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에 해당되는 글 50건

  1. 2015.02.17 평원의 밤_ 영역
  2. 2011.04.15 <북극의 진화>(Evolution of the North pole by Lee, Jae-Hoon) 영역시
  3. 2010.06.09 육필시_ 웹진 문장 2010년 6월호
  4. 2009.07.07 서태지 세대
  5. 2008.10.17 트릭스터(trickster) 1
  6. 2008.07.08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7. 2008.04.03 백사막
  8. 2008.03.23 카프카 독서실
  9. 2008.03.23 붉은 주단의 여관
  10. 2008.03.06 남자의 일생 1
  11. 2008.02.27 봉숭아
  12. 2008.02.23 가시연꽃
  13. 2008.02.18 비상
  14. 2008.02.18 당나귀
  15. 2008.02.14 만신전(萬神殿)
  16. 2008.02.13 할례의 연대기
  17. 2008.02.03 만(灣)
  18. 2008.01.31 올랭피아
  19. 2008.01.30 진흙의 봉인
  20. 2008.01.28 난장
  21. 2008.01.24 사이코 패스
  22. 2008.01.21 귀신과 도둑
  23. 2008.01.17 카프카 독서실
  24. 2008.01.11 흠향(歆饗)
  25. 2007.12.18 매일 출근하는 폐인
  26. 2007.11.15 병든 미아
  27. 2007.11.12 명왕성 되다(plutoed) 2
  28. 2007.10.22 킬리만자로
  29. 2007.10.08 동경(銅鏡)
  30. 2007.09.16 헌책

평원의 밤_ 영역

시詩 2015. 2. 17. 10:52

Plain’s Night


Lee Jaehoon

번역 홍은택



It’s become desolate. I’ve become detached from others, and unconcerned for their deaths. I’ve become detached from all emotions. I’ve become indifferent to the disciplines taught by those who teach. It’s simply because of vertigo. It’s dizzying when I drop by head and lift it back up. It spins and throbs. It spins whether I sit or lie down. It’s because of excessive drinking. It’s because of a migraine. I attempted to burn the weeds in my body. I considered that dying a glorious death is the only beauty. I thought leaving without a handshake to be considerate. A world without sadness doesn’t exist. I wanted to be a beautifully sad animal. I’ll dance with an abundant heart. What I can show is a whiff of a scent set in my clothes. It’s a sad night because I can’t say that I love. When thunder dwarfs the sound of music. When the midnight moonlight wets the hair. I’ll lie my body down on that universe and cover myself with the stars. Without any language I will be immersed in the abyss. I will sit on the plain and realize the wind’s heart.





평원의 밤


이재훈




막막해졌네. 타인에게 무심해지고, 타인의 죽음에 무심해졌네. 모든 감정에 무심해졌네. 가르치는 자들이 내놓는 규율에 무심해졌네. 단순히 어지러움 때문이네. 고개를 숙이다 고개를 들면 어지럽네. 빙빙 돌고 울렁거리네. 앉아도 누워도 빙빙 도네. 과음 때문이네. 두통 때문이네. 내 몸에 잡초들을 태우려했네. 산화하는 것만이 아름다운 거라 여겼네. 악수도 청하지 않고 떠나는 게 배려라 생각했네. 슬픔이 없는 세계는 없지. 나는 아름답게 슬픈 동물이고 싶었네. 충만한 마음으로 춤을 출 것이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내 옷자락에 배였던 냄새 한 다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 슬픈 밤이네. 천둥이 음악소리를 덮을 무렵. 자정의 달빛이 머리칼을 적실 무렵. 저 우주에 몸을 눕히고 별들을 덮을 것이네. 아무 언어도 없이 심연에 잠길 것이네. 평원에 앉아 바람의 마음을 얻을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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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의 진화


이재훈

 
툭, 떨어진다, 얼음이다.
지구는 돌고, 얼음덩어리는 각을 세운 채
조금씩, 때론 한 움큼씩
때론 한 마을과 한 세대가 제 몸을 허문다.
곶과 곶, 섬과 섬, 만과 만, 길과 길이 허물어진다.
지도는 늘 변했다.
그속엔 울음이 있고 해체가 있다.
인간의 눈물이 북쪽을 흔든다.
언젠가 인간의 시계는 멈추겠지만
얼음의 시간은 멈추지 않겠지.
질질흐르고 흘러
땅을 감싸고, 머금고, 토한다.
최초의 물은 멈추지 않고 질퍽대면서
어느새 허벅지까지 올라온다.
솔직히 나는 진화했다.
물이건, 얼음이건 간에
먹고 버리고 회피하면서 몸뚱이를 지켜왔다.
상점에 들어오면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푸르스름한 기억을 소환해
이 도시를 담금질한다.
한 달 새 교차로엔 거대한 빌딩이 들어섰다.
대형 마트와 옷가게가 들어서고 그 위에 사람들이 산다.
지도는 또 바뀔 것이다.
대륙의 한 점이, 또 한 점이 되고,
다시 한 점이 덧입혀져 거대한 점이 될 때까지.
저 멀리 철새는 날아오르고
꽃잎은 몽우리를 틔울 것이다.
내 숨은 어느 산맥을 따라 이동할까.
밤이 되면 지도의 소리는 막힌다.
거칠게 울고 우는 소리만 가득하다.
인간의 소리만 가득하다.
모든 것이 까마득하다.

- 『시와 사상』 2010년 여름호 발표

   

Evolution of the North pole


by Lee, Jae-Hoon

 
The ice drops, suddenly,
The earth revolves, the ice cube builds the angles
little by little, sometimes by the lump
Now and then a village, a generation demolishes its body.
Cape and cape, island and island, gulf and gulf, street and street collapse.
The map has always changed.
There are crying and dismantling in there.
Human tears shake the North.
Human clock will stop someday
but never the time of ice.
Flowing and dragging
it wraps, nurses and vomits the earth.
The earliest sloppy water never stops
suddenly filling up to the thigh.
Honestly, I evolved.
Whether water or ice,
I preserved my body eating, deserting and evading.
Water sounds somewhere in the shop.
And anneals this city
summoning the blueish memories.
In a month a gigantic building appeared at the crossroad.
People live upon the large marts and new boutiques.
The map will change again.
A continental dot will become another dot,
to be a gigantic blot.
Far away the birds migrate flying over
and petals will bud out.
Which mountain range will my breadths move along.
At night the sound of the map is blocked.
Filled with rough weeping and weeping.
Filled with human voices.
All things are so far and far away.

