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시인'에 해당되는 글 150건

  1. 2012.07.17 문학나눔 패러디백일장_ 시인 이재훈의 「남자의 일생」 패러디 하기
  2. 2012.05.03 무욕(無慾)의 명징함을 찾아서 / 조해옥
  3. 2012.05.03 식육과 형벌의 세계를 견디는 날들 / 조동범
  4. 2012.04.20 <포엠포엠> 탐방_ 시인을 만나다
  5. 2012.04.04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자 발표(현대시학, 2012년 3월호) 2
  6. 2012.03.30 <명왕성 되다>의 시인 이재훈 - 제7회 수요북콘 후기 2(최종)
  7. 2012.03.30 <명왕성 되다>의 시인 이재훈 - 제7회 수요북콘 후기 2
  8. 2012.03.30 <명왕성 되다>의 시인 이재훈 - 제7회 수요북콘 후기 1 1
  9. 2012.03.29 수요북콘_ 이재훈 북콘서트
  10. 2012.03.09 유한성의 파토스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_ 박대현
  11. 2012.03.09 유한성과 동일성 너머의 무한_박대현
  12. 2012.02.02 MBC DMB 내 손안의 책 <나는 시인이다> 인터뷰
  13. 2011.12.09 <명왕성 되다> 문화예술위 우수문예도서, <나는 시인이다> 문화관광부 올해의 교양도서로 선정!! 3
  14. 2011.10.12 열림원 문학창작교실_ 이재훈 강의 시작
  15. 2011.10.06 장미가 있는 산책길의 메모_ 이운진의 시편지
  16. 2011.10.05 [아이뉴스24] 시인들은 어떤 사람일까…이재훈의 <나는 시인이다>
  17. 2011.10.04 [문장] 김선우의 문학집배원_ 재킷을 입은 시인
  18. 2011.10.04 [주간 동아 / 시인 오은의 vitamin 詩] 카프카 독서실
  19. 2011.10.04 [한국일보] 진은영의 시로 여는 아침_ 명왕성 되다
  20. 2011.10.04 [매일경제] 이재훈 두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 출간
  21. 2011.10.04 [연합뉴스] 도시의 생태와 내면의 쓸쓸한 풍경
  22. 2011.10.04 이재훈 시집_ 명왕성 되다(민음사, 2011)
  23. 2011.09.13 도시의 감각, 글귀들, 귀신들 / 박서영
  24. 2011.09.09 첨단의 위기 속 우리의 자화상 / 김선주
  25. 2011.05.06 <나는 시인이다>_ <라이브러리&리브로> 5월호 인터뷰 기사
  26. 2011.04.15 <북극의 진화>(Evolution of the North pole by Lee, Jae-Hoon) 영역시
  27. 2011.04.08 [매일경제] 김춘수가 김수영을 질투한 까닭 / 이재훈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_ 정아영 기자
  28. 2011.04.08 [부산일보] 시인이게 시란? / 이재훈 대담집_ 김상훈 기자
  29. 2011.04.04 이재훈 대담집_ 나는 시인이다
  30. 2011.03.24 이재훈 대담집_ 나는 시인이다

출처 : http://www.for-munhak.or.kr/idx.html?Qy=play_parody

 

 

Posted by 이재훈이
,

무욕(無慾)의 명징함을 찾아서

 


조해옥

 

 


1. 이중적 기표로서의 돌

 

돌은 아득히 오랜 시간에 걸쳐 존재해왔고, 멀고 먼 미래에도 변함없이 존재할 것이다. 돌에 축적된 시간의 지속성으로 인하여 돌은 유한한 시간을 사는 인간들의 숭배 대상이 되었다. 돌의 불변성과 견고함은 인간이 돌에 신성을 부여하게 된 이유이다. 이재훈 시인의 돌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들을 보면, 그는 돌의 영원한 시간성 외에도 욕망의 권력구조가 주도하는 세상 바깥에서 자신을 초연하게 빛내는 존재라는 점을 발견해내고 그것에 그의 의식을 집중시킨다.
이재훈 시인은 돌에 인간의 욕망을 투사시키고 그 욕망을 실현시킬 대상으로 돌을 대하는 태도를 거부하고, 오히려 돌은 인간 세상과는 무관하게 초월해 있는 하나의 자연물임을 그의 돌 시편들에서 잘 보여준다. 돌은 인간의 욕망의 논리 바깥에 존재하는 사물이라는 것에서 이재훈 시인의 시적 사유가 시작된다. 「돌의 골짜기」, 「돌의 환幻」, 「수난의 돌」, 「돌의 시간」 등 그의 일련의 돌에 관한 시편들에서 돌은 시인이 지향하는 무욕과 자유로움 등이 형상화된 존재로 나타난다.
돌을 매개로 하여 무욕과 탈속을 추구하는 이재훈 시인의 시 의식은 어찌 보면, 세상을 대하는 그의 이분법적 사유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재훈 시인의 시적 자아는 그 자신 역시 세상에 속한 자임을 분명히 인식한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인간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삶의 전제임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죽음 제의를 치르는 “주술적 인간”(「주술적 인간」)이 되기도 하고, 돌과 식물과의 동일시를 시도하기도 한다.

 

부러진 돌부리에 채인다
굴러다니는 돌이 아니라
올곧게 서 있다가, 부러진 돌
창과 칼 혹은 바람이
돌의 몸을 반 동강 냈을 것이다
사방이 어둠이었고
나를 길에 내던졌던 사람들의 눈빛만
어둠 속에서 반짝하던 밤들이었을 때
발바닥 돌덩이가 내 존재를 떠받칠 때가 있다
돌이 내 집을 떠받치고,
아버지의 약속을 떠받칠 때
돌 위에 피의 흔적이 있다
돌은 깨져도 죽지 않는다
돌은 썩어갈 육체를 갖고 있지 않아
언제나 채이고 밟히고 놀아난다
돌에 의해 소멸한 것과 태어난 자리가 한 몸이 되는
이 모든 찰나를 지켜본 돌
어둠 속에서 세상이 어지럽게 돌기 시작하면
나는 흔들거리는 운명을 본다
흔적 없이 왔다간
당신의 영혼에 몰래 깃들고 마는 돌
부처의 얼굴도 만들고, 예수의, 마리아의 몸도 만드는
성육신인 돌
영원을 살고 있는 길 위의 돌
돌로 만들어진 뭇사람 하나
― 「돌의 환幻」 전문

 

시의 화자가 다른 사람에 의해 땅바닥에 내던져졌을 때, 돌덩이가 그의 발바닥을 떠받쳐준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화자가 돌을 알아본다는 것은 의미가 깊은데, 화자와 돌은 세상의 가치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자는 왜 버려진 존재가 되었을까? 화자는 “굴러다니는 돌이 아니라/ 올곧게 서 있다가 부러진 돌”과 같은 존재이다. 돌은 화자 자신의 초상이기도 하며 그가 선택한 삶의 방향의 초석이기도 하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인식의 주체이고, 돌은 인식 대상으로 나타나는데, 화자는 돌과 동일시되는 과정을 거쳐서 돌과 하나가 된다. 각각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인 화자와 돌은 시의 후반부에 이르면, “영원을 살고 있는 길 위의 돌/ 돌로 만들어진 뭇사람 하나/ 그 무성한 골짜기의 돌”에서처럼, 주체인 화자와 대상인 돌 사이의 간격이 소멸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의 소멸로 인식 주체인 화자는 대상인 돌과의 동일시를 이룬다. 그것은 버려진 돌, 올곧아서 부러진 돌, 밟히고 차이는 돌에서 화자가 자신의 초상을 발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돌은 그에게 영원한 시간이 무엇인지를, 올곧음이 어떤 것이지를, 다른 존재를 가장 낮은 위치에서 떠받쳐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침묵으로 말하고 있으며, 화자는 그러한 돌에서 숭고함을 발견한다. 돌에 대한 동일시와 숭고한 감정으로 그는 버려짐과 조롱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을 견인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 세상의 논리와 질서 바깥에서 존재하는 돌을 사람들은 온갖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욕망이 투영된 조형물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돌은 사람들의 논리와 관념과는 무관하게 서 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돌, 인간의 유한한 시간을 초월해 있는 돌은 현실에 절망한 한 인간을 무한한 환幻의 세계로 데려다 준다.

 

천 년 전의 시간이 쌓여 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천 년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서서히 시간의 안개가 헤어지고
천 년 아니 이천 년 전의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바람이 굴러다니고 시간이 웅웅댄다
황금도 향수도 없는 땅
돌만 무성하다
옛 책에서는 악마가 산다고도 했다
죽은 이들이 묻혔다고도 했다
아무 냄새도 기척도 없다
그릇된 소문들일 것이다
돌을 밟다보면, 억울한 생각이 든다
밟는 자와 밟히는 자와의 이상야릇한 관계
나는 돌에게 잘못한 적이 없는데
모든 사물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거대한 돌이 절벽에 박혀 있다
사람들은 돌 위에 돌을 올려놓고 소원을 빈다
골짜기에 가득한 욕망들
바람은 울고 이따금 새들이 끼룩거린다
― 「돌의 골짜기」 전문

 

천 년 전의 인간들이 쌓아올렸고 현재의 인간들이 여전히 쌓아올리는 행위는 인간 욕망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변함이 없다. 위의 시에서 돌이 켜켜이 쌓아올려진 골짜기는 인간들의 욕망으로 가득 찬 장소라 부를 만하다.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인간은 돌 위에 또 다른 돌을 올려놓으며 기원한다. 그러나 화자는 밟는 자와 밟히는 자의 관계망에 갇힌 인간들의 행위와는 무관한 돌의 본질을 발견한다. 그는 돌에서 유한성과 탐욕과 수직의 논리가 지배하는 인간 세상을 벗어나 존재하는 침묵의 형상을 본다. 욕망의 골짜기에 갇힌 인간 세상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돌은 천 년의 시간을 버텨내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돌은 인간의 욕망을 표현해주는 기표이기도 하지만, 돌의 본질은 인간 세상이 만들어 놓은 궤도와 전혀 무관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무욕의 기표이기도 하다. 시의 화자는 무욕의 기표인 돌을 통해서 인간 세상의 질서 바깥에서 존재하는 생을 꿈꾼다.

 

2. 죽음 제의祭儀로 인간을 이해하다

 

이재훈 시인의 시적 자아는 사람 세상에서 죽음의 제의를 거치고 땅에 묻히고 식물의 세상, 돌의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을 꿈꾼다. 이를 위해 시인은 설화적 시간 속으로 들어가 인간의 질서를 초월하는 주술적 인간을 다음의 작품에서 제시한다.

 

몸에서 흙냄새가 난다
난파된 배에 묶여 귀신들의 비방을 들은 적 있다
바람과 구름은 큰 정적 속으로 빨려 들었다
아이를 잡아먹는 꿈을 꾸고 난 새벽
씨앗이 되고 싶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가
역전에 누워 있는 노숙자들의 눈에 비치고 싶었다
멸시는 인간들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힘
깊은 골짝에 들어가 울며 회개를 하고
다시 인간의 운명을 얘기해도 된다
어떨 수 없이 사악하고
어쩔 수 없이 비겁한 인간에 대해
흉하다 말라
나무와 새들, 구름을 직유하는
언어들은 모두 인간의 욕망에서 나온 것
수난의 권리가 없는 나무들
무책임하게 자라고
때론 무책임하게 시드는 식물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 육체는, 썩으면 파리들과 구더기들의
생명의 성소聖所가 될
내 육체는, 아름다울까
춤이라도 출까
내 육체로 당신의 영혼을 훔칠 수 있을까
듬섬듬성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애써 당신의 운명을 기억한다
― 「주술적 인간」 전문

 

위의 시에서 화자의 내면은 현재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죽음의 시간을 꿈꾼다. 화자는 자신의 “몸에서 흙냄새가 난다”고 자각하는데, 여기에서 화자가 맡는 흙냄새는 매장된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을 가리킨다. 그는 자신을 죽음의 제의 속으로 밀어 넣는다. 스스로 자신의 소멸 혹은 죽음이라는 치명성을 감수하는 화자의 행위는 세상에 대한 그의 부정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화자는 현재 삶에 대한 부정의식을 표출하지만, 죽음 제의를 통하여 인간의 운명적인 삶을 새롭게 인식하고자 한다. 화자가 세상에서 경험했던 인간의 삶은 멸시라는 수직관계의 사회, 사악함과 비겁, 살해 욕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흙에 묻히는 순간은 온갖 부정적이고 혐오스러운 인간 세상으로부터 그가 떨어져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 세상에 대한 화자의 가치 판단을 보여주는데, 죽음은 그에게 염오감으로 가득 찬 세상과의 차단을 뜻한다. 한편으로 화자는 죽음의 제의를 겪으면서 멸시와 사악함과 비겁과 살해 충동은 인간의 운명적 범주에 속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인간 세상을 염오하지만, 세상은 인간에게는 뗄 수 없는 하나의 운명 덩어리이며, 세상이 만들어내는 궤도 안에서 인간은 함께 움직여 나가는 한계적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사람의 세상은 멸시하는 자와 멸시를 받는 자의 수직관계가 주축이 되어 이끌어져 간다. “멸시는 인간들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힘”이라는 것을 시의 화자는 자신의 죽음 제의를 통해 깨닫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인간 세상의 부정적인 질서와 체계를 수용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씨앗이 되어 수직의 사회구조에서 최하층에 속하는 노숙자의 눈에 비치는 식물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식물들은 멸시와 권리와 수난과 책임이라는 촘촘한 그물이 쳐진 사람 세상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운명과 분명히 다른 궤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 즉 나무를 비롯한 식물의 세계를 의식적으로 지향한다. “수난의 권리가 없는 나무들”은 수난이 끌고 들어오는 덩굴 줄기들인 고통과 공격과 희생 등의 말과 무관하게 존재한다. 또한 “무책임하게 자라고/ 무책임하게 시드는 식물들”은 무책임의 상대어인 책임이 연상시키는 말들인 의무, 부양, 짐, 회피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보여준다. 따라서 화자가 죽음의 시간 속에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더불어 그가 지향하는 세상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나무 혹은 식물이 상징하는 욕망으로 충돌하지 않는 세상, 자유로운 세상이다. 식물은 인간 세상의 궤도 바깥에서 자라고 시드는 자기의 시간을 자유롭게 누리는 존재들의 세계이다.

 

배에 묶였네. 거친 물결을 헤치는 밤이네. 빛을 따르지 않는 시간들. 어떤 질서도 나를 잡아둘 수 없네. 나는 결박당한 존재로 남고 싶지 않네. 비열하고 음란한 무리들과 거래하고 싶지 않네. 과오를 자랑스레 떠벌리는 사람들. 턱을 괴고 앉아 당신의 이름을 떠올렸네.
…(중략)…
황금지팡이를 들고 죽은 자들의 영혼을 불러 모으고 싶네. 당신을 안으려 했지만, 연기처럼 내 몸을 훑고 떠나갔네. 이제 그림자만 남은 당신의 흔적. 햇살이 돋아야만 기억이 눈에 차오르네. 인간을 떠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인 삶이라니. 수많은 돌 틈에 내던져진 몸이 있네. 한 천 년 굴러도 이름 없는 몸이 있네.
― 「수난의 돌」 부분

 

위의 시에서 비열함과 음란함과 과오의 과시로 점철되는 사람들의 세상과 자유로운 돌의 세상이 양립해 있다. 자유로움을 얻고자 하는 화자는 ‘∼하고 싶네’ 또는 ‘∼하고 싶지 않네’라는 분명한 어조로 자신의 의지로 사람 세상을 대할 때의 염오감과 자신의 결기를 표현한다. 그는 세상에 대해 부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그에 따라 판단하고자 한다. 그러한 자신의 선택이 수난을 초래할지라도, 그는 인간 세상을 벗어나 새로운 궤도의 삶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인간은 사악하고 비겁하고 탐욕스러움이 만든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 같은 삶의 질곡을 이재훈 시인의 시적 자아는 인간의 운명으로 이해한다. 그는 흙 속에 묻히는 죽음의 제의를 거쳐 인간 세상 바깥에서 존재하는 식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한다. 그는 또한 빛이 나지 않는 존재, 맞고 깨지고 터져도 결코 굴하거나 소멸하지 않는 견고한 존재인 돌과의 동일시를 이룬다. 그는 시인의 시적 자아가 직접 의지에 찬 어조로써 성스러운 육체인 돌의 “이름 없는 몸”이 되기를 희원한다.

 

3. 신성한 땅의 별

 

돌은 문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으며, 파괴의 도구도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돌의 쓰임새들은 돌의 본질과는 무관하다. 돌은 만물의 어머니이고, 아기이고, 집이고 별이다. 다음의 작품에서 시인은 돌에서 만물을 낳은 어머니를 발견해 낸다. 무한시간의 돌에서 인간들이 태어났다면, 인간 역시 신화적인 돌의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아득히 짐승의 울음이 들리는 듯한 돌, 피의 온기가 느껴지는 돌은 지상에 떨어진 별조각이다.

 

돌은 투명하다
그 몸에는 연혁이 없다
돌 위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돌을 욕되게 하는 것
돌은 인간 이전의 사물
기원을 알 수 없는 시간이다
…(중략)…
모든 존재는 돌에서 태어난다
돌을 던지면 울음이 들린다
돌이 땅에 던져지면 마치 아기처럼
온몸이 땅속에 안긴다
돌을 깨고 나온 사람들
돌로 된 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돌을 하늘에 던지면 그저
별이 된다
― 「돌의 시간」 부분

 

이재훈 시인은 현대문명 속에서 소멸해버린 신화 속의 돌, 즉 인간을 초월하는 지상의 별인 돌을 통해 삶을 견인하고자 한다. 그에게 돌은 새로운 믿음의 대상인 것이다. 신화가 현실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꿈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탄생하고 생명을 지속하였던 것처럼, 시인은 누구도 알아보지 못 한 돌의 신성을 그의 시에서 되살리고 싶어 한다. 신성한 지상의 별인 돌은 이재훈 시인이 추구하는 무욕의 삶을 명징하게 드러낸 사물일 것이다.

 

_ <시사사>, 2012년 3~4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

식육과 형벌의 세계를 견디는 날들

 

 

조동범

 

 


1. 실로Shiloh, 팔레스타인 그리고 상징들

 

팔레스타인의 옛 도시인 실로Shiloh의 의미는 ‘평화를 주는 자’, ‘의로운 메시아’이다. 실로는 유대인 정착촌이 있는 곳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의 협약을 통해 실로를 비롯한 유대인 정착촌을 철거하기로 했다. 실로는 불행한 과거의 이야기이자 하나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한다. 이재훈의 실로는 아픈 역사와 공간을 모티프로 삼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보편적인 상징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정치성과 무관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정치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도 않는다. 시인은 실로의 아픔과 상처의 이미지를 보편적인 감각으로 전환시킨다.
일단 실로의 의미를 파악한 독자의 마음은 팔레스타인의 옛 도시인 실로에 머물게 되지만 시를 통해 받아들이게 되는 세계는 실로를 포함한 모든 상처와 아픔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서 작품 안에 펼쳐진 세계는 실로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토로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로의 역사적 의미가 완전히 무화된 것은 아니다. 실로는 제목만으로도 이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상처와 아픔에 절심함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상처와 아픔의 절실함을 드러내는 시의 제목은 작품과 결합하여 상징의 깊이와 절실함을 획득한다.

 

스스로 빛을 내는 작은 길. 사연 깃든 머리핀이 떨어진 길. 얼굴에 분칠한 채 누군가를 배웅하는 길. 홀로 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사람들.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들은 속되다. 제 몸을 고이 닦고 닦아 원색으로 세상과 마주하는 동물들. 깃털처럼 가벼운 스케치의 존재들. 앉아야 할 자리를 잃고 떠다니는 먼지 같은 마음들. 여러 갈래의 작은 길들이 가득하네. 흐드러진 꽃들이 마음에 툭, 쌓이는 길. 꽃이 혀를 내밀어 길 위를 맛보는 시간. 나는 세상에서 약속한 일들을 생각하네. 밤의 기나긴 뜨락에서 마주친 불빛 한 점. 나방을 혐오하지 마라, 그에겐 불빛이 모든 이유다. 저 길도 그럴까. 어둠 속이 모든 이유라고. 언제부터인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이 좋았네. 언제부터인가 정돈되지 않는 것들만 날 감동시키네. 여러 갈래의 좁은 길이 날 끌어당기네.
― 이재훈, 「실로Shiloh」 전문

 

그곳에 “작은 길”이 있다. 그 길은 “사연이 깃든 머리핀이 떨어진 길”이며 “얼굴에 분칠한 채 누군가를 배웅하는 길”이다. 「실로」의 공간은 “길”이며 그 길은 도달하고 싶은 곳과 연결되어 있다. 시인은 “여러 갈래의 작은 길”이 “흐드러진 꽃들이 마음에 툭, 쌓이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어쩌면 실로를 향해 가는 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이 호명한 길은 실로로 향해 있는 실제의 길이 아니다. 시인은 실로라는 제목 아래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길을 드러냄으로써 길이 환기하는 아름답고 애틋한 정서를 극대화한다. 「실로」는 이러한 양자의 감정 상태에 놓임으로써 이율배반이 전달하는 시적 감흥과 긴장을 극대화한다.
또한 실로로 향하는 공간인 길에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은 “홀로 자리를 깔고 앉아” 있으며,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럽게 흐느껴야 하는 격한 감정보다 관조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실로의 공간인 길이 비극을 환기하는 길이 아닌 것처럼 길 위의 사람들 역시 세계를 연민의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조적 태도는 길의 이미지와 어우러져, 실로로 대표될 수 있는 비극적 세계까지 끌어안을 수 있게 된다.

