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서정시문학상 수상소감 |

 

크고 비밀한 일을 꿈꾸는 시를 위해

 

이재훈

 

비가 온 날입니다. 바싹 말라붙었던 온 대지가 촉촉해졌고 공기는 더욱 청명해졌습니다. 한바탕 쏟아지고 나니 모든 사물들이 상쾌합니다. 이런 느낌을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늘 꿉꿉하고 답답하고 풀이 죽은 모습만 눈에 보였습니다. 제 문학도 그런 날이 많았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고 답답한 날이 많았습니다. 이번 수상 소식은 이런 날 한바탕 내린 단비와도 같습니다. 큰 위안이자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늘 제가 생성하는 언어가 어떤 의미가 될까, 제가 짓는 언어의 방법들이 어떤 쓸모가 있을까 고심했습니다. 질서도 없이 범람하는 글자들 속에서 방황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묻고 또 물었습니다. 산을 오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저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산에 오르는 것만 같았습니다. 오르는 산을 잘못 택한 것은 아닌지 회의한 적도 여러 번입니다. 어디를 바라봐야 하는지는 알겠지만 어떻게 올라야 할지는 모르는 자의 안타까움으로 늘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럴 때 힘을 내서 올라보라고 부추겨주시는 시간이 바로 지금인 것 같습니다. 외롭지만 더 힘을 내서 올라보겠습니다. 아니, 이제 외롭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더 외롭고 싶습니다. 외롭지 않으면 자꾸 기댈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시의 길은 어차피 고독한 외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에서 손 내밀고 힘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신께서는 제게 어떤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비밀한 일이 무엇인지 여전히 궁금해 하며 시를 씁니다. 그 비밀이 무엇인지 깨치는 날이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시를 계속 쓸 수밖에 없는 힘은 깨치는 그날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제 책상에 앉아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가 보겠습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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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한국서정시문학상 특집 | 평론

 

고통의 수신기

 

남승원

 

 

 

미국을 대표하는 프리마돈나 르네 플레밍이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모든 예술은 결국 문학적으로 전달된다.”는 말을 듣고 깊은 공감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스스로를 풀 리릭 소프라노full lyric soprano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화려한 콜로라투라가 넘쳐나는 오페라의 세계에서 개성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풍부한 감수성과 남달리 깊이 있는 호소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다른 오페라 가수와 달리 TV쇼 출연 같은 대중적 활동도 마다하지 않는 것 역시 어쩌면 같은 차원에서 이해해볼 수 있겠다.

이재훈 시인의 <벌레 신화>를 앞두고 단번에 르네 플레밍이 떠올랐던 이유는, 그의 시작품들이 의미관계에서 자유로워진 기표들의 발산에서 빚어지는 다채로운 기교들을 앞세운 최근의 우리 시문학에서 보기 드물게 선명한 주체의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기교와 함께 독자들에게 스며들 수 있는 길을 찾기보다, 시를 읽는 독자들 내면에 잠재된 고유의 목소리와 어떤 방식으로든 충돌의 길을 걷게 된다. , 이재훈 시세계의 의미들은 독자들의 내면과 부딪히고 얽히는 움직임의 장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움직임을 일관되게 만드는 운동성이 <벌레 신화>를 관통하고 있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르네 플레밍의 말을 떠올려보면서, “모든 시문학은 결국 서정적으로 전달된다.”고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재훈의 시작품들은 대상을 표현하는 방식이나 주제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가장 적극적인 차원에서 독자와의 반응을 기대하면서 서정적으로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서정의 본질이나 시와의 관계, 또는 그 관계의 범주와 의미에 대한 논의는 곧 우리 현대시 백여 년의 역사와 흐름을 같이 한다. 그만큼 서정의 문제는 시문학 내부에서 명확히 한정되어 있는 어떤 특성이라기보다, 장르의 전반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본질적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서정의 기존 인식에 균열을 일으키려는 의미 있는 시도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정=서정시라는 인식이 여전히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면, 그만큼 서정과 시문학이 그 특질에 있어서 최대치를 공유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 서정이 시에 의미를 부여하는 핵심이라는 절대적 관점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서정과의 길항을 통해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새로운 시적 현실, 즉 시와 시가 아닌 것(非詩)들 간의 경계 확장이 요구되는 현실에서 다시 한 번 시의 영역을 도약시킬 수 있을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재훈의 <벌레 신화>에 특징적으로 감지되는 시적 운동성을 우리 시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역시, 그의 시세계가 특정 가치를 재현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다양한 대상들과 일으키는 반응 때문이며, 나아가 시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에까지 확대 적용되는 이 반응이야말로 그 자체로 서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서정의 가장 중요한 특질은 시를 둘러싼 모든 관계들이 반응하는 접점에 의미를 결절시키는 데에서가 아니라, 의미를 생성시키는 힘에 대한 모든 의심이 끊임없이 발현되도록 만드는 데에서 나온다.

을 보면 이것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해볼 수 있다. 진화의 흔적을 보여주는 인간의 신체 기관에 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시집의 첫 부분에 배치됨으로써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충돌의 움직임을 이끄는 역할도 하고 있다. 특히, 두 개의 연으로 나누어진 구성은 이 상상력을 둘러싸고 있는 대립적 요소들, 기원과 현재또는 희망과 고통’, ‘이상과 현실등의 충돌을 보다 적극적으로 일으킨다. 이를 통해 우리가 그토록 애써가면서 유지하고자 했던 평범한 일상이 사실은 현실과의 타협을 강요하면서 고유한 가치들을 기꺼이 스스로 퇴화시키게 만드는 폭력성을 감추고 있었다는 진실이 어렵지 않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어 끝까지 퇴화를 거부함으로써 현실의 고통 위로 두드러지고 있는 을 시적 상상력의 범주에 포함시켜 작품을 통해 드러난 폭력적인 일상 속에서도 어느 정도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데로 나아간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재훈의 작품이 시문학을 둘러싼 요소들의 충돌이라는 일관된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충돌이 빚어내는 어떤 결과물이어서는 안된다. 결과물에 주목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은 그것을 만들어내던 힘이 소멸되는 순간과 정확히 겹쳐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서 우리는 이 힘의 중심이자 충돌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고, 그곳에서 결국 수난이 없는 몸은 역사가 없다는 시인의 인식과 만난다. 이를 통해 수난이 언제나 하나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것을 피할 수도 없고, 또 그렇기에 우리의 일상이 곧 고통그 자체인 현실이 밝혀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같은 사실이 그대로 압축된 대상으로서 이 내세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화 속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우리에게도 은 일상을 지속시키는 힘인 동시에 우리에게 가해지는 일상적 고통을 수신하는 안테나의 기능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표제작을 비롯하여, 시집의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벌레에서 시인이 지옥과도 같은 일상을 흘리며 기어가는 삶을 보여줄 때에도 의 상징과 겹쳐지면서 보다 명백하게 전달된다.

을 통해 드러난, 고통으로 직조된 우리의 일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하이델베르크에서 시인은 성 밑의 마을로 표현된 일상의 모습을 특히 오래된 성과 대비시켜 잘 보여주고 있다. “희롱과 진노의 말들만 더펄거리는 곳으로 압축된 일상의 공간은 책망이 없화답이 존재하는 곳과의 위상학적 배치, 오래된 성을 찾아 떠나는 시적 주인공의 행위와 더불어 우리에게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이처럼 시인이 만들어 둔 우리 일상의 모습은 우리를 문득 K, 카프카의 바로 그 K가 마주했던 상황과 고스란히 겹쳐진다.(시인은, 다소 익살스럽게, 그곳을 가보지 않은 어느 누구라도 지명을 듣는 순간 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독일의 소도시를 제목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시에 드러나 있는 것처럼, ‘마을을 벗어나 에 오르는 일은 결국 저 마을의 시간과 분리되지 않고 반복될 수밖에 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카프카를 경험해본 사람들이라면 중차대한 법적 소송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그 이유조차 전혀 알 수 없다거나, 또는 오랫동안 기대해왔던 목표 바로 앞에서 달성이 무기한 지연되는 상황을 맞닥뜨린 적이 있을 것이다. 카프카는 이처럼 일상이 갑작스럽게 무너지는 데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그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상황을 피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 오히려 그 상황을 지속시키는 유일한 원인이 되는 이해 불가능한 상황에 우리를 몰아넣는다. 카프카가 꼼꼼히 만들어둔 일종의 미로와도 같은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처럼, 이재훈의 시세계를 관통하고 난 우리 역시 평안했던 일상 전체를 의심하고 스스로에게 끝없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처럼 시 안에서 던져진 질문과 그것을 읽는 독자 내부의 질문이 충돌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시가 가진 힘이 발산되고 있다.

<벌레 신화> 전반에 걸쳐 있는 동굴이미지 역시 이와 관련되어 있다. 햇칼, 빙하의 고고학, 구렁등에서 직접적인 소재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작품들에서 구멍-(어두운)숲속-(어둠에 잠긴)-(깊은)등의 이미저리들로 확산되면서 동굴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어둠과 밝음, 안과 밖등을 구분 짓는 경계인 동시에 그 둘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 충돌을 일으키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햇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동굴은 바깥의 햇살이 가득한 공간과 쉽게 대조를 이루고, 또 그 때문에 황홀하게만 보이는 바깥의 세계를 꿈꾸게 만든다. 하지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바깥의 세계는 동굴 속 에게 그대로 로 작용하면서 고통과 희생을 통하지 않고서는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만든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끝이 보이지 않는 텅 빈 계곡을 날고 싶다.”는 바람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물론이지만, 이재훈의 시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언제나 이면에서 그것을 발생시키는 고통스러운 순간과의 충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속적으로 충돌을 발생시키는 이재훈의 시는 독자들을 수동적인 상태에 머무르지 않게 만들고 필연적으로 적극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이를 위해 그는 우리의 일상 속으로 고통을 끌어들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할 것은 그가 고통에 직접적인 관심을 두고 있다는 오해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개인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물질적 환경과 지적·감정적 반응을 하며 이것이 결국 시를 만들어내고, 이렇게 만들어진 시작품이 다시 독자와의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시의 올바른 방향이라고 했던 오든(W.H. Auden)의 말대로, 이재훈에게 고통은 독자들에게 능동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일종의 장치인 셈이다.

나쁜 병에서 그가 고통은 존재와 다른 물질이라고 말할 때 이는 보다 분명해진다. ‘고통을 끌어들인 이유가 평범한 일상 뒤에 가려진 폭력적이고도 비인간적인 얼굴을 폭로하기 위함이라면,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맞아들인 고통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과 반응하는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고통의 전제가 우리의 존재와 동등한 독립적 차원이라는 사실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만이 어느 한 쪽의 일방적 영향력이나, 또는 그 둘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일종의 결과물에 관심을 두기보다, ‘일상고통이 동등한 차원에서 만나 벌어지는 반응들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양하게 벌어지는 이 반응들에 참여하게 되면서 때로 자신의 삶과 고통을 견주어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시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고민해보는 일도 가능해진다.

