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규원․이재훈
이재훈:오랫동안 병 중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양평 서후리에서 창작과 요양을 하고 계신데요. 건강은 어떠신지요? 근황을 여쭙고 싶습니다.
오규원:내 지병은 폐기종이라는 만성질환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숨 쉬는 기능이 약해지는 병입니다. 무엇보다도 맑은 공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서후리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모든 만성질환이 그렇겠지만 리듬을 깨뜨리지 않고 적절하게 조절을 하며 지냅니다. 여러 가지 제약을 많이 받기 때문에 집 밖 외출을 하기는 힘들고 공기가 따뜻한 시간에 집의 뜰을 산책합니다. 여느 건강한 사람들처럼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지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작품을 쓰려고 노력합니다(그러나 모두 잘 아시겠지만 작품을 쓸 때는 그 선을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재훈:선생님의 유년 시절은 삼랑진이라는 산골, 어머니의 죽음, 기숙과 기식의 학창시절로 요약됩니다. 이러한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다른 산문들을 통해 상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의 유년 또한 그 세대들의 삶이 그러하듯 평탄치는 않았습니다. 시인들은 대개 평탄치 않은 삶을 담보로 삶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충만한 감정으로 풀어나가기 마련입니다. 선생님의 작품 속에서는 문학 감수성의 모태라 할 수 있는 고향 내지 유년이 어떠한 방식으로 투영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오규원:초등학교 6학년을 경계로 나의 유년은 대조적으로 그 양상을 전개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 전까지는 정미소, 복숭아 과수원, 꽤 많은 농토를 가진 집의 막내아들로서 결핍을 모르고 지낸 시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 6학년 이후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가세의 몰락, 기숙과 기식이라는 연속적인 결핍과 불행이 발생하는 시기입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많이 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은 내 삶과 의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어머니의 죽음이 가로놓인 초등학교 6학년 전과 후는 어머니의 자궁 안의 세계와 자궁 밖의 세계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부재는 고향을 관념화시키는 쪽으로 내 의식을 몰고 가게 되었습니다. 즉 어머니의 부재는 현실적으로 엄연히 고향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으로, 회복될 수 없는 존재로 느껴지게 하는 요인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내내 그런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향을 생각하면 지극히 평화로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고향에서는 바람이 안 붑니다. 어머니와 함께 고향이 관념화되어 있어서, 현실적인 고향은 내 고향이 아니라고 부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는 외지 생활과 연결되어 있고, 기숙과 기식의 시절이 됩니다. 삼랑진을 떠나 부산으로 유학을 간 것이지만, 내게는 이 시기가 끊임없는 긴장과 자괴감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었습니다. 내가 현실을 늘 의식하고 있는 것은 그때부터 내면화된 습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기숙과 기식은 자기 현실을 낯설게 보게 하고 끊임없는 결핍을 느끼게 했습니다. 남이 아닌 형이나 누이나 숙부의 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곳이 내 집이 아닌 남의 집이라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체질적으로 예민한 데서 연유하는지 또는 삶의 급격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면서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었습니다. 결국 어머니의 부재=내 집의 상실=고향의 상실은 지금까지도 내가 사는 현실에 대해 내 스스로 집이 없는 자의 의식을 갖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내 삶이 기숙과 기식의 시간 안에 있다는 인식은 우리 사회도 기숙과 기식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의식을 갖게 합니다. 결국 이러한 의식들이 나를 리얼리스트로 만들고, 주체중심의 의식이 아닌 반(反)주체 중심의 의식을 갖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재훈:선생님께서는 4.19세대로 일컬어지는 문지 계열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 계열에서도 언어와 자아의 문제에 대해 가장 예민하고 독창적인 작품과 그에 따른 문학론을 펼쳐왔습니다. 문학사의 측면에서 볼 때 선생님의 작품 세계가 이전 세대인 50년대, 더 거슬러 30년대 모더니스트들과의 변별성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규원:30년대나 50년대 모더니스트 시인들은 몸과 머리의 토대가 다릅니다. 