 

_ <시사사>, 2012년 3~4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

2012년 <포엠포엠> 봄호 VOL53 특집
기획특집 시인을 만나다 36

 

이재훈 시인

 

 

때 : 2012년 1월 2일 6시 30분 합정동 카페 <아이두 IDO>
탐방진 : 김안, 한정원. 정훈

원고 정리 : 한창옥

 

 

요즘은 지나간 흔적을 되살리는 것이 트렌드다. 부드럽지만 도발적인 그의 작품 속으로 조용히 빠져들게 하는 이재훈 시인을 빈티지풍의 카페 지하벙커에서 만난다.
매서운 칼바람은 아니지만 소한을 앞둔 차가운 날씨다. 어둑어둑해지자 부산에서 올라온 본지 편집부 정훈 평론가, 한정원 시인, 그리고 현대시 편집장 김안 시인과 오늘 주인공 이재훈 시인이 들어선다. 모두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난로 불에 몸을 녹인다. 모처럼 서울에 올라온 정훈 평론가가 서두른다.

 

- 이재훈 선생님, 새해를 맞이한 느낌이나 계획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새해 계획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아내 지인의 집에 놀러갔다 마지막 날과 새해를 아이들과 놀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해를 정리하고, 새해에는 어떻게 해야지 하는 계획을 갖지 못하고 지나버렸어요. 지난주에는 연말이라 모임이 많았고요. 이제 좀 천천히 지난 한 해를 돌아봐야겠습니다.(미소)
올해 초에는 평론집을 한 권 낼 계획입니다. 2011년도에 시집 <명왕성 되다>를 냈고, <나는 시인이다>라는 인터뷰집을 출간했습니다. 평론집 원고도 준비가 다 되어 있었는데 한 해 책을 세 권 내는 것은 무리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 미뤄왔죠. 그동안 이리저리 시집 서평이라든가 문예지 계간 평이라든가 기획특집 글들을 시인의 입장에서 써왔습니다. 평론집을 정리하고 2012년 봄학기를 맞아야겠지요. 특별한 삶의 변화가 있지 않는 한 순간순간을 누리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대학에 강의를 나가고, <현대시> 잡지를 만들고 그러한 삶이 반복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평론집은 언제쯤 어느 출판사에서 나옵니까?

 

3월내로 계획 중입니다. 출판사는 아직 정하지 못했고요. 제목도 새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겨울에 수정, 퇴고를 할 생각입니다.

 

- 작년에 출간된 시집은 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예도서로 선정되었고, 대담집은 문화관광부 올해의 교양도서가 되었는데요. 옆에서 보면서 이런저런 결실을 많이 맺는 한 해였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특히 대담집을 보니 그 안에 있는 텍스트 하나하나가 오랫동안 시를 쓰면서 지내왔던 형의 삶의 이력같이 느껴졌습니다. 형은 지난 한해를 바라보면서 어떤 느낌이 드는지 궁금합니다.

 

점점 이 일이 작년 일인지 재작년 일인지 3년 전 일인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그런 거 있죠. 크리스마스 때 뭘 했는데 작년에 했던 것인지 재작년에 했던 것인지 헷갈리는 거요. 그래서 작년 한 해가 그 전 해보다 특별한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첫 번째 시집을 내고 6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이 나왔는데 두 번째 시집을 출간했다는 것이 의미일 것 같고요.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 같은 경우는 2001년부터 근 10년 동안의 시인들을 만나온 기록이기에 저의 문학적 일기처럼 느껴지죠. 왜냐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났을 당시의 추억이 떠오르고 어떻게 만났고, 어떤 이야기를 했고, 술자리를 어떻게 가졌고 이런 것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거든요. 원고를 모아놓고 나니까, 지난 10년 동안의 문학 활동이 파노라마처럼 스르르 지나가면서 대담집이 제게는 하나의 문학앨범이 되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두 책을 출간한 것이 가장 큰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 창작과 강의, 문학연구 이런 활동을 오랫동안 병행하면서 정신없이 성실하게 살다보니 그런 생각이 드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문학에 빠지다보면 가장이나 남편으로서 역할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은데 양쪽 다 성실하게 잘 하시는 바람직한 한국의 남자나 아버지의 모습을 제가 잠깐 보게 되었는데요.

 

아니요. 사실 제가 아버지나 남편으로서 점수가 상당히 낮은 편입니다. 집사람에게 미안하죠. 항상 비판을 많이 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성실한 가장은 되지 못합니다.

 

-그게 달콤한 비판으로 느껴지는데요.

 

아닙니다.(웃음)

 

- 대담집 말씀하실 때에 10여 년 동안 꾸준히 준비해 오셨다는데 특별한 에피소드나 기억에 남는 게 있습니까?

 

대담집을 내고 제가 인터뷰를 몇 번 했거든요. 이 찻집에서도 대담집을 출간하고 인터뷰를 했어요. MBC DMB의 <내 손 안의 책>이라는 프로그램에서요. 인터뷰할 때 항상 받는 질문인데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다 에피소드 하나 정도는 있을 겁니다. 만난 장소도 다 다르니까요.
찻집에서 우아한 시간을 보내며 만난 분들도 있고, 술부터 먹기 시작해서 대담을 어떻게 했는지 나중에 정리하기 힘들었던 경우도 있고요. 시인들도 직업군이 다양하고, 각각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니까요. 또 시인들이 에고가 세죠. 자기 자존이 센 분들이라 만나면 대립각을 맞추는 게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술을 함께 마시며 긴장을 풀어야 되는 그런 부분이 종종 있어요. 아무튼 시인들마다 하나 정도씩의 에피소드는 다들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대담을 통해 의미있는 대답이 된 것들이 있죠. 이미 돌아가신 선생님들과의 대담이 그러한데요. 지금은 그 선생님들의 육성을 들을 수 없으니까요. 김춘수, 오규원, 박찬 선생님들은 지금 고인이 되셨죠. 이 분들과의 대담에 얽힌 얘기들은 다른 지면에서 많이 얘기를 했어요.

 

- 말씀을 잘 해주셔서 시간가는 줄을 모르겠습니다. 인터뷰어로 많은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인터뷰이로서의 역할도 잘 하시는 것 같습니다.(웃음)

 

왜냐하면 분량을 알거든요. 말을 너무 짧게 하거나 너무 길게 하면 힘듭니다.(웃음) 적당히 한 시간 정도가 좋아요

 

- 인터뷰하는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는 따뜻한 품성의 소유자란 생각이 듭니다. 뻔한   질문이겠지만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가 2005년도에 나왔고, 지난해 2011년에 <명왕성 되다> 시집이 나왔어요, 6년 정도 시간의 간격이 있는데 첫 시집하고 시세계가 달라진 면이 있다든지 혹은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의 시세계가 변화된 부분이 있나요?

 

달라진 부분이라고 한다면, 전체적인 시세계의 성향은 비슷한 면이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신성에 대한 욕망, 시원에 대한 갈망, 이미지들을 신화적 상상력으로 구현하려는 몸짓. 이런 부분에서는 일맥상통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첫 번째 시집보다 두 번째 시집에서 구체적인 일상인으로서의 자아가 많이 들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까요.
첫 시집에선 제가 가지고 있는 주도적인 시세계를 주로 표출하려고 했죠. 그러다 보니 일상인으로서의 자아가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요. 시집 준비를 오래 하다보니 자기검열이 너무 강해져서 100여 편의 발표작 중에 44편만으로 시집을 묶었어요. 자연스럽게 색깔있는 시들만 묶여지게 되었죠. 두 번째 시집에서는 그런 것들을 이어가되 일상인으로 겪는 자아의 성찰이 첫 시집에 비해서 조금 더 많이 드러났다고 생각해요. 
첫 시집에서는 시적자아가 우주나 공허, 하늘을 유영하는 자아가 많은데 두 번째 시집에서는 도시라는 문명의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일상인의 모습이 많이 투영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조금 달라진 점이 있지 않을까요.

 

- 첫 시집은 우주, 하늘과 같은 높은 데 떠 있었다면, 두 번째 시집은 낮아졌다, 땅으로 내려왔다는 평이 있던데 동의하시는지요?

 

예, 그런 부분이 있죠. 제가 시골 태생인데, 고등학교 때까지 시골에서만 살았어요. 첫 시집 낼 때까지만 해도 도시에 대한 성찰이나 자의식이 그렇게 크지 않았죠. 오히려 도시는 막연한 동경과 환상의 대상이었어요. 그런데 도시에 산 지 20년 가까이 되다 보니 도시의 환상들이 무너지는 경험을 심하게 겪었죠. 도시에 대한 성찰이 30대 후반에 비로소 생긴 거 같아요.
하지만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다보니 도시를 떠날 수 없는 버거운(?) 삶이 되었죠. 도시는 제가 발 딛고 살아가야만 하는 필연적인 공간이 된 거죠. 예전에는 정신의 휴식을 외적인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으로 해소했다면, 이제는 도시 속에서 어떤 은둔처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보니 도시 속에서 산책자로서의 자아가 자연스럽게 투영이 되었고, 이런 시들이 주변 시인들이나 독자들의 반응을 이끌어냈다고 봅니다.

 

- 첫 번째 시집의 시적 화자가 이 거대한 도시를 하릴없이 배회하는 산책자의 모습이었다면, 두 번째 시집의 시적 화자는 <안드로메다 바이러스>에서 보듯 이 피비린내 나는 행성에 불시착한 외계인과 같은 느낌이었어요. 특히 1부에서 이런 시적 화자가 도드라져 보이고, 2부에서는 <대황하> 연작에서 보듯 특유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쓰인 느낌이었어요. 시집의 차례를 구성하는 데 거대한 그림을 그린 것이 느껴집니다.

 

저는 기승전결의 구성보다 3부작이 편해요. 4부가 되면 머리가 복잡해져서 그런 구성을 했는데 김안 시인이 이야기한 것처럼 그런 의도를 가지고 했습니다.

 

- <안드로메다 바이러스>를 말씀하시니까 생각이 나는데 시를 읽다보면 SF영화도 떠오르는데 영화를 많이 보시는지요?

 

영화를 좋아하지만 많이 보는 편은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안드로메다 바이러스>라는 영화를 본 적은 없어요. 제가 시의 초고를 써 놓고 시의 제목을 어떻게 붙일까 고민하던 중에 ‘안드로메다 바이러스’라는 용어가 제게 온 거죠. 아주 매력적인 용어였어요. ‘명왕성 되다’ 처럼. (웃음)

 

- 빗나가는 질문인데 외계인이 있다고 믿으세요?

 

있겠죠. 없다면 너무 재미없잖아요.(웃음)

 

- 네. 그렇죠. 이재훈 시인은 믿을 것 같습니다. 종교가 있나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체험 신앙을 갖고 계신 분이어서, 신앙에서만큼은 엄청 엄하셨어요. 그래서 억압이 많았죠. 사춘기때 직접 반항은 못했지만 내적 방황을 많이 겪었어요. 학창 시절에 문학책보다 신학 서적을 더 많이 읽었습니다. 기독교계통의 어린이 잡지도 많이 읽었고요. 지금 우리의 기독교는 상당히 보수적이고 완고한데 그런 부분에 좀 답답함을 느꼈다고 해야 할까요.
제 시에서 기독교 성향이 있다고 하는데, 전통적으로 말하는 기독교라기보다 배교적인 느낌을 짙게 깔아놓은 신비주의적인 성향이 많아요.

 

- 시의 표현기법이 상당히 독특한데요. 종교적인 표현에 특별한 기율이 있을 거 같거든요.

 

특별한 기준은 없고 아마 독서체험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학창시절 신앙에 대한 고민이 많아서 고등학교 때부터 20대 전체를 신(神)에 대한 갈등과 방황으로 점철했었죠. 아직 끝난 것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해방신학이 유행되었거든요. 일반 기독교에서는 이단이라고 하는데, 그쪽에도 꽤 깊게 침윤되어 있었구요. 에큐메니칼(Ecumenical)이라고, 구원의 일방성에 반기를 드는 상당히 파격적인 신앙관을 기웃거리기도 했죠. 기독교에서는 인정을 안 해 주는 교리죠. 제가 그동안 체험했던 기독교와 너무 달라서 충격을 받았어요. 호기심이 많았던 거죠. 성경도 장자의 얘기가 아닌 서자의 얘기에 관심이 많았구요. 비교도, 그노시즘에도 관심이 있었죠. 아주 성스러운 신과 악마가 공존하는 세계가 매력적이었어요. 그런 관심들이 언어적으로 내면화된 것 같아요.

 

- 첫 시집에서 크고 광대한 세계를 그려나갔고, 이는 두 번째 시집에서 이어집니다. 이 두 시집에서서 시의 길이가 길어지고, 시의 호흡 역시 빠르게 가지기보단 묵직하면서도 느리게 나가는 것은 형이 말하고자 하는 시적 세계의 스케일 때문이라고 느꼈어요. 요즘 젊은 시인들이 빠른 호흡을 하고 시행과 행 사이의 간극을 벌리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천천히 시선을 옮아가며 크고 무거운 걸음을 한 발 한 발 내딛는 거인의 발자국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래서인지 박수연 선생님은 형의 시세계를 언어적 낙관주의라고 하면서 명징한 상징과 운율을 거느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시의 작법상의 문제와 이 작법이나 스타일들이 시적 세계관과 연관되는 것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쓸 때는 작법을 의식 안하고 씁니다. 이런 생각은 하죠. 어떤 세계를 그려내야 된다는 것. 길이나 분량이나 처음에는 의식을 안 하죠. 작법이나 스타일을 정해놓고 쓰는 시인들이 많은데 저는 방목하는 스타일입니다. 시의 스타일은 운명처럼, 그 시에 맞춰 생성되는 것 같아요. 태생적으로 길어야 하는 시가 있고, 짧아야 하는 시가 있는 거죠. 우선 아직까지 컴퓨터에 시를 못 써요. 노트에 시를 쓰고 그것을 컴퓨터로 옮겨 쓰면서 퇴고하는 스타일인데요. 노트에 쓰다보니까 분량에 대한 감이 잘 안 오더라고요.
저는 하나의 대상물을 깊게 파헤쳐서 써내는 인내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하나를 바라보면서 다른 곳으로 자꾸 확장시키고 싶은 시적 욕심이 있어요. 꽃을 봤다면 꽃 속으로 들어가서 우주로 확장되거나,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거나 확장되는 그런 생각들이죠. 이런 시적 전개가 시의 스타일에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그런 식의 시적 전개가 자연스럽게 몸에 밴 부분도 없지 않겠죠.

 

 

- 첫 시집의 시적 화자는 혼자 배회하며 도시와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시집의 시적 화자는 자신이 보는 것에 대한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안드로메다 바이러스>에서 지금 이곳에 대해 ‘피비린내 나는 행성’이라 지칭하는 것과 같이, 지금 이 도시에 대한 나름의 가치판단들이 보입니다. 이는 어쩌면 세상을 보는 시인의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음 시집에서 이런 부분이 더 강해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저는 <명왕성 되다>라는 시집에서 엄살을 피울 만큼 피웠어요. 문명인으로서 겪는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너무 적대적이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그런 자기 진술들이 너무 많이 나오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들게 산다고 엄살을 부렸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창피하기도 하고요.
이제는 이 도시를 사랑할 수는 없어도, 적절한 거리만이라도 유지하자는 생각입니다. 너무 도시에 밀착되어서 도시 속에 푹 파묻혀 살아가기보다 도시를 빠져나와서 바라봐야겠어요. 제 스스로 엄살이 아닌 날 선 시각으로 느껴진다면 되는 거죠.

 

- 제가 보기에는 엄살 부린다기보다 현대인의 도시생활을 대변을 해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면적으로 한 번은 거쳐야 될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두 번째 시집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2부입니다. <대황하> 연작과 그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시들에 애착이 있고, 2부의 시를 배열하면서 나름대로 기획을 했어요. 그런데 2부의 시적 세계가 부각이 안 되더라고요. 2부에 있는 시적 부분들을 세 번째 시집에서는 조금 더 확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 첫 시집이 도시라는 미로에 갇힌 느낌이었다면, 두 번째 시집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도시를 멀리서 관조하면서 스스로의 시선을 획득했기에 변화의 지점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2부에서 보이는 시인 이재훈만의 광활한 시세계는 첫 시집과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에 대개의 독자들이 1부에서의 변화된 지점에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나 싶습니다.

 

아무래도 변화된 지점을 이야기하다보니까 그렇겠죠. 왜냐면 첫 번째 시집을 냈을 때도 세간의 평가가 신성이나 신화적 상상력, 욕망에 대한 얘기, 낯선 낭만주의적 색채 때문에 변별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왔잖아요. 두 번째 시집은 첫 번째와 어떤 변별점이 있을까 찾다보니까 그런 맥락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요.

 

- 주제를 돌려보겠습니다. 시와 평론을 겸하시면서 느꼈던 점이 있을까요? 시를 쓸 때와 평론이나 논문을 쓸 때 갈라지는 부분이 있는지. 행복하게 일치하는 순간이 가장 좋겠지만요. 산문하고 운문하고 다른 점이 있다면요?

 

저는 평론을 간간히 쓰면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시들을 분석적으로 바라볼 때 또다른 시의 모습을 보게 되거든요. 제 가치판단의 흔적들이 정리가 된다는 느낌도 있고요. 하지만 이제 평론을 조금만 쓰려고 합니다. 제 비평언어의 한계도 느껴지고, 시 쓰기에 좀 더 집중하고 싶어서죠.
시의 언어와 평론의 언어는 많이 다르죠. 정서가 지배하는 글과 이성이 지배하는 글의 차이니까요. 평론과 시를 함께 쓰면 이런 글쓰는 주체의 모드를 교체해야 되는 부분이 힘들어요. 그런 부분들 때문에 평론 쓸 때는 시가 잘 안되죠. 우선 저의 정체성은 시인이니까. 시 쓰기에 좀 더 중점을 두어야 되겠지요.

 

- 평론 쪽은 더 확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시군요?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제 지식의 한계를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써봐야 좋은 글이 나오리라는 확신이 안 들어요.

 

- 늘 공부를 하시고 계신데 겸손한 말씀이십니다.

 

아닙니다. 아직 해야 할 공부가 많습니다. 그동안 못 읽었던 책들을 읽으면서 내공을 더 다져야 합니다.(웃음)

 

- 지금까지는 선생님의 시 세계와 시를 바라보는 관점들을 다양하게 말씀해 주셨는데, 시 외부의 객관적인 시 조류라고 할까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요즘 시들이 상당히 어렵거나 시인조차 안 읽는 시가 많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반 독자들은 처음에 감동받았던 서정시 성향의 시를 계속 읽는 경향이 있고 시인들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일관된 색깔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시인들이 시를 쓸 때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독자를 염두할 필요가 있는데요. 시인과 독자들이 행복하게 만나기 위해 일치하는 지점, 그런 부분을 생각한 게 있다면요?

 

모든 시인이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을까요. 미래파 이후로 평단에서 근 몇 년 동안 소통과 난해함에 대한 담론들이 오갔는데, 저는 시라는 다양성을 이해한다면 문제될 게 없다고 봐요.
음악에 빗대어 보자면 많은 대중들이 사랑하는 음악이 있는 것이고 소수의 마니아들이 사랑하는 음악이 있어요. 록과 헤비메탈은 다수의 대중들보다는 소수의 대중들이 늘 좋아해 왔죠. 트로트나 발라드는 전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장르이고요. 시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소수의 마니아들이 즐겨 읽는 시가 있어요. 낯선 언어 운용이나 기존의 시관으로는 전혀 해석이 되지 않는 그런 시들을 오히려 더 즐겁게 읽는 소수의 독자들이 있는 거죠. 따뜻한 서정시는 많은 독자들이 읽고 호응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독특한 개성을 가진 시인들이 대중들에게 더 읽히기 위해서 시를 쓸 수는 없죠. 그렇게 되면 자기 예술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잖아요. 자신이 가장 가고 싶은 시의 길을 가다보면 독자들과의 행복한 만남은 언제든 이루어진다고 봐요.

 

- 저 개인적으로는 어려운 시, 난해시, 해석이 안 되는 시, 이런 모든 시조차도 문예사조에 기여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럼요. 시마다 다 운명이 있는 거죠. 시마다 개별적으로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지만, 이해 못하는 사람이 당연히 있죠. 모든 사람이 어떻게 다 이해를 해요. 그런 부분들 때문에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시인들의 창작에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지 않나 싶어요. 오히려 일반 대중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는 오만한 태도죠. 대중들은 늘 현명하게 변화합니다. 대중의 눈치를 보는 시는 대중에게 가장 먼저 들킬 겁니다.

 

- 지금까지 말씀해 오신 시의 색깔이라고 할까 지금 상황으로서는 계속 견지해 나갈 것이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네. 계속 가야죠. 제가 바라보는 시적 세계관이 한국 시단에서는 관심이 적은 부분이라고 봐요. 저는 그런 세계가 몸에 맞아요. 하지만 다양하고 새로운 시의 방법론을 통한 변화가 담보되어야겠죠. 개인적으로는 시집의 권수보다 의미있는 시집을 내고 싶습니다.

 

- 혹시 본받고 싶은 시인이 있습니까? 생존시인이든 작고시인이든. 아니면 주목할 만한 시인이라도?

 

그것은 말하기가 곤란하네요.(웃음)

 

- 이런 것일 수도 있나요? 시는 좋은데 실제 행동거지를 보고 너무 실망을 한 거요.