이재훈 시인이 만들어둔 길을 따라가는 일은 목적과 무관한, 반응 그 자체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반응이 결과로 이어지는 보편적 상식의 세계에서라면 이는 어쩌면 막연한 두려움을 동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말 그대로 반응안에는 최대한의 고통이라는 범주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은 살이 찌는데, 풀잎은 쪼그라들기만 하는, 그래서 소망(벌레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면 어느 한쪽을 반드시 포기해야만 하는 제로-섬 사회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언제나 고통을 남의 몫으로 미루어왔다. 결국, <벌레 신화>를 통해 고통마저 적극적으로 포함할 수밖에 없는 반응을 경험하게 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장면을 만나게 된다.

 

비밀을 말하지 않아도 맛보면 다 아는 것이지. 꿈을 맛보고, 슬픔을 맛보고, 춥고 서글픈 때를 맛보는 사람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약속을 맛본다네. 그 어떤 약속도 폐기할 수 없다고 쓴다네. 어느새 입 안이 까끌하고 씁쓸한 봄이 성큼 와 있다네.

― 「맛보는 공동체부분

 

맛을 본다는 것은 그 어떤 이해의 방식과도 전혀 다르다. 같이 눈물을 흘리거나, 혹은 안아 주거나 손을 잡아 줄 때조차, 냉정하게 말해서 타인의 고통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맛을 본다는 것은 우선 나의 감각을 직접 참여시키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또한 맛보는 행위에는 자신이 싫어하는 특정 맛이 그 대상에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단 맛을 보게 된다면, 자신의 의도가 전혀 없었던 순간에조차 맛보는 사람들과 동일한 공동체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꿈을 맛보는 것과 같은 순간이거나 춥고 서글픈 때처럼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달콤한 희망보다 입 안이 까끌하고 씁쓸한 봄을 노래하는 이재훈의 시세계가 더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전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사사>, 2017년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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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승원 | 문학평론가.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계간 <포지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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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귀가/이재훈

최종수정 2017.09.20 08:48 기사입력 2017.09.20 08:48

  
 차창 밖으로 비가 내린다. 
 버스를 타기 전에는 맑았던 하늘인데 
 집으로 가는 길에 비가 내린다. 
 지방 소도시의 대학에서 시간 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갈 때면 늘 가혹하게 막힌다. 
 모두 저마다 집으로 가거나 
 외로움을 달랠 사람들을 찾아가거나 
 저녁 일터로 가는 길일 것이다. 
 휑한 마음 한구석에 빗방울이 또르륵 떨어진다.

 

 매일 보따리를 들고 어딘가로 나서는 
 장돌뱅이의 저녁이 궁금하다. 
 언제쯤 집으로 당도할까. 
 쉬어야 할 집은 멀고 
 목은 더 컬컬해진다. 
 버스 뒷자리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연유인지 생각하다 
 뒤로 가서 가녀린 등을 토닥거려 주고 싶지만
 모른 척 그냥 눈을 감는다. 
 도착할 집은 멀고 잠은 오지 않는다. 
 버스가 도착할 무렵이면 
 가까운 막걸리집부터 찾을 것이다. 
 컬컬한 목이 바짝 마른다. 

  
■참 이상한 일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매번 멀기만 하다. 아마도 집에 빨리 도착했으면 그래서 따뜻한 물에 씻고 누웠으면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이제 세 정거장 남았구나, 저기 마트를 돌면 꼬마붕어빵 파는 아저씨가 보이겠지, 두 개만 먼저 먹어도 될까… 혼자 정겨운 셈을 하면서 차곡차곡 밟아 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은, 그런데 정말 희한하게도 왜 이렇게 퍽퍽하고 고달프기만 한지 그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어디 생맥주 한잔 같이할 사람은 없나 싶은 생각만 간절하다. 왜 그럴까?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다만 지금은 장돌뱅이처럼 좀 서성이다 아무 데나 들어가 아무렇게나 자고 싶고 그러다 좀 울고 싶을 뿐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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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산문 2018. 1. 29. 23:30

편지

이재훈

 

1.

내가 편지를 처음 쓰기 시작한 때는 중학교 1학년 즈음이다. 나는 낯설고 먼 동네에서 전학온 이방인이었다. 당시에는 전학온 학생이 드문 시절이었다. 친구들은 타향에서 온 얼굴이 희고 키가 작은 전학생을 놀려주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이상한 별명을 만들어 내어 놀려대곤 했다. 짓궂은 친구들은 뒤에서 돌을 던지고 도망가기도 했다. 누가 별명을 지어냈으며 누가 돌을 던졌고 누가 그러지 말라고 말렸는지 모두 알 수 있는 작은 동네였다. 학교에서부터 집까지 논둑길을 걸으며 한없이 외로워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엄마가 사서 입혀준 멜빵바지가 창피했다. 친구들처럼 털털하게 아무 거나 입고 함께 풀피리를 불며 소 풀뜯기러 가고 싶었다. 뚝방에서는 늘 아지랑이가 어지럽게 피어올랐다. 집에 가다 말고 뚝방에 앉아 소를 몰고 다니는 친구들을 오래도록 보는 날들이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얘기지만 당시엔 또래집단에 편입되지 못한 외로움 때문에 너무나도 힘들었다. 나는 편지를 썼다. 떠나온 곳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혹시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나처럼 너희들도 전학간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동갑내기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던 교회 누나에게도 편지를 썼다. 어쩌면 그 편지들이 내 문학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애들은 시간이 지나면 친해지게 마련이다. 나를 놀려대던 친구들은 친해지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친해지고 싶었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 놀려댔던 것이다. 나를 괴롭히는 줄로만 알았던 게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였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무장해제되었다. 몇 달 동안 외로움에 지쳐있던 나에게 친구들은 샘물처럼 달았다. 친구들과 개울가에서 미역을 감았고 함께 소 풀을 뜯겼다. 저녁나절엔 친구집 사랑방 아궁이에서 쇠죽이 끓는 구수한 냄새를 오래도록 맡았다. 억센 경상도 욕을 배웠고 친구들처럼 아무 옷이나 입고 동네를 쏘다녔다. 때론 범죄에 가까운 대량 서리를 하러 다니기도 하였다. 편지는 더 이상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사춘기가 찾아왔다. 밤늦게까지 라디오를 켜놓고 멍하게 있는 날이 많았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유행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잡히지 않는 방송이었다. 나는 김희애의 인기가요를 들었다. 늦은 밤에는 팝음악 방송을 들었다. 공테이프를 걸어 놓고 좋은 음악이 나오면 녹음을 했다. 그리고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번엔 방송국에 편지를 썼다. 다시 불을 지피기 시작한 내 그리움은 대상이 없는 막연한 것이었다. 방송국은 그런 내 그리움을 전달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편지지에 썼고, 노트에 썼고, 엽서에 썼고, 은행잎에 썼고, 티슈에 썼다. 내 그리움을 전할 수 있는 모든 사물이 나의 편지지였다. 펜이 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글씨체를 실험하며 썼다. 어쩌면 그 편지들이 내 문학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나는 또다시 전학을 갔다. 그리고 또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 편지는 그리움뿐만 아니라 존재의 궁금증에 대한 갈망을 담은 것이었다. 친구들은 답장을 쓰느라 곤혹을 치렀을 것이다. 밑도 끝도 없는 허황된 질문들과 존재론적 고민들에 대해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망설였을 것이다. 대답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편지를 쓰는 게 중요했다. 어쩌면 그 편지들이 내 문학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편지를 쓰는 일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되었다. 아마 이십대까지는 계속 편지를 썼을 것이다. 그 편지들은 몇 개의 상자 속에 오래도록 보관되어 있었다. 시골집 책상 아래 깊숙이 보관되어 있었다. 가끔씩 시골집에 들르면 그 편지들을 꺼내 보곤 했다. 아직 설익은 감정을 어찌할 바 몰라 서성대는 문장들이, 열망에 차서 흥분된 문장들이, 열등감에 휩싸여 자책하는 불안한 문장들이, 구원을 꿈꾸는 불가해한 내면의 문장들이 스멀스멀 기어다니고 있었다. 어쩌면 그 편지를 꺼내 읽는 일들이 내 문학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2.

 

스물 하고도 몇 해가 넘어갔다. 문학을 한다고 폼을 잡으며 허둥대던 시절이었다. 문학 쫌 할 것 같은 친구들이나 여학생들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 시를 썼고 시가 어떻냐고 물었다. 편지에 치기어린 문학론을 펼쳤고 문학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객기를 부렸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등단을 했다. 등단을 했다고 편지를 썼으며, 등단을 하니 더 괴롭다고 편지를 썼다. 시가 내 미래를 무엇 하나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시에 투정을 부렸다. 시 때문에 내가 이꼴이 되었다는 투정을 편지에 썼다. 어쩌면 괜찮다는 위로의 대답을 듣기 위해 투정을 부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보관한 편지상자가 불태워진 것은 이십대의 마지막이 끝나가고 있을 때였다. 명절에도 들르지 않았던 시골집에 오랜만에 들렀다. 그런데 편지상자가 없어졌다. 늘 책상 밑 깊숙이 놓여 있던 편지상자가 없어졌다.

엄마. 내 편지상자 못 봤어요?”

그거 다 태워버렸다.”

뭐라고요? 아니. 그걸. 제게 말도 안하시고 태우다니요.”

. 너무 오래 돼서. 필요 없는 건줄 알고 태워버렸지. 중요한 건지 몰랐구나.”

어머니는 그 편지들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내 일기까지도 훔쳐보시는 분인데 그 편지를 안 읽었을 리가 없었다. 아마 과거의 일들에 목매인 나의 모습이 보기 싫었으리라. 옛 추억에 젖어 찔끔거리는 아들의 모습이 안타까우셨으리라. 그리고 어머니의 병적일 만큼 깔끔한 성격도 한몫 했다. 누렇게 바랜 종이상자를 빨리 치워버리고 싶으셨을 것이다. 아무튼 편지를 잃어버린 그날의 사건은 꽤 오랫동안 나를 옥죄었다. 내 추억의 대부분이 뭉텅 잘려나간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편지를 계속 썼다. 아직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고, 편지를 쓰는 사람들이 꽤 남아 있었다.

 

내 스무 살은 노래였다. 거리에서 배운 노래가 목청으로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그것을 먼 이방의 방언이라 여겼다. 천둥소리는 더 크게 들렸고, 몸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단 하나의 권능도 없이 숨소리 없는 거리에 서 있었다. 나는, 가볍게 다른 문을 열 수 있을까. 꿈도 없는 잠을 매일 잘 수 있을까. 내 손가락들이 들러붙어 물갈퀴가 되고 이빨은 사자처럼 송곳니만 사납게 솟아난다. 성 꼭대기에 올라 어둠에 대고 소리를 지른다. 새의 등에 올라타고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으며 나스카 평원에 새겨넣은 의 형상을 한눈으로 보고 싶었다. 나는, 어떤 법을 배웠던가. 노래하는 법 말고는 배운 것이 없다. 눈 먼 한 마리의 새가 내 머리칼 속에서 둥지를 틀고 있었다. 새의 전생은 자유였다고 평원을 돌보던 파수꾼이었다고, 그 새가 법을 배웠다.

 

법을 배우는 순간, 나는 풀이 되었다.
  
하늘을 날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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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 전 풀의 고독을 기억하고 있다.

이재훈, 나스카 평원을 떠난 새에 관한 이야기부분(<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문학동네)

 

나의 노래는 편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성전에서 배운 노래를 편지에 옮겨 적었고, 거리에서 배운 노래를 편지에 옮겨 적었다. 내 존재의 고민과 환상의 빛깔과 삶의 고통들을 편지에 옮겨 적었다.

