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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2012.10.18 시의 심급(深級)과 심금(心琴)_ 신진숙
  26. 2012.10.10 송종원, <시 쓰는 일의 비밀에 관한, 혹은 시가 쓰는 비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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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2012.05.03 식육과 형벌의 세계를 견디는 날들 / 조동범
  29. 2012.04.04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자 발표(현대시학, 2012년 3월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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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서럽게 아름다운 슬픔의 미학, 눈물의 언어학 이재훈의 시

 

한민주(문학평론가)

 

1. 비와 당신

 

개개인의 삶 속에는 시적인 기억들이 남아 생을 견디게 한다. 무지갯빛 기억의 실타래를 풀면, 어린 시절 비의 경계를 경험한 순간이 떠오른다. 갑작스럽게 검은 먹구름이 천지를 뒤덮고, 하늘에 구멍 난 것처럼 퍼붓는 비를 맞으며 언덕 위의 집을 향해 정신없이 내달렸다. 그런데 집 앞에 당도했을 때 하늘은 환해지고 마당의 흙은 감쪽같이 보송보송 말라 있어, 어딜 봐도 비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흠뻑 젖어 있는 내 모습이 이상하다는 가족들의 시선과 너무 맑고 메마른 주변 환경, 그리고 여전히 비에 젖고 있는 언덕 아래 마을의 이질성 속에서 어린 나는 다른 시공간, 다른 세계를 통과해 온 경이로운 기분을 맛보았다. 어쩌면 내가 거주하고 있는 이 세계 말고 또 다른 세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과 두려움에 압도당했던 바로 그 마법의 순간. 이재훈의 시를 읽다 보면 이 신비로운 비를 자주 만난다. 특히 비가 오르고 있었다라는 표현은 예사롭지 않다. 지상으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수직으로 상승하며 가늠할 수도 따라갈 수도 없는/빗속의 신비벚꽃 사이에서 날고 있”(신비한 비, 벌레 신화)는 잃어버린 당신의 기억과 스민다. 비를 사랑하는 시인은 오랜 세월 빗방울도 없이/빗소리가 내리는 방”(카프카 독서실, 명왕성 되다)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자거나 울거나, 시를 쓴다. 이재훈은 2005, 그의 첫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에서 새벽 빗소리가 눈을 친다라고 밝혔다. 분명, 그의 시 세계에서 는 아주 중요한 시적 소재임이 틀림없다. 비는 인식이나 각성을 상징하는 과 연결되면서 시인의 의식 세계를 깨우는 매개 역할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비가 때로는 아늑하게, 때로는 불편하게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탁월한 플롯 장치로 기능해 왔다는 것은 일반화된 사실이다. 개인의 경우도 비는 아늑함과 불편함의 길항작용 속에서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돕는다. 그러므로 비는 그쳤지만/빗소리가 내 가슴에 올라와 있”(황홀한 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는 순간들이 잦다. 실상 침묵 속에 울고 있어서 몸 부딪히는 소리만들리는 알몸당신은 그 아픔을 숨기고 투명한 몸으로, 꽃잎처럼 경쾌하게내린다. 시인은 이를 서러운 아픔도 참, 아름다워요”(빗소리, 최초의 말)라며 침묵 속에 울려 퍼지는 슬픔과 고통을 심미화하고 있다. 그런데, 사방에 닿는 빗소리는 당신의 울음소리가 아니던가. 어느새 투명한 빗소리는 아픔을 간직한 울음소리로 전환된다. 인간의 역사라는 까마득한 광야에 거칠게 울고 우는 소리만 가득하다.”(북극의 진화, 명왕성 되다) 이토록 비통한, 비에 관한 기록들은 지금껏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비애에 빠져 있는 시적 화자들에게 빗소리는 계속 고통의 감각을 일깨운다.

도대체 왜 시인은 빗물이 흐르듯 울고 또 우는 것인가. 문학에 대한 독서와 창작을 작가의 고백 행위이자 그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윤리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방편들로 볼 때, 이재훈이 표현한 슬픔의 정치와 윤리에 관한 탐구는 그의 시 세계를 파악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해 보인다. 이재훈의 시에서 비는 물질적인 부요와 탐욕의 천사인 너와의 언약으로 고통이 하나씩 늘고, 빚이 늘고, 미래의 노동이 늘해거름, 차창에서 졸고 있는 저 빈곤한 육체”(맘몬과 달과 비, 벌레 신화)를 처연하게 달랜다. 그리고 비록 비는 자연의 일부지만, 한 주체가 뱃속에 가득한 허기” (노란 애벌레가 좋아, 생물학적인 눈물)와 허무에 휩싸여 혼돈에 빠진 자아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기발표작 고통이 없다를 보면, “한때는 투명한 피부를 가지고 싶었, “나무에 새긴 초록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이상적 자아의 세계와 달리 현실적 자아는 고기를 뱃속 가득 채우며 짐승의 시간에 지배되어 산다. 이시는 자아의 괴리감과 실망감에 맞닥뜨린 그 고통스러운 순간을 재현하고 있다. “슬픔은 환멸 속에서 더 환하다.” “어쩌면 잃어버린 사람을 찾으려고 헤맨 걸지도모를 그의 인생사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채우지 못한 허기를 달래는데 온 생을 바치며 달려온 것과도 같다. 그런데, 이러한 생의 조건 속에 고통이 없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다. 생물 의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도, 진정으로 고통에서 해방된 존재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가 결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현재의 고통을 누를 수 있는 더 큰 고통이 존재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현재의 고통을 더 극대화하기 위한 고통의 아이러니가 기획된 것일 수도 있다.

고통은 생물 의학적 과정의 결과이기도 하고 개인의 정신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주관적 경험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울증과 공포, 비애 같은 정신 분열적이고 정서적인 상태에 의해 보강되고 때때로 새롭게 창조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고통은 개인과 집단의 성장과 성취를 동반하기에 우리는 고통을 받아들인다. 저마다 고통으로부터 의미를 발견하고 고통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이처럼 고통이란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인간의 근본적 경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고통의 의미를 단지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창조하면서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는 고통의 지위를 이해하는데 특별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이런 측면에서 되새겨보면, 이재훈의 시 세계에 사는 시적 화자들은 모두 상처 입은 화자들이며, 끝없는 슬픔에 빠져 있다.

이재훈의 시 세계는 잃어버린 상실의 대상을 찾아 떠도는 슬픔의 도정이 펼쳐져 있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우선, 시인이 빗속에 엎드려 자고 있으면” “빈 말들의 뼈”(카프카 독서실, 명왕성 되다)가 살포시 그의 몸에 감긴다. 우리의 언어가 어떤 사물을 지칭함에 있어 필연적으로 일대일의 대응 관계에 있다고 하던 종래의 소쉬르 관념을 넘어, 기표와 기의는 서로 유리되어 있고 또한 아무 관계가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관념이 지배적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 존재하는 메꿀 수 없는 틈을 직시하게 되며, 그 결과 말하여지는 차원은 의미 되는 차원으로부터 언제나 미끄러져 있는 상태임을 또한 인식하게 된다. 언어는 자신 속에 분열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시인은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꾸며 이 세계에 없던 언어를 찾아 나”(거리의 왕 노릇, 벌레 신화)선다. 이때, 시어를 향한 시인의 도정에는 부재(不在)”라는 그리움의 양식”(앉은뱅이꽃, 명왕성 되다)이 동반한다. 따라서 그는 늘 말하려던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직선을 치다, 생물학적인 눈물)라는 말을 되뇌며 반복적인 회의와 좌절감에 빠져 고통스러워한다.

고통과 슬픔에 관해서 아무리 말해도 말할 수 없는 게 있다. 이 상처의 정확한 표현 불가능성 때문에 고통의 재현도 언어처럼 미끄러진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의 상상 속에서 상처 입은 몸과 고통, 슬픔을 시적으로 표현하려 하며, 그와 관련한 문화적 증상을 드러내려 한다. 그런데 고통의 혼돈을 서사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서 프랭크는 고통의 혼돈을 살아낼 수는 있어도, 그것을 말할 수는 없다고 한다. 혼돈은 서사가 요구하는 시간적 순서대로 삶을 재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의 혼돈을 시로 말할 수 있을 때쯤이면 일관성을 되찾는 작업은 이미 잘 시작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늘 곁불만 쬐며갖게 된 시인의 엄살의 통각”(일식,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옹알거리기라는 소심한 표현으로 이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다. 또한, 이재훈의 시적 화자들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통의 요인이 되는 상실시인의 자기 정립 조건이기도 하다. 상실에 대한 반응 태도로 애도와 우울증이 있다. 과거가 해결되고 죽은 것으로 선언되는 애도와 달리, 우울증은 잃어버린 과거가 현재에 변함없이 살아있으면서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대상 상실이 자아 상실로 전환된다. 이처럼 우울증은 끝나지 않을 고통 속에 사는 자아의 병을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벤야민의 시각을 전유해 볼 때, 우울증은 상실과 함께 끝없는 투쟁에 참여함으로써 과거와의 지속적이고 개방적인 관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우울이 병은 아니지,” “그저 또 다른 시간에 이른 것”(짐승의 피, 벌레 신화)이라는 통찰처럼, 이재훈의 시는 무언가를 상실하고 앓는 우울증이 어떻게 시인의 행동주의, 윤리, 그리고 정체성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일로 여기며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데, 이재훈은 회피나 포기, 탈출이 아니라 슬픔 안에 머물며 이를 분석하고 그를 관통해 나가려는 행동주의적 면모를 보인다. “무릎을 꿇고 울고 있나는 선물이 되지 못하고, 맛이 되지 못하고, 그저 나만 아는 곤고한 사람이 되었”(라틴어를 배우는 시간, 생물학적인 눈물)다 라는 자책 속에서 시인이 되고 싶은 선물이나 은 상호적인 관계성에 놓여 있는 것들이다. 타인에게 선물이 되고, 맛이 되고 싶다는 시인의 염원은 동정과 연민, 공감과 위로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이재훈이 고통의 윤리와 슬픔의 본질을 파헤쳐 나가며 비로소 가닿고자 하는 슬픔의 미학적 완성이 무엇인지를 탐구해 보려 한다.

 

 

2. 도시의 은유, 시인의 몽상하는 발걸음

 

당신에게 도달하기를 원하는 이재훈의 시는 대화의 몸짓이다. 따라서 잃어버린 대상을 찾고, 그것을 향해 말을 건넨다. 가령, 시인은 뜨거운 돌 위에 누”(예쁜 똥,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워 돌과 대화를 나누고 잘 익은 돌을 낳기도 한다. 그리고 태초부터 돌 속에 봉인되어 있던 수많은 사연에 귀를 기울인다. 신작시 극빈의 돌은 고통을 켜켜이 응결시켜 놓은 결정체를 비유하기 위해 을 소재로 삼았다. 시적 화자는 모두 바뀌는 것들만 궁금해하며 집도 자동차도 직업도 사람도 모두바뀌는 세상에서 살자니 숨이 가쁘고 피가 돌지 않는다.” 그는 오래도록 바뀌지 않는 것들만 나를 살리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을 물과 사라지지 않을 공기와 나무에게 입술을 대었다.” 이처럼 시인은 계속 바뀌는 현대성의 다른 한편에 변함없는 자연의 항구성을 대립 항으로 설정해 두고 인간의 숨 쉴 자리를 향수하게 만든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인이 속한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이 액체화되었다고 진단하였다. 그리고 체제의 구조가 지닌 특성이 구조화되지 않은 유동적인 순간적 생활정치 무대와 쌍을 이루어 인간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시는 이처럼 지속적으로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가난한 것만이 변하지 않는다는 부조리를 인식하게 만든다. 게다가 가난의 질곡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의 항구성은 프롤레타리아의 돌이 함의하고 있는 존재론적 비극성을 더욱 부각한다.

이재훈의 시 속 대부분의 시적 화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대도시라 할 수 있는 서울에서 비롯된다. 도시는 지속적인 개발과 변화의 대상이었고, 그에 맞춰 새로운 생활 방식을 만들어왔기에 현대성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시적 화자와 자본 문명의 시대에 가장 이율배반적인 인간형이라는 시인과의 심리적 거리는 매우 가깝다. 모든 화가가 자신을 그리듯이 시인 역시 자신을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도시의 일상생활, 특히 도시에 대한 주관적 성찰, 탐구 및 경험을 통해 도시의 열기, 먼지 그리고 냄새를 새로운 방법으로 되살아나게 한다. 도시생활자인 시인은 도시의 흘러가는 무리들에 몸을 섞은 채 홀로 다닐 용기도 내지 못”(양의 그림자를 먹었네, 생물학적인 눈물)하고 군중 속 일원이 된다. 그 군중 속 시인은 나는 육십억 분의 일일 뿐”(매일 출근하는 폐인, 명왕성 되다)임을 자각하며 고독하게 혼자 걷고 있는 현대인을 표상한다. 따라서 거리의 군중을 대표하는 일 개인으로서의 시인이 겪는 운명이란 곧 거리에 있는 집단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재훈의 도시 상상력은 근본적으로 거리를 걷는 행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걷는 것은 우리가 주변 세계를 이해하고 주변 환경과 관련된 우리 자신을 인식하는 기본 수단이다. 따라서 걷기는 도시 공간을 경험하고 도시 상상력을 창조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재훈의 시는 걷기의 시학을 구현하고 있다는 기존의 평가처럼 도시생활자인 시적 화자가 배회하고 지나간 발자국의 흔적을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속도와 시간, 합리성을 강조하는 현대적인 도시 속에서 걷는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행위로 비칠 수 있다. 도시의 거리를 걷는 것은 시골길을 걷는 아주 사사로운 옛사람의 산책”(미적인 궁핍, 벌레 신화)과는 분명 다르다. 걷기 활동은 주로 현대 교통수단의 체계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도시 계획이 교통체제에 점점 더 적응하면서 보행자가 무시되는 상황에서 시인은 일부러 걷기를 선택했다. 따라서 시인에게 걷는 것은 도시 계획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이며, 정해진 이동 방식에 대한 반항의 행동이다. 또한, 규범화된 교통수단으로 도시를 통과하는 것과 달리 시인은 걷는 가운데 사색과 몽상 속에서 살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을 스스로 방황하는 몽상가라고 말”(당신은 가짜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한다.

시적 화자가 도시 속에서 바퀴가 싫어 걷다 보면/빌딩의 키가 커진다.” 그리고 핵폭발처럼 밝은 도시/기하학적인 구조물로 가득한 발명의 도시”(미적인 궁핍, 벌레 신화)는 그에게 시각적인 충격을 안겨 준다. 이처럼 시적 화자의 발걸음은 현대적인 현상들을 모두 수용하고 해석하기 위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이곳은 문명의 숲/충혈된 눈으로 비만한 이미지만 봤어요”(다정한 재봉사의 재판, 명왕성 되다)라며 상품의 거리를 분석한다. 아마도 근현대사에서 현대성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가속화된 자본주의의 발전, 다양한 새로운 기질의 출현, 빠른 도시화와 산업화, 그리고 인간의 현실 경험에 시각의 영향력이 커진 것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발전은 시인이 현대 시대를 바라보는 관점들과 자연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시인이 창조한 걷는 자는 도시의 거리 곳곳에 만화경처럼 펼쳐져 있는 현대성의 텍스트를 읽고 있다. 이 현대성을 담지하고 있는 시인의 눈은 카메라를 닮노출을 열고/몇 시간 동안 창밖을 보면/불빛만 남은 세계”(비비디 바비디 부, 명왕성 되다)에 익숙하다. 이처럼 도시를 걷고 있는 시인은 시대의 외부 세계와 현상을 기록하는 특권적인 방법인 현대적 기질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걷는 자는 도시의 새로운 현상, 즉 거리의 새로운 감각을 기록하고 반응하는 지적이고 감각적인 기질을 구현하면서 현대성의 등록 매체로 기능한다. 그런데 이재훈이 창조한 시적 화자들은 일관되게 도시를 어두운 상상의 장소로 묘사하며 그 현대성에 역행하려 한다.

도시는 도시화 과정과 그것이 수반하는 기술 혁신에 대한 경험 속에서 범죄, 가난, 죽음이 생성되는 현장으로 그려진다. 따라서 이재훈의 시에서 서울은 황량하고 악몽 같으며 죽음의 상징으로 가득한 곳이다. 전염병이 돌고 홍수가 나서 오물이 넘쳐 나는 도시는 잿더미에 휩싸여 있다. 이처럼 이재훈의 시들은 가난과 도덕적 타락, 억압이 지배하는 도시의 비전을 창조하며, 사회 변혁을 요구하는 불안스러운 예언적 분위기를 발산한다. “지천에 널려 있는 악의 부스러기들때문에 고통과 어둠이 사십 일 동안 지속될 것이다. 더한 슬픔과 허무가 너를 뒤덮을 것이다”(재의 수요일, 생물학적인 눈물)라는 계시가 잇따른다. “아비를 죽이고 시체를 토막내는 자도 있는 세상에 전염병에 관용은 없고 심판은 멀지 않았”(물고기 바이러스, 생물학적인 눈물)다는 것이다. 재난과 재앙에 대한 두려움은 한층 더 종교적인 정서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도시의 개념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죄의 도시 바빌론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과 타락의 도시 바빌론의 사막 한가운데 있는 공중정원에서는 까맣게 타들어간” “잿빛 몸들이”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한다.”(공중정원,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부패한 바빌론이 신의 파멸을 기다리고 있다는 계시록의 예언처럼 현대 도시의 멸망에 대한 두려움은 종말론적 상상력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시인은 서울의 도시화와 함께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도시의 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오물의 역사로 그려낸다. 미궁으로 비유되는 도시의 복잡성과 계획성은 도시의 거리와 하수로, 강에 대한 태도를 통해 드러난다. 걷는 자는 배설과 오물의 길” “그 위에 서성이다가, “트르륵트르륵 한 세기 동안/콘크리트 덮는 소리를 듣다가/문득 발길을 멈춘다.” 도시는 현대화라는 핑계로 하수의 오물과 공업용 폐기물을 뒤덮으며 성장해 왔기 때문에 그 불순물들은 유독성 물이 되어 도시인들의 발밑을 흐르고 있다. “물이 흐른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네가 버린 물과 네가 뱉은 말이/파이프를 타고 수화기를 타고/물결치며 이 집 저 집을 들락거린다/이 무시무시한 동력.” 이처럼 시인은 도시의 부패와 타락을 오물로 가득한 하수구 시스템으로 표현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시스템 속에서 나는 썩은 물로 컸다.”(도시의 물관(),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게다가 굽이치는 황토물 때문에 사람들은 피부병에 걸려 기왓장으로”(대황하9, 명왕성 되다) 제 몸을 긁는다. 점입가경으로, 도시가 만든 하수구 시스템은 도시의 불순물을 왈칵 분출시킨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몸에서 자꾸 냄새가나고, “거리에는 고름 덩어리를 매단 사람들이 천천히 기어”(역병, 생물학적인 눈물) 다닌다. 현대인의 신체적 고통과 질병, 전염병이 도시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있음을 아주 날카롭게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또, 도시의 일상에 내재해 있는 다원적인 혼란을 꿰뚫어 보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제공한다. 그는 소외와 공허감 속에 무기력과 나태, 방황을 산출하는 현대성의 속성을 속도의 감각으로 재현하고 있다. 현대의 거리는 직선으로 태어나고 사람들은 직선으로 기다린다.” 역한 거리의 질서안에서 사람들은 직선으로 달리는 법을 모르는 채 질주”(직선을 치다, 생물학적인 눈물) 하다가 피를 흘린다. 이들의 질주 속엔 신속과 합리, 경제라는 현대적 매력으로 현란하게 포장된 속도가 개입해 있다. “속도가 폐부를 훑고 지나가는 아침,”(거리의 왕 노릇, 벌레 신화) 현대의 속도를 표상하는 지하철속 사람들은 모두 핸드폰을 들고, 걸고, 만지고, 본다.”(귀신과 도둑, 명왕성 되다) 그러면서 그들은 현실의 자신과 제 옆의 사람들을 보지 못한다.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상시로 온라인에 접속하는 현대인들에게 신중과 반성, 창조를 가능하게 할 숭고한 조건인 고독을 누릴 기회마저 사라졌다는 바우만의 경고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느린 발걸음으로 걷고 있는 시인은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가속도적 촉진을 거스르고, 생산과정과 속도의 현란함에 저항하고 있다.

따라서 시대의 첩보원”(나무의 내력, 명왕성 되다)이 된 시인은 이 도시를 먼 타역으로 여기고 집시가 되어 거리를 걷는다.”(직선을 치다, 생물학적인 눈물) 그는 이 공간에서 주변 세계를 무시하는 것이 자유로워 보인다. 세상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 속에 도시를 돌아다니는 동안, 걷는 자는 소외되거나 버림받은 사람들, 또는 사회의 변두리에 있는 주변인들과의 만남을 피할 수 없다. “이 세계는 깨끗한 것만을 전시해놓으려 하므로 구더기도, 박쥐도, 검은 피도, 집 잃은 고양이도모두 숨기고 지렁이가 나올까 싶어 시멘트를 바르신성한 것들만 숨기는 음모들”(녹색섬광, 벌레 신화)을 꾸민다. 이처럼 도시는 과밀, 질병, 범죄와 빈곤, 고립과 소외 등의 도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부랑자, 도둑, 소매치기, 사기꾼, 매춘부 같은 주변인들을 정화하려 한다. 하지만 시인은 명왕성에서 온 첩자”(카프카 독서실에서, 벌레 신화)이자 이교도”(빌딩나무 숲,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가 되어 이방의 언어로 도시를 읽으려 한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외계인”, “난쟁이또는 그냥 ’”(안드로메다 바이러스, 명왕성 되다)으로 부르며 이 도시의 첩자그냥 먼지”(명왕성 되다, 명왕성 되다)로 치부하고 소외시킨다. 기발표작 침묵의 달인에서 볼 수 있듯이 소외당한 나는 어디를 가든 환영은 없, “억울하게 남았다.” 침묵을 강요하고, 또 침묵으로 응대하는 것이 유일한 생존법이 된 도시의 세계에서 홀로 고독한 주체는 비루한 존재로 남게 된다.

도시를 수평으로 보행하던 이전의 시적 화자들과 달리, 신작시 돌멩이 기도에서 걷는 자는 산에 올라 도시를 바라본다. 물리적으로 높은 위치에서 도시를 관찰하면 관음의 조감도가 형성된다. 관음인은 자신의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조망하며 익명의 거대한 도시 전체를 볼 수 있다. 그가 내려다보는 도시는 매일 강도와 강간이 일어나고 자살을한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나를 감추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고 변명과 회개를 일삼는다. 그런데 주머니에 남에게 던질 돌을 가득 넣은 채/상처의 말들을 입에 가득 담은 채걷던 시적 화자는 나도 모르게 주저 앉아 돌을 품으며 지나치는 사람들의 눈망울을 마주한다. 상처가 되고 고통이 된 돌을 품는 그의 모습에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돌팔매질 당하고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상이 겹쳐지는 것은 과잉 해석일까. 자신을 순례자라 생각하는 것”(혈통, 생물학적인 눈물)이 주어진 운명처럼 느껴지는 시인에게 걷는 것은 순례의 삶을 은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처럼 온 땅을 모두 밟아보고 싶었”(순례,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던 소망대로 시인은 이 도시 속에서 나는 사십 년의 광야처럼 매일 순례하며 살고 있다.”(나르치스, 벌레 신화)

 

 

3. 언덕의 아들, 시시포스의 돌

 

도시생활자인 한 남자의 일생을 시인은 풀잎에 매달려 있다가/,/떨어진 애벌레의 한해살이로 표현하였다. 맥없이 지상에 떨어진 인간의 운명이 지닌 속절없음은 이 이라는 한 단어에 압축되어 있다. 어쩔 수 없이 아스팔트 위를 기는 애벌레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하다가 상처를 입기 때문에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 데/온 생을 바”(남자의 일생, 명왕성 되다)친다. 이재훈은 가혹한 인생의 수레바퀴에 짓밟히는 인간의 형상을 운명론에 입각해 표현하려고 언덕이란 시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이 세계는 오르는 순간보다/흘러내리는 순간이 더 잦은 땅이다. 그래서 한 남자는 애벌레처럼 기었다/울었다/다시 기었다.”(아직 사십대, 생물학적인 눈물) 이처럼 이재훈의 시 속 걷는 자들의 산책길엔 언덕이 있다.” 따라서 시적 화자들은 오르고 올라도 닿지 않는 거리를 헤맸다.”(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명왕성 되다) , 시인이 창조한 언덕의 아들저녁의 거리를 걷다 보면, 어느새 달린다.” “도시의 속도에 적응된 발로 허공을 구른다.” 그리고 메마른 얼굴에 눈물이 흐른다.”(언덕의 아들, 명왕성 되다)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이 질긴 운명”(정의, 생물학적인 눈물)의 깊고 깊은 절망감. 이런 삶의 굽이굽이를 넘어가는 사이 어느새 나는 돌의 근원을 생각했다.”(, 명왕성 되다) 이재훈이 인간의 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유의 방식은 바로 이 언덕에 대한 비유 속에 녹아 있다.

시인이 매일 다니는 골목길에 큰 돌 하나 있었다./무심코 지나쳤으나 돌은 늘 거기 있었다.” 그리고 그는 가끔 지칠 때 돌 위에 앉아 쉬었다.” 그가 돌 위에 앉아 있으면/저 바닥 아득히 짐승의 울음이 들리는 듯/엉덩이가 뜨끈함을 느꼈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를 가진, “피의 온기를 가진 돌”(, 명왕성 되다)은 숭고한 인간의 삶을 상징한다. 또한, 이재훈의 시에서 언덕과 골목길에 있는 돌은 시시포스의 돌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 시시포스는 신들로부터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리는 형벌을 받아 그것이 산 아래로 다시 굴러떨어지면 몇 번씩이나 되돌아가서 굴리는 행위를 반복해야 할 운명에 처했다. 문제는 신들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시시포스의 언덕 넘기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원히 목표에 미치지 못할 시시포스의 돌은 성공을 성취할 수 없는 허무와 절망의 상징으로 이해된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시적 화자는 언덕을 오르고/또 한 언덕을 오르면/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명왕성 되다)지 모른다는 저 언덕의 희망 고문에 시달린다. 소원을 성취하려면 개인의 고통과 인내가 당연히 따른다는 현대성의 주술은 인간이 현재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이루면 모든 게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목표를 향해 달려가도록 돕는다. 이 같은 효율적인 사고방식은 인간이 정해진 목표를 향해 달려가느라 정작 잃어버린 것들을 알 수 없도록 은폐하고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놓는다. 이재훈의 시에서 하루하루를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시적 화자들은 의욕적으로 넥타이를 매고 미소를 연습한다.”(매일 출근하는 폐인, 명왕성 되다) 이같이 거울 앞에 선 수많은 표정은 밀고 밀린 생들이”(건기(乾期)의 새, 명왕성 되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 세계의 삶 자체를 시시포스의 형벌이 내려진 유형지’(유형지, 벌레 신화)로 인식한다. 시시포스는 자신의 노동에 대한 해결이나 만족에 대한 희망 없이 일하는 사람을 나타낸다.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을 향해 계속되는 노동은 영원히 실패할 것이라는 좌절감을 동시에 생산한다. 따라서 시적 화자는 구하고 절하고 넘어지는 어제와 오늘”(고통과 신체, 생물학적인 눈물)의 반복된 삶 속에서 고통의 비명을 지르지만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앉은뱅이꽃, 명왕성 되다)는 고립감과 비통함에 빠져 산다.

그러나 시인이 정작 두려워하는 대상은 생의 분노도 잊은 채, 태평하게 먼 이방의 전설을 말하는 내 입술”(순례,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이다. 개인의 자유를 박탈당했음에도 분노를 느끼지 못하고 자동인형처럼 감각이 마비되어있는 상태는 산주검(living dead)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시인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아무것도 기대하지 않통각이 없는 시간들”(물에 대한 사소한 변론, 명왕성 되다)에 갇혀 침묵하고 이름을 부여하지 않으려 하는, 허무적인 존재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픔을 느끼는 감각이 없는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분명 죽음의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다. 시에서 주체의 부조리에 대한 인식은 자유로운 영혼의 갈구를 상징하는 목마름과 연결된다. 그래서 인생의 사막 한가운데서 목이 마르다는 걸 알게 된 건/내가 광야의 시간을 견뎠기 때문일까/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밭을 걷고 있었기 때문일까”(마라의 오아시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라고 자문해 본다. 결국, “밤거리를 배회하는 이유도 모른 채/방황하는 몽상가라고 말하는 당신은” “가짜다”(당신은 가짜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라는 판결과 함께 시적 화자들의 자기반성이 이어진다.

카뮈는 시시포스가 결코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을 향해 무겁지만 신중한 발걸음으로 되돌아 내려오는 그 잠시의 휴지의 순간에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숨 쉬는 공간과 같은 이 순간을 고통만큼이나 확실하게 돌아오는 의식의 시간으로 해석한다. 깨어있음으로 살아가라! 따라서 시적 화자는 도시의 은유에 머물렀다가/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며 와르르/내 얼굴이 무너짐을 본다.”(거울 속의 얼굴, 명왕성 되다) 이런 자기반성의 기록들 속에서 시를 짓는 한 인간은 계속 재판이나 심판을 받으며 반성성을 드러낸다. “나는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다짐으로/생을 버텨왔다 그러나/멀리서 새벽 종소리가 들려올 때/나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마루,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라는 자아의 분열상은 시인의 열망하는 자아와 상황적 자아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을 나타낸다.

시시포스의 운명은 오로지 자신의 그 노동들이 결국에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거나 깨닫게 되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부조리한 인간 조건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바우만은 시시포스가 바로 자기 자신의 그 비참한 고통에 압도당해 사로잡히면서 그 자신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곤경에 대한 유일한 답변이자 그 곤경으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이끌리게 된다고 본다. 이재훈의 시에서 손목 깊숙이 칼날이 헤집고 들어오는 자살의 모티프가 자주 사용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돈을 숭배하고, “수학의 아름다움이 지배하는 세계”(안드로메다 바이러스, 명왕성 되다)는 감염자의 공격성을 극대화하여 자살에 이르게 하는 바이러스가 공기 중에 떠돈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더러운 짐승이 된다”(정의, 생물학적인 눈물)는 두려움에 칼을 의지하며사는 시적 화자들은 존재론적인 소외와 불안의 고통에 갇혀 칼을 꺼내 손목을 그었다.”(귀신과 도둑, 명왕성 되다) 그러나 손목 깊숙이 칼날이 헤집고 들어온 날/온몸이 뜨거워지다가 갑자기 허기가 몰려”(결핍의 왕, 생물학적인 눈물) 온다. 허무와 절망의 고통이 반복되는 이 세계에서 자살이 아니라 제 삶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한편으로 고통의 방언을 멈추지 않는다. “이 엄살은 모두 기획된 것. 더 타락하기 위해 준비된 것. 더 성스럽기 위해 예비한 것. 거룩한 엄살은 악마를 교란시킬 수 있는 무기”(대리자(代理者), 벌레 신화)라며 계속 위악을 부린다.

삶이 본질적으로 좌절감을 안겨 주는 신의 사업이나 운명으로 묘사되는 한, 시인의 비전은 영원한 불만을 나타내는 이미지를 상상하는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늘 길 위에 있을 것이다./점퍼를 입은 사람들을 볼 것이다./새로 발행된 지폐의 냄새를 맡지 않을 것이다./윤리를 잊을 것이다.” “세상의 고아가 되어/명왕성의 시민이 될 것이다.”(언젠가는 영월에 갈 것이다, 생물학적인 눈물)라는 다짐들을 되뇌며, 좌절을 불러오는 생의 조건들에 대한 투쟁을 선언하고 저항의 몸짓을 탐구한다. “이제 군주는 필요 없다”(녹색 기사, 벌레 신화)라는 선언과 함께 학살에 속한 세계거리의 질서에 저항하다 피를 흘리고, 저주의 말로 땀을 냈다. 짐승처럼 쓰러지고 일어났다. 바람이 사는 거주지에 자주 운신했다.” 그리고 거리의 규율을 화분에 옮겨 담았다.”(파종의 도(), 생물학적인 눈물) 더 나아가, “씨앗이 되고 싶은 시인은 거리의 규율을 흙 속에 묻어 어둠 속에 가둔 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가/역전에 누워 있는 노숙자들에게 닿고 싶”(주술적 인간, 벌레 신화)어 한다. 카뮈는 의식과 반항이라는 거부 행위는 포기와 정반대라고 말하며 인간이 제 삶의 주인이 되어 부조리의 사막을 벗어나지 않은 채 그 속에서 버티는 삶을 살도록 격려하였다. 반인반마의 혼종성을 상징하는 사수자리 켄타우로스처럼 떠돌고 방랑하는 순례자의 삶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시인은 꺼지지 않는 촛불의 위태로움을/말 위에서 견디는 삶”(사수자리,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을 선택하고, 노래한다.

