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4.02.21 이재훈의 <기타가 있는 궁전> 읽기
  2. 2013.11.15 황하의 순례자 (이재훈론)_ 김혜영
  3. 2007.11.15 병든 미아
  4. 2007.09.19 서정의 위기, 서정의 확장
  5. 2007.09.05 시적 회상의 두 유형_ 김옥성
  6. 2007.03.15
  7. 2007.01.14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8. 2007.01.14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기타가 있는 궁전

 

 

이재훈

 

 

아버지가 기타를 연주하십니다. 나는 아버지의 다리 밑에 누워 있습니다. 기타에서 떨어지는 마른 고독이 목젖을 열게 합니다. 노래를 부릅니다. 말들이 우르르 목덜미로 떨어집니다. 말들이 저 밖으로 퍼지지 못하고 등 뒤로 차오릅니다. 나는 말 위에 떠 있고, 아버지는 저 말 속에 계십니다. 내가 뱉어놓은 검은 말 속에서 기타를 연주하십니다. 말이 진화하면 물이 된다지요. 고도로 단련된 연금술인 셈입니다. 허공에 산화되어 사라지는 말을 만들어 냅니다. 그제서야 저는 말을 배웠습니다. 내 말은 이미 물이 되었습니다. 물속에서 기타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버지가 기타를 연주하신 곳은 궁전이었다고 합니다. 그 궁전의 돌계단이 너무 높았지요. 다리가 아파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곤 노래 위를 떠다녔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했던 기억의 꽃잎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립니다. 검은 말들이 기타의 현을 먹고 저렇게 아름답게 치장을 하다니. 참 감동스럽습니다.

겨울이 오고 말들이 얼어붙습니다. 저는 도끼로 말들을 내려칩니다. 얼었던 말의 입이 쩍 벌어지고 피가 솟아오릅니다. 아버지, 제 말이 자꾸만 피가 됩니다.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려옵니다. 등 뒤로 솟는 피가 참 따뜻합니다.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중에서

 

 


 

 

 

이재훈의 「기타가 있는 궁전」을 읽으면서 어떤 연주가 사건이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생각했다. 하나의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여러 사태들을 연쇄적으로 이끌어낼 때, 그 사태는 사건으로 전화된다.

이 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은 아버지의 기타 연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아버지의 연주를 시적 화자는 자주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연주에서 “마른 고독”을 듣게 될 때, 그 연주는 사건으로 전화된다. 저 연주가 “마른 고독”임을 감지하는 순간 시적 화자의 목젖이 열리게 되기 때문이다. 하여, 열린 목젖은 노래를 불러일으키고 “나는 말 위에 떠 있”게 되며 아버지는 “내가 뱉어놓은 검은 말 속에서 기타를 연주하”시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은 시적 화자가 부르는 노래의 말이 물로 진화하게 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물과 같이 흐르는 노래는 말의 궁륭을 이룰 수 있게 했던 것이어서, 아버지는 그 궁륭의 궁전에서 연주하시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시적 화자의 노래를 불러일으켰던 것이 아버지가 연주하는 “기타에서 떨어지는 마른 고독”이었음을 상기해본다면, 말이 물로 진화될 수 있었던 것은 고독하게 말라버린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슬픔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그 고독과 슬픔은 어떤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한 사람을 사랑했던기억의 꽃잎들”인 “검은 말들”이 그 죽음을 암시한다. “검은 말들”에 기타의 현을 먹이는 아버지의 연주는 죽어버린 연인에 대한 “기억의 꽃잎들”을 반짝거리게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가 “뱉어놓은 검은 말”이란 결국 기타 연주로 현현한 아버지의 검은 말들을 미메시스한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교묘하게 시간은 순환되는데, 화자가 자신의 “검은 말”에 아버지를 유폐한 것은 바로 아버지가 연주로 전화시킨 “검은 말들”에 미메시스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의 순환이 가능한 것은, “등 뒤로 솟는 피가 참 따뜻”하다는 문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아버지와 화자가 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려옵니다”라는 문장에서 암시받을 수 있듯이 저 일련의 사태들은 화자의 기억과 상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현재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암시 말이다.

그래서 “겨울이 오고 말들이 얼어붙”은 것 아니겠는가. 하여, 이재훈 시인에게 시 쓰기란 그 얼었던 말들을 도끼로 내려쳐서 그 말 속의 피―아버지의 피이기도 할―를 솟아오르게 하는 것이다. 말을 피가 되게 하는 시 쓰기는 아버지의 연주처럼 죽은 연인에 대한 기억―“검은 말들”―에 악기―“기타의 현”―를 먹이는 일이기도 할 터, 결국 그것은 현재 얼어붙어 있는 ‘사건’―“마른 고독”을 떨어뜨리는 아버지의 기타 연주-을 다시 기억하여 되찾는 일인 것이다.

- 이성혁(문학평론가)

 

출전 : <시사사>, 2014년 1~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

황하의 순례자

- 이재훈론

 

 

김혜영

 

 

 

1. 기원을 향한 아득한 향수

 

원시 부족사회는 그 집단을 다스리는 위대한 아버지가 있었고,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법과 심판을 수용해야 하는 윤리적 구속과 그 속박을 끊고 감히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고픈 욕망도 함께 가졌을 것이다. 아버지의 법을 지키는 것과 아버지의 법을 위반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는 종교든 세속의 정치권력이든지 언제나 의식의 틈새를 비집고 출현하는 사건이다. 가장 작은 집단인 가족 안에서 아버지가 차지했던 권력은 어린 아들에게 전지전능한 아버지의 환상을 품게 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뿐만 아니라 원시 사회의 추장이나 고대 국가의 왕이 소유한 절대 권력이 갖는 아우라가 어쩌면 자연스럽게 전지전능한 그 어떤 절대적 존재에 대한 종교적 사유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고대국가의 왕이 소유한 신성함은 종교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왕의 집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금기와 터부 역시 내포하고 있다. 그 절대적인 아버지가 현대에서는 여러 번 살해되었고 끊임없이 전복되고 있다. 기원으로서의 아버지를 해체한 현대 문명 속에서 고독한 개인들은 현상의 물질적 가치 혹은 생존을 위한 가혹한 경쟁체제에 매몰되어 황하에 익사될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이재훈의 시 세계는 기독교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하여, 존재의 기원에 대한 상상과 별을 노래하는 시인의 깊고 푸른 여정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적 공간은 광활하고 존재의 깊은 심연에 대한 탐색을 추구한다. 첫 시집인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는 “말”이라는 상징적 동물과 언어라는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시적 화자는 상상 속의 말을 타고 아득한 존재의 기원을 찾아 중세의 기사처럼 순례를 떠난다.

