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인들의 서정성 변모를 중심으로


김지선


1. 서정성 논란과 서정의 변화 

2006년의 시단은 서정시 논란으로 뜨거웠다. 환유적, 환상적, 언어 분절의 심화 등의 키워드를 특징으로 하는 젊은 시인들의 시를 "다른 서정"으로 지칭하며 시의 지평을 넓힌 시로 지지하는 쪽과 이들의 시에 회의적 시선을 드리우며 전통을 잇는 서정시를 옹호하는 쪽의 열띤 논쟁이 오고 갔다. 서정시에 대한 논란은 서정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담론을 통해 우리의 시대성을 담아내는 장르로써 서정시의 지평과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현재 우리 시가 배태한 서정의 질에 대한 회의가 담긴 문제이다.
"다른 서정"에 쏟아지는 부정의 시선은 무엇보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의식이 없으며, 놀이, 유희에만 경주하는 기법의 시라는 점에 집중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 시는 중심부재의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로서의 자기 정체를 회의하고 고민하는 시대성을 담지한 시로서의 의의를 지닌다는 평가 또한 받고 있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상당부분 시에 접근하는 독법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새로운 서정"의 가능성에 대한 성급한 판단에 앞서 우리의 시단은 시의 독법간의 단절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반시적이며 혁신적 언어의 사용과 기법이 이들 시의 성취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들 시의 일부는 팽팽한 시적 긴장감을 찾을 수 없으며 도식성과 반복성에서 오는 지루함이 상투성으로 굳어지고 있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서정과 반서정의 대립이야말로 문학사에서 되풀이 되어온 쟁점이다. 이러한 시의 반성과 전망의 모색을 통해 문학사는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논쟁은 서정과 반서정의 논란이라기보다는 서정의 확장이라는 변화의 지점에서 나타나는 충돌의 양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논란이 재래적 서정성의 재구축을 위한 노력으로 환원된다면 이는 다원화된 시의 양상을 획일화하고 단순화시킬 위험을 안게 될 것이다. 새로운 시의 화법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논의가 전통 서정시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촉발되어서는 안 된다. 시가 시다움을 잃어버리지 않을까라는 우려의 목소리에 서정의 질에 대한 고민이 실려야지 기존 시에 대한 권위와 고집이 담겨서는 위험하다.
장르는 무소불위의 권위나 고정불변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는 굳건한 실체가 아니다. 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사회와 역사의 장에 부딪히며 각개전투를 해 나가는 사이에 마모되고 잘려나가며 새롭게 형성해나가는 과정의 산물인 것이다. 변화하지 않는 고정불변의 정체성이야말로 서정시가 지닌 고질적인 병폐가 될 것이며 관습적 틀에 안주하려는 안일함이 될 것이다. 이들의 논의가 재래적 서정으로의 후퇴라는 퇴보로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는 작품 하나 하나에 대한 질의 반성과 더불어 현대적 삶과 조우하여 빚어내는 시적 주체의 다각적인 삶의 양상과 반응, 그에 따른 시적 변화를 감지하고 살펴보려는 노력이 불가결하다.


  2. 풍경, 주체, 시선의 변화

풍경은 오래도록 서정의 원천이었다. 시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자아소멸의 시점에서 시작되어 세계와의 균열된 틈이 없는 조화와 화합의 계기가 되거나, 인간의 세계를 드러내기 위한 해석된 자연이었다. 박라연의 시에 자연은 적극적으로 해석된 자연으로 나타난다.
 
매 순간 태어나고 죽는
뗏장 묻을 시간도 문상의 시간도 없는
지상에서 가장 단명한 목숨인
물, 속에 어룽대는
얼굴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며
어이! 이 사람아!
오래 사는
몸값으로 죄조차 짓지 않는다면
어찌 산목숨이겠는가?

