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시인'에 해당되는 글 150건

  1. 2016.08.11 최초의, 최후의 노래들- 현대시와 신화적 상상력_ 김진희
  2. 2016.08.11 신과 함께_ 송종원
  3. 2016.08.11 돌의 시로, 물의 시로_ 장석원
  4. 2016.03.28 [문정희의 문학집배원] 이재훈, 남자의 일생
  5. 2015.02.06 김태형, 최치언 시인과
  6. 2015.01.29 바람의 계곡 라다크 투르툭에서의 이틀
  7. 2015.01.29 EBS 라디오 시콘서트
  8. 2014.07.31 빈이무첨의 시간_ 나민애
  9. 2014.03.21 대도시와 정신적 삶, 그리고 서정시_ 조강석
  10. 2014.02.21 이재훈의 <기타가 있는 궁전> 읽기
  11. 2014.02.13 꿈처럼 오련하게 사레들리네
  12. 2013.12.11 한 글자 사전 - 잎
  13. 2013.12.02 [경향시선 - 미래에서 온 詩] 동경(銅鏡)_ 박성준
  14. 2013.12.02 <명왕성 되다>, <재킷을 입은 시인> 영상 2
  15. 2013.12.02 [행사] 젊음, 시로 폭발하다
  16. 2013.11.15 황하의 순례자 (이재훈론)_ 김혜영
  17. 2013.09.27 힐링에 중독된 시대의 시_ 신진숙
  18. 2013.06.28 오늘의 시인_ <시작> 2013년 여름호
  19. 2013.06.17 ‘왕’과 ‘노릇’ 사이에서의 탈주, 시의 운명_ 전소영
  20. 2013.06.05 호젓이 몽해와 들길을 소요하는 석자_ 장석주 대담
  21. 2013.03.13 황하에서 돌까지
  22. 2013.02.04 신생의 사건으로서의 시_ 정과리
  23. 2012.12.07 대선과 크리스마스
  24. 2012.12.03 김태형 산문집 <작가와의 만남>
  25. 2012.10.18 육성(肉聲)을 얻기 위한 영혼의 드라마_ 이성혁
  26. 2012.10.17 윤성근의 시 <엘리엇 생각> 낭독
  27. 2012.09.26 문화예술위 <문학나눔> 패러디백일장 심사평
  28. 2012.09.05 행복한 문학편지_ 나 명왕성 되었어(이 땅의 소외된 이들에게)
  29. 2012.08.30 EBS 라디오 <시콘서트> 출연 (DJ 배우 강성연 씨와)
  30. 2012.08.07 [시현실 2012년 여름호] 집중조명 이재훈 화보

 

'이재훈_관련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통의 수신기(이재훈 작품론)_ 남승원  (0) 2019.01.22
  (0) 2017.10.26
신과 함께_ 송종원  (0) 2016.08.11
돌의 시로, 물의 시로_ 장석원  (0) 2016.08.11
<현대시작품상> 심사평  (0) 2014.12.10
Posted by 이재훈이
,

제15회 현대시작품상 특집 / 평론

 

 

 

신과 함께

 

 

 

송종원

 

 

 

 

 

낮은 목소리로

 

강물엔 사람들이 허우적대고 있다

스스로 얼음을 깨고 몸을 넣는다

숨이 끊어진 사람들이 둥둥 떠다닌다

노래도 없는 시간들이 사는 강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강물에 뛰어들어 허우적대는 사람들

― 「스틱스, 서울」 부분

 

이재훈의 시에는 잊지 못하는 자의 비극적 투쟁이 기록되어 있다. 시의 목소리는 느리고 또 느리게 허공에 울려 퍼지는데, 이는 마치 시간의 흐름과 동시에 형성되는 망각의 강의 유속에 저항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투쟁하는 자의 목소리에서 우리는 보통 재빠르고 활기찬 상태를 기대하지만 이재훈의 시는 그 기대를 뭉갠다. 그는 되도록 느리고 처연하게 노래한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상대하는 대상은 안달난 시간 속에 마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싸우는 대상은 ‘삶’이며, 그가 잊지 못하는 것은 ‘삶이 빚어내는 치욕’이다. 당연히 이 싸움은 단번에 승부가 결정되는 형태가 아니라 오래오래 지속되는 형국일 수밖에 없다. 이 지난한 싸움을 대하는 시인의 전략은 싸움의 구도 자체를 해체하는 듯한 느린 속도로 전투력을 상실한 자의 목소리를 전면화하는 방식이다. 시인은 처음부터 우리가 기대하는 싸움이 아니라 우리가 기대할 수 없는 싸움을 벌이려 했던 것일까.

느리고 나지막한 시의 목소리에는 사실 어딘가 체념과 후회의 분위기가 묻어 있기도 하다. 이재훈이 시에서 자주 활용하는 ‘~지’, ‘~네’라는 어미가 특히 그런 효과를 만든다. 이와 같은 어미의 조형에는 시인의 특별한 전략과 기호가 작용했을 테지만, 동시에 시인 자신 또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개입했을 것이다. 시의 언어는 시인이 쓰지만 시인을 넘어선 힘의 작용이 시어를 형성하기도 한다. 즉, 시인은 시의 전부를 결정하지 못한다. 시를 쓰는 순간 시인은 결정할 수 없는 일을 결정해야 할 때와 마주하게 된다. 이를 테면 시의 언어에 작용하는 시대적 정황의 압력이 그러하리라. 이 압력과 관련해서 특히나 주목해야 지켜보아야 할 지점은 이재훈의 시가 이전에 비해 현실에 대한 발언의 선명도가 높아진 것은 물론이고, 분열된 자아의 내적 혼돈의 목소리보다 외적 세계와의 교통이 원활해진 자아의 형상을 그려내는 시점에서 저 어조들의 조형이 활기를 더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의 끝에 이른 거와 같은 묵시록적 상황을 유모와 격앙된 어조를 섞어 희극적으로 상대하는 시적 전략이 익숙한 요즘에 이재훈 시의 어조는 확실히 특이한 데가 있다. 시인은 그 어조를 빌어 자신의 발언을 확보한 비극성을 더 진지한 것으로 만드는 중이다. 투박하게나마 저 목소리가 발언하는 내용과 관련한 시대적 분위기를 이름 붙여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확언 불가능한 시대 또는 희망 불가능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한 시에서 작금의 시적 현실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예언도 사라지고

초월도 사라지고

왜소한 지식을 입에 문 기사騎士들만 즐비한 곳

― 「녹색기사」 부분

 

[言]을 적절히 운용하는 기사(아마도 시인일 것이다) 대신에 마치 말[馬]처럼 재갈이 물린 기사만 있다. 게다가 이 기사가 물고 있는 재갈은 왜소한 지식이다. 그러니까 이 시의 언어는 지금, 시인이 시인을 부끄러워하는 중임을 증언한다. 확언이 불가능한 시대에 또는 희망이 불가능한 시대에 시인은 할 소임은 왜소한 지식의 대변이 아니라 불명료한 언어들 속에서 빛과 같은 명료한 초월성을 발견하는 일이고, 희망 불가능을 선포하는 말들 속에서 불가능을 능가하는 가능성을 예언하는 내기를 실험하는 일일 테니 말이다. 지식을 넘어서려는 내기와 그에 따른 발견이 전무한 시의 현실을 목격하며 시인은 시의 위상과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 번 되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이재훈은 특정 감정의 선언을 자신의 시의 자리로 몰아갔다.

 

부끄러움의 왕

 

바람이 불면 이별하겠다

바람이 온 몸을 휘젓고 나가야

간신히 나지막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황금의 입」 부분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 적은 윤동주의 시는 역사적 정황 안에서 파악할 맥락을 지니지만 그것은 또한 예술 일반이 특정한 시대를 넘어 보편적 가치로 상정할만한 정서적 내용을 포함한다(참고로 종교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시를 구원의 매개로 여겼던 윤동주의 시적 태도는 이재훈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다. 이재훈의 시를 근현대 한국문학사의 흐름에 위치시킬 경우 아마도 그것은 윤동주를 시작으로 한 시적 계열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부끄러운 자가 시를 쓴다. 달리 말해 시는 성찰한 사람의 목소리를 요구한다. 시와 성찰이라니, 웬 고리타분한 이야기인가라는 반응이 따를 만하다. 시라는 장르의 언어는 성찰의 여유를 통과하기 이전에 단말마와 같은 비명이며, 성찰이 불가능한 고통의 현시라는 이야기가 종종 전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생각은 시가 언어의 작용의 일종이라는 점을 철저히 무시한 태도에 불과하다. 시는 투명한 신의 얼굴처럼 우리의 얼굴을 다시 매만지게 한다. 시의 언어가 아무리 남다른 속도감을 지닌다하더라도 그것이 언어의 일종인 이상 시는 쓰는 자로 하여금 자신의 뜻과 감정을 되비쳐보게 만든다. 물론 이 언어라는 거울은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쓰는 자의 얼굴을 되비추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하지만 오히려 그와 같은 상태가 쓰는 자를 더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이 예민한 집중은 정신의 힘을 더 높이는 데 기여한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자각이 불투명한 언어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수치심이란 도덕적 과오가 야기하는 감정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감추고 싶어 하지만 은폐할 수 없는 모든 것’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다. 왜 특별히 나체에 구토 혹은 뱃속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꼬르륵 소리 등이 부끄러운가? 그것은 수치가, 우리 자신이 오직 우리 자신으로서 혹은 우리의 몸으로서 환하게 비춰지는 그 생리적 현현의 순간에 발생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수치 속에서 나는 그저 나의 몸일 뿐이다. 나는 나의 정신이 아니며, 나의 염원이나 이상도 아니며 단지 위장과 성기와 머리칼을 갖고 있는 생리에 불과하다. 이 분석을 뒤집으면, 수치심은 오직 자신의 동물성을 자각하는 인간, 스스로의 동물적 한계와 대면하는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라는 사실이 도출된다. 부끄러움을 통하여 인간은 스스로이 비인간성과 대면하고 이 관계를 인간적으로 성찰하는 주체 즉 개인으로 성립하는 것이다.”(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66~67쪽)

 

 

 

인용에서 말하는 ‘수치심’의 상태는 이재훈의 시가 표현하는 ‘부끄러움’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재훈은 「거리의 왕 노릇」이라는 시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꾼다고 적은 바 있지만 그의 시가 실제로 내는 목소리는 저 꿈과는 조금 다르다. 독자들이 그의 시를 통해 전해 받는 것은 부끄러움이 없는 세계의 모습이 아니라 부끄러움이 가득한 음색이다. 이재훈 시의 화자는 “언제부터인가 그리워하는 시간이 내게 없”다고 고백을 하고, 사람들이 군집한 광장에서 “죄와 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머리들”을 바라본다. 시선에도 음성에도 가득한 건 부끄러움이다. 도대체 이 많은 부끄러움은 어디로부터 왔는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그것은 숨길 수 없는 몸으로부터 왔다. 아니 그 몸을 드러내는 정직한 시선에서 왔다.

 

졸고 있는 오후. 몸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이리저리 펄럭이네. 나를 부르는 소리, 내게 명령하는 소리, 멀리서 풍겨오는 몸 썩는 소리. 푹 썩어 물컹한 몸으로 의자에 파묻히네. 저녁이 되면 식탁에 앉아 뱃속에 고기를 우겨넣지. 육즙을 맛본 혀가, 살 씹는 맛을 아는 혀가 쉬지 않고 날름거리네.

― 「치미는 몸」 부분

 

의미의 끈으로 잇거나 봉합하지 않을 경우 몸은 조각이 난 상태로 펄럭인다. 멀쩡한 한 덩어리의 몸이 조각나 있다니 무슨 말인가 되물을 수도 있지만, 몸이 일정하게 통일적 형태로 기능한다는 생각만큼 관념적인 것이 또 없다. 조각난 몸의 통합 내지 몸에 통일성을 부여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적 담론에 조금 기대어 이야기하자면 우리의 몸은 다양한 부분충동들이 어지럽게 난립하는 지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저 충동들의 방향은 제각각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일정한 도덕적 틀을 적용하여 인간의 행위를 정향시키는 일은 애초부터 일정한 폭력성을 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폭력적이다 하여 거부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인간의 충동에 내재한 공격성이 스스로를 혹은 타인을 파괴할 가능성이 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천편일률적인 도덕적 틀은 문제적이지만 스스로가 자신의 욕망과 관련한 윤리를 정립하는 일은 자신을 위해서나 공동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어쩌면 욕망의 허기란 무언가를 취하기를 바라는 허기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무언가를 취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일러주는 법에 대한 허기일 수도 있다. 그것을 부끄러움을 거부하는 몸의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와 같은 몸의 이중성은 이재훈 시의 아포리아이자 시적 기미의 발생지이다.

 

피부가 구멍을 닫으면 우리는 작은 관에 갇히지. 몸을 붙잡고 통곡하는 소리. 통곡하다 울다 지쳐가는 한숨 소리. 뜨거운 몸뚱이는 차가운 쇳덩이에 들어가지. 화염으로 가루가 되지. 가루가 되어 땅속에 파묻히거나 서랍에 들어가지. 가루가 될 몸들끼리, 서로 숭배하고, 경멸하고, 질투하는 가녀린 몸. 몸 때문에 죄를 짓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어리석은 몸.

― 「디스diss」 부분

 

죽음에 이른 몸을 화장火葬하는 과정으로 읽을 수 있는 구절이다. 흥미롭게도 시인이 인간의 몸을 관으로도 파악하고 또 관으로도 인식한다. 인간의 몸은 스스로를 가둘 수 있는 족쇄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자신의 외부와 공명을 일으킬 수도 있는 물질인 셈이다. 이와 같은 몸에 대한 이중적 인식이 시인에게 몸을 거듭해서 사유할 대상으로 만든다. 부끄러움의 잠재적 거처로서의 몸을 절단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있는 대로의 모습에 대한 순수한 인정 속에 시적인 비약을 거쳐 몸이 새로운 가능성의 지대로 거듭나게 하려는 시인은 고민하고 관찰하고 기록한다. 몸은 형성이 완료된 물질이 아니라 늘 구성중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인의 관찰하고 기록하고 생각하는 사이 몸에 잠재한 수많은 역사들이 자연스럽게 시 속에 스민다.

 

나는 거친 아버지의 세계만 알았지 어머니의 세계는 몰랐다네.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과 도덕에만 관심있었지.

하지만 날 구원해주는 것은 언어가 없는 원시의 감각이었네.

그럴 때쯤 마치 마술처럼, 성애의 욕망과

죽음과 예술의 열정이 한꺼번에 찾아왔네.

― 「나르치스」 부분

 

아버지의 세계와 어머니의 세계를 이분하는 방식과 원시의 감각이라는 관념 또한 상투적인 데가 없지 않지만, 시의 목소리가 우리의 몸과 언어 속에 뒤엉켜 있는, 성애의 욕망과 죽음 그리고 예술의 열정을 동시다발로 맞닥뜨리는 상황은 진실하다. 이 다양한 실재의 어떤 것에도 주도권을 내주지 않고 그것들의 난립과 갈등을 균형감 있게 제시하려는 이재훈의 노력에는 시를 향한 순례자를 순결함이 깃들어 있다. 시인은 몸의 혼란조차도 ‘몸의 무늬’로 만들 수 있다고 하였던가. 이재훈의 시는 스스로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신들이 사는 세계

 

고난을 마주하는 사람이 없어

신에 대해 물을 데가 없어

저 허공에 통곡을 합니다.

이유도 모르고 운명도 모른 채

웃고 노래를 부릅니다.

선한 사람이 없어 울어 봅니다.

눈에 보이는 당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신을 사랑한다 말했습니다.

― 「기복祈福」 부분

 

시가 신을 모신다는 말은 일견 시의 자리를 위축시키는 의미로 들린다. 시가 쓰이는 곳은 모든 신을 거부해야 하는 자리라고 여기는 태도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한 시인의 시구처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는 것이,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이는 일이 시의 지향이라고 우리는 믿어왔다. 하지만 믿음과 진실은 늘 일치하지 않는다. 신을 모시지 않는 시가 과연 존재할까.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 자주 무감하며 때때로 의식하지 못한 채 신적인 것에 기대어 시의 깊이와 활기를 더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정작 중요한 문제는 신에 대한 시의 거부가 아니라 어떤 신을 시가 믿는지에 대한 명증한 확인일지도 모른다.

 

선량한 바람을 맞는다. 해가 지기 전의 결기처럼 무엇을 사로잡혔을까. 무엇에 놀랐을까. 산속에서 만난 한 사람. 흰 옷을 입고, 울고 있는 한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났을까. 머리를 숙이니 나를 빤히 보고 있는 풀 한 포기. 하늘거리며 바람 속으로 제 피를 흘리고 있다.

― 「풀이 던진 질문」 부분

 

“산속에서 만난 한 사람. 흰 옷을 입고, 울고 있는 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도 그러하고, “머리를 숙이니 나를 빤히 보고 있는 풀 한 포기. 하늘거리며 바람 속으로 제 피를 흘리고 있”는 이미지 또한 우리를 붙들어 세운다. 저 이미지는 연약함과 처연함이 어떤 강인함 못지않게 읽는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는 신비로운 사실을 우리에게 경험하도록 한다. 해서 자기 방어적인 무장이 해제된 마음이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저 영롱한 유약함을 들여다본다. 이 이미지를 보며 나는 장-뤽 낭시가 한 그림을 가지고 보편적 아름다움과 관련한 이미지에 대해 설명한 언급을 떠올릴 수 있었다.

 

“보여지는 형태를 통해서 우리를 초월하는 그 이상으로 향하는 무언가에 사로잡히는 것 때문에 우리는 그 이미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게 됩니다. 잡지 속의 이미지와는 다른 것입니다. 잡지의 이미지들은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서 제작되었죠. 카를라 부르니를 보고, 다음 페이지에서는 나오미 캠벨을 보고, 페이지를 넘기고, 계속 반복하죠. 또한 아름다운 풍경사진들이나 헬리콥터로 내려다보이는 대지를 봅니다. 이 사진들도 매혹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여러분은 다시 페이지를 넘기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회화작품들이나, 예술작품을 목적으로 한 사린들을 보면서 페이지를 넘길 수는 없습니다. 반복해서 그 화폭에 집중해야 합니다.” (장-뤽 낭시, 이영선 역,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 갈무리, 2012, 192쪽)

 

우리를 사로잡는 이미지를 반복해서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쾌감을 넘어서는 불편함을 감수하게 된다. 저 이미지는 취향이나 기호로서 좋음의 차원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우리의 불안과 불완전함을 자극하며 어떤 너머로 우리의 몸을 정향시키도록 추동한다. 왜냐하면 ‘선’적인 무엇인가가 그리고 ‘진(眞)’에 가까운 어떤 것이 저 선혈이 선명한 이미지 너머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탁월한 빛”이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되어 우리에게 흘러들어 “선량한 바람”처럼 부드럽게 접촉하는 체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탁월한 빛과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이재훈의 시가 모시는 신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까. 그 신은 우리를 그렇게 빤히 바라보고 있지만, 또한 탁월하다와 가장 아름답다와 같은 인간의 말이 특별한 수사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전하지 않으며 스스로 흔들림 없이 유약함에 몰두하는 모습으로 우리를 동요하도록 이끈다. 그러므로 이 신은 전지전능한 종류의 신이라기보다 순연한 모습으로 순정의 빛을 발산하는 사소한 존재에 가깝다. 이재훈에게 신은 저 푸르고 연약한 풀과 같은 존재이다. 이와 같은 발견은 그의 시에 새로운 활기를 더한다. 우선 그의 시는 신의 거처를 지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의 자리에 위치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돌보게 하도록 유도한다. 신이 인간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신을 보호하는 상황의 아이러니함. 이 역설로 인해 지상은 신들의 사는 세계가 되고 또한 이 역설을 통해 신은 인간과 같은 혼돈의 몸을 얻는다. 결국 시가 신을 모실 뿐 아니라 신이 모시는 것 또한 시가 되는 역설까지 나아가는 일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이재훈은 「저자의 말」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적은 바 있다.

 

“사제의 방엔 말이 죽는다. 말이 죽는 법을 연습한다. 침묵이란 말도 필요없이 생각이 달린다.”

 

시의 사제인 시인은 말[言]을 죽인다. 이는 말이 말을 타고 넘어가는 기예를 차단하기 훈련으로 보인다. 시인은 말이 말의 부름을 받을 뿐 아니라 말을 넘어서는 무언가의 부름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무언가의 자리에 ‘시’를 놓아도 어색하지 않다. 아니 이재훈은 그곳에 오직 시가 놓여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시가 저만치 앞서 달려가 시를 기다리고 있다. 오직 시만이 시를 부를 수 있다. 시 아닌 것이 시를 부를 때 그것은 시가 아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망각하는 것일까. 이재훈의 시가 이 기다림의 훈련으로부터 더 많은 시와 기다림을 구원하기를 기원한다.

Posted by 이재훈이
,

제15회 현대시작품상 특집 / 평론

 

 

 

돌의 시로, 물의 시로

― 시여, 새로운 무기가 되어라

 

 

장석원

 

 

 

 

 

 

세계를 향한 시인의 뜨거운 발화가, 힘찬 육성이 여기에 있다. 그는 불이 되려 한다. 그는 불 이후의 재에 대해 묵상한다. 그는 자신을 처형한다.

나는 시가 우리의 이 땅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시가 역사의 변혁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미망을 증오한다. 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시인은 무력한 시민에 불과하다. 시는 언어의 혁명이라는, 시는 영혼의 등불이라는, 시는 모국어의 수호자라는, 시는 인간 정신의 극점에서 터져 나오는 고결한 것이라는 말을 부정한다. 시는 더 이상 순수 예술도 아니고, 혁명의 무기도 아니다. 시는 이 세계에 상품이 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기적 같은 신기루의―그래서 소중하고 아름답고 유일한―상징에 불과하다. 시여, 그대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시여, 그대의 종말을 만인에게 알려라.

이재훈은 나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한다. 그의 수상 작품을 읽어보자. “막막해졌네. 타인에게 무심해지고, 타인의 죽음에 무심해졌네. 모든 감정에 무심해졌네. 가르치는 자들이 내놓는 규율에 무심해졌네.”(「평원의 밤」) 이 구절은 정확하다. 내가 이렇다. 그가 살고 있는 ‘「스틱스, 서울」’의 풍경. “시청에서 개선가가 울리고/ 교회에서는 장송곡이 울린다/ 강으로부터 날아온 비명이 가득하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 이승과 저승을 가로지르는 ‘한강’의 시체들, 우리들. 학생들의 학교 폭력을 응시하면서 언어폭력이라는 살인무기에 대해 고발하는 「디스Diss」에서 이재훈은 우리의 외면 뒤에 묻힌 죽음을 까발린다. “결국 가루가 될 아이들. 울음이 될 아이들. 빌딩에서 썩어가는 아이들”의 “뜨거운 몸뚱이는 차가운 쇳덩이에 들어가”고 “화염으로 가루고 되”고 “가루가 되어 땅속에 묻히거나 서랍에 들어가”고 있다. 나도 알고 있다. 나는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직시하려고 하지 않았다. 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재훈이 울면서 말한다. “나르치스. 사십은 늙은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네./ 사랑도 예술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라고 고백한다.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나무의 짐을 나눠지고 새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삶의 거룩함 따위는 없다고, 오늘의 세상과 살았던 자신의 과거가 전부 거짓이라고, 깨달으며, 이재훈은 “침묵하며 자꾸 울고만 싶”다고 고해한다. 그가 “이제 순례를 떠날 때가 되었”(「나르치스」)다고, 다시 시를 써야 한다고 독백한다. 그는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 결단하는 ‘나’의 눈물이 죽음의 전후를 매개한다. 이재훈은 새로 태어난다.

 

내 몸이 썩고 썩어 문드러지면 폴폴 날리는 꽃잎으로 남을까. 신비한 탄생의 시간을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리네. 꽃잎은 늘 가벼운 죽음이지만 난 그런 죽음이 좋네. 꽃잎은 가장 장중하게 땅에 안착하겠지. 그리곤 온 대지가 울리고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는 첫 경험을 주겠지.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땅과 함께 밤새 울 것이네.

― 「치미는 몸」 부분

 

다시 태어난 시인이 몸이 있다. “썩고 썩어 문드러지면” ‘나’에게 자유가 찾아오겠지, “폴폴 날리는 꽃잎”이 ‘나’의 죽음의 유일한 흔적이겠지, “온 대지가 울리고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는 첫 경험”의 황홀이 ‘나’를 맞이하겠지. 이재훈이 읊조린다.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증오와 자신을 처단하고 싶은 욕망의 강도는 비례한다. 「풀이 던진 질문」에서 이재훈이 찾아낸 것. “노을은 경계도 없이 제 몸을 허”물고, “그 몸 아래 조그맣게 엎드려 졸고 있는 풀 한 포기” 앞에서 그는 “선량한 바람을 맞는다.” “머리를 숙이”자 “나를 빤히 보고 있는 풀 한 포기”를 발견한다. 풀처럼 순교하는 시인. “하늘거리며 바람 속으로 제 피를 흘리고 있”는 풀 한 포기, 이재훈. 직정直情의 언어가 일어선다. 세상의 어둠 속에서 시인이 우리에게 건네는 노래가 들려온다.

