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와 정신적 삶, 그리고 서정시

 

 

-조강석

 

 

 

 

 

 

1.

 

대도시의 성립은 단지 물적 기반의 확립과 경제 시스템의 정착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앙리 르페브르가 강조했듯이 공간은 정신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사회적인 것, 역사적인 것 등을 연결하고 발견, 생산, 창조의 과정을 재구성함으로써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공간은 “할당된 장소와 위치 안에서 무수히 많은 교차를 내포”하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간의 문제는 물적 토대, 지식과 담론의 생산, 그리고 공간의 재현 양태 모두와 결부된다. 대도시의 성립이 예술에 있어 새로운 의미지평을 획득하게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대도시의 대두와 성립은 단지 물리적 차원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공간을 표상하고 재현하는 구성원들의 의식 차원의 문제와도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대도시는 물리적으로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구획하고 정초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 삶의 영역에서도 새로운 방식의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아마도 이와 관련하여 게오르그 짐멜의 논의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막스 베버, 에밀 뒤르켐 등이 근대 세계에서 대도시의 성립과 관련된 역사적 계기와 도시의 발달 조건 등에 대해 논했지만 대도시의 발달이 인간의 내면적-정신적 삶과 일상적 상호작용에 대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짐멜의 글 「대도시와 정신적 삶」이 우선적으로 주목에 값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대목을 눈여겨보자.

 

한편으로는 관심을 끄는 자극들이 도처에서 밀려오고 시간과 의식의 충전을 통해 거의 움직이지 않아도 마치 강물에 휩쓸려가듯이 저절로 떠밀려가는 삶을 살게 되면서 개인의 삶은 엄청나게 편리해졌다. 다른 한편으로 삶은 점점 더 개인적 색채나 비교불가능한 특성을 몰아내는 비인격적 내용과 제공물로 채워진다. 그 결과 누군가를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 혹은 자신만을 위한 경우라도 개인적인 것을 과장할 필요성이 생긴다.

 

인용된 게오르그 짐멜의 언급에서 흥미로운 것은 대도시가 개인의 의식의 영역에서 “도처에서 밀려오”는 자극들을 끊임없이 생산한다는 대목이다. 생활의 영역에서 개인의 삶은 더욱 편리해졌지만 한편으로 정신적 삶의 영역은 “비인격적 내용과 제공물”들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이 짐멜의 설명이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급속도로 이미지들이 교체되면서 밀려오거나,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포착되는 내용의 변화가 급격하거나 밀려드는 인상이 전혀 예기치 못한 경우에 더 큰 부담을 갖는다. 이러한 심리적 조건은 대도시의 거리를 걸을 때나 빠르고 다양한 경제적-직업적 및 사회적 삶을 경험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정신적 삶의 감각적 기반, 다시 말해 차이에 입각한 우리 존재의 속성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의식의 총량을 비교해보면, 대도시는 소도시나 시골의 삶과 커다란 차이를 보여준다. 후자에서는 감각적-정신적 생활의 리듬이 더 느리면서 더 익숙하고 더 평탄하게 흘러간다.

 

그러니까, “비인격적 내용과 제공물”로 가득찬 자극들이 “정신적 삶의 감각적 기반”을 형성하는 감각자료들이 됨에 따라 주체는 한편으로는 신경과민에, 또 한편으로는 둔감함에 내몰리게 된다는 것이다. 짐멜 전문가 김덕영은 이에 대해 이 둔감함이, 지젝의 규정에 따르면 “사물의 차이에 대한 마비증세”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둔감함은 쉴 새 없이 주어지는 자극들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주체의 내면에 사물의 차이에 대한 마비증세가 나타난 결과라는 것이다. 모든 개별 가치들을 교환가치로 환원시키는 화폐의 유통이 사물들 고유의 가치에 대한 계량보다 우선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런 양상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신경과민과 둔감함이라는 양가적 심리를 동시에 지닌 주체들은 무수한 자극과 만남들에 대해 매번 전면적인 내면적 반응을 보이는 것을 피하고 자신의 속내를 감춤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한다는 것이 짐멜의 후속 설명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짐멜은 대도시에서의 정신적 삶과 관련하여 양적 개인주의와 질적 개인주의를 구분하여 설명한다. 짐멜에 의하면 양적 개인주의란 18세기에 발생한 것으로 “자연이 불어넣었지만 사회나 역사에 의해 훼손될 수 있는 인류의 고상한 본질”을 회복하려는 개인주의 즉, 종교적 억압과 같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구속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려는 개인주의를 의미한다. 반면, 질적 개인주의란 “역사적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개인들이 각기 남과 구분되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이상”으로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질적 유일성과 대체 불가능성이라는 개인적 가치를 유지하려는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짐멜은 대도시에서 개인의 정신적 삶이 결국 이 두 개의 개인주의의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혹은 “투쟁과 분규”를 통해 형성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2.

