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시집'에 해당되는 글 1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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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1.10.04 이재훈 시집_ 명왕성 되다(민음사, 2011)
  3. 2007.05.28 빗소리
  4. 2007.03.15
  5. 2007.03.02 빗소리
  6. 2007.01.14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7. 2007.01.14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8. 2007.01.05 Big Bang
  9. 2006.02.14 결별의 노래
  10. 2006.02.14 쓸쓸한 날의 기록
  11. 2006.02.14 햇살의 집
  12. 2006.02.14 일식
  13. 2006.02.14 순례
  14. 2006.02.14 수선화
  15. 2006.02.14 빌딩나무 숲
  16. 2006.02.14 사수자리
  17. 2006.02.14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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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시원(始原)을 응시하며 세속 도시를 순례하는 시인 이재훈

슬픔의 소진마저 지난 후에야 비로소 얻는 소멸의 미학



“이재훈 시의 시공은 광대하다. ‘빌딩나무 숲’인 이곳에 사막과 우주와 원시의 시공을 겹친다.”(김혜순 시인), “그의 시는 오늘의 시에 대한 새로운 보고서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조정권 시인)라는 평을 받은 이재훈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가 출간되었다. 도시의 생태와 자신의 내면을 결합하며 한 시대의 쓸쓸한 풍경을 기록한 첫 번째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로 큰 주목을 받았던 그는, 이번 시집에서 소재와 착상의 범위가 더욱 넓고 풍요로워졌으며, 다양한 시편들을 통해 호흡과 리듬도 점점 확장되고 있다.

이재훈 시인에게 도시는 늘 새로운 탐구의 대상이다. 욕망으로 가득한 도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도시를 성찰한다. 시집 곳곳에서 지하철, 버스, 독서실, 저녁의 거리, 도서관, 골목 등 시인의 일상 공간들이 직접 드러나는데, 존재의 시원(始原)에 가닿고자 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도시 속에서 환상적이고도 동화적인 색채의 공간을 펼쳐 놓는다. 그 도시 속에서 “육십억 분의 일일 뿐”인, 그저 “먼지”처럼 “아무것도 아닌” “매일 출근하는 폐인”들의 고단한 삶이 펼쳐지며, 시인은 그 속에서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을 진하게 그려 낸다. 시집 안에서는 끊임없이 “일용근로자의 피로와 백수건달의 자책과 독학자의 자부심과 시인의 기상”이 한데 배어나고 있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명왕성 되다(plutoed)’라는 말은, 명왕성이 태양계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한 사건에 빗댄 신조어다. 익명과 소외, 그리고 기계적 규칙성이라는 도시 생활자의 삶에서 그는 ‘명왕성’이 됨으로써 스스로 궤도를 벗어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끊임없이 구원을 꿈꾸고 있는데, 그에게 ‘구원’은 곧 ‘근원’이다. 이재훈의 시에서 근원적인 곳은 머나먼 어딘가가 아닌, 세속 도시의 구석구석에 내재되어 있다. 이 도시 안에서 시인은 세속적인 이미지 속에서 성스러움을 체험한다.


이재훈

1972년 강원 영월에서 태어났다. 1998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가 있다.


■ 편집자 리뷰

침묵과 고요의 깊고 너른 ‘울음’을 통한 거대한 ‘울림’


첫 번째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가 하늘 위에서 부르는 노래, 특히 ‘영가(靈歌)’의 세계였다면,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는 하늘과 땅의 중간쯤에서 부르는 ‘침묵’과 ‘고요’의 깊고 너른 ‘울음’을 통한 거대한 ‘울림’이다. 이재훈 시인에게 도시는 늘 새로운 탐구의 대상이다. 숨이 막히고, 끊임없이 옥죄는 공간이지만, 어쨌든 발 디디고 살아가야 할 공간인 욕망의 도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도시를 성찰한다. 「新林洞」, 「매일 출근하는 폐인」, 「비비디 바비디 부」,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등의 시에서 시인의 일상 공간들이 직접 드러나는데, 존재의 시원(始原)에 가닿고자 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도시 속에서 환상적이고도 동화적인 색채의 공간을 펼쳐 놓는다.


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 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잦아들고

온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나비 한 마리.

공중으로 날아간다.


풀잎이 몸을 연다.

―「남자의 일생」


이 시는 애벌레가 나비로 변화하는 과정의 알레고리 속에 처절한 생존 게임과도 같은 인생의 과정 전체를 담아내며, 이 시대에 남자로 살아가는 것의 고충을 우회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의욕적으로 넥타이를 매고 미소를 연습한다. 수많은 거울 앞의 표정들. 낯선 얼굴, 낯선 침묵.


다른 말은 없다. 너를 자위케 하던 기호들. 새, 별, 그리고 꽃과 나무. 아무 생각 없이 잠들 수 있었던 그대, 라는 말을 향해.