서른이 넘어가면서 편지 쓰는 일이 뜸해졌다. 이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성탄절 카드도 신년 카드도 서서히 사라졌다. 이제 편지는 내 스무 살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지금은 사라진 어떤 흔적이 편지의 기억을 통해 내 청춘을 증언해주는 것만 같다. 편지로 주고받았던 오랜 기다림과 떨림은 이제 없을 것이다. 봄날 비가 오는 밤이 되면 정말 오랜만에 손편지를 써봐야겠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끄러워 부치지 못할 정념의 말들을 맘껏 써봐야겠다. 펜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부끄러운 문장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그 기다림의 문장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빗소리를 들어야겠다.

출처 : <문학사상>, 2016년 4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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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_관련자료 2017. 10. 26. 14:29

 

이재훈 

 

찬바람이 옷깃을 연다

궁핍도 잊고 지체한 일들을 잊고

언덕을 오른다

바람의 체온을 오래 안으면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붉게 물들어 간다.

물들어 간다는 건 고통스러운 것인데

물들어간다는 건 소멸하는 것인데

이 아름답고 황홀한 속마음을 어디에 둘까.

악인이 넘치는 세계에서

무엇을 붙들고 물들고 잠들까.

무력한 사람들에게 간청할 목록을 적고 나면

소리 내어 울고 싶어진다.

무엇을 위해 우린 목소리를 놓지 못했을까.

지난여름 온몸을 물로 가득 채웠지.

물의 힘으로 당신을 기억했다.

이제 서서히 내 몸에 물이 빠져나간다.

잎들은 모두 붉고 노랗게 늙는다.

언덕의 세상과 당신과 내가 온통 물들다가

툭 다른 계절로 사라지는 순간

푸석한 내 몸에서 당신이 툭 떨어져 나가는 순간

툭 툭 빗방울이 가슴을 두드리는 절명의 순간

 

―《시와표현, 201611월호

 


 

은 의성어(擬聲語)이다. 사물의 소리를 흉내내는 말이다. 이 소리만 들어도 무엇인가 벌어지는 사건들을 사실 그대로 실감할 수 있게 한다. 또는 이란 본래의 하나 된 어떤 사물이 분리되어질 때 나는 소리이기도 하다. 하나를 이루는 순간이 둘로 분리되어 완전한 개체를 형성하는 순간 하는 소리는 절로 일어난다. 이 화자에게는 하나의 소멸이요, ‘고통이 된다.

화자는 찬바람이 옷깃을 연다하나의 개체를 이루는 순간을 맞는다. 따라서 찬바람은 곧 궁핍이요, ‘지체한 일로서 옷깃을열듯 언덕을 오른다’. 또한 바람의 체온을 오래 안으면서 붉게 물들어감으로써 바람의 체온이 안기는 하나를 이룬다. 그리고 마침내 소멸된다. 완전한 개체의 분리다. 소리의 원형을 이룬다. ‘물들어 간다는 건 고통스러운 것인데/물들어간다는 건 소멸하는 것인데/이 아름답고 황홀한 속마음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찬바람 궁핍 지체한 일 고통 소멸 악인이 넘치는 세계 간청할 목록 로부터 옷깃을 열고 언덕을 오르고 붉게 물들어 간 붙들고 물들고 잠들까 빠져나간다 붉고 노랗게 늙음으로써 하는 세상에 이른다. 그것은 곧 언덕의 세상과 당신과 내가 온통 물들다가/툭 다른 계절로 사라지는 순간/푸석한 내 몸에서 당신의 툭 떨어져 나가는 순간/툭 툭 빗방울이 가슴을 두드리는 절명의 순간이 된다. 결국 이 시작품은 삶의 온갖 노정에서 만나는 숱한 언덕의 세상과 당신과 내가 온통 물들다가끝내 하며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거니와. 이를 이라는 의성어를 통하여 시동성(示同性시차성(示差性)을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삶의 다양한 상징적 체계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추천 구재기)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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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이 되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재훈

 

우리는 그때 김광석을 광석이형이라고 불렀다. 스무 살이 되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짐을 싸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갈 데가 없었다. 친구의 자취방에 얹혀살았다. 나와 처지가 비슷한 친구들도 몇 있었다.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자취방에 모여 술이나 마시며 시간을 축내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에는 무협지나 비디오를 빌려보는 게 최고의 재미였다. 자취방에는 비디오기기가 없었기에 비디오테이프를 플레이할 수 있는 비디오기기까지 빌려주던 시절이었다. 하루 이틀 동안 열편이 넘는 비디오를 보고나면 머리가 아팠다. 대부분 홍콩영화나 헐리우드 액션영화였는데 줄거리나 영화 제목이 겹쳐서 무엇을 보았는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러다 할 일이 없으면 음악을 들었다. 우리에게 김광석의 음악은 마치 우리의 삶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김광석을 듣고 있으면 그때의 일들이 떠올려진다.

배가 고팠던 시절이었다. 라면만 먹어 자주 설사를 했다. 밥은 먹어야 했기에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저마다 학원으로 업소로 공장으로 식당으로 나다녔다. 밤이 되면 두더지처럼 한 사람씩 자취방의 소굴로 기어들어왔다. 모두 지쳐있었다. 아무런 기술도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외로웠다. 그 외로움은 혼자라는 외로움이 아니라 삶의 고단함 속에서 나오는 외로움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복잡한 심사가 서로 얽혀 마음을 힘들게 했다. 아무런 낙관도 없는 미래의 일들이 눈앞에 뻔히 보였다. 친구들끼리 점점 말수가 줄었다. 무협지를 읽는 일도 비디오를 보는 일도 심드렁해졌다. 그러다 밤이 깊어지면 술을 찾았다. 스무 살은 누구나 술을 물처럼 마실 나이였다. 항상 술이 부족했던 나이였다. 안주는 새우깡이나 생라면 몇 개면 그만이었다. 술을 마시면 김광석을 들었다. 왜 김광석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누구도 김광석의 노래를 바꾸라고 한 일은 없었다. 술을 마실 때는 무조건 김광석이어야만 했다. 누구라도 김광석을 틀어놓는 것에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

김광석을 들으며 옛 애인을 생각했다. 무료한 날들을 생각했고, 댓가없는 날들을 생각했으며, 사람은 왜 이렇게 외롭게 살아야하는가를 생각했다. 김광석을 들으며 노래가 주는 쓸쓸함을 사랑하게 되었다. 김광석의 노래가 왜 쓸쓸하게 들리는지에 대해서는 서로의 의견들이 달랐다. 그의 목소리 때문이라는 친구도 있었고 그의 노랫말 때문이라는 친구도 있었다. 어떤 친구는 그의 포크적인 음악성향 때문이라고도 했다. 어느 이유에서건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술을 찾게 되고 쓸쓸해지게 된다는 사실에서는 모두 수긍했다.

나는 김광석의 노래 중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특히 좋아했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는 그 노랫말이 꼭 내 얘기 같았다. 실제로 유리창에 이별한 애인의 이름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술을 마시면 꼭 이 노래를 부르고 싶어진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는 울고 싶을 때 듣는 노래이다. 살다 보면 이유 없이 울고 싶을 때가 많다. 남자라는 무의식적 관행 때문에 울음을 많이 참는다. 혼자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세상 모든 일들을 다 이해할 것만 같다. 또한 세상 모든 일들이 애처롭고 고맙고 미안해지게 되는 노래이다. 김광석은 김목경의 이 노래를 버스에서 듣다가 그 자리에서 울고 말았다고 한다. 내가 60대가 되더라도 아직 철이 들지 못한 늙은 어린애일 테지만 이 노래만큼은 아는 척하며 꼰대짓을 하고 싶어진다.

<마루>는 어머니와 슬픔에 관한 시이다. 이 시는 그 시절을 통과해 쓴 시이다. 어쩌면 김광석과 함께한 깊은 밤의 수많은 술추렴이 이 시를 도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루


이재훈


이별은 순간이다
그 순간을 이겨낸 자만이
슬픔을 바닥에 깔고 앉을 수 있다
나는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생을 버텨왔다 그러나
멀리서 새벽 종소리가 들려올 때
나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어머니가 마루에 앉아 뜨개질을 하신다
엉덩이 밑에서 건져 올린 슬픔을
한 올 한 올 뜨고 계신다

 

_ 출처 : <이럴 땐 쓸쓸해도 돼>(천년의 상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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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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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의 밤_ 영역

시詩 2015. 2. 17. 10:52

Plain’s Night


Lee Jaehoon

번역 홍은택



It’s become desolate. I’ve become detached from others, and unconcerned for their deaths. I’ve become detached from all emotions. I’ve become indifferent to the disciplines taught by those who teach. It’s simply because of vertigo. It’s dizzying when I drop by head and lift it back up. It spins and throbs. It spins whether I sit or lie down. It’s because of excessive drinking. It’s because of a migraine. I attempted to burn the weeds in my body. I considered that dying a glorious death is the only beauty. I thought leaving without a handshake to be considerate. A world without sadness doesn’t exist. I wanted to be a beautifully sad animal. I’ll dance with an abundant heart. What I can show is a whiff of a scent set in my clothes. It’s a sad night because I can’t say that I love. When thunder dwarfs the sound of music. When the midnight moonlight wets the hair. I’ll lie my body down on that universe and cover myself with the stars. Without any language I will be immersed in the abyss. I will sit on the plain and realize the wind’s heart.





평원의 밤


이재훈




막막해졌네. 타인에게 무심해지고, 타인의 죽음에 무심해졌네. 모든 감정에 무심해졌네. 가르치는 자들이 내놓는 규율에 무심해졌네. 단순히 어지러움 때문이네. 고개를 숙이다 고개를 들면 어지럽네. 빙빙 돌고 울렁거리네. 앉아도 누워도 빙빙 도네. 과음 때문이네. 두통 때문이네. 내 몸에 잡초들을 태우려했네. 산화하는 것만이 아름다운 거라 여겼네. 악수도 청하지 않고 떠나는 게 배려라 생각했네. 슬픔이 없는 세계는 없지. 나는 아름답게 슬픈 동물이고 싶었네. 충만한 마음으로 춤을 출 것이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내 옷자락에 배였던 냄새 한 다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 슬픈 밤이네. 천둥이 음악소리를 덮을 무렵. 자정의 달빛이 머리칼을 적실 무렵. 저 우주에 몸을 눕히고 별들을 덮을 것이네. 아무 언어도 없이 심연에 잠길 것이네. 평원에 앉아 바람의 마음을 얻을 것이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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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원시의 시간, 라다크(Ladakh)

 

 

 

이재훈

 

 

 

 

 

모르는 시간

 

풍경은 시간을 앞선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풍경은 이전의 기억을 지워버린다. 마치 구름처럼 하늘과 지상의 일을 슬쩍 가리고 무감하게 한다. 내게는 라다크로 가는 하늘 위가 그랬다.

값싼 여행을 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은 비행기를 갈아타는 것이다. 우리는 배고픈 여행객들이었다. 서울에서 홍콩으로, 홍콩에서 델리로, 델리에서 다시 라다크의 주도인 레(Leh)로 이동하는 경로였다. 하지만 델리에서 이미 지쳐있었다. 비행기를 타는 시간만큼 환승 시간도 길었다. 인천공항에서부터 꼬박 하루를 견뎠다. 델리에서 라다크로 가는 비행기를 탄 시간은 다음날 아침이 밝기 전이었다.





