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시인'에 해당되는 글 150건

  1. 2010.08.18 최치언_ 좀 더 역겹고, 불결하고, 냄새나는 상상력
  2. 2010.06.09 육필시_ 웹진 문장 2010년 6월호
  3. 2010.04.14 강성철_ 이재훈의 <안드로메다 바이러스> 평
  4. 2010.03.17 이재훈의 <Big Bang>
  5. 2009.07.30 ‘서태지 세대’의 궁지와 난문(難問)_ 김창환
  6. 2009.07.07 서태지 세대
  7. 2008.10.17 트릭스터(trickster) 1
  8. 2008.10.01 이명연_ 자재에의 욕망
  9. 2008.09.17 권온_ 시적 시간 혹은 순간에 뿜어져 나오는 영혼의 불꽃
  10. 2008.08.14 비대상에서 禪까지_ 이승훈 대담
  11. 2008.07.31 구원을 향한 로드 포엠_ 김명원
  12. 2008.07.30 탈장르, 탈문법의 새로운 시적 전망
  13. 2008.07.29 허무의 시인 이형기_주제로 읽는 현대시 산책 ①
  14. 2008.07.25 딜레마의 시학_ 이재훈 문학평론집
  15. 2008.07.24 [중앙일보] 시(詩)가 있는 아침_ 이재훈의 수염
  16. 2008.07.10 박판식, 이재훈 시인 채팅 - <새로운 세대의 시적 전망>
  17. 2008.07.09 낯선 몸들이 자아내는 새로운 우주(Cosmos)_ 도일
  18. 2008.07.08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19. 2008.07.08 그물 속의 시체와 강 건너의 등불_ 김옥성
  20. 2008.06.02 상처를 이기는 두 가지 방식
  21. 2008.04.22 도시의 얼굴_ 금동철
  22. 2008.04.03 백사막
  23. 2008.03.23 카프카 독서실
  24. 2008.03.23 붉은 주단의 여관
  25. 2008.03.14 '연애편지'와 '멜랑콜리아' 사이에서_ 김백겸
  26. 2008.03.13 포르노그라피와 현대시의 페티시즘_ 허혜정
  27. 2008.03.13 현재를 산다는 것 : 생의 파편 혹은 아날로그_ 김석준
  28. 2008.03.06 신령스런 은자의 맑고 투명한 저 힘_배한봉 시인
  29. 2008.03.06 남자의 일생 1
  30. 2008.02.27 봉숭아

안드로메다 바이러스


이재훈


그대들은
나를 외계인이라 불렀지.
난장이라고도 불렀으며
그냥 ‘꽃’이라고도 불렀지.
나는 원래 눈이 하나인 키클롭스를 사랑했고
피부가 검은 육체를 사랑했지.
피비린내 나는 이 행성에
착륙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잔혹한 DNA를 가진 종족들을 보고야 말았어.
내 고향에서 십만 광년이나 떨어진 땅.
처음엔 검은 땅과 푸른 바다와 하늘이 끔찍했지.
왜 지구에 사는 종족들은 땅에 붙어서 다닐까.
마음껏 날고 싶었지만,
이곳에 살기 위해선 참아야 했어.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팔과 다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매일 괴로웠지.
비명과 고통이 반복되었고,
숭배할 대상은 이 땅에 없었어.
몇몇은 돈을 숭배하기도 했지만,
정작 아름다운 살육을 보지는 못했어.
아름다운 역사도 간혹 있었다지만
이곳의 풍습은 선량한 것들만 쓰게 하지.
결국 이 세계는 수학의 아름다움이 지배해.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남겨진 숫자의 아름다움.
그 미학으로 서로의 키를 재고 우쭐거리지.
팔등신은 수로 만들어지는 것.
조화의 아름다움은 방황으로 만들어지는 것.
지구인이라는 종족은 말이야.
가끔씩 약속을 어기고 방사능을 누출하곤 하지.
나는 거대한 건물 속으로 몸을 숨겼어.
하얀 가루가 폭발하고
그 가루가 내 몸에 달라붙었지.
해독크림을 발랐지만 너무 늦었어.
갑자기 사위가 연기로 가득 찼어.
손전등을 빌려 친구들과
살아나갈 도주로를 찾았지.
눈을 뜨니
세상은 온통 흰 눈으로 덮여 있었어.
아름다운 북극의 얼음 위에서
지혜의 말들을 외울 거야.
그대들은 나를 북극에 핀 꽃이라 하겠지.
외눈박이 육체를 사랑하는 나를 말이야.


* 안드로메다 바이러스 : DNA가 없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생물체가 전염하는 가상의 바이러스. 공기로 전염되며, 20초 안에 사망. 감염자의 공격성을 극대화하여 자살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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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역겹고, 불결하고, 냄새나는 상상력



최치언
(시인)



‘안드로메다 바이러스’란 제목의 이 시는 SF적이고, 퓨전적이고 카툰적이다. 상징들은 적당하게 불친절한데, 서사는 힘이 있고 흥미롭다.
시인의 모든 시가 그렇지는 않지만, 이 시는 나의 영혼을 무례하게(?) 자극하여 좀 더 역겹고, 불결하고, 냄새나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재밌다는 또 다른 표현이다. 재밌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상징이나 주제, 의미 따위를 분석해야 되나? 미안하지만 난 남이 쓴 상징이나 주제, 의미를 분석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하여간, 제멋대로 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시를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다.

00년00시00분.
핏빛 하늘 위로 거대한 날개를 가진 무엇인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안드로메다에서 날아온 외계생명체들이었다.
지구를 향해 ‘십만 광년’을 날아온 그들의 거대한 날개는 너덜너덜 찢겨져 있었고, 말대가리 같은 길쭉한 얼굴은 돌투성이에 얻어맞은 듯 으깨어져 있었다. 주걱처럼 휜 턱주가리 아래 선과 악을 초월한 당근 맟 같은 그들의 하나 뿐인 눈알이 박혀 있었다.
한편, ‘검은 땅’에선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팔과 다리’로 보기에도 ‘괴로운’ 인간들이 ‘우쭐’대며 걸어 다니고 있었다.
남자라는 인간들은 서로의 성기를 만지며 그 크기와 무게로 서열을 매겨댔고, 여자들은 사소한 질투로 자살을 결행했다. 하여간 그들은 소란과 무질서와 미친 짓거리들로 간신히 안정적인(?) 거리를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못생긴 발가락이 지구를 굴리고 있다는 허무맹항한 감상에도 젖어 있었다. 이미 지구가 무엇 때문에 우울하게 돌고 있는지 뻔히 밝혀졌는데도 말이다. 인간은 그러한 족속들이었다. 우월이 지나쳐 추악의 단계로 진입한 멜랑똘리들이었다.

00시00분.
맨발의 A가 14블록을 걸어간다.
A는 파랑에서 빨강으로 신호등이 점멸하는 것을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걷는다. 그리고 그는 멈춰 서서 실성한 듯 하늘을 쳐다보며 지껄여댄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거대한 날개를 가진 ‘난장이’들, 눈물을 묻히지 않은 눈알로 이곳을 섬뜩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저 ‘꽃’들. 시인의 상징에서만 가능하던 존재들! 우린 너무 늦어버린 게 아닐까? 누군가 피를 토해야 겨우 하나를 알아먹을 수 있다면, 너무 늦어버린 거야.”
A의 뒤로, 털 빠진 비둘기 같은 수명의 B들이 신호등의 빨강을 쳐다보며 멍청하게 구구대고 있다.
A는 뒤돌아 B들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말한다.
“…왜 저들은 내가 보는 것을 볼 수 없단 말인가? 저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기 전에 시를 가르쳤다면, 저들은 나와 좀 더 각별한 얘기를 나누었을 텐데……”
A가 이처럼 난수표 같은 말을 떠들고 있을 때, 복용시 침을 찍찍 뱉게 되는 신종마약 찍찍을 처먹은 C가 덤프트럭을 몰고 13블록을 빠져 나오고 있다. 그리곤 14블록으로 낭창낭창 달려오더니 순식간에 ‘앗’하는 사이도 없이 인도로 뛰어들며 B들을 모조리 깔아뭉개 버린다.
덤프트럭에서 12인치 몽키스파나처럼 생긴 C가 내린다. C는 덤프트럭에 깔린 B들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기꺼멓게 썩은 이빨들 사이로 침을 찍찍 뱉으며, 갤갤 풀린 눈으로 핏빛 하늘을 올려다본다. 물론 A는 O다리 니퍼처럼 서서 황당하게 C를 보고 있다.

00시00분.
하늘을 날다 지친 외계생명체들이 C의 검은 동공 속으로 내리꽂히듯, ‘검은 땅’ 위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당황한 C는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해대며 소리 지른다.
“찍찍… 난장이들… 찍찍… 꽃… 찍찍…”
A는 얼른 C에게 다가서며 말한다.
“자네 눈에도 저것들이 ‘난장이’와 ‘꽃’들로 보이는가? 그렇다면 자네하고는 좀 더 각별한 얘기가 필요할 것 같군. 뭐랄까?… 음… 다 뒤집어엎고 다시 시적으로 상상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고나 할까…?… 자네와 내가 지구를 구하는 일말일세… 부디, 이미 저지른 아픔답지 않은 ‘살육’ 따위는 잊어주게. 내 이름은 콩킹박사일세… 자네 이름은?… 찍찍맨이라 해두지…”
C가 A의 얼굴에 찍찍 침을 뱉을 사이도 없이 A는 C를 어둠에 쌓인 구두뒷굽 같은 골목 안으로 잡아끌고 들어간다.
순간, 빗빛 하늘에서 핏방울들이 떨어져 내리고 추락하는 외계생명체의 비명으로 지구가 헐렁헐렁 흔들리기 시작한다.
신호등이 빨강에서 파랑으로 점멸한다.
안드로메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20초 동안에 사망한다던가? 거짓말을 조금 보탠다면 위의 짧은 이야기는 시를 읽고 난 뒤 20초 동안에 제멋대로 떠오른 생각이다.
그렇다면 난 안드로메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 아닐까? 오래전부터 나에게만 유통된 말을 빌려 쓰자면 진정한 상상력은 의식의 죽음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니까. 하여간, 이것이 이 시의 힘이다.

_ [시와사상], 2010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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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웹진 문장 2010년 6월호 http://www.munjang.or.kr

시 : 녹색섬광 / 옛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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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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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메다 바이러스


이재훈


그대들은

나를 외계인이라 불렀지.
난장이라고도 불렀으며
그냥 ‘꽃’이라고도 불렀지.
나는 원래 눈이 하나인 키클롭스를 사랑했고
피부가 검은 육체를 사랑했지.
피비린내 나는 이 행성에
착륙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잔혹한 DNA를 가진 종족들을 보고야 말았어.
내 고향에서 십만 광년이나 떨어진 땅.
처음엔 검은 땅과 푸른 바다와 하늘이 끔찍했지.
왜 지구에 사는 종족들은 땅에 붙어서 다닐까.
마음껏 날고 싶었지만,
이곳에 살기 위해선 참아야 했어.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팔과 다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매일 괴로웠지.
비명과 고통이 반복되었고,
숭배할 대상은 이 땅에 없었어.
몇몇은 돈을 숭배하기도 했지만,
정작 아름다운 살육을 보지는 못했어.
아름다운 역사도 간혹 있었다지만
이곳의 풍습은 선량한 것들만 쓰게 하지.
결국 이 세계는 수학의 아름다움이 지배해.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남겨진 숫자의 아름다움.
그 미학으로 서로의 키를 재고 우쭐거리지.
팔등신은 수로 만들어지는 것.
조화의 아름다움은 방황으로 만들어지는 것.
지구인이라는 종족은 말이야.
가끔씩 약속을 어기고 방사능을 누출하곤 하지.
나는 거대한 건물 속으로 몸을 숨겼어.
하얀 가루가 폭발하고
그 가루가 내 몸에 달라붙었지.
해독크림을 발랐지만 너무 늦었어.
갑자기 사위가 연기로 가득 찼어.
손전등을 빌려 친구들과
살아나갈 도주로를 찾았지.
눈을 뜨니
세상은 온통 흰 눈으로 덮여 있었어.
아름다운 북극의 얼음 위에서
지혜의 말들을 외울 거야.
그대들은 나를 북극에 핀 꽃이라 하겠지.
외눈박이 육체를 사랑하는 나를 말이야.


안드로메다 바이러스로 인해 지구 종말을 앞둔 미래 지구에서 안드로메다 바이러스와 그 퇴치법을 암시한 힌트를 현재 지구로 보내오면서 시작되는 영화 <안드로메다 바이러스>. 그 힌트를 이진법의 ‘숫자’ 등으로 해석해본 결과, 무언가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의미의 원형 도형과 미래 지구에는 없는 안드로메다 바이러스 퇴치제인 해저 미생물 이름. 이 해저미생물로 안드로메다 바이러스가 거의 퇴치되어가다가 인간의 탐욕에 의해 퇴치제가 멸종되고, 동시에 누군가의 음모로 안드로메다 바이러스 샘플은 우주를 통해 미래로 보내져 미래 지구를 멸망으로 이르게 하는데…….
요즘 ‘신종 플루’, ‘아이티 지진’, ‘환경 재해’ 등으로 나타나는 지구 종말론의 일단을 보여주는 이 영화를 모티프 삼아, 이재훈 시인은 <안드로메다 바이러스>라는 시적 화자가 되어 지구의 타락상에 대해 선지자처럼 경고한다. 지구인들이 “눈이 하나(원형 도형을 상징)인 키클롭스를 사랑”하는 자신을, ‘외계인’ 등으로 불렀는데, 착륙하지 말았어야 할 지구라는 행성에 와 “잔혹한 DNA를 가진 종족들을 보고야 말았”다고 한다.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팔과 다리”를 가진 인간들은 왜 땅에 붙어만 다닐까? 괴로움과 비명과 고통이 계속되는 피비린내 나는 이 땅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마음껏 날고 싶었지만, 살기 위해 모든 끔찍한 일들을 참아야만 한다고 한다. 숭배할 대상이 없는 이 행성에서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살육은 있었지만, ‘노아의 방주’나 ‘소돔과 고모라’처럼 아름다고 정의로운 살육은 없었다고도 한다.
“아름다운 역사도 간혹 있었다지만/ 이곳의 풍습은 선량한 것들만 쓰게 하”는 이곳 지구는, 더하고 곱하고 빼는 계산적인 인간들과 ‘수학의 아름다움’만 존재한다고 한다. 바벨탑처럼 빌딩을 높이 쌓고, 서로의 키를 재고 ‘36, 24, 36’의 S라인 성형미인 등 ‘숫자의 아름다움’이 지배하는 곳인 지구라는 행성. 이곳 사람들은 “가끔씩 약속을 어기고 방사능을 누출하곤 하”여, 시적 화자인 ‘안드로메다 바이러스’가 지구를 멸망시키기도 전에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간다고 한다. ‘안드로메다 바이러스’는 지구의 몇몇 의인義人인 친구들과 ‘노아의 방주’를 타고 아수라장인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 빙하기가 지배하는 북극으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노아처럼 “지혜의 말들을 외”우며 ‘동그란 눈의 외눈박이’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꽃으로 불려질 것이라고 한다. (강성철)

_ 강성철 시평집, <시 읽어주는 은행원>, 한국문연, 2010.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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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Bang


이재훈


태양이 어슷어슷 거리로 내려왔습니다. 쇼윈도우 마네킹들은 땀도 흘리지 않았지요. 누군가가 지나치는 여인에게 양공주 같다고 킬킬거렸습니다. 좌판 아저씨는 제 옷자락을 잡아끌고 빨간 비디오테이프를 꺼내주었습니다. 신문엔 사람들끼리 불총을 쏘아대고 있었습니다. 그런 거리를 걷다보니 어느새 제 겨드랑이에 털이 솟아 있었습니다.
무르팍에 힘이 없었습니다. 숱진 머리칼이 아버지를 닮았다지만 전 야틈한 언덕에서 방황했습니다. 아버지는 언덕을 넘으면 시온이 있다고 했었지요. 그때 태양이 제 몸에 달라붙어 명징한 기억들을 빨아먹고 있던 겁니다.
누구나 안식처를 찾아 세상을 헤매입니다. 눈앞에 솔개그늘이 하나 있었고 그 속에서 저는 RPG게임을 했습니다. 제 몸의 태양열로 세계를 불질렀습니다. 펑펑펑 150억 광년의 우주에 불을 놓습니다. 세상에 불을 지른 자는 신이던가요?

가끔씩 가슴으로 소나기밥을 먹습니다. 온 몸에 자릿내가 풀풀거려도 괜찮습니다.
언덕을 넘으면 시온이 있구요. 그곳에 다가갈수록 수염이 자꾸 굵어집니다. 간간히 제 가슴에 나비물마냥 불덩어리들이 흩어 날아갑니다. 


불의 상상력은 제 몸을 태워서 제 몸을 빛낸다. 끊임없는 타오르는 ‘불의 빅뱅’은 ‘불의 블랙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누구나 꿈꾸는 불, 그러나 불은 위험하다. 영원한 소멸의 거대한 블랙홀이 입을 벌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태양이 굴러다니는 거리가 있다. 한 소년이 성장해온 길바닥이 있다. 오늘도 태양빛이 내리쬐는 이상한 풍경이 있다. ‘소돔성’처럼 병들고 타락한 도시이다. 언제나 그러했던, 인간들은 도시에서 살기 위해서 이곳으로 몰려들지만 사실은 도시에서 죽기 위하여 몰려온 것이다. 이런 허기진 욕망들이 이 도시의 남루하고 비루한 풍경을 이룬다. 시의 화자는 이런 ‘마네킹’과 ‘양공주 같은 여자’와 ‘빨간 비디오테이프’가 있는 풍경을 따라 ‘겨드랑이에 털이 솟’을 만큼 성장해 가는데, ‘기성세대’를 표상하는 ‘아버지’는 자꾸만 나를 속여먹는다. 구원의 땅은 멀고, 안식의 그늘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무수한 ‘아버지들의 아이’는 고작 RPG게임이나 하고, 배터리처럼 충전되는 게임머니로 이 세계를 불지른다. 사이버 공간이라 할지라도 ‘펑펑펑 150억 광년의 우주에 불을 놓’는다. 이는 ‘아버지들의 아이’가 타락한 이 도시의 블랙홀을 견뎌내기 몸부림인 동시에 스스로의 태양열로 이 세계를 불 지르고 싶어 하는 욕망을 표상한다. 스스로 하나의 불덩어리가 되어 세계를 불 지르고 우주에 불을 놓으려는, ‘불의 아이’의 당돌한 모험. 그러나 그 결과는 자명하다. 아카루스의 날개처럼 제 몸이 녹아낼 뿐이다. 따라서 시인은 이토록 음울한 정열의 음화를 우리에게 던져놓는 것일까? 결국, 이 시는 수직으로 내리쬐는 태양빛과 수평으로 걸어가는 시의 화자를 교직시킨 뒤 그 접점을 통해 인간 삶의 비루한 풍경을 보여준다. 가볍게 빗금처럼 긁고 지나가는 풍경을 배경으로 ‘태양 아래의 성장기’를 담아낸다. 여기엔 제 가슴의 불덩어리를 완전히 흩날리지 못한 ‘울울한 욕망’과 아직도 찾지 못한 ‘시온의 땅’이 숨 쉬고 있는데, 그렇다, 태양 아래의 안식은 애당초 없었다. 그런 갈증 때문에 시인의 상상력은 ‘불의 빅뱅’처럼 타오르는 것이리라.  (오정국 시인)

_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10년 3~4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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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세대


이재훈


아름다운 골목은 없다.
돌고 도는 것이 골목이며
참고 참는 것이 사랑이다.
첫 사랑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때까지
본드를 마시고, 부탄가스를 불었다.
정작 중요한 말이라고 세상에 떠도는 건
모호한 개념 정의들뿐.
됐어 됐어 이젠 그런 가르침은 됐어.*
유치하다 생각한 노래를 목청껏 불렀지만
우리에게 밤문화를 가르쳐준 선생님과
몇 푼의 참고서 값으로 위안을 삼는다.
대학도 회사도 모두 판매왕을 모집하여
고시원과 학원을 전전하였던 아름다운 시절.
희망도 아니고, 욕망도, 진리도 아닌
어수룩한 정당성으로 가득한 신자유주의.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
그리고 나는 불편하다는 것.
정의와 진실이 정치적이라는 걸
한순간 깨달았을 때.
잔혹한 눈망울을 낼 수 없는 나는
숭고한 공간을 꿈꾸었던 나는
이 시대를 매일 버린다.
머릿속 꿈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한 것도 결국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이십일 세기 문명에 무릎을 꿇는다.
내 손으로 만든 옷과 신발과 종이가
하나도 없는 무능한 세대.
조금 일찍 태어났더라면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고
울분으로 노래를 부르고
세상에 욕을 하고
그것으로 명예를 얻고 정치를 하고 돈을 벌고
후배들에게 내 아픔의 젊은 날을 얘기할 텐데.
체게바라의 페데로사를 끌고
동해와 남해를 거쳐 서해의 어귀에서
술을 마시고 낯선 여자를 만나고
모래밭에서 잠드는 낭만놀이를 했을 텐데.
손잡고 싶은 사람 하나 없어
집으로 향하지만
오늘도 우편함엔 밀린 고지서와
광고 전단지만 가득하다.

* 서태지, <교실이데아>



|작품평|


‘서태지 세대’의 궁지와 난문(難問)



김창환
(문학평론가)



지금 쓰고 있는 이것이 <서태지 세대>라는 텍스트에 대한 글이 아니라 허물없는 말이라면, 이것이 지면이 아니라 시인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공간이라면, 혹은 내가 텍스트를 평가하기 위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알량한 자의식을 버릴 수 있다면, 나는 이 시에 대해 따져 물을 것도 풀어 설명할 것도 없다. 한 행, 한 행에 담겨 있는, 심지어 그 행간에 숨어 있는 감정의 값조차 직관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바로 내가 ‘서태지 세대’이기 때문이다. 시인과 시 속 발화자를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이 어렵고, 그 발화자와 독자(나)를 구분하는 것도 불편하다. 이 친화력을 떨어내기 위해 애쓰며 「서태지 세대」를 말해야 한다고 스스로 되뇌는 순간, 문득, 이 곤혹스러움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바로 이 시의 고갱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이 시는 한국 사회의 한 세대가 직면한 내적, 외적 궁지와 그것이 야기하는 우울과 무력감을 절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혹여 독자가 그 세대에 속한다면 우울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골목은 없다. 돌고 도는 것이 골목이며 참고 참는 것이 사랑이다”로 시작되는 이 시의 전반부는 한 세대의 궤적을 숨 가쁘게 추적한다. 특히 첫 대목에 놓여 있는 ‘골목’은 유년기의 체험부터 성인이 된 이후의 세계인식을 아우르는 긴요한 상징이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황금기인 유년기, 자족적 소우주 안에서 살아가는 그 시절의 ‘골목’은 새로운 공간 체험을 가능케 하는 돌쩌귀이다. 공간들은 구불구불하게 꺾여 있는 골목길을 따라 접혀 있고, 꺾인 골목을 돌아 내달릴 때 경험하는 새로운 공간은 세계체험의 가장 초보적인 형태이다. 그런데, 이 시는 접힌 공간이 펼쳐지며 나타나는 공간이 더 이상 새롭지도 아름답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저 획일적이고 비루한 공간의 반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돌고 도는’이라는 이 말에 담긴 시적 주체의 진저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린 시절의 단순한 탈향의식부터 예민한 정신이 결코 깨끗이 포기할 수 없는 유토피아 동경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익숙한 공간의 피륙을 찢고 새로운 곳으로, 혹은 최소한 이곳과는 다른 곳으로 뛰쳐나가려는 충동을 내장하고 있다. 이러한 강렬한 충동을 인정한다면 ‘돌고 도는 것이 골목’이라고 말하는 자의 끝 모를 좌절, 즉 이 세계에 이곳과 다른 곳이 없다는 사실, 새로움이 없다는 사실이 안기는 좌절을 간취해낼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사춘기의 발달과업을 자아와 세계의 탐색이라고 말한다. 진짜배기 탐색을 시작한 진지한 개인들은 내 삶을 지탱할, 혹은 내가 살아갈 세상을 지시할 말들을 고르고 그것들의 경중을 따져 우선순위를 매기기 마련이다. 이러한 작업의 심층에는, 언어가 실재를 지시하고 있으며(아니면 최소한 언어가 실재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 맺고 있으며), 인간 체험은 언어를 통해 의미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고,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와 관계할 수 있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 만약 ‘말’로 나와 세계의 관계를 직조해내지 못한다면 진지한 개인들은 무의미의 심연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적 주체가 ‘서태지 세대’의 우울과 무기력의 한 극단으로 포착해낸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정작 중요한 말이라고 세상에 떠도는 건/ 모호한 개념 정의들뿐”이라고 말할 때 이 짧은 2행은 서태지 세대가 가지고 있는 ‘말’에 대한 불신을 잘 보여준다. ‘말’에 대한 불신은 곧 자기 이해와 세계인식의 불투명성과 연관되며 그것은 이 시의 흐름을 좇아가면 ‘정의’와 ‘진실’의 불가능성과 연관되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사실, ‘서태지 세대’가 어떤 ‘가르침’에 존경심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들이 대학문턱을 밟고 다닐 무렵 대학의 강단은 ‘해머의 철학’이 지배하고 있었다. 전통적 사유, 사유의 축조술은 맛보고 판별하기도 전에 부정해야 할 무엇으로 다루어졌으며 오랫동안 근대세계를 떠받치고 있던 많은 것들이 이미 부서져 있었다. 모든 말들은 그 지시대상이 모호하거나 지시대상과 교묘히 어긋나 있었고, 말은(조금 더 확대해서 언어는) 더 이상 세계를 여는 열쇠라고 추앙받지 않았다. 그런데 ‘서태지 세대’가 지니는 ‘말’에 대한 불신은 해체를 지향하는 교육의 효과가 야기한 지적 승복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감각적으로 체득한 것이다. 이것이 ‘서태지 세대’의 날카로움이다. “됐어 됐어 이젠 그런 가르침은 됐어./ 유치하다 생각한 노래를 목청껏” 부른 세대는 전통적 가치체계나 이데올로기와 그것들을 가장 밑바닥에서 떠받치고 있는 ‘말’에 대한 부정을 감각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말’은 세계 내적 존재인 나를 떠받치는 토대가 되지 못한다. ‘정의와 진실’은 그 절대성을 잃고 그저 ‘정치적’인 맥락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전락했다. 이제 내가 좇아야 할 숭고한 대상들은 다 소멸하고 ‘신자유주의’라는 전지구적 시스템만이 내 삶의 내밀한 영역까지 파고들어 나를 지배한다. 적과 나를 구분하는 것이 본질인 정치의 생리를 체득하지 못한 ‘나’는, 이 바깥 없는 체제를 살아가면서 감히 바깥 혹은 높음을, 다시 말해 ‘숭고의 공간을 꿈꾸었던 나’는 이 시대와 심각한 불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제 ‘나’는 이 시대의 힘을 받아들여 순응하거나 스스로 유폐하는 것 중 하나를 강요당한다. 그리고 ‘나’는 후자를 택한다. ‘정의’와 ‘진실’을, 그리고 ‘머릿속 꿈들’과 ‘선한 것’을 부여잡고 있는 시적 주체에게 이 시대는 복마전을 방불케 한다. ‘조금 일찍’ 태어난 세대에 대한 감정의 본질은 자기 삶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부여할 수 있었던 세대에 대한 부러움이다. 그러나 그 의미부여가 얼마나 허구적(낭만적)이고 자기기만적인지 시적 주체는 잘 알고 있다. 기실 부러워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을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시적 주체의 모습을 바라보는 독자의 입맛은 씁쓸하다. 주체와 세계에 관한 ‘중요한 말’을 갖지 못한 세대의 우울과 무기력이 단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말’의 권위가 사라지면 ‘진실’은 존립할 재간이 없다. ‘진실’이 없는 곳에서는 보편적 ‘정의’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세계 속에서 나 자신의 삶을 긍정하거나 의미를 부여할 어떠한 방법도 없다. 이것이 ‘서태지 세대’가 처한 내적 궁지이다. 그리고, 잠깐 쓰이다 버림받을 노동만을 요구하는 세계 질서의 강고함이 그 세대가 처한 외적 궁지이다. 이 불멸의 궁지 속에서 숭고를 꿈꾸는 자는 필멸 혹은 필패이다. 이것이 ‘서태지 세대’의 우울과 무기력을 낳는다. 자, 이 난경難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난문難問이 시인을 기다리고 있다.