(중략)


나는 육십억 분의 일일 뿐. 페트병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맥주 캔. 먹다 남긴 컵라면. 참기 힘든 소음. 역겨운 화장 냄새와 비둘기 똥 냄새로부터.


계곡의 하얀 물보라를 헤치고, 난파된 얼음 위에 올라서 저물어 가는 사람들의 삶을 감상하고 싶다. 그러면 아주 쓸쓸하겠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아무도 없이 고독하겠다.


(중략)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의 형벌이었다.

―「매일 출근하는 폐인」


이 시를 통해 우리는 견고한 생활의 필연적 조건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비관’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스스로 정확히 ‘인지’한다. 이 인지의 결과는 바로 다음과 같은 시에 나타난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 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 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명왕성 되다(plutoed)」


이 시의 제목이자,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명왕성 되다(plutoed)’라는 말은, 명왕성이 태양계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한 사건에 빗댄 표현인데, 사물이나 사람이 갑자기 평가절하 되거나 혹은 소외되는 것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이 시의 배경은 규칙적인 리듬의 기계 소리만 들리는 2호선 지하철 안으로, 화자는 익명과 소외, 그리고 기계적 규칙성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이것이야말로 도시 생활자의 정신적 삶을 규정하는 필연적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이 시의 화자는 바로 그런 제약들로부터 비켜서고자 눈을 감는다. 그는 ‘첩자’나 ‘폭풍’과 같은, 기계적 삶의 리듬을 뒤흔들 파국을 스스로 필요로 하고 있다. ‘명왕성 되다’는 말은 즉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궤도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재훈의 시에서 근원적인 곳은 머나먼 어딘가가 아닌, 세속 도시의 구석구석에 내재되어 있다. 시적 자아는 세속 도시의 세속적인 이미지 속에서 성스러움을 체험한다. 지하철의 문은 계속해서 열리지만, 우리를 진정한 삶으로 인도할 출구는 없다. 하지만 시인은 그 공간 안에서 출구를 찾는 방법을 터득했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소멸의 순간을 꿈꾸다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중략)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다.

장 그르니에가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빛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다.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은,

그 짧은 시간만큼은 황홀하겠지.

언덕이 있는 곳은 월곡(月谷),

달빛이 있는 골짜기다.

언덕을 오르고

또 한 언덕을 오르면

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그 햇살의 순간처럼.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키르케고르가 유한과 무한, 필연성과 가능성의 문제를 종교로 풀어냈다면, 그는 이 문제를 종교가 아닌 시로 풀어내고 있다. 그는 유한이 무한의 반대가 아니라, 무한의 일부임을 깨닫고, 시적 상상력을 통해 유한한 시간을 펴서 무한한 시간에 잇대어 유한성과 필연성을 뛰어넘는다. 그의 초월은 현실을 탈출하고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초월적 공간으로 바꿔 놓는다. 또한 그는 끊임없이 구원을 꿈꾸고 있는데, 그에게 ‘구원’은 곧 ‘근원’이다. 이 시집은 바로 그 ‘근원’, 즉 존재의 시원에 대한 물음과 상상력을 통해 유한과 무한, 필연성과 가능성의 문제를 풀어내고자 하는 시적 고민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시에서는 기계적인 ‘심장’과 존재의 비밀을 깨칠 ‘순간’의 대립이 선명하게 이미지화 된다. 그리고 다시 그것은 퇴근길의 행선지인 월곡과 장 그르니에의 미적 처소인 산타크루즈의 이미지로 보다 또렷하게 구상화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제 월곡과 산타크루즈의 대립이 아니라 월곡을 산타크루즈로 ‘발견’할 수 있느냐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촛불도 아니고 감나무도 아니다.

(중략)

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이었다.

(중략)

그러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

그 비밀의 성소(聖所)가 내 집이었다.

소멸이

내 먹는 밥이었다.

―「연금술사의 꿈」


그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이 소멸의 순간임을 믿는다. 그러므로 그는 끊임없이 소멸을 꿈꾼다. 우주 속으로, 거대한 대황하 속으로, 허공 속으로,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침묵 속으로, 빛 속으로, 영원 속으로 흔적조차 없는 완전한 소멸을 꿈꾼다. “바람은 불어야 제 몸을 갖”고, “눈물은 흘려야 제 몸을 갖”(「비비디 바비디 부」)듯이 그는 소멸함으로써 비로소 제 몸을 갖는다. 그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처럼,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는 시인이다.