라다크로 가는 하늘 위에서 여명이 밝아 왔다. 피곤에 지쳐 눈꺼풀이 반쯤 감겨 있을 때였다. 그날의 첫 햇살이 눈가를 살살 간질였다. 눈을 뜨니 저 멀리 구름에 살짝 걸린 햇귀가 보였다. “죽인다.” 그 말밖에는 할 수 없는 일출 장면이었다. 노랗게 익은 햇살이었다. 햇살 아래로 양털 구름이 양탄자처럼 깔려 있었다. 하늘과 구름이 풍경의 전부였다. 그러다 이내 강렬한 빛이 창안으로 쏘아들었다. 창밖을 볼 수 없을 만큼 강한 빛이었다. 온 얼굴이 아침햇살로 뜨끈했다. 기내식 커피를 한 잔 하고 나니 햇살은 수그러들었다. 구름과 파란 하늘만이 모든 풍경을 감쌌다. 햇살은 어느새 저 하늘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 아침이 찬란하게 푸르렀다. 도시에서 보았던 수직과 직선의 완고함이 이 높은 하늘에서는 무력했다. 선이 아닌 면으로 뒤덮인 구름과 하늘만이 가득할 뿐이다.





그러다 비행기가 낮게 깔리며 내려갔다. 산맥이 나타났다. 눈을 이고 있는 산봉우리가 서로를 맞잡고 있었다. 저 밑이 바로 히말라야다. 낮게 비행하며 바라보는 산맥은 장관이었다.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키를 재듯 머리를 내밀었다. 산맥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다른 산맥의 몸에 길게 드리워졌다. 그런 그림자들은 서로의 산맥에 검은 덧칠을 하며 묘한 명암을 만들어냈다. 힘차면서 부드럽게 감싸는 그림자가 긴장하듯 햇살의 몸에 담겨 있었다. 원시의 경이가 있다면 이런 순간일 것이다. 그때는 몰랐다. 우리가 저 밑의 산맥을 달리고 휘돌아가면서 울렁울렁했다는 것을. 저 원시의 시간들. 내가 모르는 시간들 앞에 설 생각에 마음이 달떴다. 자꾸만 숨이 가빠왔다.



 

오래된 사원


라다크에서 가장 먼저 둘러본 곳은 레 근처에 있는 사원들이었다. 헤미스(Hemis), 틱세(Thiksey), 쉐이(Shey), 스톡(Stock) 사원들을 차례대로 둘러보았다. 라다크는 티벳 불교를 믿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인도의 힌두인들과 다르게 라다크는 대부분 불교인들이다. 라다크의 곰파들은 모두 몇 천 년 전의 건물처럼 오래돼 보였다. 돌을 쌓고 진흙을 비비고 발라 만든 사원들은 히말라야의 고원에서도 몇 백 년을 견뎠다. 대부분의 곰파는 그 지역의 가장 높은 곳에 세워졌다. 그렇기에 곰파에 가기 위해서는 늘 올라야 한다. 마치 하늘 위로 오르는 것처럼. 모든 계단과 길들이 하늘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사원의 곳곳에는 낮잠을 자는 개들이 유독 많았다. 이곳에서 개는 아무도 소유하려 하지 않는 가장 미천한 동물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향불을 피우고 식사를 준비하는 어린 스님들의 모습은 진지하면서도 천진했다.





석양이 지는 어스름. 사원으로 전해지는 사양은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저물어간다는 것은 쓸쓸하거나 때론 아름다운 일인데, 이곳에서는 성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저물어가는 사양은 대지와 숲이 아니어도 근원을 향할 수 있었다. 사원으로 오르느라 지친 얼굴에 저문 햇살의 감촉이 다가왔다. 서서히 누그러지고 넘어져가는 석양을 마음에 담느라 일행들은 모두 저마다의 시간 속에 홀로 서 있었다. 햇살이 수직에서 사선으로 제 몸을 허물다가 스스로 스러지는 일. 매일 가장 꼭대기에서부터 가장 아래로의 소멸을 겪는 일. 우리는 스러질 때에야 비로소 평온해진다. 스러지고 소멸될 즈음에야 평온해진 자신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실로 오랜만에 저물어가는 일의 감동과 흐뭇함을 천천히 음미했다. 이곳에서의 모든 소멸에게 온 맘으로 경이를 보내고 싶었다.

나는 어쩌면 몇 천 년 전의 사람들과 만나고 온 것인지도 모른다. 먼 기억을 소환하는 공간에 열흘 동안 있다 온 셈이다. 작은 도랑물 소리. 바람이 발바닥을 간질이는 나긋함. 마당을 쓰는 빗질 소리. 멀리서 들리는 야크의 울음. 옆 호텔에서 두런거리는 이방의 방언들. 나는 먼 기억으로부터 왔다. 저 우주의 행성에서 지구의 어느 땅을 밟는다면 가장 먼저 이곳을 밟으리라.

 




느림

 

레에 도착해 우리는 숙소에서 하루를 온전히 쉬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거나 소요했다. 고산증 때문이다. 어지러웠고 메스꺼웠고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그렇기에 느릴 수밖에 없다. 방심하여 조금이라도 뛰면 곧바로 머리가 아프고 뒷목이 당기고 어지럽고 숨이 가빴다. 느리게 걷고 느리게 말하고 느리게 움직이기. 그것이 라다크에 적응하는 첫 번째 일이다. 세수를 할 때도 느릿하게 얼굴 한 번 문지르고 숨 한 번 쉬어야 한다. 몸을 씻을 때도 느릿하게 물 한 번 끼얹고 숨 한 번 크게 쉬고 비누칠 한 번 하고 숨 한 번 쉬어야 한다. 말도 천천히, 걷는 것도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것도 천천히. 천천히 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온몸으로 느꼈다. 마치 슬로우비디오를 찍는 것처럼. 생각해보면 내 말과 움직임이 그동안 얼마나 빨랐던 것일까. 빠르게 움직이는 몸의 감각들을 느린 감각으로 되돌려놓기. 그 느림의 시간들이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라다크에서는 이렇게 오래도록 생각할 수 있는 몸을 저절로 만들게 된다. 밤에는 옥상에 올라 오래도록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최초의 시간

 

판공초(Pangong Tso)는 해발 4,350미터에 위치한 가장 높은 소금호수이다. 판공초는 마법의 호수라는 뜻이다. 이 높은 곳에 염호가 있다는 사실은 믿기지 않는다. 판공초는 빙하기 시대 대륙의 판들이 솟아오르고 히말라야가 융기하면서 바닷물이 높은 곳에 고여 그대로 호수가 되었다. 소금호수이기 때문에 이곳에는 갈매기가 날아다닌다. 판공초는 인도와 티벳에 걸쳐져 130km나 뻗어 있는 어마하게 큰 호수이다. 우리가 본 곳은 그 일부분일 뿐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도 영화 <세 얼간이>의 끝부분에 판공초가 배경이 되기도 한다. 보통은 기대를 많이 하면 실망을 하기 마련인데, 판공초는 기대 이상이었다.





레에서 판공초로 가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세 번째로 높은 고개 창 라(Chang La)를 넘어야 한다. 창 라는 5,360미터이다. 레에서 점심 도시락을 싸들고 온종일 히말라야의 가장 높은 곳을 넘고 북쪽으로 달려야 닿는 곳이 판공초이다.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물은 얼음처럼 차갑고 공기는 더욱 희박해져 갔다. 빙하가 흘러내리는 물에 잠시 발을 담그고 저 먼 시간의 흔적을 생각하기도 했다.

판공초의 끝 언저리에 닿자 긴장했던 모든 마음이 허물어지고 에머랄드빛 호수의 색깔에 눈이 멀어 버렸다. 그저 마음을 풀어 놓고 누워 있고 싶었다. 저 호수 가까이에 가서 바람을 맘껏 쐬고 싶었다. 멍하니 넋 놓고 한참 앉아보고 싶은 곳. 내게는 그러한 장소가 또하나 생긴 것이다.





원하는 마음이 아무 것도 들지 않는 곳이었다. 혹시라도 소리 지르면 죄를 짓는 것 같은 곳이었다. 그립다는 말이 소용없는 곳이었으며 자꾸만 침묵 속으로 잦아들어가는 곳이었다. 나도 모르게 원시의 기억을 하나씩 헤집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각자 물과 바람과 시간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 시간이 무엇을 주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오래도록 그 시간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어둠이 깔리자 추위가 몰려들었다. 해발 4천 미터가 넘는 곳의 호수바람은 매서운 겨울바람보다 더 사나웠다. 8월의 여름이었지만 판공초의 밤은 겨울이었다. 준비해간 겨울점퍼를 입고 달을 보았고, 장작불을 피웠다. 이전의 기억은 자꾸만 스러져갔고 추위는 점점 더 몰려왔다. 어쩌면 이곳에서 만나 함께 불을 쬐고 있는 록산과 우리는 몇 천 년 전 이곳에서 만났을 지도 모른다.

 

 

동지들

 

생각하면 열흘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먼저 동행했던 여행 동지들. 어쩌다 저쩌다 이러다 저러다 만나게 되었다. 세상에 계획된 일은 늘 계획과는 무관하게 흘러가게 되며 우연한 인연이 동지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세상에 천재시인은 많지만 그중 천재시인이자 여행전문작가인 김선생. 혼자 떠나는 여행의 달인이며 외국인들의 이성적 로망인 신시인. 늘 감동할 줄 아는 화가이자 시적 감성이 넘쳐흐르는 송작가. 인도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믿기지 않았지만 이십대 꽃청춘이었던 현지 라다키 가이드 록산. 이들은 모두 지극했다. 김선생은 피곤에 쩐 몸을 일으켜 매일 짜이를 타주며 일행의 정신적 위로자가 되어주었다. 신시인은 말할 줄 모르는 동지를 위해 통역을 도맡아 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할애했다. 신시인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행 고아가 됐을지도 모른다. 송작가는 우리에게 꾸밈없는 웃음을 주었다. 순간순간 많이도 웃었다. 송작가는 카메라 없이 여행지를 모두 그림으로 담는 예술혼을 보여주었다. 록산은 잘 생기고 건실하고 순수한 청년이었다. 록산의 희망은 한국을 여행하는 것이라 했다. 꼭 그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기도한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나의 별칭은 ‘동바’였다. 동네바보라는 뜻이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실실 웃으며 때론 투정도 하며 따라다니는 동바로 살았다.





라다크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 라다키인들과 인도인들과 때때로 만난 서양인들. 곰파에서 만나 우리를 거처로까지 초대했던 노스님과 어린 승려들. 누브라계곡의 훈더르, 투르툭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에 대해 어떻다고 말할 처지는 아니다. 잠시 여행지에서 스쳤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시 스친 인연이지만 그들의 웃음과 표정과 냄새와 그 배경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

 

오래된 기억

 

니체는 알프스 산맥 깊숙이 있는 호숫가에서 영겁회귀의 사상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때 쓴 문장은 한 줄이었다. “사람과 시간의 저쪽 6천 피트”. 이 한 줄의 문장이 영원회귀의 철학을 낳았던 것이다. 시간은 어떤 풍경과 만나 철학으로 남고, 때로는 한 편의 시로 남는다.

