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시인 윤동주

 

이재훈
(시인, 현대시 부주간)

 

 

 


별의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1945). 그는 28세의 짧은 생을 살다갔으나 우리 시단에서 잊히지 않는 큰 별과 같은 시인이다.
시인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대해 늘 고민하는 지식인이었다. 또한 조국의 앞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부끄러움 의식’을 시로 승화시킨 뛰어난 시인이었다. 윤동주는 살아 있는 동안 문학적 영화를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했다. 그는 사후(死後)에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서 평생 기독교 신앙을 지키며 살았다. 1925년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하는데 이때 조선의 역사를 배우고 민족의식과 독립 사상을 깨우치게 된다. 이후 집이 용정으로 이주하여 은진중학교에 입학하고, 이 시절 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 등을 발표하는 활동을 했다. 1935년 평양으로 이주하여 숭실중학교로 편입하였으나 이듬해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되자 용정에 있는 광명학원으로 다시 편입했다. 이 당시 <카톨릭 소년>에 「병아리」 「빗자루」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1938년에는 지금의 연세대학교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연희전문학교에서는 최현배 선생으로부터 조선어와 민족의식을, 이양하 선생으로부터 영시(英詩)를 배웠다. 1941년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졸업 기념으로 출간하려다 실패했다. 이듬해엔 일본 동경으로 유학하여 릿쿄[立敎] 대학 영문과 입학하여,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로 옮겼다.
1943년 조국으로 귀향을 앞두고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조국 해방을 6개월 남겨 놓고 옥사했다.
윤동주는 생전에 시집을 간행하지 못했다. 1948년이 되어서야 유작 31편을 실은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가 간행되었다. 이 시집은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간행되었으며 시인 정지용이 서문을 썼다.
윤동주의 대표시는 아마도 <서시>일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로 시작하는 전 국민의 애송시 <서시>는 국민의 뇌리와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또한 대표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등도 사랑을 많이 받는 시이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자화상> 전문

위의 시 <자화상>은 윤동주의 내면의식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시이다.
시에 등장하는 ‘우물’은 자신을 성찰하는 시적 대상이다. 이 우물은 아주 조용한 곳에 존재한다. 산모퉁이를 돌아야 하고 논가 외딴 곳에 위치해 있다. 우물은 자아를 생각하고 성찰하는 장소이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도 그렇듯 늘 자신을 성찰하고, 고백한다. 이 시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물을 통해 자아를 성찰하고 자아의 내면을 고요히 응시한다. “한 사나이”는 시인의 모습과도 동일시된다. 즉 자신의 모습이 우물에 비췄을 때 미워졌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돌아가다 생각하니 다시 그 사나이가 가엾어지는 것이다. 사내는 아무런 변화없이 늘 그 자리에 있다.
시에서는 우물에 비친 사내의 모습이 미워졌다가, 가엾어졌다가, 다시 미워졌다가, 그리워진다. 미워졌지만 가엾어지는 연민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당시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나약한 지식인의 초상이 그대로 시속에 드리워져 있다. 우물 속에는 아름다운 자연의 흐름이 그대로 존재한다. 즉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사나이가 있고, 그 사나이는 추억처럼 존재한다.
우리는 윤동주의 시를 통해 자신을 스스로 바라보고, 성찰하는 법을 깨우치게 된다. 윤동주는 치열하게 자신을 성찰하며, 늘 부끄러움 의식으로 괴로워했던 지식인이다.
우리는 성찰이 부재한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위정자들부터 성찰이 없고 부끄러움이 없다. 괴로워하지도 않고 늘 핑계하며, 숨기고 속여 쉽게 넘어가기만을 바란다. 많은 이들이 윤동주의 시를 읽으며 감동하고 환호하는 것은 성찰과 부끄러움 속에 담긴 진실함을 읽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시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오는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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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의 시인 김관식

 

이재훈
(시인, 현대시 부주간)

 

 


시인 김관식(金冠植, 1934~1970)은 충남 논산 출신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시인 김관식하면 그의 독특한 인생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는 심한 주벽과 기행으로 많은 일화와 화제를 낳았다. 1960년 ‘대한민국 김관식’이라는 명함 하나로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시 거물 정치인이었던 장면(張勉)과 겨루었던 사건은 대표적인 일화 중의 하나다. 그 이후로 김관식의 별호는 ‘대한민국 김관식’이 되었다. 고은 시인은 김관식을 가리켜 ‘단군 이래의 한국 기인’이라 칭하기도 했다. 김관식의 부친 김낙희씨는 한약방을 운영했다. 1952년 강경상고를 졸업한 뒤 충남대학교에 입학했다가 고려대학교로 편입, 1953년 다시 동국대학교 농과대학으로 옮겼으나 중퇴했다.
김관식과 미당 서정주와의 인연 또한 화제였다. 당시 전주로 피난 가 있던 서정주를 직접 찾아가 인사드리고 문학에 순교하겠다고 열정을 불태웠다. 이러한 서정주와의 인연으로 1954년 서정주의 처제인 방옥례(方玉禮)와 혼인했다. 데뷔는 1955년 <연(蓮)>, <계곡에서>, <자하문 근처> 등의 작품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여주농고, 서울공고, 서울상고 등의 교사를 지냈으며 1958년 <세계일보> 논설위원을 지내다 결국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직했다. 이 무렵부터 결핵과 위장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기나긴 투병 생활에 접어들게 된다. 그는 투병 중에도 한문 실력을 발휘하여 <서경>을 번역하여 간행하였으며, 작품 활동도 쉬지 않았다. 김관식의 시비는 대전 보문산 공원, 강경상고 교정, 논산공설운동장 등 세 곳에 세워져 있다. 대표작으로 <연>, <귀양 가는 길>, <동양의 산맥>, <다시 광야에> 등이 있다. 시집으로는 <김관식시선>(자유세계사, 1956), <낙화집>(창조사, 1952), <다시 광야에>(창작과비평사, 1976), 역서로 <서경(書經)> 등이 있다.
김관식은 어려서부터 한학과 서예를 익히고 성리학과 동양학을 배웠다. 때문에 당시 한국 사회에서 실력있는 한학자였다. <김관식시선>의 서문 ‘동양인 선언’ 등의 글을 통해 그의 문학적 지향점이 어떤 지점에 있는지를 확연하게 표출한다. 김관식은 전국의 유명한 한학자들을 찾아 나서며 한학을 익혔다. 공주의 권중하(權重夏), 전주의 성리학 대가 최병심(崔秉心), 서예가 오세창(吳世昌), 육당 최남선과 위당 정인보 등을 찾아 사사했다. 당시 육당 최남선이 김관식을 수제자로 받아들이면서 김관식은 한학자로서의 천재성을 인정받는다.

