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등선을 꿈꾸는 호랑나비돛배를 타고



고진하․ 이재훈



홀로 산길을 오르다 보니,/가파른 목조계단 위에/호랑나비 날개 한 짝 떨어져 있다./나도 羽化登仙의/가벼움을 꿈꾸는 생인지라/연민이 일어 가만 들여다보고 있는데,/개미 한 마리 어디서 나타나/뻘뻘 기어오더니/호랑나비 날개를 턱, 입에 문다/그리고 나서/제 몸의 몇 배나 되는/호랑나비 날개를 번쩍 쳐드는데/어쭈,/날개는 근사한 돛이다./(암, 날개는 돛이고 말고!)/바람 한 점 없는데/바람을 받는 돛배처럼/기우뚱/기우뚱대며/산길을 가볍게 떠가고 있었다./개미를 태운 호랑나비돛배는!

― <호랑나비돛배> 전문


이를테면 상상력은 이런 것이다. 떨어진 날개에 돛을 달아주기. 몸으로부터 거세된 날개는 더 이상 의욕적인 주체자가 될 수 없다. 이때 황망히 나타난 개미는 호랑나비 날개를 제 몸에 싣는다. 여기서 개미는 유토피아의 길을 인도해 주는 파수꾼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해 열심히 땀흘린 것뿐이다. 결국 저 호랑나비돛배는 무엇인가. 어디로 향하는 배인가. 우화등선(羽化登仙). 말하자면, 누구에게 밟힐 뻔한 처지에서 돛을 달고 산길을 가볍게 떠가고 있으니 번데기가 나비로 화한 것에 비견할 만하다. 호랑나비돛배는 육보시를 하는 것인가. 우화등선은 도도한 꿈이다. “나는 빛인 적이 없다./해의 기생식물 해바라기처럼 나에게 기대어/그대 안의 어둠을 몰아내려 하지 말라.”(<예수>) 라고 절대자를 인식하는 자아의 의지와 단호함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시인은 황폐함과 죽음의 골고다를 노래했고, 땅을 고르는 아낙네의 손이 뚫린 우주를 누비는 광경도 목도했다. 고진하 시인이 신과 인간의 중재자임에도 불구하고 사유의 편재성(遍在性)이 두드러지는 것은 진리의 절대성에 적절한 거리를 두기 때문이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말을 빌리자면(<신화의 힘>중 ‘영원의 가면’ 부분), 적어도 그는 형상을 통하여 신을 경험하지 않는다. 형상을 통하여 신을 경험할 경우, 거기에는 우리의 형상을 짓는 우리의 마음이 신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형상이 없는 존재 혹은 형상을 초월한 존재를 경험한다는 것은 신과 하나되기이다. 신과 하나가 된다면 주체와 객체의 이원성은 초극되고 형상은 사그라진다. 고진하 시인의 노장에 대한 깊은 관심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시라는 그릇이 진리와 구원에 대한 넓은 긍정을 가능케 하는 가장 적절한 용기라는 것이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는 날, 시인을 만났고 또 빗소리를 들으며 이 글을 쓴다. 이런 비에 대한 친연성은 의욕에서 오는 것이다. 비와 나를 공통분모로 묶어두려는 애정어린 의욕. 인사동 어귀에서 시인을 기다리며 나는 그와의 공통분모를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내게서 오래도록 머물 것 같다는 의욕이 자꾸 북받쳐 올랐다.

이재훈:감리교 신학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시절을 듣고 싶습니다. 강원도에서 계속 성장하셨나요?

고진하:영월 주천이라는 산골짜기에서 자랐는데, 워낙 시골이라 문화적인 혜택을 거의 못 받고 자랐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시집 한 권 가져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 대신 대자연의 품에서 마음껏 산과 강과 들판을 뒹굴며 자랐죠.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시를 쓰는 제겐 큰 축복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고등학교까지 영월에서 보내고 대학 입학하면서 서울로 왔죠.

이재훈:<기독교사상>이라는 월간지에서도 일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저는 그 잡지의 애독자였습니다.

고진하: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에 제주도에 내려갔습니다. 제주도에서 첫 목회를 한 거죠. 그러다 올라와서 다시 신학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했는데 대학원 다니면서 <기독교사상>에 입사해서 잡지 편집 일을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대학원도 졸업했구요. 신학대학원에서는 문학을 이해하는 교수님이 지도교수가 되셔서 허만 멜빌의 <백경>이라는 소설로 논문을 쓰며 문학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재훈:1987년에 등단을 하셨으면 우리나라 나이로 34세잖아요. 한창 목회에 전념하시고 계셨을 텐데요. 어떤 계기가 있으셨을 것 같아요. 사건이라든지 내면적인 어떤 열망이라든지 하는.