 

그런 경우도 있죠. 그러나 기본적으로 시인들은 다 괜찮은 사람들이에요. 시인들은 워낙 자기세계가 뚜렷하고, 그만큼 욕망이 강해요. 어떠한 세속적인 부를 갖다 주는 장르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작품에 대한 욕망이 더 강한 것 같아요. 좋은 작품에 대한 욕망은 순수한 욕망인데, 그 욕망이 술자리에서 세속적인 형태로 보일 때는 싫어지죠. 하지만 이 사람들이 아니면 누구한테 내 시를 이야기하고 고민을 하겠어요. 시를 버리지 않는 이상, 평생 보고 지낼 사람들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애증의 관계이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시인들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 <재킷을 입은 시인>이라는 시도 있지만 시인이 가져야 할 영혼의 옷, 시인이 입어야 할 옷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너무 피상적이지만 질문이 됐지만)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왜냐면 자칫하다간 상당히 계몽적인 얘기가 될까 봐서. 시인의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조심스럽네요.
시인마다 다른 개성을 가져야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아주 소수가 가진 개성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죠. 비평가도 마찬가지이고요. 비슷한 옷을 유행처럼 입고 다니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만 바라보며 거기에 대한 이야기에만 집중하는 것도 문제죠. 촌스럽고 남들이 입고 다니지 않는 옷을 입고 다니는 시인들도 바라봐야 하겠고요. 시인들은 자신의 시에 대해 당당해야 합니다.

 

- 페루나 중국 황하에 가보셨어요?

 

못 가봤어요. 못 가보고 상상으로 쓴 거죠. 그동안 정보로만 알던 곳에 대한 상상. 그리고 너무 큰 자연을 보면 못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 자연에 압도될 것 같아요.

 

- 2부에 있는 <대황하> 연작에서 그려지는 물은 기존의 물에 대한 상상력을 초월한 것 같아요. 이 물은 생명을 잉태하는 물이 아닌, 파괴되고/하고, 시체가 즐비하고, 무언가를 더럽히는 물이란 느낌이 강해요. <대황하> 연작 앞에 놓인 <물에 대한 사소한 변론>에서 이미 <대황하> 연작의 물이 일반적 속성의 물이 아니라고 언명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대황하>의 물은 수평적으로 흐르는 물이 아니라, 수직으로 떨어지고 침잠하는 물이란 느낌이 강해요. 넓게 퍼지는 물이 아닌 더 깊은 곳으로 곤두박질치는 물과 같은 느낌 말이죠. <대황하> 연작을 쓸 때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썼는지 궁금해요.

 

대황하 끝 시편에 물길이 솟구친다고 표현했는데, 물은 아래로 흐르는 게 속성이잖아요. 이유 없이 물길이 솟구칠 수는 없죠. 어떤 압력에 의해서든지 물길이 솟구치는 것은 이유가 있는 거죠. 또 황토물이라도 우리는 그 물을 마시고 살아야 해요. 그 물이 생명을 주고 문명을 이루고 어떻게든 사람에게 정서를 주고 그 속에서 구원자를 만납니다. 더럽지만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물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습니다.
물에 대한 상상력이 워낙 흔한 거잖아요. 흔한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물이 아닌 누런 물길을 상상한 거예요. 대황하는 문명을 이루는 거대한 물줄기인데, 이 줄기를 통해 내면을 표출해보고 싶었죠. 사람들이 대황하를 엿보면서 어떤 생각들을 할까 궁금하기도 했고요.

 

- 태아 때의 양수를 언급하시는 것 같아요.

 

네. 몇 년 전 친한 대학 동창이 하늘나라로 갔던 일이 떠오릅니다. 친하게 지냈던 몇 동창 중 한 명이었어요. 갑자기 독감으로 병원에 들어갔다가 뇌사상태가 되어 이승을 등졌죠. 그 친구 뼛가루를 인천 바다에 뿌려주었는데, 그 이야기가 대황하 4편에 나와요. 그날 비가 왔거든요.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바닷가에 뼛가루를 뿌리면서 물에 대한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이 가장 먼저 만나고 많이 만나는 물질이 물이잖아요. 양수에서부터 물의 질감을 느끼잖아요.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란 말도 생각났고요. 물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오랫동안 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친구의 죽음도 쉽게 떠나지 않았고. 그래서 물에 대한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 2부 마지막 시 <북극의 진화>에서 “거칠게 울고 우는 소리만 가득하다./ 인간의 소리만 가득하다./ 모든 것이 까마득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대황하> 연작의 물들이 가진 황량함과 소멸에 대한 느낌을 정의내리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이런 시선은 1부에서 그려낸 생활이 이루어지는 도시의 속성과 연결되는 것 같아요. 도시와 황하, 이 둘 사이의 연계점들이 보였습니다.

 

마지막 시에는 “소멸이 내 먹는 밥이다”라고 했죠. 해설을 쓴 조강석 선생님이 ‘소멸의 총아’란 말도 썼고, 키에르케고르랑 이재훈을 ‘VS’로 대결시킨 사건이 되기도 했죠. 시를 쓸 당시엔 도시가 육체적 거소라 한다면, 황하는 정신의 거소라고 생각했어요. 규정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소멸은 꼭 말하고 싶었던 거죠. 결국 소멸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말이죠. 소멸이 창조의 에너지를 낸다는 걸, 몰래 말하고 싶었을까요.

 

- 첫 시집이나 두 번째 시집에 존재, 실존에 대한 시들이 유독 많아요. 존재하는 것, 존재 되어지는 것, 구원을 말하는 것은 곧 그것을 잉태한 시원에 가 닿고자하는 몸부림이죠. 그런데 이는 시인이 평생 풀어가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런 문제를 시의 중심 테마로 선정해 작업해 나아갈 때는 자연스레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 사이에 변화의 지점이 생길 것 같아요. 형 나름대로의 존재의 시원에 가 닿고자하는 것, 혹 구원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무엇일까요?

 

아마 평생 가져가야 할 화두겠죠. 시 쓰는 자아의 삶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관심사가 변하면 다른 형태로 드러나겠지만. 첫 시집이 탐구의 방향을 선언적으로 보여준 시집이었다면, 두 번째는 이런 바탕 속에서 시인의 내면이 등사기처럼 비춰졌던 거고요. 세 번째는 다른 방식으로 이러 질문들이 내면화돼서 표출이 되겠죠. 제가 구원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다면, 벌써 새로운 종교의 교주가 됐겠죠. (웃음)

 

- 선생님이 엄살을 많이 피웠다고 말씀하셨는데 <비비디 바비디 부>에서 ‘블랙데이’, ‘피’ 나중에는 ‘이탈자’, ‘탈락자’ 이런 말로 엄살을 피우지만 결국은 선생님은 살아남은 자, 큰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성공한자가 아닌가.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봤어요.(웃음)

 

- 저는 남들 경쟁할 때 멀리서 보면서 저러고들 있네 해요.(웃음)

 

그런 생각은 안 해봤고, 저는 경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자죠.

 

- 그거는 한수 위라는 거네요.

 

참여하지 않으면 이탈된 사람이거든요. 시에는 그런 자아가 나오죠. 참여를 해서 어떻게든지 뭘 얻어야만 뭔가 남는 자들보다 나은 자가 되는 건데요. 거기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이탈자 시선이 있죠. 소외되고 이탈된 자이긴 하지만 멋있고 싶었던 거죠. 사실 제가 철이 없어요. 참여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멋있게 보고 싶었고, 참여하지 않는 자의 엄살을 멋있게 떨고 싶었겠죠. 자책하거나 열등의식에 휩싸이는 모습을 내가 스스로 버렸다는 것. 그런 자아가 되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거 같아요.

 

- 경쟁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감이 큰 거죠. 자신감이 없다면 참가하지 않는 것도 실천의 한 방법인데, 자신감이 없다면 그런 실천이 나오지 못했겠죠.

 

그런 건가요? 자신감인지는 몰라도 경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요.(웃음)

 

- <재킷을 입은 시인>은 작가의 어머니의 아련한 모습이 떠올랐어요. 쉽게 읽혀지면서도 내면의 깊이를 느끼게 해주더군요. 아픔이 묻어났어요. 어머니는 어떤 분이세요?

 

저는 아직도 엄마라고 불러요.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왜 엄마에 대한 시는 한 편도 없냐고요. 엄마에 대한 시도 좀 써봐라.(웃음) 그런데 쉽지 않아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대상은 너무 어렵죠. <재킷을 입은 시인>은 엄마의 살로 베를 짜서 재킷을 만들어 입는 상상, 내가 엄마의 살로 만든 옷을 입고 다니며 시를 쓰고 다닌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아베 고보의 소설에서 모티브를 잡은 작품이에요.

 

- 아베 고보가 유명한가요?

 

상당히 알려진 작가죠. 아베 고보의 알려진 작품이 많은데 <시인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짧은 단편입니다.

 

- 어머니도 이재훈 시인처럼 조용하신 성품이세요?

 

조용하지 않죠. 여느 아줌마들처럼.(웃음) 지금은 행복하신 것 같아요. 순전히 제 생각이지만. 젊었을 적에는 상당히 수줍음 많은 소녀였다가, 점점 나이 들면서 거칠어진 한국적 여인상이랄까. 따뜻한 부분도 있지만,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하시고 자기 주관이 뚜렷하시죠.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항상 그렇게 살아오셨어요.

 

- 어느 자리에서 이반 일리치(Ivan Illich) 말을 인용하시며 시인이 이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한 요소 중의 하나로 말씀하셨는데요.

 

계몽적으로 인용하기 좋은 말이에요. ‘이반 일리치’가 인류를 구원할 세 가지가 자전거, 도서관, 시인이래요. 왜냐면 시를 읽으면 아무래도 정서적으로 풍요로워지잖아요. 우리가 시를 낭송하는 사람일 때, 그 자아는 가장 순수한 자아거든요. 시를 읽으면서 나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김현의 <한국문학의 위상>이라는 책을 보면 문학은 출세하지도 큰돈이 되지도 못하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고 했죠. 그것으로 문학이 억압하는 것의 정체를 밝힐 수 있다고요. 시가 바로 그 중심에 있겠죠. <포엠포엠>

 

_ <포엠포엠>, 2012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

 

 

 

 

 

 

 

Posted by 이재훈이
,

관객들의 질문을 받은 후 이어진 낭독의 시간입니다.

 

 

초대 손님들이 올라오시기 전 이재훈 시인과 진행자 신혜정 시인의 낭독이 있었기에,

허연, 김태형, 오은 시인 순서로 낭독이 이어졌습니다.

좋더군요! 와우.

 










그렇게 객석에도 시의 기운이 감전되고...



행사 후 이어진 사인회 겸 포토타임~

수요북콘의 트레이드 마크 빨간 장미를 한 송이씩 선물하고~!





그리고 여기저기 있는 시인들에게 사인 받으랴 사진찍으랴 바쁩니다.


 

 

 

 

정말 한 자리에 모이기 힘든 시인들이 이렇게 대거 모이다니요~!

놀랍습니다. 그리고 오신 분들도 놀랍고 고맙습니다.

시인에 대한, 시에 대한 사랑이 아직까지 이렇게 뜨겁다는 것에 감동한 밤입니다.

 


진행자와 초대손님의 기념촬영 촬콱~!




민음사 장은수 편집대표님과 허양희 시인과도 한 컷~

 


 

무슨 이미지 사진 같군요. 사진 같군요. 흐흣.

 

마무리 촬.칵.

 

이렇게 제7회 수요북콘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오신 분들께 감사, 모여주신 시인들께 감사, 객석에서 함께해주신 이영주, 김종훈, 강정, 허양희, 신동옥... (아 이름을 제가 놓쳤다면 용서해주세요.~) 시인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저희 수요북콘은 앞으로도 책과 저자의 향기가 향긋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계속해서 관심 갖고 지켜봐주세요.

수요북콘의 행진은 다음주에도 계속됩니다.!

 

 

끝-

Posted by 이재훈이
,

제7회 수요북콘은 '나는 시인이다' 편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재훈 시인과 가깝게 지내는 시인 세 분을 모셨지요.

 

우측부터

신혜정, 이재훈, 허연, 김태형, 오은 시인입니다.

 

 


 

이런 자리에 관객으로도, 게스트로도, 주인공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처음 나와봤다는 허연 시인.

이재훈 시인의 전화 한 통에 바로 수락하셨다고 합니다. 와웃!


 


날카로움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모두 갖추신 분 같았어요!

 

허연 시인은...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추계예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게이오대학교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현재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로 재직하고 있으며, 중앙대학교와 한국사이버대학교에서 미디어 문장론과 시 창작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불온한 검은 피》, 산문집 《고전 탐닉》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 등이 있다.

 

 

 

말씀을 어찌나 차분하고, 진지하게 하시는지 오신 분들이 김태형 시인의 말에 고개를 계속 끄덕이셨어요.!

 

김태형 시인은...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2년 『현대시세계』에 시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로큰롤 헤븐>,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코끼리 주파수>가 있다.

 

 

 



언어유희가 가득한 시집으로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해주신 오은 시인...

오, 시와 시인이 닮았냐는 물음에 재치 센스 만점 입담으로 관객들께 웃음을 선사했지요~

 

오은 시인은...

2002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다. 2012년 현재 작란作亂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2012년, 미술 산문집 <너랑 나랑 노랑>을 출간하였다.

 

참, 이제 막 출간된 따끈한 미술 산문집 <너랑 나랑 노랑>에도 관심 가져주세요. ><





시에 대한 진지한 질문들이 이어집니다.

 

이재훈 시인에게 누구와 가장 친하냐고 물었더니 모두 자기라고 답하시네요. :-)



그리고 시에대한 진지한 물음들이 오갔어요.

 

시가 처음 찾아왔던 그 때의 느낌 말예요.

 

이재훈 : 정말 모든 게 다 시였고, 지나가면 시가 나왔어요.

허연 : 좋은 시 한 편을 써 놓으면 하루종일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안고팠지요...

김태형 : 생각하는 시간이 중요해요. 시를 쓰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문자메시지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줄여보세요~

오은 : 형이 제가 끄적인 걸 문예지들에 응모했는데, 어느날 전화가 왔어요. '등단하셨습니다...' 등단이 뭐죠? 제가 그 때 술이 안 깼거든요. (흣. 이런 귀엽고, 천재 같은 일화가!)




그렇게 '나는 시인이다'의 대화가 이어지고,

 

객석에는 여기저기 숨어 있는(?) 시인들과,

이화여대 이화문학회, 반도문학회 학생들이 화기애애 함께 웃고 박수쳐주셨지요.

 

그리고 곽객들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시적인 것부터 사적인 것까지...^^ 






 

 

열심히 답해주시는 시인들.






- 다음편에 계속

Posted by 이재훈이
,

2월 15일에 시작한 수요북콘이 어느덧 7회 행사를 치렀습니다.

제7회 수요일의 정기 북콘서트 '수요북콘'의 주인공은 2012 시인협회 주관 시인상에서 젊은시인상을 수상한 이재훈 시인입니다.  

3월 24일 막 시상식을 마치고 온 시인과,

그의 친구들(?)

'나는 시인이다' 편을 열 준비가 한창입니다.

 

북스리브로 홍대점에 이렇게 매대를 준비해 놓고,,,

시집 단독으로 책을 진열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는데, 매우 새로운 느낌이 드네요. ^^

 


 

아아, 마이크 테스트... 오늘의 행사 전반 음향과 무대 조명을 점검중입니다.



 

카메라는 잘 돌아가고 있나요? (그렇다고 합니다.^^ )

 

관객들이 막 들어오고 있네요.

 

이제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손님들을 맞고 오프닝 낭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화여대에서 온 반도문학회 학생들.. 파릇파릇 생기가 돕니다.

시를 쓰는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눈망울을 반짝반짝..




오늘의 주인공 이재훈 시인을 무대로 모셨습니다.

 

 

 

진지하게 관객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명왕성 되다... 무슨 뜻인가요?

지구의 수금지화목토천해명... 의 아홉번째 행성인 명왕성이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소행성 134340으로 다시 명명되었죠..

명황성 pluto를 이용해 미국에서는 be plutoed... 라는 수동태로 부르면서,

명왕성 되다.. (나 완전히 x됐어.. 같은?^^) 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2006년 미국 방언협회에서 선정한 그 해의 방언에 be plutoed가 선정되었죠.

명왕성 되다.

아, 소외된 현대인의 고독이 느껴지지 않나요?

시인은 이 말을 캐치해서 끊임없이 도는 서울 순환선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철컥철컥 계기판 없이 흐르는 그 시간을 시로 형상화 했죠.

 

그게 바로 이 시집의 표제작 <명왕성 되다>입니다.

 

 


열심히 설명하는 이재훈 시인.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 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 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 명왕성 되다 전문 


 

계속 시와 시 쓰기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오늘의 깜짝 무대는 진행을 맡은 신혜정 시인이 준비해주셨습니다.

 

이재훈 시인과 오래전부터 절친! 사이라고 하네요.




무대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김건모의 <서울의 달>을 열창해 주셨습니다.

 

후후, 노래 끝나고 무척 쑥스러워 하셨습니다. ^^

 

 

- 2편에서 계속 -

Posted by 이재훈이
,

 

 

3월 21일 일곱 번째 주인공은

2012년 시집 <명왕성 되다>(민음사)로 시인협회에서 수여하는 젊은시인상을 수상한 이재훈 시인입니다.

3월의 마지막 주간은 주인공으로 오시는 이재훈 시인을 비롯해, 시인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초대손님

<나쁜 소년이 서 있다>의 시인 허연,

<코끼리 주파수>의 시인 김태형

<호텔 타셀의 돼지들>의 시인 오은

 

모두 '나는 시인이다'로군요.!^^

 

자, 젊은시인상 수상작가 이재훈 시인과

젊은 시인들의 토크토크 톡톡!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어서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이재훈 시인은...

1972년 강원 영월에서 태어났다. 1998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가 있다. 이밖에도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를 비롯, <딜레마의 시학>, <현대시와 허무의식> 등의 책을 썼다. 2012년 한국시인협회에서 수여하는 '젊은시인상'을 수상했다.

 

 

Posted by 이재훈이
,

유한성의 파토스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

 

 


1.

언젠가부터 한국시에서 죽음에 대한 사유는 주체의 문제로 전이되어왔다. 탈주체 이론 이후 주체의 자리가 ‘빈공간’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면, 이론적으로 주체는 살거나 죽는 주체가 아니라 살거나 죽는다고 오인하는 주체와 다르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 때문에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의식을 포함한) 의식 그 자체를 유발하는 주체의 기원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시적 사유의 중대한 변곡점이라 할 수 있는데, 주체의 기원에 대한 시적 사유 속에서 죽음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파토스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시들이 죽음에서 비롯된 과도한 허무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탈주체의 주체는, 테리 이글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리 자체를 즉흥적으로 다루는 것이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방식”임을 깨달아 “우리 자신의 현존에 근거가 없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죽음과 가깝게 살아”갈 수 있는 주체이다. 하여 탈주체의 주체는 “죽음을 소름끼치게 상상하는” 저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소멸 혹은 죽음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오인’에 의한 주체의 구조를 의식하는 주체라 할지라도 그것은 강력한 현실작용 위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는 원래부터 ‘빈 공간’임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육체에 기반하고 있는 주체로서는 죽음에서 비롯되는 ‘소름’에서 해방되기란 힘든 일이다. 주체의 기원을 사유하고 해체하는 주체는 ‘자아’로서의 강력한 통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탈주체의 주체 역시 원래부터 죽음과 무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죽음’의 유령으로부터 끊임없이 소환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장욱이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상징계를 균열시키는 동시에 주체마저도 하나가 아닌 둘로 균열시키는 나가는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면, 이재훈은 주체의 소멸에서 비롯된 파토스적 세계를 응시한다. 이장욱의 시가 주체와 상징계의 균열을 매우 “드라이한 저음”(함돈균)으로 드러내고 있다면, 이재훈의 시는 균열된 주체 틈새로 새어나오는 습한 신음에 젖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주체의 균열과 죽음에 대한 시적 사유의 시차(視差)를 드러내는데, 이는 최근 시들의 흐름을 바라보는 시각에 선명한 입체성을 제공하기도 한다.

...(중략)...

3.

