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하의 순례자

- 이재훈론

 

 

김혜영

 

 

 

1. 기원을 향한 아득한 향수

 

원시 부족사회는 그 집단을 다스리는 위대한 아버지가 있었고,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법과 심판을 수용해야 하는 윤리적 구속과 그 속박을 끊고 감히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고픈 욕망도 함께 가졌을 것이다. 아버지의 법을 지키는 것과 아버지의 법을 위반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는 종교든 세속의 정치권력이든지 언제나 의식의 틈새를 비집고 출현하는 사건이다. 가장 작은 집단인 가족 안에서 아버지가 차지했던 권력은 어린 아들에게 전지전능한 아버지의 환상을 품게 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뿐만 아니라 원시 사회의 추장이나 고대 국가의 왕이 소유한 절대 권력이 갖는 아우라가 어쩌면 자연스럽게 전지전능한 그 어떤 절대적 존재에 대한 종교적 사유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고대국가의 왕이 소유한 신성함은 종교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왕의 집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금기와 터부 역시 내포하고 있다. 그 절대적인 아버지가 현대에서는 여러 번 살해되었고 끊임없이 전복되고 있다. 기원으로서의 아버지를 해체한 현대 문명 속에서 고독한 개인들은 현상의 물질적 가치 혹은 생존을 위한 가혹한 경쟁체제에 매몰되어 황하에 익사될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이재훈의 시 세계는 기독교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하여, 존재의 기원에 대한 상상과 별을 노래하는 시인의 깊고 푸른 여정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적 공간은 광활하고 존재의 깊은 심연에 대한 탐색을 추구한다. 첫 시집인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는 “말”이라는 상징적 동물과 언어라는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시적 화자는 상상 속의 말을 타고 아득한 존재의 기원을 찾아 중세의 기사처럼 순례를 떠난다.

 

   1

 

   그곳을 찾았을 때

   모든 시간은 무너지고

   가없는 기억의 언덕도 무너지고

   또닥또닥,

   희미한 발굽 소리만 들렸는데

 

   2

 

   잠든 말, 묵상도 없는 말들이 벽에 붙어 있다 너의 소리를 들으려고 널 만진다 그제야 너는 벽화가 된다 널 만지면 황소가 되었다가 사슴이 되었다가 초원을 가로지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타 노래를 부르는 추장이 된다

 

   ―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부분[각주:1]

 

세계의 근원을 기독교에서 로고스 즉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거룩한 신의 말씀으로 창조된 우주와 인간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 시인은 맹목적으로 신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기원에 대한 역사를 쓸 야심을 갖는다. 이 세상에서 아무도 가지 않는 나만의 시원, 나만의 언어 찾기에 골몰하는 것이다. 그가 타고 가는 말은 고대 토템에서 부족들이 숭상했던 여러 동물들 즉 황소, 사슴, 말, 돼지, 매, 뱀 가운데 하나이다. 시인이 말을 선택한 것은 말을 타고 하늘을 날고픈 비상의 의지와 함께 언어의 연금술사를 꿈꾸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사명은 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언어에 자신만의 새로운 언어의 집을 건설해, 커다란 변화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을 지향하는 시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그의 첫 시집이다.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내 목을 자르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라고 절연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재훈의 시적 여정에서 이토록 담대한 선언이 또 있겠는가. 자신의 목을 스스로 자른다는 것은 자살의 의미보다는 성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부분이다. 예수의 비범한 능력으로는 죽음의 잔을 피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 선포한 진리를 위해 죽음의 길을 스스로 걸어간 예수와의 동일시가 비쳐진다. 예수가 유대교의 모세 신앙을 중심으로 한 유일신 개념과 선택받은 민족에 대한 우월의식을 타파하고 보다 넓은 보편성의 종교로 방향을 전환한 것처럼 이재훈이 시인으로서 지향하는 것은 새로운 자신만의 기원 찾기인 것이다.