-Quaterly 『Poetry and thought』 2010 summer 

[출처] 시인광장 국내시 英譯 【61】이성렬의 국내시 영역
[31]Evolution of the North pole by Lee, Jae-Hoon(북극의 진화 - 이재훈)


 

번역: 이성렬 시인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및 KAIST를 졸업.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 수여받음. 시집으로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모아드림, 2003)와  『비밀요원』(서정시학, 2007) 가 있음. 현재 경희대학교 교수. 웹진 『시인광장』 부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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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웹진 문장 2010년 6월호 http://www.munjang.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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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세대

시詩 2009. 7. 7. 13:56


서태지 세대

이재훈



아름다운 골목은 없다.
돌고 도는 것이 골목이며
참고 참는 것이 사랑이다.
첫 사랑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때까지
본드를 마시고, 부탄가스를 불었다.
정작 중요한 말이라고 세상에 떠도는 건
모호한 개념 정의들뿐.
됐어 됐어 이젠 그런 가르침은 됐어.*
유치하다 생각한 노래를 목청껏 불렀지만
우리에게 밤문화를 가르쳐준 선생님과
몇 푼의 참고서 값으로 위안을 삼는다.
대학도 회사도 모두 판매왕을 모집하여
고시원과 학원을 전전하였던 아름다운 시절.
희망도 아니고, 욕망도, 진리도 아닌
어수룩한 정당성으로 가득한 신자유주의.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
그리고 나는 불편하다는 것.
정의와 진실이 정치적이라는 걸
한순간 깨달았을 때.
잔혹한 눈망울을 낼 수 없는 나는
숭고한 공간을 꿈꾸었던 나는
이 시대를 매일 버린다.
머릿속 꿈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한 것도 결국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이십일 세기 문명에 무릎을 꿇는다.
내 손으로 만든 옷과 신발과 종이가
하나도 없는 무능한 세대.
조금 일찍 태어났더라면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고
울분으로 노래를 부르고
세상에 욕을 하고
그것으로 명예를 얻고 정치를 하고 돈을 벌고
후배들에게 내 아픔의 젊은 날을 얘기할 텐데.
체게바라의 페데로사를 끌고
동해와 남해를 거쳐 서해의 어귀에서
술을 마시고 낯선 여자를 만나고
모래밭에서 잠드는 낭만놀이를 했을 텐데.
손잡고 싶은 사람 하나 없어
집으로 향하지만
오늘도 우편함엔 밀린 고지서와
광고 전단지만 가득하다.

* 서태지, <교실이데아>

------------------------------

시작메모

나는 서태지와 동갑이다. 그러니까 좀 묵은 서태지 세대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서태지의 모든 노래들을 부르고 다녔다. 고등학교 중퇴, 남들이 가지 않는 새로운 음악의 길. 그의 모든 것이 내 삶과 오버랩되었던 시절. 다 추억이 되었다. 열심히 시를 썼지만 살기 힘들다. 외롭게 버텼지만 불안한 미래가 옥죈다. 누구는 억울하다고 했다. 그래도 시가 있었기에 버텼다고 했다. 우리 세대를 생각했다. 엄살의 시를 한 편 써봤다. 물론 ‘서태지’라는 이름을 꼭 빌리고 싶었다.

_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작가, 2010.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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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스터(trickster)

시詩 2008. 10. 17. 11:25


트릭스터(trickster)


이재훈


1.

배에 올랐지. 차가운 나라, 먼 끝을 향하는 배. 내릴 수가 없었지. 어리석고 오만한 사람들이 가득한 배. 자신은 소명을 가진 자라고 착각하며. 선구자라고 착각하며. 탐욕스럽게, 모자와 단추에 보석을 주렁주렁 매단 사람들. 침묵이 두려운 사람들. 가장 조용하고 작은 사내를 미워했지. 그의 다리를 붙잡고 머리부터 바다 속으로 처넣었지.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교수들이 그 광경을 기록했지. 선구자가 치르는 희생의 영광에 대해. 사람들은 모두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내의 눈빛을 기억하지. 꿈에서 나타나는 그 눈빛을 애써 외면하지. 철학자들은 꿈과 망상의 상관관계에 대해 기록했지. 아, 모두 먼 기억의 일들이었지.

2.

어떤 시인은 자신이 천재라 생각하지. 나는 바보여서 그걸 믿고야 말았지. 어떤 시인은 자신이 순교자라 생각하지. 나는 바보여서 그걸 믿고야 말았지. 나는 부정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인간의 지위와 권력을. 넓은 정원에서 잔치를 벌이는 주인들을 나는 존경했어야 했는데. 그들의 규칙을 탐닉해야 했는데. 화려한 네온사인 속으로 들어가 영혼을 의지했지. 땅바닥에서 가만가만 숨죽인 노란 피부의 족속들을 경멸했지. 하늘에서 보면, 사람들의 정수리는 텅 비어있지. 아, 자존도 없이 교활한 날들이었지.

3.

배가 고파 사치를 하고, 호색한이 되었지. 배에서 내려 밟은 이 땅엔 불이 있어. 토끼가 인디언에게 가져다준 불이 있어. 불로 심판하고, 불로 배를 불렸지. 사랑하는 자에게 불화살을 쏘는 인간들을 동정했어. 단지, 죽지 않기 위해 좀 더 다른 얼굴로 성형을 했지. 나는 아첨꾼이자 장난꾼일 뿐. 대지 같은 사람을 찾아 헤맸지. 이 땅엔 용(龍)도 없고, 심지어 악령도 없는 리얼리티의 숲. 산토끼가 되어 빌딩 사이를 배회하지. 말과 말 사이를 가로채, 새로운 말을 만들어 소문을 내지.