 

 

4. 강철 무지개를 벼리며

 

밤을 지새우니 비가 내린다. 사선으로 빗금을 그으며 산에 빗자국을 그린다. 비가 가슴을 그으며 내린다. 비가 가슴으로 파고들며 내린다. 모래를 잔뜩 실은 트럭이 언덕 밑으로 떠내려간다. 홍수는 아닌데 차가 떠내려가고 동물이 떠내려 간다. 비는 내일이면 그칠 것이다. 내일이면 그칠 텐데 모두 떠내려간다. 첩첩산중에서 아래를 본다. 모든 시간이 빗금을 그으며 상처를 낸다. 지혜가 없어 빛을 잃어버리는 언덕. 고개를 올려다보면 더 가파른 비탈이 있다. 지금, 여기. 나무와 나무 사이. 풀과 풀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둥그런 땅에서 한참을 졸다 깨어난 아침. 햇살이 언덕을 타고 오른다.(궁륭(穹窿), 생물학적인 눈물)

 

고로, 거칠고 위태로운 인생의 사막 위에 씨앗이 되고 싶은 시인은 햇살이 언덕을 타고 오르듯,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산다. 위 시에서 비가 가슴을 파고들며 상처를 내는 이유는 사선으로 빗금을 그으며내리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합리, 체계, 이념의 경계를 상징하는 빗금은 그 속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입은 상처의 원인이 된다. 이 시에서 시인은 궁륭형의 빛을 잃어버리는 언덕이 아침 햇살과 함께 무지개다리 형상으로 변성되는 기막힌 전환을 보여주면서, 존재와 타자 사이의 견고한 빗금을 뛰어넘는 시적 연금술을 발휘한다. 그리고 빗금 사이에 존재하는 이분법적 구분의 벽을 허물고 경계의 영역을 이동하면서 지속적인 변화를 꾀한다. 그 바람에 나무와 나무 사이. 풀과 풀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인간과 반동물적인 물질세계 사이의 빗금이 풀어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노을은 경계도 없이 제 몸을 허물기 때문에 아름다운 노래가 된다.”(풀이 던진 질문, 벌레 신화) 그리고 사물의 경계를 지우고 스미는 안개를 온몸으로 먹고 슬픔은 기지개를 편다”(누대(屢代), 생물학적인 눈물)라는 서럽게 아름다운 문장이 탄생했다. 이렇듯 인간이 자기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존재자와 교섭하는 하나의 존재 양식으로서 기능하는 사이 세계는 두 기표 사이에서 번쩍이는 은유의 창조적 섬광을 보여준다. 사이라는 통로를 통과하면서 새는 나무에게로 나무는 새에게로존재론적 변이를 한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옮아가는 것”(새에게로 나무에게로, 생물학적인 눈물)이라는 경이로운 시적 결론에 이른다.

신작시 눈물로 돌을 만든다는 눈물과 돌의 경계를 지우고 맞이하는 존재론적 변이를 표현하였다. 눈물에 감동하지 않는 사람을 돌의 심장이라고 표현하는 관용어처럼, 눈물은 돌이 지닌 딱딱하거나 차갑거나 건조한 상태와 반대되는 성질을 지녔다. 흐르고, 따뜻하며, 축축한 눈물은 생명력과 치유의 상징이 되었으며 선하고 경건한 감정의 증거로 기능해 왔다. 또한, 물질적 상상력에 있어서 흐르는물은 생명과 여성성을 상징하며 모성의 근원적 특성을 지닌 것으로 여겨져 물질을 이루는 근원적 원소로 이해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 눈물은 사람을 만든다.” 그리고 눈물의 사제인 시인은 눈물의 시를 써서 사람을 만든다. “복수를 모르고/변신하는 방법을 모른, “온몸을 섭리에 맡기는 돌은 평생 구르는 노동과/몸을 벼리는 일만 안다.” 이 돌은 한평생 고지식하게 생산의 노동에만 임해 온 프롤레타리아를 상징하고 있다. 기득권을 쥔 체제는 땅의 온갖 죄를 돌에게 담당시켰다/던지고 차고 묻고 깼다.” 그 바람에 돌은 썩지 않는 형벌의 몸을 가지고 침묵을 지키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시인은 공중에서도 바닷속에서도 땅속에서도/몸을 부딪칠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다시 귀환하는 돌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한 상상은 노동자들이 운명에 맞서 싸워온 길고 긴 투쟁의 역사가 담고 있는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이 시에 따르면 돌은 분명 오랜 시간 인간들이 그들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며 흘린 눈물의 결정체이다.

이재훈이 물질적 상상력에 기반하여 고통의 눈물로 만든 은 연금술사들이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들을 배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 때 촉매제 역할을 했던, 상상적 물질인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처럼 여겨진다. 연금술사들은 연금술이 자연적 사물 안에 있는 형상을 완전성으로 이끄는작용에 관심을 가졌다. 카를 융과 같은 분석심리학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면, 연금술은 근원적으로 내부적이고 영적인 완전성을 획득하기 위한 내향적 탐구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연금술은 완전함을 추구하는 종교적 수행과도 같았다. 근원으로부터 창조하고 모든 경험을 살아있는 영혼의 형태로 변형시키는 시인은 연금술사와 공유되는 부분이 많다. 그런데 인간과 신성의 영역을 분명하게 한계지으려 했던 중세시기에 악마가 소유한 기예를 평가하는 척도가 되기까지 한 연금술적 상상력은 신의 창조 능력을 찬탈하려는 불경한 것이었다. 때로 불경하고 불온한 시인은 하나의 물질 원소에서 다른 원소로의 변성을 상상하며 말이 진화하면 물이되는 고도로 단련된 연금술”(기타가 있는 궁전,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을 구사한다. “잠든 말을 만지면 그제야 너는 벽화가 된다 널 만지면 황소가 되었다가 사슴이 되었다가 초원을 가로지르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타 노래를 부르는 추장이 된다.”(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이처럼 시인의 환상 연구실에서는 모든 원소가 경계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반사하고 굴절되어” “회귀하며 얽히고설키고” “꿈이 무지개로 반사”(환상 연구실, 생물학적인 눈물)되는 신비스러운 연금술이 펼쳐진다.

또 시인은 재봉사가 자신의 직업이라며 가끔씩 바늘을 들고 몽상에 잠그 몽상을 새로운 무늬로”(다정한 재봉사의 재판, 명왕성 되다) 짜내는 페넬로페가 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몽상을 꿰매어 꿈시를 짓는 시인이 바느질하는 이유다. 그는 하늘을 날고 있는 제 모습과 더불어 저 먼 세계를 비상하는 영혼의 고난함을 짜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재훈은 돌덩이에 바싹 닿은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은 이미 돌 그 자체 볼 수밖에 없는 비탈길의 시시포스가 느꼈을 고통과 슬픔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는 시시포스의 눈물에 눈물로 응대한다. 시인은 내 삶은 죽어 있는 새들의 시체를 보는 것에서 시작하곤 한다며 이른 아침, 누군가에게 밟혀 배가 터져 있는 까마귀”(까마귀 속에 나의 시간이 있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를 예사로 넘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문밖에서 울고 있는 힘없는 사람들의 눈물 흐르는 소리” (라틴어를 배우는 시간, 생물학적인 눈물)에 먹먹해 괴로워한다. 이처럼 소외되고 나약한 존재에 관한 관심과 염려에서 부터 생겨난 시인의 감수성은 다른 사람들이 무관심하게 보아넘기는 바로 그것에서 촉발된다. 그래서 그는 태초부터 울고 있는 사람들의 상처를 긁어내 주고 싶”(부패한 사랑, 생물학적인 눈물)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상처 입은 자들과 하나가 되어 울고 또 운다. 이재훈은 이 통곡의 지점에서 슬픔의 본질에 관한 탐구를 시작한다.

일 분 일 초의 생존만이 철학”(풀잎의 사소한 역사, 생물학적인 눈물)으로 지배하는 세계에서 슬픔과 고통에 지나지 않는 한 개인의 인생이 보여주는 참담한 광경은 울음으로 살아온 인류의 역사로 재조명된다. 그 눈물의 역사는 슬픔과 고통이라는 감정이 인생 그 자체의 고유한 속성임을 드러낸다. 결국, 이재훈의 시는 슬픔이 없는 세계는 없지”(평원의 밤, 벌레 신화)라는 인식과 더불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경험에 속하는 고통에 관한 깊이 있는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머리를 감다가 어처구니없이 울게 될 때./양치를 하다가 가장 더러운 모습으로 청승 떨 때밀려오는 슬픔은 그저 조건일 뿐”, “운명의 이름일 뿐”(기다림 방법, 생물학적인 눈물)이라는 것이다. 즉 슬픔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적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고통과 함께 살아가기. 그렇다면 그 고통을 인식하는 주체의 태도가 더 중요해진다. 시인은 슬픔과 고통의 언덕 끝에서 절망보다는 삶의 회복을 염두에 두며 고통의 새로운 이해를 성취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이재훈은 슬픔과 고통의 경험을 어떻게 재구성하는가에 몰두한다. 우선, “눈물은 흘려야만 제 몸을 갖는다”(비비디 바비디 부, 명왕성 되다)라며 눈물을 언어화하고 있다. 오랜 시간 눈물로 말해온 탓에 내 어깨는 울음으로 지어졌다.”(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한 얼굴의 죽음에 관하여,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시인은 개인의 자유가 구속될 때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육체라고 본다. 따라서 몸의 증언인 울음소리는 눈물의 언어가 되어 억압적인 사회질서 속 개인의 상처를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다음으로, 슬픔의 위안이 될 만한 위로의 기술을 모색한다. 인간의 울음소리가 가득한 이 광야에서 위로의 딸이 되고 싶었다”(물질에 울다, 명왕성 되다)라는 시인의 고백도 있다. 글쓰기는 예전부터 병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곤 하지 않았던가. 현대의 사람들은 불행의 뒤만 쫓으며/아파트로 들어가고 사무실에 갇힌다.” 이같이 일상이라는 지능적인 시나리오에 빼앗긴현대인의 영혼을 위로하려는 시인은 매일 입고 벗는 시가 되기 위해 환각을 맞는다.”(당신은 시를 쓰는 사람인가요, 생물학적인 눈물) 인간은 자신이 지닌 내적 가치와 외적 세계 사이의 틈을 메꾸는 하나의 상징적 형식을 갈망한다.환각이 없다면 어떻게 인간을 견뎌낼 것인가”(엉뚱한 기차는 꿈을 돕는다, 생물학적인 눈물)라는 시인의 토로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환각으로 비유되는 몽상만이 이 비참한 세계를 살아가기 위한 자구책이 된다. 따라서 몽상도 죄가 되나요”(다정한 재봉사의 재판, 명왕성 되다) 라는 시인의 호소는 마음속 깊은 울림을 낳는다. “이후, 누구에게 밟히거나/공중에 던져져도 괜찮았다./나는 자꾸 진화한다./詩人이었다가 일용근로자였다가 백수건달이었다가 독학자가 된다./어떤 모습에도 아파하지 않는 내성(耐性)의 몸”(비상, 명왕성 되다)을 갖게 된 것이다.

계속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여러 시 속에서 되뇌고 있었지만, 사실 시인은 기적을 행하고 싶어 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고 싶”(물질에 울다, 명왕성 되다)기적이 일어나” “완벽한 평화가 되(기발표작, 침묵의 달인)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현대라는 부조리한 시대에 거주하고 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강한 연민과 공감을 드러내는 이재훈의 시적 세계는 고통의 파편을 재건하고 조립하며 별자리를 만들어나가는 개방적인 구조 속에서 마법적인 순간들을 아끼지 않고 창조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나는 그 무엇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무엇으로도 존재의 변성은 가능하다. 따라서 차갑고 텅 빈 사물에/쇳물을 들이붓고 싶다./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뜨거운 강철이었다는 물질적 인식으로의 귀결은 그의 시 세계에서 지극히 합당해 보인다. 슬픔으로 울고 또 울다가 목이 마르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라는, 강철로 된 시인의 몸은 슬픔이 깃든 에밀레종의 전설처럼 비밀의 성소(聖所)”가 된다.”(연금술사의 꿈, 명왕성 되다) 아이가 어미를 부르는 듯 슬픈 소리를 내는 이 종은 내 육체로 당신의 영혼을 말하기 위해, “애써 당신의 운명을 노래”(주술적 인간, 벌레 신화)하기 위해 시인의 눈물과 피, 살로 빚어진 것이다.

시인은 그저 그리워하는 직업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고단한 삶 속에서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나르치스, 벌레 신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이 지닌 슬픔은 멀찍이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되었어요. 만지지 못하고, 쓰다듬지 못하고, 홀로 방탕했어요”(추천해주고 싶지 않은 직업, 생물학적인 눈물)라는 자성을 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워하는 병에 걸려 매일 참회의 시를 쓰”(치미는 몸, 벌레 신화)는 그는 모든 그리운 것들이 어룽대는/스밈의 환()”(연옥의 산, 명왕성 되다)에 빠져 산다. ‘그리움스밈은 사랑과 소통의 본성이 아니던가. 신형철은 문학이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의 말만이 진실하게 들리기 때문이라며 타인의 고통을 정확히 인식한 시만이 정확한 위로를 할 수 있다고 본다. “말이 없어도 언어가 없어도 알 수 있는소통의 길을 꿈꾸는 이재훈은 원시의 감각”(나르치스, 벌레 신화)을 소환한다. 그것은 비밀을 말하지 않아도 맛보면 다 아는” “춥고 서글픈사람들의 맛보는 공동체”(맛보는 공동체, 벌레 신화)를 형성할 수도 있다. 이 원시의 감각 속에서는 밟혀야 할 운명을타고난 눈이 떠올라/내 발목을 쥐고/너도 나처럼/떠올라라/떠올라라속삭이며 조용한 혁명을/일으키는 것이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따라서 시인은 이 세계에 충성하고 싶지 않다. 사랑하고만 싶다며 장막을 걷고 거리와 섞였”(오로지 밤의 달만이 반겼다, 생물학적인 눈물)던 것이다. “사랑은 위험한 길에서 더욱 악착같은 것./더 아래로 굴러떨어지더라도/더 위로 매달리더라도/마치 한 마리인 듯 두 마리인 듯/서로의 목을 물고 처절하게 붙어 있”(아직 사십대, 생물학적인 눈물)는 것이라는 깨달음 후, 시인은 사랑에 천착한다. 애당초 시는 연애와 같은 것”(당신은 시를 쓰는 사람인가요, 생물학적인 눈물)이 아니던가. 시인이 한 시절을 울다보면 살짝 데친 가난이 서로 부둥켜안고 있”(나물 같은 시, 생물학적인 눈물)으며, 그가 걷던 순례의 여정엔 늘 사랑이 있”(나르치스, 벌레 신화)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분석을 통해 볼 때, 완성을 향한 시인의 조립과 재구성은 정확한 사랑을 위한 실험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재훈의 시 세계에서 구원의 징표인 어머니는 마루에 앉아 엉덩이 밑에서 건져올린 슬픔을 한 올 한 올 뜨고 계신다.” 이 모습에서 시인은 이별은 순간이다/그 순간을 이겨낸 자만이/슬픔을 바닥에 깔고 앉을 수 있다”(마루,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라는 통찰을 얻어 냈다. 상처 입은 자들이 슬픔과 고통에 침윤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고 더욱 단단해지기를 바라는 시인의 바람이 드러난다. 이념과 합리를 요구하는 자본주의 현대 사회에서 재킷을 입고 시를 쓰는 시인의 외투는 실상 어머니의 살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재킷, 재킷! 하면 어머니의 뇌와 심장이 실이 되어/올올이 풀려나온다.” 그런데 그 헌신과 사랑으로 짠 재킷을 입고 추위를 견딘 나는정작 어머니에 대해 쓸 수 없다.”(재킷을 입은 시인, 명왕성 되다) 이 시대의 시인이 처한 운명을 잘 표현한 시가 아닐까 싶다. 시의 언어가 시인의 손에 의해 슬픔의 씨줄과 날줄로 엮어져서 한 편의 시로 태어난다. 하얀 종이 위에 천 일 동안 잃어버린 기억을 하나씩 써나갔어.” “빼앗긴 내 기억들을 처음부터 다시 조립하며 미완성의 시를 써나가는 것, “그것이 지상에서 내가 사는 유일한 길이었어”(시인 셰에라자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라는 셰에라자드의 절박한 이야기는 완벽한 미완성을 향해 나가는 시인의 생애이기도 하다. 시는 미학적인 완성을 향해 가면 또다시 미끄러지고 실패의 늪으로 향하는 본질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시인의 시적 사유는 무거운 돌을 짊어지고 평생 반복하여 언덕을 올라야 하는 시시포스의 운명이 시의 운명과 다름 없다는 말과 함께 공명한다. 시인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은 미끄러짐과 어긋남이라는 잦은 이별로 솟구치는 슬픔과 고통의 반복 속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을, 정확한 사랑에 이르려는 노력임을 알 수 있다. “다정한 시인인 그는 어제와 다름없이 오늘도, 서럽게 아름다운 눈물의 선물을 우리에게 건네며 울음으로 지어진 어깨를 다독인다.

_ <딩아돌하>, 2023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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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세상을 읽어가는 동안

  
배진우(시인)



  새로운 언어를 접할 때는 새로운 추임새를 배우고 새로운 문화를 배운다. 새로운 언어를 사용할 때 내가 아니던 내 성격이 튀어나온다. 몇 개 국어가 가능한 사람에게 나는 질문을 던진다. “외국어를 쓸 때 다른 사람이 되는 거 같아?” 어떤 사람은 그렇다고 말하며, 어떤 사람은 내 성격이 어디 가겠느냐며 모국어를 쓸 때처럼 한결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라틴어를 배우는 시간」을 읽고 생각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언어로 세상을 읽어나가는 것에 제한이 있다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내가 아닌 성격으로 세상을 읽어간다면 다르게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세상을 읽기에 좋은 언어와 성격은 무엇일까. 내가 알고 있는 언어가 세상의 끝 같다. 세상이 벅차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언어는 세상을 설명하기에는 한 박자 느리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세상을 읽을 수 있는 자아를 발견한다면 세상이 조금 더 쉬울까. 
 「라틴어를 배우는 시간」의 화자는 질문한다. 그리고 대답한다. 무언가가 되어 있지 않은 문장으로 말을 채웠다. 무언가 된 것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무언가가 되고 싶어서 연습한다. 말하며. 우리들이 알고 있는 기본적인 회화를 벗어나서 말이다.

  말을 하고 있는 나와 내가 말하고 있는 나는 다르다. 시에서 화자는 이 사이를 오가며 자기를 소개하며 자기의 위치를 보여준다. 말하고 있는 화자의 위치는 나약하다. 본인 소개를 통해 보자면 나약한 곳만 ‘찾아’다녔다. 약자와 잊혀 진 것 사이에서 그간 시인은 이야기를 해왔다. 이재훈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에서 표제작인 「명왕성 되다」에서는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하는 문장이 있다. 명왕성은 더 이상 행성이 아니다. 행성에서 소외당했다. 명왕성이 행성이다 아니다 라고 말하는 인간이 있기 전부터 명왕성은 그 자리를 지켰을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명왕성은 거기 있었고 사람들은 명왕성을 정리했다. 남아있는 명왕성을 읽은 것은 시인이다. 이처럼 사회적 분유물이 되어버린 것을 응시하는 시인의 시선은 이번 작품에서도 남아 있다. 나약하고 쓸쓸한 화자의 언어를 옮겨 적음으로 인하여 라틴어를 배우고 있는 그의 자리를 보여준다.    
 
 「라틴어를 배우는 시간」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 첫 문장은 “선생님.”이며 마지막 문장은 “눈곱을 떼어내고 이방의 언어로 세상을 겨우 읽기 시작한 근사한 순간이에요.”이다. 시의 첫 단어 “선생님.”으로 보아 강의실에서 라틴어를 배우며 말하는 화자가 그려진다. 화자가 연습하는 문장은 당연하게 자기를 소개하는 것이다. “저는 집을 떠나본 적이 없어요. 바닷가의 노을을 보고 싶어도 참았어요. … 대신 저는 죽지 않았어요. 겁은 났지만 나약한 자리만 찾아다녔죠. … 먼 바다의 시간을 견뎠어요. … 내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죄라는 사실을 몰랐죠. … 거리를 걷다가 넘어져 있는 나를 보았어요. 무릎 꿇고 울고 있어요. 나는 선물이 되지 못하고.” 
  화자가 지금 당도해 있는 공간은 ‘선물이’ ‘맛이’ 무언가가 되지 못하는 무언가가 될 수 없는 공간이다. “맹인이 그림을 그리고, 벙어리가 노래를 부르”는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곳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 계속하여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있는 것밖에는 되지 못하는 곳이다. 화자는 이 공간을 벗어나려 한다. 언어를 통해.

  화자는 본인의 영역을 떠나 본 적이 없다. 그런 그가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 배우고 ‘괜찮다면 괜찮은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려 한다. 본인이 살고 있는 영역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순간을 상상한다. 그리고 “눈곱을 떼어내고 이방의 언어로 세상을 겨우 읽기 시작한 근사한 순간이에요.” 이방의 언어로 세상을 곧 읽어나갈 것이다. 
  질문하는 문장과 아무것도 되지 않으려고, 되지 않은 문장의 연쇄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의도가 되는 문장들.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고 부서질 듯 부서지지 않은 가늘고 강한 문장들이 이 시에 있다. 언어가 밖으로 나온 이상 언어가 읽어갈 세상을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세상을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언어로 “가장 위험한 사랑”의 시간을 시작할 것임을 믿는다.

 *
  
  세상을 읽어가는 방법 중 하나로 우리는 언어를 배운다. 언어를 배우며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한다.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를 만든다. 슬퍼서 슬프다고 말하고. 들어주는 사람은 때때로 알맞은 표정을 지어준다. 「라틴어를 배우는 시간」을 읽고 가장 마음에 드는 문장을 찾아 밑줄을 그었다. 어제의 문장과 오늘의 문장이 달랐다. 마치 슬픈 이야기를 하는 사람 앞에서 다른 표정을 지어주기 위해 잠시 노력했던 것처럼.   
 언어를 어디까지 알아야지 시를 쓸 수 있을까? 또한 잘 읽을 수 있을까? 국어사전을 펴놓고 단어에 집착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시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에는 도움을 주진 못한다는 것만 깨달을 뿐이다. 글쓴이는 지금도 알고 싶다는 욕심의 덩어리만 있을 뿐 시를 모른다. 그렇기에 시를 쓴다. 그렇다면 새로운 언어를 잘 모를 때에도 막연한 문장의 충돌 사이에서 시가 나오지는 않을까. 몰라서 목적어를 잊고 횡설수설하며 내가 가지고 있는 답답한 언어의 범위에서 무언가를 말해야만 할 때가 있다. 그 때에는 언어에게 구걸이라도 하여 정확한 문장을 가지고 싶다. 세상을 읽을 수 있는 문장을. 또한 세상이 나의 문장을 읽어주길 바랄 때도 있다. 세상 어딘가에는 나의 문장이 속하기를 바란다. 

_ <현대시> 2019년 7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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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로부터 오늘, 오늘로부터 내일


류수연(문학평론가)



2. 우리 모두의 생물학적인 슬픔 – 이재훈의 '생물학적인 눈물'

이시영 시인의 세계가 일상에서 문득 포착된 자연의 찰나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고자 했다면, 이재훈 시인의 새 시집 '생물학적인 눈물'(문학동네, 2021)이 응시하고 있는 세계는 지극히 현실적인 일상 그 자체이다. 시인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삶이고, 그것을 살아내는 인간이다. 

차창 밖으로 비가 내린다.
버스를 타기 전에는 맑았던 하늘인데
집으로 가는 길에 비가 내린다.
지방 소도시의 대학에서 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갈 때면 늘 가혹하게 막힌다.
모두 저마다 집으로 가거나
외로움을 달랠 사람들을 찾아가거나
저녁 일터로 가는 길일 것이다.
휑한 마음 한구석에 빗방울이 또르륵 떨어진다.
매일 보따리를 들고 어딘가로 나서는
장사꾼의 저녁이 궁금하다.
언제쯤 집에 당도할까.
쉬어야 할 집은 멀고
목은 더 컬컬해진다.
버스 뒷자리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사연인지 생각하다
뒤로 가서 가녀린 등을 토닥거려주고 싶지만
모르는 척 그냥 눈을 감는다.
도착할 집은 멀고 잠은 오지 않는다.
버스가 도착할 무렵이면
가까운 막걸리집부터 찾을 것이다.
컬컬한 목이 바짝 마른다.
- 「퇴근」 전문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가는 길, 휴식이 되어야 할 집은 아직 멀기만 하다. 버스를 채운 사람들의 모습조차 크게 다르지 않다. 집으로 돌아가거나, 누군가를 만나러 가거나, 아니면 또 다른 일터로 향하는 길. 시인은 그곳에서 문득 외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도 이미 알고 있다. 이 외로움은 사실 그리 지독하거나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그것은 이미 오래도록 익숙하게, 삶의 매순간마다 마주쳐 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목이 바짝 마르도록’ 긴장되고 힘겨운 것은, 그것이 영원히 극복되지 않을 근원적 고통임을 보여준다.
과장되지 않게, 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게 시인의 일상에 배어들어 있는 이 슬픔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진원지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을 운명적인 슬픔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기원은 아무래도 시인의 이전 시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꽃 속에 산다.
웅덩이에 잠겨
달콤함에 취해
먹고 싸며 늙는다.

그곳이 지옥인 줄 알고
기어 나올 때

지옥을 보려고 온 사람들
예쁘다고 기념할 때

벌레들끼리 서로 눈 마주쳐
징그러워 깜짝 놀랄 때

마지막 계절은 
툭 떨어진다.
- 「벌레」 전문

이재훈의 전작 󰡔벌레 신화󰡕에 실린 「벌레」는 기괴하기보다는 애잔하다. 벌레의 존재가 인지되는 순간은 벌레(혹은 벌레임을 각성한)들이 ‘서로 눈이 마주치며’ 놀라는 바로 그 때이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느 순간에 서로와 조우하는가이다. 그들만의 지옥을 벗어나자 오히려 혐오의 지옥이 펼쳐지는 이 모순된 순간. 시인은 한 마리의 벌레가 된 자신을 자각한다. 그리고 그의 계절이, 세계가 변화한다.

바람은 바닷물을 뒤집고
바닷물을 따라 물고기들이 솟구친다.
햇빛에 몸을 기울이는 수중식물이
바닷물끼리 부딪히는 협곡에 숨어
줄기에 공기를 불어넣는다.
몰락의 길에는 비상구가 없다.
오랜 사랑이 없고 도륙과 생존만이
물속의 시간을 지배한다.
맑은 하늘 아래 아이가 뛰어놀고
씨앗들이 바람을 따라 잉태하는 땅.
순수한 길을 걸었다는 어떤 시인의
추악한 옷가슴을 보았을 때
원시의 바다를 생각한다.
오직 생존만이 도덕인 바다의 꿈틀거림.
미래를 점칠 수 없는 계절이 계속되고
가장 알량한 회개가 마음을 헤집는다.
수면 위로 솟구쳐올라 바위에 온몸을 부딪치는
눈물벼락.
남몰래 땅속을 흐르는 물주머니가
천둥처럼 얼굴에 달라붙는다.
- 「생물학적인 눈물」 전문

시인이 지옥 바깥에서 만난 또 다른 지옥은 더욱 추악하다. ‘사랑은 이미 사라졌고 도륙과 생존만이 지배한다.’ 순수를 노래하는 시인조차 사실상 이 타락한 세계의 일원일 뿐, 그 어떤 순수도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저 타락과 자조만이 남았을 것 같은 그곳에서, 시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눈물’과 조우한다.
스스로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이러한 마음의 동요를, 그는 “가장 알량한 회개”라고 지칭한다. 어쩌면 그것은 이성이나 감정이 아닌 본능에 가까운 것, 깊은 반성이나 공감이라기보다는 값싼 연민과 동정일지 모를……. 그리하여 오늘이 지나면 금세 잊혀져버릴 것들……. 차마 반성이라고 명명될 수조차 없는 찰나의 것. 
하지만 그 보잘 것 없었던 감정은 이내 그의 모든 것을 헤집는다. 폭풍이 된다. 거센 파도가 된다. 그리하여 온 얼굴을 메운 눈물이 된다. 그리고 이 눈물이야말로 지옥에서 우리를 견디게 했던 유일한 힘이었으며, 지옥 바깥에서 마주친 서로를 향한 지독한 연민과 공감의 언어였음이 다시금 환기된다. 이재훈의 시가 우리에게 속 깊은 위로일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눈물은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나오종 지닌 것”(김현승의 「눈물」)이므로.

3. 또 다른 위로의 시간을 맞이하며

2021년 12월,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지난 2년보다 더 암울하다. 2022년 1월, 우리가 마주하게 될 현실은 이보다 더 암울할지 모른다는 우울한 관측이 더 많다. 끝이 보일 듯 보일 듯 이어진 팬데믹 상황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강탈당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도둑맞은 시간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고, 살아내야 한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결코 회복될 수 없을 것 같은 공백의 시간을 살아야 했지만, 그 안에서 ‘우리’를 발견하는 것은 이전보다 훨씬 쉬운 일이 되었다. 서로를 향한 연민과 공간으로 그 공백을 채우고, 이 지옥의 시간을 함께 살아내었다는 사실 역시 결코 지워지지 않는 진실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가장 큰 위로로 존재해왔던 것이다. 

좋은 시인이란 그러므로 귀가 쫑긋 솟은 사람인지 모른다
그래야 잉크병 얼어붙은 겨울밤 곱은 손 불며
이 모든 소리를 백지 위에 칠필로 꾹꾹 눌러쓸 것이다
- 이시영의 「듣는 사람」 부분

풀잎이 너를 쓴다.
멀리서 너를 읽는 소리가 들린다.
네 몸이 조각나 날린다.

우린 모두 피를 만드는 사람.
어떤 사람은 역사를 쓰고
어떤 사람은 일기를 쓰고
어떤 사람은 시를 쓴다.

새벽이 건너가는 소리 들린다.
거울을 보니 흰 수염이 가득하다.
- 이재훈의 「에다」 부분

그러므로 시인의 오늘에서 다시 시작하자. 시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결국은 무엇인가를 쓰는 일이며, 때로는 쓰지 않은 혹은 쓸 수 없는 그 무엇을 환기하는 일이다. 시인에게 그것은 그저 주어진 소명일 뿐이다. 그들이 하루를 살아가고 살아내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며, 어쩌면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전하는 위로의 본질도 여기에 있다. 어제처럼 오늘을, 그리고 오늘처럼 내일을 살아가는 그 순간들 말이다.
지난 2년,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그저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그리고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받는 그런 시간을 살아왔다. 그리고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런 시간을 맞이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소명으로, 살아낸 어제와 살아가는 오늘과 살아갈 내일을 통해, 우리는 그 무엇보다 서로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고 있다. 그러니 더 이상 공백의 시간에 압도되지 말자. 서로를 향한 위로로 우리는 이미 그 공백을 채워왔으니 말이다. 