 

   1

 

   그곳을 찾았을 때

   모든 시간은 무너지고

   가없는 기억의 언덕도 무너지고

   또닥또닥,

   희미한 발굽 소리만 들렸는데

 

   2

 

   잠든 말, 묵상도 없는 말들이 벽에 붙어 있다 너의 소리를 들으려고 널 만진다 그제야 너는 벽화가 된다 널 만지면 황소가 되었다가 사슴이 되었다가 초원을 가로지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타 노래를 부르는 추장이 된다

 

   ―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부분[각주:1]

 

세계의 근원을 기독교에서 로고스 즉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거룩한 신의 말씀으로 창조된 우주와 인간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 시인은 맹목적으로 신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기원에 대한 역사를 쓸 야심을 갖는다. 이 세상에서 아무도 가지 않는 나만의 시원, 나만의 언어 찾기에 골몰하는 것이다. 그가 타고 가는 말은 고대 토템에서 부족들이 숭상했던 여러 동물들 즉 황소, 사슴, 말, 돼지, 매, 뱀 가운데 하나이다. 시인이 말을 선택한 것은 말을 타고 하늘을 날고픈 비상의 의지와 함께 언어의 연금술사를 꿈꾸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사명은 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언어에 자신만의 새로운 언어의 집을 건설해, 커다란 변화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을 지향하는 시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그의 첫 시집이다.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내 목을 자르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라고 절연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재훈의 시적 여정에서 이토록 담대한 선언이 또 있겠는가. 자신의 목을 스스로 자른다는 것은 자살의 의미보다는 성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부분이다. 예수의 비범한 능력으로는 죽음의 잔을 피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 선포한 진리를 위해 죽음의 길을 스스로 걸어간 예수와의 동일시가 비쳐진다. 예수가 유대교의 모세 신앙을 중심으로 한 유일신 개념과 선택받은 민족에 대한 우월의식을 타파하고 보다 넓은 보편성의 종교로 방향을 전환한 것처럼 이재훈이 시인으로서 지향하는 것은 새로운 자신만의 기원 찾기인 것이다.

인간 존재의 본질과 아득한 시원에 대한 탐색을 지향함에 있어서 아버지를 위반하는 아들의 출현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이다. 중세나 16,17세기의 종교시에는 전능한 하느님에 대한 찬미와 신성한 섭리에 부합되는 삶을 살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20세기 이후의 종교시는 신에 대한 헌신이나 찬미 보다는 신으로부터 이탈한 현대인의 초상이나 신을 전복하려는 시도를 한다. 남성적인 아버지 신에 대한 반기로써 여성시인들은 가부장제의 모태로서의 아버지 신을 거부하고 살해하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한다. 이재훈의 시 곳곳에 스며있는 종교적 상징과 이미지는 아버지 신을 살해하고 아들로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보다는 그 어떤 근원에 이르기까지의 혼란스러운 순례의 기록으로 읽혀진다. 첫 시집에서는 낭만주의적 사유의 흔적을 보이면서 아득히 먼 고대의 시공간을 배회하는 영혼의 몸짓을 묘사하고, 둘째 시집인 <명왕성 되다>에서는 자본주의라는 물신 사회의 왜곡된 이미지를 황하의 다양한 풍경 속에 풀어놓는다. 욕망과 자본이라는 이교도의 신을 위해 예수라는 인격신을 살해한 현대 문명의 기괴한 얼룩을 스케치한다. 대도시의 풍경과 중국을 관통해서 흐르는 황하 이미지를 중첩적으로 겹쳐 놓음으로써 고대 문명과 현대 문명의 이질성과 여전히 삶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을 펼쳐 보인다.

모세는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선언함으로써, 절대적 진리가 감각적 대상이 아닌 정신적인 것임을 그의 백성들에게 각성시킨다. 고대 문화에서는 이집트 신화처럼 여러 다양한 동물 신의 형상과 태양신 ‘라’ 의 상징이 지배적이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영원히 존재하고, 무한히 자비와 축복을 베푸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이라는 유일신의 개념은 이전의 다신교의 전통을 억압해 버린다. 예수가 죽은 이후에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한 유대인 바울 역시 육체 보다는 정신적 사랑의 우위를 설파한다. 그러나 이재훈은 그러한 가치에 함몰되지 않고 감각의 순수성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그의 시「수선화」에서는 한밤중의 몽정인지 자위인지 알 수 없지만 사춘기 소년의 육체에서 꽃피는 생명의 노래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한밤중에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을 잘 무렵이면, 내 몸에 꽃씨 앉는 소리가 들린다. 간지러워, 암술과 수술이 살 부비는 소리가 사물거리며 온몸에 둥지를 틀고, 어머 꽃피네, 마른버짐처럼, 간지러운 꽃이 속옷새로 피어나네, 내 몸에 피는 꽃, 어머 내 몸에 핀 꽃, 나르키소스의 영혼이 노랗게 물든, 수선화가 핀다, 아름다운 내 몸, 노랑 꽃파랑이 쓰다듬으며 어깨에서 가슴을 지나 배꼽으로 핀 꽃과 입맞추고, 시커면 거웃 사이에도 옹골지게 핀 꽃대 잡는다, 아아, 아 에코가 메아리치네, 아름다운 내 몸, 거울에 비추어, 아아아 에코가 흐느끼네, 내 몸이 하분하분 물기에 젖네, 꽃들이 더펄거리며 시들어가네, 나르키소스여 내 몸에 오지 마소서 五慾에 물든 몸 꽃피게 마소서

   한밤중이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들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나

 

   ― 「수선화」 전문[각주:2]

 

사춘기 소년이 겪는 성적 욕망의 발산을 수선화의 이미지를 통해 묘사하면서, 금욕을 미화시키는 종교 사이에서 갈등하는 소년의 내면을 보여준다.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가 자기애에 빠진 모습도 동시에 연상시킨다. 나르키소스가 연못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연못에 빠져드는 모순을 두려워하는 시적화자의 심적 갈등이 구체화되어 있다. 자기애를 지향하는 이드의 폭력적인 충동과 타자에의 사랑을 강조하는 초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심리적 에너지가 예술로 승화된 시이다. 생명으로 충만한 육체의 순수한 욕망과 그것을 억압하려는 윤리 사이에서 고민하는 소년의 긴장과 두려움이 노란 수선화처럼 어둔 밤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시이다.

 

2. 명왕성처럼 퇴출당한 신의 아들들

 

프로이트는 <종교의 기원>에서 종교와 신경증과의 상관성을 흥미롭게 진행하면서 정신적 외상에 대해 설명한다.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라는 논문에서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탈출시키고 새로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려한 모세를 살해한 기억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세가 가르쳐준 유일신의 교리가 그들을 너무 억압했기에 모세를 살해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를 죽인 죄의식과 함께 모세의 신앙으로의 회귀를 전승을 통해서 이루어왔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를 죽인 후, 죽은 예수에 대한 사랑을 재확인하고 예수의 성찬식을 되풀이하는 종교적 의식과 유사하다. 이 같은 증상이나 사고의 패턴이 신경증 환자에게도 나타난다고 그는 주장한다. 강박증을 가진 환자들이 무엇인가를 금기시하거나, 강박적으로 특정 행위를 반복하는 것 역시 속죄 혹은 자기 방어의 충동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의 토템 신앙에서 부족의 상징으로 신성시하는 동물을 잡아 서로 나누어 먹는 전통이 기독교에서 예수의 몸과 피를 나누어 먹는 의식으로 계승되었다고 보고 있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는 현대 종교도 고대 원시 사회의 토템 신앙과 다신교의 여러 이미지들을 계승하고 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로버트슨 스미슨의 토템 이론을 바탕으로,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던 무리는 토템을 받드는 형제를 중심으로 하는 무리로 자리바꿈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아버지로부터 승리를 쟁취한 형제들은 아버지를 죽인 뒤부터 아버지의 소유였던 여자들을 포기하고는 족외혼속을 좇게 되었다. 이로써 아버지의 권능은 붕괴되고 가족은 모권 중심으로 재편성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들의 양가적인 감정 태도는 그 이후의 전 발전 단계에 걸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형제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특수한 동물을 토템으로 세웠다. 이 토템 동물은 형제들의 조상이자 수호령신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다치게 하거나 죽여서는 안되었다. 모듬살이의 남성들은 일년에 한 번씩 한자리에 모여 의례적인 향연을 벌였는데, 그들은 바로 이 자리에서 토템 동물(평소에는 숭배의 대상이던)을 죽이고는 모두 그 고기를 찢어 나누어 먹었다. 모듬살이의 남성이면 어느 누구도 빠질 수 없는 향연은 아버지 살해의 의례적인 반복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사회적인 질서, 윤리적인 규범, 그리고 종교가 시작되었다. 로버트슨 스미스의 토템 향연과 기독교의 최후의 만찬 사이의 유사성은 무수한 내 선배 학자들의 주목을 환기시켰다.[각주:3]