_ <현대시>, 2009년 8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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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세대

시詩 2009. 7. 7. 13:56


서태지 세대

이재훈



아름다운 골목은 없다.
돌고 도는 것이 골목이며
참고 참는 것이 사랑이다.
첫 사랑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때까지
본드를 마시고, 부탄가스를 불었다.
정작 중요한 말이라고 세상에 떠도는 건
모호한 개념 정의들뿐.
됐어 됐어 이젠 그런 가르침은 됐어.*
유치하다 생각한 노래를 목청껏 불렀지만
우리에게 밤문화를 가르쳐준 선생님과
몇 푼의 참고서 값으로 위안을 삼는다.
대학도 회사도 모두 판매왕을 모집하여
고시원과 학원을 전전하였던 아름다운 시절.
희망도 아니고, 욕망도, 진리도 아닌
어수룩한 정당성으로 가득한 신자유주의.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
그리고 나는 불편하다는 것.
정의와 진실이 정치적이라는 걸
한순간 깨달았을 때.
잔혹한 눈망울을 낼 수 없는 나는
숭고한 공간을 꿈꾸었던 나는
이 시대를 매일 버린다.
머릿속 꿈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한 것도 결국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이십일 세기 문명에 무릎을 꿇는다.
내 손으로 만든 옷과 신발과 종이가
하나도 없는 무능한 세대.
조금 일찍 태어났더라면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고
울분으로 노래를 부르고
세상에 욕을 하고
그것으로 명예를 얻고 정치를 하고 돈을 벌고
후배들에게 내 아픔의 젊은 날을 얘기할 텐데.
체게바라의 페데로사를 끌고
동해와 남해를 거쳐 서해의 어귀에서
술을 마시고 낯선 여자를 만나고
모래밭에서 잠드는 낭만놀이를 했을 텐데.
손잡고 싶은 사람 하나 없어
집으로 향하지만
오늘도 우편함엔 밀린 고지서와
광고 전단지만 가득하다.

* 서태지, <교실이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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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메모

나는 서태지와 동갑이다. 그러니까 좀 묵은 서태지 세대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서태지의 모든 노래들을 부르고 다녔다. 고등학교 중퇴, 남들이 가지 않는 새로운 음악의 길. 그의 모든 것이 내 삶과 오버랩되었던 시절. 다 추억이 되었다. 열심히 시를 썼지만 살기 힘들다. 외롭게 버텼지만 불안한 미래가 옥죈다. 누구는 억울하다고 했다. 그래도 시가 있었기에 버텼다고 했다. 우리 세대를 생각했다. 엄살의 시를 한 편 써봤다. 물론 ‘서태지’라는 이름을 꼭 빌리고 싶었다.

_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작가, 2010.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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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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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스터(trickster)

시詩 2008. 10. 17. 11:25


트릭스터(trickster)


이재훈


1.

배에 올랐지. 차가운 나라, 먼 끝을 향하는 배. 내릴 수가 없었지. 어리석고 오만한 사람들이 가득한 배. 자신은 소명을 가진 자라고 착각하며. 선구자라고 착각하며. 탐욕스럽게, 모자와 단추에 보석을 주렁주렁 매단 사람들. 침묵이 두려운 사람들. 가장 조용하고 작은 사내를 미워했지. 그의 다리를 붙잡고 머리부터 바다 속으로 처넣었지.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교수들이 그 광경을 기록했지. 선구자가 치르는 희생의 영광에 대해. 사람들은 모두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내의 눈빛을 기억하지. 꿈에서 나타나는 그 눈빛을 애써 외면하지. 철학자들은 꿈과 망상의 상관관계에 대해 기록했지. 아, 모두 먼 기억의 일들이었지.

2.

어떤 시인은 자신이 천재라 생각하지. 나는 바보여서 그걸 믿고야 말았지. 어떤 시인은 자신이 순교자라 생각하지. 나는 바보여서 그걸 믿고야 말았지. 나는 부정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인간의 지위와 권력을. 넓은 정원에서 잔치를 벌이는 주인들을 나는 존경했어야 했는데. 그들의 규칙을 탐닉해야 했는데. 화려한 네온사인 속으로 들어가 영혼을 의지했지. 땅바닥에서 가만가만 숨죽인 노란 피부의 족속들을 경멸했지. 하늘에서 보면, 사람들의 정수리는 텅 비어있지. 아, 자존도 없이 교활한 날들이었지.

3.

배가 고파 사치를 하고, 호색한이 되었지. 배에서 내려 밟은 이 땅엔 불이 있어. 토끼가 인디언에게 가져다준 불이 있어. 불로 심판하고, 불로 배를 불렸지. 사랑하는 자에게 불화살을 쏘는 인간들을 동정했어. 단지, 죽지 않기 위해 좀 더 다른 얼굴로 성형을 했지. 나는 아첨꾼이자 장난꾼일 뿐. 대지 같은 사람을 찾아 헤맸지. 이 땅엔 용(龍)도 없고, 심지어 악령도 없는 리얼리티의 숲. 산토끼가 되어 빌딩 사이를 배회하지. 말과 말 사이를 가로채, 새로운 말을 만들어 소문을 내지.


_ 거대한 뿌리여, 괴기한 청년들이여 : 김수영 40주기 기념 시집(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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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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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自在)에의 욕망

 

 

이명연

 

 

1. 시작 - 자재에의 욕망?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하이데거의 말이다. 하이데거의 할아버지쯤 되는 니체에게는 매우 익숙했을 이 전복적인 문장의 의미는 (인간) 존재가 언어를 통해 존재가 된다는, 존재가 언어로 인해 존재로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언어를 만든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이 놀라운 정의는 그러나 그리 놀랄 만한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래 전, 이와 비슷한 말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요한복음 1장 1절).”라는 말이다. 이 말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존재는 말씀 이후에, 말씀으로부터 태어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무려나, 언저가 존재를 앞서는 것이라 했을 때, 언어가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했을 때,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언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 ‘언어의 감옥(프레드릭 제임슨)’에 갇힌 수인(囚人)의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자연이 아닌, 인공 아니, 언공(言工)으로서의 존재는 하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길 욕망한다. 욕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재훈의 시 제목이기도 하고 마네의 그림 제목이기도 한 <올랭피아>의 하녀처럼, 그 하녀가 빼앗기지 않았으면 하는 ‘내 꽃’인 자유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존재성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기에.
헌데 욕망이란 무엇인가? 지라르나 라깡이 지적하듯, 나의 욕망은 나의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내 욕망의 대상의 욕망이며, 대차자의 욕망일 뿐이다. 즉 그것은 중계된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나만의 것, 나의 자유의지가 만들어낸 무엇이 될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욕망이건 욕망의 대상이건, 언어화될 수 없는 것들은 욕망이,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욕망은 언어, 정확히는 금지와 금지의 수용을 통해 구성되는 주체로서의 나(라깡)와 그러한 주체들이 만들어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나(지라르)의 욕망이라는 점에서 결국 언어로부터 탄생한 욕망, 언어로써 말해질 수 있는 욕망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에의 욕망은 불가능한 욕망일 뿐이며, ‘자재에의 욕망’이란 말은 불가능한 말이 될 수밖에 없다. ‘자유자애(自由自在)의 준말이라도 볼 수 있"는 자재라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구속당하지 않는 상태, ’시공을 넘어서는‘ ’초월적 영역‘을 이르는 말(이명권, <예수 석가를 만나다>, 코나루스, 2006. 34쪽)인데, 우리는 언어의 구속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 욕망을 이룰 수 없는 존재, 이 자재의 상태에 이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욕망을 포기해야 할까? 자재의 존재로서의 나, 자유롱ㄴ 존재로서의 나에의 욕망을 우리는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시는 고개를 젓는다. 시는 언어를 통해 언어를 넘어서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중략)...

3. 진실을 바라보라 - 이재훈의 경우

삶과 세계의 진실을 바라본다는 것은 뼈아픈 일이지만, 자재의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한 첫 단계라는 점에서 더 없이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것이 뼈아픈 일인 이유는 우리의 삶과 세계가 아름답지만은 않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그것이 자재로서의 존재의 첫 단계인 이유는 그것, 곧 삶과 세계의 아름답지만은 않은 진실을 알아야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렷한 밤이었지. 무수히 낭비한 말들을 끌어안고 그 성(城)을 찾았어. 어지럽게 나선형 계단을 올랐지. 두렵지는 않았어. 사람의 눈은 아름다운 무늬만을 본다지. 내가 만난 이의 꿈꾸는 눈빛. 정물처럼 수놓아진 가슴에 꽃잎이 화르르 번졌어. 촛불 사이로 흐르던 눈물과 기도. 가슴으로 잇는 하나의 다리를 오래오래 건넜어. 숨찬 시간이 흘렀지. 붉은 꽃이 만발한 오솔길도 아니었어. 구름과 어우러지는 파란 하늘과 흰 등대로 아니었어. 안개 자욱한 길 끝에, 스스로 몸을 비튼 고행의 소나무들이 가득했어. 사는 것의 원리도 모른 채, 그 캄캄한 숲에 발을 디뎠지. 성 안은 온통 어두웠지만, 따뜻하고 행복했어. 해가 뜨면 오로지 명령만 귀에 가득했지. 애벌레처럼 꿈틀대다 안식향을 피워. 집을 나와 지하철을 타지. 내 몸은 이 땅에 저당잡혀 있어. 말끔한 이미지의 감옥 속으로 나는 들어가지.

위 시, <하얀 성>에서 화자는 ‘무수히 낭비한 말들을 끌어안고’ 성을 찾는다. ‘또렷한 밤’이라는 시어에서 알 수 있듯, 무수히 낭비한 말들은 낮 동안의 말들이다. 이 낮 동안의 말들이 낭비인 이유는 내가 저당잡혀 있는 이 땅이 ‘이미지의 감옥’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실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이미지의 감옥 속에서의 말들은 낭비된 말이 될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밤은 또렷하다는 점에서 실체의 세계라 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스스로 몸을 비튼 고행의 소나무들이 가득’한 공간이지만, 하여 뼈아픈 공간이지만, ‘따뜻하고 행복’한 공간이 된다. 더구나 극 오간은 ‘명령’이 없기에 자유로운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공간은 실재하는 공간이기보다는 오인의 공간, 꿈의 공간이라는 점이 문제이다. 그곳은 화자가 보소 싶어하는 ‘아름다운 무늬’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다 할 때, 성은, 하얀 성은 화자가 보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무늬일 뿐이며, 내 몸이 저당잡혀 있는 세계는 명령만 가득한 이미지의 감옥, 안식향을 피워야만 하는 공간이 된다. 전자가 꿈의 세계라면, 후자는 몸이 살아내는 현실의 세계이다. 그런데 결국 우리가 사는 곳은, 살 수밖에 없는 곳은 후자라는 점에서 하얀 성은 오이느이 공간, 꿈의 공간으로 남을 수밖에 없고, 이 공간 역시 이미지의 감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미지의 감옥에서의 시 혹은 시 쓰기는 어떠한가?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어머니가 없는 공허한 시를 쓴다.
예술가들은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고
머리에 뿔을 단다. 광대의 옷을 입는다.
거친 발걸음으로 거리에 나가 거죽을 벗긴
날짐승을 전시한다.
대중은 환호하고, 예술은 진지하다.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고독한 오만으로 공허한 시를 쓴다.
재주 좋은 시인은
높은 나무에 올라 나뭇잎의 형상을 그린다.
시든 나뭇가지의 슬픔을 노래한다.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사로잡힌 유니콘의 뿔에 대해.
사랑하는 말발굽 소리에 대해.
문명인의 실험에 훼손당한 별의 슬픔에 대해.
스삭스삭 재킷의 말로 쓴다.
실상 외투는 어머니의 살로 만들어진 것.
재킷, 재킷! 하면* 어머니의 뇌와 심장이 실이 되어
올올이 풀려나온다.
재킷을 입고 추위를 견딘 나는
어머니에 대해 쓸 수 없다.
잠자는 숲에 들어가 촛불을 켜고
재킷을 태우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편의 시가 태어날텐데.
재킷의 재가 나무에 뿌려져
울창한 숲이 되면,
앙상한 내 겨드랑이에 날개가 생길텐데.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
너무 추워 재킷을 꼭 껴입고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재킷, 재킷 말을 건다.

- <재킷을 입은 시인>


위 시는 <재킷을 입은 시인>이다. 아베 고보의 소설 <시인의 생애>를 시로 다시 쓴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위 시에서 시인은 자신을 이미지로 만든다. 그들은 대중의 환호에 진지한 척 하지만, 공허한 시를 쓸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 시에는 어머니가 없기 때문이다. <시인의 생애>에서 재킷은 어머니의 노동이자 어머니의 육체였다. 그런 점에서 어머니가 없는 시란 노동과 그 노동의 지옥과 그 노동을 하는 육체가 없는 시를 말하고, 이는 역으로 노동과 노동의 지옥과 노동을 하는 육체가 담겨 있을 때 시는 가득 찬 세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어머니의 노동과 어머니의 노동의 지옥과 어머니의 육체로서의 재킷을 입고 시를 쓴다는 것은 제스처일 뿐이며, 이 제스처를 버릴 때, 이 재킷을 태워버리고 내가 시를 쓸 때, 그 시는 ‘가장 아름다운’ 시, 가득 찬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위 시에서 시인은 재킷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태워버리지 못하고 공허한 시, 제스처의 시만을 쓸 수밖에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하는 공허한 말 걸기일 뿐이다. 시인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재킷을 벗기에 이 세계는 너무 춥기 때문이다. 재킷은 이렇게 볼 때, 화자인 시인을 자재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공허한 삶과 육체가 기댈 수밖에 없는 무엇이면서 동시에 시인이 어머니의 것이 아닌 시인의 것으로서 가져야 할 무엇이 된다.
하지만 시인은 어머니의 재킷을 태워버리고 자신의 재킷을 가질 수 없다. 추위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추위는 무엇일까? ‘공상을 허락하지 않(<만>)’는 시대로서의 추위일까? 그럴 것도 같다. 그럴 것도 같지만, 그것으로는 재킷이 지난 무게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일가. 추위의 정체는.


얼굴 없는 안개의 밤,
죽음의 그림자를 막연하게 살피던 밤,
한밤 내 웃었다.


<만(灣)>의 일부이다. 위 시를 통해 우리는 추위의 온전한 정체와 만날 수 있다. 그것은 두려움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만’이라는 제목은 이 시의 모티프인 천연두 자국과의 형태적 유사성과 배꼽과의 의미론적 유사성(만은 육지의 배꼽이라 할 수 있다)을 담고 있는 은유이다. 위 시의 화자는 어릴 적 천연두를 앓으면서 죽음의 그림자를 확인하고 한밤 내 웃는다. 이때의 웃음은 즐거운 웃음이라기보다는 죽음이라는 뼈아픈 진실을 안 자의 페이소스가 담긴 웃음이라 할 수 있다. 천연두 자국과 유사성을 지닌 만으로부터 그 만에서 연상되는 배꼽을 바라보는 것을 통해 재생되는 이 웃음은 삶의 두려운 진실을 상기하게 하고, <재킷을 입은 시인>의 시인으로 하여금 어머니인 재킷을 벗어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배교의 고백 혹은 돌아온 탕아의 ‘연대기’를 연상시키는 일련의 시들 속에서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해 재킷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시인으로서의 화자는 ‘난삽한 사랑(<할례의 연대기>)’의 삶을 살고, ‘아무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지 못(<귀신과 도둑>)’하는, ‘호명을 두려워(기억의 기술>)’하는 존재의 삶을 산다. 이는 <재킷을 입은 시인>에 표현된 ‘고독한 오만’이라 할 수 있다. 고독하기에 호명을 두려워하고 아무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지 못하며, 오만하기에 난삽한 사랑만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 오만은 ‘유디트의 강한 팔에 붙들려/ 목이 잘리는 환상이 가장 즐거울 때도 있었다.(<기억의 기술>)’는 진술이나 ‘그러나 나는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사랑이 완성(<만신전>)’된다는 진술까지 가능케 한다. 이러한 고독과 오만은 재킷의 시인의 한계이자 삶 옆에 죽음을 달고 사는 인간 존재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을 바라본다는 것, 이것을 안다는 것은 이미지로서의 세계와 삶이 아닌 실체로서의 세계(인간이 만든 것으로서의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것,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앎은 ‘세상과 더불어 있’는 존재로서의 자재를 가능케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고독한 오만을 안다는 것은 그 고독한 오만을 벗어나 죽음이라는 진실과 함께 삶의 진실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첫 단계이기 때문이다.
 

돌 위에 앉아 있으면
저 바닥 아득히 짐승의 울음이 들리는 듯
엉덩이가 뜨끈했다.
숭고한 소리들이 돌 속으로 몰려갔다.
피의 온기를 가진 돌.
깊은 밤 달빛은 제 몸인양 돌 속으로 푹 잠겼다.
나도 모르게 일어서 돌에 머리를 숙였다.

- <돌> 부분


<돌>의 일부이다. ‘매일 다니는 골목길에’ 있는 ‘무심코 지나쳤’던 돌에게 화자는 인사를 한다. 고독과 오만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재킷을 벗어버릴 수 없는 약한 존재, 죽음과 함께 사는 존재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그 고독과 오만을 알았을 때, 재킷의 시인은 자신이 ‘세상과 더불어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이로 인해 ‘돌의 근원’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생각 속에서 돌은 인간의 삶이 잃어버린 짐승의 울음과 숭고가 담겨 있는 것이자, 따뜻한 온기를 담고 있는 자재하는 존재로 변한다. 이처럼 새로운 돌, 자재하는 돌, 돌의 자재를 본다는 것은 곧 나의 자재를 찾아가는 또 다른 단계 혹은 시작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재의 세계란 그저 그렇게 있음, 자유롭게 있음의 존재들, 곧 자재자들이 모여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_ <시현실> 2008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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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엔 언덕이 있다.
그날은 이상했다.
오르고 올라도 닿지 않는 거리를 헤맸다.
혼을 빼앗긴 것처럼.
늪에 빠진 것처럼.
뒷덜미를 놓아주지 않는 불빛이 있었다.
사위가 어둠에 둘러싸이면서
상점엔 불이 하나씩 켜졌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어둠이 안겨주는 거대한 정적을,
위대한 침묵을
나는 알지 못했다.
상처받은 한 친구를 생각했고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생각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바쁜 거리의 일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산책길엔 언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길목과 길목이 혀를 내밀어
몸을 떠받치고 있을 뿐.
타인의 인격을 규정하지 않기로 했다.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다.
장 그르니에가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빛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다.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은,
그 짧은 시간만큼은 황홀하겠지.
언덕이 있는 곳은 월곡(月谷),
달빛이 있는 골짜기다.
언덕을 오르고
또 한 언덕을 오르면
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그 햇살의 순간처럼.

- 이재훈,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전문


우연의 일치일까. 이 시는 구성의 큰 틀에 있어서 앞의 시와 닮은 점이 적지 않아 보인다. 남진우의 작품에 나오는 ‘그’가 오르막길을 헐떡거리며 걸어가듯이 이재훈 시의 화자인 ‘나’는 언덕이 있는 산책길을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의 세부에 있어서 양자의 차이는 엄존한다. 시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에서 시인과 근접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화자는 어떤 이상한 기운이 감돌던 ‘그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나’는 또 시인은 복잡다단한 심경 속에서 ‘거리’를 헤매다 ‘언덕’이 있는 ‘산책길’을 오르게 된다. 바삐 돌아가는 거리에서 ‘나’는 마치 “혼을 빼앗긴” 듯, “늪에 빠진” 듯 방황한다. 방황의 구체적 이유들로는 ‘상처받은 친구’와 ‘갚아야 할 빚의 액수’ 그리고 ‘타인의 인격’ 등이 제시된다. 화자는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자신이 저주스럽다. 그가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다.”나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다.”는 열망을 내비치는 이유는 현재에 쌓인 강한 불만의 심리와 무관할 수 없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어둠’이 ‘사위’에 내릴 때, 거리의 상점엔 ‘불빛’이 하나 둘 켜지고 ‘나’의 종교적 심성은 고양된다. 화자가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 곧 고통 속에 기생하는 황홀한 ‘그 짧은 시간’을 추구하는 까닭은, 그가 ‘근원’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달빛’이 흐르는 골짜기인 이곳 ‘월곡’에서 한없이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그리하여 ‘존재의 비밀’을 깨칠 ‘그런 순간’이 ‘내’게 올지 모른다. 장 그르니에가 지중해의 푸른 물결 속에서 발견한 산타크루즈의 그 빛, ‘그 햇살의 순간’을 시인은 희구하고 있다. ‘그날’은 신이 내 곁에 가장 가까이 내려앉을 수 있는 ‘일요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단 하나의 연에 38행이 담겨 있는 이 시를 가리켜, 삶의 아픔을 보듬어 줄 신성(神聖)의 빛을 향한 수도자의 기나긴 길의 시적 현현(顯現)으로 부르고만 싶다.

- 권온, <시적 시간 혹은 순간에 뿜어져 나오는 영혼의 불꽃>, 시작, 2008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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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상에서 禪까지



대담자:이승훈, 이재훈(시인)




이재훈 : 선생님의 유년 시절은 불안과 우울의 시간들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내셨던 외조부와 한의학을 하셨던 조부, 그리고 의학을 하셨던 부친 밑에서 성장합니다. 외형적으로는 괜찮은 집안의 총명하고 명석한 아이였겠지만, 내면적으로는 외로움과 우울, 불안감 등에 시달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집안의 잦은 이주, 부친의 병, 모친의 자살 시도 등은 집적적인 영향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과 내면적 정황들이 자신의 내면세계를 고집스럽게 파고든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선생님의 천성적 성정性情보다는 외부 환경이 더 많은 영향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승훈:외면과 내면의 아이러니죠. 겉으론 멀쩡하고 이 시인 말처럼 그럴 듯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계속된 건 불안, 공포, 우울이었습니다. 내가 너무 내성적이고 여린 성격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불안은 내 브랜드죠. 난 초등학교 입학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어머니 손을 잡고 설레이며 학교에 입학하던 추억이 없어요. 어느날 갑자기 낯선 아이들 속에, 그것도 시끄러운 아이들 속에 내가 앉아 있던 기억만 납니다. 무슨 카프카 소설같고 악몽같은 기억입니다. 도대체 이 낯선 곳에 내가 왜 왔는가 ? 그후 알게 된 것이지만 아버지는 나이도 차기 전에 그러니까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가을에 나를 학교에 집어 넣은 것입니다. 낯선 것에 대한 공포는 그후에도 계속됩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6. 25가 나고 난 계속 낯선 곳으로 옮겨 다니고 그후에도 잦은 이사 무엇보다 아버지 병으로 가정은 어둡고 언제 집안이 박살 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며 유년 생활을 보냈죠. 난 어린 시절 한번도 웃어본 적이 없어요. 사실 의사이신 아버지가 병으로 고생하신 것도 아이러니입니다.

이재훈 : 위의 질문처럼 생각하게 된 연유는 직접 선생님을 뵙고 든 느낌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감정도 풍부하시고 유머감각도 있으시고 웃음도 많으시고 해서 든 생각입니다.

선생님께는 두 분의 큰 스승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춘천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사였던 이희철 시인과의 만남, 한양대에서 박목월 선생과의 만남이 그것인데요. 두 분과의 만남이 선생님께 끼쳤던 영향이 어떤 부분이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승훈:불안과 우울에 지친 셈이죠. 그리고 이젠 나이가 들었잖아요 ? 최근엔 왜 사냐 건 웃지요라고 노래한 김상용 시인의 시가 좋아요. 고교 시절 이희철 선생님을 만난 건 행운이었고 대학 시절 박목월 선생님을 만난 건 운명이라는 생각입니다. 이희철 선생님은 당시 「문학예술」지에 신인으로 등단한 분으로 참 시가 좋았습니다. 고교 시절 난 선생님의 시를 다 외울 정도고 당시 동급생이던 소설가 전상국 형이 말하듯 선생님은 사실 나를 편애할 정도였습니다. 시의 기초가 잡힌 건 선생님의 영향과 지도 때문이고 박목월 선생님은 이미 기초가 다 된 나를 문단에 바로, 그것도 대학 2학년 봄에 내보내신 겁니다. 그러나 목월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지금의 내가 없을 정도로 선생님과의 만남은 그후 운명이 됩니다. 난 목월 선생님을 만나려고 이 땅에 태어난 것 같습니다.

이재훈 : 이희철, 박목월 선생은 전통 서정계열의 작품 세계가 당신의 문학관이었고 그것을 작품으로 훌륭하게 구현해 낸 시인입니다. 선생님의 작품세계는 전통 서정시의 반대편에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선생님께서는 스승의 문학 세례에 큰 영향을 받는 우리 문학 전통으로 비추어 본다면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스승의 문학 경향과 반대의 지점에 가 있기 때문이지요. 이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승훈:두 선생님 모두 내가 하는 문학에 대해서는 그렇게 긍정적이지는 않으셨죠. 이희철 선생님은 네가 李箱을 좋아하더니 시가 그렇게 되나 보다라고 하신 적이 있고 목월 선생님은 글쎄 아무래도 이상의 시는 장난 같제 ?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모더니즘 계열 시인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라는 게 모처럼 등단을 시켜 놓으니까 이상, 김춘수, 김수영, 전봉건같은 시인들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니 속으로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셨을까 ? 그런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목월 선생님은 너는 네 길을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대가 풍이셨죠.

이재훈 : 선생님께서는 고립감, 외로움, 허무, 불안 등의 삶이 현대인의 조건이며, 현대적인 것이라 말합니다. 이것은 세계를 불화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고, 이 불화 속에 내던져진 현대인의 의식세계가 모더니즘의 에너지겠지요. 자연인으로서 선생님의 삶 또한 이러한 불화를 스스로 수긍하고 고독한 산책자로 살아가는 듯한 인상을 많이 받습니다. 선생님의 문학적 태도 이전에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태도 또한 궁금합니다.

이승훈:고독이 낭만주의의 개념이라면 불안은 현대주의, 모더니즘의 개념입니다. 홀로 있기 때문에 고독하고 누군가를 만나면 고독이 해소되죠. 그러나 불안은 다릅니다. 혼자 있어도 불안하고 누구와 함께 있어도 불안합니다. 아니 함께 있는 사람이 갑자기 무서울 때도 있습니다. 물론 정신분석에 의하면 불안은 분리 불안이고 이 불안이 자아 분열로 발전합니다. 사회학적으로는 이 시인 말처럼 자아와 세계의 불화, 단절, 소외가 동기가 될 수 있고 따라서 이런 단절 속에 던져진 현대인의 내면, 곧 불안과 공포가 모더니즘의 에너지입니다. 내가 대학 시절 좋아했던 카프카의 세계가 그렇고 이상의 시가 그렇습니다. 내 시가 그렇다면 내 인생도 그렇고 거꾸로 내 인생이 그렇다면 내 시도 그렇습니다. 시는 속일 수가 없어요. 사실 난 잿빛 인생입니다. 요즘도 불안해서 시를 쓰고 해질 무렵이면 혼자 맥주를 마시고 두통으로 고생이고 매일 두통약을 먹고 감기로 고생이고 매일 감기약을 먹고 우습죠. 고독한 산책자이기 보다는 난 사실 산책같은 건 취미가 없고 여행도 싫고 그저 잿빛으로 삽니다. 무슨 목표도 없고 프로젝트도 없이 그저 하루 하루를 산 게 여기까지 온 겁니다. 그런 점에서 난 허무주의자이고 정신적 방랑자입니다. 정신적 유목민이라고 할까? 언젠가 이재복 평론가와 대담을 할 때도 그런 말을 했지만 난 그동안 낸 책이 몇 권인지 몰라요. 그래서 조사해보니 50 권이더군요. 그런데 강동우 평론가는 자기가 알기로는 53 권이래요.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겉보기와 달리 속은 엉망이죠.

