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을 구원하기 위한 풍장


이성혁
(문학평론가)



   이재훈의 「겨울 숲」은 30대 시인 특유의 감성을 발현하면서 젊음을 보내버린 겨울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할 윤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 특유의 감성이란, 지나가버리고 있는 청춘을 민감하게 의식하는 자가 느끼는 쓸쓸함을 말한다. 30대엔 다른 삶을 향해 나가게 된 지인들과 이별해야 하는 일들을 자주 겪게 된다. 이별은 과거와의 결별을 어쩔 수 없이 이끌어온다. 벅찼던 삶들은 기억으로만 외롭게 현재의 한구석에 버려지기 시작한다. 쓸쓸함의 감성은 겨울에 특히 어울린다. 조숙한 젊은 시인들이 눈의 이미지에 그토록 경도되는 이유는 그것이 이별의 정조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녹고 있는 눈의 이미지와 사라지고 있는 젊은 날들이 교차되면서 섞이기 쉽다. 그래서인지 청장년 시인들은 겨울이라는 상황을 자주 선택하여 젊은 날이 소멸되고 있는 현재에 대해 유장함의 어조로 슬퍼하곤 한다.
   「겨울 숲」에서 시적 화자는 지금 세상에 등을 돌리고 겨울 숲으로 떠난 형인 ‘그’를 생각한다. 해어진 그 형에 대한 기억은 이젠 과거가 되어 버린 방황들을 아프게 떠올리게 할 것이다. 시적 화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그 급격한 낙차를 느끼며 가슴을 쓸어내릴 것이다. 그리하여 과거를 현재의 흐름에 급격하게 끌어당겨올 때 일어나는 유장함이 시를 적신다. 「겨울 숲」 역시 청장년 특유의 어조와 감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칫 감상으로 빠질 수 있는 이 감성의 흐름을 시인은 ‘그’의 삶이 보여주는 윤리의 문제로 끌어올림으로써 적절하게 통제한다. “이제야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며 시인은 시를 시작한다. 시의 물꼬를 미리 이렇게 터놓음으로써 시인은 청장년 시인에게 전형적인 쓸쓸함과 유장함의 어조를 유지하면서도 감정을 발산하는 식으로 나아가지 않고,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시는 ‘그’의 삶의 방식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시적 화자의 세계관적 변동을 토로한다. 겨울 숲으로 떠난 그를 지금은 이해하게 되었으므로 “그를/찾으러 겨울 숲에 간다”고 시의 후미 부분에서 시적 화자는 말한다. 아마 예전엔 투사(鬪士)이자 수사(修士)였을 그, 하지만 그는 “아마 목숨까지 다 토”해버리며 과거를 등지고 겨울 숲으로 떠난 자이다. 그렇게 다 토해버린다는 것, 그리고 은둔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시적 화자는 예전엔 몰랐다고 진술한다. “언젠가 술 취한 내 등을 두드리며/다 토해라, 있는 것 다 토해라고/그가 말할 때 나는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겨울 숲으로 떠나기 직전인 그가 “버스터미널에 우두커니 서 있을 때”, 그의 떠남의 의미를 몰라 “오래도록 그의 등 뒤를 서성거렸”으리라. 하지만 ‘그’와 같이 과거의 ‘풍성한 사연들’이 다 마를 때까지 모두 토해낼 수 있을 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시적 화자는 지금 깨닫고 있다. 이 깨달음이 청장년층이 겪는 쓸쓸함을 넘어 새로운 삶에 대한 성찰로 나아가게 한다. 그것은 “앙상한 뼈들만 모여 서 있는” 겨울 숲이 “더 뜨겁다”는 그의 진술을 이해하게 되는 세계관적 변동이다.
   아직 “겨울 숲이 오히려 더 따듯하다”는 그의 진술을 시적 화자가 진실로써 받아들이는 단계는 아니다. 시적 화자는 그 진술을 받아들이면서 진실인가 확인하고자 그를 찾으러 겨울 숲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그의 말을 전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겨울 숲은 모든 것을 다 토하고 과거와 결별한 자의 내면을 상징할 것이다. 그 숲에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헐벗은 나무들이 겨울바람에 맞서 서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뼈만 남은 헐벗은 나무가 그냥 서 있기만 하는 것만은 아니다. “뼈를 태우”고 있다. 아마 삶과 죽음의 경계선상에서 온 힘을 다해 삶을 지탱하고 있는 중이다. 모든 것을 다 토해 “이미 거죽만 남은 몸”인 ‘그’ 역시 저 겨울 숲의 나무들처럼 존재하고자 한다. 뼈가 탈 것이니 삶을 지탱하는 마지막 지지대 역시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뼈까지도 아깝지 않다”면서 “묘비도 없이 바람에 존재를 실어버리는 게/가장 행복한 결말이라고,/정말 시적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자신을 풍장하여 “신문에도 남지 않”도록 소멸하는 삶이 겨울 숲에서의 삶이며 그의 삶의 결말이라는 말이다.
   청춘의 끝에서 청춘을 불살라버리는 가장 극한적이고 청춘에 걸 맞는 결말을 ‘그’는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그는 과거와 극한 결별을 시도하면서도 과거를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남들과 같이 과거의 분실을 애도하면서 청춘을 끝내려 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 젊은 시절과 이별할 수밖에 없다면, 그는 모든 과거와 결별하면서 청춘의 극단적 에너지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그 방도는 거죽만 남은 채로 삶의 공허와 대결하는 것이다. 이 삶의 방식을 선택한 ‘그’를 통해, 시인은 젊은 시절이 점차 과거로 밀려나가고 있는 현재에 맞서 젊은 시절 이후의 삶이 여전히 젊을 수 있는 역설적인 방도와 윤리를 보여주려 한다. 헛된 희망이라는 거짓을 지지대 삼아 살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삶의 상황이 겨울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겨울을 철저히 받아들이고 맞서 살아 나가야지만 봄의 시절도 구원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철저히 절망한 사람만이 희망을 보여줄 수 있다는, 카프카를 읽으며 발터 벤야민이 한 말처럼.

_ <현대시>, 2006년 1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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