_ 거대한 뿌리여, 괴기한 청년들이여 : 김수영 40주기 기념 시집(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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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이재훈

 

산책길엔 언덕이 있다.
그날은 이상했다.
오르고 올라도 닿지 않는 거리를 헤맸다.
혼을 빼앗긴 것처럼.
늪에 빠진 것처럼.
뒷덜미를 놓아주지 않는 불빛이 있었다.
사위가 어둠에 둘러싸이면서
상점엔 불이 하나씩 켜졌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어둠이 안겨주는 거대한 정적을,
위대한 침묵을
나는 알지 못했다.
상처받은 한 친구를 생각했고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생각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바쁜 거리의 일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산책길엔 언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길목과 길목이 혀를 내밀어
내 몸을 떠받치고 있을 뿐.
타인의 인격을 규정하지 않기로 했다.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다.
장 그르니에가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빛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다.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은,
그 짧은 시간만큼은 황홀하겠지.
언덕이 있는 곳은 월곡(月谷),
달빛이 있는 골짜기다.
언덕을 오르고
또 한 언덕을 오르면
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그 햇살의 순간처럼.

― <시인시각>, 200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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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막

시詩 2008. 4. 3. 12:09

이재훈


달빛을 받은 낙타의 그림자.
목이 축 늘어져 있다.
움직일 때마다 목젖이 패였다가 튀어나온다.
그 느린 몸짓이 아름다웠다.
내 연혁은 사막으로부터 시작한다.
기약도 없는 시간의 끝을 향해 걷는다.
바람 이는 모래밭에 귀를 가져다 대면
작은 돌들이 구르는 소리 들린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도록 귀를 짓이겼다.
돌 구르는 소리가 바람처럼 인다.
떼구루루 떼구루루,
바람이 불고 돌이 구른다.
까닭 없는 시간들이 있다.
터벅터벅 오아시스로 향했다.
몇 년이 걸렸을까.
물속에 축 쳐진 낙타의 그림자가 잠겨 있다.
내 生은 늘 저런 식이었다.
늘어질대로 늘어진 생각들.
결국 물맛을 보고 싶어 슬쩍 물속으로
몸을 담가보는 행위들.
사막의 돌은 스스로 열심히 굴렀다.
너무 작아 모래와 구별이 되지 않을 뿐이다.
돌은 의미있는 삶을 살았지만
오아시스가 죽음의 집인 줄은 몰랐다.
물속에다 제 몸을 허물었다.
모래로 지은 그의 집은 찰진 흙의 온기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으로 그는 목숨을 다해도 좋았다.
돌은 신비한 힘을 가졌다.
뭉개진 몸으로 구르는 소리를 낸다.
아주 먼 시간을 넘어 온
이방인의 귀에게까지도 들릴 만큼.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돌들이 서로 뒤엉켜
거대한 기둥을 이루었다.
투명한 돌의 몸이 하얗게 빛났다.
아득한 비명이 들리기도 했다.

_ <시향>, 200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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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2008. 3. 23. 18:01
 

이재훈


   벽이다

엎드려 잘 때마다 이곳은

바닥이 아니라 무른 껍질이라 생각했다

배에 힘을 주면 지그시 열릴 것 같은

그 껍질을 깨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몸을 마음껏

비벼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주장해야 했다

쿵, 말문이 열리면 긴 오솔길이 펼쳐지곤 했다

한참을 걸었을 때 울창한 숲이 보였다

나는 구름을 먹고,

신성한 사랑에 대해 논했다

풀숲에는 소리가 고여 있었다

풀을 헤치니 소리가 서로 밥을 먹고 있다

갑자기 구역질이 나서

나무의 텅 빈 몸에 구름을 토했다

검은 말들이 꿈틀댔다

가련한 밤,

문신을 새기는 꿈을 꾸었다

팔뚝 위에 피리를 새겨 넣자

내 몸에서 노래가 흘러 나왔다

창밖엔 십자가가 흐른다

가로등이 떠다닌다

감정없이 장단만 있는 노래

이 방은 어둠이 몸 푸는 자리,

얼굴도 없고 가슴도 없다

빗방울도 없이

빗소리가 내리는 방

엎드려 자고 있으면

살포시 몸에 감기는

빈 말들의 뼈

   _ <미네르바>, 200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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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2008. 3. 23. 17:55

이재훈


너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이미 네 기억은 삭제되었구나
푸른 물에서
살점들이 떨어져 내리고 빛나는 은빛
강철이 널 휘감을 때
나는 붉은 주단이 깔려 있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지

기억하지
거리에서 넌 바퀴에 깔려있었지
창자가 사람들의 발 밑에 널브러지고
너의 남은 뼈에서 벌레가 기어나왔지
흰 가운입은 자들에게 둘러싸여
앰뷸런스에 넌 실려가고
조간신문에 네 얼굴은 관념적으로
인쇄되어 나왔지
수술실로 향하는 침대 바퀴소리를
들으며 넌 깊은 잠을 잤지

붉은 주단이 깔려있는 낭하를 지날 때
방문엔 은빛 케이블이 탯줄처럼
흘러나와 있었지
방 안에선 딸각 딸각
숨 쉬는 소리가 들렸지

너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이미 네 몸은 차가워졌구나
사람들은 너의 피로 물든
붉은 주단의 여관을
딸각 딸각
클릭하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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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2008. 3. 6. 11:25

이재훈


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 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잦아들고
온 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나비 한 마리.
공중으로 날아간다.

풀잎이 몸을 연다.


