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서럽게 아름다운 슬픔의 미학, 눈물의 언어학 – 이재훈의 시
한민주(문학평론가)
1. 비와 당신
개개인의 삶 속에는 시적인 기억들이 남아 생을 견디게 한다. 무지갯빛 기억의 실타래를 풀면, 어린 시절 비의 경계를 경험한 순간이 떠오른다. 갑작스럽게 검은 먹구름이 천지를 뒤덮고, 하늘에 구멍 난 것처럼 퍼붓는 비를 맞으며 언덕 위의 집을 향해 정신없이 내달렸다. 그런데 집 앞에 당도했을 때 하늘은 환해지고 마당의 흙은 감쪽같이 보송보송 말라 있어, 어딜 봐도 비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흠뻑 젖어 있는 내 모습이 이상하다는 가족들의 시선과 너무 맑고 메마른 주변 환경, 그리고 여전히 비에 젖고 있는 언덕 아래 마을의 이질성 속에서 어린 나는 다른 시공간, 다른 세계를 통과해 온 경이로운 기분을 맛보았다. 어쩌면 내가 거주하고 있는 이 세계 말고 또 다른 세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과 두려움에 압도당했던 바로 그 마법의 순간. 이재훈의 시를 읽다 보면 이 신비로운 비를 자주 만난다. 특히 “비가 오르고 있었다”라는 표현은 예사롭지 않다. 지상으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수직으로 상승하며 “가늠할 수도 따라갈 수도 없는/빗속의 신비”는 “벚꽃 사이에서 날고 있”(「신비한 비」, 『벌레 신화』)는 잃어버린 ‘당신’의 기억과 스민다. 비를 사랑하는 시인은 오랜 세월 “빗방울도 없이/빗소리가 내리는 방”(「카프카 독서실」, 『명왕성 되다』)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자거나 울거나, 시를 쓴다. 이재훈은 2005년, 그의 첫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에서 “새벽 빗소리가 눈을 친다”라고 밝혔다. 분명, 그의 시 세계에서 ‘비’는 아주 중요한 시적 소재임이 틀림없다. 비는 인식이나 각성을 상징하는 ‘눈’과 연결되면서 시인의 의식 세계를 깨우는 매개 역할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비가 때로는 아늑하게, 때로는 불편하게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탁월한 플롯 장치로 기능해 왔다는 것은 일반화된 사실이다. 개인의 경우도 비는 아늑함과 불편함의 길항작용 속에서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돕는다. 그러므로 “비는 그쳤지만/빗소리가 내 가슴에 올라와 있”(「황홀한 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는 순간들이 잦다. 실상 침묵 속에 울고 있어서 “몸 부딪히는 소리만” 들리는 “알몸”의 “당신은 그 아픔을 숨기고 투명한 몸으로, 꽃잎처럼 경쾌하게” 내린다. 시인은 이를 “서러운 아픔도 참, 아름다워요”(「빗소리」, 『최초의 말』)라며 침묵 속에 울려 퍼지는 슬픔과 고통을 심미화하고 있다. 그런데, 사방에 닿는 빗소리는 당신의 울음소리가 아니던가. 어느새 투명한 빗소리는 아픔을 간직한 울음소리로 전환된다. 인간의 역사라는 까마득한 광야에 “거칠게 울고 우는 소리만 가득하다.”(「북극의 진화」, 『명왕성 되다』) 이토록 비통한, 비에 관한 기록들은 지금껏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비애에 빠져 있는 시적 화자들에게 빗소리는 계속 고통의 감각을 일깨운다.
도대체 왜 시인은 빗물이 흐르듯 울고 또 우는 것인가. 문학에 대한 독서와 창작을 작가의 고백 행위이자 그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윤리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방편들로 볼 때, 이재훈이 표현한 슬픔의 정치와 윤리에 관한 탐구는 그의 시 세계를 파악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해 보인다. 이재훈의 시에서 비는 물질적인 부요와 탐욕의 천사인 “너와의 언약으로 고통이 하나씩 늘고, 빚이 늘고, 미래의 노동이 늘”어 “해거름, 차창에서 졸고 있는 저 빈곤한 육체”(「맘몬과 달과 비」, 『벌레 신화』)를 처연하게 달랜다. 그리고 비록 비는 자연의 일부지만, 한 주체가 “뱃속에 가득한 허기” (「노란 애벌레가 좋아」, 『생물학적인 눈물』)와 허무에 휩싸여 혼돈에 빠진 자아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기발표작 「고통이 없다」를 보면, “한때는 투명한 피부를 가지고 싶었”고, “나무에 새긴 초록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이상적 자아의 세계와 달리 현실적 자아는 “고기를 뱃속 가득 채”우며 “짐승의 시간”에 지배되어 산다. 이시는 자아의 괴리감과 실망감에 맞닥뜨린 그 고통스러운 순간을 재현하고 있다. “슬픔은 환멸 속에서 더 환하다.” “어쩌면 잃어버린 사람을 찾으려고 헤맨 걸지도” 모를 그의 인생사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채우지 못한 허기”를 달래는데 온 생을 바치며 달려온 것과도 같다. 그런데, 이러한 생의 조건 속에 “고통이 없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다. 생물 의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도, 진정으로 고통에서 해방된 존재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가 결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현재의 고통을 누를 수 있는 더 큰 고통이 존재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현재의 고통을 더 극대화하기 위한 고통의 아이러니가 기획된 것일 수도 있다.
고통은 생물 의학적 과정의 결과이기도 하고 개인의 정신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주관적 경험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울증과 공포, 비애 같은 정신 분열적이고 정서적인 상태에 의해 보강되고 때때로 새롭게 창조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고통은 개인과 집단의 성장과 성취를 동반하기에 우리는 고통을 받아들인다. 저마다 고통으로부터 의미를 발견하고 고통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이처럼 고통이란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인간의 근본적 경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고통의 의미를 단지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창조하면서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는 고통의 지위를 이해하는데 특별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이런 측면에서 되새겨보면, 이재훈의 시 세계에 사는 시적 화자들은 모두 상처 입은 화자들이며, 끝없는 슬픔에 빠져 있다.