귀를 씻고 세상 일 듣지 말꺼나
피에 젖은 아우성
고달픈 삶에, 가쁜 호흡을 지키기 위해
사나이는 모름지기 곡괭일 들고
여자여. 너는……

세리(稅吏)도 배고파 오지 않는 곳.
낫거미 집을 짓는 바람벽에는
썩은 새끼에 시래기 두어 타래……

가난 가난 가난 아니면
고생 고생 고생이렸다.
(시름없이 튕겨 보는 가야금 줄에 청승맞게 울면서 흐느끼는 가락은)

단정학(丹頂鶴)은 야위어 천년을 산다.
성인(聖人)에의 지름길은 과욕의 길.
밭고랑에서 제 땀방울을 거둬들이는
부지런한 지나(支那)의 꾸리[苦力]와 같이
기나긴 세월을 두루미 목에 감고 견디어 보자.

가만히 내 화상(畵像)을 들여다본 즉
이렇게, 언구렁창에 내던져 괜찮은 건가.
<눈으로 눈이 들어가니>
<눈물입니까.> <눈물입니까.>
요지경 같은 세상을 떠나

오늘도 나는, 누더기 한 벌에 바릿대 하나.
눈포래 윙윙 기승부리고
사람 자국이 놓인 일 없이
흰곰의 떼 아프게 소리쳐 우는, 저
천산(天山) 북로(北路)를 넘어가노나
- <가난 예찬(禮讚)> 전문

김관식은 가난과 10여 년 동안의 병마와 싸우다 간염으로 36세에 요절했다. 시인은 나라가 위급할 때 도와야 한다며 국회의원에 출마하지만 참패한다. 당시 1백표도 못 되는 득표를 얻고 남아 있던 재산인 과수원마저 처분한다. 그 후 자하문 밖 언덕의 홍은동 골짜기로 들어가 술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그의 선비정신은 고독하고 타협없는 삶을 지탱해 주는 가장 큰 무기였다.
김관식의 시가 동양의 정신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평가받지만, 실상 시인의 삶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시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위의 시 <가난 예찬>도 마찬가지다. 가난을 예찬하기는 쉽지 않다. 가난과 고생의 삶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 시인의 태도는 모든 것을 비우는 비움의 철학을 생각하게 한다. “귀를 씻고 세상 일 듣지 말”자는 얘기는 세상과 절연하자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시인과 한학자로서의 기품을 잃지 말자는 의미일 것이다. 시에서 ‘단정학’은 세간의 타협과 유혹에 굴하지 않는 꼿꼿한 선비의 정신을 생각하게 한다. 오로지 재화만이 능력이고 선(善)이라 추앙받는 현대문명사회에서 김관식의 가난 예찬은 기억할만한 깨우침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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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시인 김춘수


이재훈
(시인, 현대시 부주간)




꽃의 시인 김춘수(1922~2004). 일반적으로 ‘꽃’이라고 하면 예쁘고 아름다운 감성적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춘수에게 ‘꽃’은 이러한 의미가 아니다. 김춘수 시인이 말하는 꽃은 존재의 대상이다. 전국민에게 사랑받는 시 <꽃>으로 인해 김춘수는 꽃의 시인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김춘수 시인은 한국 시단에 아주 독특한 시세계를 가진 시인이다. 그의 시세계는 ‘관념시’와 ‘무의미시’, 그리고 이 둘의 변증법적 지양을 거친 ‘의미’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거치며 진화해왔다. 그로 인해 시인의 문학적 역정은 언제나 문제적이었으며 또한 가장 독특한 경지에 있었다.

김춘수 시인은 1922년 경남 통영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시인은 유복한 가정환경과 개방적 사고를 가진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호주 선교사가 운영하는 유치원에서의 경험은 시인에게 이그조티즘(이국취향)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 체험이 독특한 시적 세계관과 미적 관심에 대한 최초의 자각이다.

시인은 통영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의 경기중학에 입학한다. 이후 일본대학 시절 천황비판으로 옥살이를 한 경험도 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대학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추방되어 퇴학당하고 한국으로 건너온다. 통영중학교와 마산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65년 경북대학교 교수, 1978년 영남대학교 문리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특이한 이력은 1981년 제11대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한 것이다.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은 시인으로서의 삶과 너무나 다른 일이었다. 이후 작고하기 전까지 김춘수 시인은 정치활동 경험에 대해 많은 후회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6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시와 시론을 묶은 <김춘수 전집>(현대문학)이 2004년 출간되었다.

김춘수 시인은 1948년에 첫 시집 <구름과 장미> 이후 한국 시단에서 가장 독특하고 모던한 시의 경향을 보이게 된다. 196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시적 실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김춘수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무의미시’이다. 대상과의 거리가 상실된다는 것. 대상을 지울 때에 대상의 구속으로부터 시인은 해방되고, 어떤 의미부여의 행위로부터도 해방된다. 그러나 무의미시가 가지고 있는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에서 이미지는 의도하지 않아도 의미를 띄게 된다. 이 의미를 지우기 위해 탈이미지로 가게 된다. 탈이미지는 리듬만으로 시를 쓴다는 것인데 이것은 시인이 고백한대로 언어도단의 세계이다.

무의미시의 막다른 골목에서 시인은 다시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시인은 다시 의미의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 이 의미의 세계는 이전의 관념시와는 다른 변증법적 지양을 거친 세계이다. 이 관념시와 무의미시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형성된 시집들이 후기의 <들림, 도스토예프스키>, <거울 속의 천사>, <쉰 한 편의 비가> 등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꽃> 전문

김춘수의 시 <꽃>은 전국민이 모두 아는 시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비교적 초기작품이긴 하지만, 김춘수가 가진 존재의 의미를 마음 깊이 새기게 하는 시이다. 어떠한 대상이든지 불러주기 전에는 아무런 이름이 없다. 산의 이름 모를 들풀도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이름을 가진 존재로서 의미를 띄는 것이다. 그 의미가 바로 시에 말하는 ‘꽃’으로 상징할 수 있다. 이름이 불리워지지 않은 존재는 늘 불안하다. 그리고 너와 나 모두 무엇이 되고 싶은 열망과 소망이 있다. 어떤 의미로든지 타인과 이 세계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간절함이 있다. 시에서는 그것을 가리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고 전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서로간의 존재에 대한 가치가 희박하다. 인터넷 공간과 블로그, 미니홈피, 트위터, 그외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 디지털미디어 기기, 스마트폰 등으로 대화가 단절되고 타인에 대한 관심이 더욱 적어진다. 가상공간에서 포장된 나와 타인이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춘수의 <꽃>을 읽고 있으면 타인을 가만히 불러보고 싶게 한다.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어떤 의미라고 속삭이고 싶게 한다. 찬바람이 분다. 외롭다고 인터넷과 스마트폰만 쳐다볼 게 아니라, 그동안 잊고 지냈던 지인들에게 전화라도 한 통 한다면 어떨까. 따스한 마음이 전해지지 않을까. 그동안 잊었던 내 존재가 그에게로 가서 새로운 존재로 남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참 포근하고 훈훈한 날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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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의 시인 이상



이재훈
(시인, 현대시 부주간)




시인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 1910~1937). 만 26년 7개월을 살다 요절한 천재 시인. 시인 이상의 이름 앞에는 늘 천재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이상의 시는 늘 가장 문제적이었으며, 지금 현재에도 가장 문제적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또한 아방가르드, 초현실주의, 탈장르, 새로운 실험과 전위 미학 등의 말들이 등장할 때마다 가장 최전방에 서 있던 시인이다. 이미 한 세기 일찍 모든 문학적 실험들을 가장 개성적인 문학적 태도와 신념을 가지고 구현해 나간 시인이다.