풀어서 얘기한다면 몸은 농경사회에 토대를 두고 태어났고 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머리는 서구 산업사회가 토대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몸과 머리의 간격이 그 시대의 모더니스트 시인들을 난감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 시인들의 시가 실패했다면 그런 시대나 사회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 사회가 60년대까지 농경사회였다는 것을 한 눈에 보여주는 예는 박정희 정권이 그때까지도 새마을 운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30년대는 이상이 유일하게 성공을 거둔 예인데, 이상은 우리 시대나 사회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몸과 머리가 일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 우리 사회를 노래했다면 농경 사회와 산업 사회의 간격이 생겨 시가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 ‘나의 삶’에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모더니스트의 현실인 몸과 모더니스트의 언어인 머리가 현실의 괴리를 일으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다행스럽게도 한국에 모더니티가 발생한 70년대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선배들처럼 수입이론이 아닌 자생이론을 가질 수 있는 모더니스트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재훈:동시대의 시인들과의 변별성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이승훈 선생이 가장 적확한 대상일 듯 싶은데요. 동시대의 시인이면서 또한 동류의 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평가 면에서는 각각 독립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듯합니다. 동시대 시인들과의 변별점과 그 연관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오규원:잘 알려진 대로 이승훈 시인은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시론을 자기 나름대로 새롭게 개척해서 80년대부터 ‘비대상시론’을 발표했습니다. 지금도 그 연장선상에서 시론을 끊임없이 내놓고 있는 시인입니다. 나는 관념의 재해석, 관념의 해체에 이어 현재 관념을 배제한 ‘날이미지시’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해도 두 사람 사이의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면 김준오 선생의 글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김준오 선생은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한국 모더니즘 시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긴 분입니다. 선생은 모더니즘시론은 조향․김춘수․이승훈의 계열과 김기림․김수영․오규원의 계열로 이원화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이 분류를 참고하면 두 사람 사이의 변별성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재훈:많은 평자들이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젊은 시인들을 선생님의 영향관계 하에 평가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이는 선생님의 작품과 시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후학들의 창작과정에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데요. 자아와 내면의 문제에 탐구, 사회성을 띄고 있다는 점, 형태적인 실험 등등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그 영향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론 또한 선생님의 이전 세대에서도 행해진 것이었는데요. 선생님의 영향을 받았다 할 수 있는 후배 시인들의 문제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오규원:내가 예로 잘 드는 집이라는 건축물을 가지고 얘기해보겠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구조와 공법을 가지고 건축한 우수한 집 한 채가 있다고 칩시다. A라는 사람은 그 집의 거실과 주방을 본 떠서 자기 집의 거실과 주방을 개조했습니다. 또 B는 그 집의 지하 서재를 모델로 해서 자기 집의 서재를 개조했고 C는 그 집의 다락방을 보고 자기 집의 새로운 다락방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했을 경우에 현실적으로 A B C 세 사람의 집은 좋아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A의 집을 보고 이 집은 거실과 주방 때문에 이 집 전체 구조가 좋아졌다, B 집을 보고는 집의 내부구조가 몰라보게 좋아졌다, C 집은 이 집에 새로운 날개를 하나 더 단 것 같다는 칭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X 라는 사람은 이 집의 구조와 건축 공법을 연구하고 그 기초의 정신을 이해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건축물을 만들었습니다. 시의 관계도 위와 같이 A B C와 X의 두 종류의 영향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건축 미학적으로 볼 때 X의 건축물은 독자적으로 평가를 받지만 A B C는 건축학적으로는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모방 건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영향을 받을 바에는 X와 같이 받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A B C는 현실적으로는 다소 이점이 있을지 모르나 근본적으로는 그 시의 세계가 발전적으로 될 가능성을 없을 것입니다.