이재훈의 시집 <명왕성 되다>는 소멸의 감각으로 점철되어 있다. ‘소멸’이라는 저주의 늪에 걸려든 시적 주체는, 그러나 서서히 가라앉는 소멸의 늪에서 이 세계를 응시하는 뜨거운 눈을 가지고 있다. “내 눈은 카메라를 닮았다. 노출을 열고/ 몇 시간 동안 창밖을 보면/ 불빛만 남은 세계./ 칼 맞고 피 흘리는 거룩한 세계.”(「비비디 바비디 부」)라고 했듯이, 그의 시는 소멸의 망막에 비친 세계에 대한 기록이다. 소멸에 대한 예민한 감각으로 말미암아 그의 시에 비친 세계상은 냉철하게 묘사되기보다는 그의 내면의식에 되비친 이미지로 점철된다. “내 눈은 카메라를 닮았다”고 선언했을 때, 그 눈은 ‘카메라 아이’(camera-eye)와 같은 냉철한 기계적 속성이 아니라, “붉은 눈물,/ 가만히 들어와 출렁이”(「대황하11」)는 눈이다.
하여 그의 눈은 이미 소멸과 허무에 익숙한 눈이기도 하다. “소멸을 향해 스스로 전진하는 몸짓.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풍경”(「대황하1」)과 같은 구절이 말해주듯이 그의 시선은 허무와 소멸이라는 감관(感官)을 관통한다. 혹은 “누웠다. 땅이 따뜻했다. 내 등은 늘 따뜻한 곳만을 찾는다. 누웠다. 썩는 냄새가 났다. 옆을 보니 시체가 누워 있다. 시체의 살이 썩고 있다.”(「대황하2」)에서 확인되듯이, ‘대황하’의 물결을 시즙(屍汁)으로 치환시킴으로써 소멸할 수밖에 없는 육체의 치욕과 굴욕을 드러낸다. 그래서 “아무것도 거둘 수 없는 몸./ 냄새나는 몸./ 위로할 것 없는 몸.”(「흠향(歆饗)」)이라거나 “타닥타닥, 누군가 내 몸을 읽는 소리”(「세이렌의 도서관」)와 같은 소멸과 허무 의식은 이재훈의 시를 지배하는 의미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재훈의 시적 사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소멸과 허무를 감각하되 그것에 대적하여 싸우는 치열한 의식의 장(場)으로 나아간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촛불도 아니고 감나무도 아니다.
미끈한 자동차도 아니고
달콤한 솜사탕도 아니다.
차갑고 텅 빈 사물에
쇳물을 들이붓고 싶다.
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이었다.
꿈을 꾸면
붉은 별 하나가 내게 떨어지는 사건이었다.
손이 델까 만지지도 못한 별이
마당에 내려와 날 또렷이 노려보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엎드려 울지 않겠다.
슬픔을 우스운 몸짓으로 과장하지 않겠다.
해거름에 사양(斜陽)을 보며 사흘을 울겠다.
그러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
그 비밀의 성소(聖所)가 내 집이었다.
소멸이
내 먹는 밥이었다.
-「연금술사의 꿈」 전문

이 ‘연금술사의 꿈’은 유한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주체의 열망과 맞닿는다. 인간의 유한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치열한 고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재훈의 시가 ‘유한성의 파토스’로 가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주체의 ‘결여’에 대한 자각 속에서 소멸과 허무 의식은 들끓는다. 그러나 “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 혹은 “소멸이/ 내 먹는 밥”이라는 고백 속에서 허무의 세계를 대적하고자 하는 주체의 결연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나’라는 주체의 허무와 소멸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만들어내는 “신명”이기를 간절히 기구(祈求)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신명 속에서 만들어지는 “뜨거운 강철”은 꿈속에서 “내게 떨어지는” “붉은 별”이자 “사건”으로서 재주체화의 과정에 있는 시인이 지향하는 ‘연금술’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주체의 ‘진화’로도 진술된다. “나는 자꾸 진화한다./ 詩人이었다가 일용근로자였다가 백수건달이었다가 독학자가 된다./ 어떤 모습에도 아파하지 않는 내성(耐性)의 몸”은 “누구의 소유도 아닌” “연혁이 없는” “몸”이다. (「비상」) 누구의 소유도 아닌 몸은 자신의 연혁을 지움으로써 탈주체화를 도모한다. 주체의 ‘결여’화를 도모하고 ‘결여’에 직면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주체 이론이 다다른 윤리학의 정점이다.
그러나 지상의 ‘소멸’과 천상의 ‘붉은 별’이 지니고 있는 간극은 너무 크다. 시인이 마주하고 있는 지상은 “페트병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맥주 캔. 먹다 남긴 컵라면. 참기 힘든 소음. 역겨운 화장 냄새와 비둘기 똥 냄새”(「매일 출근하는 폐인」) 따위로 가득한 현실이다. 급기야 시인은 “육십억 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 왜소한 존재로서의 절망감을 드러낸다. “벌거벗은 육체 사이에서 신음”하거나 “저녁마다 매연을 맡으며 구역질을 하”면서 “허무의 군락 사이를 헤매”(「킬리만자로」)야 하는 현실은 처음부터 혁명 혹은 개조가 불가능한 대상인 것이다. 하여 그의 시는 결국 어떤 ‘근원’의 세계에 의탁하기도 한다. “돌의 근원”.(「돌」) 구체적인 물상(物像)으로 펼쳐진 광활한 세계를 폐기함으로써 드러내는 “짐승도 없고 새도 없고 울음도 없”고 “깊은 밤 달빛”이 “제 몸인 양” “푹 잠”긴 “돌의 근원”을 향한 회귀욕망. 말할 것도 없이 ‘돌’은 추상화된 세계로서의 사물이다. “차갑고 텅 빈 사물에/ 쇳물을 들이부”(「연금술사의 꿈」)음으로써 이 세계를 연금술적으로 해득하고자 했던 시인의 욕망은 잠재성의 차원에서 꿈틀거릴 뿐이다.
문제는 소멸과 허무 의식이다. 인간이 지닌 소멸과 허무의식이야말로 ‘탈주체’가 맞닿은 가장 큰 장벽이기 때문이다. 소멸과 허무 의식은 유한성의 세계관 속에서 강화된다. 일자(一者)로 수렴된 무한은 일종의 ‘유일신’으로서 유한한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대척점에 서게 된다.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연금술사의 꿈」)에 대한 열망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의 형벌”을 견뎌야 하는 “육십억 분의 일”(「매일 출근하는 폐인」)이라는 주체 속에서 들끓는다. 이 양자(兩者)의 간극을 견디면서 “천사와 함께 비탄의 노래를 부르”고 “처형의 시간”((「연옥의 산」)을 기다리는 존재가 바로 이재훈의 시적 주체이며, 이 시적 주체의 발화가 그의 시세계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 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명왕성 되다(plutoed)」 전문

지하철의 시간은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이다. “기계소리”만이 들리는 지하철 속에서 시인은 정주할 힘을 전혀 갖지 못한다. “도시의 生”을 향한 “새로운 문이 자꾸 열리”지만, 도시의 기계적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은 그는 섣불리 지하철의 리듬에 몸을 맡기지 못한다. “男子가 바닥에 구토를 하”거나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지하철에서 “심장은 슬픔을 견디기 위해 존재”(「귀신과 도둑」)할 뿐이다. 도시적 삶의 조건을 수락할 수 없으면서도 도시 ‘내부’에 존재하는 시적 주체는 도시 ‘내부’의 ‘바깥’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 ‘내부’에 거주하고 있으면서도 도시적 삶에 탑승하지 못하는 주체는 그야말로 태양계에서 버림받은 ‘명왕성’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계의 행성과 유사한 궤적을 돌고 있는 명왕성처럼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는 시적 주체는 도시 ‘내부’의 ‘바깥’에서 “푸른 멍자국”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속의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는 고백. 이 ‘허무’는 “도시의 生”을 겨냥한 것이다. “도시의 生”은 바로 허무다. 이재훈은 이 사실을 명확히 직관한다. “도시의 속도에 적응된 발로 허공을 구른다”(「언덕의 아들」)고 했듯이, 도시의 삶은 “허공으로, 바람 속으로 달리”는 것에 불과한 것. 시인의 내면에 들어앉은 소멸과 허무의식은 도시의 삶 전체로 확장되고 있다.
그렇다면 “아무도 모르는 그곳”은 주체의 허무를 관통한 이후의 그 어떤 세계가 아닌가. 그곳은 내 안의 “허무”를 관통하여 ‘결여’의 자리에 정주할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시인은 고백한다. “내 안의 허무로 들어갈 자신이 없다.” 쉽게 뛰어들지 못하는 ‘도시의 생’과 ‘허무’의 사이에서 시인은 배회한다. 그 배회의 실상은 어떠한가? 시인은 내면의 허무로써 “모든 것이 까마득”한 이 세계를 “얼음의 시간”(「북극의 진화」) 속에 감금하는 적멸(寂滅)의 사유로 나아가려함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은유에 머물렀다가/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며 와르르” “무너지”는 “형체 없는 얼굴”(「거울 속의 얼굴」)로 귀착되고 만다. 이처럼 이재훈은 소멸과 허무를 도시의 폐부까지 불어넣는 동시에 멸각할 수밖에 없는 인간 주체의 고통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이러한 고통은 일찍이 진이정이 보여주었던 “나라는 물건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각성이/둔한 내 뒷골을 쑤셔야만 하리라 하하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니,/그럼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단 말인가!”(「아트만의 나날들」)와 같은 고통의 공동체를 이룬다.

4.

주체의 기원 형성을 ‘오인’으로 파악하고 주체의 자리를 ‘빈공간’으로 파악하는 사유의 방식은 궁극적으로 아파니시스(aphanisis), 즉 주체의 소멸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방식은 주체를 지속적으로 재정립하는 윤리의 역능을 발휘한다. 주체의 소멸이 주체의 허무와 죽음으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경유한 새로운 주체로 재탄생하는 과정 자체가 윤리성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 이론과 무관하게 주체의 실상은 매우 복잡다기한 고통으로 가득하다. 그 고통에서 자유롭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주체의 분열과 고통을 마주하는 시인의 태도는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이장욱과 이재훈은 주체와 세계 속에 내재한 균열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방식에 있어서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장욱이 시의 주체를 선험적으로 파기함으로써 소멸과 죽음에서 발생하는 파토스로부터 자유롭다면 이재훈의 시적 주체는 파기되는 ‘과정’ 내에 존재함으로써 유한성의 파토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때문에 이장욱의 시적 상상력은 매우 자유롭다. 어느 한 시점에 매이지 않고 세계의 구획을 마음대로 넘나들며 주체의 자장과 진폭을 마음껏 넓히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생년월일’을 파괴함으로써 획득하는 새로운 주체의 ‘생년월일’의 복수성(複數性)을 무한하게 추구하고 있다. 이는 주체 기원의 복수화(複數化)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주체의 관성(慣性)을 깨고 있다는 점에서 파토스적 주체마저도 사라질 수밖에 없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에 이재훈은 유한성의 파토스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있다. 이재훈의 시적 주체는 자기 소멸의 사태에 예민하게 감응함으로써 시적 파토스를 더욱 강화한다. 이러한 파토스는 분열의 주체가 아니라 실존적 주체와 강력하게 결합한다는 점에서 매우 현실적이다. 주체의 결여에 선험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결여’를 향해 나아가는 고통의 결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그러나 이장욱과 이재훈에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여전히 주체의 기원과 소멸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장욱이 주체와 세계의 ‘생년월일’을 탐색하고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세기”(「생년월일」)로 나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면, 이재훈 역시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연금술사의 꿈」)에 대한 열망을 응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열망은 라캉주의 좌파의 관점에서 보자면 윤리의 원질(原質)에 해당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실재를 경유한 윤리적 주체는 뚜렷한 정치적 주체로서 성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최근의 시적 주체들이 대개 실재를 경유하는 데만 골몰할 뿐, 뚜렷한 정치적 윤리를 탐색하는 데 있어서 다소 소극적인 것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주체의 윤리를 정치적 윤리로 확장해나가는 작업이 이루어질 때, 이들의 시가 보다 큰 진폭과 파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_ <시인수첩>, 2011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


1. 유한의 감성과 주체의 공백화

 

 

바디우는 낭만주의적 전통이 오늘날까지 남긴 유일한 정신적 자산이 있다면 유한성에 대한 예민한 자각이라고 정리한 바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유한성에 처해 있다는 자각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죽음에 귀착되게 하는 문제를 발생시켜왔다는 것이다. 열망과 좌절의 간극 속에서 발생하는 유한성의 페이소스는 낭만주의 전통 이후 동일성의 시학이 지니고 있는 감성적 자질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시인은 본질적으로 죽음과 파국이라는 유한성의 예감에 치를 떠는 존재다. 낭만주의적 영원과 신성, 혹은 무한자를 향한 열망은 인간이 자각하는 유한성의 강도를 더해왔던 것이다.
유한의 감성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바디우는 독특하게도 동일성의 대상인 무한을 일자(一者)가 아닌 다자(多者)로 해체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한다. 이른바 무한의 탈신성화. “무한을 아우라 없는 다수성들의 유형학 속에 산포시키기 위해 일자의 지배에서 끄집어내”는 것이다. 주체마저도 일자(一者)가 아닌 이자(二者), 혹은 다자(多者)로 해체되고 빈 공간이 됨으로써, 무한과 주체는 일자가 아닌 오직 “무한한 다수들”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무한한 다수들”은 일자(일자)의 세계가 아니라 ‘빈 공간’ 혹은 공백의 세계이다. 따라서 무한과 주체가 ‘공백’으로 환원되고 그 자체가 “무한의 다수들”이 됨에 따라 주체의 유한성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동일성의 시학(김준오)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시사하는데, 인간 주체(유한)의 공백과 절대자(무한)의 공백이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유한/무한의 대립관계가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디우가 지향하는 주체는 ‘공백’을 감싸는 둘레가 없는 일자(一者)를 폐기한 ‘비-전체’로서의 주체이다. 둘레를 제거한 인간 주체가 발산하는 무한의 공백은 무한자의 공백과 자연스럽게 겹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과 소멸, 즉 유한을 극복하고자 하는 현대시의 한 방향은 주체의 공백을 둘러싼 테두리를 제거함으로써 주체의 자리를 무화(공백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동일성의 시학은 무화되고 만다. 동일성의 시학이 절대․영원과의 분리의식을 해소하고자 유한자의 무한자에 대한 열망에 근거한 것이라면, 바디우의 주체 관점에서 동일성의 욕망은 폐기되어야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성의 시학(김준오)에서 시적 주체는 보다 큰 일자(一者)로 귀속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다. 대립과 적대 관계 속에서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향한 열망을 품게 되는 동일성의 욕망은 서정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을 내포한다. 에밀 슈타이거가 지적했듯이 서정적인 것은 세계와의 조화로운 상태 그 자체라면, 지금 여기의 세계를 부정하고 다른 세계를 열망하는 동일성은 페이소스를 필연적으로 동반하기 때문이다. 왜소한 존재로서의 주체는 이 세계의 결핍과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영원과 무한의 세계를 동일성의 대상으로 삼는다. 세계의 유한성을 향한 대립과 갈등 속에서 배태된 적대적 감정이 바로 페이소스이며, 영원한 무한자를 향한 동일성의 욕망을 충동하는 배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디우의 철학적 관점에서 동일성의 시학은 극복대상이 되고 만다. 바디우에게 동일성의 시학은 낭만주의적 전통의 유한성의 파토스를 이어받은 일자(一者) 중심의 세계관적 산물이다. 바디우는 유한과 무한의 대립이라는 낭만주의적 유산을 극복하고 주체의 공백 속에 내재한 무한의 공백을 읽어냄으로써 모든 것이 죽음(유한)에 귀착되고 마는 오늘날의 정신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자로서의 주체와 무한에 감금되지 않고 주체와 무한의 감싼 테두리를 제거함으로써 ‘공백’이라는 ‘비-전체’를 발견하는 것. 이로써 유한자로서의 동일성 욕망이 응축하고 있는 유한성의 페이소스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허무주의적 탈주체 이론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주체의 윤리를 가장 극단적으로 정립해 나가고자 하는 정치적 주체이론의 근간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의 시를 읽는 일은 의미 있을 것이다. 90년대 이후 한 흐름을 형성해왔던 주체의 균열과 유한의 감수성은 여전히 한국시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상자된 이재훈과 김영미의 시집 역시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2. 신성(神聖)의 파국과 균열의 기록

이재훈의 시는 신성(神聖)을 욕망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시원(始原)에 대한 원대한 물음”이 있으며, “문학하는 이유가 자기 구원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흠의 고백」)는 제1시집(<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2005)의 고백을 환기한다면, 그의 시적 지향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인간 개체와 시원을 연결 짓는 원대한 꿈은 시의 유년을 지배했던 열망이 아닐 수 없다. 시가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 발원되고 사회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존재와 우주, 그리고 근원과 시원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했던 물음이기 때문이다. 이재훈의 제1시집은 바로 그런 물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예컨대 “새의 등을 올라타고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으며 나스카 평원에 새겨넣은 神의 형상을 한눈으로 보고 싶었다”(「나스카 평원을 떠난 새에 관한 이야기」), 혹은 “나는 어머니가 믿는 神의 안부가 궁금해졌지”(「사수자리」)라는 부분만을 보더라도 그의 시에 내재된 신성에의 욕망이 확인된다.
‘신성’은 자기구원의 언덕이다. 그러니까 이재훈의 시는 자기구원을 위한 ‘신성’에의 탐구에서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이재훈의 첫 시집은 ‘신성’에의 탐색으로 가득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성에의 탐색과 거기서 비롯된 균열의식으로 가득하다. “천 년 동안 날아가고 천 년의 천 년을 날아가지. 아무리 날아도 어딘가로 닿지 않지. 시간을 견디지 못해 몸은 찢어졌지”(「순례2」)처럼 신성은 시인의 접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신성’의 분리는 인간의 전락(顚落)과도 무관하지 않으므로 시인의 시선은 인간의 깊은 무의식(“잠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깊은 동굴이었지”(「사수자리」)과 드넓은 천공(天空)을 향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서 발원되었던 것이 시인의 ‘말’, 곧 시(詩)이다. 이재훈의 시적 주체는 신성에 가닿은 시원의 언어를 찾아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가” “노래 부르는” 시의 “추장”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내 목을 자르고”서라도 말이다.(「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6년만의 시집 <명왕성 되다>(2011)는 신성에의 동일성 욕망이 결국 파국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제1시집에서도 그 균열과 파국의 징후가 보이긴 했지만, 제2시집만큼 적나라하지는 않았다. 자기구원의 문학적 가능성이 제2시집에서는 여지없이 파국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 구체적 징후는 우선 ‘소멸’에 대한 압도적 감성에서 드러나는데, 「대황하」 연작시편은 인간을 지배하는 소멸의 역사를 형상화한다. 시인은 신성이 떠나간 이 세계를 “소멸을 향해 스스로 전진하는 몸짓.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풍경”(「대황하1」)으로 진술한다. 이 소멸의 세계에는 이제 더 이상의 구원은 없다. 이재훈은 말한다. “당신의 세상은 불구의 시간이 시작되는 때”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으므로 “일부러 가부좌를 틀 필요는 없다.”(「앉은뱅이꽃」) 그렇다면 그토록 갈구했던 신성(神聖)은 어디로 갔는가? 이재훈의 시에서 신성은 이 세계와 회복할 수 없는 간극을 지닌 것으로 그려진다.

밀었다. 저 새. 군무의 몸짓이 궁중을 긋고 지나갈 때. 하늘 귀퉁이 구름을 밀었다. 타인의 몸 몇 개를 밀었다. 늙은 햇살이 들판을 토닥토닥거릴 때. 밀었다. 어둠 속으로 햇살을 밀었다. 이 세계엔 바람이 없다. 밀고 밀린 생들이 서로 겹쳐 희붐히 향기만 가득할 뿐. 잊혀진 고향 땅만 언뜻언뜻 보일 뿐. 지겹다. 밀고 밀었다. 눈을 감았다. 도도록한 마음 가운데 한 머리가 덜컹 떨어졌다. 팔짱만 낀 몸이 잠시 움찔했다. 파릇파릇 새로운 몸이 피어났다. 당신의 형상은 몰라요. 부서진 뼈의 향기는 달콤했다. 어떤 운명을 잠시 밀었다. 물 쪽으로 향한 구름에 몸을 던진다. 저 새.
- 「건기(乾期)의 새」 전문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위 시에서 시인은 회복할 수 없는 신성을 노래한다. 이 세계엔 우주의 저 끝에 있을 신성(神聖)으로 밀어줄 바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밀고 밀린 생들이 서로 겹쳐 희붐히 향기만 가득하”고 “잊혀진 고향 땅만 언뜻언뜻 보일 뿐”이다. “밀고 밀린 생들”이라 했지만, 사실 이들은 모두 ‘밀리고 밀린’ “생들”이다. 신성의 세계는 이제 인간계와 분리되었으며, 그 간극을 극복하기에 너무 메말랐다. ‘건기(乾期)의 새’란 신성을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세계에 처한 인간의 비극을 아련하게 드러낸다. 신성(神聖)이란 이제 이렇게 진술된다. “당신의 형상은 몰라요. 부서진 뼈의 향기는 달콤했다.” 그럼에도 구름에 몸을 던지는 새야말로 인간의 운명을 의미하지 않는가, 라고 말하기에는 신성과 인간의 간극에서 비롯되는 피로도가 역치에 달했다.
그나마 아름답게 형상된 이 비극의 세계는 「만신전(萬神殿)」에 이르러 그 끔찍함이 폭로되고 만다. “저는 오래전 아버지를 죽이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뒤로 수많은 신들이 제 속에 들어와 소리를 지릅니다. 홀짝홀짝 살들을 빨아 먹습니다.”“허공의 사다리엔 긴 목을 가진 시체들이 걸려 있습니다.”(「만신전(萬神殿)」) 신성을 향한 인간의 열망은 숭고함을 잃었다. 이재훈은 숭고함을 상실한 이 결핍의 자리를, 신성이 인간의 살들을 ‘홀짝홀짝’ 빨아먹는 이미지로써 끔찍하게 드러낸다. 신성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힘겹게 건너가는 “허공의 사다리”에는 “긴 목을 가진 시체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성의 세계는 해체되고 만다. “처형의 시간” 이후 도달한 “연옥의 산”에서조차 “그 어떤 존재도 이름이 없다”(「연옥의 산」)는 사실은 ‘신성’을 향한 낭만적 환상이 여지없이 파국을 맞이했음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신성한 사랑에 대해 논”하는 일이란, “구름”과 같은 헛된 것을 먹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구역질이 나서/ 나무의 텅 빈 몸에 구름을 토하”(「카프카 독서실」)는 비루함에 맞먹는다. 그런데, “텅 빈 몸”이라니. 시인은 비로소 주체의 자리를 ‘빈 공간’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신성과 개체의 영성적 동일성을 추구했던 시인의 세계관은 주체의 ‘결여’ 쪽으로 기우는 것이다.

