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타자를 향한 러시안 룰렛 게임과 대황하의 변주곡


정준영




이재훈 시인의 강은 건널 다리도 없는 거친 황톳물 넘실거리는 ‘대황하’다. 그가 스스로 강이 되어 누웠다. 이재훈의 이번 신작시는 <대황하 2~5>와 <물에 대한 사소한 변론>이라는 제목을 가졌다. <대황하 2~5>는 서사적 성격이 보이는 산문시이고 마지막으로 <물에 대한 사소한 변론>까지 붙였으니 그의 이번 신작시를 순차적으로 읽는 것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강물의 흐름처럼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스스로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전주곡과도 같은 <대황하 2> 이후 <대황하 3, 4, 5>는 같은 제목을 가진 시들의 내용을 구성하는 플롯의 성격을 보인다.
이재훈의 신작시 <대황하>는 성(性)에 따른 명사의 구분에 의해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할 듯싶다. 우리나라에는 단어에 성의 구병이란 게 없지만 명사에 남성, 여성 혹은 중성을 붙이는 나라에서 ‘강’은 여성형을 가진 명사로 취급된다. 그리고 가스통 바슐라르가 ‘몽상의 시학’에서 말했듯이 ‘숲’은 남성이고 ‘삼림’은 여성인 것처럼 유사한 단어들은 미묘한 그러나 지대한 차이에 의해 또 다시 남성형과 여성형으로 구분되어진다. ‘강’은 여성형의 명사지만 이재훈의 ‘대황하’는 강은 강이로되 만일 성(性)을 갖는다면 남성형의 명사로서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대황하’라는 시어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시 <대황하 2>에 등장하는 첫 구절은 ‘누웠다’이다. 강은 수직으로 솟은 산과 달리 누워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누웠다’라는 자동사는 계속해서 반복된다.

매일 같은 굴욕과 비방을 얻는다. 누웠다. 고개 숙였다.
― <대황하 2> 부분

눕는다는 행위를 유발한 원인은 앞뒤의 다른 문장들이 나누어 가졌다. 즉, ‘매일 같은 굴욕과 비방’이 그로 하여금 눕게 만드는 원인이고, 눕는다는 말은 ‘고개 숙이다’라는 말과 동의어를 형성한다. 여기서의 강은 일단 수동적이고 저항하지 않으므로 여성형으로서의 강에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눕는 이유는 <대황하 3>에서 설명된다. <대황하 3>에 이르러서 ‘누웠다’는 동사는 ‘바랐다’라는 동사로 바뀌어 있다.

강을 바란 것은 깊이 때문이다. 가늠할 수 없는 저 중심(中心)
― <대황하 3> 부분

여기서 강은 이중적인 상징이 된다. 즉, 외압의 굴욕에 여성적으로 누운 강이기도 하지만 거대한 힘을 가진 외압체로서의 남성적인 강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 시인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대황하의 거친 황톳물처럼 강력한 위세를 가져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듯 범람하고 있다. <대황하 2>에서 세상은 ‘썩은 것’이었지만 그 위력과 위세는 대항하기 어려운 것일 때 물의 혼탁성은 이미 선과 악의 개념에서부터 벗어나 그 자체로 거부할 수 없는 존재의 위엄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강에 뼛가루를 뿌렸다지, (중략) 물속에 묻혔다지
― <대황하 4> 부분

무서운 대황하의 황톳물이 삼키는 뼛가루는 이것이 연습상황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실제 상황임을 뼈저리게 각성시킨다. ‘생은 연습이 없다. 단 한번이면 족하다. 누웠다’(<대황하 2>) 매일 같은 굴욕에 고개 숙이고 누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황하의 황톳물은 뼛가루까지 삼키는 절대존재이다. 죽어서 정말로 강바닥에 뼛가루로 눕는 것보다는 미리 누워 사는 생에 익숙해지는 것, 그러면서 대황하의 힘을 배우는 것이 굴욕에 고개 숙이는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황하의 굽이치는 황토물을 생각한다. 긴 시간의 강을 젓는 내 굵은 힘줄을 생각한다.
― <대황하 5> 부분

이 세상이라는 무시무시한 황톳물은 모든 것을 삼킬 위력을 가졌고 실로 강에 뼛가루를 뿌린 사람의 한마저 휩쓸어 간다. 이렇게 그의 <대황하> 연작시를 서사적으로 생각해보니 이재훈의 ‘강’은 조용히 포용하며 말없이 흐르는 수동적인 여성형의 명사가 아닌 거칠고 호흡이 거센 남성형의 명사로서 적합하다. <대황하 2>에서 ‘누웠다, 고개 숙였다’눈 곳운 다만 그가 현실적으로 취하는 행동의 일면일 뿐이며 실은 거대한 위력을 지닌 대황하의 흐름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나아가 그런 위력을 행사하는 대황하 자체의 힘을 바라는 그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재후늬 시가 완곡한 여성형에 잠시 의탁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장치로서의 선택이고 내용적으로는 완전한 에네르기의 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눕는다는 행위와 고개 숙이는 행위는 여성형의 ‘강’을 잠시 차용한 것이고 그 피난처 안에 피난을 하고 있는 주체는 강한 남성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신작시의 문장이 매우 건조하며 짧은 서술체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도 이재훈이 내면에 지니고 있는 강한 남성성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침묵도 때로는 폭력이 될 수 있다’(<물에 대한 사소한 변론>)는 말에서 ‘폭력’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일은 이재훈의 신작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 이재훈의 시에서 ‘폭력’은 외부의 것이기도 하고 내부의 것이기도 하다. 폭력이 외부로부터 오는 것일 때 이재훈은 ‘강’과 같은 여성형을 취한다. 그러나 폭력이 내부의 것일 때 ‘강’은 완전한 남성형을 가진 ‘대황하’로 바뀐다는 것이다. 거칠게 흐르는 대황하의 강을 이루는 물이 서로의 몸을 겹쳐가며 거대한 흐름을 이루듯이 자와 타자와의 싸움은 삶을 이루는 핵심적인 문제이다. 야성의 타자를 향한 나의 욕망 역시 야성적일 수밖에 없다. 생이란 야성의 타자에 의한 굴욕과 비방에 나의 얼굴이 뜯기고 너의 팔다리가 뜯겨 결국 한 몸이 되어 엉기는 러시안 룰렛 게임과 대황하의 변주곡과 같은 것이다.

_ <시와세계>, 2008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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