2010년은 시인 이상이 탄생한 지 100주년 되는 해이다. 많은 문학 단체와 지자체와 예술 각 방면에서 이상을 추모하고 기리는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교하아트센터에서는 이상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상이 문을 열어 가게를 시작했던 ‘제비다방’을 모티브로 한 작품전을 갖는다. 이상이 차렸던 ‘제비다방’은 2년여 만에 문을 닫아 실패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당시 김유정, 박태원 같은 문화 예술인들이 문우의 정을 나누고 문학과 예술을 논하던 장소였다. 그런 의미에서 제비다방은 유럽의 살롱과 같이 중요한 문학적 생산처였으며, 문인들의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장소였다. 더불어 이상의 문학세계를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연내 마련된다고 한다. 이상 100주기를 추모하는 학술행사나 출판 등도 활발하게 진행될 예정이다. 이미 출간된 이상 전집뿐 아니라 이상 관련 서적이 출간을 준비 중에 있다. 가수 조용남도 이상 시 해설서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를 최근 출간했다.
이상을 추모하고 기리는 행사는 외국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유럽과 한국의 예술가 20여명이 프랑스 파리와 서울에서 다양한 장르의 예술로 이상을 기리는 행사를 연다고 한다. 문화예술기획모임인 ‘랩 201’은 파리시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복합문화공간 라 제네랄과 공동으로 ‘2010 파리/서울 이상-직선은 원을 살해하였는가’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그만큼 이상은 시뿐만 아니라 소설, 건축가, 예술 곳곳에서도 후대에 큰 영향력을 끼친 문인이다.
이상의 삶은 괴팍하기로 소문나 있다. 평생 폐결핵을 앓았으며, 지독한 가난과 싸워야 했다. 이상은 이발업에 종사하던 부친을 이른 나이에 떠나 백부 밑에서 성장했다.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취직하였지만, 적응을 하지 못해 곧 그만두었다.
1931년 처녀시 <이상한가역반응>, <오감도(烏瞰圖)>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고,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면서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1934년 <구인회>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다. 그러나 이 연재시는 한국 문단을 통틀어 가장 문제적인 독자들의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상은 이천 점의 작품 중에서 삼십 편을 고르느라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문법 파괴, 띄어쓰기 무시, 이해 불가능한 수사 등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이상의 시에 당황했다. “무슨 미친놈의 잠꼬대냐”, “무슨 개수작이냐”, “당장 신문사로 가서 원고를 불사르자”, “작가를 죽여야 한다” 등의 격한 반응들이 쏟아졌다. 이상의 시를 연재하기로 한 작가 이태준은 항상 사직서를 품고 다녀야만 했다. 이태준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오감도>는 30회 연재를 마저 채우지 못하고 15회로 끝나고 만다.
1937년에는 사상불온 혐의로 동경 니시칸다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한다. 그러나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향년 만 26년 7개월에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객사하였다. 유해는 화장하여, 경성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에 숨진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유실되었다.
이상의 대표적인 시는 역시 <오감도>이지만, 이 시가 가지고 있는 난해함으로 인해 시의 유명세에 비해 독자들에게 두루 읽혀지지는 않았다. 대신 이상의 시 <거울>은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시가 아닐까 한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몰으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만은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 이상, <거울> 전문

위의 시 <거울>은 식민지 시절 지식인의 고뇌를 초현실적인 기법과 무의식의 언어로 표출해내고 있는 시이다. 거울은 소리가 없으며, 거울 속에 비춰지는 나는 악수를 할 수 없는 이미지의 형상이다. 이러한 사실을 반복적으로 재확인하고, 그것을 인지함으로 인해 지식인으로서 느낄 수 있는 의식의 분열과 착란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이를 잘 표현하기 위해 시인은 의도적으로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있다. 이 시가 착란의 언어라고 하지만, 시의 구조를 볼 때 이성적으로 잘 질서화된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시에서 보여주는 거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읽는 독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거울 속의 나와 현실의 나를 대비해서 보여줌으로 인해 분열된 자아를 재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거울이라는 연결매개체를 통해 자신의 본모습을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된다. 이상의 성찰이 개성적인 까닭은 거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개성적인 주체를 서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보편적인 감성과 보편적인 깨달음을 줄곧 받아왔다. 하지만 이상과 같이 전혀 낯설고, 다소 충격적인 자아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또다른 자신을 반추하고 비춰보게 된다. 이것으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성찰을 넘어 미학적 체험의 즐거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한여름 이상의 시를 읽으며 ‘이상한 가역반응’을 느끼며, ‘무한건축육면각체’의 비밀들을 탐사하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한다.

 _ 논산문화, 2010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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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읽는 현대시 산책 ⑧
― 서정주 편


혼(魂)의 시인 서정주

 

이재훈(시인)

 


2010년은 미당 서정주가 타계한 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올 해에는 미당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을 중심으로 미당기념사업회(회장 : 홍기삼)가 창립되었다. 미당기념사업회에서는 미당의 시를 낭송하는 월례 행사와 서울 관악구 남현동의 미당 자택을 복원하여 ‘미당 서정주의 집’으로 개관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미당의 고향인 전북 고창에서는 매년 미당문학제가 열리고 있으며, 올 해에는 4월부터 동백꽃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미당 서정주(1915~2000). 미당(未堂)은 한국 시사에서 가장 영예를 많이 받은 이름이다. 미당 서정주를 부르는 이름 또한 만만치 않다. 시의 정부(政府), 시의 귀신, 시의 학교, 시인 중의 시인, 한국 부족 언어의 주술사, 시선(詩仙) 등등. 미당 서정주는 시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들을 받았다. 시인으로서의 찬사만큼이나 그의 시적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일찍부터 예술관련단체의 굵직굵직한 자리를 역임했으며, 신춘문예와 문예지를 통해 수많은 문인들을 배출해 냈다. 또한 서라벌예술대, 중앙대, 동국대 등에 재직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死後), 과거 친일 행적과 독재정권과의 영합 때문에 명예롭지 못한 비판을 받아 왔다. 아직까지 미당의 평가에 대한 후학들의 입장은 논란 중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당 서정주가 가진 문학적 업적과 자산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근대 이후 우리의 시문학은 미당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정도로 그는 한국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념의 상징주의, 한국적 정한의 토속세계, 불교적 세계, 신화적 세계, 동서양을 넘나드는 역사의 시적 형상화 등등. 그가 도달하지 못한 시적 세계관은 없을 정도이며, 그가 닿고자하는 시적 지향점에서 뚜렷한 시적 완성품을 문학사에 제출하였다. 그 중에서도 <자화상>은 전국민이 애송하는 미당의 대표작이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어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자화상> 전문