이재훈 : 선생님의 작품 세계는 자아 탐구로 시작해서 그 시적 대상이 로 변화됨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 시집 「밝은 방」부터는 자아 소멸, 주체 소멸로 바뀌게 됩니다. 자아와 주체가 소멸되면 남는 게 언어이고, 이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시작詩作에 그대로 투영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언어에 대한 자율성을 누리게 하고, 스스로 생장, 형질 변화하도록 언어를 방목하는 형식이 하나의 시적 방법론으로 파악됩니다. 하지만 이런 언어를 사유하고 시적 대상으로서의 언어를 질서화시키는 건 결국 주체가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언어주체와의 친화와 길항 관계들에 대해 독자들을 위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승훈: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내 시세계는 자아―언어―대상의 관계에서 처음부터 대상, 곧 자연이나 현실을 노래하지 않았어요. 아니 난 그런 대상의 세계엔 관심이 없고 자아에만 관심이 컸고, 따라서 자아탐구의 시를 썼습니다. 이른바 비대상 시입니다. 대상을 상실한 자아는 무의식, 어두운 충동의 세계이고 이 세계는 그후 나/ 너/ 그라는 인칭 체계로 탐구되죠. 그러나 느닷없이 이런 자아탐구가 자아소멸로 전환됩니다. 자아탐구에서 자아가 없다는 인식에 도달하기까지 30년이 걸린 셈입니다. 아니 내가 등단한 게 1963년이고 첫 시집을 낸 게 1969년이니까 시집을 기준으로 하면 25년이 걸린 셈이고. 이 시인 말처럼 1995년에 낸 시집 「밝은 방」이 전환점이 됩니다. 아무튼 자아를 찾는다는 게 이상하게도 자아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겁니다.

이제 자아―언어―대상에서 남은 건 언어이고 자아가 없다면 언어가 시를 쓴다는 결론이 나오죠. 이 무렵 자아가 없다는 생각은 불교적 사유가 아니라 언어학, 특히 후기구조주의 언어학을 공부하면서 깨달은 거죠. 방브니스트, 데리다, 라캉, 바르트가 그렇습니다. 주체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말을 할 때 주체가 탄생하고 말, 언어가 없다면 주체가 없습니다. 그리고 말할 때 말하는 주체와 말 속의 주체가 태어나고 그런 점에서 주체는 두 주체 사이에 있고 주체는 계속 흘러가지요. 난 어제 술을 마셨어 하면 지금 말을 하는 나와 말 속의 나가 태어나고 나는 이 두 개의 나 사이에 있고 말이 계속되는 한 두 체의 관계도 계속 흘러갑니다. 그러니까 실체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주체가 있고 이런 주체는 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텍스트적 주체, 해체적 주체, 차연적 주체입니다. 고정된 절대적 실체로서의 주체, 데칼트적 주체는 없고 주체는 차연이 생산하고 차이와 연기가 주체입니다. 말하자면 두 주체는 차이/ 연기의 관계이고 말하는 주체도 그렇고 말 속의 주체도 그렇습니다. 라캉 식으로 말하면 기표와 기표 사이에 존재/ 부재는 주체입니다. 따라서 나는 이 시인과 다른 생각입니다. 주체가 언어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언어가 주체를 구성/ 탈구성합니다. 요컨대 주체는 해체되는 거죠. 그러나 이렇게 자아소멸, 주체소멸을 깨닫고도 내 시가 계속 불안, 우울, 광기에 시달린 건 정효구 교수의 지적처럼 이 깨달음이 언어학을 매개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재훈 : 「비대상」, 「시적인 것은 없고 시도 없다」, 「비빕밥 시론」 등에서부터 최근 저서 「탈근대주체이론―과정으로서의 나」 등의 시론은 우리 시사詩史에 남을 대표적 시론으로 평가됩니다. 이러한 시론은 선생님의 시세계와 함께 공존하고 있어서 어느 하나를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게 됩니다. 선생님의 시를 좋아하는 많은 독자들은 시가 먼저냐 시론이 먼저냐를 놓고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시론에 의해 시가 탄생됐는지 아니면 시에 의해 시론이 탄생됐는지를 묻는 독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승훈:「비대상」은 말 그대로 대상이 없는 시를 쓰던 초기의 세계를 나대로 성찰한 것으로 그동안 오해도 많았고 말도 많았던 시론입니다. 대상이 사라지고 남은 자아는 무의식적 실체이고, 나는 이런 자아를 노래했습니다. 이상의 「절벽」같은 시가 그렇고 김춘수의 무의미 시론이 의미론을 강조한다면 내 시론은 심리학, 무의식, 억압된 심리적 에너지의 투사를 강조합니다. 나는 이런 세계를 실존의 투사, 외부세계의 무화無化, 언어의 도취로 요약한 바 있습니다. 김춘수의 무의미 시는 묘사적 이미지, 자유연상, 통사해체의 단계로 발전하고 나는 비대상, 자아소멸, 해체로 발전합니다. 「시적인 것은 없고 시도 없다」, 「비빔밥 시론」은 자아소멸 이후에 남은 언어에 대한 사유, 시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습니다. 전자는 시에는 본질이 없고 언어와 제도만 있다는 것, 후자는 이 언어와 제도의 해체를 다룬 것입니다. 「비대상」이 제 1기를 대표한다면 이 시론들은 제 2기를 대표합니다. 시와 시론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닙니다. 함께 가는 겁니다. 특히 현대시는 시론을 요구하고 시론은 시를 보는 시각, 입장, 태도입니다. 현대 회화도 현대회화에 대한 시각, 이론, 입장이 없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쓰레기가 회화가 되는 것도 이론, 입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우리시가 전통 서정시로 퇴행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짓이고 현대시에 대한 시각, 입장, 이론이 분명치 않다는 것이고 이런 것들이 미적 후진성과 통합니다. 도대체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나무, 달, 이슬, 꽃, 강입니까 ?

이재훈 : 서구 문예 이론의 한국적 수용에도 큰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현대시사상」이라는 잡지를 주관하시면서 여러 가지 문예 사상과 시적 담론들을 번역하고 그것을 우리 문학에 수용하는 논문들을 생산해 내는 데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저도 습작 시절에 이 잡지를 복사, 제본하면서 공부했던 게 지금도 큰 재산으로 남습니다. 또한 지금 이러한 잡지가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서구에서 이제 우리가 수용하고 천착해야 될 사상과 이론들은 어떤 게 있을까요? 그리고 선생님께서 서구 이론을 연구하시면서 가장 큰 인상을 받았던 이론 혹은 이론가로는 누구였는지 궁금합니다.

이승훈:서구는 끝났다는 생각입니다. 그들의 끝에 동양이 있습니다. 서구 사상은 이론적이지만 동양 사상은 직관적이고 따라서 동양 사상, 특히 노장 사상, 불교 사상, 禪 사상에 대한 현대적 읽기가 요구됩니다. 그런 점에서 계간 「시와 세계」가 표방하는 후기현대와 선의 만남은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사실 많은 문예지, 시지들이 나오지만 뚜렷한 문학적 태도를 표방한 잡지들은 별로 없고 그 많은 시지들이 왜 나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종이 낭비지요. 그건 그렇고 예컨대 데리다의 글쓰기가 놀이, 무용성을 강조한다면 장자는 이 놀이, 무용성의 유용성을 강조하고 그런 점에서 데리다가 예술을 강조한다면 장자는 예술과 삶이 하나가 되는 경지를 지향합니다. 데리다의 해체 개념도 유마 거사가 말하는 不二 사상과 비슷하고 다릅니다. 이 차이, 틈, 균열을 파고들 필요가 있죠. 요컨대 서양과 동양의 만남, 회통 그러니까 서양도 아니고 동양도 아닌 잡탕, 비빔밥, 혼교, 난교, 혼혈이 요구됩니다. 개인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론가는 소쉬르, 프로이트, 데리다, 라캉입니다. 소쉬르가 말하는 언어의 기호학적 특성, 프로이트의 무의식, 데리다의 해체, 라캉의 자아 개념 등은 지금도 내 사유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물론 나대로 수용한 것이죠.

이재훈 : 60년대는 선생님께서 등단하신 연대이지요. 당시 선생님께서 몸 담고 계셨던 「현대시」 동인은 새로운 문학적 감수성으로 이념과 경향을 떠난 순수시로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30년대 모더니즘 극복과 전후모더니즘의 극복이라는 명제를 안고 있었던 당시에 「현대시」 동인은 가장 주목할 만한 문학 그룹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와는 다르게 현재의 「현대시」 동인들의 면면을 보면 모더니즘적 성격을 고수하며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은 선생님과 함께 김영태, 박의상 선생 정도에 불과합니다. 당시 「현대시」 동인의 영향과 그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이승훈:1960년대 신세대로 구성된 「현대시」 동인은 이 시인 말처럼 1930년대 식민지 모더니즘, 1950년대 전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이른바 산업화 초기 모더니즘을 추구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현대시」는 제 3기 모더니즘에 해당하죠. 30년대가 식민지 시대의 억압된 내면(이상)을 노래한다면 50년대는 실존, 존재(김춘수)를 노래하고 60년대는 산업화 초기의 내면, 갈등을 노래합니다. 60년대를 순수/ 참여로 양분한다면 순수파에 속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순수도 참여도 아닌 제 3의 그룹, 중간파로 봅니다. 중간파는 순수 (전통서정시), 참여(현실비판시) 양쪽에서 욕을 먹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죠. 그러나 서구 모더니즘, 아방가르드는 모두 회색이고 중간파입니다. 비유해 말하면 선거를 할 때 투표 행위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회색입니다. 왜 모두 투표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투표 거부, 기권, 포기는 선거와 제도에 대한 부정이고 아방가르드 정신이 그렇습니다. 새로운 예술은 전통을 부정하고 현실도 부정합니다. 「현대시」 동인은 60년대의 외적 현실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내면을 노래하고 이런 내면의식이 현대성과 통합니다. 어느 세대나 그 세대의 몫이 있죠.

이재훈 : 선생님께서는 김춘수 선생의 무의미시론을 계승해서 새로운 시론으로 개척한 시인으로 평가받습니다. 그것이 「비대상시론」입니다. 작고하신 김준오 선생은 모더니즘시론을 조향김춘수이승훈의 계열과 김기림김수영오규원의 계열로 이원화할 수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시적 방법론을 떠나 선생님의 시에 드러나는 내면 정감의 노출구체화는 김춘수보다 김수영과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만, 김수영은 광기의 형태로 드러났다면 선생님께서는 허무의 형태로 드러났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이것은 국소적인 부분이지요. 선생님께서는 김춘수 선생의 영향과 동시대 시인으로 대표적인 모더니스트인 오규원 선생과의 차이와 선생님 시와 시론의 변별성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이승훈:앞에서도 말했듯이 비대상 시론은 김춘수의 무의미 시론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시를 쓰든 그림을 그리든 누구의 영향을 받지 않고는 창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시인들은 이상하게도 나는 누구의 영향을 받았소 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를 쓰는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내 사유가 어디 있습니까 ? 내 생각이라는 게 모두 그동안 읽은 책, 들은 소리들의 쓰레기 아닙니까 ? 그런 점에서 내 사유, 독창성이라는 건 없고 내 사유는 쓰레기들의 재활용입니다. 또 선배가 있어야 후배가 있죠. 그런 말을 하는 시인들은 제대로 공부를 안 했거나 선배에 너무 인색한 사람들입니다. 결국 텍스트가 있는 게 아니라 인터텍스트가 있습니다. 모든 텍스트는 상호텍스트입니다. 문학은 인과성이 아니라 상호성이 중요합니다. 김수영은 30년대 이상의 정신, 아방가르드를 계승하고 나는 이상과 김춘수 사이에 있고 그런 점에서 김수영의 광기, 실험을 옹호하는 입장입니다.

김춘수, 이승훈, 오규원이라? 크게 보면 같은 유파에 속하고 그것은 시에서 의미, 대상, 관념을 부정한다는 특성으로 요약됩니다. 김춘수의 무의미 시론은 관념의 제거를 노리는 이른바 묘사적 이미지에서 자유연상, 통사해체로 발전합니다. 오규원의 날 이미지 시론은 말 그대로 관념의 흔적이 없는 날 이미지를 추구하고 그런 점에서 김춘수의 묘사적 이미지를 발전적으로 계승합니다. 내가 주장한 비대상 시론은 김춘수의 자유연상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지만 나는 자유연상보다 액션 페인팅의 논리, 곧 억압된 무의식의 투사를 강조했습니다. 김춘수가 대상의 재구성, 대상과 이미지의 거리를 강조하고, 이때 대상의 의미, 곧 지시적 의미의 소멸을 강조한다면 오규원 역시 이런 재구성, 곧 대상의 날 이미지를 계속 추구하고 나는 이런 대상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요컨대 김춘수, 오규원은 대상을 전제로 무의미, 날 이미지를 추구하지만 난 출발부터 그런 대상이 없고 따라서 나의 내면, 무의식이 문제였습니다. 시의 경우엔 김춘수는 이상과 정지용 사이에 있고, 오규원은 이상과 김수영 혹은 김수영과 김춘수 사이에 있고 나는 이상과 김춘수 사이에 있습니다.

이재훈 : 모더니즘 시사를 조감해 보면 이상으로부터 시작해 조향, 김춘수에서 김영태, 이승훈, 오규원으로 이어지는 큰 흐름이 있습니다. 그 이후 선생님 세대를 영향받은 후학들의 시세계는 조금 다른 성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영향관계로 따져야하는가 의심이 들 정도이지요. 많이 거론되는 80년대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 등은 자아의 탐색이라기보다 사회성을 가진 의식적 모더니즘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들은 선생님의 작품세계와 일정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90년대 들어서 함기석, 박상순, 송찬호, 박찬일, 김언희 등이 더욱 친밀하게 영향받은 세대가 아닌가 싶은데요. 소위 모던한 시를 쓰는 후학들의 작품세계가 선생님의 영향과 연관짓는다면 어떤 계보와 분류로 특징지어야 할까요?

이승훈:80년대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 외에도 최승호, 기형도 등은 60년대 식의 내면이 아닙니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내면을 드려다 볼 겨를이 없었고 그런 점에서 과격한 모더니스트들입니다. 정치적 모더니즘, 시장 바닥의 모더니즘이죠. 그러나 최승호, 기형도가 온건한 모더니즘이라면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은 아방가르드입니다. 이 시인 말처럼 난 이들 보다는 90년대 모더니스트들이 친척 같아요. 이재훈, 정재학도 이 계열입니다. 이유는 80년대가 외적 현실을 대상으로 한다면 90년대 신세대는 내적 현실, 말하자면 현대인의 악몽을 노래하고 이런 악몽, 그로테스크의 세계는 초기 내 상상력과 통하고 내가 생각하는 우리시의 현대성을 이들이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우리 모더니즘의 제 5기에 해당합니다. 비슷비슷한 시들이 판을 치는 우리 시단에 이만한 개성, 이만한 재주, 이만한 전위를 만날 수 있다는 건 기쁨입니다. 이들은 대체로 30년대 정지용, 김기림의 온건한 모더니즘이 아니라 이상의 과격한 모더니즘, 곧 이상적 아방가르드를 계승하고 그런 점에서 이상의 후예입니다.

이재훈 : 저는 우리 시사의 모더니즘적 특성 중 초현실적인 시적 방법은 실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 예전에 이상 시의 계보를 작성하시면서 분류하신 게 초현실주의의 기법, 다다이즘의 기법, 미래주의의 기법, 입체주의의 기법인데요. 우리의 형식 실험은 다분히 말 그대로 실험의 차원에서 끝난 예가 많습니다. 깊게 들여다보면 형식 이외의 것들은 모두 형식의 무게에 눌려 무위의 경험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지요.

선생님의 시에는 의식이 형식에 구속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고의적으로 시를 작은 사각형 안에 문자를 가두는 형식을 보면, 형식에 대한 깊은 관심을 알 수 있습니다. 시 형식에 대한 선생님의 관심은 선생님 시를 이해할 때 중요한 부분의 하나로 생각되어지는데요.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승훈:실패도 있고 성공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서구의 시적 방법을 그대로 수용할 수 없고 어디까지나 굴절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서구 방법을 모델로, 무슨 공식처럼 적용해선 안되죠. 어떻게 20세기 초 프랑스를 모델로 지금 이 땅의 시를 평가할 수 있습니까 ? 수용은 수입이 아닙니다. 일종의 대화이고 굴절이고 변주입니다. 그건 그렇고 난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고 아니 형식이 내용이라는 입장입니다. 결국 시는 형식, 형태, 스타일이고 그런 점에서 난 형식주의자이고 스타일리스트이고 스타일리스트는 허무주의자입니다. 기댈 곳이 없어요. 현실도 대상도 의미도 본질도 없습니다. 언어가 있어서 시를 쓰고 언어는 현실이 아닙니다. 허깨비, 환상, 떠도는 기표입니다.

그러므로 시가 있는 게 아니라 시라는 형식, 형태가 있습니다. 시는 결국 낱말들을 이상하게 배열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조가 그렇고 자유시가 그렇죠. 그동안 시를 써 오면서 제일 괴로운 건 형태였습니다. 이 시인 말처럼 별 놈의 형태를 다 시도해보았죠. 그동안의 시쓰기는 형태 변화였고 그것은 연구분이 있는 시, 산문시, 연 구분이 없는 단련시, 낱말 하나가 시행이 되는 길고 가느다란 시, 산문시 변형, 사각형 형태, 직사각형 형태, 그리고 최근에는 다시 자유로운 산문시로 변합니다. 형태에 지치고 새로운 형태를 생각하고 다시 지치고 그런 식입니다. 물론 형식과 형태는 다르지만 크게 보면 같고 그러니까 그동안의 시쓰기는 형식, 형태, 언어를 파괴하고 다시 구성하고 다시 파괴하고 다시 구성하는 일. 그러니까 언어 놀이죠. 사는 게 재미 없잖아요 ?

이재훈 : 김춘수 선생의 시적 흐름이 의미에서 무의미로 다시 변증법적 통합을 거친 의미로 되돌아왔다는 것으로 거칠게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선생님께서는 자아 탐구, 자아 소멸로 철저하게 자아와 싸워온 고투의 흔적으로 보여집니다. 대신 변화하는 내면의 운동성을 이성으로 파악해 보려는 의지가 시적 대상의 전이轉移를 통해 보여줍니다. 그러다가 시집 「인생」을 기점으로 선생님의 시세계가 선적인 세계로 옮겨갔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것은 선생님의 사유 활동이 현재 선세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논리를 넘어서서, 선생님의 작품 세계의 새로운 돌파구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선적인 세계가 선생님의 시세계의 새로운 지향점으로 이해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승훈:이 시인 말처럼 김춘수는 의미에서 무의미로 다시 변증법적 통일로서의 의미로 돌아왔습니다. 아니 돌아온 게 아니라 지양되고 발전되었습니다. 나는 자아탐구에서 자아소멸의 단계를 거쳐 이 시인 말처럼 시집 「인생」(2002)을 기점으로 禪의 세계, 선적인 세계로 전환합니다. 아니 전환보다는 발전이나 초월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아소멸, 주체소멸을 주장하면서도 내가 자아로부터 완전한 자유나 해방을 성취하지 못한 것은 언어학, 특히 후기구조주의를 매개로 했기 때문이고 그건 이론이고 따라서 이론과 실천 사이에 괴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불교, 그것도 선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나로서는 너무 늦은 법연이지요. 90년대 후반 어느 봄날 진주 장모님 49제가 하동 칠성암에서 있었고 그때 금강경을 만났고 그때 처음 내가 펼친 부분이 대승정종분이고 거기서 보살은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을 버려야 한다는 부처님 말씀이 나와요. 특히 아상을 버리라는 말씀이 충격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아탐구니 자아소멸이니 하는 게 결국은 아상에 대한 집착이니까요. 자아는 相이고 想이라는 것. 부처님의 이 말씀과 만나고 나서 한결 가벼워지고 그후 無我, 無住, 不二, 空같은 개념들이 내 사유를 지배하게 됩니다. 시집 인생은 이런 사유들을 담고 있습니다. 결국 선이 강조하는 것은 있음/ 없음을 초월하는 공이고 자유이고 해방입니다. 올해 낸 시집 비누에서는 이런 인식을 좀더 자유롭게 노래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자아탐구에서 자아소멸을 거쳐 마침내 자아불이로 발전했고 자아 있음(자아탐구) / 자아 없음(자아소멸)의 대립이 변증법적으로 종합되고 아니 선은 종합이 아니므로 있음/ 없음의 경계를 초월하는 공, 불이의 세계로 나간 셈이지요. 불이나 공은 이런 유/ 무를 초월하는 세계이므로 나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나는 너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不二 사상, 요컨대 무슨 분별, 대립이 지겹습니다. 최근에 쓰는 시들은 시와 삶의 경계를 깨는 작업이고 시와 삶 역시 불이의 관계에 있고 이젠 시를 쓰려는 생각도 버리고 시를 쓰고 아니 밥 먹는 게 시이고 아이들 가르치는 게 시이고 낮잠 자는 게 시라는 생각입니다. 삶과 시의 경계 뿐만 아니라 시와 비시의 경계도 깨야 합니다. 따라서 이젠 삶에서도 시에서도 한 결 자유롭습니다. 요컨대 시는 없고 시라는 것이 있고 이 시라는 것, 정의, 명명도 허상입니다.

결국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바르트는 선에 대해 말하면서 필름을 넣지 않고 셔터를 누르는 카메라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내용, 의미, 기의 없이 사물을 보는 행위지요. 삶에 무슨 본질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까 ? 결국 그저 있는 것, 그저 사는 것, 그저 쓰는 것이지요. 이 그저가 중요합니다. 그저 배 고프면 밥 먹고 술 생각 나면 술 마시고 잠이 오면 자는 겁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쓰고 결국 삶이 시이고 시가 삶입니다. 나는 선을 만나고 시의 새로운 돌파구가 아니라 삶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셈입니다. 그러나 나는 불자도 아니고 그저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는 글쟁이입니다.

이재훈 : 본 대담은 그간 있었던 선생님의 시적 작업을 큰 줄거리를 통해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해 보려는 시도였습니다. 많은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답변에 큰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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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향한 로드 포엠


김명원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 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 장 그르니에



꿈꾸는 자는 머물지 않는다. 꿈꾸는 자는 늘 떠난다. 지혜를 구하여 자신이 열망하였던 이상향에 진입하려는 의지로 시간을 추동시키는 자, 항시 꿈꾸기 때문이다. 이곳에서의 추억과 사랑에 묶이지 않으려는 자, 이곳 너머의 세상에서 새로운 꿈을 꾸려 꿈꾸기 때문이다. 꿈꾸는 자, 그에게 있어 지나 간 과거는 휘발되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아득하며, 오로지 길 위에서의 여정만이 생생한 삶의 실체가 될 뿐이다. 그러기에 꿈꾸는 자에게는 길이 신앙적 도구가 된다. 길 위에서 사색하고, 길 위에서 잠이 들며, 길 위에서 시를 쓴다.

이재훈의 시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에서 시적 자아인 ‘나’는 길을 헤맨다. 꿈꾸기 위해 오르는 ‘산책길’에는 ‘언덕’이 있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오르고 올라도 닿지 않는 거리”에서 “혼을 빼앗긴 것처럼” “늪에 빠진 것처럼” 헤매는 것이다. 그날은 생의 근본적 에너지 원천인 태양을 기리는 날, 그리고 그리스도교에서 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사건을 매주 기념하는 날, ‘일요일’이고,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그는 산책길을 찾고자 하는 행위가 실존에 대한 자각의 장소라기보다는 ‘근원’을 바라는 ‘꿈꾸는 장소’였음을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꿈이 실현될 수 있는 공간인 산책길과 언덕을 헤매다 놓침으로서 인식론적 전환을 꾀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중요한 상징들이 개입하게 된다.

상징이란 하나의 단어나 사물이 지향하는 암시적이면서도 다의성을 띤, 두터운 입체감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신비하고 유기적인 존재로 부상한다. 「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시 전체를 아우르며 문맥 구석구석까지 고루 비춰주는 상징들을 통해 이재훈은 자신 내면에 집적된 고통과 방황의 세월과 꿈의 색채를 드러나게 하고 있다. 여기에는 ‘어둠’과 ‘산책길’, 그리고 ‘빛’이라는 세 가지 상징어가 출연한다.

1. 어둠

길을 잃고 헤매는 화자에게 엄습하는 것은 ‘어둠’이다. 어둠은 빛이 소실된 상태를 일컫지만, 시에서는 어둠이 내장하고 있는 상징으로서의 존재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어둠이 안겨주는 거대한 정적”과 “위대한 침묵”의 지반인 ‘근원’이다. 어둠은 빛의 바탕이며, 빛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등장할 ‘빛’과 현존의 짝을 이룰 것이지만, 어둠 자체에 깊이 드리워진 상징적 의미로서의 심연을 시인은 독자들에게 각인케 하는 것이다. 어둠의 세례를 숙연하게 받는 자, 어둠의 이치를 엄중히 깨달아 숙고한 자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통과하여 빛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리라.

입사 초입 단계인 어둠의 지점에서, 시적 자아는 어둠이라는 묵언의 진리를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알지 못했다/ 상처받은 한 친구를 생각했고/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생각했다”고 자책하고 있다. 결국은 일상적 현실에 묶임으로 진정한 꿈꾸기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조건으로서의 임무를 그르치게 된 셈인데,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바쁜 거리의 일들을 떠올렸”던 연유이다. 어둠에 오롯이 전념하지 못하고, 어둠이 전언하는 메시지를 인지하지 못하였으므로, 이제부터 꿈꾸기 위한 ‘길’을 상실하는 데서 오는 슬픔과 회의가 시작된다.

2. 산책길(언덕)

우리는 무수한 ‘길’의 상징을 기억한다. 인생의 험한 세파를 함의해서 진한 감동을 주었던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의 「길(La Strada)」, 시대적 인식이 처절했던 윤동주의 「길」, 예수가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 십자가를 지고 시련을 겪었던 비아돌로로사, 수난의 상징인 ‘십자가의 길’ 등에서 나타난 길들은 자신이 운명처럼 구현하려는 세계로 향하는 노정이며 피할 수 없는 통로임이 드러난다. 모든 길에는 한숨과 비통과 피눈물이, 그리고 환희의 땀 내음이 얼룩져 있다.

이재훈은 길 위에서 방황한다. 언덕에 오르는 산책길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둠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으므로 꿈꾸는 실현의 장소인 언덕에 끝내 이르지 못할 것임이 자명한데도, “산책길엔 언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위로한다. 또한 “길목과 길목이 혀를 내밀어/ 내 몸을 떠받치고 있을 뿐”이라고 길을 놓친 경위를 길에게 전가한다. 이는 당도하지 못한 자의 궁색한 변명이자 모호한 회의인 셈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열려 있으며, 누구를 막론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길이지만, 아무나 그 길 입구에 들어서서 가고자 열망하는 곳까지 성공하여 가는 것은 아니다. 준비되어 있는 사람만을, 길에 연하여 있는 길을 통하여 끝없는 열망의 정수리까지 걷고자 하는 사람만을 길은 받아들인다. 바로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 않는다”는 신경림의 「길」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제 뜻대로 허락한 사람만을 받아들이는 길 끝, 언덕에는 빛이 있을 것이다. 이 빛은 근원을 비추는 빛이며, 본질을 천착하게 해주는 구원의 빛일 터이다.

3. 빛(불빛, 햇빛, 달빛)

이제 ‘빛’이다. 화자가 길 위에서 헤맨 이유는 빛을 꿈꾸기 위한 제대祭臺로서의 장소에 이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장 그르니에가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빛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고, 마니케이즘에서 주장하듯이 인간 영혼은 타락해서 악의 물질과 섞여 있지만, 지혜가 이를 해방시킨다는 것처럼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고, 그리하여 빛이 상징하고 있는 생명력을 분출하며 생명을 전도하는 빛의 사제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이는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던 자신의 한계와 비루에서 벗어나, 빛을 영접하여 빛으로 현현되는 순간을 꿈 꾼 이유가 된다. 생명을 생명답게 영위해 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이면서, 아름다움을 직접적으로 느끼며 일상에서 야기되는 사물이나 사건들에 환호하거나 분노하는 동적 에너지로 충일되기를 갈망하는 이중 감정을 내재하는 것이다.

빛을 둘러싸고 있는 둥근 상징성의 매체는 세 가지이다. 시의 초반에서 켜져 있었던 상점의 ‘불빛’,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장 그르니에가 쬔 ‘햇빛’, 그리고 언덕이 있는 월곡月谷에 비추고 있는 ‘달빛’이다. 상점의 불빛은 생활의 인접성에서 이루어지는 빛으로 ‘나’에게 ‘빛’을 인지시키는 원인을 제공한다면, 여기서 유추해 내는 ‘햇빛’은 언덕과 연상되어 중첩되는 산타크루즈의 장 그르니에에게 향한 경외를 나타내며, ‘달빛’은 부활과 재생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신을 향한 구원의 메시지를 채록한다.