 

어둠 속에서 오직 나무만이 황금빛으로 발하고 있었지

모든 사람들은 희미한 실루엣으로만 존재할 뿐

나 또한 한낱 이 세계의 배경일 텐데

배경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란

매일 동화 쓰는 시간을 맞이하지

희미한 달이 낡은 뱃전을 어루만지며 다가오는데

 

밤이 환상의 세계라면

저녁은 동화의 세계

 

저녁이 되면 광장에 사람들이 모이지

광장의 사람들은 어떤 저녁을 매일 그리고 있을까

하얀 치자꽃을 꺾어 어두워가는 책상 위에 두고

달금하고 앳된 향기와 함께 조금씩 늙어가는 시간

풀어진 눈으로 넘어가는 해를 보는 시간

늘어진 삶에 끼어든 늙은 햇살이 온몸을 휘감지

나무에 몸을 기댄 자는 고독해지지

― 「동화의 세계」 부분

 

어둠 속에서 “황금빛으로 발하고 있”는 나무가 다가온다. “모든 사람들은 희미한 실루엣으로만 존재”하는 저녁이 찾아온다. 이재훈은 “나 또한 한낱 이 세계의 배경”임에 불과하다고 자인한다. 그가 타인을 응시한다. ‘나’와 ‘너’를, ‘우리’를, “배경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을 주목한다. 저녁이다. 세상이 밤길 밝힐 등을 켜는 시간, 하루의 광휘가 사그라든다. 피로와 우울의 왼손과 안도와 평화의 오른손을 합장한다. “희미한 달이 낡은 뱃전을 어루만지며 다가오는” 광경이 ‘동화처럼’ 펼쳐지는 시간. “저녁이 되면 광장에 사람들이 모”인다. 그곳의 사람들은 “어떤 저녁을 매일” 그려낸다. 우리가 살아나는 시간, 우리의 삶에 안식이 찾아오는 시간. “하얀 치자꽃을 꺾어 어두워가는 책상 위”의 어둠을 살며시 밀어내는 시간이다. “달금하고 앳된 향기와 함께 조금씩” 하루의 삶이 소멸하는, “늙어가는”, 사라지는 것들이 잠깐 숨을 뿜어 올리지만 포르르 다시 삼키고 마는, 여린 등불의 시간이다. “풀어진 눈으로 넘어가는 해를 보는” 사람들의 “늘어진 삶에 끼어든 늙은 햇살이” ‘나’의 “온몸을 휘감”는다. “나무에 몸을 기댄 자”가 “고독해지”는 시간이다. 저녁이 찾아왔다. 이재훈은 애련에 물들어버린다. 떠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시인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무서운 사랑 때문에 그는 조금 ‘울면서’ 광장을, 그곳의 사람을, 오늘을 살아낸 우리들을 껴안는다. 생기生氣의 감정이 직핍直逼한다. 시인의 살을, 살의 온기를, 온기 속의 방향芳香을 느낄 수 있다. 이재훈의 사랑을 체험한다.

 

바람이 불면 이별하겠다

바람이 온몸을 휘젓고 나가야

간신히 나지막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꽃이 피는 것엔 이유가 없고

너의 욕망도 이유가 없다

배려는 늘 사람을 고뇌하게 만든다

그대와 나 사이

팽팽한 거리만 있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했을 텐데

언제부턴가 몸속에 나비를 키우며 산다

싱그럽고 건강한 몸 내음에 취한 나비떼가

몸속에서 팔랑거린다

제 몸속 나비 한 마리가 다른 몸을 찾아 가는 일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 몸에 한 마리의 나비만 남을 무렵

그 퀭한 광야를 품고 다니는 저녁

 

움직임 없는 구름의 속도를

무슨 까닭으로 이리저리 책망할까

숲의 교훈도 무력하고 늦은 햇살의 위로도

눈이 따갑기만 하다

겨울이 넘어가고 있었고

신비한 그림자만 남았다

침묵하는 입술만 씰룩대었다

― 「황금의 입」 전문

 

제목 ‘황금의 입’은 마지막 행 “침묵하는 입술”로 귀결된다. ‘황금의 입’에서 ‘침묵의 입’으로 여행이 시작된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온몸을 휘젓고 나”갔다. “간신히 나지막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것이 이재훈의 노래이다. 우리는 ‘작은’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이다. 그의 노랫말이다. “꽃이 피는 것엔 이유가 없”고, 우리의 “욕망도 이유가 없”다. ‘나’와 ‘그대’ 사이에 “팽팽한 거리만 있었다면” ‘나’는 사랑에 빠졌을 텐데, ‘나’와 ‘당신’은 ‘배려’로 엮인, 공동의 타자였으므로, ‘우리’ 사이에 사랑이 기거할 공간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배려가 뿌리 내릴 자리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배려를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배려’하지 않고, ‘사랑’에 자신의 존재를 함몰시킨다. 사랑은 배려를 뽑아내고, 희생을 싹틔운다. 이재훈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이다. 인식이 실재로 전환된다. 앎이 세계를 움직인다. 그렇다, 사랑과 희생이다. 이것을 알게 되었던 “언제부턴가 몸속에 나비”가 들어왔다. ‘나’의 몸은 ‘나비’의 집이다. 사랑의 빛이 가득 찬 “싱그럽고 건강한 몸 내음에 취한 나비떼”가 이재훈의 “몸속에서 팔랑거”린다. 이재훈이 말한다. “제 몸속 나비 한 마리가 다른 몸을 찾아가는 일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을 기적이라고 말할까. 아름다움이라고 말할까. 이재훈이 우리의 질문에 답을 내놓는다. “내 몸에 한 마리의 나비만 남을 무렵/ 그 퀭한 광야를 품고 다니는 저녁”의 먹먹함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동화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넘실거리던 이재훈의 사랑이, 사랑의 나비가 우리들 어깨와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시인에게 남겨진 것은 “한 마리”뿐. 자신의 사랑을 전부 나눠준, 전부 희생한 시인의 빈 육신에 저녁의 어둠이 차오른다. 그는 “움직임 없는 구름”이 되었다. “늦은 햇살의 위로”에도 그의 눈은 “따갑기만 하다”. 그는 지쳤다. 자신의 사랑을 다 내어주었을 때, 그의 육신은 “겨울”이 되었고, 마침내 단 한 마리의 나비마저 얼어붙어 눈발로 흩어졌을 때, 이재훈의 빈 몸이 부서져 내렸을 때, “신비한 그림자만 남”겨졌다. 이재훈의 “침묵하는 입술만 씰룩대”고 있다. 그 입이 ‘황금의 입’이다. 이재훈의 입술 사이에서 나비가 날아오른다. 우리에게 사랑이 도달했다. 이재훈의 시가 반짝이는 순간이다. 저녁에 도달하여 사랑을 발견하기까지 이재훈이 지나온 한낮의 거리와 광장으로 돌아가보자.

 

플래카드엔 권유와 명령만 있을 뿐

전투력 가진 말들이 길거리 여기저기서 뽐을 내지

문명의 한 구석에 제 이름을 새기려는 영혼들

왕 노릇하려고, 서로 왕 노릇하려고

생명을 능가하고, 죽음을 능가하는 이웃들

나는 왕의 언어가 없고

법의 언어가 없고

왕을 심판하는 언어가 없지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꿀 뿐이지

이 세계에 없던 언어를 찾아 나설 뿐이지

아름다운 운율은 규칙이 아니라

당신의 입술 때문에 만들어지지

― 「거리의 왕 노릇」 부분

 

한낮의 거리에 내걸린 “플래카드엔 권유와 명령만 있을 뿐”이다. “전투력 가진 말들이 길거리 여기저기서 뽐을 내”고 있다. “서로 왕 노릇하려고/ 생명을 능가하고, 죽음을 능가하는 이웃들”이 “문명의 한 구석에 제 이름을 새기려” 한다. 시인의 언어는 무력하다. 그에게는 “왕의 언어가 없고/ 법의 언어가 없고/ 왕을 심판하는 언어가 없”다. 시인의 언어는 왕의 언어가 아니고, 법의 언어가 아니고, 왕을 심판하는 언어가 될 수 없다. 시인의 언어는 왕과 법과 심판의 언어가 결단코 아니라고 이재훈이 말한다. 권력에 복종하는 언어들의 질서를 부정한다. 시인의 언어는 권력을 거부한다. 시인의 언어는 권력을 파괴한다.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꾸기에 시인의 언어는 무기가 된다. 정해진 것, 기존의 모든 것, 이념과 권력의 시녀를 증오하는 시인의 언어는 “이 세계에 없던 언어”가 된다. 아름다운 시의 노래는 “규칙이 아니라/ 당신의 입술 때문에 만들어”진다. 시인의 언어가 ‘나비’가 되어 입술 사이에서 날아오른다. 이재훈은 “중얼거리는 입술로 거리의 왕”이 된다.

시인이 거리의 왕이 되었다. 거리의 왕, 이재훈이 지닌 무기가 그의 시이다. 이재훈이 뿔을 세우고 달려온다. 대안對岸의 사랑에 당도하기까지 이재훈이 지나온 거리를 다시 돌아본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변하지 않았”다. “구름도 흔들리고 새들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한낮의 풍경”(「악령」)은 달라지지 않았다. “타인의 영혼을 훔치면 왜 안 되”(「기이한 탄생들」)냐는 말이 횡행한다. “예언도 사라지고/ 초월도 사라지고/ 왜소한 지식을 입에 문 기사騎士들만 즐비한” 거리에 “자기 경험을 강요하는 꼰대들/ 침을 질질 흘리며 풋풋한 냄새를 킁킁거리는 꼰대들”(「녹색기사」)이 행진한다. 그들은 “트럭 짐칸에 가득 실인 돼지의 말을 뱉어내며 생을 즐긴다”. 이재훈은 “시가 삶의 전부라고 과장되게 눙쳤”던 자들을 떠올린다. 자신도 그랬을지도 모른다. “저자를 돌아다니며 뜨거운 밥의 말을 말아 먹고” 이재훈은 “책상에 앉아” ‘꼰대들’의 언어를 살해하고, “고통의 소리 가득한 늦가을. 비에 맞아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나뭇잎 하나. 핏물을 머금은 말 한 덩이”로 새로운 ‘저자의 말’을 쓰기 위해 진력한다. 그는 “말이 죽는 법을 연습한다.”(「저자의 말」) 타락한 언어, 더러운 질서, 악령의 시를 죽이고 “머리에서 흐르는 피로 글자를 쓰겠”(「벌레신화」)다고 다짐한다. 세계를 찌를 수 있는 “변하지 않는 뼈”의 언어를 곧추세운다. 창에 옆구리를 찔리고, “꼬리는 빠져 시큰하고/ 벌건 불속에서 갈비뼈를 드러낸 채/ 울고 있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재훈은 “너덜너덜해진 빈 육체가 되어 울고 있”다. “뱀이 몸을 휘감아 숨을 쉴 수가 없”다. “일상이 일상을 읽는 밤”에, “내 몸이 불어 터져 고통을 읽는 밤”에, “뿔을 잃고 읊조리는 밤”에, “오직 죽기 위해 춤추는 날”들의 밤에 이재훈은 결의한다. 고통은 두렵지 않다. 고통이 없다면, 고통을 응시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고통에 몸을 열지 않는다면 시와 시인은 죽을 수밖에 없다. “수난이 없는 몸은 역사가 없”(「뿔」)다. 이재훈은 자문한다. 자신을 의심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짐승처럼 왔을까” “그때 우리는 참담했을까”라는 물음 앞에서 그는 “무엇을 요구할 수 없는 사십대가 된 것 뿐이”라고, “텅 빈 마음이 들어온 거”(「짐승의 피」)라고 말한다. 그리고 “허공에 통곡”을 한다. 울음이 자신을 소진시킨 후에 얻은 결의. “세계와 불화하는 가장 극적인 방법은/ 사랑임을 알지 못했”다는 후회. 이재훈은 “부패한 말들이 냄새를 피우”(「기복祈福」)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이재훈은 “채찍이 내 피부에 감기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가시가 박혀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갈라지고/ 뱃가죽이 찢어지고 창자가 흘러내려도/ 나는 기쁘겠”다고 자신을 저주한다. “내 몸이 곪아 칼로 피부를 도려내는 기쁨”에 젖어버리겠다고 다짐한다. “풍습을 거스르고 바람을 거스르고/ 스승을 거스를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선언한다. 세계를 향해 웅변한다. “우리는 다시 이 땅으로 올 거예요/ 새로 태어난 우상들/ 땅을 호령하는 권력들에게 말하겠어요/ 대지의 증인은 우리들이며/ 흙의 몸은 바로 우리들이라고”(「벌레신화」) 외친다. 과거의 ‘나’를 처형한 후 이재훈은 눈을 뜬다. 「돌의 환」을 발견한다

 

부러진 돌부리에 채인다

굴러다니는 돌이 아니라

올곧게 서 있다가, 부러진 돌

창과 칼 혹은 바람이

돌의 몸을 반동강 냈을 것이다

사방이 어둠이었고

나를 길에 내던졌던 사람들의 눈빛만

어둠 속에서 반짝하던 밤들이었을 때

발바닥 돌덩이가 내 존재를 떠받칠 때가 있다

돌이 내 집을 떠받치고,

아버지의 약속을 떠받칠 때

돌 위에 피의 흔적이 있다

돌은 깨져도 죽지 않는다

돌은 썩어갈 육체를 갖고 있지 않아

언제나 채이고 밟히고 놀아난다

돌에 의해 소멸한 것과 태어난 자리가 한 몸이 되는

이 모든 찰나를 지켜본 돌

어둠 속에서 세상이 어지럽게 돌기 시작하면

나는 흔들거리는 운명을 본다

흔적 없이 왔다간

당신의 영혼에 몰래 깃들고 마는 돌

부처의 얼굴도 만들고, 예수의, 마리아의 몸도 만드는

성육신인 돌

영원을 살고 있는 길 위의 돌

돌로 만들어진 뭇사람 하나

그 무성한 골짜기의 돌

― 「돌의 환」 전문

 

이재훈을 ‘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돌이 된 이재훈, 돌이 된 그의 시가 획득한 염결한 의지. “이 세계를 말하지 말고 써야 하네. 가르치는 언어가 아니라 감각을 일깨우는 글자들. 피부에 달라붙어 생채기를 내고 콧속으로 들어가 온몸을 서늘하게 만드는 단 한 줄의 시를 써야 하네.”(「대리자代理者」) 우리가 경험했던 이재훈의 사랑의 경로가 이러하다. 그의 시는 세상을 향해 던져진 돌이다. 그 돌이 세상에 균열을 낸다. 절망에 젖어 시의 발화發火를 부정하는 나를 불태운다. 어제의 죽은 내가 보인다.

 

벽에 귀를 갖다 대면 물소리가 들린다. 아득하다. 눈을 감으면 당신의 소리가 들린다. 나는 늘 아득한 것만을 탐했다. 물소리, 물소리. 축축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 몸이 소리가 된다. 어떤 채비도 없이 탐험은 시작된다. 돌로 된 벽. 사이사이 틈. 틈 사이사이 어둠. 슬며시 그 얇은 어둠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간다. 내 몸은 돌이 되지 못하고, 역사가 되지 못하고, 흐물흐물 유형도 무형도 아닌 정욕의 애액이 되어 돌 속에 분신한다. 돌 속에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 파닥거리며 지느러미를 움직인다. 돌이 흔들거린다. 돌 속에서, 돌 속의 물속에서 노래를 부르자니 숨이 가빴다. 내 몸의 구멍으로 물이 들어왔다. 살갗이 울퉁불퉁하게 딱딱해진다. 온몸이 물이 된다. 물속에서 돌이 되는 순간. 물이 돌이 되는 꿈. 돌이 된 몸속에서 아득한 물결 소리가 철썩인다.

― 「고분古墳」 전문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이재훈에 의해 무덤 ‘안’에서 나는 깨어났다. “벽에 귀를 갖다 대”자 “물소리가 들린다.” “눈을 감으면 당신의 소리가 들린다.” 당신이 나를 깨어나게 했다. 당신의 소리가 나를 되살아나게 했다. 당신의 소리가 나를 부활시켰기에 “어떤 채비도 없이 탐험은 시작된다.” “돌로 된 벽. 사이사이 틈. 틈 사이사이 어둠”을 지나 나는 간다. “내 몸은 돌이 되지 못하고, 역사가 되지 못하고, 흐물흐물 유형도 무형도 아닌 정욕의 애액이 되어 돌 속에 분신”했다. 무덤 안에서 내가 사라진 후에, 당신이 어제의 나를 멸실시킨 후에, 나는 “돌 속에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가 되었다. “파닥거리며 지느러미를 움직”이자 “돌이 흔들거린다.” “숨이 가빴다.” 기적처럼 “내 몸의 구멍으로 물이 들어왔다.” “살갗이 울퉁불퉁하게 딱딱해”졌다. “온몸이 물이 되”었다. 나는 돌 속의 물이다. 나는 살갗이 딱딱한 물이다. “물이 돌이 되는 꿈”을 꾼다. 나는 곧 “물속에서 돌이 되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나는 물이자 돌이 될 것이다. “돌이 된 몸속에서 아득한 물결 소리가 철썩”이는 꿈이 이재훈에 의해 실현되었다. 나는 물이고 돌인 시를 읽었다. 나는 이재훈의 시에 의해 시의 진실과 가능성을 다시 믿게 되었다. 그의 자성自省이 나를 데운다. 그의 시는 개안開眼으로 이끈다. 부정否定과 갱신으로 나를 이끈다. 이재훈의 수상을 축하한다.

Posted by 이재훈이
,

이재훈, 「남자의 일생」

 

이재훈, 「남자의 일생」

 


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찾아들고
온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나비 한 마리
공중으로 날아간다.

풀잎이 몸을 연다.

시·낭송 _ 이재훈 – 1972년 강원 영월 출생. 1998년 《현대시》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등이 있다.

 

배달하며

한밤중이 되면 몸에서 수선화가 피어난다는 시인. 깊은 동굴로 들어가 서둘러 어둠을 껴입고 찰박찰박 입술을 오므려 휘파람을 분다는 시인.
애벌레-나비-남자들은 낮에는 실존적인 제약과 필연 속에 넥타이를 매고 아스팔트를 달려 “매일 출근하는 폐인”이다.
나비는 시인이요, 일용근로자, 백수, 독학자이다.
그늘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 아스팔트 위에서 뱃가죽이 뜯어지는 무력한 생명의 순환과 만다라를 읽는다. 「남자의 일생」이라는 제목에 그만 몇 편의 페미니즘 시가 움찔하다가 풀잎처럼 몸을 연다.

문학집배원 문정희

▶ 출전_『명왕성 되다』(민음사)

▶ 음악_ 권재욱

▶ 애니메이션_ 김은미

▶ 프로듀서_ 김태형

Posted by 이재훈이
,

2014년 가을밤.

충무로에서. 동국대 이해랑극장에서 최언형이 극작을 쓴 연극을 관람한 후.
김태형, 최치언 형들과.

 

 

 

'시시각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일, 오미경 작가와  (0) 2015.02.06
약수파 사진  (0) 2015.02.06
단국대 국문과 특강  (0) 2015.02.03
2014년 현대시작품상 시상식  (0) 2015.02.02
김산 시창작반 특강  (0) 2014.08.05
Posted by 이재훈이
,

바람의 계곡 라다크 투르툭에서의 이틀

 

 

 

이재훈

 

 

 

 

 

인도의 라다크는 내게 늘 관념 속에서만 머물렀던 정신적 공간이었다. 헬레나가 <오래된 미래>를 통해 소개한 공동체 낙원 라다크. 문명이 서서히 들어와 변질되어가는 히말라야 고원의 라다크. 하지만 라다크의 실체는 사회학자들이 얘기했던 현상을 느낄 수 없을 만큼 태고의 원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열흘 동안 나는 태초의 신비를 탐했다. 숨 쉬기 힘들었고,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으며, 전기는 자주 끊겼다. 많은 것들이 불편했지만 마음만은 평화로웠다. 내 마음에도 평화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곳이 라다크이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알 수 없는 평화로움이 물밀듯 밀려와서 잠깐 난감하였으나 곧 그 평화로움을 누리게 되었다.

라다크에서의 열흘 동안 가장 평화로웠던 시간은 아마도 투르툭(Turtuk) 마을에서 지냈던 이틀일 것이다. 여행의 마지막 이틀을 투르툭에서 소요하며 보냈다. 투르툭은 라다크의 주도인 레(Leh)에서 10시간 정도 걸리는 마을이다. 우리 일행은 레에서 누브라 밸리로 갔고 누브라의 훈다르 마을에서 하룻밤 캠핑을 하고 투르툭 마을로 이동했다. 투르툭 마을은 파키스탄의 국경과 마주한 지역이다. 이전에는 개방이 되지 않았던 곳인데 2010년 인도 정부가 여행 제한을 풀었다고 한다. 그래서 더 신비하고 더 원초적인 곳이었을까.

투르툭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황토물이 산처럼 굽이치는 강을 만났고, 흙과 돌로만 쌓아올려진 누런 민둥산을 끝없이 오르내렸다. 때론 작은 초원이 있는 마을을 지났고, 마을에서 밀을 수확하는 여인들과 만나기도 했다. 어딘가를 가는 길은 늘 닿는 시간보다 가는 시간이 즐겁다. 투르툭으로 가는 길에는 욕망이나 격정보다는 광막한 막막함이 더 자주 다가왔다. 그 막막함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 이 막막한 풍경 속에서 시간도 잊은 채 나른하게 취하고 싶었다. 늘 취하고 싶었으나 취할 수 없는 긴장의 시간을 즐긴 것이라고 말할까.

투르툭에 도착하자 이곳은 한없이 게으를 수 있고 한없이 상상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멍 하니 바라보거나 멍 하니 앉아 있으면 되었다. 특별한 일정이나 계획 없이 이틀을 꼬박 빈둥거리며 지냈다. 투르툭은 어렸을 적 자주 갔던 외가의 마을과 닮아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는 오래된 돌계단이 있었고 돌담이 둘러쳐 있었다. 마을 전체에 키 높이의 돌담이 있었고 돌담 사이로 작은 골목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나는 그 골목길에서 자주 서성였다.

마을의 골목길 중간중간 아주 오래된 살구나무들이 많았다. 투르툭은 살구나무의 마을이었다. 작은 도랑이 흘렀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그러다 투르툭의 아이들을 만났다.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아이들은 천진난만했고 이 세상을 다 가진듯한 밝은 표정이었다. 아이들은 쓰러진 나무 기둥에 모여 앉아 낯선 외국인을 구경했다. 특히 아이들은 디지털 카메라에 폭발적인 관심을 보였다.

몇 백년이 되었을지 모르는 돌담길을 따라가다 보면 마을 아이들을 위해 만든 수영장도 있다. 물을 가두어 만든 수영장에서 수십 명의 사내 아이들이 벌거벗고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곳은 인도의 다른 지역과 다르게 이슬람 교도들이 대부분이다. 여인들은 히잡을 쓰고 다닌다. 또한 낯선 남자들에게 경계심이 강하다. 그리고 이곳 여인들은 농사일을 도맡아 한다.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짚단을 지게에 짊어지고 다니는 여인들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아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는 아주 작은 사원이 있었다. 사원을 올랐다. 돌담길을 지나 너른 흙길을 지나 나무들이 숨을 뿜어내는 작은 숲길을 지나 언덕으로 오르는 돌밭을 지나 마을의 꼭대기까지 올랐다. 돌계단을 오르고 올라 가쁜 숨을 몰아쉰 후 언덕의 꼭대기에 오르니 원시의 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쪽 너머의 산으로 강은 굽이치고 있었고 여러 겹의 산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나무들과 작은 초원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언덕 위에 앉아 한참동안 풍경에 취해 있었다. 작은 사원 안에는 명상을 하는 서양인들이 몇몇 있었다. 여행객이 아니라 구도자에 가까운 파란 눈동자의 젊은 명상가들에게서 무엇인지 모르는 자유가 느껴졌다. 자유는 자신의 외적인 모습에 신경쓰지 않는 태도에서 풍겨나오는 것임을 알았다. 나도 저런 삶을 바랐었는데 어쩌다 지금 이렇게 살고 있을까.

라다크는 바람의 계곡이다. 우리도 바람을 만났다. 작은 마을에 갑자기 불어닥치는 바람에 몸이 날아갈 지경이었다. 아이들은 바람을 맞으며 바람놀이를 하고 있었다. 바람 때문에 잠시 무서웠다. 그러나 곧 평온해졌다. 도둑처럼 들이닥치는 이곳의 바람은 늘 이런 식인가보다. 골짜기에 숨어 있는 마을은 바다의 외딴 섬처럼 존재해 있다. 하지만 이런 바람을 맞아들이는 마을이다. 투르툭은 바람을 맞아들이며 스스로 가쁜 숨을 뿜어낸다. 그러다 때론 침묵한다. 마을의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보면 조잘조잘 수런거린다. 그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음악을 며칠 동안 한없이 들었다.

나는 게으름을 좋아한다. 게으름이 여행의 본질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게으름에도 격이 있다면 이곳에서의 게으름은 그럴 듯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색에도 쾌락이 있다면, 사색을 유희할 수 있다면 트르툭에서는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도시에서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허무의 관념들이 이곳에서는 한 번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 마을에서 나는 며칠만 머무른 나그네일 뿐이다. 길손이 되어 그들에게 무엇을 던져주고 간 존재일 뿐이다. 일방적일 수밖에 없는 여행객은 그들의 모습과 풍경 속에서 많은 것을 담아간다. 그들은 나를 통해 무얼 생각했을까. 트루툭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 삶의 속도대로 산다. 그렇게 오래오래 그들의 속도대로 천천히 소요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쏟아질 듯한 별을 보며 누워 있던 트루툭의 밤이 아련하게 그립다.

