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호흡과 비전
-이재훈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손진은(시인, 경주대 교수)



  1.

  최근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출현으로 한국 시의 지형도가 재편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젊은 시인이자 평론가인 권혁웅이 ‘미래파’라고 명명한 이 경향은 한국시의 물줄기에 새로움으로 수혈될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 문학판의 변화로까지 어어질 수 있는 문화적 감성에서 배태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다만 이들의 움직임이 60년대의 김수영, 80년대의 이성복, 황지우가 감당했던 에너지로까지 승화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고서 말이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문단은 그 주류적 흐름으로 ‘생태시’를 꼽는 데 주저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생태시의 부상에는 인간우위적 가치관의 붕괴와 대안을 마련하려는 입지점이 놓여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생태시, 에코페미니즘적 경향은 이제는 별다른 문제의식도 없이 삶의 체험이나 철학도 없이 누구나가 시도하고 있는 시적 관행으로 굳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90년대부터 큰 흐름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여 이제 완연히 자리를 잡은 서정시 본연의 위력과 광휘를 보여주는, ‘부드러운 서정’이리고 일컬을 수 있는 시적 맥락이 있다. 그런 시인들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야 없겠지만, 여기에 포괄될 수 있는 시인들은 대체로 나희덕, 장석남, 이정록, 박형준, 문태준, 이윤학 등이고, 이전 세대들인 천양희, 이시영 등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겠다. 이들 세계와는 변별되는 지점에서 존재의 깊이와 서정을 보여주는 시인들이 있다. 김명인, 이성복, 오규원, 최하림, 김사인, 고재종, 조용미, 김기택, 송찬호, 최정례 등의 시인들이다. 이들은 많은 시인들이 생태시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그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내면 성찰이라 존재의 깊이 쪽으로 물꼬를 틀어 한국시가 철학과 사상을 내면에 거느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흔해빠진 비유를 통해 흔해빠진 우리들 삶의 모습, 그 허망과 음험함을 비극적 정서로 탁월하게 드러낸 이성복의 『아, 입이 없는 것들』 같은 시는 한국시가 이를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지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과거 민중문학이 가지고 있는 현실성은 담지하되 부족한 부분이었던 깊이를 확보하는 시적인 경향으로 김신용, 이기인 등의 현장을 다룬 시들을 꼽고 있는 평자들도 있다.    
  그러나 ‘미래파’들은 이런 문화적 지형도를 바꾸려하고 있다. 그들은 세계와 자아의 행복한 일치를 기조로 하는 서정시 본연의 문법이 못마땅한 것이다. 이성과 관념 이전의 원초적인 시어로, 이 세대의 문화감각으로, 이미지의 분열적 분방함과 해체적 언술로 시단의 앙팡테리블로 불려지길 희망하고 있다.


  2.
 
  이재훈도 그런 일군의 무리들에 해당하는 시인이다. 그 역시 무의식과 환상과 분열적 내면의 풍경을 다루는 사유의 혼종성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이들 시인들과의 변별점은 이재훈이 시원의 언어를 향한 순례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그는 기원에 대한 탐구로 시작의 실마리를 연다. 이 글은 우리 시단의 새 목소리라고 명명되는 이재훈의 시가 어떤 지점을 거느리며 자신의 세계관을 열어가고 있는가를 고찰한 기록이다.

잠든 말, 묵상도 없는 말들이 벽에 붙어 있다 너의 소리를 들으려고 널 만진다
(……)
말은 내게 뱃속을 열어 보여준다
건강한 줄기를 먹고 자란 말
(……)
아프다, 말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뱃속에서 말의 새끼들이 뛰어나온다
(……)
내 목을 자르고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부분

