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적 낭만의 순간


  박수연



  시집은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로 마무리된다. 이 말은 서정시의 보편적인 발화방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재훈의 시집은 그의 실제 삶과 분리된 또다른 삶을 “나”의 정처로 삼은 말들의 저수지이다. “나”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그의 시가 고정성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시에 대한 옳은 이해가 아니다.
  말은 본디 뛰노는 것이다. 말(馬)도 그렇고 말(言語)도 그렇다. 전자의 말은 이미 만들어진 길을 가로질러 넘어다니는 실제적 생명체이며 후자의 말은 지금까지 소비된 적이 없었던 의미를 끄집어내어 세계의 비약을 이루어내는 기호이다. 이것들은 그러므로 논리화되거나 체계화되기 이전의 어떤 마음들에 대해 최초로 활성적 힘을 부여하는 존재들이라고 해야 한다. 이것이 지속적으로 움직이며 탄생하는 존재들의 최초의 이유이다. 그리고, 시의 존재 이유가 그럴 것이다. 잘 만들어진(혹은 솟아나온) 시는 세계와 최초로 만나는 존재들의 육성이다. 이렇다는 점에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는 시적 계기에 대한 보고서이다. 이 점을 알아보기 위해 몇 개의 계단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재훈은 시적 정황들에 대한 낭만적 구성의 재능을 이 시집 하나로 일약 보여준다. 이는 특히 시의 언어들을 수려하게 배열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최근의 젊은 시인들이 시행과 시행 사이의 간격을 넓게 벌려 놓고 일반적인 언어 논리로 규정되지 않는 의미들을 다차원적으로 부려놓는다는 사실에 대해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낯선 언어들 때문에 일견 난해해보이기도 하는 이런 경향들에 대해서는 되도록이면 상식적인 선에서 그 작업의 의미를 파악해보는 일이 필요하다. 일반론의 차원에서 접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작업의 특이성 또한 소통되기 힘든 개체성으로만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별체들의 특이성이란 일반성의 차원 위에서만 작동하는 힘의 운동으로 구성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젊은 시인들의 독특한 언어사용 방식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혹은 성공한 것이든 실패한 것이든, 기존의 언어 체계를 교란시킴으로써 새 세계의 환기에 도달하려는 의도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시의 무게 있는 경향은, 90년대 이후 인문사회학계의 언어학적 문제설정과 강하게 연동되면서 시적 언어의 의미와 존재방식에 대해 발본적으로 질문하도록 하는 효과를 갖는다. 이것을 의사소통의 난항이라는 이유를 들어 평가절하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닐 것이다. 모든 언어 사용 방식에는 각각 제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 새로운 언어 사용이 얼마나 애초의 의도를 실현하고 있는가 하는 점임에 틀림없다. 이재훈의 시는 그런데 그 새로운 시의 경향에서 일정하게 비켜 서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 모습이 낭만적이라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시의 주제면에서 도드라진다.

  맨발로 유리 밟는 소리를 듣는다. 유리의 머리가 내 발바닥을 찢는 수런거림을 듣는다. 수행자처럼 온 땅을 모두 밟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땅은 너무 넓어. 내 온기가 기댈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 그 사이의 위태로운 희망, 그리고 낯선 꿈들뿐.

  내가 밟는 유리의 온기를 기억하고 싶었다. 그 뜨거운 감촉. 두꺼운 군살을 비집고 환한 몸으로 날 찾아오는 신비. 유리를 밟으며 축제를 연다. 붉은 포도주가 흐르는 식탁. 얼굴을 분칠을 하고, 혀에 피어싱을 하고, 히피처럼 연기를 피워 올린다. 치렁치렁한 푸른 옷을 입고, 방 안을 빙빙 돈다. 사각사각 유리가 몸 안에서 춤을 춘다. 두려움은 없다. 정작 두려움은 예언자의 눈, 인디언의 귀, 언 고기를 사각거리는 알래스카의 몽골리안을 그리워하는 것. 生의 분노도 잊은 채, 태평하게 먼 이방의 전설을 말하는 내 입술.