이재훈은 이 시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려면 어둠의 세계에서 길을 몸소 자기화하여 고행을 실행하는 자, 빛에 들 수 있음을 우수 어린 어조로 눈부시게 노래하고 있다. 언제인가는 현실의 무게에서 헤매는 시적 자아가 진정으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꿈꾸던 바로 그것, “언덕을 오르고/ 또 한 언덕을 오르면/ 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을 반드시 만나게 되길 바란다.

_ <현대시>, 200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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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말


탈장르, 탈문법의 새로운 시적 전망



이재훈




최근 우리 시는 전망의 부재에 시달리고 있다. 시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담론은 물론이거니와, 문학 내부가 공동으로 용인하는 시적 지향점도 아득하기만 하다. 시의 위기나 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이제 지지부진한 구태의 선정적인 담론이라고 누구든 말하지만, 문학 외부에서 바라보는 완고한 시선에는 아직도 자유로울 수 없다. 비교적 내외적 자본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시 장르의 경우, 일반 독자층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는 가장 풍요로운 담론의 장을 형성해 왔다. 담론의 역할을 풍성하게 채워줄 작품 또한 활발하게 생산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담론과 함께 시 또한 정체되어 있다는 감응을 지울 수 없다. 많은 문예지들의 기획은 새로운 것보다 이미 했던 것의 다른 제목일 뿐이며, 최근 시단을 풍요롭게 했던 ‘미래파’의 논제들도 더 나가야 할 지점을 찾지 못하고 발목이 묶여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동안 시단에서 제기되어 왔던 시 장르의 외연 확장에 대한 평자들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현재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작품은 기존의 전통적인 시 장르의 문법을 전복하는 언어를 보여주고 있다. 산문과 시의 경계를 아슬하게 넘나드는 시 언어의 생산은 이미 보편화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가장 최근 등단하는 시인들의 언어가 대개 이러한 시적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을 보면 더욱 확연하다. 이번 기획에서는 새로운 시 문법의 생산을 평가가 민첩하게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앞으로 탈장르, 탈문법의 시적 언어가 어떠한 전망을 갖게 될 것인지를 살펴본다. 평자들의 진단과 전망에 대한 사유를 통해 시의 언어가 가야 할 또다른 자리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유성호는 최근 우리 시의 지형에 대한 진단과 앞으로의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우리 시가 새롭게 구축해가야 할 시적 논리(logic)”로 “반항구적인 생명력을 갖춘 기율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라 말하면서 이를 ‘비극성’과 ‘전망’의 범주로 풀어내고 있다.

이형권은 시의 탈장르, 탈문법 현상에 관해 꼼꼼한 분석을 하고 있다. 그는 “원심적 진화, 즉 요즈음의 젊은 시인들이 외계적 언어를 활용하여 기이한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 언어적 징후들”을 포착해 내어 이들의 언어와 상상력에 대한 미래적 가치를 사유하고 있다. 시가 가진 전위의 정신이 시의 궁극인 시성의 회복과 맞물린 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진단하고 있다.

우리는 이 기획이 단발성의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 활발한 담론의 장이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_ <현대시>, 200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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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 시인, 이형기 편 - 주제로 읽는 현대시 산책 ①


허무의 시인 이형기



이재훈(시인)





지난 2008년 7월 12~13일 이틀 동안 이형기 시인의 고향인 경남 진주에서는 제1회 이형기문학제를 개최했다. 이형기 문학세미나, ‘불멸의 시인 이형기’라는 주제의 시극(詩劇) 공연, 청소년 시낭송 대회, 대금 산조, 허튼 춤 사위, 음유 시인의 축하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로 이형기 시인을 추억했다. 이형기 시인에 대한 조명과 평가는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경남 진주는 시인 이형기의 고향이자 문학의 원적지(原籍地)이다. 이형기는 진주농림학교 재학 시절 당시 16세의 나이로 제1회 개천예술제(1948년)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다. 차상은 박재삼 시인. 백일장 심사위원은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등 한국 문단의 기라성 같은 시인이었다. 이 개천예술제는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개최되고 있다. 이형기는 최연소 등단이라는 이색적인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1950년 17세의 나이로 <문예>지에 <비오는 날>이 추천되어 등단한다. 추천위원은 초회에 문학평론가 조현연, 2회 추천에 미당 서정주, 3회 추천완료는 모윤숙 시인이 했다. 이 최연소 등단기록은 아직도 문단에서 깨지지 않고 있다. 이형기는 1941년 진주 요시노(吉野) 소학교 시절부터 소설 미치광이로 불리며 문학적 재질을 드러낸 시인이다. 동국대학교를 졸업한 뒤 언론사에 20여 년 간 몸담다가 동국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지냈다.

시인 이형기(1933~2005)의 이름 앞에는 늘 ‘문학 청년’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영원한 문학청년 이형기. 그는 작고할 때까지 문학에 대한 열정과 천재의식을 놓치지 않은 대시인이었다. 초기의 전통적 자연 서정의 세계, 중기의 주지주의적인 날카로운 감성과 새로운 언어 미학의 세계, 후기의 생태학적 고발과 문명비판의 세계로 변화하며 끊임없이 자기갱신을 한 시인이다. 이형기의 시세계 전체를 통어하고 있는 세계는 바로 ‘허무’라고 할 수 있다. 이형기의 ‘허무’는 초기시에서 후기시로 갈수록 다른 방향으로 펼쳐진다. 초기시에서는 자연의 순환원리를 통해 인생의 무상함과 허무를 깨닫는 달관의 견지와 같은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후기시로 갈수록 실존적 허무로 성격이 바뀐다.
이형기 하면 떠오르는 시가 바로 전 국민의 애송시인 <낙화>이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낙화> 전문

위의 시는 가야할 때를 깨닫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치인들을 향한 경구로도 읽히고, 모주꾼이 술집에서 술값을 치르지 않기 위해 도망갈 때 읊는 유머로도 읽는다. 또한 존재의 조락(凋落)을 통해 죽음과 실존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스펙트럼이 넓은 시이다. <낙화>에서 중요한 부분은 ‘결별’을 ‘축복’으로 인식하는 지점에 있다. 존재의 결별이 또다른 탄생의 미학을 낳는다는 창조적 인식이 시를 지배하고 있다. <낙화>는 이형기의 초기시가 가진 ‘허무’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는 시이다.

진주시 신안동 공원에 있는 이형기의 ‘낙화’ 시비 ⓒ 이재훈


흔히들 이형기를 가리켜 ‘허무의 시인’이라고 한다. 이형기의 시적 세계관의 핵심은 ‘허무의식’에 있다. 그의 허무는 두 가지의 근거를 통해 발생되었다. 하나는 이형기가 경험한 근대적 자본주의와 문명체험이 허무의식을 갖게 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인간의 본성이 변화되어 가는 사회적 현상을 목도했으며 인간성 상실의 위기의식을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또 하나의 근거는 스스로의 시적인 자각을 통해 이루어진 세계관이라는 점이다. 이형기는 끊임없이 자신의 시적 세계관을 회의하고 갱신하면서 몇 번의 시적실험을 거친 시인이다. 그러한 세계관의 변화는 다양한 독서체험과 시에 대한 갱신의 노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즉 이형기가 도달한 ‘허무’는 생성과 소멸의 끊임없는 과정의 변증법적인 인식이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시의식이다. 허무를 통해 새로운 창조적 세계를 꿈꾸는 허무의 시인 이형기. 그의 시가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의미로 점점 깊이 와 닿는 계절이다.

_ <논산문화>, 2008년 가을호

:
2007 신년호 - 강은교

2007 봄   호 - 김승희

2007 여름호 - 최승자

2007 가을호 - 김혜순

2008 신년호 - 박용래

2008 봄   호 - 신동엽 

Posted by 이재훈이
,

국학자료원. 23,000원. 양장본. 290쪽




























[책소개]

"급하고 좁은 눈으로 바라본 작품의 세계는 어느 순간, 멀리서 뒤돌아보았을 때 그동안 보지 못했던 밑그림을 선사해 줄 경우가 많다. 또한 전혀 논리적 맥락이 필요하지 않는 시의 언어도 있으며, 간혹 시의 언어가 논리적 해석을 강력히 거부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그러나 시를 비평하는 행위는 결국 시가 가진 형식이나 내용의 한 지점을 붙잡고 의미를 불어넣는 일이다. 논리성이 필요없는 시에 대해서도 일정한 논리를 불어넣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를 바라보는 가슴과 머리가 서로 길항하고 공모하는 가운데 배태된 언어들이 이 책에 가득 고여 있다. 그 속에서 시가 가진 언어의 몸을 이곳저곳 눌러볼 수 있었다. 필자의 글은 어쩌면 가치평가나 의미부여 혹은 비판과 해석의 궁지에서 헤어 나오려는 몸부림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 <책머리에> 중에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라는 개성있는 시집으로 시단에 활기를 불어 넣은 바 있는 이재훈 시인의 첫 번째 문학평론집. 이재훈 시인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현재 시단에서 활발한 비평 활동도 함께 하고 있다.
젊은 시인의 눈으로 본 시읽기는 과연 어떠한 탐색, 증언, 풍경으로 이어질까. 이번 평론집에서는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시의 풍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시인의 감수성으로 시를 새롭게 바라보려는 흔적이 책의 곳곳에 남아 있다. 날 서 있거나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고 있는 비평의 언어는 아니지만 감수성 있고 풍부한 수사를 가진 비평적 언어가 매력이다. ‘딜레마’는 창작행위와 비평행위 사이에서의 고민에서 비롯한 상징적 언어이다. 이재훈은 시를 읽고 이해하고 가치평가하는 과정 중에서 논리적 전개가 아닌 감상적 직관이 자꾸만 글 속에 개입함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논리적 맥락으로 시를 읽어야 하는 이중의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번 책에서는 이러한 딜레마들을 극복해가면서 성실한 시읽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저자 약력]

1972년 강원 영월에서 출생했다. 1998년 「현대시」 신인상에 <수선화>외 4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연구서로 <현대시와 허무의식>이 있다. 현재 「현대시」편집장, 「시와세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중앙대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중앙대, 경기대, 열린사이버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건양대, 서울산업대에에서 강의하고 있다.

[구성]

1부는 탐색(探索)의 장이다. 한국 현대시의 공시적 단면을 조감하거나 주제론을 다룬 글들이다. 먼저 1970년대 시문학을 다룬 글이다. 산업화시대라고 말하는 70년대 시문학을 극복의 과제와 새로운 활로를 찾는 관점으로 파악했다. 다음으로 1950~60년대 시 중에서 모더니즘 시를 다룬 글이다. 모더니즘의 계보 속에서 50~60년대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를 구체적인 텍스트 분석을 통해 해명한 글이다. 기독교적 상상력을 다룬 글은 현대시에 기독교적 세계관을 구현한 중요한 시인들을 중심으로 그 형상화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2부는 증언(證言)의 장이다. 증언은 현장에서 발표한 시에 대한 나름의 분석보고서이다. 계간평이나 월평을 통해 2000년대 이후에 잡지의 현장에서 발표된 시편을 탐색한 글들이다. 최근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개성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3부는 풍경(風景)의 장이다. 시집 해설이나 서평 혹은 한 시인의 시세계를 다룬 글들을 모았다. 김영태, 이윤택, 김백겸, 김영남, 배용제, 위선환, 장석원 등을 비평하고 있다. 각 시인들은 저마다 개성있는 어법과 세계관으로 자신의 집을 짓고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시 풍경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제1부 탐색
근대라는 딜레마, 혼돈의 질서
부정과 극복의 시학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기독교적 상상력

제2부 증언
새로운 증언의 목소리들
변신과 귀환
일상성의 몇 가지 양상과 전망
구멍의 시학
언어의 사원과 불멸의 노래
삶과 죽음이라는 운명의 변증법
풍경의 미학적 전거(典據)들
성찰의 풍경

제3부 풍경
무욕(無慾)과 정적(靜寂)의 세계 - 김영태 시집 『누군가 다녀갔듯이』
야성의 회복과 상생(相生)의 세계 - 이윤택 시집 『나는 차라리 황야이고 싶다』
비밀정원을 향한 영혼의 모험 - 김백겸의 시세계
성찰의 시학 - 김정희 시집 『세상을 닦고 있다』
치유와 구원의 시학 - 이원로 시집 『모자이크』
꽃과 신(神)의 기호 찾기 - 전길자 시집 『꽃의 기호』
자연의 전사록(轉寫錄) - 유승도 시집 『차가운 웃음』
유폐된 원형의 꿈과 그리움의 시학 - 윤지영 시집 『물고기의 방』
'흥'의 시학 - 김영남 시집 『푸른 밤의 여로』
소멸의 자리에서 진화하는 生의 감각 - 배용제 시집 『이 달콤한 감각』
기원(起源)과 관계의 시학 - 박강우 시집 『병든 앵무새를 먹어보렴』
관통의 수사학 - 위선환 시집 『새떼를 베끼다』
'검은 새'의 알과 아프락사스 - 장석원 시집 『아나키스트』
몽상의 감각들 - 박장호의 시세계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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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 - 이재훈(1972~ )

내 몸은 미끈한 살덩이였다. 푸른 잎사귀에 숨은 청개구리처럼, 천형을 가진 작은 울음이었다. 봄이 되자 몸이 조금씩 부풀어올랐다. 탕자의 우리 속에서도, 소문 무성한 저잣거리 에서도, 밟히지 않고, 물도 먹고, 햇살도 받았다. 미치도록 긴 가뭄이 찾아왔을 때, 내 살갗이 벗겨졌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가시가 솟아나왔다. 나도 모르게 자꾸 어딘가를 찌르고 싶도록 붉게 성난 가시. 그러나 난 그 가시를 감춰야 했다. 매일매일 가시를 깎아냈다. 미끈한 살덩이 속에서 가시들이 서로를 찌르는 소리. 아침에 일어나면 검은 피 먹은 가시가 턱밑으로 삐져나와 있다. 