_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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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2008. 2. 27. 12:09

이재훈


그대는 울고 있는 게 아니다
단지 태양을 보지 못했을 뿐
그러한 밤들이 지나고 있었다
피해야 할 것들을 피하지 못하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
어떤 멋진 말을 해도
바보처럼 보이는 그 순간에
비 맞고 서 있는 그대의 붉은 눈을 본다
그러한 밤들이 지나자
그대는 웃었다
대문 안까지 조용히 들어와
문만 열면 바라볼 수 있게 웃었다
너도 슬프다고 말해 주려다가
침묵했다
느리고 느린 이별의 발
말을 걸면 할 말이 너무 많아져
말없이 보내야 했던 밤
나는 몰라도 꽃은 알 것 같았다
검은 구름이 흘러가고
햇살이 눈동자에 와 닿는다
그러한 밤들이 지나고 있었다


_ 포에지 충남 2005년,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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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아무 말도 없는 밤. 모든 진실은 추악해졌고, 냄새는 역겨워졌다. 잠에서 깬 설익은 밤. 당신의 지느러미가 물의 품에서 파닥거리는 소리. 아무 것도 믿지 않는 밤. 정작 내세울 것이라곤 뜨거운 마음뿐. 침묵을 거느린 그대의 말과 말 사이. 그 행간으로 여명은 왔다. 뜨거운 마음 하나가 붉은 햇살을 따라 간다.

저 홀로 빛나는 존재들이 있다. 오만 가득한 몸. 축복에 싸인 아름다운 몸. 다른 시선들을 의식하며, 가장 완전한 자신을 드러낼 때. 아픈 밤의 시간이 흘렀다. 빈 가지를 부여잡고 깊은 잠을 잤다. 하늘에서 달콤한 사과향기가 났다. 그리고 오랜 폭우가 내렸다.

신열로 뜨거웠던 밤. 길섶에 엎드려 고요한 늪을 지켜보았다. 가슴은 차가워졌고 달그락대며 나사가 굴러다녔다. 검붉은 연기가 머릿속에서 뿜어나왔다. 당신의 비늘 부딪히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렸다. 설익은 달밤이었다.

_ 웹진 <문장>, 200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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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

시詩 2008. 2. 18. 13:45

이재훈


1. 겨울
이후, 꽃봉오리는 망울지지 않았다
나는 땅바닥을 기며
가만가만 숨 죽였다
딱딱한 땅에서 몇 오라기
풀을 지나칠 때
비로소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아무 것도 짐작하지 마라
기어가다 만난 돌의 시간도
훔쳐보지 마라
누구의 소유도 아닌
몸에겐 연혁이 없다
춥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권태로운 계절에
그렇게 한 백 년은 기다렸다

2. 오늘
이후, 아무 것도 태어나지 않았고 아무 것도 소멸하지 않았다
어떤 하늘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을 주었고 어떤 밤은 공중이 없는 하늘을 주었다 새벽녘 술이 깨어 일어나 보면 사방이 꽃천지고 앉은 자리마다 꽃자리일 때가 있다 그곳에서 연꽃 위를 기어가는 뱀을 지켜보다 혼절한 밤 다시 깨어 보면 뱀이 내 목을 휘감고 있다 휘영청 뜬 달에 내 몸을 비추어보며 깔깔 웃고 난 밤 아무 것도 태어나지 않았고 아무 것도 죽지 않았다

3. 유폐
이후, 누구에게 밟히거나
공중에 던져져도 괜찮았다
나는 자꾸 진화한다
詩人이었다가 일용근로자였다가 백수건달이었다가 독학자가 된다
어떤 모습에도 아파하지 않는 내성(耐性)의 몸
썩은 내가 풀풀 날린다
죄 지은 손 하나 빌려
하늘에 돌을 힘껏 던진다
메아리 하나 아득하게 들리다가
하늘로부터 빙폭(氷瀑)이 서서히 내려와 깔린다
나는 배꼽을 움켜쥐고
아프고 흐트러진 머리를 움켜쥐고
차가운 흙 위에 앉았다
그렇게 오래도록 갇혀 있었다

4. 서울
이후, 한 어미의 뱃속을 만나기 전부터
기다렸다 내 머리에 깃털을 꼽고
부싯돌을 따각따각 친다
발가벗은 몸으로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도솔천인가 연옥인가
이 도시는 한여름에도 눈이 내리고
한겨울에도 태풍이 오는 곳
일찍 배운 증오로
뼈와 살을 태우는 곳
나는 죽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차가운 흙 위에 앉아
새들의 노래를 부른다

_ <시평>, 2007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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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시詩 2008. 2. 18. 13:43

이재훈


터덕터덕 걸었을 뿐이다
모래바람 따라 그랬던 건 아니다
보리가 살갗에 닿는 쓰라림 같은 것
그렇게 하늘 끝을 향해 걸어갔다
차도르를 걸친 채 외줄을 탔다
그때부터 귀향지를 생각했다
도랑창에서 잠을 자다 일어나면
귓구멍에 개미가 한가득 기어 다녔다
우주의 날씨는 늘 맑은 것처럼
무더위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 뒤채는 모래처럼
한 알의 몸, 한 숨의 잠이었을까
사랑을 배운 죄로
이 넓은 광야를 걷고 있는 것일까
이슬의 영롱함과 풀잎의 생명이
더 맑다고 얘기하고 싶은데
자꾸 과거만 투명하게 보인다

뼈와 살이 풍화되는 겨울 저녁
아무도 나의 고향을 말해주지 않았다
아무도 나의 노래를 들어주지 않았다
어느 마구간 구유에 입을 넣고
소리없이 여물만 삼켰다
나는 원래 들판의 아들이었지
아름다운 황혼은 뱃속에 숨겨두고
퀭한 눈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이제는 도시의 골목을 기웃거리며
킁킁 냄새나 맡으며
예술을 아는 척 피카소전엘 간다
어깨 구부정한 늙은 포유류가
저기 보인다

_ <시현실>, 2007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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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전(萬神殿)

시詩 2008. 2. 14. 17:39

이재훈


저는 오래전 아버지를 죽이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뒤로 수많은 신들이 제 속에 들어와 소리를 지릅니다. 홀짝홀짝 살들을 빨아 먹습니다. 가슴이 휑뎅그렁해져서 사다리를 타고 허공 위에 올라갔습니다. 십자가가 네온을 켜고 붕붕 하늘을 날아 다닙니다. 오리온을 찾으려고 별자리를 하나씩 짚어보았습니다. 거인의 눈과 코와 활 오늬의 도톰한 입에 손가락이 빨려 들어갔습니다.

