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한, 희망의 원리

이경수



1. 폐허를 걷는 법

최근 논의되고 있는 ‘미래파’에 관한 논의를 바탕으로 현대시의 문제와 방향에 대해 논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 솔직히 좀 난감했다. 우리 시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건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찬사든 비판이든 논의의 초점이 한쪽에 집중된다는 건 논의의 대상이 된 당사자들에게나 논의로부터 소외된 시인들에게나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 대부분이 이제 막 첫 시집을 낸 시인들이었으니 말이다. 여름호 계간지들의 상당수가 ‘미래파’로 지칭되었던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에 대한 비판적 논의에 할애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나로선 어떻게 하면 우리 시의 미래에 대한 좀더 생산적인 논의를 끌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됐든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에 대한 비판적 담론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의 하나로서 언제까지고 동어반복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섣불리 다른 지도를 그려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일전에 발표한 「‘다른’ 미래에 관한 몽상」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에 대해 나 역시 얼마간 매혹을 느끼고 있고, 어찌 됐든 이들과 함께 우리 시의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편 가르기 식으로 이들의 시를 매도하거나 또 다른 이분법의 함정에 빠져 ‘전부 아니면 전무’,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식으로 논의를 이끌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다른’ 미래에 관한 몽상」에서 제기한 의문과 비판에 대해서는 지금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다만, 비판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 글에서는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방향에서 논의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마침 서정성의 계보를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보이는 개성 있는 시집들이 최근 몇 달 사이에 출간되어, 아직은 막연한 내 생각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최근 우리 시단의 논의를 지켜보면서 ‘다른’ 미래를 열어갈 새로운 담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면서도, 작품이 받쳐주지 않는 담론이란 공허한 것임을 다시 한번 절감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록 소설을 중심으로 한 담론이기는 하지만, 가라따니 고진은 ꡔ근대문학의 종언ꡕ에서 사회 비판적 기능을 잃어버리고 사소해진 근대문학에 대해 죽음을 선언했다. 일본의 근대문학은 1980년대에 이미 종언을 고했다고 단호하게 선언하면서도,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한국문학에 대해서는 희망이 있다고 말했던 그가 이제 한국문학도 미래가 없기는 마찬가지라고 태도를 정정한 것이 내게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나 역시 우리 문학이 일본문학이 걸어간 것과 비슷한 행보를 걷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발언을 우리의 사정을 잘 모르는 이웃나라 비평가의 발언으로 가볍게 넘겨 버릴 수 없었다.
90년대 들어 80년대 문학의 공과에 대해 평가하면서 공보다는 과에 주목하여 근대적 이분법의 한계에 사로잡힌 파시즘의 문학으로 80년대 문학을 평가하는 시선이 널리 퍼졌던 것이 사실이다. 느린 행보이긴 했지만 여전히 사람살이에 대한 관심을 철회하지 않으면서 80년대 문학의 과오에 대해 자기반성하는 시들도 씌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는 세상을 온몸으로 느끼며 우리의 문학은 사회와 역사와 윤리라는 무거운 짐을 이제 문학으로부터 덜어주고 싶어했고,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문학은 그동안 억눌러온 욕망을 발산하고자 했다. ‘문학의 위기와 죽음’에 관한 담론이 널리 퍼지며 ‘디지털 문학’과 ‘대중문화’에 대한 담론이 이전의 문학의 자리를 대신했고, 사회․역사적 상상력이나 리얼리즘, 문학의 윤리에 관한 논의는 낡은 것으로 사회적 살해를 당해 버린다. 그 와중에 신자유주의의 옷을 입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전 지구적으로 세를 확장해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졌지만, 개인의 욕망에 관한 수많은 담론들은 ‘지금, 여기’가 마치 굉장히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인양 또 다른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문학 역시 최근 담론의 추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녕 이제 문학에서 시대를 앞서나가는 새로운 전위의 역할은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인가? ‘지금, 여기’가 자유롭고 민주적이라는 환상이야말로 신자유주의가 퍼뜨린 환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학 역시 그에 대한 비판적 담론을 이끌어내기는커녕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추종하거나 그것을 조장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문제는 과거와는 달리, 이제 문학조차 그런 환상이 거짓이며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문학은 사회․역사적 상상력을 철회하면서 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마저 놓아 버린다. 이미 문화의 전위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문학에 대해 누구도 그런 역할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도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기능을 문학에 기대하던 독자들이 오늘의 문학에 실망하고 하나둘씩 문학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었다. 