_ <현대시> 2022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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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학> 201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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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서정시문학상 수상소감 |

 

크고 비밀한 일을 꿈꾸는 시를 위해

 

이재훈

 

비가 온 날입니다. 바싹 말라붙었던 온 대지가 촉촉해졌고 공기는 더욱 청명해졌습니다. 한바탕 쏟아지고 나니 모든 사물들이 상쾌합니다. 이런 느낌을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늘 꿉꿉하고 답답하고 풀이 죽은 모습만 눈에 보였습니다. 제 문학도 그런 날이 많았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고 답답한 날이 많았습니다. 이번 수상 소식은 이런 날 한바탕 내린 단비와도 같습니다. 큰 위안이자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늘 제가 생성하는 언어가 어떤 의미가 될까, 제가 짓는 언어의 방법들이 어떤 쓸모가 있을까 고심했습니다. 질서도 없이 범람하는 글자들 속에서 방황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묻고 또 물었습니다. 산을 오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저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산에 오르는 것만 같았습니다. 오르는 산을 잘못 택한 것은 아닌지 회의한 적도 여러 번입니다. 어디를 바라봐야 하는지는 알겠지만 어떻게 올라야 할지는 모르는 자의 안타까움으로 늘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럴 때 힘을 내서 올라보라고 부추겨주시는 시간이 바로 지금인 것 같습니다. 외롭지만 더 힘을 내서 올라보겠습니다. 아니, 이제 외롭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더 외롭고 싶습니다. 외롭지 않으면 자꾸 기댈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시의 길은 어차피 고독한 외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에서 손 내밀고 힘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신께서는 제게 어떤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비밀한 일이 무엇인지 여전히 궁금해 하며 시를 씁니다. 그 비밀이 무엇인지 깨치는 날이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시를 계속 쓸 수밖에 없는 힘은 깨치는 그날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제 책상에 앉아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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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한국서정시문학상 특집 | 평론

 

고통의 수신기

 

남승원

 

 

 

미국을 대표하는 프리마돈나 르네 플레밍이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모든 예술은 결국 문학적으로 전달된다.”는 말을 듣고 깊은 공감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스스로를 풀 리릭 소프라노full lyric soprano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화려한 콜로라투라가 넘쳐나는 오페라의 세계에서 개성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풍부한 감수성과 남달리 깊이 있는 호소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다른 오페라 가수와 달리 TV쇼 출연 같은 대중적 활동도 마다하지 않는 것 역시 어쩌면 같은 차원에서 이해해볼 수 있겠다.

이재훈 시인의 <벌레 신화>를 앞두고 단번에 르네 플레밍이 떠올랐던 이유는, 그의 시작품들이 의미관계에서 자유로워진 기표들의 발산에서 빚어지는 다채로운 기교들을 앞세운 최근의 우리 시문학에서 보기 드물게 선명한 주체의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기교와 함께 독자들에게 스며들 수 있는 길을 찾기보다, 시를 읽는 독자들 내면에 잠재된 고유의 목소리와 어떤 방식으로든 충돌의 길을 걷게 된다. , 이재훈 시세계의 의미들은 독자들의 내면과 부딪히고 얽히는 움직임의 장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움직임을 일관되게 만드는 운동성이 <벌레 신화>를 관통하고 있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르네 플레밍의 말을 떠올려보면서, “모든 시문학은 결국 서정적으로 전달된다.”고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재훈의 시작품들은 대상을 표현하는 방식이나 주제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가장 적극적인 차원에서 독자와의 반응을 기대하면서 서정적으로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서정의 본질이나 시와의 관계, 또는 그 관계의 범주와 의미에 대한 논의는 곧 우리 현대시 백여 년의 역사와 흐름을 같이 한다. 그만큼 서정의 문제는 시문학 내부에서 명확히 한정되어 있는 어떤 특성이라기보다, 장르의 전반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본질적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서정의 기존 인식에 균열을 일으키려는 의미 있는 시도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정=서정시라는 인식이 여전히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면, 그만큼 서정과 시문학이 그 특질에 있어서 최대치를 공유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 서정이 시에 의미를 부여하는 핵심이라는 절대적 관점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서정과의 길항을 통해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새로운 시적 현실, 즉 시와 시가 아닌 것(非詩)들 간의 경계 확장이 요구되는 현실에서 다시 한 번 시의 영역을 도약시킬 수 있을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재훈의 <벌레 신화>에 특징적으로 감지되는 시적 운동성을 우리 시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역시, 그의 시세계가 특정 가치를 재현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다양한 대상들과 일으키는 반응 때문이며, 나아가 시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에까지 확대 적용되는 이 반응이야말로 그 자체로 서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서정의 가장 중요한 특질은 시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이 반응하는 접점에 의미를 결절시키는 데에서가 아니라, 의미를 생성시키는 힘에 대한 모든 의심이 끊임없이 발현되도록 만드는 데에서 나온다.

을 보면 이것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해볼 수 있다. 진화의 흔적을 보여주는 인간의 신체 기관에 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시집의 첫 부분에 배치됨으로써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충돌의 움직임을 이끄는 역할도 하고 있다. 특히, 두 개의 연으로 나누어진 구성은 이 상상력을 둘러싸고 있는 대립적 요소들, 기원과 현재또는 희망과 고통’, ‘이상과 현실등의 충돌을 보다 적극적으로 일으킨다. 이를 통해 우리가 그토록 애써가면서 유지하고자 했던 평범한 일상이 사실은 현실과의 타협을 강요하면서 고유한 가치들을 기꺼이 스스로 퇴화시키게 만드는 폭력성을 감추고 있었다는 진실이 어렵지 않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어 끝까지 퇴화를 거부함으로써 현실의 고통 위로 두드러지고 있는 을 시적 상상력의 범주에 포함시켜 작품을 통해 드러난 폭력적인 일상 속에서도 어느 정도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데로 나아간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재훈의 작품이 시문학을 둘러싼 요소들의 충돌이라는 일관된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충돌이 빚어내는 어떤 결과물이어서는 안된다. 결과물에 주목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은 그것을 만들어내던 힘이 소멸되는 순간과 정확히 겹쳐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서 우리는 이 힘의 중심이자 충돌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고, 그곳에서 결국 수난이 없는 몸은 역사가 없다는 시인의 인식과 만난다. 이를 통해 수난이 언제나 하나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것을 피할 수도 없고, 또 그렇기에 우리의 일상이 곧 고통그 자체인 현실이 밝혀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같은 사실이 그대로 압축된 대상으로서 이 내세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화 속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우리에게도 은 일상을 지속시키는 힘인 동시에 우리에게 가해지는 일상적 고통을 수신하는 안테나의 기능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표제작을 비롯하여, 시집의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벌레에서 시인이 지옥과도 같은 일상을 흘리며 기어가는 삶을 보여줄 때에도 의 상징과 겹쳐지면서 보다 명백하게 전달된다.

을 통해 드러난, 고통으로 직조된 우리의 일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하이델베르크에서 시인은 성 밑의 마을로 표현된 일상의 모습을 특히 오래된 성과 대비시켜 잘 보여주고 있다. “희롱과 진노의 말들만 더펄거리는 곳으로 압축된 일상의 공간은 책망이 없화답이 존재하는 곳과의 위상학적 배치, 오래된 성을 찾아 떠나는 시적 주인공의 행위와 더불어 우리에게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이처럼 시인이 만들어 둔 우리 일상의 모습은 우리를 문득 K, 카프카의 바로 그 K가 마주했던 상황과 고스란히 겹쳐진다.(시인은, 다소 익살스럽게, 그곳을 가보지 않은 어느 누구라도 지명을 듣는 순간 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독일의 소도시를 제목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시에 드러나 있는 것처럼, ‘마을을 벗어나 에 오르는 일은 결국 저 마을의 시간과 분리되지 않고 반복될 수밖에 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카프카를 경험해본 사람들이라면 중차대한 법적 소송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그 이유조차 전혀 알 수 없다거나, 또는 오랫동안 기대해왔던 목표 바로 앞에서 달성이 무기한 지연되는 상황을 맞닥뜨린 적이 있을 것이다. 카프카는 이처럼 일상이 갑작스럽게 무너지는 데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그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상황을 피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 오히려 그 상황을 지속시키는 유일한 원인이 되는 이해 불가능한 상황에 우리를 몰아넣는다. 카프카가 꼼꼼히 만들어둔 일종의 미로와도 같은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처럼, 이재훈의 시세계를 관통하고 난 우리 역시 평안했던 일상 전체를 의심하고 스스로에게 끝없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처럼 시 안에서 던져진 질문과 그것을 읽는 독자 내부의 질문이 충돌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시가 가진 힘이 발산되고 있다.

<벌레 신화> 전반에 걸쳐 있는 동굴이미지 역시 이와 관련되어 있다. 햇칼, 빙하의 고고학, 구렁등에서 직접적인 소재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작품들에서 구멍-(어두운)숲속-(어둠에 잠긴)-(깊은)등의 이미저리들로 확산되면서 동굴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어둠과 밝음, 안과 밖등을 구분 짓는 경계인 동시에 그 둘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 충돌을 일으키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햇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동굴은 바깥의 햇살이 가득한 공간과 쉽게 대조를 이루고, 또 그 때문에 황홀하게만 보이는 바깥의 세계를 꿈꾸게 만든다. 하지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바깥의 세계는 동굴 속 에게 그대로 로 작용하면서 고통과 희생을 통하지 않고서는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만든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끝이 보이지 않는 텅 빈 계곡을 날고 싶다.”는 바람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물론이지만, 이재훈의 시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언제나 이면에서 그것을 발생시키는 고통스러운 순간과의 충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속적으로 충돌을 발생시키는 이재훈의 시는 독자들을 수동적인 상태에 머무르지 않게 만들고 필연적으로 적극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이를 위해 그는 우리의 일상 속으로 고통을 끌어들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할 것은 그가 고통에 직접적인 관심을 두고 있다는 오해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개인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물질적 환경과 지적·감정적 반응을 하며 이것이 결국 시를 만들어내고, 이렇게 만들어진 시작품이 다시 독자와의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시의 올바른 방향이라고 했던 오든(W.H. Auden)의 말대로, 이재훈에게 고통은 독자들에게 능동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일종의 장치인 셈이다.

나쁜 병에서 그가 고통은 존재와 다른 물질이라고 말할 때 이는 보다 분명해진다. ‘고통을 끌어들인 이유가 평범한 일상 뒤에 가려진 폭력적이고도 비인간적인 얼굴을 폭로하기 위함이라면,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맞아들인 고통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과 반응하는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고통의 전제가 우리의 존재와 동등한 독립적 차원이라는 사실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만이 어느 한 쪽의 일방적 영향력이나, 또는 그 둘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일종의 결과물에 관심을 두기보다, ‘일상고통이 동등한 차원에서 만나 벌어지는 반응들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양하게 벌어지는 이 반응들에 참여하게 되면서 때로 자신의 삶과 고통을 견주어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시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고민해보는 일도 가능해진다.

이재훈 시인이 만들어둔 길을 따라가는 일은 목적과 무관한, 반응 그 자체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반응이 결과로 이어지는 보편적 상식의 세계에서라면 이는 어쩌면 막연한 두려움을 동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말 그대로 반응안에는 최대한의 고통이라는 범주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은 살이 찌는데, 풀잎은 쪼그라들기만 하는, 그래서 소망(벌레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면 어느 한쪽을 반드시 포기해야만 하는 제로-섬 사회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언제나 고통을 남의 몫으로 미루어왔다. 결국, <벌레 신화>를 통해 고통마저 적극적으로 포함할 수밖에 없는 반응을 경험하게 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장면을 만나게 된다.

 

비밀을 말하지 않아도 맛보면 다 아는 것이지. 꿈을 맛보고, 슬픔을 맛보고, 춥고 서글픈 때를 맛보는 사람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약속을 맛본다네. 그 어떤 약속도 폐기할 수 없다고 쓴다네. 어느새 입 안이 까끌하고 씁쓸한 봄이 성큼 와 있다네.

― 「맛보는 공동체부분

 

맛을 본다는 것은 그 어떤 이해의 방식과도 전혀 다르다. 같이 눈물을 흘리거나, 혹은 안아 주거나 손을 잡아 줄 때조차, 냉정하게 말해서 타인의 고통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맛을 본다는 것은 우선 나의 감각을 직접 참여시키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또한 맛보는 행위에는 자신이 싫어하는 특정 맛이 그 대상에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단 맛을 보게 된다면, 자신의 의도가 전혀 없었던 순간에조차 맛보는 사람들과 동일한 공동체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꿈을 맛보는 것과 같은 순간이거나 춥고 서글픈 때처럼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달콤한 희망보다 입 안이 까끌하고 씁쓸한 봄을 노래하는 이재훈의 시세계가 더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전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사사>, 2017년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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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승원 | 문학평론가.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계간 <포지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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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_관련자료 2017. 10. 26. 14:29

 

이재훈 

 

찬바람이 옷깃을 연다

궁핍도 잊고 지체한 일들을 잊고

언덕을 오른다

바람의 체온을 오래 안으면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붉게 물들어 간다.

물들어 간다는 건 고통스러운 것인데

물들어간다는 건 소멸하는 것인데

이 아름답고 황홀한 속마음을 어디에 둘까.

악인이 넘치는 세계에서

무엇을 붙들고 물들고 잠들까.

무력한 사람들에게 간청할 목록을 적고 나면

소리 내어 울고 싶어진다.

무엇을 위해 우린 목소리를 놓지 못했을까.

지난여름 온몸을 물로 가득 채웠지.

물의 힘으로 당신을 기억했다.

이제 서서히 내 몸에 물이 빠져나간다.

잎들은 모두 붉고 노랗게 늙는다.

언덕의 세상과 당신과 내가 온통 물들다가

툭 다른 계절로 사라지는 순간

푸석한 내 몸에서 당신이 툭 떨어져 나가는 순간

툭 툭 빗방울이 가슴을 두드리는 절명의 순간

 

―《시와표현, 201611월호

 


 

은 의성어(擬聲語)이다. 사물의 소리를 흉내내는 말이다. 이 소리만 들어도 무엇인가 벌어지는 사건들을 사실 그대로 실감할 수 있게 한다. 또는 이란 본래의 하나 된 어떤 사물이 분리되어질 때 나는 소리이기도 하다. 하나를 이루는 순간이 둘로 분리되어 완전한 개체를 형성하는 순간 하는 소리는 절로 일어난다. 이 화자에게는 하나의 소멸이요, ‘고통이 된다.

화자는 찬바람이 옷깃을 연다하나의 개체를 이루는 순간을 맞는다. 따라서 찬바람은 곧 궁핍이요, ‘지체한 일로서 옷깃을열듯 언덕을 오른다’. 또한 바람의 체온을 오래 안으면서 붉게 물들어감으로써 바람의 체온이 안기는 하나를 이룬다. 그리고 마침내 소멸된다. 완전한 개체의 분리다. 소리의 원형을 이룬다. ‘물들어 간다는 건 고통스러운 것인데/물들어간다는 건 소멸하는 것인데/이 아름답고 황홀한 속마음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찬바람 궁핍 지체한 일 고통 소멸 악인이 넘치는 세계 간청할 목록 로부터 옷깃을 열고 언덕을 오르고 붉게 물들어 간 붙들고 물들고 잠들까 빠져나간다 붉고 노랗게 늙음으로써 하는 세상에 이른다. 그것은 곧 언덕의 세상과 당신과 내가 온통 물들다가/툭 다른 계절로 사라지는 순간/푸석한 내 몸에서 당신의 툭 떨어져 나가는 순간/툭 툭 빗방울이 가슴을 두드리는 절명의 순간이 된다. 결국 이 시작품은 삶의 온갖 노정에서 만나는 숱한 언덕의 세상과 당신과 내가 온통 물들다가끝내 하며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거니와. 이를 이라는 의성어를 통하여 시동성(示同性시차성(示差性)을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삶의 다양한 상징적 체계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추천 구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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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현대시작품상 특집 / 평론

 

 

 

신과 함께

 

 

 

송종원

 

 

 

 

 

낮은 목소리로

 

강물엔 사람들이 허우적대고 있다

스스로 얼음을 깨고 몸을 넣는다

숨이 끊어진 사람들이 둥둥 떠다닌다

노래도 없는 시간들이 사는 강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강물에 뛰어들어 허우적대는 사람들

― 「스틱스, 서울」 부분

 

이재훈의 시에는 잊지 못하는 자의 비극적 투쟁이 기록되어 있다. 시의 목소리는 느리고 또 느리게 허공에 울려 퍼지는데, 이는 마치 시간의 흐름과 동시에 형성되는 망각의 강의 유속에 저항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투쟁하는 자의 목소리에서 우리는 보통 재빠르고 활기찬 상태를 기대하지만 이재훈의 시는 그 기대를 뭉갠다. 그는 되도록 느리고 처연하게 노래한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상대하는 대상은 안달난 시간 속에 마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싸우는 대상은 ‘삶’이며, 그가 잊지 못하는 것은 ‘삶이 빚어내는 치욕’이다. 당연히 이 싸움은 단번에 승부가 결정되는 형태가 아니라 오래오래 지속되는 형국일 수밖에 없다. 이 지난한 싸움을 대하는 시인의 전략은 싸움의 구도 자체를 해체하는 듯한 느린 속도로 전투력을 상실한 자의 목소리를 전면화하는 방식이다. 시인은 처음부터 우리가 기대하는 싸움이 아니라 우리가 기대할 수 없는 싸움을 벌이려 했던 것일까.

느리고 나지막한 시의 목소리에는 사실 어딘가 체념과 후회의 분위기가 묻어 있기도 하다. 이재훈이 시에서 자주 활용하는 ‘~지’, ‘~네’라는 어미가 특히 그런 효과를 만든다. 이와 같은 어미의 조형에는 시인의 특별한 전략과 기호가 작용했을 테지만, 동시에 시인 자신 또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개입했을 것이다. 시의 언어는 시인이 쓰지만 시인을 넘어선 힘의 작용이 시어를 형성하기도 한다. 즉, 시인은 시의 전부를 결정하지 못한다. 시를 쓰는 순간 시인은 결정할 수 없는 일을 결정해야 할 때와 마주하게 된다. 이를 테면 시의 언어에 작용하는 시대적 정황의 압력이 그러하리라. 이 압력과 관련해서 특히나 주목해야 지켜보아야 할 지점은 이재훈의 시가 이전에 비해 현실에 대한 발언의 선명도가 높아진 것은 물론이고, 분열된 자아의 내적 혼돈의 목소리보다 외적 세계와의 교통이 원활해진 자아의 형상을 그려내는 시점에서 저 어조들의 조형이 활기를 더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의 끝에 이른 거와 같은 묵시록적 상황을 유모와 격앙된 어조를 섞어 희극적으로 상대하는 시적 전략이 익숙한 요즘에 이재훈 시의 어조는 확실히 특이한 데가 있다. 시인은 그 어조를 빌어 자신의 발언을 확보한 비극성을 더 진지한 것으로 만드는 중이다. 투박하게나마 저 목소리가 발언하는 내용과 관련한 시대적 분위기를 이름 붙여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확언 불가능한 시대 또는 희망 불가능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한 시에서 작금의 시적 현실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예언도 사라지고

초월도 사라지고

왜소한 지식을 입에 문 기사騎士들만 즐비한 곳

― 「녹색기사」 부분

 

[言]을 적절히 운용하는 기사(아마도 시인일 것이다) 대신에 마치 말[馬]처럼 재갈이 물린 기사만 있다. 게다가 이 기사가 물고 있는 재갈은 왜소한 지식이다. 그러니까 이 시의 언어는 지금, 시인이 시인을 부끄러워하는 중임을 증언한다. 확언이 불가능한 시대에 또는 희망이 불가능한 시대에 시인은 할 소임은 왜소한 지식의 대변이 아니라 불명료한 언어들 속에서 빛과 같은 명료한 초월성을 발견하는 일이고, 희망 불가능을 선포하는 말들 속에서 불가능을 능가하는 가능성을 예언하는 내기를 실험하는 일일 테니 말이다. 지식을 넘어서려는 내기와 그에 따른 발견이 전무한 시의 현실을 목격하며 시인은 시의 위상과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 번 되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이재훈은 특정 감정의 선언을 자신의 시의 자리로 몰아갔다.

 

부끄러움의 왕

 

바람이 불면 이별하겠다

바람이 온 몸을 휘젓고 나가야

간신히 나지막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황금의 입」 부분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 적은 윤동주의 시는 역사적 정황 안에서 파악할 맥락을 지니지만 그것은 또한 예술 일반이 특정한 시대를 넘어 보편적 가치로 상정할만한 정서적 내용을 포함한다(참고로 종교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시를 구원의 매개로 여겼던 윤동주의 시적 태도는 이재훈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다. 이재훈의 시를 근현대 한국문학사의 흐름에 위치시킬 경우 아마도 그것은 윤동주를 시작으로 한 시적 계열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부끄러운 자가 시를 쓴다. 달리 말해 시는 성찰한 사람의 목소리를 요구한다. 시와 성찰이라니, 웬 고리타분한 이야기인가라는 반응이 따를 만하다. 시라는 장르의 언어는 성찰의 여유를 통과하기 이전에 단말마와 같은 비명이며, 성찰이 불가능한 고통의 현시라는 이야기가 종종 전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생각은 시가 언어의 작용의 일종이라는 점을 철저히 무시한 태도에 불과하다. 시는 투명한 신의 얼굴처럼 우리의 얼굴을 다시 매만지게 한다. 시의 언어가 아무리 남다른 속도감을 지닌다하더라도 그것이 언어의 일종인 이상 시는 쓰는 자로 하여금 자신의 뜻과 감정을 되비쳐보게 만든다. 물론 이 언어라는 거울은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쓰는 자의 얼굴을 되비추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하지만 오히려 그와 같은 상태가 쓰는 자를 더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이 예민한 집중은 정신의 힘을 더 높이는 데 기여한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자각이 불투명한 언어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수치심이란 도덕적 과오가 야기하는 감정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감추고 싶어 하지만 은폐할 수 없는 모든 것’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다. 왜 특별히 나체에 구토 혹은 뱃속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꼬르륵 소리 등이 부끄러운가? 그것은 수치가, 우리 자신이 오직 우리 자신으로서 혹은 우리의 몸으로서 환하게 비춰지는 그 생리적 현현의 순간에 발생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수치 속에서 나는 그저 나의 몸일 뿐이다. 나는 나의 정신이 아니며, 나의 염원이나 이상도 아니며 단지 위장과 성기와 머리칼을 갖고 있는 생리에 불과하다. 이 분석을 뒤집으면, 수치심은 오직 자신의 동물성을 자각하는 인간, 스스로의 동물적 한계와 대면하는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라는 사실이 도출된다. 부끄러움을 통하여 인간은 스스로이 비인간성과 대면하고 이 관계를 인간적으로 성찰하는 주체 즉 개인으로 성립하는 것이다.”(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66~67쪽)

 

 

 

인용에서 말하는 ‘수치심’의 상태는 이재훈의 시가 표현하는 ‘부끄러움’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재훈은 「거리의 왕 노릇」이라는 시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꾼다고 적은 바 있지만 그의 시가 실제로 내는 목소리는 저 꿈과는 조금 다르다. 독자들이 그의 시를 통해 전해 받는 것은 부끄러움이 없는 세계의 모습이 아니라 부끄러움이 가득한 음색이다. 이재훈 시의 화자는 “언제부터인가 그리워하는 시간이 내게 없”다고 고백을 하고, 사람들이 군집한 광장에서 “죄와 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머리들”을 바라본다. 시선에도 음성에도 가득한 건 부끄러움이다. 도대체 이 많은 부끄러움은 어디로부터 왔는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그것은 숨길 수 없는 몸으로부터 왔다. 아니 그 몸을 드러내는 정직한 시선에서 왔다.

 

졸고 있는 오후. 몸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이리저리 펄럭이네. 나를 부르는 소리, 내게 명령하는 소리, 멀리서 풍겨오는 몸 썩는 소리. 푹 썩어 물컹한 몸으로 의자에 파묻히네. 저녁이 되면 식탁에 앉아 뱃속에 고기를 우겨넣지. 육즙을 맛본 혀가, 살 씹는 맛을 아는 혀가 쉬지 않고 날름거리네.

― 「치미는 몸」 부분

 

의미의 끈으로 잇거나 봉합하지 않을 경우 몸은 조각이 난 상태로 펄럭인다. 멀쩡한 한 덩어리의 몸이 조각나 있다니 무슨 말인가 되물을 수도 있지만, 몸이 일정하게 통일적 형태로 기능한다는 생각만큼 관념적인 것이 또 없다. 조각난 몸의 통합 내지 몸에 통일성을 부여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적 담론에 조금 기대어 이야기하자면 우리의 몸은 다양한 부분충동들이 어지럽게 난립하는 지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저 충동들의 방향은 제각각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일정한 도덕적 틀을 적용하여 인간의 행위를 정향시키는 일은 애초부터 일정한 폭력성을 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폭력적이다 하여 거부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인간의 충동에 내재한 공격성이 스스로를 혹은 타인을 파괴할 가능성이 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천편일률적인 도덕적 틀은 문제적이지만 스스로가 자신의 욕망과 관련한 윤리를 정립하는 일은 자신을 위해서나 공동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어쩌면 욕망의 허기란 무언가를 취하기를 바라는 허기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무언가를 취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일러주는 법에 대한 허기일 수도 있다. 그것을 부끄러움을 거부하는 몸의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와 같은 몸의 이중성은 이재훈 시의 아포리아이자 시적 기미의 발생지이다.

 

피부가 구멍을 닫으면 우리는 작은 관에 갇히지. 몸을 붙잡고 통곡하는 소리. 통곡하다 울다 지쳐가는 한숨 소리. 뜨거운 몸뚱이는 차가운 쇳덩이에 들어가지. 화염으로 가루가 되지. 가루가 되어 땅속에 파묻히거나 서랍에 들어가지. 가루가 될 몸들끼리, 서로 숭배하고, 경멸하고, 질투하는 가녀린 몸. 몸 때문에 죄를 짓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어리석은 몸.

― 「디스diss」 부분

 

죽음에 이른 몸을 화장火葬하는 과정으로 읽을 수 있는 구절이다. 흥미롭게도 시인이 인간의 몸을 관으로도 파악하고 또 관으로도 인식한다. 인간의 몸은 스스로를 가둘 수 있는 족쇄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자신의 외부와 공명을 일으킬 수도 있는 물질인 셈이다. 이와 같은 몸에 대한 이중적 인식이 시인에게 몸을 거듭해서 사유할 대상으로 만든다. 부끄러움의 잠재적 거처로서의 몸을 절단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있는 대로의 모습에 대한 순수한 인정 속에 시적인 비약을 거쳐 몸이 새로운 가능성의 지대로 거듭나게 하려는 시인은 고민하고 관찰하고 기록한다. 몸은 형성이 완료된 물질이 아니라 늘 구성중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인의 관찰하고 기록하고 생각하는 사이 몸에 잠재한 수많은 역사들이 자연스럽게 시 속에 스민다.

 

나는 거친 아버지의 세계만 알았지 어머니의 세계는 몰랐다네.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과 도덕에만 관심있었지.

하지만 날 구원해주는 것은 언어가 없는 원시의 감각이었네.

그럴 때쯤 마치 마술처럼, 성애의 욕망과

죽음과 예술의 열정이 한꺼번에 찾아왔네.

― 「나르치스」 부분

 

아버지의 세계와 어머니의 세계를 이분하는 방식과 원시의 감각이라는 관념 또한 상투적인 데가 없지 않지만, 시의 목소리가 우리의 몸과 언어 속에 뒤엉켜 있는, 성애의 욕망과 죽음 그리고 예술의 열정을 동시다발로 맞닥뜨리는 상황은 진실하다. 이 다양한 실재의 어떤 것에도 주도권을 내주지 않고 그것들의 난립과 갈등을 균형감 있게 제시하려는 이재훈의 노력에는 시를 향한 순례자를 순결함이 깃들어 있다. 시인은 몸의 혼란조차도 ‘몸의 무늬’로 만들 수 있다고 하였던가. 이재훈의 시는 스스로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신들이 사는 세계

 

고난을 마주하는 사람이 없어

신에 대해 물을 데가 없어

저 허공에 통곡을 합니다.

이유도 모르고 운명도 모른 채

웃고 노래를 부릅니다.

선한 사람이 없어 울어 봅니다.

눈에 보이는 당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신을 사랑한다 말했습니다.

― 「기복祈福」 부분

 

시가 신을 모신다는 말은 일견 시의 자리를 위축시키는 의미로 들린다. 시가 쓰이는 곳은 모든 신을 거부해야 하는 자리라고 여기는 태도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한 시인의 시구처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는 것이,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이는 일이 시의 지향이라고 우리는 믿어왔다. 하지만 믿음과 진실은 늘 일치하지 않는다. 신을 모시지 않는 시가 과연 존재할까.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 자주 무감하며 때때로 의식하지 못한 채 신적인 것에 기대어 시의 깊이와 활기를 더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정작 중요한 문제는 신에 대한 시의 거부가 아니라 어떤 신을 시가 믿는지에 대한 명증한 확인일지도 모른다.

 

선량한 바람을 맞는다. 해가 지기 전의 결기처럼 무엇을 사로잡혔을까. 무엇에 놀랐을까. 산속에서 만난 한 사람. 흰 옷을 입고, 울고 있는 한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났을까. 머리를 숙이니 나를 빤히 보고 있는 풀 한 포기. 하늘거리며 바람 속으로 제 피를 흘리고 있다.

― 「풀이 던진 질문」 부분

 

“산속에서 만난 한 사람. 흰 옷을 입고, 울고 있는 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도 그러하고, “머리를 숙이니 나를 빤히 보고 있는 풀 한 포기. 하늘거리며 바람 속으로 제 피를 흘리고 있”는 이미지 또한 우리를 붙들어 세운다. 저 이미지는 연약함과 처연함이 어떤 강인함 못지않게 읽는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는 신비로운 사실을 우리에게 경험하도록 한다. 해서 자기 방어적인 무장이 해제된 마음이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저 영롱한 유약함을 들여다본다. 이 이미지를 보며 나는 장-뤽 낭시가 한 그림을 가지고 보편적 아름다움과 관련한 이미지에 대해 설명한 언급을 떠올릴 수 있었다.

 

“보여지는 형태를 통해서 우리를 초월하는 그 이상으로 향하는 무언가에 사로잡히는 것 때문에 우리는 그 이미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게 됩니다. 잡지 속의 이미지와는 다른 것입니다. 잡지의 이미지들은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서 제작되었죠. 카를라 부르니를 보고, 다음 페이지에서는 나오미 캠벨을 보고, 페이지를 넘기고, 계속 반복하죠. 또한 아름다운 풍경사진들이나 헬리콥터로 내려다보이는 대지를 봅니다. 이 사진들도 매혹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여러분은 다시 페이지를 넘기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회화작품들이나, 예술작품을 목적으로 한 사린들을 보면서 페이지를 넘길 수는 없습니다. 반복해서 그 화폭에 집중해야 합니다.” (장-뤽 낭시, 이영선 역,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 갈무리, 2012, 192쪽)

 

우리를 사로잡는 이미지를 반복해서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쾌감을 넘어서는 불편함을 감수하게 된다. 저 이미지는 취향이나 기호로서 좋음의 차원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우리의 불안과 불완전함을 자극하며 어떤 너머로 우리의 몸을 정향시키도록 추동한다. 왜냐하면 ‘선’적인 무엇인가가 그리고 ‘진(眞)’에 가까운 어떤 것이 저 선혈이 선명한 이미지 너머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탁월한 빛”이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되어 우리에게 흘러들어 “선량한 바람”처럼 부드럽게 접촉하는 체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탁월한 빛과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이재훈의 시가 모시는 신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까. 그 신은 우리를 그렇게 빤히 바라보고 있지만, 또한 탁월하다와 가장 아름답다와 같은 인간의 말이 특별한 수사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전하지 않으며 스스로 흔들림 없이 유약함에 몰두하는 모습으로 우리를 동요하도록 이끈다. 그러므로 이 신은 전지전능한 종류의 신이라기보다 순연한 모습으로 순정의 빛을 발산하는 사소한 존재에 가깝다. 이재훈에게 신은 저 푸르고 연약한 풀과 같은 존재이다. 이와 같은 발견은 그의 시에 새로운 활기를 더한다. 우선 그의 시는 신의 거처를 지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의 자리에 위치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돌보게 하도록 유도한다. 신이 인간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신을 보호하는 상황의 아이러니함. 이 역설로 인해 지상은 신들의 사는 세계가 되고 또한 이 역설을 통해 신은 인간과 같은 혼돈의 몸을 얻는다. 결국 시가 신을 모실 뿐 아니라 신이 모시는 것 또한 시가 되는 역설까지 나아가는 일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이재훈은 「저자의 말」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적은 바 있다.

