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현대시의 기독교적 시학


김옥성

 

1. 서론

21세기로의 전환기에 우리는 종교와 관련된 수많은 갈등과 분쟁을 겪어야 했다. 인류는 1990년대 발칸반도의 분쟁과 일본의 옴진리교 사건, 그리고 2000년대의 9.11 참사와 그 연장선에서 진행된 세계 각지의 폭탄테러 등을 경험하면서 종교에 대해 많은 회의를 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20세기 후반 휴거소동을 경험하면서,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관심이 점차적으로 증가하였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는 개신교와 그 선교정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부쩍 부풀려놓기도 하였다. 특히, 최근의 미국과 이슬람권의 첨예한 갈등과 대결은 문화의 심층으로서 종교적 모순에서 비롯된 기독교 대 이슬람의 종교전쟁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세기를 건너는 과정에서 일어난 많은 사건들은 국내외적으로 종교에 대한 회의와 비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샘 해리스의 <종교의 종말>,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등은 종교에 대한 인류의 회의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저술들은 강한 어조로 종교를 비판하면서, 종교 무용론 나아가 종교 해악론을 전개하고 있다. 세기의 전환기에 팽배해진 종교에 대한 대중의 혐오감이나 염증과 맞물리면서 이들 저술들은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세 저서에서 공격하는 종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과 같은 유일신교, 특히 기독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이들의 논리가 샤머니즘과 같은 고대 종교나 불교나 유교, 도교 등과 같은 동양의 종교에는 적용되기 어렵다.

히친스는 “동방의 해법은 없다”라고 못을 박으면서 동양의 종교까지도 비판하고 있지만, 충분한 논증이 이루어지지 않아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동양의 지혜”가 종교(유일신교)를 대체할 수 있다는 해리스의 주장이 설득력 있다. 해리스는 유불도와 같은 동양의 특정 종교가 아니라 그러한 종교들의 저변을 관류하는 신비주의적이고 영적인 지혜가 ‘종교’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해리스의 견해가 옳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과연 동양에만 지혜가 있고 서양에는 없었을까? 일련의 국제정세를 돌이켜보면, 표면적으로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로 대변되는 유일신교가 ‘지금-여기’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를 품지 않기는 어렵다. 그러ㅏ 과연 유일신교가 인류에게 해악인가? 하는 의문 또한 제기될 필요가 있다.

동서를 불문하고 역사상 종교는 많은 악행을 저질러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만큼의 선행을 쌓아온 사실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최근의 미국과 아랍권의 갈등과 충돌은 물론 기독교와 이슬람의 문제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이라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서구권과 아랍권의 충돌은 종교적 이념의 충돌이라기보다는 소수의 정치가와 자본가의 헤게모니 투쟁과 보다 깊이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종교가 저지른 악행들의 대부분도 종교 자체의 모순이 아니라 소수 권력자의 정치, 경제적인 패권 투쟁의 산물이었다.

종교는 일종의 문화이자 전통이다. 문화와 전통은 ‘지금-여기’의 정황에 맞게 끊임없이 변화하며 진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종말’이란 있을 수 없다. 문화와 전통으로서 종교는 과거나 지금이나 인류의 정신적 삶을 윤택하게 해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신이 ‘만들어진 신’인가. “신이 위대하지 않다”든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경험과 믿음이다. 우리가 어머니를 경험할 때, 어머니의 학식과 외모와 경제력을 따지지 않는다. 우리의 어머니가 어떠한 존재이든지, 어머니는 모든 면에서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존재로 경험되고 기억된다. 믿음과 사랑은 사실관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주관에 의하여 가치가 결정된다.

  (중략)

6. 세속 도시와 신화 사이의 순례

이재훈의 첫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풍성하다. 그의 넓고 깊은 신화적 상상력의 영토 한 가운데에는 기독교 신화가 중심축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재훈의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오래 전에 적어본 것이라며 자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몽상가이다. 나는 혼자서 우는 편이다. 나는 시를 쓴다. 나는 어머니께서 호랑이꿈을 꾼 후에 태어났다. 나는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다. 나는 조울증이다.

그렇다. 그는 모태신앙을 가진 기독교 신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목회자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재훈 시에는 기독교가 내면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재훈은 기독교의 추상적인 사상이나 관념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성서에서 신화적 이미지를 추려낸다. 성서의 신화적 이미지를 딛고서 이교도의 신화를 수용하면서 그의 신화적 상상력은 광활하게 펼쳐진다.

  이재훈의 홈페이지에서 자신에 대하여 “별자리를 사수좌이고, 나무는 무화과나무이다”라고 적어 놓고 있다. 별자리는 신화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시적 주체는 자신의 선험적인 고향을 신화의 영역으로 사수자리로 설정해 놓고 있다. 이교의 신화에 속하는 사수자리 이미지는 “등불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예언”, “십자가” 등과 같은 성서적인 요소들에 에워싸이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기독교적인 것과 이교적인 것이 뒤섞인 신화의 세계는, 작품의 후반부에 오면 현실로 이어진다. “그 큰 어둠을 품고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가셨지”라는 대목은 현실로의 귀환을 암시해준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이야기들은 신화에 속한다. 어떤 시각에서 보면 신화란 종교의 추상적인 사상과 관념을 구체화시킨 이야기들이라 할 수 있다. 이재훈은 기독교 신화와 이방의 신화, 그리고 현실을 접목시킨다. 시적 주체는 신화와 현실을 넘나드는 여정을 “순례”로 규정한다.

이재훈 시에서 “순례”는 견고한 현실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시적 주체는 현실에 괄호를 치지 않고, 정면으로 노려본다. 세속 도시의 거리를 거닐며 거기에서 신화의 파편들을 발견한다. 그 파편들을 통해 시적 주체는 선험적인 근원으로서 신화의 세계와 교신을 한다. 세속 도시를 거닐며, 거기에서 신화에서 흘러나오는 성스러움을 체험하는 과정이 이재훈 시의 “순례”인 것이다.

이재훈 시는 세속도시의 현실을 딛고서, 우리를 구약과 신약의 신화시대로 이끈다. 그는 세속 도시 곳곳에 박혀 있는 신화시대의 파편들을 보여준다. 그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우리는 신화적 세계를 어렴풋이 건너다 볼 수가 있다. 신화 세계의 체험은 세속 도시의 일상에 갇혀 사는 우리의 경직된 영혼을 부드럽게 풀어헤쳐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잠시나마 꿈을 꾸듯 자유로운 영혼의 상태를 맛볼 수 있다.

_ <딩아돌하>, 2008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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