이재훈:선생님의 시론은 김춘수, 이승훈과 더불어 우리 시사에서 독창적인 시적 방법론으로 평가됩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와 이승훈의 비대상시, 선생님의 날이미지의 시는 각각 고유한 방법론을 내재해 있는 독특한 시론으로 비견됩니다. 하지만 많은 부분 김춘수, 이승훈, 오규원 선생의 시론을 읽고 알고 있지만 일반 독자들뿐만 아니라 시인들까지도 각 시론의 차이와 특성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는 경우를 봅니다. 얼마 전 제가 김춘수 선생을 인터뷰하면서 느낀 게 있었는데요. 시인의 시론을 당사자의 육성을 통해 직접적으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소중할 듯 싶습니다. 잘못 이해하거나 해석하는 소지를 줄일 수도 있겠고요. 선생님의 시론과의 차이와 개별적 특성은 무엇인지 간략히 말씀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오규원:김춘수 시인의 무의미시와 내 날이미지시를 비교해보겠습니다. 아니 변별점을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무의미시는 ‘무의미를 지향’하고 날이미지시는 ‘의미를 지향’하는 시입니다. 시의 차원에서는 가치가 있고 통상적인 의미에서는 대상도 주제도 의미도 없는, 그런 개념을 가진 것이 무의미시론 입니다. 이 개념을 좀더 명확하게 해 보자면 김종삼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매우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북치는 소년」에 보면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이라는 시 구절이 나오는데, 이 구절을 ‘내용 없는=무의미’ ‘아름다움=시’로 대체해보면 무의미시가 어떤 시인지 그 윤곽이 드러납니다. 시의 내용이 무의미하니까 시인은 시의 형태에서 그 아름다움을 찾습니다. 그래서 무의미시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처용단장」을 보면 서술시, 주술시, 해체시, 그리고 접붙이기시라는 형태들이 실험되고 있습니다. 날이미지시는 사변화되거나 개념화되기 이전의 의미, 즉 관념화되기 이전의 의미를 존재의 현상에서 찾아내어 이미지화하는 시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시의 의미는 관념을 배제한 날 것 상태, 관념화되기 이전의 의미입니다. 그런 시의 내용, 즉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특성 때문에 날이미지시에서는 이미지의 성격 변화가 무의미시의 형태적 변화처럼 중요하게 됩니다. ‘사실적 날이미지’ ‘발견적 날이미지’ ‘직관적 날이미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 날이미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설명한 바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간략하게 설명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보다 쉬운 이해를 돕기 위해 내 작품을 보기로 들겠습니다.
그때 나는 강변의 간이주점 근처에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주점 근처에는 사람들이 각각 있었다
두 손으로 가방을 움켜쥔 여학생이 지는 해를 보고 있었다
젊은 남녀 한 쌍이 지는 해를 손을 잡고 보고 있었다
주점의 뒷문으로도 지는 해가 보였다
한 사내가 지는 해를 보다가 무엇이라고 중얼거렸다
가방을 고쳐 쥐며 여학생이 몸을 한 번 비틀었다
젊은 남녀가 잠깐 서로 쳐다보며 아득하게 웃었다
나는 옷 밖으로 쑥 나와 있는 내 목덜미를 만졌다
한 사내가 좌측에서 주춤주춤 시야 밖으로 나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
― 「지는 해」
이 작품은 보는 바와 같이 ‘사실적 날이미지’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강변의 간이주점 근처”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실적으로만 나타나 있습니다. 10행의 ‘아득하게’라는 표현이 정서가 개입된 유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나 그 표현 또한 웃는 모습이라는 사실성을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이 작품처럼 사실성 그 자체만으로 날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사실적 날이미지입니다.
