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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2019.08.17 2019 현대시사숙 상상스콜라(시창작반)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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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2019.01.30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기독교적 상상력
  28. 2019.01.22 [시가 있는 월요일] 스스로의 온기로 사는 나이
  29. 2019.01.22 [매일경제] 고통을 대하는 자세…이재훈 시집 `벌레 신화` 출간
  30. 2019.01.22 [시인의 집] ‘스스로의 온기’로 고통을 견디는 시인_이재훈 시인 ‘벌레 신화’

친숙하면서도 낯선, 우리들의 명왕성

 

 

 

 

이재훈·신철규

 

사람 이전부터 지구 이전부터

우주를 떠돌았을 천형의 몸.

눈물로 돌을 만든다

 

 

이재훈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친근한 시인이다. 그가 시단의 여러 곳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그것도 이미 등단을 해서 시인이라는 직함을 얻은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그를 마주친 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마주쳤다고 해서 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는 시세계의 경향이나 연배를 막론하고 시를 쓰는 누구나에게 관심과 열성을 가지고 다가가며 호의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마치 시골 동네의 입구에 선 느티나무처럼 그는 굳건하면서도 편안하게 서서 우리를 환대한다.

하지만 정작 그런 그의 시를 꼼꼼히 들여다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시세계가 서정이나 실험, 전통과 모던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거나 묘한 충돌의 지점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어중간한 자리는 여러 사람을 품을 수 있게 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그 색과 빛을 한눈에 알아보거나 손쉽게 규정하기 힘든 자리이기도 하다. 그는 어쩌면 명왕성처럼 가장 어둡고 먼 자리에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언제나 그 경계 바깥으로 밀고 나가는, 다시 말해 경계를 넓히는 명왕성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 장마가 물러가고 무더위가 계속됩니다. 무더위 잘 넘기고 계신지 모르겠어요. 방학을 맞아 조금은 휴식의 시간을 보내고 계실 듯한데 근황이 궁금합니다. 담양에 있는 글을 낳는 집에서 한동안 머물기도 하셨던 것으로 들었고요. 동네 주민으로만 간간이 뵙다가 이렇게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으로 대면하니 어색하기도 합니다. (웃음)

 

: 신철규 시인이 같은 동네 주민이어서 너무 좋습니다. 슬리퍼를 끌고 나와서도 볼 수 있는 사이니까요. 이런 정담의 자리에 함께 해주어 감사드립니다. 방학을 맞아 담양 글을 낳는 집집필실에서 3주간 머물렀습니다. 산적한 이런저런 글을 정리하고 쉬기도 하면서 잘 보내다 왔습니다. 폭우가 많이 내려서 밤새 폭포 같은 빗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가장 오래 남습니다. 시골의 밤은 모든 소리가 선명해지는 시간이었지요.

 

: 정갈하고 고요한 곳에서 무더위도 좀 피하시고 글도 쓰시고 부럽습니다. ‘글을 낳는 집은 저도 언젠가 한번 머무르고 싶은 곳이에요.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곳에서 오래 자라지는 않고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면서 사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는지요? 한 곳에서 정착하지 못한 삶, 그리고 집안의 종교적 배경이 문학을 접하고 흠모하게 된 계기로 작동되기도 했을 것 같은데요. 문학하는 또는 글 쓰는 삶으로의 이행은 자연스러웠습니까. 기독교적 삶의 테두리에 대한 저항도 시를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나요? 가장 강렬했던 시적 경험 또는 시를 쓰고 싶다는 충동을 불러일으킨 경험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 초등학교 때까지는 강원도 여러 곳에서 가장 완전한 산골소년으로 자랐습니다. 이후 경북을 거쳐 충남 논산에서 가장 오래 거주하였고. 성인이 된 이후로는 서울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네요. 어린 시절 자주 옮겨 다닌 탓에 늘 불안했습니다. 적응을 하기도 전에 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적응을 포기해 버렸지요. 돌이켜보면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시간들로 채워졌습니다. 늘 현재 주변 사람들이 아니라 옛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으니까요. 편지가 글쓰기 훈련이 된 셈이지요. 사춘기가 되면서 숙명처럼 여겼던 신앙과 기독교에 대한 회의와 저항이 문학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문학보다 신학과 철학책을 더 많이 읽었으니까요. 시는 스무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스무 살 때부터 투고도 시작했고요. 가장 강렬했던 시적 충동은 헤르만 헤세였어요. 헤세의 시인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는 말로부터 너는 완벽한 교훈을 동경하지 말고 너 자신의 완성을 동경하라는 말을 노트에 매번 적으면서 시를 썼어요.

 

: 저는 스무 살까지 제가 나고 자란 곳을 벗어나 본 적이 없어서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삶이 잘 상상이 안 됩니다. ‘적응을 포기해버렸다는 말이 신기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존재감을 누그러뜨리고 다른 환경에 스며들었다는 뜻으로도 읽히지만 적응에 대한 열망 없이 자신을 지켜내고 자신에게 질문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어떤 막연한 갈망과 그리움이 동경을 낫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스무 살 때 시를 시작하면서 투고도 했다니 조숙하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고하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시에 투신하겠다는 각오가 서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했겠지요.

지방 소도시에서 대학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압니다.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와 졸업 무렵 등단하신 것으로 아는데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문학 공부를 치열하게 하는 데 영향을 준 스승이 있으신가요? 파란만장한 청춘기를 보내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혹독한 방랑기와 치열했던 수업 시대를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방황의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부모님께 끌려 내려왔어요. 나또한 더 방황할 명분도 없었고. 지방의 신설 대학에 반강제로 입학을 했는데 적응을 못해 군대로 도망갔습니다. 군 제대 후 복학해서부터 공부도 습작도 가장 치열하게 했었죠. 당시 구수경 교수님, 우찬제 교수님 연구실 방문 밑에 습작시를 매주 밀어 넣었고요. 등단 후 김유중 교수님 수업을 청강하면서 따라다녔고. 도서관의 모든 책에 손때를 묻혀 놓았고 시심문학회를 이끌면서 온몸을 불태웠던 시절이었습니다. 하하.

 

: 도서관의 모든 책에 손때를 묻혔다고 할 정도로 책을 잡다하게 그리고 많이 읽으셨다는 것인가요? 습작기의 시에 대한 선생님들의 평가는 어떠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칭찬만 받기는 힘드니까요. 너무 열성적인 학생이셔서 선생님들께서 부담스러워 하셨을 수도 있고요. (웃음)

등단을 하면서 서울살이를 시작하신 건가요? 낯선 도시 속으로의 틈입은 신기하면서도 상당히 불편한, 다시 말해 이방인적 자의식을 형성하기도 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최초의 말을 잃는 것이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최초의 말이라는 것을 새롭게 자각하는 경험이기도 했을 것이고요.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려는 사람은 이미 그 뿌리가 없거나 잘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시겠지만 습작 시절은 어떠셨나요?

 

: 습작 시절에는 머릿속에 온통 문학밖에 없었죠. 시도 소설도 함께 썼고요. 최근 문예지, 시집, 소설집뿐 아니라 동서양 고전들도 가장 많이 읽었던 시절입니다. 포악하고 왕성한 대식가였죠. 젊은 시절 제게 도시는 신나고 황홀했습니다. 매연 냄새를 맡고 싶어 시내를 돌아다니고 한강에 자주 나갔죠. 온갖 아르바이트와 서울의 모든 험한 주거 형태를 경험하고 도시를 파란만장하게 소비했습니다. 그러다 어느덧 도시에 지쳐갈 때쯤 나의 시원과 최초의 말이 그리워진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 첫 시집에는 아득한 시원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합니다. 그것은 지리멸렬한 현실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겠지요. 그 반대편엔 초원과 사막과 밤하늘, 그리고 공중 정원이 있고요. 현실의 말, 현실에 닿는 말은 공허할 뿐이라는 자의식 때문에 분노로 가득한 현실을 넘어선 예언의 소리 또는 최초의 말을 찾는 작업으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허공에 산화되어 사라지는 말을 만들어냅니다. 그때 비로소 저는 말을 배웠습니다.”(기타가 있는 궁전) 하나의 믿음을 강요하는 정통 교리를 거부한 이교도, 방황하는 유목민 또는 미아로서의 정체성을 일찍부터 체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밖으로 내뱉지 못해 안으로 고여 있는 말을 찾는 것, 그것을 길어 올리는 것, 그 말에 대한 목마름이 주요한 시적 추동력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아와 세계가 융화하는 서정으로 가는 길이 막혀 있다는 자의식이 초기부터 강하게 작동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 첫 시집에는 형이상학적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오래도록 내면화되었던 종교적 기표와 철학적 질문들이 언어로 튀어나왔는데요. 시집을 내고 보니 그런 시어가 많이 쓰였다는 걸 알았죠. 젊었을 때여서인지 현실의 언어들은 뭔가 시시해보이고 재미가 없었어요. 먼 우주에 대고 신나게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보편적인 크리스천입니다. 나이롱 신자이긴 합니다만. 이십대 시절 종교에 대한 호기심과 질문들이 이곳저곳을 배회하도록 만들었어요. 이단, 해방신학, 에큐메니컬, 그노시즘, 오쇼 라즈니쉬 등을 기웃거리며 동냥했던 지적 체험들이 시적 언어로 나왔지 싶습니다. 하지만 물을 마셔도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어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시원에 대한 질문들이 앙금처럼 남아 있었죠. 물리적으로 늘 떠돌면서 유목민이나 이방인처럼 살았는데 정신적으로도 늘 방황하거나 떠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무척 엄살이 심했던 때이기도 했죠.

 

: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는 이러한 초기시의 주체가 세속도시의 핍박한 현실로 내려앉은 또는 현실에 깊이 밀착하는 시들로 묶여 있는 것 같습니다. 신화적인 낭만의 세계와 궁핍한 현실의 세계를 교차적으로 그려낸 월곡 그리고 산타쿠르즈가 대표적일 것 같고요. 미궁처럼 답답한 세계에서 시인은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라며 자신의 존재론적 위치를 가늠합니다. ‘첩자는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활동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면, ‘먼지는 존재감이 없이 부유하는 존재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카프카적 세계관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요. 그것을 버티기 위해 몽상()’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 도시에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결혼도 했고 생활도 해야 했고 아이도 키워야 했으니까요. 우주가 아니라 도시가 내가 버텨야 할 순례의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현실로 내려오는 시가 쓰인 것이죠. 시는 몸에서 빠져나온 언어로 쓰니까요. 신림이나 월곡이 내가 살았던 동네였는데 골목길을 산책하면서 많은 시상이 떠올랐습니다. 산책은 육체적인 움직임이지만 중요한 정신적인 움직임이기도 했어요. 시적인 사유는 일상을 벗어나는 경우도 많은데, 제게는 몽상과 환이 그런 경우죠. 월곡의 골목길이 장 그르니에가 알제리의 산타크루즈 골목길로 변화하기도 하고, 신림의 보도블록 아래에서 나무들의 신음이 들리기도 했죠. 명왕성 되다2호선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쓴 시이고요. 도시의 삶을 견디는 시간이 명왕성에서 지구에 파견된 첩자라는 엉뚱한 생각을 낳기도 한 것이죠.

 

: 세 번째 시집 󰡔벌레 신화󰡕의 변신 모티프를 지나 작년에 출간된 󰡔생물학적인 눈물󰡕에 이르러서는 좀더 냉혹한 현실 인식을 전면에 드러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감각적 현실에서 비롯된 연상의 중첩과 연쇄를 거쳐 도출된 선언적 명제들은 허무를 강하게 내장한 묵시론적 전언으로 집약됩니다. 가령, “몰락의 길에는 비상구가 없다.”(생물학적인 눈물)는 것처럼요. 첫 시집 이후 나온 시집들에 실린 거의 모든 시들에는 마침표(온점)가 찍혀 있습니다. 비유에 기대기보다는 간명하고 정확한 진술의 힘이 느껴지는데, 명료하면서도 완결된 문장에 대한 욕망이 그것을 추동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섣부른 관념의 표출이라기보다는 관찰과 응시 속에서 걸러낸 묵직한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적 정황들로부터 시작해서, 그것에 대한 이미지와 사건들이 흘러가다가 어떤 한 문장에서 멈칫하게 만들지요. 그것이 어쩌면 사제의 언어”(송종원)인지도 모르고요. 감정적 언술로 세상을 뒤덮거나 색칠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경로를 따라가다 맞닥뜨린 인간과 세계의 진실을 마주할 때의 낯선 충격이 매력적이라 생각됩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인식이 인간과 세계를 읽는 틀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생물학적이라는 것은 어떤 뜻으로 붙이신 건가요?

 

: 허무는 제 시의 또 다른 에너지이기도 합니다. 저는 허무도 긍정적인 정서라고 보거든요. 허무는 의지가 있는 것이고, 가장 힘들 때는 허무에 빠질 때가 아니라 무기력할 때인 것 같아요. 아무튼 현실 속에서 사제를 꿈꾸는 언어로 변화된 것 같고요. 이전보다 이미지가 더 많이 쓰였어요. 마침표를 찍기 시작한 것은 몇 가지 생각이 있는데요. 시도 문장이고 싶다는 것, 완미한 문장으로 리듬을 만들고 싶다는 것, 마침표의 휴지가 주는 침묵을 누리고 싶은 것 등등인데요. 더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 안 찍기 때문에 찍는 게 더 멋있어 보이기도 했고, 마침표를 찍다 보니 안 찍으면 자꾸 중얼거리게 되고, 말이 숨어드는 것 같고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마침표를 찍으니 시가 더 잘 써져서겠죠? 생물학적이라는 말을 왜 붙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아요. 다만 눈물은 흘리고 싶어서 흘리는 게 아니고 흘리고 싶지 않아도 흘리잖아요. 그런 생물학적이라는 의미를 감정과 사물에도 모두 부표처럼 붙이고 싶었어요. 아직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겠죠. 바다가 침묵하다가 분노하는 이유 같은 것. 그걸 과학적으로 알고 싶지 않고 다른 서사를 알고 싶은 것이죠. 그런 이미지가 벼락처럼 가슴에 와 닿은 느낌이 인간과 세계를 읽는 작은 틀이라면 틀이지 싶습니다.

 

: 벼락처럼 와 닿는 이미지를 끌고 가는 사유의 힘이 선배님 시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문체상으로 따지면 관념적이면서도 묵직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유치환, 김구용 등의 시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명징한 언술과 관념적 자의식이 지배적인 유치환, 심오한 언술과 난해한 환상이 지배적인 김구용, 이런 시인들을 나름대로 사사한 것입니까. 이 시인들의 시에 대한 압력이 자신의 시에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자신의 문학에 강한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시인 또는 예술가가 있으신지요?

 

: 유치환은 정말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생명의 서는 너무 멋있어서 학창시절 외우고 다니며 술자리에서 낭송도 하곤 했죠. 유장한 관념어를 매력적으로 사용하는 시인이잖아요. 김구용은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 면에서 특별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들춰보았고요. 하지만 이런 큰 시인들에게 영향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도 모르게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겠지요. 습작 시절에는 헤르만 헤세, 카프카, 릴케, 장 그르니에, 이성복, 정현종, 이승훈, 이승우를 너무 좋아했어요. 또한 매 시절마다 여러 시인들을 한 번씩 짝사랑하며 강한 문학적 동기를 부여받았죠.

 

: 시를 퇴고할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지 말씀해주세요. 시를 퇴고하다가 어느 때 이제 됐다라는 느낌이 드는지요?

 

: 모든 시가 다 다릅니다. 퇴고를 하지 않은 시, 퇴고를 여러 번 한 시, 퇴고를 하다가 버린 시 등. 퇴고를 할 때 소리 내어 읽는 습관이 있습니다. 소리 내어 읽을 때 많은 게 보이거든요. ‘이제 됐다는 생각은 아예 없습니다. 늘 부족하죠. 하지만 지금 최선을 다했으면 됐다고 생각합니다.

 

: 요새 저의 가장 큰 고민이기도 해서 여쭤보고 싶은데, 선배님께서는 시집 이후 새롭게 시를 써나가는 과정이실 텐데 시집을 내고 나서 슬럼프 같은 것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그 이전과는 다른 시를 써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을 것이고, 다른 시인들의 시작 방향과의 차별화를 위해 새로운 시적 모험을 감행하고 싶다는 욕망 또한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 신철규 시인도 잘 아시면서. 슬럼프는 매번 있죠. 요즘은 슬럼프 없을 때가 없는 것 같아요. 하하. 이삼십 대에는 노트에 손만 갖다 대도 시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요즘은 밤새 끙끙대며 한두 줄 쓰다가 덮어버리잖아요.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욕망만 앞서니 매번 좌절하고, 또 다시 끄적거리고. 다른 방법이나 방향은 없을까도 매번 고민하고. 시는 평생 버릴 수 없는 나쁜 애인인 거죠.

 

: 나쁜 애인에게 더 끌리기도 하니까요. 편안하고 무난한 것을 못 견디는 성격이 시를 쓰게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웃음) 이번에 발표하신 신작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지요. 세 편의 신작과 두 편의 근작, 그리고 시론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최근작들의 중심 소재는 한눈에 보아도 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눈물로 돌을 만든다는 돌-인간-시인을 한 자리에 놓는 유비적 사고가 모티브가 된 듯합니다. 눈물이 사람을 만들고 그 눈물이 사람이 갈 길을 만들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니 결국 시인은 눈물의 사제가 될 수밖에 없겠지요. 그 눈물은 몸 안을 돌고 영혼을 살아 있게 하는데 돌은 천형의 몸으로 상처를 안으로 품으면서 더욱 단단해집니다. 태초에 돌이 있고 눈물이 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돌은 별의 사체나 유골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것은 바뀌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우리 곁에 언제나 가난하게 머무릅니다. “죽기 전까지 함께할 것들이 나를 살린다.”(극빈의 돌) 시인은 그런 돌을 껴안고 품고 그 곁에 있으면서 돌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연작은 어떤 뜻에서 시도하게 되신 건가요?

 

: 돌을 소재로 한 시편들이 이전에도 많이 있었죠. 어쩌면 흔한 소재이기도 하고, 흔하기 때문에 가장 쓰기 어려운 소재이기도 하고요. 자연스럽게 몇 편이 써졌는데 자꾸 할 말이 더 생기는 겁니다. 돌이 가지고 있는 시간성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 하고 감탄사가 터질 때가 있어요. 돌이라는 소재에 제가 하고 싶은 많은 얘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죠. 그래서 실패할지도 모르는 모험을 하고 있습니다. 프란시스 퐁주처럼 사물시를 제대로 한번 써보고 싶었거든요.

