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사랑이 자아내는 서정의 원리



대담 : 정호승, 이재훈

일시 : 2009년 5월 7일
장소 : 스타벅스 남부터미널 2호점

 


 

2009년 5월 7일 오후 6시 40분. 지하철 3호선 남부터미널역 역사 안에서 정호승 시인을 기다렸다. 6시 30분도 7시도 아닌 6시 40분에 약속을 잡은 것으로 미루어 시인의 꼼꼼한 성격을 짐작해보기도 했다. 한강변에 홀로 앉아 담배를 피우는 ‘서울의 예수’를 생각하다, 노래방에 가면 자주 부르는 ‘우리가 어느 별에서’를 흥얼거리다, 최근 시집 <포옹>을 뒤적거리다 전화를 받았다. 이미 정호승 시인은 남부터미널에 도착해 대담을 할 장소를 물색하는 중이라고 했다. 터미널을 나가 예술의 전당 골목 쪽으로 내려가 만난 커피숍 <스타벅스>. 시인은 창가에 자리를 잡아 놓고, 이 자리가 어떠냐고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인다.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 앉자 시인은 늦은 햇살에 눈이 부시겠다며 탁자를 옮기며 자리를 살펴봐 주셨다. 이 시대 사랑과 감성의 파수꾼 정호승 시인과 이러저런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니 시작 전부터 설레였던 것 같다. 창가로 흘러드는 늦은 햇살이 참 따사로운 날이었다.


이재훈 : 늘 선생님의 독자로만 남아 있다가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처음 선생님과의 대담을 제의받고 좀 망설이기도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문학적 유명세 때문인지 문학지의 대담이나 언론 인터뷰만 해도 너무 많은 양이어서 말입니다. 제가 선생님과의 대담 속에서 뭔가 새로운 부분을 발견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선생님의 작품 세계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또한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직접 뵐 기회도 많지 않다고 생각했고요. 이번 대담은 선생님의 문학과 그 주변의 여러 정황들을 소개하는 소박한 마음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먼저 선생님의 출생지가 경남 하동으로 되어 있는 곳이 있고, 대구로 명기된 곳도 있습니다. 어느 곳이 맞는 곳인가요? 그리고 유년 시절의 얘기도 좀 들려주십시오.

정호승 : 원래 하동에서 출생했어요. 출생지와 고향은 좀 다르니까요. 하동에서 태어나 평택으로 다섯 살 정도에 이사를 갔어요. 부친이 은행원이었습니다. 평택 중앙초등학교 1학년 1학기까지 다녔어요. 그리고 대구로 이사 와서 대구에서 성장하게 된 거죠. 아버지의 고향이 대구였습니다. 그래서 하동은 태어난 곳이고, 대구는 성장한 곳이죠. 하동에서 출생하여 대구에서 성장이라고 약력에 쓰니, 하동에서는 제가 잘 아는 고향 사람으로 알아버리고 대구에서는 고향사람인 줄 알았더니 아니네,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대구 출생으로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하동에서 출생하여 대구에서 성장했다고 정확하게 쓰려고 합니다.

이재훈 : 대구 계성중학교와 대륜고등학교를 졸업하셨는데요. 당시 전국을 휩쓰는 고교문사였다고 들었습니다. 대구에서의 학창시절은 어떠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정호승 : 계성중학교는 박목월, 김동리의 모교죠. 대륜고등학교는 이상화, 이육사 등의 문인들이 교직에 있었고요. 육사 선생의 경우, 일제강점기 시대 조선의 학생들은 주먹이라고 강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당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했다고 해요. 참 재밌는 얘기죠. 육사 선생의 시에 나타난 기개가 학생들에게는 권투부로 반영이 된 거죠.(웃음)

이재훈 : 당시 학교 분위기가 문학을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겠네요.

정호승 : 계성중학교가 저에게 문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기독교 계통의 학교였는데, 매월 문예현상모집을 했어요. 부활절, 추수감사절 같은 행사 때만 한 것이 아니라 매달 했었죠. 당시 학교에서 문학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 문예현상모집에 뽑히면 교장선생님의 도장이 찍힌 상품권을 주었어요. 학교 구내매점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을요. 일종의 현찰과 같은 거죠. 지금 생각하면 그때 선생님들의 발상이 대단했던 거죠. 당시 삼립팥빵, 크림빵이 30원 할 때거든요. 그러니 천 원하면 무지하게 큰돈이었죠. 빵 사가지고 친구들하고 실컷 먹었지요. 그 재미에 매달 현상모집에 글을 냈었어요.(웃음)

이재훈 : 상품권 타는 재미도 있었겠지만, 그 재미에 쓰면서 저절로 문학공부가 됐겠네요.