■ 작품 해설에서

 

이 시집의 기저를 맴도는 덩어리진 목소리는 일용근로자의 피로와 백수건달의 자책과 독학자의 자부심과 시인의 기상이 한데 배어나는 것이다. 시인의 소멸에 대한 열망은 슬픔의 내력을 시간의 이력으로 전화시키려는, 다시금 유한한 것들을 무한에 대고자 하는 상상적 결단에 의한 것이다. 소멸이 슬픔의 발견, 슬픔의 과장, 슬픔의 소진마저 지난 후에야 얻는 신명의 성소(聖所)라는 것, 그러니 근대인 키르케고르가 비약의 귀재라면 이재훈은 소멸의 총아다. — 조강석(문학평론가)

 

■ 추천의 말


이재훈은 중무장한 중세의 기사와 같다. 그는 영주에게 충성하지 않고 연인에게 헌신한다. 그러나 그 연인은 비밀의 화원에 은신해 있지 않고 시인의 갑주 속에 내장되어 있다. 시인은 연인을 위한 투쟁에서 연인을 훼손시키고야 마는 운명에 처한다. 그것이 이재훈이 파악한 현대 시인의 궁지이다. 자신이 보존할 가치를 기치로 내세울 때마다 그것은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와도 같이 부스러지고 문드러진다. 그러나 그 덕분에 우리는 진실 앞에 놓인 현실의 아득한 해자를 본다. 진정한 세계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말에 채찍을 가해야 한다. 언어의 기교는 현실을 일격에 무너뜨리기 위한 필사의 계책이다. — 정과리(문학평론가, 연세대 국문과 교수)


모든 사라져 가는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애련에 젖게 한다. 시인 이재훈에게 그 정조는 무척 각별하다. 지금은 사라진 고대 문명이나 사라져 가는 시원적 자연에 감응하는 그의 상상의 촉수는 매우 예민하다. 문명의 늪을 거슬러 태초의 궁륭으로 다가서는 소리의 환(幻)이 웅숭깊다. 때로는 혼돈으로 들끓고, 때로는 명상으로 침묵하는 그 소리의 환은 격렬한 듯 단정하고, 단정한 듯 격렬하다. 그 소리의 환의 스펙트럼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에 거역하거나 크게 순응하는 연금술사의 꿈의 폭과 깊이를 가늠케 한다. 사라져 감 혹은 부재라는 그리움의 양식을 통해 이재훈은 존재의 시원적 리듬을 새삼 환기한다. 그리고 헝클어진 동시대의 존재의 리듬에 반성적 감촉을 제안한다. 큰 슬픔이라는 통과제의를 거친 우리네 존재의 신명은 아득한 듯 가깝고, 오래인 듯 여기이고, 사라져 가는 듯 되돌아온다. — 우찬제(문학평론가, 서강대 국문과 교수)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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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

시詩 2007. 5. 28. 10:21

메마른 땅에 아카시아 꽃잎 떨어져요. 질긴 가지 끝에서 제 몸을 뜯어내는 소리, 천둥치는 밤. 당신은 그 아픔을 숨기고 투명한 몸으로, 꽃잎처럼 경쾌하게 내려요. 낡은 군화를 신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앙상한 가지를 꺾어 가며 걸었어요. 흙발로 저벅저벅 아스팔트 위를 걷다가 문득, 당신을 봅니다. 사납고 포악한 걸음걸이 사이로 보이는 당신의 알몸. 밤이 되어도, 이별이 지나도, 당신의 몸이 온 사방에 닿는 소리 들려요. 당신이 울고 있다 생각했지만, 실상 당신은 아무 말 없어요. 아무 몸짓도 없어요. 잠시 침묵.

몸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요.
서러운 아픔도 참, 아름다워요.

----------------
⎗ 도시에서 한 시간을 걷더라도 흙을 밟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도시의 도로는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꽃비가 내리는 요즘만큼은 우리가 사는 이곳이 ‘메마른 땅’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어서 위안을 받는다. 도시가 자연과 자연스러운 것들을 쫓아내고 시멘트로 장악해 버렸다 할지라도 봄바람과 비를 따라 내리는 꽃비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 마음의 삭막함을 안아서 달래준다. 이재훈 시인의 「빗소리」는 마치 시멘트 포도에 내리는 꽃비처럼 여겨진다. 이재훈 시인의 「빗소리」를 읽으니, 시를 해석하는 일을 하거나 딱딱한 인식의 시를 쓰는 필자로서는 잠시 부끄러워진다. 시인의 작품이 내게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감성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거나 현상을 바라보는 데 서툴다. 내게도 ‘빗소리’를 ‘서러운 아픔’으로 감각하던 때가 있었던가? 이재훈 시인은 「빗소리」에서 의미상의 대구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화자는 자신과 ‘당신’을 대조시켜서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대상인지를 드러낸다. 화자는 낡은 군화를 신었으며, 앙상한 가지를 꺾어들었고, 흙발이고 포악한 걸음걸이를 가진 사람이다. 반면에 ‘당신’은 투명한 몸과 꽃잎의 경쾌함을 지니고 있다. ‘당신’은 연약하고 부드러운 알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아스팔트 위에 내리는 빗방울 같은 이다. 화자가 ‘당신’을 아름답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자신의 몸으로 감당하기 힘든 아픔을 겪으면서도 “아무 말 없”이, “아무 몸짓도 없”이 메마르고 딱딱한 아스팔트를 적시고 안아주기 때문이다. 빗소리는 아스팔트 같은 화자의 가슴과 「빗소리」를 읽는 이의 마음자리에 “서러운 아픔”으로 내려와서 따스하게 안아준다. ‘당신’의 “서러운 아픔”을 아는 자 역시 ‘당신’만큼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겠다.