문학의 위기를 과장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최근에 제기되는 위기 담론은 문학이 언제 위기 아닌 적이 있었냐는 식으로 낙관적이면서도 다소 무심하게 받아치기에는 좀더 근원적으로 보이며, 문학의 위상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학이 여전히 사람살이에 대해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고, 사람과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으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에게, ‘지금, 여기’의 문학이 위기로 다가오고 더 나아가 폐허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문학이 다른 대중문화와 차별 없이 재미와 새로움을 추구하는 스타일의 경쟁을 펼치게 된다면 솔직히 문학의 미래가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문학보다 훨씬 재미있고 새로운 스타일을 수용하기에 더 유리한 대중문화가 널려 있다.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시 중에는 스타일의 새로움으로 시라는 장르가 가진 한계를 극복해 보려는 시도가 보이기도 하지만, 그 새로움이라는 것도 장르의 한계를 넘어서면 그리 새로워 보이지 않는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유행하는 탈근대적 담론이 더 이상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이제 고민이 필요한 시점에 도달한 듯하다. 이 새로움이 담론을 추종하는 것은 아닌지, 새로움의 포즈만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좀더 냉정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많은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지금, 여기’는 사막이거나 폐허로 등장한다. 그들이 그리는 미래나 환상은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어찌 됐든 이 폐허를 견뎌야 할 때 폐허를 걷는 법은 각자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절망을 과장하며 냉소와 환멸의 시선으로 폐허를 걷는 자도 있을 것이며, 희망을 강요하며 또 다른 환상을 심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폐허를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묵묵히 폐허를 걸어 나가는 것일 게다. 미리 절망하여 걷기를 포기해 버리거나 오아시스라는 또 다른 환상에 사로잡혀서는 결코 폐허를 벗어날 수 없다. 이 글에서는 유행을 추종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세계를 담담히 개척해 가고 있는 몇몇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다른’ 미래를 구성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디디려 한다.


2. 리얼리즘과 서정성의 행복한 결합 가능성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새로움에 대한 추구가 확연히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가운데 리얼리즘과 서정성의 행복한 결합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전망하게 하는 시집들이 최근에 출간되어 주목을 요한다. 김진완의 ꡔ기찬 딸ꡕ, 이승희의 ꡔ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ꡕ, 고영민의 ꡔ악어ꡕ는 각기 다른 개성을 빛내며 리얼리즘이 아직 낡아빠진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첫 시집이다. 물론 이들의 경우 공교롭게도 1960년대 후반 출생으로 비록 끄트머리나마 386세대에 속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점을 눈여겨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세대 구분이 큰 의미를 가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386세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미 오래 전에 서정의 한 축을 단단히 구축하고 있는 문태준 시인도 있고, 역시 세대적인 구분에서는 벗어나지만 서정의 계보에 세울 수 있는 손택수, 신용목, 박성우 시인도 있다. 반면 김록, 장석원 등 세대적 구분과는 무관하게 오히려 새로운 시의 첨단을 달리는 시인들도 있으니 말이다.
리얼리즘과 서정성의 결합 가능성은 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90년대 시의 특성을 ‘신서정’에서 찾는 논의들은 80년대를 풍미한 리얼리즘 시가 90년대 들어 몸 바꾸기를 시도하던 중 서정성과 결합하면서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랑말랑한 서정으로 인해 상업주의와 결탁했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90년대에 유행한 생태주의 시 역시 윤리적 정당성이 문학적 성취를 앞서면서 자연에 대한 체험이 적은 젊은 세대에게 반감을 가져오기도 했다. 유형진의 「모니터킨트」나 「피터래빗 저격사건」 연작시는 디지털 세대로서의 세대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자연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보여준다. 자연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자연이 없었다고 이들이 인식하고 있다거나 기억을 사서 유년의 고향에 대한 기억을 갖게 된 이후로 오히려 혼란스러워지고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고백이 바로 그것이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이들 세대 나름의 정직한 고백이자 자연과 서정을 특권화해 온 기존의 시에 대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생태주의 시들이 그 담론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한계 안에 시를 가두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맥락이 이러한 자기 고백의 배후에 작동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리얼리즘과 서정성의 결합이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해서 모두가 판을 걷어치우듯 생활현실의 문제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작품은 대개 유행과 무관한 곳에서 나오는 법이니 말이다.
최근에 나온 김진완의 첫 시집 ꡔ기찬 딸ꡕ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동시대 시인들의 요란한 유행과는 무관하게 이 시집이 전통 서정의 미학을 계승하면서도 거기에 삶의 체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바탕이 된 사람살이에 대한 신뢰가 접목된 형식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등단 후 13년 만에 나온 첫 시집다운 내공을 보여주고 있는 시집인 셈이다.