 

게오르그 짐멜의 설명은 대도시에서 서정시의 역할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대도시가 감각적 자극의 끊임없는 흐름을 낳고 그에 따라 정신적 삶의 영역에서 개개인은 둔감함과 신경과민에 내몰리면서도 고유성을 유지하는 질적 개인으로 남고자 하는 열망을 품게 된다면, 그것은 대도시와 정신적 삶의 영역에서 서정시가 할 일이 적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서정시란 사물들을 익명의 교환가치에 의해 환원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사물 각각의 고유성에 대한 구체적 관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서정시에 대한 오래된 규정 중 하나가 ‘서정시는 사물의 꿈이다’라는 것을 상기해 보라. 또한, 감각적 자극들에 매몰되거나 이에 휩쓸려 신경과민과 둔감함에 치우지는 대신 넘치는 자극들을 수용하여 고유한 내적 반응을 생성시키고 이를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주체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것이 서정시이기 때문이다. 둔감함대신 일사일언(一事一言)을, 교환과 환원대신, 질적 고유성을 택하는 것이 대도시의 자극에 의해 계발되면서도 동시에 정신적 삶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질적 개인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시적 주체의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의 대도시 형성 경험에 나타난 문학적 표상과 재현의 예를 직접 드는 것이 긴 설명을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조선에 근대적 도시가 본격적으로 성립되던 1930년대의 한 정신 풍경의 지형도를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서 단적으로 일람할 수 있을 것이다.

 

 

(1)

가로수(街路樹) 이팔마다 발발(潑潑)하기 물고기 같고 유월(六月)초승 하늘아래 밋밋한 고층건축(高層建築)들은 삼(杉)나무 냄새를 풍긴다 ( …중략)

풀포기가 없어도 종달새가 나려오지 않어도 좋은, 푹신하고 판판하고 만만한 나의 유목장(遊牧場) 아스팔트!

 -정지용, 「아스팔트」 중에서

 

 

(2)

그러나―왜 나는 미끈하게 솟아 있는 近代建築의 위용을 보면서 먼저 鐵筋鐵骨, 시멘트와 細砂, 이것부터 선뜩하니 감응하느냐는 말이다

 

(… …중략)

 

나는 오늘 大悟한 바 있어 美文을 避하고 絶勝의 風光을 隔하여 蕭條하게 往生하는 것이며 宿命의 슬픈 透視癖은 깨끗이 벗어 놓고 溫雅慫慂, 외로우나마 따뜻한 그늘 안에서 失命하는 것이다.

                    

- 이상, 「종생기」 중에서

 

 

(3)

서울의 이곳저곳에 뛰어난 근대적 <데파트멘트>의 출현은 1931년도의 大京城의 주름잡힌 얼굴 위에 假裝하고 나타난 <近代>의 <메이크업>이 아니고 무엇일까(… … 중략) 이 <메이크업>한 <메피스트>의 늙은이가 온갖 근대적 시설과 機構感覺으로써 <젊음>을 꾸미고 황폐한 이 도시의 거리에 다리를 버리고 저물어가는 황혼의 하늘에 노을을 등지고 급격한 각도의 직선을 도시의 상공에 뚜렷하게 浮彫하고 있다.

