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의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는 환상의 언어, 꿈의 언어, 무의식의 언어를 통해 자아의 의식 세계를 보여준다. 꿈을 매개로 현실의 리얼리티를 표현하는 것은 확실히 매혹적이다. 현실이 허구일 때 꿈(환상)이 실재일 수밖에 없는, 그래서 꿈과 현실의 경계선이 무의미해진 시인의 세계인식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 꿈의 화법일 것이다.
이재훈의 시는 꿈의 화법을 통해 계기성이나 인과성이 탈락된 삶, 곧 시간적 질서나 논리적 과학적 질서가 탈락된 삶을 노래한다. 그것은 ‘꿈’, ‘술’, ‘독한 감기약’을 통해 드러나는 바 그의 시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이런 질서에 대한 부정과 파괴이다. 가령 “예쁜 여인이 옆에 앉으면 주문을 외지. 너는 내 아들을 잉태했다. 새벽에 술에 취해 방문을 열고 불을 켜면 섬칫 놀라. … 아침에 보았던 예쁜 여인이 아기를 안고 있어”와 같은 언술은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주문을 왼다고 현실 속에서 실현되는 것은 아닐 것이며, 하루만에 아기를 출산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결국 꿈꾸기나 술먹기, 독한 감기약을 먹는 행위는 모두 본능적인 행위 혹은 의식이 탈락된 상태에서 파편화되고 불연속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것이 의식의 활동을 억제한다는 점에서 욕망과 무의식과 관련된다.
욕망은 언어적 질서, 상징적 질서를 부정한다. 상징적 질서란 아버지의 이름, 그러니까 현실 원칙을 의미한다. 모든 현실이 상징적 질서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은 이런 질서가 삶의 실체가 아니라 그야말로 상징, 곧 헛것에 지나지 않음을 암시한다. 그가 노리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상되는 상징적 질서와 그런 질서에 억압되는 무의식, 또는 욕망의 관계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의식의 허위, 사고의 허위, 그러니까 현실원칙의 허위를 직시한 태도가 바탕이 된다. 꿈과 환상은 이재훈에게 있어 그러한 허위를 극복하기 위해 추구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수용된다. 그의 꿈 속의 세계를 들여다 보자.
이 시에서 꿈 속의 공간은 의식이 태어나기 이전의 전의식 혹은 무의식의 공간이다. 꿈 속의 세계는 이성적 사고에 의해서 분열되기 이전의 거대한 암흑과 같은 곳(“깜깜한 앞만 보았지”)이며, 진정한 자아의 모습을 발견하는 공간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의 내면 세계에 나타나는 자아는 극도로 불안한 형상을 하고 있다. 꿈 속에서 나타나는 그는 “누군가가 내 몸을 질근질근 밟고 있”고, 누군가 “목에 십자드라이버를 꽂”고 있으며, “바지에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형상으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이런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그가 지향하는 세계와 현실 세계의 불일치에서 오는 불안이다.
“너는 나의 아이를 잉태했다”라는 언술을 통해 볼 때, 그가 지향하는 세계는 ‘어머니’ ‘아이(나)’가 합일되어 있는 공간을 떠도는 일이다. 그것은 “내 바지에 피가 흐르고”라는 언술에서 알 수 있듯이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서 ‘아버지’가 개입되지 않은 공간, 즉 현실원칙을 표상하는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상상적 공간이다. 상실한 어머니를 되찾고 너와 나가 한몸이 되기를 꿈꾸는 것이 그가 지향하는 세계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면서 억압된다.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고 대상에게 투사되어 충족되기를 꿈꾼다. 결국 현실의 자아는 끊임없이 상상적 질서를 꿈꾸는 자아이며, 죽어 있을 수밖에 없는 자아이다. 이 상황을 더욱 애절하게 보여주는 것이 “나는 기적을 믿지 않지”라는 언술이다. 그가 말하는 기적이란 현실 원칙을 부정하는, 의식이 제거된, 그러니까 욕망과 무의식이 지배하는 삶이다. 때문에 그는 “당신의 손이 내 몸에 닿을 때 흐르는 내 피가 멎”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실적 자아와 내면적 자아든, 나와 어머니든, 나와 사랑하는 사람이든 아름다운 합일을 꿈꾸는 것. 이것이 그가 시를 쓰는 원천일 것이다.
Posted by 이재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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