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현대적 일상에 대한 순례자의 보고서

이재훈의 시 세 편은 새로운 개성을 시도하고 있다. 현대 도시에 대한 신화적인 발상 속에서 몽상의 새로운 몸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바슐라르가 꿈꾸었던 4원소의 자연친화적인 몽상은 현대 도시의 콘크리트와 네온사인과 TV 앞에서는 맥을 추기 어렵다. 벽난로에 조용히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불과 고양이의 나른한 기지개 속에 부풀어 오르는 공간, 흔들리는 수풀 사이로 나지막이 웅얼거리며 흐르는 시냇물과 같은 몽상을 도시의 어느 곳에서 구할 것인가.

저는 매일 매일 똑같은 무늬를 짰어요.
이 세계의 무력함과 무모함.
제 주위엔 살인도 있고
죽음도 있었지만
제겐 큰 감흥이 없어요.
저는 하늘을 날고 있는 제 모습을 짜고 싶었어요.
저 먼 세계를 비상하는 영혼의 고난함을 짜고 싶었어요.
제겐 낙원도 있었고,
제가 태어나기 전의 고향도 있었어요.
몽상도 죄가 되나요.
― <다정한 재봉사의 재판> 부분

세상 사람들에 의해 갇힌 채 세상의 잔혹함에 대한 똑같은 무늬를 짜도록 강요받던 재봉사는 시인의 입장을 대변한다. 시인은 “태어나기 전의 고향”을 지닌 자, “먼 세계를 비상하는 영혼”이라고 한다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하이데거의 어투와 썩 비슷할 것 같다. 재판을 받고 화살을 등에 맞으며 고난을 겪던 시적 화자는 이제 “문명의 숲”에 들어와 고뇌에 찬 어조로 선언을 한다. 문명의 비만한 이미지들과, 이교도들의 숭배와, 부활의 기적이 일어날 가망이 없음을 말하며, “이제 내 몸이/ 잠자는 자들의 첫 음식이 된다면 좋겠”다고 고백한다. 재판이 아닌 순교를 택하는 것이다.
이재훈의 세 시편은 특정한 캐릭터로서 시적 화자를 내세우고 현대 도시 문명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을 하나의 콩트처럼 구성해낸다. 그 가운데 <다정한 재봉사의 재판>은 현대 문명의 일상에 대한 보고의 첫 장이자, 선언문처럼 읽힌다. 문명의 숲에서 몽상을 꿈꾼 죄로 순교하는 재봉사가 그 선언자이다. <댄디보이>에서는 TV를 보며 브라운관 속 ‘당신’에 빠져 기다리는 ‘댄디보이’가 등장하고, <스토커>에서는 “천사의 눈을 가진 그녀”의 뒤를 밟으며 “마주볼 자신” 없이 숨어 보는 ‘스토커’가 나온다. 시적 화자로 등장하는 이들은 현대 사회 속에 고립되어 타인과 온전히 소통하지 못하는 개인들의 분신이자 작은 자아들이다.

나는 스타일리스트. 당신은 나의 관객.
원두커피를 내려 블랙으로 마시고
잠옷 바람으로 스텝을 밟는다.
― <댄디 보이> 부분

우리가 TV를 보고 그녀가 브라운관에서 연기나 음악을 하는 것일 텐데, 어느 순간 욕망은 모방되고 시선은 전도된다. 그녀가 관객이 되어 나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TV 속에 등장한 행동과 사물들은 실제처럼 느껴지고 나의 현실과 그 가상현실은 뒤섞인다. 다시 그 가상이 현실에 접속될 때까지 “지루한 기다림의 상상”을 하는 시적 화자에게 일상은 “가부좌를 틀고 퍼포먼스”를 하는 시간이 된다.
<스토커>에서도 시적 화자는 그녀의 뒤를 밟으며 “내내 눈동자를 기억”한다. “댄디보이”와 마찬가지로 “스토커”도 대상에 대한 일방적인 관계라는 것은 동일하다. 그 일방적인 관계는 대상에 대한 ‘지루할 만큼의 기다림’과 간절함을 동반한다. 또한 ‘재봉사’의 순교와도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순교도 누군가를 대신하거나 무엇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지만, 정작 그들은 순교자의 희생과 가치에 대하 모르기 마련이다. 역시 일방적인 것이지 교환 관계가 아닌 것이다. 즉 이러한 일방성은 자본주의적인 교환처럼 등가의 교환이거나 더 큰 이익을 남기기 뒤한 잉여의 교환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나의 것을 바치는 헌신이거나 희생의 불균등 교환이다.
<스토커>에서 시적 화자는 그녀가 숨기고 있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을 읽어주고, 그 몸짓을 해석한다. 이 시에서 스토킹은 상대를 괴롭히거나 집착하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과 관계 맺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

버스 안에서 그녀를 쓴다.
멀미를 참아 가며
옆에 앉은 아저씨의 눈초리를 받으며.
이제 벨이 울리고 내릴 시간이다.
그녀가 사는 세상 속으로 놀러갈 시간이다.
그녀가 사는 세상을 쓸 시간이다.
― <스토커> 부분

이재훈의 시에서 알게 된, 일상을 히치하이킹하는 두 번째 방식은 분신술이라고 해 두자. 그러나 그 분신들은 진지하기 짝이 없는 캐릭터들이다. 그들의 육체를 통해 시인은 순례자의 보고서를 쓰고자 하는지도 모르겠다.

_ <시현실> 2009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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