 

“사제의 방엔 말이 죽는다. 말이 죽는 법을 연습한다. 침묵이란 말도 필요없이 생각이 달린다.”

 

시의 사제인 시인은 말[言]을 죽인다. 이는 말이 말을 타고 넘어가는 기예를 차단하기 훈련으로 보인다. 시인은 말이 말의 부름을 받을 뿐 아니라 말을 넘어서는 무언가의 부름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무언가의 자리에 ‘시’를 놓아도 어색하지 않다. 아니 이재훈은 그곳에 오직 시가 놓여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시가 저만치 앞서 달려가 시를 기다리고 있다. 오직 시만이 시를 부를 수 있다. 시 아닌 것이 시를 부를 때 그것은 시가 아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망각하는 것일까. 이재훈의 시가 이 기다림의 훈련으로부터 더 많은 시와 기다림을 구원하기를 기원한다.

Posted by 이재훈이
,

제15회 현대시작품상 특집 / 평론

 

 

 

돌의 시로, 물의 시로

― 시여, 새로운 무기가 되어라

 

 

장석원

 

 

 

 

 

 

세계를 향한 시인의 뜨거운 발화가, 힘찬 육성이 여기에 있다. 그는 불이 되려 한다. 그는 불 이후의 재에 대해 묵상한다. 그는 자신을 처형한다.

나는 시가 우리의 이 땅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시가 역사의 변혁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미망을 증오한다. 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시인은 무력한 시민에 불과하다. 시는 언어의 혁명이라는, 시는 영혼의 등불이라는, 시는 모국어의 수호자라는, 시는 인간 정신의 극점에서 터져 나오는 고결한 것이라는 말을 부정한다. 시는 더 이상 순수 예술도 아니고, 혁명의 무기도 아니다. 시는 이 세계에 상품이 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기적 같은 신기루의―그래서 소중하고 아름답고 유일한―상징에 불과하다. 시여, 그대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시여, 그대의 종말을 만인에게 알려라.

이재훈은 나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한다. 그의 수상 작품을 읽어보자. “막막해졌네. 타인에게 무심해지고, 타인의 죽음에 무심해졌네. 모든 감정에 무심해졌네. 가르치는 자들이 내놓는 규율에 무심해졌네.”(「평원의 밤」) 이 구절은 정확하다. 내가 이렇다. 그가 살고 있는 ‘「스틱스, 서울」’의 풍경. “시청에서 개선가가 울리고/ 교회에서는 장송곡이 울린다/ 강으로부터 날아온 비명이 가득하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 이승과 저승을 가로지르는 ‘한강’의 시체들, 우리들. 학생들의 학교 폭력을 응시하면서 언어폭력이라는 살인무기에 대해 고발하는 「디스Diss」에서 이재훈은 우리의 외면 뒤에 묻힌 죽음을 까발린다. “결국 가루가 될 아이들. 울음이 될 아이들. 빌딩에서 썩어가는 아이들”의 “뜨거운 몸뚱이는 차가운 쇳덩이에 들어가”고 “화염으로 가루고 되”고 “가루가 되어 땅속에 묻히거나 서랍에 들어가”고 있다. 나도 알고 있다. 나는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직시하려고 하지 않았다. 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재훈이 울면서 말한다. “나르치스. 사십은 늙은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네./ 사랑도 예술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라고 고백한다.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나무의 짐을 나눠지고 새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삶의 거룩함 따위는 없다고, 오늘의 세상과 살았던 자신의 과거가 전부 거짓이라고, 깨달으며, 이재훈은 “침묵하며 자꾸 울고만 싶”다고 고해한다. 그가 “이제 순례를 떠날 때가 되었”(「나르치스」)다고, 다시 시를 써야 한다고 독백한다. 그는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 결단하는 ‘나’의 눈물이 죽음의 전후를 매개한다. 이재훈은 새로 태어난다.

 

내 몸이 썩고 썩어 문드러지면 폴폴 날리는 꽃잎으로 남을까. 신비한 탄생의 시간을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리네. 꽃잎은 늘 가벼운 죽음이지만 난 그런 죽음이 좋네. 꽃잎은 가장 장중하게 땅에 안착하겠지. 그리곤 온 대지가 울리고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는 첫 경험을 주겠지.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땅과 함께 밤새 울 것이네.

― 「치미는 몸」 부분

 

다시 태어난 시인이 몸이 있다. “썩고 썩어 문드러지면” ‘나’에게 자유가 찾아오겠지, “폴폴 날리는 꽃잎”이 ‘나’의 죽음의 유일한 흔적이겠지, “온 대지가 울리고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는 첫 경험”의 황홀이 ‘나’를 맞이하겠지. 이재훈이 읊조린다.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증오와 자신을 처단하고 싶은 욕망의 강도는 비례한다. 「풀이 던진 질문」에서 이재훈이 찾아낸 것. “노을은 경계도 없이 제 몸을 허”물고, “그 몸 아래 조그맣게 엎드려 졸고 있는 풀 한 포기” 앞에서 그는 “선량한 바람을 맞는다.” “머리를 숙이”자 “나를 빤히 보고 있는 풀 한 포기”를 발견한다. 풀처럼 순교하는 시인. “하늘거리며 바람 속으로 제 피를 흘리고 있”는 풀 한 포기, 이재훈. 직정直情의 언어가 일어선다. 세상의 어둠 속에서 시인이 우리에게 건네는 노래가 들려온다.

 

어둠 속에서 오직 나무만이 황금빛으로 발하고 있었지

모든 사람들은 희미한 실루엣으로만 존재할 뿐

나 또한 한낱 이 세계의 배경일 텐데

배경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란

매일 동화 쓰는 시간을 맞이하지

희미한 달이 낡은 뱃전을 어루만지며 다가오는데

 

밤이 환상의 세계라면

저녁은 동화의 세계

 

저녁이 되면 광장에 사람들이 모이지

광장의 사람들은 어떤 저녁을 매일 그리고 있을까

하얀 치자꽃을 꺾어 어두워가는 책상 위에 두고

달금하고 앳된 향기와 함께 조금씩 늙어가는 시간

풀어진 눈으로 넘어가는 해를 보는 시간

늘어진 삶에 끼어든 늙은 햇살이 온몸을 휘감지

나무에 몸을 기댄 자는 고독해지지

― 「동화의 세계」 부분

 

어둠 속에서 “황금빛으로 발하고 있”는 나무가 다가온다. “모든 사람들은 희미한 실루엣으로만 존재”하는 저녁이 찾아온다. 이재훈은 “나 또한 한낱 이 세계의 배경”임에 불과하다고 자인한다. 그가 타인을 응시한다. ‘나’와 ‘너’를, ‘우리’를, “배경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을 주목한다. 저녁이다. 세상이 밤길 밝힐 등을 켜는 시간, 하루의 광휘가 사그라든다. 피로와 우울의 왼손과 안도와 평화의 오른손을 합장한다. “희미한 달이 낡은 뱃전을 어루만지며 다가오는” 광경이 ‘동화처럼’ 펼쳐지는 시간. “저녁이 되면 광장에 사람들이 모”인다. 그곳의 사람들은 “어떤 저녁을 매일” 그려낸다. 우리가 살아나는 시간, 우리의 삶에 안식이 찾아오는 시간. “하얀 치자꽃을 꺾어 어두워가는 책상 위”의 어둠을 살며시 밀어내는 시간이다. “달금하고 앳된 향기와 함께 조금씩” 하루의 삶이 소멸하는, “늙어가는”, 사라지는 것들이 잠깐 숨을 뿜어 올리지만 포르르 다시 삼키고 마는, 여린 등불의 시간이다. “풀어진 눈으로 넘어가는 해를 보는” 사람들의 “늘어진 삶에 끼어든 늙은 햇살이” ‘나’의 “온몸을 휘감”는다. “나무에 몸을 기댄 자”가 “고독해지”는 시간이다. 저녁이 찾아왔다. 이재훈은 애련에 물들어버린다. 떠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시인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무서운 사랑 때문에 그는 조금 ‘울면서’ 광장을, 그곳의 사람을, 오늘을 살아낸 우리들을 껴안는다. 생기生氣의 감정이 직핍直逼한다. 시인의 살을, 살의 온기를, 온기 속의 방향芳香을 느낄 수 있다. 이재훈의 사랑을 체험한다.

 

바람이 불면 이별하겠다

바람이 온몸을 휘젓고 나가야

간신히 나지막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꽃이 피는 것엔 이유가 없고

너의 욕망도 이유가 없다

배려는 늘 사람을 고뇌하게 만든다

그대와 나 사이

팽팽한 거리만 있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했을 텐데

언제부턴가 몸속에 나비를 키우며 산다

싱그럽고 건강한 몸 내음에 취한 나비떼가

몸속에서 팔랑거린다

제 몸속 나비 한 마리가 다른 몸을 찾아 가는 일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 몸에 한 마리의 나비만 남을 무렵

그 퀭한 광야를 품고 다니는 저녁

 

움직임 없는 구름의 속도를

무슨 까닭으로 이리저리 책망할까

숲의 교훈도 무력하고 늦은 햇살의 위로도

눈이 따갑기만 하다

겨울이 넘어가고 있었고

신비한 그림자만 남았다

침묵하는 입술만 씰룩대었다

― 「황금의 입」 전문

 

제목 ‘황금의 입’은 마지막 행 “침묵하는 입술”로 귀결된다. ‘황금의 입’에서 ‘침묵의 입’으로 여행이 시작된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온몸을 휘젓고 나”갔다. “간신히 나지막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것이 이재훈의 노래이다. 우리는 ‘작은’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이다. 그의 노랫말이다. “꽃이 피는 것엔 이유가 없”고, 우리의 “욕망도 이유가 없”다. ‘나’와 ‘그대’ 사이에 “팽팽한 거리만 있었다면” ‘나’는 사랑에 빠졌을 텐데, ‘나’와 ‘당신’은 ‘배려’로 엮인, 공동의 타자였으므로, ‘우리’ 사이에 사랑이 기거할 공간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배려가 뿌리 내릴 자리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배려를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배려’하지 않고, ‘사랑’에 자신의 존재를 함몰시킨다. 사랑은 배려를 뽑아내고, 희생을 싹틔운다. 이재훈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이다. 인식이 실재로 전환된다. 앎이 세계를 움직인다. 그렇다, 사랑과 희생이다. 이것을 알게 되었던 “언제부턴가 몸속에 나비”가 들어왔다. ‘나’의 몸은 ‘나비’의 집이다. 사랑의 빛이 가득 찬 “싱그럽고 건강한 몸 내음에 취한 나비떼”가 이재훈의 “몸속에서 팔랑거”린다. 이재훈이 말한다. “제 몸속 나비 한 마리가 다른 몸을 찾아가는 일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을 기적이라고 말할까. 아름다움이라고 말할까. 이재훈이 우리의 질문에 답을 내놓는다. “내 몸에 한 마리의 나비만 남을 무렵/ 그 퀭한 광야를 품고 다니는 저녁”의 먹먹함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동화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넘실거리던 이재훈의 사랑이, 사랑의 나비가 우리들 어깨와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시인에게 남겨진 것은 “한 마리”뿐. 자신의 사랑을 전부 나눠준, 전부 희생한 시인의 빈 육신에 저녁의 어둠이 차오른다. 그는 “움직임 없는 구름”이 되었다. “늦은 햇살의 위로”에도 그의 눈은 “따갑기만 하다”. 그는 지쳤다. 자신의 사랑을 다 내어주었을 때, 그의 육신은 “겨울”이 되었고, 마침내 단 한 마리의 나비마저 얼어붙어 눈발로 흩어졌을 때, 이재훈의 빈 몸이 부서져 내렸을 때, “신비한 그림자만 남”겨졌다. 이재훈의 “침묵하는 입술만 씰룩대”고 있다. 그 입이 ‘황금의 입’이다. 이재훈의 입술 사이에서 나비가 날아오른다. 우리에게 사랑이 도달했다. 이재훈의 시가 반짝이는 순간이다. 저녁에 도달하여 사랑을 발견하기까지 이재훈이 지나온 한낮의 거리와 광장으로 돌아가보자.

 

플래카드엔 권유와 명령만 있을 뿐

전투력 가진 말들이 길거리 여기저기서 뽐을 내지

문명의 한 구석에 제 이름을 새기려는 영혼들

왕 노릇하려고, 서로 왕 노릇하려고

생명을 능가하고, 죽음을 능가하는 이웃들

나는 왕의 언어가 없고

법의 언어가 없고

왕을 심판하는 언어가 없지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꿀 뿐이지

이 세계에 없던 언어를 찾아 나설 뿐이지

아름다운 운율은 규칙이 아니라

당신의 입술 때문에 만들어지지

― 「거리의 왕 노릇」 부분

 

한낮의 거리에 내걸린 “플래카드엔 권유와 명령만 있을 뿐”이다. “전투력 가진 말들이 길거리 여기저기서 뽐을 내”고 있다. “서로 왕 노릇하려고/ 생명을 능가하고, 죽음을 능가하는 이웃들”이 “문명의 한 구석에 제 이름을 새기려” 한다. 시인의 언어는 무력하다. 그에게는 “왕의 언어가 없고/ 법의 언어가 없고/ 왕을 심판하는 언어가 없”다. 시인의 언어는 왕의 언어가 아니고, 법의 언어가 아니고, 왕을 심판하는 언어가 될 수 없다. 시인의 언어는 왕과 법과 심판의 언어가 결단코 아니라고 이재훈이 말한다. 권력에 복종하는 언어들의 질서를 부정한다. 시인의 언어는 권력을 거부한다. 시인의 언어는 권력을 파괴한다.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꾸기에 시인의 언어는 무기가 된다. 정해진 것, 기존의 모든 것, 이념과 권력의 시녀를 증오하는 시인의 언어는 “이 세계에 없던 언어”가 된다. 아름다운 시의 노래는 “규칙이 아니라/ 당신의 입술 때문에 만들어”진다. 시인의 언어가 ‘나비’가 되어 입술 사이에서 날아오른다. 이재훈은 “중얼거리는 입술로 거리의 왕”이 된다.

시인이 거리의 왕이 되었다. 거리의 왕, 이재훈이 지닌 무기가 그의 시이다. 이재훈이 뿔을 세우고 달려온다. 대안對岸의 사랑에 당도하기까지 이재훈이 지나온 거리를 다시 돌아본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변하지 않았”다. “구름도 흔들리고 새들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한낮의 풍경”(「악령」)은 달라지지 않았다. “타인의 영혼을 훔치면 왜 안 되”(「기이한 탄생들」)냐는 말이 횡행한다. “예언도 사라지고/ 초월도 사라지고/ 왜소한 지식을 입에 문 기사騎士들만 즐비한” 거리에 “자기 경험을 강요하는 꼰대들/ 침을 질질 흘리며 풋풋한 냄새를 킁킁거리는 꼰대들”(「녹색기사」)이 행진한다. 그들은 “트럭 짐칸에 가득 실인 돼지의 말을 뱉어내며 생을 즐긴다”. 이재훈은 “시가 삶의 전부라고 과장되게 눙쳤”던 자들을 떠올린다. 자신도 그랬을지도 모른다. “저자를 돌아다니며 뜨거운 밥의 말을 말아 먹고” 이재훈은 “책상에 앉아” ‘꼰대들’의 언어를 살해하고, “고통의 소리 가득한 늦가을. 비에 맞아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나뭇잎 하나. 핏물을 머금은 말 한 덩이”로 새로운 ‘저자의 말’을 쓰기 위해 진력한다. 그는 “말이 죽는 법을 연습한다.”(「저자의 말」) 타락한 언어, 더러운 질서, 악령의 시를 죽이고 “머리에서 흐르는 피로 글자를 쓰겠”(「벌레신화」)다고 다짐한다. 세계를 찌를 수 있는 “변하지 않는 뼈”의 언어를 곧추세운다. 창에 옆구리를 찔리고, “꼬리는 빠져 시큰하고/ 벌건 불속에서 갈비뼈를 드러낸 채/ 울고 있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재훈은 “너덜너덜해진 빈 육체가 되어 울고 있”다. “뱀이 몸을 휘감아 숨을 쉴 수가 없”다. “일상이 일상을 읽는 밤”에, “내 몸이 불어 터져 고통을 읽는 밤”에, “뿔을 잃고 읊조리는 밤”에, “오직 죽기 위해 춤추는 날”들의 밤에 이재훈은 결의한다. 고통은 두렵지 않다. 고통이 없다면, 고통을 응시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고통에 몸을 열지 않는다면 시와 시인은 죽을 수밖에 없다. “수난이 없는 몸은 역사가 없”(「뿔」)다. 이재훈은 자문한다. 자신을 의심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짐승처럼 왔을까” “그때 우리는 참담했을까”라는 물음 앞에서 그는 “무엇을 요구할 수 없는 사십대가 된 것 뿐이”라고, “텅 빈 마음이 들어온 거”(「짐승의 피」)라고 말한다. 그리고 “허공에 통곡”을 한다. 울음이 자신을 소진시킨 후에 얻은 결의. “세계와 불화하는 가장 극적인 방법은/ 사랑임을 알지 못했”다는 후회. 이재훈은 “부패한 말들이 냄새를 피우”(「기복祈福」)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이재훈은 “채찍이 내 피부에 감기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가시가 박혀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갈라지고/ 뱃가죽이 찢어지고 창자가 흘러내려도/ 나는 기쁘겠”다고 자신을 저주한다. “내 몸이 곪아 칼로 피부를 도려내는 기쁨”에 젖어버리겠다고 다짐한다. “풍습을 거스르고 바람을 거스르고/ 스승을 거스를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선언한다. 세계를 향해 웅변한다. “우리는 다시 이 땅으로 올 거예요/ 새로 태어난 우상들/ 땅을 호령하는 권력들에게 말하겠어요/ 대지의 증인은 우리들이며/ 흙의 몸은 바로 우리들이라고”(「벌레신화」) 외친다. 과거의 ‘나’를 처형한 후 이재훈은 눈을 뜬다. 「돌의 환」을 발견한다

 

부러진 돌부리에 채인다

굴러다니는 돌이 아니라

올곧게 서 있다가, 부러진 돌

창과 칼 혹은 바람이

돌의 몸을 반동강 냈을 것이다

사방이 어둠이었고

나를 길에 내던졌던 사람들의 눈빛만

어둠 속에서 반짝하던 밤들이었을 때

발바닥 돌덩이가 내 존재를 떠받칠 때가 있다

돌이 내 집을 떠받치고,

아버지의 약속을 떠받칠 때

돌 위에 피의 흔적이 있다

돌은 깨져도 죽지 않는다

돌은 썩어갈 육체를 갖고 있지 않아

언제나 채이고 밟히고 놀아난다

돌에 의해 소멸한 것과 태어난 자리가 한 몸이 되는

이 모든 찰나를 지켜본 돌

어둠 속에서 세상이 어지럽게 돌기 시작하면

나는 흔들거리는 운명을 본다

흔적 없이 왔다간

당신의 영혼에 몰래 깃들고 마는 돌

부처의 얼굴도 만들고, 예수의, 마리아의 몸도 만드는

성육신인 돌

영원을 살고 있는 길 위의 돌

돌로 만들어진 뭇사람 하나

그 무성한 골짜기의 돌

― 「돌의 환」 전문

 

이재훈을 ‘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돌이 된 이재훈, 돌이 된 그의 시가 획득한 염결한 의지. “이 세계를 말하지 말고 써야 하네. 가르치는 언어가 아니라 감각을 일깨우는 글자들. 피부에 달라붙어 생채기를 내고 콧속으로 들어가 온몸을 서늘하게 만드는 단 한 줄의 시를 써야 하네.”(「대리자代理者」) 우리가 경험했던 이재훈의 사랑의 경로가 이러하다. 그의 시는 세상을 향해 던져진 돌이다. 그 돌이 세상에 균열을 낸다. 절망에 젖어 시의 발화發火를 부정하는 나를 불태운다. 어제의 죽은 내가 보인다.

 

벽에 귀를 갖다 대면 물소리가 들린다. 아득하다. 눈을 감으면 당신의 소리가 들린다. 나는 늘 아득한 것만을 탐했다. 물소리, 물소리. 축축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 몸이 소리가 된다. 어떤 채비도 없이 탐험은 시작된다. 돌로 된 벽. 사이사이 틈. 틈 사이사이 어둠. 슬며시 그 얇은 어둠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간다. 내 몸은 돌이 되지 못하고, 역사가 되지 못하고, 흐물흐물 유형도 무형도 아닌 정욕의 애액이 되어 돌 속에 분신한다. 돌 속에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 파닥거리며 지느러미를 움직인다. 돌이 흔들거린다. 돌 속에서, 돌 속의 물속에서 노래를 부르자니 숨이 가빴다. 내 몸의 구멍으로 물이 들어왔다. 살갗이 울퉁불퉁하게 딱딱해진다. 온몸이 물이 된다. 물속에서 돌이 되는 순간. 물이 돌이 되는 꿈. 돌이 된 몸속에서 아득한 물결 소리가 철썩인다.

― 「고분古墳」 전문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이재훈에 의해 무덤 ‘안’에서 나는 깨어났다. “벽에 귀를 갖다 대”자 “물소리가 들린다.” “눈을 감으면 당신의 소리가 들린다.” 당신이 나를 깨어나게 했다. 당신의 소리가 나를 되살아나게 했다. 당신의 소리가 나를 부활시켰기에 “어떤 채비도 없이 탐험은 시작된다.” “돌로 된 벽. 사이사이 틈. 틈 사이사이 어둠”을 지나 나는 간다. “내 몸은 돌이 되지 못하고, 역사가 되지 못하고, 흐물흐물 유형도 무형도 아닌 정욕의 애액이 되어 돌 속에 분신”했다. 무덤 안에서 내가 사라진 후에, 당신이 어제의 나를 멸실시킨 후에, 나는 “돌 속에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가 되었다. “파닥거리며 지느러미를 움직”이자 “돌이 흔들거린다.” “숨이 가빴다.” 기적처럼 “내 몸의 구멍으로 물이 들어왔다.” “살갗이 울퉁불퉁하게 딱딱해”졌다. “온몸이 물이 되”었다. 나는 돌 속의 물이다. 나는 살갗이 딱딱한 물이다. “물이 돌이 되는 꿈”을 꾼다. 나는 곧 “물속에서 돌이 되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나는 물이자 돌이 될 것이다. “돌이 된 몸속에서 아득한 물결 소리가 철썩”이는 꿈이 이재훈에 의해 실현되었다. 나는 물이고 돌인 시를 읽었다. 나는 이재훈의 시에 의해 시의 진실과 가능성을 다시 믿게 되었다. 그의 자성自省이 나를 데운다. 그의 시는 개안開眼으로 이끈다. 부정否定과 갱신으로 나를 이끈다. 이재훈의 수상을 축하한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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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현대시작품상 특집 / 심사평

 

 

실재계의 목소리

 

원구식

 

 

 

지난해 한국시는 우리의 경제사정만큼이나 피폐하였다. 시인은 이미 호모사케르인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맑스가 세상에 나왔듯이, 오늘의 정보혁명은 또 다른 맑스의 출현을 예감케 한다. 한국이 세계에서 자살률이 1위인 까닭은 세계에서 정보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기술혁명은 고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절망을 넘어선 청년들의 실업은 구조화가 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실패한 시장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는 이미 오래 전에 버려졌다. 그런 와중에 나는 이번 심사에서 김안, 박진성, 이재훈, 이현승, 최금진 시인을 추천하였다. 모두 지친 삶을 꾸려가고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 한국 시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우리들의 전사이다. 어느 시인이 수상하여도 본상의 명예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번에 수상자로 선정된 이재훈 시인은 수도원에서 거리로 나온 실재계의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구도를 열망하는 나르치스의 언어와 세속에 빠진 골드문트의 언어가 혼재되어 있다. 이 두 목소리가 길항하며 부딪칠 때 이재훈의 시는 묘한 빛을 발한다. 그것은 마치 실재계가 상징계로 침입하는 것과 같다. 실재계는 언어에 의해 포착되지 않은 세계이다. 기표도 기의도 없는 삶의 영역, 그래서 시인은 “날 구원해주는 것은 언어가 없는 원시의 감각”(「나르치스」)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감각을 소유한 시인은 “전투력을 가진 말들이” 서로 왕 노릇을 하려고 뽐을 내는 길거리에서 “이 세계에 없는 언어를 찾아나”선다.(「거리의 왕 노릇」) 그리하여 그가 평원에서 “아무 언어도 없이 심연에 잠길” 때, “저 우주에 몸을 눕히고 별들을 덮을” 때(「평원의 밤」), 혼잡한 지하철에서 눈을 감고 퇴출한 명왕성으로 사라질 때, 상징계의 꼭두각시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문득 우리의 맨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수상을 축하한다.

 


제15회 현대시작품상 특집 / 심사평

 

 

영혼의 전인적 복기 의지

 

박주택

 

 

 

수상작을 선정한다는 것은 작품의 우수성뿐만 아니라 시인이 그간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작품을 써왔는지도 중요한 가치 평가로 작용한다. 상호연관성 속에서 관계 짓는 이 잣대는 이런 의미에서 전체적이고 통일적이다. 시가 시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전인적 삶으로부터 현시된다. 시가 역사이고 정신인 것은 시간과 함께 지속적으로 삶 속에 자신을 투여할 때 가능하다. 따라서 한 편의 시에는 미적 체험으로서의 선명한 자기 인식이 녹아 있다.

이번 수상자인 이재훈 시인은 그간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2005)와 <명왕성 되다>(2011)를 상재하며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해온 시인이다. 그의 시편들은 동시대의 현실을 가장 새로운 묵시의 형식으로 시화하면서, 동시에 난파된 젊음에 대한 우수와 자긍을 겹쳐놓은 독특한 현실 환기의 세계다라는 평가(유성호)와 함께, 유한한 것들을 무한에 대고자 하는 상상적 결단이라는 평가(조강석)를 받아왔다.

수상작인 「거리의 왕 노릇」은 속도와 비생명적 일상 속에서 전투와 명령만 있는 세상에 대해 신랄하게 풍자하며 통박한다. 일찍이 벤야민이 도시 산책자의 시선으로 생명을 억압하는 기제들에 대해 신령상실을 탄식한 것처럼 이재훈은 영혼과 말의 부재를 공간의 부재로 대체하며 배설과 오물의 길에 서성인다. 대지에 서 있지만 대지에서 유폐된 채 서로 왕 노릇하려고 생명과 죽음을 능가하려는 부끄러움이 없는 영혼들을 조롱하고 야유한다. 십자가 없는 어두움과 허공 속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조용한 잠이 없는 모퉁이 속에서 쭈글해진 어머니 배에 귀를 갖다 대며(「사수자리」) 신의 안부에 고통스럽게 침묵하는 이교도처럼(「빌딩나무 숲」) 처형의 시간을 고통스럽게 바라본다.(「연옥의 산」)

이재훈의 시는 그간 도시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영혼 없는 형식의 세계를 개성적인 시각으로 묘파해왔다. 일관되게 자신의 시적 세계를 밀고 나가는 그의 추동력은 존재의 시원을 상기시키며 성소로서의 낙원 의지를 복기해 왔다. 이번 수상으로 그의 시가 우리시의 부족한 부면을 더욱 광활하게 개척하기를 고대하며 현대시 작품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제15회 현대시작품상 특집 / 심사평

 

 

존재론적 시원始原을 추구하는 순례자의 언어

 

오형엽

 

 

 

나는 예심을 거쳐 올라온 본심 대상 시인들 중에서 1차로 김중일, 박진성, 심보선, 윤의섭, 이재훈 시인을 추천했다. 1차 투표 결과 이재훈 시인이 3표, 박진성, 이현승, 최금진 시인이 각각 2표를 얻었다. 심사위원들은 이 네 시인이 작년 한 해 동안 발표한 시들을 놓고 작품성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했다. 다각도의 논의가 진행된 후 심사위원들은 이재훈 시인을 수상자로 결정하는 데 합의했다. 이재훈의 시는 세속도시의 일상을 지배하는 자본과 마케팅 문화의 힘에 맞서 존재론적 시원始原을 추구하면서 천상의 언어를 회복하려 한다. 수상작인 「거리의 왕 노릇」은 최근 이재훈 시의 특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문명의 한 구석에 제 이름을 새기려는 영혼들”과 “서로 왕 노릇하려고/생명을 능가하고, 죽음을 능가하는 이웃들”이 발설하는 “왕의 언어”, “법의 언어”, “왕을 심판하는 언어”에 저항하는 시인의 언어는 “이 세계에 없던 언어”이다. “문득 신들이 사는 세계를 구경하고 싶었”다는 진술이 드러내듯, 이재훈의 최근 시는 신학과 문학이 만나는 사제적 언술로 우리의 현실을 질타한다. 이처럼 이재훈의 시는 신학적 상상력에 근거하지만, “아름다운 운율은 규칙이 아니라/ 당신의 입술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처럼 거리의 소음과 노동과 사랑을 시적 시선에서 놓치지 않는다. 군중과 농부와 회사원으로 구성되는 일상의 현실을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체험에 공감하고 동참함으로써 이들의 목소리를 한데 모아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구성한다. 그래서 이재훈 시의 화자가 드러내는 목소리는 군중과 농부와 회사원의 언어를 종합하고 그것을 순례자의 언어로 승화시켜 얻어진 것이다. 우리 시단에서 무의식적 욕망의 언어 및 사회적 윤리의 언어와 더불어 존재론적 시원을 추구하는 순례자의 언어를 만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재훈 시인의 현대시작품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제15회 현대시작품상 특집 / 심사평

 

 

마음의 한 세기를 다루는 시인

 

조강석

 

 

 

2014년 현대시작품상을 이재훈 시인이 수상하는 것에는 문학 내적인 필연과 문학 외적인 우연이 결부되어 있다. 부차적인 우연에 대해서 가장 간명한 형식으로 먼저 얘기하는 게 좋겠다. 현대시작품상은 지난 한 해 동안 쓰인 가장 좋은 작품에 주어진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 중에서 이재훈의 작품이 마음을 가장 오래 붙잡았다. 그리고 이재훈 시인은 우연히도 시상 주체와 관련된 불필요하고 근거 없는 오해와 결부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다. 작품의 수월성에 대한 고민은 짧았지만 혹시라도 수월성과 우연의 성근 인과관계를 유독 필연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을까봐 고민하는 시간이 몇 배 길었다. 그러나 필연은 필연이고 우연은 우연이다.

이제 필연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이 글을 쓰는 이나 읽는 이나 한 시대의 얼굴을 오래 지켜보고 있다. 하나의 시대가 어떻게 자신을 구조적으로 체계화하며 그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감산하는지를 제법 오래 우리는 지켜보고 있다. 자본이 국경 없는 제국의 섭생을 관장하고 다수결이 소수에 의해 입안된 구체적 이익을 출납하고 덧셈 뺄셈처럼 명료해 보이는 외설적 욕망과 전횡도 모두 각자도생의 이전투구처럼 비치게 하는 나팔수가 24시간 활약하는 시대에 출근하고 카드 긁고 퇴근하고 정산하는 삶을 부정할 수 없는 우리는, 생활하며, 그러나, 마음의 한 세기도 경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훈은 바로 그 마음의 한 세기가 어떻게 운용되는지, 통치와 경영과 합리화와 욕망의 구조 속에서 그래도 하루를 살아야 하는 우리가 마음의 한 세기를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를 가장 진솔하게 보여주는 작품을 쓰고 있다. 시가 내감의 외화만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사유의 귀결이기도 하다면 마음의 한 세기를 다루는 이 시인의 운산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의 표상에 대한 내밀한 사유와 적실한 이해로부터 비로소 우리는 폐기할 것들의 숙주로 살고 있는 이의 곤혹스러운 윤리가 모든 끝의 시작임을 배운다. 드물고 귀한 시선을 이제 우리시는 지녔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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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다시 별들의 방언을 찾아

 

 

 

감사합니다. 그저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말밖에 떠오르질 않습니다. 늦은 밤. 홀로 창밖을 보다가 문득 별을 발견했습니다. 예전 서울에 올라와 옥탑방에 살 때는 별이 참 많았습니다. 지금이라고 그 별이 줄어들지는 않았겠지요. 당시엔 자주 하늘을 올려다 볼 때였습니다. 문학을 하고 있고, 시를 쓰고 있는 제 자신이 안쓰럽기도 하고 간혹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무릎 꿇고 살더라도 시를 쓸 수만 있다면 고귀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니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변해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혹시 시인의 자존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교만하지는 않았는지, 시를 제 목숨보다 앞에 놓고 사는 시인들의 작품을 함부로 폄훼하지는 않았는지 곱씹어 보았습니다.

