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벗겨지지 않는 시의 ‘빤쭈’ 벗기기


김점용 _ 이재훈

 


밤이 되면 으레 검은 우물 속으로 들어간다. 검은 우물. 그렇다. 검은 우물은 바닥이 없다. 그 검은 우물이 수만 가지 색깔로 보이기도 한다. 심연이란 그런 것인가. 배추흰나비 한 마리 팔랑거리는 단아한 이미지 한 컷이 아름다울 수 있는 그런 곳인가.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맡에 놓인 ‘열두 개의 꿈’. 그리고 계속 따라다니는 꿈…
꿈처럼 속설이 많은 건 없다. 속설인 줄 알면서도 우리는 그 속설을 믿는다. 결국 꿈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로는 규명할 수 없는 현상일까. 꿈은 하나의 심상이다. 시각적 심상이 부각되기는 하지만 그 심상 안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심상이 함께 놓여 있다. 이 스펙트럼이 융합(融合), 치환(置換), 상징, 형상화(形象化) 등의 메커니즘을 거치면서 ‘꿈’이라는 이해불가한 심상을 기억하게 만든다. 그 기억되는 심상이 회상몽인데 그것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꿈’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꾸는 대부분의 꿈은 기억하기 어렵다. 아니, 금방 기억에서 삭제된다. 과학적인 견해에 따르면 꿈은 깊은 수면에 들지 못했을 때 꾼다고 한다. 그러면 꿈을 많이 꾸는 사람은 깊은 수면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이 되는가. 신경이 예민하거나 정신의 오감이 불안한 사람에게 꿈이 더 많이 찾아오는 것인가. 그럼 당신은 지금 얼마나 많은 꿈을 꾸고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시인의 ‘빤쭈’는 좀 벗겼을지 몰라도 시의 ‘빤쭈’ 벗기기에는 실패했다. 이미 우리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꿈에 대한, 꿈과 관계된 그리고 꿈을 이루는 다양한 얘깃거리는 존재했다. 나는 시인의 눈가에 주름이 잡히는, 그 웃음이 좋았다. 우리가 희망이라고 부르는 꿈과 시인이 말하는 꿈과의 막막한 거리를 그 웃음이 대신해 주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무슨 이유에선지 아주 유쾌해져 있었다.

이재훈: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시집 뒷면에 쓰신 ‘시인의 말’에서 “시는 결코 ‘빤쭈’를 벗지 않는다”면서 “시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말이 없다”고 하셨는데 대담을 맡은 제게는 난감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대담이란 시인의 ‘빤쭈’를 확, 벗겨버리는 일이니까요.(웃음) 그래도 오늘은 조금이나마 시늉이라도 내줘서 독자들에게 좀 더 시인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점용:하하하, 그거 재밌고 중요한 얘긴데요… 거기 쓴 건 제가 ‘빤쭈’를 벗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시가 그렇다는 얘기지요. 그러니까 저로서는 할 말이 없는 것이고요.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이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을 크게 산문적 언어와 시적 언어로 나누어 얘기할 때 산문적 언어는 대체로 명쾌해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성적이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니까요. 그런데 시적 언어는 전혀 다르거든요. 논리나 이성, 혹은 과학적 언어로 풀 수 없는 영역에 놓여 있지요. 그러니까 그 말은, 아무리 애써봤자 그(시) 내용을 속속들이 알 수 없다는 뜻에서 한 거지요. 이 시인도 시를 쓰시니까 아시겠지만 자기도 모르게 어떤 구절이 나올 때가 있잖아요. 일종의 무의식적인 작용 같은 거 말입니다.

이재훈:네, 그럴 때가 많더군요. 제 개인적으로는 등단작을 포함해서 많은 시가 그런 경우거든요. 말하자면 뮤즈가 찾아와서 시가 쓰여진 경우라고 할까요?(웃음) 나름대로 자의식이 많이 개입하고 있겠지만요.

김점용:그런 면에서 보면 시인은 바보지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자기도 모르고 써대니까요. 그런데 중요한 건 그런 시적 언어와 산문적 언어가 합쳐져야 인간에 대한 종합적 이해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만으로 이 세계와 인간을 완전히 설명할 순 없으니까요. 우리가 보통 시를 ‘불립문자’라고 하는 것, 또는 말해진 방식과 말하는 성질이 다르다고 하는 건 그 때문이지요. ‘빤쭈’ 안에 감춰져 있으니까 미루어 짐작할 뿐이고 느낄 뿐이죠. 이거 좀 야한가요?(웃음)

이재훈:빤쭈 얘기는 그쯤 해두고, 고향이 통영이신데 유적지도 많고 예인들도 많이 배출한 고장이지요? 저도 그곳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습니다만…

김점용:네, 태어나서 고등학교 때까지 통영에서 죽 살았습니다. 한때는 해저터널과 착량묘 근처에 살아서 이 시인처럼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많이 보고 자랐죠.(웃음)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잔 날도 많았습니다. 이 시인이 대표로 책임지세요.

