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가 있는 산책길의 메모

_이운진

 

 

거리를 걷다 보면 자꾸 온몸이 붕 뜬다

바퀴가 싫어 걷다 보면

빌딩의 키가 커진다

핵폭발처럼 밝은 도시

기하학적인 철구조물로 가득한 낭만의 도시

밤마다 폭죽이 울린다

다리도 아프고, 목이 말라

시냇가로 가면 물이 바짝 말라 있다

차도 없고 집도 없고 양복도 구두도 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도시는 저 멀리 있다

가녀리게 풀벌레 신음하는

시냇가에 앉아 풀피리를 분다

도시에서 흘러나온 검은 물소리가

박자를 맞춘다

도시의 무관심이 차라리 행복하다면

위안이 될까

냄새나는 숲의 향기 때문에 마스크를 쓴다

차라리 예술을 할까

예술을 한다면 이해해줄지도

아주 잠깐 부요해진 듯하다

꼬깃꼬깃 접어놓은 그날들을 펴보는

옛사람의 산책

 

-이재훈,「미적인 궁핍」전문 (『시인시각』2011 여름)

 

  우리는 물질과 문명의 정점이라는 위대한 시대사를 함께 쓰는 영광을 안았지만, 그 영광만큼이나 큰 시대의 병리 또한 가지고 말았습니다. 어떤 자명한 도덕도, 순수함도, 자연도 상실해 버렸습니다. 현실과의 모순이 첨예할수록 정신적 상처는 깊어졌고 도시에서 잃어버린 내면의 깊이가 깊을수록 우리는 더 큰 극빈을 느꼈습니다. 속도와 크기로 짓누르는 도시의 풍경 속에서는 내 것이 아닌 시간들로 하루가 채워지고 그 하루도 모두가 질주 중에 있습니다. 보이는 것 말고는 믿을 것이 없고 믿는 것은 영원함을 잃어버린 그 앞에서 생은 한없이 초라해질 밖에요. 이러한 시대의 노이로제를 앓는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이 무거운 구원의 책임을 예술이나 시에게 모두 다 지워도 되는 것일까요? 시인의 마음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도시의 거리는 눈부시고 화려합니다. 그 아름다운 불빛과 아우토반의 속도는 분명 매혹적이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깁니다. 어쩌면 시인의 말대로 핵폭발처럼 밝게 빛나고 사라져야 하는 것이 도시의 최종지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이 도시에서 본래의 본성을 지키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지요. 그런 이유 때문이었겠죠. 도시와 욕망의 몰락을 예감한 시인은 아무것도 없이 도시를 벗어나 봅니다. ‘양복도 구두도 없이’ 떠나온 곳에서 조그만 시내를 만나 다리를 쉬며 풀피리를 불어봅니다. 그러나 그곳도 ‘도시에서 흘러나온 검은 물’이 지나고 풀벌레가 신음하는 곳이었습니다. 아, 시인의 안타까운 탄식이 들립니다. 어디에서 위안을 찾아야 하냐고 묻는 간절한 질문이 들립니다. 그 순간 예술을 떠올립니다. 예술이라면, 문학이라면, 시라면 잿빛 장미 곁을 지켜주고 불가능한 회복을 믿게 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정 우리 모두의 소망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다가 나는 미美, 아름다움이라는 말 쪽으로 무게를 실어 생각을 다시 짚어 봅니다. 짧은 경험을 바탕으로 짐작해보건대,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는 우아한, 고귀한, 숭고한, 선한 것의 성질을 다 아우르는 말인 듯싶습니다. 생경한 놀라움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소유나 욕망의 느낌을 배제한 상태에서도 즐기고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에 미적이다라는 말을 허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시인이 자연과 예술에 대해서 ‘미적인 궁핍’을 느꼈을 거라는 확신을 다시 하고선 깊은 공감을 표하는 것입니다.

  시를 덮고나서 나는 불 밝힌 도시의 밤거리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자연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스팔트가 동맥처럼 뻗어 있습니다. 저 핏줄에 힘을 대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도 생각합니다. 삶에 지친 장미와 시인이 하나의 모습으로 겹쳐집니다. 그것은 나와 당신이기도하고, 별빛과 별빛의 감정이기도 하고, 강물과 물소리이기도 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 둘 사이의 틈새를 채우는 슬픔이 유목의 도시에서 부유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중세의 어느 마을에서 겨울을 맞는 듯한 권태도 가득합니다. 동서남북 어디서나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찾아내는 불행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이 모든 것들을 견디기 위해 나는 장미와 시를 기록할 방식들을 고민해 봅니다. 내가 다시 감성의 풍요를 느낄 수 있는 일이란 몽환이라는 혁명뿐일까, 아니면 정말 꼬깃꼬깃한 옛사람들의 산책로를 펴는 일일까, ‘창조하며 나는 회복될 수 있었고 창조하며 나는 건강해졌노라’는 하이네처럼 창조적 열망에 온 몸을 기대야 하는 것일까? 당신의 대답이 담긴 가을 편지를 장미 꽃잎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_ 계간 <시인시각> 2011 가을 / 이운진의 시편지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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