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곳을 찾았을 때
모든 시간은 무너지고
가없는 기억의 언덕도 무너지고
또닥또닥,
희미한 발굽 소리만 들렸는데

2.
잠든 말, 묵상도 없는 말들이 벽에 붙어 있다 너의 소리를 들으려고 널 만진다 그제야 너는 벽화가 된다 널 만지면 황소가 되었다가 사슴이 되었다가 초원을 가로지르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 타 노래를 부르는 추장이 된다

3.
말은 내게 뱃속을 열어 보여준다
건강한 줄기를 먹고 자란 말
빨갛게 화장(化粧)한 말의 뱃속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뱃속에 질서있게 자리잡은 내장의 곡선에
손가락을 갖다 대본다
아프다, 말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뱃속에서 말의 새끼들이 뛰어나온다

4.
말이 쏟아져 내린다 초원에 내려 거칠게 달려나간다 내가 지겹게 머무는 도시의 거리까지 와서 내 머릿속을 후두둑후두둑 내달린다

5.
밤이 되면 나는 시를 쓴다
거리의 곤고함에 대해
꽃이 침묵하며 피는 이유에 대해
아는 척 쓰다가 말다가 결국
“말은 태양을 잉태했다”고 쓰다가

6.
믿음엔 증거가 있어야 한다
내가 검은 말을 타고 요정의 검을 차고
맥베스처럼 “눈 앞의 이것이 나인가” 되뇌이며
내 목을 자르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

-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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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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