 

: 저도 사물시에 대한 욕망이 있는데 적절하고 간절한 소재가 잘 다가오지 않아서 시도를 못 하고 있어요. 저 또한 프란시스 퐁주의 비누양파같은 시를 보면서 사물을 관찰하고 그것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작업에 대한 길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연작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지, 그리고 마무리될지 관심 가지고 지켜보겠습니다.

요즘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늙어감의 기미는 조금씩 다가오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부정하려는 충동이 순간순간 치솟을 때마다 이제 난 그럴 때가 아니야, 라며 다독거리게 되지요. 그리고 뭔가 더 싸우지 못하고 일종의 타협을 하게 되는 내 자신을 보면서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고요. 육체적으로는 힘이 소진되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괜한 조바심이나 걱정이 일어나기도 하고요. 마흔 살 무렵에 나온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의 자서에서 이제 내 바람은 멋있게 늙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멋있게늙고 계신가요? 멋있게 늙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흔히 사십대를 기우는 나이라고 합니다. ‘기면서 울고 울면서 기는’(아직 사십대) 나이가 사십대인지도 모르겠어요.

 

: 멋있게 늙는 바람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아직 멀었고요. 욕망이 아직 많아요. 아직도 기면서 울고 울면서 기고 있어요. 삶도 매번 불안하고, 지치고, 평화의 시간이 잘 없습니다. 평화를 누리는 어른이 진정한 어른일 것 같아서요. 그런 늙음에 다다르고 싶습니다. 아직은 먼 이야기인 것 같아요. 더 나이가 들면 키케로의 늙음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않을까요. 골목길에 있는 슈퍼 평상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지는 해를 바라보는 시간. 그 시간을 가장 평화롭게 보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물론 이것도 모두 비유이긴 합니다.

 

: 선배님을 만나면 항상 최근에 나온 시집이나 오래 전에 나온 희귀한 시집들에 대한 얘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러면서 제가 느낀 것은 시를 보는 안목이 젊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미 어느 정도 시를 보는 눈이 고정되어버려서 적당히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여지는 것은 내팽개치는 쪽인데도 선배님은 여전히 그것들과 함께 가려는 책임감으로, 그리고 읽는 기쁨으로 젊은 시들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당함은 시에서 가장 피해야 할 덕목 중 하나일 것입니다. 젊은 시는 깨부수고 깨지고 폭발하고 자멸하는 지점이 있어야 하는데 제 시는 좀 나이 들어 보여요. 최근의 젊은 시들이 한편으로는 장형화되면서 연상을 자유롭게 풀어내는 데 조금은 소모적이거나 설명적이라는 생각도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평한 언어로 타자를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사소하고 내밀한 취향을 드러내면서 미묘한 기분을 표출하는 데 그치고 만다는 생각도 듭니다. 큰 울림이나 낯선 지각을 끌어내기에 오래 걸리는 시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 최근 시도 열심히 읽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시를 읽는 일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바쁘기도 하지만 시 읽는 것을 생활화하자라는 생각으로 읽습니다. 제가 학기 중에는 지방을 매번 오가다 보니 주로 이동하면서 많이 읽고요. 소파에 누워서도 읽고. 지하철에서도 읽고요. 지하철에서 시집 읽는 분을 만나면 손잡고 인사라고 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리고 제가 상상스콜라라는 창작반을 운영하고 있어서 더욱 최근의 많은 시를 읽으려고 노력하죠. 감각이 뒤떨어지면 안 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가장 빨리 변화하는 언어적 감수성이 시인 것 같아요. 젊은 시인들의 시는 그런 게 재미있죠. 그런데 저도 이제 아재가 되었는지 이런 것도 시가 되는구나 하고 중얼거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시의 고정관념을 깨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시 언어의 스펙트럼은 일반적 언어와는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이니까요. 함께 가려는 책임감보다는 그냥 좋아서 하는 겁니다. 제가 뭘 또 책임지겠어요. 너나 잘하세요, 란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시인의 가장 큰 고급 독자는 시인들이니까요. 독자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죠. 그리고 신철규 시인의 시는 절대 나이 들어 보이지 않으니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세요. 하하.

 

: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작년 연말에 비평집이 묶여 나오기도 했지만 또 다른 책이나 시집 등도 준비하고 계신 것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 올 하반기에는 책이 세 권 나올 예정입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출간이 몰리게 되었어요. 모두 연기가 불가능해서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연구서, 에세이, 시집이 연이어 나올 예정입니다. 특별한 계획은 없습니다. 강의하고, 글 쓰고, 걷고. 그렇게 가을이 오고 겨울을 맞을 것 같습니다. 신철규 시인과 이런 자리를 해서 잊지 못할 큰 추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시를 꼼꼼히 읽어주시고 깊은 질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질문을 받고 자세를 고쳐 않았습니다. 우매한 답이라도 잘 받아주셔서 또 감사하고요. 이제 한잔 하러 가시죠. 하하.

 

: 올해는 결실이 풍성한 해가 되겠습니다. 책 출간을 핑계 삼아 또 동네에서 몇 번의 술자리를 예약해야겠습니다. 정말 축하드리고 잘 마무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목이 컬컬하네요. 얼른 시원한 술로 목을 좀 축여야겠습니다. 긴 시간 시와 삶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풀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무더위 시원하게 나세요, 선배님.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명왕성 되다

 

이재훈 시인은 자신의 빛을 꺼둘 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빛을 과시하거나 자랑하기보다는 은은하게 빛나면서 다른 이들이 서 있는 자리를 돋보이게 하는 사람이다. 그의 시도 화려하기보다는 묵직하게 내리누르면서 묵묵하게 자신의 빛을 드러낸다. 그는 부패해가는 말들과 싸우면서 사람의 말을 찾고 말의 배후에 오래 시선을 두면서 직절적인 문장을 길러낸다. 그는 이 세계와 인간에게 미련 없는 그리움을 던진다. 그것이 돌아오지 않는 혼자만의 호소로 그칠지라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추천해주고 싶지 않은 직업인 시인이라는 소명을 한시도 놓지 않을 것이다.

늦은 밤, 그는 뜬금없이 내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철규야, 고맙다.’ 나는 그런 문자를 받으면 무슨 일이 있으신가 해서 덜컥 놀라면서 전화를 건다. 그 문자가, 늦었지만 혹시 시간 되면 동네 놀이터에서 캔맥주나 마실까, 라는 의미를 담고 있을 거라 예상하면서도. 그는 볼 일이나 약속 때문에 서울에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그냥 생각나서, 라고 답을 한다. 나는 베란다로 나가 통화를 하면서 우리 집 근처 골목에 계신가 하고 창밖을 본다. 아니야, 집에 다 왔어. 우리의 즉석 만남이 성사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나는 그가 아무 일 없이 집에 잘 들어가시기를 빈다. 다음에 뵈어요, 선배님. 흐린 밤하늘에 첩자처럼, 먼지처럼 별 하나가 희미하게 빛난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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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서럽게 아름다운 슬픔의 미학, 눈물의 언어학 이재훈의 시

 

한민주(문학평론가)

 

1. 비와 당신

 

개개인의 삶 속에는 시적인 기억들이 남아 생을 견디게 한다. 무지갯빛 기억의 실타래를 풀면, 어린 시절 비의 경계를 경험한 순간이 떠오른다. 갑작스럽게 검은 먹구름이 천지를 뒤덮고, 하늘에 구멍 난 것처럼 퍼붓는 비를 맞으며 언덕 위의 집을 향해 정신없이 내달렸다. 그런데 집 앞에 당도했을 때 하늘은 환해지고 마당의 흙은 감쪽같이 보송보송 말라 있어, 어딜 봐도 비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흠뻑 젖어 있는 내 모습이 이상하다는 가족들의 시선과 너무 맑고 메마른 주변 환경, 그리고 여전히 비에 젖고 있는 언덕 아래 마을의 이질성 속에서 어린 나는 다른 시공간, 다른 세계를 통과해 온 경이로운 기분을 맛보았다. 어쩌면 내가 거주하고 있는 이 세계 말고 또 다른 세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과 두려움에 압도당했던 바로 그 마법의 순간. 이재훈의 시를 읽다 보면 이 신비로운 비를 자주 만난다. 특히 비가 오르고 있었다라는 표현은 예사롭지 않다. 지상으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수직으로 상승하며 가늠할 수도 따라갈 수도 없는/빗속의 신비벚꽃 사이에서 날고 있”(신비한 비, 벌레 신화)는 잃어버린 당신의 기억과 스민다. 비를 사랑하는 시인은 오랜 세월 빗방울도 없이/빗소리가 내리는 방”(카프카 독서실, 명왕성 되다)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자거나 울거나, 시를 쓴다. 이재훈은 2005, 그의 첫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에서 새벽 빗소리가 눈을 친다라고 밝혔다. 분명, 그의 시 세계에서 는 아주 중요한 시적 소재임이 틀림없다. 비는 인식이나 각성을 상징하는 과 연결되면서 시인의 의식 세계를 깨우는 매개 역할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비가 때로는 아늑하게, 때로는 불편하게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탁월한 플롯 장치로 기능해 왔다는 것은 일반화된 사실이다. 개인의 경우도 비는 아늑함과 불편함의 길항작용 속에서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돕는다. 그러므로 비는 그쳤지만/빗소리가 내 가슴에 올라와 있”(황홀한 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는 순간들이 잦다. 실상 침묵 속에 울고 있어서 몸 부딪히는 소리만들리는 알몸당신은 그 아픔을 숨기고 투명한 몸으로, 꽃잎처럼 경쾌하게내린다. 시인은 이를 서러운 아픔도 참, 아름다워요”(빗소리, 최초의 말)라며 침묵 속에 울려 퍼지는 슬픔과 고통을 심미화하고 있다. 그런데, 사방에 닿는 빗소리는 당신의 울음소리가 아니던가. 어느새 투명한 빗소리는 아픔을 간직한 울음소리로 전환된다. 인간의 역사라는 까마득한 광야에 거칠게 울고 우는 소리만 가득하다.”(북극의 진화, 명왕성 되다) 이토록 비통한, 비에 관한 기록들은 지금껏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비애에 빠져 있는 시적 화자들에게 빗소리는 계속 고통의 감각을 일깨운다.

도대체 왜 시인은 빗물이 흐르듯 울고 또 우는 것인가. 문학에 대한 독서와 창작을 작가의 고백 행위이자 그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윤리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방편들로 볼 때, 이재훈이 표현한 슬픔의 정치와 윤리에 관한 탐구는 그의 시 세계를 파악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해 보인다. 이재훈의 시에서 비는 물질적인 부요와 탐욕의 천사인 너와의 언약으로 고통이 하나씩 늘고, 빚이 늘고, 미래의 노동이 늘해거름, 차창에서 졸고 있는 저 빈곤한 육체”(맘몬과 달과 비, 벌레 신화)를 처연하게 달랜다. 그리고 비록 비는 자연의 일부지만, 한 주체가 뱃속에 가득한 허기” (노란 애벌레가 좋아, 생물학적인 눈물)와 허무에 휩싸여 혼돈에 빠진 자아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기발표작 고통이 없다를 보면, “한때는 투명한 피부를 가지고 싶었, “나무에 새긴 초록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이상적 자아의 세계와 달리 현실적 자아는 고기를 뱃속 가득 채우며 짐승의 시간에 지배되어 산다. 이시는 자아의 괴리감과 실망감에 맞닥뜨린 그 고통스러운 순간을 재현하고 있다. “슬픔은 환멸 속에서 더 환하다.” “어쩌면 잃어버린 사람을 찾으려고 헤맨 걸지도모를 그의 인생사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채우지 못한 허기를 달래는데 온 생을 바치며 달려온 것과도 같다. 그런데, 이러한 생의 조건 속에 고통이 없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다. 생물 의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도, 진정으로 고통에서 해방된 존재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가 결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현재의 고통을 누를 수 있는 더 큰 고통이 존재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현재의 고통을 더 극대화하기 위한 고통의 아이러니가 기획된 것일 수도 있다.

고통은 생물 의학적 과정의 결과이기도 하고 개인의 정신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주관적 경험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울증과 공포, 비애 같은 정신 분열적이고 정서적인 상태에 의해 보강되고 때때로 새롭게 창조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고통은 개인과 집단의 성장과 성취를 동반하기에 우리는 고통을 받아들인다. 저마다 고통으로부터 의미를 발견하고 고통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이처럼 고통이란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인간의 근본적 경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고통의 의미를 단지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창조하면서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는 고통의 지위를 이해하는데 특별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이런 측면에서 되새겨보면, 이재훈의 시 세계에 사는 시적 화자들은 모두 상처 입은 화자들이며, 끝없는 슬픔에 빠져 있다.

이재훈의 시 세계는 잃어버린 상실의 대상을 찾아 떠도는 슬픔의 도정이 펼쳐져 있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우선, 시인이 빗속에 엎드려 자고 있으면” “빈 말들의 뼈”(카프카 독서실, 명왕성 되다)가 살포시 그의 몸에 감긴다. 우리의 언어가 어떤 사물을 지칭함에 있어 필연적으로 일대일의 대응 관계에 있다고 하던 종래의 소쉬르 관념을 넘어, 기표와 기의는 서로 유리되어 있고 또한 아무 관계가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관념이 지배적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 존재하는 메꿀 수 없는 틈을 직시하게 되며, 그 결과 말하여지는 차원은 의미 되는 차원으로부터 언제나 미끄러져 있는 상태임을 또한 인식하게 된다. 언어는 자신 속에 분열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시인은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꾸며 이 세계에 없던 언어를 찾아 나”(거리의 왕 노릇, 벌레 신화)선다. 이때, 시어를 향한 시인의 도정에는 부재(不在)”라는 그리움의 양식”(앉은뱅이꽃, 명왕성 되다)이 동반한다. 따라서 그는 늘 말하려던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직선을 치다, 생물학적인 눈물)라는 말을 되뇌며 반복적인 회의와 좌절감에 빠져 고통스러워한다.

고통과 슬픔에 관해서 아무리 말해도 말할 수 없는 게 있다. 이 상처의 정확한 표현 불가능성 때문에 고통의 재현도 언어처럼 미끄러진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의 상상 속에서 상처 입은 몸과 고통, 슬픔을 시적으로 표현하려 하며, 그와 관련한 문화적 증상을 드러내려 한다. 그런데 고통의 혼돈을 서사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서 프랭크는 고통의 혼돈을 살아낼 수는 있어도, 그것을 말할 수는 없다고 한다. 혼돈은 서사가 요구하는 시간적 순서대로 삶을 재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의 혼돈을 시로 말할 수 있을 때쯤이면 일관성을 되찾는 작업은 이미 잘 시작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늘 곁불만 쬐며갖게 된 시인의 엄살의 통각”(일식,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옹알거리기라는 소심한 표현으로 이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다. 또한, 이재훈의 시적 화자들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통의 요인이 되는 상실시인의 자기 정립 조건이기도 하다. 상실에 대한 반응 태도로 애도와 우울증이 있다. 과거가 해결되고 죽은 것으로 선언되는 애도와 달리, 우울증은 잃어버린 과거가 현재에 변함없이 살아있으면서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대상 상실이 자아 상실로 전환된다. 이처럼 우울증은 끝나지 않을 고통 속에 사는 자아의 병을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벤야민의 시각을 전유해 볼 때, 우울증은 상실과 함께 끝없는 투쟁에 참여함으로써 과거와의 지속적이고 개방적인 관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우울이 병은 아니지,” “그저 또 다른 시간에 이른 것”(짐승의 피, 벌레 신화)이라는 통찰처럼, 이재훈의 시는 무언가를 상실하고 앓는 우울증이 어떻게 시인의 행동주의, 윤리, 그리고 정체성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일로 여기며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데, 이재훈은 회피나 포기, 탈출이 아니라 슬픔 안에 머물며 이를 분석하고 그를 관통해 나가려는 행동주의적 면모를 보인다. “무릎을 꿇고 울고 있나는 선물이 되지 못하고, 맛이 되지 못하고, 그저 나만 아는 곤고한 사람이 되었”(라틴어를 배우는 시간, 생물학적인 눈물)다 라는 자책 속에서 시인이 되고 싶은 선물이나 은 상호적인 관계성에 놓여 있는 것들이다. 타인에게 선물이 되고, 맛이 되고 싶다는 시인의 염원은 동정과 연민, 공감과 위로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이재훈이 고통의 윤리와 슬픔의 본질을 파헤쳐 나가며 비로소 가닿고자 하는 슬픔의 미학적 완성이 무엇인지를 탐구해 보려 한다.

 

 

2. 도시의 은유, 시인의 몽상하는 발걸음

 

당신에게 도달하기를 원하는 이재훈의 시는 대화의 몸짓이다. 따라서 잃어버린 대상을 찾고, 그것을 향해 말을 건넨다. 가령, 시인은 뜨거운 돌 위에 누”(예쁜 똥,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워 돌과 대화를 나누고 잘 익은 돌을 낳기도 한다. 그리고 태초부터 돌 속에 봉인되어 있던 수많은 사연에 귀를 기울인다. 신작시 극빈의 돌은 고통을 켜켜이 응결시켜 놓은 결정체를 비유하기 위해 을 소재로 삼았다. 시적 화자는 모두 바뀌는 것들만 궁금해하며 집도 자동차도 직업도 사람도 모두바뀌는 세상에서 살자니 숨이 가쁘고 피가 돌지 않는다.” 그는 오래도록 바뀌지 않는 것들만 나를 살리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을 물과 사라지지 않을 공기와 나무에게 입술을 대었다.” 이처럼 시인은 계속 바뀌는 현대성의 다른 한편에 변함없는 자연의 항구성을 대립 항으로 설정해 두고 인간의 숨 쉴 자리를 향수하게 만든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인이 속한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이 액체화되었다고 진단하였다. 그리고 체제의 구조가 지닌 특성이 구조화되지 않은 유동적인 순간적 생활정치 무대와 쌍을 이루어 인간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시는 이처럼 지속적으로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가난한 것만이 변하지 않는다는 부조리를 인식하게 만든다. 게다가 가난의 질곡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의 항구성은 프롤레타리아의 돌이 함의하고 있는 존재론적 비극성을 더욱 부각한다.