정호승 : 그렇죠. 공부가 되죠. 저뿐 아니라 당시 문예반 친구들 중에서도 열심히 쓰려는 친구들이 있었고요. 교장선생님께서 주시는 상금을 받으려는 공통의 목적이 있었겠지만요.(웃음) 또한 선생님들께서 어릴 때 문학의 싹을 틔워야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고요. 아동문학 하시는 김성도 선생님이 계셨고요. 아동문학도 하시고 수필도 쓰시고,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나온 <만선일보>라고 있었는데, 그 신문에 소설 당선되셨던 김진태 선생님도 국어 선생님이셨고요. 그분들께서 늘 문학적으로 성장하게끔 지도해 주셨죠. 칭찬도 많이 해주시고.

이재훈 : 당시에는 고교 문예잡지 <학원>이 있었을 때였죠.

정호승 : 예. 저도 <학원>에서 활동했죠. 중학교 때도 학원문학상에 우수작으로 뽑혔고요. 고등학생 때는 1학년 때 우수작, 3학년 때 최우수작이 되었죠. 학원문단이라는 말도 있었고요. 저도 학원문단 세대죠.

이재훈 : 경희대에 문예특기생으로 입학하셨지요. 경희대에서 주최하는 ‘전국고교생현상문예모집’에서 <고교문예의 성찰>이라는 평론으로 당선되셨는데요. 어떻게 고교생의 신분으로 평론을 쓰실 생각을 하셨는지요?

정호승 : 저는 그때 이미 <현대문학>, <문학춘추> 등의 잡지를 헌책방에서 구해 읽었어요. <현대문학>이 대표적인 잡지였고요. 부모님께서 주시는 용돈을 모아 헌책방에서 과월호를 구입해 다 읽었죠. 잡지에 실린 소설을 읽으면 굉장히 재밌었어요. 어른들의 세계를 알 수 있었으니까요. 평론은 처음엔 잘 모르죠. 그러나 자꾸 읽다 보니까 아, 평론이라는 게 이런 걸 쓰는 거구나 하고 이해하게 된 거죠. 평론은 작품론을 쓰거나 작가론을 쓰거나 둘 중 하나를 이러한 방식의 글로 쓰는 거구나 하고 이해했죠.
제가 고3때 계기가 있었어요. 경희대 문예장학생이 되기 위해서는 경희대 백일장에 장원이 되거나 차하, 차상이 되어야 했어요. 저는 그때 참방이 되었어요. 1967년 9월 28일 경희대에서 백일장이 있었는데요. 참방은 문예장학생으로 입학이 안 돼요. 그래서 저는 입시에 떨어진 기분으로 밤기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왔죠. 속으로 생각했죠. 내가 서울에서 문예장학생으로 다녀야 되는데. 부모님께서 대학 등록금을 대주실 형편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했었죠. 그런데 11월에 ‘전국고교생 문예현상 모집’이 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다시 원고를 보내 도전하자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런데 제 생각에 또 시를 보내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조병화 선생님께서 심사를 하셨는데, 심사평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정군의 시는 상위권으로 입상시키자니 그렇고, 떨어뜨리자니 좀 그렇고 그래서 참방을 준다고 하셨거든요. 그때 알았죠. 내 작품이 문제가 아니고 심사 선생님과 어떤 부분에서 시를 생각하는 영역이 맞지 않는구나 라고요. 그래서 평론을 쓴 거죠. 평론을 할 때 작가론은 무리이고, 작품론을 쓰자고 생각했어요. 당시 고교생 중에는 시집을 낸 친구도 있었고, 전국백일장에서 당선된 작품들이 있었잖아요. 자연스럽게 그 작품들을 다 모아 놓았었고요. ‘고교문예’라는 말은 제가 만들었고, ‘성찰’이라는 말은 평론에 흔히 등장하는 제목이잖아요. 부제는 ‘고교시를 중심으로’로 했죠. 김우종 선생님께서 심사를 하셨는데, 평론 당선작은 처음 나왔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때 제가 쓴 평론이 고등학생이 쓴 게 아닐 거라는 의심도 받았어요. 그런데 그 원고를 보면 한자를 자꾸 틀리게 쓰니까, 이게 고등학생이 쓴 게 맞다고 한 거죠.(웃음)

이재훈 : 당시 평론에서 평을 했거나, 지금 활동하시는 문인들 중에 생각나는 고교문사들이 있나요?

