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물관(管)


물이 흐른다
어제까지도 길이었던 곳에
도둑처럼 물이 넘어 든다

사람들은 물길을 튼다
배설과 오물의 길
그 위에 서성이는 사람들
트르륵트르륵 한 세기 동안
콘크리트 덮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발길을 멈춘다
가고 싶지 않은 길
집과 집 사이엔 수평선처럼
악수할 수 없는 긴 부정법이 놓여 있다
어제를 부인하고
어제의 그 집을 부인하고
어제의 그 집까지 향해 있던 길을 부인한다
발밑의 물소리는 늘 고요하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말을 뱉고 침을 뱉고
그 말과 침이 화간(和姦)하여
발밑으로 스며들었다
물을 기억하게 될 때
사방은 모두 가라앉는다
누란(樓蘭)은 물 속의 집
오래된 말들의 집
누란은 오아시스다
말들이 목마름으로 남아 있는 곳

물이 흐른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네가 버린 물과 네가 뱉은 말이
파이프를 타고 수화기를 타고
물결치며 이집 저집을 들락거린다
이 무시무시한 동력(動力)

나는 썩은 물로 컸다
발밑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내 속에서만 고여 있는 말로 컸다

- <서정시학>, 2003년 여름호

이 시를 읽고 나니 ‘조울’, ‘비애’와 같은 단어들이 나를 찾아온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내부에 곧 터질 듯한 위태로운 물관 하나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이다. 시인은 길을 걷다 물관(管)이 터진 현장을 만난다. 쏟아진 물과 오물이 뒤범벅 된, 별로 유쾌하지 못한 현장이다. “한 세기 동안/콘크리트 덮는 소리를 듣다가/문득 발길을 멈춘” 것은 이재훈이기도 하고 물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나’인 이재훈은 곧 현대 문명인의 모습이고, ‘물’은 그들의 내면이다. 온통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육체)에서 물관이 터진 그 길(운명)은 어떤 불행을 예고하는 징조 같다. 거기다 온갖 오물까지 합세했으니 길을 걷던 이재훈이나 콘크리트 아래 물관을 타고 흐르던 물이나 그 길은 그다지 “가고 싶지 않은 길”인 것이고, 그러나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다. 그러므로 “긴 부정법이 놓여”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처럼 “어제를 부인하고/어제의 그 집을 부인하고/어제의 그 집까지 향해 있던 길을 부인”하게 된다. 이재훈에게는 도시 문명이 만든 사막 같은 길(운명)이 슬프고, 물은 땅속 지류를 버리고 인위적으로 만든 물관을 따라 흘러야하는 운명이 슬프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뱉은 “말과 침이 화간하여/발 밑으로 스며”든 ‘물 속의 집, 누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비밀처럼 땅 속에 숨겨진 ‘파이프’같은 “무시무시한 동력”이 있을 뿐이다. 콘크리트 길 위로 흘러 넘친 물은 땅 속으로 스며들지도 못하고 증발한다. 현대인들, 즉 이 시 속의 ‘나’는 “도시의 물관”과 자기를 동일화시킨다. 물관 속에 고인 물처럼 “내 속에서만 고여 있는 말”로 세상을 읽으며 살아왔다는 자기 한탄이 너무 우울하고 고통스럽다.
아, 꿀물 흐르는 샘 하나, 어디 없을까?

- <시선>, 2003년 가을호.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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