시 <자화상>은 언제 읽어도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운명이란 어떤 것인가. 애비는 집으로 오지 않는다는 결핍의 운명. 부모의 연이 단절된 이유가 “종이었다”는 운명론적 감수성은 우리 민족 저변에 깔린 한(恨)을 잘 드러내준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는 유명한 싯귀는 시련을 그대로 받아내고 참아내는 인고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또는 아버지 없는 운명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선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시인은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운명에 구속되어 오히려 피해자인 자신이 죄책감을 느껴야만 하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살아온 삶일지라도 부끄러워하지는 않겠다는 각오도 서려 있다.
죄인과 천치를 읽고 가는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에는 어떤 문제가 없는가. 시에서는 가장 밑바닥의 운명적 실체를 보여준다. 할머니는 너무 늙었고, 집안은 어머니가 풋살구 하나도 못 먹을 정도였으며,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서 살 정도로 가난했다. 그 집안의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손톱이 까맣다. 자신은 그런 가족사에 편입되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부재했던 외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가르친 것은 저 들판의 바람뿐이었으리라.
이 시는 현재의 관점에서 읽어도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인간 이기주의, 날로 발달해가는 자본 문명, 이러한 모든 것들이 마치 문명인의 운명처럼 경쟁적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 당시와 달라진 건 없다. 가난의 대물림은 오히려 현재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지경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악착같이 버텨내기 위해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자화상은 자신의 모습을 비춘 형상이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어떤 가치관으로 자신을 실패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서정주의 시를 읽으며 다시 한 번 닥친 운명에 대해 뉘우치지 않는 각오를 해본다. 이 각오가 새로운 희망으로 변주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_ <논산문화>, 2010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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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永遠)의 시인 구상

 

이재훈(시인)

 

 

한 해의 끝자락에 와있다. 해마다 연말이면 그동안 연락이 뜸했던 지인들이 생각나고, 한동안 자주 못만났던 동료들과 친구들이 생각난다. 문득 보고 싶은 사람들이 생기는 것은 한 해 동안 쉼없이 보내온 시간들에 대한 상념때문일 것이다. 무엇을 위해 지금껏 살아왔는가. 나는 지금 행복한가. 순결한 성찰의 시간은 바로 이런 순간이다. 돌아보며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며, 때론 다짐하며 한 해의 마지막 시간들을 보낸다. 이런 즈음이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바로 구상의 <오늘>이다.
구상(具常, 1919년 9월 16일 ~ 2004년 5월 11일) 시인은 작고할 때까지 시와 인간적 품성이 늘 함께 존경받는 이 시대의 스승이었다. 프랑스 문인협회가 선정한 세계 200대 문인 중에 한 분으로 선정될 만큼 큰 시인이었으며 한국 시단에 큰 영향을 끼친 시인이었다. 구상 시인은 문학 분야뿐 아니라 종교계, 교육계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구상 시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시간들 그 자체이며, 격변했던 한국 근대사를 온몸으로 통과한 삶이었다. 시인은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네 살 때 원산으로 이주하여 유년시절을 보낸다. 시인의 부친이 독일계 신부들이 개설한 원산의 교구에서 교육사업을 하였던 것이다. 이후 원산 덕원 성베네딕도 수도원 부설 신학교 중등과를 수료하고 1941년 일본 니혼대학 전문부 종교과를 졸업한다. 귀국 후 해방이 되고 원산의 작가동맹에서 펴낸 시집 <응향>에 자신의 시를 실었으나, 1946년 응향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북조선 당국으로부터 반동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월남했다. 이후 경북 왜관에 정착하여 20여년을 거주하다 서울 여의도에서 나머지 일생을 마감했다. 현재 경북 칠곡군에는 구상문학관이 설립되어 있다.
구상 시인은 평생 현실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오로지 문학과 종교활동에만 몰두하였다. 효성여자대학, 서강대학교, 서울대학교, 중앙대학교, 하와이대학 등에 재직하며 후학들을 가르쳤다. 시인은 이때에도 일체의 보직을 사양하였다고 한다. 서라벌 예술대학의 초대 학장과 국민대 총장 자리를 제의했을 때에도 사양했다고 전해진다. 시인에게 정치를 권유한 정치인들은 많았다. 처음 구상 시인에게 정계 입문을 권유한 사람은 해공 신익희 선생이었고 이후에도 장면 총리가 시인이 몸담고 있는 서강대로 찾아와서 간곡히 정계입문을 권유했다.그때마다 시인은 강원도와 제주도 등지에 숨어 정계입문을 간접적으로 거절했다.
구상 시인과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간적 관계는 잘 알려진 것이다. 5 ․ 16 직후 박 대통령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고문으로 구상 시인을 내정해 놓고 시인을 설득했지만 끝내 박 대통령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생전에 구상 시인은 박 전 대통령을 관(官)에 나가 있다는이유로 ‘박 첨지’라고 불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구상 시인은 종교인, 문화예술인들과도 다방면으로 돈독한 친분이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 화가 이중섭, 걸레스님 중광, 장애인 화가 김기창, 아동문학가 마해송 등과의 친분과 수많은 일화들도 우리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일들이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 「오늘」 전문

구상 시인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시인이 작고한 날,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명동성당에서 그의 영결식을 집도하였으며, 수많은 종교인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종교적 인식은 서구의 보편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에 동양적 세계관이 덧입혀진 통합적 인식이다. 그것은 시인이 일찍부터 신화와 유교, 불교, 노장사상 등의 사상을 섭렵해 왔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바탕 위에 다양한 종교적, 철학적 인식이 덧입혀져 더 넓은 영역의 인식적 기반이 된 것이다. 시인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라고 말한다. 즉 오래전 과거와 지금의 현실과 죽음 이후의 내세에 관해서 이를 단절의 시간이 아니라 통합의 시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삶에서 아등바등 발버둥치며 사는 시간들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성찰하게 된다. 시인이 유언처럼 남긴 “영원이라는 것은 저승에 가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이 곧 영원 속의 한 과정”이라는 말은 위의 시를 잘 설명하고 있다.
구상 시인은 생전에 시를 쓸 때 기어(綺語)의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남겼다. 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언령(言靈)이 있으므로 참된 말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묘하게 꾸며 겉과 속이 다른, 진실이 없는 말을 결코 해서 안 된다는 것인데, 이 시대에 가슴 속에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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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시인 김현승

 

이재훈(시인)

 