정호승 : 그 원고가 아직 제게 있어요.(웃음) 음… 당시에 이시영, 송기원 씨 등이 같은 학년이었고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전국적인 고교문사였죠.

이재훈 : 대학시절은 어떠셨나요?

정호승 : 맨날 시 썼죠 뭐.(웃음) 문예특기생 총장 장학금이 1년간이었어요. 그래서 입학한 지 1년 안에 문단에 등단을 해야 장학생이 유지되었는데요. 그렇지 못하면 등록금을 내야 했죠. 시를 열심히 쓴다고만 다 되는 건 아닌데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미팅도 한번 못해 보고, 도서관에서 시를 썼어요.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야 하니까요. 제가 68학번인데 69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랐는데 떨어졌죠. 그래서 등록금 마련을 못해 학교를 휴학하고 경주 외할머니댁에 가서 토함산 자락의 오덕암이라는 암자에서 일 년 내내 읽고 쓰고 했어요. 고시공부하듯이.(웃음) 지금 생각하면 좋은 시절이었죠.
그 다음해 70년도에도 신춘문예에 떨어졌어요. 복학을 할 수도 없고 해서 군대를 갔죠. 군에서도 신춘문예를 계속 투고했죠. 일단은 성공했어요. 1972년 <한국일보>에서 동시가 당선되고, 그 다음해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로 당선되었죠. 1972년 12월 24일 우편배달부가 ‘축 당선 연락바람 대한일보 문화부’라고 적힌 전보를 주었어요. 그 전보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어요. 그래서 다행히 복학해서 총장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전국 대학에서 문예장학생 제도가 있던 곳이 경희대밖에 없었어요. 나 같은 사람은 그런 제도에 의해서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시를 더 열심히 쓸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죠.

