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처럼 오련하게 사레들리네

 

 

 

이재훈

 

 

 

 

정말 오랜만에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닌 줄 알면서도 이 어쩔 수 없음이 제 마음을 다시 붙잡습니다. 늘 당신에게 나는 막무가내의 고집쟁이로 비춰졌겠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당신이 나를 만난 이후로 활짝 웃는 날보다 우울했던 날들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저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하기보다는 늘 각을 세우고 칼 같은 말들을 내뱉던 시절 말입니다. 문학을 한다는 이유로 한없이 유치하고 철없이 굴었던 시간들이었죠. 하지만 그때도 알고 있었어요. 당신과 내가 얼마 후면 이별할 수도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마 당신이 아니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시작하기도 전에 다 보일 때가 있습니다. 다 보인다고 믿고 있는 자신의 마음처럼 서글픈 일은 없죠. 사랑은 제게 화두와 같은 것입니다. 다른 관념의 외피를 입을 때조차도, 사랑의 일을 돌보는 것은 제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어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럴 때 내 영혼의 한계를 발견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게 사랑의 일이라지만, 너무 어렵고 힘이 듭니다.

쓸쓸함을 사랑하는 건 나 자신을 사랑하려고 하는 노력의 하나입니다. 쓸쓸함도 지금 내 모습의 일부이니까. 그때 나는 어떤 꿈이 있었을까요. 시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막무가내로 바랐던 꿈이었습니다. 당신은 내게 이런 말도 했었죠. “시가 좋아요? 내가 좋아요?” 그건 범주가 다른 문제라고 말했지만, 당신이 내게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어쩌면 사랑을 잘 몰랐던 겁니다. 에릭 프롬이나 구약의 아가서에 나오는 사랑만이 사랑인 줄 알았던 겁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며, 살아가는 일이며, 함께 옆에서 호흡하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거죠. 내 꿈이 시인이었기에, 자주 시의 동력을 얻기 위해 숨어버렸습니다. 사람살이가 모두 달라서 달팽이의 칩거가 꿈인 자도 있죠. 나는 그때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그때 바라보려 하지 않고 숨어버리려고 했으니까요. 마음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과 같아서, 파릇파릇 당신이 지금 돋아납니다.

아무 것도 몰랐던 시절이라고 하겠습니다. 늘 변죽만 울리다가, 자기비하에 빠지는 편지만 썼던 시절입니다.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은 꼭꼭 숨겨두었던 시절입니다. 그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촌스러운 거라고 생각한 내가 참 한심합니다. 참 소심했습니다. 자꾸만 삶이 어떤 힘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에 대해 두려웠습니다. 일반의 구속과 다른 사랑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빨리 늙고 싶었던 듯도 합니다. 내 마음의 원함이 늘 그런 식이었습니다.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내게 당신은 위로였습니다. 늘 가장 먼저인 시간에 당신이 있었습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로 아플 때도 먼저 당신이 떠올랐습니다. 바깥의 바람을 맞고 들어와 헝클어진 머리와 차가워진 몸을 당신의 기억으로 덥혔습니다. 날 방치하고, 몰아세우고, 핍박하던 시간들. 당신을 만난 것은 작은 우연으로 시작되었지만, 당신을 만난 게 우연이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 이후로 꽤 오랫동안 궁핍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기도 했죠. 순정이란 것을 당신으로 인해 알았습니다. 늘 수동적이었던 나. 사람의 이성과 감정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일 때 비로소 제 것이 된다는 걸 왜 몰랐을까요. 당신을 통해 어떤 의미들이 차곡차곡 쌓여 갔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바퀴의 절망과 환희를 돌아 결국 제자리에 서 있을 때, 언제부터 혼자 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누군가 기댈 어깨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언젠가부터 혼자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아마, 당신을 시작으로 천천히 성숙되어갔나 봅니다.

당신이 나를 만나 큰 것들을 버렸다고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그때 당신은 용기를 가진 자였습니다. 나는 무엇을 버렸을까요. 늘 망설였던 것 같아요. 이건 모두 당신을 실패할까봐 두려워서겠죠. 당신을 오래오래 봐야겠다는 설익은 마음으로 그랬을지도. 늘 말줄임표로 끝이 나는 당신에 대한 생각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잊으려했네, 내 가슴에 철쭉마냥 흐드러진 분홍빛 시간을, 저어기 삶의 저쪽에 띄우려했네, 흘러가면 그만이겠지, 한 세월 넘어 河口에 닿으면 분홍으로 물든 물빛, 그 빛깔 기억하면 되겠지, 그의 집 앞, 옷가슴, 덕적덕적 낀 욕망을, 백수광부처럼 노래하며 떠나 보내려했네, 그러나, 내 가슴 아직 고여 있네, 썩으면 어떡하나, 물가로만 빙빙 도는, 내 속 수면 위에 떠서 자맥질하는······ 그 철쭉 그만 삼켜버렸네, 어떡하나 내 사랑, 도근도근 내 사랑, 나 몰랐네, 빛 좋은 철쭉, 먹으면 죽는다는 전설을, 아아 사레들리네, 꿈처럼 오련하게, 사레들리네

― 「강」 전문

 

나에게 사랑시는 없습니다. 사랑으로 가는 길목의 지난함만이 있을 뿐. 사랑이라고, 첫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사레들릴 것 같습니다. 철쭉은 아름다운 꽃이지만 먹어서는 안 되는 꽃입니다. 철쭉의 운명과 분홍 빛깔의 아름다움이 내 사랑의 이미지입니다. 먹으면 죽는다는 전설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사랑을 꿈꾸었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네요. 다만 당신의 빛깔과 생각하면 떠오르는 맛과 자꾸 사레들어 고개를 돌려야했던 풍경만이 선명합니다.

사실 내게는 당신이 참 낯선 경우였습니다. 애매함의 경계 위에서 위태위태하게 걷고 있는 시간들이. 터무니없이 허둥댔던 그 긴 밤의 시간들이. 바보처럼, 답답하게, 깊은 망설임의 안개 속에서 앞을 못보고 발걸음치던 시간들이. 다만, 조금 늦거나, 조금 빨랐을 뿐이라고 자위했습니다. 당신 눈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보였다고 했죠. 당신을 보면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한 아련함과 불편함 때문에 복잡한 심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내게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이었죠. 그런 게 바보 같았나요? 지금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요.

당신을 만나겠다는 미련한 생각은 안하기로 했습니다. 이제 당신을 볼 수 없지만, 그 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봄철 아지랑이 올라오는 긴 흙길을 함께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란히 걷지 못하고, 손 잡아주지 못하고 자꾸 뒤만 돌아보았던 그때. 그 시간이 있음으로 사랑을 조금 엿보았던 것 같습니다. 부디, 행복하기만을 기도하겠습니다.

재훈

 

_ 출처 바로가기 : <어쩌다 당신이 좋아서 - 내 생애 최고의 '사랑 고백'을 꿈꾸는 그대에게>, 곰, 2013, 14,000원

 

 

 

Posted by 이재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