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_관련자료 2017. 10. 26. 14:29

 

이재훈 

 

찬바람이 옷깃을 연다

궁핍도 잊고 지체한 일들을 잊고

언덕을 오른다

바람의 체온을 오래 안으면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붉게 물들어 간다.

물들어 간다는 건 고통스러운 것인데

물들어간다는 건 소멸하는 것인데

이 아름답고 황홀한 속마음을 어디에 둘까.

악인이 넘치는 세계에서

무엇을 붙들고 물들고 잠들까.

무력한 사람들에게 간청할 목록을 적고 나면

소리 내어 울고 싶어진다.

무엇을 위해 우린 목소리를 놓지 못했을까.

지난여름 온몸을 물로 가득 채웠지.

물의 힘으로 당신을 기억했다.

이제 서서히 내 몸에 물이 빠져나간다.

잎들은 모두 붉고 노랗게 늙는다.

언덕의 세상과 당신과 내가 온통 물들다가

툭 다른 계절로 사라지는 순간

푸석한 내 몸에서 당신이 툭 떨어져 나가는 순간

툭 툭 빗방울이 가슴을 두드리는 절명의 순간

 

―《시와표현, 201611월호

 


 

은 의성어(擬聲語)이다. 사물의 소리를 흉내내는 말이다. 이 소리만 들어도 무엇인가 벌어지는 사건들을 사실 그대로 실감할 수 있게 한다. 또는 이란 본래의 하나 된 어떤 사물이 분리되어질 때 나는 소리이기도 하다. 하나를 이루는 순간이 둘로 분리되어 완전한 개체를 형성하는 순간 하는 소리는 절로 일어난다. 이 화자에게는 하나의 소멸이요, ‘고통이 된다.

화자는 찬바람이 옷깃을 연다하나의 개체를 이루는 순간을 맞는다. 따라서 찬바람은 곧 궁핍이요, ‘지체한 일로서 옷깃을열듯 언덕을 오른다’. 또한 바람의 체온을 오래 안으면서 붉게 물들어감으로써 바람의 체온이 안기는 하나를 이룬다. 그리고 마침내 소멸된다. 완전한 개체의 분리다. 소리의 원형을 이룬다. ‘물들어 간다는 건 고통스러운 것인데/물들어간다는 건 소멸하는 것인데/이 아름답고 황홀한 속마음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찬바람 궁핍 지체한 일 고통 소멸 악인이 넘치는 세계 간청할 목록 로부터 옷깃을 열고 언덕을 오르고 붉게 물들어 간 붙들고 물들고 잠들까 빠져나간다 붉고 노랗게 늙음으로써 하는 세상에 이른다. 그것은 곧 언덕의 세상과 당신과 내가 온통 물들다가/툭 다른 계절로 사라지는 순간/푸석한 내 몸에서 당신의 툭 떨어져 나가는 순간/툭 툭 빗방울이 가슴을 두드리는 절명의 순간이 된다. 결국 이 시작품은 삶의 온갖 노정에서 만나는 숱한 언덕의 세상과 당신과 내가 온통 물들다가끝내 하며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거니와. 이를 이라는 의성어를 통하여 시동성(示同性시차성(示差性)을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삶의 다양한 상징적 체계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추천 구재기)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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