김진완의 시는 「기찬 딸」, 「그 어느 잠결에」, 「굳은 살」, 「아픈 딸」 등에서 살아있는 인물 형상을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는데, 그것은 에밀 슈타이거가 말한 회감의 원리에 충실하면서도 사람살이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화자의 따뜻하고도 유머 어린 시선으로 각 인물에 세월의 깊이를 불어넣는 힘에서 오는 것이다. 기차 안에서 여러 사람의 은혜를 입어 태어났다고 해서 “多惠子”라는 이름을 얻게 된 화자의 어머니는 여러 사람의 성원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잘 살아보려 했지만, 그런 “마음은 맘에만 가득할 뿐” “빌린 돈 이자에 치여 / 만성두통에 시달”리는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화자의 어머니 다혜자씨는 “칙칙폭폭 칙칙폭폭 끓어오르는 부아를 소주 한잔으로 다스릴 줄도 알아/ “암만 그렇다캐도 문디, 베라묵을 것 몸만 건강하모 희망은 있다!””라는 말을 화자에게, 또 자신에게 건넬 줄 아는 “여장부”이다. 그의 표현대로 정말이지 “기찬, / 기-차-안 딸”(「기찬 딸」)인 것이다. 화자의 어머니 다혜자 씨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떤 어려움도 꿋꿋하게 이겨내는 생활력 강한 어머니의 모습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형상화해낸다. 외할아버지를 통해 전해 들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어머니가 태어나던 순간의 기억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구어체를 활용함으로써 형성되는 리듬감과 의성어․의태어의 사용, 적절한 대화의 삽입 등을 통해 생생하게 장면화된다. 이러한 형식적 특성은 백석 시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걸쭉한 경남 진주 사투리가 더해져 백석 시와는 또 다른 좀더 해학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우리말이 가지고 있는 반복의 미학을 잘 살리고 있는 점도 김진완 시의 장점이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시에서 잊혀져 가던 전통적인 해학의 정서를 계승해 인물과 장면에 끈끈한 화해의 힘을 불어넣는 것은 김진완 시가 가진 특별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의 시의 매력이 여기서 멈추었다면 유행을 추종하지 않는 뚝심은 있지만 새로울 건 없다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과 삶에 대한 따뜻한 애착을 보여주고 있는 그의 시는 실은 세상에 대한 아주 특별하고 날카로운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동생의 손에 백인 굳은살을 보며 남의 살이 아파서 울먹이던 시절의 자신을 기억해내는 「굳은 살」에서는 “삼팔육이고 사팔육이고 있는 것들이 더 지독해”라는 동생의 말을 빌려, 이제는 남의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는 노회한 사람들이 되어버린 “삼팔육 꼬라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거기서 “그저 거품뿐이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달라진 세상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인연설화 혹은,」에 오면 그 변화의 근원을 추적하는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주기도 한다. 100년 전 화자의 아내와 피붙이들과 전답을 강제로 빼앗고 화자를 죽이기까지 했던 악랄한 도적은 다름 아닌 ‘자본’이었음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밝혀진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다고 말해야 할” 자본은 시인의 표현대로 악연을 이어나가는 “독한 놈”인 것이다.
각기 살아 있는 개성을 지닌 사람에 대한 시인의 애정은 시집에 따뜻한 해학의 정서를 불어넣는다. 그러나 그것은 무차별적 화해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오히려 끊임없이 몸을 바꾸며 생명력을 이어가는 자본에 의해 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시인이 품게 되는 세상에 대한 근원적인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시는 리얼리즘이 폐기처분되어야 할 가치가 아니라 시인들의 각성에 의해 새롭게 실험되고 구축될 수 있는 가치임을 하나의 예로서 실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리얼리즘은 아직도 힘이 세다. 다만, 그것을 시와 접목시키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을 뿐이다.