그동안 숨어 있던 마음의 보풀이
비늘처럼 떨어집니다.
입김을 불면 그대로 내 살들이
냄새를 풍기며 날아갑니다.
비린내가 가득합니다.
-「물에 대한 사소한 변론」 부분

고가도로 아래로 바람이 분다.
땅속으로 분다.
이 세계의 배꼽 속으로 분다.
모든 허공으로 분다.
모든 공허 속에 인다.
-「미궁의 열두 번째 통로」 부분

신성(神聖)을 향한 욕망이 “마음의 보풀이/ 비늘처럼 떨어지듯” 허물어진다. “입김을 불면” 그대로 “냄새를 풍기며 날아가”는 “살들”의 “비린내”. 신성의 확신으로 가득 차 있던 주체는 비로소 악취를 풍기는 것이다. 강한 것은 비리다. 암석처럼 단단한 주체는 허물어질 때 비로소 독한 비린내를 풍긴다. 비린내는 주체의 강도에 비례하리라. 주체가 ‘빈 공간’이라는 자기 파국의 비수는 마침내 신성(神聖)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간다. “고가도로 아래” 부는 세속의 “바람”이 “땅속으로”, “이 세계의 배꼽 속으로” 불듯이 말이다. 그런데 “땅속”, “이 세계의 배꼽”, “모든 허공”, “모든 공허”의 병치는 결국 하나의 의미망으로 귀결되지 않는가. 이 병치는 ‘신성’을 담지하고 있을 “세계의 배꼽”이 “허공”이자 “공허”임을 웅변한다. 그렇다면, 신성에 닿고자 했던 주체는 ‘빈 공간’으로서 ‘신성’과 합일을 이룬다. 그러나 이 합일은 절대적 무한으로서의 ‘신성’을 부정하고 주체의 확실성을 부정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합일이다. 이와 같은 주체와 신성(神聖)의 파국 속에서 이재훈의 시적 세계관은 극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제2시집의 제목이 <명왕성 되다>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태양계의 궤도로부터 이탈된 명왕성은 주체와 신성(神聖)의 궤도를 이탈한 존재의 비유에 다름 아닌 것이다.

거울엔 과녁이 없다.
내가 거울에 입을 맞추면
오히려 그는 없고 내 얼굴만
환하다.
어디를 찔러도 되돌아오는 아픔.
거울은 고요다.
어떤 사연도 담지 않고
내가 볼 때마다 붉게 충혈된
눈만 되돌려 주며
침묵하는 사태.
나는 도시의 은유에 머물렀다가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며 와르르
내 얼굴이 무너짐을 본다.
형체 없는 얼굴,
소실점으로 모이지 못하는 얼굴,
-「거울 속의 얼굴」 부분

겨냥할 과녁이 없는 세계, 욕망의 대상이 사라지고 말아 내 존재만이 홀로 남아 있는 세계 속에서 주체는 결국 ‘나’라는 존재의 “소실점”을 상실하고 만다. 이 “소실점”은 주체의 ‘누빔점’이 아닌가. ‘누빔점’을 상실한 주체의 파국이야말로 이재훈의 시가 새롭게 진입한 세계의 진경(眞境)이다. 하여, 시인에게 ‘시’(詩)란 시원(始原)의 신성(神聖)을 향해 날아가는 ‘자기구원’의 언어가 아니라 “어머니가 없는 공허한 시”에 지나지 않으며, 시인조차도 “재킷을 입고 시를 쓰”(「재킷을 입은 시인」)는 세속화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토록 극적인 세계관의 변화 속에서 상처는 피할 수 없다. 시인은 단지 ‘자기구원’의 “일생을 꿈꾸었을 뿐인데”, “챙, 소리에 놀라 보니 사방에 깨진 파편들이 빤짝”이는 것이다. “깨진 기왓장”의 “천년을 건너온 어떤 눈동자”에 시인은 “스윽” “손을 베이”고 만다.(「동경(銅鏡)」 파국의 과정에서 시인은 깊은 상처를 입는다. 이 상처의 깊이는 ‘신성’(神聖)을 열망했던 시인이 경험한 자기 파국의 강도를 알려준다. 따라서 이재훈의 제2시집은 신성(神聖)을 희구했던 주체가 비로소 맞이한 파국의 세계와 그 안에 새겨진 고통과 균열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_ <시와사상>, 2011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
Posted by 이재훈이
,
올해 출간한 두 권의 책, 좋은 소식이 있었습니다.
<나는 시인이다>(팬덤북스)가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올해의 교양도서로 선정되었습니다.

http://www.mcst.go.kr/web/notifyCourt/notice/mctNoticeView.jsp?pCurrentPage=1&pSeq=6788

<명왕성 되다>(민음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2011년 우수문학 도서보급사업에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었습니다. 아래는 선정평입니다.~^^

http://www.for-munhak.or.kr/idx.html?Qy=book3&fld=cGFydF9ib29rc195ZXNfYWE=&words=2011-4&nid=9158&page=1



"별자리의 혼처럼 볼 수 없는, 시의 검은 여백에서는 시인의 젖은 눈빛과 호흡이 심장처럼 뛰고 있을 것이다. 시집 『명왕성 되다』의 표정은 생각보다 멀리 뛰는 말이었고, 그 뜨거운 빛을 방울처럼 울려댔다. 일용근로자의 피로와 백수건달의 자책과 독학자의 자부심과 시인의 기상이 한 별자리로 앉아있다 ‘동시에’ 일어나는 바람에 독자는 화들짝 놀란 유성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아쉬움을 햇빛처럼 눈이 부시게 보다 잃었을 때, 시인은 소멸의 그림자를 자신의 무릎에 가벼이 올려놓는다. 슬픔을 소진한 시인이 새로 얻은 별자리의 흔적을 감추고 있는 시집이다."


선정위원 /  이기인 안상학 강형철 유안진


'민음의 시' 175권. "이재훈 시의 시공은 광대하다. '빌딩나무 숲'인 이곳에 사막과 우주와 원시의 시공을 겹친다."(김혜순 시인), "그의 시는 오늘의 시에 대한 새로운 보고서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조정권 시인)라는 평을 받은 이재훈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

도시의 생태와 자신의 내면을 결합하며 한 시대의 쓸쓸한 풍경을 기록한 첫 번째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로 큰 주목을 받았던 그는, 이번 시집에서 소재와 착상의 범위가 더욱 넓고 풍요로워졌으며, 다양한 시편들을 통해 호흡과 리듬도 점점 확장되고 있다.

이재훈 시인에게 도시는 늘 새로운 탐구의 대상이다. 욕망으로 가득한 도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도시를 성찰한다. 시집 곳곳에서 지하철, 버스, 독서실, 저녁의 거리, 도서관, 골목 등 시인의 일상 공간들이 직접 드러나는데, 존재의 시원(始原)에 가닿고자 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도시 속에서 환상적이고도 동화적인 색채의 공간을 펼쳐 놓는다.

그 도시 속에서 '육십억 분의 일일 뿐'인, 그저 '먼지'처럼 '아무것도 아닌' '매일 출근하는 폐인'들의 고단한 삶이 펼쳐지며, 시인은 그 속에서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을 진하게 그려 낸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명왕성 되다(plutoed)'라는 말은, 명왕성이 태양계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한 사건에 빗댄 신조어다. 익명과 소외, 그리고 기계적 규칙성이라는 도시 생활자의 삶에서 그는 '명왕성'이 됨으로써 스스로 궤도를 벗어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끊임없이 구원을 꿈꾸고 있는데, 그에게 '구원'은 곧 '근원'이다. 이재훈의 시에서 근원적인 곳은 머나먼 어딘가가 아닌, 세속 도시의 구석구석에 내재되어 있다. 이 도시 안에서 시인은 세속적인 이미지 속에서 성스러움을 체험한다.


이재훈

1972년 강원 영월에서 태어났다. 1998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명왕성 되다』가 있다.

Posted by 이재훈이
,

<열림원과 함께하는 문학창작교실>을 오픈합니다!

30년 전통의 문학전문 출판사 열림원에서는, 고급 문학의 창작 저변과 향유 계층을 넓히고 재능 있는 문화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문학창작교실을 오픈합니다.
첫 번째 강좌로서 이재훈 시인과 신동옥 시인의 시창작교실을 개강하고 아래와 같이 가능성과 열정을 갖춘 예비 시인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 참고로 소설창작교실은 추후 개설할 예정입니다.


열림원과 함께하는 문학창작교실 시 강좌 제1기 수강생 모집

1. 모집대상 및 자격

* 좋은 시를 가려내고 좋은 시를 쓰고자 하는 분.
* 신춘문예나 문예지 공모 등을 통해 등단을 준비하시는 분.

2. 교실 운영 방법

* 주 1회(매주 화요일, 금요일) 2시간 강의로 두 개의 교실을 총 12주 동안 동시에 진행. 총 24시간 스터디. 수업 시작은 오후 일곱 시. 장소는 마포구 서교동 열림원 2층 회의실
* 시창작의 이론과 실제를 함양하는 것을 기본 목표로, 특강을 포함해 다양한 형식의 교육 및 학습.(상세한 커리큘럼은 추후 공개)
* 기성 시인의 작품과 수강생의 작품을 심층적으로 분석, 합평하고 시의 기본 구조와 유형 등을 스터디함.

3. 수강 인원 및 수강료

* 집중적이고 효율적인 수업을 위해 선착순 화요반, 금요반 각 8인만 모집.
* 12주 기준 24만원.(수강료는 전액 강사에게 지급될 예정입니다.) 

4. 수강신청 방법

* 이메일로 이름(본명)과 나이, 성별과 직업, 주소와 연락처 등 필수적인 신상정보와 함께 간단한 자기소개서를 보내주세요. 자기소개서에는 시를 쓰고자 하는 동기, 시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등을 자유롭게 적어주세요. 희망하는 교실을 꼭 명시해주세요. 예) 화요반 희망, 금요반 희망.

* 열림원 문학창작교실 담당자 이메일 : drybook@yolimwon.com / drybook@naver.com

5. 창작교실 오픈

* 화요반 11월 1일 화요일 첫 수업 예정
* 금요반 11월 4일 금요일 첫 수업 예정


강사 소개

금요일반 이재훈 시인
1972년 강원 영월에서 태어났고 1998년 『현대시』로 등단하여 시를 쓰기 시작했다. 국문학과 문예창작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현대시』 부주간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명왕성 되다』(민음사)가 있고, 그 외에 지은 책으로 『현대시와 허무의식』, 『딜레마의 시학』, 시인 인터뷰집인 『나는 시인이다』 등이 있다.

화요일반 신동옥 시인
1977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고 한양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 『시와반시』신인상 공모를 통해 시단에 나왔다. 펴낸 시집으로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랜덤하우스중앙)가 있고 곧 문학동네에서 두 번째 시집이 출간될 예정이다. 현재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인스턴트 동인 결성을 주도해 2000년대 중반 이후의 전위적인 시운동에 참여했고 2010년 윤동주문학상 젊은 작가상을 받았다.


'시시각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우주' 시낭송회 특강  (0) 2011.12.07
문학동네 시랑사랑 낭독회 <시판사판>  (0) 2011.12.02
곰을 보다  (0) 2011.04.04
억지 표정~  (1) 2011.03.03
인터뷰  (0) 2010.12.06
Posted by 이재훈이
,

장미가 있는 산책길의 메모

_이운진

 

 

거리를 걷다 보면 자꾸 온몸이 붕 뜬다

바퀴가 싫어 걷다 보면

빌딩의 키가 커진다

핵폭발처럼 밝은 도시

기하학적인 철구조물로 가득한 낭만의 도시

밤마다 폭죽이 울린다

다리도 아프고, 목이 말라

시냇가로 가면 물이 바짝 말라 있다

차도 없고 집도 없고 양복도 구두도 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도시는 저 멀리 있다

가녀리게 풀벌레 신음하는

시냇가에 앉아 풀피리를 분다

도시에서 흘러나온 검은 물소리가

박자를 맞춘다

도시의 무관심이 차라리 행복하다면

위안이 될까

냄새나는 숲의 향기 때문에 마스크를 쓴다

차라리 예술을 할까

예술을 한다면 이해해줄지도

아주 잠깐 부요해진 듯하다

꼬깃꼬깃 접어놓은 그날들을 펴보는

옛사람의 산책

 

-이재훈,「미적인 궁핍」전문 (『시인시각』2011 여름)

 

  우리는 물질과 문명의 정점이라는 위대한 시대사를 함께 쓰는 영광을 안았지만, 그 영광만큼이나 큰 시대의 병리 또한 가지고 말았습니다. 어떤 자명한 도덕도, 순수함도, 자연도 상실해 버렸습니다. 현실과의 모순이 첨예할수록 정신적 상처는 깊어졌고 도시에서 잃어버린 내면의 깊이가 깊을수록 우리는 더 큰 극빈을 느꼈습니다. 속도와 크기로 짓누르는 도시의 풍경 속에서는 내 것이 아닌 시간들로 하루가 채워지고 그 하루도 모두가 질주 중에 있습니다. 보이는 것 말고는 믿을 것이 없고 믿는 것은 영원함을 잃어버린 그 앞에서 생은 한없이 초라해질 밖에요. 이러한 시대의 노이로제를 앓는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이 무거운 구원의 책임을 예술이나 시에게 모두 다 지워도 되는 것일까요? 시인의 마음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도시의 거리는 눈부시고 화려합니다. 그 아름다운 불빛과 아우토반의 속도는 분명 매혹적이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깁니다. 어쩌면 시인의 말대로 핵폭발처럼 밝게 빛나고 사라져야 하는 것이 도시의 최종지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이 도시에서 본래의 본성을 지키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지요. 그런 이유 때문이었겠죠. 도시와 욕망의 몰락을 예감한 시인은 아무것도 없이 도시를 벗어나 봅니다. ‘양복도 구두도 없이’ 떠나온 곳에서 조그만 시내를 만나 다리를 쉬며 풀피리를 불어봅니다. 그러나 그곳도 ‘도시에서 흘러나온 검은 물’이 지나고 풀벌레가 신음하는 곳이었습니다. 아, 시인의 안타까운 탄식이 들립니다. 어디에서 위안을 찾아야 하냐고 묻는 간절한 질문이 들립니다. 그 순간 예술을 떠올립니다. 예술이라면, 문학이라면, 시라면 잿빛 장미 곁을 지켜주고 불가능한 회복을 믿게 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정 우리 모두의 소망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다가 나는 미美, 아름다움이라는 말 쪽으로 무게를 실어 생각을 다시 짚어 봅니다. 짧은 경험을 바탕으로 짐작해보건대,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는 우아한, 고귀한, 숭고한, 선한 것의 성질을 다 아우르는 말인 듯싶습니다. 생경한 놀라움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소유나 욕망의 느낌을 배제한 상태에서도 즐기고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에 미적이다라는 말을 허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시인이 자연과 예술에 대해서 ‘미적인 궁핍’을 느꼈을 거라는 확신을 다시 하고선 깊은 공감을 표하는 것입니다.

  시를 덮고나서 나는 불 밝힌 도시의 밤거리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자연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스팔트가 동맥처럼 뻗어 있습니다. 저 핏줄에 힘을 대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도 생각합니다. 삶에 지친 장미와 시인이 하나의 모습으로 겹쳐집니다. 그것은 나와 당신이기도하고, 별빛과 별빛의 감정이기도 하고, 강물과 물소리이기도 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 둘 사이의 틈새를 채우는 슬픔이 유목의 도시에서 부유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중세의 어느 마을에서 겨울을 맞는 듯한 권태도 가득합니다. 동서남북 어디서나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찾아내는 불행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이 모든 것들을 견디기 위해 나는 장미와 시를 기록할 방식들을 고민해 봅니다. 내가 다시 감성의 풍요를 느낄 수 있는 일이란 몽환이라는 혁명뿐일까, 아니면 정말 꼬깃꼬깃한 옛사람들의 산책로를 펴는 일일까, ‘창조하며 나는 회복될 수 있었고 창조하며 나는 건강해졌노라’는 하이네처럼 창조적 열망에 온 몸을 기대야 하는 것일까? 당신의 대답이 담긴 가을 편지를 장미 꽃잎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_ 계간 <시인시각> 2011 가을 / 이운진의 시편지


Posted by 이재훈이
,
[읽기의 행복] 시인을 찾아서

8월 첫째주 추천 전자책…<나는 시인이다>와 <대설주의보>
2011.08.05, 금 13:21 입력

◆시인들은 어떤 사람일까…이재훈의 <나는 시인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 나오는 시의 일부이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들어보고 읊어봤을 대표 시이다. 국어 책에도 나온다. 몇 번을 고쳐 쓴 연애편지에 인용했던 기억들은 없는지... 괜히 맘에 드는 이성을 붙잡고 '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객기를 부린 적은 또 없는지...

김춘수 시인은 의미와 무의미의 관계를 두고 시를 써 온 시인이었다. 김춘수 시인은 자신을 '역사 허무주의자'라고 표현했다. 시인은 니콜라이 베르자예프(러시아 작가)의 말을 빌려 "지금까지는 역사가 인간을 심판했지만, 이제부터는 인간이 역사를 심판해야 한다"라고 까지 했다. 그만큼 역사는 김춘수 시인에게 있어 이념이자 폭력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었다.

이재훈의 <나는 시인이다>는 한국의 시단을 움직여 왔던 35명의 시인에 대한 솔직담백한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가 직접 시인들을 만나 때론 집에서, 때론 카페에서 대화한 내용을 기본으로 시인들의 시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질곡의 역사를 살아온 시인들에게 시의 의미는 무엇이었으며, 자신이 자라고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이 어떻게 자신의 시에 녹아들어 있는지를 시인들의 육성으로 직접 들어볼 수 있다.

<나는 시인이다-우리시대 시인 서른다섯 명의 내밀한 고백>
장르: 시/에세이/기행
저자: 이재훈
출판사: 팬덤북스
가격: 7천200원
Posted by 이재훈이
,
사이버문학광장 > 문장 > 문학집배원
이재훈, 「재킷을 입은 시인」 낭송 이재훈 | 2011.09.19
이글을 이메일로 다시 받기 | 추천하기 | 메일보내기 | 트위터 담기 | 미투데이 담기 | 주소복사
 
 
이재훈, <재킷을 입은 시인>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어머니가 없는 공허한 시를 쓴다.
예술가들은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고
머리에 뿔을 단다. 광대의 옷을 입는다.
거친 발걸음으로 거리에 나가 거죽을 벗긴
날짐승을 전시한다.
대중은 환호하고, 예술은 진지하다.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고독한 오만으로 공허한 시를 쓴다.
재주 좋은 시인은
높은 나무에 올라 나뭇잎의 형상을 그린다.
시든 나뭇가지의 슬픔을 노래한다.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사로잡힌 유니콘의 뿔에 대해.
사랑하는 말발굽 소리에 대해.
문명인의 실험에 훼손당한 별의 슬픔에 대해.
스삭스삭 재킷의 말로 쓴다.
실상 외투는 어머니의 살로 만들어진 것.
재킷, 재킷! 하면* 어머니의 뇌와 심장이 실이 되어
올올이 풀려나온다.
재킷을 입고 추위를 견딘 나는
어머니에 대해 쓸 수 없다.
잠자는 숲에 들어가 촛불을 켜고
재킷을 태우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편의 시가 태어날 텐데.
재킷의 재가 나무에 뿌려져
울창한 숲이 되면,
앙상한 내 겨드랑이에 날개가 생길 텐데.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너무 추워 재킷을 꼭 껴입고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재킷, 재킷 말을 건다.
 
 
* 아베 고보의 소설 <시인의 생애>에서.
 
 
 
시낭송_ 이재훈 - 1972년 강원 영월에서 태어났으며, 1998년 <현대시>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가 있음.
 
출전_ <명왕성 되다>(민음사)
음악_ 임승태
애니메이션_ 강성진
프로듀서_ 김태
 
 
아베 고보의 짤막한 단편소설 「시인의 생애」에서 모티브를 얻은 시이지만, 이 시를 즐기기 위해 그 단편소설을 꼭 읽어야할 필요는 없다는 것 알고 계시죠? 스스로 물레에 감긴 실이 되고 마침내 재킷이 된 노파의 이야기가 나오는 아베 고보의 「시인의 생애」는 퍽 의미심장한 소설인데, 저는 아베 고보가 이 시를 보면 아주 즐거워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과는 전혀 다른 경로의 즐거움을 주는 시입니다. 풍자와 알레고리가 예리하게 살아있는, 어딘지 허를 꿰뚫는 느낌의 시. 이만하면 소설과 시의 상호작용이 퍽 아름다운 진경을 펼쳐보이는 셈.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를 읽고 임철우 소설가가「사평역」을 쓴 것처럼, 시와 소설이 서로에게 미칠 수 있는 좋은 관계들이 많이 만들어질수록 독자는 즐거워지지요. 이제 저는 흥미로운 마음으로 재킷에 몰두해봅니다. 시인이 공허한 시를 쓰는 이유는 재킷을 입었기 때문인데, 재킷은 어머니이고, 어머니를 입어버렸으니 시인이 쓰는 시에는 어머니가 없고, 그러니 공허하고, 공허한데 아닌 척 허세를 부리고, 그러느라 점점 세상은 춥고, 재킷 없이는 추위를 견딜 수 없고, 그럴수록 시는 더 공허해지고, 나는 재킷을 더 꼭 껴입고…… 생명력 있고 진실 된 시를 쓰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재킷으로부터 해방시켜 드려야 하는데 재킷 없이 시인은 이 거리의 추위를 견딜 수 없으니, 이 모순을 어떻게 견딜까. 눈치 채셨겠지만 이것은 비단 시인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당신은 어떤 재킷을 입고 있나요? 당신의 재킷은 안녕한가요? 당신의 어머니는 무탈하신가요.
 