담쟁이덩굴이 가벼운 공기에 업혀 허공에서
허공으로 이동하고 있다
새가 푸른 하늘에 눌려 납짝하게 날고 있다
들찔레가 길 밖에서 하얀 꽃을 버리며
빈 자리를 만들고
사방이 몸을 비워놓은 마른 길에
하늘이 내려와 누런 돌멩이 위에 얹힌다
길 한켠 모래가 바위를 들어올려
자기 몸 위에 놓아두고 있다
― 「하늘과 돌멩이」
이 작품은 ‘발견적 날이미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실적 날이미지’로 되어 있는 「지는 해」와는 다르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느낄 것입니다. ‘발견적 날이미지’로 되어 있는 날이미지시는 사실성 위에 새롭게 발견된 다른 의미가 부과되어야 합니다. 이 작품을 사실적 날이미지로 쓴다면 “담쟁이 덩굴이 뻗어 있다/하늘에서 새가 날고 있다/들찔레 꽃이 졌다/돌멩이 위로 하늘이 있다/길에 바위가 놓여 있다”는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이 사실적 날이미지가 발견적 날이미지로 바뀌는 것은 그 뜻 그대로 발견적 시선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들찔레가 길 밖에서 하얀 꽃을 버리며/빈 자리를 만들고”라는 현상을 그 예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이 현상의 사실적 표현은 “들찔레 꽃이 졌다”는 것이며, 이것은 인간인 내가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들찔레의 시선으로 본다면 꽃을 떨어뜨리는 순간은 자신의 일부를 버리는 시간인 동시에 또한 자신의 일부로서의 빈 자리를 만드는 시간인 것입니다. 존재가 사라지면 빈 자리가 생긴다는 인식과 사라지면서 존재는 빈 자리를 만든다는 인식의 차이를 생각해보십시오. 주체 중심의 시선이 아닌 반주체 중심의 시선이 발견적 이미지를 가능하게 합니다. 발견적 날이미지는 관념적으로나 비유적으로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려져 있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낯설지만 분명 사실적이고 객관적입니다.
어제는 펑펑 흰 눈이 내려 눈부셨고
오늘은 여전히 하얗게 쌓여 있어 눈부시다
뜰에서는 박새 한 마리가
자기가 찍은 발자국의 깊이를
보고 있다
깊이를 보고 있는 박새가
깊이보다 먼저 눈부시다
― 「발자국과 깊이」
이 작품은 「하늘과 돌멩이」와는 또 다릅니다. 이 작품과 같은 ‘직관적 날이미지’는 그 이미지가 깨달음을 동반한 상태에서 사실적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발견적 날이미지와 변별되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하늘과 돌멩이」에서 “모래가 바위를 들어올려/자기 몸 위에 놓아두고 있다”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발견입니다. 바위는 분명 모래 위에 놓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발자국과 깊이」에서의 “깊이”라는 표현은 어떤 깨달음을 동반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즉 박새가 쳐다보는 것은 발자국이 아니라 발자국의 깊이입니다. 발자국을 쳐다보는 것은 사실적이지만, 발자국의 깊이까지를 보는 것은 깨달음으로 보는 시선이므로 직관적 날이미지가 됩니다. 이렇듯 직관적 날이미지가 깨달음을 동반하는 데도 관념적이지 않게 되는 것은, 그 깨달음 또한 분명 사실성 위에서 직조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잠깐, 재미있는(?) 차이점 한 가지를 말해 볼까요. 김춘수 시인은 ‘허무’를 자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는 ‘허무’를 한번도 언급한 바 없습니다. 그것도 무의미 지향과 의미 지향과 관계있지 않을까요? 나는 위와 같은 차이 때문에 형태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김춘수 시인은 ‘예술적 인식’의 차원에서, 이미지의 내용을 추구하는 나는 ‘인식적 예술’의 차원에서 시의 구조를 짜고 있다는 구분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둘째, 무의미시는 ‘서술적 언어 체계’속에서 이루어지고 날이미지시는 ‘환유적 언어 체계’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김춘수 시인은 이미지를 의미가 발생하는 않는 서술적 이미지와 의미가 발생하는 비유적 이미지로 나누고, 무의미시를 서술적 이미지에서 구합니다. 나는 언어학에서 인접성에 근거하는 환유적 체계와 유사성에 근거하는 은유적 체계를 차용하고, 환유적 언어 체계 속에서 날이미지시를 구합니다. 그러나 서술적 이미지에서도 의미는 발생하며 환유적 언어 속에서도 은유가 발생하므로 무의미시와 날이미지시는 각각 나름의 조심스러운 수사적 장치와 행보를 해야 합니다.