_ <대전평생교육>, 2015년 1~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

언제 방송에 나갔는지는 모르겠네. 작년 가을인데.
EBS라디오 <강성연의 시콘서트>에서 아래의 시를 낭송하고 짧게 코멘트 했었다.
이제 불혹에 대해 아무 느낌도 없는 나이가 되었음.^^

 


불혹

 

 

 

어른은 큰 소리내지 않는단다

마음에 생채기를 남기고 비겁한 자가 되겠지

담배 연기만 품어대며, 다 안다는 듯

끄덕끄덕대기만 하겠지

날 어른이라 부르는 손가락들

그 모든 비겁도 눈 감고

어떠한 격정에도 미혹되지 않는

어른들의 세계

이미 네 앞의 시간들은 결정된 것

가르치려 드는 꼰대들에게

다리를 까딱거리고 딴지를 걸고 싶더라도

어른이란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제 소년을 간신히 넘었을 뿐인데

눈물을 참아야 하고 그리움도 참아야 하고

홀로 식당문을 들어서는 서글픔도

지루한 술자리도 참아야 한다

아직도 쓸쓸함을 사랑할 수 없나

차가운 거리를 헤매다 방안에 들어와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할 때

내 몸에 남아 있는 허약한 온기

엎드려 시를 쓰는 사람

엎드려 생각하는 사람

엎드리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라지만

엎드리는 일은 자신을 잊는 일

엎드려 이제

스스로의 온기로 인해 나는 살겠다

 


 

불혹이라는 시는 제가 마흔을 넘어가면서 쓴 시입니다. 어딜 가서 나이 얘기를 잘 안하는데요. 서른을 넘길 때와 마흔을 넘길 때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서른 때에는 빨리 나이를 먹고 싶었는데, 마흔이 되니 달라지더군요. 이제 나이 먹고 싶지 않거든요. 그래서 마흔이 넘어가면서 꼭 ‘마흔’이라는 시간에 대해 시를 써보고자 생각했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마흔’이라는 시는 많겠지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마흔의 의미가 또 있는 것이니까요. 마흔이 넘어가니 주변의 모든 분들이 이제 어른이 다 됐네, 라고 말합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무슨 말일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른이라는 것은 참으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눈물도, 그리움도, 외로움도, 꿈과 희망도 참아야 하고 비겁한 일도 모르는 척 넘기는 게 어른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참아야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잊지는 않고 싶습니다. 모두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겠지만 그런 어른이라면 어른이 되기 싫은 거지요. 차라리 엎드리라면 엎드리는 게 낫겠지요. 눈물도, 그리움도, 외로움도, 꿈도 희망도 참지 않는 어른이면 참 근사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이재훈)

 

Posted by 이재훈이
,

빈이무첨의 시간

 

 

나민애

 

 

 

  울었지. 허벅지가 패고 뺨에 피가 흐르지. 우리는 어디에서 짐승처럼 왔을까. 당신의 기별을 기다리며 안절부절하는 날들. 먼 시간을 건너왔을까. 천 년 전부터 서로의 몸을 기억했을까. 기억이란 늘 중심이 다를텐데.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검은 밤의 시간을 가로질러 왔지. 그때 우리는 참담했을까. 누군가는 나를 기억하고, 누군가는 내가 뱉은 말들을 기억하지. 아무도 없이, 아무에게도 위로받지 않고 잠들고 싶었지.

  내 겨울엔 소리가 없지. 모든 사물은 배경으로만 존재할 뿐. 두려움은 고독 때문인 것. 문을 열고 나가면 그뿐인데. 전략 없는 삶이 늘 자랑스러웠지. 슬픔에도 정도가 있다면 나는 어떤 고통쯤에 닿았을까. 우린 숨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 묘한 시간이 지나면 어느덧 시의 동지들. 불을 만지고, 물을 만지고, 공기를 만지는 손들.

  우울이 병은 아니지. 무엇을 요구할 수 없는 사십대가 된 것뿐이지. 달이 떠오르는 시각. 달빛의 광경보다 텅 빈 마음이 들어온 거지. 중년의 형편이 가장 누추할 때. 땀이며 피며 살갗이 흘러내리지. 이제 갈 시간이 된 것. 도시에서, 혹은 상스럽고 선정적인 인문학의 세계에서.

  - 이재훈, <짐승의 피> 전문(<세계의문학>, 봄호)

 

 

이재훈 시인의 시를 읽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그 시인을 통해 ‘불완전한 성인(成人)’의 위태로운 사회적 위치와 불안한 심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세의 이립(而立)을 지났어도 세운 것은 하나 없고, 40세의 불혹(不惑)이 되었어도 미혹되지 않은 바 없다. 많은 ’성인‘들이 모여 시에서처럼 ’우리‘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성인이 되었음은 물론, 성인이 된 지 한참 지났어도 21세기의 성인들은 ’미성인(未成人)‘의 처지에 있다. 이재훈 시인의 작품에는 성인이되 성인이지 못하다는 이 모순적 자의식이 존재한다. 더불어 뒤틀린 자의식이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고통과 살 타는 냄새가 가득하다.

이 고통의 냄새를 민감하게 맡고, 그 냄새의 원천지를 찾아 나서는 독자의 심정은 아마도 타인의 표정에서 자기 얼굴을 찾아내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내 고통의 표정을 타인의 고통의 표정에서 찾아내는 즐거움, 이것이 이재훈 시인의 시를 읽는 두 번째 이유이다. 내가 고통스러운 것처럼 그도 고통스럽구나 내지는 내 타는 살보다 저 사람의 살은 더 타고 있구나, 이렇게 비교 가능한 고통을 확인하는 것은 고통을 견디는 데 위안이 된다. 매우 야박한 일이지만 나만 아픈 것이 아니라 너는 더 아프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고통의 심리적 지수는 체감상 낮아지게 된다.

그렇지만 체감상 낮아질 뿐 고통은 여전히 고통이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안절부절하는 날”과 “참담”은 계속되고, “형편이 가장 누추”하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변함없는 것을 변하게 할 힘이 없는데 그렇다면 이런 사실을, 못난 현실과 못난 나를 고발하는 행위는 무슨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이재훈의 시를 읽는 세 번째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다. 그의 시는 오욕과 더러움과 진땀의 세계에 속해 있고, 그것을 어쩌지 못하고 건너는 ‘개 같은 날들’의 기록이다. 이렇게 더러움을 깨끗하다고 말하지 않고, 참 더럽다고 말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나는 이재훈 시인의 주먹에는 ‘빈이무첨(貧而無諂)’의 세계관이 쥐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더럽지만 그래, 더러우니까 나만 깨끗하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가난하지만, 가진 것은 없고 미혹과 불안만이 있지만, 아첨하지는 않겠다. 이것이 ‘빈이무첨’의 정신이고, 완전히 짐승 쪽으로 건너가지는 않겠다는 마지막 마지노선이다. 도시를 욕하면서 그곳에 사는 도시인뿐만 아니라 “상스럽고 선정적인 인문학의 세계”를 욕하면서도 그 세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더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죽을 때까지 풀지 않을 주먹에 ‘빈이무첨’을 꼭 쥐고 이 세계를 건너는 자세 말이다.

 

― <문학사상>, 2014년 7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

대도시와 정신적 삶, 그리고 서정시

 

 

-조강석

 

 

 

 

 

 

1.

 

대도시의 성립은 단지 물적 기반의 확립과 경제 시스템의 정착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앙리 르페브르가 강조했듯이 공간은 정신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사회적인 것, 역사적인 것 등을 연결하고 발견, 생산, 창조의 과정을 재구성함으로써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공간은 “할당된 장소와 위치 안에서 무수히 많은 교차를 내포”하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간의 문제는 물적 토대, 지식과 담론의 생산, 그리고 공간의 재현 양태 모두와 결부된다. 대도시의 성립이 예술에 있어 새로운 의미지평을 획득하게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대도시의 대두와 성립은 단지 물리적 차원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공간을 표상하고 재현하는 구성원들의 의식 차원의 문제와도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대도시는 물리적으로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구획하고 정초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 삶의 영역에서도 새로운 방식의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아마도 이와 관련하여 게오르그 짐멜의 논의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막스 베버, 에밀 뒤르켐 등이 근대 세계에서 대도시의 성립과 관련된 역사적 계기와 도시의 발달 조건 등에 대해 논했지만 대도시의 발달이 인간의 내면적-정신적 삶과 일상적 상호작용에 대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짐멜의 글 「대도시와 정신적 삶」이 우선적으로 주목에 값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대목을 눈여겨보자.

 

한편으로는 관심을 끄는 자극들이 도처에서 밀려오고 시간과 의식의 충전을 통해 거의 움직이지 않아도 마치 강물에 휩쓸려가듯이 저절로 떠밀려가는 삶을 살게 되면서 개인의 삶은 엄청나게 편리해졌다. 다른 한편으로 삶은 점점 더 개인적 색채나 비교불가능한 특성을 몰아내는 비인격적 내용과 제공물로 채워진다. 그 결과 누군가를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 혹은 자신만을 위한 경우라도 개인적인 것을 과장할 필요성이 생긴다.

 

인용된 게오르그 짐멜의 언급에서 흥미로운 것은 대도시가 개인의 의식의 영역에서 “도처에서 밀려오”는 자극들을 끊임없이 생산한다는 대목이다. 생활의 영역에서 개인의 삶은 더욱 편리해졌지만 한편으로 정신적 삶의 영역은 “비인격적 내용과 제공물”들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이 짐멜의 설명이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급속도로 이미지들이 교체되면서 밀려오거나,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포착되는 내용의 변화가 급격하거나 밀려드는 인상이 전혀 예기치 못한 경우에 더 큰 부담을 갖는다. 이러한 심리적 조건은 대도시의 거리를 걸을 때나 빠르고 다양한 경제적-직업적 및 사회적 삶을 경험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정신적 삶의 감각적 기반, 다시 말해 차이에 입각한 우리 존재의 속성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의식의 총량을 비교해보면, 대도시는 소도시나 시골의 삶과 커다란 차이를 보여준다. 후자에서는 감각적-정신적 생활의 리듬이 더 느리면서 더 익숙하고 더 평탄하게 흘러간다.

 

그러니까, “비인격적 내용과 제공물”로 가득찬 자극들이 “정신적 삶의 감각적 기반”을 형성하는 감각자료들이 됨에 따라 주체는 한편으로는 신경과민에, 또 한편으로는 둔감함에 내몰리게 된다는 것이다. 짐멜 전문가 김덕영은 이에 대해 이 둔감함이, 지젝의 규정에 따르면 “사물의 차이에 대한 마비증세”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둔감함은 쉴 새 없이 주어지는 자극들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주체의 내면에 사물의 차이에 대한 마비증세가 나타난 결과라는 것이다. 모든 개별 가치들을 교환가치로 환원시키는 화폐의 유통이 사물들 고유의 가치에 대한 계량보다 우선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런 양상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신경과민과 둔감함이라는 양가적 심리를 동시에 지닌 주체들은 무수한 자극과 만남들에 대해 매번 전면적인 내면적 반응을 보이는 것을 피하고 자신의 속내를 감춤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한다는 것이 짐멜의 후속 설명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짐멜은 대도시에서의 정신적 삶과 관련하여 양적 개인주의와 질적 개인주의를 구분하여 설명한다. 짐멜에 의하면 양적 개인주의란 18세기에 발생한 것으로 “자연이 불어넣었지만 사회나 역사에 의해 훼손될 수 있는 인류의 고상한 본질”을 회복하려는 개인주의 즉, 종교적 억압과 같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구속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려는 개인주의를 의미한다. 반면, 질적 개인주의란 “역사적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개인들이 각기 남과 구분되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이상”으로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질적 유일성과 대체 불가능성이라는 개인적 가치를 유지하려는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짐멜은 대도시에서 개인의 정신적 삶이 결국 이 두 개의 개인주의의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혹은 “투쟁과 분규”를 통해 형성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2.

 

게오르그 짐멜의 설명은 대도시에서 서정시의 역할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대도시가 감각적 자극의 끊임없는 흐름을 낳고 그에 따라 정신적 삶의 영역에서 개개인은 둔감함과 신경과민에 내몰리면서도 고유성을 유지하는 질적 개인으로 남고자 하는 열망을 품게 된다면, 그것은 대도시와 정신적 삶의 영역에서 서정시가 할 일이 적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서정시란 사물들을 익명의 교환가치에 의해 환원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사물 각각의 고유성에 대한 구체적 관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서정시에 대한 오래된 규정 중 하나가 ‘서정시는 사물의 꿈이다’라는 것을 상기해 보라. 또한, 감각적 자극들에 매몰되거나 이에 휩쓸려 신경과민과 둔감함에 치우지는 대신 넘치는 자극들을 수용하여 고유한 내적 반응을 생성시키고 이를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주체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것이 서정시이기 때문이다. 둔감함대신 일사일언(一事一言)을, 교환과 환원대신, 질적 고유성을 택하는 것이 대도시의 자극에 의해 계발되면서도 동시에 정신적 삶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질적 개인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시적 주체의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의 대도시 형성 경험에 나타난 문학적 표상과 재현의 예를 직접 드는 것이 긴 설명을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조선에 근대적 도시가 본격적으로 성립되던 1930년대의 한 정신 풍경의 지형도를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서 단적으로 일람할 수 있을 것이다.

 

 

(1)

가로수(街路樹) 이팔마다 발발(潑潑)하기 물고기 같고 유월(六月)초승 하늘아래 밋밋한 고층건축(高層建築)들은 삼(杉)나무 냄새를 풍긴다 ( …중략)

풀포기가 없어도 종달새가 나려오지 않어도 좋은, 푹신하고 판판하고 만만한 나의 유목장(遊牧場) 아스팔트!

 -정지용, 「아스팔트」 중에서

 

 

(2)

그러나―왜 나는 미끈하게 솟아 있는 近代建築의 위용을 보면서 먼저 鐵筋鐵骨, 시멘트와 細砂, 이것부터 선뜩하니 감응하느냐는 말이다

 

(… …중략)

 

나는 오늘 大悟한 바 있어 美文을 避하고 絶勝의 風光을 隔하여 蕭條하게 往生하는 것이며 宿命의 슬픈 透視癖은 깨끗이 벗어 놓고 溫雅慫慂, 외로우나마 따뜻한 그늘 안에서 失命하는 것이다.

                    

- 이상, 「종생기」 중에서

 

 

(3)

서울의 이곳저곳에 뛰어난 근대적 <데파트멘트>의 출현은 1931년도의 大京城의 주름잡힌 얼굴 위에 假裝하고 나타난 <近代>의 <메이크업>이 아니고 무엇일까(… … 중략) 이 <메이크업>한 <메피스트>의 늙은이가 온갖 근대적 시설과 機構感覺으로써 <젊음>을 꾸미고 황폐한 이 도시의 거리에 다리를 버리고 저물어가는 황혼의 하늘에 노을을 등지고 급격한 각도의 직선을 도시의 상공에 뚜렷하게 浮彫하고 있다.

밤 하늘을 채색하는 찬란한 <일류미네이션>의 人目을 현혹케 하는 변화―수백의 눈을 거리로 향하여 버리고 있는 들창―.

-김기림, 「都市風景 1․2」 중에서

 

 

1930년대에 이르러 경성은 완연하게 근대적 도시의 면모를 지니게 된다. 통계에 따르면, 1928년 현재 경성의 인구는 약 31만 5천이었으나 1934년에는 38만 2천 명에 이르며 1941년에는 무려 97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완연한 성장이 아닐 수 없다. 근대적 도시가 형성됨에 따라 지식인들의 도시 문물 체험은 일상적이면서 동시에 문제적인 것이 된다. 많은 작가들이 소위 ‘산책자’로서 도시의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새로운 문물에서 ‘신기성’을 발견하고 동시에 새롭게 도입된 근대 문물이 자극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따라 부유하는 군중의 모습을 발견했고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관견기로만 간주될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대도시의 넘쳐나는 감각적 자극들의 홍수 속에서 사태를 고유한 방식으로 파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당대의 대표적 모더니스트로 꼽히는 정지용, 김기림, 이상 등은 근대 도시 문물의 상징인 고층 건물에 대한 각기 다른 인상을 기록한 글들을 남기고 있는데 이 글들은 이들이 속도감 있게 육박해오는 근대와 근대적 도시에 대해 보여준 인식의 차이와 그에 따른 미학적 태도의 차이를, 그리고 그 결과 각자의 고유성이 발원하는 지점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정지용은 근대 문물의 상징인 낯선 고층건물에서 ‘杉(삼)나무 냄새’를 느끼고 아스팔트에서 유목장을 상기한다. 이는 낯설고 새로운 것을 친숙한 감각을 통해 전유하는 정지용 특유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근대 도시의 넘쳐나는 자극들을 감성적으로 전유하여 새로운 이미지로 벼리는 것이 정지용의 방식이다. 반면 이상은 낯선 자극을 감성적으로 전유하여 친숙한 이미지들의 결합체로 변환시키는 대신 정공법을 택한다. 그는 근대건축의 위용을 보면서 무엇보다 먼저 철근철골, 시멘트와 세사 등을 “선뜩하니 감응”한다고 말하며 이를 스스로 ‘슬픈 투시벽’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근대와 근대 도시에서의 삶을 해부학적 시선으로 투시하는 것이 이상의 방식이다. 김기림의 태도는 또 다르다. 각기 근대와 근대 도시의 감각적 전유와 수학적 환원으로 환언될 수 있는 정지용과 이상의 태도와 달리 그는 고층 건물의 외관에서 ‘메이크업한 표정’을 읽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근대 도시의 물리적 알리바이로부터 매혹과 불안이라는 양가적 정서를 느낀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일종의 신경증이라고 표현될 만한 성질의 것이다. 근대 도시의 산물을 익숙한 감각에 의해 치환하고 전유하거나 대도시라는 괴물을 수학적 알고리즘으로 해부하고 포획하는 태도와 달리 김기림은 근대 도시가 지시하는 숨은 기표를 더듬으며 때론 그것을 매혹으로 때론 그것을 불안으로 풀어내고 있다. 김기림의 작품에 나타나는 근대도시에 대한 양가적 태도가 이런 신경증적 태도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1930년대에 대도시가 본격적으로 성립됨에 따라 작가들은 그것이 주는 새로운 감각적 자극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이에 대해 고유한 대응을 해나갈 것인가를 각자의 방식으로 모색했으며 그 귀결이 그들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3.

그렇다면 최근의 사정은 어떠한가를 간략히 살펴보기 위해 최근의 시 두 편을 더 읽어 보자.

 

(1)

도시는 수많은 유리알을 낳는다

 

도시의 유리체를 통과한 것들은

유리체 통과의 꿈을 꾸지 않는 것들과 함께 있지만

유리체를 통과하지 않은 것들과 같지 않다

아직도 뒹굴며 꿈꿀 뿐이다.

 

돌아온 것들은 죽고 완성된 것은 훼손된다

꿈을 통과하지 않은 것들만 밖에서 천예(天倪)의 숨을

쉰다. 유리체는 녹화되지 않고 영원히 비어 있다

구름을 향해 그들은 불구의 몸으로

가지를 뻗는다

 

이미 사라진 것의 남은 존재들은

지나간 거리에 긴 그림자를 끌기 시작한다

오늘도 혼돈은 눈을 감고, 길을 차단하고 돌아와

깨어나지 않는 유리알 속으로 사라진다

-고형렬, 「유리알 도시의 빌딩 속에서 - 고귀한 삶을 빙자한 숲의 은유」 전문

 

 

(2)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 낸다. 눈빛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빛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소리. 단추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 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 이재훈, 「명왕성 되다」 전문

 

 

(1)이 이미 경험의 본원적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로 자리 잡은 도시를 단적으로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라면 (2)는 도시에서 질적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겪어내는 정신의 운동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우선 인용(1)을 보자.

유리는 바깥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다른 세계를 환기시키는 동시에 스스로 차단막으로 기능한다. 이 이미지는 도시의 심리적 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는 얼핏 보아 유리와 숲의 대립 구조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도시 자체가 이미 매혹과 환멸, 방랑과 귀환, 순수와 퇴화의 심리 구조로 축조된 것임을 적실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도시는 매혹으로도 환멸로도 펼쳐질 수 있는 감각적 자료들을 끊임없이 생산하여 주체의 감성에 기입한다. 넘치는 자극들로 인해 익명성과 은닉의 편안함 속으로 퇴거하는 것도, 넘치는 자극들을 수용하여 질적 개인으로 재탄생 하는 것도 모두 가능하다. 이처럼 서정시가 자극의 감성적 전유과 감각적 표현을 통해 도시인의 정신적 삶을 개변시킬 수 있는 격려가 될 수 있는 여지는 항상 도시가 낳은 피로감을 토로하는 것을 반복할 위험과 동시에 존재한다. 인용(2)를 보라.

이 시의 배경이 되는 것은 출퇴근길의 2호선 지하철이다. 이 시의 주체는 지금 익명과 소외, 그리고 기계적 규칙성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다. 이것이야말로 도시 생활자의 정신적 삶에 대한 노골적 은유가 아닐 수 없다.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생(生)”, 모든 대면 접촉이 시간을 두고 익명성의 궁륭이 되는 부박한 삶의 한 가운데에서, 게오르그 짐멜식으로 표현하자면 연속적인 익명적 자극이 끊임없이 주어지는 도시적 삶의 한 가운데에서 이 시의 주체는 질적 개인으로의 탄생을 꿈꾼다.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하고 묻는 것은 삶의 고유성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열망의 불씨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심회는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는 말을 통해 역설적으로 다시 한 번 표현된다. 폭풍이란 바로 기계적 삶의 리듬을 뒤흔들 파국이 아니겠는가? 일상에 한 번 생긴 파국은 언제나 치명적이다. 그것은 항상 이미 생긴 파국이기 때문이다.

시인 김수영은 “도시의 피로”를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새로운 삶의 씨를 틔우는 텃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아니, 그 가능성을 믿으며 도시의 피로, 바로 거기로부터 삶의 새로운 지평이 발원하기를 열망했다. 신경과민과 둔감함, 그리고 환원의 피로가 도시의 것이라면 새로운 감각이 탄생하고 피로로부터 신세계로의 발원을 가능하게 하는 씨앗을 품고 있는 것도 도시이다. 서정시는 토로하고 전유하고 창조하고 싹 틔운다. 갑을 시대에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 다시 한 번 필요한 까닭은 우리가 누구도 양적 보편성으로 환원되는 개성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둔감에 매몰되는 재난에 대해 시만한 방재시스템이 따로 없다. 

 

_ 출처 : <시인수첩>, 2014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

기타가 있는 궁전

 

 

이재훈

 

 

아버지가 기타를 연주하십니다. 나는 아버지의 다리 밑에 누워 있습니다. 기타에서 떨어지는 마른 고독이 목젖을 열게 합니다. 노래를 부릅니다. 말들이 우르르 목덜미로 떨어집니다. 말들이 저 밖으로 퍼지지 못하고 등 뒤로 차오릅니다. 나는 말 위에 떠 있고, 아버지는 저 말 속에 계십니다. 내가 뱉어놓은 검은 말 속에서 기타를 연주하십니다. 말이 진화하면 물이 된다지요. 고도로 단련된 연금술인 셈입니다. 허공에 산화되어 사라지는 말을 만들어 냅니다. 그제서야 저는 말을 배웠습니다. 내 말은 이미 물이 되었습니다. 물속에서 기타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버지가 기타를 연주하신 곳은 궁전이었다고 합니다. 그 궁전의 돌계단이 너무 높았지요. 다리가 아파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곤 노래 위를 떠다녔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했던 기억의 꽃잎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립니다. 검은 말들이 기타의 현을 먹고 저렇게 아름답게 치장을 하다니. 참 감동스럽습니다.

겨울이 오고 말들이 얼어붙습니다. 저는 도끼로 말들을 내려칩니다. 얼었던 말의 입이 쩍 벌어지고 피가 솟아오릅니다. 아버지, 제 말이 자꾸만 피가 됩니다.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려옵니다. 등 뒤로 솟는 피가 참 따뜻합니다.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중에서

 

 


 

 

 

이재훈의 「기타가 있는 궁전」을 읽으면서 어떤 연주가 사건이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생각했다. 하나의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여러 사태들을 연쇄적으로 이끌어낼 때, 그 사태는 사건으로 전화된다.

이 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은 아버지의 기타 연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아버지의 연주를 시적 화자는 자주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연주에서 “마른 고독”을 듣게 될 때, 그 연주는 사건으로 전화된다. 저 연주가 “마른 고독”임을 감지하는 순간 시적 화자의 목젖이 열리게 되기 때문이다. 하여, 열린 목젖은 노래를 불러일으키고 “나는 말 위에 떠 있”게 되며 아버지는 “내가 뱉어놓은 검은 말 속에서 기타를 연주하”시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은 시적 화자가 부르는 노래의 말이 물로 진화하게 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물과 같이 흐르는 노래는 말의 궁륭을 이룰 수 있게 했던 것이어서, 아버지는 그 궁륭의 궁전에서 연주하시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시적 화자의 노래를 불러일으켰던 것이 아버지가 연주하는 “기타에서 떨어지는 마른 고독”이었음을 상기해본다면, 말이 물로 진화될 수 있었던 것은 고독하게 말라버린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슬픔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그 고독과 슬픔은 어떤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한 사람을 사랑했던기억의 꽃잎들”인 “검은 말들”이 그 죽음을 암시한다. “검은 말들”에 기타의 현을 먹이는 아버지의 연주는 죽어버린 연인에 대한 “기억의 꽃잎들”을 반짝거리게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가 “뱉어놓은 검은 말”이란 결국 기타 연주로 현현한 아버지의 검은 말들을 미메시스한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교묘하게 시간은 순환되는데, 화자가 자신의 “검은 말”에 아버지를 유폐한 것은 바로 아버지가 연주로 전화시킨 “검은 말들”에 미메시스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의 순환이 가능한 것은, “등 뒤로 솟는 피가 참 따뜻”하다는 문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아버지와 화자가 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려옵니다”라는 문장에서 암시받을 수 있듯이 저 일련의 사태들은 화자의 기억과 상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현재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암시 말이다.

그래서 “겨울이 오고 말들이 얼어붙”은 것 아니겠는가. 하여, 이재훈 시인에게 시 쓰기란 그 얼었던 말들을 도끼로 내려쳐서 그 말 속의 피―아버지의 피이기도 할―를 솟아오르게 하는 것이다. 말을 피가 되게 하는 시 쓰기는 아버지의 연주처럼 죽은 연인에 대한 기억―“검은 말들”―에 악기―“기타의 현”―를 먹이는 일이기도 할 터, 결국 그것은 현재 얼어붙어 있는 ‘사건’―“마른 고독”을 떨어뜨리는 아버지의 기타 연주-을 다시 기억하여 되찾는 일인 것이다.