문학집배원 김선우

Posted by 이재훈이
,

입력 2011.08.16 800호(p72~73)

[시인 오은의 vitamin 詩] 


카프카 독서실



카프카 독서실


벽이다.

엎드려 잘 때마다 이곳은

바닥이 아니라 무른 껍질이라 생각했다.

배에 힘을 주면 지그시 열릴 것 같은

그 껍질을 깨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몸을 마음껏

비벼 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주장해야 했다.

쿵, 말문이 열리면 긴 오솔길이 펼쳐지곤 했다.

한참을 걸었을 때 울창한 숲이 보였다.

나는 구름을 먹고,

신성한 사랑에 대해 논했다.

풀숲에는 소리가 고여 있었다.

풀을 헤치니 소리가 서로 밥을 먹고 있다.

갑자기 구역질이 나서

나무의 텅 빈 몸에 구름을 토했다.

검은 말들이 꿈틀댔다.

가련한 밤,

문신을 새기는 꿈을 꾸었다.

팔뚝 위에 피리를 새겨 넣자

내 몸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창밖엔 십자가가 흐른다.

가로등이 떠다닌다.

감정 없이 장단만 있는 노래.

이 방은 어둠이 몸 푸는 자리,

얼굴도 없고 가슴도 없다.

빗방울도 없이

빗소리가 내리는 방.

엎드려 자고 있으면

살포시 몸에 감기는

빈 말들의 뼈.

― 이재훈 ‘명왕성 되다’(민음사, 2011)에서


빈말을 채워야 할 시간이 닥쳤다

재수 시절, 나는 학원 대신 독서실에 다녔다. 유독 아침잠이 많았던 나는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11시에 퇴근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독서실도 일부러 집에서 좀 먼 데로 잡았다. 그래야 마음이 덜 흔들릴 것 같아서였다. 컴퓨터, TV, 그리고 침대와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했다. 독서실은 밤낮으로 어둡고 습했다. 스탠드를 켜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에어컨에선 물이 뚝뚝 떨어졌다. 눅눅해진 책장을 넘기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퍽 서글퍼졌다. 시간 가는 줄도 알고, 시간이 잘 안 가는 줄도 알던 시기였다.

혼자서 저녁 먹고 들어와 식곤증에 고개를 끄덕거리다 보면 “창밖엔 십자가가 흐”르는 게 예삿일이었다. 어떤 종교도 나를 붙잡아주지 못할 것 같았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으면 눈앞에 둥둥 “가로등이 떠다”녔다. 가로등은 점멸등처럼 자꾸 깜박거렸다. 그만큼 나는 불안했다. 기약 없는 일을 남들보다 일 년 더 해야 한다는 사실은 나를 움츠러들게 만들기 충분했다. 자책하는 날이 늘어났다. 나는 왜 이토록 유약한가. 나는 왜 사소한 것에 쉬 휘둘리는가. 카프카가 아니어서 나는 감히 ‘성’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사방에 덫이 깔린 것 같았다.

어느 날이었다. 저녁 먹고 들어왔더니 어김없이 졸음이 쏟아졌다. 정신이 좀 들까 해서 독서실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후 8시, 여느 때처럼 가로등이 켜지던 순간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뜬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머릿속에 빛줄기가 흡사 빗줄기처럼 내리쳤다. 그날이었다. 내가 독서실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나는 줄기차게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면서도 그게 시라고는, 시가 될 수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았다. “오솔길”과 “울창한 숲”을 요리조리 헤치고 나가는 게 그저 즐거웠을 뿐이다. 계절이 바뀌고 히터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자극했지만, 이미 나는 마음속으로 시원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할 말은 아직도 “풀숲”처럼 곱슬곱슬 우거져 있었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독서실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됐다. 하루가 점점 짧게 느껴졌다. 인수분해를 하고 판구조론에 대해 공부해야 할 시간에 나는 말을 처음 배우는 심정으로 단어들을 장난감 블록처럼 가지고 놀았다. “팔뚝 위에 피리를 새겨 넣”으면 “내 몸에서 노래가 흘러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독서실은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 됐다. 어쩌면 나는 그곳에서 내 운명을 발견한 셈이다. 그래서 오늘도 “완성되지 않은 몸”들은 기꺼이 독서실에 간다. 시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만의 방’을 찾아든다. 지금도 분명 “빈 말”들이 “뼈”가 돼 누군가의 “몸”에 “감기”고 있을 것이다. 빈말을 채워야 할 시간이 또다시 닥친 것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종이를 꺼내야겠다. 더는 창백할 수 없는, 더없이 새하얀 것으로. 그리고 나는, 곧, 너를 채울 것이다.

 

오은 |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Posted by 이재훈이
,
[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명왕성 되다(plutoed)

이재훈

입력시간 : 2011.08.21 20:39:35  수정시간 : 2011.08.21 21:36:42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 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아름다운 시 한 구절을 외우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미국 방언협회는 'plutoed(명왕성 되다)'를 2006년의 새 단어로 선정했대요. '태양계로부터 소외당했다'는 뜻입니다. 그 해 명왕성은 태양계의 행성 지위에서 퇴출당했거든요. 명왕성이 태양 궤도를 돌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강제로 잊혀진 별이 되었을 뿐. 깊은 피로감에 휩싸여 우리는 이탈한 적도 없으나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하는 얼굴들을 떠올립니다.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고 싶던 별같이 환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어요. 아직도 몸을 뚫지 못한 폭풍 같은 열망이 살갗에 멍을 남깁니다. 그 멍 때문에 지하철에서 내려 일상의 궤도를 향해 뛰어가지 못해요. 그냥 문이 닫혀주길 기다립니다. 오늘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 보고 싶습니다.

Posted by 이재훈이
,
뉴스 > 전체 > 프린트 이메일 전송 리스트
이재훈 두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 출간
도시순례자의 눈으로 본 세상
명왕성 되다 / 이재훈 지음 / 민음사 펴냄
기사입력 2011.08.12 17:02:48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블로그 스크랩
참 애처롭고 쓸쓸하다. 도시 남자의 일생이 애벌레처럼 느껴지다니. 이재훈 시인은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아등바등하며 살아가는 수컷의 고충을 시 `남자의 일생`으로 토로한다.

`풀잎에 매달려 있다가/툭,/떨어진 애벌레.//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 데/온 생을 바쳤다.//늦은 오후./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그림자 잦아들고/온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나비 한 마리./공중으로 날아간다.//풀잎이 몸을 연다.`

살벌한 세상과 사투를 벌이듯 살다 초라하게 생을 마감해야 하는 남자의 숙명을 애벌레에 비유했다. 숨 막힐 정도로 끊임없이 옥죄는 사회에서 버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할 수밖에 없는 수컷의 피로감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민음사 펴냄) 속에는 도시 노동자의 핍진한 삶과 성찰이 담겨 있다. 거대한 기계의 부품처럼 존재감 없이 그저 살아내는 데 급급한 일상이 황량하게 펼쳐진다. 지하철과 버스, 독서실, 골목 등 시인의 일상 공간 속에서 느낀 소외감과 외로움이 진하게 배어 있다.

시인은 각박한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상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한 남자를 명왕성에 빗댔다. 궤도가 불안정하고 크기가 작다는 이유로 태양계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퇴출된 명왕성 사건을 떠올린 것이다. 도시에서 버려지지 않기 위해, 구원받기 위해 넥타이를 매고 만원 지하철에 오르는 남자의 하루가 시 `매일 출근하는 폐인`을 통해 애잔하게 다가온다.

`의욕적으로 넥타이를 매고 미소를 연습한다. 수많은 거울 앞의 표정들. 낯선 얼굴, 낯선 침묵.//다른 말은 없다./너를 자위케 하던 기호들. 새, 별, 그리고 꽃과 나무. 아무 생각 없이 잠들 수 있었던 그대, 라는 말을 향해.(중략) 나는 육십억 분의 일일 뿐. 페트병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맥주 캔. 먹다 남긴 컵라면. 참기 힘든 소음. 역겨운 화장 냄새와 비둘기 똥 냄새로부터.//계곡의 하얀 물보라를 헤치고, 난파된 얼음 위에 올라서 저물어 가는 사람들의 삶을 감상하고 싶다. 그러면 아주 쓸쓸하겠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아무도 없이 고독하겠다.(중략)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의 형벌이었다.`

현실은 비루하지만 시인은 비관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정확하게 인지한다. 도피하려 하지도 않는다. 시 `명왕성 되다`를 통해 오히려 현실을 초월적 공간으로 바꿔 놓는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전지현 기자]

Posted by 이재훈이
,

도시의 생태와 내면의 쓸쓸한 풍경


이재훈 시집 '명왕성 되다' 발간

(서울=연합뉴스) 김영현 기자 = 'Plutoed(명왕성 되다)'는 미국 방언협회에 의해 '2006년의 단어'로 선정된 신조어다. 국제천문연맹(IAU)이 명왕성의 태양계 행성 지위를 박탈한 뒤 'Pluto(명왕성)'라는 단어에 '가치를 떨어뜨리다, 소외되다'는 의미가 추가됐다.

시인 이재훈(39)은 도시 속 익명과 소외를 드러내는데 이 단어를 적절하게 활용했다. 2005년 이후 6년 만에 낸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민음사 펴냄)에서다.

시인은 이 시에서 출퇴근길 지하철 2호선을 탄 도시 생활인의 팍팍한 정신세계를 전했다. 이 '도시인'은 주변 제약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쉽게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눈만 감고 만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중략)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명왕성 되다(Plutoed)' 중)

시인은 이처럼 시집에서 도시를 탐구 대상으로 삼았다. 도시의 생태와 자신의 내면을 결합해 쓸쓸한 풍경을 그렸다.

"의욕적으로 넥타이를 매고 미소를 연습한다. 수많은 거울 앞의 표정들. 낯선 얼굴, 낯선 침묵. (중략) 나는 육십억 분의 일일 뿐. 페트병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맥주 캔. 먹다 남긴 컵라면. 참기 힘든 소음. 역겨운 화장 냄새와 비둘기 똥 냄새로부터.('매일 출근하는 폐인' 중)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고 노래한 '남자의 일생'은 이 시대에 남자로 살아가는 고충을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과정으로 씁쓸하게 비유했다.

제약과 구속에 시달린 시인은 마침내 초월을 꿈꾼다. 하지만 그 시도는 현실을 탈출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초월적 공간을 꿈꾼다. '근원'을 찾는 것이다.

"나는 근원을 바랐다./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중략) 언덕이 있는 곳은 월곡(月谷),/달빛이 있는 골짜기다./언덕을 오르고/또 한 언덕을 오르면/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중)

문학평론가 조강석은 "이 시집의 기저를 맴도는 덩어리진 목소리는 일용근로자의 피로와 백수건달의 자책과 독학자의 자부심과 시인의 기상이 한데 배어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148쪽. 8천원.

cool@yna.co.kr


Posted by 이재훈이
,




존재의 시원(始原)을 응시하며 세속 도시를 순례하는 시인 이재훈

슬픔의 소진마저 지난 후에야 비로소 얻는 소멸의 미학



“이재훈 시의 시공은 광대하다. ‘빌딩나무 숲’인 이곳에 사막과 우주와 원시의 시공을 겹친다.”(김혜순 시인), “그의 시는 오늘의 시에 대한 새로운 보고서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조정권 시인)라는 평을 받은 이재훈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가 출간되었다. 도시의 생태와 자신의 내면을 결합하며 한 시대의 쓸쓸한 풍경을 기록한 첫 번째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로 큰 주목을 받았던 그는, 이번 시집에서 소재와 착상의 범위가 더욱 넓고 풍요로워졌으며, 다양한 시편들을 통해 호흡과 리듬도 점점 확장되고 있다.

이재훈 시인에게 도시는 늘 새로운 탐구의 대상이다. 욕망으로 가득한 도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도시를 성찰한다. 시집 곳곳에서 지하철, 버스, 독서실, 저녁의 거리, 도서관, 골목 등 시인의 일상 공간들이 직접 드러나는데, 존재의 시원(始原)에 가닿고자 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도시 속에서 환상적이고도 동화적인 색채의 공간을 펼쳐 놓는다. 그 도시 속에서 “육십억 분의 일일 뿐”인, 그저 “먼지”처럼 “아무것도 아닌” “매일 출근하는 폐인”들의 고단한 삶이 펼쳐지며, 시인은 그 속에서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을 진하게 그려 낸다. 시집 안에서는 끊임없이 “일용근로자의 피로와 백수건달의 자책과 독학자의 자부심과 시인의 기상”이 한데 배어나고 있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명왕성 되다(plutoed)’라는 말은, 명왕성이 태양계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한 사건에 빗댄 신조어다. 익명과 소외, 그리고 기계적 규칙성이라는 도시 생활자의 삶에서 그는 ‘명왕성’이 됨으로써 스스로 궤도를 벗어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끊임없이 구원을 꿈꾸고 있는데, 그에게 ‘구원’은 곧 ‘근원’이다. 이재훈의 시에서 근원적인 곳은 머나먼 어딘가가 아닌, 세속 도시의 구석구석에 내재되어 있다. 이 도시 안에서 시인은 세속적인 이미지 속에서 성스러움을 체험한다.


이재훈

1972년 강원 영월에서 태어났다. 1998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가 있다.


■ 편집자 리뷰

침묵과 고요의 깊고 너른 ‘울음’을 통한 거대한 ‘울림’


첫 번째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가 하늘 위에서 부르는 노래, 특히 ‘영가(靈歌)’의 세계였다면,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는 하늘과 땅의 중간쯤에서 부르는 ‘침묵’과 ‘고요’의 깊고 너른 ‘울음’을 통한 거대한 ‘울림’이다. 이재훈 시인에게 도시는 늘 새로운 탐구의 대상이다. 숨이 막히고, 끊임없이 옥죄는 공간이지만, 어쨌든 발 디디고 살아가야 할 공간인 욕망의 도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도시를 성찰한다. 「新林洞」, 「매일 출근하는 폐인」, 「비비디 바비디 부」,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등의 시에서 시인의 일상 공간들이 직접 드러나는데, 존재의 시원(始原)에 가닿고자 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도시 속에서 환상적이고도 동화적인 색채의 공간을 펼쳐 놓는다.


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 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잦아들고

온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나비 한 마리.

공중으로 날아간다.


풀잎이 몸을 연다.

―「남자의 일생」


이 시는 애벌레가 나비로 변화하는 과정의 알레고리 속에 처절한 생존 게임과도 같은 인생의 과정 전체를 담아내며, 이 시대에 남자로 살아가는 것의 고충을 우회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의욕적으로 넥타이를 매고 미소를 연습한다. 수많은 거울 앞의 표정들. 낯선 얼굴, 낯선 침묵.


다른 말은 없다. 너를 자위케 하던 기호들. 새, 별, 그리고 꽃과 나무. 아무 생각 없이 잠들 수 있었던 그대, 라는 말을 향해.


(중략)


나는 육십억 분의 일일 뿐. 페트병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맥주 캔. 먹다 남긴 컵라면. 참기 힘든 소음. 역겨운 화장 냄새와 비둘기 똥 냄새로부터.


계곡의 하얀 물보라를 헤치고, 난파된 얼음 위에 올라서 저물어 가는 사람들의 삶을 감상하고 싶다. 그러면 아주 쓸쓸하겠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아무도 없이 고독하겠다.


(중략)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의 형벌이었다.

―「매일 출근하는 폐인」


이 시를 통해 우리는 견고한 생활의 필연적 조건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비관’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스스로 정확히 ‘인지’한다. 이 인지의 결과는 바로 다음과 같은 시에 나타난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 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 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명왕성 되다(plutoed)」


이 시의 제목이자,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명왕성 되다(plutoed)’라는 말은, 명왕성이 태양계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한 사건에 빗댄 표현인데, 사물이나 사람이 갑자기 평가절하 되거나 혹은 소외되는 것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이 시의 배경은 규칙적인 리듬의 기계 소리만 들리는 2호선 지하철 안으로, 화자는 익명과 소외, 그리고 기계적 규칙성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이것이야말로 도시 생활자의 정신적 삶을 규정하는 필연적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이 시의 화자는 바로 그런 제약들로부터 비켜서고자 눈을 감는다. 그는 ‘첩자’나 ‘폭풍’과 같은, 기계적 삶의 리듬을 뒤흔들 파국을 스스로 필요로 하고 있다. ‘명왕성 되다’는 말은 즉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궤도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재훈의 시에서 근원적인 곳은 머나먼 어딘가가 아닌, 세속 도시의 구석구석에 내재되어 있다. 시적 자아는 세속 도시의 세속적인 이미지 속에서 성스러움을 체험한다. 지하철의 문은 계속해서 열리지만, 우리를 진정한 삶으로 인도할 출구는 없다. 하지만 시인은 그 공간 안에서 출구를 찾는 방법을 터득했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소멸의 순간을 꿈꾸다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중략)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다.

장 그르니에가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빛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다.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은,

그 짧은 시간만큼은 황홀하겠지.

언덕이 있는 곳은 월곡(月谷),

달빛이 있는 골짜기다.

언덕을 오르고

또 한 언덕을 오르면

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그 햇살의 순간처럼.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키르케고르가 유한과 무한, 필연성과 가능성의 문제를 종교로 풀어냈다면, 그는 이 문제를 종교가 아닌 시로 풀어내고 있다. 그는 유한이 무한의 반대가 아니라, 무한의 일부임을 깨닫고, 시적 상상력을 통해 유한한 시간을 펴서 무한한 시간에 잇대어 유한성과 필연성을 뛰어넘는다. 그의 초월은 현실을 탈출하고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초월적 공간으로 바꿔 놓는다. 또한 그는 끊임없이 구원을 꿈꾸고 있는데, 그에게 ‘구원’은 곧 ‘근원’이다. 이 시집은 바로 그 ‘근원’, 즉 존재의 시원에 대한 물음과 상상력을 통해 유한과 무한, 필연성과 가능성의 문제를 풀어내고자 하는 시적 고민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시에서는 기계적인 ‘심장’과 존재의 비밀을 깨칠 ‘순간’의 대립이 선명하게 이미지화 된다. 그리고 다시 그것은 퇴근길의 행선지인 월곡과 장 그르니에의 미적 처소인 산타크루즈의 이미지로 보다 또렷하게 구상화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제 월곡과 산타크루즈의 대립이 아니라 월곡을 산타크루즈로 ‘발견’할 수 있느냐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촛불도 아니고 감나무도 아니다.

(중략)

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이었다.

(중략)

그러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

그 비밀의 성소(聖所)가 내 집이었다.

소멸이

내 먹는 밥이었다.

―「연금술사의 꿈」


그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이 소멸의 순간임을 믿는다. 그러므로 그는 끊임없이 소멸을 꿈꾼다. 우주 속으로, 거대한 대황하 속으로, 허공 속으로,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침묵 속으로, 빛 속으로, 영원 속으로 흔적조차 없는 완전한 소멸을 꿈꾼다. “바람은 불어야 제 몸을 갖”고, “눈물은 흘려야 제 몸을 갖”(「비비디 바비디 부」)듯이 그는 소멸함으로써 비로소 제 몸을 갖는다. 그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처럼,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는 시인이다.


■ 작품 해설에서

 

이 시집의 기저를 맴도는 덩어리진 목소리는 일용근로자의 피로와 백수건달의 자책과 독학자의 자부심과 시인의 기상이 한데 배어나는 것이다. 시인의 소멸에 대한 열망은 슬픔의 내력을 시간의 이력으로 전화시키려는, 다시금 유한한 것들을 무한에 대고자 하는 상상적 결단에 의한 것이다. 소멸이 슬픔의 발견, 슬픔의 과장, 슬픔의 소진마저 지난 후에야 얻는 신명의 성소(聖所)라는 것, 그러니 근대인 키르케고르가 비약의 귀재라면 이재훈은 소멸의 총아다. — 조강석(문학평론가)

 

■ 추천의 말


이재훈은 중무장한 중세의 기사와 같다. 그는 영주에게 충성하지 않고 연인에게 헌신한다. 그러나 그 연인은 비밀의 화원에 은신해 있지 않고 시인의 갑주 속에 내장되어 있다. 시인은 연인을 위한 투쟁에서 연인을 훼손시키고야 마는 운명에 처한다. 그것이 이재훈이 파악한 현대 시인의 궁지이다. 자신이 보존할 가치를 기치로 내세울 때마다 그것은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와도 같이 부스러지고 문드러진다. 그러나 그 덕분에 우리는 진실 앞에 놓인 현실의 아득한 해자를 본다. 진정한 세계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말에 채찍을 가해야 한다. 언어의 기교는 현실을 일격에 무너뜨리기 위한 필사의 계책이다. — 정과리(문학평론가, 연세대 국문과 교수)


모든 사라져 가는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애련에 젖게 한다. 시인 이재훈에게 그 정조는 무척 각별하다. 지금은 사라진 고대 문명이나 사라져 가는 시원적 자연에 감응하는 그의 상상의 촉수는 매우 예민하다. 문명의 늪을 거슬러 태초의 궁륭으로 다가서는 소리의 환(幻)이 웅숭깊다. 때로는 혼돈으로 들끓고, 때로는 명상으로 침묵하는 그 소리의 환은 격렬한 듯 단정하고, 단정한 듯 격렬하다. 그 소리의 환의 스펙트럼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에 거역하거나 크게 순응하는 연금술사의 꿈의 폭과 깊이를 가늠케 한다. 사라져 감 혹은 부재라는 그리움의 양식을 통해 이재훈은 존재의 시원적 리듬을 새삼 환기한다. 그리고 헝클어진 동시대의 존재의 리듬에 반성적 감촉을 제안한다. 큰 슬픔이라는 통과제의를 거친 우리네 존재의 신명은 아득한 듯 가깝고, 오래인 듯 여기이고, 사라져 가는 듯 되돌아온다. — 우찬제(문학평론가, 서강대 국문과 교수)

Posted by 이재훈이
,

나의 고문(拷問), 나의 주인
대자본의 영웅인 바퀴들
톱니바퀴에 대해서라면 얘기하고 싶어
나는 정치를 모르고 돈을 모르지
감각의 즐거움을 찾아다니는 광대
모호한 질서들이 난무하는 도시의 산책자
- 이재훈 「결락(缺落)」중에서

바람이 분다. 아니나 다를까 목이 다시 아파온다. 고추장을 찍어 한 입 먹다가 창밖을 본다. 누가 고추장 같은 벌건 노을을 하늘에 처발라놓았다. 언젠가는 남해바닷가 끝자락에 가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유보된 삶이 도시변방을 산책 한다. 누가 말한다. 남해 끝자락이라고! 요즘은 그런 곳이 더 비싸! 우리는 매일매일 새로운 각본을 쓴다. 때때로 운명을, 예언을, 고통을 몸에 문지르며 자본주의에서 자꾸 멀어져 가는 일에 대해 쓴다. 다가가면 자꾸 멀어지는 이상한 삶이다. 이 도시의 ‘톱니바퀴’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데올로기와 정치와 분배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뜻일 테다. 그 속에서 소외와 고독, 불안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뜻일 테다. 문학행위가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하여, 문학이 노동이 되기 위하여서는 장기적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 계획 속에는‘언젠가는’이라는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이 숨겨져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끝없이 마찰을 일으킨다. 제대로 맞물리지 않은 톱니바퀴들은 끝없이 제 살에 상처를 내며 또한 고장이 나고 만다.