도시는 너무 시끄럽습니다. 가슴 속에서 귀신들이 포식하고 구역질하는 소리 들립니다. 밤거리를 나서면 골목의 이곳저곳에서 토하는 소리 들립니다. 저는 시끄러운 음악이 흐르는 술집을 찾아 헤맵니다. 너무 시끄러워 고독합니다. 어제 올랐던 사다리를 허방지방 오르다가 기우뚱합니다. 차라리 길 위에 몸을 던질까요. 공중으로 힘껏 차올라 활갯짓을 합니다. 귀신들이 아우성을 칩니다. 몸이 터져 귀신들을 내놓으면 사람들은 변할까요. 기도의 시간도 포기할까요. 그러나 나는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사랑이 완성됩니다.

촛불을 집어 삼키고 가슴에 등을 켭니다. 환한 가슴으로 지나가는 개에게 절을 합니다. 허공의 사다리엔 긴 목을 가진 시체들이 걸려 있습니다. 이전 세상에서 쫓겨난 귀신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갑니다. 제 목이 점점 뻣뻣해지고 코끝이 찡해집니다. 어머니가 자꾸 저를 부르십니다. 아들아, 아들아 문 밖에 나와 목이 쉬도록 부르십니다. 칼날이 제 목젖을 지그시 누르고 천천히 들어옵니다.

_ <작가와 사회>, 200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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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의 연대기

시詩 2008. 2. 13. 11:22

이재훈



큰 물고기를 잡았다.
한 아름이 넘치는 몸집이었다.
혹시나 죽을까 물고기를 수족관에 넣었다.
물고기의 눈이 나와 통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고기는 내 자랑이었다.
눈물도 없이 날 바라보며
몸을 뒤채는 성실한 영혼.
동네 형들이 내게 침을 뱉던 날.
하얗다며 얼굴에 진흙을 바르던 날.
공중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오줌을 내갈겼다.
붉은 얼굴로 욕하는 연습을 했다.
다행히 집엔 물고기가 있었다.
수족관 유리에 입술을 대고 혀를 내밀었다.
차갑고 막막하여 아름다운 감촉.
침묵을 알아버린 호흡.
나는 방안에 박혀 물고기와 놀았다.
온몸이 달아올라 수족관에 다리를 비볐다.
물고기 때문이었다.
악한 아이를 죽이지 못하고
풀밭 위에 누워 한없이 울게 된 것은.
나는 시퍼런 칼을 든 모험의 소년이고 싶었다.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방법쯤은 알고 있었다.
침착하고 고요하게 모두 죽이고 나면,
평정이 온다는 것을.
그것이 운명일지라도.
물고기를 호수에 풀어주었다.
물에 놓자마자 내 발등을 핥고
허벅지를 핥고 사타구니를 깨물고는
서서히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슬쩍, 물 위에 비치는 내 몸.
온몸에 비린내가 났다.
가랑이에서 썩은 내가 났다.
난삽한 사랑이 시작되었다.
과분하게 영원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

- <리토피아>, 200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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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灣)

시詩 2008. 2. 3. 00:32

이재훈


웃음이 사방에 번지는 날.
선생님께서 묶어놓은 밧줄을 풀고
거리를 나섰다.
몸에 핀 동그란 열꽃이
펑펑 터져 붉고, 푸르고, 검은 파문이
살갗에 차올랐다.
얼굴 없는 안개의 밤,
죽음의 그림자를 막연하게 살피던 밤,
한밤 내 웃었다.
접힌 주름 사이로 웃음의 까닭을 세어보는데
온몸이 얽어 있었다.
밤새 축축하고 끈적해진 공기가
얽은 피부를 핥고 있었다.
숯덩이처럼 뜨거운 혀를 낼름거리고 있었다.
보석을 입안 가득 물고 있었다.
몇 백 년이 흘렀을까.
놀라운 비약이 있었고,
시대는 공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행복과는 먼 밤들을 채워나갔다.
간혹 알몸으로 욕조에 들어가
낯선 배꼽을 만졌다.
움푹, 깊숙한 골이 생겼다.
웃음의 까닭도 모르고
자꾸 웃고만 있었다.

_ <작가와사회>, 200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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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랭피아

시詩 2008. 1. 31.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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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 올랭피아

얼굴을 폭로하지 않겠다. 다만 네 몸만 열 수 있으면 되겠다. 나는 단정하며, 울지도 않으며, 매달리지도 않는다. 널 바라보는 내 시선에는 관심두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람들만 보았으면 더없이 좋겠다. 나는 검고 너는 하얗고, 나는 몸을 숨기고 너는 발가벗었다.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는 너는, 파렴치한 부자들도 풍요롭게 받아들일 줄 아는 너는, 신성한 오로라를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병적이고, 너는 유희적이야. 나는 머릿기름을 발라 올린 단정한 남자를 좋아하고, 너는 술 취한 밤처럼 헝크러진 머리칼을 가진 남자를 좋아하지. 나는 영혼이 없고, 갈망이 없고, 희망도 없지. 너는 사랑 하나면 된다 했지.

금빛 구두를 벗지 않았으면 좋겠다. 금빛 팔찌를 풀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 머리의 꽃장식과 별처럼 앙징맞은 귀걸이도 그냥 그대로면 좋겠다. 이방인의 세계야, 아아, 분신(焚身)이 아름다운 세계야. 코카인을 가득 털어 넣고 몸을 내어주면 더더욱 황홀한 세계야. 그렇지만 내 꽃은 빼앗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도둑처럼 훔쳐만 보고, 너는 성녀처럼 기도하지. 내 몸엔 새가 쪼은 흔적으로, 꽃가지가 할퀸 상처로 가득하지. 나는 온몸에 덮을 천이 필요하고, 너는 목과 손과 발에 장식할 금이 필요하지. 왼손으로 가린 너의 음부를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너는 언제나 아름다운 행위만을 원하지. 아아, 나는 눕고 싶어. 네 몸을 잊고 신비한 밤을 맞고 싶어. 달창난 내 피부가 아니라, 네 몸에 풍기는 값싼 향내를 사랑하고 싶어. 너무 많이 생각했어, 너무 많이 두려워했지. 너는 아름답고, 나는 추한 하녀지. 하얀 침대가 젖빛으로 가득한, 나른한 오후지.