이재훈 :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로 당선되었고,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로 당선되셨습니다. 1982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기도 하셨는데요. 시를 쓰시다가 소설로 등단하신 어떤 이유가 있으신지요. 또 등단 이후 소설 작업은 크게 에너지를 쏟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그 부분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정호승 : 중학교 2학년 때 학원문학상에 산문이 우수작이 되었던 적이 있어요. <흙의 심정>이라는 산문인데 제일 처음 썼던 것은 산문이었어요. 그런데 그 이후 중학교 내내 시를 썼고, 고등학교 때도 선생님부터 시작해 주위에 전부 시 쓰는 사람들만 있었죠. 그렇지만 그 이후 산문에 대한 꿈이 계속 마음속에 남아 있었나 봅니다. 그 꿈을 한번 펼치고 싶었던 거죠. 1982년도 신춘문예에 처음 써본 소설을 <조선일보>에 보냈죠. 당시 황순원, 전광용 선생님께서 심사를 하셨는데요. 황순원 선생님은 제자를 뽑지 않으시는 분이세요. 혹시 심사위원으로 황순원 선생님이면 어떡하나 싶어 제 아들 이름을 필명으로 해서 응모했는데 당선되었습니다.
그렇게 소설을 쓰고 싶다는 갈망으로 시작했는데요. 1982년도가 제가 삼십대 초반이었는데 가정을 꾸리고 직장생활을 할 땐데, 무척 바빴던 시절이었어요. 그때 동아일보 출판국에서 <여성동아> 만들 때였는데요. 일요일도 없이 일만 했어요. 시간이 없으니 도저히 소설은 못쓰겠다 하고, 10년 뒤에나 쓰자고 생각했어요. 그랬더니 어느새 10년이 일 년처럼 지나버리더라구요. 마흔 하나가 되었을 때인데. <월간조선> 만들 때였네요. 그때 직장 그만두고 소설을 쓰자고 생각했어요. 사십대가 굉장히 문학적으로 소중한 시간으로 생각되더라고요.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었어요. 진짜 다른 걸 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 게 아니라 소설을 쓰기 위해서 그만두었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소설공부를 하고, 한 오 년 정도의 시간을 보냈어요. 그때 뭘 깨달았느냐 하면요. 시간과 경제적인 댓가를 혹독하게 치르면서 말이죠. 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서 자기의 문학적 기질에 맞는 장르가 있구나, 하는 걸 깨달은 거죠. 나는 역시 시(詩)가 내게 맞는구나. 혹독한 댓가를 치르면서 너무 늦게 깨달은 거죠.(웃음) 1990년에 나온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 이후에 97년에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시집을 냈거든요. 그 시집 출간의 간격 사이에 직장도 없이 뭐했느냐 하면요. 소설 공부한다고 보내면서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다시 시를 잡은 거죠. 잘못하다간 시가 날 버리겠더라구요. 어리석었죠. 그 이후로 게으르지 않게 시를 쓰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재훈 : 등단 이후 가장 먼저 활동하신 것은 1976년부터 김명인, 김창완 등과 함께 한 <반시(反詩)> 동인입니다. <반시>는 현재까지 70년대를 대표하는 시동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인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어떠했나요. 그리고 ‘반시’라는 이름의 느낌과 당시 시대상이 유신으로 인해 억압의 시대였습니다. 그런 것과 동인의 모토가 일정 부분, 영향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정호승 : 60년대에 <현대시>, <신춘시> 동인이 있었다면 70년대에는 <반시>가 있었죠. 그때 ‘1973’이라고 해서 그해 시, 소설로 등단한 문인들끼리 모여 친목처럼 시화전도 하고 놀았죠. 소설에는 지금 기억나는 분이 박범신, 이경자, 최학 등이 있었고요. 시 쪽에는 김명인, 김창완, 김승희, 이동순 등이 있었죠. 3년 정도 시화전도 하고 하다가 어느 시점에 시인들끼리만 내보자 해서 <1973>이라고 동인지를 냈어요. <반시>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죠. 그 이후 1973년에 등단하지 않았더라도 뜻에 맞는 시인들이 참여를 했죠. <반시>의 의미는 서문에도 나오는데 일상의 언어로 오늘의 현실을 노래하는 시를 쓰자는 취지였어요. 그 전의 선배 동인들이 너무 난해한 추상의 영역에 머물렀기 때문에 우리는 좀 다르게 가자고 한 거죠. 당시에는 지금과 다르게 문학적으로 서로 외로웠으니까 <반시>가 각자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됐습니다.

이재훈 : 선생님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1979)와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1982)는 선생님의 시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시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벽편지>(1987)와 <별들은 따뜻하다>(1990)는 첫 번째, 두 번째 시집의 시세계를 좀 더 확장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정갈하고 단아한 언어를 통해 민중들의 삶을 노래하고 있고, 네 번째 시집에서는 ‘무덤’, ‘죽음’, ‘시체’ 등의 시어를 통해 개인의 정서적 상황을 공동체의 삶으로 확장시켜 보여주고 있는데요.

정호승 : 물리적으로 제 문학적 삶을 토막낸다면 1990년에 나온 <별들은 따뜻하다>를 경계로 제 문학이 크게 양분됩니다. 저는 유신시절을 이십대로 보낸 세대인데요. 그 전까지는 시대의 눈물을 닦으면서 시를 쓰려고 노력했었고요.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고 오만한 생각인데. 내 자신의 눈물도 못 닦으면서 민중의 눈물을 어떻게 닦는다고.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웃음)

이재훈 : 선생님의 초기작에서 스스로 독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기쁨’을 줄 수 있을지, 기쁨과 슬픔을 나눌 것인지 자문하고 있습니다. 첫 시집의 제목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독자들에게 줄 수 있는 기쁨은 슬픔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즉 ‘슬픔’이 ‘기쁨’에게로. 시집에서도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소재와 상황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습니다. “첫 아이를 사산한 여인”이라든지, “불빛 없는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청년”(<슬픔을 위하여>).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갈 길은 멀고 길을 잃”은 ‘맹인부부가수’, “너의 고향은 아가야/아메리카가 아니다”고 말하고 있는 ‘혼혈아’ 등등을 살펴볼 때 더욱 확연히 드러납니다. 제가 중요한 시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슬픔’이라는 관념과 추상성이 어떻게 독자들에게 ‘아름다움’을 줄 수 있는가 입니다. 즉 ‘슬픔’의 아름다움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현실’의 애환이 담보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슬픔'이라는 관념어가 삶의 지난한 사연과 어울려 빚어내는 어쩔 수 없는 아픔이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주었습니다. 초기작에서 두드러진 현실에 대한 관심, 사회적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반시> 동인에서의 활동이나 당시 사회적 상황 등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선생님께서 현실에 대한 관심이 어떤 연유에서인지 궁금합니다.

