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기독교적 상상력

 

이재훈

 

 

1. ()과 속()의 피안(彼岸)

 

문학과 종교의 관계는 상보적이면서도 대립된 관계에 놓여 있다. 그 성격은 다르지만 구원(救援)’을 열망의 마지막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동지적(同志的) 입장에 서 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보면 구원이라는 동질의 지향점이 서로의 세계를 용인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문학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여 신에게 이르고, 종교는 신에게부터 출발하여 인간으로 내려온다. 그 차이점이 경미한 상황으로 인식할 수도 있지만 실상 시인의 의식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못하다.

문학은 목표가 분명치 않은 세계를 지향한다. 그런 점에서 문학은 종교에 비해 좀 더 자유롭다. 목표가 분명치 않은 문학은, 작품을 창작하는 개별적 존재자가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대리자(代理者)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작품의 창작자에 따라 구원에 이르는 길이 제각기 다르다. 또한 구원의 방법과 도달점도 다르다. 이렇게 각기 다를 수 있는 이유는 문학은 인간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이 관념화되어 보편적 진리에 이르는 수순을 밟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종교는 특수한 목표가 있다. 종교는 경전을 통해 과학적인 분명함이 지배하지 않는 이상적 세계를 보여준다. 그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 다른 초월의 세계이지만, 오히려 그 초월의 세계가 현실을 더욱 단단히 지탱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종교는 보편적 세계를 특수한 선민(選民)의 세계로 인도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이러한 이유로 문학과 종교가 본질적으로는 상통하는 내력을 가질 수 있으나 그 도달점과 방법은 상이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은 문학 일반에서 로 방향을 바꾸어 보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시는 보편적 언어를 객관화하고 대리하는 다른 장르와 달리 노래성이 강하다. 그 노래성은 달리 말하면 부족의 언어, 방언을 육성할 때 힘을 발휘한다. 그렇기에 시의 언어는 여러 비유를 차치하고서라도 언어의 개별성에 많이 기댄다. 이는 종교가 가지는 특수한 세계와 상충되기도 한다. 종교의 모든 목표는 문학을 통해 종교적 진리를 전파하는 데 있다. 물론 각 종교마다 그 성질은 각기 다르지만 본질적인 인식은 그와 같다. 그렇기에 분명한 목적을 가진 종교적 세계를 시로 노래하기란 쉽지 않다. 시는 이미 확정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그 미적 자질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확정적인 세계로 인도하도록 강제받을 경우에 있어서는 그 반발이 더욱 심해지게 된다.

어떻든 속()의 세계에서 성()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게 문학이라면 종교는 이미 성()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를 관리하고 설교한다. 이런 경우, 성과 속이 서로 위무하고 용인하는 지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지점이 바로 종교적 상상력이 서야 할 지점이다. 인간은 원시시대부터 종교생활을 했으며 그것은 사유의식을 가진 인간의 본성적인 것이다. 폴 틸리히(P. Tillich)종교는 인간 정신 생활의 모든 기능의 심층에서라면 어디나 있을 집이 있다고 했다. 이는 종교가 우리의 삶에 어떤 부분인지를 말해 준다. 우리는 성과 속이 서로 습합되고 위치를 바꾸는 현실의 상황들을 목격하기도 한다. 그것은 문학과 종교가 서로 상충되면서도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1)각주

 

2. ()에 속한 시의 내력과 층위(層位)

 

기독교는 일반적으로 나사렛 예수를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교를 말한다. 한국에서는 동방정교회의 전통이 거의 없기에 개신교(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이 주류로 크게 뿌리내리고 있다. 이십세기 초에 유입된 기독교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와 가톨릭을 합쳐 약 천 사백만의 신도수를 가진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의미는 이미 기독교가 우리의 정신세계를 많은 부분 책임지는 사상으로 거듭났다는 데 있다. 그 동안 기독교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회 전부면에 걸쳐 그 정신이 침윤되었다. 문학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문학 작품들이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쓰여졌고 현재에도 쓰여지고 있다.