이재훈:그럼 나중에 제가 한잔 사지요.(웃음) 고향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시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내용이나 형과 형수, 그리고 조카 얘기도 나오더군요. 선생님 시에서 가족사는 중요한 시적 경험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강박적 인식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설명하는 관점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에서는 실제 경험을 극단적으로 왜곡하고 변형된 상태로 전달하는 게 많습니다. 실제의 가족사는 어떠했는지 조심스럽게 묻고 싶네요.

김점용:시에 있는 대로 다 사실이지요. 오히려 실존인물들 때문에 밝히지 않은 것들도 많은데, 뭐 중요한 것들은 대충 다 나왔습니다. 한 가지 해명해야 할 것은 시에 등장하는 자폐아가 친조카는 아니구요, 그 자폐아의 아버지를 제가 형이라고 부르니까 독자들이 조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자폐아 우인이는 제가 예전에 다니던 직장 상사의 아들이었거든요.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직장이 대기업 홍보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2년 정도만 다니고 확실하게 망가지든가 아니면 공부를 대차게 좀 해보든가 그럴 참이었는데 생각보다 직장생활이 재밌더군요. 일도 쉬웠고 돈도 많이 주는 데다, 무엇보다 넥타이를 안 매도 될 정도로 자유롭고 시간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그게 얼마 못 갔어요.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평소 직장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다가 정말 그만두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나서 막판 무렵엔 자연스레 술자리에 자주 끼이게 됐죠. 그때 부서 과장님의 아들이 자폐아라는 걸 알게 됐고, 직장을 그만두고도 그 집에 자주 갔었죠.

이재훈:시에서의 자폐아 ‘우인’이는 꿈과 현실, 모두에 공존하는 인물이네요?

김점용:그렇죠. 우인이와는 그렇게 인연이 되어 일 년 정도 왕래를 하다가 그 뒤로는 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우인이가 특수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시간도 그렇고 다른 사정도 있었고요.

이재훈: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시집 출간 후 많이 들어본 질문일 텐데요. 선생님의 시는 시집의 해설에서 상세히 설명한 대로 꿈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제시하는 전반부와 깨어 있을 때 꿈에 대한 시적 자아의 감정이나 사유, 혹은 상황을 진술하는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프로이트 이래 정신분석학이 문학비평의 새로운 잣대 구실을 하면서 꿈에 대한 해석이나 연구가 아주 활발하게 행해졌습니다. 꿈에 대해 말할 때 어떠한 사유방식으로 작품에 접근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 봤는데요. 기술되어야만 하는 꿈이라면 그것은 꿈꾼 자의 특별한 개성을 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개성은 인격 자체에서 발생할 수도 있고 어떤 특수한 경험으로부터 발생할 수도 있겠지요. 이 두 가지 모두가 다 꿈꾼 자의 개성을 말하는 좋은 준거가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은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쉽게 말하면 이상한 꿈을 꾸는 자가 굳이 자기 해명을 한다면 자기 자신에게 무게를 두느냐 아니면 외부 환경에 무게를 두느냐 하는 문제겠죠.

김점용:물론 아시겠지만 그 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거지요. 환경이 개성을 만들고 개성이 환경을 변화시키기도 하니까요. 그래도 굳이 얘길 하자면 제 경우엔 가족사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가족사의 범위를 넓혀 개체의 유전적인 정보까지 포함한다면 말할 것도 없지요. 제가 좀 독특한 꿈을 많이 꾼 건 사실이고, 자기 환영(幻影)이나 환청도 자주 경험했는데, 아무래도 이런 경험들은 가족사의 왜곡이나 굴절에서 생겨난 측면이 클 겁니다. 그리고 원래 제가 꿈을 많이 꿨습니다. 꿈을 많이 꾼다고 해서 그게 장애는 아니거든요. 누구나 많은 꿈을 꾸죠. 꿈이란 게 어차피 무의식의 한 표상인데 그걸 두고 개성적인 무의식이다, 아니면 몰개성적인 무의식이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여느 사람과 다른 게 있다면 대부분의 꿈들을 기억한다는 것이겠죠.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자면 긴데, 간단히 말해 그것도 저는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정신분석학이나 신화에 관심을 갖고 자기 꿈을 들여다본다면 충분히 기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재훈:꿈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동기라도 있습니까?