모든 기억은 허전함만을 남긴다. 라다크에서의 열흘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 기억이 어떤 형상으로 남을까. 지금 여기에서 보면 그 형상이 다소 비현실적인 환상과도 같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들의 진실은 고이 박제될 것이다. 나는 어떤 한 줄의 문장을 쓰고 왔을까. 어떤 한 편의 시를 쓰고 왔을까. 아직 모르겠다. 앞으로 열흘 동안의 라다크를 좀 더 생각한 후에 단 한 줄의 문장이 나올 것이다. 좀 더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한 편의 시가 써질 지도 모르겠다.


_ <시인동네>, 2014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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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현대시작품상 특집 / 심사평

 

 

실재계의 목소리

 

원구식

 

 

 

지난해 한국시는 우리의 경제사정만큼이나 피폐하였다. 시인은 이미 호모사케르인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맑스가 세상에 나왔듯이, 오늘의 정보혁명은 또 다른 맑스의 출현을 예감케 한다. 한국이 세계에서 자살률이 1위인 까닭은 세계에서 정보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기술혁명은 고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절망을 넘어선 청년들의 실업은 구조화가 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실패한 시장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는 이미 오래 전에 버려졌다. 그런 와중에 나는 이번 심사에서 김안, 박진성, 이재훈, 이현승, 최금진 시인을 추천하였다. 모두 지친 삶을 꾸려가고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 한국 시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우리들의 전사이다. 어느 시인이 수상하여도 본상의 명예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번에 수상자로 선정된 이재훈 시인은 수도원에서 거리로 나온 실재계의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구도를 열망하는 나르치스의 언어와 세속에 빠진 골드문트의 언어가 혼재되어 있다. 이 두 목소리가 길항하며 부딪칠 때 이재훈의 시는 묘한 빛을 발한다. 그것은 마치 실재계가 상징계로 침입하는 것과 같다. 실재계는 언어에 의해 포착되지 않은 세계이다. 기표도 기의도 없는 삶의 영역, 그래서 시인은 “날 구원해주는 것은 언어가 없는 원시의 감각”(「나르치스」)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감각을 소유한 시인은 “전투력을 가진 말들이” 서로 왕 노릇을 하려고 뽐을 내는 길거리에서 “이 세계에 없는 언어를 찾아나”선다.(「거리의 왕 노릇」) 그리하여 그가 평원에서 “아무 언어도 없이 심연에 잠길” 때, “저 우주에 몸을 눕히고 별들을 덮을” 때(「평원의 밤」), 혼잡한 지하철에서 눈을 감고 퇴출한 명왕성으로 사라질 때, 상징계의 꼭두각시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문득 우리의 맨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수상을 축하한다.

 


제15회 현대시작품상 특집 / 심사평

 

 

영혼의 전인적 복기 의지

 

박주택

 

 

 

수상작을 선정한다는 것은 작품의 우수성뿐만 아니라 시인이 그간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작품을 써왔는지도 중요한 가치 평가로 작용한다. 상호연관성 속에서 관계 짓는 이 잣대는 이런 의미에서 전체적이고 통일적이다. 시가 시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전인적 삶으로부터 현시된다. 시가 역사이고 정신인 것은 시간과 함께 지속적으로 삶 속에 자신을 투여할 때 가능하다. 따라서 한 편의 시에는 미적 체험으로서의 선명한 자기 인식이 녹아 있다.

이번 수상자인 이재훈 시인은 그간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2005)와 <명왕성 되다>(2011)를 상재하며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해온 시인이다. 그의 시편들은 동시대의 현실을 가장 새로운 묵시의 형식으로 시화하면서, 동시에 난파된 젊음에 대한 우수와 자긍을 겹쳐놓은 독특한 현실 환기의 세계다라는 평가(유성호)와 함께, 유한한 것들을 무한에 대고자 하는 상상적 결단이라는 평가(조강석)를 받아왔다.

수상작인 「거리의 왕 노릇」은 속도와 비생명적 일상 속에서 전투와 명령만 있는 세상에 대해 신랄하게 풍자하며 통박한다. 일찍이 벤야민이 도시 산책자의 시선으로 생명을 억압하는 기제들에 대해 신령상실을 탄식한 것처럼 이재훈은 영혼과 말의 부재를 공간의 부재로 대체하며 배설과 오물의 길에 서성인다. 대지에 서 있지만 대지에서 유폐된 채 서로 왕 노릇하려고 생명과 죽음을 능가하려는 부끄러움이 없는 영혼들을 조롱하고 야유한다. 십자가 없는 어두움과 허공 속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조용한 잠이 없는 모퉁이 속에서 쭈글해진 어머니 배에 귀를 갖다 대며(「사수자리」) 신의 안부에 고통스럽게 침묵하는 이교도처럼(「빌딩나무 숲」) 처형의 시간을 고통스럽게 바라본다.(「연옥의 산」)

이재훈의 시는 그간 도시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영혼 없는 형식의 세계를 개성적인 시각으로 묘파해왔다. 일관되게 자신의 시적 세계를 밀고 나가는 그의 추동력은 존재의 시원을 상기시키며 성소로서의 낙원 의지를 복기해 왔다. 이번 수상으로 그의 시가 우리시의 부족한 부면을 더욱 광활하게 개척하기를 고대하며 현대시 작품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제15회 현대시작품상 특집 / 심사평

 

 

존재론적 시원始原을 추구하는 순례자의 언어

 

오형엽

 

 

 

나는 예심을 거쳐 올라온 본심 대상 시인들 중에서 1차로 김중일, 박진성, 심보선, 윤의섭, 이재훈 시인을 추천했다. 1차 투표 결과 이재훈 시인이 3표, 박진성, 이현승, 최금진 시인이 각각 2표를 얻었다. 심사위원들은 이 네 시인이 작년 한 해 동안 발표한 시들을 놓고 작품성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했다. 다각도의 논의가 진행된 후 심사위원들은 이재훈 시인을 수상자로 결정하는 데 합의했다. 이재훈의 시는 세속도시의 일상을 지배하는 자본과 마케팅 문화의 힘에 맞서 존재론적 시원始原을 추구하면서 천상의 언어를 회복하려 한다. 수상작인 「거리의 왕 노릇」은 최근 이재훈 시의 특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문명의 한 구석에 제 이름을 새기려는 영혼들”과 “서로 왕 노릇하려고/생명을 능가하고, 죽음을 능가하는 이웃들”이 발설하는 “왕의 언어”, “법의 언어”, “왕을 심판하는 언어”에 저항하는 시인의 언어는 “이 세계에 없던 언어”이다. “문득 신들이 사는 세계를 구경하고 싶었”다는 진술이 드러내듯, 이재훈의 최근 시는 신학과 문학이 만나는 사제적 언술로 우리의 현실을 질타한다. 이처럼 이재훈의 시는 신학적 상상력에 근거하지만, “아름다운 운율은 규칙이 아니라/ 당신의 입술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처럼 거리의 소음과 노동과 사랑을 시적 시선에서 놓치지 않는다. 군중과 농부와 회사원으로 구성되는 일상의 현실을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체험에 공감하고 동참함으로써 이들의 목소리를 한데 모아 시적 화자의 목소리를 구성한다. 그래서 이재훈 시의 화자가 드러내는 목소리는 군중과 농부와 회사원의 언어를 종합하고 그것을 순례자의 언어로 승화시켜 얻어진 것이다. 우리 시단에서 무의식적 욕망의 언어 및 사회적 윤리의 언어와 더불어 존재론적 시원을 추구하는 순례자의 언어를 만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재훈 시인의 현대시작품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제15회 현대시작품상 특집 / 심사평

 

 

마음의 한 세기를 다루는 시인

 

조강석

 

 

 

2014년 현대시작품상을 이재훈 시인이 수상하는 것에는 문학 내적인 필연과 문학 외적인 우연이 결부되어 있다. 부차적인 우연에 대해서 가장 간명한 형식으로 먼저 얘기하는 게 좋겠다. 현대시작품상은 지난 한 해 동안 쓰인 가장 좋은 작품에 주어진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 중에서 이재훈의 작품이 마음을 가장 오래 붙잡았다. 그리고 이재훈 시인은 우연히도 시상 주체와 관련된 불필요하고 근거 없는 오해와 결부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다. 작품의 수월성에 대한 고민은 짧았지만 혹시라도 수월성과 우연의 성근 인과관계를 유독 필연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을까봐 고민하는 시간이 몇 배 길었다. 그러나 필연은 필연이고 우연은 우연이다.

이제 필연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이 글을 쓰는 이나 읽는 이나 한 시대의 얼굴을 오래 지켜보고 있다. 하나의 시대가 어떻게 자신을 구조적으로 체계화하며 그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감산하는지를 제법 오래 우리는 지켜보고 있다. 자본이 국경 없는 제국의 섭생을 관장하고 다수결이 소수에 의해 입안된 구체적 이익을 출납하고 덧셈 뺄셈처럼 명료해 보이는 외설적 욕망과 전횡도 모두 각자도생의 이전투구처럼 비치게 하는 나팔수가 24시간 활약하는 시대에 출근하고 카드 긁고 퇴근하고 정산하는 삶을 부정할 수 없는 우리는, 생활하며, 그러나, 마음의 한 세기도 경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훈은 바로 그 마음의 한 세기가 어떻게 운용되는지, 통치와 경영과 합리화와 욕망의 구조 속에서 그래도 하루를 살아야 하는 우리가 마음의 한 세기를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를 가장 진솔하게 보여주는 작품을 쓰고 있다. 시가 내감의 외화만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사유의 귀결이기도 하다면 마음의 한 세기를 다루는 이 시인의 운산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의 표상에 대한 내밀한 사유와 적실한 이해로부터 비로소 우리는 폐기할 것들의 숙주로 살고 있는 이의 곤혹스러운 윤리가 모든 끝의 시작임을 배운다. 드물고 귀한 시선을 이제 우리시는 지녔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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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다시 별들의 방언을 찾아

 

 

 

감사합니다. 그저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말밖에 떠오르질 않습니다. 늦은 밤. 홀로 창밖을 보다가 문득 별을 발견했습니다. 예전 서울에 올라와 옥탑방에 살 때는 별이 참 많았습니다. 지금이라고 그 별이 줄어들지는 않았겠지요. 당시엔 자주 하늘을 올려다 볼 때였습니다. 문학을 하고 있고, 시를 쓰고 있는 제 자신이 안쓰럽기도 하고 간혹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무릎 꿇고 살더라도 시를 쓸 수만 있다면 고귀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니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변해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혹시 시인의 자존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교만하지는 않았는지, 시를 제 목숨보다 앞에 놓고 사는 시인들의 작품을 함부로 폄훼하지는 않았는지 곱씹어 보았습니다.

면구쩍어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이 세계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는 별이 제게 자꾸 말을 거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별의 소식을 잘 받아 적었느냐고. 많이 바쁘지 않았느냐고. 시가 네게 어떤 의미가 되었느냐고.

