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매혹적인 시의 근원을 찾아서


이 재 훈


지난 호에 이어 소통을 주제로 한 두 번째 기획을 준비했다. 지난 호의 기획 의도는 2000년대 전후의 젊은 시인들을 둘러싼 논쟁을 중진 시인들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바라보는지 살펴보는 것이었는데, 이번 기획은 그 역으로 진행되었다. 즉 젊은 시인들이 어떠한 양상으로 중진 시인들의 시를 바라보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오늘의 한국시가 시와 독자와의 소통, 시인들과의 소통, 세대 간의 소통이 잘 안 되고 있다는 지적은 이미 본지 지난 호와 다른 지면들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이러한 소통의 정체는 각 세대가 가진 사회적 경험과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것은 자명한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문학 세대들은 이전 세대들의 문학적 성취를 섭렵하고 그 토대 위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젊은 시인들은 매혹적으로 읽은 중진 시인들의 시를 자신의 문학적 자양분으로 삼았으며 그 밑거름이 새로운 언어를 꿈꾸게 하는 힘이 되었다.

이번 기획은 세대 간 소통이 서로의 시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새로운 활로를 열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기획의 방식은 지난 호와 마찬가지로 진행되었다. 먼저 대표적인 젊은 시인들에게 인상깊게 읽은 중진 시인들의 시 한 편을 추천하고, 그 시에 대한 짧은 감상과 함께 다음과 같은 설문을 부탁했다.

1. 젊은 시인들의 시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 젊은 시인들의 시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3. 추천할 만한 중진 시인들의 시집이나 시가 있다면 써주시고, 그 이유를 간단히 써주십시오.
4. 현 한국 시단에는 세대 간 시적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앞으로 중진 시인들과 젊은 시인들 간의 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는 방법이나 의견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써 주십시오.

젊은 시인은 등단 10년 미만, 70년대 이후에 태어난 시인들로 한정지었다. 또한 본지에 최근 작품을 발표했거나 조명을 한 시인들은 필자의 중복으로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그렇게 우리가 청탁한 31명의 시인은 아래와 같으며 원고를 보내온 시인은 16명이다.

김근, 문혜진, 이재훈, 김민정, 류외향, 진은영, 이영주, 최치언, 박성우, 이승원, 이창수, 장이지, 정영, 길상호, 박진성, 신동옥, 신혜정, 안현미, 유형진, 윤성택, 임현정, 오은, 조동범, 최승철, 한용국, 김안, 김경주, 박상수, 박판식, 송승환, 윤석정

당분간 산문청탁을 보류해 달라고 개인적인 부탁을 한 몇 시인들은 청탁목록에서 제외하였다. 원고청탁은 먼저 이메일로 청탁서를 보낸 후 집필여부를 이메일과 전화로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 최종으로 전화를 통해 집필여부를 확인하였다. 이렇게 메일을 통해 청탁한 이유는 집필에 대해서 최대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또한 원고 집필을 하겠다고 밝힌 몇 시인들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집필을 포기하였다.

원고청탁에 응하지 못한 시인들은 외국에 체류해 있거나 국내 여행 중인 시인들이 많았다. 또한 지난 호에서처럼 산문에 대한 부담감, 다른 지면과의 겹치기 청탁 등으로 집필이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지난 호에서처럼 시인을 선정하는 과정에 대한 부담감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번 기획의 열여섯 시인들의 글을 통해 지금의 한국시가 존재하는 기원을 한 단면으로나마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시인들은 중진 시인들의 시를 문학의 교과서로 삼아 읽고 감동하였으며 전파했다. 그 시적 편력과 사연들을 통해 새로움의 원형들을 한 번 예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혜진은 최승호의 「뭉게구름」을 통해 사물의 유연함을 말한다. 구름의 운명과 먹구름처럼 드리워진 인간사의 고통, 생의 덧없음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시를 존재의 자기변신술이라 칭하며 꼼꼼히 읽고 있다. 이재훈은 조정권의 「산정묘지」를 읽었다. 「산정묘지」 연작은 존재의 본질을 상징과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한 시이다. 조정권의 시를 새벽 동살을 기다리며 비밀의 숲을 소요하는 단독자單獨者의 언어이며 고요한 성찰 가운데에 매운 채찍을 휘갈기는 언어라고 말한다. 이승원은 오규원의 「빈약한 상상력 속에서」를 통해 문화적으로 빈약한 상상력에 대해 말한다. 맹물 사랑을 신봉하는 존재들은 자신의 구린내를 대면하고 직관하는 일을 회피한다. 대부분의 미망과 비극은 비좁은 사유가 부른 그릇된 가치부여와 믿음에서 기인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이창수는 오탁번의 시 「마늘」을 감상하면서 자기를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방법은 매운 맛을 잃어버린 시인 자신을 비판하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살아오면서 점점 본래의 모습에서 퇴화되거나 변절해 버리는 현대인들을 마늘을 통해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장이지는 귀찮음의 미학을 얘기하고 있다. 김사인의 시 「장마」는 세공의 흔적이 역력해서 거기다가 미학이라는 수식을 더해주고 싶은 귀찮음의 미학을 보여주는 시라 말한다. 속도의 시대 속에서 매력을 찾을 수 있는 시이다. 길상호는 이재무의 「국수」를 읽으며 어린 시절 국수에 대한 기억들을 떠올린다. 길상호는 서민적이고 소박한 음식에 사로 잡히는 것처럼 시 또한 흔하고 일상적인 제재를 통해 깨달음을 주는 시를 좋아한다고 한다. 시인은 이재무의 시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통해 가족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박진성은 송찬호의 찔레꽃에 대한 추억이 있다. 시에 대한 얘기로 통음을 했으며 필사를 했고 눈물을 자아냈던 시가 박진성에게는 송찬호의 시다. 한 개인의 연애담이 찔레꽃과 눈썹과 사기와 뱀을 거쳐 野史로 태어나는 광경을 다시 한 번 시인을 통해 감상해 본다. 박판식은 이문재의 「판화」를 중심으로 80년대 시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특히 강창민의 「아름다운 노래」, 배진성의 「길이 있는 풍경」, 장경린의 「허리 운동」 세 편의 시에 대한 감상을 함께 하며 저물녘의 황혼을 떠올리고 있다.

