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회의 그물망 속에 포획된 죽음


오늘날 현대인의 의식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인간의 삶이 이미 단단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 한치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것은 마치 꼼꼼한 그물망처럼 우리의 삶은 철저히 감싸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그 사회가 만들어 놓은 법칙과 질서에 구속되어 있는 수동적 인간으로 변모되고 말았다. 특히 자본주의적 삶의 구조는 인간을 생산과 소비라는 이중 구조 속에 편입시켜 놓음으로써 경제적 문제로부터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비극적 인간형을 만들어 놓았다. 손택수의 [셀러리맨의 죽음], 이재훈의 [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한 얼굴의 죽음에 관하여]는 이러한 현대인의 자화상을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극단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중략) 손택수가 [세일즈맨의 죽음]을 통해 현대인의 죽음을 매우 사실적이고 직접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면 이재훈은 [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한 얼굴의 죽음에 관하여]를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성을 환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관을 열었다. 몸뚱이 없이 얼굴만 덩그마니 있었다. 눈을 감았다. 무서워서 누군가를 불렀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떴다. 네 얼굴, 선혈 뚝뚝 흐르는 네 얼굴이 있다. 나는 그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관을 닫았다. 음악이 흘렀다. 관 속의 얼굴이 노래를 불렀다. 나는 몸없는 그 얼굴을 사랑한다. 그리고 일상이라는 지능적인 시나리오에 빼앗긴 네 몸을, 경멸한다.

― [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한 얼굴의 죽음에 관하여] 부분


우리는 일반적으로 삶이란 항상 현재 속에 있고 죽음은 먼 시간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죽음이란 이미 우리의 삶 속에 공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체의 자각이나 깨어있음을 전재하지 못할 때 그러한 사회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란 어쩌면 죽은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재훈의 시는 이처럼 일상에 매몰되어 살 수밖에 없는 세계의 허구성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훈이 그리고 있는 죽음은 주로 죽은 자의 얼굴에 대한 묘사에 집중된다. 특히 그가 그리고 있는 얼굴의 모습은 몸과 분리된 얼굴이라는 점에서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이때 그가 그리고 있는 죽음의 형상은 온전한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변형되고 왜곡된 죽음임을 암시적으로 드러내 준다. “선혈이 뚝뚝 흐르는 네 얼굴/관 속의 얼굴이 노래를 불렀다”와 같은 구절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살아 있는 존재인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즉 관 속에 누워있는 죽은 이의 모습은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자연인으로서가 아니라, 죽어서까지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무서운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인간의 신체를 집요하게 대상화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비극적 현대인의 모습을 가장 상징적으로 대변해 주는 것이 인간의 신체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오늘의 인간이 더 이상 숭고한 대상이거나 정신적 영역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냉소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즉 “일상이라는 지능적인 시나리오에 빼앗긴 몸”이야말로 온전하고 자족적인 존재가 될 수 없는 현대인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손택수와 이재훈의 시에 나타난 죽음은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내 몰린 자가 극단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통해 우리의 일상을 짓누르는 폭력적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 강경희, <소멸에 관한 철학적 명상>(리토피아, 2002년 여름호)
Posted by 이재훈이
,