정호승 : 그때 시에 대한 제 생각이 어떠했냐하면요. 장미를 예로 든다면, 저 장미가 인간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장미를 보는 거죠. 장미라는 꽃이 주는 존재의 아름다움이 있을텐데 그런 것보다 장미가 인간의 삶에 무엇을 주고 있는가의 관점으로 시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현실의 삶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는 기본적으로 시대와 동떨어질 수 없겠죠. 그 시대를 산 시인이 장미의 존재성만 노래했다고 하더라도, 그 시대를 살았던 장미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고통을 지니고 있는 장미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죠.

이재훈 : 80년대의 민중시인들과 선생님의 시에 나타나는 민중적 맥락과는 조금 다른 지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되는데요. 민중을 다루고 있더라도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천착보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천착이 강하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정호승 : 그 생각에 긍정을 하고요. 또 어떤 생각이 드는데요. 시라는 장미가 인간이라는 삶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의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러나 결국 시의 본질은 있거든요. 장미는 꽃이라는 본질이 있는 거니까요. 저는 시의 본질이 뭔지 지금까지 완벽히 아는 건 아니지만 시의 본질은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시의 본질이라는 게 서정의 물기 같은 게 아닐까요. 나무의 물관부에 수분이 공급되지 않으면 나무가 말라죽잖아요. 시는 나무의 물과 같은 정서의 본질을 지니고 있고요. 밥할 때 쌀을 비유로 든다면. 쌀을 넣고 물을 부어야 밥이 되잖아요. 시도 마찬가지지요. 생쌀을 먹느냐, 물을 부어서 밥을 해서 먹느냐인데요. 나는 생쌀을 먹기보다는 서정의 물을 부어서 밥을 해서 먹어야 배가 부르다고 생각했어요. 밥하는 것도 물과 불에 의해서 하게 되잖아요. 시도 영원성, 영속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질도 변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시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시를 썼기 때문에 제 시가 노동시의 갈래로 묶이지 않고 제 나름의 모습을 지니려고 노력해 온 부분이 있는 거에요.

이재훈 :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시집인 <서울의 예수>를 좋아합니다. 첫 시집보다 훨씬 더 처연한 현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즉 ‘슬픔’에서 ‘고통’으로 나아간다고 해야 할까요. 그 변화의 과정엔 역사적 운명도 있지만 가장 큰 중심이 되는 것은 바로 ‘문명’에 대한 자의식을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이 현재 우리들에게는 역사적 현실보다 훨씬 가깝게 몸에 와닿기 때문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서울의 예수>는 지금 읽어도 섬뜩합니다. 이후로는 문명에 대한 자의식이 비판과 풍자를 통한 것이 아니라(<우리들 서울의 빵과 사랑>, <서울복음> 등의 작품) 역으로 사랑의 예찬을 통해 표출하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문명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문명 속에서 잃어버린 사랑을 찾는 과정으로 보여집니다. 이렇게 이해를 해도 될런지요?