 

기독교의 만찬의식을 고대의 토템 동물을 제사지내고 서로 나누어 먹는 전통과 연관시키는 것은 흥미롭다.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절대적인 아버지의 잔영과 그 아버지를 살해하는 아들들의 이미지는 인간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증상임을 설명하고 있다. 개인의 측면에서는 유아기 때 겪은 외상 같은 것들이 잠복되어 있다가 사춘기나 성인기에 반복되어 출현하는 신경증의 형태로 나타난다. 종교에서도 부친살해와 그에 대한 죄의식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이성의 억압을 피해 은폐되었다가 전승이라는 구술의 방식 혹은 문학이나 예술의 형태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재훈의 시 「할례의 연대기」에서는 어릴 적 경험한 폭력이 어른이 된 이후에도 수족관의 물고기를 보면 반복해서 떠오르는 양상을 볼 수 있다. 동네 형들의 짓궂은 장난에 저항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가 내면에 증오심을 차곡차곡 쌓지만 한편으로는 그 감정을 억압해버린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였던 수족관의 물고기를 풀어주는 행위로 전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동네 형들이 내게 침을 뱉던 날,

하얗다며 얼굴에 진흙을 바르던 날,

공중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오줌을 내갈겼다.

붉은 얼굴로 욕하는 연습을 했다.

다행히 집엔 물고기가 있었다.

수족관 유리에 입술을 대고 혀를 내밀었다.

차갑고 막막하여 아름다운 감촉.

침묵을 알아버린 호흡.

나는 방 안에 박혀 물고기와 놀았다.

온 몸이 달아올라 수족관에 다리를 비볐다.

물고기 때문이었다.

악한 아이를 죽이지 못하고

풀밭 위에 누워 한없이 울게 된 것은.

나는 시퍼런 칼을 든 모험의 소년이고 싶었다.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방법쯤은 알고 있었다.

침착하고 고요하게 모두 죽이고 나면,

평정이 온다는 것을.

그것이 운명일지라도.

물고기를 호수에 풀어 주었다.

물에 놓자마자 내 발등을 핥고

허벅지를 핥고 사타구니를 깨물고는

서서히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슬쩍, 물 위에 비치는 내 몸.

온 몸에 비린내가 났다.

가랑이에서 썩은 내가 났다.

난삽한 사랑이 시작되었다.

과분하게 영원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

 

― 「할례의 연대기」 부분[각주:4]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신성한 행위이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하는 거세의 의미를 내포한다. 신성한 행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기가 선행한다. 즉 인류사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근친상간에의 금지일 것이다. 어머니와 자매들에 대한 욕망을 절단하는 의미로서의 거세가 기본적인 의식의 구조로 잠입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갖는 선민의식도 거세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거세의 상징인 할례를 받아들임으로써 거룩한 신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이재훈은 소년의 거세 공포와 함께 거세를 감행하는 절대적인 아버지가 되고픈 욕망을 동시에 표출하고 있다. 그렇지만 감히 폭력을 행사하지 못한 채 풀밭에서 우는 소년은 “나는 시퍼런 칼을 든 모험의 소년이고 싶었다.”라고 독백하면서, 사악한 형들에게 폭력적으로 진압하려는 의지를 강화시킨다. 하지만 이 욕망은 초자아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수면 아래 잠기고 이드의 욕망으로 억압될 뿐이다. 그렇지만 이 억압된 충동이 갑자기 수족관의 물고기를 호숫가에 풀어줘 버린다. 의식의 틈새를 뚫고 나오는 이 무의식적 행동은 욕망의 자유로운 분출과 맞닿아 있다. 지나치게 윤리를 강조하는 삶의 굴레를 벗어나고픈 다양한 충동들, 성적 충동이나 폭력에의 욕구 등을 분출하는 방식에서 오히려 신의 윤리를 전복하고픈 욕망이 불현듯 출현한다. 그리고 그는 과감히 “과분하게 영원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라고 선언한다.

고대의 전지전능한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들이 얻은 자유는 새로운 사회의 틀을 짜면서 공존의 삶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현대의 양상은 아버지의 절대적 자리에 자본이라는 물신이 차지한 듯하다. 형이상학적 사유보다는 감각적 실존에 더 함몰되고, 정신보다는 육체의 가치에 더 매몰되는 듯하다. 그의 시 「만신전(萬神殿)」에서는 구원 같은 개념보다는 대도시에서 출현하는 유령과도 같은 욕망의 흔적이 그려져 있다.

 

저는 오래전 아버지를 죽이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뒤로 수많은 신들이 제 속에 들어와 소리를 지릅니다. 홀짝 홀짝 살들을 빨아 먹습니다. 가슴이 휑뎅그렁해져서 사다리를 타고 허공 위에 올라갔습니다. 십자가가 네온을 켜고 붕붕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오리온을 찾으려고 별자리를 하나씩 짚어 보았습니다. 거인의 눈과 코와 활 오늬의 도톰한 입에 손가락이 빨려 들어갔습니다.

 

― 「만신전(萬神殿)」 부분[각주:5]

 

위의 시에서 도시를 배회하는 유령 같은 도시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쓴 연작시인「대황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황하는 고대 중국 문명의 젖줄기로서 생명의 물이었지만 이재훈의 시에 등장하는 황하는 불모의 이미지이다. 마치 엘리엇의 「황무지」처럼 풍요의 물이 아니라 메마른 사막과 같은 느낌이 강하다. 유순하면서도 장대하게 흐르는 물줄기는 동양철학에서는 도의 이미지로서 절대적인 진리의 현현처럼 간주되지만, 그의 시에서는 낙원을 상실한 채 끝없이 질주하는 문명의 속도에 지친 낙오자들이 드나드는 길목처럼 느껴진다. 첫 시집에서 원시 시대의 신성하고 거룩한 별을 동경하던 시적 자아가 척박한 도시 문명의 길바닥을 맨몸으로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왜소화된다. 그래서 결국은 대다수의 시민들은 태양계에서 어느 날 문득 퇴출당한 명왕성처럼 신의 아들의 지위를 상실한 채 서서히 잊혀져가는 익명의 존재들이 되어간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 「명왕성 되다(plutoed)」 전문[각주:6]

 