올 1월에 출간된 이승희의 첫 시집 ꡔ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ꡕ는 386세대가 시로 쓰는 일종의 후일담이라고 할 수 있는 시집이다. 그 후일담은 벽제라는 공간을 빌려 전해진다. 벽제는 가난하던 시절 시인이 살던 곳으로 아직도 그의 누님이 혼자 노동하며 외롭게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벽제 가는 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여러 편의 시에서 이승희는 가방공장에서 일하는 누님이 살고 있는 벽제라는 장소에 대해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것은 어려서 자신을 희생하며 시인을 “업고 키웠다는 누님”(「벽제 가는 길」)에 대한 부채의식이기도 한데, 시를 읽어갈수록 그것이 전부는 아님을 짐작하게 된다. 벽제는 시인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 누님이 지금도 힘겹게 노동하며 살아가고 있는 곳이자, 민주화투쟁에 몸 바친 투사들의 화장터가 가까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벽제에 간다는 것은 좀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젊음을 바쳤던 지난 80년대의 기억을 떠올리는 행위를 동반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80년대적인 삶의 방식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진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시인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벽제 가는 길은 단지 벽제를 향해 다가가는 물리적인 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잊혀진 과거를 망각의 늪에서 끌어올리는 행위를 의미하게 된다.
가난하고 팍팍했던 그 시절을 시인은 잊고 싶을 만큼 끔찍해 하지만, 누님을 모른 척할 수 없는 것처럼 지난 시절을 잊고 살 수는 없음을 깨닫는다. 공장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소풍가자고 누님을 조르면서도 그가 누님이 사는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승희의 시에서 ‘누님’은 벽제라는 장소에 현재 살고 있는 실존하는 누님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상징적인 존재로 겹쳐 읽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누님은 이승희 시인의 누님이자 그 시절을 어렵게 살아 온 우리네 누님들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누님을 향한 시인의 발언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시인의 넋두리이자 독백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기는데, 그 때문에 누님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 벽제 화장터에 묻혀 있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들게 한다.
그것은 누님을 만나러 벽제 가는 길이 바로 시인에게 386 세대로서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지난 시간을 기억함으로써 찾는 행위와 겹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승희 시인의 자기 고백적 시 쓰기가 의미하는 바이다. 「벽제 가는 길」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일은 가난하다는 것인가.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그 순간 돌이 될 것이다.”와 같이 설의적 의문형과 명령형 어미가 쓰여 청자를 상정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화자의 독백으로 들린다.
이승희의 첫 시집에는 청승맞은 가락과 어조가 눈에 띈다. 그의 이런 어조 상의 특징을 가리켜 너무 감상적인 것이 아니냐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자기 고백적 행위이기 때문에 청승맞아 보이는 어조를 동반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어머니 같은 누님 앞에 앉아-혹은 누님의 무덤 앞에 앉아- 혼자 넋두리하듯이, 이승희 시의 화자는 가난하고 고생스럽던 지난 시절이 지나가버린 과거의 시간으로 잊혀지지 않고 현재에도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누님이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그것이 아닐까 싶다.
둥근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 그의 시에서 둥긂은 날카로움과 단단함을 품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오랜 세월 삭혀 온 날카로운 분노의 칼을 품고 있는 단단한 둥긂. 그의 시가 너그러워 보여도 슬픔을 유발하고 청승맞은 듯싶다가도 너그러운 연민의 웃음을 짓는 것은, 바로 이 단단한 둥긂, “각진 세월이 파랗게 날 세우고 있”(「돌멩이를 쥐고」)는 둥긂 때문이다. 이승희의 시는 가난했지만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이 살아 있던 지난 시대에 대한 후일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난 시절에 대한 감상적인 향수에 젖어 그 시절을 무조건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섣불리 부정하거나 모멸하지도 않는다. 이승희의 시에서 부정을 긍정으로 전환하는 힘은 가난의 체험으로부터 온다. 그의 시에서 가난은 징글징글한 과거의 기억에 머물지 않고 시인의 현재를 끊임없이 간섭해 오는 윤리적 척도가 된다. 그의 시가 타인에 대한 유대와 연민의 시선을 획득하는 것도 바로 이 가난의 체험으로부터이다. 이승희의 시에서 그것은 도덕적 한계에 갇히지 않는데, 그의 시에서 가난이 핍진한 서사를 동반하기보다는 1인칭 화자의 고백적 어조에 기대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체험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서정적 색채를 통해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밖에도 농경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해학의 정서를 계승하고 있는 고영민의 ꡔ악어ꡕ를 주목할 만하다. 고영민 시인의 세상에 대한 태도는 시집의 맨 앞에 수록되어 있는 「즐거운 소음」이라는 시에서 잘 드러난다. 한밤중에 시인은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지 / 건물 전체가 울”리는 소음을 듣는다. 매우 짜증나는 상황일 텐데, 그로부터 시인은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 / 만들기 위해 / 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주는 삶의 방식을 발견한다. 나 아닌 타인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조금씩 자기의 욕심을 줄이고 자신의 자리를 내주는 태도가 필요한 법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덜 가진 사람에게 좀더 나눠 줄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이 자발적으로 가능하기만 하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만, 대개는 힘을 동원해 빼앗고 힘이 없어 뺏길 뿐, 모두가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내주어 다른 존재가 들어설 틈을 마련해주는 일이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영민이 제시하고 희구하는 삶의 태도는 너무 이상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이런 생각이 가능한 것은 그의 현실 인식이 부족하거나 낭만적이어서라기보다는 농경문화에 익숙한 그의 천성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조화롭게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꿈꾸는 시인은 모두가 자신의 자리를 “아주 조금씩만 양보하면” 타인을 받아들여 더불어 살아가는 일이 가능함을 이 시를 통해 말하고자 한다. “저 한밤중의 소음을” “웃으면서 참는” 것이야말로 시인이 제시하는,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태도이다.