한국의 정서에 유, , 선의 종교는 샤머니즘적 전통과 함께 맞물려 일종의 동질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하지만 근대가 시작되면서 유입된 기독교는 그 성격이 많이 다르다. 기독교의 발전은 한국의 성장 자본주의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물론 한국적인 기독교가 기복신앙(祈福信仰)의 성격을 가진 연유는 종교의 토착화를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기도 하다. 한국교회에만 보편적으로 행하고 있는 새벽기도회는 정화수를 떠놓고 간원을 비는 한국적 기복신앙의 모습이다. 또한 본질적인 기독교와 다르게 현세의 축복과 상급을 강조하는 측면도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기독교 의식, 혹은 기독교적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여러 가지 개념과 범주를 들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박이도의 다음과 같은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기독교 의식이란 기독교의 목표가 되는 속죄, 구원, 부활, 재림 등의 실현을 위해 일상 생활에서 기도하고 간증하며 신과 교감하는 것을 말한다. 이 같은 의식이 시인의 내부에 심화됨으로써 작품 속에 기독교 의식의 시정신이 드러나게 된다. 2)각주

 

결국 기독교적 상상력이란 기독교 정신3)각주 을 시적으로 잘 구현한 작품들을 의미한다. 문제는 기독교 정신, 혹은 기독교 의식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냈느냐의 문제이다. 기독교가 가진 내세에 대한 단호한 믿음은 많은 부분 상상력을 제한한다. 즉 기독교가 시세계의 사상적 측면에서는 다양성을 준 게 사실이나 그 미적 형상화는 한계점을 드러낸 경우가 많았다. 외형적 측면에서는 성서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과 소재들,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비유들과 예수의 행적, 제자들의 행적에 관한 소재주의로 빠진 경우가 많았다. 기독교 정신을 깊게 고민하고 갈등하는 시적 자아의 모습을 포기한 채 이미 선취된 인간형이나 사상을 그대로 옮겨놓는 경우들도 허다하다.

또한 그 사상적 측면에서도 문제점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상상력이 시의 근간을 이루는 많은 시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의 획일성과 교조주의(敎條主義)적 성격 때문이다. 시의 목적이 종교의 정신을 전파하려는 데 있을 때 시는 종교의 목적을 달성하는 시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종교적인 목표에 부합되는 시편들은 일반의 시와 다른 범주에서 평가되고 인식되고 있다. 이른바 신앙시, 종교시 등의 개념을 들어 종교적 목표가 시의 분명한 목적일 때 일반 문학과의 차이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상상력을 가진 시가 가야 될 방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두 말은 큰 의미가 있다.

 

교의는 진정한 시에서는 그 모습을 나타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혹 나타난다 하더라도 교의로서가 아니라 순수한 환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한 것은 기독교 문학이 어떤 위치에서 이룩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적절히 표현한 대목이다. 문학이란 장르에서 기독교적인 것만을 뽑아 그 의의를 상고한다는 것은 무의미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한국의 현대 문학 속에 기독교적인 특징이나 정신만으로 된 작품을 고르고 분석하기 보다는 작가의 기독교적인 인스피레이션이 얼마만큼 뿌리박고 있는지를 작품 전체에서 얻어낼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4)각주

 

우리가 문제삼으려고 하는 기독교 시는 신에 대한 절대 긍정과 함께 인간 역사에 반영된 신의 섭리를 해석하고 그것을 실천의 지평에 놓는 태도를 포괄하는 시편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 기독교 시가 지향하는, 일종의 대안적 유토피아주의야말로 기독교 정신 혹은 이념을 가장 충실하게 지칭하는 것이 된다. 5)각주

 

가장 중요한 점은 종교적 경험에 대한 자아의 정신적 현존을 드러내는 것이다. 경험에 대한 관념화와 실천적 의지, 본질에 대한 방황 등이 확실한 세계에 대한 궁극적인 뒷모습을 더욱 공고히 해주는 길이다. 완료된 해석의 틀을 거부하고 그 해석에 의해서 반죽되어진 자아의 본질적 모습을 통해 성자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 시사에서 이런 기독교적 상상력을 미적으로 승화시킨 시인들은 적지 않다. 또한 많은 시인들이 남긴 다양한 사상적 층위와 여정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기독교의 신앙적 정신을 시적으로 잘 형상화한 시, 속된 자아와 신앙인으로서의 자아 사이의 갈등과 죄의식을 고백한 시, 기독교 사상이 대상 속에 스며들어 보편적인 정서의 형태로 내재화된 시, 기독교 정신의 올바른 방향을 변론하기 위해 비유나 풍자의 방법론을 택한 시 등 다양한 표출방식으로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윤동주, 정지용, 김현승, 박두진, 박목월 등이 보여준 세계는 한국 시문학의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본 글에서는 이미 다량의 평가를 받아온 위의 시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가가 미흡되었다고 생각되는 몇 시인들의 시를 살펴봄으로써 기독교적 상상력을 실천한 다양한 시적 모습을 살펴보겠다.