면구쩍어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이 세계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는 별이 제게 자꾸 말을 거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별의 소식을 잘 받아 적었느냐고. 많이 바쁘지 않았느냐고. 시가 네게 어떤 의미가 되었느냐고.

시는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언이었습니다. 훈육된 제 언어는 너무 짧고 황망하여 이리저리 변죽만 울리다가 이내 사그라들기만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제가 찾은 유일한 언어였습니다. 운명적으로 만난 제 존재와 저를 둘러싼 환각의 관계들을 밤새도록 되작이며 중얼거려도 헛헛하지 않았습니다. 내게도 예술적 파토스가 있다면 이 방언을 잊지 않고 목이 쉬도록 불렀다는 것이겠지요. 신과 마주하는 기도와 시와 마주하는 방언 사이에서 늘 헤매었던 것 같습니다. 때때로 그 자발적인 영혼의 방랑이 변덕을 많이 부렸습니다. 지치기도 하고 도망치고 싶기도 했습니다. 아마 이 상은 그런 제 마음을 다시 붙잡아 놓으려는 신호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가볍고 산뜻하게 시를 쓰고 싶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칭얼대기도 싫고 노인네처럼 훈계하기도 싫습니다. 늘 새로운 것만 요구되는 시대에 저 먼 시간의 강을 헤엄치려 합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것들을 탐하며 이 세계 이전의 존재들을 그리워하겠습니다. 최초의 말을 만나기 위해 방황하겠습니다.

제 육체는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 영혼 또한 영원히 완성되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전언으로 삼고 있는 헤세의 말처럼 “너는 완벽한 교훈을 동경하지 말고 너 자신의 완성을 동경하라”는 말을 가슴에 얹을 것입니다.

어짊으로 이 자리를 마련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이 큰 빚을 언제 갚을까요. 이제 별의 신호에 따라 다시 외계의 방언을 받으러 가야겠습니다.

 

_ <현대시>, 2014년 5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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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이무첨의 시간

 

 

나민애

 

 

 

  울었지. 허벅지가 패고 뺨에 피가 흐르지. 우리는 어디에서 짐승처럼 왔을까. 당신의 기별을 기다리며 안절부절하는 날들. 먼 시간을 건너왔을까. 천 년 전부터 서로의 몸을 기억했을까. 기억이란 늘 중심이 다를텐데.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검은 밤의 시간을 가로질러 왔지. 그때 우리는 참담했을까. 누군가는 나를 기억하고, 누군가는 내가 뱉은 말들을 기억하지. 아무도 없이, 아무에게도 위로받지 않고 잠들고 싶었지.

  내 겨울엔 소리가 없지. 모든 사물은 배경으로만 존재할 뿐. 두려움은 고독 때문인 것. 문을 열고 나가면 그뿐인데. 전략 없는 삶이 늘 자랑스러웠지. 슬픔에도 정도가 있다면 나는 어떤 고통쯤에 닿았을까. 우린 숨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 묘한 시간이 지나면 어느덧 시의 동지들. 불을 만지고, 물을 만지고, 공기를 만지는 손들.

  우울이 병은 아니지. 무엇을 요구할 수 없는 사십대가 된 것뿐이지. 달이 떠오르는 시각. 달빛의 광경보다 텅 빈 마음이 들어온 거지. 중년의 형편이 가장 누추할 때. 땀이며 피며 살갗이 흘러내리지. 이제 갈 시간이 된 것. 도시에서, 혹은 상스럽고 선정적인 인문학의 세계에서.

  - 이재훈, <짐승의 피> 전문(<세계의문학>, 봄호)

 

 

이재훈 시인의 시를 읽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그 시인을 통해 ‘불완전한 성인(成人)’의 위태로운 사회적 위치와 불안한 심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세의 이립(而立)을 지났어도 세운 것은 하나 없고, 40세의 불혹(不惑)이 되었어도 미혹되지 않은 바 없다. 많은 ’성인‘들이 모여 시에서처럼 ’우리‘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성인이 되었음은 물론, 성인이 된 지 한참 지났어도 21세기의 성인들은 ’미성인(未成人)‘의 처지에 있다. 이재훈 시인의 작품에는 성인이되 성인이지 못하다는 이 모순적 자의식이 존재한다. 더불어 뒤틀린 자의식이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고통과 살 타는 냄새가 가득하다.

이 고통의 냄새를 민감하게 맡고, 그 냄새의 원천지를 찾아 나서는 독자의 심정은 아마도 타인의 표정에서 자기 얼굴을 찾아내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내 고통의 표정을 타인의 고통의 표정에서 찾아내는 즐거움, 이것이 이재훈 시인의 시를 읽는 두 번째 이유이다. 내가 고통스러운 것처럼 그도 고통스럽구나 내지는 내 타는 살보다 저 사람의 살은 더 타고 있구나, 이렇게 비교 가능한 고통을 확인하는 것은 고통을 견디는 데 위안이 된다. 매우 야박한 일이지만 나만 아픈 것이 아니라 너는 더 아프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고통의 심리적 지수는 체감상 낮아지게 된다.

그렇지만 체감상 낮아질 뿐 고통은 여전히 고통이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안절부절하는 날”과 “참담”은 계속되고, “형편이 가장 누추”하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변함없는 것을 변하게 할 힘이 없는데 그렇다면 이런 사실을, 못난 현실과 못난 나를 고발하는 행위는 무슨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이재훈의 시를 읽는 세 번째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다. 그의 시는 오욕과 더러움과 진땀의 세계에 속해 있고, 그것을 어쩌지 못하고 건너는 ‘개 같은 날들’의 기록이다. 이렇게 더러움을 깨끗하다고 말하지 않고, 참 더럽다고 말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나는 이재훈 시인의 주먹에는 ‘빈이무첨(貧而無諂)’의 세계관이 쥐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더럽지만 그래, 더러우니까 나만 깨끗하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가난하지만, 가진 것은 없고 미혹과 불안만이 있지만, 아첨하지는 않겠다. 이것이 ‘빈이무첨’의 정신이고, 완전히 짐승 쪽으로 건너가지는 않겠다는 마지막 마지노선이다. 도시를 욕하면서 그곳에 사는 도시인뿐만 아니라 “상스럽고 선정적인 인문학의 세계”를 욕하면서도 그 세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더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죽을 때까지 풀지 않을 주먹에 ‘빈이무첨’을 꼭 쥐고 이 세계를 건너는 자세 말이다.

 

― <문학사상>, 2014년 7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

대도시와 정신적 삶, 그리고 서정시

 

 

-조강석

 

 

 

 

 

 

1.

 

대도시의 성립은 단지 물적 기반의 확립과 경제 시스템의 정착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앙리 르페브르가 강조했듯이 공간은 정신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사회적인 것, 역사적인 것 등을 연결하고 발견, 생산, 창조의 과정을 재구성함으로써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공간은 “할당된 장소와 위치 안에서 무수히 많은 교차를 내포”하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간의 문제는 물적 토대, 지식과 담론의 생산, 그리고 공간의 재현 양태 모두와 결부된다. 대도시의 성립이 예술에 있어 새로운 의미지평을 획득하게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대도시의 대두와 성립은 단지 물리적 차원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공간을 표상하고 재현하는 구성원들의 의식 차원의 문제와도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대도시는 물리적으로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구획하고 정초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 삶의 영역에서도 새로운 방식의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아마도 이와 관련하여 게오르그 짐멜의 논의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막스 베버, 에밀 뒤르켐 등이 근대 세계에서 대도시의 성립과 관련된 역사적 계기와 도시의 발달 조건 등에 대해 논했지만 대도시의 발달이 인간의 내면적-정신적 삶과 일상적 상호작용에 대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짐멜의 글 「대도시와 정신적 삶」이 우선적으로 주목에 값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대목을 눈여겨보자.

 

한편으로는 관심을 끄는 자극들이 도처에서 밀려오고 시간과 의식의 충전을 통해 거의 움직이지 않아도 마치 강물에 휩쓸려가듯이 저절로 떠밀려가는 삶을 살게 되면서 개인의 삶은 엄청나게 편리해졌다. 다른 한편으로 삶은 점점 더 개인적 색채나 비교불가능한 특성을 몰아내는 비인격적 내용과 제공물로 채워진다. 그 결과 누군가를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 혹은 자신만을 위한 경우라도 개인적인 것을 과장할 필요성이 생긴다.

 

인용된 게오르그 짐멜의 언급에서 흥미로운 것은 대도시가 개인의 의식의 영역에서 “도처에서 밀려오”는 자극들을 끊임없이 생산한다는 대목이다. 생활의 영역에서 개인의 삶은 더욱 편리해졌지만 한편으로 정신적 삶의 영역은 “비인격적 내용과 제공물”들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이 짐멜의 설명이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급속도로 이미지들이 교체되면서 밀려오거나,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포착되는 내용의 변화가 급격하거나 밀려드는 인상이 전혀 예기치 못한 경우에 더 큰 부담을 갖는다. 이러한 심리적 조건은 대도시의 거리를 걸을 때나 빠르고 다양한 경제적-직업적 및 사회적 삶을 경험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정신적 삶의 감각적 기반, 다시 말해 차이에 입각한 우리 존재의 속성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의식의 총량을 비교해보면, 대도시는 소도시나 시골의 삶과 커다란 차이를 보여준다. 후자에서는 감각적-정신적 생활의 리듬이 더 느리면서 더 익숙하고 더 평탄하게 흘러간다.

 

그러니까, “비인격적 내용과 제공물”로 가득찬 자극들이 “정신적 삶의 감각적 기반”을 형성하는 감각자료들이 됨에 따라 주체는 한편으로는 신경과민에, 또 한편으로는 둔감함에 내몰리게 된다는 것이다. 짐멜 전문가 김덕영은 이에 대해 이 둔감함이, 지젝의 규정에 따르면 “사물의 차이에 대한 마비증세”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둔감함은 쉴 새 없이 주어지는 자극들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주체의 내면에 사물의 차이에 대한 마비증세가 나타난 결과라는 것이다. 모든 개별 가치들을 교환가치로 환원시키는 화폐의 유통이 사물들 고유의 가치에 대한 계량보다 우선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런 양상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신경과민과 둔감함이라는 양가적 심리를 동시에 지닌 주체들은 무수한 자극과 만남들에 대해 매번 전면적인 내면적 반응을 보이는 것을 피하고 자신의 속내를 감춤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한다는 것이 짐멜의 후속 설명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짐멜은 대도시에서의 정신적 삶과 관련하여 양적 개인주의와 질적 개인주의를 구분하여 설명한다. 짐멜에 의하면 양적 개인주의란 18세기에 발생한 것으로 “자연이 불어넣었지만 사회나 역사에 의해 훼손될 수 있는 인류의 고상한 본질”을 회복하려는 개인주의 즉, 종교적 억압과 같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구속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려는 개인주의를 의미한다. 반면, 질적 개인주의란 “역사적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개인들이 각기 남과 구분되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이상”으로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질적 유일성과 대체 불가능성이라는 개인적 가치를 유지하려는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짐멜은 대도시에서 개인의 정신적 삶이 결국 이 두 개의 개인주의의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혹은 “투쟁과 분규”를 통해 형성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2.

 

게오르그 짐멜의 설명은 대도시에서 서정시의 역할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대도시가 감각적 자극의 끊임없는 흐름을 낳고 그에 따라 정신적 삶의 영역에서 개개인은 둔감함과 신경과민에 내몰리면서도 고유성을 유지하는 질적 개인으로 남고자 하는 열망을 품게 된다면, 그것은 대도시와 정신적 삶의 영역에서 서정시가 할 일이 적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서정시란 사물들을 익명의 교환가치에 의해 환원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사물 각각의 고유성에 대한 구체적 관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서정시에 대한 오래된 규정 중 하나가 ‘서정시는 사물의 꿈이다’라는 것을 상기해 보라. 또한, 감각적 자극들에 매몰되거나 이에 휩쓸려 신경과민과 둔감함에 치우지는 대신 넘치는 자극들을 수용하여 고유한 내적 반응을 생성시키고 이를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주체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것이 서정시이기 때문이다. 둔감함대신 일사일언(一事一言)을, 교환과 환원대신, 질적 고유성을 택하는 것이 대도시의 자극에 의해 계발되면서도 동시에 정신적 삶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질적 개인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시적 주체의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의 대도시 형성 경험에 나타난 문학적 표상과 재현의 예를 직접 드는 것이 긴 설명을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조선에 근대적 도시가 본격적으로 성립되던 1930년대의 한 정신 풍경의 지형도를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서 단적으로 일람할 수 있을 것이다.

 

 

(1)

가로수(街路樹) 이팔마다 발발(潑潑)하기 물고기 같고 유월(六月)초승 하늘아래 밋밋한 고층건축(高層建築)들은 삼(杉)나무 냄새를 풍긴다 ( …중략)

풀포기가 없어도 종달새가 나려오지 않어도 좋은, 푹신하고 판판하고 만만한 나의 유목장(遊牧場) 아스팔트!

 -정지용, 「아스팔트」 중에서

 

 

(2)

그러나―왜 나는 미끈하게 솟아 있는 近代建築의 위용을 보면서 먼저 鐵筋鐵骨, 시멘트와 細砂, 이것부터 선뜩하니 감응하느냐는 말이다

 

(… …중략)

 

나는 오늘 大悟한 바 있어 美文을 避하고 絶勝의 風光을 隔하여 蕭條하게 往生하는 것이며 宿命의 슬픈 透視癖은 깨끗이 벗어 놓고 溫雅慫慂, 외로우나마 따뜻한 그늘 안에서 失命하는 것이다.

                    

- 이상, 「종생기」 중에서

 

 

(3)

서울의 이곳저곳에 뛰어난 근대적 <데파트멘트>의 출현은 1931년도의 大京城의 주름잡힌 얼굴 위에 假裝하고 나타난 <近代>의 <메이크업>이 아니고 무엇일까(… … 중략) 이 <메이크업>한 <메피스트>의 늙은이가 온갖 근대적 시설과 機構感覺으로써 <젊음>을 꾸미고 황폐한 이 도시의 거리에 다리를 버리고 저물어가는 황혼의 하늘에 노을을 등지고 급격한 각도의 직선을 도시의 상공에 뚜렷하게 浮彫하고 있다.

밤 하늘을 채색하는 찬란한 <일류미네이션>의 人目을 현혹케 하는 변화―수백의 눈을 거리로 향하여 버리고 있는 들창―.

-김기림, 「都市風景 1․2」 중에서

 

 

1930년대에 이르러 경성은 완연하게 근대적 도시의 면모를 지니게 된다. 통계에 따르면, 1928년 현재 경성의 인구는 약 31만 5천이었으나 1934년에는 38만 2천 명에 이르며 1941년에는 무려 97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완연한 성장이 아닐 수 없다. 근대적 도시가 형성됨에 따라 지식인들의 도시 문물 체험은 일상적이면서 동시에 문제적인 것이 된다. 많은 작가들이 소위 ‘산책자’로서 도시의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새로운 문물에서 ‘신기성’을 발견하고 동시에 새롭게 도입된 근대 문물이 자극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따라 부유하는 군중의 모습을 발견했고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관견기로만 간주될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대도시의 넘쳐나는 감각적 자극들의 홍수 속에서 사태를 고유한 방식으로 파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당대의 대표적 모더니스트로 꼽히는 정지용, 김기림, 이상 등은 근대 도시 문물의 상징인 고층 건물에 대한 각기 다른 인상을 기록한 글들을 남기고 있는데 이 글들은 이들이 속도감 있게 육박해오는 근대와 근대적 도시에 대해 보여준 인식의 차이와 그에 따른 미학적 태도의 차이를, 그리고 그 결과 각자의 고유성이 발원하는 지점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정지용은 근대 문물의 상징인 낯선 고층건물에서 ‘杉(삼)나무 냄새’를 느끼고 아스팔트에서 유목장을 상기한다. 이는 낯설고 새로운 것을 친숙한 감각을 통해 전유하는 정지용 특유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근대 도시의 넘쳐나는 자극들을 감성적으로 전유하여 새로운 이미지로 벼리는 것이 정지용의 방식이다. 반면 이상은 낯선 자극을 감성적으로 전유하여 친숙한 이미지들의 결합체로 변환시키는 대신 정공법을 택한다. 그는 근대건축의 위용을 보면서 무엇보다 먼저 철근철골, 시멘트와 세사 등을 “선뜩하니 감응”한다고 말하며 이를 스스로 ‘슬픈 투시벽’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근대와 근대 도시에서의 삶을 해부학적 시선으로 투시하는 것이 이상의 방식이다. 김기림의 태도는 또 다르다. 각기 근대와 근대 도시의 감각적 전유와 수학적 환원으로 환언될 수 있는 정지용과 이상의 태도와 달리 그는 고층 건물의 외관에서 ‘메이크업한 표정’을 읽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근대 도시의 물리적 알리바이로부터 매혹과 불안이라는 양가적 정서를 느낀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일종의 신경증이라고 표현될 만한 성질의 것이다. 근대 도시의 산물을 익숙한 감각에 의해 치환하고 전유하거나 대도시라는 괴물을 수학적 알고리즘으로 해부하고 포획하는 태도와 달리 김기림은 근대 도시가 지시하는 숨은 기표를 더듬으며 때론 그것을 매혹으로 때론 그것을 불안으로 풀어내고 있다. 김기림의 작품에 나타나는 근대도시에 대한 양가적 태도가 이런 신경증적 태도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1930년대에 대도시가 본격적으로 성립됨에 따라 작가들은 그것이 주는 새로운 감각적 자극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이에 대해 고유한 대응을 해나갈 것인가를 각자의 방식으로 모색했으며 그 귀결이 그들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3.

그렇다면 최근의 사정은 어떠한가를 간략히 살펴보기 위해 최근의 시 두 편을 더 읽어 보자.

 

(1)

도시는 수많은 유리알을 낳는다

 

도시의 유리체를 통과한 것들은

유리체 통과의 꿈을 꾸지 않는 것들과 함께 있지만

유리체를 통과하지 않은 것들과 같지 않다

아직도 뒹굴며 꿈꿀 뿐이다.

 

돌아온 것들은 죽고 완성된 것은 훼손된다

꿈을 통과하지 않은 것들만 밖에서 천예(天倪)의 숨을

쉰다. 유리체는 녹화되지 않고 영원히 비어 있다

구름을 향해 그들은 불구의 몸으로

가지를 뻗는다

 

이미 사라진 것의 남은 존재들은

지나간 거리에 긴 그림자를 끌기 시작한다

오늘도 혼돈은 눈을 감고, 길을 차단하고 돌아와

깨어나지 않는 유리알 속으로 사라진다

-고형렬, 「유리알 도시의 빌딩 속에서 - 고귀한 삶을 빙자한 숲의 은유」 전문

 

 

(2)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 낸다. 눈빛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빛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소리. 단추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 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 이재훈, 「명왕성 되다」 전문

 

 

(1)이 이미 경험의 본원적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로 자리 잡은 도시를 단적으로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라면 (2)는 도시에서 질적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겪어내는 정신의 운동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우선 인용(1)을 보자.

유리는 바깥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다른 세계를 환기시키는 동시에 스스로 차단막으로 기능한다. 이 이미지는 도시의 심리적 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는 얼핏 보아 유리와 숲의 대립 구조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도시 자체가 이미 매혹과 환멸, 방랑과 귀환, 순수와 퇴화의 심리 구조로 축조된 것임을 적실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도시는 매혹으로도 환멸로도 펼쳐질 수 있는 감각적 자료들을 끊임없이 생산하여 주체의 감성에 기입한다. 넘치는 자극들로 인해 익명성과 은닉의 편안함 속으로 퇴거하는 것도, 넘치는 자극들을 수용하여 질적 개인으로 재탄생 하는 것도 모두 가능하다. 이처럼 서정시가 자극의 감성적 전유과 감각적 표현을 통해 도시인의 정신적 삶을 개변시킬 수 있는 격려가 될 수 있는 여지는 항상 도시가 낳은 피로감을 토로하는 것을 반복할 위험과 동시에 존재한다. 인용(2)를 보라.

이 시의 배경이 되는 것은 출퇴근길의 2호선 지하철이다. 이 시의 주체는 지금 익명과 소외, 그리고 기계적 규칙성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다. 이것이야말로 도시 생활자의 정신적 삶에 대한 노골적 은유가 아닐 수 없다.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생(生)”, 모든 대면 접촉이 시간을 두고 익명성의 궁륭이 되는 부박한 삶의 한 가운데에서, 게오르그 짐멜식으로 표현하자면 연속적인 익명적 자극이 끊임없이 주어지는 도시적 삶의 한 가운데에서 이 시의 주체는 질적 개인으로의 탄생을 꿈꾼다.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하고 묻는 것은 삶의 고유성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열망의 불씨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심회는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는 말을 통해 역설적으로 다시 한 번 표현된다. 폭풍이란 바로 기계적 삶의 리듬을 뒤흔들 파국이 아니겠는가? 일상에 한 번 생긴 파국은 언제나 치명적이다. 그것은 항상 이미 생긴 파국이기 때문이다.

시인 김수영은 “도시의 피로”를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새로운 삶의 씨를 틔우는 텃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아니, 그 가능성을 믿으며 도시의 피로, 바로 거기로부터 삶의 새로운 지평이 발원하기를 열망했다. 신경과민과 둔감함, 그리고 환원의 피로가 도시의 것이라면 새로운 감각이 탄생하고 피로로부터 신세계로의 발원을 가능하게 하는 씨앗을 품고 있는 것도 도시이다. 서정시는 토로하고 전유하고 창조하고 싹 틔운다. 갑을 시대에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 다시 한 번 필요한 까닭은 우리가 누구도 양적 보편성으로 환원되는 개성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둔감에 매몰되는 재난에 대해 시만한 방재시스템이 따로 없다. 

 

_ 출처 : <시인수첩>, 2014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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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가 있는 궁전

 

 

이재훈

 

 

아버지가 기타를 연주하십니다. 나는 아버지의 다리 밑에 누워 있습니다. 기타에서 떨어지는 마른 고독이 목젖을 열게 합니다. 노래를 부릅니다. 말들이 우르르 목덜미로 떨어집니다. 말들이 저 밖으로 퍼지지 못하고 등 뒤로 차오릅니다. 나는 말 위에 떠 있고, 아버지는 저 말 속에 계십니다. 내가 뱉어놓은 검은 말 속에서 기타를 연주하십니다. 말이 진화하면 물이 된다지요. 고도로 단련된 연금술인 셈입니다. 허공에 산화되어 사라지는 말을 만들어 냅니다. 그제서야 저는 말을 배웠습니다. 내 말은 이미 물이 되었습니다. 물속에서 기타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버지가 기타를 연주하신 곳은 궁전이었다고 합니다. 그 궁전의 돌계단이 너무 높았지요. 다리가 아파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곤 노래 위를 떠다녔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했던 기억의 꽃잎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립니다. 검은 말들이 기타의 현을 먹고 저렇게 아름답게 치장을 하다니. 참 감동스럽습니다.

겨울이 오고 말들이 얼어붙습니다. 저는 도끼로 말들을 내려칩니다. 얼었던 말의 입이 쩍 벌어지고 피가 솟아오릅니다. 아버지, 제 말이 자꾸만 피가 됩니다.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려옵니다. 등 뒤로 솟는 피가 참 따뜻합니다.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문학동네) 중에서

 

 


 

 

 

이재훈의 「기타가 있는 궁전」을 읽으면서 어떤 연주가 사건이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생각했다. 하나의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여러 사태들을 연쇄적으로 이끌어낼 때, 그 사태는 사건으로 전화된다.

이 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은 아버지의 기타 연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아버지의 연주를 시적 화자는 자주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연주에서 “마른 고독”을 듣게 될 때, 그 연주는 사건으로 전화된다. 저 연주가 “마른 고독”임을 감지하는 순간 시적 화자의 목젖이 열리게 되기 때문이다. 하여, 열린 목젖은 노래를 불러일으키고 “나는 말 위에 떠 있”게 되며 아버지는 “내가 뱉어놓은 검은 말 속에서 기타를 연주하”시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은 시적 화자가 부르는 노래의 말이 물로 진화하게 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물과 같이 흐르는 노래는 말의 궁륭을 이룰 수 있게 했던 것이어서, 아버지는 그 궁륭의 궁전에서 연주하시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시적 화자의 노래를 불러일으켰던 것이 아버지가 연주하는 “기타에서 떨어지는 마른 고독”이었음을 상기해본다면, 말이 물로 진화될 수 있었던 것은 고독하게 말라버린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슬픔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그 고독과 슬픔은 어떤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한 사람을 사랑했던기억의 꽃잎들”인 “검은 말들”이 그 죽음을 암시한다. “검은 말들”에 기타의 현을 먹이는 아버지의 연주는 죽어버린 연인에 대한 “기억의 꽃잎들”을 반짝거리게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가 “뱉어놓은 검은 말”이란 결국 기타 연주로 현현한 아버지의 검은 말들을 미메시스한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교묘하게 시간은 순환되는데, 화자가 자신의 “검은 말”에 아버지를 유폐한 것은 바로 아버지가 연주로 전화시킨 “검은 말들”에 미메시스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의 순환이 가능한 것은, “등 뒤로 솟는 피가 참 따뜻”하다는 문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아버지와 화자가 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려옵니다”라는 문장에서 암시받을 수 있듯이 저 일련의 사태들은 화자의 기억과 상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현재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암시 말이다.

그래서 “겨울이 오고 말들이 얼어붙”은 것 아니겠는가. 하여, 이재훈 시인에게 시 쓰기란 그 얼었던 말들을 도끼로 내려쳐서 그 말 속의 피―아버지의 피이기도 할―를 솟아오르게 하는 것이다. 말을 피가 되게 하는 시 쓰기는 아버지의 연주처럼 죽은 연인에 대한 기억―“검은 말들”―에 악기―“기타의 현”―를 먹이는 일이기도 할 터, 결국 그것은 현재 얼어붙어 있는 ‘사건’―“마른 고독”을 떨어뜨리는 아버지의 기타 연주-을 다시 기억하여 되찾는 일인 것이다.

- 이성혁(문학평론가)

 

출전 : <시사사>, 2014년 1~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

황하의 순례자

- 이재훈론

 

 

김혜영

 

 

 

1. 기원을 향한 아득한 향수

 

원시 부족사회는 그 집단을 다스리는 위대한 아버지가 있었고,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법과 심판을 수용해야 하는 윤리적 구속과 그 속박을 끊고 감히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고픈 욕망도 함께 가졌을 것이다. 아버지의 법을 지키는 것과 아버지의 법을 위반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는 종교든 세속의 정치권력이든지 언제나 의식의 틈새를 비집고 출현하는 사건이다. 가장 작은 집단인 가족 안에서 아버지가 차지했던 권력은 어린 아들에게 전지전능한 아버지의 환상을 품게 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뿐만 아니라 원시 사회의 추장이나 고대 국가의 왕이 소유한 절대 권력이 갖는 아우라가 어쩌면 자연스럽게 전지전능한 그 어떤 절대적 존재에 대한 종교적 사유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고대국가의 왕이 소유한 신성함은 종교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왕의 집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금기와 터부 역시 내포하고 있다. 그 절대적인 아버지가 현대에서는 여러 번 살해되었고 끊임없이 전복되고 있다. 기원으로서의 아버지를 해체한 현대 문명 속에서 고독한 개인들은 현상의 물질적 가치 혹은 생존을 위한 가혹한 경쟁체제에 매몰되어 황하에 익사될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이재훈의 시 세계는 기독교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하여, 존재의 기원에 대한 상상과 별을 노래하는 시인의 깊고 푸른 여정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적 공간은 광활하고 존재의 깊은 심연에 대한 탐색을 추구한다. 첫 시집인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는 “말”이라는 상징적 동물과 언어라는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시적 화자는 상상 속의 말을 타고 아득한 존재의 기원을 찾아 중세의 기사처럼 순례를 떠난다.

 

   1

 

   그곳을 찾았을 때

   모든 시간은 무너지고

   가없는 기억의 언덕도 무너지고

   또닥또닥,

   희미한 발굽 소리만 들렸는데

 

   2

 

   잠든 말, 묵상도 없는 말들이 벽에 붙어 있다 너의 소리를 들으려고 널 만진다 그제야 너는 벽화가 된다 널 만지면 황소가 되었다가 사슴이 되었다가 초원을 가로지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타 노래를 부르는 추장이 된다

 

   ―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부분[각주:1]

 

세계의 근원을 기독교에서 로고스 즉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거룩한 신의 말씀으로 창조된 우주와 인간에 대한 믿음에 대하여 시인은 맹목적으로 신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기원에 대한 역사를 쓸 야심을 갖는다. 이 세상에서 아무도 가지 않는 나만의 시원, 나만의 언어 찾기에 골몰하는 것이다. 그가 타고 가는 말은 고대 토템에서 부족들이 숭상했던 여러 동물들 즉 황소, 사슴, 말, 돼지, 매, 뱀 가운데 하나이다. 시인이 말을 선택한 것은 말을 타고 하늘을 날고픈 비상의 의지와 함께 언어의 연금술사를 꿈꾸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사명은 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언어에 자신만의 새로운 언어의 집을 건설해, 커다란 변화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을 지향하는 시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그의 첫 시집이다.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내 목을 자르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라고 절연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재훈의 시적 여정에서 이토록 담대한 선언이 또 있겠는가. 자신의 목을 스스로 자른다는 것은 자살의 의미보다는 성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부분이다. 예수의 비범한 능력으로는 죽음의 잔을 피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 선포한 진리를 위해 죽음의 길을 스스로 걸어간 예수와의 동일시가 비쳐진다. 예수가 유대교의 모세 신앙을 중심으로 한 유일신 개념과 선택받은 민족에 대한 우월의식을 타파하고 보다 넓은 보편성의 종교로 방향을 전환한 것처럼 이재훈이 시인으로서 지향하는 것은 새로운 자신만의 기원 찾기인 것이다.

인간 존재의 본질과 아득한 시원에 대한 탐색을 지향함에 있어서 아버지를 위반하는 아들의 출현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이다. 중세나 16,17세기의 종교시에는 전능한 하느님에 대한 찬미와 신성한 섭리에 부합되는 삶을 살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20세기 이후의 종교시는 신에 대한 헌신이나 찬미 보다는 신으로부터 이탈한 현대인의 초상이나 신을 전복하려는 시도를 한다. 남성적인 아버지 신에 대한 반기로써 여성시인들은 가부장제의 모태로서의 아버지 신을 거부하고 살해하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한다. 이재훈의 시 곳곳에 스며있는 종교적 상징과 이미지는 아버지 신을 살해하고 아들로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보다는 그 어떤 근원에 이르기까지의 혼란스러운 순례의 기록으로 읽혀진다. 첫 시집에서는 낭만주의적 사유의 흔적을 보이면서 아득히 먼 고대의 시공간을 배회하는 영혼의 몸짓을 묘사하고, 둘째 시집인 <명왕성 되다>에서는 자본주의라는 물신 사회의 왜곡된 이미지를 황하의 다양한 풍경 속에 풀어놓는다. 욕망과 자본이라는 이교도의 신을 위해 예수라는 인격신을 살해한 현대 문명의 기괴한 얼룩을 스케치한다. 대도시의 풍경과 중국을 관통해서 흐르는 황하 이미지를 중첩적으로 겹쳐 놓음으로써 고대 문명과 현대 문명의 이질성과 여전히 삶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을 펼쳐 보인다.