가을이다. 가을을 가리켜 흔히 천고마비의 계절, 혹은 고독의 계절이라고 한다. 산의 나무들은 형형색색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거리의 가로수들은 나뭇잎을 떨어뜨린다. 우리는 가을이 되면 쓸쓸해지고, 인생과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철학자는 아닐지라도 산책자쯤은 되는 것이다. 조락의 계절. 지는 낙엽은 소멸과 죽음이지만, 우리는 그 소멸의 광경을 지켜보며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소멸의 미학이다. 자신이 지나온 삶을 추억하며 존재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는 계절. 가을이다. 가을엔 편지를 쓰고 싶고, 낙엽을 줍고 싶고, 그리워하고 싶고, 거리를 걷고 싶어진다. 그리고 고독해진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시인은 바로 김현승이다. 가을과 고독의 시인으로 불렸던 다형(茶兄) 김현승(1913∼1975) 시인. 김현승은 유독 가을과 고독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또한 그 시들이 유독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대충 짚어 봐도 <가을의 기도>, <가을의 시>, <가을저녁>, <플라타너스>, <절대고독>, <고독>, <고독의 풍속>, <고독의 순금>, <고독의 끝> 등등. 김현승은 전남 광주에서 출생하여, 부친의 사역지를 따라 제주에서 잠시 성장하다가 7세 때부터 다시 광주로 이주해 성장했다. 부친 김창국(金昶國)은 개신교 목사인데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혈연적 전통은 김현승의 시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현재에도 김현승은 기독교적 상상력을 시적으로 승화한 가장 훌륭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광주 소재 미션계 학교인 숭일학교 초등과를 졸업하고 숭실전문대학(숭실대학교)을 졸업했다. 대학 재학중이었던 1934년에 모교의 교수였던 양주동의 추천으로 <동아일보>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1951년 고향 광주에 있는 조선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고, 한국전쟁 와중에서도 <신문학>을 창간 자칫 단절될 뻔했던 광주 문학사의 맥을 이어주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조선대 재직 시절 지역을 근거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문병란, 이성부, 오규원, 문순태, 이근배, 김종해 등 40여 명을 <현대문학>에 추천하여 후진을 양성했다. 1960년 모교의 후신인 숭실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활발한 문학활동을 펼치다가  1975년 4월 숭실대학교 채플시간에 기도하다가 지병인 고혈압으로 쓰러져 타계했다. 최근에는 탄생 100주년 앞두고 그의 문학적 고향인 광주에서 그의 문학사적 족적과 시 정신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을 활발히 해나가고 있다. 제자들을 중심으로 다형 김현승 시인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다양한 문학사업들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김현승의 대표시는 아무래도 <가을의 기도>나 <플라타너스>일 것이다.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로 이어지는 시 <가을의 기도>는 전국민의 애송시이다. 매년 가을이면 빠짐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현승은 ‘고독의 시인’이라 일컬을 정도로 고독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그중 <견고한 고독>을 읽으며 ‘고독’의 찬란한 순간을 느껴보자.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모든 신들의 거대한 정의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는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주며

결정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한 칼날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씁쓸한 자양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 <견고한 고독> 전문

김현승의 고독 시리즈는 관념적인 부분이 있어 다소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가을에 이 시를 읽을 때는 가슴 한복판으로 시어들이 밀려들어올 때가 있다. 시의 모든 사물들은 고독을 향해 수렴되어 있다. 얼굴, 손발, 창끝, 떡, 칼날 등의 시어가 내 모습과 함께 중첩되고 이것은 다시 고독의 공간으로 수렴된다. 세파에 찌든 우리들의 모습은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과 다름 아니다. 그곳에서 가녀린 창끝을 의지해 살아가지만 굶주린 삶의 고난함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고고한 영혼을 가진 인간이다. 고독한 시간들 속에서도, 영어(囹圄)와 같은 삶의 시간들 속에서도 고독한 영혼을 보듬어 안으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무상한 삶의 내력들이 충만한 생명력을 가지게 될 수 있는 힘이 된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삶을 자학하고 훼손해 왔는가.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을 느끼기 위해 우리의 영혼은 얼마나 노력했는가. 고독을 느끼는 가을의 시간. 고독을 통해 우리 영혼의 소중함을 단 하루만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충만한 시간들을 체험할 수 있지 않을까.

_ <논산문화>, 2009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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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시인 김수영



이재훈 _ 시인, <현대시> 편집장




김수영의 대표적인 프로필 사진을 보면 시인은 흰 러닝셔츠 차림이다. 턱을 괴고 앉아 퀭한 눈으로 어딘가 먼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눈에는 독기가 흐르는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어딘가 연민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복합적인 감정을 광기라고 해야 할까. 김수영의 사진을 보면 격식과 형식을 차리지 않고 내면의 자유로운 영혼을 그대로 발산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김수영(1921~1968). 그의 이름 석 자는 한국 현대시사에 가장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지난 2008년은 김수영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지 4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김수영 40주기 추모사업회가 꾸려져 추모학술제가 개최되었으며, 40세 이하 젊은 시인 40명이 김수영에게 바치는 오마주 시집 <거대한 뿌리여 괴기한 청년이여>를 발간하고, 기념 문학제를 열기도 했다. 올해 2009년에는 미발표작을 포함하여 354면의 <육필시고 전집>이 발간되었다. 이처럼 김수영은 당대뿐 아니라 후대에까지도 가장 사랑받는 시인 중의 한 명이다. 이를 가리켜 최두석 시인(한신대)은 “해방 이후 활동한 시인 가운데 김수영만큼 주목을 받은 이는 아직까지 없다”고 말했다. 그만큼 김수영은 후대 연구자들이나 창작자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시인 중 한 명이다.

김수영은 1921년 서울 종로에서 출생했다. 21세 되던 해에 선린상업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일본으로 공부를 하기 위해 건너간다. 이때 연극학교를 입학하게 되는데 이는 연극계에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서 귀국하여 다시 만주로 가서는 조선 청년들과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도 한다. 해방 이후 서울로 돌아와서는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한다. 가장 가까운 문우이자 애증의 친구인 박인환은 김수영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박인환이 경영하는 고서점 ‘마리서사’에서 김기림, 김광균 등과 만나면서 50년대 문인들과 폭넓은 교유를 가지게 된다. 명동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50년대 문학사에서 김수영은 늘 가장 중심에 있었다. 30세가 되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 후퇴 시 징집되어 북으로 끌려간다. 이후 평남 개천에서 강제노동을 하다가 탈출, 국군 최선봉 부대를 만나 서울까지 갔으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가장 암울한 시기를 보낸다.

