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는 과학이 태어나는 대지이다.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점을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초기의 사상가들로 하여금 철학적으로 사유하도록 강요한 것은 경이로움이었다…신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철학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신화라는 것이 경이로움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형이상학』, A2, 982b). 논리의 분절적 시냅스가 이루어지는 순간 신화는 과학이 된다. 신화는, 눈뜨기 이전의 과학을 품고 있다.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를 낸 바 있는 이재훈 시인은 서울이라는 공화국의 시민이면서도 사실은 그는 ‘자신의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의 한 주민으로서 살고 있다. 언제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안경 속의 눈빛과 온화한 무표정의 얼굴은 세계적 거대 도시 서울의 권위 있는 시 전문 월간지의 걸음 빠른 편집장이 아니라 아직은 자연과 정신이 분화되기 이전의 신화적 시대에 살고 있는 원시 부족의 자연인이다. 자동차와 전철이 무질서하게 뒤엉켜 운행하는 복잡한 서울의 중심에서 그가 거닐고 있는 곳은 황도십이궁의 한 모퉁이의「사수자리」이거나 혹은 ‘태양을 갉아 먹는 뱀’의 숲 같은 곳이다. 그는 문명의 진화를 건너뛰어 들어온 샤먼의 후예로서 신화적 위상 공간에서 거주하는 서울공화국의 진정한 무정부주의자이다.

언제부턴가 새는 날지 않았다. 나스카 평원을 유유히 날아 광대한 상상의 틀까지도 슬쩍슬쩍 엿보던 새가, 날지 않게 되었다. 사연은 있었다. 가벼운 날갯짓, 그림자 아래에서 즐기는 종종걸음의 시간이 지나자, 설움이 찾아 왔다. 새의 부리와 발톱이 꺾이고, 허기가 지면 온 몸이 숯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새는, 투명한 옷을 입고 전생의 시간 앞을 오갔다. 수면을 뛰어오르는 물고기나 굴을 빠져나온 뱀을 낚아챌 때마다 한 생이 투명하게 빛 바래는 순간을 보았다. 새는, 눈이 멀었고 노래를 배웠다.

내 스무 살은 노래였다. 거리에서 배운 노래가 목청으로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그것을 먼 이방의 방언이라 여겼다……새의 등에 올라타고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으며 나스카 평원에 새겨넣은 神의 형상을 한눈으로 보고 싶었다. 나는, 어떤 법을 배웠던가. 노래하는 법 말고는 배운 것이 없다. 눈 먼 한 마리의 새가 내 머리칼 속에서 둥지를 틀고 있었다. 새의 전생은 자유였다고 평원을 돌보던 파수꾼이었다고……

                                        -「나스카 평원을 떠난 새에 관한 이야기」부분

  융은 의식과 무의식의 해리를 현대의 심각한 정신적 문제로 지적하였지만, 보다 근본적이고 내재적인 문제점은 정신과 육체의 격리적 사고이다. 정신과 육체는 분리되어 있지 않은 하나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정신과 육체의 유리적 상황을 경험한다. 신체에 대한 정신의 격리는 곧 신체기관의 전경화로서 인격의 부재화를 의미하며 인간이 하나의 도구이자 수단으로 전락함을 의미한다.
  한조 시대에 정위라는, 백황기술자는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소량의 물질을 반응용기에 넣어 은으로 변하게 하자 그 비밀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댄다. 하지만 아내가 그것은 운명적으로만 전수될 뿐이라고 하자 정위는 그녀를 위협하여 결국엔 미쳐서 죽게 하고 말았다. 연금술은 영적 본질을 물질계에 구현해 보임으로써 영성을 깨닫게 한다. 그녀가 죽으면서까지 그 기술을 알려줄 수 없었던 건 어떤 영적 가치의 문제와 결합되어 있는 때문이다.
  자신의 영혼에 가하는 모욕만으로도 우리는 신체기관의 주체자로서 정신과 신체의 해리적 공황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체에 대한 체벌이나 가학 행위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신체기관의 전경화에 따른 영성 부재 의식은 인간을 인격체가 아닌 하나의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케 한다.
  정신분석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분리한다. 융이 환자를 전인적 인격체로서의 자기 완성을 염두에 두었던 것과는 달리 프로이트는 환자를 리비도적 신체기관으로 환원한다. 그것은 어떤 경우 견딜 수 없는 치욕이자 고문일 수 있다. 치료를 거부하고 미치광이로 살아가게 한 도라 양의 경우는 초기의 프로이트가 전이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실수였다고 하나, 문제는 보다 근원적인 곳에 있다.
  타인 즉, 영성 부재의 신체기관은 권력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권력이 기록되는 양피지 혹은 신전을 건축하는 한 장의 벽돌 같은 것으로 상징화 된다. 도구화된 인간의 신체기관은 자신의 기호체계 또는 하나의 기표로 인식될 뿐이다. 푸코는 일찌기 ‘몸은 권력을 각인시키는 장소이자 권력의 문화를 새겨 넣는 매체’로 인식하였다.
  사회의 검은 무의식의 휘장 속에 감추어진 신체기관의 전경화 또는 영성 부재 의식은 오늘날 심판, 성전, 민주화 또는 정의, 평등, 규범이라는 이름 등으로 개인과 사회, 국가 간 서슴없이 자행되어지고 있으며 또한 ‘문명의 충돌’ 같은 표제 하에 인류학적 서고의 깊숙이 은폐되어진다.  

- <문학마당>, 2007년 봄호 중에서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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