이재훈의 「명왕성 되다(plutoed)」시편은 최초의 아름다운 말의 부족을 찾아 떠난 시적자아가 팍팍한 도시에서 발견하는 자화상의 한 단면이다. 아름답고 성스러운 별의 영혼임을 인식하는 연금술사가 문득 발견한 것은 초라한 소시민의 일그러진 얼굴이다. 늦은 밤 지하철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익숙한 얼굴들의 피로감이 현대 도시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더 이상 전지전능한 신의 자랑스러운 아들도 아니고 욕망의 극한까지 질주하는 악동도 아니다. 일상의 사소한 의무감에 묶여 묵묵히 달팽이처럼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시인이 발견하는 이 작고 왜소한 자화상이 갖는 위력은 이런 데 있다. 찬란하고 거룩하게 빛나는 별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처럼 사라지는 ‘소멸’을 꿰뚫는 시선이 예언자의 눈빛이다. 종교의 환상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허무를 처절할 정도로 직면하는 용기가 빛난다. 유대인처럼 선택받았다는 과잉된 자기 확신도 거부하고, 아버지의 억압적인 거세를 조롱하고 비웃을 수 있는 시인의 말은 하늘을 날아가는 적토마처럼 독자의 인식에 빗금을 지른다. 지나치게 엄격한 윤리 역시 억압이 되어 그 욕망을 대리적으로 분출하게 마련이고, 자유를 탐닉하는 자아 역시 먼지처럼 세상에서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불멸을 꿈꾸는 연금술사의 끈질긴 욕망은 새로운 사건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제물로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 그 비밀의 성소(聖所)가 내 집이었다./ 소멸이/ 내 먹는 밥이었다.”(「연금술사의 꿈」)에서처럼 소멸을 지향하는 찬란한 꿈이 빚어내는 새로운 세계가 궁금해진다. 자신의 몸을 죽여 제물이 된 고대의 토템 동물처럼, 혹은 살해된 모세처럼,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처럼 시인은 자신의 말이 아득한 먼지처럼 사라질지라도 누군가의 밥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기억의 흔적처럼 전승을 통해 출현하는 종교적인 사건처럼, 혹은 신경증 환자의 외상처럼 상처로 얼룩진 욕망들이 그의 시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아주 작은 먼지일지라도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별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그의 통찰력이 환한 빛을 비춘다. 연금술사는 자신의 몸을 내어주듯 자신의 내밀한 언어를 내밀어 허무한 생을 건너는 불사조의 깃털이 된다.

 

 


출전 : <시와사상>, 2012년 가을호.

 

 

  1. 이재훈,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문학동네, 2005. p. 19-21. [본문으로]
  2. 이재훈,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문학동네, 2005. p. 18. [본문으로]
  3. 지그문트 프로이트, <종교의 기원>,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7. p. 420-1. [본문으로]
  4. 이재훈, <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p. 2-73. [본문으로]
  5. 이재훈, <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p. 36-7. [본문으로]
  6. 이재훈, <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p. 25. [본문으로]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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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미아

시詩 2007. 11. 15. 13:27


이재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할 때 궁창이 열렸습니다. 저는, 그 작은 골짜기에서 푸른 씨앗을 주웠습니다. 그때 물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간은 망각을 가져다주더군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았는데, 저 그만, 큰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 푸른 씨앗을 한 자궁 속에다 잃었습니다. 이 땅의 푸른 날숨과 들숨들은 모두 광년을 넘어왔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서기 이천 년도 인간이 만들어낸 시간이 아닌가요.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저, 가난한 뱃속에서 막걸리 찌꺼기로 취하며 이 작은 몸뚱아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기쁘시죠? 태초부터 저와 함께한 그대들, 정말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왜 하필 이 늙은 땅에서 저를 잃으셨나요?
쇠지랑물과 땅더껑이 속에서 벌레들이 슬금슬금 기어나옵니다.
숨소리가 들리세요?
거북이처럼 엎드려 살아도 자꾸 병들어갑니다.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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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이라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뒷말은 아마도 축복이 아닐까. 어미의 자궁을 빠져나온 신생아의 울음소리에 사람들은 기쁨의 박수와 함께 덕담을 보낸다. 그러나 산모의 통증보다, 빠져나오느라 더 많이 아팠던 아기는 여전히 울고 있다. 탄생을 신비와 경이,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시인은 외로운 미아로 부르고 있다.

가난한 뱃속에서 막걸리 찌꺼기로 취하며 제 몸을 만들고 푸른 씨앗을 잃어버린 죄 값으로 병들어간다. 탯줄이 끊어지고 첫울음이 터지는 순간부터 나는 미아다. 어미가 손을 놓고 나를 잃어버린 거다.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전도서 1:9)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던 이 늙은 땅에서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혼자뿐이다. 탄생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이미 정한 바 되어 있었으니, 속수무책으로 나는 태어날 수밖에 없다. 태중에서 나를 잃어버린 어미를 탓할 수도 없다. 벌레들이 슬금슬금 기어나오는 땅바닥을 보면 온몸에 소름이 돋아도 거북이처럼 엎드려 살아야한다. 잘려진 탯줄을 궁창에 던지고 살아 팔딱여야 한다. 적어도 살아 있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얻어먹은 막걸리 찌꺼기 값을 갚으려면 병든 몸으로 신음소리라도 팔아야 한다. 찬바람 부는 새벽 병든 미아들의 쿨럭이는 기침소리로 골목 안이 술렁인다.  (허은희 시인)

_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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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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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들의 서정성 변모를 중심으로


김지선


1. 서정성 논란과 서정의 변화 

2006년의 시단은 서정시 논란으로 뜨거웠다. 환유적, 환상적, 언어 분절의 심화 등의 키워드를 특징으로 하는 젊은 시인들의 시를 "다른 서정"으로 지칭하며 시의 지평을 넓힌 시로 지지하는 쪽과 이들의 시에 회의적 시선을 드리우며 전통을 잇는 서정시를 옹호하는 쪽의 열띤 논쟁이 오고 갔다. 서정시에 대한 논란은 서정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담론을 통해 우리의 시대성을 담아내는 장르로써 서정시의 지평과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현재 우리 시가 배태한 서정의 질에 대한 회의가 담긴 문제이다.
"다른 서정"에 쏟아지는 부정의 시선은 무엇보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의식이 없으며, 놀이, 유희에만 경주하는 기법의 시라는 점에 집중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 시는 중심부재의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로서의 자기 정체를 회의하고 고민하는 시대성을 담지한 시로서의 의의를 지닌다는 평가 또한 받고 있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상당부분 시에 접근하는 독법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새로운 서정"의 가능성에 대한 성급한 판단에 앞서 우리의 시단은 시의 독법간의 단절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반시적이며 혁신적 언어의 사용과 기법이 이들 시의 성취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들 시의 일부는 팽팽한 시적 긴장감을 찾을 수 없으며 도식성과 반복성에서 오는 지루함이 상투성으로 굳어지고 있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서정과 반서정의 대립이야말로 문학사에서 되풀이 되어온 쟁점이다. 이러한 시의 반성과 전망의 모색을 통해 문학사는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논쟁은 서정과 반서정의 논란이라기보다는 서정의 확장이라는 변화의 지점에서 나타나는 충돌의 양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논란이 재래적 서정성의 재구축을 위한 노력으로 환원된다면 이는 다원화된 시의 양상을 획일화하고 단순화시킬 위험을 안게 될 것이다. 새로운 시의 화법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논의가 전통 서정시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촉발되어서는 안 된다. 시가 시다움을 잃어버리지 않을까라는 우려의 목소리에 서정의 질에 대한 고민이 실려야지 기존 시에 대한 권위와 고집이 담겨서는 위험하다.
장르는 무소불위의 권위나 고정불변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는 굳건한 실체가 아니다. 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사회와 역사의 장에 부딪히며 각개전투를 해 나가는 사이에 마모되고 잘려나가며 새롭게 형성해나가는 과정의 산물인 것이다. 변화하지 않는 고정불변의 정체성이야말로 서정시가 지닌 고질적인 병폐가 될 것이며 관습적 틀에 안주하려는 안일함이 될 것이다. 이들의 논의가 재래적 서정으로의 후퇴라는 퇴보로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는 작품 하나 하나에 대한 질의 반성과 더불어 현대적 삶과 조우하여 빚어내는 시적 주체의 다각적인 삶의 양상과 반응, 그에 따른 시적 변화를 감지하고 살펴보려는 노력이 불가결하다.