_ <작가와 사회>, 200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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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의 봉인

시詩 2008. 1. 30. 10:53

이재훈


햇발에 눈을 뜨면
진흙 속에 누워 있었네
어스름한 구름 사이로
밤새 하늘을 날다 지친듯한
새의 다리가 언듯 보이네
피곤한 탓일까 병일까 생각하다
부드럽고 안락한 흙의 감촉에
자꾸만 잠이 오네
리모컨을 두드려 텔레비전을 켜자
사바나 초원에서 쫓겨난 마사이족이
물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네
피곤한 탓일까 병일까 생각하다
문 밖의 일들이 궁금해 뒤척여보지만
어느새 진흙의 손길이 온 몸을 쓰다듬네
춤이라도 춰볼까 몸을 일으키면
흙의 찰기가 내 발목을 쥐고 날 눕히네
유폐와 어둠의 아침

이집트의 술항아리와 미이라의 관(棺)에는
진흙이 발라져 있었지
앗수르에서 온 편지도 그렇게 봉인되었다지
내 입술은 봉인되지 못하고
부끄러운 고백들을 나불댔네
결국 슬픔이 되고 공허가 될 말들
입술 주위를 차지한 구순 염증들
간지럽고 따가운 존재로 남은
저, 징그러운 말들의 시체

갯벌에는 망울망울 숨구멍이 열려 있었네
풍경이 아니라 목숨을 위한 문(門)
그 구멍을 내 서툰 발로 짓이기곤 했네
진흙은 뜨거울수록 더욱 단단해져
억울한 죽음과 거짓된 약속과
세상을 지배하는 음모들이
진흙으로 마감된 시간 속에 묻히지
약을 먹고 진흙 뻘에서 춤을 추고
아무 고통도 없는 날을 보내고 싶네
암흑 속에서 아무도 듣지 않는
노래를 부르고 싶네
향기로운 흙의 향기가
내 숨을 막을 때
모든 것과 이별하고 싶네

_ <시와세계>, 200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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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

시詩 2008. 1. 28. 14:34

이재훈


1. 골짜기
빛의 동네다.
도로 위에 빛의 뼈들이 달그락거리고
뭉텅한 안개 몸을 뒤엎으며 흐느적거린다.
아무리 먹고 먹어도 배가 고프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달빛 교교한 언덕으로 올랐다.
하늘에 혀를 내밀었다.
달콤한 달빛으로 목을 축이는데
뒷덜미를 훑고 지나가는 어떤 손.

2. 달
고요히 체념한 얼굴이다.
익숙한 손짓으로
제 눈과 코를 짓누른다.
애꾸눈이 된다.
먼지로 만들어진 얼굴.
아름다운 그림자를 가진 얼굴,
마지막 숨을 남겨 놓고 있다.
동살에 얼굴이 문드러져도
저렇게 늙어갈 수만 있다면.

3. 꼽추
새벽이 오면 늘 목이 막힌다.
내 등껍질에는 냄새가 난다.
고깃덩이가 익는 냄새.
빠른 걸음에 허벅지가 맞닿아
타이어 타는 냄새가 난다.
얼굴을 가린 채 희미한 빛을 바라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공기를 매만진다.
푸석푸석하고 누렇게 변한
빛의 몸.
달의 핏물이 배어 있다.

4. 묘지
날이 밝았다.
아침을 메우는 발자국 소리들.
귀가 따갑다.
귀를 막고 무릎을 꿇었다.
몸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구멍난 뼈에서 벌레가 기어나왔다.
깊은 땅 속에 박힌 손 하나.
골짜기에서 합창이 들렸다.

_ <시평>, 200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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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 패스

시詩 2008. 1. 24. 11:34


이재훈


어떤 경우, 시험이 아닌 고통도 있다.
겪지 않아도 되는 재해 같은 것.
악창 같은 것.
발바닥까지 닿는
나의 괴로움은 오늘로 족하다.
반지를 낀 여인의 손가락을 보면,
잘라버리고 싶다.
애인은 왜 이렇게 늦게 오는가.
폭포처럼, 떨어지는
고통을 질겅질겅 씹고,
엉겅퀴 줄기로 피부를 문지르고,
오늘도 슬럼가에 있는 작은 공장으로 가야 한다.
꺾인 무릎을 또 꺾어야 하는 게 삶의 지혜인 줄을 몰랐다.
먼지 풀풀 날리는, 공장 바닥에 앉아
나를 위해 기도한다던 개척교회 목사를 생각했다.
영생의 권태로움을 겪을 자신이 없다.
바닥을 긁어대는 저항의 소리 한 번 못내 봤다.
언제나 꿈처럼 저 혼자 빛나는
별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목이 따갑다, 목에서 쇳소리가 난다.
느린 전자오르간 소리에 맞춰
아주 성스럽게 한 여인의 피부를 도려낼 것이다.
난, 그렇게 얘기하고 싶었다.
사방엔 바람만 남아 있다.
바람이 분다.
차가운 혀가 내 뒷덜미를
슥 핥고 지나간다.

_ <다층>, 200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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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2008. 1. 21. 16:52

이재훈



지하철을 탔다. 男子가 바닥에 구토를 한다. 女子가 토사물을 손으로 쓸어담아 내게 건네준다. 누가 볼까 토사물을 내 옷가슴에 넣었다. 옆 사람의 가슴에서도 역겨운 냄새가 났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 때문에 구역질이 났다. 모두 핸드폰을 들고, 걸고, 만지고, 본다. 시끄러워, 시끄럽다니까! 소리를 질렀다. 골짜기에 나는 갇혔다.

지하철을 탔다. 쓰레기장 냄새가 났다. 무료 일간지들이 선반에 쌓였다. 한 노인이 내 무릎을 비집고 들어와 선반의 신문을 자루에 담는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도 날 바라보지 않는다. 칼을 꺼내 손목을 그었다. 나는 칼을 의지하며 살았어요. 나는 벌레요. 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아무도 날 바라보지 않았다. 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가슴을 그으며 지나갔다.