고영민의 시에는 평생을 살면서 큰소리 한번 심각하게 내지 않은 부모가 주름진 얼굴로 따뜻한 웃음을 짓고 있다. 오래 세파를 겪어 오면서 고난조차 웃음으로 넘길 줄 아는 여유를 획득하게 된 노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미소가 그의 시에는 퍼져 있다. 그는 “마르고 닳도록 외치다 / 인이 박여 생긴 생계의 운율 / 계란 한 판의 리듬”(「계란 한 판」) 같은 시를 쓰고 싶어한다. 날마다 동네에 울려 퍼지는 “계란 사세요” 소리에는 생계의 운율이 깃들어 있게 마련이다. 고영민은 자신의 시가 책상 앞에서 씌어지는 시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땀방울과 헐떡이는 목소리를 담아 씌어지는 시이기를 바란다.
그의 시는 넉넉한 웃음을 품을 줄 안다. 아마도 그것은 농경문화적 정서에 익숙한 시인에게서 체화되어 나오는 것일 게다. 세상을 따뜻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가 늘 공감을 자아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도시에서의 단절된 삶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그의 시는 자칫 안일하게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선악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재단하려 드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시는 긍정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담담히 그려 보여줌으로써 온기를 서서히 전염시키는 방법을 따를 줄 안다. 새로운 서정이라고 부르기에 고영민의 시는 아직 미흡하지만, 그럼에도 신뢰가 가는 까닭은 그가 가진 느긋함 뒤에는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섬세하게 읽어내고 요란한 포즈 없이 위로할 줄 아는 예민함과 따뜻함이 동시에 숨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밖에도 이미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중견 시인이지만, 김신용 시인이 「도장골 시편」 연작시를 통해 최근에 보여주고 있는 행보는 새로운 서정을 개척해나간다는 맥락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의 시는 도장골이라는 인적이 드문 마을의 풍경, 자연현상,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느리게 관찰함으로써 그로부터 깊이 있는 인식과 사유에 도달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들은 감성적 차원의 주관화에 그칠 위험을 안고 있는 서정성에 사색의 깊이를 부여함으로써 서정성을 확장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빠른 속도의 시대에 홀로 느리고 깊게 사유하며 생의 의미를 통찰하고자 하는 김신용 시인의 시작(詩作)은, 새로움은 발 빠른 행보만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예로서도 기억할 만한 것이다.


3. 시인의 몽상과 구원으로서의 영성(靈性)

앞서 살펴본 시인들이 리얼리즘과 서정성의 결합을 시도함으로써 새로운 서정을 개척해 나간 시인들이라면, 이 장에서 살펴볼 시인들은 자유로운 몽상을 펼쳐 보이면서도 그것이 환상을 통해 ‘지금, 여기’에 대한 환멸로 흐르지 않고 구원으로서의 영성에 이를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인들이다. 이들의 시는 ‘미래파’, 또는 ‘미래형 시’라는 범주에 포함되어 논의되기도 했지만, 특권화된 서정으로부터의 일탈을 시도하는 듯 보이면서도 궁극적으로 영성을 예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환멸을 유발하는 시들과는 다른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관점이다. 다시 말해 탈주체적이라거나 탈근대적이라는 수식어가 이들의 시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서정을 확장했다거나 ‘다른’ 서정의 길을 개척해 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좀더 사실에 근접한 판단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함께 논해 볼 만한 시인으로는 이재훈, 박판식, 김병호 등이 있다.