이재훈의 시 세계는 잃어버린 상실의 대상을 찾아 떠도는 슬픔의 도정이 펼쳐져 있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우선, 시인이 빗속에 “엎드려 자고 있으면” “빈 말들의 뼈”(「카프카 독서실」, 『명왕성 되다』)가 살포시 그의 몸에 감긴다. 우리의 언어가 어떤 사물을 지칭함에 있어 필연적으로 일대일의 대응 관계에 있다고 하던 종래의 소쉬르 관념을 넘어, 기표와 기의는 서로 유리되어 있고 또한 아무 관계가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관념이 지배적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 존재하는 메꿀 수 없는 틈을 직시하게 되며, 그 결과 말하여지는 차원은 의미 되는 차원으로부터 언제나 미끄러져 있는 상태임을 또한 인식하게 된다. 언어는 자신 속에 분열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시인은 “부끄러움이 없는 언어의 세계를 꿈”꾸며 “이 세계에 없던 언어를 찾아 나”(「거리의 왕 노릇」, 『벌레 신화』)선다. 이때, 시어를 향한 시인의 도정에는 “부재(不在)”라는 “그리움의 양식”(「앉은뱅이꽃」, 『명왕성 되다』)이 동반한다. 따라서 그는 늘 “말하려던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직선을 치다」, 『생물학적인 눈물』)라는 말을 되뇌며 반복적인 회의와 좌절감에 빠져 고통스러워한다.
고통과 슬픔에 관해서 아무리 말해도 말할 수 없는 게 있다. 이 상처의 정확한 표현 불가능성 때문에 고통의 재현도 언어처럼 미끄러진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의 상상 속에서 상처 입은 몸과 고통, 슬픔을 시적으로 표현하려 하며, 그와 관련한 문화적 증상을 드러내려 한다. 그런데 고통의 혼돈을 서사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서 프랭크는 고통의 혼돈을 살아낼 수는 있어도, 그것을 말할 수는 없다고 한다. 혼돈은 서사가 요구하는 시간적 순서대로 삶을 재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의 혼돈을 시로 말할 수 있을 때쯤이면 일관성을 되찾는 작업은 이미 잘 시작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늘 곁불만 쬐며” 갖게 된 시인의 “엄살의 통각”(「일식」,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이 “옹알거리기”라는 소심한 표현으로 이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다. 또한, 이재훈의 시적 화자들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통의 요인이 되는 ‘상실’은 ‘시인의 자기 정립 조건’이기도 하다. 이 ‘상실’에 대한 반응 태도로 애도와 우울증이 있다. 과거가 해결되고 죽은 것으로 선언되는 애도와 달리, 우울증은 잃어버린 과거가 현재에 변함없이 살아있으면서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대상 상실이 자아 상실로 전환된다. 이처럼 우울증은 끝나지 않을 고통 속에 사는 자아의 병을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벤야민의 시각을 전유해 볼 때, 우울증은 상실과 함께 끝없는 투쟁에 참여함으로써 과거와의 지속적이고 개방적인 관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우울이 병은 아니지,” “그저 또 다른 시간에 이른 것”(「짐승의 피」, 『벌레 신화』)이라는 통찰처럼, 이재훈의 시는 무언가를 상실하고 앓는 우울증이 어떻게 시인의 행동주의, 윤리, 그리고 정체성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일로 여기며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데, 이재훈은 회피나 포기, 탈출이 아니라 슬픔 안에 머물며 이를 분석하고 그를 관통해 나가려는 행동주의적 면모를 보인다.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나는 선물이 되지 못하고, 맛이 되지 못하고, 그저 나만 아는 곤고한 사람이 되었”(「라틴어를 배우는 시간」, 『생물학적인 눈물』)다 라는 자책 속에서 시인이 되고 싶은 ‘선물’이나 ‘맛’은 상호적인 관계성에 놓여 있는 것들이다. 타인에게 선물이 되고, 맛이 되고 싶다는 시인의 염원은 동정과 연민, 공감과 위로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이재훈이 고통의 윤리와 슬픔의 본질을 파헤쳐 나가며 비로소 가닿고자 하는 슬픔의 미학적 완성이 무엇인지를 탐구해 보려 한다.
2. 도시의 은유, 시인의 몽상하는 발걸음
‘당신’에게 도달하기를 원하는 이재훈의 시는 대화의 몸짓이다. 따라서 잃어버린 대상을 찾고, 그것을 향해 말을 건넨다. 가령, 시인은 “뜨거운 돌 위에 누”(「예쁜 똥」,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워 돌과 대화를 나누고 잘 익은 돌을 낳기도 한다. 그리고 태초부터 돌 속에 봉인되어 있던 수많은 사연에 귀를 기울인다. 신작시 「극빈의 돌」은 고통을 켜켜이 응결시켜 놓은 결정체를 비유하기 위해 ‘돌’을 소재로 삼았다. 시적 화자는 “모두 바뀌는 것들만 궁금해”하며 “집도 자동차도 직업도 사람도 모두” 바뀌는 세상에서 살자니 “숨이 가쁘고 피가 돌지 않는다.” 그는 “오래도록 바뀌지 않는 것들만 나를 살”리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을 물과 사라지지 않을 공기와 나무에게 입술을 대었다.” 이처럼 시인은 계속 바뀌는 현대성의 다른 한편에 변함없는 자연의 항구성을 대립 항으로 설정해 두고 인간의 숨 쉴 자리를 향수하게 만든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인이 속한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이 ‘액체화’되었다고 진단하였다. 그리고 체제의 구조가 지닌 특성이 구조화되지 않은 유동적인 순간적 생활정치 무대와 쌍을 이루어 인간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시는 이처럼 지속적으로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가난한 것만이 변하지 않는다”는 부조리를 인식하게 만든다. 게다가 가난의 질곡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의 항구성은 ‘프롤레타리아의 돌’이 함의하고 있는 존재론적 비극성을 더욱 부각한다.
이재훈의 시 속 대부분의 시적 화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대도시라 할 수 있는 서울에서 비롯된다. 도시는 지속적인 개발과 변화의 대상이었고, 그에 맞춰 새로운 생활 방식을 만들어왔기에 현대성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시적 화자와 “자본 문명의 시대에 가장 이율배반적인 인간형”이라는 시인과의 심리적 거리는 매우 가깝다. 모든 화가가 자신을 그리듯이 시인 역시 자신을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도시의 일상생활, 특히 도시에 대한 주관적 성찰, 탐구 및 경험을 통해 도시의 열기, 먼지 그리고 냄새를 새로운 방법으로 되살아나게 한다. 도시생활자인 시인은 도시의 “흘러가는 무리들에 몸을 섞”은 채 “홀로 다닐 용기도 내지 못”(「양의 그림자를 먹었네」, 『생물학적인 눈물』)하고 군중 속 일원이 된다. 그 군중 속 시인은 “나는 육십억 분의 일일 뿐”(「매일 출근하는 폐인」, 『명왕성 되다』)임을 자각하며 고독하게 혼자 걷고 있는 현대인을 표상한다. 따라서 거리의 군중을 대표하는 일 개인으로서의 시인이 겪는 운명이란 곧 거리에 있는 집단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재훈의 도시 상상력은 근본적으로 거리를 걷는 행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걷는 것은 우리가 주변 세계를 이해하고 주변 환경과 관련된 우리 자신을 인식하는 기본 수단이다. 따라서 걷기는 도시 공간을 경험하고 도시 상상력을 창조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재훈의 시는 “걷기의 시학”을 구현하고 있다는 기존의 평가처럼 도시생활자인 시적 화자가 배회하고 지나간 발자국의 흔적을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속도와 시간, 합리성을 강조하는 현대적인 도시 속에서 걷는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행위로 비칠 수 있다. 도시의 거리를 걷는 것은 시골길을 걷는 “아주 사사로운 옛사람의 산책”(「미적인 궁핍」, 『벌레 신화』)과는 분명 다르다. 걷기 활동은 주로 현대 교통수단의 체계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도시 계획이 교통체제에 점점 더 적응하면서 보행자가 무시되는 상황에서 시인은 일부러 걷기를 선택했다. 따라서 시인에게 걷는 것은 도시 계획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이며, 정해진 이동 방식에 대한 반항의 행동이다. 또한, 규범화된 교통수단으로 도시를 통과하는 것과 달리 시인은 걷는 가운데 사색과 몽상 속에서 살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을 스스로 “방황하는 몽상가라고 말”(「당신은 가짜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한다.