이재훈의 시 속 대부분의 시적 화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대도시라 할 수 있는 서울에서 비롯된다. 도시는 지속적인 개발과 변화의 대상이었고, 그에 맞춰 새로운 생활 방식을 만들어왔기에 현대성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시적 화자와 자본 문명의 시대에 가장 이율배반적인 인간형이라는 시인과의 심리적 거리는 매우 가깝다. 모든 화가가 자신을 그리듯이 시인 역시 자신을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도시의 일상생활, 특히 도시에 대한 주관적 성찰, 탐구 및 경험을 통해 도시의 열기, 먼지 그리고 냄새를 새로운 방법으로 되살아나게 한다. 도시생활자인 시인은 도시의 흘러가는 무리들에 몸을 섞은 채 홀로 다닐 용기도 내지 못”(양의 그림자를 먹었네, 생물학적인 눈물)하고 군중 속 일원이 된다. 그 군중 속 시인은 나는 육십억 분의 일일 뿐”(매일 출근하는 폐인, 명왕성 되다)임을 자각하며 고독하게 혼자 걷고 있는 현대인을 표상한다. 따라서 거리의 군중을 대표하는 일 개인으로서의 시인이 겪는 운명이란 곧 거리에 있는 집단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재훈의 도시 상상력은 근본적으로 거리를 걷는 행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걷는 것은 우리가 주변 세계를 이해하고 주변 환경과 관련된 우리 자신을 인식하는 기본 수단이다. 따라서 걷기는 도시 공간을 경험하고 도시 상상력을 창조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재훈의 시는 걷기의 시학을 구현하고 있다는 기존의 평가처럼 도시생활자인 시적 화자가 배회하고 지나간 발자국의 흔적을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속도와 시간, 합리성을 강조하는 현대적인 도시 속에서 걷는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행위로 비칠 수 있다. 도시의 거리를 걷는 것은 시골길을 걷는 아주 사사로운 옛사람의 산책”(미적인 궁핍, 벌레 신화)과는 분명 다르다. 걷기 활동은 주로 현대 교통수단의 체계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도시 계획이 교통체제에 점점 더 적응하면서 보행자가 무시되는 상황에서 시인은 일부러 걷기를 선택했다. 따라서 시인에게 걷는 것은 도시 계획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이며, 정해진 이동 방식에 대한 반항의 행동이다. 또한, 규범화된 교통수단으로 도시를 통과하는 것과 달리 시인은 걷는 가운데 사색과 몽상 속에서 살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을 스스로 방황하는 몽상가라고 말”(당신은 가짜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한다.

시적 화자가 도시 속에서 바퀴가 싫어 걷다 보면/빌딩의 키가 커진다.” 그리고 핵폭발처럼 밝은 도시/기하학적인 구조물로 가득한 발명의 도시”(미적인 궁핍, 벌레 신화)는 그에게 시각적인 충격을 안겨 준다. 이처럼 시적 화자의 발걸음은 현대적인 현상들을 모두 수용하고 해석하기 위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이곳은 문명의 숲/충혈된 눈으로 비만한 이미지만 봤어요”(다정한 재봉사의 재판, 명왕성 되다)라며 상품의 거리를 분석한다. 아마도 근현대사에서 현대성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가속화된 자본주의의 발전, 다양한 새로운 기질의 출현, 빠른 도시화와 산업화, 그리고 인간의 현실 경험에 시각의 영향력이 커진 것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발전은 시인이 현대 시대를 바라보는 관점들과 자연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시인이 창조한 걷는 자는 도시의 거리 곳곳에 만화경처럼 펼쳐져 있는 현대성의 텍스트를 읽고 있다. 이 현대성을 담지하고 있는 시인의 눈은 카메라를 닮노출을 열고/몇 시간 동안 창밖을 보면/불빛만 남은 세계”(비비디 바비디 부, 명왕성 되다)에 익숙하다. 이처럼 도시를 걷고 있는 시인은 시대의 외부 세계와 현상을 기록하는 특권적인 방법인 현대적 기질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걷는 자는 도시의 새로운 현상, 즉 거리의 새로운 감각을 기록하고 반응하는 지적이고 감각적인 기질을 구현하면서 현대성의 등록 매체로 기능한다. 그런데 이재훈이 창조한 시적 화자들은 일관되게 도시를 어두운 상상의 장소로 묘사하며 그 현대성에 역행하려 한다.

도시는 도시화 과정과 그것이 수반하는 기술 혁신에 대한 경험 속에서 범죄, 가난, 죽음이 생성되는 현장으로 그려진다. 따라서 이재훈의 시에서 서울은 황량하고 악몽 같으며 죽음의 상징으로 가득한 곳이다. 전염병이 돌고 홍수가 나서 오물이 넘쳐 나는 도시는 잿더미에 휩싸여 있다. 이처럼 이재훈의 시들은 가난과 도덕적 타락, 억압이 지배하는 도시의 비전을 창조하며, 사회 변혁을 요구하는 불안스러운 예언적 분위기를 발산한다. “지천에 널려 있는 악의 부스러기들때문에 고통과 어둠이 사십 일 동안 지속될 것이다. 더한 슬픔과 허무가 너를 뒤덮을 것이다”(재의 수요일, 생물학적인 눈물)라는 계시가 잇따른다. “아비를 죽이고 시체를 토막내는 자도 있는 세상에 전염병에 관용은 없고 심판은 멀지 않았”(물고기 바이러스, 생물학적인 눈물)다는 것이다. 재난과 재앙에 대한 두려움은 한층 더 종교적인 정서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도시의 개념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죄의 도시 바빌론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과 타락의 도시 바빌론의 사막 한가운데 있는 공중정원에서는 까맣게 타들어간” “잿빛 몸들이”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한다.”(공중정원,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부패한 바빌론이 신의 파멸을 기다리고 있다는 계시록의 예언처럼 현대 도시의 멸망에 대한 두려움은 종말론적 상상력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시인은 서울의 도시화와 함께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도시의 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오물의 역사로 그려낸다. 미궁으로 비유되는 도시의 복잡성과 계획성은 도시의 거리와 하수로, 강에 대한 태도를 통해 드러난다. 걷는 자는 배설과 오물의 길” “그 위에 서성이다가, “트르륵트르륵 한 세기 동안/콘크리트 덮는 소리를 듣다가/문득 발길을 멈춘다.” 도시는 현대화라는 핑계로 하수의 오물과 공업용 폐기물을 뒤덮으며 성장해 왔기 때문에 그 불순물들은 유독성 물이 되어 도시인들의 발밑을 흐르고 있다. “물이 흐른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네가 버린 물과 네가 뱉은 말이/파이프를 타고 수화기를 타고/물결치며 이 집 저 집을 들락거린다/이 무시무시한 동력.” 이처럼 시인은 도시의 부패와 타락을 오물로 가득한 하수구 시스템으로 표현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시스템 속에서 나는 썩은 물로 컸다.”(도시의 물관(),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게다가 굽이치는 황토물 때문에 사람들은 피부병에 걸려 기왓장으로”(대황하9, 명왕성 되다) 제 몸을 긁는다. 점입가경으로, 도시가 만든 하수구 시스템은 도시의 불순물을 왈칵 분출시킨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몸에서 자꾸 냄새가나고, “거리에는 고름 덩어리를 매단 사람들이 천천히 기어”(역병, 생물학적인 눈물) 다닌다. 현대인의 신체적 고통과 질병, 전염병이 도시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있음을 아주 날카롭게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또, 도시의 일상에 내재해 있는 다원적인 혼란을 꿰뚫어 보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제공한다. 그는 소외와 공허감 속에 무기력과 나태, 방황을 산출하는 현대성의 속성을 속도의 감각으로 재현하고 있다. 현대의 거리는 직선으로 태어나고 사람들은 직선으로 기다린다.” 역한 거리의 질서안에서 사람들은 직선으로 달리는 법을 모르는 채 질주”(직선을 치다, 생물학적인 눈물) 하다가 피를 흘린다. 이들의 질주 속엔 신속과 합리, 경제라는 현대적 매력으로 현란하게 포장된 속도가 개입해 있다. “속도가 폐부를 훑고 지나가는 아침,”(거리의 왕 노릇, 벌레 신화) 현대의 속도를 표상하는 지하철속 사람들은 모두 핸드폰을 들고, 걸고, 만지고, 본다.”(귀신과 도둑, 명왕성 되다) 그러면서 그들은 현실의 자신과 제 옆의 사람들을 보지 못한다.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상시로 온라인에 접속하는 현대인들에게 신중과 반성, 창조를 가능하게 할 숭고한 조건인 고독을 누릴 기회마저 사라졌다는 바우만의 경고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느린 발걸음으로 걷고 있는 시인은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가속도적 촉진을 거스르고, 생산과정과 속도의 현란함에 저항하고 있다.

따라서 시대의 첩보원”(나무의 내력, 명왕성 되다)이 된 시인은 이 도시를 먼 타역으로 여기고 집시가 되어 거리를 걷는다.”(직선을 치다, 생물학적인 눈물) 그는 이 공간에서 주변 세계를 무시하는 것이 자유로워 보인다. 세상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 속에 도시를 돌아다니는 동안, 걷는 자는 소외되거나 버림받은 사람들, 또는 사회의 변두리에 있는 주변인들과의 만남을 피할 수 없다. “이 세계는 깨끗한 것만을 전시해놓으려 하므로 구더기도, 박쥐도, 검은 피도, 집 잃은 고양이도모두 숨기고 지렁이가 나올까 싶어 시멘트를 바르신성한 것들만 숨기는 음모들”(녹색섬광, 벌레 신화)을 꾸민다. 이처럼 도시는 과밀, 질병, 범죄와 빈곤, 고립과 소외 등의 도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부랑자, 도둑, 소매치기, 사기꾼, 매춘부 같은 주변인들을 정화하려 한다. 하지만 시인은 명왕성에서 온 첩자”(카프카 독서실에서, 벌레 신화)이자 이교도”(빌딩나무 숲,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가 되어 이방의 언어로 도시를 읽으려 한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외계인”, “난쟁이또는 그냥 ’”(안드로메다 바이러스, 명왕성 되다)으로 부르며 이 도시의 첩자그냥 먼지”(명왕성 되다, 명왕성 되다)로 치부하고 소외시킨다. 기발표작 침묵의 달인에서 볼 수 있듯이 소외당한 나는 어디를 가든 환영은 없, “억울하게 남았다.” 침묵을 강요하고, 또 침묵으로 응대하는 것이 유일한 생존법이 된 도시의 세계에서 홀로 고독한 주체는 비루한 존재로 남게 된다.

도시를 수평으로 보행하던 이전의 시적 화자들과 달리, 신작시 돌멩이 기도에서 걷는 자는 산에 올라 도시를 바라본다. 물리적으로 높은 위치에서 도시를 관찰하면 관음의 조감도가 형성된다. 관음인은 자신의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조망하며 익명의 거대한 도시 전체를 볼 수 있다. 그가 내려다보는 도시는 매일 강도와 강간이 일어나고 자살을한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나를 감추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고 변명과 회개를 일삼는다. 그런데 주머니에 남에게 던질 돌을 가득 넣은 채/상처의 말들을 입에 가득 담은 채걷던 시적 화자는 나도 모르게 주저 앉아 돌을 품으며 지나치는 사람들의 눈망울을 마주한다. 상처가 되고 고통이 된 돌을 품는 그의 모습에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돌팔매질 당하고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상이 겹쳐지는 것은 과잉 해석일까. 자신을 순례자라 생각하는 것”(혈통, 생물학적인 눈물)이 주어진 운명처럼 느껴지는 시인에게 걷는 것은 순례의 삶을 은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처럼 온 땅을 모두 밟아보고 싶었”(순례,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던 소망대로 시인은 이 도시 속에서 나는 사십 년의 광야처럼 매일 순례하며 살고 있다.”(나르치스, 벌레 신화)

 

 

3. 언덕의 아들, 시시포스의 돌

 

도시생활자인 한 남자의 일생을 시인은 풀잎에 매달려 있다가/,/떨어진 애벌레의 한해살이로 표현하였다. 맥없이 지상에 떨어진 인간의 운명이 지닌 속절없음은 이 이라는 한 단어에 압축되어 있다. 어쩔 수 없이 아스팔트 위를 기는 애벌레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하다가 상처를 입기 때문에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 데/온 생을 바”(남자의 일생, 명왕성 되다)친다. 이재훈은 가혹한 인생의 수레바퀴에 짓밟히는 인간의 형상을 운명론에 입각해 표현하려고 언덕이란 시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이 세계는 오르는 순간보다/흘러내리는 순간이 더 잦은 땅이다. 그래서 한 남자는 애벌레처럼 기었다/울었다/다시 기었다.”(아직 사십대, 생물학적인 눈물) 이처럼 이재훈의 시 속 걷는 자들의 산책길엔 언덕이 있다.” 따라서 시적 화자들은 오르고 올라도 닿지 않는 거리를 헤맸다.”(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명왕성 되다) , 시인이 창조한 언덕의 아들저녁의 거리를 걷다 보면, 어느새 달린다.” “도시의 속도에 적응된 발로 허공을 구른다.” 그리고 메마른 얼굴에 눈물이 흐른다.”(언덕의 아들, 명왕성 되다)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이 질긴 운명”(정의, 생물학적인 눈물)의 깊고 깊은 절망감. 이런 삶의 굽이굽이를 넘어가는 사이 어느새 나는 돌의 근원을 생각했다.”(, 명왕성 되다) 이재훈이 인간의 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유의 방식은 바로 이 언덕에 대한 비유 속에 녹아 있다.

시인이 매일 다니는 골목길에 큰 돌 하나 있었다./무심코 지나쳤으나 돌은 늘 거기 있었다.” 그리고 그는 가끔 지칠 때 돌 위에 앉아 쉬었다.” 그가 돌 위에 앉아 있으면/저 바닥 아득히 짐승의 울음이 들리는 듯/엉덩이가 뜨끈함을 느꼈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를 가진, “피의 온기를 가진 돌”(, 명왕성 되다)은 숭고한 인간의 삶을 상징한다. 또한, 이재훈의 시에서 언덕과 골목길에 있는 돌은 시시포스의 돌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 시시포스는 신들로부터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리는 형벌을 받아 그것이 산 아래로 다시 굴러떨어지면 몇 번씩이나 되돌아가서 굴리는 행위를 반복해야 할 운명에 처했다. 문제는 신들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시시포스의 언덕 넘기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원히 목표에 미치지 못할 시시포스의 돌은 성공을 성취할 수 없는 허무와 절망의 상징으로 이해된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시적 화자는 언덕을 오르고/또 한 언덕을 오르면/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명왕성 되다)지 모른다는 저 언덕의 희망 고문에 시달린다. 소원을 성취하려면 개인의 고통과 인내가 당연히 따른다는 현대성의 주술은 인간이 현재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이루면 모든 게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목표를 향해 달려가도록 돕는다. 이 같은 효율적인 사고방식은 인간이 정해진 목표를 향해 달려가느라 정작 잃어버린 것들을 알 수 없도록 은폐하고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놓는다. 이재훈의 시에서 하루하루를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시적 화자들은 의욕적으로 넥타이를 매고 미소를 연습한다.”(매일 출근하는 폐인, 명왕성 되다) 이같이 거울 앞에 선 수많은 표정은 밀고 밀린 생들이”(건기(乾期)의 새, 명왕성 되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 세계의 삶 자체를 시시포스의 형벌이 내려진 유형지’(유형지, 벌레 신화)로 인식한다. 시시포스는 자신의 노동에 대한 해결이나 만족에 대한 희망 없이 일하는 사람을 나타낸다.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을 향해 계속되는 노동은 영원히 실패할 것이라는 좌절감을 동시에 생산한다. 따라서 시적 화자는 구하고 절하고 넘어지는 어제와 오늘”(고통과 신체, 생물학적인 눈물)의 반복된 삶 속에서 고통의 비명을 지르지만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앉은뱅이꽃, 명왕성 되다)는 고립감과 비통함에 빠져 산다.

그러나 시인이 정작 두려워하는 대상은 생의 분노도 잊은 채, 태평하게 먼 이방의 전설을 말하는 내 입술”(순례,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이다. 개인의 자유를 박탈당했음에도 분노를 느끼지 못하고 자동인형처럼 감각이 마비되어있는 상태는 산주검(living dead)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시인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아무것도 기대하지 않통각이 없는 시간들”(물에 대한 사소한 변론, 명왕성 되다)에 갇혀 침묵하고 이름을 부여하지 않으려 하는, 허무적인 존재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픔을 느끼는 감각이 없는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분명 죽음의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다. 시에서 주체의 부조리에 대한 인식은 자유로운 영혼의 갈구를 상징하는 목마름과 연결된다. 그래서 인생의 사막 한가운데서 목이 마르다는 걸 알게 된 건/내가 광야의 시간을 견뎠기 때문일까/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밭을 걷고 있었기 때문일까”(마라의 오아시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라고 자문해 본다. 결국, “밤거리를 배회하는 이유도 모른 채/방황하는 몽상가라고 말하는 당신은” “가짜다”(당신은 가짜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라는 판결과 함께 시적 화자들의 자기반성이 이어진다.

카뮈는 시시포스가 결코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을 향해 무겁지만 신중한 발걸음으로 되돌아 내려오는 그 잠시의 휴지의 순간에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숨 쉬는 공간과 같은 이 순간을 고통만큼이나 확실하게 돌아오는 의식의 시간으로 해석한다. 깨어있음으로 살아가라! 따라서 시적 화자는 도시의 은유에 머물렀다가/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며 와르르/내 얼굴이 무너짐을 본다.”(거울 속의 얼굴, 명왕성 되다) 이런 자기반성의 기록들 속에서 시를 짓는 한 인간은 계속 재판이나 심판을 받으며 반성성을 드러낸다. “나는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다짐으로/생을 버텨왔다 그러나/멀리서 새벽 종소리가 들려올 때/나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마루,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라는 자아의 분열상은 시인의 열망하는 자아와 상황적 자아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을 나타낸다.

시시포스의 운명은 오로지 자신의 그 노동들이 결국에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거나 깨닫게 되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부조리한 인간 조건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바우만은 시시포스가 바로 자기 자신의 그 비참한 고통에 압도당해 사로잡히면서 그 자신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곤경에 대한 유일한 답변이자 그 곤경으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이끌리게 된다고 본다. 이재훈의 시에서 손목 깊숙이 칼날이 헤집고 들어오는 자살의 모티프가 자주 사용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돈을 숭배하고, “수학의 아름다움이 지배하는 세계”(안드로메다 바이러스, 명왕성 되다)는 감염자의 공격성을 극대화하여 자살에 이르게 하는 바이러스가 공기 중에 떠돈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더러운 짐승이 된다”(정의, 생물학적인 눈물)는 두려움에 칼을 의지하며사는 시적 화자들은 존재론적인 소외와 불안의 고통에 갇혀 칼을 꺼내 손목을 그었다.”(귀신과 도둑, 명왕성 되다) 그러나 손목 깊숙이 칼날이 헤집고 들어온 날/온몸이 뜨거워지다가 갑자기 허기가 몰려”(결핍의 왕, 생물학적인 눈물) 온다. 허무와 절망의 고통이 반복되는 이 세계에서 자살이 아니라 제 삶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한편으로 고통의 방언을 멈추지 않는다. “이 엄살은 모두 기획된 것. 더 타락하기 위해 준비된 것. 더 성스럽기 위해 예비한 것. 거룩한 엄살은 악마를 교란시킬 수 있는 무기”(대리자(代理者), 벌레 신화)라며 계속 위악을 부린다.