모세는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선언함으로써, 절대적 진리가 감각적 대상이 아닌 정신적인 것임을 그의 백성들에게 각성시킨다. 고대 문화에서는 이집트 신화처럼 여러 다양한 동물 신의 형상과 태양신 ‘라’ 의 상징이 지배적이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영원히 존재하고, 무한히 자비와 축복을 베푸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이라는 유일신의 개념은 이전의 다신교의 전통을 억압해 버린다. 예수가 죽은 이후에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한 유대인 바울 역시 육체 보다는 정신적 사랑의 우위를 설파한다. 그러나 이재훈은 그러한 가치에 함몰되지 않고 감각의 순수성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그의 시「수선화」에서는 한밤중의 몽정인지 자위인지 알 수 없지만 사춘기 소년의 육체에서 꽃피는 생명의 노래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한밤중에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을 잘 무렵이면, 내 몸에 꽃씨 앉는 소리가 들린다. 간지러워, 암술과 수술이 살 부비는 소리가 사물거리며 온몸에 둥지를 틀고, 어머 꽃피네, 마른버짐처럼, 간지러운 꽃이 속옷새로 피어나네, 내 몸에 피는 꽃, 어머 내 몸에 핀 꽃, 나르키소스의 영혼이 노랗게 물든, 수선화가 핀다, 아름다운 내 몸, 노랑 꽃파랑이 쓰다듬으며 어깨에서 가슴을 지나 배꼽으로 핀 꽃과 입맞추고, 시커면 거웃 사이에도 옹골지게 핀 꽃대 잡는다, 아아, 아 에코가 메아리치네, 아름다운 내 몸, 거울에 비추어, 아아아 에코가 흐느끼네, 내 몸이 하분하분 물기에 젖네, 꽃들이 더펄거리며 시들어가네, 나르키소스여 내 몸에 오지 마소서 五慾에 물든 몸 꽃피게 마소서

   한밤중이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잠들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나

 

   ― 「수선화」 전문[각주:2]

 

사춘기 소년이 겪는 성적 욕망의 발산을 수선화의 이미지를 통해 묘사하면서, 금욕을 미화시키는 종교 사이에서 갈등하는 소년의 내면을 보여준다.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가 자기애에 빠진 모습도 동시에 연상시킨다. 나르키소스가 연못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연못에 빠져드는 모순을 두려워하는 시적화자의 심적 갈등이 구체화되어 있다. 자기애를 지향하는 이드의 폭력적인 충동과 타자에의 사랑을 강조하는 초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심리적 에너지가 예술로 승화된 시이다. 생명으로 충만한 육체의 순수한 욕망과 그것을 억압하려는 윤리 사이에서 고민하는 소년의 긴장과 두려움이 노란 수선화처럼 어둔 밤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시이다.

 

2. 명왕성처럼 퇴출당한 신의 아들들

 

프로이트는 <종교의 기원>에서 종교와 신경증과의 상관성을 흥미롭게 진행하면서 정신적 외상에 대해 설명한다.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라는 논문에서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탈출시키고 새로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려한 모세를 살해한 기억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세가 가르쳐준 유일신의 교리가 그들을 너무 억압했기에 모세를 살해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를 죽인 죄의식과 함께 모세의 신앙으로의 회귀를 전승을 통해서 이루어왔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를 죽인 후, 죽은 예수에 대한 사랑을 재확인하고 예수의 성찬식을 되풀이하는 종교적 의식과 유사하다. 이 같은 증상이나 사고의 패턴이 신경증 환자에게도 나타난다고 그는 주장한다. 강박증을 가진 환자들이 무엇인가를 금기시하거나, 강박적으로 특정 행위를 반복하는 것 역시 속죄 혹은 자기 방어의 충동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의 토템 신앙에서 부족의 상징으로 신성시하는 동물을 잡아 서로 나누어 먹는 전통이 기독교에서 예수의 몸과 피를 나누어 먹는 의식으로 계승되었다고 보고 있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는 현대 종교도 고대 원시 사회의 토템 신앙과 다신교의 여러 이미지들을 계승하고 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로버트슨 스미슨의 토템 이론을 바탕으로,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던 무리는 토템을 받드는 형제를 중심으로 하는 무리로 자리바꿈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아버지로부터 승리를 쟁취한 형제들은 아버지를 죽인 뒤부터 아버지의 소유였던 여자들을 포기하고는 족외혼속을 좇게 되었다. 이로써 아버지의 권능은 붕괴되고 가족은 모권 중심으로 재편성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들의 양가적인 감정 태도는 그 이후의 전 발전 단계에 걸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형제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특수한 동물을 토템으로 세웠다. 이 토템 동물은 형제들의 조상이자 수호령신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다치게 하거나 죽여서는 안되었다. 모듬살이의 남성들은 일년에 한 번씩 한자리에 모여 의례적인 향연을 벌였는데, 그들은 바로 이 자리에서 토템 동물(평소에는 숭배의 대상이던)을 죽이고는 모두 그 고기를 찢어 나누어 먹었다. 모듬살이의 남성이면 어느 누구도 빠질 수 없는 향연은 아버지 살해의 의례적인 반복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사회적인 질서, 윤리적인 규범, 그리고 종교가 시작되었다. 로버트슨 스미스의 토템 향연과 기독교의 최후의 만찬 사이의 유사성은 무수한 내 선배 학자들의 주목을 환기시켰다.[각주:3]

 

기독교의 만찬의식을 고대의 토템 동물을 제사지내고 서로 나누어 먹는 전통과 연관시키는 것은 흥미롭다.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절대적인 아버지의 잔영과 그 아버지를 살해하는 아들들의 이미지는 인간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증상임을 설명하고 있다. 개인의 측면에서는 유아기 때 겪은 외상 같은 것들이 잠복되어 있다가 사춘기나 성인기에 반복되어 출현하는 신경증의 형태로 나타난다. 종교에서도 부친살해와 그에 대한 죄의식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이성의 억압을 피해 은폐되었다가 전승이라는 구술의 방식 혹은 문학이나 예술의 형태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재훈의 시 「할례의 연대기」에서는 어릴 적 경험한 폭력이 어른이 된 이후에도 수족관의 물고기를 보면 반복해서 떠오르는 양상을 볼 수 있다. 동네 형들의 짓궂은 장난에 저항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가 내면에 증오심을 차곡차곡 쌓지만 한편으로는 그 감정을 억압해버린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였던 수족관의 물고기를 풀어주는 행위로 전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동네 형들이 내게 침을 뱉던 날,

하얗다며 얼굴에 진흙을 바르던 날,

공중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오줌을 내갈겼다.

붉은 얼굴로 욕하는 연습을 했다.

다행히 집엔 물고기가 있었다.

수족관 유리에 입술을 대고 혀를 내밀었다.

차갑고 막막하여 아름다운 감촉.

침묵을 알아버린 호흡.

나는 방 안에 박혀 물고기와 놀았다.

온 몸이 달아올라 수족관에 다리를 비볐다.

물고기 때문이었다.

악한 아이를 죽이지 못하고

풀밭 위에 누워 한없이 울게 된 것은.

나는 시퍼런 칼을 든 모험의 소년이고 싶었다.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방법쯤은 알고 있었다.

침착하고 고요하게 모두 죽이고 나면,

평정이 온다는 것을.

그것이 운명일지라도.

물고기를 호수에 풀어 주었다.

물에 놓자마자 내 발등을 핥고

허벅지를 핥고 사타구니를 깨물고는

서서히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슬쩍, 물 위에 비치는 내 몸.

온 몸에 비린내가 났다.

가랑이에서 썩은 내가 났다.

난삽한 사랑이 시작되었다.

과분하게 영원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

 

― 「할례의 연대기」 부분[각주:4]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신성한 행위이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하는 거세의 의미를 내포한다. 신성한 행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기가 선행한다. 즉 인류사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근친상간에의 금지일 것이다. 어머니와 자매들에 대한 욕망을 절단하는 의미로서의 거세가 기본적인 의식의 구조로 잠입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갖는 선민의식도 거세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거세의 상징인 할례를 받아들임으로써 거룩한 신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이재훈은 소년의 거세 공포와 함께 거세를 감행하는 절대적인 아버지가 되고픈 욕망을 동시에 표출하고 있다. 그렇지만 감히 폭력을 행사하지 못한 채 풀밭에서 우는 소년은 “나는 시퍼런 칼을 든 모험의 소년이고 싶었다.”라고 독백하면서, 사악한 형들에게 폭력적으로 진압하려는 의지를 강화시킨다. 하지만 이 욕망은 초자아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수면 아래 잠기고 이드의 욕망으로 억압될 뿐이다. 그렇지만 이 억압된 충동이 갑자기 수족관의 물고기를 호숫가에 풀어줘 버린다. 의식의 틈새를 뚫고 나오는 이 무의식적 행동은 욕망의 자유로운 분출과 맞닿아 있다. 지나치게 윤리를 강조하는 삶의 굴레를 벗어나고픈 다양한 충동들, 성적 충동이나 폭력에의 욕구 등을 분출하는 방식에서 오히려 신의 윤리를 전복하고픈 욕망이 불현듯 출현한다. 그리고 그는 과감히 “과분하게 영원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라고 선언한다.

고대의 전지전능한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들이 얻은 자유는 새로운 사회의 틀을 짜면서 공존의 삶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현대의 양상은 아버지의 절대적 자리에 자본이라는 물신이 차지한 듯하다. 형이상학적 사유보다는 감각적 실존에 더 함몰되고, 정신보다는 육체의 가치에 더 매몰되는 듯하다. 그의 시 「만신전(萬神殿)」에서는 구원 같은 개념보다는 대도시에서 출현하는 유령과도 같은 욕망의 흔적이 그려져 있다.

 

저는 오래전 아버지를 죽이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뒤로 수많은 신들이 제 속에 들어와 소리를 지릅니다. 홀짝 홀짝 살들을 빨아 먹습니다. 가슴이 휑뎅그렁해져서 사다리를 타고 허공 위에 올라갔습니다. 십자가가 네온을 켜고 붕붕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오리온을 찾으려고 별자리를 하나씩 짚어 보았습니다. 거인의 눈과 코와 활 오늬의 도톰한 입에 손가락이 빨려 들어갔습니다.

 

― 「만신전(萬神殿)」 부분[각주:5]

 

위의 시에서 도시를 배회하는 유령 같은 도시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쓴 연작시인「대황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황하는 고대 중국 문명의 젖줄기로서 생명의 물이었지만 이재훈의 시에 등장하는 황하는 불모의 이미지이다. 마치 엘리엇의 「황무지」처럼 풍요의 물이 아니라 메마른 사막과 같은 느낌이 강하다. 유순하면서도 장대하게 흐르는 물줄기는 동양철학에서는 도의 이미지로서 절대적인 진리의 현현처럼 간주되지만, 그의 시에서는 낙원을 상실한 채 끝없이 질주하는 문명의 속도에 지친 낙오자들이 드나드는 길목처럼 느껴진다. 첫 시집에서 원시 시대의 신성하고 거룩한 별을 동경하던 시적 자아가 척박한 도시 문명의 길바닥을 맨몸으로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왜소화된다. 그래서 결국은 대다수의 시민들은 태양계에서 어느 날 문득 퇴출당한 명왕성처럼 신의 아들의 지위를 상실한 채 서서히 잊혀져가는 익명의 존재들이 되어간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 「명왕성 되다(plutoed)」 전문[각주:6]

 

이재훈의 「명왕성 되다(plutoed)」시편은 최초의 아름다운 말의 부족을 찾아 떠난 시적자아가 팍팍한 도시에서 발견하는 자화상의 한 단면이다. 아름답고 성스러운 별의 영혼임을 인식하는 연금술사가 문득 발견한 것은 초라한 소시민의 일그러진 얼굴이다. 늦은 밤 지하철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익숙한 얼굴들의 피로감이 현대 도시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더 이상 전지전능한 신의 자랑스러운 아들도 아니고 욕망의 극한까지 질주하는 악동도 아니다. 일상의 사소한 의무감에 묶여 묵묵히 달팽이처럼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시인이 발견하는 이 작고 왜소한 자화상이 갖는 위력은 이런 데 있다. 찬란하고 거룩하게 빛나는 별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처럼 사라지는 ‘소멸’을 꿰뚫는 시선이 예언자의 눈빛이다. 종교의 환상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허무를 처절할 정도로 직면하는 용기가 빛난다. 유대인처럼 선택받았다는 과잉된 자기 확신도 거부하고, 아버지의 억압적인 거세를 조롱하고 비웃을 수 있는 시인의 말은 하늘을 날아가는 적토마처럼 독자의 인식에 빗금을 지른다. 지나치게 엄격한 윤리 역시 억압이 되어 그 욕망을 대리적으로 분출하게 마련이고, 자유를 탐닉하는 자아 역시 먼지처럼 세상에서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불멸을 꿈꾸는 연금술사의 끈질긴 욕망은 새로운 사건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제물로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 그 비밀의 성소(聖所)가 내 집이었다./ 소멸이/ 내 먹는 밥이었다.”(「연금술사의 꿈」)에서처럼 소멸을 지향하는 찬란한 꿈이 빚어내는 새로운 세계가 궁금해진다. 자신의 몸을 죽여 제물이 된 고대의 토템 동물처럼, 혹은 살해된 모세처럼,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처럼 시인은 자신의 말이 아득한 먼지처럼 사라질지라도 누군가의 밥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기억의 흔적처럼 전승을 통해 출현하는 종교적인 사건처럼, 혹은 신경증 환자의 외상처럼 상처로 얼룩진 욕망들이 그의 시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아주 작은 먼지일지라도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별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그의 통찰력이 환한 빛을 비춘다. 연금술사는 자신의 몸을 내어주듯 자신의 내밀한 언어를 내밀어 허무한 생을 건너는 불사조의 깃털이 된다.

 

 


출전 : <시와사상>, 2012년 가을호.

 

 

  1. 이재훈,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문학동네, 2005. p. 19-21. [본문으로]
  2. 이재훈,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문학동네, 2005. p. 18. [본문으로]
  3. 지그문트 프로이트, <종교의 기원>,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7. p. 420-1. [본문으로]
  4. 이재훈, <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p. 2-73. [본문으로]
  5. 이재훈, <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p. 36-7. [본문으로]
  6. 이재훈, <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p. 25. [본문으로]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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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에 중독된 시대의 시_ 신진숙

 

 

 

 

 

   세계의 비참 앞에서도 시인들은 시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시인들이 마주한 가장 강력한 현실이다. 낙관이나 전망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비극과 종말 또한 없으며, 모든 것이 파괴될 수 있지만 어떤 혁명도 추구되지 않는 세계. 모두가 자신이 처한 슬픔과 자신의 가계(家計)만을 염려하는 세계. 타자 없는 삶.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본질이다.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알은 체하지 않는.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타자의 삶에 대한 의무나 책무로부터 배제된, 상처받은 존재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런 점에서 용서와 힐링(healing)이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과거 어느 시대에도 힐링이 이토록 중요했던 시대는 없었다. 산업화의 후유증을 앓는 몸을 돌보는 웰빙(well-being) 바람에 이어 힐링이 현대인을 사로잡고 있다. 고대 주술사의 치료 방식을 모방한 것처럼 보이는 힐링은 근대 이후의 인간이 느끼는 정신적 폐허감(廢墟感)은 치료한다. 방송에서는 날마다 눈물과 호소, 애도를 결합한 힐링의 주술이 재연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힐링을 통해 심연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힐링이 전적으로 개인적인 해방만을 의미함으로써 나와 타자의 삶을 분리시킨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힐링의 순간, 우리는 세계의 비참을 잊는다. 그 속에는 간단하고 명료한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살아가야 한다. 나는 내 고통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자에게는 타자의 삶과 고통이 존재한다. 힐링은 상처 때문에 무너진 하나의 세계, 즉 나를 중심으로 세워졌던 세계를 다시 재건하도록 돕는다. 힐링과 나르시시즘이 통합된다. 그리고 우리는 힐링에 중독된다. 

   물론 시인들 역시 그 누구보다 치유를 희망한다. 그러나 시인들의 언어는 주술적이지도 순진하지도 않다. 자기 연민이라는 광기에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세계의 비참을 눈감을 수 없다. 시인들은 오히려 힐링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기를 원하는데, 그것은 타자에 대한 사유를 중지시키는 힐링이야말로 어떤 것도 힐링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힐링에 중독된 시대에 시인은 힐링의 덫을 벗어나, 더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시적 치유가 세계의 비참을 망각하는 것도 근거 없는 행복감도 아니라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이재훈의 시 〈평원의 밤〉을 읽어 보자.

 

   막막해졌네. 타인에게 무심해지고, 타인의 죽음에 무심해졌네. 모든 감정에 무심해졌네. 가르치는 자들이 내놓는 규율에 무심해졌네. 단순히 어지러움 때문이네. 고개를 숙이다 고개를 들면 어지럽네. 빙빙 돌고 울렁거리네. 앉아도 누워도 빙빙 도네. 과음 때문이네. 두통 때문이네. 내 몸에 잡초들을 태우려 했네. 산화하는 것만이 아름다운 거라 여겼네. 악수도 청하지 않고 떠나는 게 배려라 생각했네. 슬픔이 없는 세계는 없지. 나는 아름답게 슬픈 동물이고 싶었네. 충만한 마음으로 춤을 출 것이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내 옷자락에 배었던 냄새 한 다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 슬픈 밤이네. 천둥이 음악소리를 덮을 무렵. 자정의 달빛이 머리칼을 적실 무렵. 저 우주에 몸을 눕히고 별들을 덮을 것이네. 아무 언어도 없이 심연에 잠길 것이네. 평원에 앉아 바람의 마음을 얻을 것이네.
— 이재훈 〈평원의 밤〉(《유심》 8월호)

 

   자기애(自己愛)에 상처를 입은 존재는 역설적으로 타인의 슬픔에 무감해지곤 한다. 힐링이 주는 위안은 상처받은 이 자기애를 복원하는 것에 집중된다. 핵심은 타인을 어느 정도 무감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슬픔이 제거될 수 있도록 무심(無心)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힐링의 최종 목표다. 그럴 때 우리 모두는 상처받은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 타인과 나의 관계 또는 세계 자체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이 시의 한 구절, “슬픔이 없는 세계는 없지”라고 말하기 이전까지 화자가 처한 삶이기도 하다. 그러나 슬픔이 없는 삶을 꿈꾸는 한, 힐링의 주술은 풀리지 않는다. 힐링이 가져오는 거짓 마법에 빠져든다. 진정한 시적 치유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에 출발하지만, 나 자신의 슬픔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슬픔과 아름다움이 다른 것이 아니듯. 슬픔이라는 심연은 삶의 외곽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다. ‘힐링’에서 ‘치유’로 나아가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이다. 그렇다면 이재훈 시인은 어떤 계기 속에서 이러한 깨달음은 얻었는가.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침묵’ 덕분이다. 즉, “천둥이 음악소리마저 덮을 무렵” “자정의 달빛이 머리칼을 적실 무렵”, 그 무렵에서야 발견되는 언어의 심연. 우리 자신은 자신의 언어를 잊을 때 비로소 슬픈 ‘한 사람’의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제 슬픔의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아름다운 슬픈 동물”이 된다.

 

 

_ <유심>, 201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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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작품상 이달의 추천작 / 이재훈

 

 

거리의 왕 노릇

 

 

하늘에 다리를 놓고 싶었지

구름이 다리에 걸터앉아 쉬는 풍경을 꿈꾼 거지

속도가 폐부를 훑고 지나가는 아침

햇살은 더 이상 찬란하지 않고

지루한 시간을 못 견뎌 핸드폰을 만지작대지

언제부터인가 그리워하는 시간이 내겐 없지

플래카드엔 권유와 명령만 있을 뿐

전투력 가진 말들이 길거리 여기저기서 뽐을 내지

문명의 한 구석에 제 이름을 새기려는 영혼들

왕 노릇하려고, 서로 왕 노릇하려고

생명을 능가하고, 죽음을 능가하는 이웃들

나는 왕의 언어가 없고

법의 언어가 없고

왕을 심판하는 언어가 없지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꿀 뿐이지

이 세계에 없던 언어를 찾아 나설 뿐이지

아름다운 운율은 규칙이 아니라

당신의 입술 때문에 만들어지지

 

중얼거리는 입술로 거리의 왕이 되지

죄와 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머리들이

거리에 둥둥 떠다니고 광장엔 사람들이 자꾸 모이지

새벽녘 농부가 곡괭이를 들고 집을 나서지

새벽녘 회사원이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지

느릿하다 때론 떠들썩한 발소리가 거리에 가득하지

문득 신들이 사는 세계를 구경하고 싶었지

 

― <문학사상>, 5월호

 


 

현대시작품상 추천작을 읽고

 

 

 

‘왕’과 ‘노릇’ 사이에서의 탈주, 시의 운명

 

 

 

전소영(문학평론가)

 

 

 

 

 

 

명왕성의 사람이 있었지. 아니 그렇게 자처하는 이가 있지. 공전 구역에서, 말하자면 구심력에서 멀어졌다 하여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추방당한 지 얼마간이 흘렀나. 현실 밖의 이데아를 꿈꾸어서가 아니라 내부의 환부를 응시하기 위해, 먼 외부에 고독한 자리를 마련한 누군가는 시인이었지.

빛의 속도만큼이나 기민하게 지구에 닿는 그의 시선은 늘 첨예하게 흐벅져 있었지. 고성능의 망원경과 현미경을 번갈아 들이대는 시인 앞에서 파헤쳐지고 들추어지고 더듬어졌던 현실, 뼈아픈 자리들. 그럼에도 그의 시에서 감상을 강요하는 슬픔의 말들은 탈수되었지. 시인의 목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왔기 때문. 음파의 날개를 빌려 시가 지구에 도착할 무렵, 그것은 물기가 없어 더 서글프고 아름다워졌지.

다시 명왕성의 시인이 보낸 시에서 시대는 여전히 격발하는 것들로 웅성대고 있지. 구름이 하늘 다리에 걸터앉은 한갓진 풍경은 꿈결에서나 볼 수 있을 뿐. 도시인들은 하루의 속도가 낙오의 정도와 정확히 반비례하기라도 하듯 제 생 안에서 쉼과 틈을 지워 없앴지. 속도계처럼 몸에 붙은 휴대폰이 징표.

오래 배양되어야 하는 감정마저 옛 나라의 유물처럼 부식되는 중이지. 시인에 따르면 그리움이 유독 그렇지. 그리움이 생겨나는 과정, 지난하고 무료한 탓. 누군가를 만나 각인한다, 어떤 까닭으로 그가 부재한다, 실물은 사라져도 뇌리에 남는다, 그런데도 그를 향한 감정만은 현재형이다, 독할 만큼 선명한 현재형이다. 그리움처럼 절실하게 발아하고 단단해진 끝에 잊히지 않는 감정을 지으며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 되지. 시간에 장악되는 대신 시간을 삶 속으로 초대하지. 하여 스스로가 주체임을, 살아 있음을 확인하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리워하는 시간이 내겐 없지.”

숙성의 시간을 대신하는 것은 돌진하는 말들. 흡사 심리전 때 나부꼈던 삐라의 언어들과 같은 성급한 권유, 실은 명령의 언사들에 둘러싸여 우리는 숙고를 잃고 피동형의 인간이 되었지. 호전적으로 육박하는 말들의 배후에 문명과 시스템을 장악했다 여기는 누군가가 있지. “서로 왕 노릇하려고” 타인의 생명과 죽음, 존재 자체를 간과하는 자들. 자명한 사실은 그들이 왕이 아니라는 것. 그저 왕 ‘노릇’을 하고 있을 뿐.

 

문명의 한 구석에 제 이름을 새기려는 영혼들

왕 노릇하려고, 서로 왕 노릇하려고

생명을 능가하고, 죽음을 능가하는 이웃들

나는 왕의 언어가 없고

법의 언어가 없고

왕을 심판하는 언어가 없지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꿀 뿐이지

이 세계에 없던 언어를 찾아 나설 뿐이지

아름다운 운율은 규칙이 아니라

당신의 입술 때문에 만들어지지

― 「거리의 왕 노릇」 부분

 

시인도 시를 통해 말을 하지만 저들처럼 왕의 언어나 법의 언어, 왕을 심판하는 언어를 바라지 않지. 오히려 그가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꾸기에, 그의 말은 ‘왕’과 ‘노릇’의 간극에서 빠져나와 ‘노릇’이라는 허황 자리에서 제 주인을 물러서게 하지. 부끄럽지 않은 시의 언어란 무엇이던가.

시가 노래에서 해리解離되는 것이 활자 시대의 불가피한 운명이라 해도 노래가 되지 못하는 시는 쓸쓸하지. 적어도 음유시인의 목소리가 아직 울림을 지녔던 시기, 속도는 어떤 미덕도 아니었지. 누군가의 입술을 떠난 시가 다른 누군가의 귀에 느리게 가닿을 때, 여하한 시차를 사이에 두고서라도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나’에게 발견될 수 있었지. “아름다운 운율은 규칙이 아니라 당신의 입술 때문에 만들어지지”.

가닿을 이 없어 허공으로 흩어지는 언술들, 소모적이어서 부끄럽지. 수치를 몰라 일 방향적 연설을 곤두세웠던 독재자 중에는 대개 어리석은 자가 많았지. 플래카드로 대변되는 말들 대신, 시인은 새로운 시의 언어를 찾아가려 하지. ‘나’와 ‘당신’의 공존을 확인하게 하는, 내 시를 읊는 “당신의 입술”에서 완성될 “아름다운 운율”을 발굴하고자.

그럴 때 시인은 왕 노릇하는 가짜와 달라지지. 이것은 시대 안에서 시가 담당해야 할 몫을 환기시키지. 노래의 시, 혹은 운율을 매개로 ‘나’와 ‘당신’, ‘우리’를 절박하게 연결하는 것. “사람들이 자꾸 모이”는 ‘거리’를 ‘광장’답게 하며 억압적인 언어와 폭력적 구심성과 거리가 먼 새 연대의 징후나 징표로 남는 것.

이것이 시의 숙명이라 말하는 명왕성의 사람이 있지. 명왕성이 태양계의 완연한 외부가 된 지 얼마간이 흘렀나. 현실 밖의 이데아를 꿈꾸어서가 아니라 내부의 환부를 응시하기 위해, 가장 고독한 외부에 이냥 자리를 마련한 그는 시인이자 왕이었지. 거리(street)의 왕이었고 거리(distance)의 왕이었지.

 

_ <현대시>, 2013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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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古墳)

 

이재훈

 

 

벽에 귀를 갖다 대면 물소리가 들린다. 아득하다. 눈을 감으면 당신의 소리가 들린다. 나는 늘 아득한 것만을 탐했다. 물소리, 물소리. 축축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 몸이 소리가 된다. 어떤 채비도 없이 탐험은 시작된다. 돌로 된 벽. 사이사이 틈. 틈 사이사이 어둠. 슬며시 그 얇은 어둠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간다. 내 몸은 돌이 되지 못하고, 역사가 되지 못하고, 흐물흐물 유형도 무형도 아닌 정욕의 애액이 되어 돌 속에 분신한다. 돌 속에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 파닥거리며 지느러미를 움직인다. 돌이 흔들거린다. 돌 속에서, 돌 속의 물속에서 노래를 부르자니 숨이 가빴다. 내 몸의 구멍으로 물이 들어왔다. 살갗이 울퉁불퉁하게 딱딱해진다. 온몸이 물이 된다. 물속에서 돌이 되는 순간. 물이 돌이 되는 꿈. 돌이 된 몸속에서 아득한 물결 소리가 철썩인다.

_ <시인동네> 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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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잘 다니지 않는 도로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금은 몇 년 동안 선을 조금씩 더 벌려 그곳에 민들레가 피었다. 고분은 도굴당했거나 오래되어서 텅 비어 있을 것이다. 시적 화자는 물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물이 있는 곳은 늘 축축하기도 하지만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틈은 소우주를 확장시키고 융합하며 또 다른 개별성을 존재하게 한다.

화자는 틈을 만들기 위해 축축함을, 물소리를 끌고 왔다. 그리고 틈을 만들고 어둠의 틈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간다. 다시 돌 속을 축축하게 하고 고체의 개념을 녹여서 물이 되게 한다. 돌 속에 강이 흐른다. "돌 속의 물속에서 노래를 부르자니 숨이 가빴다" 현대의학으로 인해 오래 살고 있는 우리도 하나의 고분이다. 돌 같은 육체 속에 갇혀 다시 물 같은 흐름 속에 갇혀 시의 노래를 부르는 시인은 숨이 가쁠 것이다. 고단할 것이다. 하지만 돌 속에 강물을 만들고 살아가는 시인의 가슴은 행복할 것이다.

돌이 된 몸속에서도 시인은 몸에 새겨진 물무늬를 바라보며 물결소리를 잃지 않는다.

(이인철 시인)

 

_ <시와세계>, 2013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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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종합한다면 시가 다른 예술 장르와 구별해본다고 할 때, 시는 무엇보다도 예술적 충동의 맨 앞자리에 놓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적 충동의 맨 앞자리에 놓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다시 한다면, 앞자리에 놓인다는 것을 다른 말로 치환해보건대 시는 시원始原의 자리에 있으려고 한다, 탄생의 자리에 있고자 한다, 라는 것입니다. 이는 프랑스 철학자인 장 뤽 낭시Jean-Luc Nancy의 말을 인용해보면 더 확고해집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을 통해 의미의 시원에 도달한다면, 그 방식은 ‘시적으로!’라는 방식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시가 그런 도달의 수단 혹은 중개를 이룬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의 뜻인데, 즉 오직 그런 도달만이 시를 구성한다는 것, 그리고 시는 그런 도달이 일어날 때에만 생겨난다는 뜻이다.

 

이 말대로, 우리가 시를 쓴다는 것은 시를 쓰는 행위 자체가 의미의 시원에 다다르는 행위라는 겁니다. 의미의 시원에 다다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의미의 시원 그 자체입니다. 좀 더 말을 바꿔보자면, 시를 쓴다는 것은 언제나 ‘신생의 사건’이 되려고 하는 충동과 관련된다고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항상 ‘신생의 사건’을 스스로 겪거나 체험하거나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

 

어쨌거나 프로이트가 생각할 때, 아이가 반복적으로 팽이를 던지는 행위는 쾌락원칙 너머에 있다고 봅니다. 쾌락원칙에 충실히 따르면 몇 번 하고 스스로 만족해야 되는데, 만족하지 못한다는 얘기죠.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가 있다, 이게 반복강박이죠. 쾌락원칙 너머의 이 반복강박은 ‘생의 충동’이 아니라 ‘죽음의 충동’과 관계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 ‘죽음의 충동’의 현장이 바로 앞서 읽었던 보들레르의 「여행」이라는 시입니다. “죽음이여,…(중략)… 닻을 올리자!”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죠?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우리는 죽어야 다시 살아납니다. 죽지 않으면, 언제나 낡은 생의 찌꺼기가 남아 있습니다. 낡은 생의 찌꺼기를 완전히 버려야지만 우리는 다시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진짜로 죽으면 다시 살지 못하잖아요.(웃음) 그러니까 죽되 죽지 않아야 합니다. 죽되 죽지 않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게 바로 시 쓰기라는 얘기입니다. 시를 쓰는 것, 그게 언제나 ‘신생의 사건’이 되는 거라면, ‘신생의 사건’은 결국 무엇인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완전히 새로 사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꼭 시에만 있는 것만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시에 유별나게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왜 유별나게 많은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시는 언제나 예술적 충동의 맨 앞자리에 놓이기 때문이죠.