- 조해옥(문학평론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7년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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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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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사 2007. 3. 15. 11:33

[경남신문 / 시가 있는 간이역 12] 눈-이재훈
 
 
 
 
눈 / 이재훈

눈을 밟는다
눈이 시린 풍경을
꾹꾹 밟는다
그러나 눈은
온전히 밟혀지지 않고
자꾸만 발등 위로
심지어 무릎까지
올라온다
제 존재를
떠올리려 한다
덮어야 할.
밟혀야 할 운명을
내 발걸음에 의탁한 채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눈이 떠올라
내 발목을 쥐고
너도 나처럼
떠올라라
떠올라라
머리 위까지
눈이 날린다

-이재훈. <눈> 전문.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2005)에서

--------------------------
▲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상이다. 눈이라도 내려 덮어주었으면 좋겠는데. 눈 내리지 않으니 눈 대신 눈에 대한 시 한 편 읽어보자. 세상길이 아무리 탁류라 해도 멈출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다리 아파도 함부로 쉴 수도 없는 것이 우리네 길 위의 삶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조용한 혁명’이다. 섬세함이다. 시인의 시선을 보라. 내리는 눈이 아니라 쌓여 밟히는 눈을 주목하고 있다. 그리하여 ‘밟혀야 할 운명’을 가진 눈이 밟는 자의 힘 반동을 이용해 위로 떠오르는 것을 본다. 아름다운 눈의 혁명. 우리도 가만히 속삭여 보자. 떠올라라. 날아올라라. 머리 위까지! 그러면 우리 삶의 바닥 슬픔이 세상 끌고 가는 힘이란 걸 알 수 있지 않을까. - 배한봉(시인. 《시인시각》 편집주간)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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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

시詩 2007. 3. 2. 13:14



메마른 땅에 아카시아 꽃잎 떨어져요. 질긴 가지 끝에서 제 몸을 뜯어내는 소리, 천둥치는 밤. 당신은 그 아픔을 숨기고 투명한 몸으로, 꽃잎처럼 경쾌하게 내려요. 낡은 군화를 신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앙상한 가지를 꺾어가며 걸었어요. 흙발로 저벅저벅 아스팔트 위를 걷다가 문득, 당신을 봅니다. 사납고 포악한 걸음걸이 사이로 보이는 당신의 알몸. 밤이 되어도, 이별이 지나도, 당신의 몸이 온 사방에 닿는 소리 들려요. 당신이 울고 있다 생각했지만, 실상 당신은 아무 말 없어요. 아무 몸짓도 없어요. 잠시 침묵.

몸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요.
서러운 아픔도 참, 아름다워요.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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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0) 2007.01.14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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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한이 들고 입술이 부르터서 몸뚱이가 버거울 때였지. 꿈을 꾸었어. 갑자기 뒷덜미가 서늘해져 지나온 것들을 보지 않으려 캄캄한 앞만 보았지. 저 앞의 세상엔 어떤 동물들이 살고 있을까. 한 발자국 내딛을 때, 내 몸에 사박사박 모래알 밟는 소리가 났어. 오, 누군가가 내 몸을 질근질근 밟고 있었지.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아침마다 청량리에서 신촌으로 가는 131번 버스를 타지. 어쩌다 예쁜 여인이 옆에 앉으면 주문을 외지. 너는 내 아들을 잉태했다. 새벽에 술에 취해 방문을 열고 불을 켜면 섬뜩 놀라. 내 바지에 피가 흘러내리고, 아침에 보았던 예쁜 여인이 아기를 안고 있어.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뒤를 돌아보면 내 목에 십자드라이버를 꽂고 있는 사람이 보여. 당신을 사랑해. 어지러워, 온 몸에 피가 타오르지. 독한 감기약을 먹고 아침이 되면 131번 버스를 타지.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 내 몸이 가벼워져 바다 위를 걷는다면, 당신의 손이 내 몸에 닿을 때 흐르는 피가 멎는다면, 그걸 누구에게 고백해야 할까.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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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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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곳을 찾았을 때
모든 시간은 무너지고
가없는 기억의 언덕도 무너지고
또닥또닥,
희미한 발굽 소리만 들렸는데

2.
잠든 말, 묵상도 없는 말들이 벽에 붙어 있다 너의 소리를 들으려고 널 만진다 그제야 너는 벽화가 된다 널 만지면 황소가 되었다가 사슴이 되었다가 초원을 가로지르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 타 노래를 부르는 추장이 된다

3.
말은 내게 뱃속을 열어 보여준다
건강한 줄기를 먹고 자란 말
빨갛게 화장(化粧)한 말의 뱃속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뱃속에 질서있게 자리잡은 내장의 곡선에
손가락을 갖다 대본다
아프다, 말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뱃속에서 말의 새끼들이 뛰어나온다