고진하:85년도던가요. 당시에 <기독교사상>에 있었는데요. 군부 독재 시절, 잡지에 게재된 글이 보안법에 걸렸는데, 일종의 필화사건인 셈이었죠. 그래서 안기부에 끌려가서 이런저런 곤욕을 치루고 그 뒤에 압력에 의해 사표를 냈습니다. 그 이듬해 곧바로 영월로 낙향을 했죠. 영월에 낡은 고향집이 있었으니까요. 86년도에 고향에 내려가서 칩거하다시피 하면서 열심히 시를 썼습니다.

이재훈:그 후로는 어떻게 지내셨죠?

고진하:그 이듬해, 97년에 다시 홍천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이라는 첫 시집의 세계가 그 홍천 시절을 담고 있습니다. 아주 자그마한 교회인데 가난하고 척박한 곳이었죠. 홍천에서 5년 정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지를 떠나서 출판 일을 1년 정도 했습니다. 어느 기독교 출판사에서 편집주간으로 일을 하다가 다시 그만두고 강릉으로 다시 목회생활을 하러 내려갔죠. 강릉에서 두 번째 세 번째 시집을 냈고 8년 가까이 강릉에서 목회를 하다가 지난해에 지금 있는 원주로 왔습니다.

이재훈:신학을 공부하면서 문학을 한다는 게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문학도 종교와 비슷한 측면들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문학도 구원의 욕망이 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요. 문학과 신학 사이의 갈등도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고진하:문학에도 혼(魂)이 있다면 저는 20대 초반에 문학에 나의 혼을 빼앗겼고 제주도에 내려갈 때도 목회에 대한 열망 외에 글쓰고 싶은 욕망이 있어서 내려갔었죠. 그 후로도 계속해서 쓰긴 했었는데 집중은 못했던 거 같아요. 문학의 스승도 없었고요. 혼자 읽고 혼자 쓰는 게 고작이었죠. 대학원 다니고 <기독교사상>에 있으면서도 시에 대한 갈망은 계속 있었죠. 그러다가 영월에 내려가서 1년 동안 참 많이 습작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그 이듬해에 등단을 했는데요.

문학작업과 내가 하고 있는 목회, 신학 사이의 갈등이 현실적으로는 늘 존재했죠. 이를테면 단지 종교를 관념으로 갖는 게 아니라 소위 제도적인 현실 속에서 맞부딪혀야 하는 상황이니까 말이죠. 또한 교인들은 성직자에 대한 자기들 나름대로 기대의 울타리가 있는데, 그것이 상상력을 제한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 것 사이의 갈등은 끊임없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면서도 문학을 포기하지 못하는, 뭔가 갈고리에 꿰인 것 같은 그런 정황 속에서 계속 글을 쓰고 했었습니다. 그 세월이 10여년 이상 흘렀죠. 지금은 문학하는 행위와 종교적인 행위 사이에 큰 갈등은 없어요. 우리가 무제한의 자유를 갈망하지만 세상에 사는 인간들 치고 얽매임 없이 사는 존재들이 어디 있습니까.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얽매이지요. 나이 들면서 이런 얽매임을 긍정하고 외적인 자유보다는 내면의 자유가 소중하다고 생각했지요. 적어도 <우주배꼽>이라는 시집부터는 비교적 종교와 문학 사이의 갈등에서 많이 자유로워졌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교우들을 만나면서 목회를 하는 과정들이 글쓰는 것에 도움이 되고, 또한 문학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목회를 하는 것에도 도움이 됩니다. 상호보완적이죠. 저는 목회만 하는 다른 친구들보다는 시야가 조금은 넓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문학적 독서와 글쓰기, 작가들과의 폭넓은 사귐 덕분이죠. 그래서 교인들을 만나면서도 내가 종교적 도그마에 사로잡혀서 사람을 정죄한다든지 그러지 않게 되었죠. 문학의 자유로움과 상상력은 우리가 종교적인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사유와 행동의 폭을 넓혀준다고 생각합니다. 삶이라는 게 갈등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건 불가능한 거고 어떠한 모양의 갈등이든지 있는 거구요. <우주배꼽>부터는 문학과 종교 사이의 갈등이 줄어들고 내 안에서 비교적 둘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진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죠.

이재훈:지금 강원도 춘천 성암교회에 시무하시는데요. 독자들을 위해 교회에 대해 잠깐 소개해 주세요.