- 이성혁(문학평론가)

 

출전 : <시사사>, 2014년 1~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

꿈처럼 오련하게 사레들리네

 

 

 

이재훈

 

 

 

 

정말 오랜만에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닌 줄 알면서도 이 어쩔 수 없음이 제 마음을 다시 붙잡습니다. 늘 당신에게 나는 막무가내의 고집쟁이로 비춰졌겠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당신이 나를 만난 이후로 활짝 웃는 날보다 우울했던 날들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저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하기보다는 늘 각을 세우고 칼 같은 말들을 내뱉던 시절 말입니다. 문학을 한다는 이유로 한없이 유치하고 철없이 굴었던 시간들이었죠. 하지만 그때도 알고 있었어요. 당신과 내가 얼마 후면 이별할 수도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마 당신이 아니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시작하기도 전에 다 보일 때가 있습니다. 다 보인다고 믿고 있는 자신의 마음처럼 서글픈 일은 없죠. 사랑은 제게 화두와 같은 것입니다. 다른 관념의 외피를 입을 때조차도, 사랑의 일을 돌보는 것은 제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어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럴 때 내 영혼의 한계를 발견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게 사랑의 일이라지만, 너무 어렵고 힘이 듭니다.

쓸쓸함을 사랑하는 건 나 자신을 사랑하려고 하는 노력의 하나입니다. 쓸쓸함도 지금 내 모습의 일부이니까. 그때 나는 어떤 꿈이 있었을까요. 시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막무가내로 바랐던 꿈이었습니다. 당신은 내게 이런 말도 했었죠. “시가 좋아요? 내가 좋아요?” 그건 범주가 다른 문제라고 말했지만, 당신이 내게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어쩌면 사랑을 잘 몰랐던 겁니다. 에릭 프롬이나 구약의 아가서에 나오는 사랑만이 사랑인 줄 알았던 겁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며, 살아가는 일이며, 함께 옆에서 호흡하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거죠. 내 꿈이 시인이었기에, 자주 시의 동력을 얻기 위해 숨어버렸습니다. 사람살이가 모두 달라서 달팽이의 칩거가 꿈인 자도 있죠. 나는 그때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그때 바라보려 하지 않고 숨어버리려고 했으니까요. 마음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과 같아서, 파릇파릇 당신이 지금 돋아납니다.

아무 것도 몰랐던 시절이라고 하겠습니다. 늘 변죽만 울리다가, 자기비하에 빠지는 편지만 썼던 시절입니다.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은 꼭꼭 숨겨두었던 시절입니다. 그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촌스러운 거라고 생각한 내가 참 한심합니다. 참 소심했습니다. 자꾸만 삶이 어떤 힘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에 대해 두려웠습니다. 일반의 구속과 다른 사랑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빨리 늙고 싶었던 듯도 합니다. 내 마음의 원함이 늘 그런 식이었습니다.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내게 당신은 위로였습니다. 늘 가장 먼저인 시간에 당신이 있었습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로 아플 때도 먼저 당신이 떠올랐습니다. 바깥의 바람을 맞고 들어와 헝클어진 머리와 차가워진 몸을 당신의 기억으로 덥혔습니다. 날 방치하고, 몰아세우고, 핍박하던 시간들. 당신을 만난 것은 작은 우연으로 시작되었지만, 당신을 만난 게 우연이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 이후로 꽤 오랫동안 궁핍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기도 했죠. 순정이란 것을 당신으로 인해 알았습니다. 늘 수동적이었던 나. 사람의 이성과 감정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일 때 비로소 제 것이 된다는 걸 왜 몰랐을까요. 당신을 통해 어떤 의미들이 차곡차곡 쌓여 갔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바퀴의 절망과 환희를 돌아 결국 제자리에 서 있을 때, 언제부터 혼자 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누군가 기댈 어깨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언젠가부터 혼자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아마, 당신을 시작으로 천천히 성숙되어갔나 봅니다.

당신이 나를 만나 큰 것들을 버렸다고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그때 당신은 용기를 가진 자였습니다. 나는 무엇을 버렸을까요. 늘 망설였던 것 같아요. 이건 모두 당신을 실패할까봐 두려워서겠죠. 당신을 오래오래 봐야겠다는 설익은 마음으로 그랬을지도. 늘 말줄임표로 끝이 나는 당신에 대한 생각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잊으려했네, 내 가슴에 철쭉마냥 흐드러진 분홍빛 시간을, 저어기 삶의 저쪽에 띄우려했네, 흘러가면 그만이겠지, 한 세월 넘어 河口에 닿으면 분홍으로 물든 물빛, 그 빛깔 기억하면 되겠지, 그의 집 앞, 옷가슴, 덕적덕적 낀 욕망을, 백수광부처럼 노래하며 떠나 보내려했네, 그러나, 내 가슴 아직 고여 있네, 썩으면 어떡하나, 물가로만 빙빙 도는, 내 속 수면 위에 떠서 자맥질하는······ 그 철쭉 그만 삼켜버렸네, 어떡하나 내 사랑, 도근도근 내 사랑, 나 몰랐네, 빛 좋은 철쭉, 먹으면 죽는다는 전설을, 아아 사레들리네, 꿈처럼 오련하게, 사레들리네

― 「강」 전문

 

나에게 사랑시는 없습니다. 사랑으로 가는 길목의 지난함만이 있을 뿐. 사랑이라고, 첫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사레들릴 것 같습니다. 철쭉은 아름다운 꽃이지만 먹어서는 안 되는 꽃입니다. 철쭉의 운명과 분홍 빛깔의 아름다움이 내 사랑의 이미지입니다. 먹으면 죽는다는 전설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사랑을 꿈꾸었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네요. 다만 당신의 빛깔과 생각하면 떠오르는 맛과 자꾸 사레들어 고개를 돌려야했던 풍경만이 선명합니다.

사실 내게는 당신이 참 낯선 경우였습니다. 애매함의 경계 위에서 위태위태하게 걷고 있는 시간들이. 터무니없이 허둥댔던 그 긴 밤의 시간들이. 바보처럼, 답답하게, 깊은 망설임의 안개 속에서 앞을 못보고 발걸음치던 시간들이. 다만, 조금 늦거나, 조금 빨랐을 뿐이라고 자위했습니다. 당신 눈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보였다고 했죠. 당신을 보면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한 아련함과 불편함 때문에 복잡한 심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내게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이었죠. 그런 게 바보 같았나요? 지금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요.

당신을 만나겠다는 미련한 생각은 안하기로 했습니다. 이제 당신을 볼 수 없지만, 그 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봄철 아지랑이 올라오는 긴 흙길을 함께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란히 걷지 못하고, 손 잡아주지 못하고 자꾸 뒤만 돌아보았던 그때. 그 시간이 있음으로 사랑을 조금 엿보았던 것 같습니다. 부디, 행복하기만을 기도하겠습니다.

재훈

 

_ 출처 바로가기 : <어쩌다 당신이 좋아서 - 내 생애 최고의 '사랑 고백'을 꿈꾸는 그대에게>, 곰, 2013, 14,000원

 

 

 

Posted by 이재훈이
,

한 글자 사전 - 잎

산문 2013. 12. 11. 13:10

 

 

 

이재훈

 

 

 

 

버려진 것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쓸쓸한 존재들이 스멀스멀 꿈틀거린다. 허물어지고 홀로된 존재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서럽게 아름답다. 이런 아름다움은 사람에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잎은 아름답다. 잎이 더 아름다우려면 버려져야 한다. 버려진 것들의 아름다움을 잎이 가장 완벽하게 증거한다.

잎은 꽃과 나무에 떨어질 듯 들러붙어 한 계절을 난다. 초록의 빛깔로 자신의 청춘을 온힘으로 뒤흔든다. 초록의 몸이었을 때 사람들은 그 몸의 숨을 마신다. 청춘의 숨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청춘의 숨처럼 온몸을 차오르게 하는 게 있을까.

잎은 소멸을 증언한다. 소멸의 순간이 아름답다는 역설을 증언한다. 스러져가는 존재에 환호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아직 내 차례는 아니라는 안도감이겠지. 모든 젊음은 시든 운명을 타고 태어난 것. 모든 청춘은 지는 운명을 지닌다. 잎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잎은 저마다 아름답게 늙는 법을 안다. 붉게 늙고 노랗게 늙고 적갈색으로 늙는다. 사람들은 몸에 붙어 있을 때보다 제 몸으로부터 떨어진 잎에 관심을 갖는다. 이탈된 존재에 대한 관심은 본능적인 것일까. 이탈된 나를 본다. 이탈된 우리를 본다. 이탈된 가방. 이탈된 책. 이탈된 영혼. 이탈된 사랑. 주변엔 모두 이탈자들뿐이다. 국적 없는 자들은 고독하고 쓸쓸하겠지만, 그들에겐 소용 있는 고독이 있지 않은가. 아무것에도 소속되지 않고 유일하게 혼자이고 싶다는 철없는 객기가 순간순간 불쑥 일어난다.

쓸려 어딘가로 버려지기 전. 잎은 노쇠해져가는 자신의 미학을 가장 완벽히 보여준다. 하지만 그 소멸의 말로는 잔인하게 버려지는 것이다. 빗자루로 포대자루로 리어카로 트럭으로 쓸리고 실려 버려진다. 태워지고 분해되고 땅속으로 파묻힌다. 마치 아우슈비츠처럼. 마치 신자유주의 시민들처럼.

그러나 잎을 찬양하지 말 것. 소멸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지 말 것. 찬양받고 감탄되는 것들은 모두 가짜이기 때문이다. 그저 내가 좋고 네가 좋으면 그뿐인 것이다.

 

파편

 

파편의 아름다움은 아마 모여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에서 시작할 것이다. 잎은 저 홀로 있을 때 빛나지만, 모여 있을 때는 거리의 색채가 보여줄 수 있는 충일감 때문에 황홀하다. 초록의 시절. 잎은 서로 손을 잡고 제 어미의 몸을 간절히 부여잡는다. 세상에 간절한 것만큼 마음 아리는 게 있을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잎은 절대로 그 손을 놓지 않는다. 간절한 마음이 잎의 몸을 초록으로 물들게 했을 것이다. 목에 굵은 힘줄이 불거져 초록으로 온몸을 새겼을 것이다.

간절함과는 상관없이 잎이 제 어미와 떨어져야 할 때. 잎은 제 몸을 바람에 내맡긴다. 제 터전이 아닌 어딘가로 잎은 날아간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미지를 향해 잎은 제 몸을 맡긴다. 헤어지고 떨어지고 슬퍼하는 게 추앙받는 계절. 온몸과 마음이 파편으로 남아도 아름답다고 말하는 계절. 붙들었던 것을 놓을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을 배우는 계절. 가을은 잎의 계절이다. 잎은 가을에 완성된다.

 

기다림

 

벤치에 떨어진 잎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다. 아마 생의 마지막 기다림이겠지. 어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손을 잡고 벤치에 앉을 때, 그 잎은 치워질 것이다. 기다림은 그런 것이겠지. 바깥으로 치워질지 알면서도 설레는 시간이 기다림이겠지.

잎 하나 책갈피에 꽂아 넣고 짧은 기억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본다. 꽃잎은 맑은 물에 띄워 차로 마시기도 한다. 잎은 제 몸이 바짝 말려진 뒤에도 기다림의 시간을 견딘다. 화석조차도, 말려진 몸조차도 쓸모 있는 잎의 오지랖. 말린 잎의 몸에선 향기가 난다. 스스로 욕망하지 못하고 순응적으로 호흡하며 살아온 향. 물과 공기만으로 제 몸을 삼투한 향. 기다림에도 향기가 있다면 이런 내음이 아닐까.

 

태초

 

동물의 노쇠는 누추한데 왜 식물들의 노쇠는 찬란할까. 가장 성실한 생명의 열매였던 잎은 다시 땅의 입으로 들어간다. 마치 그곳이 잎의 기원이라는 듯이. 시(詩)는 잎을 기록하지 않는다. 잎의 운명과 함께하는 것뿐이다.

 

 

_ <문예중앙>, 2013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

 

 

 동경(銅鏡)

 

깨진 기왓장을 주워 주머니에 넣으면, 그 속에서 비닐에 덮여 자고 있는 여인을 볼 수 있다. 콧대와 턱이 뿌연 비닐과 뒤엉켜, 툭 건드리면 바삭 부서질 것 같다. 팔딱팔딱, 손가락 사이로 심장 소리가 뛰어올랐다. 모든 소리들이 긴 줄에 매달려 그네를 탔다. 녹색의 밤. 신발을 잃어버리고 울었던 밤. 나는 단지, 일생을 꿈꾸었을 뿐인데. 챙, 소리에 놀라 보니 사방에 깨진 파편들이 반짝였다. 깜박깜박, 수많은 눈동자가 길을 물었다. 그네는 삐걱거리며 보랏빛 옷만 남겼다. 깊은 숲길에 안개가 뿌옇고, 여인은 안개를 덮었다.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면 천년을 건너온 어떤 눈동자에 손을 베인다. 스윽.

- 이재훈 (1972~ )

 


△ 시는 언어 속에 내장된 사유가 좀 더 극단적으로 외침이 된 형태이다. 이 때문에 몇몇 시인들은 언어가 생성되기 이전에 감각된 어떤 질감을 전략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그것을 초능력으로 비한다면, 사이코메트리(Psychometry)일 수 있겠다. 사이코메트리란 사물 속에 잠재되어 있는 혼을 계측하여 해석하는 능력인데, 대개 이재훈의 시가 성립되는 방식이 그렇다.

 


깨진 기왓장을 자신의 주머니 속에 취했을 뿐인데 발화자는 기왓장과 함께 살다간 여인을 손의 촉감만으로 재구성한다. 손끝으로 뭉개진 얼굴을 지나 그네를 타고 노니는 소리의 운동성을 느끼고 잃어버린 신발, 보랏빛 옷의 감촉까지. 여인을 둘러싼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주머니 속에서 종합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오래된 거울에서 살다간 이미 지워져버린 삶의 기록들이자 주변의 역사들이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생애의 파편들이다.

 

그가 자주 태초의 시공간을 자신의 언어 속에 안착시키고, 소멸해간 것들을 호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근대 시스템이 가진 폭력을 자신의 초능력으로 일격에 무너뜨리고, 또 회복시키기 위해서가 아닐까. 아픈 줄도 모르고 살다가 그의 시를 읽는다. 그에게는 시원(始原)이 있고, 자주 나의 손을 베이게 해 왜 아픈지 또 질문하게 하는 것이다.

 

 

 

 

 

 

 

 

 

 

 

 

 

*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1242025165&code=990100

 

 

Posted by 이재훈이
,

 

 

<명왕성 되다>. 영상 : 윤형철 감독. 영상 출처 : 유튜브 

 

 

<재킷을 입은 시인>. 영상 : 윤형철 감독. 일러스트 : 우소영 작가.

 

'시시각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약수파  (0) 2014.03.31
2013년 송년회  (0) 2013.12.05
[행사] 젊음, 시로 폭발하다  (0) 2013.12.02
극단 <두목> 특강  (0) 2013.12.02
[행사] 젊음, 시로 폭발하다_ 웹자보  (0) 2013.11.27
Posted by 이재훈이
,

11월 21일 서울과기대에서 <젊음, 시로 폭발하다> 행사가 있었다.

최치언 형의 연출과 극단 <두목>이 함께 했다.

이병률, 강정, 김경주, 오은, 조인호, 장수진 시인과 함께 출연했다.

이날 박성훈 배우가 <명왕성 되다>를 낭송했다. 고맙다! 성훈아.

나는 <재킷을 입은 시인>을 낭송했다.

수업을 더 늦출 수 없어 2부를 보지 못해 아쉬웠다.

뒤늦게 뒷풀이 자리에 합류했다.

다시 만난 2인조 밴드 <투명>과 영상작업을 한 윤형철 감독과의 만남은 오래 남을 것이다.

 

 

<명왕성 되다>. 낭송 : 박성훈 배우. 영상 : 윤형철 감독.

 

 

<투명>의 민경준, 정현서 씨와. 정현서 씨와는 동갑내기여서 친구가 됐다.

 

 

 

'시시각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3년 송년회  (0) 2013.12.05
<명왕성 되다>, <재킷을 입은 시인> 영상  (2) 2013.12.02
극단 <두목> 특강  (0) 2013.12.02
[행사] 젊음, 시로 폭발하다_ 웹자보  (0) 2013.11.27
<시원> 동인 옛 동지들과  (0) 2013.11.27
Posted by 이재훈이
,

황하의 순례자

- 이재훈론

 

 

김혜영

 

 

 

1. 기원을 향한 아득한 향수

 

원시 부족사회는 그 집단을 다스리는 위대한 아버지가 있었고,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법과 심판을 수용해야 하는 윤리적 구속과 그 속박을 끊고 감히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고픈 욕망도 함께 가졌을 것이다. 아버지의 법을 지키는 것과 아버지의 법을 위반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는 종교든 세속의 정치권력이든지 언제나 의식의 틈새를 비집고 출현하는 사건이다. 가장 작은 집단인 가족 안에서 아버지가 차지했던 권력은 어린 아들에게 전지전능한 아버지의 환상을 품게 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뿐만 아니라 원시 사회의 추장이나 고대 국가의 왕이 소유한 절대 권력이 갖는 아우라가 어쩌면 자연스럽게 전지전능한 그 어떤 절대적 존재에 대한 종교적 사유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고대국가의 왕이 소유한 신성함은 종교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왕의 집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금기와 터부 역시 내포하고 있다. 그 절대적인 아버지가 현대에서는 여러 번 살해되었고 끊임없이 전복되고 있다. 기원으로서의 아버지를 해체한 현대 문명 속에서 고독한 개인들은 현상의 물질적 가치 혹은 생존을 위한 가혹한 경쟁체제에 매몰되어 황하에 익사될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이재훈의 시 세계는 기독교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하여, 존재의 기원에 대한 상상과 별을 노래하는 시인의 깊고 푸른 여정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적 공간은 광활하고 존재의 깊은 심연에 대한 탐색을 추구한다. 첫 시집인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는 “말”이라는 상징적 동물과 언어라는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시적 화자는 상상 속의 말을 타고 아득한 존재의 기원을 찾아 중세의 기사처럼 순례를 떠난다.

 

   1

 

   그곳을 찾았을 때

   모든 시간은 무너지고

   가없는 기억의 언덕도 무너지고

   또닥또닥,

   희미한 발굽 소리만 들렸는데

 

   2

 

   잠든 말, 묵상도 없는 말들이 벽에 붙어 있다 너의 소리를 들으려고 널 만진다 그제야 너는 벽화가 된다 널 만지면 황소가 되었다가 사슴이 되었다가 초원을 가로지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타 노래를 부르는 추장이 된다

 

   ―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부분[각주:1]

 

세계의 근원을 기독교에서 로고스 즉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거룩한 신의 말씀으로 창조된 우주와 인간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 시인은 맹목적으로 신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기원에 대한 역사를 쓸 야심을 갖는다. 이 세상에서 아무도 가지 않는 나만의 시원, 나만의 언어 찾기에 골몰하는 것이다. 그가 타고 가는 말은 고대 토템에서 부족들이 숭상했던 여러 동물들 즉 황소, 사슴, 말, 돼지, 매, 뱀 가운데 하나이다. 시인이 말을 선택한 것은 말을 타고 하늘을 날고픈 비상의 의지와 함께 언어의 연금술사를 꿈꾸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사명은 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언어에 자신만의 새로운 언어의 집을 건설해, 커다란 변화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을 지향하는 시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그의 첫 시집이다.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내 목을 자르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라고 절연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재훈의 시적 여정에서 이토록 담대한 선언이 또 있겠는가. 자신의 목을 스스로 자른다는 것은 자살의 의미보다는 성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부분이다. 예수의 비범한 능력으로는 죽음의 잔을 피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 선포한 진리를 위해 죽음의 길을 스스로 걸어간 예수와의 동일시가 비쳐진다. 예수가 유대교의 모세 신앙을 중심으로 한 유일신 개념과 선택받은 민족에 대한 우월의식을 타파하고 보다 넓은 보편성의 종교로 방향을 전환한 것처럼 이재훈이 시인으로서 지향하는 것은 새로운 자신만의 기원 찾기인 것이다.

인간 존재의 본질과 아득한 시원에 대한 탐색을 지향함에 있어서 아버지를 위반하는 아들의 출현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이다. 중세나 16,17세기의 종교시에는 전능한 하느님에 대한 찬미와 신성한 섭리에 부합되는 삶을 살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20세기 이후의 종교시는 신에 대한 헌신이나 찬미 보다는 신으로부터 이탈한 현대인의 초상이나 신을 전복하려는 시도를 한다. 남성적인 아버지 신에 대한 반기로써 여성시인들은 가부장제의 모태로서의 아버지 신을 거부하고 살해하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한다. 이재훈의 시 곳곳에 스며있는 종교적 상징과 이미지는 아버지 신을 살해하고 아들로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보다는 그 어떤 근원에 이르기까지의 혼란스러운 순례의 기록으로 읽혀진다. 첫 시집에서는 낭만주의적 사유의 흔적을 보이면서 아득히 먼 고대의 시공간을 배회하는 영혼의 몸짓을 묘사하고, 둘째 시집인 <명왕성 되다>에서는 자본주의라는 물신 사회의 왜곡된 이미지를 황하의 다양한 풍경 속에 풀어놓는다. 욕망과 자본이라는 이교도의 신을 위해 예수라는 인격신을 살해한 현대 문명의 기괴한 얼룩을 스케치한다. 대도시의 풍경과 중국을 관통해서 흐르는 황하 이미지를 중첩적으로 겹쳐 놓음으로써 고대 문명과 현대 문명의 이질성과 여전히 삶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을 펼쳐 보인다.

모세는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선언함으로써, 절대적 진리가 감각적 대상이 아닌 정신적인 것임을 그의 백성들에게 각성시킨다. 고대 문화에서는 이집트 신화처럼 여러 다양한 동물 신의 형상과 태양신 ‘라’ 의 상징이 지배적이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영원히 존재하고, 무한히 자비와 축복을 베푸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이라는 유일신의 개념은 이전의 다신교의 전통을 억압해 버린다. 예수가 죽은 이후에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한 유대인 바울 역시 육체 보다는 정신적 사랑의 우위를 설파한다. 그러나 이재훈은 그러한 가치에 함몰되지 않고 감각의 순수성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그의 시「수선화」에서는 한밤중의 몽정인지 자위인지 알 수 없지만 사춘기 소년의 육체에서 꽃피는 생명의 노래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한밤중에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을 잘 무렵이면, 내 몸에 꽃씨 앉는 소리가 들린다. 간지러워, 암술과 수술이 살 부비는 소리가 사물거리며 온몸에 둥지를 틀고, 어머 꽃피네, 마른버짐처럼, 간지러운 꽃이 속옷새로 피어나네, 내 몸에 피는 꽃, 어머 내 몸에 핀 꽃, 나르키소스의 영혼이 노랗게 물든, 수선화가 핀다, 아름다운 내 몸, 노랑 꽃파랑이 쓰다듬으며 어깨에서 가슴을 지나 배꼽으로 핀 꽃과 입맞추고, 시커면 거웃 사이에도 옹골지게 핀 꽃대 잡는다, 아아, 아 에코가 메아리치네, 아름다운 내 몸, 거울에 비추어, 아아아 에코가 흐느끼네, 내 몸이 하분하분 물기에 젖네, 꽃들이 더펄거리며 시들어가네, 나르키소스여 내 몸에 오지 마소서 五慾에 물든 몸 꽃피게 마소서

   한밤중이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들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나

 

   ― 「수선화」 전문[각주:2]

 

사춘기 소년이 겪는 성적 욕망의 발산을 수선화의 이미지를 통해 묘사하면서, 금욕을 미화시키는 종교 사이에서 갈등하는 소년의 내면을 보여준다.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가 자기애에 빠진 모습도 동시에 연상시킨다. 나르키소스가 연못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연못에 빠져드는 모순을 두려워하는 시적화자의 심적 갈등이 구체화되어 있다. 자기애를 지향하는 이드의 폭력적인 충동과 타자에의 사랑을 강조하는 초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심리적 에너지가 예술로 승화된 시이다. 생명으로 충만한 육체의 순수한 욕망과 그것을 억압하려는 윤리 사이에서 고민하는 소년의 긴장과 두려움이 노란 수선화처럼 어둔 밤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시이다.