밤 하늘을 채색하는 찬란한 <일류미네이션>의 人目을 현혹케 하는 변화―수백의 눈을 거리로 향하여 버리고 있는 들창―.

-김기림, 「都市風景 1․2」 중에서

 

 

1930년대에 이르러 경성은 완연하게 근대적 도시의 면모를 지니게 된다. 통계에 따르면, 1928년 현재 경성의 인구는 약 31만 5천이었으나 1934년에는 38만 2천 명에 이르며 1941년에는 무려 97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완연한 성장이 아닐 수 없다. 근대적 도시가 형성됨에 따라 지식인들의 도시 문물 체험은 일상적이면서 동시에 문제적인 것이 된다. 많은 작가들이 소위 ‘산책자’로서 도시의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새로운 문물에서 ‘신기성’을 발견하고 동시에 새롭게 도입된 근대 문물이 자극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따라 부유하는 군중의 모습을 발견했고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관견기로만 간주될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대도시의 넘쳐나는 감각적 자극들의 홍수 속에서 사태를 고유한 방식으로 파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당대의 대표적 모더니스트로 꼽히는 정지용, 김기림, 이상 등은 근대 도시 문물의 상징인 고층 건물에 대한 각기 다른 인상을 기록한 글들을 남기고 있는데 이 글들은 이들이 속도감 있게 육박해오는 근대와 근대적 도시에 대해 보여준 인식의 차이와 그에 따른 미학적 태도의 차이를, 그리고 그 결과 각자의 고유성이 발원하는 지점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정지용은 근대 문물의 상징인 낯선 고층건물에서 ‘杉(삼)나무 냄새’를 느끼고 아스팔트에서 유목장을 상기한다. 이는 낯설고 새로운 것을 친숙한 감각을 통해 전유하는 정지용 특유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근대 도시의 넘쳐나는 자극들을 감성적으로 전유하여 새로운 이미지로 벼리는 것이 정지용의 방식이다. 반면 이상은 낯선 자극을 감성적으로 전유하여 친숙한 이미지들의 결합체로 변환시키는 대신 정공법을 택한다. 그는 근대건축의 위용을 보면서 무엇보다 먼저 철근철골, 시멘트와 세사 등을 “선뜩하니 감응”한다고 말하며 이를 스스로 ‘슬픈 투시벽’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근대와 근대 도시에서의 삶을 해부학적 시선으로 투시하는 것이 이상의 방식이다. 김기림의 태도는 또 다르다. 각기 근대와 근대 도시의 감각적 전유와 수학적 환원으로 환언될 수 있는 정지용과 이상의 태도와 달리 그는 고층 건물의 외관에서 ‘메이크업한 표정’을 읽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근대 도시의 물리적 알리바이로부터 매혹과 불안이라는 양가적 정서를 느낀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일종의 신경증이라고 표현될 만한 성질의 것이다. 근대 도시의 산물을 익숙한 감각에 의해 치환하고 전유하거나 대도시라는 괴물을 수학적 알고리즘으로 해부하고 포획하는 태도와 달리 김기림은 근대 도시가 지시하는 숨은 기표를 더듬으며 때론 그것을 매혹으로 때론 그것을 불안으로 풀어내고 있다. 김기림의 작품에 나타나는 근대도시에 대한 양가적 태도가 이런 신경증적 태도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1930년대에 대도시가 본격적으로 성립됨에 따라 작가들은 그것이 주는 새로운 감각적 자극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이에 대해 고유한 대응을 해나갈 것인가를 각자의 방식으로 모색했으며 그 귀결이 그들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3.

그렇다면 최근의 사정은 어떠한가를 간략히 살펴보기 위해 최근의 시 두 편을 더 읽어 보자.

 

(1)

도시는 수많은 유리알을 낳는다

 

도시의 유리체를 통과한 것들은

유리체 통과의 꿈을 꾸지 않는 것들과 함께 있지만

유리체를 통과하지 않은 것들과 같지 않다

아직도 뒹굴며 꿈꿀 뿐이다.