  2. 풍경, 주체, 시선의 변화

풍경은 오래도록 서정의 원천이었다. 시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자아소멸의 시점에서 시작되어 세계와의 균열된 틈이 없는 조화와 화합의 계기가 되거나, 인간의 세계를 드러내기 위한 해석된 자연이었다. 박라연의 시에 자연은 적극적으로 해석된 자연으로 나타난다.
 
매 순간 태어나고 죽는
뗏장 묻을 시간도 문상의 시간도 없는
지상에서 가장 단명한 목숨인
물, 속에 어룽대는
얼굴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며
어이! 이 사람아!
오래 사는
몸값으로 죄조차 짓지 않는다면
어찌 산목숨이겠는가?

내 몸 위에서 반짝이는 저 햇살들은
대쪽같이 살겠다며 저를 분질러버린 이들이
세상 그리워
눈부시게 다시 한번 왔다
가는
혼불이라네
아무렴!
―박라연, [영산호湖 생각], [우주 돌아가셨다], 랜덤하우스 중앙)

위 시의 발원지는 인간과 자연의 전도된 시선이다. 완전무결한 우주적 존재가 사유하는 인간은 찰나라는 순간을 통해 영원으로 회귀하지 못하는 연민의 대상이다. 우리는 이 무한한 너그러움 속에서 위안을 받을 뿐 아니라 불완전함마저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겉으로 완전무결해 보이는 이 시선은 인간적 해석에 의해 가능할 뿐이다. 이 거시적 시선이 우리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이분법적 대립이라는 몇 가지 고정된 전제가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인간은 하잘 것 없는 존재이며 대자연은 영원하고 완전무결하다. 찰라라는 짧은 순간과 영원은 같은 차원으로 통하는 시간의 겹이다. 하지만 이러한 우주적 차원의 거시적 시선이 시적인 울림을 일으키기에 시적 사유의 주체인 시인의 담론이 너무 거대하고 관념적이다. 지나치게 초연한 자세는 미적 거리의 소멸을 일으키며 때로 미적 거리의 소멸은 미적 교감의 소멸로 나타나기도 한다.
김선우의 시 역시 풍경을 주된 시적 제재로 삼아 해석된 자연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의 풍경은 익숙한 듯하면서도 어쩐지 묘한 인상을 남긴다. 

하루가 저물어간다, 참 잘 곰삭은 저 저녁 풍경이 실은 천연스레 뒤를 보이고 앉아 볼일을 보는 크낙한 엉덩이라면 저물녘 저 태양이 문이라면
금빛 항문 ― 어슴푸레 열리는 새벽으로부터 한낮 지나 저물녘에 이른 우리의 하루가 뒤를 보이고 앉아 시름없이 일을 보는 크낙한 엉덩이의 한 오분 시원한 용변과 같다면
수성이랄지 목성은 그녀의 젖가슴쯤 명황성이랄지 천왕성은 쌔근거리는 정수리 문쯤이 될까
금빛 거웃 바람결에 흔들려 드문드문 하늘자리 젖는 저 풍경이 우리가 셈하지 못하는 어떤 하루의 한 오분 마지막 순간이라면
저물어간다, 허방지방 거미줄 치고 있는 목마른 나의 하루는 긴가 너무 짧은가 아득한 물병자리 옆얼굴이 슬몃 보였는데 뭉게구름 느릿느릿 금빛 항문을 닦아주며 흐르는데
―김선우, [어느날 석양이], [도화 아래 잠들다], 창비)

시는 완전히 인간적으로 해석된 자연임에도 낯선 인상을 준다. 그녀의 시를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보기에는 적극적 판단의 개입이 애매하며, 에로틱하게 보기에는 지나치게 질펀하다. 시인의 상상력으로 포착되는 석양무렵의 풍경은 여성의 몸이다. 여기까지는 다른 시들과 비교해 그다지 다를 게 없는 듯하지만 이때의 여성은 관습적으로 우주와 여성을 신성시하고 신비화하는 여타의 상상력과는 차별화된다. 석양 무렵 번지는 노을을 두고 몸이 배출하는 용변을 떠올리는 시인의 연상도 범상치 않지만 그보다는 배출의 순간을 '저 풍경이 우리가 셈하지 못하는 어떤 하루의 한 오분 마지막 순간이라면'이라는 시구로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몸과 세계를 동시에 긍정하는 것이 놀랍다. 그러나 이 긍정은 딱 오분이라는 시간으로 제한된다. 뒤를 이어 흐르는 정서는 모호하고 허무하게 흔들림으로써 세계를 주체가 판단할 수 없는 미지의 공간으로 연기한다. 여기서의 풍경은 완전하게 의인화되어 인간의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대상도 아니며 주체와의 거리를 소멸시키고 대타자에 이입되는 존재로써의 자연도 아니다. 김선우의 시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은 풍경에 닿을 수  없는 일정한 거리를 견지한다. 이 거리야말로 그녀의 시를 투명하게 의미화할 수 없는 해석의 모호한 지점으로 데려가지만 동시에 그녀 시의 매혹적인 면모로 작용한다.  
문태준의 시는 정감있는 문체와 수려한 언어로 뛰어난 미학적 성취를 이루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가재미][맨발]과 같은 구조적으로 안정적이며 미학적으로 매끄러운 휴머니즘의 시편들보다는 풍경과 주체가 만나는 애매한 거리의 지점을 형상화한 시가 더 좋다.  

배꽃이거나 석류꽃이 내려오는 길이 따로 있어
오디가 익듯 마을에 천천히 여럿 빛깔이 내려오는 길이 있어서
가난한 집의 밥 짓는 연기가 벌판까지 나가보기도 하는 그런 길이 분명코 있어서
그 길이 이 세상 어디에 어떻게 나 있나 쓸쓸함이 생기기도 하여서
그때 걸어가본 논두렁길이나 소소한 산길에서 봄 여름 다 가고
아, 서리가 올 때쯤이면 알게 될는지
독사에 물린 것처럼 굳어진 길의 몸을
―문태준, [길],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여타의 서정시에서 동일성이 가능해지는 것은 대상과 일체가 된 시적 자아가 풍경의 안을 사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 시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은 정직한 거리를 확보한다. 시적 주체는 풍경의 바깥에서 균열이나 틈을 바라본다. 풍경은 바깥의 타자로써 존재하지만 동경의 대상이나 닮고 싶은 존재는 아니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전원을 그려내는 듯 싶던 시는 후반부 문득'독사에 물린 것처럼 굳어진 길의 몸'이라는 뜻하지 않은 세계의 낯선 풍경으로 귀결된다.