 

2. 명왕성처럼 퇴출당한 신의 아들들

 

프로이트는 <종교의 기원>에서 종교와 신경증과의 상관성을 흥미롭게 진행하면서 정신적 외상에 대해 설명한다.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라는 논문에서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탈출시키고 새로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려한 모세를 살해한 기억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세가 가르쳐준 유일신의 교리가 그들을 너무 억압했기에 모세를 살해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를 죽인 죄의식과 함께 모세의 신앙으로의 회귀를 전승을 통해서 이루어왔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를 죽인 후, 죽은 예수에 대한 사랑을 재확인하고 예수의 성찬식을 되풀이하는 종교적 의식과 유사하다. 이 같은 증상이나 사고의 패턴이 신경증 환자에게도 나타난다고 그는 주장한다. 강박증을 가진 환자들이 무엇인가를 금기시하거나, 강박적으로 특정 행위를 반복하는 것 역시 속죄 혹은 자기 방어의 충동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의 토템 신앙에서 부족의 상징으로 신성시하는 동물을 잡아 서로 나누어 먹는 전통이 기독교에서 예수의 몸과 피를 나누어 먹는 의식으로 계승되었다고 보고 있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는 현대 종교도 고대 원시 사회의 토템 신앙과 다신교의 여러 이미지들을 계승하고 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로버트슨 스미슨의 토템 이론을 바탕으로,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던 무리는 토템을 받드는 형제를 중심으로 하는 무리로 자리바꿈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아버지로부터 승리를 쟁취한 형제들은 아버지를 죽인 뒤부터 아버지의 소유였던 여자들을 포기하고는 족외혼속을 좇게 되었다. 이로써 아버지의 권능은 붕괴되고 가족은 모권 중심으로 재편성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들의 양가적인 감정 태도는 그 이후의 전 발전 단계에 걸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형제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특수한 동물을 토템으로 세웠다. 이 토템 동물은 형제들의 조상이자 수호령신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다치게 하거나 죽여서는 안되었다. 모듬살이의 남성들은 일년에 한 번씩 한자리에 모여 의례적인 향연을 벌였는데, 그들은 바로 이 자리에서 토템 동물(평소에는 숭배의 대상이던)을 죽이고는 모두 그 고기를 찢어 나누어 먹었다. 모듬살이의 남성이면 어느 누구도 빠질 수 없는 향연은 아버지 살해의 의례적인 반복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사회적인 질서, 윤리적인 규범, 그리고 종교가 시작되었다. 로버트슨 스미스의 토템 향연과 기독교의 최후의 만찬 사이의 유사성은 무수한 내 선배 학자들의 주목을 환기시켰다.[각주:3]

 

기독교의 만찬의식을 고대의 토템 동물을 제사지내고 서로 나누어 먹는 전통과 연관시키는 것은 흥미롭다.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절대적인 아버지의 잔영과 그 아버지를 살해하는 아들들의 이미지는 인간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증상임을 설명하고 있다. 개인의 측면에서는 유아기 때 겪은 외상 같은 것들이 잠복되어 있다가 사춘기나 성인기에 반복되어 출현하는 신경증의 형태로 나타난다. 종교에서도 부친살해와 그에 대한 죄의식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이성의 억압을 피해 은폐되었다가 전승이라는 구술의 방식 혹은 문학이나 예술의 형태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재훈의 시 「할례의 연대기」에서는 어릴 적 경험한 폭력이 어른이 된 이후에도 수족관의 물고기를 보면 반복해서 떠오르는 양상을 볼 수 있다. 동네 형들의 짓궂은 장난에 저항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가 내면에 증오심을 차곡차곡 쌓지만 한편으로는 그 감정을 억압해버린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였던 수족관의 물고기를 풀어주는 행위로 전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동네 형들이 내게 침을 뱉던 날,

하얗다며 얼굴에 진흙을 바르던 날,

공중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오줌을 내갈겼다.

붉은 얼굴로 욕하는 연습을 했다.

다행히 집엔 물고기가 있었다.

수족관 유리에 입술을 대고 혀를 내밀었다.

차갑고 막막하여 아름다운 감촉.

침묵을 알아버린 호흡.

나는 방 안에 박혀 물고기와 놀았다.

온 몸이 달아올라 수족관에 다리를 비볐다.

물고기 때문이었다.

악한 아이를 죽이지 못하고

풀밭 위에 누워 한없이 울게 된 것은.

나는 시퍼런 칼을 든 모험의 소년이고 싶었다.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방법쯤은 알고 있었다.

침착하고 고요하게 모두 죽이고 나면,

평정이 온다는 것을.

그것이 운명일지라도.

물고기를 호수에 풀어 주었다.

물에 놓자마자 내 발등을 핥고

허벅지를 핥고 사타구니를 깨물고는

서서히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슬쩍, 물 위에 비치는 내 몸.

온 몸에 비린내가 났다.

가랑이에서 썩은 내가 났다.

난삽한 사랑이 시작되었다.

과분하게 영원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

 

― 「할례의 연대기」 부분[각주:4]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신성한 행위이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하는 거세의 의미를 내포한다. 신성한 행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기가 선행한다. 즉 인류사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근친상간에의 금지일 것이다. 어머니와 자매들에 대한 욕망을 절단하는 의미로서의 거세가 기본적인 의식의 구조로 잠입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갖는 선민의식도 거세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거세의 상징인 할례를 받아들임으로써 거룩한 신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이재훈은 소년의 거세 공포와 함께 거세를 감행하는 절대적인 아버지가 되고픈 욕망을 동시에 표출하고 있다. 그렇지만 감히 폭력을 행사하지 못한 채 풀밭에서 우는 소년은 “나는 시퍼런 칼을 든 모험의 소년이고 싶었다.”라고 독백하면서, 사악한 형들에게 폭력적으로 진압하려는 의지를 강화시킨다. 하지만 이 욕망은 초자아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수면 아래 잠기고 이드의 욕망으로 억압될 뿐이다. 그렇지만 이 억압된 충동이 갑자기 수족관의 물고기를 호숫가에 풀어줘 버린다. 의식의 틈새를 뚫고 나오는 이 무의식적 행동은 욕망의 자유로운 분출과 맞닿아 있다. 지나치게 윤리를 강조하는 삶의 굴레를 벗어나고픈 다양한 충동들, 성적 충동이나 폭력에의 욕구 등을 분출하는 방식에서 오히려 신의 윤리를 전복하고픈 욕망이 불현듯 출현한다. 그리고 그는 과감히 “과분하게 영원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라고 선언한다.

고대의 전지전능한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들이 얻은 자유는 새로운 사회의 틀을 짜면서 공존의 삶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현대의 양상은 아버지의 절대적 자리에 자본이라는 물신이 차지한 듯하다. 형이상학적 사유보다는 감각적 실존에 더 함몰되고, 정신보다는 육체의 가치에 더 매몰되는 듯하다. 그의 시 「만신전(萬神殿)」에서는 구원 같은 개념보다는 대도시에서 출현하는 유령과도 같은 욕망의 흔적이 그려져 있다.

 

저는 오래전 아버지를 죽이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뒤로 수많은 신들이 제 속에 들어와 소리를 지릅니다. 홀짝 홀짝 살들을 빨아 먹습니다. 가슴이 휑뎅그렁해져서 사다리를 타고 허공 위에 올라갔습니다. 십자가가 네온을 켜고 붕붕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오리온을 찾으려고 별자리를 하나씩 짚어 보았습니다. 거인의 눈과 코와 활 오늬의 도톰한 입에 손가락이 빨려 들어갔습니다.

 

― 「만신전(萬神殿)」 부분[각주:5]

 

위의 시에서 도시를 배회하는 유령 같은 도시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쓴 연작시인「대황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황하는 고대 중국 문명의 젖줄기로서 생명의 물이었지만 이재훈의 시에 등장하는 황하는 불모의 이미지이다. 마치 엘리엇의 「황무지」처럼 풍요의 물이 아니라 메마른 사막과 같은 느낌이 강하다. 유순하면서도 장대하게 흐르는 물줄기는 동양철학에서는 도의 이미지로서 절대적인 진리의 현현처럼 간주되지만, 그의 시에서는 낙원을 상실한 채 끝없이 질주하는 문명의 속도에 지친 낙오자들이 드나드는 길목처럼 느껴진다. 첫 시집에서 원시 시대의 신성하고 거룩한 별을 동경하던 시적 자아가 척박한 도시 문명의 길바닥을 맨몸으로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왜소화된다. 그래서 결국은 대다수의 시민들은 태양계에서 어느 날 문득 퇴출당한 명왕성처럼 신의 아들의 지위를 상실한 채 서서히 잊혀져가는 익명의 존재들이 되어간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 「명왕성 되다(plutoed)」 전문[각주:6]

 

이재훈의 「명왕성 되다(plutoed)」시편은 최초의 아름다운 말의 부족을 찾아 떠난 시적자아가 팍팍한 도시에서 발견하는 자화상의 한 단면이다. 아름답고 성스러운 별의 영혼임을 인식하는 연금술사가 문득 발견한 것은 초라한 소시민의 일그러진 얼굴이다. 늦은 밤 지하철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익숙한 얼굴들의 피로감이 현대 도시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더 이상 전지전능한 신의 자랑스러운 아들도 아니고 욕망의 극한까지 질주하는 악동도 아니다. 일상의 사소한 의무감에 묶여 묵묵히 달팽이처럼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시인이 발견하는 이 작고 왜소한 자화상이 갖는 위력은 이런 데 있다. 찬란하고 거룩하게 빛나는 별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처럼 사라지는 ‘소멸’을 꿰뚫는 시선이 예언자의 눈빛이다. 종교의 환상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허무를 처절할 정도로 직면하는 용기가 빛난다. 유대인처럼 선택받았다는 과잉된 자기 확신도 거부하고, 아버지의 억압적인 거세를 조롱하고 비웃을 수 있는 시인의 말은 하늘을 날아가는 적토마처럼 독자의 인식에 빗금을 지른다. 지나치게 엄격한 윤리 역시 억압이 되어 그 욕망을 대리적으로 분출하게 마련이고, 자유를 탐닉하는 자아 역시 먼지처럼 세상에서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불멸을 꿈꾸는 연금술사의 끈질긴 욕망은 새로운 사건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제물로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 그 비밀의 성소(聖所)가 내 집이었다./ 소멸이/ 내 먹는 밥이었다.”(「연금술사의 꿈」)에서처럼 소멸을 지향하는 찬란한 꿈이 빚어내는 새로운 세계가 궁금해진다. 자신의 몸을 죽여 제물이 된 고대의 토템 동물처럼, 혹은 살해된 모세처럼,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처럼 시인은 자신의 말이 아득한 먼지처럼 사라질지라도 누군가의 밥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기억의 흔적처럼 전승을 통해 출현하는 종교적인 사건처럼, 혹은 신경증 환자의 외상처럼 상처로 얼룩진 욕망들이 그의 시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아주 작은 먼지일지라도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별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그의 통찰력이 환한 빛을 비춘다. 연금술사는 자신의 몸을 내어주듯 자신의 내밀한 언어를 내밀어 허무한 생을 건너는 불사조의 깃털이 된다.

 

 


출전 : <시와사상>, 2012년 가을호.

 

 

  1. 이재훈,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문학동네, 2005. p. 19-21. [본문으로]
  2. 이재훈,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문학동네, 2005. p. 18. [본문으로]
  3. 지그문트 프로이트, <종교의 기원>,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7. p. 420-1. [본문으로]
  4. 이재훈, <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p. 2-73. [본문으로]
  5. 이재훈, <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p. 36-7. [본문으로]
  6. 이재훈, <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p. 25. [본문으로]
Posted by 이재훈이
,

힐링에 중독된 시대의 시_ 신진숙

 

 

 

 

 

   세계의 비참 앞에서도 시인들은 시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시인들이 마주한 가장 강력한 현실이다. 낙관이나 전망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비극과 종말 또한 없으며, 모든 것이 파괴될 수 있지만 어떤 혁명도 추구되지 않는 세계. 모두가 자신이 처한 슬픔과 자신의 가계(家計)만을 염려하는 세계. 타자 없는 삶.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본질이다.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알은 체하지 않는.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타자의 삶에 대한 의무나 책무로부터 배제된, 상처받은 존재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런 점에서 용서와 힐링(healing)이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과거 어느 시대에도 힐링이 이토록 중요했던 시대는 없었다. 산업화의 후유증을 앓는 몸을 돌보는 웰빙(well-being) 바람에 이어 힐링이 현대인을 사로잡고 있다. 고대 주술사의 치료 방식을 모방한 것처럼 보이는 힐링은 근대 이후의 인간이 느끼는 정신적 폐허감(廢墟感)은 치료한다. 방송에서는 날마다 눈물과 호소, 애도를 결합한 힐링의 주술이 재연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힐링을 통해 심연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힐링이 전적으로 개인적인 해방만을 의미함으로써 나와 타자의 삶을 분리시킨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힐링의 순간, 우리는 세계의 비참을 잊는다. 그 속에는 간단하고 명료한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살아가야 한다. 나는 내 고통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자에게는 타자의 삶과 고통이 존재한다. 힐링은 상처 때문에 무너진 하나의 세계, 즉 나를 중심으로 세워졌던 세계를 다시 재건하도록 돕는다. 힐링과 나르시시즘이 통합된다. 그리고 우리는 힐링에 중독된다. 

   물론 시인들 역시 그 누구보다 치유를 희망한다. 그러나 시인들의 언어는 주술적이지도 순진하지도 않다. 자기 연민이라는 광기에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세계의 비참을 눈감을 수 없다. 시인들은 오히려 힐링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기를 원하는데, 그것은 타자에 대한 사유를 중지시키는 힐링이야말로 어떤 것도 힐링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힐링에 중독된 시대에 시인은 힐링의 덫을 벗어나, 더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시적 치유가 세계의 비참을 망각하는 것도 근거 없는 행복감도 아니라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이재훈의 시 〈평원의 밤〉을 읽어 보자.

 

   막막해졌네. 타인에게 무심해지고, 타인의 죽음에 무심해졌네. 모든 감정에 무심해졌네. 가르치는 자들이 내놓는 규율에 무심해졌네. 단순히 어지러움 때문이네. 고개를 숙이다 고개를 들면 어지럽네. 빙빙 돌고 울렁거리네. 앉아도 누워도 빙빙 도네. 과음 때문이네. 두통 때문이네. 내 몸에 잡초들을 태우려 했네. 산화하는 것만이 아름다운 거라 여겼네. 악수도 청하지 않고 떠나는 게 배려라 생각했네. 슬픔이 없는 세계는 없지. 나는 아름답게 슬픈 동물이고 싶었네. 충만한 마음으로 춤을 출 것이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내 옷자락에 배었던 냄새 한 다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 슬픈 밤이네. 천둥이 음악소리를 덮을 무렵. 자정의 달빛이 머리칼을 적실 무렵. 저 우주에 몸을 눕히고 별들을 덮을 것이네. 아무 언어도 없이 심연에 잠길 것이네. 평원에 앉아 바람의 마음을 얻을 것이네.
— 이재훈 〈평원의 밤〉(《유심》 8월호)

 

   자기애(自己愛)에 상처를 입은 존재는 역설적으로 타인의 슬픔에 무감해지곤 한다. 힐링이 주는 위안은 상처받은 이 자기애를 복원하는 것에 집중된다. 핵심은 타인을 어느 정도 무감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슬픔이 제거될 수 있도록 무심(無心)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힐링의 최종 목표다. 그럴 때 우리 모두는 상처받은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 타인과 나의 관계 또는 세계 자체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이 시의 한 구절, “슬픔이 없는 세계는 없지”라고 말하기 이전까지 화자가 처한 삶이기도 하다. 그러나 슬픔이 없는 삶을 꿈꾸는 한, 힐링의 주술은 풀리지 않는다. 힐링이 가져오는 거짓 마법에 빠져든다. 진정한 시적 치유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에 출발하지만, 나 자신의 슬픔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슬픔과 아름다움이 다른 것이 아니듯. 슬픔이라는 심연은 삶의 외곽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다. ‘힐링’에서 ‘치유’로 나아가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이다. 그렇다면 이재훈 시인은 어떤 계기 속에서 이러한 깨달음은 얻었는가.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침묵’ 덕분이다. 즉, “천둥이 음악소리마저 덮을 무렵” “자정의 달빛이 머리칼을 적실 무렵”, 그 무렵에서야 발견되는 언어의 심연. 우리 자신은 자신의 언어를 잊을 때 비로소 슬픈 ‘한 사람’의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제 슬픔의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아름다운 슬픈 동물”이 된다.

 

 

_ <유심>, 2013년 9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

 

 

 

 

 

 

 

 

Posted by 이재훈이
,

현대시작품상 이달의 추천작 / 이재훈

 

 

거리의 왕 노릇

 

 

하늘에 다리를 놓고 싶었지

구름이 다리에 걸터앉아 쉬는 풍경을 꿈꾼 거지

속도가 폐부를 훑고 지나가는 아침

햇살은 더 이상 찬란하지 않고

지루한 시간을 못 견뎌 핸드폰을 만지작대지

언제부터인가 그리워하는 시간이 내겐 없지

플래카드엔 권유와 명령만 있을 뿐

전투력 가진 말들이 길거리 여기저기서 뽐을 내지

문명의 한 구석에 제 이름을 새기려는 영혼들

왕 노릇하려고, 서로 왕 노릇하려고

생명을 능가하고, 죽음을 능가하는 이웃들

나는 왕의 언어가 없고

법의 언어가 없고

왕을 심판하는 언어가 없지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꿀 뿐이지

이 세계에 없던 언어를 찾아 나설 뿐이지

아름다운 운율은 규칙이 아니라

당신의 입술 때문에 만들어지지

 

중얼거리는 입술로 거리의 왕이 되지

죄와 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머리들이

거리에 둥둥 떠다니고 광장엔 사람들이 자꾸 모이지

새벽녘 농부가 곡괭이를 들고 집을 나서지

새벽녘 회사원이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지

느릿하다 때론 떠들썩한 발소리가 거리에 가득하지

문득 신들이 사는 세계를 구경하고 싶었지

 

― <문학사상>, 5월호

 


 

현대시작품상 추천작을 읽고

 

 

 

‘왕’과 ‘노릇’ 사이에서의 탈주, 시의 운명

 

 

 

전소영(문학평론가)

 

 

 

 

 

 

명왕성의 사람이 있었지. 아니 그렇게 자처하는 이가 있지. 공전 구역에서, 말하자면 구심력에서 멀어졌다 하여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추방당한 지 얼마간이 흘렀나. 현실 밖의 이데아를 꿈꾸어서가 아니라 내부의 환부를 응시하기 위해, 먼 외부에 고독한 자리를 마련한 누군가는 시인이었지.

빛의 속도만큼이나 기민하게 지구에 닿는 그의 시선은 늘 첨예하게 흐벅져 있었지. 고성능의 망원경과 현미경을 번갈아 들이대는 시인 앞에서 파헤쳐지고 들추어지고 더듬어졌던 현실, 뼈아픈 자리들. 그럼에도 그의 시에서 감상을 강요하는 슬픔의 말들은 탈수되었지. 시인의 목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왔기 때문. 음파의 날개를 빌려 시가 지구에 도착할 무렵, 그것은 물기가 없어 더 서글프고 아름다워졌지.

다시 명왕성의 시인이 보낸 시에서 시대는 여전히 격발하는 것들로 웅성대고 있지. 구름이 하늘 다리에 걸터앉은 한갓진 풍경은 꿈결에서나 볼 수 있을 뿐. 도시인들은 하루의 속도가 낙오의 정도와 정확히 반비례하기라도 하듯 제 생 안에서 쉼과 틈을 지워 없앴지. 속도계처럼 몸에 붙은 휴대폰이 징표.

오래 배양되어야 하는 감정마저 옛 나라의 유물처럼 부식되는 중이지. 시인에 따르면 그리움이 유독 그렇지. 그리움이 생겨나는 과정, 지난하고 무료한 탓. 누군가를 만나 각인한다, 어떤 까닭으로 그가 부재한다, 실물은 사라져도 뇌리에 남는다, 그런데도 그를 향한 감정만은 현재형이다, 독할 만큼 선명한 현재형이다. 그리움처럼 절실하게 발아하고 단단해진 끝에 잊히지 않는 감정을 지으며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 되지. 시간에 장악되는 대신 시간을 삶 속으로 초대하지. 하여 스스로가 주체임을, 살아 있음을 확인하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리워하는 시간이 내겐 없지.”

숙성의 시간을 대신하는 것은 돌진하는 말들. 흡사 심리전 때 나부꼈던 삐라의 언어들과 같은 성급한 권유, 실은 명령의 언사들에 둘러싸여 우리는 숙고를 잃고 피동형의 인간이 되었지. 호전적으로 육박하는 말들의 배후에 문명과 시스템을 장악했다 여기는 누군가가 있지. “서로 왕 노릇하려고” 타인의 생명과 죽음, 존재 자체를 간과하는 자들. 자명한 사실은 그들이 왕이 아니라는 것. 그저 왕 ‘노릇’을 하고 있을 뿐.

 

문명의 한 구석에 제 이름을 새기려는 영혼들

왕 노릇하려고, 서로 왕 노릇하려고

생명을 능가하고, 죽음을 능가하는 이웃들

나는 왕의 언어가 없고

법의 언어가 없고

왕을 심판하는 언어가 없지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꿀 뿐이지

이 세계에 없던 언어를 찾아 나설 뿐이지

아름다운 운율은 규칙이 아니라

당신의 입술 때문에 만들어지지

― 「거리의 왕 노릇」 부분

 

시인도 시를 통해 말을 하지만 저들처럼 왕의 언어나 법의 언어, 왕을 심판하는 언어를 바라지 않지. 오히려 그가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꾸기에, 그의 말은 ‘왕’과 ‘노릇’의 간극에서 빠져나와 ‘노릇’이라는 허황 자리에서 제 주인을 물러서게 하지. 부끄럽지 않은 시의 언어란 무엇이던가.

시가 노래에서 해리解離되는 것이 활자 시대의 불가피한 운명이라 해도 노래가 되지 못하는 시는 쓸쓸하지. 적어도 음유시인의 목소리가 아직 울림을 지녔던 시기, 속도는 어떤 미덕도 아니었지. 누군가의 입술을 떠난 시가 다른 누군가의 귀에 느리게 가닿을 때, 여하한 시차를 사이에 두고서라도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나’에게 발견될 수 있었지. “아름다운 운율은 규칙이 아니라 당신의 입술 때문에 만들어지지”.

가닿을 이 없어 허공으로 흩어지는 언술들, 소모적이어서 부끄럽지. 수치를 몰라 일 방향적 연설을 곤두세웠던 독재자 중에는 대개 어리석은 자가 많았지. 플래카드로 대변되는 말들 대신, 시인은 새로운 시의 언어를 찾아가려 하지. ‘나’와 ‘당신’의 공존을 확인하게 하는, 내 시를 읊는 “당신의 입술”에서 완성될 “아름다운 운율”을 발굴하고자.

그럴 때 시인은 왕 노릇하는 가짜와 달라지지. 이것은 시대 안에서 시가 담당해야 할 몫을 환기시키지. 노래의 시, 혹은 운율을 매개로 ‘나’와 ‘당신’, ‘우리’를 절박하게 연결하는 것. “사람들이 자꾸 모이”는 ‘거리’를 ‘광장’답게 하며 억압적인 언어와 폭력적 구심성과 거리가 먼 새 연대의 징후나 징표로 남는 것.

이것이 시의 숙명이라 말하는 명왕성의 사람이 있지. 명왕성이 태양계의 완연한 외부가 된 지 얼마간이 흘렀나. 현실 밖의 이데아를 꿈꾸어서가 아니라 내부의 환부를 응시하기 위해, 가장 고독한 외부에 이냥 자리를 마련한 그는 시인이자 왕이었지. 거리(street)의 왕이었고 거리(distance)의 왕이었지.

 

_ <현대시>, 2013년 6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

호젓이 몽해와 들길을 소요하는 석자(錫子)

 

 

 

대담 : 장석주 이재훈

 

 

 

 

 

 

 

2013년 5월 5일. 어린이날.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장석주 시인의 <수졸재>를 찾았다. 금광저수지를 앞에 두고 책과 음악과 시가 있는 문학의 성채를 온몸으로 느꼈다. <일상의 인문학>에 나오는 약력을 보면 시인은 자신을 가리켜 ‘문장 노동자’라고 칭한다. 문장 노동자라니. 눈을 감고 깊은 세계에 빠져들고 있는 시인의 프로필 사진에서 문장가로서의 고독한 고뇌와 자부심 같은 것들이 함께 느껴졌다. 시인은 뇌의 모든 부분이 읽고 쓰는 데 최적화된 것 같다고 했다. 마치 김연아 선수의 뇌가 피겨스케이팅을 위해 최적화되어 있듯이. 안성으로 내려와 <월든>을 집필한 숲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처럼 그 스스로 나무가 되고 풀이 되고 숲이 되는 시간들을 견뎌 마침 ‘석자(錫子)’라는 별칭을 얻게 된 내력을 어떻게 들여다봐야 할까.

이제 노년의 초입에 들어선 시인은 제주도에 새로운 집필실과 <여행자 도서관>을 만드는 게 꿈이라 했다. 이미 땅을 사 놓았고, 설계할 건축가도 있다고 했다. 몇 년 뒤 그 건축물이 지어지면 노년은 제주도에서 보낼 계획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바람 냄새를 온몸에 가득 담은 채 제주도의 <여행자 도서관>에 닿아 시인과 만나는 상상을 했다. 대담 후 우리는 중앙대 안성캠퍼스 후문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카레라이스와 돈가스를 먹었다. 그곳은 이해선 사진작가가 운영하는 <셰므아>. 사진작가가 시인을 위해 직접 내놓은 레드와인도 한잔씩 했다. 일요일 오후, 시인들의 이야기처럼 와인도 진하게 폭 익어 있었다.

 

이재훈 : 선생님 안녕하세요. 시집 <오랫동안>으로 받으신 11회 영랑시문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몇 년 전에 제1회 질마재문학상을 받으셨지요. 그 시상식에 저도 갔었는데요. 시인으로 받는 첫 상이라는 수상소감이 남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이번 상은 또 다른 느낌이셨을 텐데요. 감회를 듣고 싶습니다.

 

장석주 : 첫 번째로 받은 질마재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얼떨떨했어요. 문학상과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이번 영랑시문학상 수상 소식은 순수하게 기뻤어요. 무엇보다도 심사위원인 김남조 선생님이나 고은 선생님 같은 대선배시인들의 따뜻한 격려 같은 게 느껴졌어요. 상이란 건 즐거운 해프닝이라고 생각해요. 항상 당대 최고의 작품들이 문학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최고’라는 합의 역시 심사위원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테니까요. 수상자의 문학적 성취에 대한 판단은 엄연한 것이겠지만, 그것을 재는 객관적 잣대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심사자의 주관적 정념이 객관성을 뒤집는 경우가 잦아지는 탓에 문학상이 결정되는 그 이면은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그 복잡함을 이루는 요소는 문학‘성’과 심사위원들의 취향, 우연의 작동, 연륜과 인연의 그물들 같은 것들이겠죠.