신시론 동인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여 50년대 전후모더니즘을 대표하는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59년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춘조사에서 발간하였다. 이후 참여시 문학논쟁 등을 벌이며 한국 현대시의 가장 중심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68년 6월 15일 밤. 마포에 있는 집으로 귀가하던 중 버스에 치어 머리를 다치고 의식을 잃은 채 적십자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의 사후 여러 권의 시선집이 발행되었고 1981년 민음사에서 <김수영 전집>이 발간되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려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情緖로

가로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夜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겨서있다 絶頂 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만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시 <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 전문

김수영의 대표작으로는 늘 <풀>이나 <눈>, <폭포> 등을 떠올리지만 가장 김수영다운 시는 위의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김수영답다는 게 뭘까. 자신의 옹졸함마저도 시적 공간 속에 들여놓고 자신의 윤리적 자아를 배반하는 언어들을 직설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 모습은 김수영만의 모습이 아니고, 바로 나의 모습이며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시인이 선각자나 투사의 이미지로 비춰지는 게 아니라, 설렁탕집에서의 옹졸함과 같은 솔직한 소시민으로 비춰진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모래처럼 작은 존재 또한 시인의 일면이다. 이 시를 읽을 때마나 꼭 나 자신과 같아서 가슴이 서늘해지곤 한다.

김수영은 불온의 시인이며, 반시(反詩)의 시인이다. 또한 “시는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며, 가슴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라는 유명한 전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 전언을 통해 시는 형식과 내용 사이의 긴장을 통한 변증법적 유기체라는 점을 자각케 하기도 하였다. 김수영의 영혼은 늘 자유를 향한 갈급함에 목말라 있었으며, 기존의 관습과 타성을 부숴버리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김수영은 때로는 모더니스트로서, 때로는 현실의 가장 최첨단에 선 참여시인으로서의 역할을 올곧게 수행했다. 김수영이 모더니스트이건 참여시인이건간에 그 중심에는 항상 ‘저항’의 정신이 살아 있었다.

저항의 시인 김수영. 그를 떠올려 본다. 시국이 어수선하다. 만약 김수영이 이 시대에 살아 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_ 논산문화, 2009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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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인 김종삼



이재훈(시인)






우리 한국시에서 “가장 순도 높은 순수시”를 썼다고 평가받는 김종삼 시인(1921~1984). 언제나 말없이 점퍼 차림에 벙거지를 쓰고 술집에 홀로 앉아 술을 즐겼다는 김종삼. 그는 평생 직장다운 직장 한 번 가져본 적 없이 오로지 詩만 바라보며 가난하게 살았다. 김종삼은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꺼려했다. 도깨비, 괴짜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대신 평생 음악과 술을 친구 삼아 고독의 시간을 즐겼다.

김종삼의 술과 음악에 대한 취향은 독특했다고 전해진다. 좀 과장되어 말한다면 그것은 마치 선인들의 수행과정과도 닮았다. 술은 독작(獨酌)이 원칙이었으며, 술을 마실 때에는 안주나 곡기를 전혀 먹지 않았다. 또한 한번 마셨다 하면 오로지 술만 열흘이고 보름이고 마시다 깨다를 반복했다. 술값이 생기면 소주를 사들고 홀로 어디 구석진 공간을 찾아 다녔다는 김종삼 시인.

그의 음악에 대한 사랑 또한 남다르다. 김종삼이 직장이라고 할 만한 일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일한 곳이 바로 동아방송의 음악효과를 담당하는 일이었다. 아마 음악 효과의 일을 오랫동안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종삼은 한번 음악을 들었다 하면 한 곡을 하루 종일 또한 한두 달을 계속해서 들었다. 일종의 편집증 증세처럼 하나의 곡, 혹은 한 음악가를 만나면 고집스럽게 들었다. 김종삼의 증언에 따르면 10대 후반에는 베토벤을 좋아했고, 그 후에 바하와 모차르트를 좋아했으며 세자르 프랑크, 라벨, 드뷔시 같은 음악가를 좋아했다. 그 때문인지 김종삼의 시에는 음악을 소재로 하거나 음악을 들으며 집필했던 것이 분명한 시편들이 상당수 있다. 특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음악가인 프랑크의 음악에 대한 애정을 여러 편의 시를 통해 형상화하기도 했다.

김종삼은 1921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다. 그가 부모와 형제들과 함께 남한에 내려온 것은 해방 이후 1947년이었다. 형제들 중에는 친형인 김종문 시인도 있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전봉래의 자살을 겪은 것은 한국전쟁 피란 때였다. 전봉래는 부산 남포동의 스타다방에서 바하를 들으면서 세코날을 복용하고 자살했다. 이후 김종삼은 서울의 가난한 단칸방에서 평생을 가난과 고독과 함께 살았다.

김종삼에게 술과 음악은 신산한 현실을 지탱할 수 있는 힘과 같은 것이었다. 또한 그의 시에는 종교적 맥락을 환기하는 다수의 시편들이 있다. 그에게 종교는 특정한 교리를 전파하는 역할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을 말하고 싶은 순수의 욕망에서 발원한다. 알 수 없는 원죄의식과 인간으로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희미한

풍금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 시 <물통> 전문

김종삼의 대표작 중에서 「물통」은 미학적 언어의 특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김종삼의 의식세계를 잘 알 수 있는 시이다. 중요한 구절은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고 묻고 있는 절대자와 대답을 하는 시적 화자와의 말이다. 시에서 화자는 말하고 있다.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화자의 답변은 자신의 일생을 요약할 수 있는 성찰과 회한의 말이다. “~밖에 없다”는 말의 이면에는 내 삶이 참으로 보잘 것 없음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를 뒤집어 생각하면 “물”이라는 존재의 근원을 따질 때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은연중 전하고 있다. 물은 우리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물질이다. 물을 먹지 않고는 며칠을 버티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을 길어다 주었다는 것은 생명의 원천을 제공해주었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김종삼이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생명의 원천은 바로 ‘詩’일 것이다. 시를 통해 근원과 본질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낮추어 말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근원과 본질의 힘이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는 마지막 연에서 광야의 풍경이 영롱한 날빛으로 가득해지는 땅으로 변화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첫 연에서 음악적 효과를 주었으며, 마지막 연을 통해 정작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적으로 말하고 있다.