내 몸 위에서 반짝이는 저 햇살들은
대쪽같이 살겠다며 저를 분질러버린 이들이
세상 그리워
눈부시게 다시 한번 왔다
가는
혼불이라네
아무렴!
―박라연, [영산호湖 생각], [우주 돌아가셨다], 랜덤하우스 중앙)

위 시의 발원지는 인간과 자연의 전도된 시선이다. 완전무결한 우주적 존재가 사유하는 인간은 찰나라는 순간을 통해 영원으로 회귀하지 못하는 연민의 대상이다. 우리는 이 무한한 너그러움 속에서 위안을 받을 뿐 아니라 불완전함마저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겉으로 완전무결해 보이는 이 시선은 인간적 해석에 의해 가능할 뿐이다. 이 거시적 시선이 우리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이분법적 대립이라는 몇 가지 고정된 전제가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인간은 하잘 것 없는 존재이며 대자연은 영원하고 완전무결하다. 찰라라는 짧은 순간과 영원은 같은 차원으로 통하는 시간의 겹이다. 하지만 이러한 우주적 차원의 거시적 시선이 시적인 울림을 일으키기에 시적 사유의 주체인 시인의 담론이 너무 거대하고 관념적이다. 지나치게 초연한 자세는 미적 거리의 소멸을 일으키며 때로 미적 거리의 소멸은 미적 교감의 소멸로 나타나기도 한다.
김선우의 시 역시 풍경을 주된 시적 제재로 삼아 해석된 자연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의 풍경은 익숙한 듯하면서도 어쩐지 묘한 인상을 남긴다. 

하루가 저물어간다, 참 잘 곰삭은 저 저녁 풍경이 실은 천연스레 뒤를 보이고 앉아 볼일을 보는 크낙한 엉덩이라면 저물녘 저 태양이 문이라면
금빛 항문 ― 어슴푸레 열리는 새벽으로부터 한낮 지나 저물녘에 이른 우리의 하루가 뒤를 보이고 앉아 시름없이 일을 보는 크낙한 엉덩이의 한 오분 시원한 용변과 같다면
수성이랄지 목성은 그녀의 젖가슴쯤 명황성이랄지 천왕성은 쌔근거리는 정수리 문쯤이 될까
금빛 거웃 바람결에 흔들려 드문드문 하늘자리 젖는 저 풍경이 우리가 셈하지 못하는 어떤 하루의 한 오분 마지막 순간이라면
저물어간다, 허방지방 거미줄 치고 있는 목마른 나의 하루는 긴가 너무 짧은가 아득한 물병자리 옆얼굴이 슬몃 보였는데 뭉게구름 느릿느릿 금빛 항문을 닦아주며 흐르는데
―김선우, [어느날 석양이], [도화 아래 잠들다], 창비)

시는 완전히 인간적으로 해석된 자연임에도 낯선 인상을 준다. 그녀의 시를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보기에는 적극적 판단의 개입이 애매하며, 에로틱하게 보기에는 지나치게 질펀하다. 시인의 상상력으로 포착되는 석양무렵의 풍경은 여성의 몸이다. 여기까지는 다른 시들과 비교해 그다지 다를 게 없는 듯하지만 이때의 여성은 관습적으로 우주와 여성을 신성시하고 신비화하는 여타의 상상력과는 차별화된다. 석양 무렵 번지는 노을을 두고 몸이 배출하는 용변을 떠올리는 시인의 연상도 범상치 않지만 그보다는 배출의 순간을 '저 풍경이 우리가 셈하지 못하는 어떤 하루의 한 오분 마지막 순간이라면'이라는 시구로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몸과 세계를 동시에 긍정하는 것이 놀랍다. 그러나 이 긍정은 딱 오분이라는 시간으로 제한된다. 뒤를 이어 흐르는 정서는 모호하고 허무하게 흔들림으로써 세계를 주체가 판단할 수 없는 미지의 공간으로 연기한다. 여기서의 풍경은 완전하게 의인화되어 인간의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대상도 아니며 주체와의 거리를 소멸시키고 대타자에 이입되는 존재로써의 자연도 아니다. 김선우의 시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은 풍경에 닿을 수  없는 일정한 거리를 견지한다. 이 거리야말로 그녀의 시를 투명하게 의미화할 수 없는 해석의 모호한 지점으로 데려가지만 동시에 그녀 시의 매혹적인 면모로 작용한다.  
문태준의 시는 정감있는 문체와 수려한 언어로 뛰어난 미학적 성취를 이루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가재미][맨발]과 같은 구조적으로 안정적이며 미학적으로 매끄러운 휴머니즘의 시편들보다는 풍경과 주체가 만나는 애매한 거리의 지점을 형상화한 시가 더 좋다.  

