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은뱅이꽃

시詩 2007. 2. 19. 14:34
 

앉은뱅이꽃



이 재 훈



일부러 가부좌를 틀 필요는 없다 당신은 감각의 수행자, 당신의 세상은 불구의 시간이 시작되는 때, 눈을 감아도 또렷이 기억나는 게 있다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반했던 제비꽃 향기처럼 당신, 들릴 듯 말 듯한 냄새 당신의 냄새를 들었다 노란색 코트가 아니라 감미로운 목소리가 아니라 당신의 발자국처럼 저 멀리서부터 두근거리는 냄새 눈을 감아도 또렷이 기억나는 게 있다 그러나 당신의 향기는 잠시 머물렀다 사라졌다 부재(不在)는 그리움의 양식 바이올렛 향기로 내 몸이 건반처럼 울렸지 잠시 뿐이었지만, 덤불 속에서 상채기를 핥다가 취한 당신의 냄새 적어도 당신의 몸에서 육식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다른 꽃으로 환생한다해도 이미 알았던 것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음을*



*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다 :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이리언(Alien)


 

시작메모


향기는 마법의 물질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 감각의 기억은 오래도록 남는다. 향기에 의해 생성된 그 기억은 이전의 시간을 재생시킨다. 또한 그 시간과 함께 나누었던 감정의 세밀한 떨림들까지 느끼게 된다. 이러한 감각의 체험은 주관성에 의존한다. 같은 향기라도 그 향기가 거느렸던 사연과 순간의 각별함으로 인해 범상치 않은 감각체험을 하는 것이다. 앉은뱅이꽃은 제비꽃의 다른 말이다. 금방 날아가버리는 속성으로 귀했던 제비꽃의 향은 매력적인 냄새였다. 바이올렛향을 가진 앉은뱅이꽃의 불구성(不具性)이 감각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하게 했다.

- 2007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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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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