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

시詩 2007. 5. 28. 10:21

메마른 땅에 아카시아 꽃잎 떨어져요. 질긴 가지 끝에서 제 몸을 뜯어내는 소리, 천둥치는 밤. 당신은 그 아픔을 숨기고 투명한 몸으로, 꽃잎처럼 경쾌하게 내려요. 낡은 군화를 신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앙상한 가지를 꺾어 가며 걸었어요. 흙발로 저벅저벅 아스팔트 위를 걷다가 문득, 당신을 봅니다. 사납고 포악한 걸음걸이 사이로 보이는 당신의 알몸. 밤이 되어도, 이별이 지나도, 당신의 몸이 온 사방에 닿는 소리 들려요. 당신이 울고 있다 생각했지만, 실상 당신은 아무 말 없어요. 아무 몸짓도 없어요. 잠시 침묵.

몸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요.
서러운 아픔도 참, 아름다워요.

----------------
⎗ 도시에서 한 시간을 걷더라도 흙을 밟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도시의 도로는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꽃비가 내리는 요즘만큼은 우리가 사는 이곳이 ‘메마른 땅’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어서 위안을 받는다. 도시가 자연과 자연스러운 것들을 쫓아내고 시멘트로 장악해 버렸다 할지라도 봄바람과 비를 따라 내리는 꽃비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 마음의 삭막함을 안아서 달래준다. 이재훈 시인의 「빗소리」는 마치 시멘트 포도에 내리는 꽃비처럼 여겨진다. 이재훈 시인의 「빗소리」를 읽으니, 시를 해석하는 일을 하거나 딱딱한 인식의 시를 쓰는 필자로서는 잠시 부끄러워진다. 시인의 작품이 내게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감성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거나 현상을 바라보는 데 서툴다. 내게도 ‘빗소리’를 ‘서러운 아픔’으로 감각하던 때가 있었던가? 이재훈 시인은 「빗소리」에서 의미상의 대구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화자는 자신과 ‘당신’을 대조시켜서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대상인지를 드러낸다. 화자는 낡은 군화를 신었으며, 앙상한 가지를 꺾어들었고, 흙발이고 포악한 걸음걸이를 가진 사람이다. 반면에 ‘당신’은 투명한 몸과 꽃잎의 경쾌함을 지니고 있다. ‘당신’은 연약하고 부드러운 알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아스팔트 위에 내리는 빗방울 같은 이다. 화자가 ‘당신’을 아름답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자신의 몸으로 감당하기 힘든 아픔을 겪으면서도 “아무 말 없”이, “아무 몸짓도 없”이 메마르고 딱딱한 아스팔트를 적시고 안아주기 때문이다. 빗소리는 아스팔트 같은 화자의 가슴과 「빗소리」를 읽는 이의 마음자리에 “서러운 아픔”으로 내려와서 따스하게 안아준다. ‘당신’의 “서러운 아픔”을 아는 자 역시 ‘당신’만큼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겠다.

- 조해옥(문학평론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7년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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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

시詩 2007. 3. 2. 13:14



메마른 땅에 아카시아 꽃잎 떨어져요. 질긴 가지 끝에서 제 몸을 뜯어내는 소리, 천둥치는 밤. 당신은 그 아픔을 숨기고 투명한 몸으로, 꽃잎처럼 경쾌하게 내려요. 낡은 군화를 신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앙상한 가지를 꺾어가며 걸었어요. 흙발로 저벅저벅 아스팔트 위를 걷다가 문득, 당신을 봅니다. 사납고 포악한 걸음걸이 사이로 보이는 당신의 알몸. 밤이 되어도, 이별이 지나도, 당신의 몸이 온 사방에 닿는 소리 들려요. 당신이 울고 있다 생각했지만, 실상 당신은 아무 말 없어요. 아무 몸짓도 없어요. 잠시 침묵.

몸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요.
서러운 아픔도 참, 아름다워요.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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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묘지山頂墓地 1

조정권


겨울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뭍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 밑에서 들려주리.