시적 화자가 도시 속에서 “바퀴가 싫어 걷다 보면/빌딩의 키가 커진다.” 그리고 “핵폭발처럼 밝은 도시/기하학적인 구조물로 가득한 발명의 도시”(「미적인 궁핍」, 『벌레 신화』)는 그에게 시각적인 충격을 안겨 준다. 이처럼 시적 화자의 발걸음은 현대적인 현상들을 모두 수용하고 해석하기 위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이곳은 문명의 숲/충혈된 눈으로 비만한 이미지만 봤어요”(「다정한 재봉사의 재판」, 『명왕성 되다』)라며 상품의 거리를 분석한다. 아마도 근현대사에서 현대성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가속화된 자본주의의 발전, 다양한 새로운 기질의 출현, 빠른 도시화와 산업화, 그리고 인간의 현실 경험에 시각의 영향력이 커진 것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발전은 시인이 현대 시대를 바라보는 관점들과 자연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시인이 창조한 걷는 자는 도시의 거리 곳곳에 만화경처럼 펼쳐져 있는 현대성의 텍스트를 읽고 있다. 이 현대성을 담지하고 있는 시인의 “눈은 카메라를 닮”아 “노출을 열고/몇 시간 동안 창밖을 보면/불빛만 남은 세계”(「비비디 바비디 부」, 『명왕성 되다』)에 익숙하다. 이처럼 도시를 걷고 있는 시인은 시대의 외부 세계와 현상을 기록하는 특권적인 방법인 현대적 기질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걷는 자는 도시의 새로운 현상, 즉 거리의 새로운 감각을 기록하고 반응하는 지적이고 감각적인 기질을 구현하면서 현대성의 등록 매체로 기능한다. 그런데 이재훈이 창조한 시적 화자들은 일관되게 도시를 어두운 상상의 장소로 묘사하며 그 현대성에 역행하려 한다.
도시는 도시화 과정과 그것이 수반하는 기술 혁신에 대한 경험 속에서 범죄, 가난, 죽음이 생성되는 현장으로 그려진다. 따라서 이재훈의 시에서 서울은 황량하고 악몽 같으며 죽음의 상징으로 가득한 곳이다. 전염병이 돌고 홍수가 나서 오물이 넘쳐 나는 도시는 잿더미에 휩싸여 있다. 이처럼 이재훈의 시들은 가난과 도덕적 타락, 억압이 지배하는 도시의 비전을 창조하며, 사회 변혁을 요구하는 불안스러운 예언적 분위기를 발산한다. “지천에 널려 있는 악의 부스러기들” 때문에 “고통과 어둠이 사십 일 동안 지속될 것이다. 더한 슬픔과 허무가 너를 뒤덮을 것이다”(「재의 수요일」, 『생물학적인 눈물』)라는 계시가 잇따른다. “아비를 죽이고 시체를 토막내는 자도 있”는 세상에 “전염병에 관용은 없고 심판은 멀지 않았”(「물고기 바이러스」, 『생물학적인 눈물』)다는 것이다. 재난과 재앙에 대한 두려움은 한층 더 종교적인 정서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도시의 개념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죄의 도시 바빌론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과 타락의 도시 바빌론의 사막 한가운데 있는 공중정원에서는 “까맣게 타들어간” “잿빛 몸들이”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한다.”(「공중정원」,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부패한 바빌론이 신의 파멸을 기다리고 있다는 계시록의 예언처럼 현대 도시의 멸망에 대한 두려움은 종말론적 상상력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시인은 서울의 도시화와 함께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도시의 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오물의 역사로 그려낸다. 미궁으로 비유되는 도시의 복잡성과 계획성은 도시의 거리와 하수로, 강에 대한 태도를 통해 드러난다. 걷는 자는 “배설과 오물의 길” “그 위에 서성이”다가, “트르륵트르륵 한 세기 동안/콘크리트 덮는 소리를 듣다가/문득 발길을 멈춘다.” 도시는 현대화라는 핑계로 하수의 오물과 공업용 폐기물을 뒤덮으며 성장해 왔기 때문에 그 불순물들은 유독성 물이 되어 도시인들의 발밑을 흐르고 있다. “물이 흐른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네가 버린 물과 네가 뱉은 말이/파이프를 타고 수화기를 타고/물결치며 이 집 저 집을 들락거린다/이 무시무시한 동력.” 이처럼 시인은 도시의 부패와 타락을 오물로 가득한 하수구 시스템으로 표현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시스템 속에서 “나는 썩은 물로 컸다.”(「도시의 물관(管)」,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게다가 굽이치는 황토물 때문에 사람들은 “피부병에 걸려 기왓장으로”(「대황하9」, 『명왕성 되다』) 제 몸을 긁는다. 점입가경으로, 도시가 만든 하수구 시스템은 도시의 불순물을 왈칵 분출시킨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몸에서 자꾸 냄새가” 나고, “거리에는 고름 덩어리를 매단 사람들이 천천히 기어”(「역병」, 『생물학적인 눈물』) 다닌다. 현대인의 신체적 고통과 질병, 전염병이 도시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있음을 아주 날카롭게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또, 도시의 일상에 내재해 있는 다원적인 혼란을 꿰뚫어 보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제공한다. 그는 소외와 공허감 속에 무기력과 나태, 방황을 산출하는 현대성의 속성을 ‘속도’의 감각으로 재현하고 있다. 현대의 “거리는 직선으로 태어나고 사람들은 직선으로 기다린다.” 이 “역한 거리의 질서” 안에서 사람들은 “직선으로 달리는 법을 모르는 채 질주”(「직선을 치다」, 『생물학적인 눈물』) 하다가 피를 흘린다. 이들의 질주 속엔 신속과 합리, 경제라는 현대적 매력으로 현란하게 포장된 ‘속도’가 개입해 있다. “속도가 폐부를 훑고 지나가는 아침,”(「거리의 왕 노릇」, 『벌레 신화』) 현대의 속도를 표상하는 ‘지하철’ 속 사람들은 “모두 핸드폰을 들고, 걸고, 만지고, 본다.”(「귀신과 도둑」, 『명왕성 되다』) 그러면서 그들은 현실의 자신과 제 옆의 사람들을 보지 못한다.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상시로 온라인에 접속하는 현대인들에게 신중과 반성, 창조를 가능하게 할 숭고한 조건인 ‘고독’을 누릴 기회마저 사라졌다는 바우만의 경고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느린 발걸음으로 걷고 있는 시인은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가속도적 촉진을 거스르고, 생산과정과 속도의 현란함에 저항하고 있다.
