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막

시詩 2008. 4. 3. 12:09

이재훈


달빛을 받은 낙타의 그림자.
목이 축 늘어져 있다.
움직일 때마다 목젖이 패였다가 튀어나온다.
그 느린 몸짓이 아름다웠다.
내 연혁은 사막으로부터 시작한다.
기약도 없는 시간의 끝을 향해 걷는다.
바람 이는 모래밭에 귀를 가져다 대면
작은 돌들이 구르는 소리 들린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도록 귀를 짓이겼다.
돌 구르는 소리가 바람처럼 인다.
떼구루루 떼구루루,
바람이 불고 돌이 구른다.
까닭 없는 시간들이 있다.
터벅터벅 오아시스로 향했다.
몇 년이 걸렸을까.
물속에 축 쳐진 낙타의 그림자가 잠겨 있다.
내 生은 늘 저런 식이었다.
늘어질대로 늘어진 생각들.
결국 물맛을 보고 싶어 슬쩍 물속으로
몸을 담가보는 행위들.
사막의 돌은 스스로 열심히 굴렀다.
너무 작아 모래와 구별이 되지 않을 뿐이다.
돌은 의미있는 삶을 살았지만
오아시스가 죽음의 집인 줄은 몰랐다.
물속에다 제 몸을 허물었다.
모래로 지은 그의 집은 찰진 흙의 온기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으로 그는 목숨을 다해도 좋았다.
돌은 신비한 힘을 가졌다.
뭉개진 몸으로 구르는 소리를 낸다.
아주 먼 시간을 넘어 온
이방인의 귀에게까지도 들릴 만큼.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돌들이 서로 뒤엉켜
거대한 기둥을 이루었다.
투명한 돌의 몸이 하얗게 빛났다.
아득한 비명이 들리기도 했다.

_ <시향>, 200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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