정호승 : <서울의 예수>는 1982년에 출간한 시집인데요. 문명은 끊임없이 변화되기 마련입니다. 긍정적인 의미이든 부정적인 의미이든 발전하기 마련이에요. 한 가지 예로 제가 어릴 때 전화를 하면서 사람 얼굴을 쳐다보면서 전화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것이 현실화되었잖아요. 제 생각에 미래에는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스카이차 같은 게 나오겠죠. 그러한 새로운 문명에 의해서 새로운 문명의 질서가 생기겠죠. 그렇게 문명화되었다고 해서 우리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것은 아니죠. 인간의 가장 중요한 화두와 본질인 ‘사랑’ 때문에 비인간화 될 수 있는 것이죠. 사랑이 결핍되면 비인간화 됩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결국 인간 삶의 가장 큰 문제와 화두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사랑 때문에 고통스럽잖아요. 사랑의 문제를 남녀상열지사로 폄하시키면 안 됩니다. 사랑은 고귀한 인간의 화두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에 의해서 태어나고 사랑에 의해 고통받다가 사랑에 의해 죽어가는 게 인간의 삶 아닙니까. 한 인간이 죽어갈 때 사랑이 없으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사랑이 있을 때 인간답게 품위를 잃지 않고 죽어갈 수 있어요. 인간에게 문명의 변화나 발전이 인간을 망치는 게 아니고 사랑의 부재나 결핍이 인간을 훼손시킨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시인들이 아마 이렇게 생각하고 시를 쓸 거예요.

이재훈 : 선생님 시의 방법론에 대해 생각해 볼까 합니다. 선생님의 시는 시적 상징이나 메타포 등을 통한 수사보다는 진술에 의존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생님의 산문 중에 이런 말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배고플 때 밥을 먹지 밥그릇을 먹는 게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밥그릇을 먹고 있다. 시는 밥이지 밥그릇이 아니다. 결국은 인간이라는 밥. 사랑이라는 밥…….” 즉 이미지와 시어가 가진 애매성보다는 직선으로 통하는 진술로 심금을 울리는 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의 상징도 누구나 소통할 수 있는 대중적 상징을 주로 씁니다. 가령, 제가 좋아하는 구절은 이런 부분입니다. “나는 오늘 새벽, 슬픔으로 가는 길을 홀로 걸으며/평등과 화해에 대하여 기도하다가/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슬픔을 위하여>). 이런 부분은 선생님께서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의욕이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호승 : 그런데 시는 본질적으로 은유에요. 은유가 없는 진술은 공허할 수밖에 없고요. 시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은유의 품 안에서 진술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어떤 진술적 시라도 하나의 은유성을 띠고 있는 거죠.

이재훈 : <가두낭송을 위한 시> 연작 등은 첫 시집에서부터 써왔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운율에 대한 관심도 남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리듬은 언어의 조탁이나 반복을 통한 것보다는 의미와 의미가 만들어가는 리듬이 강합니다. 실제 낭송을 하며 읽으면 가슴에 팍 와닿거든요. 운율에 대한 관심이 평소에도 있으셨는지요.

정호승 : 지금까지도 그 관심이 있죠. 저는 한국시에서 전통적 서정시인입니다. 한국시의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요. 그 전통 속에 운율이 있습니다. 저도 아마 내재적 운율이 내 가슴속에 전통적 운율성으로 부여받게 되어서 나타나게 된 거겠죠. 시의 본질인 노래성을 인정하고 있고요. 저는 요즘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2009년에 시를 공부하면 지금 현재의 시부터 읽지 말고, 소월이나 만해부터 시작해서 오늘의 시까지 읽어오면 한국시의 맥락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시의 맥락을 죽 살펴보면 운율의 문제가 분명 있습니다.

이재훈 : 덧붙여 선생님의 시는 많은 가수들에 의해 노래로 불리워 왔습니다. 최근 가수 안치환 씨가 <안치환, 정호승을 노래하다>라는 9.5집 음반을 내기도해서 화제가 되었는데요. 선생님의 시를 노래화한 것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곡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어느 별에서>가 애창곡 중의 하나입니다.(웃음)

정호승 : 제 시를 가지고 대중가요로 40여곡 정도 작곡되었는데요. 가장 먼저 노래화된 게 이동원의 <이별노래>에요. 이동원의 <이별노래> 이후에 정지용의 <향수>를 만든 거예요. <향수>의 모태적 발판을 마련해준 게 <이별노래>일 거예요. 그 다음에 김광석이 마지막으로 녹음하고 남긴 노래여서 의미가 있는 <부치지 않은 편지>가 있어요. 백창우 씨가 작곡을 했고요. 그 다음에 안치환 씨와의 우정을 들 수 있어요. 우정의 앨범을 냈으니까. 제 시를 가지고 많이 작곡 했어요. 이번 앨범에 작곡된 노래 중에 <풍경 달다>라는 노래가 있어요. 제가 풍경을 달아본 체험을 가지고 쓴 시에요. 운주사의 와불을 보고 풍경을 달았던 기억으로 쓴 시인데요. 노래를 들으니 아, 참 좋더라구요. 제가 노래를 빨리 외우거나 부르지 못하는데, 금방 외워 불렀어요. 지금도 가끔 아무도 듣지 않을 때 혼자 불러 봅니다.(웃음)