따라서 “시대의 첩보원”(「나무의 내력」, 『명왕성 되다』)이 된 시인은 이 도시를 먼 타역으로 여기고 “집시가 되어 거리를 걷는다.”(「직선을 치다」, 『생물학적인 눈물』) 그는 이 공간에서 주변 세계를 무시하는 것이 자유로워 보인다. 세상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 속에 도시를 돌아다니는 동안, 걷는 자는 소외되거나 버림받은 사람들, 또는 사회의 변두리에 있는 주변인들과의 만남을 피할 수 없다. “이 세계는 깨끗한 것만을 전시해” 놓으려 하므로 “구더기도, 박쥐도, 검은 피도, 집 잃은 고양이도” 모두 숨기고 “지렁이가 나올까 싶어 시멘트를 바르”며 “신성한 것들만 숨기는 음모들”(「녹색섬광」, 『벌레 신화』)을 꾸민다. 이처럼 도시는 과밀, 질병, 범죄와 빈곤, 고립과 소외 등의 도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부랑자, 도둑, 소매치기, 사기꾼, 매춘부 같은 주변인들을 정화하려 한다. 하지만 시인은 “명왕성에서 온 첩자”(「카프카 독서실에서」, 『벌레 신화』)이자 “이교도”(「빌딩나무 숲」,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가 되어 이방의 언어로 도시를 읽으려 한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외계인”, “난쟁이” 또는 “그냥 ‘꽃’”(「안드로메다 바이러스」, 『명왕성 되다』)으로 부르며 “이 도시의 첩자”나 “그냥 먼지”(「명왕성 되다」, 『명왕성 되다』)로 치부하고 소외시킨다. 기발표작 「침묵의 달인」에서 볼 수 있듯이 소외당한 나는 “어디를 가든 환영은 없”고, “억울하게 남았다.” 침묵을 강요하고, 또 침묵으로 응대하는 것이 유일한 생존법이 된 도시의 세계에서 홀로 고독한 주체는 비루한 존재로 남게 된다.
도시를 수평으로 보행하던 이전의 시적 화자들과 달리, 신작시 「돌멩이 기도」에서 걷는 자는 산에 올라 도시를 바라본다. 물리적으로 높은 위치에서 도시를 관찰하면 관음의 조감도가 형성된다. 관음인은 자신의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조망하며 익명의 거대한 도시 전체를 볼 수 있다. 그가 내려다보는 도시는 “매일 강도와 강간이 일어나고 자살을” 한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나를 감추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고 “변명과 회개”를 일삼는다. 그런데 “주머니에 남에게 던질 돌을 가득 넣은 채/상처의 말들을 입에 가득 담은 채” 걷던 시적 화자는 “나도 모르게 주저 앉아 돌을 품”으며 “지나치는 사람들의 눈망울을 마주”한다. 상처가 되고 고통이 된 돌을 품는 그의 모습에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돌팔매질 당하고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상이 겹쳐지는 것은 과잉 해석일까. 자신을 “순례자라 생각하는 것”(「혈통」, 『생물학적인 눈물』)이 주어진 운명처럼 느껴지는 시인에게 걷는 것은 ‘순례의 삶’을 은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처럼 온 땅을 모두 밟아보고 싶었”(「순례」,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던 소망대로 시인은 “이 도시 속에서 나는 사십 년의 광야처럼 매일 순례하며 살고 있다.”(「나르치스」, 『벌레 신화』)
3. 언덕의 아들, 시시포스의 돌
도시생활자인 한 남자의 일생을 시인은 “풀잎에 매달려 있다가/툭,/떨어진 애벌레”의 한해살이로 표현하였다. 맥없이 지상에 떨어진 인간의 운명이 지닌 속절없음은 이 ‘툭’이라는 한 단어에 압축되어 있다. 어쩔 수 없이 아스팔트 위를 기는 애벌레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하다가 상처를 입기 때문에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 데/온 생을 바”(「남자의 일생」, 『명왕성 되다』)친다. 이재훈은 가혹한 인생의 수레바퀴에 짓밟히는 인간의 형상을 운명론에 입각해 표현하려고 ‘언덕’이란 시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이 세계는 “오르는 순간보다/흘러내리는 순간이 더 잦은 땅”이다. 그래서 한 남자는 애벌레처럼 “기었다/울었다/다시 기었다.”(「아직 사십대」, 『생물학적인 눈물』) 이처럼 이재훈의 시 속 걷는 자들의 “산책길엔 언덕이 있다.” 따라서 시적 화자들은 “오르고 올라도 닿지 않는 거리를 헤맸다.”(「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명왕성 되다』) 또, 시인이 창조한 “언덕의 아들”은 “저녁의 거리를 걷다 보면, 어느새 달린다.” “도시의 속도에 적응된 발로 허공을 구른다.” 그리고 “메마른 얼굴에 눈물이 흐른다.”(「언덕의 아들」, 『명왕성 되다』)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이 질긴 운명”(「정의」, 『생물학적인 눈물』)의 깊고 깊은 절망감. 이런 삶의 굽이굽이를 넘어가는 사이 “어느새 나는 돌의 근원을 생각했다.”(「돌」, 『명왕성 되다』) 이재훈이 인간의 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유의 방식은 바로 이 ‘언덕’과 ‘돌’에 대한 비유 속에 녹아 있다.