셋째, 무의미시는 ‘주체 중심의 심리적 세계’이며, 날이미지시는 ‘반주체 중심의 사실적 세계’입니다. 무의미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통상적으로 대상도 없고 주제도 없는 시입니다. 주제나 대상도 없으면 당연히 그 세계가 심리적일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또한 관념적인 일면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연유로 무의미시는 시의 행간 어딘가에 관념을 숨겨놓고 있습니다. 아이디얼리스트가 어떻게 관념을 배제하겠습니까. 외견상 관념의 배제로 드러나는 이 무의미시와 날이미지시가 만나는 접점이 바로 이곳, 관념의 배제라는 지점입니다. 왜냐하면 날이미지시도 관념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체 중심의 심리적 세계인 무의미시는 그 특성상 관념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투명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날이미지시는 존재의 현상을 반주체중심의 시선으로 이미지화하기 때문에 관념이 은폐되지 않고 배제되어 투명합니다.
활자 사이를
코끼리가 한 마리 가고 있다.
잠시 길을 잃을 뻔하다가
봄날의 먼 앵두밭을 지나
코끼리는 활자 사이를 여전히
가고 있다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코끼리,
코끼리는 발바닥도 반짝이는
은회색이다.
― 「은종이」
김춘수 시인의 이 작품을 보면 그 차이를 좀더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외견상 객관적 묘사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사실은 심리적 주관적 묘사의 세계입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니 은종이 한 장 끼어 있었다”는 한 줄의 부제가 유일한 연상의 통로인 이 작품은 ‘코끼리가 가고 있는 것은 활자 사이이고, 그 코끼리는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고, 그러나 잘 보이지도 않는 코끼리의 발바닥은 반짝이는 은회색’이라는 모순된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모순은 대소(大小) 관념의 조작이라는 숨겨진 의식의 놀이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습니다. 이 결과 발생한 난센스(무의미)는 서정적인 다른 시행과 결합하여 시가 되고, 시인의 관념은 작품 뒤에 숨게 됩니다.
심리적 주관적 묘사의 세계인 무의미시와는 달리 날이미지시는 관념화되기 이전의 의미를 추구하기 때문에 존재의 현상을 날 것 그대로, 객관적으로 묘사합니다. 그 세계는 심리적 세계가 아닌 사실적 세계이며, 주체 중심의 시인 무의미시와는 달리 반주체 중심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나비가 동에서 서로 가고 있다
돌이건 꽃이건 집이건
하늘이건 나비가 지나가는 곳에서는
모두 몸이 둘로 갈라진다 갈라졌다가
갈라진 곳을 숨기고 다시
하나가 된다
그러나 공기의 속이 굳었는지
혼자 길을 뚫고 가는 나비의 몸이
울퉁불퉁하게 심하게 요동친다
― 「봄과 길」
이 작품은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가는 짧은 순간을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이 사실적 풍경이 낯설게 보이는 것은 발견적 이미지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나가는 나비와 만나는 때는 모든 존재의 몸이 둘로 갈라지는 순간이며, 나비는 날아가는 모습이 불균형적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넷째, 김춘수 시인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서구 문화의 이원론에 발을 붙이고 있고 나는 경(經) 중심의 관념 불교가 아닌 실천 중심의 선불교의 일원론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내 경우는 김춘수 시인과는 달리 종교가 직접적으로 작품에 개입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재훈:최근 몇 년 사이의 선생님의 시가 호흡이 짧아지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되기도 합니다. 한쪽에서는 건강 때문에 그러하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날이미지의 시가 근본적으로 시를 짧게 요구하는 일면이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오규원:날이미지가 시의 길이를 짧게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해야겠습니다. 날이미지의 특성이 행갈이와 연갈이의 호흡을 바꾸고 시의 길이에도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시의 구조가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야기 하겠습니다. 10년쯤 전부터 짧은 시에 관해서 따로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건강 때문에 시가 짧아진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짧은 형식의 시를 탐구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여러 가지 책들을 다시 찾아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내 체질에 맞는 어떤 형식의 짧은 시가 없을까 하고 말입니다. 근년에 발표되는 나의 짧은 시는 그러한 관심의 일환입니다. 그러므로 내 시에서 보편적인, 그리고 종래부터 가지고 있던 내 호흡의 길이의 형태를 띠고 있는 시와 근래의 내 짧은 시를 따로 나누어 읽어야 합니다.