김종삼의 여러 대표작 중에 위의 시를 택한 이유는 우리 삶의 본질을 다시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생전에 문학적 영광의 자리에 단 한 번도 오른 적 없이 고독하게 살다간 시인이다. 그러나 그의 사후 많은 후배 문인들과 후학들은 그의 절창들을 다시 노래하고 되새겼다. 김종삼의 노래는 순수를 탐하는 가장 미학적인 언어의 결정체였으며, 그의 삶은 예술가의 전형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사례였다. 자연을 노래하지 않고, 스스로 난해한 길을 걸어갔지만 50년대 그 누구보다도 독특한 시의 숲길을 만든 김종삼. 그의 시와 삶에 축배를 들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_ <논산문화>, 2009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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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읽는 현대시 산책 ③
― 유치환 편


의지와 생명의 시인 유치환


이재훈(시인)



2008년은 청마 유치환(1908~1967)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나라 시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청마 유치환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청마의 고향인 경남 통영을 중심으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유치환의 대표작인 시 「깃발」의 표제를 딴 ‘깃발 축제’가 개최되었고, 거제에서는 청마기념관이 들어섰다. 청마 유치환의 생가도 복원되었으며, 유치환이 지인들에게 수천통의 편지를 부쳤던 우체국 옛터에 흉상도 세워졌다.
유치환은 한국 시단에 굵직한 소나무 같은 존재이다. 일제 강점기, 대부분의 시인들이 여리고 섬세한 감수성을 아름다운 시어를 통해 드러낸 시편들을 발표하였다. 이른바 초창기 현대시는 여성적 어조를 바탕으로 한 감수성의 전통이 큰 맥을 이루었다. 이러한 시사적 측면에서 유치환은 단연 이채로운 존재였다. 선 굵은 남성적 어조에 거친 이미지와 관념적 시어를 가감없이 사용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치환이 남성적 어조를 가졌다고 해서 그의 시가 마냥 거친 것만은 아니다. 유치환은 사랑편지를 무려 오천여 통이나 남긴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유치환의 작고 후, 시조시인 이영도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오천여 통의 편지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유치환은 시조시인 이영도에 대한 연모의 정을 편지를 통해 전달했고, “사랑 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되는 「행복」과 같은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연애시를 남기기도 했다.
유치환의 시에서 무엇보다 가장 유치환다운 시는 「생명의 서(書)」가 아닐까 한다. 「생명의 서」는 유치환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깃발」과 함께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아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생명의 서(書)」 전문

위의 시가 쓰여진 공간적 배경은 북만주이다. 1940년 되던 해에 유치환은 가족들을 이끌고 북만주로 이주한다. 유치환이 국내에서 일제의 핍박을 피해 달아난 곳이 바로 북만주이다.
유치환에게 있어 북만주에서의 생활은 중요한 체험이다. 유치환은 만주에서 농장의 관리인으로 일했다. 그 농장은 유치환의 형인 극작가 유치진의 처가에서 개간한 벌판이었다. 농장 관리인으로 비교적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생활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다른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황막한 벌판에서 조국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죄책감과 끝없이 이어지는 고독과 절망적인 인식 때문이었다.
도피의 공간에서 그 모든 고통이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도피한 자신의 모습에서 더 비참한 감정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유치환은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 극복의 공간이 바로 “아라비아의 사막”이다. 시에서 그리고 있는 “아라비아의 사막”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토피아의 공간은 아니다. 그곳은 수행의 공간이며, 새로운 사유를 위해 다시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공간이다.
시인은 북만주의 고통을 ‘의지’의 힘으로 다시 이겨내고자 했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발견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이성이 무너졌을 때 감정 또한 함께 무너진다. 그렇기에 매순간이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순간을 극복하기 위해 만주벌판에서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을 시인은 꿈꾸었던 것이다.
유치환은 삶의 의지를 통해 생명을 희구한 시인이다. 시인은 단독자로서 운명처럼 자신과 마주하고 싶다는 다짐을 한다. 그것은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새로운 생명의 꿈틀거림을 의미한다. 시인은 늘 본질에 대한 탐구의 태도를 보여준다.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워 새로운 ‘나’와 대면하고 싶은 게 시인의 생각이다. 그것을 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다.
나라 안팎의 모든 사회, 경제, 문화의 기반들이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는 요즘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마음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유치환의 「생명의 서」를 읽는다. 이 시를 읽으면 어느새 마음에 강한 삶의 의지가 들어참을 느낄 수 있다.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는 시만큼 더 값진 문학이 또 어디 있겠는가. 다시 한 번 시를 읽으며 마음을 다잡아 보는 겨울밤이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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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시인 기형도



이재훈(시인)




1989년 3월 7일 새벽. 서울 종로 파고다공원 근처의 한 심야 극장에서 한 남자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남자의 가방 속에는 시작메모로 채워진 푸른 노트, 외국에서 온 몇 통의 편지, 줄쳐 읽던 몇 권의 책과 소화제 알약이 들어 있었다. 사인은 뇌졸중. 그가 바로 시인 기형도였다. 그의 나이 만 29세. 기형도의 죽음을 두고 여러 가지 풍문이 떠돌았지만 모두 풍문에 지나지 않았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형도는 젊은 문청들에게 전설이 되었다. 기형도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우수에 찬 용모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 시편들이 젊은이들의 심장을 후벼 팠다. 기형도를 읽는 것은 시를 읽는 것뿐 아니라 90년대 이후 문화의 현상을 읽는 일이었다. 기형도를 가슴에 품고 다니는 젊은 대학생들은 세대적 공유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좀 더 외연을 넓혀 말하자면 기형도는 동구권이 무너지고 이데올로기의 억압에서 벗어난 세대들의 상징적 코드였다. 90년대에 문학을 한 이들 중에서 기형도의 바이러스에 한번이라도 감염이 안된 자가 그 누가 있던가.(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지금까지 무려 61쇄가 인쇄됐다. 약 40여 만 부가 팔렸으며 현재에도 해마다 1만부씩 팔리고 있다.)

기형도는 1960년 경기도 옹진군 연평리에서 출생했다. 부친의 사업 실패 이후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에 정착했다. 유년 시절은 가난하고 외롭게 보냈다.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엄마 걱정> 등의 시편들은 당시 유년의 우울한 정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학창시절의 기형도는 조용하고 노래를 잘 부르는 학생이었다. 교내에서 합창단 활동을 하기도 했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고, 교내 문학동아리인 ‘연세문학회’에 입회하여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시작했다. 대학문학상인 박영준 문학상(소설부문)에 <영하의 바람>이 당선없는 가작으로 입선하였고, <식목제>가 대학문학상인 윤동주문학상 시부문에 당선되었다. 안양 근교에서 방위병으로 복무하면서 안양의 문학동인인 ‘수리’에 참여하고 동인지에 <사강리> 등을 발표하고 시작에 몰두하였다. 대부분의 초기작이 이 시기에 씌여졌다고 한다.

1984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사에 입사했다. 신문사에서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등에서 일했는데 주로 문화부에서 일했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이후로 주로 젊은 문인들과 만나면서 문단 교유의 폭을 넓혔다.