  이성적인 사유체계로 길든 독법으로는 쉽사리 읽을 수 없는 시이다. 어떤 점에서 이 시는 결여와 부재의 언어 사이에서 최초로 태어나는 말에 대한 이재훈의 사유를 보여준다. 보이는 질서와 체계는 이미 없다. “모든 시간은 무너지고” 주체가 기댈 “기억의 언덕도 무너지고” 없다. 이재훈은 기원이 사라진 시대에서 말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 지난한 작업을 자신의 시 창작의 첫 번째 질료로 삼고 있다. 여기서 말은 말(馬)이면서 말(言)이고, 또한 그 가치의 신념체계를 넘어선다. 그러기에 발굽 소리가 들리고 벽에 붙어 있기도 하며, 그것으로 한정되지는 않는다. 만지면 황소가 되고, 사슴이 되고, 초월을 가로지르는 말이 되고 나는 말 위에 올라탄 추장이 된다. 마침내 그 뱃속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말하자면 이재훈에게 ‘말’은 말이라는 시니피앙에 대한 수많은 인접혼란을 겪어 새로이 태어나는 어떤 힘이요, 빛이나 공기 입자의 산란처럼 의미의 비좁은 틈을 뚫고, 그 사유의 혼종성 속에 태어나는 생명이다. 이는 소통을 위주로 하는 언어 체계에 대한 신선한 위반이요, 경계 넓히기이다. 그러나 이재훈은 의미 없는 교란에 머물지는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환기의 표지로 언어를 이끌어간다. 마침내 자신의 목마저 자르고 자신의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의 추장이 된다. 이는 이재훈의 시가 이성보다는 감각과 정서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재훈의 이런 시적 경험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그가 “거리의 곤고함”으로 표상되는 이 시대의 삶과 문화를 외면하지 않고 있다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거리의 곤고함이 그를 이러한 세계로 이끈 내적 동인이 되는 것이다. 시집의 첫 작품이 「사수자리」라는 사실은 이런 그의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거니와 ‘평원을 떠난 새’, ‘기적’, ‘공중정원’, ‘도시의 물관’, ‘마라의 오아시스’ 등 그의 시 제목이 환기하는 정서는 환멸이라는 이름으로 명명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정치문화적 함의를 짐작하게 하는 다양한 기호들로 가득차 있다. 말하자면 ‘사수자리’, ‘마라’와 같은 천문학적인, 성서적인 공간의 인유는 그가 이 시대를 바라보는 표지가 환멸이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한다. “아무도 면회 오지 않는 숲에서/나는 이교도가 되었다”(「빌딩나무 숲」)가 시인은 말한다.

밤이 되면 말을 타러 갔었지
잠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깊은 동굴이었지
(……)
나는 편자를 갈고 있었지
등불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같았지
빛이 어둠을 갉아먹기 시작할 때
하늘에서 별이 하나씩 떨어졌지
말이 내 앞에 와서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지
(……)
열두 밤이 지나자 황도십이궁의 한 모퉁이에
나는 떨어졌지

새벽녘 어머니가 내 머리칼을 만지고 있었지
나는 쭈글해진 어머니의 배에 귀를 갖다댔지
말발굽 소리와 활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지
그 큰 어둠을 품고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가셨지
나는 어머니가 믿는 神의 안부가 궁금해졌지
-「사수자리」부분

  화자인 나는 사수로 설정되어 있다. 이 사수는 떨어지는 별에 맞을까 두려워 말을 타고 등불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심정으로 가고 있다. 이는 꺼지지 않는 촛불의 위태로움을 말 위에서 견디는 삶이다. 말하자면 묵시론적인 비전과 상황으로 환치되어 있다.   아울러 이 모든 상황이 밤과 잠이라는 설정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잠이라는 게 무엇인가. 현실에서 비전을 가질 수 없을 때 육체의 호흡에 기대는 형식이 아닌가. 현실에 억압과 환멸이 밤과 잠을 부르게 했지만, 이 밤과 잠의 세계는 육체가 가동하는 통로가 된다. 열두 밤이 지나자 황도십이궁에 떨어진 ‘나’가 쭈글해진 어머니의 배에서 말발굽 소리와 활이 날아가는 소리를 듣는 것은 이 같은 맥락이다. 말하자면 이재훈의 시에서 육체는 모든 비전을 함의하는 영혼의 형식이면서 우주의 무한한 팽창과 맞먹는 힘을 가진 것이다. 황도십이궁에서 화살을 쏘던 시적 자아의 잠과 꿈의 무한배경은 기실 어머니의 쭈글해진 배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재훈의 시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무한팽창과 축소를 거듭하는 시적 연동방식이며 육체 속에 담겼다가 새로운 길을 찾아나가는 시적 행로이다. 우주의 무한팽창과 축소를 육체의 호흡의 수준으로 규정하는 시인의 개성은 예술지상주의적 인식에 가깝다. 또 위의 시에서 보았듯이 나의 육체만이 그 통로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육체의 기반은 넓기까지 하다. 물론 위의 시에서의 육체는 생명의 통로가 되었던 모체이므로 그 모성성, 여성성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이재훈의 시는 페미니즘의 좁은 영역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이재훈에게 육체는 자신을 분할하여 세계로 진입하는 통로(“내 목을 자리고/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 속으로 들어갔다”-「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이면서도 끊임없이 소생하는 질료이다. 이는 맥베스의 “눈앞의 이것이 나인가”라는 화두에서처럼 규정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기호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사도 바울의 말처럼 끊임없는 갱신을 향한 고투의 흔적으로도 독법이 가능하게 한다. 이재훈에게 예술은 정신의 표현이자 육체의 조화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이재훈에게 육체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넘어서고, 교란하며 갱신하는 에너지가 된다. 이는 ‘나’를 포괄하는 ‘개인으로 세계를 끌어안으려 하는 기획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일식」은 이재훈의 ’최초의 말‘이 가지는 위력과 육체의 호흡을 보여주는 시편이다.