이재훈 시인은 톱니바퀴의 세상에서의 불화를 ‘결락’으로 표현하고 있다. 낸시 헤드웨이의 <세계 신화 사전>에 의하면 어리석은 험담꾼과 뇌물을 건네는 자들을 위한 방으로 ‘톱니의 방’이 있다. 시인에게 이 ‘톱니의 방’은 “아주 작은 나사와 구멍들이 얽혀있는 공장”이다. “톱니바퀴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자신의 심리에 대해 거울 속의 자신에게 속삭이듯이 어조는 다정하다. 자신의 운명에 대해 누구에게 마음 터놓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인가. 들어갈 수도 빠져나올 수도 없는 ‘톱니바퀴’속에서의 삶은 ‘몸’과 ‘톱니바퀴’를 동일하게 만들어버린다.

톱니바퀴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이 세계는 아주 작은 나사와 구멍들이 얽혀있는 공장
사실 말이야
하늘도 구름도
빛과 공기의 구멍들이
서로 교합한 증거물들
톱니바퀴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쉬지 않고 몸에서 소리가 나지
째깍째깍 죽음을 단축시키는 소리
내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톱니바퀴
- 이재훈,「결락」(<시와표현>, 2011년 창간호) 부분

이재훈 시인에게 도시는 “모호한 질서들이 난무”하는 곳이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모호하게 잘 어울려 돌아가는 곳. 시인은 적응해야 하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 이재훈 시인의 다른 시 「밀랍蜜蠟」을 보자.

나의 기착지는 어디일까
뼈들이 비대하게 자라고
피의 색깔이 변하는 이 도시
스스로의 시간에 묶여
하늘의 목소리는 듣지 못하지
어제는 네 시간을 준비하고
두 시간을 강의하여 차비를 얻어왔지
싸우고 차지하는 법을 배우고 가르치지
내장을 편하게 하는 법칙들
홀로 슬프고, 홀로 애달픈 몸의 성분들
-이재훈,「밀랍 蜜蠟」(<현대문학>, 2011년 6월호) 부분

위 시에서 자본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고통이 배여있음을 알 수 있다. 정작 시인 자신은“싸우고 차지하는 법을”살아내지 못하면서도 누군가에게 그런 삶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에 서있다. 두 편의 시에서 만져지는 것은 자아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야하는 이의 고독과 원죄의식이다.「결락缺落」에서 “잉태의 소리가 가득해”라는 문장은「밀랍蜜蠟」에서 다시 “그렇다고 너무 억울해 마오/ 이 땅이 당신에게 어머니를 선사했잖소/어머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이오/당신의 피를 받아 마시는 신비의 여인이오/당신이 체험했던 가장 깊고 따뜻한 말”이라는 문장과 연결된다. 그러나 이 두 문장의 의미는 서로 다르다. 「결락缺落」에서의‘잉태’가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다면 ‘어머니’는 한없이 따뜻한 의미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톱니바퀴’의 몸은 시끄러운 소음을 내며 무언가를 잉태하지만 정작 중요한‘어머니’를 잃어버렸다. “당신이 체험했던 가장 깊고 따뜻한 말”인 ‘어머니’에서 시인은 상실한 존재자, 시인 자신을 찾아 방황하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 정치와 노동, 분배의 문제는 언제나 불리하다. 그 어떤 싸움에서도 유리하지 않다. 시인은 “감각의 즐거움”을 찾아다니는 “도시의 산책자”이기에 “정치를 모르고 돈을” 모른다. 그러나 정치와 노동, 분배와 연대에 익숙해져버린 자들과 함께 생존해가야 한다. 몸의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몸이 끈적끈적하게 녹아내리는 곳. 이런 도시의 풍경을 이재훈 시인은“비릿한 고통의 풍경들”이라고 한다.

몸을 만져보면
구멍 난 몸 여기저기서 물컹한 피가 흐르지
아프지않고 따뜻해
추억이라 하기엔 낭만적이지
이미 오래전 언약된 여행
자 이제 갈 때가 되었지
-이재훈,「밀랍蜜蠟」(<현대문학>, 2011년 6월호) 부분

시인의 예언처럼 “이제 갈 때가” 되었다. ‘언젠가는’은 너무 빨리 올 지도 모르겠다. 가까이 있는 이의 얼굴을 몇 번이나 더 보게 될까. 몇 번이나 더 만나 밥과 술을 먹고 남의 험담을 하고 손을 흔들게 될까. 언젠가는 남해끝자락 작은 마을에 가서 살고 싶다가도 이런 생각을 하면 이 도시의 변방에 더 오래 머물고 싶어진다. 당신을 향한 증오와 사랑이 아직 많이 남아있기에.

_ <시와경계>, 2011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

현대시작품상 이달의 추천작 / 이재훈


숭고한 셀러던트


중얼거릴 수 없다
뱀이 온몸을 감고 있어 숨쉬기 힘들다
언제나 위기가 아닌 적은 없었다
고통 이후를 생각하는 시간들
늘 속도에 의지했으며
숨 쉬는 것들을 혐오하며 살았다

검은 바닷가 모래 위
구름은 낡았고 파도는 헤졌다
내 고통을 바라보는 한 사람이
멀리서 날 지켜보고 있다
낯설지만 또 낯익은 순간
오직 한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이 비릿한 고통의 풍경

사람들은 대체로 첨단을 잘 견딘다
그는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던가
울며 흐느끼고 있었던가
새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물비린내도 없이
파도소리만 가난하게 들렸다

칼로 내 가죽을 벗기려 한다
아, 이 극악한 자본의 성실함
생살을 찢어 슬금슬금 도려내야
도덕적으로 아름다운 이 땅과 하늘
밤이 되면 일하러 간다
삼인칭으로만 불리는 인생 공부의 완성을 위해
― <현대시>, 6월호

 


현대시작품상 추천작을 읽고

 

첨단의 위기 속 우리의 자화상

 

김선주

 

 


배고픔의 시기를 거치면 또 다른 세계가 암울한 공간을 비워놓고 삶의 모든 것들을 견뎌내는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 가령 세계가 말하지 않는가?
“무엇을 보고 있니?”
“무엇이 보이니?”
이재훈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마치 맨발로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착취와 억압의 공간에 힘겨운 자존을 투사하고 있다. 이해하는 척 하면서 상대에게 오히려 버거운 도회의 ‘소 공간 점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미래를 잃어버린 세대의 노동현장은 허튼 몇 마디의 말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지난 시간은 되찾으려 하면할수록 스스로의 권리와 자유는 ‘자살’이라는 극단의 처방으로 이어진다. ‘목숨의 방’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인간이 가지는 참 존재는 ‘꿈’의 공간에서 ‘현실’의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어디에 속해 있는지 방향성과 정체성의 혼란은 이재훈의 시 “숭고한 셀러던트”에 그 의지를 담고 있다.
이재훈의 시에서는 ‘개인의 일상’에 침투하여 마침내 그 영혼까지 잠식해 버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정함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각 개인이 자기만의 고유한 색깔과 가치를 발휘하기 어렵다. 개별성이 없는 삶은 획일적이며,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때 프로이트는 노동의 윤리가 지배하는 삶을 ‘현실원칙’에 의해 성립된 삶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억압된 ‘쾌락원칙’의 비극으로 보았다. 자본주의 역사의 상당부분을 노동에 수반된 억압으로 엮고, 모든 문명의 특징이자 인간 충동의 본능적인 ‘쾌락 지향성’에 근원한 필연으로 일반화한 것이다. 또한 노동에 대한 사회적 필요 때문에 사람들은 언제나 ‘문명화된 조절’의 규칙에 복종하도록 강제되어야 한다고 서술했다.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는 한 개인을 발견해보자. 그 인생은 초라하지만 어쩌면 가장 소중한 가치의 실재이다. 어느 날 무심코 바라본 자리에서, 형편없이 시들어버린 한 송이 인생이 ‘우리의 자화상’으로 떠오른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시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숭고한 셀러던트(saladent)”는 결국 샐러리맨이 사회 현실에서 겪는 괴리감을 ‘인생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표현하고 있다.
1연의 시작부터 “중얼거릴 수”도 없고 “숨쉬기 힘들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그만큼 고달프다는 것인데, 이는 ‘뱀’이라는 동물이 평소 자신의 몸을 휘감는 모습에 빗대어 현실로부터의 갑갑함을 호소하는 것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런 힘든 시기를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었고, 힘든 만큼 이런 현실을 더욱 더 못견뎌하는 모습이 세상의 “속도”와 “숨을 쉬는 것들을 혐오하며 살았다”에서 잘 드러난다.
2연에서도 부정적인 단어들이 보인다. “검은 바닷가”로 시각화하여 현실의 사나움과 비정함 등을 잘 살렸고, “낡고 헤졌다”는 시어를 통해 화자의 현재가 비참할 정도로 너덜너덜함을 보여준다. 그런 화자의 고통을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누구인지 명백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3연에서의 “하모니카를 불고, 울며 흐느끼고 있었던가.”라는 시구로 보았을 때 화자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동반자 내지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 혹은 그런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혈연 정도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첨단’이라는 단어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견디”고 있으나 그것은 기꺼이 견디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버티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화자가 이런 현실에 직면하고 있지만, 별다른 해결책 없이 그냥 그 속에서 살고 있음이 느껴진다.
반면 <이방인>에서의 주인공 뫼르소는 오후 4시에 작열하는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 뜨거운 태양을 부조리의 대상으로 간주해 보면, 부정의 타파를 위해서 행해지는 가혹한 행위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지난 과오를 돌이켜보면, 인류의 ‘빛나는 이성’은 서로의 상처에 흠집을 내며 전쟁이란 빅 이벤트를 행함에 있었다. 전쟁의 상흔이란 결국 인간 모두에게 치유 할 수없는 고통을 준다. 세상을 사는 방법론은 인간이 추구하는 내면적 가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이재훈의 시는 시대를 살아가는 샐러리맨의 비애라기보다는 한 인간이 가지는 삶에 대한 극복 과정이다. 자유와 희망을 품은 “새소리는 들리지 않”고 현실 속에 순응하려해도 돌아오는 것은 짙은 ‘허무’와 마음의 “가난”뿐인 것이다.
4연에서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가난”으로 인해 살이 찢어지고 가죽이 벗겨져 나가는 듯 극심한 고통을 시작으로 하는데 이런 현실을 “극악한 자본의 성실함”으로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철저히 자본주의에 의해 돌아가는 사회구조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서민층을 비롯한 화자 등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 이재훈은 생계를 유지시킬 수 있는 상황을 “생살을 찢어 슬금슬금 도려내야 도덕적으로 아름다운”의 구절을 통해 현 사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나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도 아닌 억지로 해야 하는 이 인생의 굴레를 “공부”라고 표현하였고, 그 삶의 주체를 “삼인칭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실에서 버텨나가고 있는 화자 자신 그리고 이 시대를 힘겹게 살고 있는 모든 가장들에게 반어법(irony)을 차용하여 “숭고한 셀러던트”로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셀러던트” 참 슬픈 시어로 다가온다. 치열한 삶속에서 서로 경쟁하고 싸워 이겨야 한다. 샐러리맨으로 성공해야 하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행복은 곧 성공이라는 불가사의한 등식이 성립하고 있는 요즈음 모두 “인생 공부다, 인생 공부다.”라고 외치지만, 그로 인하여 너와 나는 더 이상 가까울 수 없고 늘 거리를 두며 살아가는 “삼인칭”으로 매번 차갑게 만나야 하는 것이다.
결국 시인 이재훈은 ‘달빛이 비치는 숲의 세계’를 그리며 ‘유토피아’로 향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 도피는 아니며, 한바탕 열정을 다해 나름대로 현실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근원적 낭만주의 기질을 토대로, 현실너머 ‘진실의 세계’를 염원하며 그 안에서 진정한 ‘자기세계’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으리라. 그는 지금 이 순간도 현실 ‘저 너머의 미학’을 조용히 꿈꾸고 있을 것이다.

- <현대시>, 2011년 7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

<라이브러리&리브로> 5월호 인터뷰 기사



 

Posted by 이재훈이
,

북극의 진화


이재훈

 
툭, 떨어진다, 얼음이다.
지구는 돌고, 얼음덩어리는 각을 세운 채
조금씩, 때론 한 움큼씩
때론 한 마을과 한 세대가 제 몸을 허문다.
곶과 곶, 섬과 섬, 만과 만, 길과 길이 허물어진다.
지도는 늘 변했다.
그속엔 울음이 있고 해체가 있다.
인간의 눈물이 북쪽을 흔든다.
언젠가 인간의 시계는 멈추겠지만
얼음의 시간은 멈추지 않겠지.
질질흐르고 흘러
땅을 감싸고, 머금고, 토한다.
최초의 물은 멈추지 않고 질퍽대면서
어느새 허벅지까지 올라온다.
솔직히 나는 진화했다.
물이건, 얼음이건 간에
먹고 버리고 회피하면서 몸뚱이를 지켜왔다.
상점에 들어오면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푸르스름한 기억을 소환해
이 도시를 담금질한다.
한 달 새 교차로엔 거대한 빌딩이 들어섰다.
대형 마트와 옷가게가 들어서고 그 위에 사람들이 산다.
지도는 또 바뀔 것이다.
대륙의 한 점이, 또 한 점이 되고,
다시 한 점이 덧입혀져 거대한 점이 될 때까지.
저 멀리 철새는 날아오르고
꽃잎은 몽우리를 틔울 것이다.
내 숨은 어느 산맥을 따라 이동할까.
밤이 되면 지도의 소리는 막힌다.
거칠게 울고 우는 소리만 가득하다.
인간의 소리만 가득하다.
모든 것이 까마득하다.

- 『시와 사상』 2010년 여름호 발표

   

Evolution of the North pole


by Lee, Jae-Hoon

 
The ice drops, suddenly,
The earth revolves, the ice cube builds the angles
little by little, sometimes by the lump
Now and then a village, a generation demolishes its body.
Cape and cape, island and island, gulf and gulf, street and street collapse.
The map has always changed.
There are crying and dismantling in there.
Human tears shake the North.
Human clock will stop someday
but never the time of ice.
Flowing and dragging
it wraps, nurses and vomits the earth.
The earliest sloppy water never stops
suddenly filling up to the thigh.
Honestly, I evolved.
Whether water or ice,
I preserved my body eating, deserting and evading.
Water sounds somewhere in the shop.
And anneals this city
summoning the blueish memories.
In a month a gigantic building appeared at the crossroad.
People live upon the large marts and new boutiques.
The map will change again.
A continental dot will become another dot,
to be a gigantic blot.
Far away the birds migrate flying over
and petals will bud out.
Which mountain range will my breadths move along.
At night the sound of the map is blocked.
Filled with rough weeping and weeping.
Filled with human voices.
All things are so far and far away.

-Quaterly 『Poetry and thought』 2010 summer 

[출처] 시인광장 국내시 英譯 【61】이성렬의 국내시 영역
[31]Evolution of the North pole by Lee, Jae-Hoon(북극의 진화 - 이재훈)


 

번역: 이성렬 시인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및 KAIST를 졸업.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 수여받음. 시집으로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모아드림, 2003)와  『비밀요원』(서정시학, 2007) 가 있음. 현재 경희대학교 교수. 웹진 『시인광장』 부주간.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원의 밤_ 영역  (0) 2015.02.17
육필시_ 웹진 문장 2010년 6월호  (0) 2010.06.09
서태지 세대  (0) 2009.07.07
트릭스터(trickster)  (1) 2008.10.17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0) 2008.07.08
Posted by 이재훈이
,

김춘수가 김수영을 질투한 까닭
이재훈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 출간
기사입력 2011.03.31 17:01:10 | 최종수정 2011.03.31 19:47:50
http://news.mk.co.kr/v3/view.php?year=2011&no=203840 
트위터 미투데이 블로그 스크랩

시인(詩人)은 詩(시)이기도 하고 人(사람)이기도 하다. 시인이자 평론가인 이재훈의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팬덤북스 펴냄)는 시인들의 이 두 가지 면모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2001년부터 2011년까지 모두 35명의 시인을 만나 그들의 시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만난 시인은 김춘수 오규원 박찬 등 이미 세상을 떠난 시인부터 이승훈 정호승 남진우 김소연 강정 김태형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까지 연령별로 다양하다.

"김수영의 `풀` 같은 작품을 보면서 내가 써보고 싶었던 것을 벌써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종의 라이벌 의식, 질투가 생긴 거지요. 나보다 선수를 쳤구나 하는 생각. 그래서 의식적으로 더 내면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고(故) 김춘수 시인은 "내 본래 의식은 역사허무주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1960년대 김수영이 참여의 길을 가게 되었기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그 반대 진영 쪽이라 할 수 있는 내면세계로 더 침잠한 것은 아닌가"라는 저자의 질문에는 "그 말이 옳다"며 수긍한다.

"현실에 부딪히면 현실에 대한 울분 같은 것도 또 있는 것"이지만 김수영이 이미 그런 시들을 썼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더 내면으로 들어오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내 생애에 시인으로서 라이벌 의식을 가진 시인은 그 사람(김수영)뿐"이라고 고백한다.

그런 김춘수 시인은 이승훈 오규원과 더불어 우리 시사(詩史)에서 독창적인 시적 방법론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김춘수의 무의미시와 이승훈의 비대상시, 오규원의 날이미지시는 각각 고유한 방법론을 가진 독특한 시론.

하지만 각 시론의 차이와 특성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어렵기만 하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시인의 시론을 당사자의 육성을 통해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고(故) 오규원 시인은 김춘수의 무의미시론과 비교하며 자신의 날이미지시론을 설명한다.

"무의미시는 `무의미를 지향`하고, 날이미지시는 `의미를 지향`하는 시입니다. (무의미시에서는) 시의 내용이 무의미하니까 시인은 시의 형태에서 그 아름다움을 찾습니다. (반면) 날이미지시는 사변화되거나 개념화되기 이전의 의미, 즉 관념화되기 이전의 의미를 존재의 현상에서 찾아내 이미지화하는 시입니다."

대담을 진행한 저자가 시인이라는 점은 독자들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시와 시인의 관계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그는 꼭 물어야 할 것을 묻고, 꼭 들어야 할 것을 들었다. 그 덕분에 독자들은 시인들의 일상부터 유년 시절, 시인의 시 세계까지 폭넓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승훈 시인은 자아 탐구, 모더니즘과 해체 그리고 선(禪)에 이르기까지의 삶과 문학 여정을 밝히고, 유안진 시인은 시를 쓸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든 유년 시절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고교 문사에서 문학청년 시절을 거쳐 등단하기까지의 과정을 풀어놓는 정호승 시인과 쇳물은 물도 불도 아니라는 연금술적 상상력을 보이는 노동자 시인 최종천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 밖에 30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로 찬사를 받은 허만하 시인, 독특한 자유주의자의 길을 걷고 있는 김정환 시인, 시인이자 명기타리스트로 문학적 순교를 꿈꾸는 원구식 시인, 사과나무 아래로 귀환한 오르페우스의 꿈을 꾸는 남진우 시인, 사물보다는 사물과 사물 사이 어떤 한 세계보다는 세계와 세계 사이에 자꾸 시선이 간다는 김소연 시인 등 그들이 밝히는 독특한 사유와 시론을 만나보는 것도 흥미롭고 의미 있다.

또한 1992년 `현대시세계`로 같이 등단해 우리 시의 확장성을 선보이는 동년배 시인 강정과 김태형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시는 시인에게서 나오고, 시인은 시로 세상을 산다. 그래서 시인의 머리와 가슴을 직접 열어보이는 이 책을 읽다보면 어렵게만 느껴졌던 시가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자리 잡고 앉는다.