이재훈의 첫 시집 ꡔ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ꡕ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몽상을 통해 그가 펼쳐 보이는 공간은 말을 타고 달리는 드넓은 평야, 즉 태초의 공간으로서의 대지라고 할 수 있다. ‘말(馬)/말(言)’의 이중성을 통해 이재훈의 시는 태초의 공간을 거침없이 달리는 활달한 상상력의 현신(現身)으로서의 말(馬)과 태초의 언어로서의 말(言)을 겹쳐 놓는다. 말의 현신을 통해 태초의 언어에 다가가고자 하는 그의 시는 자기애로부터 출발하고 있지만, 근원에 다가서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낸다. 그것은 이재훈의 시에서 종교적인 연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종교시로 귀착하지 않으면서 시원에 대한 상상력을 펼쳐 보인다. 이것은 우리 시에서는 낯선 풍경으로, 이재훈 시인의 시가 기대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몽상을 통해 활력 있는 새로운 공간의 창출에 성공하고 있는 이 시인의 시도 자기 상처를 들여다보고 아파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한밤중이 되면 내 몸에 수선화가 핀다”, “나르키소스여 내 몸에 오지 마소서”(「수선화」)라는 고백을 통해 시를 쓰는 행위가 시인에게 자신의 상처와 대면하는 시간임을 짐작하게 하지만, 태초의 공간과 언어에 다가서려 하는 시원에 대한 갈망이 그의 시가 나르시시즘에 발목을 잡히지 않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적 상상력을 활용하면서도 종교시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그의 시에서 종종 순례자의 태도가 연상되는 것은 아마도 그런 까닭에서일 것이다.
박판식의 첫 시집 ꡔ밤의 피치카토ꡕ는 한 시인을 지나간 유년의 상처와 어둠과 불치와 피로의 병력으로 빼곡한 몽상의 기록이다. 그곳에는 한밤중에 흐느끼는 어머니가 근원적 상처로 새겨져 있다. 세상으로 가는 고행의 길을 “온몸으로 채찍 받으며” “타박타박”(「화남풍경」) 걸어가고 있는 어머니의 아픔과 슬픔은 시인에게로 고스란히 유전된다. 그는 슬픔과 우울과 고뇌가 자신의 천성임을 예감한다. 그것은 마치 몸의 일부가 붙어서 어쩔 수 없이 한 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샴쌍둥이의 운명을 닮았다. 지독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써봤겠지만, 결국 시인은 공존의 방법을 터득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운명애야말로 박판식 시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박판식 시인이 선택한 길이다. 이제 결과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 바로 그 과정이 시가 된다.
그는 엄살을 부리지 않고 자신에게 드리워진 운명의 어두운 그림자를 담담히 감당하면서도 만만치 않은 안간힘으로 거기에 맞선다. 그것은 박판식의 시에서 “구름의 부력”(「샴쌍둥이」), 혹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손에서 튀어 오른 “새의 반발력”(「인생의 전진」)으로 표현된다. 이 세계가, 또는 우리의 삶이 “더러운 샘”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서 “지진 같은 굉음의 푸른 줄기 하나”(「밤의 피치카토」)를 보고자 하는 의지가 그의 시에 구원의 가능성을 마련한다.
김병호는 최근에 출간된 첫 시집 ꡔ달 안을 걷다ꡕ에서 어둡고 음울한 몽상의 날개를 펼쳐 보인다. 시인의 몽상을 촉발하는 것은 어둔 밤에 떠오르는 시간이다. 검은 싹이 돋고 검은 꽃이 피는 숲에서 검고 우울한 시인의 몽상은 시작된다. “불탄 묵시록 같은 검은 숲”에는 청맹과니 마술사인 아버지와 아버지의 마지막 주문을 외워 기괴한 짐승들―“얼룩 코끼리와 혹 뗀 낙타 / 털 빠진 늙은 거위와 죽지 부러진 타조떼”―을 불러 모으는 누이, 누이를 범한 눈먼 짐승들이 살고 있고, 불탄 나무와 검은 싹과 “불길한 예언” 같은 “검은 꽃”이 피어나고, “죽은 짐승들의 피가 흐르고”(「아버지의 화원」) 있다.