시인이 “매일 다니는 골목길에 큰 돌 하나 있었다./무심코 지나쳤으나 돌은 늘 거기 있었다.” 그리고 그는 “가끔 지칠 때 돌 위에 앉아 쉬었다.” 그가 “돌 위에 앉아 있으면/저 바닥 아득히 짐승의 울음이 들리는 듯/엉덩이가 뜨끈”함을 느꼈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를 가진, “피의 온기를 가진 돌”(「돌」, 『명왕성 되다』)은 숭고한 인간의 삶을 상징한다. 또한, 이재훈의 시에서 언덕과 골목길에 있는 돌은 시시포스의 돌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 시시포스는 신들로부터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리는 형벌을 받아 그것이 산 아래로 다시 굴러떨어지면 몇 번씩이나 되돌아가서 굴리는 행위를 반복해야 할 운명에 처했다. 문제는 신들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시시포스의 언덕 넘기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원히 목표에 미치지 못할 시시포스의 돌은 성공을 성취할 수 없는 허무와 절망의 상징으로 이해된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시적 화자는 “언덕을 오르고/또 한 언덕을 오르면/마치 기적처럼 달빛에 닿는,/존재의 비밀을 한순간에 깨칠/그런 순간이 올 수 있을”(「월곡 그리고 산타크루즈」, 『명왕성 되다』)지 모른다는 저 언덕의 희망 고문에 시달린다. 소원을 성취하려면 개인의 고통과 인내가 당연히 따른다는 현대성의 주술은 인간이 현재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이루면 모든 게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목표를 향해 달려가도록 돕는다. 이 같은 효율적인 사고방식은 인간이 정해진 목표를 향해 달려가느라 정작 잃어버린 것들을 알 수 없도록 은폐하고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놓는다. 이재훈의 시에서 하루하루를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시적 화자들은 “의욕적으로 넥타이를 매고 미소를 연습한다.”(「매일 출근하는 폐인」, 『명왕성 되다』) 이같이 거울 앞에 선 수많은 표정은 “밀고 밀린 생들이”(「건기(乾期)의 새」, 『명왕성 되다』)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 세계의 삶 자체를 시시포스의 형벌이 내려진 ‘유형지’(「유형지」, 『벌레 신화』)로 인식한다. 시시포스는 자신의 노동에 대한 해결이나 만족에 대한 희망 없이 일하는 사람을 나타낸다.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을 향해 계속되는 노동은 영원히 실패할 것이라는 좌절감을 동시에 생산한다. 따라서 시적 화자는 “구하고 절하고 넘어지는 어제와 오늘”(「고통과 신체」, 『생물학적인 눈물』)의 반복된 삶 속에서 고통의 비명을 지르지만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앉은뱅이꽃」, 『명왕성 되다』)는 고립감과 비통함에 빠져 산다.
그러나 시인이 정작 두려워하는 대상은 “생의 분노도 잊은 채, 태평하게 먼 이방의 전설을 말하는 내 입술”(「순례」,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이다. 개인의 자유를 박탈당했음에도 분노를 느끼지 못하고 자동인형처럼 감각이 마비되어있는 상태는 산주검(living dead)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시인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통각이 없는 시간들”(「물에 대한 사소한 변론」, 『명왕성 되다』)에 갇혀 침묵하고 이름을 부여하지 않으려 하는, 허무적인 존재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픔을 느끼는 감각이 없는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분명 죽음의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다. 시에서 주체의 부조리에 대한 인식은 자유로운 영혼의 갈구를 상징하는 ‘목마름’과 연결된다. 그래서 인생의 사막 한가운데서 “목이 마르다는 걸 알게 된 건/내가 광야의 시간을 견뎠기 때문일까/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밭을 걷고 있었기 때문일까”(「마라의 오아시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라고 자문해 본다. 결국, “밤거리를 배회하는 이유도 모른 채/방황하는 몽상가라고 말하는 당신은” “가짜다”(「당신은 가짜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라는 판결과 함께 시적 화자들의 자기반성이 이어진다.
카뮈는 시시포스가 결코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을 향해 무겁지만 신중한 발걸음으로 되돌아 내려오는 그 잠시의 “휴지의 순간”에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숨 쉬는 공간과 같은 이 순간을 고통만큼이나 확실하게 돌아오는 “의식의 시간”으로 해석한다. 깨어있음으로 살아가라! 따라서 시적 화자는 “도시의 은유에 머물렀다가/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며 와르르/내 얼굴이 무너짐을 본다.”(「거울 속의 얼굴」, 『명왕성 되다』) 이런 자기반성의 기록들 속에서 시를 짓는 한 인간은 계속 재판이나 심판을 받으며 반성성을 드러낸다. “나는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다짐으로/생을 버텨왔다 그러나/멀리서 새벽 종소리가 들려올 때/나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마루」,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라는 자아의 분열상은 시인의 열망하는 자아와 상황적 자아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을 나타낸다.
시시포스의 운명은 오로지 자신의 그 노동들이 결국에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거나 깨닫게 되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부조리한 인간 조건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바우만은 시시포스가 바로 자기 자신의 그 비참한 고통에 압도당해 사로잡히면서 그 자신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곤경에 대한 유일한 답변이자 그 곤경으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이끌리게 된다고 본다. 이재훈의 시에서 손목 깊숙이 칼날이 헤집고 들어오는 자살의 모티프가 자주 사용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돈을 숭배”하고, “수학의 아름다움이 지배하는 세계”(「안드로메다 바이러스」, 『명왕성 되다』)는 감염자의 공격성을 극대화하여 자살에 이르게 하는 바이러스가 공기 중에 떠돈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더러운 짐승이 된다”(「정의」, 『생물학적인 눈물』)는 두려움에 “칼을 의지하며” 사는 시적 화자들은 존재론적인 소외와 불안의 고통에 갇혀 “칼을 꺼내 손목을 그었다.”(「귀신과 도둑」, 『명왕성 되다』) 그러나 “손목 깊숙이 칼날이 헤집고 들어온 날/온몸이 뜨거워지다가 갑자기 허기가 몰려”(「결핍의 왕」, 『생물학적인 눈물』) 온다. 허무와 절망의 고통이 반복되는 이 세계에서 자살이 아니라 제 삶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한편으로 고통의 방언을 멈추지 않는다. “이 엄살은 모두 기획된 것. 더 타락하기 위해 준비된 것. 더 성스럽기 위해 예비한 것. 거룩한 엄살은 악마를 교란시킬 수 있는 무기”(「대리자(代理者)」, 『벌레 신화』)라며 계속 위악을 부린다.