 

돌아온 것들은 죽고 완성된 것은 훼손된다

꿈을 통과하지 않은 것들만 밖에서 천예(天倪)의 숨을

쉰다. 유리체는 녹화되지 않고 영원히 비어 있다

구름을 향해 그들은 불구의 몸으로

가지를 뻗는다

 

이미 사라진 것의 남은 존재들은

지나간 거리에 긴 그림자를 끌기 시작한다

오늘도 혼돈은 눈을 감고, 길을 차단하고 돌아와

깨어나지 않는 유리알 속으로 사라진다

-고형렬, 「유리알 도시의 빌딩 속에서 - 고귀한 삶을 빙자한 숲의 은유」 전문

 

 

(2)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어 낸다. 눈빛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빛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기계소리. 단추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 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 이재훈, 「명왕성 되다」 전문

 

 

(1)이 이미 경험의 본원적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로 자리 잡은 도시를 단적으로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라면 (2)는 도시에서 질적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겪어내는 정신의 운동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우선 인용(1)을 보자.

유리는 바깥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다른 세계를 환기시키는 동시에 스스로 차단막으로 기능한다. 이 이미지는 도시의 심리적 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는 얼핏 보아 유리와 숲의 대립 구조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도시 자체가 이미 매혹과 환멸, 방랑과 귀환, 순수와 퇴화의 심리 구조로 축조된 것임을 적실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도시는 매혹으로도 환멸로도 펼쳐질 수 있는 감각적 자료들을 끊임없이 생산하여 주체의 감성에 기입한다. 넘치는 자극들로 인해 익명성과 은닉의 편안함 속으로 퇴거하는 것도, 넘치는 자극들을 수용하여 질적 개인으로 재탄생 하는 것도 모두 가능하다. 이처럼 서정시가 자극의 감성적 전유과 감각적 표현을 통해 도시인의 정신적 삶을 개변시킬 수 있는 격려가 될 수 있는 여지는 항상 도시가 낳은 피로감을 토로하는 것을 반복할 위험과 동시에 존재한다. 인용(2)를 보라.

이 시의 배경이 되는 것은 출퇴근길의 2호선 지하철이다. 이 시의 주체는 지금 익명과 소외, 그리고 기계적 규칙성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다. 이것이야말로 도시 생활자의 정신적 삶에 대한 노골적 은유가 아닐 수 없다.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생(生)”, 모든 대면 접촉이 시간을 두고 익명성의 궁륭이 되는 부박한 삶의 한 가운데에서, 게오르그 짐멜식으로 표현하자면 연속적인 익명적 자극이 끊임없이 주어지는 도시적 삶의 한 가운데에서 이 시의 주체는 질적 개인으로의 탄생을 꿈꾼다.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하고 묻는 것은 삶의 고유성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열망의 불씨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심회는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는 말을 통해 역설적으로 다시 한 번 표현된다. 폭풍이란 바로 기계적 삶의 리듬을 뒤흔들 파국이 아니겠는가? 일상에 한 번 생긴 파국은 언제나 치명적이다. 그것은 항상 이미 생긴 파국이기 때문이다.

시인 김수영은 “도시의 피로”를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새로운 삶의 씨를 틔우는 텃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아니, 그 가능성을 믿으며 도시의 피로, 바로 거기로부터 삶의 새로운 지평이 발원하기를 열망했다. 신경과민과 둔감함, 그리고 환원의 피로가 도시의 것이라면 새로운 감각이 탄생하고 피로로부터 신세계로의 발원을 가능하게 하는 씨앗을 품고 있는 것도 도시이다. 서정시는 토로하고 전유하고 창조하고 싹 틔운다. 갑을 시대에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 다시 한 번 필요한 까닭은 우리가 누구도 양적 보편성으로 환원되는 개성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둔감에 매몰되는 재난에 대해 시만한 방재시스템이 따로 없다. 

 

_ 출처 : <시인수첩>, 2014년 봄호

 

 

Posted by 이재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