생명력이 넘치는 짙은 초록의 숲이 아니라, 봄을 기억하지 못하는 숯이 된 뿌리들로 가득한, 불탄 묵시록 같은 검은 숲을 그가 몽상의 공간으로 선택한 이유는 ‘지금, 여기’에서는 더 이상 평화로운 마음의 안식처로서의 고향이나 숲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은 여전히, 임신한 아내와 잎 푸른 감나무가 교감하고, 아이의 생명의 기운이 가족과 친지들에게 태몽으로 미리 전해지는(「환한 길 하나」), 생명세계의 신비로움에 설렐 줄 아는 가슴을 가졌지만, ‘지금, 여기’는 봄에 관한 기억을 잃어버린 죽은 생명들로 가득하다. 그가 믿어왔고 또한 여전히 갈망하는 세계와 ‘지금, 여기’ 사이의 깊은 불화가 김병호의 시에 어둠과 밝음이 공존하게 한다. 그는 아이의 태동에서 “겨울 언 강 밑을 가지런히 헤엄치는 피라미의 꼬리지느러미 같은” 생명의 기미를 느끼고, 그 “기미가 이 별을 움직인다”(「幾微」)는 깨달음에 이를 줄 아는 시인이다. 그러나 이 어둡고 암울한 세계가 시인의 감수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검은 숲이라는 몽상의 공간은 그 불화의 틈새에서 발견된 것이다.
묵시록적 전망과 생명과 일상에 대한 따뜻한 감성이 충돌하는 김병호의 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멸과 냉소에 빠져들지 않는다. “오래 전에 지운 아버지의 얼굴이 / 내 아이의 얼굴에 돋는”(「강가의 墓石」) 것을 보며, 시인은 그 시간의 유장한 흐름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어두운 검은 숲의 세계가 점점 침몰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겨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김병호 시인은 “아름다운 순장의 형식으로”(「雪害林, 그 아름다운 순장의 형식으로」) 몰락의 시간을 함께 하고자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이재훈, 박판식, 김병호 등의 시는 어둡고 우울하고 검은 몽상의 시간을 펼쳐 보이지만, 최근에 유행하는 탈근대나 탈주체적 지향의 시들과는 다른 흐름을 형성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90년대적 ‘신서정’이나 최근의 ‘환상’과도 다르고 앞장에서 살펴본 리얼리즘과 서정성이 결합한 시들과도 다른 이 시인들의 행보가 주목되는 까닭은, 자기 상처를 들여다보는 데서 출발해 어두운 운명에 절망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환멸에 발목을 잡히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며 살아가는 힘을 이 시인들이 발견할 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겨우 첫 시집을 낸 시인들이지만, 유행에 쉽게 흔들리지 않으며 개성적인 시세계를 열어가 주기를 기대해 본다.


4. 오래된 미래

이 글에서 논한 내 생각은 시대착오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시대추수적인 시보다는 차라리 시대의 변화에 발 빠르게 따라가는 것을 거부하는 느린 시로부터 ‘다른’ 미래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근대라는 시기가 열릴 때 노래하는 시, 읊는 시로부터 읽는 시로의 커다란 변화가 있었듯이, 다시 한번 문학에 커다란 변화의 시기가 왔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시든 소설이든 문학의 위상 자체에도 변화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더 이상 시인이나 소설가는 지식인이자 철학자로서의 면모를 지니지 않게 되었으며 비평가라고 해서 그리 다르지도 않다. 사회에서도 더 이상 그들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여전히 신문의 칼럼이나 문화 잡지의 칼럼 한 자리를 시인이나 소설가가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관례에 의한 것일 뿐 그만큼의 사회적 존경의 표현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졌다. 그러나 문학이 새로움과 재미, 언어적 마력만으로 승부를 건다고 했을 때, 그것은 궁극적으로 만화나 영화, TV 드라마, 게임 시나리오 등과 다를 바가 없어질 것이다. 문학의 특권은 놓으려 하지 않으면서 대중문화의 상상력을 추종하거나 기존의 담론을 추종하는 것은 이미 대중문화의 상상력과 담론의 우위를 시인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이대로라면 머잖아 우리 문학은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대중문화와 서로 재미와 새로움을 견준다면, 상대적으로 시는 훨씬 불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생활인의 현실은 그렇게 많이 변한 것은 아니다.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세상을 숨 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피가 돌고 웃고 울고 분노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세상의 속도에 발맞춰 가야겠지만, 그런 세상에서 느끼는 상실감과 소외감은 당연히 더 클 수밖에 없다. 기계의 부품처럼 단자화 되어 가는 세상을 살아가며 상대적으로 느리고 공들여 읽어야 하는 문학을 선택해 읽는 사람들이 문학에 기대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에 대해서도 이제 좀더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니, 그렇게 거창할 필요까지도 없을 것이다. 시인 개개인이 느꼈을 상처가 좀더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학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과도한 짐을 질 필요도 없겠지만, 너무 개인적이고 사소한 상처에만 집착하는 것도 바람직한 미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문학의 상품화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이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문학이 열어가는 미래는 최소한의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기능을 지켜내는 데 위치해야 하는 건 아닐까? 