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열된 연대의 시적 기록


정과리
(문학평론가, 연세대 교수)



앞에서 이재훈의 짧은 시구를 인용하면서 “과거에 미련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단순히, 예전의 시들이 기원의 신화 속에서 태어났음을 가리킨 것일 뿐이다. 그러나 발설된 말은 발설자를 떠나 혼자 놀기 시작한다. 저 과거는 어떤 과거인가? 시를 태어나게 한 현실을 가리키는 것인가(왜냐하면, 지금의 논리 속에서 시는 현실 다음에 오니까)? 아니면, 시라는 것의 별도의 맥락(‘한국현대시사’ 같은 표현이 지시하는 것처럼)을 환기하는 것인가? 이재훈의 시는 소박하나마 하나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곳에 살기 위하여”가 아니라 “이교도”로 살기 위하여. 실상 시는 “나는 이교도가 되었다”고 했지 “이교도로 살기 위하여”라고 적지 않았다. 그런데 시를 읽어 보면, 시의 화자는 이교도가 되지 않았다. 그는 빌딩 속에서 살면서 자연을 그리워한다. 빌딩에는 가짜 자연들만이 있다. 빌딩과 자연의 대위법은, 그러나, 빌딩을 붕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빌딩을 재생산한다.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야만 빌딩은 거듭 솟아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빌딩의 종교이다. 화자의 종교도 같은 종교다. 이교도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나를 만지고 한없이 그리워져
나무에게로 간다
― 이재훈, [빌딩나무 숲] 부분

이 시구의 앞 행에 드리워진 성적 암시를 제거하고 읽으면 이교도로 사는 방식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빌딩의 종교 의식은 대상의 성물화를 통해서 나타난다. 그런데 화자의 그리움은 자위를 통해 솟구친다. 자위의 끝에서 그는 몰아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죽음의 예행연습), 오히려 대상에 대한 그리움으로 타오른다. 그래서 저 가짜 나무, 가짜 새에게로 가 “말을 건다.” 가짜가 진짜를 온전히 대행하는 순간이다. 그러니까 이 시구가 암시하는 것은 화자가 빌딩의 종교이기도 한 자신의 종교를 절대자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자기의 이름으로 행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이단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단이라고 말하기가 화자는 께름칙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류를 가리키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그 꺼림한 감정이 ‘이단’ 대신 ‘이교도’를 선택하게 한다. 그는 이교도인 체 함으로써 이단을 사는 것이다. 그러한 방식의 최종적인 명제가 ‘이교도로 살기 위하여’이다.
엘뤼아르의 시이기도 하고 김지하의 시 제목이기도 한 “이곳에 살기 위하여”에서 ‘이곳에’는 의미론적으로는 무의미한 췌사이다. 사는 것은 언제나 여기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다른 곳에서 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당연히 ‘저곳에 살기 위하여’라고 써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살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이곳에’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단지 리듬의 조화를 위해서만 기능한다. 따라서 의미론적으로는 ‘살기 위하여’만이 작동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그것은 무언가 부족하다. 문자 그대로의 그것은 모든 존재들의 한결같은 소망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부족한가? 바로 그 소망의 방식이 부족한 것이다. 가령, 용감히 살기 위하여, 떳떳이 살기 위하여, 멋지게 살기 위하여, 반항아로 살기 위하여, 음메 기죽어로 살기 위하여, 죽어서 살기 위하여, 이교도로 살기 위하여, 기타 등등.

- 정과리, [파열된 연대의 시적 기록]중에서, 현대시 2004년 1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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