 

이재훈 : 토지문화관에서 집필을 하시다가 어제 수졸재로 드셨다고 들었습니다. 근황이 궁금합니다.

 

장석주 : 4월 1일부터 5월말까지 원주의 토지문화관 입주작가로서 글을 쓰고 있어요. 올해 말까지 내야 할 책들, 새로운 시집 등을 준비하고 있고요. 토지문화관을 나오면 6월 하순에서 7월 중순까지 터키와 그리스 여행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MBC 네트워크의 ‘장석주의 지중해 인문학 기행’이라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졌기 때문인데요. 프로듀서와 촬영감독 등 6명 정도가 함께 여행할 예정입니다. 에게해 중심으로 이스탄불, 카잔차키스의 무덤이 있는 크레타 섬까지 돌아볼 겁니다. 에게해 문명과 신화, 역사,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프로그램이에요. 올해 일정은 모두 다 잡혀 있는 상태죠.

지난주에는 <철학자의 사물들>이라는 신간이 나왔고요. 5월에 <동물원과 유토피아>라는 철학적 사회비판 책이 나올 예정이구요. 그리스를 다녀오면 7, 8월 중에 다시 2권의 저서가 출간 예정이고 하반기에 4권 정도가 더 나올 예정이어서 올해만 8권 정도가 출간되겠지요. 지금이 내 인생에서 생산력이 가장 왕성할 때인 것 같네요. 20년 전에는 내가 죽을 때까지 50~60권 정도 쓸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지금 벌써 70여권을 썼으니까요.

 

이재훈 : 선생님의 생산력에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 생산력을 지탱하는 일상들이 궁금합니다. 최근 발표하신 시 「큰 찰나」는 곤궁한 기억의 추체험을 통한 찰나의 순간을 보여줍니다. 제가 곤궁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실상 그때의 시간은 오히려 순일한 시간으로 표현됩니다. “튀긴 두부 두 모를 삼키던 추분”, “두드려 펼친 북어 한 쾌를 끓이던 상강”, “삶은 고등어 한 손에 찬밥을 먹던 중양절”의 시간들은 지금 선생님께서 바라보는 지향점을 은근히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습니다. 평론가 조강석은 이를 ‘마음의 섭생’으로 풀었더군요. 큰 찰나의 순간은 잡다한 일상들이 모두 거세되고 남는 단순함 속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지요. 산책과 독서, 집필로 대표되는 선생님의 순일한 일상은 어떠신지요?

 

장석주 : 튀긴 두부, 북엇국, 고등어조림은 제가 좋아하는 음식들입니다. 최근에 읽은 장-뤽 낭시의 책에 “먹는 것은 먹은 것을 몸으로 합병하는 행위가 아니라 몸을 제가 삼킨 것을 향해 여는 것, ‘안’을 가령 생선이나 무화과의 맛으로 발산하는 행위”라고 했더군요. 음식을 먹고 삼키는 행위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들을 몸으로 ‘합병’하고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향해 내 몸을 여는 것, ‘안’을 그 매개물에 의지해서 그것의 맛으로 저를 ‘발산’하는 행위라는 것이죠. 미각의 만족감이 삶의 행복과 연결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먹고 마셔라! 그리하면 행복해질 것이니! 몸은 마음의 외부가 아니고, 따라서 마음은 몸의 내부가 아닙니다. 다만 몸의 자명함에 견줘서 마음은 자명하지 않습니다만 몸의 섭생과 마음의 섭생이 그리 멀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에피쿠로스라는 고대 철학자의 철학을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요. 추분, 상강, 중양절은 몸을 제약하는 시간의 분절들이지만, 역시 마음의 현동을 제약하기도 하겠지요. 제 일상은 대체로 단순해요. 새벽에 일어나 신문과 인터넷을 보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해요. 날마다 쓰고, 날마다 이러저러한 책들을 읽습니다. 오후에는 산책을 하고, 단골 찻집에 들러 즐기는 차를 마십니다. 혼자 있는 시간들이 많고, 그것을 즐기는 편입니다.

 

이재훈 : 경기도 안성의 수졸재(守拙齋)의 ‘수졸’이 “재주와 기교가 뛰어난 사람이 이를 감추고 소박하고 투박하게 사는 것을 말하며,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을 말한다”(장인수)고 합니다. 많은 문인들은 부러워하기도 하죠. 하지만 조용한 곳에서의 생활이 오히려 시가 더 안 나오더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수졸재로 터전을 옮길 당시 마음과 계획 같은 것들이 있었을텐데요. 그런 마음과 계획들이 문학적으로 잘 실천되고 있는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장석주 : 안성으로 내려갈 때는 몸도, 마음도, 돈도 다 거덜나버린 상태에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이었어요. 생계를 걱정하고, 미래의 불안을 견뎌야 했지요. 게다가 딱히 대상이 없는 분노 같은 게 있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러다 죽겠다는 자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도 마음을 다독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어요. 그래서 노자와 장자를 무작정 읽었어요. 그리고 안성의 들길과 산길들을 찾아 걸었어요. 내 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니다, 다만 잠정적으로 ‘점유’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내 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니라면 이것을 억지로 쥐고 있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이어졌지요. 욕심과 욕망은 내 몸과 마음이 내 소유라는 확신 속에서 번성하는 겁니다. 벌써 안성 생활이 13년째 이어지고 있는데, 만족하고 있습니다. 충분한 자기 위로의 시간들을 보내고, 덕분에 창작의 활화산 같은 시간들을 맞고 있는 느낌입니다. 씩씩하게 책들을 써서 밥벌이를 하고 있고, 메말랐던 감성도 충만해졌어요.

 

이재훈 : 위의 질문과 더불어 최근 관심가지고 계시는 노장에 대한 깊은 관심은 일상과 산책자의 관조 사이에서 체화된 것은 아닌지요?

 

장석주 : 노자와 장자 읽기는 안성에 정착하면서 우연으로 시작한 것이지만,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떤 필연성이 있었어요. 우선 노자와 장자를 읽을 수 있는 자유가 조건 없이 풍성하게 주어졌다는 점이지요. 안성에서의 첫 시작은 백수 노릇이었으니까요. 그랬으니 노자와 장자를 100번 이상씩 읽어낼 수 있었어요. 물론 지금도 노자와 장자의 그 심오한 철학을 다 이해하고 체화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노자> 1장에 나오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은 아직도 제 화두예요. 가끔씩 이 화두를 붙잡지만 안성에 내려와 살면서 제 심성이 너그러워진 부분이 있다면 이건 그 두 현자의 힘이 크겠지요. 인생에 대한 긍정과 여유, 넉넉한 관조적 시선,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찾게 했으니까요.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덜어내니까, 인생이 훨씬 더 살만한 것으로 다가오더군요. 삶을 가능한 한 단순화시키면서 책읽기와 명상, 들길이나 산길 걷기에 집중했기 때문에 지난 13년간 그 많은 책들을 읽어내고, 지치지 않고 서른 권이 넘는 책들을 써낼 수 있었지요.

 

이재훈 : 연보를 보면 유년 시절 충남 논산 외가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사셨지요. 그 후 서울로 올라오셨습니다. 선생님의 전체적인 스타일 ―문학적 양식까지 포함해서―은 도시풍의 세련됨입니다. 하지만 10여년 정도를 보낸 유년 시절은 또 다른 선생님의 문학적 토대일지도 모릅니다. 유년 시절의 원체험이 선생님의 문학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궁금합니다.

 

장석주 : 네, 맞습니다. 10살 무렵까지 논산의 외가에서 자랐어요. 제가 태어난 곳은 한반도의 전형적인 농촌 취락 형태로 발생한 마을이었어요. 다들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지요. 언덕을 넘으면 논으로 이루어진 평평한 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곳인데,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들을 처음 봤을 때 현기증이랄까, 알 수 없는 공포감 같은 걸 느꼈어요. 외삼촌들을 따라 그 들로 나갔는데 논과 수로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더군요. 시선의 경이랄까요, 그 엄청난 유년기의 자연체험은 무의식에 새겨진 원체험이지요. 그 뒤 서울로 올라와서 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며 40여년을 살지만, 그 원체험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제 안에는 유년기의 긍정적인 자연체험과 성장기의 부정적인 도시체험이 함께 들어 있어요. 그 둘은 융합하지 않고 서로 불화하며 겉돕니다. 제 의식은 그 ‘사이’에서 분열과 상처를 끌어안고 있지요. 아마 제 가장 중요한 시적 상상력은 그 ‘사이’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재훈 : 중학교 때부터 당시의 청년문단인 <학원>지에 시를 발표하고 학교에서도 책만 읽었던 외톨이였다고 증언합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교련수업 거부 사건으로 제도적 교육과의 자발적 결별을 선택하게 되는데요. 지금 들어보면 상당히 주체적이고 조숙한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책으로서만 세계와 소통하던 20대 초반까지의 시간들이 천재적인 문학가가 되기 위한 밑거름이 되었을 텐데요. 그 고독한 시간들 이면에 다른 회한이나 후회 같은 것들이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장석주 : <학원>지에 중학교 2학년 때 첫 투고한 시가 고은 시인이 뽑아 활자화 되었어요. 그때는 고은 시인이 누구인지도 모를 때였습니다. 어쨌든 그게 크게 자극이 되었어요. 7, 8편의 시들을 연속으로 발표하고, 이듬해 학원문학상에서 우수작 1석으로 뽑혔어요. 그 뒤로 고등학교에 와서는 또 단편소설을 써서 투고했는데, 소설가 임옥인 선생이 선을 해서 활자화되었고요. 그러면서 전국의 문학소년들 사이에 이름이 나고 그들과 편지를 주고받읍며 교류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시절에 주변에 저를 이끌어줄 만한 스승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지요. 혼자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제 길은 스스로 찾아야만 했어요. 이 모든 일들이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졌어요. 제도 교육에서 자발적으로 이탈한 것은 나중에 더 자세하게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진 거예요. 동년배의 다른 친구들이 다들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할 때 저는 무적자(無籍者)가 되어 방황을 하거나 몇 년간을 시립도서관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것 밖에 없었으니까요. 결국 시립도서관에 처박혀 쓴 시와 평론이 1970년대의 마지막 해에 두 군데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문단에 나오고, 그게 연줄이 되어 출판사 편집부에 입사했지요. 아주 가끔 그때 혼자 외롭게 시립도서관에 처박혀 문학이나 철학 책들을 읽는 대신에, 대학에 가서 자연과학 쪽 공부를 했으면 내 삶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고 생각해 볼 때도 있습니다. 아마 그랬다면 삶은 지금과는 크게 달라졌겠지요.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여유도 없었고, 삶과 세계를 꿰뚫어보는 지적 능력이나 균형잡힌 ‘인지적 자각’같은 게 없었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20대 초반에 이미 문학을 숙명으로 수락하고 고분고분 받아들였던 게 아닌가 싶어요.

 

이재훈 : 선생님의 젊음을 가리켜 “고독과 가난, 주체할 수 없는 청춘이라는 이름의 70년대”(김태형)라고 표현했던데요. 당시는 사회참여 민중시의 시대였지 않습니까. 또 다른 대척점에는 실험시가 있었을텐데, 이도 상당히 정치적인 측면이 있죠. 당시 시문학사에서 선생님께서는 이쪽과 저쪽도 아닌 미학주의자로서 독자적인 길 쪽에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바로 밑 선생님의 후배들로부터 바슐라르에 영향받은 미학주의자들이 시단에 나타났구요. 당시 선생님의 문학적 지향점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장석주 : 제 20대는 고독과 가난을 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그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겁니다. 그 결핍이 있었기에 문학과 음악에 대한 강렬한 열망 같은 걸 품게 된 게 아닐까요? 20대 초반 시립도서관에서 책만 읽은 게 아니라 서울 광화문에 있던 ‘르네상스’나 명동에 있던 ‘필하모니’, ‘전원’, ‘티롤’ 같은 고전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제 초기시의 미학주의적 성향은 서양 고전음악들을 접하며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이재훈 : 선생님의 청년 독서목록에는 헤세, 카프카, 사르트르, 카뮈, 니체, 바슐라르 등의 이름이 열거됩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당시 철학과 인문학의 거센 광풍은 지금보다 훨씬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런 독서가 추후 양서를 출판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겠죠. 지금 선생님의 사유체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나 철학자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요.

 

장석주 : 10대 후반에 한국문학전집들을 독파하고 헤르만 헤세, 알베르 카뮈, 카프카, 헤밍웨이와 같은 널리 알려진 서구 작가들, 그리고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와 같은 일본작가들의 소설들을 남독하며 보냈다면, 20대 초반에는 시립도서관의 참고열람실에서 보내면서 서양 철학자들의 책들을 많이 읽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게 니체와 바슐라르였어요. 일종의 황홀경 같은 걸 느끼면서 그 책들을 읽었거든요. 그리고 김현과 김우창 선생의 책들을 읽으면서 내 공부가 얼마나 하찮은가를 깨달으며 엄청난 지적 자극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 초기 지적 자양분은 전적으로 이 분들에게서 얻은 것들입니다. ‘고려원’에 막 입사해서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인 <영혼의 자서전>의 교정을 봤는데요, 작가의 방대한 지적 편련에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국내에 소개가 그다지 많이 되지 않은 생소한 작가였어요. <영혼의 자서전>에서 깊은 감명을 받고 그의 전집을 만들어보자고 출판사 사장에게 건의를 해서 그 전집이 나오게 되었지요. 나중에 ‘고려원’ 편집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 출판사를 차린 것은 ‘니체 전집’을 새로 번역해서 내야 되겠다는 결심 때문이었어요. 일종의 보은(報恩)이었던 것이지요.

 

이재훈 : 선생님의 연보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1991, 청하) 사건입니다. 당시 이 일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공권력의 개입이 전 국민에게 전면적으로 드러난 사건입니다. 외설스런 내용의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저자를 구속한 세계 최초의 사례였다고 평가하는데요. 이 사건으로 출판 책임자로써 선생님께서도 징역형을 선고받으셨죠. 이 일로 선생님께서 출판에 대한 뜻을 접습니다. 아까운 일이었죠. 저 또한 지금까지 가장 아까운 출판사로 ‘청하’를 1순위로 꼽습니다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일로 우리는 시인이자 작가 ‘장석주’를 새롭게 얻습니다. 출판사가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왕성한 시인이자 집필자로서의 장석주를 얻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텐데요. 동의하시는지요?

 

장석주 : 마광수 선생의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은 참 어처구니도 없고 안타까운 일이지요. 제 인생에도 엄청난 타격이 된 ‘마이너스 체험’입니다. 그때 입은 내상(內傷) 같은 게 아직도 남아 있어요. 그 분노와 실망이 출판사를 접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출판사를 할 때 제 젊음 전체를 담보로 하는 것이었기에 치열했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기획, 편집, 교정, 디자인, 영업 같은 걸 다 했었죠. 출판사가 커져서 직원이 20명, 30명으로 느니까, 출판 일과 무관한 ‘인력 관리’ 같은 게 필요해지더라구요. 그런 일들에 내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되는 게 싫었어요. 필화사건을 계기로 출판사를 접고자 결단했을 때, 한편으로, 이젠 내 길을 가자, 이런 생각도 있었어요. 결국 내 길이란 내 문학, 내 글쓰기지요. 이건 일종의 역설이겠지만, 사실 출판사를 경영할 때 책을 가장 못 읽었어요. 출판사를 그만 두고 난 뒤, 출판사를 경영할 때보다 10배는 더 책을 읽게 되더군요. 이것만 보더라도 출판사를 그 시점에서 접은 것은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재훈 : 선생님의 시집은 14권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 외 2권의 시선집을 내셨구요. 끊임없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시집 <햇빛사냥>(1979) 이후 몇 년 간의 터울로 계속해서 시집을 발간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시집뿐 아니라, 평론 에세이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글을 활발히 창작하셨는데요. 그런 가운데에서 쉬지 않고 시집에 큰 에너지를 쏟기가 쉽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다른 장르 글쓰기와의 관계 하에서 시창작의 통과의례를 듣고 싶습니다.

 

장석주 : 그 무렵은 한창 출판사가 커가고, 그에 따른 업무들이 팽창할 땐데, 그 시들을 어느 틈에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시를 쓰는 건 일종의 숨쉬기 같은 게 아니었을까. 숨을 쉬지 않으면 죽으니까, 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시를 썼던 거지요. 그 시절의 시에는 아쉬운 바가 있어요. 그 시절의 시들은 좋은 시가 품어야 할 긴 시간, 느릿한 숙성, 자애의 적요(寂寥) 같은 게 모자랍니다. 일하면서 짬짬이 짧은 시간을 들여 썼으니까요.

 

이재훈 : 선생님의 시세계를 크게 본다면 두 갈래의 변화지점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0번째 시집인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2002, 그림같은세상)는 안성에 내려가셨을 때 쓴 시집인데요. 안성에 정착한 이후로 시세계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장석주 :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2002, 그림같은세상), <붉디붉은 호랑이>(2005, 애지), <절벽>(2007, 세계사)은 ‘안성 3부작’으로 꼽을 만한 시집들입니다. 안성의 물, 바람, 흙이 들어 있고, 제가 먹은 밥과 젊은 벗들, 밤과 고독들이 고스란히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전의 시집들에 있던 도시적 메마른 감성 대신에 그늘과 여린 것들에 대한 자애, 자연의 관능성에서 연유된 활발함이 눈에 띄는데, 이것들은 제 안의 촉기가 풍성해진 결과일 겁니다. 김영랑 시인은 이 촉기를 두고 “같은 슬픔을 노래하면서도 탁한 데 떨어지지 않고, 싱그러운 음색과 기름지고 생생한 기운”이라고 했는데, 바로 그런 뜻에서 그렇습니다. ‘안성 3부작’에 어떤 풍성함이 있다면 자연과 제 오감이 비벼지면서 얻어진 이 촉기 때문일 겁니다.

 

이재훈 : 좀 더 세분화해서 살펴본다면 네 번째 시집까지는 어둡고 절망적인 청춘의 열망이 고스란히 집약된 세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완전주의자의 꿈」을 보면 “채 끝내지 못한 교정지와/ 빈 책상들만 어둠 속에 남아 있을/ 사무실과 내가 방금 내려온 어두운 계단들이/ 내 뒤에 남겨져 있는 모든 것이다./ 나를 열기 위하여, 활짝 열려진 문처럼/ 혹은 나를 닫기 위하여, 쾅쾅 못질하여 닫아버린 문처럼/ 나는 일년을 살았다. 아니 일년을 죽었다.”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당시 세계를 절망적으로 보는 시선에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장석주 : <햇빛사냥>(1979, 고려원), <완전주의자의 꿈>(1981, 청하), <그리운 나라>(1984, 평민사), <새들은 황홀 속에 집을 짓는다>(1986, 나남)로 이어지는 초기 시편들은 청년의 순수한 자아 제일주의, 세계와 자아 사이의 찢김, 상처와 분열증, 관념주의의 우월성 따위가 두드러지지요. 물론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지만. 체험의 직접성, 영감의 번뜩임, 광기 같은 건 희박했어요. 그저 소시민적 생활인의 옅은 비애와 메마름, 거기에 약간의 관념들이 섞여서 만들어진 세계지요.

 

이재훈 : 이후 중기의 시집들이라고 할 수 있는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1991, 문학과지성사),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1996, 문학과지성사),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1998, 세계사),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2001, 세계사) 등의 작품세계는 다양한 형태로 변주됩니다. 쓸쓸하고 절망적인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여전하지만, 다양한 이미지의 변주와 시적 대상들을 통해 좀 더 활발해집니다.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시도가 있었던 때입니다. 사랑을 테마로 한 시집도 있었고, 이때부터 구체적 일상이 활발하게 드러납니다. “왜 생활은 완성되지 않는가/ 왜 생활은/ 미완성으로만 완성되는가/ 왜 생활은/ 미완성일 때 아름다운가”(「왜 생활은 완성되지 않는가」)라는 시적 전언들은 이를 잘 드러내줍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의 추억을 통한 사유도 마찬가지고요. 1990년대에는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미학적 담론들이 생성될 때인데요. 문학쪽에서 다양한 담론들이 새롭게 형성된 시기입니다. 선생님께서도 이런 시대적 이데올로기를 의식하셨는지요?

 

장석주 :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1991, 문학과지성사),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에는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에서 끊임없이 타자와 자신에게 착취당하는 느낌이 불가피하게 침착되어 있지요. 자아의 궁핍함과 메마른 도시에서의 무의미함과 건조함이 격렬하게 표출되었던 시기였어요. 제대로 살려면 서울을 벗어나야하는 게 아닌가하는 강박적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숲이나 강과 같은 자연에 가까이 접하려는 열망이 있었죠. 서울 삶에 대한 진절머리 같은 것들이 나던 시기였고요. 끊임없이 가속화되는 속도 속에 갇히고 삶속에서 자아는 죽어버리고 노동기계가 되는 시간들을 견딘 거죠. 그 집단적 인식 안에 나도 속해 있었죠. 그러니까 당시에는 메마르고 어둡고 비극적인 정조의 시가 나왔어요.

좀 이색적인 시집이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인데요. 그 시집도 사실은 시를 통해 나락에 빠진 나를 필사적으로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능동적 의지가 있었어요. 그 시집에 사랑시가 몇 편 있기는 하지만, 제목과는 달리 사랑 시집은 아니예요. 그 시집의 반 정도가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 화집을 보면서 떠올린 영감으로 쓴 시들이에요. 뭉크의 비극적인 삶과 내 삶이 겹쳐지죠. 그 시집에는 어떻게든 시를 붙들고 새로운 삶으로 도약하려는 몸부림, 자기 치유와 성찰, 상처와 슬픔과 모욕을 끝끝내 견뎌내려는 불굴의 의지 같은 것이 오롯합니다. 그 시들을 통해 생의 시련들을 견뎌냈어요. 2000년 여름 안성에 내려오면서 삶의 외관이나 내면의식, 감성이 커브를 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내 몸에 은닉된 도시의 자명성이 해체되고, 물, 나무, 안개, 새벽, 뱀, 너구리 따위의 자연 체험, 농약을 삼킨 개들의 죽음, 함께 놀아줄 귀신이라고 있었으면 하는 지독한 심심함, 소름끼치는 근본으로서의 고독 속에서 시가 나오니까, 그 전의 쓰던 시와는 전혀 다른 시세계가 만들어지더군요. 시골도 이미 지고지순은 아니예요. 밋밋한 시골의 삶에는 도시보다 더 끔찍한 지옥이 숨어 있어요. 그런 걸 시골에 와서 열세 해를 살면서 겪어낸 것이지요.

 

이재훈 : 안성에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가 그 시집들에 담겨 있는 거네요. 도시에서의 삶에 대해 사유의 극점을 찍고 그 세계를 통과해야 새로운 세계로 입성할 수 있는 거니까 말이죠.

 

장석주 : 우리가 철학적인 어휘로 얘기를 나눴는데요. 사실은 돈이 없었어요.(모두 웃음) 제 재산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안성의 땅에 내려올 수밖에 없었죠. 안성에 살면서 초기 2년 동안은 참으로 고요했어요.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할 일도 없고. 2년이 지나니까 여성잡지사들 10여 군데에서 취재를 오고, EBS에서 1시간짜리 프로그램을 찍어가고요. 말하자면 사람들은 시인이 호수가에 전원주택을 짓고 내려와 근사한 전원생활을 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게 당시 중산층들의 꿈이고 열망인데. 그것을 마치 내가 선점한 것처럼 비췄던 거겠죠. 여성잡지와 방송 매체를 타고 평이한 시골살림이 근사한 전원생활로 탈바꿈되어 소개되고 나니 여기저기서 원고청탁이 밀려들고, 대학에서는 강의 제안이 들어오고, 신문과 잡지에서는 연재를 하게 되었지요. 그 바람에 시골의 고요한 삶은 다 깨져버리고 서울에서보다 더 많이 바빠졌어요.

 

이재훈 : <절벽>(2007, 세계사) 이후의 작품들은 좀 더 인문학적, 혹은 철학적 사유가 내재화되어 드러난다고 봅니다. 가장 최근의 시집인 <오랫동안>(2012, 문예중앙)은 그 결실이 직접적으로 드러났다고 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그 전 시집인 <몽해항로>(2012, 민음사)는 선생님의 전체적인 시세계 속에서 독특한 지점에서 빛이 나는 매력적인 시집이라고 생각합니다. ‘몽해’라는 특별한 상징을 통해 내면의 사유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말이죠. 특히 상징을 통해 관념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내면의 여정이 더욱 미학적으로 완성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최근 작품들의 시가 발아하는 계기나 앞으로의 시작 향방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장석주 : <몽해항로>는 안성에 내려온 지 만 10년 되는 해에 나왔습니다. 안성 3부작이라고 불리는 세 시집을 낸 뒤 상상력의 중심이 안성에서 벗어나, 다시 죽음과 같은 사유와 상상력으로 회귀하더군요. 장소마다 장소의 목소리가 있는데, 이제 내 시에는 안성의 목소리가 잦아들었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일부러 의식해서 쓴 것은 아니고, 자연스럽게 안성하고는 결별하더라구요. 이재훈 시인이 잘 지적했듯이 초기의 내 시들은 죽음이나 존재의 본질에 대한 사유로 들어가니까 관념적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었죠. 초기시의 관념과 지금의 관념성은 달라요. 초기시에는 체험이라는 거름망을 통과하지 않은, 책읽기를 통한 간접성에 연루된 형이상학이었다면 <몽해항로>에서 드러나는 관념성은 상당 부분 직접적이고 날 것인 체험과 연륜이 체화되고 육화된 것의 분출 같은 것이지요. 내 안에 있는 본래적인 것들의 목소리를 낸다고나 할까요. 평생 붙든 화두라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왜 태어났느냐, 왜 인간은 죽는가, 하는 형이상학적 것들인데, 그것이 깊이를 매개로 하면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더라구요.