[정아영 기자]

Posted by 이재훈이
,
문화
나는 시인이다 / 이재훈
시인에게 시란?
김상훈 기자 icon다른기사보기
배너
나는 시인이다 / 이재훈
김춘수(1922~2004) 시인은 "김수영(1921~1968) 시인이 평생의 라이벌이었다"고 했다. 그는 실제 김수영과 만난 적은 없었다. 서울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김수영 집으로 전화를 했던 김춘수. 김수영은 당시 집에 있었지만 만취해서 전화를 도저히 받을 수 없었다. 두 라이벌의 만남은 그렇게 미완으로 끝났다.

김춘수는 왜 김수영을 라이벌로 생각했을까.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몸소 겪어야 했던 김춘수는 이데올로기, 사상, 역사에 대한 회의감을 많이 느꼈다. 그것은 그가 평생 역사허무주의자란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이유였다. 물론 현실에 대한 울분으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란 시를 쓰기도 했지만 그의 본래 의식은 역사허무주의였다.


고 김춘수·허만하 등 35명 대담
'시론·개인사' 생생한 육성 담아

김춘수 시인은 라이벌로 여겼던 김수영 시인(오른쪽 작은 사진)이 참여 시인의 길을 걷자 내면세계를 더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부산일보DB

역사와 현실의 문제에 등을 돌렸던 김춘수는 1968년 김수영의 '풀'을 보게 됐다. '풀'은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풀에 빗대어 쓴 시로 김수영을 대표적인 참여 시인으로 만든 작품. 김춘수는 '풀'을 보며 '내가 써보고 싶었던 것을 벌써 썼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라이벌 의식과 질투심을 느꼈다. '나보다 선수를 쳤구나' 하는 생각에 김춘수는 더 의식적으로 내면세계에 침잠하게 됐다. 김수영은 '풀'을 쓰고 나서 보름 만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짧지만 강렬한 삶을 살았던 김수영은 김춘수의 작품 세계에 가장 큰 자극을 줬다.

1999년 허만하 시인이 30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를 들고 문단에 다시 나왔을 때 한국 시단은 경탄의 눈빛을 보냈다. "어설픈 사고와 감상의 대중적 푸닥거리와 쉬운 위안이 유행하는 시대에 이만큼 깊이 생각하고 끈질기게 생각하는 시인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김우창)" "지난 천 년의 막바지에 마치 스톤헨지의 유적처럼 발굴되었다(정과리)" 등 호평이 이어졌다.

부산 고신대 의대교수를 지내며 병리학자와 시인의 길을 걸어온 허만하 시인. 그는 두 가지 길을 어떻게 조화롭게 이끌어왔을까. 그는 "내가 시를 지켜주기도 했지만, 시 또한 나를 지켜 주었다"고 했다. 그는 생활인과 예술인의 길이 공존했던 30년 간 삶의 궤적을 데리다의 말로 압축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독립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의지해서 존재하는 상관적 존재'라는 사실!

유안진 시인은 대학 2학년 때 시작 노트를 들고 박목월 시인을 찾았다. 그는 박 시인과 설렁탕 집에서 점심 식사를 하게 됐다, 소금 그릇이 박 시인 그릇 옆에 있자 유 시인은 그것을 가져올 용기가 없어 설렁탕을 맹탕으로 먹었단다. 그 과정을 알고 있었던 박 시인은 그 일을 훗날 수필로 썼다. 유 시인에 대해 '저렇게 숙맥인 걸 보니까 시는 제대로 쓰겠구나'라는 평가를 남겼다. 그 뒤 유안진 시인은 박목월 시인이 '현대문학'에 추천한 10명 안팎의 시인에 드는 영예를 누렸다.

'나는 시인이다'는 월간 '현대시' 부주간인 저자가 2001년부터 10년간 시인들과 나눈 이야기를 묶은 대담집이다. 저자는 이미 작고한 김춘수, 오규원, 박찬 시인을 포함해 허만하, 서규정, 배한봉, 성선경과 같은 부산·경남지역 시인 등 35명을 인터뷰했다. '현대시', '유심' '열린시학' 등 문학잡지에 실렸던 원고들을 모았다. 시인들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시와 시론, 내밀한 개인사를 접하고 나니 그들의 시들이 새롭게 보인다. 이재훈 지음/팬덤북스/570쪽/1만8천 원.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newsId=20110401000193
Posted by 이재훈이
,

Posted by 이재훈이
,


나는 시인이다


우리시대 시인 서른다섯 명의 내밀한 고백

 

           지은이  이재훈

              판  형  140*210/ 무선

              발행일  2011년 4월 15일

              페이지 576페이지

              분  야  문학 > 비소설

              ISBN  978-89-94792-14-9  13810

              가  격  18,000원

 

 

서른다섯 명의 시인이 고백하는 육성은 그들의 시를 더욱 풍성하고 적확하게 읽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저자의 말대로 시인은 특별하다. ‘이율배반적인 인간형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며 어느새 시인의 머릿속으로, 가슴속으로 들어가는 행복한 경험을 할 것이다.

시인은 시 안으로 숨는다. 비의(秘義)다.
그 비의를 읽기 위해 시인과 시인의 대화를 엿듣는다.
다시 시(詩)의 시대는 오는가?

어떻게 쓸 것인가? 시인의 고민이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 독자의 고민이다. ‘어떻게’라는 화두는 같지만, 시인은 쓰고, 독자는 읽는다. 최근의 시들은 그 시인과 독자 사이가 너무 멀게 느껴지게 한다.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우주적 깊이라고 할 만하다.
1980년대를 문단에서는 시의 시대라 했다. 1990년대 소설의 시대를 거쳐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한때 문학의 위기, 시의 죽음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다. 참여와 비참여를 떠난 지점에서 무의미시, 비대상시, 날이미지시, 해체시 등의 방법론적 분류가 난립했다. 그러다 느닷없이(과연?) 미래파가 등장했다. 미래파는 창작론적으로, 의미론적으로, 정서적으로 새로웠다. 문단은 새로워하면서도 내심 당황했다. 내부로의 침잠, 암호화된 정서, 독특한 상상력, 극단으로 치닫는 표현과 형식, 낯선 은유 등은 새롭지만 해독이 어렵다는 독자들의 불평을 들어야 했다. 미래파라는 용어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아직도 유효한 가운데, 문제는 시 독자들의 수가 반토막되었다는 상황은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 책임이 소위 미래파라 불리는 시인들에게 있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미래파에 맞서 극서정시를 주창하며 최근 조정권, 이하석, 최동호 시인들이 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결과는 두고 볼 일이다. 시인도, 독자도 서로의 공통분모를 찾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 중이라 해야겠다.
와중에 문학 전문 출판사들은 새로운 시집 출간에 열을 올린다. 문학동네 출판사는 획기적인 판형의 시집을 선보였고, 잠시 주춤하던 민음사와 문예중앙 등의 출판사 들도 새로운 기획을 펼치고 있다. 시 전문 문예지들도 의욕적이다. 다시 시의 시대가 올 것인가?
마침 의미 있는 책이 하나 나왔다. 월간《현대시》부주간인 이재훈 시인이 다른 시인들과 만나 나눈 이야기를 묶어 대담집을 펴냈다. 대담은 멀리 2001년부터 올해 봄에 걸쳐 이루어졌다. <현대시>, <유심>, <열린시학> 등에 실렸던 원고를 모았다. 이미 작고한 김춘수, 오규원, 박찬 시인을 포함한 서른다섯 명이다. 시인들이 직접 말하는 자신의 시와 시론(詩論), 그리고 내밀한 개인사를 읽고 나면 새삼 시들이 다시 읽힌다.
시인 인터뷰는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 인터뷰 대상에 대해 상당히 많은 준비를 요한다. 최대한 그 시인의 시를 읽어야 하고, 그에 대한 평론도 꼼꼼히 찾아야 한다. 이전의 인터뷰도 챙긴 후에 적절한 질문을 만들어야 한다. 모르면 시인의 답변에 대응을 못해 대담이 산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이 책의 장점은 인터뷰어인 이재훈 시인이 꼼꼼한 시/시인 읽기를 통해 유효적절한 질문을 던진다는 것에 있다. 시인의 일상으로 들어가 마음을 열기도 하고, 유년 또는 문청 시절에 겪은 여러 경험들을 통해 시인의 시관, 시 세계를 엿보기도 한다. 그러다 시인의 시에 대해 전격적으로 공격한다. 질문하는 시인과 답변하는 시인 사이에 긴장이 흐르는 순간이다. 아마도 독자는 그 긴장이 즐거우리라.
서른다섯 명의 시인이 고백하는 육성은 그들의 시를 더욱 풍성하고 적확하게 읽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저자의 말대로 시인은 특별하다. ‘이율배반적인 인간형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며 어느새 시인의 머릿속으로, 가슴속으로 들어가는 행복한 경험을 할 것이다.

월간《현대시》부주간인 이재훈 시인이 다른 시인들과 만나 나눈 이야기를 묶어 대담집을 펴냈다. 이미 작고한 김춘수, 오규원, 박찬 시인을 포함한 서른다섯 명이다. 시인들이 직접 말하는 자신의 시와 시론(詩論), 그리고 내밀한 개인사를 읽고 나면 새삼 시들이 다시 읽힌다.

평소 다방식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 고 김춘수 시인이 평생의 라이벌로 여긴 시인은 김수영뿐이었다. 역사허무주의자였지만 현실에 대한 울분 같은 것도 가지고 있던 시인은 ‘김수영의〈풀〉같은 작품을 보면서 내가 써보고 싶었던 것을 벌써 썼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일종의 라이벌 의식, 질투’를 느꼈고, ‘그래서 의식적으로 더 내면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시인이 역사허무주의자가 된 일본에서의 경험과 후배 시인들에게 주문하는 ‘큰 시인’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30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시집《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로 ‘지난 천 년의 막바지에 마치 스톤헨지의 유적처럼 발굴되었다(정과리)’는 찬사를 받은 허만하 시인. 그가 밝히는 독특한 사유와 시론은 30년간 묵묵히 시인의 길을 걸어온 내공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나는 끝까지 시인입니다”라는 그의 말에서 이 대담집의 제목《나는 시인이다》가 나왔다.

이승훈 시인은 자아 탐구, 모더니즘과 해체, 그리고 선(禪)에 이르기까지의 삶과 문학 여정을 밝힌다. 시인은 ‘삶과 시의 경계뿐만 아니라 시와 비시의 경계도 깨야’ 한다고 말한다. 시인은 이제 ‘삶에서도 시에서도 한결 자유’를 느낄 경지의 깨달음에 이르렀다.

고 오규원 시인은 김춘수의 무의미시론과 자신의 날이미지시론을 서로 비교하며 설명하여 독자의 눈을 밝게 만든다. 그에 의하면 무의미시는 ‘심리적, 주관적 묘사의 세계’이다. 반면 날이미지시는 ‘관념화되기 이전의 의미’여서 ‘존재의 현상을 날것 그대로’ 묘사한다. 사실적, 발견적, 직관적 세 가지로 구분하는 날이미지는 시인 자신의 시를 빌려 설명해 이해를 돕는다.

시를 쓸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든 유년 시절과 목월의 제자가 된 사연을 들려주는 유안진 시인. 고교 문사에서 문학청년 시절을 거쳐 등단하기까지의 이야기와 그만의 세계관, 인간에 대한 애정을 말하는 정호승 시인. 쇳물은 물도 불도 아니라는 연금술적 상상력을 보이는 노동자 시인 최종천. 서른다섯 명의 시인이 고백하는 육성은 그들의 시를 더욱 풍성하고 적확하게 읽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한편 1992년《현대시세계》로 같이 등단하여 우리 시의 확장성을 선보이는 동년배 시인 강정과 김태형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저자의 말대로 시인은 특별하다. 특별한 시인도 역시 한 사람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독자는 시인의 머릿속으로, 가슴속으로 들어가는 행복한 경험을 할 것이다.



이 책의 구성은…….


* 내 생애에 시인으로서 라이벌 의식을 가진 시인은 김수영뿐입니다. - 김춘수

* 나는 끝까지 시인입니다.  - 허만하

* 자아 탐구에서 자아가 없다는 인식에 도달하기까지 30년이 걸린 셈입니다. - 이승훈

* 시인은 모국어의 창조자이니까 시어까지도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 유안진

* 날이미지시는 관념화되기 이전의 의미를 존재의 현상에서 찾아내어 이미지화하는 시입니다.       - 오규원

* 시의 본질이라는 게 서정의 물기 같은 게 아닐까요. - 정호승

* 나이가 드니까 시를 투명하게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 한영옥

* 살아 숨 쉬는 정신주의는 육체성이 깃들어야 합니다. - 최동호

* 주변 장르로 전락한 시의 화려한 부활 혹은 변모를 꿈꿔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어요. - 원구식

* 자연이든 사회든, 서정시든 서사시든 본질적인 것은 인간이고, 인간의 관계고, 인간의 태도입      니다. - 김정환

* 시의 죽음이야말로 새로운 시의 탄생을 가능케 하는 최고의 질료. - 남진우

* 두 번째 은유, 곧 은유를 은유한 언어가 시가 되는 것이지요. - 이사라

* 굳이 저의 이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휴머니즘밖에 없다고 말할 겁      니다. - 박찬

* 존재론적 성찰을 통해 내 안의 적들과 싸우는 관계가 성립되는 거죠. - 이재무

* 시인은 일종의 물(物)에 최면을 거는 샤먼. - 김명리

* 저는 시를 절대로 작위적으로 쓰지 않습니다. ……즉발적으로 나올 때 씁니다. - 서지월

* 쇳물은 물도 아니고 불도 아닙니다. 물인 동시에 불이고, 불인 동시에 물입니다. - 최종천

*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폐해지고 황폐해진 내 삶을 다시 구원해 준 건 시였습니다.

  - 이진영

* 저는 의도하지 않음을 통해서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고진하

* 저의 언어가 가장 반발하는 것은 의미 과잉 내지는 주도의 언어이지요. - 손진은

*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바로 물속이고 아틀란티스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 성선경

* 상징이니 은유니 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백병전으로 몸과 싸워 보고자 했습니다. - 서규정

* 내 시의 말들이 통각의 말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장대송

* 내가 꿈꾸는 나의 궁극은 내가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날이죠. - 허연

* 저는 되레 더 큰 배반과 더 예리한 당착을 추구합니다. - 강정

* 이제는 이미지들이 안으로 집중되면서 소용돌이치는 상징의 힘에 제 몸을 맡기는 쪽입니다.       - 김태형

* 저는 밝고, 화려하고, 강한 것보다는 어둡고, 쓸쓸하고, 약한 것들에 천성적으로 마음이 가닿      는 쪽이거든요. - 김선태

 * 사물보다는 사물과 사물 사이, 어떤 한 세계보다는 세계와 세계 사이, 그곳에 자꾸 시선이       갑니다. - 김소연

* 한 편의 시가 교란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존재할 수 있나요. - 이수명

* 결국 일상이 만들어 내는 파장에 제 귀는 쏠려 있습니다. - 유종인

* 저는 기본적으로 ‘시란 내 사고가 만들어 내는 상품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 김영남

* 경험 과학이나 실증 과학의 언어로 말할 수 없으니까 상징적 언어(시적 언어)로 말하는 거 아      닌가요? - 김점용

* 방법론이지만 전 영화를 만들 듯이 시를 씁니다. - 배용제

* 시인은 창조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애정이 각별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 배한봉

* 의미를 사유하는 문장보다는 이미지를 사유하는 문장이 더 구체적 언어에 가깝지 않을까요.       - 여정


저자의 말


시인들은 특별한 인간들이다. 한없이 천진난만하다가도 독선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 있고, 무(無)와 유(有), 욕망과 버림의 사이에서 늘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면서도, 누구보다 자기 세계가 확고하다. 하지만 안주하는 법은 없다. 남들이 가지 않았던 또 다른 세계를 넘보려 기를 쓰는 족속들이다. 질서보다 혼돈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고요한 침묵을 즐길 줄 안다. 자본 문명의 시대에 가장 이율배반적인 인간형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대담이란 핑계로 시인들과 나눈 말과 시간들. 내 문학적 청춘의 가장 잊지 못할 추억거리로 남았다. 대담을 진행하면서 아주 즐거웠다. 내가 만난 시인들은 문청 시절 내 문학 공부의 텍스트가 되었던 장본인들이었다. 그들의 시를 읽고 평하면서 문학 수련의 담금질을 했던 내가 그들과 직접 만나 육성을 듣는다는 것은 대단히 흥분되는 일이었다.”


본문 내용


<김춘수 시인>

이재훈 : 60년대 김수영이 참여의 길을 가게 되었기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그 반대 진영 쪽이라 할 수 있는 내면세계로 더 침잠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김춘수 : 그 말이 옳기는 옳은 말입니다. 저는 아까 말했다시피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상과 역사라는 것에 대한 회의가 생겼습니다. 지금도 이 역사허무주의자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 부딪히면 현실에 대한 울분 같은 것도 또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같은 시도 썼지만, 내 본래 의식은 역사허무주의였습니다. 역사나 현실의 문제에 대해 등을 돌리고 있었지요. 그때 김수영의 〈풀〉 같은 작품을 보면서 내가 써보고 싶었던 것을 벌써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종의 라이벌 의식, 질투가 생긴 거지요. 나보다 선수를 쳤구나, 하는 생각. 그래서 의식적으로 더 내면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재훈 : 선생님은 김수영을 가장 큰 라이벌로 생각하셨나요?

김춘수 : 했지. 그때뿐만 아니라 내 생애에 시인으로서 라이벌 의식을 가진 시인은 그 사람뿐입니다. 미당 같은 시인도 있었지만, 나와는 시적 세계관이 너무 다르니까 그런 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었지요.


<이승훈 시인>

김춘수의 무의미시론은 관념의 제거를 노리는, 이른바 묘사적 이미지에서 자유연상, 통사 해체로 발전합니다. 오규원의 날이미지시론은 말 그대로 관념의 흔적이 없는 날이미지를 추구하고, 그런 점에서 김춘수의 묘사적 이미지를 발전적으로 계승합니다. 내가 주장한 비대상시론은 김춘수의 자유연상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지만, 나는 자유연상보다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의 논리, 곧 억압된 무의식의 투사를 강조했습니다. 김춘수가 대상의 재구성, 대상과 이미지의 거리를 강조하고, 이때 대상의 의미, 곧 지시적 의미의 소멸을 강조한다면, 오규원 역시 이런 재구성, 곧 대상의 날이미지를 계속 추구하고, 나는 이런 대상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요컨대 김춘수, 오규원은 대상을 전제로 무의미, 날이미지를 추구하지만, 난 출발부터 그런 대상이 없고, 따라서 나의 내면, 무의식이 문제였습니다. 시의 경우엔 김춘수는 이상과 정지용 사이에 있고, 오규원은 이상과 김수영 또는 김수영과 김춘수 사이에 있고, 나는 이상과 김춘수 사이에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

시는 본질적으로 은유에요. 은유가 없는 진술은 공허할 수밖에 없고요. 시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은유의 품 안에서 진술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어떤 진술적 시라도 하나의 은유성을 띠고 있는 거죠.



지은이 


이재훈

1972년 강원 영월 출생.

1998년 《현대시》로 등단하여 시를 쓰기 시작했다.

국문학과 문예창작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현대시》 부주간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지은 책으로 《현대시와 허무의식》, 《딜레마의 시학》이 있다.


ipoet@hanmail.net

http://ipoet.tistory.com 

http://twitter.com/hoonyletter



차례 


의미와 무의미의 변증법을 찾아서 _ 김춘수

풍경과 실존과 시인 _ 허만하

비대상에서 선(禪)까지 _ 이승훈

‘봄비 한 주머니’ 들고 온 세상의 누이 _ 유안진

날이미지시와 무의미시 그리고 예술 _ 오규원

슬픔과 사랑이 자아내는 서정의 원리 _ 정호승

적극적 마술로 잉태한 마음사람 _ 한영옥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에 대한 명상 _ 최동호

시인, 名기타리스트 그리고 순교자 _ 원구식

황색예수 이후, 또 다른 서시(序詩)를 찾아서 _ 김정환

사과나무 아래로 귀환한 오르페우스의 꿈 _ 남진우

‘미학적 슬픔’의 참된 모습과 조우하며 _ 이사라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의 미학 _ 박찬

몸에 피는 추억, 그 보폭을 따라서 _ 이재무

고통과 즐거움이 상생하는 귓속말 _ 김명리

햇살 나리는 산모롱이에 핀 서정의 꽃 _ 서지월

수렵의 시인에서 관능의 시인까지 _ 이진영

문화에서 건져 올린 한 노동자 시인의 인간학 _ 최종천

우화등선을 꿈꾸는 호랑나비돛배를 타고 _ 고진하

숲을 설레게 하는 두 힘을 생각하며 _ 손진은

물속에서 비상하는 고래에 대하여 _ 성선경

상채기 많은 진눈깨비의 아름다움 _ 서규정

검은빛 기억을 날아다니는 새 _ 장대송

일찍이 허무를 알아 버린 푸른 낭만주의자 _ 허연

처형극장에서 세상을 보다 _ 강정

메탈 지프를 타고 노란 잠수함으로 가라앉기 _ 김태형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성찰 _ 김선태

세상의 변죽들에게 바치는 매혹의 언어 _ 김소연

투명한 착란과 자유로운 공황의 미학 _ 이수명

‘미친 누이’에게 보내는 아득하고 근사한 기다림 _ 유종인

오브제 올라타기, 혹은 감싸 안기 _ 김영남

벗겨지지 않는 시의 ‘빤쭈’ 벗기기 _ 김점용

이 달콤한 감각의 세계에서 _ 배용제

신령스런 은자의 맑고 투명한 저 힘 _ 배한봉

지금도 21C 콜로세움에서 꿈틀대는 벌레 11호 _ 여정

Posted by 이재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