김점용:처음엔 꿈이 너무 희한하니까 이게 무슨 뜻인가 싶어 일기장에 써보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점점 악몽에 시달릴 때가 많아지니까 이거 좀 정밀하게 따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그쪽 방면의 책도 보고 사람들과 만나 얘길 하다 보니 조금씩 아마추어 분석가가 되어 갔지요. 악몽을 자주 꾸게 된 건 정확하지는 않지만 직장생활과 관련이 깊다는 생각이 들고 다른 원인도 있는 것 같고 그래요.
이런 걸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까 이 시인께서 빤쭈를 벗으라고 하셨으니까, 아마 그 무렵에 가진 첫 성경험도 한 축으로 작용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건 프로이트 이론의 밑바탕이니까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고, 직장생활과 관련해서는 일종의 스트레스가 꿈으로 나타난 거겠죠. 직장생활이 쉬웠다고는 하지만 직장도 엄연한 이익집단이고 경쟁사회인 데다, 홍보실이다 보니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야 하고, 쓰기 싫은 글을 쓰면서 자의식에 시달려야 할 때도 많았으니까요. 학교 다닐 때는 이해관계에 그다지 많이 얽매이지 않잖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을 번다는 것 자체가 굴욕이고 치욕이기 때문에 내적으로 꼬일 수밖에 없었겠죠. 그것이 유년의 잠재된 욕망이나 기억, 성적 욕망과 뒤엉키면서 꿈으로 나타났을 거라고 어렴풋하게 추정해보는 거지요. 또 그 무렵에 재밌는 모임이 있었는데 저를 포함해 세 명이 ‘꿈읽기’ 모임을 만들었어요. 각자 꿈을 이야기하고 서로 분석해주는 거였지요. 관련서적도 함께 읽었고요. 개인 사정 때문에 얼마 가지는 못했지만 제가 꿈에 대해 분석가가 필요하다고 느낀 건 그 모임 때문이었죠.

이재훈:꿈 연작시에 일련의 번호가 있습니다. 그만큼의 분량을 쓰신 건가요? 실제의 꿈을 시로 쓰려면 약간의 변형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을 텐데…

김점용:그것보다 훨씬 많이 썼죠. 꿈이란 게 무의식의 심연처럼 무궁무진하니까요. 대부분 기록된 채 방치되어 있고, 요즘은 융이 말한 ‘큰꿈’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거의 버리죠. 그리고 시와 관련해서는 꿈을 바로 시라고 우기기엔(?) 제 양심이 허락칠 않았어요. 공짜로 건지는 거니까. 그리고 서구의 초현실주의가 보여준 한계도 뻔했고요. 최소한 꿈이 현실과 관계 맺는 접점은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씀하셨듯이 시로 쓰려면 변형은 어쩔 수 없지요. 대개는 하나의 영상을 언어로 번역하는 거니까 기록 자체가 왜곡이죠. 그걸 ‘2차 왜곡’(꿈 자체의 왜곡이 1차 왜곡이다)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꿈 한 토막을 전부 다 쓸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애로였어요. 그래서 의미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만 잘라서 옮겨놓은 겁니다. 번호를 매겨 놓은 건 처음엔 개성화 과정으로 시집을 배열할까 싶어서 그랬는데 나중엔 다시 흔들어버렸죠. 어떤 식으로 정형화한다는 게 꿈이나 시의 기본적 성격과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재훈: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보면 꿈 해석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로 꿈의 내용에 주목하여 어떤 관점에서 유사하게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내용으로 대체하려는 것, 이것이 ‘상징적인’ 꿈 해석이죠. 예를 들면 요셉이 해석한 파라오의 꿈이 그렇고 시인들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꿈들은 대부분 이러한 상징적인 해석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가 암호해독법인데 이건 완전히 설득력 없는 얘기 같더군요. 시인들이 만들어낸 꿈들이 상징적인 해석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는데요.

김점용:꿈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지요. 금방 언급하신 프로이트는 소망 충족을 바닥에다 놓고 풀어갑니다. 결핍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보는 거지요. 반면에 융은 보상성의 원리로 풀어가고요. 꿈이 한 개인에게 있어 어떤 부분을 보완해주는 기능을 한다고 보는 거죠. 크게 보면 비슷하지만, 주체의 욕망에다가 포인트를 두느냐 아니면 인격의 전체성에다 강조점을 두느냐가 서로 다르지요. 최근의 뇌생리학에서는 잠을 기억 저장을 위한 것으로 보고, 꿈은 그 저장 과정에서 파생되는 무엇으로 이해하는 모양입니다.
사실 해석이란 ‘다르게 말하기’에 불과한데, 꿈이 문학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꿈이 지닌 은유나 환유적 성질입니다. 꿈이 시의 상징과 유사한 것은 그 때문이지요. 경험과학이나 실증과학의 언어로 말할 수 없으니까 상징적 언어(시적 언어)로 말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처음엔 프로이트의 논리에 반해서 푹 빠졌는데 나중엔 회의가 많이 들더군요. 1대1 대응으로 해석하는 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고, 오히려 해석의 범위를 넓혀서 상징적 역할 그 자체를 강조하는 융 계열의 접근이 유효하다고 봅니다. 시집의 시들 중에는 꿈에 대한 느낌이나 해석이 여러 번 달라진 게 더러 있습니다.