빗소리를 들으며 잔다. 빗소리를 듣기 위해 자는 것인지 자기 위해 빗소리를 듣는 것인지. 나방이 유리창에 제 몸을 찧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잔다. 간혹 꿈의 껍질을 두드리는 비명소리. 내 최초의 몸은 미끈한 살덩이. 천형을 가진 작은 울음. 푸른 잎사귀에 숨은 청개구리. 기억을 달래주며 내리는 비가 평화의 모체가 되듯, 꿈에 비명이 가시기를 바랐다. 그러나 빗소리 그치고 긴 가뭄이 찾아와 벗겨진 살갗과 어딘가를 찌르고 싶은, 붉게 성난 가시. 감추고 깎아내도 마침내 가시끼리 서로 찌르는 도저(到底)한 분노. 생의 근육이 빠져나가는 밤. 자존(自尊)에 박힌 가시 흉스럽게 가문 밤에 곤두서고, 죄를 덮는 사랑은 오지 아니하여 완전한 사람이 되지 못할 때, 두려움 없이 만드는 용서는 어디에 있는가. 기적이 세계를 목 놓아 불러 평화를 부를 때 검은 피 먹은 가시 끝끝내 턱밑으로 삐져나오고 있는데.  <박주택·시인> _ 2008.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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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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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훈(dreamjam)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김경락 ▶ 엇
사회자 ▶ 어서오세요 이재훈 시인님
박판식 ▶ 안녕하세요, 이재훈 형
푸른저녁 ▶ 안녕하세요, 이재훈 시인님.
문옥진 ▶ 안녕하세요
푸른저녁 ▶ ㅎㅎ
사회자 ▶ 드디어 오셨습니다.
김경락 ▶ 재훈형이다..
김경락 ▶ 술먹자고 전화할려고 했더니
이현미 ▶ 안녕하세요.. 시인님
김경락 ▶ ;;
이재훈 ▶ 안녕하세요..~`
리브카 ▶ 반갑습니다
사회자 ▶ 이재훈 시인님
사회자 ▶ 글자색 변경 부탁 드립니다.
이재훈 ▶ 반갑슨니다
사회자 ▶ 그리고 한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사회자 ▶ 개인적인 호칭은 잠시 아껴 두시고 오늘은 공식적인 호칭으로
사회자 ▶ 시인님으로 호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리브카 ▶ 동의합니당
♤ 곽성진(acepens)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동호 ▶ 넵
박판식 ▶ 네, ^^
사회자 ▶ 그리고 오늘 체팅은 어려운 시를 이미지를 통해서 감각적으로 써 내듯이
이재훈 ▶ 네~~
김경락 ▶ 넵
박판식 ▶ 곽성진님 안녕하세요..
사회자 ▶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쉽고 재밌게 풀어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채효석(bornfre)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곽성진 ▶ 반갑습니다.
사회자 ▶ 그럼 인사하는 시간으로 좀더 쓰겠습니다.
박판식 ▶ 네, 반가워요 곽성진님
이재훈 ▶ 안녕하세요...
사회자 ▶ 이재훈 시인님은 지금 막 들어오셨으니 한번 훌훌 둘러보시고
사회자 ▶ 인사들 나누십시요
채효석 ▶ 안녕하세요..
사회자 ▶ 아!~
사회자 ▶ 제 인사가 빠졌습니다.
이재훈 ▶ 반갑고..박판식시인도 오랜만이고..~^^
사회자 ▶ 저는 오늘 사회를 맡은 조용숙입니다.
김경락 ▶ 짝짝짝
사회자 ▶ 참고로 제가 오타를 엄청 많이 칩니다. 너그러운 이해를 구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이재훈 ▶ 반갑습니다..조용숙 선생님~
사회자 ▶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시이님 ^.~
박판식 ▶ 네 잘 부탁드립니다, 조용숙 선생님^^
♤ 이재훈 (dreamjam)님께서 퇴장하셨습니다.
♤ 푸른저녁 (poetone)님께서 퇴장하셨습니다.
사회자 ▶ ^.^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박시인님
사회자 ▶ 윽!~
♤ 푸른저녁(poetone)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사회자 ▶ 이시인님께서 당황하셨나 바로 나가버리시네요
사회자 ▶ ㅎㅎㅎ
♤ 이재훈(dreamjam)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사회자 ▶ 다시 환영합니다.
이현미 ▶ ㅋㅋㅋ
사회자 ▶ 푸른 저녁님도 환영합니다.
이재훈 ▶ 죄송합니다..긴장해서
사회자 ▶ 그 모습이 더 아름다워서
박판식 ▶ 그러게 저처럼 미리 와서 시험해보시지,
사회자 ▶ 100점 추가로 드립니다. ^^
사회자 ▶ 하하하
사회자 ▶ 오늘 느낌 아주 좋습니다.
이재훈 ▶ 감사감사~
사회자 ▶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오늘 기대되지 않나요?
박판식 ▶ 채팅 한 이후로 처음 손바닥에서 땀나네요,
사회자 ▶ 한마디씩 안하시면 수업 시작 안합니다.
이재훈 ▶ 하이텔 통신 이후로 채팅이 처음이라
사회자 ▶ 오늘 오신 회원님들은 필히 한마디씩 신고식을 해 주십시요 ^^
이재훈 ▶ 이제 좀 괜찮습니다
사회자 ▶ ^^
옥매듭 ▶ 안녕하세요 두분 시인님 반갑습니다 ^&^
이재훈 ▶ 반갑습니다..옥매듭님~
김경락 ▶ 안녕하세요...저는 이재훈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입니다
푸른저녁 ▶ 아, 저는 대전에서 시를 쓰고 있는 박진성이라고 합니다. 두 분 시인 만나뵙게 되어 너무 반갑습니다. ^^;
리브카 ▶ ㅋㅋ
이재훈 ▶ 감사합니다~
리브카 ▶ 모두 반갑습니당
이재훈 ▶ 하하 박진성 시인님~
김경락 ▶ (아..박진성 시인도 좋아합니다..)
김경락 ▶ ;;
동호 ▶ ㅋㅋ
푸른저녁 ▶ ㅎㅎ
추워요ㅠㅠ ▶ 시를 좋아하는, 그러나 현대시는 좀 어려워하는 독자입니다
추워요ㅠㅠ ▶ 꾸벅
추워요ㅠㅠ ▶ 현대시라고 하면 너무 포괄적이지만...^^;
♤ 설국(poempark)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푸른저녁 ▶
사회자 ▶ 와~ 오늘 성적 팍팍 올라갑니다. ^^
사회자 ▶ 어서오세요 설국님
푸른저녁 ▶ 소주 한잔씩 드시고 긴장 푸시지요.
푸른저녁 ▶ ㅎㅎ
은빛날개 ▶ 벌써부터 술을...
사회자 ▶ 푸른저녁님!~
은빛날개 ▶ 하하
추워요ㅠㅠ ▶ ㅋ
사회자 ▶ 술값 넉넉하신가 봅니다.^^
이현미 ▶ ㅎㅎㅎㅎ
푸른저녁 ▶ ㅎㅎㅎ
박판식 ▶ 설국님 안녕하세요, 닉네임에 시가 들어간 예사롭지 않은 분^^
이재훈 ▶ 술마시고 싶네요
사회자 ▶ 이방은 안주발 세우는 방입니다.
추워요ㅠㅠ ▶ 근데 소주병뚜껑이 붉은 색... 그 옛날 진로처럼..
설국 ▶ 헉
푸른저녁 ▶ 설국님 소개 부탁드려요~
설국 ▶ 반갑습니다.
푸른저녁 ▶ ㅎㅎ
사회자 ▶ 안주는 오징어와 땅콩 순대 이런거 말고 크리스마스 케익으로 넣어 주십시요
박판식 ▶ 글자색도 못바꿔서 저는 쩔쩔맸는데, 박진성 시인의 개인기를 보니^^
사회자 ▶ 잠시 후에 공식적인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리브카 ▶
사회자 ▶ 와!~
푸른저녁 ▶ 큭. 저는 글자색을 바꾸면 안됩니다.
박판식 ▶ 리브카님까지!
푸른저녁 ▶ ㅡ.ㅡ;
사회자 ▶ 리브카님 촛불이 부족해요
사회자 ▶ ^^
김경락 ▶ (저 술은..빼갈 같다는..)
리브카 ▶ v
사회자 ▶ 두분 시인님!~
이재훈 ▶ 제 글자색이 좀 튀는 것 같은데..
푸른저녁 ▶ 설국님은 부끄러움이 많으셔서... 설국님은 시를 쓰는 박정석, 이라는 분입니다.
설국 ▶ 아닌데요...
사회자 ▶ 혹 준비하신 강의 내용이 있으신지요?
설국 ▶ ㅋㄷ
박판식 ▶ 반가워요, 박정석 시인..
이재훈 ▶ 박정석 시인님~
이재훈 ▶ 반갑네요
설국 ▶ 아...네 방갑습니다
설국 ▶ 지송해요..속일려는 뜻은 절대 없었씀다
박판식 ▶ 속이고 있어도 괜찮은데, 좋잖아요, 재밌고
이재훈 ▶ 준비한 강의보다 그냥 편안한 분위기가 좋을 것 같아서요
설국 ▶ 푸른저녁땜시 들통났네요.
사회자 ▶ 그럼 편안한 대화 형식으로 가는것으로 하겠습니다.
푸른저녁 ▶ 오늘 강의 기대가 많이 됩니다.
이재훈 ▶ 강의를 하라면 하겠지만서도..^^
사회자 ▶ 수업에 앞서 진지한 질문은 용광로에서 녹여서 솜사탕처럼 해 주시고
사회자 ▶ 대답과 질문은 중학교 수준으로 맞춰 주실것을 간곡히 부탁 드립니다.
사회자 ▶ 그리고 참석하신 회원님들께서는 자판이 쉬지 않도록
이재훈 ▶ 알겠습니다~~ㅎ헤
사회자 ▶ 꼭 한마디씩은 해 주실 것을 부탁들비낟.
푸른저녁 ▶ 두 분 다 박사이십니다!
사회자 ▶ 부탁드립니다.
박판식 ▶ 아닙니다, 박사과정입니다, 그것도 무늬만,
이재훈 ▶ 괜한 말을..거참~
사회자 ▶ 그럼 오늘은 박판식시인님과, 이재훈 시인님을 모시고 독자와의 만남 시간을 시작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 ▶ 궁금했던 질문들 아낌없이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재훈 ▶ 안녕하세요. 저는 시 쓰는 이재훈입니다.모두들 반갑습니다~
문옥진 ▶ 네.. 반갑습니다.
♤ 블새(kmrsky8018)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김경락 ▶ 네...짝짝짝
이현미 ▶ 방가방가
박판식 ▶ 안녕하세요 블새님, 불새 아니죠?
이현미 ▶ ㅋㅋㅋ
블새 ▶ 네 ..반갑습니다
이재훈 ▶ 제가 입출력이 좀 늦으니 이해 부탁드려요~
이현미 ▶ 입출력이라고 하니 꼭 기계같아요..^^
김경락 ▶ 질문해도 되나요?
사회자 ▶ 네에 하십시요 김경락님!~
김경락 ▶ 두 분께...음..술 먹고 시 쓰신적 있으신지..;;;;;
리브카 ▶ zz
리브카 ▶ ㅋ
김경락 ▶ (죄송합니다.~);;;
이재훈 ▶ 술 먹고 많이 씁니다..써먹지 못해서 그렇지..^^
박판식 ▶ 저도 술 먹고 자주 씁니다, 솔직히
박판식 ▶ 지금도 입술이 근질근질
동호 ▶ 그럼 또 다음날 부끄럽고 그러신지.. ㅎㅎ
김경락 ▶ 아휴...솔직한 답변 감사합니다..ㅎ
이재훈 ▶ 다음날 지우거나 버리거나..
이재훈 ▶ 어쩔땐 이걸 내가 썼나,,의심들 때도
사회자 ▶ ^^
이재훈 ▶ 있지만, 몇 구절들은 남겨두기도..
박판식 ▶ 저는 일기나, 낙서로 시 쓰기 때문에 버리진 않구, 그냥 냅둡니다
박판식 ▶ 늘 부끄럽죠,
김경락 ▶ 아..그렇군요..
푸른저녁 ▶ '새로운 세대'라고 하면 대략 범주를 어떻게 잡아야하는지요?
이재훈 ▶ 헉~낙서이기엔 범상치 않던걸요~
사회자 ▶ ^^
이재훈 ▶ 딱히 범주는 없다고 봐야 할 것 같네요
이재훈 ▶ 세대론으로 규정할만한 틀이 현재 무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호 ▶ 박판식 시인 시의 종결어미는 대개 -였다, -다, 로 끝나는데, 언뜻 딱딱하고 차가운 느낌도 들어요. 실제 말투는 어떠신지?
박판식 ▶ 박진성 시인께 물어보면 압니다..
이재훈 ▶ 나이보다는 작품의 새로움으로 봐야할 듯 싶습니다
박판식 ▶ 여자 대할 때와 남자 대할 때가 다르답니다.
푸른저녁 ▶ ㅎㅎㅎ
사회자 ▶ 와!~
리브카 ▶ 하하
김경락 ▶ ㅎ
사회자 ▶ 정답
이재훈 ▶ 저도..~^^
리브카 ▶ 그럼 시를 쓸 땐 남자를 대하듯이? ㅋ
박판식 ▶ 전 아닌 것 같은데, 뭐 박진성시인이 그러니 맞을지도_._
사회자 ▶ 그럼 혹시 일기나 낙서를 한다고 하셨는데, 간혹 연애 편지도 쓰시는지?
푸른저녁 ▶ 궁금하면, 제가 만나서 재연을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리브카 ▶ ㅋㅋ]
사회자 ▶ ^^
박판식 ▶ 늘 씁니다, 부칠 수 있는 것도 부칠 수 없는 것으로 분류도 하고
사회자 ▶ 혹 제 멜 주소 알려 드림 안될까요? ㅋㅋㅋ
사회자 ▶ 잠시 엉뚱 버전이었습니다.
이재훈 ▶ 저도 최근까진 썼습니다만.
박판식 ▶ 펜으로 쓴 지 참 오래됐네요,
리브카 ▶ 연애편지라는 단어, 참 오랜만에 듣는 듯...
사회자 ▶ 학창시절에
사회자 ▶ 펜팔 왕이었는데
리브카 ▶ ㅋㅋ 그랬을 것 같아요
리브카 ▶ 대필 전문
사회자 ▶ 그 시절이 엄청시리 그리워질라 그럽니다
사회자 ▶ 어떻게 알았죠 리브카님
사회자 ▶ ^^
리브카 ▶ ㅋㅋ
사회자 ▶ 그럼 잠시 한단계 올라가서 질문을 드립니다.
사회자 ▶ 두분 시의 근원지는 어디인지
사회자 ▶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박판식 ▶ 저는 한 단계 못올라 가겠는데요, 연애 감정에서 나오기 땜에
이재훈 ▶ 어려워요~
사회자 ▶ 아!~ 제 질문을 한단계 올렸다는 말이었는데
사회자 ▶ 오독이 있으셨던것 같습니다.
사회자 ▶ 연애 감정이야 말로 가장 높은 경지겠지요
사회자 ▶ 다른분 질문 해 주십시요
이재훈 ▶ 맞습니다~
박판식 ▶ 네~ 오독이 제 전문분야에요, 들켰네요..
이재훈 ▶ 예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이재훈 ▶ 어쩔땐 내가 시를 쓰는 게 아니고 누가 찾아오는 것 같다고~^^
사회자 ▶ 그분이요? ^^
이재훈 ▶ 네.
사회자 ▶ 시마
사회자 ▶ ^^
사회자 ▶ 은빛날개님!~
이재훈 ▶ 시마.뮤즈...등등
사회자 ▶ 이름이 참 고우십니다.
사회자 ▶ 질문 하나 해 주시지요?
사회자 ▶ 불새님!~
블새 ▶ 넵
사회자 ▶ 자꾸 쳐다보면 개구리 눈 되거든요
블새 ▶ ㅎㅎㅎ
사회자 ▶ 질문 하나만 해 주시지요
사회자 ▶ 가령 교생선생님이 첫 부임해 오시면 하는 질문 있잖아요
이재훈 ▶ 박시인님~피씨방은 채팅할만한가요?
박판식 ▶ 너무 강요 마세요? 땀 흘릴듯..
사회자 ▶ ^^
박판식 ▶ 네 좋아요, 공기도 좋고 소음도 좋고 예쁜 카운터 아가씨까지,
사회자 ▶ 윽!~
이재훈 ▶ 저보다 좋네요..
문옥진 ▶ ㅎㅎㅎ
푸른저녁 ▶ 에이~ 설마 신혼집보다 피씨방이 좋겠어요?
푸른저녁 ▶ ㅎㅎ
사회자 ▶ ^^
은빛날개 ▶ 어디가 신혼집인가요?
이재훈 ▶ 무슨 소릴~~
푸른저녁 ▶ 이재훈 시인 결혼한지 두 달 되셨습니다.
은빛날개 ▶ 으아
사회자 ▶ 와!~
추워요ㅠㅠ ▶ 부럽..
사회자 ▶ 꿈결같겠습니다.
추워요ㅠㅠ ▶ ㅋㅋ
사회자 ▶ 그럼 박시인님은?
푸른저녁 ▶ 박판식 시인 장가가세요~
이재훈 ▶ 부끄럽다..에고~
박판식 ▶ 축하드려야할지, 위로드려야할지, 훗 ^^
사회자 ▶ ㅎㅎㅎ
리브카 ▶ 이시인님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신다 들었는데, 어떤 강의를 하시나요?
이재훈 ▶ 아, 예.그냥 교양과 시론을 합니다~
이재훈 ▶ 참고로 날나리 강사입니다.
사회자 ▶ 전 특히 교양이 부족한데, 교양충전 받으러 가야겠습니다.
리브카 ▶ 날나리 강사가 가장 사랑받는 법인데...
사회자 ▶ 예로부터 날라리 강사를 최고로 치던데요
사회자 ▶ ^^
리브카 ▶ 시론 수업에 교재도 있나요?
이재훈 ▶ 뭐..사랑은 아니고, 매니아는 있습니다.
사회자 ▶ 직업정신을 발휘해서 그럼 두분 시인님께서 시를 쓰게 된 계기가 있을것 같은데
사회자 ▶ 차근 차근 말씀을 풀어 주십시요
이재훈 ▶ 교재 있고요~
이재훈 ▶ 방황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박판식 ▶ 전 재수했는데, 대학와서 이성복, 기형도 읽고 충격받아서 시작했어요
푸른저녁 ▶ (이재훈 시인 등단작이 '수선화'라고 알고 있는데, 그 시를 아주 잘 읽었습니다. 이번 시집에서요.)
이재훈 ▶ 아, 감사..합니다~
김경락 ▶ 질문입니다..
김경락 ▶ 이재훈 시인에게..
김경락 ▶ 전 회사를 다니고 있는데
김경락 ▶ 일반독자에게
설국 ▶ 전 박판식 시인의 '하관'과 '장지'란 시를 좋아합니다.(개인취향)
푸른저녁 ▶ 박판식 시인 석사논문이 이성복 선생에 관한 것으로 아는데, 이성복 시인에 대해 남다르시겠네요.
김경락 ▶ (짤렸군요..)ㅎ
사회자 ▶ ^^
리브카 ▶ (계속 말씀하세요^^)
사회자 ▶ 계속 하시죠 김경락님
박판식 ▶ 큿 김경락님 얘기부터 듣죠, 시인님들..^^*
김경락 ▶ 아...동료중에..기독교 신자가 있어서..
김경락 ▶ 제가 아는 시인중에 기독교 신자인데..
김경락 ▶ 시집을 냈다고
김경락 ▶ 순례라는 시를 읽어보라고 권했더니
김경락 ▶ 그 사람 하는 말이
김경락 ▶ 아..이 사람 정말 기독교인 맞나..
김경락 ▶ 라고 하더라구요
김경락 ▶ 시인에게..종교와..시는..어떤 것인지..
김경락 ▶ 궁급합니다
이재훈 ▶ 저는...날나리 기독교인입니다.~^^
사회자 ▶ ^^
김경락 ▶ 날라리라면..부정할수도 있다는?
이재훈 ▶ 신의 존재를 부정하진 않습니다~다만,
사회자 ▶ 겸손하게 표현하신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경락님
김경락 ▶ 네
김경락 ▶ ㅎ
이재훈 ▶ 아직 더 방황하고 싶은 것 같아요..제가,
박판식 ▶ 저는 종교는 없는데, 신은 믿습니다, 온갖 잡신들이 지금도 주위에 가득하지 않나요^^
이재훈 ▶ ^^~
사회자 ▶ 저도 그런디
박판식 ▶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큰 슬픔이 오면, 신이 내린다더군요
사회자 ▶ 윽!!~
사회자 ▶ 감동멘트 입니다.
박판식 ▶ 저는 주변에 신 내린 사람이 몇 있어서..
이재훈 ▶ 저도 기도원에서 귀신들린 자를 직접 봤습니다..
사회자 ▶ 으악!~
사회자 ▶ 그럴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이재훈 ▶ 너무 무서웠죠~^^
사회자 ▶ 그럼 두분 시인님들께서는 습작기때 어떤 부분이
사회자 ▶ 가장 힘들었는지 말씀해 주십시요
사회자 ▶ 또 힘들때 어떤 힘으로 견뎌냈는지도 궁금합니다.
이재훈 ▶ 그때 제 주변은,
이재훈 ▶ 이태원 밤무대나가는 친구의 자취방과
이재훈 ▶ 백수건달의 시절이어서
이재훈 ▶ 문학을 얘기하고 고민할 친구가 없었다는..외로웠다는..헤헤
사회자 ▶ ^^
박판식 ▶ 큿, 시는 제 삶의 잉여물 같은 거라, 위로만 됐지 저한테 해를 끼친 적이 없어서
설국 ▶ 친구들도 외로웠을 거예요, 재훈형
설국 ▶ ㅋㅋ
사회자 ▶ 와!~
사회자 ▶ 해를 끼친 적이 없다라는 말이
사회자 ▶ 참 멀게만 느껴집니다.
이재훈 ▶ 맞아요~..그래서 눈물나게 그립죠
박판식 ▶ 노래와 춤이 그렇듯이요, 슬퍼도 기뻐도 좋지 않나요..
사회자 ▶ 일차적으로는 주량을 대폭 증가시켜 놓은 점이
사회자 ▶ 저에게 가장 해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
이재훈 ▶ 하하..인정~
사회자 ▶ 혹 두분 고향은 도심이신지, 아님 시골쪽이신지 궁금합니다.
이재훈 ▶ 산간오지였습니다.~강원도 영월
블새 ▶ 박시인님 함양?
박판식 ▶ 저는 함양 산골에서 부산 변두리를 거쳐, 서울 산동네에 삽니다.. 비탈진 곳을 벗어나질 못하는 중
사회자 ▶ 와!~ 블새님
블새 ▶ 불새입니다 ,,잘못해서
사회자 ▶ 하하하
김경락 ▶ ㅎ
블새 ▶ ㅎㅎㅎ
박판식 ▶ 설마, 드라마 불새 매니아는 아니죠^^
사회자 ▶ ㅎㅎㅎ
블새 ▶ 맞아요
사회자 ▶ 제가 듣기로 박시인님 팬이라고 들었습니다.
사회자 ▶ ^^
블새 ▶ 심장의 타종,,,좋습니다
박판식 ▶ 저는 드라마에서 인생을 배웁니다.. 불새에서도 많은 걸 배웠죠
사회자 ▶ 공감
블새 ▶ 불새노래도 좋아요
푸른저녁 ▶ 저는 박판식 시인의 <그리운 가족>을 좋아합니다.
사회자 ▶ ^^ 전 부부클리닉에서 가정은 골치아픈 것이라고 배웁니다.
사회자 ▶ ㅋㅋㅋ
박판식 ▶ 너무 띄우지 마시압, 떨어질려는 중
블새 ▶ ㅎㅎㅎ
사회자 ▶ 이재훈 시인님!~
푸른저녁 ▶ 이재훈 시인의 시를 보면 도시 이미지가 많이 나오는데, 아까 말씀하신 '방황기'의 영향 탓이라고 봐도 될까요.
이재훈 ▶ 예
사회자 ▶ 앞으로 꼭 써 보고 싶은 시가 있다면?
사회자 ▶ 혹은 시외에 다른 장르에 대한 관심이 있으신지?
이재훈 ▶ 방황기의 영향 맞습니다~
이재훈 ▶ 뭐..그게 다는 아니지만~
박판식 ▶ 갑자기 티브이를 친구로 삼은 신동욱 시인 생각나네요..
사회자 ▶ 진행이 좀 수동적인 느낌으로 흘러 가는것 같습니다.
박판식 ▶ 신동옥인데, 또 욕먹겠다
이재훈 ▶ 꼭 써보고 싶은 시는 아직, 또 뭐가 쓰고 싶어질지
김경락 ▶ ㅎ
사회자 ▶ 두분 시인님들께서 하고 싶은 이야기 술 먹었다 생각하시고
사회자 ▶ 한번 확 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리브카 ▶ ㅎㅎ
김경락 ▶ 두 분은..주로 시집만 읽으시는지..
옥매듭 ▶ 두분시인님 말씀 감사합니다 ^^
푸른저녁 ▶ 도시속의 순례자, 라고 해야하나, 박수연 선생께서는 이재훈 시인의 시를 '낭만성'으로 보시더군요.
사회자 ▶ 술주정은 절대 다음날 발설하지 않는다는 금기가 있습니다.
김경락 ▶ 궁금합니다
♤ 옥매듭 (leeoanna)님께서 퇴장하셨습니다.
이재훈 ▶ 술을 안먹어서~^^
김경락 ▶ 한국 문학에서..
김경락 ▶ 시는 소설보다 낫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계시는지
사회자 ▶ 윽!~ 제가 졌습니다. 이시인님 ^^
김경락 ▶ 예전에는..문인들이..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했었는데..
김경락 ▶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이재훈 ▶ 저도 소설쓰고는 싶은데,,
김경락 ▶ 장르의 구별 탓인가요..아니면..수준 탓인지...
김경락 ▶ 궁금합니다
이재훈 ▶ 둘 다 잘 쓴다면 가장 좋겠죠
김경락 ▶ ㅎ
사회자 ▶ 그럼 내가 시인이 되서 참 잘했다고 생각 됐을때가 있었다면? 언제였는지
이재훈 ▶ 집중력의 분산이 그런 경우를 낳을 거에요
박판식 ▶ (느리게 흘러 가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흠, 옥매드님의 퇴장에 상처받고 치유중)
사회자 ▶ 하하하
블새 ▶ ㅎㅎㅎ
리브카 ▶ ㅋㅋ
사회자 ▶ 박시인님!~
이재훈 ▶ ㅎㅎ
사회자 ▶ 개의치 마세요
김경락 ▶ ㅎ
사회자 ▶ 아마도 화장실이 급해 나갔을 겁니다.
박판식 ▶ 장르론이 제일 어렵지 않나요,
박판식 ▶ 전 카프카 보면 소설이 아니라 시 같고,
푸른저녁 ▶ (김록 시인의 장편, '악담'이 나왔더군요.)
박판식 ▶ 병승이 형 시보면 소설 같고, 훗
이재훈 ▶ 그렇군요
김경락 ▶ 네..
박판식 ▶ 김록 시인께 위로 문자 보냈습니다..
푸른저녁 ▶ 흐흐.
리브카 ▶ ㅋ
박판식 ▶ 대화보다 필담을 좋아하시는 분이라, 훗
리브카 ▶ (김록, 김근, 김언, 김현 ... 또 있나 ㅋ)
이재훈 ▶ 저는 시인들이 소설쓰는 거,
이재훈 ▶ 좋아합니다
김경락 ▶ 왜요?
김경락 ▶ ㅎ
사회자 ▶ 요즘 시인들 보면 어떤 사상 혹은 철학쪽에 많이 기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혹 두분도 그런측면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푸른저녁 ▶ 생각에 그치지 않고 말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것을 알기 위한 것이며, 진보적인 차원에서 사회적인 기능을 지지하는 것이다." , 김록 시인 소설집 첫 구절이라고 하더군요.
박판식 ▶ (김참, 김민, 김안...)
리브카 ▶ 이장욱 시인은 평론도 쓰고 소설도 쓰지요.
리브카 ▶ (맞아요 ㅋ)
사회자 ▶ 시를 쓰다가 소설을 쓰면 언어가 우선 감각적일 수 있으니까요 시쓰다가 소설 쓰시는 분들은 꽤 많은 편이죠
김경락 ▶ 네에..
이재훈 ▶ 서사의 욕구를 시라는 장르가 못채워줄 때
박판식 ▶ 부럽죠, 소설 언젠간 쓰고 싶은, 그런데 강도 높은 노동을 요구하잖아요
박판식 ▶ 게으른 시인에겐 고통이죠
이재훈 ▶ 해볼만하다 생각드는데..
사회자 ▶ 한마디로
사회자 ▶ 중노동이라고 하던데요
사회자 ▶ 노가대
리브카 ▶ 중노동이죠;
푸른저녁 ▶ 어제, 김언 시인과 채팅을 하면서 잠깐 얘기가 나왔었는데, 대학원 공부가 실제 시 쓰시는데 도움이 되시는지요?
이재훈 ▶ 엉덩이가 가벼워, 못쓰죠~
사회자 ▶ ^^
박판식 ▶ 내겐 너무나 가벼운 엉덩이^^
사회자 ▶ 이시인님!~ 갈수록 제 취향인것 같습니다.
사회자 ▶ ㅋㅋㅋ
이재훈 ▶ 친해봅시다~
사회자 ▶ 두분다
사회자 ▶ ^^
사회자 ▶ 가벼운 엉덩이라는 말이 오늘은 포인트 인것 같습니다.
사회자 ▶ 오늘의
이재훈 ▶ 공부는 공부고 시는 시인데
블새 ▶ 사회자님 엉덩이 무거운데 ...ㅎㅎ
사회자 ▶ 하하하
사회자 ▶ 쉿!~
블새 ▶ ㅎㅎㅎ
김경락 ▶ ㅎ
사회자 ▶ 블새님 비밀 누설하면
사회자 ▶ 알죠?
이재훈 ▶ 그런 비밀이..
블새 ▶ 죄송합니다 제가 거짓말을 못합니다
사회자 ▶ ㅎㅎㅎㅎ
사회자 ▶ 리브카님
사회자 ▶ 제편좀 들어 주심 안될까요?
사회자 ▶ ^^
리브카 ▶ ㅋㅋㅋ
이재훈 ▶ 참, 말하다 말았네.
사회자 ▶ 아무리 둘러봐도 가볍다고 변론해 주실 분이 한분도 안계신듯 하여 다음 대화로 페이지 넘깁니다.
이재훈 ▶ 대학원 공부 시 쓰는데 많이 방해됩니다.
이재훈 ▶ 노력중입니다~^^
사회자 ▶ 그럼 이시인님을 여행을 즐기시나요?
푸른저녁 ▶ 네... ^^;
사회자 ▶ 아님 장구경?
사회자 ▶ ^^
이재훈 ▶ 즐기는데, 많이 즐기는데, 엉덩이가 무거워 잘 못떠납니다~
사회자 ▶ ^^
사회자 ▶ 처음 체팅손님으로 오셨던 이원규 시인님이 족필로 쓴다고 했던
이재훈 ▶ 예전엔 훌쩍 잘도 다녔는데..
사회자 ▶ 말이 자꾸 생각나서 질문을 드려 봤습니다.
김경락 ▶ 어떤 작가는...아침 아홉시부터 열두시까지..줄곧..쓴다고 합니다...매일 아마 소설가라 그럴테지만..
이재훈 ▶ 족필로?
김경락 ▶ 시인은 도대체 언제 쓰는지..
사회자 ▶ 네에
김경락 ▶ 시간을 정해두고 쓰나요..
김경락 ▶ 아니면 뮤즈가 휙~ 오나요?
이재훈 ▶ 그때 그때 달라요~
김경락 ▶ ㅎ
사회자 ▶ 박시인님!~
박판식 ▶ (저는 지금 질문들이 많이 겹쳐서 하나씩 다 대답하려는 중인데^^)
사회자 ▶ 하하하
사회자 ▶ 저는 다이어트 하신줄 알았습니다.
이재훈 ▶ 그러면 잊어먹잖아요~
김경락 ▶ 혹..뮤즈를 믿는지..열정이 뮤즈인지..
사회자 ▶ 안보이실만큼 작게
박판식 ▶ '현대시시상'이나 '시와 사상'이라는 잡지가 있는 거 보면 시와 사상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하고
박판식 ▶ 대학원 생활은 대학원생 하기 나름이라, 시쓰는데 거의 방해 안되고
박판식 ▶ 여행은 먼 곳보다는 가까운 나 자신부터 들여다보느라 지쳐서 갈 얼두도 못내고
박판식 ▶ ^^잠시 휴식 중
사회자 ▶ ㅎㅎㅎㅎ
블새 ▶ ㅎㅎ
사회자 ▶ 우와!~
김경락 ▶ ~
이재훈 ▶ 수고하셨습니다~
사회자 ▶ 암튼 박시인님 재치가 만만치 않습니다.
박판식 ▶ (거의 강박증이죠, 훗, 건망증까지 겹쳐서 가끔 볼만해요..)
사회자 ▶ 하하하
♤ 은수(bubwoo)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사회자 ▶ 어서오세요 은수님!~
사회자 ▶ 은수(언니)님 ㅋㅋ
이재훈 ▶ 반갑습니다.은수님~
사회자 ▶ ^^
박판식 ▶ 안녕하세요, 은수님. 반가워요
은수 ▶ 분위기 파악까지 조용~~
푸른저녁 ▶ 2000년대도 어느 새 중반인데, 올해는 유난히 첫시집이 많이 쏟아졌습니다. 이런 일군의 시인들이 전 시대와 대비되는 특징 같은 것이 있다면 어떤 걸 꼽을 수 있을까요?
박판식 ▶ (수동적이고 피동적이고 느리고 답답하지만, 나름대로 즐기는 중^^)
이재훈 ▶ 박판식 시인이 정리해서 말씀해주시겠습니다~
사회자 ▶ 우와!~
사회자 ▶ ㅎㅎㅎㅎㅎㅎ
푸른저녁 ▶ 이재훈 시인께 여쭙고 싶습니다.
푸른저녁 ▶ ㅎㅎㅎ
사회자 ▶ 오늘 두분 호흡이 거의 환상적입니다.
박판식 ▶ (역시 진지한 박진성 시인, 귓속말로 그렇게 진지해지지 말라고 했건만^^)
사회자 ▶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푸른저녁 ▶ 현대시 편집장으로 계시니까 아무래도 시단의 흐름이랄까, 이런것을 잘 느끼실 것 같다는 생각인데요.
푸른저녁 ▶ ㅎㅎㅎ
이재훈 ▶ 특징이 있긴 합니다. 선배 시인들이 못 알아먹겠다고 하니깐~^^
사회자 ▶ ㅋㅋㅋ
김경락 ▶ ㅎ
이재훈 ▶ 얘기하자면 너무 긴데..
박판식 ▶ 좋지 않나요, 일단 다양해서, 골라 읽는 재미가
박판식 ▶ 경직되었던 예전 보다 시가 뭔지 처음부터 다시 묻는 시인부터 막 노는 시인까지..
이재훈 ▶ 가장 큰 다른 점이라 한다면, '언어'겠지요.
이재훈 ▶ '시적 언어'라는 고정관념이 깨졌으니깐.
이재훈 ▶ '고정'이라는 말은 뺄게요~
♤ 귀뜸(flowon)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박판식 ▶ 귀뜸님 안녕하세요..^^
♤ 사회자 (whdydtnr)님께서 퇴장하셨습니다.
이재훈 ▶ 안녕하세요. 귀뜸님~
귀뜸 ▶ 많이 늦엇습니다.실례^^*
박판식 ▶ 앗! 사회자님께서 드디어 침묵을 참지 못하시고
♤ 사회자(whdydtnr)님께서 입장하셨습니다.
김경락 ▶ 몸은 다 나으셨습니까
김경락 ▶ (박진성 시인께..뜬금없다는;;;;)
김경락 ▶ ㅎ
김경락 ▶ 죄송;;
푸른저녁 ▶ (경락님... 무슨 말씀? ^^)
김경락 ▶ 시집을 보면..
김경락 ▶ 많이..것두 아주 많이
김경락 ▶ 아프신것 같았다는
김경락 ▶ ;;
푸른저녁 ▶ 왔다리갔다리 합니다.
푸른저녁 ▶ ^^;
김경락 ▶ 네^^;;
푸른저녁 ▶ 이재훈 시인의 말씀을 계속 듣고 싶은데요~
사회자 ▶ 제가 진지한 질문 하지 말라고 한 부분에 대해서 반성문 쓰고 왔습니다. 이제부터는 질문에 무게를 달지 않겠습니다. 맘껏 질문해 주십시요
박판식 ▶ (큿, 박진성 시인 병은 술먹으면 잠시 나았다가 술 끊으면 심해지는 병!)
사회자 ▶ 밖에 끌려나가 된통 혼나고 왔거든요 ^^
리브카 ▶ 사회자님 추운데 고생하셨습니다
김경락 ▶ 그렇군요^^;;
사회자 ▶ ^^
푸른저녁 ▶ ^^
리브카 ▶ 그나저나 시간이 또 이렇게 빨리 흘러서
리브카 ▶ 벌써 10시 반이 다 되어 가네요
사회자 ▶ 오늘은 특별히 12시까지 하면 안될까요?
이재훈 ▶ 시간가는 줄 모르겠습니다
사회자 ▶ ^^
박판식 ▶ 이제 손가락이 좀 풀릴려고 하는데,
리브카 ▶ 원래 셔터내리고 안에서 마시는 술이 진짜
사회자 ▶ 공식적인 시간은 11시로 정하고
사회자 ▶ 2부 행사로 12시까지 하겠습니다.
동호 ▶ ㅋㅋ
블새 ▶ 리브카님 말씀 동감 .
리브카 ▶ ^^
박판식 ▶ 글이 남는다고 생각하니까 뻣뻣해져서 그래요
리브카 ▶ 원하시면 부분 편집도 가능합니다 ㅋㅋ
사회자 ▶ 그럼 신나는 음악을 좀 틀까요 박시인님?
이재훈 ▶ 이 글이 남나요?
김경락 ▶ !
박판식 ▶ 큿, 말의 즐거움..공기처럼 사라지는
리브카 ▶ 하하
사회자 ▶ 뻣뻣한 글이 좀 풀리게 시리
박판식 ▶ 안 그래도 옆자리에서 디스코 음악 막 나옵니다
사회자 ▶ ㅎㅎㅎㅎㅎㅎㅎ
김경락 ▶ (이름을 삭제 하고 싶다..)
사회자 ▶ 아무래도 오늘 체팅은 역사에 오래 남을것 같습니다.
리브카 ▶ 음...
이재훈 ▶ 글이 남는다는 걸 잊고 있었네요~^^
리브카 ▶ ㅎㅎ
리브카 ▶ 11시 되면 셔터 내리니까, 그때까지만 진중하게 버티고
박판식 ▶ 이상 생각나네요 (검열자를 염두에 두고도 자유로웠던)
리브카 ▶ 그 뒤로 뒤집어집시다
박판식 ▶ 그럼 더 느리게 느리게 갑시당!
동호 ▶ ㅋㅋㅋ
이재훈 ▶ 화장실도 좀 가고..
박판식 ▶ 커피도 한 잔 하고,,
리브카 ▶ 커피 좋지요.
사회자 ▶ 아!~
사회자 ▶ 커피 배달 오다가
사회자 ▶ 오토바이가 뒤집어 졌다고 합니다.
푸른저녁 ▶ 담배 한대씩 피우죠.
리브카 ▶
사회자 ▶ 윽!~
푸른저녁 ▶ 오늘 근데, 박판식 시인 너무 부드럽습니다. 적응 안됩니다.
푸른저녁 ▶ 진면목을 보여주세요~
푸른저녁 ▶ ㅎㅎㅎ
사회자 ▶ 그럼 원래 박시인님이 카리스마
리브카 ▶ 여성을 만났다고 생각하시고...
사회자 ▶ 스타일이신가요?
박판식 ▶ 클, 저도 때론 부드러운 남잡니다..^^
사회자 ▶ 하하하
블새 ▶ 박시인님 안경 쓰시나요?
박판식 ▶ (제발 한 번만 봐줘요, 박형..)
사회자 ▶ ^^
박판식 ▶ 귓속말로 공포분위기 그만 조성하구-.-
사회자 ▶ 하하하
푸른저녁 ▶ ㅡㅡ;
사회자 ▶ 귓속말 많이하면
푸른저녁 ▶ 저는 좋은 말씀을 듣고 싶어서요~
사회자 ▶ 귀지도 많이 쌓이나요?
박판식 ▶ 박진성 시인과 저는 오래된 필담 친구입니다
사회자 ▶ 귀뜸님!~
귀뜸 ▶ 아, 넵!
사회자 ▶ 귓속말 말고
사회자 ▶ 목소리 한번 냉큼 들려주시지요?
사회자 ▶ ^^
푸른저녁 ▶ 제가 늘 배우고 있습니다.
귀뜸 ▶ 저는 저 위의 커피향에 취해서리 그만~~~
사회자 ▶ ^^
푸른저녁 ▶
사회자 ▶ 으악!~
푸른저녁 ▶ 한잔 하시죠~
귀뜸 ▶ 크아 더 취합니다
사회자 ▶ 우린 맥주 아니고
사회자 ▶ 막걸리 마시고 왔는데요
사회자 ▶ ^^
블새 ▶ 내꺼다 ㅎㅎ
귀뜸 ▶ 병 부셔집니다
사회자 ▶ 은수(언니)님
사회자 ▶ 옆에 낑겨 앉으세요 알고 보면 다 아는 사람들이니까요 ^^
은수 ▶ 네
사회자 ▶ 이시인님!~
사회자 ▶ 이재훈 시인님!~
이재훈 ▶ 예.
사회자 ▶ 지금 이순간 생각하는 책 한권만
사회자 ▶ 소개해 주십시요
사회자 ▶ 생각하지 말고 바로 답변을
이재훈 ▶ 끼냐르, 은밀한 생. 두고두고 읽을수있어요
사회자 ▶ 서적에 주문 들어갑니다. ^^
사회자 ▶ 서점
사회자 ▶ 이제 공식적인 시간 30여분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이재훈 ▶ 참, 밤의 피치카토도 추가합니다~
사회자 ▶ 네에 감사
박판식 ▶ (큿 죽여주시압)
사회자 ▶ ㅎㅎㅎㅎ
리브카 ▶ 두고두고 읽을 수 있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잘 안 읽혀서 - -;;)
은수 ▶ ㅎㅎㅎ
사회자 ▶ 박시이님!~
귀뜸 ▶ ㅋㅋ
푸른저녁 ▶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추천합니다. ㅎㅎㅎ
김경락 ▶ ㅎ
사회자 ▶ 혹 직업을 바꿀 의향이 있으신지 여쭤봅니다.?
푸른저녁 ▶ 드디어 외웠습니다. 이재훈 시인님~
푸른저녁 ▶ ㅎㅎㅎ
리브카 ▶ 줄임말로 뭐라 부르시나요?
이재훈 ▶ 참, 고생많으셨습니다
푸른저녁 ▶ ㅡㅡ;
김경락 ▶ 내.사.보
김경락 ▶ ;;;
리브카 ▶ 헉
푸른저녁 ▶ 헐
사회자 ▶ ㅎㅎㅎ
박판식 ▶ (^^*)
리브카 ▶ 책은 좀 팔리십니까!
이재훈 ▶ 오늘 지어주시는대로, 가죠.
리브카 ▶ 아 난 왜 이게 계속 궁금하지? - -
사회자 ▶ ^^
김경락 ▶ (저도 궁금했는데 쪽팔려서 못 물어봤습니다..)
블새 ▶ ㅎㅎㅎ
사회자 ▶ ^^
리브카 ▶ ㅎㅎ
김경락 ▶ ;;
이재훈 ▶ 모르는 게 약이죠..^^
리브카 ▶ 주말에 신촌에서 가장 크다는 홍익문고에 들러서
이재훈 ▶ 혼자 무척 많이 팔리고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곤합니다
리브카 ▶ 이번 행사에 참여하시는 시인 열 분의 시집을 보려 했는데
리브카 ▶ 몇몇 책만 확인할 수 있었어요
푸른저녁 ▶ 어, 대부분 서점에 있을텐데?
리브카 ▶ 교보 같은 데가 아닌 이상, 참 시집 자리는 인색해요
사회자 ▶ 리브카님
사회자 ▶ 서점 사장을 바꿔버려요
박판식 ▶ (키에르케고르가 자기 책 팔리는 것보다 경악했다는데, 저도 그 사람처럼 부자였으면 좋겠어요)
사회자 ▶ 그럼 간단히 해결될텐데요
리브카 ▶ 제가 꼼꼼하게 못 봤는지 모르겠는데, 일단 시집 코너 자체가 좁더라구요
귀뜸 ▶ 으아
리브카 ▶ 손 좀 볼까요?
사회자 ▶ 확실히
사회자 ▶ 쓰다듬어 줘요
사회자 ▶ ㅎㅎㅎ
리브카 ▶ ㅋㅋ
리브카 ▶ 그 비좁은 코너 안에서도
박판식 ▶ (죽을 때까지 부자로 살다가 마지막 은행 잔금 빼오다 죽은 키에르케고르!)
리브카 ▶ 사랑시집이 잔뜩 차지하고 있어서
리브카 ▶ 여하간 살짝 분노하고 되돌아왔습니다
김경락 ▶ 근데 이재훈은..가수 이재훈이랑 겹쳐서 쪼끔 불이익이..;;
이재훈 ▶ (불쌍한 케에르케고르)
사회자 ▶ 역시 우리에게 빵은 사랑밖에 없는가 봅니다. ^^
푸른저녁 ▶ (헐, 키에르케고르에게 그런 일이 있었나요? ㅠㅠ)
박판식 ▶ 프로토스 유저이기도!
사회자 ▶ 설국님!~
사회자 ▶ 질문좀 해 주세요
사회자 ▶ 오늘 좀 많이 조용하신듯 하여
사회자 ▶ 자리에 계신지 확인차 ^^
이재훈 ▶ 프로게이머 이재훈도 있습니다.
김경락 ▶ ㅎ
푸른저녁 ▶ 고등학교때 돈 빌려 가서 안 갚은 제 친구 이재훈도 있습니다.
푸른저녁 ▶ ㅡㅡ;
김경락 ▶ ㅎㅎㅎㅎ
블새 ▶ ㅎㅎ
사회자 ▶ ^^
김경락 ▶ 얼마?
김경락 ▶ ;;;
사회자 ▶ 확실히 잊어버려야 할 이름이군요
김경락 ▶ 죄송;
푸른저녁 ▶ 3만원으로 기억합니다.
이재훈 ▶ 싸이월드에서 검색 못합니다. 너무 많아서~^^
푸른저녁 ▶ ^^;
김경락 ▶ ㅎ
김경락 ▶ 속이 좁으시다는
김경락 ▶ ㅎㅎㅎㅎㅎ
김경락 ▶ ;
푸른저녁 ▶ 이재훈 시인께서는 올해가 의미 있는 한해겠네요. 첫 시집을 내시고, 장가 가시고......
사회자 ▶ 시를 쓰고자 하는 후배들한테 한말씀 아낌없이 해 주신다면요?
이재훈 ▶ 대신 제가 박시인님께 3만원 정도의 음주는 제공하지 않았을까...싶은데
푸른저녁 ▶ ^^;
사회자 ▶ ^^
박판식 ▶ 쓸 사람은 어차피 말려도 쓸테고 안 쓸 사람은 괜히 끌어들이면 나중에 욕먹기 쉽상
사회자 ▶ ^^
사회자 ▶ 오늘 말씀들은 그야말로 명언록에 기록되어야 할것 같습니다.
블새 ▶ 맞아요 ..말려도 쓰겠지요
박판식 ▶ 누가 기형도 시집 읽고 이게 대체 뭐냐고 했던데,
박판식 ▶ 삶이 밝고 건강하다면
박판식 ▶ 그것도 좋지 않은지..
박판식 ▶ 시 안 쓰고 사는 행복도 좋고 시 쓰고 사는 불행도 좋고
김경락 ▶ 오~
사회자 ▶ 크!~
블새 ▶ 와
사회자 ▶ 밑줄 쫙쫙!~~~~~
귀뜸 ▶ 명언록!
사회자 ▶ ^^
박판식 ▶ (얼굴 붉어지고 있습니다^^ 좀 말이 많죠)
사회자 ▶ 전 술드시고 오신줄 알았습니다. ^^
블새 ▶ 술은 사회자님이 ㅎㅎ
사회자 ▶ 쉿!~
박판식 ▶ (네, 연짝 마시다가 오늘만 잠시 휴식중) 끝마치고 마셔야죠, 혼자라도
귀뜸 ▶ 따릅니다, 받으세요.ㅎㅎㅎ
사회자 ▶ ㅎㅎㅎ
사회자 ▶ 귀뜸님!~ 불새님...
푸른저녁 ▶ 그러지 마세요. 맘 약해서 또 택시 타고 갑니다.
블새 ▶ 네
사회자 ▶ 아까 마신 술 아직 깼죠?
사회자 ▶ ^^
김경락 ▶ 판식이라는 이름은..솔직히 참 촌스럽다고 생각하는데...본인은?
김경락 ▶ ;;
귀뜸 ▶ 당신은 누구?
블새 ▶ 머리아퍼요
박판식 ▶ 무지 마음에 듭니다, 내가 아닌 것 같아서
사회자 ▶ ㅎㅎ
김경락 ▶ (저도 제 이름..짜증이..)
박판식 ▶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사는 것 같아서
박판식 ▶ 박판식이 누굽니까? 전 잘 모르겠는데요
김경락 ▶ ^^;;;
박판식 ▶ 박진성 시인은 워낙 의리파에 즉흥파라
사회자 ▶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사는 것 같다. 웬지 의미 심장합니다.
박판식 ▶ 아마 조르면 택시타고 대전에서 올라올겁니다 당장..
푸른저녁 ▶ ㅡㅡ;
사회자 ▶ 푸하하하
박판식 ▶ (오늘은 시험에 빠뜨리지 말아야죠..)
푸른저녁 ▶ 저는 이재훈 형의 신혼방으로 가겠습니다!
귀뜸 ▶ ^^
사회자 ▶ 박시인님!~ 서울로 직행하시죠
사회자 ▶ 박진성시인님!~
박판식 ▶ 신동욱 시인이 질투할겁니다 아마
이재훈 ▶ 헉~~
푸른저녁 ▶ 헉~~
김경락 ▶ 이재훈 시인께...
사회자 ▶ 하하하
김경락 ▶ 이번 시집에서..가장 아끼는 시가 뭔지..
김경락 ▶ 궁금합니다
박판식 ▶ 신동옥(크..프로이트 말에 실수엔 의미가 있다는데)
김경락 ▶ 이유도 함께
김경락 ▶ ;;
사회자 ▶ 실수에 의미가 있다
푸른저녁 ▶ 신동옥 시인은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오해 마시길~
사회자 ▶ 검색해보기 전에
사회자 ▶ 풀어놔 보시지요
푸른저녁 ▶ 독자들이 먼저 얘기해보는 것도 어떨까요?
이재훈 ▶ 순위를 매기고 싶진 않구요..많은 편수 중에 고른거라..
박판식 ▶ (둘이 사귑니다. 이성보다 도 더 간절히)
사회자 ▶ 하하하하
김경락 ▶ 그래도 고른다면?
리브카 ▶ ㅎㅎ
이재훈 ▶ 깨물면 안아픈 손가락없다는 말이..^^
김경락 ▶ 빠져나가려는..솜씨..
김경락 ▶ ;;
푸른저녁 ▶ 저는 이재훈 시인의 시집 중에서는, <쓸쓸한 날의 기록>, 박판식 시인의 <하관>을 아껴가며 읽고 있습니다.
푸른저녁 ▶ 두 분 시인의 시적 성향을 잘 드러내주는 시라 생각합니다.
사회자 ▶ 공식적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것 같아 오신 분들의 출석을 한번씩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이쁜 사람만 대답한 걸로 알겠습니다.
김경락 ▶ 네
이재훈 ▶ 말 그대로, 기록, 일기 같은 시인데..
박판식 ▶ 크 (저는 이재훈 시인의 말에 관한 사랑이 너무 마음에 들던데요..)
사회자 ▶ 나수희님, 오스틴님, 리브카님, 은수님, 김경락님, 장규석님, 이현미님.
박판식 ▶ 또 마루 같은 서정적인 시도 좋고
박판식 ▶ 서정시인 아니라더니, 태생적으로 서정시인..
김경락 ▶ 아..저도 마루..좋아요;;
사회자 ▶ 문옥진님, 은빛날개님, 추워요님, 동호님, 곽성진님, 채효석님, 불새님, 설국님, 귀뜸님
박판식 ▶ (불러도 소리 없는 이름이요, 부끄러우시면 귓속말로 사회자님께 답하세요)
사회자 ▶ 하하하
사회자 ▶ 박시인님
사회자 ▶ 회원님들은 귓속말이 허용 되지 않습니다.
사회자 ▶ 오늘 오신 분들은 다 결석처리 하겠습니다. ^^
블새 ▶ 네
푸른저녁 ▶ <다들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서정시인이 되고 싶다> 라는 구절은 어떤 메타포처럼 들립니다, 이재훈 시인님,
사회자 ▶ 대답이 없었던 이유로 해서 이의신청은 아카데미로 해 주십시요
박판식 ▶ (무섭다..*)
이재훈 ▶ 예..좀 답답한 게 있었지요~
김경락 ▶ 사회자 결석 처리에 동의하시는 분들 거수!
김경락 ▶ ;;
사회자 ▶ ^^
김경락 ▶ ;;ㅎ
박판식 ▶ 이재훈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 어떻게 변해갈지 저도 궁금..
귀뜸 ▶ 좀 무섭지만 귀여운 사회자님
푸른저녁 ▶ 다음번에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서정시인이 되고 싶은데, 왜 다들 믿지 못하겠지만, 이라는 전구가 나오는지요.
설국 ▶ 자리비워서 죄송합니다...이제야..컴백
사회자 ▶ 귀뜸님!~ ^.~
사회자 ▶ 설국님께서 오시니 방에 꽃향기 그득합니다.
설국 ▶ 지금 갈무리로 훑는 중입니다..
사회자 ▶ 공식적인 시간이 끝나기 전에 마무리 질문들 해 주십시요
설국 ▶ 여자랑 있다 왔냐는 물음같네요..
사회자 ▶ 하하하
박판식 ▶ (하하)
사회자 ▶ 설국님 눈치도 빠르셔^^
귀뜸 ▶ ㅋㅋ
박판식 ▶ 그래도 오늘 주제에 한 마디 답은 해야 않을까요, 이재훈 형?
♤ 이현미 (hyunmi3)님께서 퇴장하셨습니다.
추워요ㅠㅠ ▶ (출석 체크 늦었슴다. 화장실^^;)
은빛날개 ▶ 벌써 끝날 시간이 다 되었나요...
사회자 ▶ 출석부에 지우개 똥이 그득해 졌습니다.
사회자 ▶ ^^
이재훈 ▶ 판식 형이 해주세요~
설국 ▶ 기다리던 중입니다.
사회자 ▶ 두분 시인님께서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신다고 하니
사회자 ▶ 잠시 경청해 주십시요
설국 ▶ (이 한순간을 위해 허리통증을 견디며..ㅜㅜ)
동호 ▶ ㅎㅎ
박판식 ▶ (주제가 뭐였죠^^이러면 뒤집어 질듯)
김경락 ▶ ㅎ
사회자 ▶ 하하하
푸른저녁 ▶ 헐
블새 ▶ ㅎㅎ
리브카 ▶ ㅋ
푸른저녁 ▶ 이 산이 아닌가벼
설국 ▶ (헉, 너무해요!)
박판식 ▶ 분명히 새로운 세대가 등장한 것은 우선 사실인듯
박판식 ▶ 서정시도 90년대의 서정시가 아니고
박판식 ▶ 실험시도 90년대의 실험시가 아니고
박판식 ▶ 다양한 경험과 다양한 사상과 다양한 상상력이
박판식 ▶ 다양한 시공간과 교류하면서
박판식 ▶ 지평을 넓혀 갈듯..
박판식 ▶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인 시인들이 너무 많이 등장하고 있어요
박판식 ▶ 독자로서 너무 즐거운 일
김경락 ▶ (그래도 열거 해주지..;;)
박판식 ▶ 그들과 같이 호흡하며 동시대에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박판식 ▶ 저는 너무 좋아요
이재훈 ▶ 어렵지 않은 시대가 없었지만
이재훈 ▶ 지금 시 쓰기 가장 어려운 시대가 아닐까 생각듭니다.
이재훈 ▶ '시'가 할 수 있는 새로움이라는 의미에서 보자면요.
박판식 ▶ (심란한 말씀이군요..이재훈 시인님, 좋네요^^)
사회자 ▶ ^^
귀뜸 ▶ 갑자기 지금 내 발은 어디쯤에 있을까 생각이듭니다^^*
설국 ▶ 짝짝짝!~
이재훈 ▶ '새로움'이라는 '억압'에 지금 세대 시인들은 살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박판식 ▶ (새로움이라는 강박증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새로워집니다, 우리)
사회자 ▶ 또다른 이 시대의 형틀
리브카 ▶ 전위에 대한 강박은 어느 시대에나 있지 않을까요
귀뜸 ▶ 판식, 재훈, 진성 등등 시인짱
사회자 ▶ 하하하
사회자 ▶ 역시 귀뜸 짱!~
푸른저녁 ▶ ('새롭다'라는 말에 저는 약간의 거부반응이 있는데요, '새로움'이라는 이름 아래 시가 너무 자기독백이 되고 장광설이 되는 현상은 저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재훈 시인 말씀대로, 그 어느 시대보다 시를 쓰기 어려운 시대이겠지만, 말이죠.)
블새 ▶ 푸른저녁님 말씀에 동감
사회자 ▶ 저도 공감 ^^
이재훈 ▶ 그 새로움의 억압 때문에 시 장르 자체에 대한 회의가 새로운 방법론으로 나오고 있죠
은수 ▶ 저는 감탄
사회자 ▶ 오늘 말씀들이 한결같이 공감되는 말입니다.
이재훈 ▶ 예전 전통 시학에서 보면 절대로 시가 될 수 없는 시.
설국 ▶ 저는 '새롭다'는 말에 시인들이 얽매일때 시가 일종의 '강박'이 된다고 봅니다.
푸른저녁 ▶ (제 자신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지만, 시인들이 너무 파편화된 단상에 매몰되는 현상은 제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 설국님 공감^^
이재훈 ▶ 윗 세대 시인들께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이걸 시라고 할 수 있을까..
설국 ▶ (그럼 안되겠죠)
사회자 ▶ 시인은 자유로울 이유가 있다
사회자 ▶ ^^
박판식 ▶ (시를 써서 조금씩 자유로워져야하는데 시가 뭔지, 시적인 게 뭔지 과도하게 고민하다보니)
이재훈 ▶ 중요한 건, 이제 새로운 시학이 나올 때가 되었다는~~..
사회자 ▶ 시를 쓰고자 함도 결국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함일진데 오히려 관념을 엮어가고 있지는 않나 하는 반성이 들기도 합니다.
이재훈 ▶ 그래서 산고를 겪고 있는 게 지금 세대 시인들이 아닐까.
사회자 ▶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역시 주님밖에 없는것 같습니다. ^^
박판식 ▶ (하지만 썩어 거름이 되겠죠^^)
귀뜸 ▶ 이거 이거 분위기가 수우울술
블새 ▶ ㅎㅎㅎ
이재훈 ▶ 거름이 되었음 합니다..정말로.
사회자 ▶ 귀뜸님!~ 눈치도 빠르셔
사회자 ▶ ^^
블새 ▶ 사회자님 아멘 ..
사회자 ▶ ㅎㅎㅎ
귀뜸 ▶ ㅋㅋ
은수 ▶ 酒님?
사회자 ▶ 네에 은수언니
김경락 ▶ ㅎ
사회자 ▶ ^^
동호 ▶ 시간이 늦어 먼저 일어섭니다. 오늘 즐거웠구요,
동호 ▶ 모두 건강하시길....
박판식 ▶ (아, 따뜻한 술국에 소주 한 잔이 그리운 시간!)
사회자 ▶ 네에 동호님
사회자 ▶ 편안한 밤 되십시요
동호 ▶ 꾸벅
푸른저녁 ▶ 11시가 넘어버렸네요.
♤ 동호 (ehdgh)님께서 퇴장하셨습니다.
김경락 ▶ (시간이 일러 아직도 개기는...)
김경락 ▶ ;;
푸른저녁 ▶ ^^;
이재훈 ▶ 모두들 감사합니다~
은수 ▶ 눈도 오는데 酒님이 필요한 밤
설국 ▶ 재훈형, 나중 놀러 갈게요
사회자 ▶ 공식적인 채팅 수업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채효석 ▶ 수고하셨습니다
♤ 채효석 (bornfre)님께서 퇴장하셨습니다.
박판식 ▶ (감사,,감사^^)
김경락 ▶ 짝짝짝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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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몸들이 자아내는 새로운 우주(Cosmos)