이재훈 : 선생님의 후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제5시집부터 7시집까지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시집의 세계가 사회공동체와 고통과 슬픔에 대한 관심에서 관념의 보편적 정서에 관심을 기울이는 곳으로 이동했다고 해야 할까요. 이전의 세계가 산업화 사회 속에서 잃고 지냈던 우리의 공동체, 주변의 약자들과 소외된 자들, 천천히 뒤돌아봐야 할 작은 생명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으로 시적 시선이 가 닿았습니다. <별들은 따뜻하다> 이후 7년만에 출간한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를 보면 우리 민족의 공동체적 정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느낄 수 있는 보편적 정서가 드러납니다. 하응백 씨는 “과거의 시가 관념적 체험의 픽션의 소산이었다면, 추상적 민중을 향한 노래였다면, 이번 시는 자신을 대상으로 한 시로 변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변화하게 된 특별한 내적, 외적인 계기가 있었을까요?

정호승 : 그때부터 제가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거죠. 그 전에는 우리 속에 있는 나를 생각했는데요. 뭐라고 얘기하면 좋을까요. 섬을 비유해서 얘기하자면 바다에 떠있는 섬은 개인인데 바다 밑의 섬의 뿌리는 다른 섬과 연결되어 있잖아요. 그 전에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섬만 보지 않고 그 밑에 연결된 다른 것을 보려고 했죠. 개인을 통해 전체를 보려고 한 거죠. 그런데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부터는 섬이라는 개인의 개체를 집중적으로 보려 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형상하는 삶이라는 게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가장 가치있는 부분인가. 어떻게 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된 거죠.

이재훈 : 이전 시집에서는 기독교적 메타포나 소재가 언뜻 보였는데,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에서는 오히려 불교적 색채가 강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인상비평에 불과한데요. 타인과의 부대낌 속에서 얻어지는 시적 감성보다 자신에게 향하는 사색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홀로 오래도록 소요하고 명상하여 나온 시어들이 눈에 띄게 보입니다. 시집의 첫 번째 실린 <새>라는 작품에서 “새가 죽었다/참나무 장작으로/다비를 하고 나자/새의 몸에서도 사리가 나왔다/겨울 가야산에/누덕누덕 눈은 내리는데/사리를 친견하려는 사람들이/새떼처럼 몰려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음 시에서도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미안하다>)라고 합니다. <수덕사역>에서는 버림의 자세가 보입니다. “꽃을 버리고 기차를 타다/꽃을 버리고 수덕사역에 내리다//중략/해는 저물고/수덕사로 가는 눈길/발은 없고 발자국만 남아 있다//악!”. <국밥>에서는 윤회의 사상을 엿볼 수 있고요. “사람 사는 세상에 살면서/소머리 국밥을 먹는다/소들이 사는 세상에서는/소들이 사람머리 국밥을 먹는다”. <허허바다>에서도 버림의 미학이 있습니다. “찾아가보니 찾아온 곳 없네/돌아와보니 돌아온 곳 없네/다시 떠나가보니 떠나온 곳 없네”
오랜 공력을 쌓아 이를 수 있는 어떤 지점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혹시 그간 다른 내적인 수련을 한 것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정호승 : 선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나이가 좀 드니까 그런 부분도 있구요.(웃음) 저는 기독교문화 속에서 저의 영혼을 성장시켜왔고 지금도 기독교적인 문화가 저의 양식이고 한데요. 그렇다고 해서 불교적 문화를 도외시하는 건 아니거든요. 아까 운주사 얘기도 나왔는데요. 정말 운주사 와불을 뵙고 내려오는데 삼존불이 있어요. 삼존불 중의 한분이 앉아 있는데 얼마나 감동적인지 그 부처상을 보고 진짜 울었어요. 얼굴이 마모될 만큼 마모되고 모든 걸 비우고 있잖아요. 그때부터 부처님의 불가의 세계, 불교적 세계관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 후로 불교적 이미지를 시에 차용해 온 거죠. 삶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욱 크게 가지려고 노력한 결과로 보아주시면 됩니다.