삶이 본질적으로 좌절감을 안겨 주는 신의 사업이나 운명으로 묘사되는 한, 시인의 비전은 영원한 불만을 나타내는 이미지를 상상하는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늘 길 위에 있을 것이다./점퍼를 입은 사람들을 볼 것이다./새로 발행된 지폐의 냄새를 맡지 않을 것이다./윤리를 잊을 것이다.” “세상의 고아가 되어/명왕성의 시민이 될 것이다.”(「언젠가는 영월에 갈 것이다」, 『생물학적인 눈물』)라는 다짐들을 되뇌며, 좌절을 불러오는 생의 조건들에 대한 투쟁을 선언하고 저항의 몸짓을 탐구한다. “이제 군주는 필요 없다”(「녹색 기사」, 『벌레 신화』)라는 선언과 함께 “학살에 속한 세계”인 “거리의 질서에 저항하다 피를 흘리고, 저주의 말로 땀을 냈다. 짐승처럼 쓰러지고 일어났다. 바람이 사는 거주지에 자주 운신했다.” 그리고 “거리의 규율을 화분에 옮겨 담았다.”(「파종의 도(道)」, 『생물학적인 눈물』) 더 나아가, “씨앗이 되고 싶”은 시인은 거리의 규율을 흙 속에 묻어 어둠 속에 가둔 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가/역전에 누워 있는 노숙자들에게 닿고 싶”(「주술적 인간」, 『벌레 신화』)어 한다. 카뮈는 의식과 반항이라는 거부 행위는 포기와 정반대라고 말하며 인간이 제 삶의 주인이 되어 부조리의 사막을 벗어나지 않은 채 그 속에서 버티는 삶을 살도록 격려하였다. 반인반마의 혼종성을 상징하는 사수자리 켄타우로스처럼 떠돌고 방랑하는 순례자의 삶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시인은 “꺼지지 않는 촛불의 위태로움을/말 위에서 견디는 삶”(「사수자리」,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을 선택하고, 노래한다.
4. 강철 무지개를 벼리며
밤을 지새우니 비가 내린다. 사선으로 빗금을 그으며 산에 빗자국을 그린다. 비가 가슴을 그으며 내린다. 비가 가슴으로 파고들며 내린다. 모래를 잔뜩 실은 트럭이 언덕 밑으로 떠내려간다. 홍수는 아닌데 차가 떠내려가고 동물이 떠내려 간다. 비는 내일이면 그칠 것이다. 내일이면 그칠 텐데 모두 떠내려간다. 첩첩산중에서 아래를 본다. 모든 시간이 빗금을 그으며 상처를 낸다. 지혜가 없어 빛을 잃어버리는 언덕. 고개를 올려다보면 더 가파른 비탈이 있다. 지금, 여기. 나무와 나무 사이. 풀과 풀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둥그런 땅에서 한참을 졸다 깨어난 아침. 햇살이 언덕을 타고 오른다.(「궁륭(穹窿)」, 『생물학적인 눈물』)
고로, 거칠고 위태로운 인생의 사막 위에 씨앗이 되고 싶은 시인은 “햇살이 언덕을 타고 오”르듯,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산다. 위 시에서 비가 가슴을 파고들며 상처를 내는 이유는 “사선으로 빗금을 그으며” 내리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합리, 체계, 이념의 경계를 상징하는 ‘빗금’은 그 속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입은 상처의 원인이 된다. 이 시에서 시인은 궁륭형의 “빛을 잃어버리는 언덕”이 아침 햇살과 함께 무지개다리 형상으로 변성되는 기막힌 전환을 보여주면서, 존재와 타자 사이의 견고한 빗금을 뛰어넘는 시적 연금술을 발휘한다. 그리고 빗금 사이에 존재하는 이분법적 구분의 벽을 허물고 경계의 영역을 이동하면서 지속적인 변화를 꾀한다. 그 바람에 “나무와 나무 사이. 풀과 풀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인간과 반동물적인 물질세계 사이의 빗금이 풀어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노을은 경계도 없이 제 몸을 허”물기 때문에 “아름다운 노래가 된다.”(「풀이 던진 질문」, 『벌레 신화』) 그리고 사물의 경계를 지우고 스미는 “안개를 온몸으로 먹고 슬픔은 기지개를 편다”(「누대(屢代)」, 『생물학적인 눈물』)라는 서럽게 아름다운 문장이 탄생했다. 이렇듯 인간이 자기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존재자와 교섭하는 하나의 존재 양식으로서 기능하는 ‘사이 세계’는 두 기표 사이에서 번쩍이는 은유의 창조적 섬광을 보여준다. 그 ‘사이’라는 통로를 통과하면서 “새는 나무에게로 나무는 새에게로” 존재론적 변이를 한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옮아가는 것”(「새에게로 나무에게로」, 『생물학적인 눈물』)이라는 경이로운 시적 결론에 이른다.
신작시 「눈물로 돌을 만든다」는 눈물과 돌의 경계를 지우고 맞이하는 존재론적 변이를 표현하였다. 눈물에 감동하지 않는 사람을 ‘돌의 심장’이라고 표현하는 관용어처럼, 눈물은 돌이 지닌 딱딱하거나 차갑거나 건조한 상태와 반대되는 성질을 지녔다. 흐르고, 따뜻하며, 축축한 눈물은 생명력과 치유의 상징이 되었으며 선하고 경건한 감정의 증거로 기능해 왔다. 또한, 물질적 상상력에 있어서 ‘흐르는’ 물은 생명과 여성성을 상징하며 모성의 근원적 특성을 지닌 것으로 여겨져 물질을 이루는 근원적 원소로 이해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 “눈물은 사람을 만든다.” 그리고 “눈물의 사제”인 시인은 눈물의 시를 써서 사람을 만든다. “복수를 모르고/변신하는 방법을 모른” 채, “온몸을 섭리에 맡”기는 돌은 “평생 구르는 노동과/몸을 벼리는 일만 안다.” 이 돌은 한평생 고지식하게 생산의 노동에만 임해 온 프롤레타리아를 상징하고 있다. 기득권을 쥔 체제는 “땅의 온갖 죄를 돌에게 담당시켰다/던지고 차고 묻고 깼다.” 그 바람에 돌은 “썩지 않는 형벌의 몸을 가”지고 “침묵을 지키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시인은 “공중에서도 바닷속에서도 땅속에서도/몸을 부딪칠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다시 귀환하는 돌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한 상상은 노동자들이 운명에 맞서 싸워온 길고 긴 투쟁의 역사가 담고 있는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이 시에 따르면 돌은 분명 오랜 시간 인간들이 그들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며 흘린 눈물의 결정체이다.