시는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언이었습니다. 훈육된 제 언어는 너무 짧고 황망하여 이리저리 변죽만 울리다가 이내 사그라들기만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제가 찾은 유일한 언어였습니다. 운명적으로 만난 제 존재와 저를 둘러싼 환각의 관계들을 밤새도록 되작이며 중얼거려도 헛헛하지 않았습니다. 내게도 예술적 파토스가 있다면 이 방언을 잊지 않고 목이 쉬도록 불렀다는 것이겠지요. 신과 마주하는 기도와 시와 마주하는 방언 사이에서 늘 헤매었던 것 같습니다. 때때로 그 자발적인 영혼의 방랑이 변덕을 많이 부렸습니다. 지치기도 하고 도망치고 싶기도 했습니다. 아마 이 상은 그런 제 마음을 다시 붙잡아 놓으려는 신호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가볍고 산뜻하게 시를 쓰고 싶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칭얼대기도 싫고 노인네처럼 훈계하기도 싫습니다. 늘 새로운 것만 요구되는 시대에 저 먼 시간의 강을 헤엄치려 합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것들을 탐하며 이 세계 이전의 존재들을 그리워하겠습니다. 최초의 말을 만나기 위해 방황하겠습니다.

제 육체는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 영혼 또한 영원히 완성되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전언으로 삼고 있는 헤세의 말처럼 “너는 완벽한 교훈을 동경하지 말고 너 자신의 완성을 동경하라”는 말을 가슴에 얹을 것입니다.

어짊으로 이 자리를 마련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이 큰 빚을 언제 갚을까요. 이제 별의 신호에 따라 다시 외계의 방언을 받으러 가야겠습니다.

 

_ <현대시>, 2014년 5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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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 에세이

 

 

 

내가 꾼 꿈은 사실 꿈이 아니었네

 

 

 

이재훈

 

 

 

 

 

 

범꿈

 

다들 믿지 못하겠지만 내 태몽은 호랑이 꿈이었다. 어머니는 가끔씩 고개를 갸우뚱거리시며 지금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내 태몽을 얘기하셨다. 정말 생생하게 꾸었어. 지금도 호랑이가 내 앞에 떡 하고 서 있는 것 같아. 바늘처럼 꼿꼿하게 선 황금빛 털. 온 땅이 울리는 듯한 숨소리. 아직도 생생해. 꿈속의 어머니는 밭을 매고 계셨다. 신혼의 새댁이라 알록달록하게 수놓은 화려한 한복을 입고 계셨다. 그런데 갑자기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며 내려오더니 어머니 앞에 떡 하고 나타났다. 어머니는 놀라서 허겁지겁 도망을 쳤지만 금세 호랑이는 어머니 얼굴 앞에 다시 섰다. 그러곤 어머니 치맛자락을 물고는 놔주지 않는 것이다. 호랑이는 고깔밑까지 얼굴을 파묻고 어머니를 떠나지 않았다. 잠이 깬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태몽인 걸 아셨다. 어머니는 그전에 유산한 경험이 있었다. 이번에는 아기가 뱃속에서 떨어지지 않고 잘 들어서겠구나고 생각하셨다.

나를 잉태하고 실제로 어머니는 호랑이를 만났다고 했다. 믿기 힘든 얘기다. 하지만 어머니는 정말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부재중이셨다. 아버지께서 확신하신 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잠시 가족을 떠나 있었다. 강원도 산골은 긴 겨울밤을 홀로 보내기엔 너무 적막한 공간이었다. 어머니는 뜨개질을 하시다가 까무룩 잠이 드셨을 것이다. 자정 무렵.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방문 앞에서 멈추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문을 꼭 잠갔다. 두려웠다. 만삭의 배를 한 번 더 쓸어보고는 두 손으로 꼭 안으셨다. 날이 이슥하도록 호랑이는 집을 뱅뱅 돌았다. 온 대지가 밤새 울렸다. 그때 어머니는 보았다. 방문 틈으로 숨죽여 밖을 살펴보았을 때. 호랑이의 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무섭게 빛났다. 더 오래 볼 수 없어서 이내 방문을 닫고 밤새 호랑이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해가 밝았다. 호랑이는 가버렸다. 집 주위엔 호랑이가 남긴 발자국이 가득했다. 발자국 하나가 사람 얼굴 만 하다고 했다.

다소 과장이 섞인 이야기겠지만 어머니는 겨울밤에 만났던 그 짐승이 호랑이라고 굳게 믿고 계셨다. 담이 없는 산 밑의 외딴 시골집에는 짐승들이 자주 출몰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호랑이가 가끔씩 출몰한다는 소문도 수근거렸으리라. 1972년의 일이다.

이것은 어떤 사건일까. 운명이라고 하기엔 호랑이가 내 형상이나 기질과 맞지 않고, 우연이라고 하기엔 마치 신탁처럼 너무 생생하다.

나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주문리(일명 모운동)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하동면이 김삿갓면으로 개명되었다. 내 태어난 곳 근처에 김삿갓의 무덤이 있다. 지명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모운동’은 구름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이다. ‘모운동’은 구름처럼 떠돌며 살다간 김삿갓(난고 김병연)을 이곳으로 다시 오게 했다. 한때는 산속의 석탄을 캐러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던 곳이다. 지금은 노인들만 남아 있는 고요한 마을이 되었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운명인 걸까. 나 또한 이십대까지 구름처럼 전국을 떠돌며 살았고, 김삿갓처럼 시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김삿갓의 혼이 담긴 곳과 가장 가까이에서 태어난 시인인 셈이다.

 

 

겨울

 

내 유년의 겨울은 유독 길었다. 강원도를 두루 다니며 살았던 덕이다. 나는 겨울에 태어난 겨울 아이다. 내 감각이 가장 예민하게 기억하는 계절 또한 겨울이다. 찬바람이 불어야 비로소 나는 모든 것들이 예민하게 감각된다. 찬바람이 콧속으로 들어와 온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느낌이 들 때야 비로소 나를 느낀다. 늦가을부터 시작되는 찬기와의 만남은 날 설레게 한다.

강원도의 산골은 일 년의 반이 겨울이나 다름없다. 여름이 지나면 곧바로 김장이 시작된다. 그리곤 긴 겨울이 시작된다. 어느 겨울엔 자고 일어나니 온 세계가 전부 눈으로 덮인 날도 있었다. 방문을 여니 흰 눈이 너무 눈부셔 눈을 뜰 수 없었다. 내가 디딤돌을 밟고 올라타야 오를 수 있는 마루에까지 눈은 차올라 있었다. 어느 곳이 마루이고 마당이고 대문인지, 어느 곳이 길이고 도랑이고 담벼락인지 모를 정도로 온 세상이 눈으로 가득했다. 초등학교 2학년쯤이었다. 자동으로 방학이 되어 그날부터 학교엔 가지 못했다.

군인들은 그날부터 마을로 모두 나와 눈을 치웠다. 우리 꼬맹이들은 터널을 만들고 이글루를 만들어 놀았다. 손과 발에 동상이 걸리도록 놀았다. 그때 우리들은 누구나 동상 한번쯤은 걸렸다. 저녁나절엔 친구의 아버지가 우리집에 고기를 가져다 주셨다. 친구의 아버지는 육군 중사였다. 그 고기는 오늘 잡은 멧돼지라고 했다. 나는 멧돼지 고기를 그날 처음 먹어 보았다. 아, 멧돼지, 토끼, 꿩, 사슴, 개구리, 그리고 온갖 민물고기 등을 그때 다 먹었었다. 아쉽게도 그 맛을 지금 다 기억하지 못한다.

잊지 못할 유년의 죽음이 있었다. 당시 내가 사랑했던 강아지의 죽음이다. 강아지의 이름은 물론 메리였다. 강아지라면 누구나 이름이 메리였던 시절이었다. 메리는 한겨울에 얼어 죽었다. 그것이 병인지 동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에 일어나 메리집으로 가보니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렇게 추운 날 내가 부엌으로 옮겨놨어야 했는데 하는 심한 죄책감이 일었다.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한겨울에 내복만 입고 개집 주위를 한참이나 서성였다. 나중 아버지와 함께 파묻어 주었다. 우리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강아지의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강아지의 주검은 옷으로 잘 감싸서 땅을 파고 묻었다. 작은 봉분도 만들었고 그 위에 십자가도 세워주었다. 이 절차는 모두 내가 집행했다. 아버지는 묵묵히 지켜보고만 계셨다. 내가 다른 영혼을 위해 가장 간절히 기도할 수 있다는 걸 아마 그때 깨닫지 않았을까. 이별의 아픔은 다른 사랑으로 회복되듯이 곧 나는 다른 강아지를 들여 그 아픔을 회복하였다. 강아지와 함께 골목에서 골목으로 마을 어귀에서부터 강가에 이르기까지 뛰어다니면 행복했다.

 

 

편식

 

언제부터인가 편식이 시작되었다. 우유도 맛이 없었고 고기도, 멸치도, 콩도, 달걀도. 세상에 어린이들에게 몸에 좋다는 음식은 모두 맛이 없었다. 그때 맛있었던 음식은 라면과 김 정도. 우유나 삶은 달걀 흰자를 먹다 토하기도 했다. 돼지고기는 입안에 넣자마자 몰래 뱉어내었다. 우유와 달걀에 대한 거부감은 거의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이어졌다. 밥도 맛이 없어서 라면 스프나 설탕에 비벼먹기도 했다. 어떤 날은 밥을 남기면 혼날까봐 엄마 몰래 땅속에 밥을 파묻기도 했다.

친구들은 냇가에서 피라미를 잡아 그 자리에서 배를 따고 씹어 먹었다. 어른들 흉내를 내느라 된장을 가져와 피라미와 마늘쫑을 함께 찍어 먹기도 했다. 나도 따라 했다. 아무리 맛이 없어도 친구들이 하는 건 따라 했다. 동산에 가서 오디를 따먹기도 했다. 혓바닥과 이빨이 새까매지도록 오디를 따먹고 주전자에 한 가득씩 담아 왔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어린 시절 먹었던 대부분은 가장 천연의 자연식인 것이다. 아직 오염되지 않은 강원도 산골에서 냇물과 공기와 자연의 모든 것들을 먹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편식 때문에 키가 크지 않고 점점 말라갔다.

 

 

편지

 

이사를 자주 다녔다. 전학을 가면 낯선 환경과 친구들과 적응을 해야 했다. 친구들이 못살게 굴기도 하고 놀리기도 했다. 나는 얼굴이 하얀 편이어서 대부분의 친구들이 도시에서 전학을 온 것으로 오해했다. 전학 오는 학생이 흔치 않은 때였다. 한 학년에 한 반이거나 두 반이 전부였던 학교에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전학생을 구경하러 왔다. 전학 선물로 받아온 내 자석필통이나 샤프펜슬, 공책을 구경하기도 했다. 엄마가 입혀주신 새 옷에 흙을 칠하거나 운동화를 밟기도 했다.

전학을 자주 다니니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나는 그곳의 친구들과는 다르고 영원히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이방인이라는 경계 위에서 위태롭게 관계를 유지하다가 마음에 맞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이상하게 그런 복은 있는 것이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보지는 못했지만 늘 친구들은 내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친구들이 생겨서 친해지고 서로 손을 맞잡으며 어깨를 부딪칠 무렵 또 전학을 가야 했다.

