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된 구원과 작은 희망


송기한
(문학평론가, 대전대 교수)



이재훈의 [빌딩나무 숲] 또한 생명과 그 근원이 소멸하여 모든 존재가 사물이 되고 죽음에 의해 점령당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 숲엔 풍경이 없다
나무와 새 온갖 풀벌레가 가득하지만
그들은 소리내지 않는다
사방을 둘러봐도 제자리만 지키고 선
가장 그럴듯한 포즈의 마네킹들
그곳엔 소리가 없다
어머니, 하고 부르면 침묵만 되돌아와
귓가엔 내 목소리만 자욱히 앉아 있다
숲속에서 숨이 막혀 한참을 내달았다
소리를 지르고 실컷 울고는,
그루터기에 앉아 부풀어 오르는 힘줄들을 만졌다
나는 나를 만지고 한없이 그리워져
나무에게로 간다
새에게 말을 건다
자애는 폐허, 라고 되뇌이는 시간들
내 힘줄을 내가 끊어도 고통스럽지 않은 곳,
그곳엔 아무도 없다
있다면, 침묵이 있다
아무도 면회오지 않는 숲에서
나는 이교도가 되었다
― 이재훈, [빌딩나무 숲](현대시, 1월호)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물화(物化)를 통해 인간이 고독과 소외의 상황으로 내몰리는 양상을 그리고 있다.
“나무와 새 온갖 풀벌레가 가득하지만 소리내지 않는 풍경”이라든가 그것이 “그럴듯한 포즈의 마네킹”과 겹치는 상황, 혹은 ‘어머니’하는 외침이 “침묵으로 돌아오”거나 “자애가 곧 폐허”가 되는 상황들은 환경의 물화와 인간의 소외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생명을 잃고 사물이 되어 버린 ‘나무’나 ‘새’, “아무도 면회오지 않는 숲”에서는 죽음이 예사롭지 않게 찾아든다. “내 힘줄을 내가 끊어도 고통스럽지 않다”는 진술에서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이 같은 상황을 ‘빌딩나무 숲’이라 명명함으로써 환경의 사물화에 대한 근거로 근대라는 패러다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이처럼 생명이 상실되고 죽음이 만연한 곳에서는 어떠한 구원도 손쉽게 찾아들 수 없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어머니’라는 근원적인 힘이나 ‘자애’와 같은 미덕들은 결코 응답받지 못하게 되는 바, 시인이 “나는 이교도가 되었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곧 인간을 구원하고 세상에 빛과 희망을 주어야 할 종교조차 이런 소외된 상황에서는 그 구실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 송기한, [좌절된 구원과 작은 희망]중에서, 현대시 2004년 2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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