삶이 본질적으로 좌절감을 안겨 주는 신의 사업이나 운명으로 묘사되는 한, 시인의 비전은 영원한 불만을 나타내는 이미지를 상상하는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늘 길 위에 있을 것이다./점퍼를 입은 사람들을 볼 것이다./새로 발행된 지폐의 냄새를 맡지 않을 것이다./윤리를 잊을 것이다.” “세상의 고아가 되어/명왕성의 시민이 될 것이다.”(언젠가는 영월에 갈 것이다, 생물학적인 눈물)라는 다짐들을 되뇌며, 좌절을 불러오는 생의 조건들에 대한 투쟁을 선언하고 저항의 몸짓을 탐구한다. “이제 군주는 필요 없다”(녹색 기사, 벌레 신화)라는 선언과 함께 학살에 속한 세계거리의 질서에 저항하다 피를 흘리고, 저주의 말로 땀을 냈다. 짐승처럼 쓰러지고 일어났다. 바람이 사는 거주지에 자주 운신했다.” 그리고 거리의 규율을 화분에 옮겨 담았다.”(파종의 도(), 생물학적인 눈물) 더 나아가, “씨앗이 되고 싶은 시인은 거리의 규율을 흙 속에 묻어 어둠 속에 가둔 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가/역전에 누워 있는 노숙자들에게 닿고 싶”(주술적 인간, 벌레 신화)어 한다. 카뮈는 의식과 반항이라는 거부 행위는 포기와 정반대라고 말하며 인간이 제 삶의 주인이 되어 부조리의 사막을 벗어나지 않은 채 그 속에서 버티는 삶을 살도록 격려하였다. 반인반마의 혼종성을 상징하는 사수자리 켄타우로스처럼 떠돌고 방랑하는 순례자의 삶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시인은 꺼지지 않는 촛불의 위태로움을/말 위에서 견디는 삶”(사수자리,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을 선택하고, 노래한다.

 

 

4. 강철 무지개를 벼리며

 

밤을 지새우니 비가 내린다. 사선으로 빗금을 그으며 산에 빗자국을 그린다. 비가 가슴을 그으며 내린다. 비가 가슴으로 파고들며 내린다. 모래를 잔뜩 실은 트럭이 언덕 밑으로 떠내려간다. 홍수는 아닌데 차가 떠내려가고 동물이 떠내려 간다. 비는 내일이면 그칠 것이다. 내일이면 그칠 텐데 모두 떠내려간다. 첩첩산중에서 아래를 본다. 모든 시간이 빗금을 그으며 상처를 낸다. 지혜가 없어 빛을 잃어버리는 언덕. 고개를 올려다보면 더 가파른 비탈이 있다. 지금, 여기. 나무와 나무 사이. 풀과 풀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둥그런 땅에서 한참을 졸다 깨어난 아침. 햇살이 언덕을 타고 오른다.(궁륭(穹窿), 생물학적인 눈물)

 

고로, 거칠고 위태로운 인생의 사막 위에 씨앗이 되고 싶은 시인은 햇살이 언덕을 타고 오르듯,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산다. 위 시에서 비가 가슴을 파고들며 상처를 내는 이유는 사선으로 빗금을 그으며내리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합리, 체계, 이념의 경계를 상징하는 빗금은 그 속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입은 상처의 원인이 된다. 이 시에서 시인은 궁륭형의 빛을 잃어버리는 언덕이 아침 햇살과 함께 무지개다리 형상으로 변성되는 기막힌 전환을 보여주면서, 존재와 타자 사이의 견고한 빗금을 뛰어넘는 시적 연금술을 발휘한다. 그리고 빗금 사이에 존재하는 이분법적 구분의 벽을 허물고 경계의 영역을 이동하면서 지속적인 변화를 꾀한다. 그 바람에 나무와 나무 사이. 풀과 풀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인간과 반동물적인 물질세계 사이의 빗금이 풀어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노을은 경계도 없이 제 몸을 허물기 때문에 아름다운 노래가 된다.”(풀이 던진 질문, 벌레 신화) 그리고 사물의 경계를 지우고 스미는 안개를 온몸으로 먹고 슬픔은 기지개를 편다”(누대(屢代), 생물학적인 눈물)라는 서럽게 아름다운 문장이 탄생했다. 이렇듯 인간이 자기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존재자와 교섭하는 하나의 존재 양식으로서 기능하는 사이 세계는 두 기표 사이에서 번쩍이는 은유의 창조적 섬광을 보여준다. 사이라는 통로를 통과하면서 새는 나무에게로 나무는 새에게로존재론적 변이를 한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옮아가는 것”(새에게로 나무에게로, 생물학적인 눈물)이라는 경이로운 시적 결론에 이른다.

신작시 눈물로 돌을 만든다는 눈물과 돌의 경계를 지우고 맞이하는 존재론적 변이를 표현하였다. 눈물에 감동하지 않는 사람을 돌의 심장이라고 표현하는 관용어처럼, 눈물은 돌이 지닌 딱딱하거나 차갑거나 건조한 상태와 반대되는 성질을 지녔다. 흐르고, 따뜻하며, 축축한 눈물은 생명력과 치유의 상징이 되었으며 선하고 경건한 감정의 증거로 기능해 왔다. 또한, 물질적 상상력에 있어서 흐르는물은 생명과 여성성을 상징하며 모성의 근원적 특성을 지닌 것으로 여겨져 물질을 이루는 근원적 원소로 이해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 눈물은 사람을 만든다.” 그리고 눈물의 사제인 시인은 눈물의 시를 써서 사람을 만든다. “복수를 모르고/변신하는 방법을 모른, “온몸을 섭리에 맡기는 돌은 평생 구르는 노동과/몸을 벼리는 일만 안다.” 이 돌은 한평생 고지식하게 생산의 노동에만 임해 온 프롤레타리아를 상징하고 있다. 기득권을 쥔 체제는 땅의 온갖 죄를 돌에게 담당시켰다/던지고 차고 묻고 깼다.” 그 바람에 돌은 썩지 않는 형벌의 몸을 가지고 침묵을 지키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시인은 공중에서도 바닷속에서도 땅속에서도/몸을 부딪칠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다시 귀환하는 돌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한 상상은 노동자들이 운명에 맞서 싸워온 길고 긴 투쟁의 역사가 담고 있는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이 시에 따르면 돌은 분명 오랜 시간 인간들이 그들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며 흘린 눈물의 결정체이다.

이재훈이 물질적 상상력에 기반하여 고통의 눈물로 만든 은 연금술사들이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들을 배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 때 촉매제 역할을 했던, 상상적 물질인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처럼 여겨진다. 연금술사들은 연금술이 자연적 사물 안에 있는 형상을 완전성으로 이끄는작용에 관심을 가졌다. 카를 융과 같은 분석심리학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면, 연금술은 근원적으로 내부적이고 영적인 완전성을 획득하기 위한 내향적 탐구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연금술은 완전함을 추구하는 종교적 수행과도 같았다. 근원으로부터 창조하고 모든 경험을 살아있는 영혼의 형태로 변형시키는 시인은 연금술사와 공유되는 부분이 많다. 그런데 인간과 신성의 영역을 분명하게 한계지으려 했던 중세시기에 악마가 소유한 기예를 평가하는 척도가 되기까지 한 연금술적 상상력은 신의 창조 능력을 찬탈하려는 불경한 것이었다. 때로 불경하고 불온한 시인은 하나의 물질 원소에서 다른 원소로의 변성을 상상하며 말이 진화하면 물이되는 고도로 단련된 연금술”(기타가 있는 궁전,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을 구사한다. “잠든 말을 만지면 그제야 너는 벽화가 된다 널 만지면 황소가 되었다가 사슴이 되었다가 초원을 가로지르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타 노래를 부르는 추장이 된다.”(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이처럼 시인의 환상 연구실에서는 모든 원소가 경계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반사하고 굴절되어” “회귀하며 얽히고설키고” “꿈이 무지개로 반사”(환상 연구실, 생물학적인 눈물)되는 신비스러운 연금술이 펼쳐진다.

또 시인은 재봉사가 자신의 직업이라며 가끔씩 바늘을 들고 몽상에 잠그 몽상을 새로운 무늬로”(다정한 재봉사의 재판, 명왕성 되다) 짜내는 페넬로페가 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몽상을 꿰매어 꿈시를 짓는 시인이 바느질하는 이유다. 그는 하늘을 날고 있는 제 모습과 더불어 저 먼 세계를 비상하는 영혼의 고난함을 짜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재훈은 돌덩이에 바싹 닿은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은 이미 돌 그 자체 볼 수밖에 없는 비탈길의 시시포스가 느꼈을 고통과 슬픔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는 시시포스의 눈물에 눈물로 응대한다. 시인은 내 삶은 죽어 있는 새들의 시체를 보는 것에서 시작하곤 한다며 이른 아침, 누군가에게 밟혀 배가 터져 있는 까마귀”(까마귀 속에 나의 시간이 있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를 예사로 넘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문밖에서 울고 있는 힘없는 사람들의 눈물 흐르는 소리” (라틴어를 배우는 시간, 생물학적인 눈물)에 먹먹해 괴로워한다. 이처럼 소외되고 나약한 존재에 관한 관심과 염려에서 부터 생겨난 시인의 감수성은 다른 사람들이 무관심하게 보아넘기는 바로 그것에서 촉발된다. 그래서 그는 태초부터 울고 있는 사람들의 상처를 긁어내 주고 싶”(부패한 사랑, 생물학적인 눈물)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상처 입은 자들과 하나가 되어 울고 또 운다. 이재훈은 이 통곡의 지점에서 슬픔의 본질에 관한 탐구를 시작한다.

일 분 일 초의 생존만이 철학”(풀잎의 사소한 역사, 생물학적인 눈물)으로 지배하는 세계에서 슬픔과 고통에 지나지 않는 한 개인의 인생이 보여주는 참담한 광경은 울음으로 살아온 인류의 역사로 재조명된다. 그 눈물의 역사는 슬픔과 고통이라는 감정이 인생 그 자체의 고유한 속성임을 드러낸다. 결국, 이재훈의 시는 슬픔이 없는 세계는 없지”(평원의 밤, 벌레 신화)라는 인식과 더불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경험에 속하는 고통에 관한 깊이 있는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머리를 감다가 어처구니없이 울게 될 때./양치를 하다가 가장 더러운 모습으로 청승 떨 때밀려오는 슬픔은 그저 조건일 뿐”, “운명의 이름일 뿐”(기다림 방법, 생물학적인 눈물)이라는 것이다. 즉 슬픔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적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고통과 함께 살아가기. 그렇다면 그 고통을 인식하는 주체의 태도가 더 중요해진다. 시인은 슬픔과 고통의 언덕 끝에서 절망보다는 삶의 회복을 염두에 두며 고통의 새로운 이해를 성취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이재훈은 슬픔과 고통의 경험을 어떻게 재구성하는가에 몰두한다. 우선, “눈물은 흘려야만 제 몸을 갖는다”(비비디 바비디 부, 명왕성 되다)라며 눈물을 언어화하고 있다. 오랜 시간 눈물로 말해온 탓에 내 어깨는 울음으로 지어졌다.”(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한 얼굴의 죽음에 관하여,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시인은 개인의 자유가 구속될 때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육체라고 본다. 따라서 몸의 증언인 울음소리는 눈물의 언어가 되어 억압적인 사회질서 속 개인의 상처를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다음으로, 슬픔의 위안이 될 만한 위로의 기술을 모색한다. 인간의 울음소리가 가득한 이 광야에서 위로의 딸이 되고 싶었다”(물질에 울다, 명왕성 되다)라는 시인의 고백도 있다. 글쓰기는 예전부터 병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곤 하지 않았던가. 현대의 사람들은 불행의 뒤만 쫓으며/아파트로 들어가고 사무실에 갇힌다.” 이같이 일상이라는 지능적인 시나리오에 빼앗긴현대인의 영혼을 위로하려는 시인은 매일 입고 벗는 시가 되기 위해 환각을 맞는다.”(당신은 시를 쓰는 사람인가요, 생물학적인 눈물) 인간은 자신이 지닌 내적 가치와 외적 세계 사이의 틈을 메꾸는 하나의 상징적 형식을 갈망한다.환각이 없다면 어떻게 인간을 견뎌낼 것인가”(엉뚱한 기차는 꿈을 돕는다, 생물학적인 눈물)라는 시인의 토로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환각으로 비유되는 몽상만이 이 비참한 세계를 살아가기 위한 자구책이 된다. 따라서 몽상도 죄가 되나요”(다정한 재봉사의 재판, 명왕성 되다) 라는 시인의 호소는 마음속 깊은 울림을 낳는다. “이후, 누구에게 밟히거나/공중에 던져져도 괜찮았다./나는 자꾸 진화한다./詩人이었다가 일용근로자였다가 백수건달이었다가 독학자가 된다./어떤 모습에도 아파하지 않는 내성(耐性)의 몸”(비상, 명왕성 되다)을 갖게 된 것이다.

계속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여러 시 속에서 되뇌고 있었지만, 사실 시인은 기적을 행하고 싶어 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고 싶”(물질에 울다, 명왕성 되다)기적이 일어나” “완벽한 평화가 되(기발표작, 침묵의 달인)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현대라는 부조리한 시대에 거주하고 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강한 연민과 공감을 드러내는 이재훈의 시적 세계는 고통의 파편을 재건하고 조립하며 별자리를 만들어나가는 개방적인 구조 속에서 마법적인 순간들을 아끼지 않고 창조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나는 그 무엇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무엇으로도 존재의 변성은 가능하다. 따라서 차갑고 텅 빈 사물에/쇳물을 들이붓고 싶다./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뜨거운 강철이었다는 물질적 인식으로의 귀결은 그의 시 세계에서 지극히 합당해 보인다. 슬픔으로 울고 또 울다가 목이 마르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라는, 강철로 된 시인의 몸은 슬픔이 깃든 에밀레종의 전설처럼 비밀의 성소(聖所)”가 된다.”(연금술사의 꿈, 명왕성 되다) 아이가 어미를 부르는 듯 슬픈 소리를 내는 이 종은 내 육체로 당신의 영혼을 말하기 위해, “애써 당신의 운명을 노래”(주술적 인간, 벌레 신화)하기 위해 시인의 눈물과 피, 살로 빚어진 것이다.

시인은 그저 그리워하는 직업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고단한 삶 속에서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나르치스, 벌레 신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이 지닌 슬픔은 멀찍이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되었어요. 만지지 못하고, 쓰다듬지 못하고, 홀로 방탕했어요”(추천해주고 싶지 않은 직업, 생물학적인 눈물)라는 자성을 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워하는 병에 걸려 매일 참회의 시를 쓰”(치미는 몸, 벌레 신화)는 그는 모든 그리운 것들이 어룽대는/스밈의 환()”(연옥의 산, 명왕성 되다)에 빠져 산다. ‘그리움스밈은 사랑과 소통의 본성이 아니던가. 신형철은 문학이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의 말만이 진실하게 들리기 때문이라며 타인의 고통을 정확히 인식한 시만이 정확한 위로를 할 수 있다고 본다. “말이 없어도 언어가 없어도 알 수 있는소통의 길을 꿈꾸는 이재훈은 원시의 감각”(나르치스, 벌레 신화)을 소환한다. 그것은 비밀을 말하지 않아도 맛보면 다 아는” “춥고 서글픈사람들의 맛보는 공동체”(맛보는 공동체, 벌레 신화)를 형성할 수도 있다. 이 원시의 감각 속에서는 밟혀야 할 운명을타고난 눈이 떠올라/내 발목을 쥐고/너도 나처럼/떠올라라/떠올라라속삭이며 조용한 혁명을/일으키는 것이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따라서 시인은 이 세계에 충성하고 싶지 않다. 사랑하고만 싶다며 장막을 걷고 거리와 섞였”(오로지 밤의 달만이 반겼다, 생물학적인 눈물)던 것이다. “사랑은 위험한 길에서 더욱 악착같은 것./더 아래로 굴러떨어지더라도/더 위로 매달리더라도/마치 한 마리인 듯 두 마리인 듯/서로의 목을 물고 처절하게 붙어 있”(아직 사십대, 생물학적인 눈물)는 것이라는 깨달음 후, 시인은 사랑에 천착한다. 애당초 시는 연애와 같은 것”(당신은 시를 쓰는 사람인가요, 생물학적인 눈물)이 아니던가. 시인이 한 시절을 울다보면 살짝 데친 가난이 서로 부둥켜안고 있”(나물 같은 시, 생물학적인 눈물)으며, 그가 걷던 순례의 여정엔 늘 사랑이 있”(나르치스, 벌레 신화)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분석을 통해 볼 때, 완성을 향한 시인의 조립과 재구성은 정확한 사랑을 위한 실험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재훈의 시 세계에서 구원의 징표인 어머니는 마루에 앉아 엉덩이 밑에서 건져올린 슬픔을 한 올 한 올 뜨고 계신다.” 이 모습에서 시인은 이별은 순간이다/그 순간을 이겨낸 자만이/슬픔을 바닥에 깔고 앉을 수 있다”(마루,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라는 통찰을 얻어 냈다. 상처 입은 자들이 슬픔과 고통에 침윤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고 더욱 단단해지기를 바라는 시인의 바람이 드러난다. 이념과 합리를 요구하는 자본주의 현대 사회에서 재킷을 입고 시를 쓰는 시인의 외투는 실상 어머니의 살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재킷, 재킷! 하면 어머니의 뇌와 심장이 실이 되어/올올이 풀려나온다.” 그런데 그 헌신과 사랑으로 짠 재킷을 입고 추위를 견딘 나는정작 어머니에 대해 쓸 수 없다.”(재킷을 입은 시인, 명왕성 되다) 이 시대의 시인이 처한 운명을 잘 표현한 시가 아닐까 싶다. 시의 언어가 시인의 손에 의해 슬픔의 씨줄과 날줄로 엮어져서 한 편의 시로 태어난다. 하얀 종이 위에 천 일 동안 잃어버린 기억을 하나씩 써나갔어.” “빼앗긴 내 기억들을 처음부터 다시 조립하며 미완성의 시를 써나가는 것, “그것이 지상에서 내가 사는 유일한 길이었어”(시인 셰에라자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라는 셰에라자드의 절박한 이야기는 완벽한 미완성을 향해 나가는 시인의 생애이기도 하다. 시는 미학적인 완성을 향해 가면 또다시 미끄러지고 실패의 늪으로 향하는 본질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시인의 시적 사유는 무거운 돌을 짊어지고 평생 반복하여 언덕을 올라야 하는 시시포스의 운명이 시의 운명과 다름 없다는 말과 함께 공명한다. 시인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은 미끄러짐과 어긋남이라는 잦은 이별로 솟구치는 슬픔과 고통의 반복 속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을, 정확한 사랑에 이르려는 노력임을 알 수 있다. “다정한 시인인 그는 어제와 다름없이 오늘도, 서럽게 아름다운 눈물의 선물을 우리에게 건네며 울음으로 지어진 어깨를 다독인다.