이재훈:시인은 시로 얘기할 뿐이다. 내 시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시인들도 많습니다. 대개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시인이 가고자하는 세계를 읽을 수 있는 시겠지요. 시인의 시론이 시를 쓰는데 얼마만큼의 필요충분조건이 될까요.
오규원:독자적이고 독창적인 구조와 공법을 가진 건축물이 있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설계도와 공사 지침서가 있을 것입니다.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기이한 일일 것입니다. 시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구조와 수사법을 가진 작품이 있다면 이를 뒷받침하는 시론이 있을 것입니다. 없다면 그 또한 기인한 일일 것입니다. 단 시론이 존재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명문화(明文化)되어 있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시인의 머리 속에만 있고 명문화되어 있지 않은 경우입니다. 그 어느 쪽이든 있기만 하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시론이라고 해서 꼭 논문 형식으로 되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어떤 형식이든 상관없습니다.
이재훈:얼마 전 한 시전문지에서 “우리 시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연속기획을 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다른 여러 잡지에서도 시의 문제점에 대해 논구하는 많이 특집들이 있었습니다. 특집들을 토대로 살펴볼 때 우리 시의 문제점에 대해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실험의식의 부재와 복고적 서정성으로의 퇴행이고 또 하나는 소통불능의 자폐적 내면으로의 갇힘입니다. 앞의 문제는 소위 일컫는 서정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고 뒤의 문제는 모던한 시에서 발생되는 문제점입니다.
시인들 스스로는 어디를 바라봐야 할지 새로운 유토피아나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복고’와 ‘유폐’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첫 시집이나 두 번째 시집을 낸 이후로 지쳐서 시작을 포기할까도 생각하는 시인들도 많이 눈에 띕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오규원:우리 시의 문제가 서정시의 ‘복고’와 모던한 시의 ‘유폐’로 정리되고, 전망의 부재가 ‘복고’와 ‘유폐’를 선택하게 한다고 젊은 시인들이 스스로 인정하는 한, 한국시의 미래는 밝다고 봅니다. 젊은 시인들이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한 그들에게 전망 있는 시학이 개척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망 있는 시학이 반드시 ‘복고’와 ‘유폐’를 벗어난 곳에서만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철저하고 절실한 ‘복고’와 처절하고 막다른 ‘유폐’의 시학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는 그 어디에서든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새로 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서정시의 ‘복고’니 모던한 시의 ‘유폐’니 하는 시적 현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뿐 아니라 감각조차 할 수 없는 다수의 시인들에게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위의 지적은 수정되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생산한 문학은 한국 사회가 그대로 땅 속에 묻어버릴 것이므로 문제가 될 것도 없겠습니다. 얼마간의 종이 낭비가 따르겠지만 그런 정도의 낭비란 문화가 언제나 감당해야 할 몫인 탓입니다.
이재훈:시를 쓰는 젊은 후학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요.
오규원:예술이란 중도라든지 타협이라든지 모범이라든지 하는 것에 있지 않고 극단에 있습니다. 이 점에 유의해 주었으면 합니다. 대중도 없고 환호도 없고 독자도 없는 곳으로 가십시오. 그곳에 자리 잡으면 당신의 독자가 새로 창조될 것입니다.
* [시와세계], 200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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