  맨발로 유리 밟는 소리를 듣는다. 유리가 내 몸을 돌고 돌아 검붉은 내장을 모두 만난다면, 늦은 밤 가냘프게 흔들리는 마음까지 싹둑 잘라버린다면, 나는 백치가 되리. 내 몸이 된 유리. 너의 촉감밖에, 소리밖에 모르므로 나는 불구다. 저기 저쪽, 나처럼 맨발로 유리 밟으러 가는 젊음들. 땡볕 아래 꽃들이 붉은 햇살을 게워내고 있다. 절정이다.
                                     ―「순례」 전문

  삶이 고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만 그 고행을 실체로 감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령, 유리를 밟는 소리는 그것의 감각만으로도 소름끼치는 반응을 이끌어내게 되는 것이다. 이 감각은 그러나 대상에 직핍해 들어가도록 하는 매개물이기도 한데, 이재훈에게는 그것이 “희망” “전설” “절정”의 맥락 아래 배열된다. 이를테면, 끔찍한 기억의 감각은 절정에 도달하는 교두보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감각의 기억으로부터 시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도록 하자. 모든 시에 대한 것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어떤 시는 애초에 세계의 부재와 결여에 대한 기록으로 출발한다. 언어가 세계의 압도적인 숭고함에 대면하는 인간의 보잘것없는 행위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또한 인간은 그 언어에 주술성을 부여함으로써 삶의 초라함을 벗어나려 한 존재였다. 이 벗어남의 행위가 은유를 구성할 때 표현될 수 없는 세계가 언어에 포함될 수 있다고 믿은 것도 언어를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요컨대 감각은 여전히 세계의 두려움에 기인하는 고통이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의미가 은유적 확장에 의해 언어에 도입된다. 세상은 여전히 압도적인데도 그 세상을 표현하려 하는 언어가 위로의 힘을 부릴 줄 아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의 은유는 무엇보다도 대상의 감각에 대한 언어적 표현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시는 생각하기 이전에 듣고 보는 행위이며 감각하고 지각하는 행위이다. 인식은 그 이후의 문제이다.
  「순례」는 “유리 밟는 소리”의 끔찍한 감각에서 출발하여 “절정이다”라는 간명한 진술로 끝난다. 시는 이를테면 감각으로 시작되고 인식으로 마무리된다. 이렇다는 의미에서 이 시는 시적 탄생의 보편적 경로를 개별적 시의 계기와 겹쳐 놓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감각에서 인식으로 나아가는 통로의 기본적인 동력은 “위태로운 희망” “낯선 꿈” “이방의 전설”을 거쳐 “저기 저쪽, 나처럼 맨발로 유리 밟으러 가는 젊음들”로 표상되는, 현실 저편에 대한 간절한 희구이다. 희구 이전에는 생의 고통을 시적 탐구의 미려한 정황으로 환원한다는 사실도 지적해두기로 하자. 언어도 그럴뿐더러 정황도 마찬가지인 이 미려함이야말로 이재훈의 시집 전체에 펼쳐져서 그의 시적 기율을 알게 해주는 요인인데, 「순례」는 그것을 “땡볕아래 꽃들이 붉은 햇살을 게워내고 있다”는 진술로 압축한다. 고통의 미적 전환이라고 할 만한 움직임이 여기에는 있다.
  이 전환이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를 낭만적 유미주의의 육성으로 읽도록 한다. 시편들의 대부분은 현실 저편에 대한 지향을 보여주며 그 틈틈이 낭만적 지향을 촉발시키는 비정한 현실이 배경처럼 깔린다. 「빌딩나무 숲」이나 「마라의 오아시스」 「거리를 훔치다」에서 표현되는 삶은 도시의 거리에서 상처받은 채 숨가빠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존재의 비망록이다. 이것이 배경이기 때문에 현실 저편은 열렬히 탐구되거나 지향되어야 하는 세계가 될 것이다. 그 세계의 온전성이 이재훈 시의 형식적 정결성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러므로 감각적 고통을 가져다주는 현실을 낭만적 극복의 미적 정결성으로 바꾸어 놓는 전형적인 예라 할 만하다.
  현실의 결여를 넘어서도록 하는 언어적 탐구가 아름다움의 정결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현실의 고통을 시로 보상받으려 한다는 사실을 뜻할 것이다. 이것은 따라서 현재적 고통의 대가를 미래적 보상으로 유예시킨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래로 유예된 보상이란 그러나 시의 내부 혹은 시인의 내면에서만 근거가 확보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시인의 외부에 있는 바로 그 결여된 현실이란 실제로는 어떤 것도 보증해 줄 수 없는 부정성의 세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시인이 택할 수 있는 것이 내면으로의 침잠이며 내면의 광휘에 녹아드는 일이다. 이재훈의 시가 현실 너머의 저편을 지향하되 그 지향운동의 장소를 나르시스적 탐구로 채워넣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수선화」는 지금 이 순간의 결여와 부재를 “한밤중”이라는 충만한 시간의 생성으로 전환시키고 보상받는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아아, 아 에코가 메아리치네, 아름다운 내 몸, 거울에 비추어, 아아아 에코가 흐느끼네, 내 몸이 하분하분 물기에 젖네”(「수선화」)라는 말로 부각시키는 자기애는 결국 자신의 내부로 침잠하는 사건의 구체화에 답한다.
  시인에게 내부로 침잠하는 사건이란 동시에 시 내부로의 집중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재훈 시의 미려함은 여기에서 또하나의 계기를 부여받는다. 이 계기는 언어에 대한 집중이기도 할 터인데, 그것이 그의 시 속에서 고통과 함께 하여 지속적 생성의 국면에 대응하는 “말”의 이중 의미이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는, 어찌되었든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시인의 삶에 대한 보고서이다. “말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뱃속에서 말의 새끼들이 뛰어나온다”는 진술이 말(馬)의 생태를 지시한다면 “밤이되면 나는 시를 쓴다/거리의 곤고함에 대해/꽃이 침묵하며 피는 이유에 대해/아는 척 쓰다가 말다가 결국/”말은 태양을 잉태했다“고 쓰다가”는 또다른 말(言語)의 생태를 알려준다. 이 두 가지 말의 생태가 모두 “뱃속”과 “잉태”라는 언어를 이용해 그 생태의 정황적 요인을 환기한다는 점과 관련시켜 보면, 이재훈에게 시란 내부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에 대한 언어적 집중이라고 할 만하다. 이를테면, 시인은 내부에 집중하면서 사건을 펼치는 언어의 주인이다. 이것을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비난할 근거는 없다. 오히려 이재훈의 시에서는,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시와 비교해본다면, 언어적 낙관주의라고 할 만한 것이 눈에 띄는데 이는 그의 시가 그의 상상세계에 대한 분명한 은유적 효과를 거느리고 있다는 점에서 도드라진다. 이 은유적 기율이야말로 그의 시에 낭만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의 시는 세계에 대해 어떤 순간의 압축적 동일시를 표현하는, 최근의 시단에서는 흔치 않은, 영역을 건설하였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도 그렇다.  
 