 

3. 기독교적 상상력의 양상

 

이용도 시인(19011933)은 우리 문학사에서 여전히 낯선 이름이다. 그가 뛰어난 시편들을 남기고 33세의 이른 나이에 요절했다는 사실 또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당시 감리교파의 개신교 부흥목사였으며 정열적인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중학재학 중 1919년 독립 만세를 부른 혐의로 투옥된 이후, 1922년 태평양 회의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는 등 열성적인 독립운동가였다. 1924년에는 협성신학교(감리교신학대학 전신) 영문과에 입학하고 이후 부흥목사로서의 활동을 하다 폐결핵으로 이른 나이에 작고한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생전에 일기나 서간문 등을 통해 발견된 시편들이다. 그의 시는 기교위주의 형식주의 시보다도 생명력있는 내용을 중시하였다. 6)각주

 

이름없이 지구의 일각을 밟고가! 샤론의 들꽃같이! 피는 줄, 지는 줄 세상이 다 모르되, 다만 하늘만이 빈 들에 속삭이는 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소문 없이 퍼지는 그 향기에 하늘이 웃음 웃고, 자취없이 눈 감을 때 적막한 밤 작은 별의 무리들이 조상을 해- 이것이 값없는 야화의 무상의 영광, 평생 발원이었던 것이로다. , 그러나 저를 낸 조물주는 여기에 가공을 하여 옮겨 놓으니, 요란한 대로변 가시밭에 한 송이 백합화가 되었구려! 고요히 이름없이 지나갈 고독한 야화! 이제는 소문 놓고 노방(路傍)에 찟길 이름 좋은, 그러나 역시 고독한 백합화로구나!

이용도, <샤론의 들꽃> 전문

 

샤론은 성서에 나오는 지명이다. 구약성경 아가서 21-2절에는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라는 부분이 나온다. 아가서는 솔로몬이 기술한 책으로 아름다운 노래의 책이란 뜻이다. 아가에는 그리스도와 인간에 대한 거룩한 사랑을 비유하는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이로 인간의 엄숙하고 순결한 사랑을 노래한 깊고 고상한 윤리적 도덕성을 엿볼 수 있다.

샤론은 욥바에서 갈멜산에 이르는 지중해변의 평원이다. 이곳은 봄이 되면 갖가지 들꽃이 만발하여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샤론의 들꽃은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에서 비범하게 핀 영광된 꽃이 아니라 들꽃처럼 평범한 꽃 한 송이를 의미한다. “이름 없이 지구의 일각을 밝고 가!”라는 단호한 어조는 스스로를 다짐하는 어조이기도 하다. 이 시는 이용도의 삶의 지표와도 맥락을 같이 하는 시이다. 평범한 들꽃처럼 온 가운데 소문 없이 퍼지는 그 향기에 하늘이 웃음 웃는 야화의 삶을 닮고 싶은 의지가 담겨 있다. “고요히 이름 없이 지나갈 고독한 야화!”의 삶은 당시의 상황을 또한 생각하게 한다. 신비주의적인 부흥목회자였던 시인은 마지막에 이단으로 낙인되어 교단에서도 지위를 박탈당한다. 또한 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초반까지의 7-8년 동안 시작활동을 벌여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의 불우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들에 핀 꽃에 대한 열망으로 시적 자아의 근원적 갈급함을 표현하고 있다. 신성한 자연의 근원적 원리를 통해 자신의 삶의 지표를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시이다.

이러한 시는 예수의 생애나 사상을 닮아 있다. 위의 시는 당시 우리 문학사를 생각해 볼 때 문학적으로 상당히 뛰어난 가편이다. 산문시가 비유와 어울려 이루어내는 세계가 기독교적 상상력을 스스로 체득하여 이루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산아, 나무야, 바위야. 나를 가리워 주의 진노의 눈에서 피하게 하여 주고, 모든 인간들에게서 숨기어 수치를 면하게 하여 다오. 그러나 내가 일찍이 산에서 범죄하여 산을 더럽혔사오매, 나는 산의 원수가 되었고, 나무와 바위 아래서 내가 부정하였으매 저가 나를 멸시한지라, 어찌 나를 덮어 주며 가리워 주랴. 산과 나무가 나를 덮어주지 아니하고, 바다가 나를 숨겨 주지 아니하며, 바람이 나를 듣지 않고, 하늘이 나를 동정치 않는도다.