물론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은 다양하게 나타나야 할 것이다. 개개의 시인이 지닌 개성적인 목소리들이 더 자기 색깔로 빛날 때 우리 시는 죽음이라는 눈앞의 현실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ꡔ근대문학의 종언ꡕ에서 가라따니 고진이 한 말은 우리 문학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게 한다. 그의 발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절망을 과장해서도 안 될 것이고, 그렇다고 우리의 사정을 모르는 남의 나라 비평가의 발언이라고 무시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근대 문학의 종언에 관한 그의 발언은 많은 부분 진실을 담고 있다. 다만, 그를 따라 문학의 장을 떠나 실천의 장으로 나아갈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죽음’의 현실을 인정하고 끌어안은 상태에서 우리의 고민은 다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 우리 시에 나타난 실험 과잉으로 보이기도 하는 징후를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찬양할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첫 시집으로 새로운 목소리를 얻고자 고민하고 있는 그들의 시를 죽음의 징후로 과잉 해석하고 싶지도 않다. 우리 시의 ‘르네상스’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는 판단이 세대론을 등에 업은 다소 과장된 욕망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분명히 다른 차이를 보이고 있는 이들의 시를 섬세하게 읽는 것을 거부하고 싸잡아서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 역시 또 다른 욕망을 숨기고 있기 쉬울 것이다. 우리 시가 오래 지속되어 온 낡은 이분법의 투쟁 속에 다시 휘말리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서로를 할퀴고 상처 내는 방식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으로 빛을 발하며, 신자유주의라는 또 다른 제국주의 논리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사회에서 숨죽인 개인이 되어가는 우리의 삶에, 그리고 예전의 위상과 빛을 잃은 채 좁은 영역에 갇혀 가는 우리 문학에 예측 불가의 이질적인 흐름을 만들어가길 바랄 뿐이다.
문학이 예전의 위상을 잃어가고 있는 지금, 그런 흐름이 떠나버린 독자들을 되돌리고 경직된 우리 삶에 균열을 내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까지는 솔직히 이 글에서 논하기 어렵다. 다만, 근대소설이 사회와 관계 맺는 방식과 시가 관계 맺는 방식이 다르고, 애초에 소설에 비해 장르의 성격 자체가 좀더 주관적이고 사적인 장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면에서 근대적인 장르의 바깥, 혹은 적어도 경계에 놓여 있는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던 점이 어쩌면 시의 미래를 다르게 열어갈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중에 한 길은 느리고 오래된 천착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발견하는 길로 열릴 것이다. 문학의 경우, 낡음과 새로움은 결코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가장 새로워 보이는 것이 오히려 낡은 것일 수 있고, 낡아 보이는 것이 새로운 것일 수 있는 아이러니가 가능해지는 일이 묘하게도 문학의 장에서는 가능하다. 우리 문학이 다른 미래를 열어갈 가능성 중 하나는 분명 오래된 미래를 개척하는 방향에서 열릴 것이다. 다만, 그것이 적당한 서정과 적당한 온기와 적당한 화해의 포즈에 안주하는 방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어쩌면 서정성을 포기하지 않는 길을 선택한 시인들에게는 더 치열한 싸움이 필요해 보인다. 세상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유지한다는 것이 그들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분명 치열한 싸움이기도 하다. 어느 하나가 자기를 완전히 죽이고 다른 하나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바람직한 의미의 사랑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이질적인 개성이 치열하게 부딪히며 공존하는 법을 터득해 가는 것이야말로 생명을 지닌 것이 다른 생명을 지닌 것을 일방적으로 해하지 않는 방식의 사랑이 아닐까. 이제 우리 시도 이러한 사랑법을 터득해 가야 할지 모른다. 아마도 그럴 수 있을 때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희망의 원리를 논한다는 것은 다소 무모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모한 희망이라도 품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으로 이 시대를 견뎌나갈 수 있을 것인가? 환멸에 중독된 우리를 구원해 줄 가능성은 무모해 보이는 희망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우리는 이미 여러 번 보아오지 않았던가? 무모해 보이는 길을 고집스럽게 가는 사람이 마침내 열어가는 길 아닌 길을 말이다.

이경수
199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반년간 ≪작가와비평≫ 편집동인.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저서 ꡔ불온한 상상의 축제ꡕ ꡔ한국 현대시와 반복의 미학ꡕ 등
Posted by 이재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