인간 존재의 본질과 아득한 시원에 대한 탐색을 지향함에 있어서 아버지를 위반하는 아들의 출현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이다. 중세나 16,17세기의 종교시에는 전능한 하느님에 대한 찬미와 신성한 섭리에 부합되는 삶을 살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20세기 이후의 종교시는 신에 대한 헌신이나 찬미 보다는 신으로부터 이탈한 현대인의 초상이나 신을 전복하려는 시도를 한다. 남성적인 아버지 신에 대한 반기로써 여성시인들은 가부장제의 모태로서의 아버지 신을 거부하고 살해하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한다. 이재훈의 시 곳곳에 스며있는 종교적 상징과 이미지는 아버지 신을 살해하고 아들로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보다는 그 어떤 근원에 이르기까지의 혼란스러운 순례의 기록으로 읽혀진다. 첫 시집에서는 낭만주의적 사유의 흔적을 보이면서 아득히 먼 고대의 시공간을 배회하는 영혼의 몸짓을 묘사하고, 둘째 시집인 <명왕성 되다>에서는 자본주의라는 물신 사회의 왜곡된 이미지를 황하의 다양한 풍경 속에 풀어놓는다. 욕망과 자본이라는 이교도의 신을 위해 예수라는 인격신을 살해한 현대 문명의 기괴한 얼룩을 스케치한다. 대도시의 풍경과 중국을 관통해서 흐르는 황하 이미지를 중첩적으로 겹쳐 놓음으로써 고대 문명과 현대 문명의 이질성과 여전히 삶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을 펼쳐 보인다.

모세는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선언함으로써, 절대적 진리가 감각적 대상이 아닌 정신적인 것임을 그의 백성들에게 각성시킨다. 고대 문화에서는 이집트 신화처럼 여러 다양한 동물 신의 형상과 태양신 ‘라’ 의 상징이 지배적이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영원히 존재하고, 무한히 자비와 축복을 베푸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이라는 유일신의 개념은 이전의 다신교의 전통을 억압해 버린다. 예수가 죽은 이후에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한 유대인 바울 역시 육체 보다는 정신적 사랑의 우위를 설파한다. 그러나 이재훈은 그러한 가치에 함몰되지 않고 감각의 순수성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그의 시「수선화」에서는 한밤중의 몽정인지 자위인지 알 수 없지만 사춘기 소년의 육체에서 꽃피는 생명의 노래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한밤중에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을 잘 무렵이면, 내 몸에 꽃씨 앉는 소리가 들린다. 간지러워, 암술과 수술이 살 부비는 소리가 사물거리며 온몸에 둥지를 틀고, 어머 꽃피네, 마른버짐처럼, 간지러운 꽃이 속옷새로 피어나네, 내 몸에 피는 꽃, 어머 내 몸에 핀 꽃, 나르키소스의 영혼이 노랗게 물든, 수선화가 핀다, 아름다운 내 몸, 노랑 꽃파랑이 쓰다듬으며 어깨에서 가슴을 지나 배꼽으로 핀 꽃과 입맞추고, 시커면 거웃 사이에도 옹골지게 핀 꽃대 잡는다, 아아, 아 에코가 메아리치네, 아름다운 내 몸, 거울에 비추어, 아아아 에코가 흐느끼네, 내 몸이 하분하분 물기에 젖네, 꽃들이 더펄거리며 시들어가네, 나르키소스여 내 몸에 오지 마소서 五慾에 물든 몸 꽃피게 마소서

   한밤중이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들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나

 

   ― 「수선화」 전문[각주:2]

 

사춘기 소년이 겪는 성적 욕망의 발산을 수선화의 이미지를 통해 묘사하면서, 금욕을 미화시키는 종교 사이에서 갈등하는 소년의 내면을 보여준다.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가 자기애에 빠진 모습도 동시에 연상시킨다. 나르키소스가 연못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연못에 빠져드는 모순을 두려워하는 시적화자의 심적 갈등이 구체화되어 있다. 자기애를 지향하는 이드의 폭력적인 충동과 타자에의 사랑을 강조하는 초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심리적 에너지가 예술로 승화된 시이다. 생명으로 충만한 육체의 순수한 욕망과 그것을 억압하려는 윤리 사이에서 고민하는 소년의 긴장과 두려움이 노란 수선화처럼 어둔 밤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시이다.