편지를 썼다. 이곳에 오면 저곳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를 쓰며 그리워하는 것이 취미가 되어 버렸다. 편지쓰기는 고등학교 때까지 이어졌다. 종이에도 쓰고, 화장지에도 쓰고, 잘 말린 은행잎에도 썼다. 사진도 보내고, 낙엽도 보내고, 그림도 그려 보내고,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도 보냈다. 어쩌면 내 문학의 출발은 편지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대학 때까지 주고받았던 그 수많던 편지들은 나중 어머니에 의해 불에 태워져 없어진다. 그 사실을 나중에 안 나는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며칠 동안 잠이 안 올 정도였다.

 

 

서재

 

초등학교때 나는 <새벗>이라는 잡지를 정기구독 했다. 아버지는 월부 책장사들에게 최우수 고객이었다. 아버지는 책에서만큼은 금방 현혹되어 신청서에 사인을 하셨다. 어머니는 무척 스트레스를 받으셨다. 빠듯한 살림 때문에 월부책을 더 이상 들여 놓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새벗>보다는 <어깨동무>나 <새소년>을 더 좋아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어깨동무>나 <새소년>에는 만화가 있었으니까. 송년호나 신년호 잡지는 그야말로 놓칠 수 없었다. 만화만 있는 특별호가 따로 나왔으며 각종 선물이 즐비했다. 내 생일이나 성탄절 선물은 물론 <어깨동무>나 <새소년>이었다. <어깨동무>의 발행인이 육영수 여사였으며 육영수가 죽자 박근혜와 육영재단이 발행인이었다는 것은 아주 나중에 안 사실이었다.

아버지의 서재에는 신학책들과 각종 월부책들로 가득했다. 나는 가끔씩 그 서재에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퀴퀴한 곰팡내가 나는 시골집 한 켠의 서재. 이 서재만 없었다면 이 방은 내 방이 되거나 우리 형제들의 방이 되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의미도 내용도 모르는 서적들을 암호 해독하듯 읽었다. 어린이 동화전집은 읽지 않았다. 재미가 없었다. 기억나는 책들로는 삼성출판사간 한국현대문학전집, 까뮈 문학전집, 보들레르 시집 등이었다. 70권짜리 세로쓰기판 한국현대문학전집은 내가 한동안 가지고 있다가 최근 동생네 집으로 분양되었다.

 

 

데미안

 

중학교 때까지 교회와 집과 학교가 내 세계의 전부였다. 집에서는 비교적 말 잘 듣는 장남이었고 교회에서는 신실한 배냇교인이었다. 학교에서도 말썽 안 부리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또래보다 조숙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 학생이기도 했다. 하지만 교회와 집 이외의 다른 세계를 경험한 친구들의 사정에 둔감했으며, 그곳의 일들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사춘기가 늦게 찾아 왔다. 남들보다 늦은 사춘기 때문에 당황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실존에 대한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신앙에 대한 회의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내 인식을 뒤덮었다. 태어나서 내 스스로 선택한 길은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의 아들로 태어나 누군가의 아들로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길을 찾고 싶었다.

부모님은 다시 먼 곳으로의 이주를 결정하셨다. 이번에는 충청도였다. 나는 혼자 남겠다고 선언하듯 얘기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나는 혼자 남게 되었다. 남아 있는 고등학교 생활 동안 자취를 했다. 그때부터 내 인생은 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학교와 교회를 벗어난 경계 바깥의 학생으로 조금씩 변해갔다. 이탈된 자가 되어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고 산 자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 세상엔 피 묻은 상처를 어쩌지 못해 들고 다니는 이탈자들과 나처럼 스스로 선택한 이탈자들이 많았다. 개중엔 간혹 건강한 이탈자들도 있었다. 나는 다른 세계의 이곳저곳을 엿보았고, 때론 함께 살았다. 함께 산다는 것의 즐거움과 어려움을 느꼈으며, 성숙하지 못한 다짐의 결말을 많이 맛보았다.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너무 놀랐다. 소설 속의 싱클레어가 바로 나였으니까. 그리고 머지않아 소설 속의 데미안도 나였으니까.

선언하듯 대학을 포기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친구들은 대학으로, 업소로, 재수학원으로 도피하듯 들어갔다. 그때 내 눈에는 명문대에 입학한 친구들도 꼭 도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갖은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마음이 동하면 그날로 처음 가보는 남쪽행 기차를 탔다. 사람살이의 모든 게 우스웠다. 그런 시절이었다. 그만큼 꽤나 지쳐 있었다.

나를 위로한 것은 예상치 않게도 문학이었다. 갑자기 내 삶에 문학이 확 끼어들었다. 일이 없는 날은 용산도서관을 매일 들락거렸다. 주로 소설과 사상서, 문예지를 읽었다. 헤르만 헤세와 프란츠 카프카를 신봉하게 되었다. 앙드레 지드는 취향은 아니었지만 매력적이었고, 보들레르나 랭보를 읽으며 미친 인간들의 미학을 엿보았다. 손창섭과 이승우에 감복했다. 이승우는 지금도 내가 최고로 치는 한국작가이다. 그 외 셀 수 없이 많은 작가들, 시인들, 사상가들과 만났다. 만났다 헤어지고, 잊히다 다시 만났다. 그때부터 돈이 생기면 각 출판사의 시인선을 모으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시인선의 시집들을 구하게 되었다. 순례하듯 헌책방을 다니며 모았고, 읽었다.

 

 

시인

 

부모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뒤늦은 나이에 대학을 가게 되었다. 간신히 턱걸이로 부모님이 계시는 지방에 신설된 대학에 입학했다. 국문학을 전공했다. 1학년 때에는 적응을 못해 학교에 결석하다시피 했다. 학교보다 서울을 더 자주 들락거렸다. 다행히 교양과목이 많아 학번 동기들이 대리출석을 해주었다. 새로 생긴 대학이라 교수님들의 열정이 대단했다. 1학년을 마치고 도피하듯 군대에 방위병으로 입대했다.

입소하기 이틀 전, 소꿉친구의 부고가 날라왔다. 예기치 않은 일이었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자동차가 눈길에 미끄러진 교통사고였다. 그 친구는 우리들이 모두 위로받고자 하는 만인의 여자친구였다. 힘들 때 늘 누나처럼 위로하였으며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다. 도저히 친구를 떠나보낼 수 없었다. 그 마음을 고스란히 안은 채 군대에 입소했다.

군대 복무를 마친 후 복학했다. 누구나 그렇듯 나의 짧은 군대이야기는 장편소설로 써도 모자랄 것이므로 넘어가기로 한다.

뒤늦게 열병을 앓듯 시를 썼다. 다행히 문학이 전공이었으므로 재미있었다. <시심문학회>의 회장이 되었다. 여러 곳을 오가며 시 쓰는 티를 냈고, 시 앞에서만큼은 수줍은 성격이 열정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각종 신춘문예와 문예지에 응모를 했다. 어쩌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시밖에 없었던 시절. 연애하면서 당신은 시가 좋아요? 내가 좋아요? 라는 질문을 받던 시절.

운이 좋았을 것이다. 대학 4학년이 시작되기 전 겨울방학. <현대시>에서 당선 통보가 날라 왔다. 친구의 자취방에서 며칠을 묵었던 탓에 내게 연락이 안 되었다고 한다. 잡지사 편집자는 하소연을 했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었느냐고. 죄송합니다. 삐삐의 배터리가 다 달아서요. 당시 내 무선호출기 번호는 012-405-4329였다. 당선작은 「수선화」 외 4편. 다들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시인이 되었다. 이건 허구가 아니다.

 

 

시의 삶

 

대학 졸업 후 다시 서울로 상경하여 대학원에 입학했다. 시의 삶을 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더 하기로 했다. 또다시 고달픈 사람살이의 연속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견딜 만했다. 시의 삶이며 시인의 삶이니까.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다들 아시는 바와 같다. 내 연보에 대충 나오는 얘기들이니까. 시와 함께 하는 고통스러운 행복을 지금까지도 누리고 있다.


_ <현대시>, 2014년 5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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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1일.

후배인 김산 시인의 시창작반에서 특강을 했다.

구일동에 위치한 아담한 도서관이었다.

북카페 <곁애>를 함께 운영하고 있었는데 커피향이 좋았다.

시의 열정을 온몸으로 받아 왔다.

시와 동시의 언저리에 대한 여러 얘기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비행기를 아주 가까이에서 자주 오래 본 여름 밤이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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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품고 있는 도시 속의 신성함 속으로 말(言)을 타고 달려본다

 

 

이재훈, 김성규

 

 

 

 

 

건기(乾期)의 새. 시집 속에서 이재훈 시인의 모습을 찾아본다면 이것이 적당하지 않을까. 자신의 말보다 타인의 말을 들어주는 시인. 시인의 모습은 자신의 시와 닮아있다. 시에 행간의 여백이 느껴지듯 타인을 자신의 여백 속으로 깃들게 만드는 시인. 북가좌동에서 가끔 이재훈 시인을 만난다. 내가 사는 동네에 이재훈 시인의 직장이 있다 보니 같이 맥주를 마시고 시 이야기를 나눈다. 이재훈 시인이 주로 나의 고민을 들어주는 편인데 생각해보니 내가 시인의 고민을 들어준 적이 없다. 주로 후배인 내가 신세한탄을 하거나 물어보는 것이 많으니 이 빚을 언제 갚을까. 등단 15년이 가까워오지만 한결같은 모습, “햇살이 없었다면/ 저물녘이 없었다면/ 늦은 밤 빗소리와/ 시를 긁적이는 펜 소리가 없었다면(자서 부분)” 우주에서 우리는 만나지 못했으리라. 평소 궁금했던 시에 대해, 시인이 품고 있는 도시 속의 신성함 속으로 말(言)을 타고 달려본다.

 

김성규 : 이재훈 선생님 안녕하세요. 평소에 가끔 만나 뵈었는데 이런 계기로 마주 앉으니 좀 쑥스럽습니다. 겨울인데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저는 감기가 심하게 걸려 며칠을 고생했습니다.

 

이재훈 : 예. 반가워요. 김성규 시인과는 가까운 사이인데 이렇게 공적으로 마주 앉는 건 처음인 듯 싶네요. 저도 이번 겨울을 병치레로 나고 있어요. 감기를 달고 있네요.

 

김성규 : 선생님 시집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신화성, 시간성, 절대성 등입니다. 일단 약력을 보면 1972년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 1998년 <현대시>로 등단하여,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2005), <명왕성 되다>(2011)를 출간하셨습니다. 시집으로 보면 등단 이후 많은 시간 차이를 두고 첫 시집을 냈고 이후에도 6년이 지나서 두 번째 시집을 냈습니다. 요즘같이 빨리 바뀌는 세상에서 긴 시간을 두고 출간하신 이유나 그 동안의 행보가 궁금합니다.

 

이재훈 : 제가 작품 발표할 때에는 그렇지 않은데 시집을 묶을 때는 자기검열이 엄청 심해지더라구요. 시를 넣고 빼고 하느라 많은 시간을 소비했구요. 결국 첫 시집은 44편만 남게 되었죠. 또 제가 첫 시집을 출간할 당시에는 지금과 상황이 달라서 시집 출간이 쉽지 않았습니다. 출판사를 결정하는데 또 시간이 걸려서 여러모로 늦어지게 되었어요. 두 번째 시집은 박사논문과 평론집, 대담집 등의 출간으로 생각보다 늦어지게 된 거구요. 장담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평생 시를 쓰지 않겠습니까. 긴 안목으로 보면 시집의 권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몇 십 년 쓴 후에는 출간한 시집이 10권이건 5권이건 크게 중요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이런 마음 때문에 출간이 더뎌지게 된 것이기도 하죠. 의미있는 시집을 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김성규 : 첫 번째 시집보다 두 번째 시집은 보다 실재적 세계에 많이 접근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시간이 많이 지난 질문인지는 모르지만 첫 시집에 비해 두 번째 시집을 출간하실 때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무엇인지요.