고진하:지금은 담임목회를 그만두고 설교목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주일에만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교회의 행정적인 문제나 교인들을 돌봐야 하는 문제, 이런 것에서는 자유로운 상태죠.

이재훈:선생님의 초기시를 보면 ‘텅 빔’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합니다. 첫 시집의 자서에서도 “푸르른 폐허의 날들. 빈들의 황량함과 텅 비어 있음의 충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텅빈 충만’은 다분히 노장적 사유라고 생각됩니다. 기독교적 사유는 ‘텅 빈’이 없지요. ‘충만’에서 오는 기쁨과 자유라고 해야 더 어울린텐데요. 이 충만은 한없이 낮아지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됩니다. 예수의 생애나 나자로의 생이 그랬듯이 말이죠. 거기에 반해 노장적 사유는 약간 오만한 데가 있습니다. 깨달음의 경지를 빈 것으로 일축해버리는 것을 보면. 하지만 그러한 매력 때문에 어떤 진리나 절대에 도달하려고 하는 시인들은 이런 사상에 매력을 느낍니다. “침묵만으로도 충분히/배부른 항아리들”(<묵언의 날>)의 사유는 어디서 나온 것인지 궁금합니다.

고진하:제 시 속에는 불교적인 이미지도 많이 들어가고 기독교적인 이미지도 들어 있지요. 또한 제 안에는 도교적인 것도 있습니다. 내가 노․장(老莊)을 좋아하니까요. 그러한 것들이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내가 억지로 의도하는 게 아니구요. 저는 예배당 가도 마음이 편하지만 사찰에 가도 마음이 편하거든요. 내 안에 그런 피가 흐르는데 그걸 어떻게 거부하겠습니까. 이번에 발표하는 <연꽃과 십자가>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시입니다. 결국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건데요, 물론 이때 종교는 제도로서의 종교를 말하는 겁니다. 예수가 이 땅에서 기독교를 만든 게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이 나중에 기독교를 만든 것이지요. 종교라고 할 때는 어떤 종교의 제도나 계율보다는 그 종지(宗旨)를 생각해야 합니다. 기독교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우리는 제도로서의 기독교보다는 예수의 삶과 그 가르침에 천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종교적인 관용의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연꽃과 십자가>라는 시에서도 표현되었지만 나보다 크신 분을 의식하게 되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연꽃에 눈을 흘길 이유도 없고 불교인이라고 해서 십자가에 눈을 흘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재훈:아마도 선생님의 직업(?)에 대한 선입관이 작품을 평가하는 데 큰 작용을 한다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고진하:대부분의 많은 비평가들이 내가 성직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내 시를 보려고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것이 내 페르조나일 수도 있는데요. 그런 면에서는 비평가들에게 다소 불만스러운 점도 있지요.

이재훈:기독교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는 많은 시인들과 작품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문학이라는 용어가 타당한지는 모르겠지만 기독교 문학이라면 우선 진리에 대한 자기확신이 먼저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요. 그만큼 기독교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 다른 종교에 비해서 강합니다. 구원은 오직 한 길이라는 게 기독교 정신 아닙니까. 즉 하나님을 마음 속에 구주로 영접하는 일입니다.(“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로마서 10장9절) 이러한 구절은 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시는 진리에 대한 확신에 일정한 거리를 둡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많은 기독교 문학과 일정한 변별점이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러면 선생님의 종교관이 문학에 끼치는 영향은 적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는데요.

고진하:소위 불교문학이니 기독교 문학이니 하고 울타리를 치는 것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구요. 그냥 문학이면 되지요. 그걸 기독교문학이니 불교문학이니 그럴 필요가 있는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시를 쓴다고 할 때, 그러면 그 속에 불교적인 것은 없는가, 또 도교적인 건 없는가, 분명 있단 말이죠. 그리고 불교인이면 그 속에 기독교적인 게 없는가, 200년 이상 기독교가 중심인 서양과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고받아 왔다면 분명히 그 속에 기독교적인 게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순수한 기독교, 순수한 불교는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백의민족이라고 하지만, 과연 우리가 순수한 혈통인가, 그런 것은 없단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건 기독교, 이건 불교라는 울타리를 쳐서 문학을 가름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내가 기독교 목사지만 내 무의식 속에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불교적인 요소도 들어 있고 도교적인 부분도 들어 있단 말입니다.