_ <딩아돌하>, 202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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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세상을 읽어가는 동안

  
배진우(시인)



  새로운 언어를 접할 때는 새로운 추임새를 배우고 새로운 문화를 배운다. 새로운 언어를 사용할 때 내가 아니던 내 성격이 튀어나온다. 몇 개 국어가 가능한 사람에게 나는 질문을 던진다. “외국어를 쓸 때 다른 사람이 되는 거 같아?” 어떤 사람은 그렇다고 말하며, 어떤 사람은 내 성격이 어디 가겠느냐며 모국어를 쓸 때처럼 한결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라틴어를 배우는 시간」을 읽고 생각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언어로 세상을 읽어나가는 것에 제한이 있다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내가 아닌 성격으로 세상을 읽어간다면 다르게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세상을 읽기에 좋은 언어와 성격은 무엇일까. 내가 알고 있는 언어가 세상의 끝 같다. 세상이 벅차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언어는 세상을 설명하기에는 한 박자 느리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세상을 읽을 수 있는 자아를 발견한다면 세상이 조금 더 쉬울까. 
 「라틴어를 배우는 시간」의 화자는 질문한다. 그리고 대답한다. 무언가가 되어 있지 않은 문장으로 말을 채웠다. 무언가 된 것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무언가가 되고 싶어서 연습한다. 말하며. 우리들이 알고 있는 기본적인 회화를 벗어나서 말이다.

  말을 하고 있는 나와 내가 말하고 있는 나는 다르다. 시에서 화자는 이 사이를 오가며 자기를 소개하며 자기의 위치를 보여준다. 말하고 있는 화자의 위치는 나약하다. 본인 소개를 통해 보자면 나약한 곳만 ‘찾아’다녔다. 약자와 잊혀 진 것 사이에서 그간 시인은 이야기를 해왔다. 이재훈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에서 표제작인 「명왕성 되다」에서는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하는 문장이 있다. 명왕성은 더 이상 행성이 아니다. 행성에서 소외당했다. 명왕성이 행성이다 아니다 라고 말하는 인간이 있기 전부터 명왕성은 그 자리를 지켰을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명왕성은 거기 있었고 사람들은 명왕성을 정리했다. 남아있는 명왕성을 읽은 것은 시인이다. 이처럼 사회적 분유물이 되어버린 것을 응시하는 시인의 시선은 이번 작품에서도 남아 있다. 나약하고 쓸쓸한 화자의 언어를 옮겨 적음으로 인하여 라틴어를 배우고 있는 그의 자리를 보여준다.    
 
 「라틴어를 배우는 시간」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 첫 문장은 “선생님.”이며 마지막 문장은 “눈곱을 떼어내고 이방의 언어로 세상을 겨우 읽기 시작한 근사한 순간이에요.”이다. 시의 첫 단어 “선생님.”으로 보아 강의실에서 라틴어를 배우며 말하는 화자가 그려진다. 화자가 연습하는 문장은 당연하게 자기를 소개하는 것이다. “저는 집을 떠나본 적이 없어요. 바닷가의 노을을 보고 싶어도 참았어요. … 대신 저는 죽지 않았어요. 겁은 났지만 나약한 자리만 찾아다녔죠. … 먼 바다의 시간을 견뎠어요. … 내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죄라는 사실을 몰랐죠. … 거리를 걷다가 넘어져 있는 나를 보았어요. 무릎 꿇고 울고 있어요. 나는 선물이 되지 못하고.” 
  화자가 지금 당도해 있는 공간은 ‘선물이’ ‘맛이’ 무언가가 되지 못하는 무언가가 될 수 없는 공간이다. “맹인이 그림을 그리고, 벙어리가 노래를 부르”는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곳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 계속하여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있는 것밖에는 되지 못하는 곳이다. 화자는 이 공간을 벗어나려 한다. 언어를 통해.

  화자는 본인의 영역을 떠나 본 적이 없다. 그런 그가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 배우고 ‘괜찮다면 괜찮은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려 한다. 본인이 살고 있는 영역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순간을 상상한다. 그리고 “눈곱을 떼어내고 이방의 언어로 세상을 겨우 읽기 시작한 근사한 순간이에요.” 이방의 언어로 세상을 곧 읽어나갈 것이다. 
  질문하는 문장과 아무것도 되지 않으려고, 되지 않은 문장의 연쇄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의도가 되는 문장들.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고 부서질 듯 부서지지 않은 가늘고 강한 문장들이 이 시에 있다. 언어가 밖으로 나온 이상 언어가 읽어갈 세상을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세상을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언어로 “가장 위험한 사랑”의 시간을 시작할 것임을 믿는다.

 *
  
  세상을 읽어가는 방법 중 하나로 우리는 언어를 배운다. 언어를 배우며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한다.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를 만든다. 슬퍼서 슬프다고 말하고. 들어주는 사람은 때때로 알맞은 표정을 지어준다. 「라틴어를 배우는 시간」을 읽고 가장 마음에 드는 문장을 찾아 밑줄을 그었다. 어제의 문장과 오늘의 문장이 달랐다. 마치 슬픈 이야기를 하는 사람 앞에서 다른 표정을 지어주기 위해 잠시 노력했던 것처럼.   
 언어를 어디까지 알아야지 시를 쓸 수 있을까? 또한 잘 읽을 수 있을까? 국어사전을 펴놓고 단어에 집착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시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에는 도움을 주진 못한다는 것만 깨달을 뿐이다. 글쓴이는 지금도 알고 싶다는 욕심의 덩어리만 있을 뿐 시를 모른다. 그렇기에 시를 쓴다. 그렇다면 새로운 언어를 잘 모를 때에도 막연한 문장의 충돌 사이에서 시가 나오지는 않을까. 몰라서 목적어를 잊고 횡설수설하며 내가 가지고 있는 답답한 언어의 범위에서 무언가를 말해야만 할 때가 있다. 그 때에는 언어에게 구걸이라도 하여 정확한 문장을 가지고 싶다. 세상을 읽을 수 있는 문장을. 또한 세상이 나의 문장을 읽어주길 바랄 때도 있다. 세상 어딘가에는 나의 문장이 속하기를 바란다. 

_ <현대시> 2019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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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로부터 오늘, 오늘로부터 내일


류수연(문학평론가)



2. 우리 모두의 생물학적인 슬픔 – 이재훈의 '생물학적인 눈물'

이시영 시인의 세계가 일상에서 문득 포착된 자연의 찰나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고자 했다면, 이재훈 시인의 새 시집 '생물학적인 눈물'(문학동네, 2021)이 응시하고 있는 세계는 지극히 현실적인 일상 그 자체이다. 시인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삶이고, 그것을 살아내는 인간이다. 

차창 밖으로 비가 내린다.
버스를 타기 전에는 맑았던 하늘인데
집으로 가는 길에 비가 내린다.
지방 소도시의 대학에서 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갈 때면 늘 가혹하게 막힌다.
모두 저마다 집으로 가거나
외로움을 달랠 사람들을 찾아가거나
저녁 일터로 가는 길일 것이다.
휑한 마음 한구석에 빗방울이 또르륵 떨어진다.
매일 보따리를 들고 어딘가로 나서는
장사꾼의 저녁이 궁금하다.
언제쯤 집에 당도할까.
쉬어야 할 집은 멀고
목은 더 컬컬해진다.
버스 뒷자리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사연인지 생각하다
뒤로 가서 가녀린 등을 토닥거려주고 싶지만
모르는 척 그냥 눈을 감는다.
도착할 집은 멀고 잠은 오지 않는다.
버스가 도착할 무렵이면
가까운 막걸리집부터 찾을 것이다.
컬컬한 목이 바짝 마른다.
- 「퇴근」 전문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가는 길, 휴식이 되어야 할 집은 아직 멀기만 하다. 버스를 채운 사람들의 모습조차 크게 다르지 않다. 집으로 돌아가거나, 누군가를 만나러 가거나, 아니면 또 다른 일터로 향하는 길. 시인은 그곳에서 문득 외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도 이미 알고 있다. 이 외로움은 사실 그리 지독하거나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그것은 이미 오래도록 익숙하게, 삶의 매순간마다 마주쳐 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목이 바짝 마르도록’ 긴장되고 힘겨운 것은, 그것이 영원히 극복되지 않을 근원적 고통임을 보여준다.
과장되지 않게, 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게 시인의 일상에 배어들어 있는 이 슬픔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진원지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을 운명적인 슬픔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기원은 아무래도 시인의 이전 시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꽃 속에 산다.
웅덩이에 잠겨
달콤함에 취해
먹고 싸며 늙는다.

그곳이 지옥인 줄 알고
기어 나올 때

지옥을 보려고 온 사람들
예쁘다고 기념할 때

벌레들끼리 서로 눈 마주쳐
징그러워 깜짝 놀랄 때

마지막 계절은 
툭 떨어진다.
- 「벌레」 전문

이재훈의 전작 󰡔벌레 신화󰡕에 실린 「벌레」는 기괴하기보다는 애잔하다. 벌레의 존재가 인지되는 순간은 벌레(혹은 벌레임을 각성한)들이 ‘서로 눈이 마주치며’ 놀라는 바로 그 때이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느 순간에 서로와 조우하는가이다. 그들만의 지옥을 벗어나자 오히려 혐오의 지옥이 펼쳐지는 이 모순된 순간. 시인은 한 마리의 벌레가 된 자신을 자각한다. 그리고 그의 계절이, 세계가 변화한다.

바람은 바닷물을 뒤집고
바닷물을 따라 물고기들이 솟구친다.
햇빛에 몸을 기울이는 수중식물이
바닷물끼리 부딪히는 협곡에 숨어
줄기에 공기를 불어넣는다.
몰락의 길에는 비상구가 없다.
오랜 사랑이 없고 도륙과 생존만이
물속의 시간을 지배한다.
맑은 하늘 아래 아이가 뛰어놀고
씨앗들이 바람을 따라 잉태하는 땅.
순수한 길을 걸었다는 어떤 시인의
추악한 옷가슴을 보았을 때
원시의 바다를 생각한다.
오직 생존만이 도덕인 바다의 꿈틀거림.
미래를 점칠 수 없는 계절이 계속되고
가장 알량한 회개가 마음을 헤집는다.
수면 위로 솟구쳐올라 바위에 온몸을 부딪치는
눈물벼락.
남몰래 땅속을 흐르는 물주머니가
천둥처럼 얼굴에 달라붙는다.
- 「생물학적인 눈물」 전문

시인이 지옥 바깥에서 만난 또 다른 지옥은 더욱 추악하다. ‘사랑은 이미 사라졌고 도륙과 생존만이 지배한다.’ 순수를 노래하는 시인조차 사실상 이 타락한 세계의 일원일 뿐, 그 어떤 순수도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저 타락과 자조만이 남았을 것 같은 그곳에서, 시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눈물’과 조우한다.
스스로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이러한 마음의 동요를, 그는 “가장 알량한 회개”라고 지칭한다. 어쩌면 그것은 이성이나 감정이 아닌 본능에 가까운 것, 깊은 반성이나 공감이라기보다는 값싼 연민과 동정일지 모를……. 그리하여 오늘이 지나면 금세 잊혀져버릴 것들……. 차마 반성이라고 명명될 수조차 없는 찰나의 것. 
하지만 그 보잘 것 없었던 감정은 이내 그의 모든 것을 헤집는다. 폭풍이 된다. 거센 파도가 된다. 그리하여 온 얼굴을 메운 눈물이 된다. 그리고 이 눈물이야말로 지옥에서 우리를 견디게 했던 유일한 힘이었으며, 지옥 바깥에서 마주친 서로를 향한 지독한 연민과 공감의 언어였음이 다시금 환기된다. 이재훈의 시가 우리에게 속 깊은 위로일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눈물은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나오종 지닌 것”(김현승의 「눈물」)이므로.

3. 또 다른 위로의 시간을 맞이하며

2021년 12월,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지난 2년보다 더 암울하다. 2022년 1월, 우리가 마주하게 될 현실은 이보다 더 암울할지 모른다는 우울한 관측이 더 많다. 끝이 보일 듯 보일 듯 이어진 팬데믹 상황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강탈당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도둑맞은 시간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고, 살아내야 한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결코 회복될 수 없을 것 같은 공백의 시간을 살아야 했지만, 그 안에서 ‘우리’를 발견하는 것은 이전보다 훨씬 쉬운 일이 되었다. 서로를 향한 연민과 공간으로 그 공백을 채우고, 이 지옥의 시간을 함께 살아내었다는 사실 역시 결코 지워지지 않는 진실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가장 큰 위로로 존재해왔던 것이다. 

좋은 시인이란 그러므로 귀가 쫑긋 솟은 사람인지 모른다
그래야 잉크병 얼어붙은 겨울밤 곱은 손 불며
이 모든 소리를 백지 위에 칠필로 꾹꾹 눌러쓸 것이다
- 이시영의 「듣는 사람」 부분

풀잎이 너를 쓴다.
멀리서 너를 읽는 소리가 들린다.
네 몸이 조각나 날린다.

우린 모두 피를 만드는 사람.
어떤 사람은 역사를 쓰고
어떤 사람은 일기를 쓰고
어떤 사람은 시를 쓴다.

새벽이 건너가는 소리 들린다.
거울을 보니 흰 수염이 가득하다.
- 이재훈의 「에다」 부분

그러므로 시인의 오늘에서 다시 시작하자. 시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결국은 무엇인가를 쓰는 일이며, 때로는 쓰지 않은 혹은 쓸 수 없는 그 무엇을 환기하는 일이다. 시인에게 그것은 그저 주어진 소명일 뿐이다. 그들이 하루를 살아가고 살아내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며, 어쩌면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전하는 위로의 본질도 여기에 있다. 어제처럼 오늘을, 그리고 오늘처럼 내일을 살아가는 그 순간들 말이다.
지난 2년,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그저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그리고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받는 그런 시간을 살아왔다. 그리고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런 시간을 맞이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소명으로, 살아낸 어제와 살아가는 오늘과 살아갈 내일을 통해, 우리는 그 무엇보다 서로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고 있다. 그러니 더 이상 공백의 시간에 압도되지 말자. 서로를 향한 위로로 우리는 이미 그 공백을 채워왔으니 말이다. 

_ <현대시> 2022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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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기획특집  강민숙의 시가 꽃피는 아침

<강민숙의 시가 꽃피는 아침> (86) 이재훈 시인의 ‘남자의 일생’

 ‘남자의 일생’
 

 - 이재훈 시인 

 

 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찾아들고

 온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나비 한 마리,
 

 공중으로 날아간다.
 

 풀잎이 몸을 연다. 
 

 <해설> 

 시의 일차적 풍경은 애벌레가 역경을 딛고 힘차게 날아오르는 한 마리 나비의 비상입니다. 어떤 생명체인들 산고(産苦)가 없을까마는,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데 / 온 생을 바쳤다”니 한 마리 나비로 날기 위해서는 이토록 많은 고통을 참고 견디나 봅니다. 

 이 시의 제목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비가 아니라 ‘남자의 일생’이지만 남자와 비유해 읽어보면 “남자의 애잔한 생애”가 너머로 보입니다. “늦은 오후, /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 그림자 찾아들고 / 온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면서 남자의 힘겨운 여정을 보여줍니다. 

 일찍이 프란츠 카프카는 소설 ‘변신 ’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를 ‘의무의 무거운 짐을 진 벌레로 변신한 남자’를 등장 시켰습니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새벽기차를 타고 출근하는 외판원으로서 가족들의 삶이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사명감으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잠에서 깼을 때 그는 벌레로 변해 있었고 출근은 고사하고 스스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든 벌레로 살다 그의 아버지가 등에 쏜 사과에 맞아 죽게 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나비 한 마리, / 공중으로 날아간다.”를 통해 고통이 비극적 사멸이 아니라 탄생으로 치환됩니다. 남자가 나비이면서 곧 비상이고, 나아가 마지막 시행 “풀잎이 몸을 연다.”를 통해 드넓은 시적 지평을 열어줍니다. 

 추운 겨울, 깊고 어두운 땅속에는 ‘나비로의 비상을 꿈꾸는 애벌레’가 고단한 몸을 뒤척이고 있겠지요. 마치 겨울 언강 밑으로 수많은 물고기가 움직이듯.
 

 강민숙 <시인/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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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태관 형님. 요즘 노성은 어떤가요. 꽃들이 활짝 펴서 지천이 꽃밭이겠네요.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서성이는 산성 근처를 매일 오고가시겠지요. 요즘은 노성산에 둘레길도 잘 조성해 놓았다고 들었어요. ‘형수님과 손잡고 자주 거닐고 계시지요? 여름이 오기 전에 또 콧바람 쐬러 갈게요.

제가 등단 초기에 있었던 가장 큰 사건은 형님을 알게 된 게 아닐까요. 논산이라는 시골에서 시인을 만난다는 게 어려울 때였어요. 1998년이었을 겁니다. 문학평론가 이형권 선생님이 논산 계실 때 저를 불러내었죠. 좋은 시인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시며 소주 한 잔 하자고요. 그렇게 우리 셋은 식당에서 소주와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물론 형님은 막걸리를 드셨겠지요. 저는 이것저것 먹었을 거예요. 술도 약하니까요. 그러다 이형권 선생님 댁으로 가서 두 분은 바둑을 두시고, 저는 문학평론가의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구경했어요. 무엇이든 닥치고 읽었던 시절이라 책 구경이 제일 좋았거든요. 아주 잠시 나도 바둑을 둘 줄 알았더라면 생각했지만 멋진 서가를 보는 순간 마음을 곧 빼앗겼어요.