이재훈이 물질적 상상력에 기반하여 고통의 ‘눈물’로 만든 ‘돌’은 연금술사들이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들을 배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 때 촉매제 역할을 했던, 상상적 물질인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처럼 여겨진다. 연금술사들은 연금술이 자연적 사물 안에 있는 형상을 ‘완전성으로 이끄는’ 작용에 관심을 가졌다. 카를 융과 같은 분석심리학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면, 연금술은 근원적으로 내부적이고 영적인 완전성을 획득하기 위한 내향적 탐구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연금술은 완전함을 추구하는 종교적 수행과도 같았다. 근원으로부터 창조하고 모든 경험을 살아있는 영혼의 형태로 변형시키는 시인은 연금술사와 공유되는 부분이 많다. 그런데 인간과 신성의 영역을 분명하게 한계지으려 했던 중세시기에 악마가 소유한 기예를 평가하는 척도가 되기까지 한 연금술적 상상력은 신의 창조 능력을 찬탈하려는 불경한 것이었다. 때로 불경하고 불온한 시인은 하나의 물질 원소에서 다른 원소로의 변성을 상상하며 “말이 진화하면 물이” 되는 “고도로 단련된 연금술”(「기타가 있는 궁전」,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을 구사한다. “잠든 말”을 만지면 “그제야 너는 벽화가 된다 널 만지면 황소가 되었다가 사슴이 되었다가 초원을 가로지르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타 노래를 부르는 추장이 된다.”(「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이처럼 시인의 ‘환상 연구실’에서는 모든 원소가 “경계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반사”하고 “굴절되어” “회귀”하며 “얽히고설키고” “꿈이 무지개로 반사”(「환상 연구실」, 『생물학적인 눈물』)되는 신비스러운 연금술이 펼쳐진다.
또 시인은 재봉사가 자신의 직업이라며 “가끔씩 바늘을 들고 몽상에 잠”겨 “그 몽상을 새로운 무늬로”(「다정한 재봉사의 재판」, 『명왕성 되다』) 짜내는 페넬로페가 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몽상을 꿰매어 꿈시를 짓는 시인이 바느질하는 이유다. 그는 “하늘을 날고 있는 제 모습”과 더불어 “저 먼 세계를 비상하는 영혼의 고난함을 짜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재훈은 돌덩이에 바싹 닿은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은 이미 돌 그 자체로 볼 수밖에 없는 비탈길의 시시포스가 느꼈을 고통과 슬픔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는 시시포스의 눈물에 눈물로 응대한다. 시인은 “내 삶은 죽어 있는 새들의 시체를 보는 것에서 시작하곤 한다”며 이른 “아침, 누군가에게 밟혀 배가 터져 있는 까마귀”(「까마귀 속에 나의 시간이 있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를 예사로 넘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문밖에서 울고 있는 힘없는 사람들의 “눈물 흐르는 소리” (「라틴어를 배우는 시간」, 『생물학적인 눈물』)에 먹먹해 괴로워한다. 이처럼 소외되고 나약한 존재에 관한 관심과 염려에서 부터 생겨난 시인의 감수성은 다른 사람들이 무관심하게 보아넘기는 바로 그것에서 촉발된다. 그래서 그는 “태초부터 울고 있는 사람”들의 “상처를 긁어내 주고 싶”(「부패한 사랑」, 『생물학적인 눈물』)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상처 입은 자들과 하나가 되어 울고 또 운다. 이재훈은 이 통곡의 지점에서 슬픔의 본질에 관한 탐구를 시작한다.
“일 분 일 초의 생존만이 철학”(「풀잎의 사소한 역사」, 『생물학적인 눈물』)으로 지배하는 세계에서 슬픔과 고통에 지나지 않는 한 개인의 인생이 보여주는 참담한 광경은 울음으로 살아온 인류의 역사로 재조명된다. 그 눈물의 역사는 슬픔과 고통이라는 감정이 인생 그 자체의 고유한 속성임을 드러낸다. 결국, 이재훈의 시는 “슬픔이 없는 세계는 없지”(「평원의 밤」, 『벌레 신화』)라는 인식과 더불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경험에 속하는 고통에 관한 깊이 있는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머리를 감다가 어처구니없이 울게 될 때./양치를 하다가 가장 더러운 모습으로 청승 떨 때” 밀려오는 “슬픔은 그저 조건일 뿐”, “운명의 이름일 뿐”(「기다림 방법」, 『생물학적인 눈물』)이라는 것이다. 즉 슬픔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적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고통과 함께 살아가기. 그렇다면 그 고통을 인식하는 주체의 태도가 더 중요해진다. 시인은 슬픔과 고통의 언덕 끝에서 절망보다는 삶의 회복을 염두에 두며 고통의 새로운 이해를 성취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이재훈은 슬픔과 고통의 경험을 어떻게 재구성하는가에 몰두한다. 우선, “눈물은 흘려야만 제 몸을 갖는다”(「비비디 바비디 부」, 『명왕성 되다』)라며 눈물을 언어화하고 있다. 오랜 시간 눈물로 말해온 탓에 “내 어깨는 울음으로 지어졌다.”(「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한 얼굴의 죽음에 관하여」,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시인은 개인의 자유가 구속될 때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육체라고 본다. 따라서 몸의 증언인 울음소리는 눈물의 언어가 되어 억압적인 사회질서 속 개인의 상처를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다음으로, 슬픔의 위안이 될 만한 위로의 기술을 모색한다. 인간의 울음소리가 가득한 이 광야에서 “위로의 딸이 되고 싶었다”(「물질에 울다」, 『명왕성 되다』)라는 시인의 고백도 있다. 글쓰기는 예전부터 병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곤 하지 않았던가. 현대의 “사람들은 불행의 뒤만 쫓으며/아파트로 들어가고 사무실에 갇힌다.” 이같이 “일상이라는 지능적인 시나리오에 빼앗긴” 현대인의 영혼을 위로하려는 시인은 “매일 입고 벗는 시가 되기 위해 환각을 맞는다.”(「당신은 시를 쓰는 사람인가요」, 『생물학적인 눈물』) 인간은 자신이 지닌 내적 가치와 외적 세계 사이의 틈을 메꾸는 하나의 상징적 형식을 갈망한다. “환각이 없다면 어떻게 인간을 견뎌낼 것인가”(「엉뚱한 기차는 꿈을 돕는다」, 『생물학적인 눈물』)라는 시인의 토로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환각’으로 비유되는 몽상만이 이 비참한 세계를 살아가기 위한 자구책이 된다. 따라서 “몽상도 죄가 되나요”(「다정한 재봉사의 재판」, 『명왕성 되다』) 라는 시인의 호소는 마음속 깊은 울림을 낳는다. “이후, 누구에게 밟히거나/공중에 던져져도 괜찮았다./나는 자꾸 진화한다./詩人이었다가 일용근로자였다가 백수건달이었다가 독학자가 된다./어떤 모습에도 아파하지 않는 내성(耐性)의 몸”(「비상」, 『명왕성 되다』)을 갖게 된 것이다.
