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태관 형님. 요즘 노성은 어떤가요. 꽃들이 활짝 펴서 지천이 꽃밭이겠네요.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서성이는 산성 근처를 매일 오고가시겠지요. 요즘은 노성산에 둘레길도 잘 조성해 놓았다고 들었어요. ‘형수님과 손잡고 자주 거닐고 계시지요? 여름이 오기 전에 또 콧바람 쐬러 갈게요.

제가 등단 초기에 있었던 가장 큰 사건은 형님을 알게 된 게 아닐까요. 논산이라는 시골에서 시인을 만난다는 게 어려울 때였어요. 1998년이었을 겁니다. 문학평론가 이형권 선생님이 논산 계실 때 저를 불러내었죠. 좋은 시인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시며 소주 한 잔 하자고요. 그렇게 우리 셋은 식당에서 소주와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물론 형님은 막걸리를 드셨겠지요. 저는 이것저것 먹었을 거예요. 술도 약하니까요. 그러다 이형권 선생님 댁으로 가서 두 분은 바둑을 두시고, 저는 문학평론가의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구경했어요. 무엇이든 닥치고 읽었던 시절이라 책 구경이 제일 좋았거든요. 아주 잠시 나도 바둑을 둘 줄 알았더라면 생각했지만 멋진 서가를 보는 순간 마음을 곧 빼앗겼어요.

누가 바둑에서 이겼는지는 생각이 안 나요. 진 사람이 술을 내기로 한 것은 맞겠지요. 우린 곧바로 포장마차로 갔으니까요. 그때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한 안주를 먹었지요. 살아서 펄떡펄떡 뛰는 빙어를 씹어 먹는 안주였어요. 대접에 빙어가 열댓 마리 놀고 있었고 그중 한 마리를 집어 들고 초장에 찍어 먹는 안주였어요. 저는 비위가 안 맞아 도저히 못 먹겠더라고요. 빙어가 너무 파닥대면 초장이 옷에 튀니 먼저 빙어대가리를 초장에 푹 넣어 기절시킨 다음 먹는 거라고 친절히 설명도 해주었지요. 시인 선배의 월권으로 이건 먹어야한다고 하여 눈 딱 감고 입에 넣고 무조건 씹었죠. 아 예상대로 별로였어요. 너무 비렸거든요. 그런데 형님은 아예 안 드시는 거예요. 알고 보니 형님도 비위가 안 맞아 안 드셨던 거죠. 뭔가 당한 느낌이랄까. 내가 산 빙어 먹는 모습을 보며 너무 좋아하시는 것 같아 불안했는데. 갓 등단한 어린 시인을 놀려주려는 맘도 있었겠지요. 그 시절부터 제가 형님을 따라다녔던 것 같습니다. 저는 대학원 진학으로 서울로 가고 이형권 선생님은 충남대로 직장을 옮겨 가셨고 모두 논산을 떠날 때도 형님은 논산을 지키셨어요.

논산 노성면 윤증고택에서 찻집을 하실 때가 너무나 선명히 떠올라요. 그때는 제가 대학원을 마치고 건양대에 출강을 할 때인데요. 강의를 마치면 자주 노성을 찾았습니다. 찻집 창문을 열고 달빛에 바라본 하얀 구절초밭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어요. 지금도 그런 황홀한 꽃밭은 본 적이 없어요. 그때 형님은 막걸리를 치고 노래를 불렀지요.

. 막걸리. 형님하면 자연스레 막걸리가 떠오릅니다. 세상에서 막걸리를 가장 좋아하는 시인. 술은 오로지 막걸리만 먹는 시인. 저도 형님 따라 막걸리를 좋아하게 되었고요. 노성에 있는 가내술도가에서 받아먹는 막걸리는 정말 최고였어요. 말통에 술을 받아서 노성산에 가서 먹었던 날도 있었어요. 제가 그랬지요? 아니 어떻게 사람이 이걸 다 먹을 수 있냐고요. 제가 조금 거들긴 했지만 형님은 그걸 해내셨어요.

제가 형님께 받은 유산이 있다면 시인으로서의 자존 아닐까요. 형님은 시인들과 잘 섞이는 거 같지만(술을 드실 때는 가장 유쾌한 사람이죠), 어딘가에 섞이지 않고 늘 외따로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실제로 그렇게 사셨죠. 시인의 이름으로 굽신거리거나 손을 비벼본 적이 없죠. 그저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시를 쓰고, 시를 쓰는 사람들의 마음을 함께 읽어주었죠. 그래서 시인들이 형님 주변으로 모이나 봐요. 시인의 태도, 시인의 삶, 남편과 아빠로서의 삶까지도 많은 얘기를 해주셨지요. 제게는 정말 살아가면서 큰 힘이 되었어요.

형님은 늘 바람처럼 사신 거 같아요. 출판사도 운영해보고 시도 가르쳐보고 전기일도 해보고 황태도 다듬어보고. 모교인 충남대학교의 출판과장도 하셨지요. 전국 대학출판과장 모임에서 폭발적인 인기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죠. 그렇게 여러 일들을 했지만 늘 시를 놓거나 등한시한 적이 없었어요. 시를 삶의 가장 중심에 놓았어요. 일은 시를 위한 여러 호구지책들인 거죠. 자주 창작 레지던스에 입주하여 지냈으니까요.

 

사랑을 하라

하나뿐인 목숨으로

이 겨울

떨어진 잎이 나무의 뿌리를 덮듯

사랑을 하라

그 사랑이

모과향처럼 단단히 무르익었을 때

사랑한다는 말을

딱 열 번만 거푸 가슴으로 삼켜보라

그러고 나서

그 떨림을 시로 써라

그래도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술이 술독을 박차고 나오듯

시가 솟구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세상 누구도, 아니

당신 자신조차도 사랑할 자격이 없다

이태관, 떡갈나무 아래서의 시론전문(숲에 세 들어 살다, 달아실)

 

저리도 붉은 기억은 늘 형님의 삶과 사유의 사이에서 서성이이다가 시로 툭 떨어졌어요. 그땐 강과 길이 사유의 실마리를 주었는데. ‘나라는 타자를 만나면서 바람이 온몸을 관통하는 시를 보여주었고요. 최근 시집 숲에 세 들어 살다에서는 나무와 열애중이지요. 숲과 나무와 대화를 하다보면 떡갈나무 사랑학을 덧댄 시론이 탄생하는 것인가요.

요즘도 저는 서울에서 논산을 오가며 지나가는 풍경들을 유심히 보는데요. 더 정겹고 애잔하네요. 시간은 풍경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나 봐요. 풍경도 오래두면 익나 봐요. 저는 언제 숲에 세 들어 살까요. 일찌감치 숲과 나무와 열애중인 형님에게 비밀을 엿들어야겠어요. 그럼 다음 주에 찾아 뵐 테니 기다리고 계세요.

출전 : <시와경계>, 2021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