4.
말이 쏟아져 내린다 초원에 내려 거칠게 달려나간다 내가 지겹게 머무는 도시의 거리까지 와서 내 머릿속을 후두둑후두둑 내달린다

5.
밤이 되면 나는 시를 쓴다
거리의 곤고함에 대해
꽃이 침묵하며 피는 이유에 대해
아는 척 쓰다가 말다가 결국
“말은 태양을 잉태했다”고 쓰다가

6.
믿음엔 증거가 있어야 한다
내가 검은 말을 타고 요정의 검을 차고
맥베스처럼 “눈 앞의 이것이 나인가” 되뇌이며
내 목을 자르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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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Bang

시詩 2007. 1. 5. 17:22


태양이 어슷어슷 거리로 내려왔습니다. 쇼윈도우 마네킹들은 땀도 흘리지 않았지요. 누군가가 지나치는 여인에게 양공주 같다고 킬킬거렸습니다. 좌판 아저씨는 제 옷자락을 잡아끌고 빨간 비디오테이프를 꺼내주었습니다. 신문엔 사람들끼리 불총을 쏘아대고 있었습니다. 그런 거리를 걷다보니 어느새 제 겨드랑이에 털이 솟아 있었습니다.

무르팍에 힘이 없었습니다. 숱진 머리칼이 아버지를 닮았다지만 전 야틈한 언덕에서 방황했습니다. 아버지는 언덕을 넘으면 시온이 있다고 했었지요. 그때 태양이 제 몸에 달라붙어 명징한 기억들을 빨아먹고 있던 겁니다.

누구나 안식처를 찾아 세상을 헤매입니다. 눈 앞에 솔개그늘이 하나 있었고 그 속에서 저는 RPG게임을 했습니다. 제 몸의 태양열로 세계를 불질렀습니다. 펑펑펑 150억 광년의 우주에 불을 놓습니다. 세상에 불을 지른 자는 신이던가요?

가끔씩 가슴으로 소나기밥을 먹습니다. 온 몸에 자릿내가 풀풀거려도 괜찮습니다.

언덕을 넘으면 시온이 있구요. 그곳에 다가갈수록 수염이 자꾸 굵어집니다. 간간히 제 가슴에 나비물마냥 불덩어리들이 흩어 날아갑니다.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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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별의 노래

시詩 2006. 2. 14. 15:01
결별의 노래
― 성배(聖杯)를 찾아서

흰 눈을 만나기 위해
폭염을 견디었는지 모른다
먼 기억으로 터져나오는 울음 소리,
도시의 거리와 거리, 사람과 사람이
서로 엉켜 태연히 입 맞추는 소리,
이 땅은 풀벌레 소리도 서러움이다
마음이 없는 몸을 질질 끌고
미술관으로 가서 꽃 가득한 정물화를 본다
지지 않는 꽃, 수없이 그리워하고 약속했던 꽃
나는 그림 속의 화려한 상징에만 골몰했다
마음이 없는 몸을 질질 끌고
시위대를 지나고 학교를 지나고
걸음을 멈추게 했던 대형전광판을 지난다
역사도 없고 분노도 없는 권태로운 시간을
홑날로 벼리는 젊은 어깨의 그림자
그림자들이 서로 만나 어둠을 만들고
어둠을 지키기 위해 네온사인이 하나 둘 켜진다

어제의 일이 까마득하다
하룻 밤새
이마 위에 주름이 깊어 눈이 감기고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 친다
차가운 결정(結晶),
그 위에 금빛새가 발자국을 찍고
푸드득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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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날의 기록

시詩 2006. 2. 14. 15:00
쓸쓸한 날의 기록
― 정재학에게


무기력하다 했던가
마지막 술잔을 남겨 놓고
우리가 귀가하는 순간
하늘 아래 어디 쯤에선 꽃이 피었을 거다
꽃을 보고도 그걸 표현할 방법을 몰라
그렇게 헤매었던가 우린 한낱
일렉기타의 음률과 철지난 유행가에
더 감상적이었잖은가
네게도 말했지만
나는 백년의 무명을 견딜 것이다
그렇게 철없이 살리라

더 이상 만질 것도, 들을 것도, 말할 것도 없는 어둠
소주 몇 병 먹고 어둠과 말할 수도 있지만
그만한 자족으로 그 어둠 속
텅 빈 공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옥상 위에 올라가 날아 보자
네 몸이 땅에 떨어져 옆구리가 찢어지고
사람들의 입가에 오르내린다 해도
내가 믿는 예수처럼
그 옆구리를 기억할 수 있을까
어느 요절한 시인처럼
흉흉한 소문 속에 네 아픔이 기억될 수 있을까
다들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서정시인이 되고 싶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실패한 서정시인
서럽고 아름다운 자연은 이미 다 해먹고
남은 상상으로 목울대를 울리는,
이제 우리의 가난도 팔지 못하는,