이 신생의 분출은 창조하는 자로서, 창조하는 행위로서, 창조하는 내용으로서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하려는 욕망에 밀착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사람은 새로워질 때에야 항상 나다워진다고 느낍니다. 신생은 나의 회복인 것입니다. 즉, 신생에 대한 충동은 자신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욕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일성으로의 회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진짜 모습(true identity)의 세움이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시를 씀으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진면목―진정한 자기 모습으로 도달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여느 시인들보다도 더 시적인 소설을 썼던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는 가장 환상적인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언제나 ‘인공적인 것’에 대한 저항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다.” 현실에 대한 저항이 뭡니까?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거죠. 즉, 이 말은 시가 ‘자연스러움’(‘당연함’)의 회복임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괴테도 이미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순수한 본질 안에서 고려된 시는 말(parole)도 예술―기술(art)도 아니다. 말이 아닌 것은, 시는 완성을 위해서 리듬과 노래와 육체의 운동과 시늉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이 아닌 것은, 모든 것이 ‘자연스러움(le naturel)’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움은 규칙들을 존중해야 하지만, 장인적 훈련의 억압적인 강제를 따라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언제나 영감이 피어오르는 고양된 정신이 특별한 목표나 계획도 없이 토로하는 진솔한 표현으로 존재한다.” 그렇습니다, 시는 말로 썼지만 우리는 그것을 쓰는 순간 이미 춤추고 노래하고 몸짓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까 이성복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말씀드렸잖아요. ‘앵도를 먹고 무서운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어’의 뜻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앵도를 먹고 무서운 아이를 낳’으세요. 이것이 시입니다. 순수한 본질 안에서 시는 말이 아니니까요. 이미 몸짓이고 운동이고 무용이에요. 더불어 시가 예술이 아닌 까닭은 모든 것이 자연스러움에 근거하기 때문이라고 괴테는 말했습니다. 자연스러운 규칙들, 규칙들이되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있는 이야기는 서로 모순될 수는 있겠으나 크게 두 가지예요. 어쨌든 시는 우선적으로 자기표현의 발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기 표현은 단순히 있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순수하게 토로된 세계의 창조이자 의미의 시원 혹은 신생의 사건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결국 시 쓰기로서의 자기표현은 자기로부터 세계가 되는 일입니다. 이것을 다른 것이 되는 것, 이화異化, 독일어로 ‘Entfremdung’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ntfremdung’을 자주 쓰이는 의미대로 잘못 이해하면 ‘소외’가 됩니다만, 소외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고 버려지는 것이거든요. 헤겔에 따르면 ‘Entfremdung’은 자기로부터 이화될 때 비로소 자기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는 논지에서 쓰인 용어입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정리하자면, 시의 표현은 곧 이화이고, 이화는 곧 창조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는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행위입니다. 이 때문에 시는 언제나 생성의 첫 순간에 늘 있는 것입니다.

왜 시가 ‘쓰는 것’만으로 충족되는 것인지, 그 이유는 이재훈 시인의 시를 통해서 확인해봅시다.

 

산책길엔 언덕이 있다.

그날은 이상했다.

오르고 올라도 닿지 않는 거리를 헤맸다.

혼을 빼앗긴 것처럼.

늪에 빠진 것처럼.

뒷덜미를 놓아주지 않는 불빛이 있었다.

사위가 어둠에 둘러싸이면서

상점엔 불이 하나씩 켜졌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어둠이 안겨주는 거대한 정적을,

위대한 침묵을

나는 알지 못했다.

상처받은 한 친구를 생각했고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생각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바쁜 거리의 일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산책길엔 언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길목과 길목이 혀를 내밀어

내 몸을 떠받치고 있을 뿐.

타인의 인격을 규정하지 않기로 했다.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다.

장 그르니에가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빛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다.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은,

그 짧은 시간만큼은 황홀하겠지.

언덕이 있는 곳은 월곡月谷,

달빛이 있는 골짜기다.

언덕을 오르고

또 한 언덕을 오르면

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그 햇살의 순간처럼.

― 이재훈,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명왕성 되다>, 민음사, 2011) 전문

 

이재훈 시인은 여기서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라는 말로 시가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그 이유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자인데 절대로 기적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시를 쓰되 온전히 다 이해되고 전부 해석되기를 희망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시원의 순간에 있으려고 하는 시적 충동은 시의 존재론적 양태들 중 하나로 들어갑니다. ‘묘사’는 이미 있는 것을 그리는 거잖아요. ‘묘사가 아닌 표현’이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복수성이 아닌 단수성, 시는 언제나 단수성을 지향합니다. 이것을 황동규 시인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옆놈 모습 닮으려 애쓰지 않는다”(「제비꽃」)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시는 공간적으로는 전개되는 게 아니라 언제나 압축됩니다. 왜냐하면 고밀도로 압축될 때에만 빅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압축되지 않는 것들은 폭발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터져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시는 시간적으로는 흐름이 아닌 순간입니다. 이재훈 시인의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에서 계속 ‘순간’이 지시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시는 순간에 대해서만 다루고 순간에 의해서만 다루어질 뿐, 흐름으로 의식화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시는 드러냄이 아닌 암시입니다. 왜냐하면 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창조는, 우리가 눈을 뜨는 시간에 금방 사라져버려요. 어느 한 순간에 창조되어버렸는데, 눈을 뜨는 그 시간에 이미 사라져버려요. 그러므로 우리는 시의 진지한 창조를 언제나 암시로써만 들여다볼 수 있는 거죠.

 

_ <현대시>, 2013년 2월호 중에서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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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간된 이재훈의 시집 <명왕성 되다>에는 육성(肉聲)이 담겨 있다. 많은 젊은 시인들의 시가 현란하긴 하지만 그들의 시에서 삶의 무게가 직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재훈의 시집에는 2000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환멸과 고뇌가 격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재훈의 시는 ‘나’로부터 벗어나지 않지만 그 ‘나’는 사회로부터 오는 자극에 대해 격렬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그만큼 시대의 인장이 찍혀 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더욱 지독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전형적인 영혼을 살펴볼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 영혼은 시대에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만 반응하지 않는다. 세계로부터 고통 받는 그 감수성 짙은 영혼은 어떤 도주로를 뚫고자 한다. 그래서 영혼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시집을 여는 시인 「비비디 바비디 부」는 시인이 처한 현재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 눈은 카메라를 닮았다.

노출을 열고

몇 시간 동안 창밖을 보면

불빛만 남은 세계.

칼 맞고 피 흘리는 거룩한 세계.

지친 육체는 허공이 가져 가고

영혼만 달랑달랑 소란하다.

 

이재훈 시인의 눈에 비치는 세계는 어떠한 곳인가? 세계엔 불빛만 남아 있다. 그 불빛은 현란한 도시의 야경을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시인의 눈에는 폭력으로 인한 희생의 피가 묻어 있는 핏빛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폭력적인 세계는 희생자로 가득 찬 ‘거룩한 세계’다. 핏빛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시인의 육체는 지칠 대로 지치고 영혼은 “달랑달랑 소란”해질 정도로 빈곤해진다. 파괴된 영혼이 일으키는 소란은 도시의 소란과 관련된다. 이재훈 시인에게 서울이란 도시는 “나의 메디나,/ 시인들의 공화국”(위의 시)이다. 하지만 시인은 「만신전(萬神殿)」에서 “도시는 너무 시끄럽습니다. 가슴속에서 귀신들이 포식하고 구역질하는 소리 들립니다”고 하여 도시에 대한 구토감을 드러낸다. 시인에게 서울은 시인들의 공화국이자 귀신들이 시끄럽게 토하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도시에 대한 이러한 양가적인 태도는 보들레르 이후 현대 시인의 전형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재훈 시인은 그러한 태도를 직접적으로 격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포식하고 토하는 귀신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시인은 언제나 비상을 꿈꾸는 존재이다. 하지만 도시에서 사는 시인은 “마음껏 날고 싶었지만,/ 이곳에 살기 위해선 참아야 했”(「안드로메다 바이러스」)다고 한다. 이재훈 시인은 그러한 시인에 대해 ‘외계인’이라고 명명한다. 그 외계인―시인은 지구에 유폐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탈출을 꿈꾼다. 즉, “서로의 키를 재고 우쭐거리”는 수학의 미학이 지배하는 지구에서 다시 날고 싶어 하는 이 외계인은 “살아 나갈 도주로를 찾”(같은 시)는다. 그 도주로란 “아름다운 북극의 얼음 위에서/ 지혜의 말들을”(같은 시) 얻는 데로 나아가는 길이다. 하지만 그를 묶어 놓은 이 세계의 밧줄은 쉽게 풀리지 않을 테다.

이 세계에서 사는 삶이란 “육십억 분의 일일 뿐”으로 사는 것이며 “페트병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맥주 캔. 먹다 남긴 컵라면.”(「매일 출근하는 폐인」)과 같은 폐품으로 버려진 채 사는 것이다. 시인은 “하루하루를 버티다” “외치고 울부짖”(같은 시)을 수 있을 뿐이다. 지구에 유폐된 외계인의 삶은 이렇듯 쓰레기가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환멸과 구토 속에서 외치고 울부짖는 그는 언제나 ‘거대한 허무’에 맞닥뜨린다. 시인은 대부분의 도시인들이 그렇듯이 하루하루 버티는 삶을 살아나간다. 그는 시끄러운 도시 생활 속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여유도 가지지 못하고 갖가지 노동에 파묻혀 살아가야 한다. 「명왕성 되다」를 보면, 시인은 몽상에 잠기고 영혼을 비상시키기 위한 시간을 출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겨우 얻는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 시인만이 아는 내밀한 기억들로 가기 위해서 시인은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는다. 눈을 감은 시인은 자유로운 연상에 들어서고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면서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몽상은 지하철의 기계소리에 방해받고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런 리듬”은 시인의 몽상에 지속적으로 개입해서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한 현실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리듬은 시인을 옥죄는 오랏줄이다. 도시의 일상에 묶인 시인으로서는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들어갈 자신이 없”으며 “신성한 모험”도 의심스럽기만 하다.

「다정한 재봉사의 재판」을 보면, 이 세상은 “유리로 만든 방”이며 몽상하는 시인을 죄인 취급하기도 한다. 이 세계는 재봉사로 비유된 시인을 ‘유리방’에 가두고는 유리를 통해 보이는 세상을 보고 “그대로 옷감을 짜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몽상하는 시인으로서는 그러한 명령을 따라야 하는 일이 고통이다. 그는 “하늘을 날고 있는 제 모습을 짜고 싶었”으며 “저 먼 세계를 비상하는 영혼의 고난함을 짜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만한 이미지”만을 보여주는 세계―“문명의 숲”―는 시인이 “매일매일 똑같은 무늬를” 짜도록 강요할 뿐이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시인은 탈출을 더욱 더 열망하게 될 터,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다./ 열대를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킬리만자로」)라는 담담한 진술은 이러한 열망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고 하겠다. 시인이 원하는 것은 문명의 숲으로부터 벗어나 “위대한 숲의 시를 쓰”(같은 시)는 것이다. 그 숲은 열대와는 멀리 떨어진 겨울 숲이다. 겨울 숲은 “목숨까지 다 토한”(「겨울 숲」) 어떤 兄이 먼저 떠나간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문명의 숲’에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시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도시 생활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상황과 도주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시인의 말이 빚어진다. 하지만 ‘형’처럼 겨울 숲으로 떠나지 못하고 있던 자책감이 어떤 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내 입술은 봉인되지 못하고/ 부끄러운 고백들을 나불댔네”(「진흙의 봉인」)라고 말하기도 한다. 시인의 시는 “결국 슬픔이 되고 공허가 될 말들”이였으며 “징그러운 말들의 시체”(같은 시)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시인은 이 말들이 “반성의 포즈로 모두를 속일 수 있었”(「침묵의 세계」)다고도 말한다. 이러한 자기 부정은 또 하나의 반성으로도 볼 수 있겠으나 한편으로 어떠한 도주로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모색으로서도 읽을 수 있다. 위대한 숲의 시를 쓰고 싶었다는 고백만으로는 이 문명의 숲에서 겨울 숲으로 통하는 도주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는 우선 “혀를 깨무는 연습”(같은 시)부터 하여 ‘침묵의 시민’이 되는 데서부터 다시 출발하고자 한다. 왜 혀를 깨물고 침묵하고자 하는가? 침묵 속에서 소멸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소멸은 또 다른 생성으로의 길을 열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촛불도 아니고 감나무도 아니다.

미끈한 자동차도 아니고

달콤한 솜사탕도 아니다.

차갑고 텅 빈 사물에

쇳물을 들이붓고 싶다.

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이었다.

꿈을 꾸면

붉은 별 하나가 내게 떨어지는 사건이었다.

손이 델까 만지지도 못한 별이

마당에 내려와 날 또렷이 노려보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엎드려 울지 않겠다.

슬픔을 우스운 몸짓으로 과장하기 않겠다.

해거름에 사양(斜陽)을 보며 사흘을 울겠다.

그러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

그 비밀의 성소(聖所)가 내 집이었다.

소멸이

내 먹는 밥이었다.

― 「연금술사의 꿈」 전문

 

이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이 시는 앞으로의 시작(詩作)에 대한 시인의 각오를 보여준다. 슬픔을 과장하지 않겠다는 각오는 앞에서 언급한 “혀를 깨무는 연습”과 통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그 침묵의 연습은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시를 통해 드러난다. 그 침묵은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는 작업이다. 그 작업을 통해, 시는 에밀레종처럼 몸을 녹여 소멸시키고는 “에밀레 에밀레”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은 무엇이 될 수 있을 터이다. 그리하여 시의 목소리에는 몸이 녹아 들어가 있게 된다. 시는 육성(肉聲)을 내게 되는 것이다. 소멸을 통과하여 육성을 드러내는 시. 말의 연금술사가 되고자 하는 시인은 이 경지에 다다르고자 꿈꾼다. 이때 “차갑고 텅 빈 사물”은 시의 내밀한 세계―쇳물이 출렁대는 비밀의 성소―속으로 용해되고는 새로이 탄생할 것이다. 세계와의 지독한 불화와 이에 따른 자기비판은 이렇게 단단한 영혼의 다짐으로 나아간다. 이 시집의 첫 번째 시는 철저히 공허하기만 한 세계 속에서 “달랑달랑 소란”하기만 한 영혼을 보여주었다면, 이 시집의 마지막 시에서는 “빛나는/ 뜨거운 강철”의 영혼이 등장한다. 이렇듯 이 시집은 공허에서 단단함으로 나아가는 영혼의 드라마를 엮어내고 있다.

그런데 위의 시의 자기 다짐이 손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시집의 중추를 이루는 2부는 「대황하」 연작이 실려 있는데, 이 연작시는 불모의 세계 속에서 시인이 겪어야 하는 환멸과 고통을 뜨겁게 그려내고 있는 역작이다. 강렬한 이미지의 연쇄로 전개되는 이 연작시는 시인과 환멸스러운 세계와 뒤섞임을 환몽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세계는 모래의 강과 같은 황하로 비유된다. 「대황하 1」을 보면 “작열하는 사막에서 기다리고 기다”리고 있는 시인은 누런 모래의 세계 속에 빠지고 있다. 그런데 그 모래는 흡혈귀와 같이 시인의 피를 빨아먹는다. 시인은 “서서히 내 몸이 모래에 잠기지. 모래가 살갗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지. 물과 피가 다 빨려 가죽만 남았지. 모래가 사각사각 살가죽까지 갉아먹”는다고 진술한다. 시인의 기다림은 아마도 하늘로의 비상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이 사막은 그에게 비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막의 모래는 그의 몸에 달라붙어 그의 피를 빨아먹고는 결국 가죽만 남은 시인을 쓰레기처럼 폐기해버릴 것이다. 이 사막에서 비정한 현 한국 사회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시인이 현 한국 사회가 가하는 압력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한편, 시인은 더 나아가 “끝없이 깊은 모래 밑으로 물소리가” 들린다고 말한다. 사막은 역설적으로 강이었다는 것이다.

 

손가락 하나가 툭 꺽였다. 만져 보니 문드러져 툭 떨어져 나간다. 배를 만지니 손가락이 푹 들어가 내장이 만져졌다. 누웠다.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생은 연습이 없다. 단 한 번이면 족하다. 누웠다. 온몸에서 진물이 흘렀다. 누런 물이 땅으로 스민다. 누웠다. 스민다. 쏟아지는 모든 것들이 스민다.

― 「대황하 2」 부분

 

피를 빨아먹는 사막은 육체를 부패시키는 누런 황하임이 드러난다. 시체들이 누워 있는 이 세계에서 시적 화자의 육체 역시 부패하면서 누런 물을 흘린다. 즉 황하는 시체들의 진물로 이루어진 강이다. 「대황하 3」의 “누런 황토물이 거리에 솟구친다.”라는 구절을 보면 황하란 바로 도시의 거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시는 부패해가는 시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얼굴을 가린 채 눈빛만 쏘아 대는 사람들”(「대황하 3」)이다. 자신의 마음을 가리고 상대방에게 가하는 공격적인 눈빛은 삶의 부패를 드러낸다. 그 눈빛이 바로 ‘진물’일 것이며 ‘황토물’일 터, 「대황하 7」에서는 그 시체와 같은 얼굴 가린 사람들이 제법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다음은 이 시의 후반부다.

 

뜨거운 김을 쐬고 퇴근 무렵 자동차에 몸을 싣는다. 내 얼굴에 붉은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사람들은 이미 죽음 직전의 표정을 연습하고 있다. 나는 두통을 이기기 위해 투구를 쓴다. 도도한 웃음을 연습한다. 열기를 보았다. 빛이 열기 속에서 반짝반짝 드러났다. 시장(市場)이다. 죽음의 얼굴을 파는 시장이다. 뜨거운 빛 속이다.

 

도시의 거리인 황하는 또한 시장이기도 하다. 그들은 얼굴을 가리고 “죽음 직전의 표정을 연습”한다. 시인 역시 투구를 쓰고 얼굴을 가린 채 “도도한 웃음을 연습”하고 있다. 그 웃음이란 아마도 시장에 팔리기 위한 웃음일 것이며 결국 진실한 삶을 죽이는 웃음일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 직전의 표정 짓기를 연습하면서 살아나가야 한다. 팔리기 위해 사는 이들은 경쟁자인 상대방을 공격적인 눈빛으로 바라본다. 이 “뜨거운 빛”이 사막―황하의 열기를 만들어낸다. 시인은 이들 삶 속의 죽음을 ‘붉은 물줄기’로 상징화한다. 죽음의 표정을 짓는 이들의 얼굴엔 죽음을 가리키는 붉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그리하여 이 죽어가는 삶에는 언제나 시체 냄새가 날 것이다. 시인은 “몸 가죽을 슬쩍 잡아 찢는다. 온몸에 누런 물 내음이 가득 퍼진다”(「대황하 8」)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누런 물이란 물론 부패해가는 육체가 흘리는 진물이다. 그러므로 마실 수 없는 물이다. 죽음의 삶, 거짓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황하에서는 “실체는 없고, 허상만 가득”해서 “바닥이 보이지 않”(「대황하 9」)는다. 그곳에서는 “강물에서 물을 먹지 못”하며 “재갈을 물린 입으로 소리를 질러”야 하고, 그래서 “갑판에 비명이 가득”한 공간에서 사람들은 “생수 위에서 목말라 죽어”(같은 시)가야 한다.

「황하」 연작은 이 세계에 대한 시인의 지독한 환멸을 보여준다. 그 세계는 구체적으로 서울을 가리킨다. 서울은 “한여름에도 눈이 내리고/ 한겨울에도 태풍이 오는 곳”으로서 “일찍 배운 증오로/ 뼈와 살을 태우는 곳”(「비상」)이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 나타나곤 하는 이상 기온 현상이 수시로 닥치는 도시, 증오 속에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도시가 서울이다. “죽는 법을 배우지 못”하여 죽지 못한 시인은 이 속에서 “새들의 노래를” 부르는 자다. 그러나 어떻게 이 시체들로 가득 차 있는 공간에서 비상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대황하」 연작을 마무리하는 시인 「대황하 11」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쓴다. 다음은 이 시의 마지막 연이다.

 

붉은 눈물,

가만히 들어와 출렁인다.

거리를 걷고 있으면

온몸이 하늘로 붕 뜬다.

병든 몸 위에 새들이 날고 있다.

 

죽은 삶을 상징하는 ‘붉은 물줄기’가 이 시에서는 ‘붉은 눈물’로 변환되어 나타난다. 죽어가는 삶에서 비롯되는 슬픔, 그 슬픔이 ‘붉은 눈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시인은 이 슬픔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비상의 힘을 마련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죽음 속에서 슬픔으로 마음이 출렁이게 될 때, “온몸이 하늘로 붕” 뜨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병든 몸 위에 새들이 날고 있”음을 발견한다. 더 나아가 시인은 날아가고 있는 저 새들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 역시 발견한다. 「건기(乾期)의 새」에 따르면, 새들은 “하늘 귀퉁이 구름을” 밀고 있다. 그런데 그 행위는 “어떤 운명을 잠시” 미는 것이라고 한다. 왜 그럴까? 구름을 미는 행위는 “물 쪽으로 향한 구름에 몸을 던”지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물이란 황하에서와 같은 누런 물이 아니라 “이슬의 영롱함과 풀잎의 생명”과 같은 맑은 물일 터이다. 이 맑은 물을 함유하고 있을 구름 쪽으로 몸을 미는 행위는 황하 같은 세상에서 삶의 운명을 바꾸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꿈꾸는 비상이란 맑은 삶에의 의지를 의미한다.

시인이 북극을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최초의 물”이 결빙되어 이루어진 북극의 얼음이야말로 ‘맑음’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그 맑음은 인간의 세계를 넘어선 어떤 세계다. “언젠가 인간의 시간은 멈추겠지만/ 얼음의 시간은 멈추지 않겠지.”(「북극의 진화」)라고 시인이 말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얼음의 시간대에서 인간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시인은 좀 더 광활한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시인의 인식에 따르면, 대자연의 순수성이라고 할 북극의 얼음은 인간 세계 밑바탕에서 세계를 세우고 허문다. 「북극의 진화」는 인간 세계 바깥의 시야에서 “인간의 소리”를 인식하고 있는 대작이다. 이 시의 후반부를 다시 읽으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최초의 물은 멈추지 않고 질퍽대면서

어느새 허벅지까지 올라온다.

솔직히 나는 진화했다.

물이건, 얼음이건 간에

먹고 버리고 회피하면서 몸뚱이를 지켜왔다.

상점에 들어오면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푸르스름한 기억을 소환해

이 도시를 담금질한다.

한 달 새 교차로엔 거대한 빌딩이 들어섰다.

대형 마트와 옷가게가 들어서고 그 위에 사람들이 산다.

지도는 또 바뀔 것이다.

대륙의 한 점이, 또 한 점이 되고,

다시 한 점이 덧입혀져 거대한 점이 될 때까지.

저 멀리 철새는 날아오르고

꽃잎은 몽우리를 틔울 것이다.

내 숨은 어느 산맥을 따라 이동할까.

밤이 되면 지도의 소리는 막힌다.

거칠게 울고 우는 소리만 가득하다.

인간의 소리만 가득하다.

모든 것이 까마득하다.

 

 

_ <현대시>, 2011년 9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는 이런 말이 있다. “지금 또 여기에 말[言]이 있다고 하자. 그것이 이와 같이 밝은 지혜[明知]인가 이와 같지 않은 것인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같은 것과 같지 않은 것이 모두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곧 궤변(詭辯)과 다를 것이 없다[今且有言於此, 不知其與是類乎, 其與是不類乎, 類與不類, 相與爲類, 則與彼無以異矣].” 인간은 언어 없이는 어떤 이치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언어는 완전하지 않다. 언어는 한정된 세계만을 지시할 뿐이다. 세계 밖으로 누락된 진실에는 도달할 수 없다. 말로써 다른 입장들은 억압되고, 하나의 가능한 의미만이 진실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완전한 소통은 없다. 통상적인 의사소통은 언어의 바깥을 간신히 배제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언어로써 ‘명지(明知)’할 수 없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라캉이 말한 ‘문자’의 개념을 떠오르게 한다. 문자는 하나의 동일하고 안정적인 기원을 투명하게 지닐 수 없다. 문자가 지시하는 대상/의미는 문자의 표면에 머문다. 모든 문자는 은유의 구조와 같다. 문자가 열어 놓은 것은 의미의 전달 가능성이자 불가능성이다. 문자 내부에는 문자화할 수 없는, 억압되고 누락된 것, 즉 ‘그 무엇’이 실재한다. 따라서 아무리 정교한 언어라 해도 의미는 불확정적이며 불명료하다. 라캉의 견지에서 본다면, 문자의 심급(深級)은 바로 이 불가능성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 말이 문자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자는 의미화할 수 있는 것과 의미화할 수 없는 것을 ‘누빔점(quilting point)’으로 맞물린다. 이를 통해 문자는 의미와 비의미 모두를 흐르도록 한다. 바로 그 점에서 라캉의 언어에 대한 이해가 장자와 만난다. 즉, 언어로써 모든 소통을 대신할 수 있다는 믿음은 곧 환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소통 혹은 소통의 주체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호주관적인 언어에 대한 믿음 역시 그 바탕으로 돌아가 다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통은 문자 내부에 혹은 문자의 바깥으로 누락되거나 망기된 것, 그래서 문자의 이면에 머무는 의미의 실재 혹은 비의미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소통보다 앞서는 것은 모호하고 결코 표현될 수 없는 말의 ‘심급’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에서 더욱 자명하다.

(...)

 

문자의 심급과 편향성


그러나 나는, 이토록 성급하기만 한 물음들을 뒤로 한 채, 다만 심급이 아닌 심금(心琴)을 이야기하려 한다. 말장난처럼 들릴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고, 지금 내가 심금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심급이 지닌 모호하고 (비)의미에 가까운 어둠을 실제의 삶과 일시적으로나마 누벼 주는 지점이다. 즉, 라캉의 실재이자 장자가 말한 지혜와 지혜 아닌 것 모두를 뛰어넘는 심급에서 시작되는 문자의 은유에도 소통은 ‘있다’.

여기서 문자의 두 번째 중요한 특징이 드러난다. 문자는 보이지 않는 (비)의미를 심급으로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누군가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문자의 진정한 역설이 발생한다. 즉, 문자의 의미를 지탱하는 것은 누락된 (비)의미에 있음이 밝혀진다. 소통이란 불가능한 것들이 전달될 때, 비로소 마음을 움직인다. 문자 그대로의 표면적 의미만으로는 소통의 본질에 다가서지 못한다. 불가능성의 영역은 내가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상호주관적으로 얽힐 가능성의 조건이다. 그것이 문자만으로 시가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이유일 것이다. (불가능한 의미의) 심급이 (의미의) 소통을 보증한다. 그러므로 소통은 관념과 구체, 투명함과 투명함의 문제가 결코 될 수 없다.

이에 나는 소통의 의미를 동일성이 아닌 ‘편향성’에서 찾으려 한다. 그리고 그 논의의 출발점을 “도시”에 대한 시인의 상상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도시는 소통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모두 드러내며, 대부분의 현대 시인들이 도시에 대한 애증을 멈출 수 없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도 좋으리라.

우연히 날아온 화살에 등을 맞았다
뒤를 돌아보니 신비한 빛이 발밑으로 들이쳤다
등이 아프지는 않았다
나는 화살을 등에 꽂고 거리를 지나다녔다
겨울엔 찬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천천히 바람을 가르며
거리 위를 새겨 나간다

길의 감촉도 모른 채 떠남을 탐했다
길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문명의 숲에서 충혈된 눈으로
비만한 이미지를 본다
모두 집안에 묘지를 두어 엎드려 절한다

어둠에 잠긴 강은 늘 소리를 낸다
소리의 환각을 타고
긴 여행을 떠난다
살갗을 타고 흐르는
차갑고 낯선 공기
모두 마법에 걸려 있다
복잡한 사람이고 싶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최선은
단 한 가지만 생각하는 삶
―이재훈 〈방랑의 도시〉 전문(《시로 여는 세상》 2011 여름)

근대 이후 시인에게 도시는 영감과 이러한 영감을 구속하는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공간이 되었다. 도시에서의 생활은 시인의 삶을 추동하는 동시에 가혹할 정도로 건조시킨다. 모든 혁명을 대체한 기술의 자가발전 능력에 수치를 느끼면서도 여전히 열정적으로 도시 안에 머문다. 시인은 날마다 이해할 수 없는 군중의 얼굴을 낯설게 마주하는가 하면 그 속에서 같은 감정, 이를테면 고독과 같은 것을 발견하고 안도한다. 우리는 모두 “화살을 등에 꽂고 거리를 지나다”니지만 알지 못한다. 피 흘리고 있다는 것을 감각할 수 없다. 바로 그 점에서 도시인은 절대적으로 동일한 삶을 산다. 따라서 도시는 현대의 시인에게는 꿈의 통로이자 감옥이다. 시인은 도시 어디엔가 살면서 정착하지 못하는 존재들로 남겨진다. 이재훈 시인이 정확히 읽어내고, 또 우리가 공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도시는 딱딱한 건조물로 이루어진 미로이며, 시인은 이 미로 속을 끝없이 헤매 다니는 동안, 의미화할 수 없었던 수많은 (비)의미들로써 시를 쓴다. (이에 대하여 시인은 “여행”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재훈 시인은 에두르지 않는다. 그의 사유는 정직하다. “비만한 이미지”를 뚫고 단 하나의 의미(“소리의 환각”)를 듣고자 한다. 그의 관념에 대한 편애는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나 또한 시인이 말하는 “단 한 가지만 생각하는 삶”을 그렇게 편향되게 상상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소통은 편향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닐까. 이때 편향이란 나르시시즘적 동일화가 아닌 것, 전체화할 수 없는 기우뚱한 기울임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심급에 존재하는 의미의 불가능성이 소통의 장으로 올라올 때 그것이 지니는 진정한 의미는 세계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자기동일성의 무대를 깨트리고 편향과 편애로 흘러가도록 놔두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전체주의적 기획과도 연결되지 않는다. 소통은 그야말로 파열점에서 만들어진다. 심금은 하나의 주제, 하나의 이야기로 번역될 수 없다. 심급의 불가능성이 소통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

 

_ <유심>, 2011년 7~8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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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의 어떤 시들은 「동경」과 같이 모호하고 막연한 추측들을 불러일으킨다. 좋은 시는 비평의 언어는 물론이고 스스로 시 자신의 언어까지 망설이고 머뭇거리게 하는 동시에 거리낌 없이 질문할 수 있는 용기를 만든다. 즉, 비평이 그리고 시가 시를 동경하도록 이끈다는 말이다. 구체적인 감각 속에 모호하고 신비한 추상을 숨겨놓은, 이 동경의 힘은 이재훈 시를 이끄는 주요 동력임이 틀림없다.

 

(…)

 

소멸을 먹는다니, 이 기이하고 신비한 허기는 분명 시인의 것이라 불릴만 하겠다. 거식증 환자는 아무 것도 먹지 않는 자가 아니라 무(無)를 먹는 자라는 라깡의 말을 변주하면, 시인이 먹는 것은 소멸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울음과 슬픔을 먹는 시들이 있다. 그것을 먹고 그것을 누설하며 어떤 비밀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시들. 이에 반해 이재훈의 시는 울음과 슬픔의 소멸을 먹는 시다. 이재훈은 울음과 슬픔을 양식으로 삼지 않는 그것들을 울음으로 울겠다고 하며 그 울음이 자신의 몸을 녹여서 비밀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비밀이 되지 않는 슬픔이란 얼마나 누추한 것인가. 울음과 슬픔의 격식이 상실되기 쉬운 자기 과시의 시대에 시인은 그것을 단단한 종의 울림처럼 쏟아내려 하는 중이다.

 

(…)

 

이재훈의 시는 그렇게 고통 속에서 망각과 소멸과 파멸을 말하지만, 그의 시는 망각되지도 소멸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명왕성 되다>에 실린 그의 시들은 모호한 신비의 안개를 걷어내고 한층 더 분명한 뼈를 보여줄 것만 같다. 그래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날 때마다 이 시집을 다시 꺼내 읽는 일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나는 아직 그가 보여준 고통의 뼈를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한층 더 분명해지기를 기다리겠다는 말이다. 그가 건축한 미궁 속에 이제야 처음 한 걸음을 내딛었다.