이용도, <산아, 나무야, 바위야> 전문

 

 

하늘은

헤아려

측량하기 어려운 것.

웅대하고,

한이 없는

이 우주

 

! 그 큰 천체를

한 입에 삼키는

이 작은 마음이여

이용도, <마음> 전문

 

무엇을 깨달을 때 그 깨달음을 지속할 특별한 순간을 담지할 때가 있다. 그 순간은 자연의 이미지를 통해 드러낼 때 더 선명해진다. <산아, 나무야, 바위야>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용도의 신성 원리가 신과 자아의 교감 속에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과의 물음과 대답을 통해 그곳에서 오는 죄의식과 그것에 대한 회개와 다짐이 함께 존재한다. 속죄는 기독교 정신에서도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일상적 자연이 신의 진노를 피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자아는 자연과 인간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죄를 가리고 싶은 본성을 고백하고 있다. 그것은 일찍이 아담이 뱀의 유혹을 통해 선악과를 먹고 죄의식을 갖게 된 이후부터 가질 수 있는 본성인 것이다. 시인은 또한 자신을 가리워줄 자연과 인간을 자아 자신이 훼손하였고 부정하였다고 말한다. 자신의 죄를 위무받을 수 있었던 대상과 운명적인 대립의 관계가 되어 이곳저곳에서도 위로받을 곳이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신과 자아와의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 나약한 실존을 보여준다.

마음은 모든 천체를 한 입에 삼키는 것이다. 측량하기 어려운 하늘과 웅대하고 한이 없는 우주조차도 마음 하나에 바뀔 수가 있는 것이다. 그의 시가 자연을 순례하며 자연의 비유로 자신의 신앙관을 보여줄 때 그 사상적 풍요로움은 더 깊어질 수 있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은 살아야 한다.

구상, <오늘> 전문

 

구상은 기독교적 신앙관을 시 속에 잘 형상화한 시들을 많이 남겼다. 이미 많은 종교시편을 써왔으며 스스로 신앙시집이라는 기획으로 󰡔두 이레 강아지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라는 시집을 발간한 바 있다. 구상의 시는 복잡한 수사가 없이 쉽고 간결한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사상의 깊이를 함께 가지고 있는 시에 속한다. 또한 신앙인으로서의 시인의 삶 또한 시의 의미와 덧붙여져서 감동의 무게를 더한다. 위의 시는 현세의 삶 이후의 영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기독교 정신의 핵심사상인 창조, 부활, 사랑, 심판 등의 개념 속에서 오늘에서 영원을 산다는 부활의 신앙을 담고 있다.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현세 기복적인 신앙이 아니라 이 세계의 종말이 닥치더라도 영원을 함께 살 수 있는 신앙의 회복, 영혼의 영원을 말해주고 있다. 구상의 시는 의도적으로 시적 수사를 거세하고 사상적 의미의 핵만을 남겨두는 방식을 취한다. 그의 종교적 시편들이 다수 연작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만월이 떴다

소돔성에 만월이 떠오르자

버들가지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고

고향에 두고온 깊은 강물도

더 이상 잠자리를 적시지 않았다

이미 문 밖에는

예비된 공포가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새벽이 오는 게 두려운 사람들은

이불깃에 이빨을 지그시 깨물며

절망으로 단단히 무장한 다음

가까스로 건진 희망 몇 가닥을

모세의 목에 걸어주었다

가까스로 얻은 희망 몇 가닥이

공동묘지에서 빛나는 아침

모세는 가야 했다

소돔성 떠오르는 만월이 되어

죽음보다 어두운 애급 땅으로

뚜벅뚜벅 사라진 다음에야

희망 몇 가닥에 잎이 돋는다는 것을

우리의 모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세는 가지 않았다

마을에 남아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만월이 되는 것은 아득했다

 

문 밖에는 미증유의 적막이 다가서고

승냥이 울음소리 음산하게

빈 벌판에 가 닿았다

고정희, <만월> 전문

 

고정희의 시는 기독교 정신의 올바른 방향을 변론하기 위해 비유, 풍자의 방법론을 택한 시에 해당한다. 그는 많은 시편들을 통해 기독교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풍자, 비유 등의 다양한 방법론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면은 그가 신학도이며 또한 해방신학에 영향을 받은 실천적 의지의 신앙을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의 사상을 육성한 것이 바로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한 종교의 모습이고 그러한 자신의 신념은 기존의 신념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현존하는 기독교적 가치관들을 한번 되짚어보고 자문해 본다. 또한 그의 시에서는 역사적 소명을 자신의 신앙적 경험을 체화한 형태로 표출되었다.

