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하에서 돌까지

산문 2013. 3. 13. 10:20

황하에서 돌까지

 

 

 

이재훈

 

 

 

 

 

요즘 돌에 대한 시를 쓰고 있다. 왜 돌인가 라는 질문에는 여러 가지 할 말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돌이 어떤 계시나 운명처럼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렇듯 시적 만남은 늘 벼락처럼 찾아온다. 세계는 모두 이런 우연한 만남의 반복 과정 속에서 지탱된다. 이런 우연한 만남을 필연이라고 의미부여하고, 나름의 연관성을 찾고, 게다가 가장 고귀한 사건으로 미화시키는 경우도 자주 발견하곤 한다.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에 실린 대황하 연작시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시와세계>, 2008년 가을호) 황하의 상징은 물에 대한 상징이고, 이 상징을 통해 나는 정신의 극점을 향하는 길목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리고 황하는 내 존재가 걸어가다 만나는 수많은 풍경 중의 하나이며 앞으로 만나게 될 풍경이 또 어떤 풍경이 될지는 모른다고 적었다.

돌에 관해서라면 옥타비오 파스를 얘기하고 싶다. 물로 시작한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 속에서 나는 물을 거쳐 돌로 가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던 것이다.

 

땅속 깊은 곳의 물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파도가 해변을 덮는 것처럼, 현존은 표면으로 떠오른다. 모든 것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고동친다. 존재와 겉모습은 하나이며 동일하다. 숨겨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은 자신으로 충만해져서 빛을 발하며 자신을 나타낸다. 존재의 조수. 존재의 물질에 이끌려서 나는 너에게로 다가가서, 너의 가슴을 만지고, 너의 피부를 쓰다듬고, 네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세계는 사라진다. 이제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없다. 사물과 사물의 이름, 숫자, 기호는 우리 발밑에 떨어진다. 이제 우리는 말을 벗어 던졌다. 우리 이름을 잊어버리고 대명사들은 서로 혼동되고 얽힌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우리는 위를 향해 솟구쳐 오른다. 이름과 형태가 흘러가며 소실되는 동안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 얽매여 추락한다.

― 옥타비오 파스, 「시적 계시」, <활과 리라> 중에서

 

물의 솟아오름은 존재의 지평을 확산시킨다. 우리 존재는 이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세계는 사라지고, 내 존재는 사라져도 내가 명명했던 이름들과 그 이름들을 지켜보던 돌은 남아 있을 것이다.

파스는 「태양의 돌」이라는 장시를 썼다. ‘태양의 돌’은 고대 아즈텍 문명의 우주관을 기록한 거대한 원형의 돌이다. 일명 ‘아즈텍의 역’이라고도 불린다. 그 돌의 중앙에는 태양신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과거에 멸망한 4개의 시대를 상징하는 신의 그림이 있다. 또 바깥쪽에는 아즈텍 역의 날짜를 나타내는 20의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돌은 오래된 시간이다. 시간의 표상이며,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물질이다. 아마 이 우주가 탄생하기 시작할 때부터 함께 했을 것이다. 돌로 시작된 우주. 돌로 시작된 수많은 별.

 

부러진 돌부리에 채인다

굴러다니는 돌이 아니라

올곧게 서 있다가, 부러진 돌

창과 칼 혹은 바람이

돌의 몸을 반 동강 냈을 것이다

사방이 어둠이었고

나를 길에 내던졌던 사람들의 눈빛만

어둠 속에서 반짝하던 밤들이었을 때

발바닥 돌덩이가 내 존재를 떠받칠 때가 있다

돌이 내 집을 떠받치고,

아버지의 약속을 떠받칠 때

돌 위에 피의 흔적이 있다

돌은 깨져도 죽지 않는다

돌은 썩어갈 육체를 갖고 있지 않아

언제나 채이고 밟히고 놀아난다

돌에 의해 소멸한 것과 태어난 자리가 한 몸이 되는

이 모든 찰나를 지켜본 돌

어둠 속에서 세상이 어지럽게 돌기 시작하면

나는 흔들거리는 운명을 본다

흔적 없이 왔다간

당신의 영혼에 몰래 깃들고 마는 돌

부처의 얼굴도 만들고, 예수의, 마리아의 몸도 만드는

성육신인 돌

영원을 살고 있는 길 위의 돌

돌로 만들어진 뭇사람 하나

그 무성한 골짜기의 돌

― 졸시, 「돌의 환(幻)」 전문

 

위의 시처럼 돌을 만났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에 채인 돌을 만났다. 그 누구도 지금 내가 만난 돌의 기원을 알 수 없다는 미지의 생각이 날 미혹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돌과 꽤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누구도 돌이라는 물질에 대해서는 그런 친연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 ‘환(幻)’인가 하면 돌의 실체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 정신의 지평으로 다시 환의 지평으로까지 몰고갈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그 가능성의 시작을 알리는 시였기 때문이다. 성육신의 돌을 넘어 영원을 살고 있는 길 위의 돌과 오래도록 만날 것 같은 느낌이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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