유형진은 송재학의 「하루 종일」을 읽는다. 시를 읽으며 뿌리째 뽑힌 은행나무 대신으로 벌을 서는 시인을 상상해 본다. 또한 나무의 눈을 빌려 살아 왔던 시인의 마음나무의 눈을 가진 채 짐승의 외로움을 견디며 살아 와야 했던 시간들을 생각해보고 있다. 윤성택은 김광규의 「좀팽이」를 읽으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 콧물이 된 표정을 애써 감추듯 이렇게 우리는 좀팽이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얘기한다. 그에게는 좋은 시는 시대가 변해도 그 의미와 깊이가 달라지지 않는다. 1980년대의 현실이 2007년에 와서도 뜨겁게 읽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는 말로 이 시의 매력을 표현하고 있다. 임현정은 이하석의 「밥상」을 읽었는데, 이 시를 읽을 때 따뜻한 밥김이 나를 에워싸는 것 같다고 한다. 이하석의 시를 통해 인간에 대한 시인의 따뜻한 시선과 삶을 표현하는 묘사의 힘을 느꼈다고 전한다. 이하석의 시는 임현정에게 한때 치기로 썼던 자신의 시들이 부끄러워지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최승철은 이승훈의 「그녀의 방」에 대한 시적 체험을 전하고 있다. 활발한 시행 전환, 거침없는 시상 전개, 단순한 듯하면서도 복잡한 알레고리 등이 좋아하는 이유의 목록이다. 또한 화려한 단어를 동반하지 않아도 화려해지는 이승훈의 시적 방법론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특히 「그녀의 방」은 이승훈의 시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시라고 한다.

송승환은 이성복의 시를 통해 부정 정신과 산문의 리듬을 말하고 있다. 송승환은 이성복의 시를 처음 읽었던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아버지에게 개새끼 건방진 자식,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라고 말하는 것도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권력에 대한 부정의 정신은 시를 노래로 규정지으려는 전통적 태도를 부정하고 산문이 구가할 수 있는 시적 리듬의 절정을 시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확립한다고 한다. 한용국은 황지우를 통해 재래적인 서정시의 문법이 파편화된 현실에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한 권의 시집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문제적인 시인이라고 말하는 황지우 시인의 시를 통해 존재의 가려움을 해소할 수 있다고 한다. 김안은 장정일의 「삼중당 문고」를 읽으며 스무 살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장정일의 시집을 만나면서 동질감을 느꼈고 당시 많은 양의 시집을 읽었던 추억을 떠올린다. 그 당시 읽었던 시집들이 공룡같이 기괴하고/우주같이 신비로웠고, 시인들의 관, 무덤과 같이 느껴졌다는 장정일의 말처럼 읽는 이들에게 평안한 무덤이 되는 시의 거처가 삼중당 문고라고 전한다. 윤석정은 정양의 「어금니」를 읽는다. 시인은 치통으로 고생했던 기억과 미당 선생께서 돌아가신 날의 사연을 통해 험한 세상을 견디는 쓸쓸한 영혼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을 통해 삶에 밀착된 언어, 언어에 밀착된 삶을 살아가는 시인은 삶을 시처럼, 시도 삶시인의 올곧은 시 정신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이번 기획에 옥고를 보내주신 젊은 시인들께 감사의 말을 드린다.

- 현대시 2007년 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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