<만월>은 깊은 달이 뜬 밤을 배경으로 새로운 역사의 도래나 그것이 오기까지의 정신적 여정을 적고 있다. 그 여정은 새로운 희망과 함께 긴장감이나 두려움을 동반한 감정이다. “소돔성은 지금의 현실적 상황을 말한다.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성으로 이주할 때의 이야기이다. 소돔성은 이미 성적 문란과 도덕적 퇴폐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 유황볼의 심판을 받는다. 소돔성 안에 의인 10명만 있으면 소돔성을 구할 수 있었지만 의인 10명이 없었다. 죄악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죄악에 빠져 있을 때, 그 죄악 가운데에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롯의 아내가 받았던 돌기둥의 형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돔성의 현실 속에서 모세는 구원의 지도자이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고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하였다. 그 해방 가운데 백성들과 광야에서 40년의 유랑생활을 하였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우리의 현대사는 이러한 광야의 생활과 다를 바 없다. 민족의 상실과 더불어 평화, 자유, 민주의 상실을 거듭 체험한 우리의 현실은 광야에서 고난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과도 같다. 이제 새로운 지도자나 영웅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문밖에는 아직도 미증유의 적막이 다가서는 현실 속에 있다. 민중의 아픔 속에 하나님의 진리가 함께 존재할 때 그 신앙의 존재 의미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이처럼 고정희의 시에는 신앙인으로서의 종교적 체험이 다양한 시적 방법론에 의해 시화(詩化)되고 있다.

 

장독대의 항아리들을

어머니는 닦고 또 닦으신다

간신히 기동하시는 팔순의

어머니가 하얀 행주를

빨고 또 빨아

반짝반짝 닦아놓은

크고 작은 항아리들……

 

(낮에 항아리를 열어놓으면

눈 밝은 햇님도 와

기웃대고,

어스름 밤이 되면

달림도 와

제 모습 비춰보는걸,

뒷산 솔숲의

청살모 다람쥐도

솔가지에 앉아 긴 꼬리로

하늘을 말아쥐고

염주알 같은 눈알을 또록또록 굴리며

저렇게 내려다보는걸,

장독대에 먼지 잔뜩 끼면

남사스럽제...)

 

어제 말갛게 닦아놓은 항아리들을

어머니는 오늘도

닦고 또 닦으신다

지상의 어느 성소인들

저보다 깨끗할까

맑은 물이 뚝뚝 흐르는 행주를 쥔

주름투성이 손을

항아리에 얹고

세례를 베풀듯, 어머니는

어머니의 성소를 닦고 또 닦으신다

고진하, <어머니의 聖所> 전문

 

고진하는 기독교 사상이 내재화되어 보편적인 정서에까지 그 시적 진리가 전달되는 시다. 그의 시 속에서 자아는 신앙인과 속인으로서의 가치판단이 분리되지 않은 채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무한한 신의 섭리를 이끌어낸다. 그의 시편들이 신성과 일상의 만남을 생태적 사유로 구현해냈다는 세간의 평가는 온당하다. 불순한 모든 것 또한 초월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초월의 힘이 보편적 정서로 다다르면 굳이 기독교적 상상력이 아니라 하더라도 모든 종교적 상상력이 그의 그물망과 함께 하는 것이다. 시인에게 聖所는 교회의 성전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만물이다. 또한 어머니의 세계가 바로 성소이다. 시인이 성소를 발견하는 특별한 순간은 계시의 장소가 아니라 일상의 장독대이다. 어머니가 장독대 항아리를 닦고 계시는 모습을 통해 인간이 가지는 진실된 마음이 모두 종교적인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세계는 각기 다른 존재로 분할되지 않고 사건의 연결망이며 연대성을 가지고 있다는 존재론적 인식이 고진하의 시 속에는 자주 목격된다. 기독교가 가지는 선민의식은 때로 그들만의 성찬식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를 베풀 듯성소를 닦아나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진정한 종교적 구원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가 기독교적 상상력이 가진 한계에 대한 선입견을 탈각시킬 시의 준거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외에도 김남조, 김형영, 신중신, 정호승, 김정환, 박찬일 등의 시에서도 각각 다른 방법으로 기독교적 상상력을 형상화하고 있다. 애초의 계획과 달리 짧은 지면에 이 모두를 묶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다른 지면에서 논의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대신한다.