여름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치라.
나의 발 끝에서 머리 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消去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바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산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명령을 내리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에 뿌려진 생목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 숲속을 거니는 새벽의 아들

겨울산을 자주 오른 적이 있었다. 그해 겨울 관촉사灌燭寺 반야산般若山을 자주 오르며 무언가 규정할 수 없는 정열과 싸웠던 때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灌燭寺’란 이름처럼 나의 내면을 조용히 밝히는 일이었던 것 같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 막연한 정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마치 신열身熱이 난 것처럼 영혼이 아팠기 때문이다. 겨울 산비탈에 얇게 쌓인 눈을 밟으며 혼미하고 어지러운 정신을 가다듬을 때쯤 조정권의 시편들을 만났다. 그 이후로 조정권의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와 [산정묘지], [신성한 숲] 등은 두고두고 읽어가던 내 시집 목록이 되었다. 이 세계에 대한 막연한 저주와 의미없는 자학이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을 배우는 도정에 놓여지게 된 것이다.
“숲속을 거니는 새벽의 아들, 빛의 신랑”은 조정권의 말이다. 그의 시는 새벽 동살을 기다리며 비밀의 숲을 소요하는 단독자單獨者의 언어이다. 고요한 성찰 가운데에 매운 채찍을 휘갈기는 언어이다.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에 서는 것”으로 잠든 정신을 채찍질했고, 방황 속에서 치렀던 긴 망상의 언어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내었다. 스스로 도취하지 않기 위해,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지치고 지친 불면의 밤과 나날의 어둠 속에서 영혼의 향기를 느끼기 위해 이 시를 읽었다. 관념이 수사의 치장이 아니라 내면의 고귀한 고백이며, 절박한 물음이며 또한 고통임을 이 시를 통해 희미하게 보였다.
조정권은 얼음 속에 핀 꽃잎의 산책자이다. 그의 정열은 차가운 이성 속에서 시원始原과 본질을 탐하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내게 남아 있다.

- 현대시, 2007년 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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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뱅이꽃

시詩 2007. 2. 19. 14:34
 

앉은뱅이꽃



이 재 훈



일부러 가부좌를 틀 필요는 없다 당신은 감각의 수행자, 당신의 세상은 불구의 시간이 시작되는 때, 눈을 감아도 또렷이 기억나는 게 있다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반했던 제비꽃 향기처럼 당신, 들릴 듯 말 듯한 냄새 당신의 냄새를 들었다 노란색 코트가 아니라 감미로운 목소리가 아니라 당신의 발자국처럼 저 멀리서부터 두근거리는 냄새 눈을 감아도 또렷이 기억나는 게 있다 그러나 당신의 향기는 잠시 머물렀다 사라졌다 부재(不在)는 그리움의 양식 바이올렛 향기로 내 몸이 건반처럼 울렸지 잠시 뿐이었지만, 덤불 속에서 상채기를 핥다가 취한 당신의 냄새 적어도 당신의 몸에서 육식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다른 꽃으로 환생한다해도 이미 알았던 것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음을*



*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다 :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이리언(Alien)


 

시작메모


향기는 마법의 물질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 감각의 기억은 오래도록 남는다. 향기에 의해 생성된 그 기억은 이전의 시간을 재생시킨다. 또한 그 시간과 함께 나누었던 감정의 세밀한 떨림들까지 느끼게 된다. 이러한 감각의 체험은 주관성에 의존한다. 같은 향기라도 그 향기가 거느렸던 사연과 순간의 각별함으로 인해 범상치 않은 감각체험을 하는 것이다. 앉은뱅이꽃은 제비꽃의 다른 말이다. 금방 날아가버리는 속성으로 귀했던 제비꽃의 향은 매력적인 냄새였다. 바이올렛향을 가진 앉은뱅이꽃의 불구성(不具性)이 감각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하게 했다.

- 2007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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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한이 들고 입술이 부르터서 몸뚱이가 버거울 때였지. 꿈을 꾸었어. 갑자기 뒷덜미가 서늘해져 지나온 것들을 보지 않으려 캄캄한 앞만 보았지. 저 앞의 세상엔 어떤 동물들이 살고 있을까. 한 발자국 내딛을 때, 내 몸에 사박사박 모래알 밟는 소리가 났어. 오, 누군가가 내 몸을 질근질근 밟고 있었지.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아침마다 청량리에서 신촌으로 가는 131번 버스를 타지. 어쩌다 예쁜 여인이 옆에 앉으면 주문을 외지. 너는 내 아들을 잉태했다. 새벽에 술에 취해 방문을 열고 불을 켜면 섬뜩 놀라. 내 바지에 피가 흘러내리고, 아침에 보았던 예쁜 여인이 아기를 안고 있어.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뒤를 돌아보면 내 목에 십자드라이버를 꽂고 있는 사람이 보여. 당신을 사랑해. 어지러워, 온 몸에 피가 타오르지. 독한 감기약을 먹고 아침이 되면 131번 버스를 타지.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내 몸이 가벼워져 바다 위를 걷는다면, 당신의 손이 내 몸에 닿을 때 흐르는 피가 멎는다면, 그걸 누구에게 고백해야 할까.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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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곳을 찾았을 때
모든 시간은 무너지고
가없는 기억의 언덕도 무너지고
또닥또닥,
희미한 발굽 소리만 들렸는데