장대비 속을/멧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彈丸처럼 빠르다/너무 빠른 것은 슬프다/갈 곳이 멀리/마음이 멀리에 있기 때문이다/…/저 全速力의 힘/그리움의 힘으로/멧새는 어디에 가 닿을까/집으로?/오동잎같이 넓고 고요한 집으로/中心으로?/아, /다시 생각해도/나는/너무 먼/바깥까지 왔다
―문태준, [바깥],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바깥]의 시적 주체는 바깥을 서성이는 존재다. 세계의 중심, 세계의 근원을 알 수 없는 바깥의 존재로서 그리움의 실체에 가닿기는 요원해 보인다.
전통을 잇는 서정시의 문제는 해석된 자연을 묘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해석이 상투적이고 관습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데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위 시들은 전통을 잇는 서정시 장르의 관습적 장점을 고스란히 취하면서도 달라진 세계 인식의 어느 지점을 사유하게 한다. 특히 중심을 향한 의지와 동일성의 희구가 자동화된 인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중심을 향한 갈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사유할 수 없는 주체의 위치를 직시하기 때문이라는 게 적절할 것이다. 시를 정서의 투사로만 바라보는 시는 낭만성의 과잉으로 흘러가기 쉽고, 서정적 주체와 현실 간의 갈등이 우주적 차원의 포월을 통해 비현실적으로 해소되고 있는 시의 구조는 후기현대의 다차원적이고 복잡다단한 실을 비추기에는 너무 소박하다. 김선우와 문태준의 위의 시들은 주체 중심의 권력적 시선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대성을 성취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내면의 풍경, 타자성을 복기하는 서정적 주체

서정의 변화는 20~30대의 젊은 시인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들의 시에는 비동일성의 원리와 반서정의 원리가 적극적으로 시에 내재되고 있다. 그러나 김경주, 박상수, 이재훈, 박진성, 안현미 등의 시인들을'다른 서정'계열의 시를 쓰는 시인으로만 범주화하기 모호한 점이 있으며 동시에 전통적 서정 계열의 시를 쓰는 시인으로 구분하기도 힘들다. 사실 이들 시인들을 굳이 하나의 계열로 범주화할 필요는 없다. 반서정과 서정의 원리가 얼마만큼 적절하게 녹아들어 시적 미학으로 승화되고 있는가하는 미적 성취의 문제가 보다 중요하다.  
젊은 시인들의 서정이 이전의 서정과 달라지는 확연한 지점은 우리 사회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시의 모티프로 끌어들이고 있으며, 무엇보다 단일 주체에서 벗어나 복합 주체로서의 자아를 인식한다는 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시적 자아의 내면 속에서 주체가 인식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타자성)을 끄집어낸다. 이재훈의 시에서 주체가 환기하려는 것은 세계와 불화하기 이전의 순수한 시적 언어이다.

…말은 내게 뱃속을 열어 보여준다
건강한 줄기를 먹고 자란 말
빨갛게 화장(化粧)한 말의 뱃속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뱃속에 질서 있게 자리잡은 내장의 곡선에
손가락을 갖다대본다
아프다, 말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뱃속에서 말의 새끼들이 뛰어나온다

…말이 쏟아져내린다 초원에 내려 거칠게 달려나간다 내가 지겹게 머무는 도시의 거리까지 와서 내 머릿속을 후드득후드득 내달린다

…믿음엔 증거가 있어야 한다
내가 검은 말을 타고 요정의 검을 차고
맥베스처럼 "눈앞의 이것이 나인가" 되뇌이며
내 목을 자르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
― 이재훈,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부분

이재훈의 시는 존재의 시원에 대한 물음과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그에게 풍경은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복원된 시원의 풍경이며 내면 깊숙이에 가라앉아 있는 선험적 기억의 흔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시적 언어에 대한 믿음이며 완전무결한 태초의 언어를 복기해내고자 하는 시인의 욕망의 발화이다. 낭만적이며 비현실적인 풍경은 동시에 시적 언어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말의 중의적인 의미는 시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근간이면서 동시에 시 인식을 파악하는 중요한 실마리로 작용한다. 맥박이 요동치는 야생의 말이 지닌 생기가 고스란히 말(언어)의 메타포가 되어 말은 생명력을 부여받게 된다. 말은 순수한 약동의 에너지가 되어 시적 자아에게서 도시적 삶을 베어버리고 오롯이 태초의 말이 뛰노는 세계로 시적 자아를 데려간다. 시적 언어는 현실을 재현하려 하지 않는 투명한 질료로서의 언어로 짐작된다. 현실의 언어는 분절의 틈을 지닌 불완전한 기호이다. 실용성을 목적으로 한 현실의 언어는 우리 사회의 원리만큼이나 자본화되고, 경제적 가치로 운영되는 것이기에 존재의 동질성을 재현할 수 없으며 타자와의 완전한 의사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시인이 꿈꾸는 언어는 이와는 다른 언어, 꿈을 생성하는 언어,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언어, 펄펄 살아 날뛰는 태초의 생명력을 지닌 언어이다. 그러나 이재훈의 시는 시의 인식을 언어 실험을 통해 형식화하기보다는 낭만적이며 목가적인 서정으로 그려내는 데에 경주한다.       
김경주의 시 역시 형식은 전통적 서정에서 그리 멀지 않다. 그가 구사하는 시적 언어의 의미는 앞의 이재훈의 시만큼 투명하게 전달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서정성을 획득하는 것은 비전 없는 세계에 대한 체념과 허무의 정서가 낭만적 정조를 자아내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시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귀기 어린 묘한 매혹이 있어 이를 낭만이라는 추상으로 획일화하고 끝내기 어려운 지점에 가 닿는다.'나를 조금씩 인용하고 있는 이 침묵은/바닥에 널브러진 말들의 독해처럼/나에게 있는 또 하나의 육체, 이미지인 것이다'는 그의 표현처럼 그의 시는 육체, 이미지라서 말로 해석할 수 없는 구체적 몸을 감각하게 한다.     

오늘 밤은 취한 말들만 생각하기로 한다
잠든 말들을 깨워서
추위를 이겨낼 수 있도록 술을 먹인다
구유를 당겨 물 안에 차가운 술을 부어준다
무시무시한 바람과 산맥이 있는 국경을 넘기 위해
나는 말의 잔등을 쓸어주며
시간의 체위(體位)를 바라본다
암환자들이 새벽에 병실을 빠져나와
수돗가에서 고개를 박은 채
엉덩이를 들고 물을 마시고 있듯
갈증은, 이미지 하나 육체로
무시무시하게 넘어오는 거다

말들이 거품을 뱉어내며 고원을 넘는다
눈 속에 빨간 김이 피어오른다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취한 말들이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이 말들의 고삐를 놓치면
전속력으로 취해버릴 것을 알기에
나는 잠시 설원 위에 나의 말을 눕힌다
말들의 뱃살에 머리를 베고
(우리는 몇 가지 호흡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둥둥둥 북을 울리듯 고동치는 말의 염통!
말의 배 안에서 또 다른 개인들이 숨쉬는 소리
들려오는 것이다
밤하늘, 동굴의 내벽에서 들려오는 바람의 연령
나를 조금씩 인용하고 있는 이 침묵은
바닥에 널브러진 말들의 독해처럼
나에게 있는 또 하나의 육체, 이미지인 것이다
나는 말의 등에서 몇 개의 짐들을 떼어내준다

말들이 다시 눈 덮인 고비 사막을 넘기 시작한다
그중엔 터벅터벅 내가 아는 말들도 있고
터벅터벅 내가 모르는 말들도 있다
그렇지만 오늘 밤엔 취한 말들만 생각하기로 한다
음악 속으로 날아가는 태어날 때부터
바퀴가 없는 비행기랄지
본능으로 초행을 떠난 내감(內感) 같은 거, 말이
비틀거리고 쓰러져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분만을 시작하려는 것인지
의식을 향해 말은 제 깊은 성기를 꺼낸다
기미(機微)란 얼마나 육체의 슬픈 메아리던가

그 사랑은 인간에게 갇힌 세계였다
  ― 김경주,[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 이 말들을 타고 모든 음악의 출생지로 가볼 수는 없을까],([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램덤하우스중앙)
 
혹한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취한 말을 끄는 풍경은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라는 시집의 제목처럼 이 세상에는 없는 공간의 형상화이다. 시적 자아의 내면 깊숙이 묻혀있는 풍경은 몹시도 황량하고 스산하다. 그것은 이미 황폐한 정신의 내부지만 시적 주체의 집념은 강하다. 그에게 취한 말을 타고 달리는 시간은 순수의 결정체인 음악에 도달하는 수단이기에 깊고 무서운 집중의 순간이다. 여기서의 말을 말(馬)이지만 동시에 말(言)로 해석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끝없이 깊은 나락을 거침없이 미끌어져가는 시인의 언어는 삶의 어떤 비전도 꿈꾸지 않으며 여기에서 어떤 휴머니즘의 감정도 찾아보기 힘들다. 낯선 자신의 세계를 떠도는 유령처럼 그의 언어는 외로움을 견디며 아무도 닿은 적 없는 주체의 정신의 영역을 홀로 떠돌아다닐 뿐이다.   
 