배꽃이거나 석류꽃이 내려오는 길이 따로 있어
오디가 익듯 마을에 천천히 여럿 빛깔이 내려오는 길이 있어서
가난한 집의 밥 짓는 연기가 벌판까지 나가보기도 하는 그런 길이 분명코 있어서
그 길이 이 세상 어디에 어떻게 나 있나 쓸쓸함이 생기기도 하여서
그때 걸어가본 논두렁길이나 소소한 산길에서 봄 여름 다 가고
아, 서리가 올 때쯤이면 알게 될는지
독사에 물린 것처럼 굳어진 길의 몸을
―문태준, [길],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여타의 서정시에서 동일성이 가능해지는 것은 대상과 일체가 된 시적 자아가 풍경의 안을 사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 시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은 정직한 거리를 확보한다. 시적 주체는 풍경의 바깥에서 균열이나 틈을 바라본다. 풍경은 바깥의 타자로써 존재하지만 동경의 대상이나 닮고 싶은 존재는 아니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전원을 그려내는 듯 싶던 시는 후반부 문득'독사에 물린 것처럼 굳어진 길의 몸'이라는 뜻하지 않은 세계의 낯선 풍경으로 귀결된다.

장대비 속을/멧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彈丸처럼 빠르다/너무 빠른 것은 슬프다/갈 곳이 멀리/마음이 멀리에 있기 때문이다/…/저 全速力의 힘/그리움의 힘으로/멧새는 어디에 가 닿을까/집으로?/오동잎같이 넓고 고요한 집으로/中心으로?/아, /다시 생각해도/나는/너무 먼/바깥까지 왔다
―문태준, [바깥],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바깥]의 시적 주체는 바깥을 서성이는 존재다. 세계의 중심, 세계의 근원을 알 수 없는 바깥의 존재로서 그리움의 실체에 가닿기는 요원해 보인다.
전통을 잇는 서정시의 문제는 해석된 자연을 묘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해석이 상투적이고 관습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데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위 시들은 전통을 잇는 서정시 장르의 관습적 장점을 고스란히 취하면서도 달라진 세계 인식의 어느 지점을 사유하게 한다. 특히 중심을 향한 의지와 동일성의 희구가 자동화된 인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중심을 향한 갈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사유할 수 없는 주체의 위치를 직시하기 때문이라는 게 적절할 것이다. 시를 정서의 투사로만 바라보는 시는 낭만성의 과잉으로 흘러가기 쉽고, 서정적 주체와 현실 간의 갈등이 우주적 차원의 포월을 통해 비현실적으로 해소되고 있는 시의 구조는 후기현대의 다차원적이고 복잡다단한 실을 비추기에는 너무 소박하다. 김선우와 문태준의 위의 시들은 주체 중심의 권력적 시선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대성을 성취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내면의 풍경, 타자성을 복기하는 서정적 주체