2.
잠든 말, 묵상도 없는 말들이 벽에 붙어 있다 너의 소리를 들으려고 널 만진다 그제야 너는 벽화가 된다 널 만지면 황소가 되었다가 사슴이 되었다가 초원을 가로지르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 타 노래를 부르는 추장이 된다

3.
말은 내게 뱃속을 열어 보여준다
건강한 줄기를 먹고 자란 말
빨갛게 화장(化粧)한 말의 뱃속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뱃속에 질서있게 자리잡은 내장의 곡선에
손가락을 갖다 대본다
아프다, 말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뱃속에서 말의 새끼들이 뛰어나온다

4.
말이 쏟아져 내린다 초원에 내려 거칠게 달려나간다 내가 지겹게 머무는 도시의 거리까지 와서 내 머릿속을 후두둑후두둑 내달린다

5.
밤이 되면 나는 시를 쓴다
거리의 곤고함에 대해
꽃이 침묵하며 피는 이유에 대해
아는 척 쓰다가 말다가 결국
“말은 태양을 잉태했다”고 쓰다가

6.
믿음엔 증거가 있어야 한다
내가 검은 말을 타고 요정의 검을 차고
맥베스처럼 “눈 앞의 이것이 나인가” 되뇌이며
내 목을 자르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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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연못

시詩 2006. 12. 28. 00:06


내 몸이 뜨겁다
아스팔트가 뒤집혀져서 내 발목을 챈다
나는 문명의 미끼인가
벗어날 수 없는 시간의 바퀴
살이 짓이겨지는 줄도 모른 채
실실 웃고 다닌다
이 불안이 즐겁다
이젠 원시의 기억이 내겐 없다
내 몸의 불은
나무의 몸이 낸 게 아니다
광고 전단지나 두꺼운 여성지
반들반들 윤이 나는 오색의 컬러 잉크지가
매운 냄새를 풍기며 피워낸 불
그러므로 내 불의 풍경은 낭만적이지 않다
습기 많은 푸석한 불
불을 품고 날고 싶다
평생 걸리는 긴 겨울을 건너고 싶다
노동하지 않는 내 몸을 가릴 외투를
꼭 껴입고
유리처럼 선정적인 투명함을
성에로 담금질하고 싶다
그러면 나는 차가운 물의 시간에
발을 갖다 댈 것이다
얼음의 심장을 견딘
차가운 불이 되어
잔잔한 물 위를 떠다닐 것이다
이미 떠난 자들의 얼굴이
물 위에 가득 조각되어 있는
어느 시간의 틈을
고요히 건너갈 것이다
시와시학, 200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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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숲

시詩 2006. 11. 29. 15:24

― 兄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제야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무표정한 눈으로 거리를 바라보거나
구석진 골목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그
나는 이제 투사(鬪士)도 아니고 수사(修士)도 아니라던 그
훌쩍 겨울숲에 가겠노라고
버스터미널에 우두커니 서 있을 때
나는 오래도록 그의 등뒤를 서성거렸다
언젠가 술 취한 내 등을 두드리며
다 토해라, 있는 것 다 토해라고
그가 말할 때 나는 몰랐다
이미 목숨까지 다 토한 그를
그래서 끝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던 그는

겨울숲이 오히려 더 따뜻하다고 했다
풍성한 사연들이 모두 마른 채
앙상한 뼈들만 모여 서 있는
그곳이 더 뜨겁다고 했다
겨울숲에서 뜨겁게
뼈를 태우겠노라고,
이미 거죽만 남은 몸,
뼈까지도 아깝지 않다고
쓴 술을 들이키던 그를,
묘비도 없이 바람에 존재를 실어버리는 게
가장 행복한 결말이라고,
정말 시적이라고 말하던 그를
찾으러 겨울숲에 간다
신문에도 남지 않았던 그의 결말은
그가 진정 원하던 것이었다

_시로 여는 세상, 200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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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의 꿈

시詩 2006. 11. 8. 00:43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촛불도 아니고 감나무도 아니다
미끈한 자동차도 아니고
달콤한 솜사탕도 아니다
차갑고 텅 빈 사물에
쇳물을 들이붓고 싶다
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이었다
꿈을 꾸면
붉은 별 하나가 내게 떨어지는 사건이었다
손이 데일까 만지지도 못한 별이
마당에 내려와 날 또렷이 노려보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엎드려 울지 않겠다
슬픔을 우스운 몸짓으로 과장하지 않겠다
해거름에 사양(斜陽)을 보며 사흘을 울겠다
그러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
그 비밀의 성소(聖所)가 내 집이었다
소멸이
내 먹는 밥이었다

시와세계, 200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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