 

2. 명왕성처럼 퇴출당한 신의 아들들

 

프로이트는 <종교의 기원>에서 종교와 신경증과의 상관성을 흥미롭게 진행하면서 정신적 외상에 대해 설명한다.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라는 논문에서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탈출시키고 새로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려한 모세를 살해한 기억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세가 가르쳐준 유일신의 교리가 그들을 너무 억압했기에 모세를 살해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를 죽인 죄의식과 함께 모세의 신앙으로의 회귀를 전승을 통해서 이루어왔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를 죽인 후, 죽은 예수에 대한 사랑을 재확인하고 예수의 성찬식을 되풀이하는 종교적 의식과 유사하다. 이 같은 증상이나 사고의 패턴이 신경증 환자에게도 나타난다고 그는 주장한다. 강박증을 가진 환자들이 무엇인가를 금기시하거나, 강박적으로 특정 행위를 반복하는 것 역시 속죄 혹은 자기 방어의 충동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의 토템 신앙에서 부족의 상징으로 신성시하는 동물을 잡아 서로 나누어 먹는 전통이 기독교에서 예수의 몸과 피를 나누어 먹는 의식으로 계승되었다고 보고 있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는 현대 종교도 고대 원시 사회의 토템 신앙과 다신교의 여러 이미지들을 계승하고 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로버트슨 스미슨의 토템 이론을 바탕으로,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던 무리는 토템을 받드는 형제를 중심으로 하는 무리로 자리바꿈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아버지로부터 승리를 쟁취한 형제들은 아버지를 죽인 뒤부터 아버지의 소유였던 여자들을 포기하고는 족외혼속을 좇게 되었다. 이로써 아버지의 권능은 붕괴되고 가족은 모권 중심으로 재편성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들의 양가적인 감정 태도는 그 이후의 전 발전 단계에 걸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형제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특수한 동물을 토템으로 세웠다. 이 토템 동물은 형제들의 조상이자 수호령신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다치게 하거나 죽여서는 안되었다. 모듬살이의 남성들은 일년에 한 번씩 한자리에 모여 의례적인 향연을 벌였는데, 그들은 바로 이 자리에서 토템 동물(평소에는 숭배의 대상이던)을 죽이고는 모두 그 고기를 찢어 나누어 먹었다. 모듬살이의 남성이면 어느 누구도 빠질 수 없는 향연은 아버지 살해의 의례적인 반복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사회적인 질서, 윤리적인 규범, 그리고 종교가 시작되었다. 로버트슨 스미스의 토템 향연과 기독교의 최후의 만찬 사이의 유사성은 무수한 내 선배 학자들의 주목을 환기시켰다.[각주:3]

 

기독교의 만찬의식을 고대의 토템 동물을 제사지내고 서로 나누어 먹는 전통과 연관시키는 것은 흥미롭다.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절대적인 아버지의 잔영과 그 아버지를 살해하는 아들들의 이미지는 인간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증상임을 설명하고 있다. 개인의 측면에서는 유아기 때 겪은 외상 같은 것들이 잠복되어 있다가 사춘기나 성인기에 반복되어 출현하는 신경증의 형태로 나타난다. 종교에서도 부친살해와 그에 대한 죄의식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이성의 억압을 피해 은폐되었다가 전승이라는 구술의 방식 혹은 문학이나 예술의 형태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재훈의 시 「할례의 연대기」에서는 어릴 적 경험한 폭력이 어른이 된 이후에도 수족관의 물고기를 보면 반복해서 떠오르는 양상을 볼 수 있다. 동네 형들의 짓궂은 장난에 저항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가 내면에 증오심을 차곡차곡 쌓지만 한편으로는 그 감정을 억압해버린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였던 수족관의 물고기를 풀어주는 행위로 전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동네 형들이 내게 침을 뱉던 날,

하얗다며 얼굴에 진흙을 바르던 날,

공중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오줌을 내갈겼다.