이재훈 : 선생님께서 작품 속에서 말하는 사랑이 인간에 대한 예의뿐 아니라 모든 만물에게까지 통용된다고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인데요. “강가에 초승달 뜬다/연어떼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나그네 한 사람이 술에 취해/강가에 엎드려 있다/연어 한 마리가 나그네의 가슴에/뜨겁게 산란을 하고/고요히 숨을 거둔다”. 동물이나 사물을 통해서 인간을 성찰하는 부분도 불교적 상상력과 연을 닿는다고 생각하는데요.

정호승 : 사물도 나와 동등한 생명체이자 인격체이죠. 절대자가 보기에는 동물이나 인간이나 생명의 가치는 똑같지 않겠어요. 그런데 인간이 오만하기 때문에 개나 돼지 같은 동물의 가치를 하찮게 보는 거죠. 시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얘기하고 싶어서 그렇게 나온 거겠죠.
인간은 자연적 존재죠. 자연의 기본적인 질서와 똑같은 질서를 지니고 있는 존재가 인간이에요. 제 책상에 사진이 한 장 붙어 있는데요. 토성을 중심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그리고 토성에서 지구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 있어요. 볼펜똥보다 더 작은 점 하나가 있는데 그게 지구에요. 우주의 크기가 얼마나 크며 지구가 얼마나 작은가 알 수 있죠. 그 속에 우리가 사는 거예요.

이재훈 : 시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제7시집에서부터 잡지 지면에 발표하지 않은 신작시를 시집으로 묶고 계십니다. 그 이후 시집들도 잡지의 미발표 신작들을 상당수 시집을 통해 싣고 발표하고 계시는데요. 문단의 매체나 제도, 혹은 평가에 연연하지 않겠다, 독자들과 직접 만나면 된다는 생각으로 비춰집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호승 : 그런 건 절대 아니고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시를 쓰는 저의 방법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 저는 시를 한꺼번에 몰아서 써요. 일년 이년 삼년 정도 메모를 해요. 메모가 두꺼운 노트 한권을 채울 때까지 메모만 하다가 그 노트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써요. 그러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긴장 상태를 유지하면서 몇 개월에서 길게는 일 년씩 쓸 수 있어요. 그래서 그 노트의 메모를 가지고 시를 다 쓸 때까지 가는 거예요. 두 번째는 이런 이유 때문에 시가 가장 많이 생산되어 있을 때는 청탁이 없는 거예요. 시를 못 쓰고 메모만 하고 있을 때는 청탁이 들어오고요.(웃음) 저는 문단에서 특별히 큰 교유가 없고 외톨이에요. 어느 부분에서는 혼자인데 시인은 또 혼자 있는 존재잖아요. 저의 이러한 문단의 비사회성 때문에 제 상황을 잘 모르고 청탁이 이루어지니 잘 맞지 않는 거죠. 시를 한꺼번에 쓰니까요. 그래서 한꺼번에 쓰고 청탁을 기다리다가 청탁이 없으니 그냥 시집을 내는 거죠.(웃음)

이재훈 : 8시집에 가서는 이 시대의 가난하고 버려진 사람들의 아픔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것이 선생님 방식의 내적 치유의 과정이 아닌가 생각해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9시집의 <포옹>에서는 ‘우리 시대 사랑의 명상가’라는 말처럼 반성과 응시, 침묵 끝에 들려주는 사랑의 언어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세계를 보여주실 계획으로 시집을 준비하고 계신지요.

정호승 : 앞으로 시를 더 열심히 쓸 생각입니다.(웃음) 제 존재의 여러 가치 중에 시인으로서의 가치가 더욱 중요하게 다가오더라구요. 그러면 우선 시인은 시를 쓰고 있어야 시인이니까 열심히 쓰고 있고요. 앞으로도 쓰게 되겠죠.

이재훈 : 선생님의 말씀 중에 “시를 쓰는 사람보다 시를 읽는 사람들이 더 고통받는 시대다”는 말씀이 더 가슴에 와닿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정호승 : 감사합니다. 오랜 시간 저도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_ <열린시학>, 2009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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