이재훈
(시인)



몸은 우리에게 언제나 끊임없는 충족감과 함께 결핍도 함께 전해준다. 결핍이 또다른 충족을 낳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 몸이 표현하는 방식은 결핍으로부터 배태된다. 비만한 몸은 역동성이 없으며, 완미하게 충족된 정신은 비생산적 무기력만 낳을 뿐이다. 주린 몸과 결핍된 영혼은 역동적이며, 삶에 대한 자신의 존재증거를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우리가 인식하는 몸이 ‘노동하는 몸’에서 자신의 정신을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영혼의 몸’으로 인식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몸을 통한 상상력은 더욱 감각적이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새로움을 던져주고 있다. 그래서 요즘 시대를 가리켜 흔히들 ‘몸’의 시대라는 말을 한다. 정신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몸이 이제는 우리의 정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몸소 실현하는 또 하나의 정신적 주체가 된 것이다.

모두(冒頭)에 몸에 관한 잡설로 시작한 이유는 이번 도일의 두 번째 개인전 「Beyond the line」(2008)에서 몸이 가진 역동성이 존재의 근본을 탐하는 어떤 가능성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에게 몸은 비루한 정신을 드러내는 가장 탁월한 도구이다. 몸은 원시적이며, 즉흥적이고 때론 비유적이며 신화적이다. 이제는 살아서 피가 나는 몸이 정신의 영역에까지 들어와 살아서 고뇌하는 인식의 통점(痛點)으로 확장되어 간다.

우리의 일상에서 몸에 대한 지각은 끊임없이 폭력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유지된다. 또한 몸이 표현하는 반응은 정신의 어떤 예민한 지점을 정확히 짚어준다. 도일은 이러한 몸의 근본을 ‘움직임’을 통해 드러낸다. 「한 걸음 한 잔」의 작품에서는 이 같은 사실을 가장 친근한 방식으로 증언하고 있다. 가장 단순한 움직임을 통해 인간의 희노애락을 표현하고 있다. 즉 운동성을 통해 희노애락을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는 감수성의 스펙트럼은 희노애락이라는 네 가지 감정으로 표현하기에 너무 다양하고 섬세하다. 기쁨과 슬픔 사이, 기쁨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어떤 수많은 감정들의 세목들은 언어의 힘으로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언어가 가진 지시적 폭력성은 단순한 선(線)을 통한 움직임이 주는 섬세한 감정을 통해 무참하게 깨져 버린다. 이것뿐만 아니다. 더욱 놀란 것은 단순한 움직임으로 감정뿐 아니라, 그 몸이 가지고 있는 인격까지 느낄 수가 있었다. 과장된 말이라고 할지라도, 하나의 몸이 여러 다른 몸들과 함께 줄지어 이어나가면서 그 줄은 끊기지 않고 다시 되돌아오는 순환의 원리를 통해 더욱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몸이 이어지는 것을 통해 몸 하나가 가진 인격은 주변의 몸을 통해 다시 새롭게 의미를 부여받는다.

몸의 움직임은 시각적인 영역에서의 표현이다. 그럼에도 감정의 섬세함과 그 개별의 감정 속에 녹아 있는 몸의 인격을 상상하는 것을 통해 즐거운 미적 체험을 얻을 수 있었다. 같은 몸의 움직임이라 하더라도 춤의 경우는 움직임이 주는 속도의 합(合)으로 전체적인 감정과 미적 세계를 표현한다. 그러나 전시 공간이 주는 개별 몸의 합은 하나의 움직임을 정지하여 미분화시키는 방식으로 감정을 전달해준다. 그것으로 우리는 천천히 하나의 개별적인 몸을 감상하면서 자신의 실제적 모습과 투영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체험에서 가장 특별한 체험은 바로 자신의 현재와 작품의 현재를 동일시해서 보는 즐거움일 것이다.

도일은 이전 개인전인 「저작Chew」에서와 마찬가지로 재료가 가진 친근성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대중들은 ‘낯설게 하기’의 오래된 예술적 감흥을 작품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으며, 작품의 소재 또한 친근성이 강하다.

작품 「Beyond the line」 연작은 몸끼리 서로 투영하여 새로운 몸의 색을 입고 있다. 특히 전시라는 특별한 공간성을 가장 적절하게 활용한 작품이다. 서로의 몸에서 발산하는 빛이 전시의 조명과 어우러져 오묘한 색감을 얻고 있으며, 이 오묘한 몸의 색은 서로 비추고 반사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전체를 만들어낸다. 몸들끼리 서로 어우러져 큰 하나의 담론(discourse)을 생산하고 있다. 이 소통은 ‘Beyond the line’이라는 다소 관념적인 명명(命名)과 만나면서 집중력을 분산하고 있다. 「Beyond the line 2」가 보여주고 있는 터널 속의 미궁. 그 미궁의 공간이 들어가고 나감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라는 에로티시즘의 상상력 또한 즐거운 체험이다. 미궁은 모두 뚫려 있다. 미궁은 각각의 작은 공간이 얽혀 이루어진 집합소이다. 뚫려 있으면서도 공기가 빠져나갈 것 같지 않게 밀집되어 있고, 촘촘하다 싶어 가까이에 가면 여유로운 공간 속에서 얽혀 있다.

도일은 근본주의자이다. 「만인보」에서 보여주는 조명을 통한 몸의 ‘그림자’도 그런 의미에서이리라. 하나의 몸짓 속에 또 하나의 인격이 숨어 있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몸과 인격이 가진 정체 아닌가. 더욱 역동적이고 과장되게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만인보」에서 쓸쓸한 삶의 비애를 엿본다. 이번 개인전에서 인간의 본질을 몸이 가진 움직임을 통해 적극적으로 드러냄을 보았다. 재료의 긁히고 할퀸 자국들과 움직임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특별한 세계를 보여주는 이번 개인전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낀 것일까. 뒤늦게 점점 큰 무게로 내려앉는 도일의 작품세계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 지 더 궁금해진다.


작가 도일의 작품 보기 : dop 조형예술연구소  http://blog.daum.net/yadan1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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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이재훈

 

산책길엔 언덕이 있다.
그날은 이상했다.
오르고 올라도 닿지 않는 거리를 헤맸다.
혼을 빼앗긴 것처럼.
늪에 빠진 것처럼.
뒷덜미를 놓아주지 않는 불빛이 있었다.
사위가 어둠에 둘러싸이면서
상점엔 불이 하나씩 켜졌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근원을 바랐다.
기적을 구한 것은 아니었다.
어둠이 안겨주는 거대한 정적을,
위대한 침묵을
나는 알지 못했다.
상처받은 한 친구를 생각했고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생각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바쁜 거리의 일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산책길엔 언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길목과 길목이 혀를 내밀어
내 몸을 떠받치고 있을 뿐.
타인의 인격을 규정하지 않기로 했다.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다.
장 그르니에가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빛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환호하지도 분노하지도 못하는,
심장을 꺼내 거리에 내던지고 싶었다.
심장이 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은,
그 짧은 시간만큼은 황홀하겠지.
언덕이 있는 곳은 월곡(月谷),
달빛이 있는 골짜기다.
언덕을 오르고
또 한 언덕을 오르면
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
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
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산타크루즈를 오르며 쬔
그 햇살의 순간처럼.

― <시인시각>, 200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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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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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현대시의 기독교적 시학


김옥성

 

1. 서론

21세기로의 전환기에 우리는 종교와 관련된 수많은 갈등과 분쟁을 겪어야 했다. 인류는 1990년대 발칸반도의 분쟁과 일본의 옴진리교 사건, 그리고 2000년대의 9.11 참사와 그 연장선에서 진행된 세계 각지의 폭탄테러 등을 경험하면서 종교에 대해 많은 회의를 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20세기 후반 휴거소동을 경험하면서,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관심이 점차적으로 증가하였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는 개신교와 그 선교정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부쩍 부풀려놓기도 하였다. 특히, 최근의 미국과 이슬람권의 첨예한 갈등과 대결은 문화의 심층으로서 종교적 모순에서 비롯된 기독교 대 이슬람의 종교전쟁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세기를 건너는 과정에서 일어난 많은 사건들은 국내외적으로 종교에 대한 회의와 비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샘 해리스의 <종교의 종말>,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등은 종교에 대한 인류의 회의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저술들은 강한 어조로 종교를 비판하면서, 종교 무용론 나아가 종교 해악론을 전개하고 있다. 세기의 전환기에 팽배해진 종교에 대한 대중의 혐오감이나 염증과 맞물리면서 이들 저술들은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세 저서에서 공격하는 종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과 같은 유일신교, 특히 기독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이들의 논리가 샤머니즘과 같은 고대 종교나 불교나 유교, 도교 등과 같은 동양의 종교에는 적용되기 어렵다.

히친스는 “동방의 해법은 없다”라고 못을 박으면서 동양의 종교까지도 비판하고 있지만, 충분한 논증이 이루어지지 않아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동양의 지혜”가 종교(유일신교)를 대체할 수 있다는 해리스의 주장이 설득력 있다. 해리스는 유불도와 같은 동양의 특정 종교가 아니라 그러한 종교들의 저변을 관류하는 신비주의적이고 영적인 지혜가 ‘종교’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해리스의 견해가 옳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과연 동양에만 지혜가 있고 서양에는 없었을까? 일련의 국제정세를 돌이켜보면, 표면적으로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로 대변되는 유일신교가 ‘지금-여기’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를 품지 않기는 어렵다. 그러ㅏ 과연 유일신교가 인류에게 해악인가? 하는 의문 또한 제기될 필요가 있다.