 

_ 송종원, 「시 쓰는 일의 비밀에 관한, 혹은 시가 쓰는 비밀에 대하여」, <시현실>, 2012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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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욕(無慾)의 명징함을 찾아서

 


조해옥

 

 


1. 이중적 기표로서의 돌

 

돌은 아득히 오랜 시간에 걸쳐 존재해왔고, 멀고 먼 미래에도 변함없이 존재할 것이다. 돌에 축적된 시간의 지속성으로 인하여 돌은 유한한 시간을 사는 인간들의 숭배 대상이 되었다. 돌의 불변성과 견고함은 인간이 돌에 신성을 부여하게 된 이유이다. 이재훈 시인의 돌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들을 보면, 그는 돌의 영원한 시간성 외에도 욕망의 권력구조가 주도하는 세상 바깥에서 자신을 초연하게 빛내는 존재라는 점을 발견해내고 그것에 그의 의식을 집중시킨다.
이재훈 시인은 돌에 인간의 욕망을 투사시키고 그 욕망을 실현시킬 대상으로 돌을 대하는 태도를 거부하고, 오히려 돌은 인간 세상과는 무관하게 초월해 있는 하나의 자연물임을 그의 돌 시편들에서 잘 보여준다. 돌은 인간의 욕망의 논리 바깥에 존재하는 사물이라는 것에서 이재훈 시인의 시적 사유가 시작된다. 「돌의 골짜기」, 「돌의 환幻」, 「수난의 돌」, 「돌의 시간」 등 그의 일련의 돌에 관한 시편들에서 돌은 시인이 지향하는 무욕과 자유로움 등이 형상화된 존재로 나타난다.
돌을 매개로 하여 무욕과 탈속을 추구하는 이재훈 시인의 시 의식은 어찌 보면, 세상을 대하는 그의 이분법적 사유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재훈 시인의 시적 자아는 그 자신 역시 세상에 속한 자임을 분명히 인식한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인간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삶의 전제임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죽음 제의를 치르는 “주술적 인간”(「주술적 인간」)이 되기도 하고, 돌과 식물과의 동일시를 시도하기도 한다.

 

부러진 돌부리에 채인다
굴러다니는 돌이 아니라
올곧게 서 있다가, 부러진 돌
창과 칼 혹은 바람이
돌의 몸을 반 동강 냈을 것이다
사방이 어둠이었고
나를 길에 내던졌던 사람들의 눈빛만
어둠 속에서 반짝하던 밤들이었을 때
발바닥 돌덩이가 내 존재를 떠받칠 때가 있다
돌이 내 집을 떠받치고,
아버지의 약속을 떠받칠 때
돌 위에 피의 흔적이 있다
돌은 깨져도 죽지 않는다
돌은 썩어갈 육체를 갖고 있지 않아
언제나 채이고 밟히고 놀아난다
돌에 의해 소멸한 것과 태어난 자리가 한 몸이 되는
이 모든 찰나를 지켜본 돌
어둠 속에서 세상이 어지럽게 돌기 시작하면
나는 흔들거리는 운명을 본다
흔적 없이 왔다간
당신의 영혼에 몰래 깃들고 마는 돌
부처의 얼굴도 만들고, 예수의, 마리아의 몸도 만드는
성육신인 돌
영원을 살고 있는 길 위의 돌
돌로 만들어진 뭇사람 하나
― 「돌의 환幻」 전문

 

시의 화자가 다른 사람에 의해 땅바닥에 내던져졌을 때, 돌덩이가 그의 발바닥을 떠받쳐준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화자가 돌을 알아본다는 것은 의미가 깊은데, 화자와 돌은 세상의 가치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자는 왜 버려진 존재가 되었을까? 화자는 “굴러다니는 돌이 아니라/ 올곧게 서 있다가 부러진 돌”과 같은 존재이다. 돌은 화자 자신의 초상이기도 하며 그가 선택한 삶의 방향의 초석이기도 하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인식의 주체이고, 돌은 인식 대상으로 나타나는데, 화자는 돌과 동일시되는 과정을 거쳐서 돌과 하나가 된다. 각각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인 화자와 돌은 시의 후반부에 이르면, “영원을 살고 있는 길 위의 돌/ 돌로 만들어진 뭇사람 하나/ 그 무성한 골짜기의 돌”에서처럼, 주체인 화자와 대상인 돌 사이의 간격이 소멸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의 소멸로 인식 주체인 화자는 대상인 돌과의 동일시를 이룬다. 그것은 버려진 돌, 올곧아서 부러진 돌, 밟히고 차이는 돌에서 화자가 자신의 초상을 발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돌은 그에게 영원한 시간이 무엇인지를, 올곧음이 어떤 것이지를, 다른 존재를 가장 낮은 위치에서 떠받쳐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침묵으로 말하고 있으며, 화자는 그러한 돌에서 숭고함을 발견한다. 돌에 대한 동일시와 숭고한 감정으로 그는 버려짐과 조롱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을 견인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 세상의 논리와 질서 바깥에서 존재하는 돌을 사람들은 온갖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욕망이 투영된 조형물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돌은 사람들의 논리와 관념과는 무관하게 서 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돌, 인간의 유한한 시간을 초월해 있는 돌은 현실에 절망한 한 인간을 무한한 환幻의 세계로 데려다 준다.

 

천 년 전의 시간이 쌓여 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천 년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서서히 시간의 안개가 헤어지고
천 년 아니 이천 년 전의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바람이 굴러다니고 시간이 웅웅댄다
황금도 향수도 없는 땅
돌만 무성하다
옛 책에서는 악마가 산다고도 했다
죽은 이들이 묻혔다고도 했다
아무 냄새도 기척도 없다
그릇된 소문들일 것이다
돌을 밟다보면, 억울한 생각이 든다
밟는 자와 밟히는 자와의 이상야릇한 관계
나는 돌에게 잘못한 적이 없는데
모든 사물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거대한 돌이 절벽에 박혀 있다
사람들은 돌 위에 돌을 올려놓고 소원을 빈다
골짜기에 가득한 욕망들
바람은 울고 이따금 새들이 끼룩거린다
― 「돌의 골짜기」 전문

 

천 년 전의 인간들이 쌓아올렸고 현재의 인간들이 여전히 쌓아올리는 행위는 인간 욕망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변함이 없다. 위의 시에서 돌이 켜켜이 쌓아올려진 골짜기는 인간들의 욕망으로 가득 찬 장소라 부를 만하다.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인간은 돌 위에 또 다른 돌을 올려놓으며 기원한다. 그러나 화자는 밟는 자와 밟히는 자의 관계망에 갇힌 인간들의 행위와는 무관한 돌의 본질을 발견한다. 그는 돌에서 유한성과 탐욕과 수직의 논리가 지배하는 인간 세상을 벗어나 존재하는 침묵의 형상을 본다. 욕망의 골짜기에 갇힌 인간 세상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돌은 천 년의 시간을 버텨내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돌은 인간의 욕망을 표현해주는 기표이기도 하지만, 돌의 본질은 인간 세상이 만들어 놓은 궤도와 전혀 무관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무욕의 기표이기도 하다. 시의 화자는 무욕의 기표인 돌을 통해서 인간 세상의 질서 바깥에서 존재하는 생을 꿈꾼다.

 

2. 죽음 제의祭儀로 인간을 이해하다

 

이재훈 시인의 시적 자아는 사람 세상에서 죽음의 제의를 거치고 땅에 묻히고 식물의 세상, 돌의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을 꿈꾼다. 이를 위해 시인은 설화적 시간 속으로 들어가 인간의 질서를 초월하는 주술적 인간을 다음의 작품에서 제시한다.

 

몸에서 흙냄새가 난다
난파된 배에 묶여 귀신들의 비방을 들은 적 있다
바람과 구름은 큰 정적 속으로 빨려 들었다
아이를 잡아먹는 꿈을 꾸고 난 새벽
씨앗이 되고 싶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가
역전에 누워 있는 노숙자들의 눈에 비치고 싶었다
멸시는 인간들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힘
깊은 골짝에 들어가 울며 회개를 하고
다시 인간의 운명을 얘기해도 된다
어떨 수 없이 사악하고
어쩔 수 없이 비겁한 인간에 대해
흉하다 말라
나무와 새들, 구름을 직유하는
언어들은 모두 인간의 욕망에서 나온 것
수난의 권리가 없는 나무들
무책임하게 자라고
때론 무책임하게 시드는 식물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 육체는, 썩으면 파리들과 구더기들의
생명의 성소聖所가 될
내 육체는, 아름다울까
춤이라도 출까
내 육체로 당신의 영혼을 훔칠 수 있을까
듬섬듬성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애써 당신의 운명을 기억한다
― 「주술적 인간」 전문

 

위의 시에서 화자의 내면은 현재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죽음의 시간을 꿈꾼다. 화자는 자신의 “몸에서 흙냄새가 난다”고 자각하는데, 여기에서 화자가 맡는 흙냄새는 매장된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을 가리킨다. 그는 자신을 죽음의 제의 속으로 밀어 넣는다. 스스로 자신의 소멸 혹은 죽음이라는 치명성을 감수하는 화자의 행위는 세상에 대한 그의 부정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화자는 현재 삶에 대한 부정의식을 표출하지만, 죽음 제의를 통하여 인간의 운명적인 삶을 새롭게 인식하고자 한다. 화자가 세상에서 경험했던 인간의 삶은 멸시라는 수직관계의 사회, 사악함과 비겁, 살해 욕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흙에 묻히는 순간은 온갖 부정적이고 혐오스러운 인간 세상으로부터 그가 떨어져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 세상에 대한 화자의 가치 판단을 보여주는데, 죽음은 그에게 염오감으로 가득 찬 세상과의 차단을 뜻한다. 한편으로 화자는 죽음의 제의를 겪으면서 멸시와 사악함과 비겁과 살해 충동은 인간의 운명적 범주에 속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인간 세상을 염오하지만, 세상은 인간에게는 뗄 수 없는 하나의 운명 덩어리이며, 세상이 만들어내는 궤도 안에서 인간은 함께 움직여 나가는 한계적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사람의 세상은 멸시하는 자와 멸시를 받는 자의 수직관계가 주축이 되어 이끌어져 간다. “멸시는 인간들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힘”이라는 것을 시의 화자는 자신의 죽음 제의를 통해 깨닫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인간 세상의 부정적인 질서와 체계를 수용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씨앗이 되어 수직의 사회구조에서 최하층에 속하는 노숙자의 눈에 비치는 식물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식물들은 멸시와 권리와 수난과 책임이라는 촘촘한 그물이 쳐진 사람 세상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운명과 분명히 다른 궤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 즉 나무를 비롯한 식물의 세계를 의식적으로 지향한다. “수난의 권리가 없는 나무들”은 수난이 끌고 들어오는 덩굴 줄기들인 고통과 공격과 희생 등의 말과 무관하게 존재한다. 또한 “무책임하게 자라고/ 무책임하게 시드는 식물들”은 무책임의 상대어인 책임이 연상시키는 말들인 의무, 부양, 짐, 회피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보여준다. 따라서 화자가 죽음의 시간 속에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더불어 그가 지향하는 세상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나무 혹은 식물이 상징하는 욕망으로 충돌하지 않는 세상, 자유로운 세상이다. 식물은 인간 세상의 궤도 바깥에서 자라고 시드는 자기의 시간을 자유롭게 누리는 존재들의 세계이다.

 

배에 묶였네. 거친 물결을 헤치는 밤이네. 빛을 따르지 않는 시간들. 어떤 질서도 나를 잡아둘 수 없네. 나는 결박당한 존재로 남고 싶지 않네. 비열하고 음란한 무리들과 거래하고 싶지 않네. 과오를 자랑스레 떠벌리는 사람들. 턱을 괴고 앉아 당신의 이름을 떠올렸네.
…(중략)…
황금지팡이를 들고 죽은 자들의 영혼을 불러 모으고 싶네. 당신을 안으려 했지만, 연기처럼 내 몸을 훑고 떠나갔네. 이제 그림자만 남은 당신의 흔적. 햇살이 돋아야만 기억이 눈에 차오르네. 인간을 떠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인 삶이라니. 수많은 돌 틈에 내던져진 몸이 있네. 한 천 년 굴러도 이름 없는 몸이 있네.
― 「수난의 돌」 부분

 

위의 시에서 비열함과 음란함과 과오의 과시로 점철되는 사람들의 세상과 자유로운 돌의 세상이 양립해 있다. 자유로움을 얻고자 하는 화자는 ‘∼하고 싶네’ 또는 ‘∼하고 싶지 않네’라는 분명한 어조로 자신의 의지로 사람 세상을 대할 때의 염오감과 자신의 결기를 표현한다. 그는 세상에 대해 부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그에 따라 판단하고자 한다. 그러한 자신의 선택이 수난을 초래할지라도, 그는 인간 세상을 벗어나 새로운 궤도의 삶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인간은 사악하고 비겁하고 탐욕스러움이 만든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 같은 삶의 질곡을 이재훈 시인의 시적 자아는 인간의 운명으로 이해한다. 그는 흙 속에 묻히는 죽음의 제의를 거쳐 인간 세상 바깥에서 존재하는 식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한다. 그는 또한 빛이 나지 않는 존재, 맞고 깨지고 터져도 결코 굴하거나 소멸하지 않는 견고한 존재인 돌과의 동일시를 이룬다. 그는 시인의 시적 자아가 직접 의지에 찬 어조로써 성스러운 육체인 돌의 “이름 없는 몸”이 되기를 희원한다.

 

3. 신성한 땅의 별

 

돌은 문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으며, 파괴의 도구도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돌의 쓰임새들은 돌의 본질과는 무관하다. 돌은 만물의 어머니이고, 아기이고, 집이고 별이다. 다음의 작품에서 시인은 돌에서 만물을 낳은 어머니를 발견해 낸다. 무한시간의 돌에서 인간들이 태어났다면, 인간 역시 신화적인 돌의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아득히 짐승의 울음이 들리는 듯한 돌, 피의 온기가 느껴지는 돌은 지상에 떨어진 별조각이다.

 

돌은 투명하다
그 몸에는 연혁이 없다
돌 위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돌을 욕되게 하는 것
돌은 인간 이전의 사물
기원을 알 수 없는 시간이다
…(중략)…
모든 존재는 돌에서 태어난다
돌을 던지면 울음이 들린다
돌이 땅에 던져지면 마치 아기처럼
온몸이 땅속에 안긴다
돌을 깨고 나온 사람들
돌로 된 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돌을 하늘에 던지면 그저
별이 된다
― 「돌의 시간」 부분

 

이재훈 시인은 현대문명 속에서 소멸해버린 신화 속의 돌, 즉 인간을 초월하는 지상의 별인 돌을 통해 삶을 견인하고자 한다. 그에게 돌은 새로운 믿음의 대상인 것이다. 신화가 현실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꿈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탄생하고 생명을 지속하였던 것처럼, 시인은 누구도 알아보지 못 한 돌의 신성을 그의 시에서 되살리고 싶어 한다. 신성한 지상의 별인 돌은 이재훈 시인이 추구하는 무욕의 삶을 명징하게 드러낸 사물일 것이다.

 

_ <시사사>, 2012년 3~4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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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육과 형벌의 세계를 견디는 날들

 

 

조동범

 

 


1. 실로Shiloh, 팔레스타인 그리고 상징들

 

팔레스타인의 옛 도시인 실로Shiloh의 의미는 ‘평화를 주는 자’, ‘의로운 메시아’이다. 실로는 유대인 정착촌이 있는 곳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의 협약을 통해 실로를 비롯한 유대인 정착촌을 철거하기로 했다. 실로는 불행한 과거의 이야기이자 하나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한다. 이재훈의 실로는 아픈 역사와 공간을 모티프로 삼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보편적인 상징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정치성과 무관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정치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도 않는다. 시인은 실로의 아픔과 상처의 이미지를 보편적인 감각으로 전환시킨다.
일단 실로의 의미를 파악한 독자의 마음은 팔레스타인의 옛 도시인 실로에 머물게 되지만 시를 통해 받아들이게 되는 세계는 실로를 포함한 모든 상처와 아픔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서 작품 안에 펼쳐진 세계는 실로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토로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로의 역사적 의미가 완전히 무화된 것은 아니다. 실로는 제목만으로도 이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상처와 아픔에 절심함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상처와 아픔의 절실함을 드러내는 시의 제목은 작품과 결합하여 상징의 깊이와 절실함을 획득한다.

 

스스로 빛을 내는 작은 길. 사연 깃든 머리핀이 떨어진 길. 얼굴에 분칠한 채 누군가를 배웅하는 길. 홀로 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사람들.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들은 속되다. 제 몸을 고이 닦고 닦아 원색으로 세상과 마주하는 동물들. 깃털처럼 가벼운 스케치의 존재들. 앉아야 할 자리를 잃고 떠다니는 먼지 같은 마음들. 여러 갈래의 작은 길들이 가득하네. 흐드러진 꽃들이 마음에 툭, 쌓이는 길. 꽃이 혀를 내밀어 길 위를 맛보는 시간. 나는 세상에서 약속한 일들을 생각하네. 밤의 기나긴 뜨락에서 마주친 불빛 한 점. 나방을 혐오하지 마라, 그에겐 불빛이 모든 이유다. 저 길도 그럴까. 어둠 속이 모든 이유라고. 언제부터인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이 좋았네. 언제부터인가 정돈되지 않는 것들만 날 감동시키네. 여러 갈래의 좁은 길이 날 끌어당기네.
― 이재훈, 「실로Shiloh」 전문

 

그곳에 “작은 길”이 있다. 그 길은 “사연이 깃든 머리핀이 떨어진 길”이며 “얼굴에 분칠한 채 누군가를 배웅하는 길”이다. 「실로」의 공간은 “길”이며 그 길은 도달하고 싶은 곳과 연결되어 있다. 시인은 “여러 갈래의 작은 길”이 “흐드러진 꽃들이 마음에 툭, 쌓이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어쩌면 실로를 향해 가는 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이 호명한 길은 실로로 향해 있는 실제의 길이 아니다. 시인은 실로라는 제목 아래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길을 드러냄으로써 길이 환기하는 아름답고 애틋한 정서를 극대화한다. 「실로」는 이러한 양자의 감정 상태에 놓임으로써 이율배반이 전달하는 시적 감흥과 긴장을 극대화한다.
또한 실로로 향하는 공간인 길에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은 “홀로 자리를 깔고 앉아” 있으며,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럽게 흐느껴야 하는 격한 감정보다 관조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실로의 공간인 길이 비극을 환기하는 길이 아닌 것처럼 길 위의 사람들 역시 세계를 연민의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조적 태도는 길의 이미지와 어우러져, 실로로 대표될 수 있는 비극적 세계까지 끌어안을 수 있게 된다.

 

_ <시사사>, 2012년 3~4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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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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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성의 파토스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

 

 


1.

언젠가부터 한국시에서 죽음에 대한 사유는 주체의 문제로 전이되어왔다. 탈주체 이론 이후 주체의 자리가 ‘빈공간’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면, 이론적으로 주체는 살거나 죽는 주체가 아니라 살거나 죽는다고 오인하는 주체와 다르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 때문에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의식을 포함한) 의식 그 자체를 유발하는 주체의 기원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시적 사유의 중대한 변곡점이라 할 수 있는데, 주체의 기원에 대한 시적 사유 속에서 죽음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파토스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시들이 죽음에서 비롯된 과도한 허무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탈주체의 주체는, 테리 이글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리 자체를 즉흥적으로 다루는 것이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방식”임을 깨달아 “우리 자신의 현존에 근거가 없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죽음과 가깝게 살아”갈 수 있는 주체이다. 하여 탈주체의 주체는 “죽음을 소름끼치게 상상하는” 저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소멸 혹은 죽음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오인’에 의한 주체의 구조를 의식하는 주체라 할지라도 그것은 강력한 현실작용 위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는 원래부터 ‘빈 공간’임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육체에 기반하고 있는 주체로서는 죽음에서 비롯되는 ‘소름’에서 해방되기란 힘든 일이다. 주체의 기원을 사유하고 해체하는 주체는 ‘자아’로서의 강력한 통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탈주체의 주체 역시 원래부터 죽음과 무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죽음’의 유령으로부터 끊임없이 소환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장욱이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상징계를 균열시키는 동시에 주체마저도 하나가 아닌 둘로 균열시키는 나가는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면, 이재훈은 주체의 소멸에서 비롯된 파토스적 세계를 응시한다. 이장욱의 시가 주체와 상징계의 균열을 매우 “드라이한 저음”(함돈균)으로 드러내고 있다면, 이재훈의 시는 균열된 주체 틈새로 새어나오는 습한 신음에 젖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주체의 균열과 죽음에 대한 시적 사유의 시차(視差)를 드러내는데, 이는 최근 시들의 흐름을 바라보는 시각에 선명한 입체성을 제공하기도 한다.

...(중략)...

3.

이재훈의 시집 <명왕성 되다>는 소멸의 감각으로 점철되어 있다. ‘소멸’이라는 저주의 늪에 걸려든 시적 주체는, 그러나 서서히 가라앉는 소멸의 늪에서 이 세계를 응시하는 뜨거운 눈을 가지고 있다. “내 눈은 카메라를 닮았다. 노출을 열고/ 몇 시간 동안 창밖을 보면/ 불빛만 남은 세계./ 칼 맞고 피 흘리는 거룩한 세계.”(「비비디 바비디 부」)라고 했듯이, 그의 시는 소멸의 망막에 비친 세계에 대한 기록이다. 소멸에 대한 예민한 감각으로 말미암아 그의 시에 비친 세계상은 냉철하게 묘사되기보다는 그의 내면의식에 되비친 이미지로 점철된다. “내 눈은 카메라를 닮았다”고 선언했을 때, 그 눈은 ‘카메라 아이’(camera-eye)와 같은 냉철한 기계적 속성이 아니라, “붉은 눈물,/ 가만히 들어와 출렁이”(「대황하11」)는 눈이다.
하여 그의 눈은 이미 소멸과 허무에 익숙한 눈이기도 하다. “소멸을 향해 스스로 전진하는 몸짓.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풍경”(「대황하1」)과 같은 구절이 말해주듯이 그의 시선은 허무와 소멸이라는 감관(感官)을 관통한다. 혹은 “누웠다. 땅이 따뜻했다. 내 등은 늘 따뜻한 곳만을 찾는다. 누웠다. 썩는 냄새가 났다. 옆을 보니 시체가 누워 있다. 시체의 살이 썩고 있다.”(「대황하2」)에서 확인되듯이, ‘대황하’의 물결을 시즙(屍汁)으로 치환시킴으로써 소멸할 수밖에 없는 육체의 치욕과 굴욕을 드러낸다. 그래서 “아무것도 거둘 수 없는 몸./ 냄새나는 몸./ 위로할 것 없는 몸.”(「흠향(歆饗)」)이라거나 “타닥타닥, 누군가 내 몸을 읽는 소리”(「세이렌의 도서관」)와 같은 소멸과 허무 의식은 이재훈의 시를 지배하는 의미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재훈의 시적 사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소멸과 허무를 감각하되 그것에 대적하여 싸우는 치열한 의식의 장(場)으로 나아간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촛불도 아니고 감나무도 아니다.
미끈한 자동차도 아니고
달콤한 솜사탕도 아니다.
차갑고 텅 빈 사물에
쇳물을 들이붓고 싶다.
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이었다.
꿈을 꾸면
붉은 별 하나가 내게 떨어지는 사건이었다.
손이 델까 만지지도 못한 별이
마당에 내려와 날 또렷이 노려보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엎드려 울지 않겠다.
슬픔을 우스운 몸짓으로 과장하지 않겠다.
해거름에 사양(斜陽)을 보며 사흘을 울겠다.
그러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
그 비밀의 성소(聖所)가 내 집이었다.
소멸이
내 먹는 밥이었다.
-「연금술사의 꿈」 전문

이 ‘연금술사의 꿈’은 유한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주체의 열망과 맞닿는다. 인간의 유한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치열한 고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재훈의 시가 ‘유한성의 파토스’로 가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주체의 ‘결여’에 대한 자각 속에서 소멸과 허무 의식은 들끓는다. 그러나 “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 혹은 “소멸이/ 내 먹는 밥”이라는 고백 속에서 허무의 세계를 대적하고자 하는 주체의 결연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나’라는 주체의 허무와 소멸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 만들어내는 “신명”이기를 간절히 기구(祈求)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신명 속에서 만들어지는 “뜨거운 강철”은 꿈속에서 “내게 떨어지는” “붉은 별”이자 “사건”으로서 재주체화의 과정에 있는 시인이 지향하는 ‘연금술’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주체의 ‘진화’로도 진술된다. “나는 자꾸 진화한다./ 詩人이었다가 일용근로자였다가 백수건달이었다가 독학자가 된다./ 어떤 모습에도 아파하지 않는 내성(耐性)의 몸”은 “누구의 소유도 아닌” “연혁이 없는” “몸”이다. (「비상」) 누구의 소유도 아닌 몸은 자신의 연혁을 지움으로써 탈주체화를 도모한다. 주체의 ‘결여’화를 도모하고 ‘결여’에 직면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주체 이론이 다다른 윤리학의 정점이다.
그러나 지상의 ‘소멸’과 천상의 ‘붉은 별’이 지니고 있는 간극은 너무 크다. 시인이 마주하고 있는 지상은 “페트병에 가득 담긴 담배꽁초와 찌그러진 맥주 캔. 먹다 남긴 컵라면. 참기 힘든 소음. 역겨운 화장 냄새와 비둘기 똥 냄새”(「매일 출근하는 폐인」) 따위로 가득한 현실이다. 급기야 시인은 “육십억 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 왜소한 존재로서의 절망감을 드러낸다. “벌거벗은 육체 사이에서 신음”하거나 “저녁마다 매연을 맡으며 구역질을 하”면서 “허무의 군락 사이를 헤매”(「킬리만자로」)야 하는 현실은 처음부터 혁명 혹은 개조가 불가능한 대상인 것이다. 하여 그의 시는 결국 어떤 ‘근원’의 세계에 의탁하기도 한다. “돌의 근원”.(「돌」) 구체적인 물상(物像)으로 펼쳐진 광활한 세계를 폐기함으로써 드러내는 “짐승도 없고 새도 없고 울음도 없”고 “깊은 밤 달빛”이 “제 몸인 양” “푹 잠”긴 “돌의 근원”을 향한 회귀욕망. 말할 것도 없이 ‘돌’은 추상화된 세계로서의 사물이다. “차갑고 텅 빈 사물에/ 쇳물을 들이부”(「연금술사의 꿈」)음으로써 이 세계를 연금술적으로 해득하고자 했던 시인의 욕망은 잠재성의 차원에서 꿈틀거릴 뿐이다.
문제는 소멸과 허무 의식이다. 인간이 지닌 소멸과 허무의식이야말로 ‘탈주체’가 맞닿은 가장 큰 장벽이기 때문이다. 소멸과 허무 의식은 유한성의 세계관 속에서 강화된다. 일자(一者)로 수렴된 무한은 일종의 ‘유일신’으로서 유한한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대척점에 서게 된다.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연금술사의 꿈」)에 대한 열망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의 형벌”을 견뎌야 하는 “육십억 분의 일”(「매일 출근하는 폐인」)이라는 주체 속에서 들끓는다. 이 양자(兩者)의 간극을 견디면서 “천사와 함께 비탄의 노래를 부르”고 “처형의 시간”((「연옥의 산」)을 기다리는 존재가 바로 이재훈의 시적 주체이며, 이 시적 주체의 발화가 그의 시세계다.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 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명왕성 되다(plutoed)」 전문

지하철의 시간은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이다. “기계소리”만이 들리는 지하철 속에서 시인은 정주할 힘을 전혀 갖지 못한다. “도시의 生”을 향한 “새로운 문이 자꾸 열리”지만, 도시의 기계적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은 그는 섣불리 지하철의 리듬에 몸을 맡기지 못한다. “男子가 바닥에 구토를 하”거나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지하철에서 “심장은 슬픔을 견디기 위해 존재”(「귀신과 도둑」)할 뿐이다. 도시적 삶의 조건을 수락할 수 없으면서도 도시 ‘내부’에 존재하는 시적 주체는 도시 ‘내부’의 ‘바깥’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 ‘내부’에 거주하고 있으면서도 도시적 삶에 탑승하지 못하는 주체는 그야말로 태양계에서 버림받은 ‘명왕성’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계의 행성과 유사한 궤적을 돌고 있는 명왕성처럼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는 시적 주체는 도시 ‘내부’의 ‘바깥’에서 “푸른 멍자국”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속의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는 고백. 이 ‘허무’는 “도시의 生”을 겨냥한 것이다. “도시의 生”은 바로 허무다. 이재훈은 이 사실을 명확히 직관한다. “도시의 속도에 적응된 발로 허공을 구른다”(「언덕의 아들」)고 했듯이, 도시의 삶은 “허공으로, 바람 속으로 달리”는 것에 불과한 것. 시인의 내면에 들어앉은 소멸과 허무의식은 도시의 삶 전체로 확장되고 있다.
그렇다면 “아무도 모르는 그곳”은 주체의 허무를 관통한 이후의 그 어떤 세계가 아닌가. 그곳은 내 안의 “허무”를 관통하여 ‘결여’의 자리에 정주할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시인은 고백한다. “내 안의 허무로 들어갈 자신이 없다.” 쉽게 뛰어들지 못하는 ‘도시의 생’과 ‘허무’의 사이에서 시인은 배회한다. 그 배회의 실상은 어떠한가? 시인은 내면의 허무로써 “모든 것이 까마득”한 이 세계를 “얼음의 시간”(「북극의 진화」) 속에 감금하는 적멸(寂滅)의 사유로 나아가려함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은유에 머물렀다가/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며 와르르” “무너지”는 “형체 없는 얼굴”(「거울 속의 얼굴」)로 귀착되고 만다. 이처럼 이재훈은 소멸과 허무를 도시의 폐부까지 불어넣는 동시에 멸각할 수밖에 없는 인간 주체의 고통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이러한 고통은 일찍이 진이정이 보여주었던 “나라는 물건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각성이/둔한 내 뒷골을 쑤셔야만 하리라 하하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니,/그럼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단 말인가!”(「아트만의 나날들」)와 같은 고통의 공동체를 이룬다.

4.

주체의 기원 형성을 ‘오인’으로 파악하고 주체의 자리를 ‘빈공간’으로 파악하는 사유의 방식은 궁극적으로 아파니시스(aphanisis), 즉 주체의 소멸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방식은 주체를 지속적으로 재정립하는 윤리의 역능을 발휘한다. 주체의 소멸이 주체의 허무와 죽음으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경유한 새로운 주체로 재탄생하는 과정 자체가 윤리성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 이론과 무관하게 주체의 실상은 매우 복잡다기한 고통으로 가득하다. 그 고통에서 자유롭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주체의 분열과 고통을 마주하는 시인의 태도는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이장욱과 이재훈은 주체와 세계 속에 내재한 균열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방식에 있어서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장욱이 시의 주체를 선험적으로 파기함으로써 소멸과 죽음에서 발생하는 파토스로부터 자유롭다면 이재훈의 시적 주체는 파기되는 ‘과정’ 내에 존재함으로써 유한성의 파토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때문에 이장욱의 시적 상상력은 매우 자유롭다. 어느 한 시점에 매이지 않고 세계의 구획을 마음대로 넘나들며 주체의 자장과 진폭을 마음껏 넓히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생년월일’을 파괴함으로써 획득하는 새로운 주체의 ‘생년월일’의 복수성(複數性)을 무한하게 추구하고 있다. 이는 주체 기원의 복수화(複數化)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주체의 관성(慣性)을 깨고 있다는 점에서 파토스적 주체마저도 사라질 수밖에 없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에 이재훈은 유한성의 파토스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있다. 이재훈의 시적 주체는 자기 소멸의 사태에 예민하게 감응함으로써 시적 파토스를 더욱 강화한다. 이러한 파토스는 분열의 주체가 아니라 실존적 주체와 강력하게 결합한다는 점에서 매우 현실적이다. 주체의 결여에 선험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결여’를 향해 나아가는 고통의 결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그러나 이장욱과 이재훈에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여전히 주체의 기원과 소멸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장욱이 주체와 세계의 ‘생년월일’을 탐색하고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세기”(「생년월일」)로 나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면, 이재훈 역시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 뜨거운 강철”(「연금술사의 꿈」)에 대한 열망을 응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열망은 라캉주의 좌파의 관점에서 보자면 윤리의 원질(原質)에 해당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실재를 경유한 윤리적 주체는 뚜렷한 정치적 주체로서 성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최근의 시적 주체들이 대개 실재를 경유하는 데만 골몰할 뿐, 뚜렷한 정치적 윤리를 탐색하는 데 있어서 다소 소극적인 것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주체의 윤리를 정치적 윤리로 확장해나가는 작업이 이루어질 때, 이들의 시가 보다 큰 진폭과 파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_ <시인수첩>, 2011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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