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옛말은 본다는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 가를 웅변한다. 이 말이 어떤 상황에서 비롯하였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크게 상관하지 않지만 그 뜻하는 바는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보기 전에는 들은 내용을 믿을 수 없다거나 듣는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말의 내용이 충분히 시각적 이미지로 변형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시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말이 단지 신뢰와 설득에 관련되어 실제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시각 능력은 이미 있었던 것을 재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보지 못한 것, 혹은 지금 없는 것을 상상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부재라는 견디기 힘든 상황을 ‘포르트(fort)-다(da)’라는 언어 놀이로 견딜 수 있었던 자신의 손자의 일화를 통해 프로이트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언어를 통해 대상을 통제하고자 하는 의식의 성장과정일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가지고 노는, 실을 매단 실패는 언어 경험과 시각 경험의 밀접한 관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실패를 던져서 눈 앞에서 사라지면 어머니가 가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실을 잡아당겨 실패가 나타나면 어머니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긴 이 아이의 예에서 우리는 시각적 인상이 언어의 성숙 혹은 의식의 성숙과 얼마나 크게 관계 맺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사실 언어는 시각에 많은 부분 빚지고 있다. 이것은 증명을 필요로 하는 명제가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거나 말하고 행동할 때를 가만히 떠올려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인체가 수용할 수 있는 감각의 70퍼센트 정도가 눈에 모여 있다는 사실은 시각의 중요성을 과학적으로 추인하는 수치(數値)일 뿐이다. 모든 언어와 논리를 그림으로 단순화하여 나타낼 수 있다고 믿었던 어떤 철학자의 생각 또한 시각이 우리의 언어와 사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진단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시는 시각, 혹은 본다는 행위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을까. 어떻게 보면 시란 본다는 행위와 떨어질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일상적인 시선으로는 좀처럼 간파할 수 없는 사물의 비밀스러운 유사성을 발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함을 은유와 상징이라는 수사학으로 표현하는 시에 바라봄의 행위가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각 활동이 시작되는 눈은 우리 신체의 일부분일 뿐이지만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고 어딘가로 향한다. 그러나 시각의 활동이 가시적 대상에만 묶여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시각은 때로 가시적 대상 너머로, 가시성 자체가 소멸되는 곳까지 나아간다. 그 방향은 때로 의식의 바깥이 될 수도 있고, 때로 의식의 내면일 수도 있다. 나의 의식과 세계가 만나는 지점, 바로 거기서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나고, 그 어름에서 또한 시가 탄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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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절정에 다다를 때가 있으면 또한 몰락에 이르게 될 때가 있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어떤 초인간도 영원한 생명을 지닌 채 살지 못하였다. 산 자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서 자라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삶에서 잠시 피었다가 시드는 국화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시인은 시드는 꽃에서 어둠과 상처를 발견한다. 꽃이 시드는 것처럼 자신도 나이들고 있다는 데 대한 애처로움의 고백일까, 아니면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옛사랑에 대한 서글픈 감정의 표현일까. 그러나 시인은 이 쓸쓸한 낙화에 대해,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반복하는 존재론적 순환에 대해 “눈에 밟히지 마라/끝없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있음과 동시에 생성과 소멸로 이어지는 존재의 무한한 반복에 대한 단호한 긍정이 있다.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두려움과 존재론적 숙명을 받아들이는 담담함 사이에서 시인은 진동하고 있는지 모른다.

일부러 가부좌를 틀 필요는 없다 당신은 감각의 수행자, 당신의 세상은 불구의 시간이 시작되는 때, 눈을 감아도 또렷이 기억나는게 있다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반했던 제비꽃 향기처럼 당신, 들릴 듯 말 듯한 냄새 당신의 냄새를 들었다 노란색 코트가 아니라 감미로운 목소리가 아니라 당신의 발자국처럼 저 멀리서부터 두근거리는 냄새 눈을 감아도 또렷이 기억나는 게 있다 그러나 당신의 향기는 잠시 머물렀다 사라졌다 부재(不在)는 그리움의 양식 바이올렛 향기로 내 몸이 건반처럼 울렸지 잠시 뿐이었지만, 덤불 속에서 상채기를 핥다가 취한 당신의 냄새 적어도 당신의 몸에서 육식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다른 꽃으로 환생한다해도 이미 알았던 것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음을*

*우주에서는 아무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다 :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이리언(Alien)>
― 이재훈, 「앉은뱅이꽃」(서정시학, 봄호) 전문

봄이면 산과 들에 자줏빛 꽃을 피우는 키작은 꽃을 부르는 이름이 있다. 앉은뱅이꽃. 어딘가 앙증맞으면서도 안쓰러운 감정을 자극하는 별명을 지닌 이 꽃은 달리 제비꽃으로도, 혹은 오랑캐꽃으로도 불린다. 줄기가 없어 높이 자라지 못하는 탓에 붙여졌을 별명뿐 아니라 원래 이름에서도 이 조그마한 꽃의 비극적인 운명을 눈치챌 수 있다. “당신의 세상은 불구의 시간이 시작되는 때”라고 시인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꽃의 겉모습뿐 아니라 겉모습을 따라 사람들이 불렀을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기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앉은뱅이 꽃에서 “가부좌를 튼” 듯한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고,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반했던 제비꽃 향기”를 기억해낼 수도 하지만 시인은 “눈을 감아도 또렷이 기억나는” 냄새에 이끌린다. 그것은 그저 지나치는 발걸음을 지닌 자에게는 감지될 수 없는 것이다. 땅에 붙박혀 있는 꽃에 눈길을 보낼 수 있는 이에게만 꽃은 향기를 허락하는 것인지 모른다. 가만히 꽃을 들여다보는 시인에게 꽃의 향기가 “멀리서부터 두근거리는” 듯 다가오는 소리로 느껴진다. 고요히 꽃을 바라보며 꽃의 향기를 맡는 시인에게 꽃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 것이다. 다만 꽃을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향기를 맡고 꽃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만큼 시인이 꽃에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꽃의 향기는 이내 사라지고 만다. 그것은 쉽게 자극에 익숙해지는 후각의 특성 때문일 수도 있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의 운명 때문일 수도 있다. 향기는 사라졌지만 시인은 부재(不在)에 대해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지는 않는다. 또한 부재를 현존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다만 사라진 것을 사라진 대로 내버려둘 뿐이다. 존재의 부재가 곧 존재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한다고 시인은 믿지 않기에 꽃의 변화를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그 누구도 소리를 들어주지 않은 꽃의 소리를 들으면서.

_ <현대시>, 2006년 5월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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