 

4. 맺으며

 

지금까지 기독교적 상상력을 구현한 다양한 층위의 시편들을 살펴보았다. 위의 몇 시편들을 통해 기독교 정신이 어떻게 시 속에 습합되고 표출되는지를 일별해 볼 수 있었다. 더 깊은 논의를 위해서는 각 시인들에 대한 개별적인 분석이 더 부가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남겨 둔다.

어떠한 길을 통해 그곳에 이르고자 하는지, 혹은 그 길이 목표가 없는 길이라 할지라도 깊고 진정한 사유의 세계는 깊고 오래가며 감동을 준다. 종교적 상상력이 우리 시단의 사상성에 더 깊이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서구의 오래된 문학 전통이 헤브라이즘의 전통 속에서 나왔음을 생각할 때 그 중요성은 결코 가볍지 않다.

기독교는 가장 기본적으로 현세의 종교가 아닌 내세의 종교이다. 현세의 기복과 인간의 안위가 아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보증으로서 믿는 종교이다. 모든 영적 행위는 죽음 이후 삶을 담보한다. 기독교가 유일하게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부활은 죽음 이후 다시 사는 세계를 의미한다. 죽음 이후에 다시 소생하는 생성과 소멸의 원리가 숨어 있다. 그것은 꽃이 지고 다시 꽃이 피는 자연의 순환원리처럼 우리 육신과 영혼의 삶도 그러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앞으로 명징한 세계와 그것을 거부하려는 세계 사이의 길항과 모순 속에 기독교적 상상력이 존재해 있을 때 그 미적 형상성을 더 깊어질 것이다. 하늘의 구름 위에서 군림하는 성자가 아니라 인간의 옷을 입은 성자가 시 속에 투영되기를 희망해 본다.

 

각주)

1) 엘리아데는 다음의 글을 통해 성과 속의 관계를 보편적 관계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정황들은 민속종교에서부터 그 기원이 있다고 보고 있다. “성속과 구원이라는 말은 아무리 원시인이라 할지라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인 한 종교적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명제와 관련된 것이고, 인류의 여명 추기부터 일정한 종교 체험을 해왔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을 경험하는 것은 매우 다양한 양상에서 비롯되므로 한두 가지 카테고리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을 든다면 성과 속을 구분하고 가능한 한 성에 가까이 있고자 한다는 것, 인간 조건의 한계를 느끼고 막연하지만 구원을 갈망한다는 점이다. (중략) 성은 영속적 혹은 일시적 특성으로서 어떤 사물, 인간, 공간, 시간 등에 두루 퍼져 있다. 어떤 신비적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성이 되면, 그 순간부터 하나의 변질을 겪고 사람들한테 두려움과 숭배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 성을 접축하는 것은 위험시되기도 한다. 또한 그 성은 외부로 퍼져나가 마치 물과 같이 번지고 전기와 같이 방출되는 성격을 지닌다. 그에 비해 속은 부정적 성격으로 확인되는데, 빈약한 생명력이나 허무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처럼 민속 종교에서도 성과 속을 구분하고 속의 허무를 극복하고 성으로 되돌아가고자 하였다.(엘리아데, 이은봉역, <성과 속>, 22-23)

2) 박이도, <한국 현대시와 기독교>, 종로서적, 1987, 10-11.

3) 신에 의한 창조, 사랑, 섭리, 구원의 역사를 자신의 사유의 근본 구조로 받아들이고, 그 질서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신학적이념적 원리를 이름하는 것일 터이다.(유성호, <한국학연구> 21, 고려대한국학연구소, 7)

4) 박이도, 위의 책, 57쪽.

5) 유성호, 위의 책, 7쪽.

6) 이용도의 생애나 사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변종호 편저, <이용도 목사 전집>(장안문화사, 1993)과 신규호, <한국 현대시와 종교>(국학자료원, 2003)를 참고.

* 출처 : 이재훈, <딜레마의 시학>(국학자료원)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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