누가 바둑에서 이겼는지는 생각이 안 나요. 진 사람이 술을 내기로 한 것은 맞겠지요. 우린 곧바로 포장마차로 갔으니까요. 그때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한 안주를 먹었지요. 살아서 펄떡펄떡 뛰는 빙어를 씹어 먹는 안주였어요. 대접에 빙어가 열댓 마리 놀고 있었고 그중 한 마리를 집어 들고 초장에 찍어 먹는 안주였어요. 저는 비위가 안 맞아 도저히 못 먹겠더라고요. 빙어가 너무 파닥대면 초장이 옷에 튀니 먼저 빙어대가리를 초장에 푹 넣어 기절시킨 다음 먹는 거라고 친절히 설명도 해주었지요. 시인 선배의 월권으로 이건 먹어야한다고 하여 눈 딱 감고 입에 넣고 무조건 씹었죠. 아 예상대로 별로였어요. 너무 비렸거든요. 그런데 형님은 아예 안 드시는 거예요. 알고 보니 형님도 비위가 안 맞아 안 드셨던 거죠. 뭔가 당한 느낌이랄까. 내가 산 빙어 먹는 모습을 보며 너무 좋아하시는 것 같아 불안했는데. 갓 등단한 어린 시인을 놀려주려는 맘도 있었겠지요. 그 시절부터 제가 형님을 따라다녔던 것 같습니다. 저는 대학원 진학으로 서울로 가고 이형권 선생님은 충남대로 직장을 옮겨 가셨고 모두 논산을 떠날 때도 형님은 논산을 지키셨어요.

논산 노성면 윤증고택에서 찻집을 하실 때가 너무나 선명히 떠올라요. 그때는 제가 대학원을 마치고 건양대에 출강을 할 때인데요. 강의를 마치면 자주 노성을 찾았습니다. 찻집 창문을 열고 달빛에 바라본 하얀 구절초밭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어요. 지금도 그런 황홀한 꽃밭은 본 적이 없어요. 그때 형님은 막걸리를 치고 노래를 불렀지요.

. 막걸리. 형님하면 자연스레 막걸리가 떠오릅니다. 세상에서 막걸리를 가장 좋아하는 시인. 술은 오로지 막걸리만 먹는 시인. 저도 형님 따라 막걸리를 좋아하게 되었고요. 노성에 있는 가내술도가에서 받아먹는 막걸리는 정말 최고였어요. 말통에 술을 받아서 노성산에 가서 먹었던 날도 있었어요. 제가 그랬지요? 아니 어떻게 사람이 이걸 다 먹을 수 있냐고요. 제가 조금 거들긴 했지만 형님은 그걸 해내셨어요.

제가 형님께 받은 유산이 있다면 시인으로서의 자존 아닐까요. 형님은 시인들과 잘 섞이는 거 같지만(술을 드실 때는 가장 유쾌한 사람이죠), 어딘가에 섞이지 않고 늘 외따로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실제로 그렇게 사셨죠. 시인의 이름으로 굽신거리거나 손을 비벼본 적이 없죠. 그저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시를 쓰고, 시를 쓰는 사람들의 마음을 함께 읽어주었죠. 그래서 시인들이 형님 주변으로 모이나 봐요. 시인의 태도, 시인의 삶, 남편과 아빠로서의 삶까지도 많은 얘기를 해주셨지요. 제게는 정말 살아가면서 큰 힘이 되었어요.

형님은 늘 바람처럼 사신 거 같아요. 출판사도 운영해보고 시도 가르쳐보고 전기일도 해보고 황태도 다듬어보고. 모교인 충남대학교의 출판과장도 하셨지요. 전국 대학출판과장 모임에서 폭발적인 인기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죠. 그렇게 여러 일들을 했지만 늘 시를 놓거나 등한시한 적이 없었어요. 시를 삶의 가장 중심에 놓았어요. 일은 시를 위한 여러 호구지책들인 거죠. 자주 창작 레지던스에 입주하여 지냈으니까요.

 

사랑을 하라

하나뿐인 목숨으로

이 겨울

떨어진 잎이 나무의 뿌리를 덮듯

사랑을 하라

그 사랑이

모과향처럼 단단히 무르익었을 때

사랑한다는 말을

딱 열 번만 거푸 가슴으로 삼켜보라

그러고 나서

그 떨림을 시로 써라

그래도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술이 술독을 박차고 나오듯

시가 솟구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세상 누구도, 아니

당신 자신조차도 사랑할 자격이 없다

이태관, 떡갈나무 아래서의 시론전문(숲에 세 들어 살다, 달아실)

 

저리도 붉은 기억은 늘 형님의 삶과 사유의 사이에서 서성이이다가 시로 툭 떨어졌어요. 그땐 강과 길이 사유의 실마리를 주었는데. ‘나라는 타자를 만나면서 바람이 온몸을 관통하는 시를 보여주었고요. 최근 시집 숲에 세 들어 살다에서는 나무와 열애중이지요. 숲과 나무와 대화를 하다보면 떡갈나무 사랑학을 덧댄 시론이 탄생하는 것인가요.

요즘도 저는 서울에서 논산을 오가며 지나가는 풍경들을 유심히 보는데요. 더 정겹고 애잔하네요. 시간은 풍경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나 봐요. 풍경도 오래두면 익나 봐요. 저는 언제 숲에 세 들어 살까요. 일찌감치 숲과 나무와 열애중인 형님에게 비밀을 엿들어야겠어요. 그럼 다음 주에 찾아 뵐 테니 기다리고 계세요.

출전 : <시와경계>, 202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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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멍때린다는 시쳇말이 있다. 아무생각 없이 멍 하니 오래 있다는 말이다. 멍때리는 자를 나무랄 수는 없다. 누구나 멍을 때리니까. 멍때리는 것도 다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마음이 허하든지, 배가 고파 허하든지, 무기력해서 허하든지. 고통이 극에 달해서 허하든지.

나도 자주 멍때리는 편이다. 깊은 밤 혼자 TV를 무심코 켰다가 멍때릴 때가 있다. 그 프로그램은 아무 때나 켜도 늘 방영된다. 아마 24시간 방영하는 것 같다. 멍때리고 싶을 때는 그 프로를 틀면 된다. 바로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 아마 나 같은 사람이 많기 때문에 장수하나 보다. 그 프로는 희한한 구석이 있다. 일단 보고 있으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된다. 마치 아는 사람이 출연했어? 라고 옆에서 누군가가 물어보기라도 하듯이.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게 되는 것은 지금 이곳의 결핍 때문은 아닐까. 산골의 원시적인 삶이 채워주는 무언가가 있다. 어떤 사람은 고요를 채우고, 어떤 사람은 자유를 채운다. 어떤 사람은 싸움이 없어 좋고, 어떤 사람은 건강해져서 좋다. 나는 자연인들에게서 공통된 것을 발견했는데, 그건 바로 고통스러운 세속에서 벗어나 산골을 택했고 그곳에서 상처를 보듬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무욕이 가져다주는 미소가 깃들어 있다. 그것이 다분히 연출된 것이라 해도 도시에서의 파탄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아파본 사람, 망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삶의 중요한 목록이 있을 것이다. 그 목록이 세상과 절연한 자연인을 통해 투사되는 게 아닐까. 그 프로를 오래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자연인들의 사연은 늘 비슷비슷하다. 어쩌면 시청자들에게는 그들의 사연이 중요하지 않은지 모른다. 그들의 사연과는 무관하게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을 다른 곳에 둘 수 있으니까.

사람들은 늘 어딘가를 꿈꾼다. 꿈은 늘 이곳에 없는 공간을 이상향으로 만든다. 도시에 살면 시골을 꿈꾸고, 시골에 살면 도시를 꿈꾼다. 나도 어릴 적 시골에 살 때는 도시를 꿈꾸었다. 빌딩을 드나들고 지하철 타는 꿈을 꾸었다. 도시의 매연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무궁화호 기차가 서울의 한강철교를 넘어갈 때면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가 되었다. 아무도 없는 시골에서 살고 싶다. 꿈은 늘 지금 이곳의 결핍을 드러내준다.

꿈꾸는 유토피아가 문학에서는 아주 단순한 삶을 지향하는 것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 주는 기쁨을 자주 얘기한다. 하지만 자연인처럼 산속에서 혼자 사는 삶은 어떤 부분에서는 형벌에 가깝다. 도피나 유폐와 다름없는 고독한 삶이 행복할 리가 없다. 단순한 기쁨의 저자 아베 피에르 신부는 더불어 사는 삶을 강조한다. 피에르는 사실 우리는 모두가 같은 목표, 즉 행복을 추구한다. 모든 인간은 그가 어떤 시대, 어떤 조건, 어떤 문화 속에서 생활하건 두 가지 길 가운데 선택하게 마련이다. 타인들 없이 행복할 것인가 아니면 타인들과 더불어 행복할 것인가. 혼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타인과 공감할 것인가라고 질문했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구도가 아니라면 인간은 타인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행복하지 않을까. 타인들과 나누고 실천하는 삶이 인간답게 사는 맛이다. 결국 우리는 공동체를 통해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요즘 나는 농가주택을 소개하는 유튜브를 자주 본다. 세속에서 찾은 유토피아이다. 바닷가 앞에 마당 있는 주택을 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작은 산을 두르고 있는 시골의 작은 집을 보다가 흥분하기도 했다. 이천만 원짜리 농가주택도 있었다. 서울 아파트의 반 평도 안 되는 가격이다. 서울의 집은 못 사더라도 저 집은 살 수 있지 않을까. 과연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요원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이천만 원이라면 해볼 만한 도전이지 않을까.

출처 : www.pckworld.com/article.php?aid=8878899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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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명왕성 되다(plutoed)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음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시집 명왕성 되다(민음사, 2011) 중에서

 

2005년 결혼을 했다. 평생 혼자 살 것이라는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고 누구나 한다는 결혼을 했다. 시인에게 결혼은 누구나 하는 일이 아니다. 종교적 신념에 비례하는 순교자적 소명 없이는 결혼을 생각할 수 없다. 당시 서른 넷. 시를 쓰고 대학원 박사 과정이며 비상근 문예지 편집자였던 나도 평범하게 살아볼 요량으로 결혼을 했다. 예비 신랑신부의 자취방 보증금을 빼니 오천만원이 되었다. 이러저리 돈을 더 융통해서 육천오백만원짜리 방 두 칸이 있는 전셋집을 구했다. 집은 지하철 2호선 신림역 근처에 가까스로 구했다. 지하철도 있고, 시장도 있고, 먹자골목도 있고, 게다가 월세가 아닌 전세라니. 신림동은 시골에서 상경한 내 정서와 잘 맞는 동네였다. 서울 토박이보다 고향이 남쪽인 분들이 훨씬 많았다. 무엇보다 시장 물가가 저렴했고, 신림동 순대타운이나 고시촌으로 들어가면 값싸고 푸짐한 음식점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어느 동네든지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저녁약속이 있어서 저녁을 먹고 지하철 막차를 타고 신림역에 도착했다. 집에 가기 위해서는 역근처 유흥주점 골목을 지나가야 했다. 그때 어떤 청년이 내 손목을 잡았다.

형님. 놀다 가시죠?”

전 집이 여기 바로 앞이에요. 놀러 온 거 아니에요.”

에이. 왜 이러실까. 잘 해드릴게요.”

진짜 집이 요기 바로 앞이라니까. 자꾸 그러네.”

일명 삐끼라고 부르는 주점의 호객꾼이었다. 근처에 단란한 주점이 많았는데 당시에는 거의 호객꾼들을 두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호객꾼과의 실랑이가 꽤 오랜 시간 지속되곤 했다. 한 마디로 떼어내기가 정말 어려웠다. 화도 내보고, 무시하고 지나가 보기도 하고, 돈이 없다고 지갑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호객꾼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조금 늦은 시간이면 빙 에둘러서 집에 들어갔다.

또 하나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출근길의 고통이었다. 서울살이 직장인들의 출근길 노고를 고스란히 체득하게 되었다. 나는 며칠은 출판사로 며칠은 대학원으로 출근했다. 늘 지하철을 탔다. 출근길의 2호선은 지옥철이었다. 푸시맨이 있던 시절이었다. 차를 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으면 뒤에서 푸시맨이 밀어 넣었다. 매일 구겨져서 지하철에 실려 갔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앞사람의 눈과 마주하는 것이다. 애써 서로 눈동자를 아래로 깔거나 눈을 감는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고개를 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므로. 눈을 감는 대신 매일 온갖 인간 군상들의 냄새와 소리들을 섬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비누냄새, 목욕탕 스킨 냄새, 전날 숙취 냄새, 꼬락내, 방귀 냄새, 암내, 오래 묵은 곰팡내, 신음, 하품, 욕소리, 핸드폰 벨소리, 진동소리, 안내 방송, 밀지 마요, 죽겠네, 왜이래, 저기요, 여기요, 저 여기 내려요, 다음에 내리십니까, 내립시다, 내린다니까.

명왕성 되다(plutoed)라는 말은 2006년 미국 방언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단어였다. 명왕성(Pluto)이 태양계 행성 지위를 박탈당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지하철 무가지 신문에서 읽었다.요즘은 모두 스마트폰을 쳐다보지만 당시만 해도 대부분 지하철에 무료로 배포되는 타블로이드 신문을 보았다. 세상에나. 태양계의 별도 지위를 잃는다니. 이런 일도 있구나. 그 기사가 신기해서 신문을 찢어 주머니에 넣었다. 태양계에서 가장 먼 별 명왕성이 박탈당했다. 태양계에서 소외되었다. 누가 박탈했나.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그랬단다. 나사에게 그런 자격을 누가 주었나. 아무도 모른다. 우리에게 말도 없이 왜 명왕성을 없앤다고 난리인가. 마치 꿈을 빼앗는 것처럼 이상했다.

매일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매일 박탈당하는 꿈을 꾸며 지하철 2호선을 돌고 도는 건 아닌가. 나는 완전히 소외될 때까지 2호선을 돌고 돌 것이다. 지하철에서 눈을 감으면 너는 명왕성 되었어 라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너는 박탈당하고, 소외당했단다 하는 중얼거림이 들렸다. 첩자처럼 도시를 배회했다. 허무의 그림자만 잔뜩 거느린 채 혼자 있고 싶은 곳을 찾아 다녔다. 그 시간들이 빚어낸 시가 바로 명왕성 되다이다.

내게 지하철 2호선은 삼십대를 통과했던 서울의 상징과도 같다. 명왕성 되다는 신림에서 합정을, 합정에서 증산을 오갔던 날들의 기록이다. 또한 두 번째 시집의 표제시가 되었다. 이 시집에 수록된 남자의 일생, 매일 출근하는 폐인, 신림동, 귀신과 도둑등도 모두 신림동과 지하철 2호선을 배경으로 쓴 시편들이다. 어쩌면 그 시절 가장 많은 시를 썼는지도 모르겠다. 평범하게 살려고 결혼을 했지만, 다른 사람 살 듯 평범하게 사는 게 비범하게 사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간들도, 가장 바쁘고 처참했던 시간들도 그 시절이었다. 신림동에서 2년을 살고 그곳을 떠나왔다.

ㅡ <시인시대>, 2021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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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와 같이 상상스콜라 시창작반을 안내합니다.

현재는 코로나 방역지침에 따라 온라인(zoom)으로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방역지침이 완화되면 오프라인으로 전환하여 수업을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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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 <행복학책방> 강의

http://happybookshop.co.kr/221464902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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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별곡

산문 2019. 2. 18. 17:10

책방별곡

 

이재훈

(시인, 청색종이 상주작가)

 

 

 

솔직히 예전에는 책방이 뭐 별 거 있나 라고 생각했다. 서점은 좀 큰 느낌이고 책방은 좀 작고 아늑한 사랑방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 고매한 분들의 문화적 욕구에 의해 마련된 살롱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들어가 보기엔 뭔가 부끄럽고 어색한 그런 공간이었다고 할까. 많은 책을 구경하기에도, 술이나 차를 마시기에도 애매한 공간이었다고 할까. 시간이 남을 때 길거리 어디에나 있어서 들어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지도앱을 켜고 찾아들어가야 하는 모험적 자세가 있어야 출입할 수 있는 불편도 있었다고 할까.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작은 책방은 내게 잡지에서나 가끔씩 구경하며 궁금해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책방은 너무나 소중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책방이 소중한 공간뿐 아니라, 꼭 있어야 하는 공간이라는 당위적 사명을 스스로 운위하며 사방팔방에 떠들며 다니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서점에 대해서라면 추억도 많고 할 말도 많고, 만화방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추억도 많고 할 말도 많다. 그곳엔 어설픈 비행(非行)이 있었고, 애매한 연모가 있었으며, 불가능에 가까운 문학적 대의가 숨어 있기도 했다. ‘종로서적이 사라졌을 때 느꼈던 허탈과 속절없는 기대 때문에 한동안 힘들어했던 적도 있지 않았나. 이제는, 다만 이제는 책방에 대해서도 추억과 할 말이 하나씩 쌓여가고 있는 중이다. 그동안 내 문화적 품위는 아직도 근대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자위한 터였다. 내게는 깨끗하고 근사한 카페보다는 김수영이나 박인환이 들렀을 법한 막걸리집에서의 문학적 결기가 더 편하고 좋은 공간이었다. 이제 내가 애정하는 그 목록에 작은 책방이 들어섰다고 하면 가장 적절한 표현인 듯 싶다.

가까운 시인인 김태형형이 문래동에서 책방 <청색종이>를 한다고 했을 때 의아했다. 아니 무슨 용기로 책장사를 한다는 말인가. 시인이지 않은가. 장사를 해본 분이 아니지 않은가. 차라리 책을 훔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다. 잔소리도 몇 번 한 것 같은데, 김태형 시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뚝심있게 책방을 꾸려나갔다. 책방을 창업하고 지금까지 여러 곡절도 있었겠지만 지금도 책방은 문래동의 인문학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어 책방을 한다는 시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유희경 시인의 <위트앤시니컬>, 지현아 시인의 <북스피리언스>, 김이듬 시인의 <책방 이듬> 등을 가끔씩 드나들었다. 동료 시인들이 운영하고 있었기에 작은 책방들은 내겐 더더욱 소중한 의미의 공간들이 되어 갔다. 그들도 아마 운영면에 있어서는 독립운동을 한다는 심정으로 시집을 매만지고, 책을 매만지고, 손님을 받고, 작은 행사들을 치를 것이다. 힘들지라도 행복하다는 마음이 가득할 것이다.