거울 속에서 내 눈을 보았다
무얼 견디는 지도 모르는
몽롱한 얼굴이 날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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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의 집

시詩 2006. 2. 14. 14:59
햇살의 집


햇살이 술을 마신다. 거리는 방금 목욕을 한 것처럼 뽀얗다. 나는 버스 속에 앉아 술에 취해 이글거리는 햇살을 본다. 한 소녀가 버스에 오르며 묻는다. 이 버스는 천국으로 가나요? 햇살이 일그러지고 사람들이 비틀거린다. 광화문 네거리. 한 복판에 우뚝 선 이순신 장군 동상이 흠칫 움직인다. 칼자루를 놓고 싶다 후손들아! 꽃잎이 비틀거리며 이글거리는 햇살 속으로 날아간다. 차창 밖으로 흩날리는 꽃잎을 보며 사람들이 와 좋아한다. 나도 꽃잎이 되고 싶어요! 아가씨가 황급히 벨을 누른다. 햇살은 집이 없다. 사방 어디를 가도 햇살이 누워 있다. 나는 집 없는 햇살이 시큼한 술내를 풍기며 창가로 살짝 몸을 기대는 것을 보았다. 잠이 온다. 저 햇살에 집을 주고 같이 무너져 내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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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

시詩 2006. 2. 14. 14:58
일식


태양이여,
나는 이 큰 우주를 목놓아 불러본 적 없다
용기도 없이 컴컴한 방에 앉아
창틀에 놓인 꽃병들만 바라봤다
어느 날 나는
태양이여, 불러보고 싶었다
늘 곁불만 쬐며 속으로 옹알거리기만 하며
이 엄살의 통각(痛覺)을 갖게 되었다
태양이여, 부르는 순간
내 항문으로 뱀이 숫진 머리를 들이밀고 왔다
온몸이 뜨거워져서 태양에게 다가가도
뜨겁지 않았다
불타지도 않았다

뱀이 태양을 갉아먹을 때,
하나의 꿈틀거리는 숨이 우주를 갉아먹을 때,
네 소멸이 위대한 미학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어느새 뱀의 뱃속에 태양이 들어가 있다
고요 가운데 입을 열고 들어가
한 몸이 된
뜨거운 잉태

나는 큰소리로 태양이여, 불렀다
뱃속에서 울리는 뜨거운 공명

모든 사위는 어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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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시詩 2006. 2. 14. 14:51
순례


맨발로 유리밟는 소리를 듣는다. 유리의 머리가 내 발바닥을 찢는 수런거림을 듣는다. 수행자처럼 온 땅을 모두 밟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땅은 너무 넓어. 내 온기가 기댈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 그 사이의 위태로운 희망, 그리고 낯선 꿈들뿐.

내가 밟는 유리의 온기를 기억하고 싶었다. 그 뜨거운 감촉. 두꺼운 군살을 비집고 환한 몸으로 날 찾아오는 신비. 유리를 밟으며 축제를 연다. 붉은 포도주가 흐르는 식탁. 얼굴에 분칠을 하고, 혀에 피어싱을 하고, 히피처럼 연기를 피워올린다. 치렁치렁한 푸른 옷을 입고, 방안을 빙빙 돈다. 사각사각 유리가 몸 안에서 춤을 춘다. 두려움은 없다. 정작 두려움은 예언자의 눈, 인디언의 귀, 언고기를 사각거리는 알라스카의 몽골리안을 그리워하는 것. 生의 분노도 잊은 채, 태평하게 먼 이방의 전설을 말하는 내 입술.

맨발로 유리밟는 소리를 듣는다. 유리가 내 몸을 돌고 돌아 검붉은 내장을 모두 만난다면, 늦은 밤 가냘프게 흔들리는 마음까지 싹둑 잘라버린다면, 나는 백치가 되리. 내 몸이 된 유리. 너의 촉감밖에, 소리밖에 모르므로 나는 불구다. 저기 저쪽, 나처럼 맨발로 유리 밟으러 가는 젊음들. 땡볕 아래 꽃들이 붉은 햇살을 게워내고 있다. 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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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시詩 2006. 2. 14. 14:49
수선화


한밤중이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을 잘 무렵이면, 내 몸에 꽃씨 앉는 소리가 들린다, 간지러워, 암술과 수술이 살 부비는 소리가 사물거리며 온몸에 둥지를 틀고, 어머 꽃피네, 마른버짐처럼, 간지러운 꽃이 속옷 새로 피어나네, 내 몸에 피는 꽃, 어머 내 몸에 핀 꽃, 나르키소스의 영혼이 노랗게 물든, 수선화가 핀다, 아름다운 내 몸, 노랑 꽃파랑이 쓰다듬으며 어깨에서 가슴을 지나 배꼽으로 핀 꽃과 입맞추고, 시커먼 거웃 사이에도 옹골지게 핀 꽃대 잡는다, 아아, 아 에코가 메아리치네, 아름다운 내 몸, 거울에 비추어, 아아아 에코가 흐느끼네, 내 몸이 하분하분 물기에 젖네, 꽃들이 더펄거리며 시들어가네, 나르키소스여 내 몸에 오지마소서 五慾에 물든 몸 꽃피게 마소서
한밤중이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들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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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나무 숲