지하철을 탔다. 시체 썩는 냄새가 났다. 다음 내리실 역은 무덤의 골짝입니다. 심장은 슬픔을 견디기 위해 존재하는 것. 손톱으로 손목의 상처를 긁어냈다. 심장을 파멸하기 위해 매가 날아 왔다. 사랑과 긍휼이 전혀 없는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비애로 태어났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무덤 안에도 사람이 살고 있느냐. 매의 등에 칼을 꽂았다. 지하철에 깃털이 날렸다.

어쩌면 무덤을 지나, 폭풍을 지나 당신을 보았을지도. 나는 영혼까지 죽이는 법을 모른다. 어미의 젖 빠는 법을 배우지 말았어야 했다. 영원히 잠들어야 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존재만 사랑해야 했다. 그 이후로 아무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지 못했다.


_ 시와사상, 200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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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벽이다
엎드려 잘 때마다 이곳은
바닥이 아니라 무른 껍질이라 생각했다
배에 힘을 주면 지그시 열릴 것 같은
그 껍질을 깨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몸을 마음껏
비벼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주장해야 했다
쿵, 말문이 열리면 긴 오솔길이 펼쳐지곤 했다
한참을 걸었을 때 울창한 숲이 보였다
나는 구름을 먹고,
신성한 사랑에 대해 논했다
풀숲에는 소리가 고여 있었다
풀을 헤치니 소리가 서로 밥을 먹고 있다
갑자기 구역질이 나서
나무의 텅 빈 몸에 구름을 토했다
검은 말들이 꿈틀댔다
가련한 밤,
문신을 새기는 꿈을 꾸었다
팔뚝 위에 피리를 새겨 넣자
내 몸에서 노래가 흘러 나왔다
창밖엔 십자가가 흐른다
가로등이 떠다닌다
감정없이 장단만 있는 노래
이 방은 어둠이 몸 푸는 자리,
얼굴도 없고 가슴도 없다
빗방울도 없이
빗소리가 내리는 방
엎드려 자고 있으면
살포시 몸에 감기는
빈 말들의 뼈

_ <미네르바>, 200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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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1.
신음이 들렸지. 햇살이 벌판에 누워 피를 쏟고 있었지. 땅 위가 흥건했지. 나는 새의 꿈을 꾸었어. 길들여지지 않은, 몸의 꿈. 시드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 생각했지. 깃털의 자유, 먼지의 자유. 세상을 유랑하며 흙 위에 앉아 붉은 핏물을 빨아먹고 싶었지. 핏자국이 덕적덕적한 햇살의 겨드랑이에 달라붙어 먼 생애를 생각했어. 나는 나를 죽일 수 없을 거라고. 그리워서 울었던 것은 아니라고.

2.
풀숲에 소리가 고여 있다.
잎사귀를 헤치니 소리가 서로 머리를 깨물고 있다.
가련한 밤.
사각사각,
머리를 뜯어먹는 소리.
살곰살곰,
살인자를 찾는 발자국 소리.
얼굴도 없고
가슴도 없고
빗방울도 없는
소리의 환幻.
향기를 빨아들여
영혼을 훔치는 아우성들.

3.
그냥 그런 바람이었지.
탄생도 구원도 없는 검은 소리가 내 몸에 와 잠겨.
싹이 난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법궤를 들고
저 신산의 땅으로 걸어갔지.
징기스칸의 대초원으로, 무굴제국의 타지마할로
잉카의 마추픽추 언덕으로 모두 떠나가.
이제 세속적으로 살기 위해
가벼운 날개를 달 것이야.
물렁해져 가는 몸에
단단한 근육을 만들 거야.
슬픈 짐승의 뼈를 고아 먹고
십자가 가득한 도시의 밤을 먹을 거야.
아무 것도 거둘 수 없는 몸.
냄새나는 몸.
위로할 것 없는 몸.
깊숙한 어둠 속,
엉킨 조명 아래에서
단 한 번의 후회도 없이
내 몸에 불을 지르겠지.
훨훨 불타 벌판에 누워
노을이 되겠지.

_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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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출근하는 폐인

시詩 2007. 12. 18. 15:29


이재훈


1.
의욕적으로 넥타이를 매고 미소를 연습한다. 거울 앞의 수많은 표정들. 낯선 얼굴, 낯선 침묵.

2.
다른 말은 없다. 너를 자위케 하던 기호들. 새, 별, 그리고 꽃과 나무. 아무 생각없이 잠들 수 있었던 그대, 라는 말을 향해.

3.
기록하지도 나서지도 않았던 길에 대해. 악마의 다리를 건너는 법에 대해. 꽃의 길이 아닌, 모험의 길목에 대해. 협곡 위 아슬하게 나있는 다리에 대해. 이 땅과 영원히 이별할 수 있는 길들에 대해.

4.
나는 육십억 분의 일일 뿐. 페트병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캔맥주병. 먹다 남긴 컵라면. 참기 힘든 소음. 역겨운 화장냄새와 비둘기똥 냄새로부터.

5.
계곡의 하얀 물보라를 헤치고, 난파된 얼음 위에 올라서 저물어가는 사람들의 삶을 감상하고 싶다. 그러면 아주 쓸쓸하겠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아무도 없이 고독하겠다.

6.
애초에 로마는 없었다.
그곳에 이르는 신비한 밤과 방황만 있을 뿐.

7.
바람이 부는 날.
출근길 지하철 입구에 눈 먼 소녀가 앉아 있다.
소녀의 귀에서 누렇게 익은 곡식 낱알을
새가 쪼아먹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런 소리의 길이
눈을 어지럽힌다.

8.
숭고한 저녁의 기다림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다
드디어 주장을 하고
외치고 울부짖었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의 형벌이었다.

