.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계간 <포지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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