시詩 2006. 2. 14. 14:48
빌딩나무 숲


그 숲엔 풍경이 없다
나무와 새 온갖 풀벌레가 가득하지만
그들은 소리내지 않는다
사방을 둘러봐도 제자리만 지키고 선
가장 그럴듯한 포즈의 마네킹들
그곳엔 소리가 없다
어머니, 하고 부르면 침묵만 되돌아와
귓가엔 내 목소리만 자욱이 앉아 있다
숲속에서 숨이 막혀 한참을 내달았다
소리를 지르고 실컷 울고는,
그루터기에 앉아 부풀어 오르는 힘줄들을 만졌다
나는 나를 만지고 한없이 그리워져
나무에게로 간다
새에게 말을 건다
자애는 폐허, 라고 되뇌이는 시간들
내 힘줄을 내가 끊어도 고통스럽지 않은 곳,
그곳엔 아무도 없다
있다면, 침묵이 있다
아무도 면회오지 않는 숲에서
나는 이교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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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자리

시詩 2006. 2. 14. 14:46
사수자리


밤이 되면 말을 타러 갔었지
잠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깊은 동굴이었지
따뜻한 물 흐르는 동굴에서
서둘러 어둠을 껴입었지
찰박찰박, 어둠 사이로 붉은 등을 내비치는 탯줄
그 고요의 심지에 불을 당기고
입술을 오므려 휘파람을 불었지
나는 말을 부르는 소리부터 배웠지
탯줄이 사위를 밝히고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나는 편자를 갈고 있었지
등불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같았지
빛이 어둠을 갉아먹기 시작할 때
하늘에서 별이 하나씩 떨어졌지
말이 내 앞에 와서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지
떨어지는 별에 맞을까 두려워 말에 올라 탔지
어둠 속으로 달렸지
손엔 활이 들려져 있었고
다리가 말의 몸에 심겨졌지
말과 나는 한 몸이 되었지
그제야 예언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
어둠 속엔 많은 별이 있었지
십자가 없는 어둠,
그 불안한 시간 속에서
별을 보며 내 형상을 기억했지
가끔씩 구름에 가려 별이 안보이면
활을 쏘았지 허공 속에서 비명이 들려왔지
꺼지지 않는 촛불의 위태로움을
말 위에서 견디는 삶
그곳엔 조용한 잠도 없었지
열두 밤이 지나자 황도십이궁의 한 모퉁이에
나는 떨어졌지

새벽녘 어머니가 내 머리칼을 만지고 있었지
나는 쭈글해진 어머니 배에 귀를 갖다 댔지
말발굽 소리와 활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지
그 큰 어둠을 품고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가셨지
나는 어머니가 믿는 神의 안부가 궁금해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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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9월 28일 초판 발행
* 121*186|112쪽|7,500원
* ISBN 89-546-0046-8 02810
* 문학동네

1998년 『현대시』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명료한 이미지와 풍부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시들을 선보여온 이재훈 시인의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가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 실린 총 44편의 시들은 머릿속에 자유로이 떠돌던 혼돈을 지난 기억들에 하나하나 끼워넣는, 독특한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존재의 두려움에 이끌리다
이재훈의 시는 마치 불의 뜨거움을 알고도 그 바알간 빛에 이끌리는 것처럼, 두려움에 대한 내밀한 경험들을 꿈속에 혹은 현실의 어느 곳에 고스란히 드러낸다. “내 영혼이 하루 동안 수십 바퀴의 절망과 환희를 돌아오면, 하얀 꿈이 몇백 년을 지나 내 앞에 멈추곤 한다”(「어느 꿈길」)라고, “밤이 되면 말을 타러 갔었지/잠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는/깊은 동굴이었지”(「사수자리」)라고 고백하는 그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고독한 모습들은 ‘거리’라는 확장된 장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도시의 거리를 걷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내 기억을 훔쳐간 그 거리. 나는 땅바닥에 입술을 갖다대었어. 수많은 발자국들과 친해지고 싶었던 그 거리. 사람들이 뱉어놓은 말들이 거리에 흩날렸지. 말들이 글자가 되고, 무거운 책이 되었어.”(「거리를 훔치다」) 친해지고 싶던 곳이지만 그곳엔 툭 뱉어놓은 말들만이 흩날리고 그것들이 결국 무거운 책이 되어 자신을 힘겹게 만들고 마는 거리. 그 거리를 쏘다닌 발을 부끄럽다고 하는 고독과 나르시시즘에 대한 반성에 대해 문학평론가 유성호는 “그 ‘곤고함’과 ‘견딤’과 ‘비명’ ‘목마름’과 ‘배회’야말로 거리에서의 젊은 날을 함의하는 이재훈의 생의 형식들”이라고 이야기한다.
내면(자신)을 드러내는 또하나의 방법으로서 이재훈은 소리에 집중한다. “한밤중이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을 잘 무렵이면, 내 몸에 꽃씨 앉는 소리가 들린다, (……) 내 몸에 피는 꽃, 어머 내 몸에 핀 꽃, 나르키소스의 영혼이 노랗게 물든, 수선화가 핀다,”(「수선화」)라고 말하는 그는 자기 자신에게, 자신한테서 보여지는 또다른 누군가에게 몰입하는 나르키소스처럼 자신과 또다른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인다. 소리에서 말과 노래로 한 발자국 나아간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이재훈의 시는 세상에 대한 응시와 관찰 그리고 내면의 ‘신성(神聖)경험’에 대한 고백과 보고이다.