서정의 변화는 20~30대의 젊은 시인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들의 시에는 비동일성의 원리와 반서정의 원리가 적극적으로 시에 내재되고 있다. 그러나 김경주, 박상수, 이재훈, 박진성, 안현미 등의 시인들을'다른 서정'계열의 시를 쓰는 시인으로만 범주화하기 모호한 점이 있으며 동시에 전통적 서정 계열의 시를 쓰는 시인으로 구분하기도 힘들다. 사실 이들 시인들을 굳이 하나의 계열로 범주화할 필요는 없다. 반서정과 서정의 원리가 얼마만큼 적절하게 녹아들어 시적 미학으로 승화되고 있는가하는 미적 성취의 문제가 보다 중요하다.  
젊은 시인들의 서정이 이전의 서정과 달라지는 확연한 지점은 우리 사회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시의 모티프로 끌어들이고 있으며, 무엇보다 단일 주체에서 벗어나 복합 주체로서의 자아를 인식한다는 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시적 자아의 내면 속에서 주체가 인식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타자성)을 끄집어낸다. 이재훈의 시에서 주체가 환기하려는 것은 세계와 불화하기 이전의 순수한 시적 언어이다.

…말은 내게 뱃속을 열어 보여준다
건강한 줄기를 먹고 자란 말
빨갛게 화장(化粧)한 말의 뱃속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뱃속에 질서 있게 자리잡은 내장의 곡선에
손가락을 갖다대본다
아프다, 말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뱃속에서 말의 새끼들이 뛰어나온다

…말이 쏟아져내린다 초원에 내려 거칠게 달려나간다 내가 지겹게 머무는 도시의 거리까지 와서 내 머릿속을 후드득후드득 내달린다

…믿음엔 증거가 있어야 한다
내가 검은 말을 타고 요정의 검을 차고
맥베스처럼 "눈앞의 이것이 나인가" 되뇌이며
내 목을 자르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
― 이재훈,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부분

이재훈의 시는 존재의 시원에 대한 물음과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그에게 풍경은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복원된 시원의 풍경이며 내면 깊숙이에 가라앉아 있는 선험적 기억의 흔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시적 언어에 대한 믿음이며 완전무결한 태초의 언어를 복기해내고자 하는 시인의 욕망의 발화이다. 낭만적이며 비현실적인 풍경은 동시에 시적 언어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말의 중의적인 의미는 시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근간이면서 동시에 시 인식을 파악하는 중요한 실마리로 작용한다. 맥박이 요동치는 야생의 말이 지닌 생기가 고스란히 말(언어)의 메타포가 되어 말은 생명력을 부여받게 된다. 말은 순수한 약동의 에너지가 되어 시적 자아에게서 도시적 삶을 베어버리고 오롯이 태초의 말이 뛰노는 세계로 시적 자아를 데려간다. 시적 언어는 현실을 재현하려 하지 않는 투명한 질료로서의 언어로 짐작된다. 현실의 언어는 분절의 틈을 지닌 불완전한 기호이다. 실용성을 목적으로 한 현실의 언어는 우리 사회의 원리만큼이나 자본화되고, 경제적 가치로 운영되는 것이기에 존재의 동질성을 재현할 수 없으며 타자와의 완전한 의사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시인이 꿈꾸는 언어는 이와는 다른 언어, 꿈을 생성하는 언어,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언어, 펄펄 살아 날뛰는 태초의 생명력을 지닌 언어이다. 그러나 이재훈의 시는 시의 인식을 언어 실험을 통해 형식화하기보다는 낭만적이며 목가적인 서정으로 그려내는 데에 경주한다.       
김경주의 시 역시 형식은 전통적 서정에서 그리 멀지 않다. 그가 구사하는 시적 언어의 의미는 앞의 이재훈의 시만큼 투명하게 전달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서정성을 획득하는 것은 비전 없는 세계에 대한 체념과 허무의 정서가 낭만적 정조를 자아내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시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귀기 어린 묘한 매혹이 있어 이를 낭만이라는 추상으로 획일화하고 끝내기 어려운 지점에 가 닿는다.'나를 조금씩 인용하고 있는 이 침묵은/바닥에 널브러진 말들의 독해처럼/나에게 있는 또 하나의 육체, 이미지인 것이다'는 그의 표현처럼 그의 시는 육체, 이미지라서 말로 해석할 수 없는 구체적 몸을 감각하게 한다.     