그는 짧은 작품 활동기간에도 불구하고 정열적으로 작품활동을 한 시인이었다. 죽기 전까지 중앙일보 기자이면서 시인이었던 기형도는 성실한 젊은 문인이었으며 첫 시집을 준비 중에 있었다. 또한 당시 젊은 문학 그룹인 <시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가 죽은 후 1989년 5월에는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이 출간되었다. 시집 제목은 평론가 김현이 정했다. 이후 여행 중에 대학노트에 기록한 산문을 모은 <짧은 여행의 기록>(1990), 미발표 시들과 소설들을 기존의 시들과 함께 묶은 <기형도 전집>(1999)이 출간되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기형도, <빈집> 전문

기형도의 안개의 시인이다. 안개가 주는 막막함과 고통의 실체를 알 수 없는 생의 비애가 시 곳곳에 들어차 있다. 마치 안개 속을 걷듯 아무도 보이지 않는 길과 축축한 세계 속에서 저 혼자 고통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시인의 보폭이 시 속에 선명하다. 우리 독자들은 누구나 기형도의 시가 전해주는 “안개의 주식”(<안개>)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시에는 죽음과 절망, 불안과 허무의 이미지와 진술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당대 최고의 평론가로 일컬어지는 김현이 그의 시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이러한 시적 분위기가 젊은 시인이 겪는 도시의 일상과 맞물려 시 속에서 형상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형도의 시 속에서 불안과 죽음의 이미지가 넘실대는 것은 불우한 가족사와 도시 변두리에서 살았던 경제적 궁핍, 죽음에 대한 체험 등이 큰 영향을 주었다. 1975년 기형도는 바로 손위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는 일을 체험하며 시 쓰기를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시 <빈집>은 기형도의 시 중에 독자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시이다. 이 시는 기형도가 마치 죽음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 이유로 더없이 아프게 다가오는 시이다. 사랑을 잃고 시인은 무엇을 쓰는가. 시 속의 화자는 “잘 있거라”라고 이별의 말을 고한다. 무엇과 이별하는가. 짧았던 밤들과 창밖의 겨울안개들과 밤을 함께 한 촛불들과 흰 종이들. 그리고 자신의 눈물과 이제는 없어져버린 열망들과 모두 이별한다. 이별 후에 그가 하는 일은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는 일이다. 그 문 속에는 자신의 사랑이 있다. 빈집에 갇힌 것은 사랑이지만, 그 빈집을 통해 시인은 잃어버린 사랑을 가슴에 품고자 한 것이다.

우리는 늘상 가득찬 집에 살고 있다. 안개의 시인 기형도. 시인은 우울한 일상을 품고 도시의 안개를 헤치고 나와 빈집에 마주 섰다. 이별의 계절 가을. 이별은 버리는 게 아니라 가득했던 마음을 비우고, 그 빈집에 성숙한 사랑의 의미를 담는 그런 일이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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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 시인, 이형기 편 - 주제로 읽는 현대시 산책 ①


허무의 시인 이형기



이재훈(시인)





지난 2008년 7월 12~13일 이틀 동안 이형기 시인의 고향인 경남 진주에서는 제1회 이형기문학제를 개최했다. 이형기 문학세미나, ‘불멸의 시인 이형기’라는 주제의 시극(詩劇) 공연, 청소년 시낭송 대회, 대금 산조, 허튼 춤 사위, 음유 시인의 축하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로 이형기 시인을 추억했다. 이형기 시인에 대한 조명과 평가는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경남 진주는 시인 이형기의 고향이자 문학의 원적지(原籍地)이다. 이형기는 진주농림학교 재학 시절 당시 16세의 나이로 제1회 개천예술제(1948년)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다. 차상은 박재삼 시인. 백일장 심사위원은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등 한국 문단의 기라성 같은 시인이었다. 이 개천예술제는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개최되고 있다. 이형기는 최연소 등단이라는 이색적인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1950년 17세의 나이로 <문예>지에 <비오는 날>이 추천되어 등단한다. 추천위원은 초회에 문학평론가 조현연, 2회 추천에 미당 서정주, 3회 추천완료는 모윤숙 시인이 했다. 이 최연소 등단기록은 아직도 문단에서 깨지지 않고 있다. 이형기는 1941년 진주 요시노(吉野) 소학교 시절부터 소설 미치광이로 불리며 문학적 재질을 드러낸 시인이다. 동국대학교를 졸업한 뒤 언론사에 20여 년 간 몸담다가 동국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지냈다.

시인 이형기(1933~2005)의 이름 앞에는 늘 ‘문학 청년’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영원한 문학청년 이형기. 그는 작고할 때까지 문학에 대한 열정과 천재의식을 놓치지 않은 대시인이었다. 초기의 전통적 자연 서정의 세계, 중기의 주지주의적인 날카로운 감성과 새로운 언어 미학의 세계, 후기의 생태학적 고발과 문명비판의 세계로 변화하며 끊임없이 자기갱신을 한 시인이다. 이형기의 시세계 전체를 통어하고 있는 세계는 바로 ‘허무’라고 할 수 있다. 이형기의 ‘허무’는 초기시에서 후기시로 갈수록 다른 방향으로 펼쳐진다. 초기시에서는 자연의 순환원리를 통해 인생의 무상함과 허무를 깨닫는 달관의 견지와 같은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후기시로 갈수록 실존적 허무로 성격이 바뀐다.
이형기 하면 떠오르는 시가 바로 전 국민의 애송시인 <낙화>이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낙화> 전문

위의 시는 가야할 때를 깨닫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치인들을 향한 경구로도 읽히고, 모주꾼이 술집에서 술값을 치르지 않기 위해 도망갈 때 읊는 유머로도 읽는다. 또한 존재의 조락(凋落)을 통해 죽음과 실존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스펙트럼이 넓은 시이다. <낙화>에서 중요한 부분은 ‘결별’을 ‘축복’으로 인식하는 지점에 있다. 존재의 결별이 또다른 탄생의 미학을 낳는다는 창조적 인식이 시를 지배하고 있다. <낙화>는 이형기의 초기시가 가진 ‘허무’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는 시이다.

진주시 신안동 공원에 있는 이형기의 ‘낙화’ 시비 ⓒ 이재훈


흔히들 이형기를 가리켜 ‘허무의 시인’이라고 한다. 이형기의 시적 세계관의 핵심은 ‘허무의식’에 있다. 그의 허무는 두 가지의 근거를 통해 발생되었다. 하나는 이형기가 경험한 근대적 자본주의와 문명체험이 허무의식을 갖게 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인간의 본성이 변화되어 가는 사회적 현상을 목도했으며 인간성 상실의 위기의식을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또 하나의 근거는 스스로의 시적인 자각을 통해 이루어진 세계관이라는 점이다. 이형기는 끊임없이 자신의 시적 세계관을 회의하고 갱신하면서 몇 번의 시적실험을 거친 시인이다. 그러한 세계관의 변화는 다양한 독서체험과 시에 대한 갱신의 노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즉 이형기가 도달한 ‘허무’는 생성과 소멸의 끊임없는 과정의 변증법적인 인식이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시의식이다. 허무를 통해 새로운 창조적 세계를 꿈꾸는 허무의 시인 이형기. 그의 시가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의미로 점점 깊이 와 닿는 계절이다.

_ <논산문화>, 200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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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신년호 - 강은교

2007 봄   호 - 김승희

2007 여름호 - 최승자

2007 가을호 - 김혜순

2008 신년호 - 박용래

2008 봄   호 - 신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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