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아프셨다. 허리가 너무 아파 걷지도 못하겠다고 했다. 수화기 너머로 울먹거리는 어머니의 음성이 들렸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오죽 아프셨으면 아들에게까지 하소연하실까. 당장 서울로 모셨다. 큰 대학병원 통증클리닉을 찾았다. 치료를 받기 위해 전국에서 환자들이 모인다 했다. MRI 촬영을 했다. 통증클리닉에서는 척추 부근 MRI 사진에 이상한 게 발견된다고 했다. 정형외과의 진단확인서를 가져와야 치료를 해줄 수 있다고 했다. 어머니는 혹시 암이 아닐까 걱정하셨다. 이제야 살만한데. 혹시 암이면 어떡하니. 아예 암이라고 단정짓듯 말씀하셨다. 어머니, 괜찮아요. 걱정마세요. 암은 아닐 거예요. 그렇게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마음 한 구석의 불안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한 시간이라도 빨리 확정 진단을 받기 위해 서울의 여러 병원을 돌아다녔다. 걷기도 힘든 어머니를 들쳐 업고 제발, 어머니 힘을 내세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마음속으로 크게 외치며 기도를 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암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았다. 서울에 머물며 한 달간 치료를 했다. 드디어 어머니는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웃음을 되찾았다. 감사함이 물밀듯 가슴을 휩쓸었다. 어머니께 너무 고마웠다.

우리 세대의 어머니들 대부분이 그래왔듯 내 어머니도 고생 꽤나 하셨다. 아버지는 만학의 뜻을 두고 가족들을 남겨둔 채 서울로 상경하셨다. 어머니는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삼남매를 혼자 키우셨다.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을 오르셨고, 돼지를 키우기도 했다. 충북 영동의 부잣집에서 태어나신 어머니는 험한 일을 해보신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결혼을 한 후, 온갖 험한 일을 많이 하셨다. 첫째인 나를 임신했을 때 어머니는 먹을 게 없어 썩은 사과를 한 자루 얻어와 한 달 내내 드셨다. 그 이유 때문인지 나는 어릴 적부터 사과를 유난히도 좋아했다. 둘째 여동생을 낳았을 때는 젖이 돌지 않아, 술지개미를 먹였다. 여동생은 아직도 많이 마르고 작다. 또한 집착적으로 고기를 탐한다. 어머니는 그때 못 먹여서 그런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씀을 하시곤 했다. 셋째인 막내 남동생은 소아마비라는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막내의 장애 때문에 어머니의 고생은 더 깊은 골짝으로 빠져들었다. 초등학교 6년 내내 막내를 업어 등하교시켰다. 막내는 다혈질적인 타고난 성격 때문에 싸움도 많이 했다. 장애인이라는 열등감과 너무나 완강한 자존심으로 인해 늘 막내는 사고뭉치였다. 막내의 사고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계속 이어져 어머니의 슬픔은 끊이지 않았다. 중학교 때 싸움으로 인해 앞니 3개가 부러졌을 때 어머니는 참 많이도 우셨다. 어떤 험한 일이 벌어져도 어머니는 무릎을 꿇으셨다. 자존심밖에 남지 않았던 어머니는 그렇게 무릎을 꿇고 또 꿇었다. 어느 날에는 동생을 얼싸안고 같이 죽자고 하셨던 적도 있었다.

어머니의 희생 덕분인지 우리 삼남매는 그런대로 잘 컸다. 속을 많이 썩혀드렸지만 성인이 되고, 자신의 앞가림을 하기 시작한 때부터는 어머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막내는 이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 어머니가 아파 몸져누우실 때가 오면 자신이 모든 걸 그만두고 병간호를 할테니, 그 누구도 막지 말아 달라고 한다. 나는 어머니께 늘 고만고만한 아들이었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어머니의 위로가 되는 아들이었다. 첫째 장남이었기 때문인지 당신의 어려운 속내를 내게 많이도 말씀하셨다.

공부를 마치고, 밥벌이를 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면서 나는 어머니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자식이 시인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때로는 창피할 정도로 동네에 자랑을 하고 다니실 때도 있었다. 그런 어머니에 대한 시를 나는 단 한편도 쓰지 못했다.

어머니는 내 삶의 가장 뜨거운 상징이었다. 또한 내가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신봉하는 공통의 종교는 바로 ‘어머니’라는 종교이다. 우리는 어머니를 통해 기쁨을 얻고 슬픔을 얻고 위안을 받는다. 어머니는 내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고 신봉할 수 있는 믿음이다. 조금 더 나이가 들 때쯤, 간신히 어머니에 대한 시를 쓸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 모든 인생의 슬픔을 감싸 안고 함께 사셨다. 인고(忍苦)의 세월이라고, 신산(辛酸)한 세월이었다고 다들 말하지만, 어머니는 너희들이 있어 행복하다고 늘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아직도 허리가 아프시다. 수술을 해서도 완치되지 않기에 평생 통증을 함께 안고 가야 한다. 어머니, 유독 꽃을 좋아하시는 어머니. 이 봄날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벚꽃놀이라도 가야겠다.

이재훈(시인)

 

_ <연꽃마을신문>, 2011년 04월 15일, 279호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막과 구름을 오고간 시인_ 김충규 유고시집 발문  (0) 2013.03.20
황하에서 돌까지  (0) 2013.03.13
설문  (0) 2013.01.30
문복주 시집 <철학자 산들이> 표4글  (0) 2013.01.02
대선과 크리스마스  (0) 2012.12.07
Posted by 이재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