‘몽해’는 상징적인 시공이지요. ‘몽해항로’ 연작시들은 ‘몽해’라는 상상의 차가운 바다, 죽음이 무시로 출몰하는 그 가상의 시공을 통해서 존재의 유한성, 죽음에 대한 사유를 드러내는 시편들이었고요.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슬프니까, 시에도 슬픔과 애조가 깔려 있죠. 시에는 북풍이라든지, 차가운 바다라든지 털만 남기고 죽은 비둘기라든지 하는 죽음을 은유하는 이미지들이 많이 등장하죠. 그것이 의도적이기보다는 내 안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숙성된 사유와 상상력을 도약대 삼아 튀어 나온 것이죠. <몽해항로>를 기점으로 다시 인간 본질에 대한 물음을 나에게 던지고 있는 중이죠. 그와 함께 제 시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는 예감 같은 것도 하지요.

 

이재훈 : 시인, 소설가, 평론가, 출판인, 인문학자, 독서광이자 장서가, 대학교수, 방송인 등의 명명 중 가장 아쉬운 호칭이 있다면? 그 이유도 듣고 싶습니다.

 

장석주 : 호칭은 외부에서 내게 붙여준 거니까 크게 의식을 안 하고요. 처음부터 먹고 살기 위해 써야만 하는 생계형 글쓰기, 살아남기 위해 써야만 하는 생존형 글쓰기를 하고 있죠. 원고료나 인세를 받아 애들도 키우고, 쌀도 사고, 전기세도 내고, 의료보험도 내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게으름을 부릴 수가 없었어요. 시골에 내려올 때는 느긋하게 게으름을 좀 피울까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는데, 그게 다 가망없는 희망이 되고 말았지요. 참 아이러니죠. 출판 편집, 기획자, 대학 강의, 방송 진행자, 자유기고가와 같은 다양한 경험을 한 것은 행운이죠. 나를 규정하는 여러 호칭들에서 그저 ‘시인’ 하나로 족합니다. 가장 애착이 가고요. 예술의 본질은 시가 선점하고 있으니까요. 돌이켜보면 삶의 물적 토대를 만들기 위해 편집자로서 출발하여 출판사 운영까지 가게 되었는데요, 그때는 정말 열심히 나를 던져 일을 했고요. 그 일에 대해서는 한 점의 회한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그것으로 충분하다, 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벌써 2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사람들이 물어봐요. 출판사를 하느냐, 고요. 혹은 출판 기획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것들이 까마득하게 먼 옛날 일 같은데. 가끔 내가 정말 출판 일을 하기는 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죠. 그때는 최선을 다했고 인연이 다해서 출판 일에서 물러나왔을 때는 돌아보지 않았어요. 과거는 미래의 일로써만 의미가 있겠지요. 지금은 앞날과 미래의 삶이 더 중요하죠.

지금이 노년기의 초입인데, 인생 전체의 마무리에 대해 숙고할 단계가 왔다고 생각해요. 당장은 여러 출판사들과 계약된 책을 써내는 게 우선 중요하고요. 다행인 것은 아이들이 모두 성장해서 제 앞가림을 하니까 가족부양의 의무에서 좀 일찍 해방되어서 사는데 그렇게 큰돈이 필요치는 않다는 거요.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말년의 양식(樣式)’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합니다. 시와 철학을 오가며 사유하고 글을 써온 사람으로서 내 사유와 인식의 세계를 어떻게 총체적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을까, 하는 양식(樣式)에 대한 고민이지요.

 

이재훈 : 최근에 <철학자의 사물들>이라는 신간을 출간하셨고 시집 포함해서 저서가 70여권이 있습니다. 많은 대중들에게 인문학적 사유나 지식을 교양서로 풀어내어 들려주는 작업들을 하고 계시는데요. 이런 집필이 가능한 몇 안 되는 지식인으로 출판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시인이 쓰는 철학과 인문학의 글쓰기에는 어떤 자의식이 존재하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이런 글이 시와 어떤 연결 접점에서 서로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아니면 전혀 다른 모드와 방식으로 생산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장석주 : 그렇지는 않아요. 20대 초반에 문학 계통의 책만 읽은 게 아니라 철학이나 미학 공부를 했어요. 그쪽 분야의 책을 나름대로 계통을 잡아서 읽었지요. 그 뒤로도 니체에서 들뢰즈로 이어지는 서양철학에 대한 독서를 꾸준히 해왔고요. 개별자로서 삶의 경험이 철학적 사유라든가 인식들과 만나고 섞이는 과정, 즉 융합을 통해 만들어진 사유의 영역이 시적 상상력과 만나는 바로 그 지점에 제 시의 자리가 생겨나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시와 철학적 사유가 따로 가는 게 아니라 상호호응하고, 상호삼투하지요. 철학, 미학, 예술에 관한 책들만이 아니라 분자생물학, 뇌과학, 양자물리학, 천문과학 같은 책들도 열심히 찾아 읽어요. 거기에 더해 건축, 요리, 축구, 야구와 같은 분야의 책들도 읽습니다. 이런 것은 다 새로운 지식들에서 제 시적 상상력의 동력을 구하기 위한 노력이지요.

인문학 주제에 대한 책쓰기는 계속되겠지요. 다행히 작년 연말에 낸 『일상의 인문학』과『마흔의 서재』가 독자 반응이 좋았어요. 지금도 인문학적 사유를 담은 교양서를 몇 권 준비하고 있는데요. 이런 것의 기초적 토대가 되는 게 독서입니다. 끊임없는 책읽기를 통해 어떤 사유의 극점까지 자신을 몰아가지요. 그런 끊임없는 책읽기를 통해 체화된 것들이 있기에 인문학적 주제에 대한 저술이 가능합니다. 책을 떠나서 ‘장석주’라는 한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내 시, 내 삶, 그 바탕에는 내가 읽은 수많은 책들과 그것들에 의해 만들어진 내면의 확장이 있어요.

 

이재훈 : 요즘 생계형 글쓰기 때문에 바쁘시잖아요. 바둑이나 포커 등에 상당한 고수이시고 문단에서 즐겨하시면서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요. 요즘은 많이 못하시겠어요.

 

장석주 : 다른 건 할 줄 모르고 바둑과 포커가 제가 할 줄 아는 잡기인데요. 요즘은 전혀 못하죠. 바둑은 어려서 배웠고요. 아마 3단 정도 실력이예요. 바둑 자체가 동양 철학의 집대성이예요. 그 안에 우주가 있고, 도가 있고, 세상을 움직이는 이치가 다 녹아있어요. 바둑 둘 때는 지독하게 몰입합니다. 그 몰입이 좋은 거지요. 한때 시인 후배들하고 푼돈을 걸고 포커 게임을 즐겼는데, 온몸이 소진될 때까지 뭔가를 하고 난 뒤에 그 보상으로 뭔가에 몰입하는 기쁨 같은 것에 탐닉하는 거죠. 아주 유쾌한 탐닉이지요. 후배들 하고 게임을 할 때는 나름의 원칙이 있어요. 내가 따면 안 된다는 거예요.(웃음) 다 가난뱅이 시인들인데, 그들의 푼돈을 갈취하면 안되지요. 늘 얼마쯤 잃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며 즐겼는데. 이젠 그런 시간도 낼 수가 없어요. 술을 안마시니까, 벗들과 술자리를 함께 하는 도락의 즐거움 같은 것도 없어요. 삶이 단순화되었어요. 내 자신의 사유에 집중하고 지속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단순화한 측면도 있죠. 대신에 혼자 고전음악을 듣거나 산책을 많이 해요. 혼자 걷는데 이게 자기 충족감이나 행복감을 주죠. 하이데거가 ‘들길’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나를 나에게 되돌려주는 시간, 사색의 능력을 풍성하게 일구는 호젓한 시간이 필요한 거죠.

 

이재훈 : 일요일 오후, 귀한 시간을 내주시고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많은 것을 담고 가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장석주 : 고생 많았어요. ‘수졸재’에는 6월 하순쯤이면 반딧불이가 나타나요. 반딧불이들이 어둔 수풀 위에서 사파이어처럼 반짝이며 군무를 추는 여름밤은 정말 근사해요. 그때 아이들 데리고 함께 놀러 와요. 

 

 

출전 : <열린시학>, 2013년 여름호.

 

 

이재훈 | 1972년 강원도 영월 출생.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저서로 <현대시와 허무의식>, <딜레마의 시학>, <부재의 수사학>,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가 있다.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

 

 

Posted by 이재훈이
,

황하에서 돌까지

산문 2013. 3. 13. 10:20

황하에서 돌까지

 

 

 

이재훈

 

 

 

 

 

요즘 돌에 대한 시를 쓰고 있다. 왜 돌인가 라는 질문에는 여러 가지 할 말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돌이 어떤 계시나 운명처럼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렇듯 시적 만남은 늘 벼락처럼 찾아온다. 세계는 모두 이런 우연한 만남의 반복 과정 속에서 지탱된다. 이런 우연한 만남을 필연이라고 의미부여하고, 나름의 연관성을 찾고, 게다가 가장 고귀한 사건으로 미화시키는 경우도 자주 발견하곤 한다.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에 실린 대황하 연작시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시와세계>, 2008년 가을호) 황하의 상징은 물에 대한 상징이고, 이 상징을 통해 나는 정신의 극점을 향하는 길목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리고 황하는 내 존재가 걸어가다 만나는 수많은 풍경 중의 하나이며 앞으로 만나게 될 풍경이 또 어떤 풍경이 될지는 모른다고 적었다.

돌에 관해서라면 옥타비오 파스를 얘기하고 싶다. 물로 시작한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 속에서 나는 물을 거쳐 돌로 가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던 것이다.

 

땅속 깊은 곳의 물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파도가 해변을 덮는 것처럼, 현존은 표면으로 떠오른다. 모든 것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고동친다. 존재와 겉모습은 하나이며 동일하다. 숨겨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은 자신으로 충만해져서 빛을 발하며 자신을 나타낸다. 존재의 조수. 존재의 물질에 이끌려서 나는 너에게로 다가가서, 너의 가슴을 만지고, 너의 피부를 쓰다듬고, 네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세계는 사라진다. 이제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없다. 사물과 사물의 이름, 숫자, 기호는 우리 발밑에 떨어진다. 이제 우리는 말을 벗어 던졌다. 우리 이름을 잊어버리고 대명사들은 서로 혼동되고 얽힌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우리는 위를 향해 솟구쳐 오른다. 이름과 형태가 흘러가며 소실되는 동안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 얽매여 추락한다.

― 옥타비오 파스, 「시적 계시」, <활과 리라> 중에서

 

물의 솟아오름은 존재의 지평을 확산시킨다. 우리 존재는 이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세계는 사라지고, 내 존재는 사라져도 내가 명명했던 이름들과 그 이름들을 지켜보던 돌은 남아 있을 것이다.

파스는 「태양의 돌」이라는 장시를 썼다. ‘태양의 돌’은 고대 아즈텍 문명의 우주관을 기록한 거대한 원형의 돌이다. 일명 ‘아즈텍의 역’이라고도 불린다. 그 돌의 중앙에는 태양신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과거에 멸망한 4개의 시대를 상징하는 신의 그림이 있다. 또 바깥쪽에는 아즈텍 역의 날짜를 나타내는 20의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돌은 오래된 시간이다. 시간의 표상이며,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물질이다. 아마 이 우주가 탄생하기 시작할 때부터 함께 했을 것이다. 돌로 시작된 우주. 돌로 시작된 수많은 별.

 

부러진 돌부리에 채인다

굴러다니는 돌이 아니라

올곧게 서 있다가, 부러진 돌

창과 칼 혹은 바람이

돌의 몸을 반 동강 냈을 것이다

사방이 어둠이었고

나를 길에 내던졌던 사람들의 눈빛만

어둠 속에서 반짝하던 밤들이었을 때

발바닥 돌덩이가 내 존재를 떠받칠 때가 있다

돌이 내 집을 떠받치고,

아버지의 약속을 떠받칠 때

돌 위에 피의 흔적이 있다

돌은 깨져도 죽지 않는다

돌은 썩어갈 육체를 갖고 있지 않아

언제나 채이고 밟히고 놀아난다

돌에 의해 소멸한 것과 태어난 자리가 한 몸이 되는

이 모든 찰나를 지켜본 돌

어둠 속에서 세상이 어지럽게 돌기 시작하면

나는 흔들거리는 운명을 본다

흔적 없이 왔다간

당신의 영혼에 몰래 깃들고 마는 돌

부처의 얼굴도 만들고, 예수의, 마리아의 몸도 만드는

성육신인 돌

영원을 살고 있는 길 위의 돌

돌로 만들어진 뭇사람 하나

그 무성한 골짜기의 돌

― 졸시, 「돌의 환(幻)」 전문

 

위의 시처럼 돌을 만났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에 채인 돌을 만났다. 그 누구도 지금 내가 만난 돌의 기원을 알 수 없다는 미지의 생각이 날 미혹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돌과 꽤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누구도 돌이라는 물질에 대해서는 그런 친연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 ‘환(幻)’인가 하면 돌의 실체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 정신의 지평으로 다시 환의 지평으로까지 몰고갈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그 가능성의 시작을 알리는 시였기 때문이다. 성육신의 돌을 넘어 영원을 살고 있는 길 위의 돌과 오래도록 만날 것 같은 느낌이다.

 

 

 

Posted by 이재훈이
,

그렇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종합한다면 시가 다른 예술 장르와 구별해본다고 할 때, 시는 무엇보다도 예술적 충동의 맨 앞자리에 놓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적 충동의 맨 앞자리에 놓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다시 한다면, 앞자리에 놓인다는 것을 다른 말로 치환해보건대 시는 시원始原의 자리에 있으려고 한다, 탄생의 자리에 있고자 한다, 라는 것입니다. 이는 프랑스 철학자인 장 뤽 낭시Jean-Luc Nancy의 말을 인용해보면 더 확고해집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을 통해 의미의 시원에 도달한다면, 그 방식은 ‘시적으로!’라는 방식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시가 그런 도달의 수단 혹은 중개를 이룬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의 뜻인데, 즉 오직 그런 도달만이 시를 구성한다는 것, 그리고 시는 그런 도달이 일어날 때에만 생겨난다는 뜻이다.

 

이 말대로, 우리가 시를 쓴다는 것은 시를 쓰는 행위 자체가 의미의 시원에 다다르는 행위라는 겁니다. 의미의 시원에 다다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의미의 시원 그 자체입니다. 좀 더 말을 바꿔보자면, 시를 쓴다는 것은 언제나 ‘신생의 사건’이 되려고 하는 충동과 관련된다고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항상 ‘신생의 사건’을 스스로 겪거나 체험하거나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

 

어쨌거나 프로이트가 생각할 때, 아이가 반복적으로 팽이를 던지는 행위는 쾌락원칙 너머에 있다고 봅니다. 쾌락원칙에 충실히 따르면 몇 번 하고 스스로 만족해야 되는데, 만족하지 못한다는 얘기죠.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가 있다, 이게 반복강박이죠. 쾌락원칙 너머의 이 반복강박은 ‘생의 충동’이 아니라 ‘죽음의 충동’과 관계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 ‘죽음의 충동’의 현장이 바로 앞서 읽었던 보들레르의 「여행」이라는 시입니다. “죽음이여,…(중략)… 닻을 올리자!”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죠?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우리는 죽어야 다시 살아납니다. 죽지 않으면, 언제나 낡은 생의 찌꺼기가 남아 있습니다. 낡은 생의 찌꺼기를 완전히 버려야지만 우리는 다시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진짜로 죽으면 다시 살지 못하잖아요.(웃음) 그러니까 죽되 죽지 않아야 합니다. 죽되 죽지 않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게 바로 시 쓰기라는 얘기입니다. 시를 쓰는 것, 그게 언제나 ‘신생의 사건’이 되는 거라면, ‘신생의 사건’은 결국 무엇인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완전히 새로 사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꼭 시에만 있는 것만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시에 유별나게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왜 유별나게 많은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시는 언제나 예술적 충동의 맨 앞자리에 놓이기 때문이죠.

이 신생의 분출은 창조하는 자로서, 창조하는 행위로서, 창조하는 내용으로서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하려는 욕망에 밀착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사람은 새로워질 때에야 항상 나다워진다고 느낍니다. 신생은 나의 회복인 것입니다. 즉, 신생에 대한 충동은 자신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욕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일성으로의 회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진짜 모습(true identity)의 세움이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시를 씀으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진면목―진정한 자기 모습으로 도달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여느 시인들보다도 더 시적인 소설을 썼던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는 가장 환상적인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언제나 ‘인공적인 것’에 대한 저항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다.” 현실에 대한 저항이 뭡니까?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거죠. 즉, 이 말은 시가 ‘자연스러움’(‘당연함’)의 회복임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괴테도 이미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순수한 본질 안에서 고려된 시는 말(parole)도 예술―기술(art)도 아니다. 말이 아닌 것은, 시는 완성을 위해서 리듬과 노래와 육체의 운동과 시늉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이 아닌 것은, 모든 것이 ‘자연스러움(le naturel)’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움은 규칙들을 존중해야 하지만, 장인적 훈련의 억압적인 강제를 따라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언제나 영감이 피어오르는 고양된 정신이 특별한 목표나 계획도 없이 토로하는 진솔한 표현으로 존재한다.” 그렇습니다, 시는 말로 썼지만 우리는 그것을 쓰는 순간 이미 춤추고 노래하고 몸짓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까 이성복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말씀드렸잖아요. ‘앵도를 먹고 무서운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어’의 뜻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앵도를 먹고 무서운 아이를 낳’으세요. 이것이 시입니다. 순수한 본질 안에서 시는 말이 아니니까요. 이미 몸짓이고 운동이고 무용이에요. 더불어 시가 예술이 아닌 까닭은 모든 것이 자연스러움에 근거하기 때문이라고 괴테는 말했습니다. 자연스러운 규칙들, 규칙들이되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있는 이야기는 서로 모순될 수는 있겠으나 크게 두 가지예요. 어쨌든 시는 우선적으로 자기표현의 발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기 표현은 단순히 있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순수하게 토로된 세계의 창조이자 의미의 시원 혹은 신생의 사건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결국 시 쓰기로서의 자기표현은 자기로부터 세계가 되는 일입니다. 이것을 다른 것이 되는 것, 이화異化, 독일어로 ‘Entfremdung’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ntfremdung’을 자주 쓰이는 의미대로 잘못 이해하면 ‘소외’가 됩니다만, 소외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고 버려지는 것이거든요. 헤겔에 따르면 ‘Entfremdung’은 자기로부터 이화될 때 비로소 자기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는 논지에서 쓰인 용어입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정리하자면, 시의 표현은 곧 이화이고, 이화는 곧 창조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는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행위입니다. 이 때문에 시는 언제나 생성의 첫 순간에 늘 있는 것입니다.

왜 시가 ‘쓰는 것’만으로 충족되는 것인지, 그 이유는 이재훈 시인의 시를 통해서 확인해봅시다.

 

산책길엔 언덕이 있다.

그날은 이상했다.

오르고 올라도 닿지 않는 거리를 헤맸다.

혼을 빼앗긴 것처럼.

늪에 빠진 것처럼.

뒷덜미를 놓아주지 않는 불빛이 있었다.

사위가 어둠에 둘러싸이면서

상점엔 불이 하나씩 켜졌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어둠이 안겨주는 거대한 정적을,

위대한 침묵을

나는 알지 못했다.

상처받은 한 친구를 생각했고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생각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바쁜 거리의 일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산책길엔 언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길목과 길목이 혀를 내밀어

내 몸을 떠받치고 있을 뿐.

타인의 인격을 규정하지 않기로 했다.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다.

장 그르니에가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빛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다.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은,

그 짧은 시간만큼은 황홀하겠지.

언덕이 있는 곳은 월곡月谷,

달빛이 있는 골짜기다.

언덕을 오르고

또 한 언덕을 오르면

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그 햇살의 순간처럼.

― 이재훈,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전문

 

이재훈 시인은 여기서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라는 말로 시가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그 이유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자인데 절대로 기적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시를 쓰되 온전히 다 이해되고 전부 해석되기를 희망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시원의 순간에 있으려고 하는 시적 충동은 시의 존재론적 양태들 중 하나로 들어갑니다. ‘묘사’는 이미 있는 것을 그리는 거잖아요. ‘묘사가 아닌 표현’이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복수성이 아닌 단수성, 시는 언제나 단수성을 지향합니다. 이것을 황동규 시인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옆놈 모습 닮으려 애쓰지 않는다”(「제비꽃」)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시는 공간적으로는 전개되는 게 아니라 언제나 압축됩니다. 왜냐하면 고밀도로 압축될 때에만 빅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압축되지 않는 것들은 폭발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터져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시는 시간적으로는 흐름이 아닌 순간입니다. 이재훈 시인의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에서 계속 ‘순간’이 지시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시는 순간에 대해서만 다루고 순간에 의해서만 다루어질 뿐, 흐름으로 의식화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시는 드러냄이 아닌 암시입니다. 왜냐하면 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창조는, 우리가 눈을 뜨는 시간에 금방 사라져버려요. 어느 한 순간에 창조되어버렸는데, 눈을 뜨는 그 시간에 이미 사라져버려요. 그러므로 우리는 시의 진지한 창조를 언제나 암시로써만 들여다볼 수 있는 거죠.

 

_ <현대시>, 2013년 2월호 중에서

 

 

Posted by 이재훈이
,

대선과 크리스마스

산문 2012. 12. 7. 10:28

대선과 크리스마스

 

   

이재훈 (시인) 

 

 

 

 

 

내가 처음 대선을 치른 것은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에서였다. 당시에는 김대중과 김영삼이라는 양김의 시대가 마지막으로 시대를 호령하는 때였다. 영원한 라이벌로 불리우는 정치스타 김대중과 김영삼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정치계의 화두이며 핵심이었다. 김영삼 후보는 민정당의 노태우와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과 합당, 적들과의 동침을 자행하며 민자당을 출범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14대 대선에서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문민정부에 이어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에 이르기까지의 대선 여정들은 내 청춘의 정점을 수놓은 추억들과 함께 했다.

14대 대선 때 나는 재수생이었다. 정치에 대한 관심은 배부른 사치처럼 느껴졌고, 사회에 대한 불만과 자신에 대한 열등감은 극도로 높아져 있었다. 대학생들의 시위와 시민들의 공분과 가열차게 돌아가는 대선 정국은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들처럼 여겨졌다. 혼자만의 내면에 파묻혀 세상을 바라볼 때였다. 가끔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무정부주의자를 꿈꾸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대학생이 되었고, 졸업을 하였고, 힘들게 공부를 하였으며 결혼을 했고 자녀를 키우고 있다. 지금은 비정규직의 삶을 살며 도시인으로서의 명분을 합리화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나이가 들고 삶의 규모가 조금씩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지금은 여러 열린 창을 통해 정치에 대해 일거수 일투족을 관람하고 얘기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은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염원이 피로 승화된 우리 시대의 아픈 역사이자 상징이다. 5.18의 뜨거운 피와 가슴과 열망과 눈물이 없었다면 민주화의 정치사는 아마 한참 뒤늦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나는 중학교 시절 성당 지하실 사진전에서 본 광주 민주화운동의 처참한 모습들을 잊을 수 없다.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우리의 역사이며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도저히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주위를 돌아보면 별달리 달라진 게 없는 듯하다. 공권력에 의해 인권은 유린되고 있으며 가난하고 낮은 자들에게는 이전보다 더한 모욕을 안기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예의도 상식도 배려도 없이 오로지 개인의 이기심만 팽배한 사회에서 오로지 돈만이 모든 삶의 지표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의 각박한 현실, 신자유주의로 치장한 지금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더 나아졌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려본다. 지금이야말로 5.18의 희생과 민주화를 향한 뜨거운 열정과 숭고한 피의 의미를 생각할 때 아닌가.

정치는 우리 삶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정책 하나 하나가 직접적으로 우리 삶과 밀착되어 있다. 삼포세대(취업 포기, 결혼 포기, 출산 포기)라 불리는 청년들의 미래, 사교육과 등록금으로 인해 자녀들을 교육하기 어려운 환경, 명예 퇴직이나 조기 퇴직으로 인한 50대 이상의 실업문제, 노인층의 증가로 인한 복지 문제 등등이 지금 우리 사회가 풀어가야 할 난제들 중 하나이다. 정책 하나가 달라진다는 의미는 이런 문제들이 하나씩 풀어질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기존 청치에 대해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는 투표를 하는 행위이다. 투표행위를 통해 위정자들에게 국민들의 뜻을 강하게 전달할 수 있다. 찍을 사람 없고, 좋아하는 후보자가 없다고 해서 투표권을 포기한다면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 아닐까. 의무를 다했을 때에야 정치권에 불만을 제기할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찾을 수 있다. 얼마나 더 위정자들에게 당해야 할지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뜩하기만 하다.

역대 대선 투표율은 14대 81.9%, 15대 80.7%, 16대 70.8%, 17대 63%로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다. 투표율이 더 이상 낮아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정치권에서는 투표시간 연장안을 놓고 갑론을박하고 있다. 투표시간 연장안에 반대하는 입장을 들어보면 투표율을 높이자는 취지에 대한 반론이 빈약하기 그지없다. 이번 대선에서는 후보자들의 토론회도 찾아볼 수 없다. 15대 대선에서는 54회, 16대에서는 27회, 17대에서는 11회의 대선 후보자 TV토론회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18대 대선에서는 투표일이 한 달 남은 지금까지 단 한 차례의 토론회도 열리지 않았다. 국민들에게 무엇을 보고, 듣고, 판단하라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올바른 판단과 투표행위를 통해 5.18의 정신은 올곧게 이어질 것이다. 국민들의 참정권 행사가 없이는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다. 바꾸고 싶으면 행동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 첫걸음이 투표행위가 아닐까. 13대 직선제 때부터 대선일은 늘 12월 중순이었다. 12월에는 크리스마스가 있다. 축제의 마지막 달이다. 대선 또한 우리에게 축제이고 싶다. 벌써부터 12월의 그날이 기다려진다.

