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릭스터(trickster)

시詩 2008. 10. 17. 11:25


트릭스터(trickster)


이재훈


1.

배에 올랐지. 차가운 나라, 먼 끝을 향하는 배. 내릴 수가 없었지. 어리석고 오만한 사람들이 가득한 배. 자신은 소명을 가진 자라고 착각하며. 선구자라고 착각하며. 탐욕스럽게, 모자와 단추에 보석을 주렁주렁 매단 사람들. 침묵이 두려운 사람들. 가장 조용하고 작은 사내를 미워했지. 그의 다리를 붙잡고 머리부터 바다 속으로 처넣었지.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교수들이 그 광경을 기록했지. 선구자가 치르는 희생의 영광에 대해. 사람들은 모두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내의 눈빛을 기억하지. 꿈에서 나타나는 그 눈빛을 애써 외면하지. 철학자들은 꿈과 망상의 상관관계에 대해 기록했지. 아, 모두 먼 기억의 일들이었지.

2.

어떤 시인은 자신이 천재라 생각하지. 나는 바보여서 그걸 믿고야 말았지. 어떤 시인은 자신이 순교자라 생각하지. 나는 바보여서 그걸 믿고야 말았지. 나는 부정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인간의 지위와 권력을. 넓은 정원에서 잔치를 벌이는 주인들을 나는 존경했어야 했는데. 그들의 규칙을 탐닉해야 했는데. 화려한 네온사인 속으로 들어가 영혼을 의지했지. 땅바닥에서 가만가만 숨죽인 노란 피부의 족속들을 경멸했지. 하늘에서 보면, 사람들의 정수리는 텅 비어있지. 아, 자존도 없이 교활한 날들이었지.

3.

배가 고파 사치를 하고, 호색한이 되었지. 배에서 내려 밟은 이 땅엔 불이 있어. 토끼가 인디언에게 가져다준 불이 있어. 불로 심판하고, 불로 배를 불렸지. 사랑하는 자에게 불화살을 쏘는 인간들을 동정했어. 단지, 죽지 않기 위해 좀 더 다른 얼굴로 성형을 했지. 나는 아첨꾼이자 장난꾼일 뿐. 대지 같은 사람을 찾아 헤맸지. 이 땅엔 용(龍)도 없고, 심지어 악령도 없는 리얼리티의 숲. 산토끼가 되어 빌딩 사이를 배회하지. 말과 말 사이를 가로채, 새로운 말을 만들어 소문을 내지.


_ 거대한 뿌리여, 괴기한 청년들이여 : 김수영 40주기 기념 시집(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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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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