4. 서정의 확장과 서정의 질

서정시는 고도의 산업사회인 후기 현대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 우리의 복잡한 삶의 면모를 담아낼 수 있는 장르인가? 전근대적이며 현실과 괴리된 낡은 세계관의 복사는 아닌가? 서정의 원리를 주체와 대상간의 합일에 의한 동일성의 시학에 한정한다면 이러한 의문은 고스란히 서정시에 대한 회의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서정시는 이미 동일성의 원리로 환원할 수 없는 복잡하고 다성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서정의 원리인 동일성은 대상의 자아화와 일체감을 통해 세계를 소외시키지 않고 연속시킨다. 그러나 절대이성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시대에 서정적 주체의 불완전성을 사유하고 주체와 현실의 길항이 시적 동기로 나타나는 것은 이미 일반화된 서정의 원리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시에서 동일성의 구조를 나타내는 은유만큼이나 환유적 비유가 일반화된 것 또한 서정 장르에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특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준오는 90년대의 여성주의시, 도시시, 일상시 등을 신서정으로 명명한다. 여성주의시는 비판적 시쓰기로서의 반서정주의 경향을 보이며 전통적 시 문법을 파괴하고 일상 회화체를 도입하여 탈중심화된 서정적 자아의 통제와 간섭없이 순간적 충동에 맡겨버리는 경향을 드러낸다. 또한 도시시는 도시라는 일상적 삶 속에서 새로운 서정을 찾았으며 일상시는 희극적 가벼움을 통해 90년대의 변모한 서정적 자아의 탄생을 알린다. 이들 시에서 서정적 자아가 과거와는 달리 탈중심화되는 징후(인격분열-자아분열)을 보이며 선, 악, 미, 추, 이성과 충동 등이 공존하는 인간성의 양면성에서 신서정을 발견하게 한다. 자학과 자기연민의 서정이 융합되어 있고 우리 시대의 문제성의 책임을 자신과 세계쪽에 공평하게 분할하는 모순된 서정을 찾아볼 수 있다. (김준오, [서정, 반(反)서정, 신서정],[현대시의 환유성과 메타성], 살림, 1997) 이들 서정은 반서정과 재래적 서정이 모호하게 겹쳐진 지점에서 사유된다. 비교적 쉽게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내는 서정시 본래의 장점을 잃지 않으면서 낯설고 참신한 감각을 끌어들이고 있는 시들이 시적 성취를 얻고 있는 현상은 현재의 우리 시에서 서정의 확장이 얼마만큼 진행되고 있는가하는 사실을 목도하게 한다. 2000년대의 서정시는 90년대의 서정시의 연장선상에 있다.
따라서 문제는 서정과 반서정의 대립각의 심화가 아니라 시가 일반화, 보편화되며 양식화, 고착화되는 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자연과 주관적 내면의 동일화 구조가 많은 시인들에게서 자동화되고 있으며 반시의 기법과 세계인식마저 관습화되는 현상이야말로 시에의 교감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가? 계간지의 확대로 인해 매 계절마다 배출되는 시의 양이 엄청남에도 불구하고 개성적인 시를 찾아보는 것은 쉽지 않다. 반면 세계 인식이나 감수성이 일반화를 넘어 상투화되어 가고 있는 시는 쉽게 눈에 띤다. 가령 생태시는 늘 자연을 모성이라는 가두리에 가두고 둥근 것, 조화로운 것, 삶의 이치와 깨달음을 주는 닮아가야 하는 존재로 그리고 있으며, 여성시는 남성의 권력과 횡포하에 희생당하는 여성의 아픔을 그려낸다. 선시가 가진 문제점도 인식의 단순화와 알레고리화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승호, 정일근, 차창룡 등의 시에 이르기까지 불교적 색채를 띤 시들은 대체로 피안/차안의 이분적 대립의 방식으로 세계를 나누고, 피안이라는 초월적 세계를 지향해왔다. 소박한 휴머니즘이 추구하는 따뜻한 인간애와 대자연의 부드러운 모성이 비인간화된 산업사회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은 시에서 하나의 교조주의로 굳어져 버린 것은 아닌가?  
서정의 확장은 현대시에서 이미 오래전에 진행된 현상이다. 시적 경향이 다른 시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와 고집스럽게 시의 전통적 원리만을 고집하기보다 타장르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포에시스의 확장과 변화를 적극적으로 이끌어가는 태도야말로 지금 이 자리의 서정시보다 나은 서정시를 배출해내는 데 필수불가결한 시인의 자세일 것이다.

_ [시인시각], 2007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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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성


서정시에서 회상(Erinnerung)은 일상적인 기억과는 다르다. 그것은 경험이나 대상, 사건의 재현이 아니라 경험으로 구축된 기억을 시적 상상력과 결합하여 재구성하는 시적 사유와 상상의 방식이다. 시적 회상은 현재의 것, 과거의 것, 심지어 미래의 것도 서정시의 어떠한 상태성 속에 펼쳐 보일 수 있다. 그러한 시적 회상의 영역에는 현생뿐만 아니라 전생과 내생까지 포함된다.

시적 회상의 가장 전통적인 방식은 근원에 대한 사유와 상상이다. 여기에서 근원은 존재방식에 있어서 근원적인 영역이지, 과거나 현재, 미래로 구획될 수 있는 시간적으로 제약된 특수한 영역은 아니다. 하지만 흔히 근원은 과거의 형상으로 회상된다. 오랜 세월 동안 시인들은 결여된 지금-여기의 현실의 배후에 근원적인 영역을 설정하고, 그것을 회상해 들임으로써 결여를 충당하여 왔다. 그러한 근원적인 것에 대한 회상은 결여된 현실에서 부유하는 자아의 정체성 설정과 관련된다.

권혁웅의 『마징가 계보학』과 이재훈의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는 그러한 근원적인 것에 대한 시적 회상의 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양자는 근원적인 것의 회상을 통해 자아의 시적인 정체성을 설정하는 방식에서는 유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매우 상반된 지향성을 드러낸다. 가령, 권혁웅 시의 시적 주체는 자신의 근원을 ‘서울시 성북구 삼선동’이라는 달동네로 내세우고 있는 반면, 이재훈 시의 시적 주체는 ‘이방의 신화’로 설정하고 있다.