이재훈:꿈 속에 같은 성격과 조건을 가진 동일인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면 그건 그 사람의 의식이 적극적으로 개입된 무의식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시에 나타나는 우인이를 보면 화자는 자폐아 우인이와 동일시하고 싶어하거나 동일시되어 있다고 말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우인이가 자신의 삶에 많은 부분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김점용:사실 직장 다닐 때에도 자폐아라는 별명 아닌 별명을 들었습니다.(웃음) 그러니까 그 자폐아를 보는 순간에 강력한 친화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죠. 자폐에 대한 자료를 보면 자폐아 자체가 대단한 매력을 불러일으킨다고 해요. 우인이를 보면서 저의 모습을 본 것이겠지요. 기본적으로 투사이면서 일종의 동일시라고 봐야죠.

이재훈:결국 시인과 우인이가 꾸는 꿈은 인간 세계가 만들어 놓은 질서와 공존하기 힘들다는 얘기죠. 병든 화자와는 달리 천성적으로 하나를 덜 가지고 태어난 화자니까요.

김점용:역설적으로 말해 닫혀 있어서 완전한 세계일 수도 있는데 그건 환상이죠. 나머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뭐가 뭔지.(웃음)

이재훈:신작시가 첫 시집에 비해 많이 달라졌습니다. 상징에서 알레고리로 간 듯한 생각인데요. 앞으로 시작 방향은 꿈 이야기에서 다른 곳으로 간 건가요? 시 「분석가」는 시인이 꾼 꿈의 해석을 둘러싼 시인과 평론가의 알레고리로 읽히는데요.

김점용:예. 달라진 부분이 있습니다. 발표된 시를 두고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는 좀 곤란하지만 「분석가」는 사실 나 자신과의 대화입니다. 꿈을 꾸는 나와 그 꿈을 해석하려는 나와의 관계를 다뤄본 것이지요. 반복되는 얘기지만 시적 언어가 산문적 언어의 이면, 그 대극의 어떤 것들을 드러냄으로써 이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때, 달라졌다고 해도 어찌 보면 같은 길을 가는 셈입니다. 다만 첫 시집이 무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어 보여준 것이라면 이번 시들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낸 것이 차이라면 차이랄까요. 표현하는 방식이 조금 다를 뿐 마찬가지겠지요.

이재훈:프로이트의 논문 중에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이 시인들의 꿈을 이해하는 데 좋은 이해의 지평이 되었는데요. 그 글을 보면 문학 창조자는 놀이를 하는 아이와 동일한 것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놀이는 현실 세계의 가시적이고 촉지할 수 있는 사물들에 기대어 상상적인 대상과 상황들을 보강하기를 즐기는 것인데요. 아이의 이 즐김 자체가 공상적 세계를 진지하게 창조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의 놀이가 성인이 되면서 놀이 대신 공상을 따라가는 것으로 대체된다고 하는데요.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공상이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그렇게 이해해야 할까요?

김점용:공상보다는 영어의 ‘delusion’이 더 정확할 것 같은데 일종의 망상체계라고 봅니다. 프로이트의 개념 중에 시인이나 예술가와 관련해서 ‘승화(sublimation)’라고 있지요? 그게 참 프로이트의 논리에서 아킬레스건 같은 건데, 여기서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자체 모순에 빠질 위험이 굉장히 커요. 어쨌거나 시인이나 예술가의 경우, 유아적인 망상체계의 고집이 큰 역할을 한다는 건 맞는 말인 듯해요. 저는 시나 예술이 주는 미적 즐거움은 이와 관련이 깊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시가 주는 유일한 교훈이란 ‘이렇게 살면 망한다’ 그 이상은 없다고 봐요.(웃음) 쾌락원칙만 고집하는데 어떻게 제대로 살겠어요, 안 그래요?

이재훈:그래서 시인들이 시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가 봅니다. 짜릿한 놀이이기 때문에. 장시간 감사합니다. 인사동의 밤이 벌써 깊어졌네요.


출전 : <나는 시인이다>(팬덤북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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