동서를 불문하고 역사상 종교는 많은 악행을 저질러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만큼의 선행을 쌓아온 사실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최근의 미국과 아랍권의 갈등과 충돌은 물론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제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이라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서구권과 아랍권의 충돌은 종교적 이념의 충돌이라기보다는 소수의 정치가와 자본가의 헤게모니 투쟁과 보다 깊이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종교가 저지른 악행들의 대부분도 종교 자체의 모순이 아니라 소수 권력자의 정치, 경제적인 패권 투쟁의 산물이었다.

종교는 일종의 문화이자 전통이다. 문화와 전통은 ‘지금-여기’의 정황에 맞게 끊임없이 변화하며 진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종말’이란 있을 수 없다. 문화와 전통으로서 종교는 과거나 지금이나 인류의 정신적 삶을 윤택하게 해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신이 ‘만들어진 신’인가. “신이 위대하지 않다”든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경험과 믿음이다. 우리가 어머니를 경험할 때, 어머니의 학식과 외모와 경제력을 따지지 않는다. 우리의 어머니가 어떠한 존재이든지, 어머니는 모든 면에서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존재로 경험되고 기억된다. 믿음과 사랑은 사실관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주관에 의하여 가치가 결정된다.

  (중략)

6. 세속 도시와 신화 사이의 순례

이재훈의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풍성하다. 그의 넓고 깊은 신화적 상상력의 영토 한 가운데에는 기독교 신화가 중심축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재훈의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오래 전에 적어본 것이라며 자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몽상가이다. 나는 혼자서 우는 편이다. 나는 시를 쓴다. 나는 어머니께서 호랑이꿈을 꾼 후에 태어났다. 나는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다. 나는 조울증이다.

그렇다. 그는 모태신앙을 가진 기독교 신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목회자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재훈 시에는 기독교가 내면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재훈은 기독교의 추상적인 사상이나 관념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성서에서 신화적 이미지를 추려낸다. 성서의 신화적 이미지를 딛고서 이교도의 신화를 수용하면서 그의 신화적 상상력은 광활하게 펼쳐진다.

  이재훈의 홈페이지에서 자신에 대하여 “별자리를 사수좌이고, 나무는 무화과나무이다”라고 적어 놓고 있다. 별자리는 신화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시적 주체는 자신의 선험적인 고향을 신화의 영역으로 사수자리로 설정해 놓고 있다. 이교의 신화에 속하는 사수자리 이미지는 “등불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예언”, “십자가” 등과 같은 성서적인 요소들에 에워싸이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기독교적인 것과 이교적인 것이 뒤섞인 신화의 세계는, 작품의 후반부에 오면 현실로 이어진다. “그 큰 어둠을 품고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가셨지”라는 대목은 현실로의 귀환을 암시해준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이야기들은 신화에 속한다. 어떤 시각에서 보면 신화란 종교의 추상적인 사상과 관념을 구체화시킨 이야기들이라 할 수 있다. 이재훈은 기독교 신화와 이방의 신화, 그리고 현실을 접목시킨다. 시적 주체는 신화와 현실을 넘나드는 여정을 “순례”로 규정한다.

이재훈 시에서 “순례”는 견고한 현실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시적 주체는 현실에 괄호를 치지 않고, 정면으로 노려본다. 세속 도시의 거리를 거닐며 거기에서 신화의 파편들을 발견한다. 그 파편들을 통해 시적 주체는 선험적인 근원으로서 신화의 세계와 교신을 한다. 세속 도시를 거닐며, 거기에서 신화에서 흘러나오는 성스러움을 체험하는 과정이 이재훈 시의 “순례”인 것이다.

이재훈 시는 세속도시의 현실을 딛고서, 우리를 구약과 신약의 신화시대로 이끈다. 그는 세속 도시 곳곳에 박혀 있는 신화시대의 파편들을 보여준다. 그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우리는 신화적 세계를 어렴풋이 건너다 볼 수가 있다. 신화 세계의 체험은 세속 도시의 일상에 갇혀 사는 우리의 경직된 영혼을 부드럽게 풀어헤쳐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잠시나마 꿈을 꾸듯 자유로운 영혼의 상태를 맛볼 수 있다.

_ <딩아돌하>, 2008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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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철



사람은 살아가면서 상처를 받게 마련이고,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다만 그 상처의 크기와 깊이에 따라 상처를 다스려 병을 낫게 하는 일에 쏟아야 하는 힘의 양이 정해진다. 하지만 사람마다 상처를 다스려 병을 낫게 하는 방식은 다르다. 이런 점에서 이재훈 시인의 시는 상처를 거듭 늘리고 상처 속으로 뛰어들어서 상처를 넘어서 스스로가 힘차고 튼튼해지는 데 힘을 쏟는다.

…(중략)…

2. 상처를 뛰어 넘어 스스로를 치세우는 방식

이재훈 시인의 시는 중세의 기사 이야기를 닮아 있다. 믿음을 고갱이로 하여 온갖 어려움을 스스로 찾아가고 헤쳐 나가는 힘이 있다. 바깥의 자극에 찔린 상처를 바로 되받아치지 않고 안으로 끌어들여, 그 상처를 거듭 늘려 키운다. 그의 몸은 늘 슬프고 번거로운 일로 만신창이가 된다. 그러므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츠슬러 이겨내는 힘을 키우기 위해 다시 몸과 싸운다.

늘 공허하다

낯선 여관을 즐기던 시간도

빈 방에 누워 수음하던 시간도

기억만 자꾸 엉켜 잠 못 드는 밤들,

혀가 뽑히는 꿈을 자주 꾼다

한밤에 일어나 허겁지겁 찬밥을 먹는다

- <어떤 날> 부분

어떤 일에 온 힘을 다 써버리고 나서 밀려오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할 때 텅 빈 가슴은 쓰라리다. 꽉 차인 일에서 벗어나던 즐거움이나 숨 막히는 긴장이 풀리는 몸의 황홀조차 어떤 뜻도 맛도 없어진다. 이런 때는 온갖 기억을 떠 올려 뜻과 맛을 만들려고 하기도 하지만 아무 것도 만들 수 없다. 오히려 몸이 갈라지는 두려움만 가득 밀려온다. 이재훈 시인은 이러한 두려움을 더욱 늘려 키운다. 그는 아르토의 잔혹극처럼 누르고 가로막는 것들을 떼어내어 뿔리 깊은 힘이 솟구치도록 하기 위해 애쓴다.

아무도 날 바라보지 않는다. 칼을 꺼내 손목을 그었다. 나는 칼을 의지하며 살았어요. 나는 벌레요. 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아무도 날 바라보지 않았다. 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가슴을 그으며 지나갔다.

- <귀신과 도둑> 부분

어미의 젖 빠는 법을 배우지 말았어야 했다. 영원히 잠들어야 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존재만 사랑해야 했다. 그 이후로 아무에게도 이름을 지어주지 못했다.

- <귀신과 도둑> 부분

여기에는 몸을 찢어 가르고, 끙끙거리거나 울부짖는 소리만 가득하다. 이러한 꾸밈은 사람이란 이름에 갇힌 몸과 마음을 토막내고, 그 틈에서 흘러나오는 뿌리 깊은 힘의 움직임을 드러내기 위한 전략이다. 이처럼 몸이란 이름 아래 꼼짝 못하고 갇힌 힘, 이것을 시인은 귀신이라 부르고 있다. 아니 시인은 귀신이 되어 바동거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의 온갖 삶의 방식을 편안하게 즐길 수가 없다. 이재훈 시인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서 ‘역겨운 냄새’를 맡고 토악질을 하며, ‘쓰레기 냄새’를 맡으며, ‘시체 썩는 냄새’를 맡는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사람으로서 ‘어미 젖을 빠는 법’을 배운 것이나 ‘흔적’이 남는 존재에 대한 사랑이 거추장스럽다. 뿐만 아니라 지금 삶의 방식이 빚어낸 이름붙이기에 함께 뒤섞일 수가 없다. 시인에게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늘 세계를 굳고 단단하게 가두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름을 따라 겹겹이 쌓인 울타리를 하나 하나를 뚫고 나아가는 것을 운명으로 여긴다.

<고행>에서 시인이 사람들이 믿음으로 떠받치는 ‘사원’을 찾아 나서고, 사원에서 몇 개의 문을 지나가는 일도 이런 운명을 그대로 보여준다. 문을 지나는 것은 책장을 넘기듯 이름 없는, 바꾸어 말해 흔적을 남기지 않는 영원한 것을 찾으려는 몸짓이다. 그러나 목수의 문설주 짜는 일이나 이라가 날뛰는 일이나, 선남선녀의 결혼식은 모두 신림동 전철역 네거리의 서툰 화장을 하는 소녀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가 다 울타리를 만드는 일일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겹겹의 울타리를 지나고 ‘작은 샘’을 만난다. 샘물은 무언가 새로운 힘을 다시 얻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도 고행의 길 가운데 잠깐 땀을 닦는 일일 것이다. 이런 그의 몸짓이 어떤 모습인지 시인은 알고 있다.

꼬부라진 나의 변명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지팡이로 이곳저곳을 쳐댔다. 살기 위해 기적을 꿈꾸었다. 물결 위에 놓으면 뱀으로 변할 막대기. 하늘로 던지면 검은 매가 될 막대기. 더듬거리며 어둠 속을 걸었다. 환란 일을 기다리며, 깜깜한 타인의 얼굴을 매만지며, 검은 꽃의 향기를 들이켰다. 요긴한 건 한 줄기 빛인데, 내겐 지팡이뿐. 이제 서른다섯 살이 넘었다. 중년처럼 배가 불룩 나왔다. 어느새 또 다른 지팡이를 끼고 있다. 배만 꽉 찬 몸으로 더듬거려보지만, 날 권면하는 건, 어떤 증오. 신호등 앞에서 한 남자를 보았다. 모두들 어딘가를 향해 날아가는데, 그 남자만 빈들에 솟대처럼 서 있다.

- <지팡이> 부분

이재훈 시인은 자신의 몸짓을 성경 속에 나오는 순례자에 견주고 있다. 하나님을 찾아서 떠도는 순례자의 지팡이를 지녔다고 여긴다. “물결 위에 놓으면 뱀으로 변할 막대기”, “하늘로 던지면 검은 매가 될 막대기”를 꿈꾼다. 그것은 ‘기적’을 바라는 일이다. 그것은 ‘환란’이 일어나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환란이 일어나지 않는 캄캄한 시대에 스스로에게 순례를 권하고 격려하는 힘은 ‘증오’다. 여기서 증오를 일으키는 본디는 알 수 없지만 상처가 깊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너무 깊고 큰 상처를 벗어나기 위해 시인이 스스로 상처를 키우고 자신을 해체하여 자신에게 새겨진 상처를 지우려해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킬리만자로>는 이재훈 시인이 상처를 지우고 새로 세우고 싶은 ‘나’의 본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큰 호수를 만났을 때는

열망하던 일들이 모두 잠잠했다

위대한 숲의 시를 쓰고 싶었다

숲 속에 한 평짜리 오두막을 짓고

밤마다 호랑이의 배고픈 소리를 들으며

늘 지저귀고, 사분거리고, 비벼대는 숲을

노래하고 싶었다

그 싱그러움의 머리맡에서

토닥토닥 바람을 잠재우고

풀잎의 향기에 취해 혼절하고 싶었다

- <킬리만자로> 부분

위 구절로 보면 이재훈 시인은 ‘열망’의 몸부림에서 빚어진 상처들을 잠재우고 만물이 자연 그대로 서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태초의 세계를 꿈꾸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것은 누구나 꿈꾸지만 누구도 이룰 수 없어, 인류의 영원한 꿈일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을 찾아나서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이재훈 시인의 시는 새삼 본디의 꿈을 되살리는 주술이라 할만하다.

- <시와사상> 2007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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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철




1. 가면, 그리고…

현대인들이 영위하는 대부분의 삶은 도시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도시적인 삶의 구조 가운데, 도시적인 사고방식으로, 도시적인 생활을 영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도시 속에서의 삶에 대한 본질적인 두려움을 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도시가 주는 편리함과 안락함, 풍요로움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절대로 놓지 않을 만큼 크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온전한 평안이나 안식을 얻기에는 불가능한 것임을 은연중에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스스로 인식하든 못하든, 생명의 근원인 자연 속에서 자연과 교감하면서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삶에 대한 갈망을 내면 깊숙한 곳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많은 시인들이 도시적인 삶의 방식이 지니는 비인간적이고 파괴적인 속성들을 노래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호에 실린 이재훈의 시들이 내포하고 있는 함의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 특히 문제삼고 싶은 것이 바로 이러한 도시적 삶의 공간에 관한 시인의 시선이다. 도시라는 공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시인에게 다가오고 있는지를 시인은 보여준다. 도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느끼는 도시의 얼굴 앞에 시인은 사실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서 있다. 관계의 단편성이나 박제화된 인간관계, 끝없이 추락하는 삶들을 강요하는 도시의 모습 속에서 시인은 우울하게 떠도는 것이다. 이 시들에서 어둡고 암울한 정서가 지배하는 이유도 시인의 이러한 시선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이러한 시인이 은연중에 드러내고자 하는 도시의 얼굴 중 하나는 가면이다.

술렁거리는 거리를 걸어간다
소음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땅
스모그가 밀려오고 사방에 경적이 울리면
떨어뜨린 성냥처럼 사람들로 뒤엉킨다
르네상스 쇼핑몰 사이키 조명 아래
댄서들이 아슬한 옷을 걸친 채 춤을 춘다
사람들은 모두 가면 하나씩 쓰고 걷는다
발바닥이 쿵쿵 울린다
지하 카바레로 들어가는 입구
모자 쓴 청년은 내게 노래방에 가자고 꼬인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오래전 이곳은 나무들이 울창했을 것이다
나무의 교훈으로 맨얼굴을 들이대도
부끄럽지 않은 숲
어둡고 고요한 밤, 나무들이 서로 몸 부비는
소리만 잠깐씩 들렸을 것이다
자정 녘 소음으로 숨이 막히는 시간
술에 취해 얼굴을 만져보니
이상한 가죽이 씌워져 있다
여기저기 나무들의 곡소리가 들려온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알고 보면 모두 선량한 사람들
따뜻한 방문을 열기 전 서둘러 가죽을 벗겨냈다
이곳은 新林이다
― <新林洞> 전문

가면은 자신과는 다른 모습이면서 또 다른 자신이기도 하다. 도시적인 삶이 가면을 요구하는 이유는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갖는 단편성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도시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서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는 언제나 필요한 일이나 요구에 얽매이게 되고, 그것은 그 사람 전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분적인 측면만을 요구하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정과 직업과 사회가 거의 일치하는 공간을 형성함으로써 전인격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관계 형성 방법인 것이다. 이러한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만남은 언제나 그 만남에 가장 합당한 부분적인 얼굴을 요구하는데, 그것이 곧 자아에게 가면을 쓸 것을 강요하는 이유가 된다.
시인이 “사람들은 모두 가면 하나씩 쓰고 있다”고 우울한 시선으로 말하는 장면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인 요구와 관련된다. 사람들은 가면에 대한 사회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자신의 본질적인 자아와는 다른 가면을 쓸 수밖에 없는 바, 이 시가 보여주는 바가 바로 그러한 현대이들의 사람의 방식에 대한 서글픈 인식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시에서, 보다 진솔한 방식의 만남을 지향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밤의 술자리까지 가면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가면을 벗을 수 있는 공간이 시인에게는 “따뜻한 방문”을 여는 순간, 다시 말해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순간뿐인 것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도시 공간에서 경험하는 이러한 가면의 삶과 ‘신림’이라는 지명이 불러일으키는 ‘울창했을’ 나무숲과 대조시킨다. “소음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땅”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 소음의 땅과 선명하게 대조되는 것이 바로 “오래전 이곳”에 있었을 나무들의 숲이다. 시인이 그리는 오래전의 이 숲에는, 지금의 도시와 같은 “발바닥을 쿵쿵 울이는” 지하 캬바레의 소음이나 사방에서 들려오는 “숨막히는” 소음은 없었다. 단지 “어둡고 고요한 밤, 나무들이 서로 몸 부비는/소리만 잠깐씩 들렸을” 뿐인 조용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숲은 또한 “맨얼굴을 들이대도/부끄럽지 않는” 공간이기도 하다. 시인이 마지막 행에서 “이곳은 新林이다”고 노래하는 이유는 그런 면에서 의미를 지닌다. ‘신림’의 ‘新’이 의미하는 바가 결코 긍정적이지 않은 것이다. 과거의 고요하고 차분하면서도 존재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도 오히려 아름다울 수 있는 “오래전 이곳”이라는 공간과 “소음으로 숨이 막히는” 현대의 도시 공간 사이의 간극을 이 ‘新’이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가면을 강요하는 현대 도시적 삶의 속석은 사람들 사이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주말의 식사>는 일 주일 동안 그렇게 만나기를 기다리는 “낯익은 그대”와의 관계의 문제를 통해 사람들 사이의 사랑이 얼마나 박제화되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낯익은 그대”는 “브라운관 속 투명한 색조화장을 한 얼굴”, 다시 말해 화면 속의 얼굴이다. 이 얼굴과 창가에 놓인 “화분”의 꽃이 동일시되는 과정을 통해 자아가 사랑하는 “그대”의 실상이 드러난다.
창가의 화분에 놓인 꽃에 대한 시인의 수사는 자못 찬란하다. “감동스러운 꽃, 모든 수사에도 화려하게 어울리는 꽃, 볕 잘 드는 곳에서 햇살을 쬐고” 있는 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꽃은 자연 자체가 가진 야생의 생명력을 가지지 못하고, “저녁 연기가 꽃모가지에 걸리면” 그냥 툭 떨어지는 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는 “어느새 다른 사연의 꽃이 꽃병에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자아에게 의미있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하룻밤에 불과한 존재, 그래서 언제든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꽃인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브라운관을 통해 만나는 “그대”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주말 저녁 식사를 하면서 잠시 쳐다보고 마는 존재. 삶의 자리 깊은 곳까지 내려와 뿌리 내리는 만남이 아니라, “정말 그럴듯하게, 주말드라마에서”만 만나는 존재일 뿐이다. 이런 박제화된 사랑이고 만남이기에, “꽃은 시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꽃은 당연히 시들어야 하고, 그래야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운관에서 만나는 “그대”라는 꽃은 결코 시들지 않는다. 살아 있는 생명이 아니라 박제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현대인이 써야 하는 가면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본래적인 자아를 그대로 드러낸 채 상대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브라운관이라는 매개를 통해 박제화된 상태로 만나는 인관관계, 도시라는 공간은 이러한 관계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전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순간적이고 부분적인 관계만으로 형성되는 관계는, 그래서 언제나 가면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2. 허무의 밑바닥

도시적 삶의 또 한 가지 특징으로 시인이 제시하는 것은 바로 삶의 허무이다. 자연의 살아있는 생명력을 지니고 존재의 본질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다면 부딪히지 않을 문제들을 도시적인 삶은 날마다 경험하게 만든다. 거기에는 존재의 본질까지 허물어뜨릴 파괴적인 힘들까지 존재한다.

바닥을 가지지 않은 삶도 있다
하늘 위의 독수리
그의 날개치는 소리를 듣고 싶다면, 그냥
가볍게 그곳으로 올라가면 된다
들쥐가 썩은 뼈에 이를 갈고 있을 때
올빼미의 울음은 더 우렁차고
밤 사이 구름이 움직이는 소리 들린다
그의 경험은 어디든 닿을 수 있다
솟구치지 못하고 바닥을 치는 마음이
비상을 꿈꿀 때
홀연히 찾아드는 어떤 소리
그러나
조용한 삶은 일찍 소멸한다
깔끔하고, 경건하게
굳어지기 전의 말랑한 영혼을
간직한 채
한 떨기 꽃대궁,
뿌리까지 잠방잠방 건너가는 물의 감촉,
그 종종거리는 발자국 소리
때론 뿌리 밑바닥까지 갔다가
제 몸 누일 자리 없어 뿌리를 빠져나와
땅 속으로 스미는 이주의 수런거림,
고통스럽다고 하지 마라
소리는 바닥이 없다
대신 소멸의 기록이 담긴
문장들이 네 몸에 새겨져 있다
- <소리무덤> 전문

도시의 삶은 끝없이 이주하는 삶이기도 하다. 어느 한 곳에 붙박이로 붙어 살면서 그곳을 고향으로 삼는 삶은 전근대적인 전통적 삶의 방식 중의 하나이지, 도시 공간에서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삶의 방식과는 멀다. 언제든지 직장을 따라, 집값의 추이에 따라, 생활 형편에 따라 옮겨앉아야 하는 삶이 바로 도시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끝없는 이주의 흔적들을 자신의 내면에 새겨나가는 삶, 그래서 “소멸의 기록이 담긴 무장들”을 몸에 새기고 다니는 삶이 바로 도시적인 삶인 것이다.
그런데 이 이주의 삶 중에서 시인은 “바닥을 가지지 않은” 삶을 그린다. 사람들은 언제나 비상을 꿈꾸지만 그것이 허무하게 꿈으로만 끝나고마는, 그래서 한없이 추락하는 삶들도 많이 있다. 이 시에 나타나는 바 “깔끔하고, 경건하게/굳어지기 전의 말랑한 영혼을 간직한” “한 떨기 꽃대궁”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특히 “깔끔하고 경건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영혼의 몰락은, 도시적 삶의 부정적 단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살아남기 위해 온갖 부정과 비리, 죄악들로 얼룩져 있는 도시적 삶 속에서, “깔끔하고 경건한 영혼”이 살아가기란 쉽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영혼에게 주어지는 현실의 삶의 “뿌리 밑바닥까지 갔다가/제 몸 누일 자리 없어 뿌리를 빠져나와/땅 속으로 스미는” 데까지 이른다. 그 삶을 시인은 소리 무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 도시에서 경험할 수밖에 없는 허무의 한 양상이다.
이러한 허무는 삶에서 가장 열정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일상의 기원>에서 시인은 삶 전체를 던지는 사랑마저 한 순간의 ‘잠’일 뿐이라는 인식을 드러낸다. 들장미가 흐드러진 동산에 누워 장미를 생각하는 소녀에게 장미는 가시가 되고 독이 된다. 그 독을 즐기기까지 하면서 미소를 만들어내는 소녀의 삶은 자신의 죽음까지도 거는 사랑의 한 방식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것을 그저 ‘긴 잠’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 과정을 거치는 시간 자체가 단지 “주름살 하나가 늘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시적인 박제화된 삶이 가져다주는 삶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 삶이 지니고 있는 허무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 ‘일상’이라는 것의 본질이 어떠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허무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아에게 잠이 사라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수면장에>는 사랑도 희망도 잃어버린 삶의 자리에서 경험하는 고통의 순간을 보여준다. 시인은 오히려 잠을 “뱀처럼 차갑다”고 표현한다. 자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으나, 시인에게 잠은 차갑게 미끌어져 나가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차가운 미끄러움 앞에 사랑도 희망도 가차없이 사라진다. “페가수으와 카시오페아” 사이의 사랑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먼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차가운 잠 앞에서는 “그리움”도 멎고 만다. 뿐만 아니라 “빈 들에서 돌베개를 찾다가/하늘에서 내려오는 사다리를 찾다가” “여윈잠”이 들고마는 자아의 모습은 하늘을 찾고 싶은 시인의 희망마저 이 잠앞에 미끄러질 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도시는 무엇일까. 각 사람들마나 그것의 의미는 다르겠지만, 결코 긍정적인 것으로만 채워진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도시가 제공하는 편리함과 경제적인 풍요로움은, 역으로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려야 할 많은 것들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시인의 표현대로 언제나 가면을 써야 하고, 숨막히는 소음에 시달려야 하며, 밑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는 삶을 경험하기도 하고, 잠도 잘 자지 못해 방황하기도 해야 하는 허무한 삶도 있는 것이다.
도시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시인에게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의미가 있는 이유는, 도시가 가진 본질적인 특징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수준으로 우리 인간들의 일상적인 삶을 내리누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시에 살면서도 자연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생명력이 충일한 삶, “맨얼굴”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자리를 꿈꾸는 시인의 꿈이 우리 시대에 의미있는 것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_ <시인시각>, 2006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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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막

시詩 2008. 4. 3. 12:09

이재훈


달빛을 받은 낙타의 그림자.
목이 축 늘어져 있다.
움직일 때마다 목젖이 패였다가 튀어나온다.
그 느린 몸짓이 아름다웠다.
내 연혁은 사막으로부터 시작한다.
기약도 없는 시간의 끝을 향해 걷는다.
바람 이는 모래밭에 귀를 가져다 대면
작은 돌들이 구르는 소리 들린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도록 귀를 짓이겼다.
돌 구르는 소리가 바람처럼 인다.
떼구루루 떼구루루,
바람이 불고 돌이 구른다.
까닭 없는 시간들이 있다.
터벅터벅 오아시스로 향했다.
몇 년이 걸렸을까.
물속에 축 쳐진 낙타의 그림자가 잠겨 있다.
내 生은 늘 저런 식이었다.
늘어질대로 늘어진 생각들.
결국 물맛을 보고 싶어 슬쩍 물속으로
몸을 담가보는 행위들.
사막의 돌은 스스로 열심히 굴렀다.
너무 작아 모래와 구별이 되지 않을 뿐이다.
돌은 의미있는 삶을 살았지만
오아시스가 죽음의 집인 줄은 몰랐다.
물속에다 제 몸을 허물었다.
모래로 지은 그의 집은 찰진 흙의 온기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으로 그는 목숨을 다해도 좋았다.
돌은 신비한 힘을 가졌다.
뭉개진 몸으로 구르는 소리를 낸다.
아주 먼 시간을 넘어 온
이방인의 귀에게까지도 들릴 만큼.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돌들이 서로 뒤엉켜
거대한 기둥을 이루었다.
투명한 돌의 몸이 하얗게 빛났다.
아득한 비명이 들리기도 했다.

_ <시향>, 200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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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

카프카 독서실

시詩 2008. 3. 23. 18:01
 

이재훈


   벽이다

엎드려 잘 때마다 이곳은

바닥이 아니라 무른 껍질이라 생각했다

배에 힘을 주면 지그시 열릴 것 같은

그 껍질을 깨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몸을 마음껏

비벼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주장해야 했다

쿵, 말문이 열리면 긴 오솔길이 펼쳐지곤 했다

한참을 걸었을 때 울창한 숲이 보였다

나는 구름을 먹고,

신성한 사랑에 대해 논했다

풀숲에는 소리가 고여 있었다

풀을 헤치니 소리가 서로 밥을 먹고 있다

갑자기 구역질이 나서

나무의 텅 빈 몸에 구름을 토했다

검은 말들이 꿈틀댔다

가련한 밤,

문신을 새기는 꿈을 꾸었다

팔뚝 위에 피리를 새겨 넣자

내 몸에서 노래가 흘러 나왔다

창밖엔 십자가가 흐른다

가로등이 떠다닌다

감정없이 장단만 있는 노래

이 방은 어둠이 몸 푸는 자리,

얼굴도 없고 가슴도 없다

빗방울도 없이

빗소리가 내리는 방

엎드려 자고 있으면

살포시 몸에 감기는

빈 말들의 뼈

   _ <미네르바>, 200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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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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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주단의 여관

시詩 2008. 3. 23. 17:55

이재훈


너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이미 네 기억은 삭제되었구나
푸른 물에서
살점들이 떨어져 내리고 빛나는 은빛
강철이 널 휘감을 때
나는 붉은 주단이 깔려 있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지

기억하지
거리에서 넌 바퀴에 깔려있었지
창자가 사람들의 발 밑에 널브러지고
너의 남은 뼈에서 벌레가 기어나왔지
흰 가운입은 자들에게 둘러싸여
앰뷸런스에 넌 실려가고
조간신문에 네 얼굴은 관념적으로
인쇄되어 나왔지
수술실로 향하는 침대 바퀴소리를
들으며 넌 깊은 잠을 잤지

붉은 주단이 깔려있는 낭하를 지날 때
방문엔 은빛 케이블이 탯줄처럼
흘러나와 있었지
방 안에선 딸각 딸각
숨 쉬는 소리가 들렸지

너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이미 네 몸은 차가워졌구나
사람들은 너의 피로 물든
붉은 주단의 여관을
딸각 딸각
클릭하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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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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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잦아들고
온 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나비 한 마리.
공중을 날아간다.

풀잎이 몸을 연다.