 

_ 5.18기념재단 계간지 <주먹밥> 2012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

 

Posted by 이재훈이
,

 

최근 출간된 이재훈의 시집 <명왕성 되다>에는 육성(肉聲)이 담겨 있다. 많은 젊은 시인들의 시가 현란하긴 하지만 그들의 시에서 삶의 무게가 직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재훈의 시집에는 2000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환멸과 고뇌가 격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재훈의 시는 ‘나’로부터 벗어나지 않지만 그 ‘나’는 사회로부터 오는 자극에 대해 격렬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그만큼 시대의 인장이 찍혀 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더욱 지독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전형적인 영혼을 살펴볼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 영혼은 시대에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만 반응하지 않는다. 세계로부터 고통 받는 그 감수성 짙은 영혼은 어떤 도주로를 뚫고자 한다. 그래서 영혼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시집을 여는 시인 「비비디 바비디 부」는 시인이 처한 현재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 눈은 카메라를 닮았다.

노출을 열고

몇 시간 동안 창밖을 보면

불빛만 남은 세계.

칼 맞고 피 흘리는 거룩한 세계.

지친 육체는 허공이 가져 가고

영혼만 달랑달랑 소란하다.

 

이재훈 시인의 눈에 비치는 세계는 어떠한 곳인가? 세계엔 불빛만 남아 있다. 그 불빛은 현란한 도시의 야경을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시인의 눈에는 폭력으로 인한 희생의 피가 묻어 있는 핏빛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폭력적인 세계는 희생자로 가득 찬 ‘거룩한 세계’다. 핏빛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시인의 육체는 지칠 대로 지치고 영혼은 “달랑달랑 소란”해질 정도로 빈곤해진다. 파괴된 영혼이 일으키는 소란은 도시의 소란과 관련된다. 이재훈 시인에게 서울이란 도시는 “나의 메디나,/ 시인들의 공화국”(위의 시)이다. 하지만 시인은 「만신전(萬神殿)」에서 “도시는 너무 시끄럽습니다. 가슴속에서 귀신들이 포식하고 구역질하는 소리 들립니다”고 하여 도시에 대한 구토감을 드러낸다. 시인에게 서울은 시인들의 공화국이자 귀신들이 시끄럽게 토하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도시에 대한 이러한 양가적인 태도는 보들레르 이후 현대 시인의 전형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재훈 시인은 그러한 태도를 직접적으로 격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포식하고 토하는 귀신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시인은 언제나 비상을 꿈꾸는 존재이다. 하지만 도시에서 사는 시인은 “마음껏 날고 싶었지만,/ 이곳에 살기 위해선 참아야 했”(「안드로메다 바이러스」)다고 한다. 이재훈 시인은 그러한 시인에 대해 ‘외계인’이라고 명명한다. 그 외계인―시인은 지구에 유폐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탈출을 꿈꾼다. 즉, “서로의 키를 재고 우쭐거리”는 수학의 미학이 지배하는 지구에서 다시 날고 싶어 하는 이 외계인은 “살아 나갈 도주로를 찾”(같은 시)는다. 그 도주로란 “아름다운 북극의 얼음 위에서/ 지혜의 말들을”(같은 시) 얻는 데로 나아가는 길이다. 하지만 그를 묶어 놓은 이 세계의 밧줄은 쉽게 풀리지 않을 테다.

이 세계에서 사는 삶이란 “육십억 분의 일일 뿐”으로 사는 것이며 “페트병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맥주 캔. 먹다 남긴 컵라면.”(「매일 출근하는 폐인」)과 같은 폐품으로 버려진 채 사는 것이다. 시인은 “하루하루를 버티다” “외치고 울부짖”(같은 시)을 수 있을 뿐이다. 지구에 유폐된 외계인의 삶은 이렇듯 쓰레기가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환멸과 구토 속에서 외치고 울부짖는 그는 언제나 ‘거대한 허무’에 맞닥뜨린다. 시인은 대부분의 도시인들이 그렇듯이 하루하루 버티는 삶을 살아나간다. 그는 시끄러운 도시 생활 속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여유도 가지지 못하고 갖가지 노동에 파묻혀 살아가야 한다. 「명왕성 되다」를 보면, 시인은 몽상에 잠기고 영혼을 비상시키기 위한 시간을 출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겨우 얻는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 시인만이 아는 내밀한 기억들로 가기 위해서 시인은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는다. 눈을 감은 시인은 자유로운 연상에 들어서고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면서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몽상은 지하철의 기계소리에 방해받고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런 리듬”은 시인의 몽상에 지속적으로 개입해서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한 현실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리듬은 시인을 옥죄는 오랏줄이다. 도시의 일상에 묶인 시인으로서는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들어갈 자신이 없”으며 “신성한 모험”도 의심스럽기만 하다.

「다정한 재봉사의 재판」을 보면, 이 세상은 “유리로 만든 방”이며 몽상하는 시인을 죄인 취급하기도 한다. 이 세계는 재봉사로 비유된 시인을 ‘유리방’에 가두고는 유리를 통해 보이는 세상을 보고 “그대로 옷감을 짜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몽상하는 시인으로서는 그러한 명령을 따라야 하는 일이 고통이다. 그는 “하늘을 날고 있는 제 모습을 짜고 싶었”으며 “저 먼 세계를 비상하는 영혼의 고난함을 짜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만한 이미지”만을 보여주는 세계―“문명의 숲”―는 시인이 “매일매일 똑같은 무늬를” 짜도록 강요할 뿐이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시인은 탈출을 더욱 더 열망하게 될 터,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다./ 열대를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킬리만자로」)라는 담담한 진술은 이러한 열망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고 하겠다. 시인이 원하는 것은 문명의 숲으로부터 벗어나 “위대한 숲의 시를 쓰”(같은 시)는 것이다. 그 숲은 열대와는 멀리 떨어진 겨울 숲이다. 겨울 숲은 “목숨까지 다 토한”(「겨울 숲」) 어떤 兄이 먼저 떠나간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문명의 숲’에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시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도시 생활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상황과 도주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시인의 말이 빚어진다. 하지만 ‘형’처럼 겨울 숲으로 떠나지 못하고 있던 자책감이 어떤 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내 입술은 봉인되지 못하고/ 부끄러운 고백들을 나불댔네”(「진흙의 봉인」)라고 말하기도 한다. 시인의 시는 “결국 슬픔이 되고 공허가 될 말들”이였으며 “징그러운 말들의 시체”(같은 시)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시인은 이 말들이 “반성의 포즈로 모두를 속일 수 있었”(「침묵의 세계」)다고도 말한다. 이러한 자기 부정은 또 하나의 반성으로도 볼 수 있겠으나 한편으로 어떠한 도주로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모색으로서도 읽을 수 있다. 위대한 숲의 시를 쓰고 싶었다는 고백만으로는 이 문명의 숲에서 겨울 숲으로 통하는 도주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는 우선 “혀를 깨무는 연습”(같은 시)부터 하여 ‘침묵의 시민’이 되는 데서부터 다시 출발하고자 한다. 왜 혀를 깨물고 침묵하고자 하는가? 침묵 속에서 소멸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소멸은 또 다른 생성으로의 길을 열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촛불도 아니고 감나무도 아니다.

미끈한 자동차도 아니고

달콤한 솜사탕도 아니다.

차갑고 텅 빈 사물에

쇳물을 들이붓고 싶다.

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이었다.

꿈을 꾸면

붉은 별 하나가 내게 떨어지는 사건이었다.

손이 델까 만지지도 못한 별이

마당에 내려와 날 또렷이 노려보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엎드려 울지 않겠다.

슬픔을 우스운 몸짓으로 과장하기 않겠다.

해거름에 사양(斜陽)을 보며 사흘을 울겠다.

그러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

그 비밀의 성소(聖所)가 내 집이었다.

소멸이

내 먹는 밥이었다.

― 「연금술사의 꿈」 전문

 

이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이 시는 앞으로의 시작(詩作)에 대한 시인의 각오를 보여준다. 슬픔을 과장하지 않겠다는 각오는 앞에서 언급한 “혀를 깨무는 연습”과 통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그 침묵의 연습은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시를 통해 드러난다. 그 침묵은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는 작업이다. 그 작업을 통해, 시는 에밀레종처럼 몸을 녹여 소멸시키고는 “에밀레 에밀레”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은 무엇이 될 수 있을 터이다. 그리하여 시의 목소리에는 몸이 녹아 들어가 있게 된다. 시는 육성(肉聲)을 내게 되는 것이다. 소멸을 통과하여 육성을 드러내는 시. 말의 연금술사가 되고자 하는 시인은 이 경지에 다다르고자 꿈꾼다. 이때 “차갑고 텅 빈 사물”은 시의 내밀한 세계―쇳물이 출렁대는 비밀의 성소―속으로 용해되고는 새로이 탄생할 것이다. 세계와의 지독한 불화와 이에 따른 자기비판은 이렇게 단단한 영혼의 다짐으로 나아간다. 이 시집의 첫 번째 시는 철저히 공허하기만 한 세계 속에서 “달랑달랑 소란”하기만 한 영혼을 보여주었다면, 이 시집의 마지막 시에서는 “빛나는/ 뜨거운 강철”의 영혼이 등장한다. 이렇듯 이 시집은 공허에서 단단함으로 나아가는 영혼의 드라마를 엮어내고 있다.

그런데 위의 시의 자기 다짐이 손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시집의 중추를 이루는 2부는 「대황하」 연작이 실려 있는데, 이 연작시는 불모의 세계 속에서 시인이 겪어야 하는 환멸과 고통을 뜨겁게 그려내고 있는 역작이다. 강렬한 이미지의 연쇄로 전개되는 이 연작시는 시인과 환멸스러운 세계와 뒤섞임을 환몽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세계는 모래의 강과 같은 황하로 비유된다. 「대황하 1」을 보면 “작열하는 사막에서 기다리고 기다”리고 있는 시인은 누런 모래의 세계 속에 빠지고 있다. 그런데 그 모래는 흡혈귀와 같이 시인의 피를 빨아먹는다. 시인은 “서서히 내 몸이 모래에 잠기지. 모래가 살갗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지. 물과 피가 다 빨려 가죽만 남았지. 모래가 사각사각 살가죽까지 갉아먹”는다고 진술한다. 시인의 기다림은 아마도 하늘로의 비상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이 사막은 그에게 비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막의 모래는 그의 몸에 달라붙어 그의 피를 빨아먹고는 결국 가죽만 남은 시인을 쓰레기처럼 폐기해버릴 것이다. 이 사막에서 비정한 현 한국 사회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시인이 현 한국 사회가 가하는 압력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한편, 시인은 더 나아가 “끝없이 깊은 모래 밑으로 물소리가” 들린다고 말한다. 사막은 역설적으로 강이었다는 것이다.

 

손가락 하나가 툭 꺽였다. 만져 보니 문드러져 툭 떨어져 나간다. 배를 만지니 손가락이 푹 들어가 내장이 만져졌다. 누웠다.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생은 연습이 없다. 단 한 번이면 족하다. 누웠다. 온몸에서 진물이 흘렀다. 누런 물이 땅으로 스민다. 누웠다. 스민다. 쏟아지는 모든 것들이 스민다.

― 「대황하 2」 부분

 

피를 빨아먹는 사막은 육체를 부패시키는 누런 황하임이 드러난다. 시체들이 누워 있는 이 세계에서 시적 화자의 육체 역시 부패하면서 누런 물을 흘린다. 즉 황하는 시체들의 진물로 이루어진 강이다. 「대황하 3」의 “누런 황토물이 거리에 솟구친다.”라는 구절을 보면 황하란 바로 도시의 거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시는 부패해가는 시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얼굴을 가린 채 눈빛만 쏘아 대는 사람들”(「대황하 3」)이다. 자신의 마음을 가리고 상대방에게 가하는 공격적인 눈빛은 삶의 부패를 드러낸다. 그 눈빛이 바로 ‘진물’일 것이며 ‘황토물’일 터, 「대황하 7」에서는 그 시체와 같은 얼굴 가린 사람들이 제법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다음은 이 시의 후반부다.

 

뜨거운 김을 쐬고 퇴근 무렵 자동차에 몸을 싣는다. 내 얼굴에 붉은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사람들은 이미 죽음 직전의 표정을 연습하고 있다. 나는 두통을 이기기 위해 투구를 쓴다. 도도한 웃음을 연습한다. 열기를 보았다. 빛이 열기 속에서 반짝반짝 드러났다. 시장(市場)이다. 죽음의 얼굴을 파는 시장이다. 뜨거운 빛 속이다.

 

도시의 거리인 황하는 또한 시장이기도 하다. 그들은 얼굴을 가리고 “죽음 직전의 표정을 연습”한다. 시인 역시 투구를 쓰고 얼굴을 가린 채 “도도한 웃음을 연습”하고 있다. 그 웃음이란 아마도 시장에 팔리기 위한 웃음일 것이며 결국 진실한 삶을 죽이는 웃음일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 직전의 표정 짓기를 연습하면서 살아나가야 한다. 팔리기 위해 사는 이들은 경쟁자인 상대방을 공격적인 눈빛으로 바라본다. 이 “뜨거운 빛”이 사막―황하의 열기를 만들어낸다. 시인은 이들 삶 속의 죽음을 ‘붉은 물줄기’로 상징화한다. 죽음의 표정을 짓는 이들의 얼굴엔 죽음을 가리키는 붉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그리하여 이 죽어가는 삶에는 언제나 시체 냄새가 날 것이다. 시인은 “몸 가죽을 슬쩍 잡아 찢는다. 온몸에 누런 물 내음이 가득 퍼진다”(「대황하 8」)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누런 물이란 물론 부패해가는 육체가 흘리는 진물이다. 그러므로 마실 수 없는 물이다. 죽음의 삶, 거짓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황하에서는 “실체는 없고, 허상만 가득”해서 “바닥이 보이지 않”(「대황하 9」)는다. 그곳에서는 “강물에서 물을 먹지 못”하며 “재갈을 물린 입으로 소리를 질러”야 하고, 그래서 “갑판에 비명이 가득”한 공간에서 사람들은 “생수 위에서 목말라 죽어”(같은 시)가야 한다.

「황하」 연작은 이 세계에 대한 시인의 지독한 환멸을 보여준다. 그 세계는 구체적으로 서울을 가리킨다. 서울은 “한여름에도 눈이 내리고/ 한겨울에도 태풍이 오는 곳”으로서 “일찍 배운 증오로/ 뼈와 살을 태우는 곳”(「비상」)이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 나타나곤 하는 이상 기온 현상이 수시로 닥치는 도시, 증오 속에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도시가 서울이다. “죽는 법을 배우지 못”하여 죽지 못한 시인은 이 속에서 “새들의 노래를” 부르는 자다. 그러나 어떻게 이 시체들로 가득 차 있는 공간에서 비상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대황하」 연작을 마무리하는 시인 「대황하 11」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쓴다. 다음은 이 시의 마지막 연이다.

 

붉은 눈물,

가만히 들어와 출렁인다.

거리를 걷고 있으면

온몸이 하늘로 붕 뜬다.

병든 몸 위에 새들이 날고 있다.

 

죽은 삶을 상징하는 ‘붉은 물줄기’가 이 시에서는 ‘붉은 눈물’로 변환되어 나타난다. 죽어가는 삶에서 비롯되는 슬픔, 그 슬픔이 ‘붉은 눈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시인은 이 슬픔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비상의 힘을 마련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죽음 속에서 슬픔으로 마음이 출렁이게 될 때, “온몸이 하늘로 붕” 뜨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병든 몸 위에 새들이 날고 있”음을 발견한다. 더 나아가 시인은 날아가고 있는 저 새들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 역시 발견한다. 「건기(乾期)의 새」에 따르면, 새들은 “하늘 귀퉁이 구름을” 밀고 있다. 그런데 그 행위는 “어떤 운명을 잠시” 미는 것이라고 한다. 왜 그럴까? 구름을 미는 행위는 “물 쪽으로 향한 구름에 몸을 던”지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물이란 황하에서와 같은 누런 물이 아니라 “이슬의 영롱함과 풀잎의 생명”과 같은 맑은 물일 터이다. 이 맑은 물을 함유하고 있을 구름 쪽으로 몸을 미는 행위는 황하 같은 세상에서 삶의 운명을 바꾸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꿈꾸는 비상이란 맑은 삶에의 의지를 의미한다.

시인이 북극을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최초의 물”이 결빙되어 이루어진 북극의 얼음이야말로 ‘맑음’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그 맑음은 인간의 세계를 넘어선 어떤 세계다. “언젠가 인간의 시간은 멈추겠지만/ 얼음의 시간은 멈추지 않겠지.”(「북극의 진화」)라고 시인이 말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얼음의 시간대에서 인간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시인은 좀 더 광활한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시인의 인식에 따르면, 대자연의 순수성이라고 할 북극의 얼음은 인간 세계 밑바탕에서 세계를 세우고 허문다. 「북극의 진화」는 인간 세계 바깥의 시야에서 “인간의 소리”를 인식하고 있는 대작이다. 이 시의 후반부를 다시 읽으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최초의 물은 멈추지 않고 질퍽대면서

어느새 허벅지까지 올라온다.

솔직히 나는 진화했다.

물이건, 얼음이건 간에

먹고 버리고 회피하면서 몸뚱이를 지켜왔다.

상점에 들어오면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푸르스름한 기억을 소환해

이 도시를 담금질한다.

한 달 새 교차로엔 거대한 빌딩이 들어섰다.

대형 마트와 옷가게가 들어서고 그 위에 사람들이 산다.

지도는 또 바뀔 것이다.

대륙의 한 점이, 또 한 점이 되고,

다시 한 점이 덧입혀져 거대한 점이 될 때까지.

저 멀리 철새는 날아오르고

꽃잎은 몽우리를 틔울 것이다.

내 숨은 어느 산맥을 따라 이동할까.

밤이 되면 지도의 소리는 막힌다.

거칠게 울고 우는 소리만 가득하다.

인간의 소리만 가득하다.

모든 것이 까마득하다.

 

 

_ <현대시>, 2011년 9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

윤성근의 시 낭독

 http://www.munjang.or.kr/mai_multi/djh/content.asp?pKind=14&pID=24

 

 

윤성근, 「엘리엇 생각」

 
 
내가 짧은 능력과 식견으로 돼먹지 않은 두 편의
미간행 장시를 발표한 것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나는 당신을 닮고 싶었던 것.
 
그러나 될 일도 될 턱도 없어 가슴에 묻고
예이츠도 키츠도 셰이머스 히니도 딜런 토마스도 아닌
많은 시인들 가운데 또 김수영도 정지용도 미당도 이상도 아닌
그 숱한 위대한 시인들 가운데 유독 당신 하나만을
칭송케 되었는데
 
어느 해 크리스마스 무렵 술 취해 막 이사한 아파트를 못 찾아
택시에서 어추어추 30분 이상 헤맬 때
당신의 시 「네 사중주」의 일 절 우리가 부단히 애써 인생을 살면
처음인 그 끝자리로 돌아오게 되리란 구절이 떠올라
곧장 택시 내린 곳으로 돌아와
뒤돌아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 성큼 집으로 찾아 들어갔던 것.
 
혹시 이런 모습을 시인이 내려다보고 있지나 않을까 해서
일순 계면쩍어하면서.
 
 
시_ 윤성근 - 1960년 경북 대구에서 출생. 시집 『우리가 사는 세상』『먼지의 세상』『소돔』『나는 햄릿이다』『나 한사람의 전쟁』 등이 있음. 2011년 영면함.
낭송_ 이재훈 - 시인.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가 있음.
출전_ 『나 한사람의 전쟁』(마음산책)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이지오
프로듀서_ 김태형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발표했다는 시인의 미간행 장시가 궁금하다. ‘도시서정’이라는 말이, 요즘의 ‘미래파’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시단에 회자되던 시절이었다. 윤성근은 이 도시, 서울의 ‘착란과 착란으로 얼빠진 얼굴들’(엘리엇의 「네 사중주」에서)의 잿빛 그림자를 시니컬하게, 그러나 유머러스하게 보여준 시인이었다. 참으로 유니크한 시를 썼던 이이가 생전에 마지막 시집을 낸 게 1992년이니, 20년 가까이 그는 대체 왜 침묵했단 말이냐? 하긴 20년이란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이지만, 너무도 짧은 하루들의 한 덩어리일 따름이다. 20년, 금방이다. 아주 가끔, 윤성근 씨는 이제 시 안 쓰나 생각했을 뿐, 20년이나 지난 줄 나도 몰랐다. 미안하다…….
  「엘리엇 생각」이 실린 『나 한 사람의 전쟁』은 유고시집이다. 절박한 병상에서 쓴 시들이 어찌나 맑고 따뜻하고, 꾸밈없고 거침없는지! 「엘리엇 생각」도 찬물을 들이키듯 시원스레 썼다. 만취해서도 시를 줄줄이 욀 정도라니. 엘리엇에 대한 시인의 순정이 미소롭다.
  친할 기회가 없었던 나는 그를 ‘차도남’ 혹은 ‘까도남’이라 생각했었는데, 『나 한사람의 전쟁』을 보고 좀 놀랐다. 실은 이렇게 정 많고 온유한 사람이었구나! 내가 받은 그 인상은 그의 수줍음 때문이었나? 아니면, 그의 시에서 받아온 인상 때문?
  그가 소장한 SF소설을 한 트렁크씩 몇 차례 빌려 본 기억이 난다. 그의 아내를 통해 빌린 것이지만, 그가 아주 까칠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때 생각했던 듯하다.
  술과 헤비메탈과 SF소설을 사랑했던 시인, 윤성근. 삼가 명복을 빈다.
 
문학집배원 황인숙
Posted by 이재훈이
,

제5회 패러디 백일장

 

출처 : http://www.for-munhak.or.kr/idx.html?Qy=play_parody&nid=632&page=1



[심사평]


             제5회 문학나눔 패러디 백일장 심사평 발표

 

 

글/이재훈(시인)

 

이번 백일장에서는 응모작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의 삶이 힘든 모양이다. 응모작들을 한 편씩 읽으면서 각박한 삶의 세목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때론 히죽히죽 웃음을 지었고 때론 공감했으며 때론 가슴이 먹먹하기도 했다.

<남자의 일생>은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한 평범한 남자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애벌레의 느리고 질기고 고통스러운 시간은 우리네 삶의 형편과 많이 닮아 있다. 응모작들 중 많은 수의 작품들이 각자의 위치 속에서 이런 고통스럽고 힘든 삶을 잘 표현해 주었다.

패러디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위트와 풍자가 담긴 수사법이다. 원작을 변용시킬 때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위트가 살아 있는가,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전달해 줄 수 있는가를 중점적으로 살폈다.

Red S님의 <개똥의 일생>은 위트와 해학이 넘쳤다. 한참 웃게 만드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미지가 살아 있으면서 개똥이 거름이 되어 새로운 열매를 맺는다는 생명 순환의 의미도 담겨 있다.

토머스님의 <노숙인의 하루>는 관찰자의 시선이 눈길을 끌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노숙인의 일상을 유심히 관찰하여, 노숙인이 가진 허기가 육체적 허기만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신혁님의 <지아의 일생>은 미소를 짓게 만드는 작품이다. 신지아에게 온 생은 목을 가누고 몸을 뒤집는 시간일 것이다. 아기의 일상을 몸소 체험하여 아기의 세상을 이해하게 한다. 지아에게 작은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수상으로 선정한 미립님의 <김씨의 일생>은 죽음의 순간을 사실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평생 농사일만 하다가 쓰러진 김씨는 자식들 잘되는 것을 위해 온 생을 바쳤다. 우리 부모님들은 대개 이런 분들이다. 보편적인 공감을 얻어내기에 충분한 작품이고 표현도 깔끔하다. 특히 마지막 연에 모처럼 단잠이 든다는 구절이 시를 더욱 의미있는 작품으로 만들고 있다.

이번 백일장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우리의 일생이 어떤 문장을 남기게 될까 궁금해지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우수상 : <김씨의 일생>(미립)

장려상 : <개똥의 일생>(Red S), <노숙인의 하루>(토머스), <지아의 일생>(신혁)

 

Posted by 이재훈이
,

출처 : http://www.for-munhak.or.kr/idx.html?Qy=letter&nid=484&page=1

 

 

Posted by 이재훈이
,

8월 29일(수). EBS 라디오 <시콘서트>에 출연했다.

DJ는 배우 강성연 씨.

시에 감동하는 감성을 지는 배우. 편안했다.

강성연씨는 오프닝으로 <마루>를 낭송했고,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를 낭송했다.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를 읽으며 시가 내 마음과 같아,

낭송할 때 감정몰입이 될 수 있으니 양해해 달라고 했다.

나는 배우의 낭송이 참 좋았다.

나는 <명왕성 되다>와 <카프카 독서실>을 낭송했다.

나의 어눌한 말과 긴장된 톤에 걱정했으나

PD와 작가, DJ는 모두 재밌고 유쾌한 방송이었단다...

그냥 믿기로 했다.~^^

 

다시 듣기 : http://home.ebs.co.kr/reViewLink.jsp?client_id=story&menu_seq=23&page=1

http://home.ebs.co.kr/poem/replay/8/view?courseId=BP0PHPI0000000033&stepId=01BP0PHPI0000000033&prodId=9796&lectId=3118869&lectNm=&bsktPchsYn=&prodDetlId=&oderProdClsCd=&prodFig=&vod=&oderProdDetlClsCd=&pageNo=497

 

 

Posted by 이재훈이
,

 

 

 

 

Posted by 이재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