붉은 얼굴로 욕하는 연습을 했다.

다행히 집엔 물고기가 있었다.

수족관 유리에 입술을 대고 혀를 내밀었다.

차갑고 막막하여 아름다운 감촉.

침묵을 알아버린 호흡.

나는 방 안에 박혀 물고기와 놀았다.

온 몸이 달아올라 수족관에 다리를 비볐다.

물고기 때문이었다.

악한 아이를 죽이지 못하고

풀밭 위에 누워 한없이 울게 된 것은.

나는 시퍼런 칼을 든 모험의 소년이고 싶었다.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방법쯤은 알고 있었다.

침착하고 고요하게 모두 죽이고 나면,

평정이 온다는 것을.

그것이 운명일지라도.

물고기를 호수에 풀어 주었다.

물에 놓자마자 내 발등을 핥고

허벅지를 핥고 사타구니를 깨물고는

서서히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슬쩍, 물 위에 비치는 내 몸.

온 몸에 비린내가 났다.

가랑이에서 썩은 내가 났다.

난삽한 사랑이 시작되었다.

과분하게 영원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

 

― 「할례의 연대기」 부분[각주:4]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신성한 행위이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하는 거세의 의미를 내포한다. 신성한 행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기가 선행한다. 즉 인류사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근친상간에의 금지일 것이다. 어머니와 자매들에 대한 욕망을 절단하는 의미로서의 거세가 기본적인 의식의 구조로 잠입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갖는 선민의식도 거세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거세의 상징인 할례를 받아들임으로써 거룩한 신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이재훈은 소년의 거세 공포와 함께 거세를 감행하는 절대적인 아버지가 되고픈 욕망을 동시에 표출하고 있다. 그렇지만 감히 폭력을 행사하지 못한 채 풀밭에서 우는 소년은 “나는 시퍼런 칼을 든 모험의 소년이고 싶었다.”라고 독백하면서, 사악한 형들에게 폭력적으로 진압하려는 의지를 강화시킨다. 하지만 이 욕망은 초자아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수면 아래 잠기고 이드의 욕망으로 억압될 뿐이다. 그렇지만 이 억압된 충동이 갑자기 수족관의 물고기를 호숫가에 풀어줘 버린다. 의식의 틈새를 뚫고 나오는 이 무의식적 행동은 욕망의 자유로운 분출과 맞닿아 있다. 지나치게 윤리를 강조하는 삶의 굴레를 벗어나고픈 다양한 충동들, 성적 충동이나 폭력에의 욕구 등을 분출하는 방식에서 오히려 신의 윤리를 전복하고픈 욕망이 불현듯 출현한다. 그리고 그는 과감히 “과분하게 영원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라고 선언한다.

고대의 전지전능한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들이 얻은 자유는 새로운 사회의 틀을 짜면서 공존의 삶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현대의 양상은 아버지의 절대적 자리에 자본이라는 물신이 차지한 듯하다. 형이상학적 사유보다는 감각적 실존에 더 함몰되고, 정신보다는 육체의 가치에 더 매몰되는 듯하다. 그의 시 「만신전(萬神殿)」에서는 구원 같은 개념보다는 대도시에서 출현하는 유령과도 같은 욕망의 흔적이 그려져 있다.

 

저는 오래전 아버지를 죽이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뒤로 수많은 신들이 제 속에 들어와 소리를 지릅니다. 홀짝 홀짝 살들을 빨아 먹습니다. 가슴이 휑뎅그렁해져서 사다리를 타고 허공 위에 올라갔습니다. 십자가가 네온을 켜고 붕붕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오리온을 찾으려고 별자리를 하나씩 짚어 보았습니다. 거인의 눈과 코와 활 오늬의 도톰한 입에 손가락이 빨려 들어갔습니다.