계속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여러 시 속에서 되뇌고 있었지만, 사실 시인은 기적을 행하고 싶어 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고 싶”(「물질에 울다」, 『명왕성 되다』)고 “기적이 일어나” “완벽한 평화가 되”(기발표작, 「침묵의 달인」)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현대라는 부조리한 시대에 거주하고 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강한 연민과 공감을 드러내는 이재훈의 시적 세계는 고통의 파편을 재건하고 조립하며 별자리를 만들어나가는 개방적인 구조 속에서 마법적인 순간들을 아끼지 않고 창조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나는 그 무엇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무엇으로도 존재의 변성은 가능하다. 따라서 “차갑고 텅 빈 사물에/쇳물을 들이붓고 싶다./나는 매일 소멸되어야 빛나는/뜨거운 강철이었다”는 물질적 인식으로의 귀결은 그의 시 세계에서 지극히 합당해 보인다. 슬픔으로 울고 또 울다가 목이 마르면 “불구덩이에 내 몸을 녹이고 녹여/에밀레 에밀레 신명을 내겠다”라는, 강철로 된 시인의 몸은 슬픔이 깃든 에밀레종의 전설처럼 “비밀의 성소(聖所)”가 된다.”(「연금술사의 꿈」, 『명왕성 되다』) 아이가 어미를 부르는 듯 슬픈 소리를 내는 이 종은 “내 육체로 당신의 영혼을 말”하기 위해, “애써 당신의 운명을 노래”(「주술적 인간」, 『벌레 신화』)하기 위해 시인의 눈물과 피, 살로 빚어진 것이다.
시인은 “그저 그리워하는 직업”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고단한 삶 속에서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나르치스」, 『벌레 신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이 지닌 “슬픔은 멀찍이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되었어요. 만지지 못하고, 쓰다듬지 못하고, 홀로 방탕했어요”(「추천해주고 싶지 않은 직업」, 『생물학적인 눈물』)라는 자성을 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워하는 병에 걸려 매일 참회의 시를 쓰”(「치미는 몸」, 『벌레 신화』)는 그는 “모든 그리운 것들이 어룽대는/스밈의 환(幻)”(「연옥의 산」, 『명왕성 되다』)에 빠져 산다. ‘그리움’과 ‘스밈’은 사랑과 소통의 본성이 아니던가. 신형철은 문학이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의 말만이 진실하게 들리기 때문이라며 타인의 고통을 정확히 인식한 시만이 정확한 위로를 할 수 있다고 본다. “말이 없어도 언어가 없어도 알 수 있는” 소통의 길을 꿈꾸는 이재훈은 “원시의 감각”(「나르치스」, 『벌레 신화』)을 소환한다. 그것은 “비밀을 말하지 않아도 맛보면 다 아는” “춥고 서글픈” 사람들의 “맛보는 공동체”(「맛보는 공동체」, 『벌레 신화』)를 형성할 수도 있다. 이 원시의 감각 속에서는 “밟혀야 할 운명을” 타고난 “눈이 떠올라/내 발목을 쥐고/너도 나처럼/떠올라라/떠올라라” 속삭이며 “조용한 혁명을/일으키는 것이다.”(「눈」,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따라서 시인은 “이 세계에 충성하고 싶지 않다. 사랑하고만 싶다”며 장막을 걷고 “거리와 섞였”(「오로지 밤의 달만이 반겼다」, 『생물학적인 눈물』)던 것이다. “사랑은 위험한 길에서 더욱 악착같은 것./더 아래로 굴러떨어지더라도/더 위로 매달리더라도/마치 한 마리인 듯 두 마리인 듯/서로의 목을 물고 처절하게 붙어 있”(「아직 사십대」, 『생물학적인 눈물』)는 것이라는 깨달음 후, 시인은 ‘사랑’에 천착한다. 애당초 “시는 연애와 같은 것”(「당신은 시를 쓰는 사람인가요」, 『생물학적인 눈물』)이 아니던가. 시인이 “한 시절을 울다보면 살짝 데친 가난이 서로 부둥켜안고 있”(「나물 같은 시」, 『생물학적인 눈물』)으며, 그가 걷던 “순례의 여정엔 늘 사랑이 있”(「나르치스」, 『벌레 신화』)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분석을 통해 볼 때, 완성을 향한 시인의 조립과 재구성은 정확한 사랑을 위한 실험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재훈의 시 세계에서 구원의 징표인 어머니는 마루에 앉아 “엉덩이 밑에서 건져올린 슬픔을 한 올 한 올 뜨고 계신다.” 이 모습에서 시인은 “이별은 순간이다/그 순간을 이겨낸 자만이/슬픔을 바닥에 깔고 앉을 수 있다”(「마루」,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라는 통찰을 얻어 냈다. 상처 입은 자들이 슬픔과 고통에 침윤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고 더욱 단단해지기를 바라는 시인의 바람이 드러난다. 이념과 합리를 요구하는 자본주의 현대 사회에서 재킷을 입고 시를 쓰는 시인의 외투는 실상 “어머니의 살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재킷, 재킷! 하면 어머니의 뇌와 심장이 실이 되어/올올이 풀려나온다.” 그런데 그 헌신과 사랑으로 짠 “재킷을 입고 추위를 견딘 나는” 정작 “어머니에 대해 쓸 수 없다.”(「재킷을 입은 시인」, 『명왕성 되다』) 이 시대의 시인이 처한 운명을 잘 표현한 시가 아닐까 싶다. 시의 언어가 시인의 손에 의해 슬픔의 씨줄과 날줄로 엮어져서 한 편의 시로 태어난다. 하얀 종이 위에 천 일 동안 “잃어버린 기억을 하나씩 써나갔어.” “빼앗긴 내 기억들을 처음부터 다시 조립”하며 “미완성”의 시를 써나가는 것, “그것이 지상에서 내가 사는 유일한 길이었어”(「시인 셰에라자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라는 셰에라자드의 절박한 이야기는 완벽한 미완성을 향해 나가는 시인의 생애이기도 하다. 시는 미학적인 “완성을 향해 가면 또다시 미끄러지고 실패의 늪으로 향하는 본질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시인의 시적 사유는 “무거운 돌을 짊어지고 평생 반복하여 언덕을 올라야 하는 시시포스의 운명이 시의 운명과 다름” 없다는 말과 함께 공명한다. 시인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은 미끄러짐과 어긋남이라는 잦은 이별로 솟구치는 슬픔과 고통의 반복 속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을, 정확한 사랑에 이르려는 노력임을 알 수 있다. “다정한 시인”인 그는 어제와 다름없이 오늘도, 서럽게 아름다운 눈물의 선물을 우리에게 건네며 울음으로 지어진 어깨를 다독인다.
_ <딩아돌하>, 202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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