오늘 밤은 취한 말들만 생각하기로 한다
잠든 말들을 깨워서
추위를 이겨낼 수 있도록 술을 먹인다
구유를 당겨 물 안에 차가운 술을 부어준다
무시무시한 바람과 산맥이 있는 국경을 넘기 위해
나는 말의 잔등을 쓸어주며
시간의 체위(體位)를 바라본다
암환자들이 새벽에 병실을 빠져나와
수돗가에서 고개를 박은 채
엉덩이를 들고 물을 마시고 있듯
갈증은, 이미지 하나 육체로
무시무시하게 넘어오는 거다

말들이 거품을 뱉어내며 고원을 넘는다
눈 속에 빨간 김이 피어오른다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취한 말들이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이 말들의 고삐를 놓치면
전속력으로 취해버릴 것을 알기에
나는 잠시 설원 위에 나의 말을 눕힌다
말들의 뱃살에 머리를 베고
(우리는 몇 가지 호흡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둥둥둥 북을 울리듯 고동치는 말의 염통!
말의 배 안에서 또 다른 개인들이 숨쉬는 소리
들려오는 것이다
밤하늘, 동굴의 내벽에서 들려오는 바람의 연령
나를 조금씩 인용하고 있는 이 침묵은
바닥에 널브러진 말들의 독해처럼
나에게 있는 또 하나의 육체, 이미지인 것이다
나는 말의 등에서 몇 개의 짐들을 떼어내준다

말들이 다시 눈 덮인 고비 사막을 넘기 시작한다
그중엔 터벅터벅 내가 아는 말들도 있고
터벅터벅 내가 모르는 말들도 있다
그렇지만 오늘 밤엔 취한 말들만 생각하기로 한다
음악 속으로 날아가는 태어날 때부터
바퀴가 없는 비행기랄지
본능으로 초행을 떠난 내감(內感) 같은 거, 말이
비틀거리고 쓰러져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분만을 시작하려는 것인지
의식을 향해 말은 제 깊은 성기를 꺼낸다
기미(機微)란 얼마나 육체의 슬픈 메아리던가

그 사랑은 인간에게 갇힌 세계였다
  ― 김경주,[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 이 말들을 타고 모든 음악의 출생지로 가볼 수는 없을까],([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램덤하우스중앙)
 
혹한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취한 말을 끄는 풍경은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라는 시집의 제목처럼 이 세상에는 없는 공간의 형상화이다. 시적 자아의 내면 깊숙이 묻혀있는 풍경은 몹시도 황량하고 스산하다. 그것은 이미 황폐한 정신의 내부지만 시적 주체의 집념은 강하다. 그에게 취한 말을 타고 달리는 시간은 순수의 결정체인 음악에 도달하는 수단이기에 깊고 무서운 집중의 순간이다. 여기서의 말을 말(馬)이지만 동시에 말(言)로 해석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끝없이 깊은 나락을 거침없이 미끌어져가는 시인의 언어는 삶의 어떤 비전도 꿈꾸지 않으며 여기에서 어떤 휴머니즘의 감정도 찾아보기 힘들다. 낯선 자신의 세계를 떠도는 유령처럼 그의 언어는 외로움을 견디며 아무도 닿은 적 없는 주체의 정신의 영역을 홀로 떠돌아다닐 뿐이다.   
 