소위 한국 기독교가 한때 문제시했던, 예수만으로 구원을 얻는다, 라는 부분은 상당히 민감한 부분인데요. 실제로 80년대에는 타종교에 구원이 있는가 없는가 라는 문제로 순교당한 분들도 있지요. 아무튼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배타성. 그러니까 다른 종교를 통해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라는 이런 배타성은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타종교에 대해서 포용적입니다. 내가 기독교 목사니까 예수를 통해서 구도의 길을 간다 할지라도, 다른 종교를 통해서 구도의 길을 가는 분들의 삶을 폄하하거나 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인이지만 된장, 김치만 고집하지 않고 양식도 먹고 일식도 먹듯이, 불교적인 양식도 때로는 내게 도움이 되고, 다른 종교가 지니고 있는 구도의 방편들이 내 삶을 밝게 비춰주는 거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이제는 옛날처럼 폐쇄적인 세상이 아니라 개방적인 세상이 되었거든요. 서로 배울 건 배우고 서로 협력할 건 협력하면서 대동세상을 만들어 나가야죠.

이재훈:한국의 기독교 시인들 중에 나름대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누가 있을까요. 저는 윤동주를 좋아하는데요. 윤동주의 시는 교술적이거나 진리에 대한 강요보다는 한 영혼의 ‘부끄러움’ 의식에서 출발하여, 그것에 대한 자각, 그리고 결단의 의지까지 보입니다. 최근에는 구상 선생의 신앙시집을 아주 잘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고진하:한국에서의 기독교 문학이라고 할 때는 윤동주, 박두진, 김현승 이런 분들을 들 수 있겠는데 이분들의 기독교적인 상상력은 편협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특히 김현승 선생의 시를 좋아하는 데요. 그분은 시를 통해서 인간 존재의 심연을 탐구하신 분으로 경박해진 우리 시대의 문학도들에게 삶을 깊이의 차원에서 들여다보게 해 주는 데 귀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김현승 선생을 기독교문학이라는 좁은 범주에 가두고 싶지 않습니다. 너무 관념적인 데가 있어서 습작 초기에는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분의 시가 좋아집니다. 특히 <견고한 고독>, <절대고독> 같은 시편들을 즐겨 읽는 편입니다. 그렇게 좋은 관념시도 드물기 때문이죠.

이재훈:선생님의 시에는 “성스러운 노동”에 대한 신념과 관심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노동’중에서도 1차 생산자로서의 노동입니다. 직접 땀 흘려 얻는 노동의 기쁨을 농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은 아마 선생님의 생활에서 나왔을텐데요. 앞으로도 계속 그런 관심이 지속되겠죠?

고진하:제가 농사꾼의 아들이고 농업고등학교를 다녔지만 농사를 많이 지어본 것은 아니구요. 바라보는 입장이 대부분 많았습니다. 강릉에 살 때는 땅을 좀 마련해서 직접 농사를 지었는데 거의 흉내만 낸 거지요. <우주배꼽>의 <달개비가 향기롭다>같은 시는 풀뽑기를 하다가 나온 체험시이죠. 이러다 보니까 자연이라는 것. 흙을 만지고 흙을 밟고 사는 것은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하고요. 앞으로 바램은 전문적인 농사꾼을 못되더라도 터밭이라도 가꾸고 싶습니다. 농부들, 노동하는 사람들의 삶은 신성하지요. 오히려 머릿속의 관념만 갖고 있는 종교인들의 진리에 대한 천착보다 땀흘려 사는 농부들의 삶이 더 신성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한 저는 도시에서도 살아봤고 척박한 시골에서도 살아봐서 양쪽을 다 체험했다고 얘기할 수 있죠, 저는 생태시를 의도적으로는 쓰지 않습니다. 만일 제 시에 생태학적 상상력의 범주에 넣을 만한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제 어릴 적의 체험이나 종교적인 사유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으로 봐야겠죠.

이재훈:종교를 가지고 있는 문학지망생들을 위해 뭔가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해주세요. 저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곤 하거든요.

고진하:저는 종교보다 인간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인본주의자는 아닙니다. 인간이 종교보다 먼저 생긴 것이고 종교보다 신이 먼저 계시는 것이지요. 그런 것들을 염두해 두면 상상력도 열리고 삶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도 생깁니다.

저는 의도하지 않음을 통해서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적인 시를 써야겠다든지 무슨 종교적 깨달음이나 진리를 시에 드러내야겠다고 시를 썼을 때는 거의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보죠. 사실은 모든 예술이 그렇습니다. 호교론적(護敎論的)인 목적을 가지고 할 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지요. 그런 예술 작품은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런 목적성이 앞서면 창조성이 발휘될 수 없기 때문이겠죠. 우리 시에 종교적인 감화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 있다면 그런 목적성이 개입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육화(肉化)된 작품일 것입니다.

이재훈: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대담을 마치겠습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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