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별곡

산문 2019. 2. 18. 17:10

책방별곡

 

이재훈

(시인, 청색종이 상주작가)

 

 

 

솔직히 예전에는 책방이 뭐 별 거 있나 라고 생각했다. 서점은 좀 큰 느낌이고 책방은 좀 작고 아늑한 사랑방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 고매한 분들의 문화적 욕구에 의해 마련된 살롱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들어가 보기엔 뭔가 부끄럽고 어색한 그런 공간이었다고 할까. 많은 책을 구경하기에도, 술이나 차를 마시기에도 애매한 공간이었다고 할까. 시간이 남을 때 길거리 어디에나 있어서 들어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지도앱을 켜고 찾아들어가야 하는 모험적 자세가 있어야 출입할 수 있는 불편도 있었다고 할까.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작은 책방은 내게 잡지에서나 가끔씩 구경하며 궁금해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책방은 너무나 소중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책방이 소중한 공간뿐 아니라, 꼭 있어야 하는 공간이라는 당위적 사명을 스스로 운위하며 사방팔방에 떠들며 다니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서점에 대해서라면 추억도 많고 할 말도 많고, 만화방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추억도 많고 할 말도 많다. 그곳엔 어설픈 비행(非行)이 있었고, 애매한 연모가 있었으며, 불가능에 가까운 문학적 대의가 숨어 있기도 했다. ‘종로서적이 사라졌을 때 느꼈던 허탈과 속절없는 기대 때문에 한동안 힘들어했던 적도 있지 않았나. 이제는, 다만 이제는 책방에 대해서도 추억과 할 말이 하나씩 쌓여가고 있는 중이다. 그동안 내 문화적 품위는 아직도 근대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자위한 터였다. 내게는 깨끗하고 근사한 카페보다는 김수영이나 박인환이 들렀을 법한 막걸리집에서의 문학적 결기가 더 편하고 좋은 공간이었다. 이제 내가 애정하는 그 목록에 작은 책방이 들어섰다고 하면 가장 적절한 표현인 듯 싶다.

가까운 시인인 김태형형이 문래동에서 책방 <청색종이>를 한다고 했을 때 의아했다. 아니 무슨 용기로 책장사를 한다는 말인가. 시인이지 않은가. 장사를 해본 분이 아니지 않은가. 차라리 책을 훔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다. 잔소리도 몇 번 한 것 같은데, 김태형 시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뚝심있게 책방을 꾸려나갔다. 책방을 창업하고 지금까지 여러 곡절도 있었겠지만 지금도 책방은 문래동의 인문학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어 책방을 한다는 시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유희경 시인의 <위트앤시니컬>, 지현아 시인의 <북스피리언스>, 김이듬 시인의 <책방 이듬> 등을 가끔씩 드나들었다. 동료 시인들이 운영하고 있었기에 작은 책방들은 내겐 더더욱 소중한 의미의 공간들이 되어 갔다. 그들도 아마 운영면에 있어서는 독립운동을 한다는 심정으로 시집을 매만지고, 책을 매만지고, 손님을 받고, 작은 행사들을 치를 것이다. 힘들지라도 행복하다는 마음이 가득할 것이다.

운명의 장난인지 필연의 결과인지 모를 일이 작은 책방을 통해 하나씩 내게 전달되었다. 작년부터 내가 운영하는 시창작반 상상스콜라의 강의를 <청색종이>에서 하고 있다. 나는 청색종이의 무급 홍보이사를 할 테니 저렴한 공간임대료 책정을 해주십사 제안했고, 시인 책방 대표님은 같은 시인의 마음을 널리 헤아려 주어 지금도 잘 운영해나가고 있다.

또한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고 한국작가회의가 주최하는 ‘2018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청색종이에 3개월간 상주작가로 활동하며 무려 4대보험에 가입되며 작은서점에서 암약하는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물론 이제 3개월간의 상주작가가 20191월로 끝이나 실업급여를 신청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긴 했다. 이곳에서 동네 네마실이라는 프로그램을 걸고, 영화도 보고 시도 읽고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문래동 골목에서 영화 패터슨’, ‘조용한 열정’, ‘토탈 이클립스’, ‘실비아등을 보고, 카를로스 윌리엄스, 에밀리 디킨슨, 랭보, 실비아 플라스의 시를 읽었다. 너무 근사하고 행복하지 않은가. 또한 두 군데의 작은 책방인 <책방 이듬><곁애 책방>의 활동을 지켜보며 교유를 이어나갔다.

책방은 동네의 문화 사랑방이다. 사람들이 모여 시를 읽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얘기를 나누며 마음을 나누는 곳이다. 큰 서점에서는 할 수 없는 따뜻한 열정과 마음들을 직접 눈앞에서 볼 수 있다. 작은 책방에 들르는 분들은 커피도 사들고 오고, 과일이나 과자도 사들고 오고, 심지어 김치도 가져온다. 모두 나누고 싶은 마음들 때문이다. 또한 책방은 인문학의 지식발전소이다. 철학을 읽고, 신화를 읽고, 역사와 문명사를 읽는 독서모임과 시와 책을 읽는 낭독회는 작은 책방에서 연일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책방은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위로를 받는 곳이기도 하다. 책방에 와서 사람들을 만나면 이런 생각이 자주 든다. 세상 밖에서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앞으로 동네마다 작은 책방들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작은 책방에서 시 읽는 소리가 들리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고, 영화보며 웃는 소리로 넘쳐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행복했으면 좋겠다.

 

- <한국작가회의 회보>, 2018년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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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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