4. 서정의 확장과 서정의 질

서정시는 고도의 산업사회인 후기 현대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 우리의 복잡한 삶의 면모를 담아낼 수 있는 장르인가? 전근대적이며 현실과 괴리된 낡은 세계관의 복사는 아닌가? 서정의 원리를 주체와 대상간의 합일에 의한 동일성의 시학에 한정한다면 이러한 의문은 고스란히 서정시에 대한 회의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서정시는 이미 동일성의 원리로 환원할 수 없는 복잡하고 다성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서정의 원리인 동일성은 대상의 자아화와 일체감을 통해 세계를 소외시키지 않고 연속시킨다. 그러나 절대이성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시대에 서정적 주체의 불완전성을 사유하고 주체와 현실의 길항이 시적 동기로 나타나는 것은 이미 일반화된 서정의 원리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시에서 동일성의 구조를 나타내는 은유만큼이나 환유적 비유가 일반화된 것 또한 서정 장르에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특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준오는 90년대의 여성주의시, 도시시, 일상시 등을 신서정으로 명명한다. 여성주의시는 비판적 시쓰기로서의 반서정주의 경향을 보이며 전통적 시 문법을 파괴하고 일상 회화체를 도입하여 탈중심화된 서정적 자아의 통제와 간섭없이 순간적 충동에 맡겨버리는 경향을 드러낸다. 또한 도시시는 도시라는 일상적 삶 속에서 새로운 서정을 찾았으며 일상시는 희극적 가벼움을 통해 90년대의 변모한 서정적 자아의 탄생을 알린다. 이들 시에서 서정적 자아가 과거와는 달리 탈중심화되는 징후(인격분열-자아분열)을 보이며 선, 악, 미, 추, 이성과 충동 등이 공존하는 인간성의 양면성에서 신서정을 발견하게 한다. 자학과 자기연민의 서정이 융합되어 있고 우리 시대의 문제성의 책임을 자신과 세계쪽에 공평하게 분할하는 모순된 서정을 찾아볼 수 있다. (김준오, [서정, 반(反)서정, 신서정],[현대시의 환유성과 메타성], 살림, 1997) 이들 서정은 반서정과 재래적 서정이 모호하게 겹쳐진 지점에서 사유된다. 비교적 쉽게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내는 서정시 본래의 장점을 잃지 않으면서 낯설고 참신한 감각을 끌어들이고 있는 시들이 시적 성취를 얻고 있는 현상은 현재의 우리 시에서 서정의 확장이 얼마만큼 진행되고 있는가하는 사실을 목도하게 한다. 2000년대의 서정시는 90년대의 서정시의 연장선상에 있다.
따라서 문제는 서정과 반서정의 대립각의 심화가 아니라 시가 일반화, 보편화되며 양식화, 고착화되는 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자연과 주관적 내면의 동일화 구조가 많은 시인들에게서 자동화되고 있으며 반시의 기법과 세계인식마저 관습화되는 현상이야말로 시에의 교감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가? 계간지의 확대로 인해 매 계절마다 배출되는 시의 양이 엄청남에도 불구하고 개성적인 시를 찾아보는 것은 쉽지 않다. 반면 세계 인식이나 감수성이 일반화를 넘어 상투화되어 가고 있는 시는 쉽게 눈에 띤다. 가령 생태시는 늘 자연을 모성이라는 가두리에 가두고 둥근 것, 조화로운 것, 삶의 이치와 깨달음을 주는 닮아가야 하는 존재로 그리고 있으며, 여성시는 남성의 권력과 횡포하에 희생당하는 여성의 아픔을 그려낸다. 선시가 가진 문제점도 인식의 단순화와 알레고리화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승호, 정일근, 차창룡 등의 시에 이르기까지 불교적 색채를 띤 시들은 대체로 피안/차안의 이분적 대립의 방식으로 세계를 나누고, 피안이라는 초월적 세계를 지향해왔다. 소박한 휴머니즘이 추구하는 따뜻한 인간애와 대자연의 부드러운 모성이 비인간화된 산업사회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은 시에서 하나의 교조주의로 굳어져 버린 것은 아닌가?  
서정의 확장은 현대시에서 이미 오래전에 진행된 현상이다. 시적 경향이 다른 시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와 고집스럽게 시의 전통적 원리만을 고집하기보다 타장르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포에시스의 확장과 변화를 적극적으로 이끌어가는 태도야말로 지금 이 자리의 서정시보다 나은 서정시를 배출해내는 데 필수불가결한 시인의 자세일 것이다.

_ [시인시각], 2007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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