 

이재훈 : 첫 시집 이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어요. 하늘에서 내려와라. 우주와 하늘에서 신들과만 놀고 있다고. 땅에 내려와 인간들하고도 놀자고. 그런 말들에 영향 받았을 거예요. 두 번째 시집은 내 실존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렸다고 할까요.

 

김성규 : 시를 쓰고 그것에 다가가려는 시간이 짧은 순간 완성될 수 없듯이 선생님 시는 줄곧 성배, 순례라는 시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신이나 절대에 다가가고자 하는 열망이 많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다신교적인 방식이 많이 등장합니다. 선생님 시에서 종교나 신화적 사고가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재훈 : 아마도 유년시절부터 내면화된 종교적 경험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엄격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이죠. 하지만 사춘기 때부터 종교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어요. 전통이 아닌 비전통의 교리 등을 기웃거렸죠. 결국엔 돌아 돌아왔지만 그런 내면적 경험들이 시에 드러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종교라는 것을 의식하고 쓴 적이 없어요. 습관화된 제 언어 속에서 그런 것들이 드러나는 건데요. 그렇기에 제 시는 영성이란 말이 더 어울리는 말인 것 같아요. 아무튼 신화와 영성 등의 주제는 계속해서 제가 탐구하고 싶은 주제입니다.

 

 

 

김성규 : 첫 시집 첫 번째 시가 「사수자리」라는 시입니다. 마지막 시는 「결별의 노래」이구요. 두 시 모두에서 빛이라는 상징이 드러나는데 이 빛(별)으로 가기 위해서는 “쭈글쭈글해진 어머니의 배”, 이마 위에 “주름이 깊어 눈이 감기고”라는 이미지가 나옵니다. 마치 성스러운 곳으로 가기 위한 통과제의처럼 보입니다. 이 둘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이재훈 : 「사수자리」는 존재의 시원에 관해 혼몽하는 시이고, 「결별의 노래」는 시원에서 다른 물음으로 이동하려는 다짐의 시라고 말할까요. 통과제의는 맞는데 성스러운 곳으로 갈 지는 모르겠어요. 오히려 더 속악한 곳으로 가지 않을까요? 하하.

 

김성규 : 두 번째 시집 <명왕성 되다>도 크게 보면 별자리의 하나인데 이 시집에서는 「안드로메다 바이러스」같은 경우는 외계인의 침입으로 인한 지구인들의 종말이라는 SF적이라고 해야할까요 영화적이기도 하고 성경의 종말론적 버전도 보입니다.

 

이재훈 : 맞아요. 굳이 성경을 얘기하지 않더라도 이제는 보편화된 상상이죠. 영화에서도 많이 등장하죠. 아마 종말론의 상상은 앞으로 영원히 반복될 테마겠죠.

 

김성규 : 「매일 출근하는 폐인」에서 “출근길 지하철 입구에 눈먼 소녀가 앉아 있다./ 소녀의 귀에서 누렇게 익은 곡식 낱알을/ 새가 쪼아 먹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굉장히 선명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인데요 이런 상징들이 생활인으로써의 시인, 현실에 발 딛고 있는 시인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재훈 : 상징은 일상이 내면화되어 나온다고 생각해요. 실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그걸 보지 않으려는 것뿐이죠. 왜냐면 끔찍하니까요. 지하철 입구의 소녀 이미지도 상상이 덧붙여지긴 했습니다만 실제 그렇게 느낀 이미지에요.

 

김성규 : 「겨울 숲」이라는 시는 <형의 이해하기 위하여>라는 부제가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시인들에게도 그렇지만 창작이라는 허망한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립니다. 그런데 “묘비도 없이 바람에 존재를 실어 버리는 게/ 가장 행복한 결말이라고” “신문에도 남지 않았던 그의 결말은/ 그가 진정 원하던 것이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마지막 구절이 가슴 아프게 읽혔습니다. 사적인 이야기 일수도 있지만 이 시에 얽힌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이재훈 : 시의 실제 모델인 형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십대 초반에 병으로 돌아가셨죠. 방황하던 제 친구들의 정신적 우상이었어요. 병을 앓다가 독학으로 공부해 고려대 철학과에 입학했는데 졸업도 못하고 돌아가셨죠. 그 후 십년이 훨씬 넘어 그 형에 대한 시가 나오게 된 거에요. 시 쓰는 사람들처럼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는 욕망이 강한 이들은 없을 겁니다. 이 땅에 무분별하게 널려 있는 시비를 봐도 그렇죠. 이름은 그렇게 남기는 게 아니란 것을 그 형이 알려주었다고 할까요. 단 한 사람의 가슴에라도 그 이름이 새겨진다면 정말 훌륭한 거죠.

 

 

 

김성규 : 「침묵의 세계」에서 보면 선생님 태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호랑이가 어머니 치맛자락을 물었다는 것인데, 일찍 포기하는 법을 배웠다는 구절도 있습니다. 뒷 구절을 보면 선생님이 평소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려집니다. 대부분 시 쓰는 선후배들이 선생님을 굉장히 포용적인 성격이고 베푸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얼핏 보면 태몽에 호랑이가 나온다는 것은 굉장히 도전적 인간형이라는 것인데, 포기하는 법을 배운 시인이 되신 이유나 어릴 적 어머니에 대한 기억 같은 것을 듣고 싶습니다.

 

이재훈 : 태몽은 실제 어머니에게서 들은 것이고요. 아마 실제 성격과 달리 내면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불덩어리를 끌어안고 사는 거 같아요. 그걸 본 사람들은 몇 없죠. 아마 그래서 시인이 되었겠죠.

 

김성규 : 다른 시인들과 달리 선생님 시에서는 유년에 대한 기억이나 현실에 밀착한 시들이 많지 않아 보입니다. 시속에서도 그런 경험들이 얼핏얼핏 드러나고 전면적인 모습은 많이 감추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선생님 시의 방법론 중에 하나일 수도 있겠지만 독자로서 많이 궁금합니다. 유년시절이나 성장기는 「서태지 세대」에서 잠깐 나오는데 말씀해주세요.

 

이재훈 : 파란만장했죠. 어릴 때는 데미안에 나오는 싱클레어와 같은 삶이었다가 머리가 좀 굵어지고 나서는 데미안처럼 성(聖)과 속(俗)을 이리저리 방황했다고 할까요. 하지만 삶의 경험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데 대한 부끄러움이 있어요. 천성적인 성향 같은데 많이 망설이는 것 같아요. 유년시절에 이사를 많이 다녔습니다. 그 시절에 대해 쓴 시들도 많이 있는데 「영월에서 온 편지」라는 시도 있고 다른 시편들도 많지만 시집에는 일부러 넣지 않았습니다.

 

김성규 : 「물에 대한 사소한 변론」이나 「대황하」 연작에서는 물이미지에 대해 많이 나옵니다. 물이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고 폭력적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특히 황하 연작은 무려 11편이나 나옵니다. 연작시가 거대한 서사가 없다면 쓰기가 힘들고 또 「대황하」는 시가 굉장히 역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방법론적인 특성을 보면 어조도 다른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재훈 : 물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했고, 그 이미지가 마치 돌풍처럼 제게 왔어요. 누런 황톳물이 굽이치며 제 속으로 출렁였죠. 원래 11편보다 더 많이 썼는데 선별한 거죠. 같은 이미지의 연작시이지만 모두 다른 방식으로 시가 나왔기 때문에 어조도 다르게 나온 걸 거에요.

 

김성규 : 다른 시 「돌」도 물질적 이미지인데요. 이 시를 보면 돌과 달의 유사성에서 시작해 돌이 어머니 같기도 하고 피와 온기를 가진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집니다. 전통 신앙에서 보여지는 임신과 출산에 관여하는 신적 존재, 애니미즘 적이기도 하고, 선생님의 기존 시에서 추구했던 신성성과도 연관돼 보입니다. 마지막에 돌에 머리를 숙이는 장면에서는 어떤 숭고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전봉건 선생님의 돌 연작시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한편의 시가 가진 매력으로써도 감탄한 시입니다.

 

이재훈 : 「돌」이라는 시는 지금보다 앞으로 할 말이 많은 시입니다. 지금 ‘돌’에 관한 연작시를 쓰고 있습니다. 제목은 각기 다른데 모두 돌에 대해 썼어요. 이미 10편 넘게 썼습니다. 돌은 언제든지 우리의 발에 채이지만 가장 무한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물질입니다. 돌의 기원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죠. 가장 성스러운 존재였다가 가장 희화하는 존재이기도 해요. 돌을 숭배하기도 하지만, ‘돌대가리’라고 놀리기도 하죠. 전봉건 선생의 돌 연작도 제가 좋아하는 시편들이죠. 이미 많은 시인들이 돌에 대해 썼지만 저는 다른 방식으로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성규 : 자서의 마지막 구절에서 선생님을 방황하게 만들 수많은 것들과 고독이 없었다면 애초부터 방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 곧 문학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을 것 같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이제 내 바람은 멋있게 늙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혹시 다음 시집의 계획이나 앞으로의 바람 같은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재훈 : 말 그대로 멋있게 늙는 게 바람이구요. 때가 되면 나오겠지만 세 번째 시집도 준비 중에 있습니다. 사진을 곁들인 산문집도 한 권 내고 싶고요. 눈 오는 날 창밖을 보며 아주 천천히 따뜻한 정종 한잔 할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어요.

 

김성규 : 사진까지 곁들인 산문집이라면 좀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산문집이 기대됩니다. 세 번째 시집 출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대담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든 정종 한잔 이라면 열일 제쳐놓고 나오겠습니다. 오늘 만남 즐거웠습니다.

 

이재훈 : 예, 김성규 시인도 건강하시고 좋은 작품 많이 쓰길 기대하겠습니다.

 

 

밖으로 나오자 도시의 빌딩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불빛들, 어디선가 외팔이 소년이 “천사와 함께 비탄의 노래를 부르는” “아름다운 시간”(「연옥의 산」)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이재훈 시인은 지금까지 두 권의 시집을 냈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2005), 『명왕성 되다』(2011)는 한국 시에 이제까지 부족했던 신성함과 절대성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고 있다. 1998년에 등단했으니 그동안 출간한 두 권의 시집은 과작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발표작들을 엄선해 뽑아놓은 시집 속엔 침묵 속에서 발화하는 시의 언어들이 행간에 심겨져있다. 속된 세계에서 신성한 언어를 길어올리려는 그의 과업은 속도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무모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모든 허공과 모든 공허 속에서 이는 바람을 혼자 듣고 있는지 모른다.

 

_ <시향>, 2014년 봄호.

 


 

이재훈 : 1972년 강원도 영월 출생.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저서로 『현대시와 허무의식』, 『딜레마의 시학』, 『부재의 수사학』,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가 있다.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을 수상했다.

 

김성규 : 1977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너는 잘못 날아왔다』,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가 있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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