운명의 장난인지 필연의 결과인지 모를 일이 작은 책방을 통해 하나씩 내게 전달되었다. 작년부터 내가 운영하는 시창작반 상상스콜라의 강의를 <청색종이>에서 하고 있다. 나는 청색종이의 무급 홍보이사를 할 테니 저렴한 공간임대료 책정을 해주십사 제안했고, 시인 책방 대표님은 같은 시인의 마음을 널리 헤아려 주어 지금도 잘 운영해나가고 있다.

또한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고 한국작가회의가 주최하는 ‘2018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청색종이에 3개월간 상주작가로 활동하며 무려 4대보험에 가입되며 작은서점에서 암약하는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물론 이제 3개월간의 상주작가가 20191월로 끝이나 실업급여를 신청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긴 했다. 이곳에서 동네 네마실이라는 프로그램을 걸고, 영화도 보고 시도 읽고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문래동 골목에서 영화 패터슨’, ‘조용한 열정’, ‘토탈 이클립스’, ‘실비아등을 보고, 카를로스 윌리엄스, 에밀리 디킨슨, 랭보, 실비아 플라스의 시를 읽었다. 너무 근사하고 행복하지 않은가. 또한 두 군데의 작은 책방인 <책방 이듬><곁애 책방>의 활동을 지켜보며 교유를 이어나갔다.

책방은 동네의 문화 사랑방이다. 사람들이 모여 시를 읽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얘기를 나누며 마음을 나누는 곳이다. 큰 서점에서는 할 수 없는 따뜻한 열정과 마음들을 직접 눈앞에서 볼 수 있다. 작은 책방에 들르는 분들은 커피도 사들고 오고, 과일이나 과자도 사들고 오고, 심지어 김치도 가져온다. 모두 나누고 싶은 마음들 때문이다. 또한 책방은 인문학의 지식발전소이다. 철학을 읽고, 신화를 읽고, 역사와 문명사를 읽는 독서모임과 시와 책을 읽는 낭독회는 작은 책방에서 연일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책방은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위로를 받는 곳이기도 하다. 책방에 와서 사람들을 만나면 이런 생각이 자주 든다. 세상 밖에서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앞으로 동네마다 작은 책방들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작은 책방에서 시 읽는 소리가 들리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고, 영화보며 웃는 소리로 넘쳐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행복했으면 좋겠다.

 

- <한국작가회의 회보>, 2018년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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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학> 201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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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기독교적 상상력

 

이재훈

 

 

1. ()과 속()의 피안(彼岸)

 

문학과 종교의 관계는 상보적이면서도 대립된 관계에 놓여 있다. 그 성격은 다르지만 구원(救援)’을 열망의 마지막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동지적(同志的) 입장에 서 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보면 구원이라는 동질의 지향점이 서로의 세계를 용인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문학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여 신에게 이르고, 종교는 신에게부터 출발하여 인간으로 내려온다. 그 차이점이 경미한 상황으로 인식할 수도 있지만 실상 시인의 의식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못하다.

문학은 목표가 분명치 않은 세계를 지향한다. 그런 점에서 문학은 종교에 비해 좀 더 자유롭다. 목표가 분명치 않은 문학은, 작품을 창작하는 개별적 존재자가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대리자(代理者)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작품의 창작자에 따라 구원에 이르는 길이 제각기 다르다. 또한 구원의 방법과 도달점도 다르다. 이렇게 각기 다를 수 있는 이유는 문학은 인간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이 관념화되어 보편적 진리에 이르는 수순을 밟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종교는 특수한 목표가 있다. 종교는 경전을 통해 과학적인 분명함이 지배하지 않는 이상적 세계를 보여준다. 그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 다른 초월의 세계이지만, 오히려 그 초월의 세계가 현실을 더욱 단단히 지탱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종교는 보편적 세계를 특수한 선민(選民)의 세계로 인도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이러한 이유로 문학과 종교가 본질적으로는 상통하는 내력을 가질 수 있으나 그 도달점과 방법은 상이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은 문학 일반에서 로 방향을 바꾸어 보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시는 보편적 언어를 객관화하고 대리하는 다른 장르와 달리 노래성이 강하다. 그 노래성은 달리 말하면 부족의 언어, 방언을 육성할 때 힘을 발휘한다. 그렇기에 시의 언어는 여러 비유를 차치하고서라도 언어의 개별성에 많이 기댄다. 이는 종교가 가지는 특수한 세계와 상충되기도 한다. 종교의 모든 목표는 문학을 통해 종교적 진리를 전파하는 데 있다. 물론 각 종교마다 그 성질은 각기 다르지만 본질적인 인식은 그와 같다. 그렇기에 분명한 목적을 가진 종교적 세계를 시로 노래하기란 쉽지 않다. 시는 이미 확정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그 미적 자질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확정적인 세계로 인도하도록 강제받을 경우에 있어서는 그 반발이 더욱 심해지게 된다.

어떻든 속()의 세계에서 성()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게 문학이라면 종교는 이미 성()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를 관리하고 설교한다. 이런 경우, 성과 속이 서로 위무하고 용인하는 지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지점이 바로 종교적 상상력이 서야 할 지점이다. 인간은 원시시대부터 종교생활을 했으며 그것은 사유의식을 가진 인간의 본성적인 것이다. 폴 틸리히(P. Tillich)종교는 인간 정신 생활의 모든 기능의 심층에서라면 어디나 있을 집이 있다고 했다. 이는 종교가 우리의 삶에 어떤 부분인지를 말해 준다. 우리는 성과 속이 서로 습합되고 위치를 바꾸는 현실의 상황들을 목격하기도 한다. 그것은 문학과 종교가 서로 상충되면서도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1)각주

 

2. ()에 속한 시의 내력과 층위(層位)

 

기독교는 일반적으로 나사렛 예수를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교를 말한다. 한국에서는 동방정교회의 전통이 거의 없기에 개신교(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이 주류로 크게 뿌리내리고 있다. 이십세기 초에 유입된 기독교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와 가톨릭을 합쳐 약 천 사백만의 신도수를 가진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의미는 이미 기독교가 우리의 정신세계를 많은 부분 책임지는 사상으로 거듭났다는 데 있다. 그 동안 기독교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회 전부면에 걸쳐 그 정신이 침윤되었다. 문학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문학 작품들이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쓰여졌고 현재에도 쓰여지고 있다.

한국의 정서에 유, , 선의 종교는 샤머니즘적 전통과 함께 맞물려 일종의 동질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하지만 근대가 시작되면서 유입된 기독교는 그 성격이 많이 다르다. 기독교의 발전은 한국의 성장 자본주의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물론 한국적인 기독교가 기복신앙(祈福信仰)의 성격을 가진 연유는 종교의 토착화를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기도 하다. 한국교회에만 보편적으로 행하고 있는 새벽기도회는 정화수를 떠놓고 간원을 비는 한국적 기복신앙의 모습이다. 또한 본질적인 기독교와 다르게 현세의 축복과 상급을 강조하는 측면도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기독교 의식, 혹은 기독교적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여러 가지 개념과 범주를 들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박이도의 다음과 같은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기독교 의식이란 기독교의 목표가 되는 속죄, 구원, 부활, 재림 등의 실현을 위해 일상 생활에서 기도하고 간증하며 신과 교감하는 것을 말한다. 이 같은 의식이 시인의 내부에 심화됨으로써 작품 속에 기독교 의식의 시정신이 드러나게 된다. 2)각주

 

결국 기독교적 상상력이란 기독교 정신3)각주 을 시적으로 잘 구현한 작품들을 의미한다. 문제는 기독교 정신, 혹은 기독교 의식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냈느냐의 문제이다. 기독교가 가진 내세에 대한 단호한 믿음은 많은 부분 상상력을 제한한다. 즉 기독교가 시세계의 사상적 측면에서는 다양성을 준 게 사실이나 그 미적 형상화는 한계점을 드러낸 경우가 많았다. 외형적 측면에서는 성서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과 소재들,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비유들과 예수의 행적, 제자들의 행적에 관한 소재주의로 빠진 경우가 많았다. 기독교 정신을 깊게 고민하고 갈등하는 시적 자아의 모습을 포기한 채 이미 선취된 인간형이나 사상을 그대로 옮겨놓는 경우들도 허다하다.

또한 그 사상적 측면에서도 문제점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상상력이 시의 근간을 이루는 많은 시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의 획일성과 교조주의(敎條主義)적 성격 때문이다. 시의 목적이 종교의 정신을 전파하려는 데 있을 때 시는 종교의 목적을 달성하는 시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종교적인 목표에 부합되는 시편들은 일반의 시와 다른 범주에서 평가되고 인식되고 있다. 이른바 신앙시, 종교시 등의 개념을 들어 종교적 목표가 시의 분명한 목적일 때 일반 문학과의 차이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상상력을 가진 시가 가야 될 방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두 말은 큰 의미가 있다.

 

교의는 진정한 시에서는 그 모습을 나타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혹 나타난다 하더라도 교의로서가 아니라 순수한 환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한 것은 기독교 문학이 어떤 위치에서 이룩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적절히 표현한 대목이다. 문학이란 장르에서 기독교적인 것만을 뽑아 그 의의를 상고한다는 것은 무의미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한국의 현대 문학 속에 기독교적인 특징이나 정신만으로 된 작품을 고르고 분석하기 보다는 작가의 기독교적인 인스피레이션이 얼마만큼 뿌리박고 있는지를 작품 전체에서 얻어낼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4)각주

 

우리가 문제삼으려고 하는 기독교 시는 신에 대한 절대 긍정과 함께 인간 역사에 반영된 신의 섭리를 해석하고 그것을 실천의 지평에 놓는 태도를 포괄하는 시편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 기독교 시가 지향하는, 일종의 대안적 유토피아주의야말로 기독교 정신 혹은 이념을 가장 충실하게 지칭하는 것이 된다. 5)각주

 

가장 중요한 점은 종교적 경험에 대한 자아의 정신적 현존을 드러내는 것이다. 경험에 대한 관념화와 실천적 의지, 본질에 대한 방황 등이 확실한 세계에 대한 궁극적인 뒷모습을 더욱 공고히 해주는 길이다. 완료된 해석의 틀을 거부하고 그 해석에 의해서 반죽되어진 자아의 본질적 모습을 통해 성자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 시사에서 이런 기독교적 상상력을 미적으로 승화시킨 시인들은 적지 않다. 또한 많은 시인들이 남긴 다양한 사상적 층위와 여정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기독교의 신앙적 정신을 시적으로 잘 형상화한 시, 속된 자아와 신앙인으로서의 자아 사이의 갈등과 죄의식을 고백한 시, 기독교 사상이 대상 속에 스며들어 보편적인 정서의 형태로 내재화된 시, 기독교 정신의 올바른 방향을 변론하기 위해 비유나 풍자의 방법론을 택한 시 등 다양한 표출방식으로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윤동주, 정지용, 김현승, 박두진, 박목월 등이 보여준 세계는 한국 시문학의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본 글에서는 이미 다량의 평가를 받아온 위의 시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가가 미흡되었다고 생각되는 몇 시인들의 시를 살펴봄으로써 기독교적 상상력을 실천한 다양한 시적 모습을 살펴보겠다.

 

3. 기독교적 상상력의 양상

 

이용도 시인(19011933)은 우리 문학사에서 여전히 낯선 이름이다. 그가 뛰어난 시편들을 남기고 33세의 이른 나이에 요절했다는 사실 또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당시 감리교파의 개신교 부흥목사였으며 정열적인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중학재학 중 1919년 독립 만세를 부른 혐의로 투옥된 이후, 1922년 태평양 회의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는 등 열성적인 독립운동가였다. 1924년에는 협성신학교(감리교신학대학 전신) 영문과에 입학하고 이후 부흥목사로서의 활동을 하다 폐결핵으로 이른 나이에 작고한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생전에 일기나 서간문 등을 통해 발견된 시편들이다. 그의 시는 기교위주의 형식주의 시보다도 생명력있는 내용을 중시하였다. 6)각주

 

이름없이 지구의 일각을 밟고가! 샤론의 들꽃같이! 피는 줄, 지는 줄 세상이 다 모르되, 다만 하늘만이 빈 들에 속삭이는 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소문 없이 퍼지는 그 향기에 하늘이 웃음 웃고, 자취없이 눈 감을 때 적막한 밤 작은 별의 무리들이 조상을 해- 이것이 값없는 야화의 무상의 영광, 평생 발원이었던 것이로다. , 그러나 저를 낸 조물주는 여기에 가공을 하여 옮겨 놓으니, 요란한 대로변 가시밭에 한 송이 백합화가 되었구려! 고요히 이름없이 지나갈 고독한 야화! 이제는 소문 놓고 노방(路傍)에 찟길 이름 좋은, 그러나 역시 고독한 백합화로구나!

이용도, <샤론의 들꽃> 전문

 

샤론은 성서에 나오는 지명이다. 구약성경 아가서 21-2절에는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라는 부분이 나온다. 아가서는 솔로몬이 기술한 책으로 아름다운 노래의 책이란 뜻이다. 아가에는 그리스도와 인간에 대한 거룩한 사랑을 비유하는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이로 인간의 엄숙하고 순결한 사랑을 노래한 깊고 고상한 윤리적 도덕성을 엿볼 수 있다.

샤론은 욥바에서 갈멜산에 이르는 지중해변의 평원이다. 이곳은 봄이 되면 갖가지 들꽃이 만발하여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샤론의 들꽃은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에서 비범하게 핀 영광된 꽃이 아니라 들꽃처럼 평범한 꽃 한 송이를 의미한다. “이름 없이 지구의 일각을 밝고 가!”라는 단호한 어조는 스스로를 다짐하는 어조이기도 하다. 이 시는 이용도의 삶의 지표와도 맥락을 같이 하는 시이다. 평범한 들꽃처럼 온 가운데 소문 없이 퍼지는 그 향기에 하늘이 웃음 웃는 야화의 삶을 닮고 싶은 의지가 담겨 있다. “고요히 이름 없이 지나갈 고독한 야화!”의 삶은 당시의 상황을 또한 생각하게 한다. 신비주의적인 부흥목회자였던 시인은 마지막에 이단으로 낙인되어 교단에서도 지위를 박탈당한다. 또한 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초반까지의 7-8년 동안 시작활동을 벌여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의 불우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들에 핀 꽃에 대한 열망으로 시적 자아의 근원적 갈급함을 표현하고 있다. 신성한 자연의 근원적 원리를 통해 자신의 삶의 지표를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시이다.

이러한 시는 예수의 생애나 사상을 닮아 있다. 위의 시는 당시 우리 문학사를 생각해 볼 때 문학적으로 상당히 뛰어난 가편이다. 산문시가 비유와 어울려 이루어내는 세계가 기독교적 상상력을 스스로 체득하여 이루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산아, 나무야, 바위야. 나를 가리워 주의 진노의 눈에서 피하게 하여 주고, 모든 인간들에게서 숨기어 수치를 면하게 하여 다오. 그러나 내가 일찍이 산에서 범죄하여 산을 더럽혔사오매, 나는 산의 원수가 되었고, 나무와 바위 아래서 내가 부정하였으매 저가 나를 멸시한지라, 어찌 나를 덮어 주며 가리워 주랴. 산과 나무가 나를 덮어주지 아니하고, 바다가 나를 숨겨 주지 아니하며, 바람이 나를 듣지 않고, 하늘이 나를 동정치 않는도다.

이용도, <산아, 나무야, 바위야> 전문

 

 

하늘은

헤아려

측량하기 어려운 것.

웅대하고,

한이 없는

이 우주

 

! 그 큰 천체를

한 입에 삼키는

이 작은 마음이여

이용도, <마음> 전문

 

무엇을 깨달을 때 그 깨달음을 지속할 특별한 순간을 담지할 때가 있다. 그 순간은 자연의 이미지를 통해 드러낼 때 더 선명해진다. <산아, 나무야, 바위야>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용도의 신성 원리가 신과 자아의 교감 속에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과의 물음과 대답을 통해 그곳에서 오는 죄의식과 그것에 대한 회개와 다짐이 함께 존재한다. 속죄는 기독교 정신에서도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일상적 자연이 신의 진노를 피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자아는 자연과 인간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죄를 가리고 싶은 본성을 고백하고 있다. 그것은 일찍이 아담이 뱀의 유혹을 통해 선악과를 먹고 죄의식을 갖게 된 이후부터 가질 수 있는 본성인 것이다. 시인은 또한 자신을 가리워줄 자연과 인간을 자아 자신이 훼손하였고 부정하였다고 말한다. 자신의 죄를 위무받을 수 있었던 대상과 운명적인 대립의 관계가 되어 이곳저곳에서도 위로받을 곳이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신과 자아와의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 나약한 실존을 보여준다.

마음은 모든 천체를 한 입에 삼키는 것이다. 측량하기 어려운 하늘과 웅대하고 한이 없는 우주조차도 마음 하나에 바뀔 수가 있는 것이다. 그의 시가 자연을 순례하며 자연의 비유로 자신의 신앙관을 보여줄 때 그 사상적 풍요로움은 더 깊어질 수 있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은 살아야 한다.

구상, <오늘> 전문

 

구상은 기독교적 신앙관을 시 속에 잘 형상화한 시들을 많이 남겼다. 이미 많은 종교시편을 써왔으며 스스로 신앙시집이라는 기획으로 󰡔두 이레 강아지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라는 시집을 발간한 바 있다. 구상의 시는 복잡한 수사가 없이 쉽고 간결한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사상의 깊이를 함께 가지고 있는 시에 속한다. 또한 신앙인으로서의 시인의 삶 또한 시의 의미와 덧붙여져서 감동의 무게를 더한다. 위의 시는 현세의 삶 이후의 영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기독교 정신의 핵심사상인 창조, 부활, 사랑, 심판 등의 개념 속에서 오늘에서 영원을 산다는 부활의 신앙을 담고 있다.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현세 기복적인 신앙이 아니라 이 세계의 종말이 닥치더라도 영원을 함께 살 수 있는 신앙의 회복, 영혼의 영원을 말해주고 있다. 구상의 시는 의도적으로 시적 수사를 거세하고 사상적 의미의 핵만을 남겨두는 방식을 취한다. 그의 종교적 시편들이 다수 연작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만월이 떴다

소돔성에 만월이 떠오르자

버들가지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고

고향에 두고온 깊은 강물도

더 이상 잠자리를 적시지 않았다

이미 문 밖에는

예비된 공포가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새벽이 오는 게 두려운 사람들은

이불깃에 이빨을 지그시 깨물며

절망으로 단단히 무장한 다음

가까스로 건진 희망 몇 가닥을

모세의 목에 걸어주었다

가까스로 얻은 희망 몇 가닥이

공동묘지에서 빛나는 아침

모세는 가야 했다

소돔성 떠오르는 만월이 되어

죽음보다 어두운 애급 땅으로

뚜벅뚜벅 사라진 다음에야

희망 몇 가닥에 잎이 돋는다는 것을

우리의 모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세는 가지 않았다

마을에 남아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만월이 되는 것은 아득했다

 

문 밖에는 미증유의 적막이 다가서고

승냥이 울음소리 음산하게

빈 벌판에 가 닿았다

고정희, <만월> 전문

 

고정희의 시는 기독교 정신의 올바른 방향을 변론하기 위해 비유, 풍자의 방법론을 택한 시에 해당한다. 그는 많은 시편들을 통해 기독교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풍자, 비유 등의 다양한 방법론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면은 그가 신학도이며 또한 해방신학에 영향을 받은 실천적 의지의 신앙을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의 사상을 육성한 것이 바로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한 종교의 모습이고 그러한 자신의 신념은 기존의 신념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현존하는 기독교적 가치관들을 한번 되짚어보고 자문해 본다. 또한 그의 시에서는 역사적 소명을 자신의 신앙적 경험을 체화한 형태로 표출되었다.