어느 순간, 시가 내게로 왔다
시가 ‘사랑의 대상이었다가 고백의 성소였다가 다시 불안의 자리로 옮겨가면서 여전히, 존재를 옥’죈다고 말하는 이재훈 시인은 자신의 시가 ‘반성’이 아닌 ‘고백’이라고 이야기한다.

‘고백’은 생각 이전에 눈물이 앞서는 경험이다. 상징이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 그 무엇의 생각. 내게 그것은 ‘흠’으로부터 출발된다. 어쩌면 내 말은 고백이다. 내 말이 간신히 시가 되는 이유는 눈물을 애써 감추기 위해 다른 부족의 동화(童話)를 꿈꾸기 때문이다. 먼 이방의 부족들 속에 들어가 말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꿈이다. 언제나 이곳에서 저곳을 그리워하기만 한다. ―‘시인의 말’ 중에서
어린 시절 말에 서투르고 머뭇거리는 시간조차 견디지 못해 속으로 말을 되삼키던, 여전히 낯선 이방인이라 자신을 여기는 시인에게 문학에의 욕망, 시원(始原)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고통과 아픔에 비명을 지르며 내달리는 이재훈의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는 시에 대한 새로운 자유로움과 감동을 던져주고 있다.

하프를 잃어버린 도시의 오르페우스……

우기(雨期)를 견디는 도마뱀의 숨소리처럼 처녀성을 지니고 있는 이재훈의 시는 오늘의 시에 대한 새로운 보고서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 이 신선함은 미래의 어디서 훈풍처럼 감지되는 것일까. 시인은 이 도시에서 온몸에 파란 움이 터진 시의 이파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삶을 노래하고 있다. 시 도처에서 발견되고 갈망되고 있는 낙원의식, 오염되지 않은 자신의 부족과 종족언어에 대한 향수. 그가 속해 있는 부족은, 최초의 말이 태어나 번식하는 마을이요, 밤하늘의 사수자리가 대초원을 이루는 곳이다. 그곳에 하프를 잃고 온 그는 이렇게 반문한다. ‘왜 하필, 이 늙은 땅에서 절 잃으셨나요?’ 챙 넓은 솜브레로 모자와 차우를 걸친 현대의 오르페우스처럼 그의 음조는, 도시의 우수와 자연의 웃음과 밤이 낳은 미아, 그리고 일상적으로 돌아갈 한 얼굴의 죽음이나 거북이처럼 엎드려 살면서 병들어가는 아침의 영광에 바쳐지기도 한다.
이 첫 시집에는 새로운 언어의 처녀성에 처음으로 눈뜬 자의 설렘과 감동을 포획하는 그 최초의 눈이 있다. 조정권(시인)

이재훈 시의 시공은 광대하다. 그 광대함은 ‘겹침의 시학’에서 비롯된다. 이를테면 시인은 ‘빌딩나무 숲’인 이곳에 사막과 우주와 원시의 시공을 겹친다. 그러자 몸의 결핍과 영어(囹圄)는 깊어지고, 영혼의 시공은 광대해진다. 깊음과 광대함은 ‘태양이여’라고 시인이 그 광대함을 부르는 행위, 시인의 시작(詩作)을 통해 시인의 몸 속 깊은 곳에서 겹쳐지고, 만난다. ‘태양이여’ 하고 시인이 외치자 시인의 ‘항문으로 뱀(태양)이 숯머리를’ 깊이, 뜨겁게 ‘들이민’다. 그리하여 광대함에 머리를 둔 시인이 잠자리에서 깨어날 때마다, 우주는 별자리 하나씩을 새로이 탄생시키고, 모세는 다시금 출애굽하며, 시인은 창세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마치 처음인 듯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인 이 시집의 시들을 쓰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김혜순(시인)

이재훈
1972년 강원 영월에서 태어났다. 1998년 『현대시』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현대시』 편집장, 『시와세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중앙대, 건양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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