  흰 눈을 만나기 위해
  폭염을 견디었는지 모른다
  먼 기억으로 터져나오는 울음소리,
  도시의 거리와 거리, 사람과 사람이
  서로 엉켜 태연히 입 맞추는 소리,
  이 땅은 풀벌레 소리도 서러움이다
  마음이 없는 몸을 질질 끌고
  미술관으로 가서 꽃 가득한 정물화를 본다
  지지 않는 꽃, 수없이 그리워하고 약속했던 꽃
  나는 그림 속의 화려한 상징에만 골몰했다
  마음이 없는 몸을 질질 끌고
  시위대를 지나고 학교를 지나고
  걸음을 멈추게 했던 대현 전광판을 지난다
  역사도 없고 분노도 없는 권태로운 시간을
  홑날로 벼리는 젊은 어깨의 그림자
  그림자들이 서로 만나 어둠을 만들고
  어둠을 지키기 위해 네온사인이 하나 둘 켜진다
  어제의 일이 까마득하다
  하룻밤 새
  이마 위에 주름이 깊어 눈이 감기고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차가운 결정(結晶),
  그 위에 금빛 새가 발자국을 찍고
  푸드득 날아오른다
         ―「결별의 노래-성배(聖杯)를 찾아서」 전문

  “울음소리”가 있고 “서러움”이 있는 반면에 “마음이 없는 몸”이 있고 “권태로운 시간”이 있다. 그러니까, 심한 정서적 굴곡이 한꺼번에 배열되어 있는 세계가 눈앞에 있다면, 이것은 시인의 내부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의 파노라마에 다름아닐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 역설적으로,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솟아오른다. 그것은 시의 마지막 네 행에서 표현되는 것과 같은 신생의 사건이다. 이것이 결정적인 것은 비정한 세계의 결정(結晶)인 눈보라가 금빛 새의 비상으로 전환되는 일이 갑자기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재훈의 시적 은유는 이런 방식으로 세계의 파노라마 속에 배열된 대상들을 한순간 압축하는 동일시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는 이렇게 삶의 비루함 이면을 순간의 황홀함으로 역전시키는 내면의 보고서를 만들어낸다. 이 보고서는 근래에 보기 힘든 낭만적 정신의 고투라고 할 만하다.

- 현대시, 2005년 1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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