<만월>은 깊은 달이 뜬 밤을 배경으로 새로운 역사의 도래나 그것이 오기까지의 정신적 여정을 적고 있다. 그 여정은 새로운 희망과 함께 긴장감이나 두려움을 동반한 감정이다. “소돔성은 지금의 현실적 상황을 말한다.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성으로 이주할 때의 이야기이다. 소돔성은 이미 성적 문란과 도덕적 퇴폐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 유황볼의 심판을 받는다. 소돔성 안에 의인 10명만 있으면 소돔성을 구할 수 있었지만 의인 10명이 없었다. 죄악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죄악에 빠져 있을 때, 그 죄악 가운데에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롯의 아내가 받았던 돌기둥의 형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돔성의 현실 속에서 모세는 구원의 지도자이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고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하였다. 그 해방 가운데 백성들과 광야에서 40년의 유랑생활을 하였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우리의 현대사는 이러한 광야의 생활과 다를 바 없다. 민족의 상실과 더불어 평화, 자유, 민주의 상실을 거듭 체험한 우리의 현실은 광야에서 고난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과도 같다. 이제 새로운 지도자나 영웅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문밖에는 아직도 미증유의 적막이 다가서는 현실 속에 있다. 민중의 아픔 속에 하나님의 진리가 함께 존재할 때 그 신앙의 존재 의미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이처럼 고정희의 시에는 신앙인으로서의 종교적 체험이 다양한 시적 방법론에 의해 시화(詩化)되고 있다.

 

장독대의 항아리들을

어머니는 닦고 또 닦으신다

간신히 기동하시는 팔순의

어머니가 하얀 행주를

빨고 또 빨아

반짝반짝 닦아놓은

크고 작은 항아리들……

 

(낮에 항아리를 열어놓으면

눈 밝은 햇님도 와

기웃대고,

어스름 밤이 되면

달림도 와

제 모습 비춰보는걸,

뒷산 솔숲의

청살모 다람쥐도

솔가지에 앉아 긴 꼬리로

하늘을 말아쥐고

염주알 같은 눈알을 또록또록 굴리며

저렇게 내려다보는걸,

장독대에 먼지 잔뜩 끼면

남사스럽제...)

 

어제 말갛게 닦아놓은 항아리들을

어머니는 오늘도

닦고 또 닦으신다

지상의 어느 성소인들

저보다 깨끗할까

맑은 물이 뚝뚝 흐르는 행주를 쥔

주름투성이 손을

항아리에 얹고

세례를 베풀듯, 어머니는

어머니의 성소를 닦고 또 닦으신다

고진하, <어머니의 聖所> 전문

 

고진하는 기독교 사상이 내재화되어 보편적인 정서에까지 그 시적 진리가 전달되는 시다. 그의 시 속에서 자아는 신앙인과 속인으로서의 가치판단이 분리되지 않은 채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무한한 신의 섭리를 이끌어낸다. 그의 시편들이 신성과 일상의 만남을 생태적 사유로 구현해냈다는 세간의 평가는 온당하다. 불순한 모든 것 또한 초월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초월의 힘이 보편적 정서로 다다르면 굳이 기독교적 상상력이 아니라 하더라도 모든 종교적 상상력이 그의 그물망과 함께 하는 것이다. 시인에게 聖所는 교회의 성전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만물이다. 또한 어머니의 세계가 바로 성소이다. 시인이 성소를 발견하는 특별한 순간은 계시의 장소가 아니라 일상의 장독대이다. 어머니가 장독대 항아리를 닦고 계시는 모습을 통해 인간이 가지는 진실된 마음이 모두 종교적인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세계는 각기 다른 존재로 분할되지 않고 사건의 연결망이며 연대성을 가지고 있다는 존재론적 인식이 고진하의 시 속에는 자주 목격된다. 기독교가 가지는 선민의식은 때로 그들만의 성찬식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를 베풀 듯성소를 닦아나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진정한 종교적 구원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가 기독교적 상상력이 가진 한계에 대한 선입견을 탈각시킬 시의 준거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외에도 김남조, 김형영, 신중신, 정호승, 김정환, 박찬일 등의 시에서도 각각 다른 방법으로 기독교적 상상력을 형상화하고 있다. 애초의 계획과 달리 짧은 지면에 이 모두를 묶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다른 지면에서 논의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대신한다.

 

4. 맺으며

 

지금까지 기독교적 상상력을 구현한 다양한 층위의 시편들을 살펴보았다. 위의 몇 시편들을 통해 기독교 정신이 어떻게 시 속에 습합되고 표출되는지를 일별해 볼 수 있었다. 더 깊은 논의를 위해서는 각 시인들에 대한 개별적인 분석이 더 부가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남겨 둔다.

어떠한 길을 통해 그곳에 이르고자 하는지, 혹은 그 길이 목표가 없는 길이라 할지라도 깊고 진정한 사유의 세계는 깊고 오래가며 감동을 준다. 종교적 상상력이 우리 시단의 사상성에 더 깊이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서구의 오래된 문학 전통이 헤브라이즘의 전통 속에서 나왔음을 생각할 때 그 중요성은 결코 가볍지 않다.

기독교는 가장 기본적으로 현세의 종교가 아닌 내세의 종교이다. 현세의 기복과 인간의 안위가 아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보증으로서 믿는 종교이다. 모든 영적 행위는 죽음 이후 삶을 담보한다. 기독교가 유일하게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부활은 죽음 이후 다시 사는 세계를 의미한다. 죽음 이후에 다시 소생하는 생성과 소멸의 원리가 숨어 있다. 그것은 꽃이 지고 다시 꽃이 피는 자연의 순환원리처럼 우리 육신과 영혼의 삶도 그러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앞으로 명징한 세계와 그것을 거부하려는 세계 사이의 길항과 모순 속에 기독교적 상상력이 존재해 있을 때 그 미적 형상성을 더 깊어질 것이다. 하늘의 구름 위에서 군림하는 성자가 아니라 인간의 옷을 입은 성자가 시 속에 투영되기를 희망해 본다.

 

각주)

1) 엘리아데는 다음의 글을 통해 성과 속의 관계를 보편적 관계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정황들은 민속종교에서부터 그 기원이 있다고 보고 있다. “성속과 구원이라는 말은 아무리 원시인이라 할지라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인 한 종교적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명제와 관련된 것이고, 인류의 여명 추기부터 일정한 종교 체험을 해왔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을 경험하는 것은 매우 다양한 양상에서 비롯되므로 한두 가지 카테고리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을 든다면 성과 속을 구분하고 가능한 한 성에 가까이 있고자 한다는 것, 인간 조건의 한계를 느끼고 막연하지만 구원을 갈망한다는 점이다. (중략) 성은 영속적 혹은 일시적 특성으로서 어떤 사물, 인간, 공간, 시간 등에 두루 퍼져 있다. 어떤 신비적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성이 되면, 그 순간부터 하나의 변질을 겪고 사람들한테 두려움과 숭배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 성을 접축하는 것은 위험시되기도 한다. 또한 그 성은 외부로 퍼져나가 마치 물과 같이 번지고 전기와 같이 방출되는 성격을 지닌다. 그에 비해 속은 부정적 성격으로 확인되는데, 빈약한 생명력이나 허무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처럼 민속 종교에서도 성과 속을 구분하고 속의 허무를 극복하고 성으로 되돌아가고자 하였다.(엘리아데, 이은봉역, <성과 속>, 22-23)

2) 박이도, <한국 현대시와 기독교>, 종로서적, 1987, 10-11.

3) 신에 의한 창조, 사랑, 섭리, 구원의 역사를 자신의 사유의 근본 구조로 받아들이고, 그 질서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신학적이념적 원리를 이름하는 것일 터이다.(유성호, <한국학연구> 21, 고려대한국학연구소, 7)

4) 박이도, 위의 책, 57쪽.

5) 유성호, 위의 책, 7쪽.

6) 이용도의 생애나 사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변종호 편저, <이용도 목사 전집>(장안문화사, 1993)과 신규호, <한국 현대시와 종교>(국학자료원, 2003)를 참고.

* 출처 : 이재훈, <딜레마의 시학>(국학자료원)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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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월요일] 스스로의 온기로 사는 나이

  • 허연 
  • 입력 : 2018.11.26 0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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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란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제 소년을 간신히 넘었을 뿐인데.
눈물을 참아야 하고 그리움도 참아야 하고
홀로 식당 문을 들어서는 서글픔도
지루한 술자리도 참아야 한다.
아직도 쓸쓸함을 사랑할 수 없나.
차가운 거리를 헤매다 방 안에 들어와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할 때.
내 몸에 남아 있는 허약한 온기.
엎드려 시를 쓰는 사람.
엎드려 생각하는 사람.
엎드리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라지만
엎드리는 일은 자신을 잊는 일.
엎드려 이제
스스로의 온기로 인해 나는 살겠다.
- 이재훈作 `불혹` 중


중년이 된다는 건 눈물도 참고 그리움도 참는 일일까.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고, 그리움이 밀려올 때 마음껏 그리워할 수 있는 건 젊음만의 특권일지도 모른다.

불혹을 넘겨 중년이 되는 건 `스스로의 온기로 사는 것`이라는 시인의 말이 가슴을 친다.누구나 거치는 통과의례겠지만 젊음과 헤어지는 순간은 언제나 쓸쓸하다.

그래도 그 시절 눈물과 그리움을 실컷 앓았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의 눈물과 그리움이 나를 키웠을 테니 말이다. 삶은 여전히 계속된다.

[허연 문화전문기자(시인)]


출처 :  http://opinion.mk.co.kr/view.php?year=2018&no=737477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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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고통을 대하는 자세…이재훈 시집 `벌레 신화` 출간

  • 김유태 기자
  • 입력 : 2016.08.19 15:43:30   수정 : 2016.08.19 17: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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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도 못 사는 인간으로만 살다 가는 인간이 있고 억겁의 시간에 자기를 올려두고 삶을 구경하다 가는 인간이 있다. 혹자는 후자를 시인이라 부른다.

이재훈(44)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벌레 신화`(민음사)가 출간됐다. 시인은 이번에도 어떤 분리주의적 시각을 유지한다.
몸에서 영혼을 떼어내 나를 구경하는 `자기 분리`랄까. 떨어져서 보니 꽃 속에 갇힌 벌레 한 마리가 보인다. `꽃 속에 산다./웅덩이에 잠겨/달콤함에 취해/먹고 싸며 늙는다.`(`벌레` 부분)

벌레로의 변신은 자기비하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삶이 닮았기에 등가를 이룬다. 더 주목할 건 내부 풍경이다. 벌레는 `기근보다 더한 맨살의 고통`(`뿔` 부분)을 겪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육체`(`벌레 신화` 부분)가 되길 희망한다.

원시를 현시하는 환시로 쓰인 작품들이 눈에 띈다. 아주 먼 과거에서 왔다는 신화적 상상력이 독특하다.

`우리는 어디에서 짐승처럼 왔을까.(중략)기억이란 늘 중심이 다를 텐데.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검은 밤의 시간을 가로질러 왔지.`(`짐승의 피` 부분)

`광석을 모르는 고대인들은 운석을 주웠다지. 별의 살 껍질을 주워 칼을 만들고.`(`녹색섬광` 부분)

현재에서 과거를 보는 시인의 발상이 시집 한 권에 가득하다.

장은수 문학평론가는 시집 해설에서 시인에게 "세계의 쏟아지는 폭력을 웅크리고 엎드린 채 등으로 견디면서 자신의 소리를 듣는 식물적 능동"이라는 평을 헌사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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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스스로의 온기’로 고통을 견디는 시인

<68> 이재훈 시인 ‘벌레 신화’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입력 : 2016.10.01 03:08|조회 : 5261

  

     


꽃 속에 산다. 
웅덩이에 잠겨 
달콤함에 취해 
먹고 싸며 늙는다. 

그곳이 지옥인 줄 알고 
기어 나올 때 

지옥을 보려고 온 사람들 
예쁘다고 기념할 때 

벌레들끼리 서로 눈 마주쳐 
징그러워 깜짝 놀랄 때 

마지막 계절은 
툭 떨어진다. 
- '벌레' 전문
 

오래 전,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다.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났더니 흉측한 벌레로 변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 그가 벌레로 변한 이후, 가족과 직장 등 지금까지의 일상적인 관계가 완전히 변한다는, 사람에서 비천한 벌레로 변하자 기존의 관계조차 비천해졌다는 그런 슬픈 이야기. 1998년 ‘현대시’로 등단한 이재훈 시인(1972년~ )의 세 번째 시집 ‘벌레 신화’에 수록된 여러 시편들은 카프카의 ‘변신’을 연상시킨다. 

스스로, 혹은 타의에 의해 벌레가 된 시인이 “바닥 여기저기 팔랑거리는”(‘벌레 신화’) 처지에 놓인 것은 도시의 삶과 무관치 않다. “아무도 도시에서 살라 이르지 않았”(‘향연饗宴’)지만 시인은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도시에서 살고 있다. 정글 같은 대도시에서 먹고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차도 없고 집도 없고 양복도 구두도 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도시는 저 멀리 있”(‘미적인 궁핍’)지만 시인은 도시를 떠나지 못한다. 차, 집, 양복 그리고 구두가 없다는 것은 실직했음을 뜻한다. 도시에서 월급생활자는 실직하는 순간 벌레와 같은 존재로 전락해 고통스럽게 환멸을 견뎌야 한다. 벗어나려 날개를 파닥거릴수록 삶은 점점 더 구차해진다.

도시를 떠나 자연 속에 산다고 하여 행복한 것도 아니다. 표제시 ‘벌레’에서 보듯, 꽃 속 “웅덩이에 잠겨/ 달콤함에 취해/ 먹고 싸며 늙”어가지만 거기가 천국은 아니다. 장소에 상관없이 벌레의 삶은 벌레의 삶일 뿐이다. ‘세이렌의 노래’와 같은 꽃의 아름다움에 나를 망각하고 있다가 “그곳이 지옥인 줄 알고/ 기어 나”오지만 “마지막 계절은/ 툭 떨어”지고 만다. “벌레들끼리 서로 눈 마주쳐/ 징그러워 깜짝 놀라”는 장면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언제나 고개만 숙였습니다. 변명은 늘 부끄러우니까요. 아프면 그냥 아파야 합니다. 견딜 수 없어도 견뎌야 한다죠. 게으름을 좋아하는 저는, 참는 것이 제일 쉬운 저는, 겨우겨우 살아갑니다. 다만 구걸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꽃이라는 말, 약속이라는 말을 참 좋아했던 때가 떠오릅니다. - ‘악행극’ 부분

“채찍이 내 피부에 감겨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가시가 박혀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갈라”(‘벌레 신화’)질 만큼 고통스러워도 시인은 도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참고 견딘다. 변명도 하지 않는다. “아프면 그냥 아파”하며 견딘다. “참는 것이 제일” 쉽다는, “다만 구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구절에서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려는 시인의 섬약한 마음이 느껴져 시위가 붉어진다. 시인은 꽃과 “약속이라는 말을 참 좋아했던 때”, 즉 도시의 삶 이전이나 궁핍하지 않았던 시절이 그립다.

어른은 큰소리 내지 않는단다. 
마음에 상채기를 남기고 비겁한 자가 되겠지. 
담배 연기만 뿜어 대며, 다 안다는 듯 
끄덕끄덕 대기만 하겠지. 
날 어른이라 부르는 손가락들. 
그 모든 비겁도 눈 감고 
어떠한 격정에도 미혹되지 않는 
어른들의 세계. 
이미 네 앞의 시간들은 결정된 것. 
가르치려 드는 꼰대들에게 
다리를 까딱거리고 딴지를 걸고 싶더라도 
어른이란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제 소년을 간신히 넘었을 뿐인데. 
눈물을 참아야 하고 그리움도 참아야 하고 
홀로 식당 문을 들어서는 서글픔도 
지루한 술자리도 참아야 한다. 
아직도 쓸쓸함을 사랑할 수 없나. 
차가운 거리를 헤매다 방안에 들어와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할 때. 
내 몸에 남아 있는 허약한 온기. 
엎드려 시를 쓰는 사람. 
엎드려 생각하는 사람. 
엎드리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라지만 
엎드리는 일은 자신을 잊는 일. 
엎드려 이제 
스스로의 온기로 인해 나는 살겠다. 
- ‘불혹’ 전문
 

시인은 “이제 소년을 간신히 넘”(이하 ‘불혹’)었을 뿐인데, “눈물을 참아야 하고 그리움도 참아야 하고/ 홀로 식당 문을 들어서는 서글픔도/ 지루한 술자리도 참아야” 하는 “어른들의 세계”에 발을 들려놓았다. 아직 어른이 될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지만 “가르치려 드는 꼰대들”은 “마음에 상채기를 남기고 비겁한 자가 되”라고 훈수를 둔다.  

세상의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된 마음 약한 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벌레처럼 바닥에 “엎드려 시를 쓰는” 일이다. “자신을 잊”고 “스스로의 온기로” 고통을 견디는 일이다. 그 고통이 생생히 느껴져 더 고통스럽긴 하지만 시인은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 벌레 신화=이재훈 지음 민음사 펴냄. 116쪽/ 9000원

※ 이 기사는 빠르고 깊이있는 분석정보를 전하는 VIP 머니투데이(vip.mt.co.kr)에 2016년 9월 30일 (15:08)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출처 : http://news.mt.co.kr/mtview.php?no=2016092811524779885&outlink=1&ref=http%3A%2F%2Fsearch.naver.com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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