…(중략)…

이재훈의 시적 회상은 이 셋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특징을 지닌다. 이재훈 시의 시적 주체는 근원적인 것을 경험적 과거가 아니라 선험적인 과거로서 신화적인 영역에 상정한다. 그는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의 맨 앞에 수록한 「사수자리」라는 시에서 자신의 고향이 저 밤하늘의 사수자리임을 고백한다. 시적 자아에게 별자리의 신화에서 떨어져 나온 지상에서의 삶은 이방인의 생(生)이다. 그리하여 그는 「빌딩나무 숲」에서 자기 사신을 빌딩 숲에 갇힌 이교도라고 말한다. 「수선화」에 구체적으로 드러나듯이 그러한 시적 회상은 “나르키소스”적인 것이다. 권혁웅이 경험적 과거를 동화적인 것, 만화적인 것, 영화적인 것과 뒤섞어서 세속적인 축제의 분위기를 마련하여 지금-여기의 시적 주체의 공허한 내면을 충만하게 채우는 것과 달리, 이재훈 시의 시적 주체는 자신의 고향을 신화의 영역에 설정하여 자아를 신비화하면서 지금-여기의 공허함을 신비롭고 성스러운 분위기로 충만하게 한다.

이재훈 시의 이러한 나르키소스적인 자아의 신비화는 자칫 과대망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시적 주체는 시집 곳곳에 그러한 함정에 빠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 두고 있다. 그것이 바로 지금-여기의 자아의 상황이다. 황사가 불어오는 거리의 풍경(「공중정원」), 아침도 거른 채 빌딩으로 출근하는 세일즈맨(「세일즈맨의 오후」), 시청 앞에서 시위하는 사람들, 신촌 네거리에서 찬송으로 전도하는 신도(「당신은 가짜다」) 등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경험적 현실의 이미지이다. 시적 자아는 그러한 이미지로부터 신화를 상기한다. 시적 자아에게 신화의 환기는 곧 파편화된 선험적 기억의 복원이다. 「시인 세헤라자데」에서 시적 자아는 “빼앗긴 내 기억들을 처음부터 다시 조립하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다. 시적 자아는 구체적인 현실을 배회하면서, 비루한 거리의 이미지들로부터 신성한 과거의 기억을 호출해내는 것이다.

그러한 시적 회상의 방식은 비록 신화적인 영역을 근원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지상으로부터 초월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시적 주체는 세속 도시의 이미지들로부터 신성한 기억을 환기하고 그것을 통해 세속 도시를 성화한다. 그리하여 자아를 에워싼 세속 도시 자체가 성화된다. 그와 함께 세속 도시에서의 삶 또한 “순례”라는 신성한 여행으로 인식된다. “순례”는 물론 일상에서 벗어나 근원적인 혹은 성스러운 곳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경험의 구조적인 측면을 주목할 경우 “순례”는 세속과 신성의 중간지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재훈의 시에서는 그러하지 않다. 이재훈의 시에서 근원적인 곳은 머나먼 어딘가라기 보다는 세속 도시의 구석구석에 내재되어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시적 자아는 세속 도시의 세속적인 이미지 속에서 성스러움을 체험한다. 그러므로 이재훈 시에서 “순례”는 신비화된 혹은 성화된 세속적 삶 자체라고 이해할 수 있다.

_ [시인시각], 2006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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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사 2007. 3. 15. 11:33

[경남신문 / 시가 있는 간이역 12] 눈-이재훈
 
 
 
 
눈 / 이재훈

눈을 밟는다
눈이 시린 풍경을
꾹꾹 밟는다
그러나 눈은
온전히 밟혀지지 않고
자꾸만 발등 위로
심지어 무릎까지
올라온다
제 존재를
떠올리려 한다
덮어야 할.
밟혀야 할 운명을
내 발걸음에 의탁한 채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눈이 떠올라
내 발목을 쥐고
너도 나처럼
떠올라라
떠올라라
머리 위까지
눈이 날린다

-이재훈. <눈> 전문.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200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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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상이다. 눈이라도 내려 덮어주었으면 좋겠는데. 눈 내리지 않으니 눈 대신 눈에 대한 시 한 편 읽어보자. 세상길이 아무리 탁류라 해도 멈출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다리 아파도 함부로 쉴 수도 없는 것이 우리네 길 위의 삶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조용한 혁명’이다. 섬세함이다. 시인의 시선을 보라. 내리는 눈이 아니라 쌓여 밟히는 눈을 주목하고 있다. 그리하여 ‘밟혀야 할 운명’을 가진 눈이 밟는 자의 힘 반동을 이용해 위로 떠오르는 것을 본다. 아름다운 눈의 혁명. 우리도 가만히 속삭여 보자. 떠올라라. 날아올라라. 머리 위까지! 그러면 우리 삶의 바닥 슬픔이 세상 끌고 가는 힘이란 걸 알 수 있지 않을까. - 배한봉(시인. 《시인시각》 편집주간)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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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한이 들고 입술이 부르터서 몸뚱이가 버거울 때였지. 꿈을 꾸었어. 갑자기 뒷덜미가 서늘해져 지나온 것들을 보지 않으려 캄캄한 앞만 보았지. 저 앞의 세상엔 어떤 동물들이 살고 있을까. 한 발자국 내딛을 때, 내 몸에 사박사박 모래알 밟는 소리가 났어. 오, 누군가가 내 몸을 질근질근 밟고 있었지.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아침마다 청량리에서 신촌으로 가는 131번 버스를 타지. 어쩌다 예쁜 여인이 옆에 앉으면 주문을 외지. 너는 내 아들을 잉태했다. 새벽에 술에 취해 방문을 열고 불을 켜면 섬뜩 놀라. 내 바지에 피가 흘러내리고, 아침에 보았던 예쁜 여인이 아기를 안고 있어.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뒤를 돌아보면 내 목에 십자드라이버를 꽂고 있는 사람이 보여. 당신을 사랑해. 어지러워, 온 몸에 피가 타오르지. 독한 감기약을 먹고 아침이 되면 131번 버스를 타지.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내 몸이 가벼워져 바다 위를 걷는다면, 당신의 손이 내 몸에 닿을 때 흐르는 피가 멎는다면, 그걸 누구에게 고백해야 할까.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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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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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곳을 찾았을 때
모든 시간은 무너지고
가없는 기억의 언덕도 무너지고
또닥또닥,
희미한 발굽 소리만 들렸는데

2.
잠든 말, 묵상도 없는 말들이 벽에 붙어 있다 너의 소리를 들으려고 널 만진다 그제야 너는 벽화가 된다 널 만지면 황소가 되었다가 사슴이 되었다가 초원을 가로지르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 타 노래를 부르는 추장이 된다

3.
말은 내게 뱃속을 열어 보여준다
건강한 줄기를 먹고 자란 말
빨갛게 화장(化粧)한 말의 뱃속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뱃속에 질서있게 자리잡은 내장의 곡선에
손가락을 갖다 대본다
아프다, 말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뱃속에서 말의 새끼들이 뛰어나온다

4.
말이 쏟아져 내린다 초원에 내려 거칠게 달려나간다 내가 지겹게 머무는 도시의 거리까지 와서 내 머릿속을 후두둑후두둑 내달린다

5.
밤이 되면 나는 시를 쓴다
거리의 곤고함에 대해
꽃이 침묵하며 피는 이유에 대해
아는 척 쓰다가 말다가 결국
“말은 태양을 잉태했다”고 쓰다가

6.
믿음엔 증거가 있어야 한다
내가 검은 말을 타고 요정의 검을 차고
맥베스처럼 “눈 앞의 이것이 나인가” 되뇌이며
내 목을 자르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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