태양이여,
나는 이 큰 우주를 목놓아 불러본 적 없다
용기도 없이 컴컴한 방에 앉아
창틀에 놓인 꽃병들만 바라봤다
어느 날 나는
태양이여, 불러보고 싶었다
늘 곁불만 쬐며 속으로 옹알거리기만 하며
이 엄살의 통각(痛覺)을 갖게 되었다
태양이여, 부른 순간
내 항문으로 뱀이 숯진 머리를 들이밀고 왔다
온몸이 뜨거워져서 태양에게 다가가도
뜨겁지 않았다
불타지 않았다

뱀이 태양을 갉아먹을 때,
하나의 꿈틀거리는 숨이 우주를 갉아먹을 때,
네 소멸이 위대한 미학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어느새 뱀의 뱃속에 태양이 들어가 있다
고요 가운데 입을 열고 들어가
한 몸이 된
뜨거운 잉태

나는 큰 소리로 태양이여, 불렀다
뱃속에서 울리는 뜨거운 공명

모든 사위는 어둠이 되었다
-「일식」 전문

  “엄살의 통각”만이라고 말하는 시적 화자의 수줍음을 보아라. 그러면서도 이 호명에 육체와 세계가 합치는 순간의 뜨거운 감각적 파동과 전일적 세계의 움직임을 보라. “컴컴한 방에 앉아” 있을 때의 자아와 호명하는 순간의 자아는 차이가 크다. 부르는 순간 세계는 내게로 온다. 이 변화와 실감 속에 언어의 사제로서의 시인이 가지는 주술성이 놓인다. 이재훈에게 언어는 기존의 가치체계를 허물어버리는 도구이면서 육체와 세계를 하나로 이어주는 통로가 된다. “태양이여, 부르는 순간/내 항문으로 뱀이 숯진 머리를 들이밀고 왔다”고 하지 않는가. 서정주의 「화사」에서 “스며라 배암” 할 때 우리는 순네와의 성행위를 떠올릴 수밖에 없듯 이재훈의 시에서 우리는 세계가 내 육체에게로 와서 스며든다는 실감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서정주의 그 행위는 육체적 충동에 무게 중심이 놓여 있는 심리적 수준이라 할 수 있지만, 이재훈에게 세계에 대한 발화는 실상 통각의 실감으로 육체에 그려지는 것이라서 호명의 순간에 나의 육체는 완벽한 우주의 통로가 되고 우주 그 자체가 되어 달라붙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전일적 감각의 합치를 시인은 “뜨겁지 않았다”, “불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거니와,  이 합치를 말하는 데 뱀만한 상징이 또 어디 있겠는가. 세계를 호명하고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이 합치의 순간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2연에서 육체의 호흡의 위력을 보여준다. “꿈틀거리는 숨이 우주를 갉아먹”어, 우주를 소멸시켜버리고, 내 기운(뱀) 속에 태양이 들어앉아 버리는, 달리 말하면 우주를 내 육체 속에 가두어버리는 주술을 행하게 된다. 혈액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들숨과 날숨을 거듭하는 육체의 호흡과 고동은 우주를 육체의 힘의 조화로까지 만들어버린다. 더욱 언어의 주술과 육체의 호흡을 통해 육체는 우주를 새롭게 잉태할 수 있게 되고 사위는 어둠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언어의 탄생과 육체의 호흡의 비전을 획득한 이재훈 시의 특장을 살필 수 있었거니와, 여전히 눈여겨 볼 것은 “뱃속에서 울리는 뜨거운 공명”이라는 시인의 발화이다. 기존의 시인들이 태양을 신화적 비유로 끌어다 쓰거나 관찰자적 입장을 견지하는 데 반하여, 이재훈의 육체는 세계를 끌어안아 버리는 통로가 된다. 말하자면 일식이라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가 동원되는 수사의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3.

   이재훈에게 육체는 “(그 속에) 한밤중이 되면 수선화가” 피고 (「수선화」)  하분하분 물기에 젖다가, “잘 익은 돌을 낳”고(「예쁜 똥」), 수레바퀴가 지나가는 통로가 되며(「수레바퀴 지나간 길」), 마침내 그 숨으로 우주를 삼키기까지 하는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재훈은 이성과 관념 이전의 원초적인 ‘말’들의 회복으로 개성의 터전을 마련하고, 이를 육체의 호흡이라는 비전을 통해 결정시킨 우리 시단의 새 목소리다. 문학적 감성의 변화를 보여주면서도 분열적 내면의 풍경 속으로만 탐닉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슐라르와 신화적 상상력을 자신의 몸으로 체화해내면서 자신의 어법으로 완성해가고 있다. 무엇보다 그의 육체의 호흡의 낭만성이 도시의 우수에서 발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성의 거점을 마련하고 있고, 우리 시단의 형이상학적 밀도와 부피를 수혈해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재훈을 비롯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문화적, 문학적 감성이 깊이를 더해 우리 시사의 새로운 광맥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 [시와세계], 2005년 겨울호
Posted by 이재훈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