 

― 「만신전(萬神殿)」 부분[각주:5]

 

위의 시에서 도시를 배회하는 유령 같은 도시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쓴 연작시인「대황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황하는 고대 중국 문명의 젖줄기로서 생명의 물이었지만 이재훈의 시에 등장하는 황하는 불모의 이미지이다. 마치 엘리엇의 「황무지」처럼 풍요의 물이 아니라 메마른 사막과 같은 느낌이 강하다. 유순하면서도 장대하게 흐르는 물줄기는 동양철학에서는 도의 이미지로서 절대적인 진리의 현현처럼 간주되지만, 그의 시에서는 낙원을 상실한 채 끝없이 질주하는 문명의 속도에 지친 낙오자들이 드나드는 길목처럼 느껴진다. 첫 시집에서 원시 시대의 신성하고 거룩한 별을 동경하던 시적 자아가 척박한 도시 문명의 길바닥을 맨몸으로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왜소화된다. 그래서 결국은 대다수의 시민들은 태양계에서 어느 날 문득 퇴출당한 명왕성처럼 신의 아들의 지위를 상실한 채 서서히 잊혀져가는 익명의 존재들이 되어간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 「명왕성 되다(plutoed)」 전문[각주:6]

 

이재훈의 「명왕성 되다(plutoed)」시편은 최초의 아름다운 말의 부족을 찾아 떠난 시적자아가 팍팍한 도시에서 발견하는 자화상의 한 단면이다. 아름답고 성스러운 별의 영혼임을 인식하는 연금술사가 문득 발견한 것은 초라한 소시민의 일그러진 얼굴이다. 늦은 밤 지하철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익숙한 얼굴들의 피로감이 현대 도시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더 이상 전지전능한 신의 자랑스러운 아들도 아니고 욕망의 극한까지 질주하는 악동도 아니다. 일상의 사소한 의무감에 묶여 묵묵히 달팽이처럼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시인이 발견하는 이 작고 왜소한 자화상이 갖는 위력은 이런 데 있다. 찬란하고 거룩하게 빛나는 별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처럼 사라지는 ‘소멸’을 꿰뚫는 시선이 예언자의 눈빛이다. 종교의 환상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허무를 처절할 정도로 직면하는 용기가 빛난다. 유대인처럼 선택받았다는 과잉된 자기 확신도 거부하고, 아버지의 억압적인 거세를 조롱하고 비웃을 수 있는 시인의 말은 하늘을 날아가는 적토마처럼 독자의 인식에 빗금을 지른다. 지나치게 엄격한 윤리 역시 억압이 되어 그 욕망을 대리적으로 분출하게 마련이고, 자유를 탐닉하는 자아 역시 먼지처럼 세상에서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불멸을 꿈꾸는 연금술사의 끈질긴 욕망은 새로운 사건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제물로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 그 비밀의 성소(聖所)가 내 집이었다./ 소멸이/ 내 먹는 밥이었다.”(「연금술사의 꿈」)에서처럼 소멸을 지향하는 찬란한 꿈이 빚어내는 새로운 세계가 궁금해진다. 자신의 몸을 죽여 제물이 된 고대의 토템 동물처럼, 혹은 살해된 모세처럼,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처럼 시인은 자신의 말이 아득한 먼지처럼 사라질지라도 누군가의 밥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기억의 흔적처럼 전승을 통해 출현하는 종교적인 사건처럼, 혹은 신경증 환자의 외상처럼 상처로 얼룩진 욕망들이 그의 시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아주 작은 먼지일지라도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별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그의 통찰력이 환한 빛을 비춘다. 연금술사는 자신의 몸을 내어주듯 자신의 내밀한 언어를 내밀어 허무한 생을 건너는 불사조의 깃털이 된다.

 

 


출전 : <시와사상>, 2012년 가을호.

 

 

  1. 이재훈,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문학동네, 2005. p. 19-21. [본문으로]
  2. 이재훈,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문학동네, 2005. p. 18. [본문으로]
  3. 지그문트 프로이트, <종교의 기원>,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7. p. 420-1. [본문으로]
  4. 이재훈, <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p. 2-73. [본문으로]
  5. 이재훈, <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p. 36-7. [본문으로]
  6. 이재훈, <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p. 25. [본문으로]
Posted by 이재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