_ 2007 문청 동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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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미아

시詩 2007. 11. 15. 13:27


이재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할 때 궁창이 열렸습니다. 저는, 그 작은 골짜기에서 푸른 씨앗을 주웠습니다. 그때 물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간은 망각을 가져다주더군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았는데, 저 그만, 큰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 푸른 씨앗을 한 자궁 속에다 잃었습니다. 이 땅의 푸른 날숨과 들숨들은 모두 광년을 넘어왔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서기 이천 년도 인간이 만들어낸 시간이 아닌가요.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저, 가난한 뱃속에서 막걸리 찌꺼기로 취하며 이 작은 몸뚱아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기쁘시죠? 태초부터 저와 함께한 그대들, 정말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왜 하필 이 늙은 땅에서 저를 잃으셨나요?
쇠지랑물과 땅더껑이 속에서 벌레들이 슬금슬금 기어나옵니다.
숨소리가 들리세요?
거북이처럼 엎드려 살아도 자꾸 병들어갑니다.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중에서

----------------------------------------------------------

탄생이라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뒷말은 아마도 축복이 아닐까. 어미의 자궁을 빠져나온 신생아의 울음소리에 사람들은 기쁨의 박수와 함께 덕담을 보낸다. 그러나 산모의 통증보다, 빠져나오느라 더 많이 아팠던 아기는 여전히 울고 있다. 탄생을 신비와 경이,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시인은 외로운 미아로 부르고 있다.

가난한 뱃속에서 막걸리 찌꺼기로 취하며 제 몸을 만들고 푸른 씨앗을 잃어버린 죄 값으로 병들어간다. 탯줄이 끊어지고 첫울음이 터지는 순간부터 나는 미아다. 어미가 손을 놓고 나를 잃어버린 거다.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전도서 1:9)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던 이 늙은 땅에서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혼자뿐이다. 탄생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이미 정한 바 되어 있었으니, 속수무책으로 나는 태어날 수밖에 없다. 태중에서 나를 잃어버린 어미를 탓할 수도 없다. 벌레들이 슬금슬금 기어나오는 땅바닥을 보면 온몸에 소름이 돋아도 거북이처럼 엎드려 살아야한다. 잘려진 탯줄을 궁창에 던지고 살아 팔딱여야 한다. 적어도 살아 있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얻어먹은 막걸리 찌꺼기 값을 갚으려면 병든 몸으로 신음소리라도 팔아야 한다. 찬바람 부는 새벽 병든 미아들의 쿨럭이는 기침소리로 골목 안이 술렁인다.  (허은희 시인)

_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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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왕성 되다(plutoed)

시詩 2007. 11. 12. 00:00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음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_ 시현실, 2007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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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

시詩 2007. 10. 22. 16:16


이재훈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다
열대를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텅 빈 숲의 적막이
털끝을 살살 오므려 움을 틔우는 시간
이름 모를 나무의 향기를 맡으며
허무의 군락 사이를 헤맸다
저녁마다 매연을 맡으며 구역질을 했다
벌거벗은 육체 사이에서 신음했다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없이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 시간,
꽃담을 지나 땀 흐르는 폭포를 지나
힘겹게 절정을 찾아 다녔다
빈 무덤을 넘어가며
전생의 길을 물었다
큰 호수를 만났을 때는
열망하던 일들이 모두 잠잠했다
위대한 숲의 시를 쓰고 싶었다
숲 속에 한 평짜리 오두막을 짓고
밤마다 호랑이의 배고픈 소리를 들으며
늘 지저귀고, 사분거리고, 비벼대는 숲을
노래하고 싶었다
그 싱그러움의 머리맡에서
토닥토닥 바람을 잠재우고
풀잎의 향기에 취해 혼절하고 싶었다
독수리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빙빙 돈다
폭우가 올 것 같다
빛나는 산은 신의 눈물과
천수관음인(千手觀音人)의 예언으로 존재하는 곳
화신(化身)으로 지속된 땅에서
솟구치는 피를 즐겼다
저 산보다 더 높은 곳으로 날아라
이 땅은 자꾸 따뜻해져
만년의 눈[雪]이 제 몸을 녹여
앙상한 피부를 드러냈다
황혼에 몸을 적셔 본다
금빛으로 스러지는 내 몸이
아스팔트에 널려져 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순백의 저 암암한 몸과
뒤엉킬 꿈을 꾸며

_ [시와사상], 200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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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銅鏡)

시詩 2007. 10. 8. 22:29

   이재훈(李在勳)



   깨진 기왓장을 주워 주머니에 넣으면, 그 속에서 비닐에 덮여 자고 있는 여인을 볼 수 있다. 콧대와 턱이 뿌연 비닐과 뒤엉켜, 툭 건드리면 바삭 부서질 것 같다. 팔딱팔딱, 손가락 사이로 심장 소리가 뛰어 올랐다. 모든 소리들이 긴 줄에 매달려 그네를 탔다. 녹색의 밤. 신발을 잃어버리고 울었던 밤. 나는 단지, 일생을 꿈꾸었을 뿐인데. 챙, 소리에 놀라 보니 사방에 깨진 파편들이 반짝였다. 깜박깜박, 수많은 눈동자가 길을 물었다. 그네는 삐걱거리며 보랏빛 옷만 남겼다. 깊은 숲길에 안개가 뿌옇고, 여인은 안개를 덮었다.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면 천년을 건너온 어떤 눈동자에 손을 베인다. 스윽.

_ 문학사상, 2007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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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

시詩 2007. 9. 16. 10:30

이재훈


모퉁이에서 책을 뽑았어. 선풍기는 털털 돌고 불빛이 수직으로 내린 서가. 냄새가 났어. 겉장을 넘기니 굵직한 서명. 가장 먼저인 자가 차지한 잉크 내음. 알싸했어. 책등에 서식하는 곰팡이. 암내를 풍겼어. 책을 반쯤 열고 코를 갖다 대었어. 수르르 분진이 콧구멍으로 들어와. 달창난 먼지의 몸. 푸석한 살내음. 만질해진 책 모서리를 잡았어. 아릿한 분내음. 부서질까 만질 수 없는 글자의 몸. 읽지 못하고 만져야만 하는 몸. 가령, 꽃과 나무와 별과 사랑 따위. 말년휴가 때 여관에서 들었던 김현식의 노래도 그랬어. 창문없는 먼지의 방. 닳고 닳은 몸들이 가득한 방. 냄새가 났어. 또 한 生을 뽑아 들었어.

_ [서시] 2007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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