- 이재훈, <남자의 일생>, 시사사 2008.1.2월호

어려운 시들만 감상하지 말고 쉬운 시들도 감상해보자. 쉬운 시이면서도 좋은 시가 얼마나 많은가. 이재훈은 "남자의 일생"을 타자인 풀잎의 몸에서 떨어진 애벌레의 생으로 은유했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데/ 온 생을 바쳤다."라는 진술처럼 인생은 '그늘'이라는 유토피아를 찾아 뱃가죽이 뜯어지고 온 몸이 딱딱해지는 고투이다. 고진감래 끝에 脫却을 이룬 나비가(정신 혹은 영혼)가 날아가니 어머니이자 타자인 "풀잎이 몸을 연다"로 마쳤는데 이야기구조가 좋다.

_ 김백겸, <정신과표현>, 2008년 3-4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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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혜정

부분과 파편과의 결함 외엔 아무 것도 아닌 물화된 관계는, 에로틱하다기보다는 포르노그래픽하다. 일찍이 우리 시단에서 이 물화된 관계의 불구성에 대한 시적 담론을 가장 의미있게 생산한 시인은 단연코 채호기이다. 사랑과 생식이 가능한 성이 아니라, 에리히 프롬이 ‘소도(sodomy)’라 언급한 불구적 성이 그의 시에는 가로놓여 있다. 영혼과 정신, 육체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찢겨진 채 달리고 있으며, 번성하는 자본주의는 무한히 소비될 수 있는 쾌락의 파편을 생산한다. 인위적으로 성적 상상을 자극하는 광고, 영화, 사진 등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시스템은 거의 방류의 수준으로 성의 기표들을 쏟아놓는다. ‘충동’의 문법을 따라 현대인은 철저히 물질을 좇아간다. 갈증과 매혹이라는 에로틱한 유인력은 잔혹하게 파괴되고, 오로지 감각의 교환에 다름 아닌 음란에 우리는 길들여져 있다. 이러한 시대의 무의식을 재현하는 젊은 시인들의 스타일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기로 하자.

너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이미 네 기억은 삭제되었구나
푸른 물에서
살점들이 떨어져 내리고 빛나는 은빛
강철이 널 휘감을 때
나는 붉은 주단이 깔려 있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지

기억하지
거리에서 넌 바퀴에 깔려있었지
창자가 사람들의 발 밑에 널브러지고
너의 남은 뼈에서 벌레가 기어나왔지
흰 가운입은 자들에게 둘러싸여
앰뷸런스에 넌 실려가고
조간신문에 네 얼굴은 관념적으로
인쇄되어 나왔지
수술실로 향하는 침대 바퀴소리를
들으며 넌 깊은 잠을 잤지

붉은 주단이 깔려있는 낭하를 지날 때
방문엔 은빛 케이블이 탯줄처럼
흘러나와 있었지
방 안에선 딸각 딸각
숨 쉬는 소리가 들렸지

너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이미 네 몸은 차가워졌구나
사람들은 너의 피로 물든
붉은 주단의 여관을
딸각 딸각
클릭하고 있었지

― 이재훈, <붉은 주단의 여관> 전문

위의 시는 ‘붉은 주단의 여관’으로 비유되는 성적 공간, 어쩌면 ‘은빛 케이블이 탯줄’처럼 늘어져 있는 인터넷 속의 가상공간에서 넘실거리는 것일지도 모를 쾌락을 노래하고 있다. 이미 죽어버리고 삭제되어버린 ‘너’는 이상한 성적 교살의 장면을 상상하게 한다. 그녀는 단순히 차갑게 이미지로 응결된 쾌락의 이미작 아니다. “푸른 물에서/살점들이 떨어져 내리”는 풍경, “사람들의 발 밑에 널브러”진 ‘창자’, “너의 피로 물든/붉은 주단의 여관”을 통해 보면, 그녀는 ‘관념’ 저 너머에 저장되어 있는 욕망, 궁극적으로는 대중의 꿈으로 불려나온 잔혹의 기표이다. 이 불모화된 쾌락, 섹스와 죽음의 감각은 원초적인 상흔처럼 현대 예술 속에 흐릿하게 남겨져 있다.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는 심리분석용어가 말해주듯이, 난폭한 광기와 욕망의 이미지는 현대시에서 대단히 빈번하게 분출한다. 이러한 포르노그라피의 전략은 인식과 지시의 언어에 대한 광범위한 회의와 연관되어 있다. 즉 점점 더 증가하는 감각적인 언어, 명징한 의미로 분석되길 거부하는 시적 스타일은 극단적인 잔혹으로 돌변할 수 있는 충동과 감각을 좇아간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탈정치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잔혹해진 쾌락은 현대문화의 거울효과 혹은 일종의 마취증을 영사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정치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렇듯 비이성적인고 ‘장소 없는’ 욕망의 담화는, 실제로 현대문화의 풍경과도 상당히 흡사한 바가 있다. 하이힐과 미니스커트로 도시를 휘젓고 남성의 시야를 ‘공격’하는 마네킨같은 여자들처럼 그들의 시는 인공적이고 도시적이며 가학적이다. 마치 포르노그라피처럼 현대시 속에서도 육체는 다리, 얼굴, 배꼽 등으로 다자인되어 독자의 욕망을 공격한다. 더 나아가, 육체의 기관성을 금속성으로 바뀐다. 날카롭게 조각나고 분해된 기계성, 금속성의 이미지는 자아의 심리적 육체의 파편성을 ‘전시’한다. 인공적으로 복제된 육체, 부품으로 잘려나간 기관들, 광택질의 머리칼, 뻣뻣한 동작으로 움직이는 앤드로이드의 이미지들은 꿈의 스크린 속에서 끝없이, 조각과 부분으로 흩어져 방류된다. ‘딸깍딸깍’ 손가락이 선택하는 이미지처럼, 끝없이 옷을 바꿔 입듯, 기호적 소비를 요구하는(혹은 연출된) 육체는, 파트너의 미끄러짐, 즉 끝없이 환유를 따라가는 포르노그라피와 유사한 원리에 지배받는다. 극단적으로 분해된 기표들의 조합들은 현대인의 지적인 병증과 자의식의 파산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파편화는 끝없는 주체/세계의 틈을 벌림으로써 공포의 나락으로 바뀌기도 한다.
사회적 관계를 전복하고 사유의 형식을 공격하는 포르노그라피의 전략을 우리는, 하드코어적인 감각을 통해 현대인의 딱딱하고 차가운 심장의 공포를 노래하는 현대시 속에서 익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감각의 악귀’와도 같은 잔혹한 육체숭배는 현대시의 곳곳에서 출몰한다. 공적인 자아, 정체성을 무시하는 포르노그라피가 근대의 미학에 승리한 현대의 미학을 대변하듯, 인격적 전체성을 호명하는 사랑이 아니느 부분과 파편, 대체를 요구하는 페티시즘은 오늘날의 젊은 시인들의 감수성을 요약한다.

- 허혜정, <딩아돌하>, 2008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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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 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잦아들고
온 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나비 한 마리.
공중으로 날아간다.

풀잎이 몸을 연다.

- 이재훈, <남자의 일생> 전문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이다. 울고 웃고 부대끼는 삶. 언뜻 언뜻 비추는 따스한 햇살 같은 행복감이 삶의 순간을 채우고 있기는 하지만, 삶은 지난한 불행과 고통을 경유할 때만 생의 화려한 날개 짓을 허락한다. 언구렁청에 빠져 허우적이는 삶. 아스팔트 위를 기어가야 하는 삶. 생은 고통의 극한을 체험한 자에게만 혹은 생에의 의지가 꺾이지 않는 자에게만 삶을 비약시켜 한 차원 높은 세계로 이입시킨다. 살아남기. 기고 또 기어 뱃가죽이 다 헤지고 뜯어져도 생을 부여안고 살아남기. 애벌레에서 고치로의 변성. 고치 속에서 우화를 꿈꾸기. 화려한 날개 짓으로 공중으로 날아오르기.

이재훈의 「남자의 일생」은 나비의 우화과정을 시적 모티브로 하여 이 시대에 남자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지치고 고단한가를 우회적으로 묘파하고 있다. 아니 시인은 나비 알레고리 속에 생에의 과정 전체를 담아내고 있는데, 그것은 처절한 생존게임과 유사하다. 풀잎에서 아스팔트로 떨어지기. 안온한 세계에서 나락으로 추락하기. 떨어져 추락한다는 것은 한 세계(좋은 환경)에서 또 다른 세계(열악한 환경)로 던져지는 순간인데, 시인 이재훈은 추락하는 것들 속에는 항상 날개가 있다는 것을 예증하고 있다. 추락하는 것은 아름답다. 추락하는 것은 비상이다. 추락은 존재의 심연에 이르는 아름다운 영혼의 몸짓인데, 그것은 생살 뜯어가며 극한의 고통을 인내한 연후에 찾아지는 안식이다. 몸 편안히 쉴 안식처인 그늘을 찾아 평생을 기고 옮겨 다니다가 생은 의미를 찾고 안식을 찾는다. 이제 더 이상 언구렁청을 기어 다니지 않아도 된다. 고난과 시련을 견딘 후 비로소 꿈꾸는 우화. 고지가 바로 저기다. 몸의 변성과 견고한 의지. 고치 속에서 변태變態. 돋아나는 날개. 한 마리 화려한 나비가 하늘로 자유롭게 비상 중이다.

인간의 삶도 나비의 그것과 같지 않겠는가. 생이란 진창 속에서 화려한 꽃을 피우는 연꽃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기다리고 또 기다린 후 고통에 고통이 더해진 후 인내하고 또 인내한 후 생의 날개 짓은 더 높고 더 아름답고 더 숭고하지 않겠는가. 이재훈의 「남자의 일생」은 생에의 형식과 삶을 소중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의식을 치밀하게 내파시키고 있다. 밀랍으로 만든 이카로스의 허망한 날개 아니라, 추락하는 고통 속에서 견고한 생에의 의지로 키워낸 날개로 하늘 저 높이 날아오르고 있다.

-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8년 3-4월호에서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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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봉

배한봉, 이재훈



무엇인가를 주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떤 방어력을 가지고 있어야 설득력 있는 일이다. 방어력은 어디로부턴가 공격받을 때 생기는 에너지일 것이다. 나는 배한봉 시인과 대담을 진행하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주장과 그 방어력은 어디로부터 나왔는가가 궁금해졌다. 언어는 자연의 부르짖음에서 출발한다는 루소의 언명은 이를 잘 뒷받침해 주는 말이다. 물론 이는 언어의 기원에서 비롯된 말이긴 하지만 지금의 진화된 언어도 자연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곤 한다. 굳이 물질문명 사회의 한계에 대한 대안으로 얘기하지 않더라도 자연만큼 인간에게 큰 스승은 없다. 이미지도 그 이미지를 파생한 어떠한 기교도 날 것 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자연친화적이다. 문명사회가 자연친화적인 기능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더 증폭될 것이다. 실리콘벨리의 많은 과학자들이 자연주의자라는 점이나 동양뿐만 아니라 미개발지에 대한 관심, 레오폴드나 소로우,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스콧 니어링 같은 이들에 대한 애정어린 찬탄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환경 문제가 날로 심각해져 가는 작금의 상황에서 인간이 자연에 가한 가혹성의 무모함은 더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제정복자로서의 인류 역사는 새로 쓰여져야 한다. 개인적으로도 자연주의자들 앞에서는 그 어떤 합리화의 방편이 생각나지 않는다. 결빙으로 정제시키는 맑고 투명한 저 힘 앞에 무릎꿇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외로움에 대한 고백은 너무나 절실한 울림이기 때문이다.

배한봉 시인은 경남 창녕에서 서울로 올라와 주었다. 그와 하룻밤을 같이 지내면서 자연에 대한 애정은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또한 깨달았다.

이재훈:지금 우포는 어떻습니까. 이제 봄기운이 완연했을 텐데요. 습지라는 특수한 환경이 가지는 생장군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포에는 완전히 봄이 찾아왔죠?

배한봉:우포의 봄소식은 늪 가장자리의 둑과 근처의 밭이나 논두렁에서 먼저 만날 수 있습니다. 냉이, 토끼풀, 고랭이, 소루쟁이, 개망초 등이 싱그러운 봄빛을 안겨주죠. 얼마 전부터 창포나 갈대, 부들 같은 식물과 갯버들이 새순을 밀어 올리기 시작했으니까 미구에 자운영꽃, 제비꽃 등의 꽃잔치를 만날 수 있겠네요. 이 무렵이면 소금쟁이, 물댕땡이, 물방개, 게아재비들이 수면에서 봄을 환호하며 춤추는 것도 함께 볼 수 있을 거예요.

이재훈:독자들을 위해 경남 창녕의 우포늪을 간략히 소개해 주세요. 우포늪을 지키기 위한 민간 단체들도 여럿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배한봉:우포늪은 1억 4천만년전 중생대 전기 백악기 때, 우리나라 지형의 탄생과 그 기원을 같이 하는 국내 유일의 자연 늪입니다. 현재 우포늪은 우포, 목포, 사지포, 쪽지벌 등 4개의 늪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서울 여의도와 맞먹는 70여만 평에 달하는 이 광활한 곳에는 1천여 종의 생명체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수서 식물의 보고(寶庫), 살아 있은 곤충박물관, 철새들의 낙원으로 불리기도 하죠. 여름이면 창포와 갈대, 생이가래, 개구리밥, 마름, 자라풀 등이 늪을 거대한 초록융단으로 만들지요. 또 여름 장마가 지난 뒤부터는 지름이 2~3m에 달하는 가시연이 꽃을 피운답니다. 잎을 뚫고 나와 꽃을 피운 이 장관을 놓치지 않으려고 전국에서 많은 시인, 화가, 사진가들이 몰려들더군요. 겨울엔 기러기, 고니, 오리류 등의 철새들이 생동감 넘치는 군무를 펼칩니다. 4계절 내내 생명잔치가 끊이지 않는 곳이 바로 우포늪이랍니다. 관련단체는 창녕환경운동연합푸른 우포 사람들 등이 있습니다.

이재훈:선생님의 이력을 보면 등단은 좀 늦은 편이지만 일찍부터 작품활동을 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 박재삼 선생으로부터

「경인문예」로 추천을 받았지만 잡지의 폐간으로 불우한 문학환경을 겪다가 다시 재등단 하지 않았습니까. 「경인문예」로 등단한 시절부터 재등단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셨을텐데요. 선생님의 문학적 연대기라고 할까. 그런 것들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배한봉:오래 전 이야기를 하려니까 많이 쑥스럽네요. 처음엔 소설을 쓰고 싶어했죠. 고교시절 학생잡지의 학생작품공모에 단편이 당선되었던 것이 계기였죠. 그러다가 84년 서울살이 시절에 박재삼 선생님을 만나면서 시로 바꿨지요. 그때 선생님의 후배가 관여하던 그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는데, 두어 번 더 나오다가 그만 폐간돼버렸어요. 별로 유명한 잡지도 아닌데다가 또 그 후 열심히 신춘문예를 준비했지만 몇 번인가 최종심에서 탈락하고는 상심해서 시를 쓰지 않았지요. 80년대 후반에 고향인 마산으로 내려와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시가 안 되더군요. 초심(初心)으로 돌아가 동인활동을 하며 습작하다가 93년에 다시 박 선생님 추천을 받았는데, 이번엔 문단에서 그 잡지를 인정해주지 않았어요. 시를 써놓아도 발표할 곳이 없었으니까요. 처절한 좌절감에 사로잡히던 그런 때였어요. 다시 두 번인가 신춘문예에 도전했는데 또 최종심에서 떨어졌어요. 그동안의 작품을 다 버릴 수는 없으니까 이젠 시집이라도 한 권 묶어놓고 독자로 남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시전문잡지를 고르고 골라 신인상에 응모했는데 마침 당선이 되었어요. 벼랑 끝에 서 있는 내게 마지막으로 다가온 생명줄이라고 하면 쉽게 이해될까요?

이재훈:선생님의 시는 기본적으로 서정의 힘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서를 객관적 상관물을 빌어 표현하는 것은 시가 발생한 이래로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방법론입니다. 이는 서정의 힘이 바로 시의 본질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시의 양식적 변화는 분명 필요하다고 봅니다. 인간 삶의 양식이 변한 만큼 시의 양식도 변하기 때문이죠. 시의 양식적 변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배한봉:맞습니다. 인간 삶의 양식이 변하면 자연스레 시의 양식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변화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시인들의 의식이 인기나 유행을 좇아가서는 안됩니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확고한 자기 신념이 있어야 됩니다. 저도 습작시절엔 여러 형식을 실험했던 적이 있습니다. 결국 남은 것은 하나도 없지만…(웃음) 인기나 유행이 한순간이듯 인기시․유행시는 소모품에 불과합니다. 제 스승님의 간곡한 가르침이기도 한 이 점을 저는 가장 경계합니다. 유행에 휩쓸리거나 인기를 얻기 위해 고객의 입맛에 맞춰 생산하다보면 시의 큰 미덕인 진정성에 결함을 갖게 되고 생명성을 잃게 됩니다. 이것은 고정관념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시인은 늘 새로운 세계를 향해 오감을 열고 있는 존재니까요. 그리고 또 시인으로써의 자기 세계관이 없어집니다. 세계관이 없는 시인이 생명력 있는 시를 쓸 수 있겠습니까? 좋은 시와 인기시․유행시와의 변별점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어떤 세계관으로 무엇을 어떻게 노래할 것인가는 그 시인만의 개성이고, 또 특질이 될 것입니다. 시의 양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인의 의식 아닐까요.

이재훈:제가 이 질문을 드리게 된 것은 선생님 시의 특질을 말하려고 하다가 선생님의 생각을 우선 듣고 싶어서입니다. 우선 선생님의 시는 자연에서 대상을 찾고 있고 그것을 운용하는 방식도 아주 세밀한 전통적인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 시의 특질은 방법론적인 것보다는 시가 추구하는 정신적인 특성에서 찾아질 것입니다. 우선 배한봉 시인은 자연주의자다 라는 말에 동의하십니까.

배한봉:자연주의자이긴 하지만 문명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장자」에서 19년 동안이나 칼을 갈지 않고서도 신들린 듯 소를 잡고 살점을 발라냈다는 포정(庖丁)의 기즉도(技卽道)를 자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문명세계를 어떻게 읽고 노래할 것인가 하는 점을 많이 생각합니다. 컴퓨터나 모든 기계들의 구조를 꿰뚫고 틈없는 데서 틈을 보는 포정의 칼날 같은 기즉도가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것은 곧 세계와 문명에 대한 재해석과, 가치관과 세계관에 대한 사고 양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하자는 것입니다.

도로나 루소 그리고 헤세가 기계문명에 반기를 들고 자연을 찬미했던 것은 유토피아에 대한 꿈이 절실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풍요한 물질문명의 공허는 오늘의 우리를 고향을 상실한 실향민으로 방황하게 합니다. 가난에 찌들린 과거의 시골, 현실적 고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의 가족적 공동체로 엮어주는 이상적 삶의 고장인 이상향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이나 플라톤의 공화국, 헤세의 나무들 등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유는 바로 유토피아의 가장 필요한 조건을 말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역시도 이런 이유 때문에 자연에서 대상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연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니까요. 전통적 방식을 선택한 것은 제가 추구하는 양식이나 정서적 호흡, 체질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과 잘 맞기 때문이죠. 또 한 가지는 전통적 방식 속에도 분명 새로운 것이 있다는 점이지요. 많은 시인들이 이미 낡았다고 던져버렸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새로운 감동이 살아 있습니다. 사물에 대한 통찰력이랄까 깨달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라의 불상이나 석탑을 보고 21세기를 읽어낼 때의 그 팽팽한 긴장, 그 팽팽한 힘과 같은 것이죠.

이재훈:근래에 지겹게 떠돌던 담론 중의 하나가 생태시 논의였습니다. 그것이 물질 문명사회의 한계에 대한 대안적 가치로서는 분명 옳은 것입니다. 문제는 반성적인 사고 없이 우후죽순으로 그것을 지향하는 것에 있다고 봅니다. 반성적 사고가 없는 작품은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첫 시집 「흑조」의 자서를 보면 땅의 정기와 신령스러움, 순결성은 언제나 내 경외의 대상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선생님의 농경사회가 가지는 땅에 대한 믿음이 반성적 사고의 토대 위에서 세워졌다고 생각됩니다. 작품 속에서도 그러한 부분들은 잘 드러나 있지요. 특히 「멸포」, 「화천리의 가을」, 「낙안읍성시편」 같은 작품을 보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 세대의 고민과 역사적 고민까지도 아우르려는 면모가 보입니다. 자연에 대해, 땅에 대한 화두가 나오기까지의 정신적 추이를 듣고 싶습니다.

배한봉:저는 낙동강변의 농촌에서 태어났고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고향 마을은 풍요로운 들판과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과 더불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낙동강이 홍수로 범람할 때면 그 풍요로운 들판이 침수되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는 일인(日人)들의 소작농으로 전락했던 불행한 세대가 바로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였습니다. 그 후, 우리 세대는 별로 실감 못하지만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시작한 새마을 운동 바람이 불면서 신작로가 생기고 관개사업을 벌였고, 90년대 우리의 농촌은 농공단지가 조성되면서 황폐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농촌의 도시화는 옛날과는 다른 삶의 풍요로움을 안겨준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릴 때 보았던 자연에 대한 겸손과 대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 일에 대한 신명보다는 그저 삶을 위한 맹목이 사람을 지배하기 시작하더란 것입니다. 도시생활을 해보니까 그런 것을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되더군요. 첨단 기술 문명은 비정한 경쟁과 투쟁을 강요하잖아요. 그 속에서 쟁취한 물질적 성공 뒤에 숨겨진 고독하고 공허한 문명의 실존은 물질적 세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적 무거움의 고통이고, 유토피아에 대한 상실감이고, 인류 미래의 실상을 알몸으로 보여주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유토피아에 대한 꿈이 더 절실하다고 봅니다. 경제 지상주의적(물질적) 가치관과 인간 중심의 윤리관(개인주의적 인생관)은 정복과 굴복, 승리와 패배의 원리가 지배하는 인간관계를 형성시켰으니까요. 여기서 저는 인간과 자연’, 삶과 정신이 교감하고 하나로 조응하는 큰 질서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자연에 대한 정복의 이념이 지배해온 인간 중심주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하지 않으면 발레리나 토인비가 말한 문명의 죽음을 우리 세대나 우리 자식들 세대에서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이것은 곧 인류의 미래이기도 하죠. 시는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구원의식 같은 게 있다고 확신해요. 제가 시의 방법론적인 것보다 정신적 면을 더 중요시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질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으로 변모될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공생적 삶으로 가는 한 출구로써, 그리고 민족연원에 가 닿는 한 표상으로써 자연과 대지가 와 닿았던 거예요. 이것이 향토적․토속적 정서와 만나면서 정신의 축을 이루게 된 것이지요.

이재훈:자연을 대상으로 사용할 때 중요한 것은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향토적․토속적인 정서가 정신과 맞닿는 지점이지요. 요즘은 병든 자연을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연까지도 병들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 물질문명의 폐해를 말하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선생님의 시는 자연의 긍정적인 부분들을 들추어냅니다. 이번에 발표한 「가시연꽃」이나 「얼음꽃」은 아픔을 통해서 아름다움에 이른다는 자연의 섭리와 삶의 이치가 잘 조화된 시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에게는 자연이 거대한 스승인 거지요. 선생님 시의 변별점은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겁니다. 자연 밖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직접 자연 안에서 생활하고 체험한 삶의 산물이니까요. 제 개인적으로도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투사로서 자연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연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을 통해 자연을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의 몇몇 시들 중에 자의식이 너무 강한 인상을 받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자연을 완벽한 교훈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배한봉:아주 예리하시군요.(웃음) 가끔씩 저도 그런 점 때문에 망설일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포늪 근처에 우거를 마련하고부터는 오히려 담담해졌습니다. 첫 시집 「흑조」가 대개 낙동강변의 삶이었다면 최근의 시들은 우포늪과 관련된 것이 많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체험(체험을 통한 상상력)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체험 없는 상상력은 엉터리 환상을 심어줄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무엇인가에 대한 열망이 체험을 만들고, 그것이 육화되었을 때 시를 탄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절실함, 달리 말해서 구체화된 자기 내면의 소리가 상상력이라는 날개를 달고 비상했을 때 시의 진정성을 확보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선험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다양한 경험을 통해 축적된 사유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이런 상상력이나 사유체계가 詩로 태어났을 때는 이미 외부의 여러 가지 소산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협심증에 걸리거나 흑보기[斜視]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저 역시도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투사로서 관점을 만들고 바라보는 것은 경계합니다. 다만 그것이 육화되었을 때는 이데올로기라기 보다는 삶 그 자체이고 거기서 발생한 에너지를 분출해 내다보면 그게 이데올로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시인들은 이렇게 산 체험을 통해 육화된 에너지의 분출과 재생성과정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자기 세계관을 확장시켜 나간다고 봅니다. 기왕 이데올로기 문제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요, 자연은 단언컨대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우리가 별을 바라보고 헤아리는 것조차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립니다. 태어나고 죽는 것, 이 우주의 순환질서는 스스로 그러함(自然) 그 자체로 보아야 합니다. 자연조차도 정복할 수 있다는 인간중심주의적 횡포가 얼마나 어리석고, 결국에는 얼마나 무력한가를 깨달을 수 있는 존재도 역시 인간입니다. 문학 담론에 있어서 생태시, 혹은 생명시 논의가 무성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연유일 것입니다. 저는 이런 논의가 일회성이 아니라 꾸준히 이어져 가기를 바랍니다. 자연은 우리 모두에게 거대한 스승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육화시킬 수 있다는 것, 저는 이 열망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대해 매우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재훈:여담입니다만, 계속해서 우포늪에 사실 생각이십니까?

배한봉:현재는 다른 곳으로 이사할 계획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살이는 늘 가변적이잖아요. 전에 창원에 살 때도 그랬지만 어디 가서 살던지 간에 늘 손에 흙을 묻히면서 살 겁니다. 현재 고향에 있는 조그만 과수원 농사도 계속 지을 거고, 아이들에게도 대지적 삶을 체험하도록 계속 도와주고 싶군요.

이재훈:마지막으로 정신의 또 다른 한 우주를 창출하기 위해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배한봉:시인은 창조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애정이 각별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작년 늦가을에 제 홈페이지를 만들면서 이런 산문을 남겼습니다. 저는 햇빛을 퉁기는 잎들의 가락과 조응하면서 그 자체로 생명인 것들, 또는 툇마루 판때기에 배인 시간과 같은 것들에 혈육의 정을 담아 노래하려 합니다. 새로운 좌절과 치열하게 싸움도 하면서 정신만큼은 살아 있는 그런 시, 그런 시인이 되도록 용맹정진(勇猛精進), 또 勇猛精進할 것입니다. 절벽과 절벽 사이의 길, 이 길 위에서의 목마름, 이것이야말로 창조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즐거운 고통이며, 또 다른 한 우주로의 변신이 시작된다는 증표일 것입니다. 우포늪은 앞서 이 시인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연을 통해 삶의 이치를 다시 깨달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 이 거리를 좁혀 준 것이지요. 그래서 틈날 때마다 늪길을 산책하고 명상하고 늪에 사는 무수한 생명체들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지요. 마치 똑 같은 대지에 돋아난 풀이지만 작년 봄의 풀과 올해의 풀이 다르듯이 정신의 영역도 그렇게 변하는 것이겠지요.

이재훈:이것으로 현대시 대담을 마치겠습니다. 오랜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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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일생

시詩 2008. 3. 6. 11:25

이재훈


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 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잦아들고
온 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나비 한 마리.
공중으로 날아간다.

풀잎이 몸을 연다.


_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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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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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

시詩 2008. 2. 27. 12:09

이재훈


그대는 울고 있는 게 아니다
단지 태양을 보지 못했을 뿐
그러한 밤들이 지나고 있었다
피해야 할 것들을 피하지 못하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
어떤 멋진 말을 해도
바보처럼 보이는 그 순간에
비 맞고 서 있는 그대의 붉은 눈을 본다
그러한 밤들이 지나자
그대는 웃었다
대문 안까지 조용히 들어와
문만 열면 바라볼 수 있게 웃었다
너도 슬프다고 말해 주려다가
침묵했다
느리고 느린 이별의 발
말을 걸면 할 말이 너무 많아져
말없이 보내야 했던 밤
나는 몰라도 꽃은 알 것 같았다
검은 구름이 흘러가고
햇살이 눈동자에 와 닿는다
그러한 밤들이 지나고 있었다


_ 포에지 충남 2005년,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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